- 전통 사회에서 생산력의 근간을 이루는 에너지는 대개 태양에너지와 식물의 광합성 작용에서 비롯했습니다. 식물이 자라려면 당연히 땅이 있어야겠지요. 이 땅을 용도에 따라 나눠야 했습니다. 사람 이 먹는 작물을 키우는 경작지와 가축을 먹일 사료를 재배하는 목초지, 땔감을 얻는 숲이었지요. 이 세 부류의 땅은 서로 경쟁 하면서도 균형을 이뤄야 했습니다. 식량 생산을 높이기 위해 곡 물 경작지를 늘리려면 사료를 얻는 목초지를 줄이거나 땔감을 얻 는 숲을 개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럽 같은 경우는 곡물 경작 지를 늘리는 만큼 비료도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목초지를 무한정 줄일 수 없었습니다. 곡물 생산이 늘어나 그만큼 인구가 늘면 땔 감도 더 많이 필요할 테니 숲을 계속 줄일 수도 없었겠지요. 다시 말해 인구가 늘어난다고 해서, 혹은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 경작 지를 마음껏 넓힐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 용도의 땅이 균형 을 이뤄야 했는데, 이런 균형을 맞추는 일이 항상 쉬웠던 것은 아 닙니다.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곡물 생산을 늘리려면 토질이 좋지 않아서 그간 농사를 짓지 않던 땅을 일궈야 했습니다. 이렇게 생산을 늘리면 인구도 늘어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새로 경작하는 땅은 토질이 좋지 않기 때문에 예전만큼 수확량을 낼 수 없었지요. 17세기부터 잉글랜드 같은 곳에서는 돌려짓기 방법을 바꾸고 토질을 개선하는 작물을 심어 생산성을 꽤 높일 수 있었 지만, 이런 방법도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가파른 인구 증가에 부 딪혀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런 생산 성 향상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17세기에 소빙하기가 찾아와 평 균 기온이 떨어지면서 작황이 나빠지고 인구가 줄어들기도 했지 요. 그래서 전통사회는 18세기 말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가 인 구론』에서 주장했던 법칙, 그러니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하는 반면 산출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법칙에서 벗어나 기 어려웠습니다. 토지가 풍부해 생산이 늘면 인구 역시 증가합니다. 그런데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면 땅이 부족해져서 질이 좋 지 않은 땅에도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그러면 결국 산출이 부족해지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 질병이나 기근, 전쟁 같은 억제 요인이 작동하기 시작해서 인구를 줄여버립니다. 이것 을 '맬서스 함정'이라고 부르지요. 인구와 산출이 어떤 한계 안에 서 늘거나 줄기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장과 수축이 반복되는 맬서스 함정에서 벗어나는 일은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야 가능했 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몇몇 숫자들을 다시 한번 상기해보지 요. 잉글랜드 인구는 1350년 무렵에 500만 명까지 늘었습니다. 그 무렵 찾아온 흑사병으로 인구가 거의 절반이나 줄어들었고, 그 이후 계속 줄어들다가 1600년에 이르러 흑사병 이전 수준으로 겨우 회복합니다. 17세기에 잉글랜드 인구는 다시 정체되었 다가, 18세기 초부터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후 산업혁 명이 일어나는 18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빠르게 늘어나지요. 처음으로 인구 조사가 진행된 1801년에 잉글랜드 인구는 770만 명이 되었고, 1821년에는 드디어 1천만 명을 넘어섭니다. 그 뒤 에 인구 증가세는 더 빨라졌지요. 1인당 국내총생산도 산업혁명 이후 빠르게 향상되었습니다. 2013년 가격을 기준으로 1600년 1인당 국내총생산은 1,143파운드 정도였으나, 1800년에는 2,333파운드가 되었습니다. 두 세기 만에 두 배가 된 셈이지요. 1차 산업혁명이 거의 마무리되는 1850년대 초에 이르면 3천 파운드가 되었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5,441파운드가 되었으니, 한 세기 만에 두 배 가까이 뛴 셈입니다. 