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사피엔스

역사 2022. 5. 11. 19:47

- 포레 부족에 식인이 성행했지만, 남자들은 이 연회에 참석하지 않 았다. 식인이 그들의 전투력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인 풍습은 여자와 아이들만 따랐다. 학자들이 발견한 프라이온은 죽은 사람의 뇌와 척수에만 존재했다. 포레 부족 여인이 죽은 사람의 뇌를 삼키거나, 포레 부족 아이들이 망자의 척수를 흡수할 때 프라이온이 그들의 신체로 침입하여 뇌 조직에서 단백질의 잘못 된 접힘을 야기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쿠루 주술'이 여자와 아이 들에게만 나타난 이유다. 이렇게 보면 동족포식(同族捕食)은 대자연 이 인류를 위해 설정한 금기인 것 같다. 금기에 도전하면 자연의 힘 에 잠식당하기 마련이다. 쿠루 주술'이 바로 그 전형적인 예다. 그럼 뉴기니에는 왜 식인 풍습이 남아 있는 것일까? 현재의 한 이론에 따르면, 뉴기니의 자연환경은 돼지, 소, 양, 말 등 대형 가축을 키우기에 부적합하다. 외부의 선진 기술이 유입되고 보급되기 전에, 뉴기니 현지 부락 역시 돼지 사육을 시도했다. 하지만 돼지를 키우는 데 드는 비용은 생각보다 너무 컸다. 그래서 부락 여성이 자신의 젖을 먹이며 새끼 돼지를 키우기도 했다고 한다. 대규모 가축 사육 이 불가능하다 보니 원주민의 단백질 공급원은 매우 제한되었다. 그 래서 어떤 동물 단백질도 그들에게는 매우 귀중했다. 그들은 사람을 소름 끼치게 하는 거미, 타란툴라까지 잡아서 구워 먹었고, 물에 오 래 잠긴 나무에서 자라는 배좀벌레조개도 별미 삼아 먹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방금 죽은 수십 킬로그램의 신선한 인육을 원주민들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국가박물관에서 일한 다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한 가지 원 칙을 믿게 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사회적 행위든 그 안에는 자연 과학의 기저 논리가 있다”는 원칙이다. 뉴기니의 식인 풍습도 마찬가지다. 내 우상이자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인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는 뉴기니에서 오랫동안 조사와 연구를 한 후, 그곳의 식인 풍습에 대해 이런 관점을 제시했다. “식인 풍습이 존재하는 것은, 현지의 단백질 부족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엥겔스(Engels)도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란 저서에서 식 인 현상에 대해 “식량의 결핍으로 인간은 서로의 피와 고기를 먹게됐다”고 말한 바 있다.
-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재까지 우리는 그저 피가 낭자한 쉼표를 찍었을 뿐이다. 그 후 전문가들은 일부 포레 부족 구성원이 장기간 식인을 했지만 쿠루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원인은 생존한 식인 부족의 몸속에 있었다. 정확히는 그들의 20번 염색체에 있었다. 인간의 20번 염색체에는 PRNP 라고 불리는 유전 자가 있는데, 프라이온 단백질 유전자다. 만약 이 유전자의 129번 염기 서열에 이형접합체(異型接合體, heterozygote)**가 있다면, 이 유전자의 주인은 프라이온 병에 강한 저항력을 갖게 된다. 즉, 일부 포레 부족구성원은 이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에 인육을 먹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전문가들은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조사를 했 고 프라이온 병에 저항력을 가진 유전자가 여러 민족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아주 섬뜩한 가능성을 의미한다. 우리 중 대부분의 사람이 식인의 역사에서 자연 선택의 결과 살아남 은 것일 수도 있다는 점 말이다.
- 종합해보면 공전 궤도 주기, 지축 각도 주기, 세차 주기, 이 세 주기가 어우러져 규칙적으로 지구의 기후에 영 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지축 각도가 줄고 북반구의 여름이 원일점(遠日點)**에 머물 때 빙 하기가 찾아오고, 많은 양의 물이 고위도 지역에 눈과 얼음의 형태로 갇히고 만다. 넓게 퍼진 얼음 덮개는 햇빛을 반사시켜서 기온을 더 떨어뜨리고, 그로 인해 얼음 덮개도 더욱 커진다. 이런 '자가 순환 과 정을 통해 지구는 점점 더 극심한 추위로 빠져드는 것이다. 밀란 코비치 이론'은 현재 학계에서 수많은 학자에게 인정받고 있다.
- 요추간판 돌출 즉, 허리 디스크는 직립 보행 인간에게 생긴 여러 문제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외에도 위장 하수, 탈장, 심혈관 질환 등 의 문제가 생겨났다. 또한 직립 보행은 인류에게 아주 뿌리 깊은 문 제점을 남겼는데, 그것은 바로 여성의 고통스러운 출산이다. 사실 우리의 친척인 침팬지도 특별한 경우 두 다리로 일어나 몇 걸음 걷 는다. 하지만 그 모습은 마치 주제파악 못 하고 설치는 술주정뱅이 같다. 침팬지가 비틀대며 걷는 데엔 여러 원인이 있다. 그들의 허벅 지 구조나 발가락 방향은 직립 보행에 적합하지 않다. 그 외에 또 하 나의 결정적인 요인은 그들의 골반이 키에 비해 아주 크다는 것이 다. 인간이든 침팬지는 이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게 돼 있다. 하체로 걸으려면 몸의 중심을 하체의 지지면(支持面)에 둬야 하며, 빠르게 움직일 때에도 무게중심이 지지면에서 너무 멀어지면 안 된다. 지금 고개를 숙여 자신의 골반을 보자. 지금 상태에서 골반이 두 배로 커진다면 걸을 때 어떨까? 침팬지처럼 엉덩이를 흔들면서 걸어야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걸으면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장거리 이동에서 지나친 에너지 소모는 위험하다.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자원결핍의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큰 골반 구조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키가 커졌고, 골반이 작은 체형으로 진화 했다. 그러면서 가벼운 몸놀림으로 균형을 잡고 직립보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에너지 손실도 크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결핍이라는 이 유령은 인간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골반이 작아졌다는 것은 여성의 산도(産道)가 좁아졌다는 뜻도 된다. 좁은 산도는 인류가 진 화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특질과 맞물리면서 너무나도 잔혹한 결과를 불러왔다. 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여성과 아이가 죽었으며, 오랫동안 아주 처절하게 인류의 생명 궤적을 바꿨다. 작은 골반을 괴 롭힌 잔혹한 특질은 바로 인류의 뇌 용량 증대다.
