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의 역사

역사 2022. 4. 6. 19:59

- 영과 접촉한다는 것은 곧 '평범한' 세계를 떠나 변성의식상태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변성의식상태는 '정신 기능에 대한 주관적 경험이, 의식이 명확하게 깨어 있을 때의 일반적인 기준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본인이(또는 그를 지켜보는 객관적 관찰자가) 주관적으 로 인식하는 정신 상태'로 정의할 수 있다.2 잘 알려진 사례로는 중독, 희열, 가수 상태, 최면, 간질 등이 있다. 인간 정신 상태의 여 러 형태를 연구하는 일부 학생들은 내가 이전 저서에서 그랬듯 이 목록에 꿈을 포함하기도 한다. 형태가 무엇이든 간에 변성의식상태의 공통점은 이 상태에 빠진 사람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 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주위 환경에 대한 샤먼의 인 식 능력을 일시적으로 떨어뜨린다. 동시에 그 외의 다양한 것들을 인식하는 능력을 강화한다(또는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
- 샤먼 본인에게서 나온 정보와 샤먼을 관찰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정보를 조합해서 볼 때, 겉으로 나타나는 이 모든 증상은 샤먼의 정신 상태와 어느 정도 유사성을 보인다. 하지만 완전히 동일 하지는 않다. 얼마 전부터 MRI 검사를 통해 샤먼 의식을 포함한 전반적인 변성의식상태가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진 뇌 부위의 전기 신호 패턴을 바꿀 수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시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 방법을 통해 한 연구팀은 변성의식상태 가 발생하는 동안 '정상'에서 가장 크게 벗어나는 뇌 부위가 후방 대상피질, 배측전방대상피질, 섬피질임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입증된다 해도 샤먼의 주관적 경험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변성의식상태로 넘어가는 데 사용하는 방법은 문화마다 각기 달랐다. 시베리아에서는 증기로 가득 찬 방에서 시간을 보내기 도 했는데, 이런 증기실 안에서는 샤먼의 혈압이 올라가 땀으로 뒤덮인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졌다. 모든 문화에서 가장 흔히 사용된 방법은 음악이며, 특히 노래하고 방울을 흔들고 일관된 리듬 으로 북을 치는 행위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최면 효과를 낸다. 이런 음악은 샤먼이 직접 연주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연주해주기도 한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춤, 기도, 고독, 철야기도, 단식, (정화 방식으로서의) 구토, 자학 행위, 신진대사를 촉진하거나 느리게 하는 호흡법이 있다. 성적으로 금욕하거나(드물게는 신성한 섹스를 하기도 했다) 독한 알코올음료를 마시기도 했다. 의식 전체나 일부는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부 문화에서는 사 람들이 보지 못하는 실내나 어둠 속에서 의식을 치렀다.  전과 다른 정신 상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일부 샤먼은 마술적 힘이 있다고 여기는 특별한 지팡이로 땅을 두드렸다. 일부 샤먼은 옷을 전부 벗었는데, 이것이 변성의식상태로 들어가기 위한 방법이었는지 그 이후에 나타난 결과인지는 알기 어렵다. 마지막 으로 샤먼은 영과 관련된 것으로 여기는 특정 물질을 섭취하기도 했다. 일부 학자는 이러한 물질 섭취가 종교의 기원을 나타낸다고 믿으며, 그중 한 명은 예수가 샤먼이었으며 '지금 여기'라는 한계 를 초월하기 위해 추종자들과 함께 환각 버섯을 섭취했음을 증명하려고 시도했다. 실제로 샤먼과 추종자들의 환각제 사용은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기록되었다. 일부 문화에서는 이와 같은 의 식을 치르며 양과 염소 같은 피 흘리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의 목표는 샤먼, 또는 그의 정신(그의 몸은 제자리에 남아 있으므로)이 일상적인 환경을 떠나 미스터리한 여행에 나서게 하는 것이었다. 