이렇게 인구 증가와 경제 성장에 가속이 붙는 일은 산업혁명 이전에는 상상하 기 어려웠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산업혁명이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 크래프츠와 할리가 내놓은 결과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이 발견됩니다. 두 사람은 총요소생산성 향상에 여러 공업 부문이 각각 얼마나 기여했는지도 계산했는데, 산업혁명을 이끈 면직물 공업의 기여분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고 하지요. 산업혁명의 또 다른 핵심 분야였던 제철업과 다른 직물업이 나머지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런 결과는 증기기관이라는 새로운 동력원과 기계, 공장제를 도입한 공업 부문의 생산성은 빠르게 향 상된 반면 나머지 공업 부문에서는 생산성이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산업혁명 시대에는, 이를테면 '근대' 공업과 '전통' 공업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지요. 이렇게 보면 산업혁명 시대, 특히 초기에 경제 성장이 왜 점진적이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근대 공업 부문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았기 때문에 경제 전체의 성장도 빠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근대' 부문이 늘어나자 성장 속도가 좀 더 빨라졌고요. 이런 점을 감안하면 산업혁명이 과연 '혁명'이었 나 하는 물음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산업혁명을 단기간에 일어난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좁게 생각하지 말고, 경제구 조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로 보면,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를 여 전히 쓸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 산업혁명이 시작될 무렵 잉글랜드는 유럽과 아시아의 어떤 나라보다도 임금이 높은 고임금 경제였던 반면, 자본 비용과 에너지 가격은 임금에 비해 저렴한 나라였습니다. 이런 생산요소 상대 가격의 구조 때문에 잉글랜드에서는 특정한 방향으로 기술 혁신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지요. 자본과 에너지 가격이 임금보다 싸니까 기술 혁신은 가능하면 노동 투입 을 줄이면서 대신에 자본과 에너지 투입을 늘리는 방향으로 진 행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토머스 뉴커먼이 개발하고 제임 스 와트가 성능을 개선한 증기기관과 면직물 공업에서 등장한 여 러 기계가 될 것입니다.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초기 증기기관 은 에너지 효율이 낮아서 연료 소비가 많았습니다. 와트가 효율 을 크게 개선하는 데 성공했지만, 기본적으로 증기기관은 석탄이 풍부한 곳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동력원이었지요. 잉글랜드는 자본과 석탄이 풍부했기 때문에 탄광뿐만 아니라 면직물 공장 같 은 곳에 증기기관을 설치해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 이렇게 식민지가 영국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왜 영국에서 처음 산업혁명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 마리가 됩니다. 잉글랜드가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든 것은 17세 기 초부터입니다. 에스파냐나 포르투갈에 비해 한 세기 정도 늦 었고, 네덜란드나 프랑스와는 거의 비슷한 시기였어요. 조금 늦게 식민지 경쟁에 나섰지만 잉글랜드 행정부와 의회는 강력한 해군을 만들어 잉글랜드 무역선단을 효과적으로 보호했습니다. 또 한 국가는 동인도회사를 비롯해 여러 무역회사와 식민회사에게 자체적으로 무력을 갖추고 외교활동을 펼 수 있는 특권을 주기 도 했습니다. 특정 회사가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지면 구제 조치를 취하기도 했지요. 더욱이 베스트팔렌 조약(1648) 이 체결된 이 후 유럽 열강이 국익 증진을 목표로 여러 전쟁을 벌일 때도 영국 정부는 아주 효율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행정부와 의회는 조세 징수 기구를 잘 정비해서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많은 세금을 거 뒀고, 장기공채 같은 혁신적인 금융기법을 도입해서 아주 싼 이자로 자금을 빌렸습니다. 이렇게 동원한 막대한 재정 자원은 영국이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요.