- 오늘날 주목을 받는 여자 스타들은 수려한 미모와 정교하고 작은 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턱이 작을수록 좋아 연예인을 희망하는 여성들은 성형수술로 좌우 아래턱뼈를 깎기도 한다. 왜 작은 턱이 미의 상징이 되었을까? 왜 이토록 많은 사람이 작은 턱을 사랑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것은 식성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작은 턱은 씹는 행동이 부족하다는 뜻이고, 씹는 행동이 부족하다는 것은 부드 럽고 정교한 음식을 먹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생산력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부드럽고 정교한 음식은 더 높은 사회 계층과 경제적 지위를 의미한다. 그래서 작은 얼굴은 종종 좋은 가정 형편과 연관되어 배우자를 고를 때에도 매우 유리한 조건이 된다. 반대로, 넓은 턱은 거친 음식을 씹는 것을 의미하고, 거친 음식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삶의 질, 즉 결핍이 있는 생활을 의미한다. 결핍은 고생의 근원이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그에 관련된 현상과 사물을 회피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인지 방식과 사회적 경험의 상호작용을 겪은 후, 작은 얼굴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는 가설에 불과하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고 있다.
- 2004년 「네이처(Nature)」지는 씹는 근육과 뇌 용량의 관계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내용은 이렇다. 약 200만 년 전, 인류 조상의 뇌 용량 이 급격하게 커졌는데,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한 가지 원인에 대 해 그동안 사람들이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건 바로 우리 조 상의 체내에서 'MYH16'이라는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이 변이로 인해 저작()을 담당하는 근육의 생장이 둔화되었고, 얼굴 양쪽 근육이 약화되어 머리의 성장에 가해졌던 제약이 줄어들었다. 그 결과 인류는 더 큰 뇌 용량을 가질 수 있게 됐고, 더욱 복잡한 인지 행위를 할 수 있는 물리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다. 대자연에서 진화의 기 본 원칙은 유전자 돌연변이가 발생한 후, 자연 선택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즉, 발생한 돌연변이가 살아남느냐 그렇지 못하냐는 문제는 해당 돌연변이를 가진 개체가 후손을 번식시킬 가능성에 달려 있다. MYH16의 돌연변이는 씹는 근육의 발육을 늦췄는데, 보통 이 돌연 변이 유전자를 가진 개체는 식사 효율이 떨어져 영양 섭취 부족에 시달렸다. 이미 다양한 결핍이 존재하는 환경에서 이런 변화는 생존 과 번식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류의 진화사 는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반전을 연출한다. 씹는 근육이 점점 약해 진 개체가 어떤 행동을 취한 후, 오히려 더 강해지고 더 번성해졌는 데, 반전을 연출한 그 행위는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시간 접기'이다.
씹는 근육이 약해진 후, 일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그보다 조금 늦게 출현한 호모 하빌리스는 딱딱한 음식을 씹는 이 복잡한 과정을 입 밖에서 진행했다. 즉, 석기로 음식에 선처리(處理)를 가한 것이나, 견과류의 껍데기는 부수고, 질긴 섬유질은 으깨고, 큼직한 생고기는 잘게 다지고, 거대 맹수의 골격은 골수를 미리 발라냈다. 다루기 어렵고 씹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식량을 미리 처리하고 나자, 음식을 먹는 과정은 매우 쉬워졌다. 오늘날의 영장류들은 종종 음식 을 먹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고릴라의 경우, 보통 반나절 동안 음식을 먹는다. 하지만 호모 하빌리스는 석기로 처리를 한 후에 음 식을 먹었기에 식사 시간이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호모 하빌리스 의 치아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더 작아졌고 입술 부위도 덜 돌 출되었다. 이는 입에 가해지는 부하가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외부의 힘을 빌려 더 짧은 시간 안에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행동이다. 바로 그 순간부터, 그동안 자연계에 균일하 게 흐르던 시간이 인간 조상에게만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100만 여 년 전, 올두바이 협곡에 사는 호모 하빌리스들이 손에 들고 있던 그 단순한 석기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작은 시간의 용기(容器) 로 볼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사용했을 때, 용기 안에 접혀서 들어가 있던 시간이 밖으로 나왔고, 우리는 자연계에서 다른 종들보 다 더 짧은 시간에, 더 높은 효율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됐다. 이는 단지 음식을 먹는 것에 그치지 않았고 세상의 모든 일을 포함했다.
- 결핍된 환경에서 인간의 조상들은 대개 조 잡하고 질 낮은 음식을 먹고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강한 교합 근 육에 의존해 음식을 섭취했다. 이후 유전자 돌연변이는 그들의 교 합근을 약하게 했는데, 일부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여 단단한 음식을 처리함으로써 결핍의 압박을 이겨냈다. 그 결과는 뇌 용량의 증대 로 이어졌다. 그런데 머리 크기의 증대는 산모의 출산을 힘들게 하 고 식량 채집의 효율을 떨어뜨려 새로운 결핍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 오래 사는 할머니가 살아남아 자신의 딸이 아이를 양육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렇게 장수하고, 늦게 성숙해지는 유전자 가 선택을 받으면서, 인간은 성장 과정이 더 길어지고 더 큰 체격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체질 면에서는 행동 면 에서든, 하나의 영원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응해왔다. 그 난제는 바로 결핍이다.