- 잘 때 왜 예지력이 생기는가에 대한 설명은 무척 다양하다. 아이스킬로스는 “잠자는 정신은 두 눈에서 자유로워진다”라고 말했 다. 그와 얼추 동시대를 살았던 핀다로스는 꿈이 “즐거움과 불행 중 무엇이 올지를 결정하는 것”을 즐긴다고 믿었다. 기원전 4세 기 초의 장군이자 작가였던 크세노폰은 사람의 영혼이 죽음과 유 사한 수면 상태에 있을 때 그 신적인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며 육신에 꽉 매여 있지 않기에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헬레니즘 철학가였던 이암블리코스는 잠든 영혼이 이제 신체를 운영할 필요가 없으므로 미래를 포함한 현실에 대해 자유롭게 숙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꿈에 예지력이 생기는 것이라 설명했다. 또한 영혼이 몸과 더 잘 분리될수록 영혼의 근원인 모든 것을 아는 지적 또는 신적 본질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플루타르코스가 보기에 꿈은 특정 유출물'의 결과였다. 이 유출물들은 바깥 에서 구멍을 통해 몸으로 들어와 꿈꾸는 사람에게 미래의 환영을 보여주었다. 이보다 훨씬 뒤인 서기 4세기에 그리스도교 작가인 아타나시 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몸이 잠들어 가만히 쉬고 있을 때 사람은 내면에서 움직이고있다. 그는 자기 바깥에 있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낯선 땅을 가로지르며 친구들을 만나고 종종 그것[꿈] 들을 통해 매일의 행동을 예측하고 미리 알게 된다.
여기에는 수면이 초자아의 경계를 늦춰 원래는 저 깊은 곳에 있던 것을 표면으로 끌어올린다는 프로이트의 개념과 유사한 면이 있 다. 꿈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었기에 사람들은 꿈을 꾸려고 특별 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예를 들면 자신이 조언을 구하는 신, 특히 그리스의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에서 잠을 잤다. 이 만큼 자주 쓰인 방법은 아니었지만 신성한 동굴에서 머물며 단식을 하거나, 월계관을 베개 밑에 두는 것처럼 여러 물건과 함께 잠들기도 했다. 2세기 시인인 유베날리스는 당시 로마에 동전 몇  을 받고 즉시 사람들이 원하는 꿈을 파는 유대인 여성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 1850년에서 1920년 사이는 심령주의의 황금기였다. 심령주의는 영국과 미국, 유럽 전역에 서 중산층 이상의 신사 숙녀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심지어 실증주의 및 유물론과의 전투에 말려든 교회마저도 어느 정도는 심령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에이브 러햄 링컨의 아내 메리 토드도 심령주의를 믿은 사람 중 한 명이 었다. 두 아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메리 토드는 심령주의를 백악관으로 들여와 영매를 고용하고 심령술 모임을 열었으며 그 중에는 링컨 대통령이 참석한 모임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노예제 를 폐지하라고 링컨을 설득한 것이 메리 토드와 그녀의 뒤에 있었 던 영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심령주의를 믿은 또 다른 유명인으로는 〈셜록 홈스〉 시리즈의 저자이자 역시 아들을 잃은 경험이 있었던 아서 코넌 도일이 있다. 수많은 심령술 모임에 참여한 아서 코넌 도일은 심령주의와 영매를 변호하는 글을 여러 번 썼으나 나중에 지지를 철회했다.
아이작 뉴턴이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중력의 형태로 원 격 작용이 존재함을 증명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힘이 존 재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런 사고방식은 심령주 의를 실험한 상당수가 자연과학자였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가 장 초기에 심령주의를 믿은 자연과학자는 오거스터스 드 모르간 (1806~1871)이었다고 전해진다. 선구적인 논리학자이자 수학자 였던 드 모르간은 대수학의 기본 법칙을 발견했고 지금도 그의 이 름을 딴 달 분화구가 남아 있다. 또 다른 두 명은 19세기 최고의 전자기학 전문가이자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방정식을 도출한 제 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제자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존 윌리엄 스 트럿 레일리로, 맥스웰의 뒤를 이어 1879년부터 1884년까지 세계 적으로 유명한 케임브리지 대학 캐번디시 연구소의 소장을 지냈다. 1904년에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1905년에서 1909년까지 왕립학회장을 역임했다. 관심사가 다양했던 그는 과학과 종교를 조화시키려 노력했고 실제로 심령 연구 협회의 협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인물은 올리버 로지였다. 1851년 부유한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난 로지는 런던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 고 1877년에 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인리히 헤르츠의 작업에 대해 알지 못했던 그는 독자적으로 라디오파를 발견했다. 코넌 도일의 말처럼 동시대 사람들에게 로지는 “물리학과 심령학이라는 두 분야의 위대한 지도자 였다. 오늘날 그는 주로 점화 플러그를 발명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 임사체험은 죽음이 임박한 것이 아닌, 이미 죽었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시 살아난 것을 의미한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사 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체험을 들려준다. 이런저런 수준의 임사체험에 관한 이야기들은 아마 모든 시기의 모든 문명에서 발 견될 것이다.37 임사체험은 중세에 만연했다가 종교개혁 시기에 인기를 잃은 뒤 19세기에 심령주의 운동과 연관되어 재등장했다. 1970년경 이후로는 완전히 인기를 되찾았고, 현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수가 많고 널리 알려져 있다.
