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라투스트라는 (천지창조부터 최후의 심판까지의) 시간을 직선적으로 파악했고 극단적인 선악 이원론을 펼쳤다. 종교의 세계에서 선악 이원론 은 이 세상을 설명할 때에 강한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다. 가령 이 세상을 정의의 신 한 명이 창조했다면 전 세계에 정의가 충만할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악한 군주도 살인귀도 존재하지 않는다. 청렴하고 바르게 살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런데 왜 인생에는 고통이 존재하고 삶이 이렇게나 고달플까. 만약 신이 있다면 고통스러운 삶에서 우리를 구원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인간을 고된 삶으로부터 구원하지 않는 신을 의심하고 고뇌할 수밖에 없다.
- 작가인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沈默)은 가톨릭 신자를 박해하던 일본에 숨어든 포르투갈인 사제가 일본인 신자에게 가해지는 고문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배교자의 길로 들어선다는 줄거리를 다룬다. 왜 신은 우리 를 구원해주지 않을까. 일신교를 믿는 인간은 현세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침묵』은 이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반대로, 일신교가 지 닌 모순(전능한 신이 왜 현세의 고통을 해결해주지 못할까)이 인간의 사고를 깊게 만든다는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그 근거로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후세 철학자들이 이 문제에 진지하게 매달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선악이원론의 교리는 현세의 고통과 내세와의 관계를 시간축이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 수 있다.
- 조로아스터교는 최고신으로서 아후라 마즈다가 존재하여 얼핏 일신교처럼 보이지만, 선한 신과 악한 신 그리고 다채로운 신들이 존재한다는 점 에서 다신교적인 측면도 있다.페르시아에서 탄생하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 종교로부터 가장 많은 교리를 흡수한 종교는 고대 셈족의 일신교이다. 노아의 세 아들(셈, 함, 야벳) 중에서 셈이 선조라고 전해지는 사람들을 셈족이라고 부른다. 셈족은 서남 아시아(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역사에 등장하는 사람들로, 그들에게서 탄생한 종교의 형태가 일신교이다. 구체적으로는 유 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가리킨다.
- 셈족의 일부가 믿던 유일신 야훼(YHWH)가 인류를 구원하는 예언자로 선택한 인물이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인물로,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 세계에서 “신앙의 아버지”로 존경받는다. 그래서 셈족의 일신교는 “아브라함의 종교”라고도 부른다. 셈족의 일신교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도, 천국과 지옥도, 세례 의식도 모두 조로아스터교로부터 배웠다. 현대 사회에 영향을 미친 종교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셈족의 일신교, 인도 종교 그리고 동아시아 종교이다. 
- 19세기 후반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ustra)라는 책을 썼다. 니체 철학의 중대한 명제인 “영원 회귀, 사상을 이야기한 책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라투스트라를 독일식으 로 읽은 이름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은 자라투스트라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 니체는 선악 이원론의 원조 격인 고명한 자라투스트라의 이름을 빌려 자 신의 사상을 펼쳤다. 물론 니체가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베스타를 공부하고 영감에 가까운 무엇인가를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니체가 주장하는 “영원 회귀 철학은 자라투스트라보다는 오히려 인도 브라만교의 경전 리그베다(Rigveda)』(신에게 바치는 찬가) 등을 참고했을 공산이 크다. 리그베다는 인도 선주민의 윤회전생 사상을 포함 하기 때문이다. 윤회전생 사상은 시간이 순환한다는 발상으로, 시간도 사람의 생명도 영원히 돌고 돈다고 믿는 신앙이다. 그야말로 “영원 회귀”에 가까운 개념이다.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조로아스터교는 무관하다고 생각해도 된다.