- 사실 체모와 기생충 사이의 상호관계는 인간의 진화에 약간의 실마리를 남겼다. 이 단서들을 통해 인류학자는 사람이 체모를 벗은 시기를 알아냈다. 고대 인류의 몸에는 '이'라는 기생충이 있었다. 인간의 체모가 완 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때는 길고 복슬복슬한 체모가 서로 뭉쳐 있었 을 것이다. 그 덕에 이는 체모를 따라 인간의 머리카락에서 사타구 니까지 어느 부위로든 이동해 피를 빨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점 점 털을 벗고, 어깨, 가슴, 등의 털이 모두 없어지자 '이'는 살기 어려 워졌다. 그래서 체모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두 부위, 머리카락과 음모에 갇히게 되었다. 장기간의 지리적 격리는 생식의 격리를 초래 하곤 하는데, 한 기생충이 장기간 서로 다른 환경에 갇혀 서로 유전자를 교류할 수 없게 되면, 결국 두 가지 기생충으로 분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는 머릿니와 사면발니로 분화됐다. 머릿니와 사면발 니가 언제 분화되었는지 알 수 있다면, 인간이 언제 체모를 벗게 됐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 다시 인간의 체모로 돌아가자. 앞에서 언급한 기생충에 관한 가설은 학계의 많은 전문가로부터 지지를 받긴 했지만, 다음으로 언급할 세 번째 이론이 현재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류가 체모를 벗은 이유는, '열을 발산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앞에서 아프리카 모로코 지역의 더위를 묘사했는데, 그런 환경에 서 동물이 발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더위를 먹어 죽을 것이 분 명하다. 약간의 생활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길고 촘촘한 체모는 열 분산에 큰 지장을 준다. 몸의 수분을 가두고, 공기의 이동 속도를 늦춰 땀 증발의 효율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샤워를 하자마자 온몸의 피부는 다 마르지만, 머리카락과 두피는 여전히 젖어 있는 이유도 이것이다.
- 인간의 몸에는 엽산이라는 영양물질이 있는데, 이것은 수용성 비타민이다. 엽산이 부족할 때 피로와 무기력, 멍한 기분을 느낀다. 더 중요한 것은 엽산의 부족이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관에 모두 부정적 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남성의 몸속에 엽산이 부족하면 정자 발육이 둔화된다. 일부 엽산 억제제는 남성 피임약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임신부가 엽산이 부족할 경우 태아가 발육에 지장을 받 아 척수가 없거나 심지어 뇌의 발달이 불완전할 확률이 커진다. 그렇다면 햇빛은 과연 사람의 피부색에 어떤 작용을 할까? 연구 결과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비교적 옅은 피부색을 가질 경우, 자외 선이 그의 몸 안에 있는 엽산 수치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한 시간 동안 태양 빛을 쪼이면 그 사람의 체내 엽산 수치가 50% 내려간다. 따라서 아프리카처럼 강렬한 일조 환경에서, 옅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심각한 엽산 결핍을 겪는다. 남성은 정자 활동력이 떨어질 것이고, 임신부는 기형아를 낳거나 사산할 수도 있다. 인간이 체모를 벗은 후, 피부색은 출산 능력과 후손의 생존율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특징이 됐다. 결국 엽산의 결핍에 적응하기 위해 호모 사피엔스는 짙은 피부로 진화했다. 피부 속 멜라닌 색소는 자외선이 일으키는 엽산의 분해 작용을 효과적으로 낮춰 엽산 결핍을 완화시켰고, 짙은 피부의 남성은 '명예 회복'이 가능해졌다. 짙은 피부를 가진 여성이 건강한 후손을 낳을 확률도 더 높았다. 이런 사실을 토대로 인류학자들은, 우리 의 조상이 처음 아프리카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 이동했을 때 짙은 색의 피부를 가졌을 것이라고 본다.
- 짙은 피부색이 햇빛이 인체 내의 엽산을 분해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는데, 왜 인간은 아프리카를 떠나면서 점차 피부색이 옅게 변했을까? 이 문제를 설명하려면 다른 영양물질을 다루어야 한다. 그것은 비타민D이다.  비타민D는 인간의 뼈와 근육의 성장에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만약 어린아이가 비타민D가 부족하면 구루병(樓病)에 걸려 신체 발달이 온전치 못하고, 기형이 될 수 있다. 또한 성인이 비타민D가 결핍되면 연골병, 관절 통증, 근육무력증에 걸릴 수 있다. 구석기 시대에 이런 병은 모두 환경에 대한 인체의 적응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럼 피부색과 체내의 비타민D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까?
- 일반적으로 인체는 두 가지 방법으로 비타민D를 충전한다. 햇빛과 음식이다. 인체가 충분한 양의 빛을 받으면 피하조직의 어떤 화학 물질이 비타민D로 전환되어 신체의 필요를 충족시켜준다. 하지만 피부색이 너무 짙으면 피부 안의 멜라닌 색소가 이 과정을 방해하고, 인체는 비타민D 결핍으로 각종 질환에 걸리게 된다. 그래서 짙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고위도 지역이나 안개가 낀 지역에서 구루병과 골연화증(骨軟化症)*으로 고통받기 쉽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옅은 색의 피부로 진화해야 한다. 즉, 위도가 높은 지역 등 부족한 일조 환경에서 옅은 피부 색이 유리했고, 이로 인해 피부가 상대적으로 흰 사람도 비타민D를 합성하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일조량 이 비타민D를 보충하는 유일한 공급원은 아니라는 것이다. 육류 음 식 역시 비타민D의 공급원 중 하나다. 에스키모들은 고위도 지역에 몰려 사는데, 그들의 피부색은 그다지 희지 않다. 하지만 결핍을 겪지는 않는데, 주요한 원인은 그들이 섭취하는 음식에서 육류의 비율 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그들은 '극단적 육식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육류에서 충분한 비타민D를 섭취한 그들은 고위도에 살지만 옅은 피부색이 필요하지 않다. 종합해보면, 같은 지역에서 나타나는 피부색의 차이는 엽산과 비 타민D 두 영양물질의 균형으로 결정된다. 인류가 행동 방식을 바꾸거나 특질을 바꾸는 건 두가지 영양물질 중 어느 하나라도 결핍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 학자들은 머릿니와 사면발니가 분화한 시간을 측정해 사람의 체모가 벗겨진 시간을 계산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20만 년전(호모 에렉투스 단계)이다. 고대 인류가 체모를 벗은 후, 신체의 각 부 위, 특히 어깨, 목, 가슴, 등 부위가 매끄럽게 변하면서 체모가 없는 부위에는 이가 생존하기 어렵게 됐다. 하지만 나중에 몇몇 머릿니들은 머리카락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생태학적 위치를 찾았다. 바로 고대 인류의 옷 속이다. 옷의 섬유 속에 숨어 계속 생존하기 위해 이는 앞발이 갈고리 모양으로 진화했다. 장기간의 지리적 격리는 점차 생식 격리를 초래했고, 옷 속으로 옮겨간 머릿니는 점차 몸니로 분화 되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논리적으로 설명이 된다. 옷이 있기 때문에 몸니가 생겼고, 몸니가 있다는 것은 옷이 있다는 뜻이다. 분자시계를 통해 몸니가 얼마나 오래전에 머릿니로부터 분화됐는지를 계산하 면, 고대 인류가 언제부터 옷을 입게 됐는지 알 수 있다.