- 알아차렸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샤머니즘, 예언, 신 탁, 해몽(꿈의 해석), 심령술(죽은 자와의 소통)에는 공통점이 있다. 예언자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 이 방법들은 미래에 발생 할 일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평범한'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진 입해야 한다는 가정을 깔고 있다. 현대의 분석가와 미래학자, 예 측 전문가가 하는 것처럼(또는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이성과 논 리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이성과 논리를 한쪽으로 치워 놓고 거기에서 해방됨으로써 다른 영향력이 작용할 수 있도록 하 는 여러 수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건 동전의 일면일 뿐이다. 가장 먼 과거에도 그러한 가정에 기초하지 않는 방법, 즉 미래 예측 방법을 개발하고 사용 하는 사람이 자신의 감각을 온전히 지니고 있어야 하는 방법들이 존재했다. 감각을 온전히 지녀야 했던 이유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상세히 관찰하고 관찰한 내용을 이용해 규칙을 만든 뒤, 그 규칙을 이용해 미래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은 황홀경에 빠지는 대신 과학자, 또는 최소한 기술자의 태도를 지녀야만 한다. |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중 가장 먼저 등장해 가장 오래 지속된 방법은 점성술astrology(말 그대로 별들의 논리logic 또는 말word 이라는 의미다)이다. 글이 발명되기 한참 전에, 중석기 시대의 뼈와 동굴 벽에서 발견된 흔적에 따르면 아마도 2만 5천 년 전에, 사람들은 머리 위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랬기에 하늘에서 벌어 지는 많은 일들이 주기적이며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쉬 웠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이해한 사람들은 하늘에서 관찰한 것 과 땅 위에서의 삶 사이에 있을 수도 있는 연관성에 대해 고민하 기 시작했을 것이다.
- 노스트라다무스는 아들 세자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집요하게, 그리고 아마도 헛되이 해온 작업을 돌이켜보았다. 그 일이란 신의 의지(신의 의지 없이는 아무것도 이뤄질 수 없었다)와 주술 (노스트라다무스는 주술을 강력 비난했다), 변성의식상태, 그가 찾고 있던 진정한 통찰력을 결합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 러한 통찰은 오로지 신중한 연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말 했다. 당연히 그의 예언은 틀릴 때가 많았다. 1564년 남편을 잃은 프랑스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 왕비를 만났을 때 노스트라다무스는 그녀가 평온할 것이라 단언하며 겨우 2년 뒤에 발생할 내전 을 예측하는 데 실패했다. 또한 그는 훗날 샤를 9세가 될 왕비의 아들이 아흔 살까지 살 거라고 주장했다(샤를 9세는 24세에 사망했 다), 노스트라다무스의 4행시(그의 저서 『예언 Propheties』은 4행시 942 편으로 이루어졌다)는 대개 시적이고 애매모호하다는 특징이 있었 고, 이러한 특징 덕분에 거의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여러 번 실수를 했음에도 명성에 큰 오점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 17세기 후반만 해도 우주에서 벌어진 일뿐만 아니라 지진과 엄청난 폭풍 같은 특이한 사건에는 분명 숨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결국 한 역사가의 표현처럼 신이 내린 천재지변을 피할 수 있는 위험으로 바꾸어 전조에 대한 믿음이 사그라지게 한 것은 과학 혁명의 전개였다.20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에드먼드 핼리의 『혜성 천문학 개요 Synopsis of the Astronomy of Comets 』 (1705)다. 이 책은 1638년에 관측된 혜성이 1601년과 1531년에 그리난 적성과 같은 것임을 보여주었다. 또한 핼리는 그 혜성이 ITE년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 예측했다. 그해 핼리는 사망하고 없었지만 정말로 혜성은 나타났다.