- 국가의 노력 덕분에 상인들은 자유롭게 세계 곳곳을 누비며 무역 활동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이들과 제조업자는 식민지 무역에서도 엄청난 이익을 거뒀고, 특히 제조업자는 식민지 시장에서 새로운 사업을 발굴할 수 있었지요. 제조업자가 활발하 게 사업을 펼치니 일자리가 늘어나고 그만큼 임금도 올랐습니다. 바로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앞에서 이야기한 두 조건, 그러니까 풍부한 자본과 높은 임금이라는 조건이 마련될 수 있었던 게지요. 식민지와 제국은 그만큼 산업혁명과 긴밀하게 연관된 일이었습니다.
- 미국이 2차 산업혁명을 거쳐 산업사회로 변모했듯이, 유럽에 서는 독일이 1871년 통일 이후 비슷한 길을 걸었습니다. 통일 이 전 독일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였던 프로이센에서는 일찌감치 수 공업 전통에 바탕을 두고 산업혁명을 시작해보려는 움직임이 있 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 영국이 세계 시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기 때문에 독일 같은 후발 주자는 직물업 같은 소비재 공업이나 제철업, 기계공업 같은 주요 분야에서 경쟁하기 어려웠어요. 게다가 독일은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잘 통합된 국내 시장에 의존할 수도 없었지요. 그런 만큼 독일이 산업혁명에 성공하려면 영국이 아직 지배하지 못한 새로운 분야 를 개척하는 한편 정치적 통일을 이뤄 넓은 국내 시장을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이런 필요를 어느 정도 채워준 게 바로 철도였습니다. 정치적 통일과 함께 철도망을 독일 전역에 건설하는 것은 시장 통합뿐 만 아니라 제철업과 기계공업 같은 주요 산업을 발전시키는 효과 를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대규모 자본을 조달하는 과정에 서 금융업도 발전시킬 수 있었어요. 금융업은 나중에 2차 산업혁 명 시대가 열렸을 때 독일 기업에 자본을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 을 하게 되지요. 그 결과 철강과 화학, 전기공업에서 독일 기업은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생산력과 세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 면에서 독일은 영국을 바짝 추격할 정도가 되었어요. 사실 이 시대에는 미국이나 독일뿐만 아니라 프랑스 같은 전통적인 열강과 러시아, 오스트리아 - 헝가리, 이탈리아, 일본 같은 나라가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19세기 중반에 누리던 압도적인 생산력 우위를 더 이상 유지하 기 어려워졌습니다. 이 점은 다음의 두 표가 잘 보여줍니다.
- 19세기 말 자본주의 발전을 이끌던 몇몇 나라에서 시장경쟁이 점점 치열해지자국가와 기업은 두 방향으로 대응했습니다. 한 가지 방향은 제국주의 경쟁이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일어난 아프리카 쟁탈전이 잘 보여주듯, 유럽 여러 열강과 뒤늦 게 제국 대열에 뛰어든 미국과 일본 모두 식민지를 넓히려는 치 열한 경쟁에 돌입했지요. 식민지는 화학공업을 비롯한 새로운 공 업 부문에 필요한 원료를 얻을 수 있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공산품 시장이 되어줄 것이라 기대되었습니다. 제국과 제국주의는 경제적 동기로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현상이었지만, 이 시기에 더욱 뚜렷해진 식민지 경쟁은 이윤율이 떨어지고 경쟁이 치열해진 것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다른 한 가지 방향은 기업 차원에서 이윤의 하락과 경쟁에 대 응해 내놓은 새로운 전략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기 업 규모를 키우고 조직을 개선해서 생산력과 생산성을 높이는 한 편 시장 경쟁에 참여하는 기업의 수를 줄이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 과정에서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대기업이라는 새로운 기업형태가 출현하게 되었지요.