최종 측정 결과, 몸니는 17만 년 전에 머릿니로부터 분화했다. 이는 곧 약 17만 년 전에 호모 사피엔스가 옷을 입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후에 인류학자들은 지질학적 각도에서 주변 증거를 연구했는데, 약 18만 년 전에 지구의 기후가 점점 추워지기 시작했다. 체모를 벗 은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매우 커다란 시련이었을 테고, 옷을 입는 강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 그런데 참 이상하다. 뇌 용량으로 보면 네안데르탈인이 결코 열 세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인 네안데르탈인의 평균 뇌 용량은 1200ml에서 1750ml까지 다양하다. 일부 네안데르탈인의 뇌 용량은 같은 시기 유럽에 살고 있던 호모 사피엔스(당시 호모 사피엔스의 평균 뇌 용량은 1500ml 안팎이었다)를 뛰어넘을 정도다. 그런데 뇌 용량이 더 큰 네안데르탈인이 오히려 더 강한 지적 수준과 더 복잡한 문화적 행위를 갖추지 못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 학계에서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결핍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네안데르탈인의 비교적 큰 뇌 용량 역시 여러 요소의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다. 특이하게도 그들의 두개골 후두부는 비정상적으로 돌출되었다. 현대인의 눈에는 거의 기형으로 보일 정도다. 후두부에 상응하는 대뇌 영역은 후두엽이며, 시각 중추가 있는 곳이다. 즉, 크 게 발달한 후두엽은 더 발달된 시각 중추를 의미한다. 이 특질에 맞 춰 생각해보면, 네안데르탈인은 큰 눈자위와 더 큰 안구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사항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후, 네안데르탈인이 현대인보다 더 뛰어난 시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높은 위도에서 살면서 진화해온 형질 중 하나라고 결론 내렸다.
위도가 높은 지역일수록 빛의 양이 적다. 조명 설비가 보급되지 않은 구석기 시대에 시력은 사활을 결정짓는 중요한 형질이었다. 사 냥감이 들판과 밀림에 남긴 작은 단서를 발견하는 일은 다음 일정 시간 동안 네안데르탈인 사냥꾼과 그들의 친지들이 음식을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의 문제였다. 물론 눈의 더 중요한 역할은 치명적인 위험을 파악하는 것이다. 거대 맹수의 발자국과 배설물, 나뭇가지 사 이로 쉬잇' 소리만 내고 잘 보이지 않는 독사, 적의를 품은 호모 사피 엔스가 쳐놓은 온갖 함정들을 알아채기 위해서라도 더 좋은 시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즉, 네안데르탈인은 더 많은 시각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 환경에서 큰 눈이 자연 선택되었을 것이다. 더불어 시각 정보의 과부하에 대비하기 위해 시각 중추 역시 더 크게 진화했다.
그러나 인간의 뇌 공간은 한정되어 있다. 거대해진 시각 중추가 뇌의 공간과 에너지를 많이 차지하게 되면서 네안데르탈인의 뇌 발 육은 불균형해졌다. 이마 바로 뒤에 있는 전두엽은 인류의 뇌 영역 중 가장 늦게 진화됐다. 전두엽은 사교, 기억, 정서 관리, 논리 해석 등 복잡한 지적 활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네안데르탈인의 대뇌 중 그 부분의 발육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지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에 비해 문화 행위의 창의성과 유연성이 부족해서일 가능성이 크다. 뇌 가 빛 부족 문제에 지나치게 반응하다 보면 다른 부위의 발달을 포기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이러한 한계 속에서 네안데르탈인의 뇌는 사물의 특성을 추출하는 것 같은 복잡한 지적 활동을 담아내지 못한 것 같다.
문화 행동의 차이는 결핍을 대하는 두 인간의 임기응변 능력에도 차이를 만들었다. 생존 레이스에서 승리의 저울은 점점 호모 사피엔스에게 기울었다.
- 오늘날 우리는 종종 인간의 언어를 문화의 매개체 중 하나로 보는데, 사실 언어는 추상적 개념이다. 세상의 그 어떠한 추상적 개념도, 실존하려면 물리적 토대를 가져야 한다. 인간의 언어도 마찬가지인데, 언어의 물리적 기반 중 하나는 바로 인간의 특이한 후두 구조다. 오늘날 학계의 일부 연구자들은 인간을 습관성 직립 보행을 하는 영장류'로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 습관성 직립 보행의 특징으로 인해 인간은 복잡한 언어를 가질 수 있게 됐다. 직립 보행을 하면서 경추가 점점 지면에 수직으로 늘어졌고, 목도 머리의 바로 아래로 천천히 이동했다. 목구멍도 아래로 내려왔다. 그 결과 공기는 더 긴 소리 기관에서 긴 경로로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인간이 공기의 흐름 에 다양하게 간섭할 수 있는 긴 공간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숨을 쉴 때 공기는 목구멍의 성대를 통과한다. 성대는 높 은 빈도로 개폐할 수 있는데, 이 과정은 공기에 다양한 진동 주파수 를 만들어준다. 즉, 진동을 가진 공기가 입안으로 들어가, 입술, 치아, 혀의 활동을 통해 비강 등의 다른 부위와 조합해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양한 발음이 복잡한 언 어의 존재 기반이자 전제 조건이라는 점이다.