- 이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1749~1752년에 벤저민 프랭클린이 번개는 그저 전기의 방전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었다. 번개는 다른 세계에서 보낸 전령이 아니라 자연현상이었다. 게다가 접지를 통해 다스릴 수도 있었다. 2~3세기 전에 그렇게 말했다면 아마 프랭클린은 처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랭클린 의 발견은 150년 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가 말한 “세계의 탈주술화"를 보여준 동시에 더욱 촉진했다. 하지만 변화는 점진적이었으며, 기이한 사건과 그 해석을 담은 목록은 이후로도 계속 출간되었다(오늘날에도 특히 인터넷상에서 계속되고 있다).
- 중세와 르네상스기에 숫자점은 모든 곳에서 계속되었다. 모든 숫자에는 개인이나 세상 전체에 관한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숫자는 7이었는데, 아마도 일반적인 환경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시에 가장 많이 기억할 수 있는 개수가 7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2 7은 (지구를 나타내는 4에 하 늘을 나타내는 3을 더한 것이므로) 완전함과 완벽함, 우주를 의미했 고, 천지창조의 기간, 일주일의 모든 날, 일곱 교회, 성모 칠고七苦, 행성, 일곱 가지 성사, 일곱 가지 대죄, 일곱 가지 미덕(향주삼덕에 사추덕을 더한 것), 7년 대환란, 묵시록에 나오는 일곱 트럼펫과 일 곱 봉인, 아우구스티누스 역사의 일곱 시기, ‘주기도문'의 일곱 가 지 청원, 그리스도의 일곱 번의 여행, 미사의 일곱 순서, 인생의 일 곱 단계,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곱 말씀, 음계의 일곱 음, 일곱 가지 선한 일을 나타냈다. 
- 성경을 이용해 예수가 재림하고 낙원이 펼쳐질 날을 계산하 고자 했던 여러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이작 뉴턴이다. 심 지어 1704년에는 이 주제에 관해 다니엘의 예언과 요한의 묵시록에 관한 평론이라는 책을 쓰기까지 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뉴턴은 먼저 다니엘에서 예언한 2,300일이 사실은 날이 아니라 해를 의 미한다고 상정했다. 그다음 어떤 해를 시작점으로 삼을지를 결정 하려 했다. 시작이 되는 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마케도니아인 이 페르시아제국을 멸망시킨 기원전 331년이라고들 믿는 “숫염소에게 작은 뿔이 돋아난” 때일까?(다니엘, 8:1~27) 아니면 예루살렘과 성전이 로마인에게 무너진 서기 70년일까? 아니면 “교황이 최고 지위를 얻은” 서기 800년일까? 아니면 그레고리 7세가 교황의 자리에 오른 1073년일까? 그다음 뉴턴은 「요한의 묵시록」에 언급된 숫자 1,290에 따라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그리고 여러 난해한 계산을 통해 자신이 얻은 여러 결과를 조화시키고자 했다.
결국 뉴턴은 예수가 재림할 확률이 가장 높은 해로 2060년을 제시했지만 나중에는 그 해가 2090, 2132, 2344, 2374년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 당황한 그는 『성경』속 예언은 “종말이 올 때까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덧붙였으며, 그때가 오더라도 “악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라고도 덧붙였다. 오늘날까지도 『성경』에 언급된 '날'이 정말 한 해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천 년을 의미하는지(「베드 로의 둘째 편지」 3:8~10)뿐만 아니라 일주일이 단순히 7일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1년이나 7년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 역사적 패턴이 반복된다는 생각(단순하고 일상적인 형태로는 이를 경험이라고 한다)과 역사가 순환한다는 생각은 현재에도 건재하다. 이 두 가지 생각을 토대로 저술 작업을 했던 20세기 후반의 유명 역사학자 중 한 명은 베스트셀러 『강대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Great Powers』(1987)을 쓴 폴 케네디였다. 이 책에서 그는 독자들에게 “제국적 과잉 팽창” 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제국적 과잉 팽창은 국가의 크기가 국가 방어에 쓸 수 있는 자원의 양을 능가할 때 나 타난다. 케네디는 이러한 부조화가 발생하면 국가는 쇠퇴하다 결 국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례로 스페인과 영국, 미국을 제시했다. 