- 서양 철학을 공부하는 데에는 소크라테스 이전과 소크라테스 이후로 나누는 사고방식이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 F. M. 콘퍼드의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Before and After Socrates)」가 대표적인 문헌이다. 다만,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라는 분류법은 단순한 시대 전후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데모크리토스는 소크라테스보다 젊었고, 우주는 4원소(불, 공기, 물, 흙)로 구성된다고 주장한 엠페도클레스 는 소크라테스보다 20세가량 나이가 많았다. 그렇다면 왜 굳이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로 분류하려고 했을까?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철학 주제의 차이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고 당시 아테네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차지했던 특별한 지위와도 연관이 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대항하며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했다. 쉽게 말해서 아테네는 미국의 뉴욕 같은 대도시로 당시 그리스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이오니아의 자연 철학자들은 본래 지방 사람들이었다. 이오니아는 오늘날 아나톨리아 반도(터키)의 지명이었다. 반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아테네 출신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태생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시대부터 철학은 아테네의 전유물이 되었고 본격 적으로 발전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쉽게 말해서 서울 사람들이 서울이 아닌 지방을 모두 시골로 취급하는 발상이 이미 그 시대에도 존재했던 셈이다. 아테네라는 선진 문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탈레스 이후로 만물의 근원을 찾으려는 철학 자들을 아테네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하대하고 차별했다는 비판이 등장했다. 현대 철학계에서는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라는 구분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 하는 학자들이 학계에서 다수를 차지하 게 되면서 “단순하게 초기 철학자들이라 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 소크라테스에서 시작한 철학의 큰 특징은 도대체 무엇일까? 세계는 어떤 구조로 생겼을까 하며 외부 세계의 탐구에 열을 올렸던 이오니아 학파와 달리,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내면에 초 점을 맞추고 사색의 두레박을 내려 생각을 길어 올리려고 했다. 세계는 어떻게 생겨났을까를 묻는 사람에게 소크라테스는 거꾸로 물 었다. “세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생각하는 그대는 자신에 관해서 무엇 을 아는가. 인간은 무엇을 아는가.” 소크라테스는 이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졌고 대화를 통해서 깊이 사유하며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 영국의 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1861-1947)는 플라톤의 업적에 관해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서양의 모든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 에 불과하다.” 이 말은 수많은 철학적 주제들이 플라톤이 남긴 문헌 속에 거의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서양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사람의 눈앞에는 플라톤이 남긴 산더미 같은 문헌이 가장 먼저 들어온다. 달리 말하면, 플라톤의 저작이 남아 있는 덕분에 우리가 아는 서양 철학 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사에 이름을 남긴 플라톤은 행운을 타 고났다. 어느 시대에 살았든 대학자의 업적이 남아서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세에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 예컨대 중국에는 공자보다 약간 늦게 등장 한 목자라는 대사상가가 있다. 그는 공자에 대해서 비판적인 논리를 전개 하여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교단은 묵자의 사망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뿔뿔이 흩어졌고, 그의 저서도 상당수 사라졌다. 나는 화이트헤드의 말을 생각할 때마다 묵자의 불운을 떠올리고는 한다.
- 학원을 떠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를 걷어차 고 떠났다. 마치 망아지가 낳아준 어미에게 발길질하듯.”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스승으로 모셨으나, 플라톤의 철학을 모 조리 긍정하지는 않았다고 추정된다. 이 사제 간의 철학의 차이를 『철학 키워드 사전(哲?手一口一事典)』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해설이 실 려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린 세계상은 플라톤과 달리 동적이며 아주 넓은 의미에서 생물주의적이다. 플라톤의 세계상은 현실의 개별 사물로 이루어진 세계로서, 영원히 불변하는 이데아 세계의 모방이기 때문에 원리적으로는 그의 세계상에 변화가 없다.” 즉, 플라톤의 이데아는 개념상의 직감이다. 논리로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논증하지 않는다. “세계에는 이데아가 있다”고 전제하고 논리를 펼쳐나간다. 역시 동굴의 비유”는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왜 이데아가 존재 하는지는 논증하지 않는다. 신의 세계에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전제로부 터 논리가 시작된다. 플라톤의 철학은 관념론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 는 실증적이며 경험론을 중시한다.
다양한 경험 속에서 진실을 도출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으 로 얻은 결과를 분석하고 이론화하는 과정을 중시했다. 그래서 그는 논리 학을 체계화했다. 가령, 삼단논법이 있다. “A는 B이고, B는 C이다. 고로 C는 A이다.” 대표적인 논리 전개 방법이다.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에게 차마 보여주지 못했던 자 신의 모습을 두고 고뇌했을 수도 있다. 이데아론은 어딘가 모호하다.... 그러나 감히 스승에게 반기를 들 수는 없다. 그래서 자신의 방법론으로 논리학을 다듬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라파엘로의 작품 “아테네 학당”을 살펴보자. 이 그림 속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플라톤은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땅에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합니다. 플라톤, “아니, 하늘을 봐야지. 천상계에 이 데아가 있으니까. 이 세상은 이데아 세계를 모방한 허상일 뿐이다.”
- 전국칠웅 군주는 온난한 기후와 강력한 철제 농기구 및 무기로 국력을 증대했고, 광활한 중국의 황허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쟁을 되풀이했다. 철을 이용하려면 대량의 에너지를 동원하는 제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춘추 시대부터 전국 시대로 이어지는 전란의 시기에 황허 강 유역에 펼쳐 진 드넓은 삼림 지대가 벌채되었다. 이 지역은 강우량이 그다지 많지 않다. 벌채된 삼림은 원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황야가 되었고, 초원도 드문 황토 지대로 변했다. 그러자 상류에 폭우가 쏟아질 때마다 하천이 범람했고, 강풍이 불면 황사가 날리는 지역이 확대되었다. 오늘날 한반도와 일본까지 날아드는 황사는 이 시대 이후로 발생한 것이다. 더 옛날의 황허 강은 지금처럼 누렇고 탁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에서는 고도성장에 동반된 자연 파괴가 진행되었다. 묵자는 이러한 고도성장을 내버려두었을 때에 발생하는 폐해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자세를 취한 철학자였다. 조국의 자연을 파괴하면서까지 나라를 강하게 만들고 조상 숭배를 위해서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일하 는 세상을 비판했다. 서로 배려하고 공격하지 말고 평화롭게 살아라. 그 는 오직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만이 허용된다고 믿었다. 묵자는 인간이 자연스럽게 바라는 행복과 심신의 건강 척도를 부지런히 고찰한 사상가 였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행복 지수를 발상한, 시대를 앞서가는 사상가였다.