- 오늘날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일부 부시맨들은 아직도 매 우 오래된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 언어에는 140가지 정도의 발음이 있다. 그중 혀를 입천장에 붙인 후 힘차게 공기를 빼내서 튕기는 소 리도 있는데, 이러한 소리는 야외에서는 그리 멀리 퍼지지 않기 때 문에, 몸을 숨기고 사냥감을 기다릴 때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 편 리하다고 한다. 조금은 생소한 발음 기술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토 착 언어가 호모 사피엔스의 거의 모든 발음을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복잡한 발음은 서로 다른 개념을 담을 수 있다. 그래서 호모 사피 엔스는 다양한 표현이 가능했다. 오늘날 학계는 호모 하빌리스, 호 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들의 후두부와 발음기관의 구조가 호모 사피엔스에 비해 덜 발달되었을 거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 양하고 또렷한 소리를 낼 수 없었고, 나아가 복잡하고 정교한 언어 도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것이 결국 문화 발전의 한계로 이어진 셈 이다.
- 네안데르탈인은 정밀한 언어를 구사하지 못해 복잡한 사회 조직 관계를 구축하기 어려웠다. 집단과 집단 사이의 끈끈함은 약하고, 배척의 강도는 높았다. 그래서 대규모 집단을 유지하고 함께 움직이 는 것이 불가능했다. 반면 호모 사피엔스의 정밀한 언어는 시공간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회적 관계가 복잡한 사람 또는 모두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 설령 현장에 있지 않더라도 개체나 족군 간에 '조직 자원'을 제공할 수 있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정밀한 언어 시스템으로 무형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종의 내적 소모를 크게 줄였 고, 협동성을 키웠다고 할 수 있다
- 데이터를 보면 사실의 전모가 더 잘 드러난다. 학자들은 서아시아, 즉 지중해 동부의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의 집단 내 연령 분포를 확인했다. 그 결과, 두 집단의 노인 비율은 거의 동일하게 나타났다. 유럽 지역처럼 뚜렷한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카스파리는 서아시아 지역이 위도가 낮고 유럽보다 기후가 온화해서 인간이 살 기에 적합하기 때문일 거라고 말했다. 이 명확한 차이는 우리에게 또 한 번 “결핍이 우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 날씨가 추운 유럽은 따뜻하고 온화한 서아시아보다 각종 생활 자 원에 심각한 결핍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결핍은 호모 사피엔스의 정밀한 언어와 그로 인해 늘어난 수명이 자연 선택되는 걸 촉진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유럽의 호모 사피엔스 노인들은 결핍에 대응하기 위해 생겨난 셈이다.
오늘날 인류학자들은 일부 수렵 부족의 어른이 여전히 정밀하고 복잡한 언어로 부족 무리에 지식을 전수하고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뉴멕시코대학교의 학자 힐라드 카플란(Hillard Kaplan)은 노인들의 도움으로 ‘무리에 있는 후손들이 수적으로나 생 존율 면에서 모두 나아졌고, 조부모들은 복잡한 사회관계를 더욱 공 고히 했다'는 점을 발견했다. | 이로써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은 왜 서로 다른 운명의 길로 걸어갔고, 왜 호모 사피엔스는 점점 더 발전했는데, 네 안데르탈인은 결국 사라졌을까?”라는 질문의 답에 더욱 가까워졌 다. 많은 사람이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사이의 경쟁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가 계획적으로 네안데르탈인들을 공 격하고 포위하여 최종적으로 그들을 멸종시켰다고 믿는 것 같다. 하 지만 이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대체한 것은 의식한 것도, 계획한 것도 아니다. 그저 진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 혹자는 인류가 신석기 시대에 들어선 후에야 토기를 발명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토기 기술은 구석기 시대의 마지막 단계에 이미 출현했다. 예를 들어, 장시성 셴런둥(仙人洞) 에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복원 가능한 토기가 발견됐는데, 지금 으로부터 1만 2,000년 전의 것이다. 아마도 당시 인간이 동굴 안에 서 불을 사용할 때 무심코 흙을 태우고, 토기를 만드는 영감을 얻었 을 가능성이 크다. 많은 사람이 토기 기술의 위대한 의미를 간과하고, 단순히 원시 인류가 불에 구워서 만든 단지나 항아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사 실 토기 제조 기술에는 알려지지 않은 숨은 가치가 아주 많다.
만약 당신이 석기 시대의 여성이라고 가정해보자. 아이를 낳았는 데 젖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머니 젖이 부족한 것은 흔한 상황이지만, 석기 시대에는 젖소도, 분유도 없었다. 이 경 우 갓 태어난 아이는 결핍에 목숨을 빼앗길 위기에 놓인다. 그런데 토기 기술이 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이 기술은 신석기시대에 발전해 확산되었고, 각지의 사람들이 표준화된 용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용기가 있으면 유동식을 만들 수 있고, 젖이 없는 어머니는 아이를 위해 쌀과 고깃국을 끓여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아기가 영양 부족으로 사망하는 비율이 현저하게 줄었다. 또한, 토기의 출현은 어머니의 수유 스트레스를 크게 줄여주었다. 여성들이 더 빨리 수유에서 해방되어 다음 출산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스탠퍼드대학교 동아시아 고고학과의 류리(劉莉) 교수의 언급처럼, 신석기 시대의 토기 기술은 인구 증가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 이 용기의 구체적인 사용 과정은 대략 이렇다. 먼저, 조상들은 좁쌀이나 기장 같은 곡물을 용기에 넣고 끓여 죽처럼 만든 다음, 소구 첨저병에 붓는다. 그리고 맥아 또는 다른 식물의 싹을 갈아서 넣 다(싹 안에 들어 있는 디아스타아제가 녹말을 포도당으로 분해하는 역할을 한다). 그다음, 약간의 물을 넣고 진흙으로 입구를 막아서 진공 상태로 만 든다.