- 대기업, 노동 통제권을 장악하다
장기불황에 접어들면서 가격과 이윤율이 떨어지자 기업이 거의 본능적으로 보인 반응은 공급을 줄여 물가 하락을 막고 이윤 총 량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략이 성과를 거두려 면 특정 제품 시장에서 활동하는 기업의 수도 줄여야 했습니다. 어느 한 기업이 공급량을 줄이더라도 다른 경쟁 기업이 박리다매 전략을 택해 공급을 크게 늘려버리면 전체 공급량을 조절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지요. 그러므로 시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기 업이 1880년대부터 트러스트나 지주회사 형태로 같은 상품을 생 산하는 기업들을 인수·합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전략을 수평 통합'이라 부릅니다.
- 포드자동차에서는 노동자 이직률이 아주 높았고, 결근이나 중도 탈락 같은 문제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이를테면 1913년에는 “1만 5천 명의 노동자를 채우는 데 한 해에 5만 3천 명을 모집했다”거나 같은 해 연말에는 노동자 100명을 늘리기 위해 963명을 모집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지요. 이런 문 제를 해결하기 위해 같은 해에 포드는 파격적인 해법을 내놓았어 요. 하루 9시간 노동에 2.38달러였던 급여를 8시간 근무에 일당 5달러로 개선한 것이지요.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중도탈락률이 0.5퍼센트로 줄어들었고 결근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포드자동차에는 일자리를 찾는 구직자가 대거 몰려들었지요.
하지만 '일당 5달러'에는 중요한 조건이 달려 있었습니다. 이런 조치는 성실한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집단을 분열시키고 노동자들 간 임금 격차를 확대하려는 것이었어요. 포드자동차에는 일당 5달러를 요구할 수 없는 노동자가 많았습니다. 근무 기간이 6개월 미만인 노동자나 21세 가 안 된 노동자, 여성 노동자가 그런 경우에 해당했지요. 더 나 아가 포드는 5달러라는 높은 일당을 주는 대가로 노동자를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새로운 인간형으로 개조하려고 했어 요. 예컨대 '청결과 신중함'을 강조했고, 금연이나 금주, 도박 금 지 등을 요구했지요.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포드자동차는는 사회학부서를 설립해서 노동자의 일상생활을 면밀하게 조사하 고 가정 방문 등을 통해 노동자가 규율을 잘 지키도록 강제했습 니다. 그러므로 일당 5달러 정책에는 노동 과정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노동자를 통제하려는 생각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지요. 포드자동차에서 이런 노동정책은, 이를테면 회사 경영을 방 해할 수 있는 노동운동 관련자를 솎아내고 동시에 회사가 고용한 수많은 이민 노동자를 미국식 생활방식에 적응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 르네상스 운동부터 개신교 종교개혁, 유럽의 해상 진출 같은 근대 초 유럽의 중요한 변화가 일부 자연철학자들이 '새로운 과학'을 주장하게 된 배경을 이뤘어요. '새로운 과학'은 인간이 남긴 불완전한 기록과 그 권위에 의지하기보다는 경험과 이성을 지식의 근원으로 강조했습니다. 이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면서 지식의 역사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식인의 책무는 이 제 역사에 묻힌 과거 지식을 발굴해내는 게 아니라 새로운 지식 을 발견하는 일이 되었지요. 이런 생각은 훗날 새로운 역사관이 등장하는 데도 보탬이 되었어요. 인간의 역사란 흥망성쇠를 반복 하는 순환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진보한다는 단선적인 역사관이 자리 잡는 데 도움이 된 것이지요.
- 로버트 훅은 마이 크로그라피아』(1665)에서 코페르니쿠스부터 자기 시대까지 일어 난 과학의 진보, 특히 관찰과 실험이 보여준 가능성을 자랑스럽 게 이야기해요. 좀 길지만, 한 대목을 살펴보면 좋겠어요 (니얼 퍼 거슨의 책에서 재인용한 것입니다).