이 책은 냉전이 끝나기 겨우 2년 전에 나왔 는데, 소비에트연방의 사례도 들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고대 로마는 말할 것도 없는데, 로마의 사례를 통해 이러한 과정이 서기 2세기 후반부터 이미 일어나고 있었음을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제국적 과잉 팽창으로 인해 미국이 쇠 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자국 다음으로 국방비를 많이 지 출하는 열세 개 국가의 국방비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국방 비에 지출하고 있으며(2019년 기준) 그 결과 막대한 재정 적자와 국제수지 적자를 겪고 있으므로, 미국의 힘은 점점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 사이클이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며 미국 해안을 떠나 태평양 반대쪽에 도착한다면, 워싱턴은 자기 차례를 맞이한 베이징에게 권력의 자리를 넘겨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 모든 것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는 지속적이고 확실한 하나의 '마스터키'는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 아마도 프톨레마이오.스를 본받았을 일부 경제학자들은 최선을 다해 사이클 내의 사이클을 겹겹이 고안했다. 다른 경제학자들은 당시 발전 중이었던 과학 분야인 기상학과 천문학, 심지어 점성술을 모델로 삼았다. 그 결과 1878년부터 경제활동과 태양의 흑점 간의 상관관계를 입증하려는 무수한 시도가 있었다. 실제로 1900년경부터 예측forecasting'이라는 단어가 두루 쓰이게 된 것은 이런 다양한 분야간에 일어난 상호작용 때문이다. 심지어 굴지의 경제학자와 경영인이, 정부와 사기업이 '현대적’ 경영 방식을 적용해 사이클을 부순 결과 끝없는 번영이 시작되었다고, 또는 곧 시작되어 계속 이어질 거라고 믿은 시기도 있었다(1906에서 1908년, 1920년대 후반, 1950년에서 1969년, 1993년에서 2008년).  그러나 경기 후퇴와 불황은 계속 발생했고, 호황과 불황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순환 모델은 여전히 미래 경제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남아 있다.
- 가장 먼저 변화의 영향을 느낀 곳은 유럽의 대도심이었다. 많 은 공장과 그 공장을 운영하는 노동자들이 집중되어 있던 곳도 대 도심이었고, 17세기부터 분침이 도입된 벽시계와 손목시계가 점 점 흔해지다 자부심 있는 모든 부르주아가 시계를 차고 다니게 된 곳도 대도심이었다. 17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경에는 영국에 서만 매해 15만에서 20만 개의 시계를 생산했고 그중 많은 양을 수출했다. 마치 사람들이 이제 역사의 흐름을 어떻게 이해하는 지를 보여주듯, 어떤 시계에는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Tempus fugit”는 라틴어 격언이 박히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의 표현을 빌리 면, 시간이 공간보다 더 귀했다. 공간은 되찾을 수 있지만 시간은 그렇지 않았다.
변화가 너무 급작스럽고 거대했기에 아주 외딴 시골 마을에서 오랜 전통을 지키며 살던 사람들도 이 변화를 모를 수 없었다. 변화가 유럽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대서양 너머에서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페인, 토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 같은 인물들이 변화를 이어받았다. 이 네 인물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역사는 순환한다는 생각을 폐기하고 역사는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선형으로 나아간다는 생각을 점차 지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특히 중요했던 또 다른 요소는, 19세기가 엄청난 제국주의 시대였다는 점이 다. 증기선과 철도, 소총, 말라리아 약으로 사용된 퀴닌 덕분에 유 럽인이 다른 대륙으로 넘어가 영향력을 떨치게 되면서, 수억 명의 전 세계 인구가 원하든 원치 않는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 헤겔이 이전 학자들과 달랐던 점(당시 프로이센에 막 영향을 미 치기 시작하던 어마어마한 사회경제적 변화가 반영되었다)은 역사적 과정이 이 방향에서 저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결국 그 어떤 본질적 변화도 없이 안정 상태에 도달하는 그래프의 선처럼 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는 데 있다. 지난 6천 년 역사를 되돌아본 그는 (당시 사람들은 여전히 이러한 사안에서 『성경』을 지침으로 삼았다) 역사가 매우 동적이라고 생각했다. 역사는 뉴턴의 화살 같은 시간 속에서 언제나 새로운 형태를 띠며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졌다.