미생물은 산소가 없는 환경에서만 포도당을 에틸알코올과 이산화 탄소로 바꿀 수 있다. 그런데 이 과정은 신경을 더 써야 한다. 이미 생물이 아주 연약하기 때문이다. 너무 높은 온도에서는 미생물이 쉽게 죽어서 발효가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구첨저병을 흙에 꽂아서 병의 온도를 내려가게 하고, 필요할 경우 병에 물을 뿌렸다. 온도가 너무 낮아도 미생물의 활력이 떨어져 완성된 술이 싱거워질 수 있다. 그래서 조상들은 병을 지푸라기 등으로 덮어 보온 했다. 아무튼 이렇게 정성을 들인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드디어 발 효가 완성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술을 즐겼을까? 아마도 함께 술을 빨아 마셨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까지도 중국 서남부의 일부 소수민족은 술을 빨아 먹는 풍 습이 남아 있다. 술을 빨아 먹는다는 것은, 술이 담긴 용기를 가운데 두고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긴 빨대를 용기에 넣어 함께 마시는 걸 의미한다. 학자들은 신석기 시대의 몇몇 토기의 주둥이에서 세로 방 향으로 난 마찰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초기 인류가 갈대 등을 이용해 술을 빨아 마실 때 남긴 자국일 가능성이 크다. 용기는 바닥이 뾰족해 침전물이 쉽게 모이게 되어 있다. 즉, 침전물이 위로 떠올라 식감을 방해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오늘날 일부 맥주 공장의 발효 탱크도 이러한 바닥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음주는 양사오 문화 시기에 비교적 흔한 일이었을 것이다. 출토된 부장품으로 볼 때, 그 당시는 아직 사람 사이에 지위와 재력의 차이 가 형성되지 않았다. 같은 무리에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평등해 서 같은 용기에서 술을 마실 수 있었다. 빈부격차가 나타나기 시작 한 건 양사오 문화 이후, 즉 룽산 문화 시대에 이르러서다. 사회 자 원이 부족한 사람들은 아래로 눌렸고, 결핍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사 람들이 상위 계층을 이뤘으며, 귀천의 구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 술을 마시는 용기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빨아 먹는 용기에서 점차 독립된 개인 용기로 바뀌었다. 사람과 사람 간에 경계가 뚜렷해진 것이다. 이는 중국 사회가 복잡해졌고 이 과정에서 사회 계층 이 분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이다.
- 좀 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알코올을 분해하는 능력은 인간이 자연계 대부분의 동물보다 강하다. 천부적인 음주 재능은 아마도 결핍에 의해 생겨났을 가능성이 크다. 성질로 나눠보면, 술은 과실 주에서 양조주, 다시 양조주에서 증류주에 이르는 과정을 거쳤는데 우리 조상들은 언제부터 넓은 의미의 과실주를 접하게 됐을까? 유전자 정보로 보면 약 1,000만 년 전이다. 2015년 한 연구진이 미국국립과학원회보 「PNAS」에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인간을 포함한 몇몇 영장류의 몸에서 에탄올 대사와 관련 된 유전자가 약 1,000만 년 전에 자연 선택되어 확산되었다는 내용이다. 당시는 넓은 의미의 인간조차 나타나기 전이고, 인간, 침팬지 그리고 고릴라가 어떤 고대 유인원을 공통 조상으로 가지고 있을 때다. 이 고대 유인원은 숲에서 생활할 때, 종 내 경쟁에 밀렸거나, 그 외의 다른 어떤 이유로 정상적인 열매를 충분히 먹을 수 없었다. 그 래서 어쩔 수 없이 이미 무르고 변질되기 시작한 열매를 먹어야 했 다. 이 열매들은 보통 떨어진 낙엽 사이에 묻혀 있었는데, 습하고 따 뜻하며 공기의 유통이 부족한 환경이 형성되면서 일부 과일은 발효 되어 알코올을 만들었다. 그렇게 알코올을 먹은 고대 유인원이 자연선택의 선호를 받았다. 알코올에 내성이 없는 유인원은 술에 취해서 나무에서 추락하거나 위험에 대한 경계심이 떨어져 맹수에 도전했 을 수도 있다. 그렇게 그들의 유전자는 점차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알코올에 내성을 가진 개체는 자신의 유전자를 지속하고 확산시킬 수 있었다. 나중에 이 고대 유인원들은 고릴라, 침팬지 그리고 인간 으로 점점 분화되었고, 알코올을 잘 분해하는 유전자는 이 세 종 모두에게서 발견되었다. 그 후 인간은 알코올 함량이 더 높은 양조주와 증류주를 발명해 계속해서 자신을 취하게 만들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얘기일 뿐이다. 내가 보기에도 알코올을 대사하는 능력은 결핍 의 압박 속에서 생겨난 것 같다.
- 상하이 푸단대학교 분자인류학 박사 얀시(嚴實)는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표본을 추출하고 취합하여 통계를 낸 후, 대략 60%의 중국남성이 중국 신석기 시대 5대 슈퍼 조상의 후손(『중국인의 슈퍼 조상(中 國人的初級祖先 : 국내 미출간)』 참조)이라고 밝혔다. 슈퍼 조상이란 신석기 시대에 더 많은 출산의 기회를 가졌던 남 성을 일컫는다. 즉, 그 슈퍼 조상이 매우 많은 자손을 번성시켰고, 이 자손들이 계속해서 확산되면서 광범위한 유전자 전파를 실현한 것 이다. 이들의 핏줄은 결국 중국 인구의 바다로 이어졌다. 나는 얀시 박사를 찾아가 피 검사를 한 적이 있는데, 나 역시 신석기 시대 5대 슈퍼 조상 중 하나의 후손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이 중국 민족의 슈퍼 조상과 Y염색체 아담은 그다지 비슷하지 않다. 이는 슈퍼 조상이 비교적 짧은 기간에 많은 자손을 번성시켰다는 얘기인데, 일부 학자들은 권력을 통한 성의 독점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가설을 접하며 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삶의 모든 것은 성에 관한 것이고, 성 자체를 제외하면 성은 곧 권력에 관한 것이다(Everything in life is about sex, except sex. Sex is about power).” 라는 명언이 떠올랐다.