망원경이 발명되어 이제 아무리 멀리 있는 것도 볼 수 있게 되 었다. 게다가 현미경 덕분에 아무리 작은 것도 우리의 연구 범 위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 앞에는 우리가 이해 해야 할 새로운 시각 세계가 한없이 펼쳐져 있다. (...) 비밀스 러운 자연의 섭리를 낱낱이 밝혀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철저히 연구하여 손해 볼 것이 무엇이겠는가? 토론과 논쟁 속 주장은 곧 노력을 요하는 실질적인 노동으로 바뀔 것이다. 견해라는 온갖 달콤한 망상, 뇌가 고안해낸 사치인 우주의 형 이상학적 본질은 곧 사라지고, 확고한 역사, 실험, 연구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훅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베이컨이 제안한 새로운 과학의 지 향점과 방법을 잘 이해할 수 있어요. 여기서 실험과 관찰은 “견 해라는 온갖 달콤한 망상”을 피하고, 대신 더 분명한 지식, 그것 도 실제 생활에 쓸 수 있는 지식을 만들어내는 수단이라고 하지 요. 바꿔 말하면, 이런 주장은 신이 세상을 창조한 까닭이나 창 조의 원리처럼 자칫 사변적인 논쟁으로 번질 수 있는 주제는 피하면서 자연 세계의 작동 원리를 묘사하는 데 힘을 쓰자는 말이기도 해요. 그렇게 할 때, 자연 세계를 통제하고 예측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므로 훅 같은 사람에게는 '왜'라는 질문보다 '어떻게'라는 질문이 더 중요했어요. 물론 방금 인용한 훅의 말에는 이런 새로운 철학을 실제로 어떻게 수행하는 가에 대한 답은 들어 있지 않아요.
사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베이컨이 일찌감치 명쾌한 답을 내 놓았지요. 핵심은 실험과 관찰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동료들과 적극적으로 공유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면 이들이 비슷한 실험과 관찰을 반복해 충분한 데이터를 축적해요. 마지막으로 이 데이터 에서 일반적인 결론을 끌어내지요. 그러니 과학은 이제 어떤 천 재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일이 아니라 여러 연구자가 힘을 모아 수행하는 집단 활동이 되었어요.
- 흔히 세계사에서 소비사회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간 시기를 2차 세계대전 이후라고 말합니다. 1950년 무렵부터 한 세대 사이에 서양 여러 나라와 일본 같은 선 진 자본주의 사회는 물론 개발도상국이 전례 없이 빠른 경제 성 장을 경험했던 것과 긴밀하게 연관된 일이지요. 하지만 좀 더 긴 안목으로 역사를 바라보면, 1950년대에 나타나는 소비사회의 특 징들이 그보다 훨씬 전에 등장했음을 알게 됩니다. 적어도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요. 소비사회는 역사가 꽤 오래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소비사회의 특징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는 게 좋을 듯해요. 소비 자체는 인류 역사 전체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지요. 하지만 소비가 일어나는 문맥이 달라지고 양적 으로 크게 늘어나는 새로운 국면은 대략 17세기에서 18세기 사 이에 등장합니다. 그래서 그 무렵 소비혁명'consumer revolution이 일어났다고 말하지요. 몇 가지 변화가 특징적입니다. 가령, 물건 소유가 예전에 비해 훨씬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고, 실제로 사람들이 더 많은 물건을 갖기 위해 애쓰게 되었어요. 물건을 획득하는 방법도 달라져요. 과거에는 직접 물건을 만들거나 조상에게서 물려받는 일이 흔했는데, 이제는 시장에서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물건을 얻으려는 동기도 달라지지요. 과거에는 필요가 소비를 이 끄는 중요한 동기였다면 이제는 패션과 새로움을 찾으려는 욕망 이 훨씬 중요해졌어요. 소비가 일어나는 공간도 넓어졌습니다. 예전에는 기껏해야 장터가 고작이었지만 이제 수많은 상설 상점 이 등장해요. 아무 때나 쇼핑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쇼핑 자체가 쾌락의 근원이 되었지요. 상품 정보가 훨씬 더 빨리 다양한 경로 로 퍼져나가면서 소비자도 상품에 대한 지식을 갖추게 되었습니 다. 그만큼 유행도 빨리 바뀌게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