투키디데스와 마키아벨리 등등에게는 미안하지만, 역사는 패 턴이나 사이클처럼 복제되거나 반복된 적이 한 번도 없다. 물리학 의 영역에서처럼 같은 사건이 매번 똑같이 발생하지도 않는다. 물 리학에서 수소와 산소가 만나면 언제나 물이 된다. 압력이 일정하 게 유지되기만 하면 물은 100도로 가열될 때 언제나 증기로 변한 다. 빅탱 이후로 언제나 그래왔고, 우주가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 나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헤겔이 이해한 것처럼 역사는 늘 변화 의 과정이었고, 그러한 역사 속에서 모든 사건은 유일무이한 동시 에 다른 모든 것들과 연결되었다.
- 헤겔이 역사의 진정한 본질과, 역사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 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방식으로서의 변증법의 본질을 제대로 드 러냈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시작점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철학 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영향 아래 마르크스는 헤겔의 이론을 거꾸로 뒤집어 버렸다. 마르크스는 생각이 행동을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활동'이 생각을 추동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한 생 명활동은 특히 경제활동, 즉 일이었다. 마르크스는 일을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활동으로 여겼는데, 일은 오로지 인간만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마르크스 본인이 입에 풀칠 하는 것을 늘 어려워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 생존을 위해 일하고 생산해야 하는 인간의 의무에서 비롯되어 역사 속에서 언제나 서로 경쟁하며 나아가는 '물질적 생산관계'는 변증법에 따라 발전했다. 이에 따라 노예제도가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했던 '원시적 공산주의'를 대체했다. 봉건제도가 노예제도를 대체했고, 자본주의가 봉건제도를 밀어냈다. 그리고 모든 현대 기술을 활용해 전보다 훨씬 발전된 형태로 돌아온 공산주의가 결국 자본주의를 폐기할 것이었다. 이 네 가지 생산제도는 각기 특유의 상부구조'를 발전시켰는데, 상부구조란 사회계급뿐만 아니라 상 층계급의 하층계급 지배를 설명하고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종교, 법, 문화, 예술, 사상을 의미한다. 각 생산제도에는 이전 생산제도 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번 장의 주제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점 은, 각 생산제도가 그 안에 정반대되는 제도의 싹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때가 무르익으면 정반대의 생산제도가 기존 제도를 무력 화한다. 기존 제도가 사라지고 나면 번데기에서 나비가 나오듯 새 로운 제도가 등장한다.
- 역사를 이용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 방법은 변하는 것은 아 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상정한다. 두 번째 방법은 변화는 순환하며 역사는 언제나 시작점으로 돌아가 계속 되풀이된다고 본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이 두 가지 방법은 기원전 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우연이 아닌데, 그때 가 과거를 이해하고 남기기 위해 과거의 사건을 조사' 한다는 의 미에서의 역사 개념이 처음 등장한 때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두 가지 방법은 산업혁명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18세기 말까지 함께 득세했으며, 오늘날에도 종종 이용되고 있다.  더 최근에 등장한 다른 두 가지 방법은 역사는 반복되지 않으며 변화야말로 역사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상정한다. 이 두 방법 은 19세기 초반에서야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과거와 현재 에 외삽법을 적용하는 것으로, 이렇게 하려면 역사는 화살처럼 특정 방향으로 흐른다고 가정해야만 한다. 다른 하나는 트렌드와 그 트렌드가 낳을 수밖에 없는 정반대의 트렌드를 모두 고려하는 것 이다. 이렇게 하면 양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질적 성장까지 고려할 수 있다.
이 네 가지 방법 모두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고도 유일한 방법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또 다른 공통점은 변성의식상태를 위한 공간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신의 계시도, 꿈도, 죽은 사람도 역사가 (어딘가로 흘러간다고 가정한다면) 어디로 흘러가고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줄지를 알려주지 못한다. 그 대신 이 네 가지 방법은 기록된 사실과 과정에 대한 냉철하고 객관적이며 편견 없는 연구에 기반한다. 여기서 과정이란, 현재에서 과거로 물러난 것으로 과거 안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으며 “분노와 열망 없이 sine Ira et studio" 주의 깊게 들여다보기만 하면 누구나 접근 해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어려운 점은 언제 일어난 어 떤 사건에 어떤 방법을 적용할지, 당면한 문제를 다룰 때 어떤 방 법을 사용할지, 이 네 가지 방법을 어떻게 결합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역시 이러한 어려움을 느꼈다. 마르크스가 이에 어찌나 분노했는지, 사건들이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처음에는 비극으로, 그다음에는 희극으로 일어나는 것 같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문제의 해답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발 견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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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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