중국의 신석기 시대도 마찬가지다. 소수의 남성은 부계 씨족 간의 정복 전쟁에서 큰 권력을 손에 넣었고, 이로써 성 자원을 독점한 후 주변 여성들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손을 낳았다. 그런데 한 자연 집 단에서 남성과 여성의 수는 대략 1.1:1이다. 많은 여성이 극소수 남 성에게 독점된다면 다른 남성들은 어떻게 할까? 오늘날 일부일처제 사회에서는 남성이 배우자를 찾고 후손을 남길 수 있는 확률이 크게 높아졌지만, 신석기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스탠퍼드대학교의 한 과학 연구팀이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발표했데, 신석기 시대에 남성 Y염색체의 다양성이 갑자기 낮아졌 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당시 부계 집단 간에 치열한 번식 전쟁이 일 어났고, 출산의 기회가 특정인에게 고도로 집중됐음을 의미한다. 구 석기 시대의 호모 사피엔스 부족 사이에 있었던 폭력적인 충돌은 신 석기 시대에 더욱 격렬해졌다. 농업 때문에 사람들이 물러날 수 없 었던 것이다. | 채집과 수렵의 시대에는 주거가 일정하지 않았으니, 전투에 패배 한 쪽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서 살면 됐다. 하지만 신석기 시대에는 정착 생활을 했고, 토지, 가옥, 가축 등 사유재산을 가진 상황이었다. 따라서 전투의 승자는 이 모든 것을 가졌고 패자는 다 잃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많은 남성이 사망했고, 여성과 자손을 번식할 수 있는 권리는 소수의 승리자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계속되는 전쟁의 승리를 통해 선택된 통치자와 전쟁 영웅들이었다.
연구팀은 디지털 시뮬레이션을 통해, 신석기 시대 성인 남녀의 결 혼 비율을 1:17로 추정했다. 대다수의 남성은 자신의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극도의 성 결핍 속에서 암울하게 역사의 무대를 떠났다.
성의 결핍은 남성들을 쉴 새 없이 경쟁하고 싸우게 만들었고, 심지어는 살인도 불사하게 했다. 이렇게 광범위하고도 빈번한 폭력 행위는 신석기 시대에 절정을 이뤘다.
- 토양에 아연이 부족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흉노와 선비 같은 북방 유목 민족은 위도가 높은 내륙 지방에서 오래 살았다. 그런데 그곳 대부분의 토양에는 아연이 부족하다. 게다가 북방 유목 민족은 주로 육식을 하는데, 육식에 있는 구리는 인체에서 아연과 길항작용 (抗作用)을 일으킨다. 결국 육식을 많이 하면 아연의 흡수에 어느 정도 지장을 받는 것이다. 그 결과 흉노와 선비족의 여성은 오랫동안 심각한 아연 결핍 상태에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에 출토 된 일부 유골을 분석하고, 화학 실험을 통해 이 결론을 증명해냈다.
앞에서 언급했듯, 아연의 결핍은 출산 시 임신부의 사망률을 높인다. 그래서 역사상 북방 유목 민족 사회에서는 가임 여성의 사망률이 높았고, 결론적으로 극심한 남녀 불균형이 빚어졌다. 이런 이유로, 순조롭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성은 매우 귀중한 존재였으며, 쉽게 밖으로 유출할 수 없는 자산이었다.
가오카이 박사는 인구 붕괴와 민족 멸종을 막고 가족의 핏줄을 이 어가기 위해 수계혼의 풍습이 생긴 것으로 추정했다. 과거 한 학자 는 수계혼의 세 가지 원칙을 이렇게 총결산했다. 첫째, 수계혼의 대상이 되는 여성은 반드시 과부여야 한다. 다시 말해, 자기 아버지나 형이 살아 있을 경우엔 계모나 형수와 혼인할 수 없다. 둘째, 장가드 는 사람은 망자의 사회적 관습에 맞는 혼인 계승자여야 한다. 셋째, 수계혼은 공개적인 결합이고 정당한 관계이다. 은밀하게 이뤄지는 사통 관계가 아니다.
세 가지 원칙은 북방 유목 민족 사회에서 수계혼이라는 근친혼이 가져올 폐해를 없했을 뿐 아니라, 건강한 가임 여성이 가족 내에서 핏줄을 이어갈 수 있도록 했다. 만약 가오카이 박사의 추측이 맞다. 면, 수계혼이라는 풍습은 당시의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것이다. 결핍이 이 풍습을 만들어냈다는 얘기다.
물론 삼국, 양진, 남북조 시대의 사람들은 미량 원소의 개념을 알 지 못했다. 한족과 다른 소수 민족들은 부족한 자원과 생존 공간을 두고 다툴 뿐만 아니라, 결핍으로 인한 문화적 충돌을 일으키며 서로를 적대시했다. 이런 큰 배경하에서 중화 대륙의 연이은 전쟁은 끝없이 사상자를 냈고, 수많은 학자가 삼국, 양진, 남북조 시대를 중국 역사상 가장 어둡고 혼란했던 시대로 결론 내렸다. 그 어둠과 공 포의 정도는 명나라 말기에 견줄 만하다.