-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와 스토아 학파의 “아파테이아” 의 차이 
에피쿠로스는 파토스(격정, 정열, 정념)에서 멀어짐으로써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생활을 행복이라고 규정했다. 반면 스토아 학파는 행복이란 덕을 추구한 결과로 얻을 수 있으며, 파토스에 동요되지 않는 마음(부동심)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그 상태를 아파테이아(apatheia)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서 스토아 학파는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없고, 인생의 덕을 실천해야 이를 수 있는 경지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덕이란 무엇일까?
스토아 학파는 4개의 성질을 가장 큰 덕으로 규정했다. 지혜, 용기, 정 의, 절제이다. 덕을 실천한다는 것은 곧 악덕과 싸운다는 말이다. 악덕이 란 무지, 두려움, 부정, 방종이다. 가장 큰 악덕은 인간이 지켜야 하는 4개 의 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지로 인해서 알지 못하는 상태라고 보았다. 덕을 배우기 위해서 지식을 갈고닦고 앞을 실천하며 살아야 비로소 마 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이 아파테이아이다. 에피쿠로스의 아 타락시아가 “숨어서 살아라”라는 말로 대표된다면, 아파테이아는 그와 정반대 노선에 자리한 사상임을 알 수 있다.
- 로마가 제정 시대로 들어서자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과 스토아 학파 의 철학은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이윽고 스토아 학파의 철학은 로마를 이 끄는 지도자들의 철학으로 자리매김했다. 로마 공화정 말기, 정치인 키케로(기원전 106-기원전 43)는 그리스 철학 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소개했다. 그는 그중에서도 스토아 학파의 철학을 정리했고,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로마의 지체 높은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당당히 살며, 이성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덕을 쌓는 삶의 방식에 적극적으로 매진했다. 스토아 학파의 철학이 민중의 위에 군림하며 사는 지배층에게 적합한 사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전형적인 인물이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 렐리우스(재위 기원후 161-180)이다.
- 유가, 법가, 도가는 중국 사회에 안정을 가져왔다
유가의 사상은 예와 인과 덕을 근간으로 삼는다. 군주는 민중을 사랑하고 임금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충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요컨대 지배자의 철학이 된 사상이다. 유가는 서한의 무제(재위 기원전 141-기원전 87) 시대에 국교 수준의 대우를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스토아 학파의 철학과 공통분모가 있다. 제왕이 되는 자라면 사적인 즐거움을 다소 억누르고서라도 국가의 안정과 민중의 행복을 생각하라는 사상이었다. 한편, 노자와 장자의 사상은 노력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인간은 만물의 절대성을 움직일 수 없다. 그러니 자연에 맡기고 유유자적 살며 마음의 즐거움을 중시하라고 주장했다. 에피쿠로스의 사고방식과 닮은 구석이 있다. 법가 사상도 있었다. 유교를 정치의 이론으로 삼았다면, 실제 정치는 법률에 따라 운영되었다. 중국에서는 상앙이 체계를 세우고 한비자가 완성한 법가 사상을 기축 으로 삼아 진나라의 시황제가 중앙 집권 국가(법에 따른 행정이 이루어지는 법치국가)를 수립한 이후로 2,000년 넘게 밑그림에 변화가 없었다. 정치의 겉모습이 유교에서 공산주의로 간판을 바꿔 달았을 뿐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 민중은 대외적인 정치 이념인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조상을 모 시고 부모를 공경하고 가족을 중시하며 세상의 순리에 맞추어 살아간다. 무법자는 법이 벌한다. 그리고 법가와 유가가 뒤죽박죽 섞여 제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세태에 염증을 느낀 지식 계급은 노장 사상에 몰두한다. 이처럼 제자백가의 사상은 서로 공존할 수 있었고, 중국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각자 구미가 당기는 사상을 계급별로 적절하게 취할 수 있도록 일종의 사상적인 뷔페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처럼 여러 사상들이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며 공존할 수 있었던 중국의 환경은 사회 안정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중국을 체계적으로 다잡은 사상은 법가라는 점이 중요하다. 즉, 일반 민중을 위한 패로 무대 앞에는 유가가, 무대 뒤에는 법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식인을 위해서 도가가 마련되어 있었다.