- 결핍과 결핍에 따른 파장이 17세기의 주된 흐름이었다. 볼테르 (Voltaire)는 이렇게 말했다. “17세기는 권력 찬탈의 시대였고, 전 세계 는 강탈과 약탈, 악행의 무대였다.”  20세기 중엽,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 J. Hobsbawm)은 “17세기 유럽은 경제 불황, 식량 부족, 사망률 상승, 사회 반란이 빈번하던 시대를 거치면서 위기를 맞았다”고 했다. 오늘날 사학계에서는 보통 이 위기를 '17세기 위기'라고 부른다. 제프리 파커(Geoffrey Parker)는 17세기의 위기를 심도 있게 연구했는데, 1차적인 수치로 볼 때 당시
전 세계 인구의 1/3이 빈번한 전란과 기근, 전염병으로 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현재 많은 학자가 이 같은 글로벌 위기의 주된 원인으로 오늘날보 다 현저하게 추웠던 17세기의 기후를 꼽는다. 특히 17세기 중엽에는 태양 활동이 뚜렷하게 약화되어서 추위가 더욱 심해졌고, 전 세계 각지에 일련의 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명나라 말기의 적지 않은 문 헌 기록에서 극한 기후가 남긴 여러 징후를 찾아볼 수 있다. | 천계 원년(天啓 元年, 서기 1621년) 봄, 양쯔강 중하류와 그 이남에서 눈이 40여 일간 계속되었고, 둥팅호(洞庭湖)가 얼음으로 뒤덮였다. 숭 정 6년(서기 1634년), 황허강이 얼어붙고 얼음이 돌처럼 굳었다. 숭정 9년(서기 1637년)에 중국 최남단 하이난섬에 눈이 3일 동안 쉬지 않고 내려 초목이 전부 죽었다. 1641년 쑤저우(蘇州)의 복사꽃은 예년보다 약 2주 늦게 폈다. 이듬해 장쑤성에는 초여름에 서리가 내렸고, 학자 들은 이 정보로부터 17세기 중엽의 기온이 현재보다 2°C가량 낮았 을 것으로 추측한다.
- 기근과 전란 외에 전염병도 명나라의 멸망을 증폭시킨 중대 요인이다. 결핍이 어떻게 다양한 전염병을 일으키는지, 많은 사람이 그 과정을 생소하게 느낄 것이다. 미국 시카고대학교의 명예교수 윌리엄 맥닐(Willian McNeil)은 저서 『전염병의 세계사 (Plagues and Peoples)』에 서 다음과 같은 관점을 제시했다. “한 지역에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 는 것은, 그 지역의 환경이 균형을 잃었기 때문이다. 병원체와 인간, 동물 사이에 균형을 잃으면 전염병이 폭발해 다시 균형을 이룰 때까 지 수많은 숙주를 감염시키고 죽인다." 이 이론은 명나라 말기에 충분히 검증되었다. 17세기 중엽, 명나 라 백성은 비교적 작은 범위 내에서 장기간 생활하며 해당 지역의 미생물 환경에 적응했다. 하지만 가뭄이 심해지고 황충의 습격이 연달아 일어나자,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인구의 대량 이동은 각지 미생물 환경의 균형을 파괴하는데, 이는 전염병의 대규모 확산을 위한 최고의 조건이 된다. 또한 농작물의 수확량이 적거나 아예 없을 때, 사람들은 식단 범위를 확대하고 설치류 동물처럼 평소에 먹지 않던 식재료를 먹게 된다. 이때 감염된 동물일 경우 쉽게 잡힌다. 그래서 굶주림으로 면역력이 약해진 사람 들이 병원균과 접촉해 더 쉽게 감염되는 것이다.
결국 근본적인 원인은 식량의 결핍에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전 염병은 가뭄과 충해로 인해 비롯된다. 1640~1641년에는 재해와 전염병이 일상적으로 존재했다. 명나라 말기의 산둥안후이 등에서는 심각한 기근 외에도 절반 이상의 백성이 전염병으로 죽었고, 대추만큼 큰 파리가 하늘을 가득 뒤덮고 춤을 췄다.
- 해발 2,851m의 탐보라 화산은 인도네시아 숨바와섬 북쪽에 위치 한다. 1815년 4월 5일부터 12일까지 탐보라 화산에는 VEI(화산 폭발 지수) 7의 맹렬한 폭발이 있었는데, 1,000억m33의 분진이 쏟아져 나왔 고, 고온의 화염이 공기를 뒤흔들고 광풍을 이뤘으며, 섬에 있는 거 목들이 뿌리째 뽑혔다. 넘쳐흐르는 마그마는 지나는 길목에 있는 모 든 것을 삼키고 바다로 흘러들어가 바닷물까지 끓어오르게 했다. 또 한 화산재와 돌 조각이 날려 하늘을 뒤덮고, 반경 수백km 이내의 마 을이 전부 파괴되거나 매몰됐으며, 1만 명 이상의 사람이 즉사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 탐보라 화산의 폭발로 약 150km2의 화산재가 평류층(平流)으로 분출됐다. 화산재에 함유된 거대한 양의 이산화황 구름은 고반사성 입자와 섞여 대기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햇빛을 전부 반사해버렸다. 이 현상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지구의 기온 하락이 었다. 극심한 기온 하락으로 광합성이 약화되고 수정 난도가 높아지자, 세계 각국의 농업기반이 크게 흔들렸다. 탐보라 화산이 폭발한 이듬해인 1816년에 화산으로 인한 기온 하락 효과가 명확하게 드러났고, 북반구 대부분의 나라에 여름이 오지 않았다.그래서 1816년을 '여름 없는 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해, 흉년이 전 세계를 휩쓸었고, 미국의 전(前) 대통령과 중국 윈난의 농부들은 약속이나 한 듯 심각한 곤경에 빠졌다. 윈난 지역의 농민들은 1816년의 흉년에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윈난성의 주요 작물이 벼였는데, 기온과 벼의 성장은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 윈난은 위도는 낮지만 해발고도는 높다.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 1,500m 이상인 고지대라 사계절 기온 변화가 심하지 않고, 겨 울도 북방처럼 춥지 않다. 여름에도 찌는 듯한 더위가 없다. 상대적 으로 안정된 이러한 기온에서 벼가 잘 자라려면 8월 평균 기온이 18°C를 밑돌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쌀알을 맺지 못한다. 충분한 햇빛도 매우 중요하다. 쌀알의 크기와 질량은 광합성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1816년에 탐보라 화산 폭발은 기온을 낮 췄을 뿐만 아니라 햇볕도 앗아갔다. 윈난의 8월 평균 기온은 이상할 정도로 낮았고 한여름에 서리가 내려 윈난 사람들은 평생 처음으로 눈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 결과 현지 벼농사는 그야말로 재앙과 같 은 흉작이었다. | 윈난 사람들은 벼 대신 다른 특정 작물을 심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식량 결핍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는 대재앙의 도화선이었다. 이 특수한 작물은 중국 고난의 근대사에서 매우 불미스러운 역할을 맡았고, 청나라 붕괴에도 한몫했다. 그것은 바로 양귀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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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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