- 기독교가 미트라교와 이시스교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와 펼친 포교전술 은 멋지게 성공했다. 이들 종교를 믿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애하던 요소가 대부분 포함되어 있는 기독교를 친숙하게 느꼈다. 덕분에 기독교 신자 는 꾸준히 증가했다.  2-3세기 무렵부터 유라시아 대륙에 기후 변화가 시작되며 한랭화 시대가 도래했다. 동쪽의 몽골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대초원 지대의 여러 부 족(유목민)들은 추위를 피해서 대거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러 부족 들이 로마 제국의 국경선을 넘나들며 치안이 악화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 으로 이상기후와 한랭화로 농작물 수확량이 감소했고, 생활이 불안정해 진 사람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러한 사회적 불안 속에서 예수의 말씀을 믿으면 최후의 심판에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민중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이러한 사회 환경의 변화가 기독교세력의 확장에 큰 힘을 보탰다고 볼 수 있다.
- 「고백록」에서 언급된 자유의지 
아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 입교하는 등 이런거런 사상 편적을 거쳐 기독교 신자가 된 북아프리카 태생의 인물이다. 그는 수많은 거각들을 겼는데, 자서전 격인 고백록(Confessiones)은 지금도 널리 읽힌다. 그는 이 책에서 젊은 시절에 한 여성과 긴 동거 생활을 했고 사내아이를 두었다고 고백했다.
「고백록」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논했다는 점에서 철학적으로도 주목받는다. 이 주제는 서양 철학에서 중요한 화두이다. 그는 자유의지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탄생 직후에 에덴 동산에서 신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라는 금단의 과실을 따 먹은 원죄를 범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원죄를 갚지 않으면 자유의지 를 되찾을 수 없다. 속죄하기 위해서는 신의 은총을 얻어야 한다. 기독교 를 믿고 신의 은총을 얻어야 비로소 인간은 자유의지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논리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로 귀의하여 믿음을 얻음으로 써 인생에서 짊어지는 고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 사 고방식은 이윽고 르네상스 시대부터 종교 개혁 시대에 걸쳐 철학과 종교 에서 지치지 않는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주요 논제가 되었다.
- 이슬람교의 큰 특징으로는 기독교나 불교와는 달리 종교인(사제나 승려) 이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이슬람교에는 교회나 사찰을 경영하고 포교와 관혼상제 등을 주관하는 성직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슬람교에서는 채소가게 주인이 성직을 겸업하다가 필요할 때에 전통 의상을 입고 쿠란을 읽으며 의식을 집전하는 사제 역할을 한다. 그 래서 이슬람교에서는 성직자의 생활을 위해서 헌금할 필요가 없다. 모스크라고 부르는 사원과 묘지 등의 시설물은 자치단체나 비영리단체와 유사한 조직이 관리한다. 물론 이슬람교를 공부하는 대학도 존재한다. 그리고 신학자도 존재한다. 그러나 직업 종교인은 없다. 이슬람교 신앙의 중심은 “육신오행(六信五行)”이라는 율법이다. 여섯 가지를 믿고 다섯 가지를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다. 육신, 즉 여섯 가지 믿음은 신, 천사, 경전, 예언자, 내세, 정명(定命)이다. 신은 야훼로, 이슬람의 알라이다. 천사는 무함마드에게 신의 예언을 전했다는 지브릴(가브리엘)이다. 경전은 신의 예언을 기록한 『쿠란이다. 예언자는 무함마드를 가리킨 다. 그리고 내세란 천국과 지옥의 존재에 관한 믿음이다. 정명은 칼뱅의 예정설과 유사하다. 사람의 구원 여부는 신이 미리 결정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정명을 믿는다는 것은 그와 같은 신의 결정을 믿고 산다는 뜻이다. 신자는 이 여섯 가지를 믿어야 할 의무가 있다. 입문 의식은 무척 간단하 다. 알라가 유일한 신이며 무함마드가 최후의 예언자이다”라고 신앙을 고백하면 누구나 신자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이슬람교 신자가 되면 다섯 가지 행동을 실천해야 할 의무가 생긴다. 신앙고백, 예배, 희사, 단식, 순례라는 다섯 가지 행동을 삶의 의무로 준수해야 한다. 신자의 의무 첫째는 신앙고백이고 둘째는 예배이다. 하루에 5번 메카의 카바 신전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 예배를 드린다. 셋째는 희사이다. 돈이 있는 신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라는 가르침이다. 넷째 는 단식(라마단)이다. 이슬람력 9월이 단식 기간이다. 그리고 다섯째가 순 례이다. 가능하면 평생에 한 번은 무함마드가 태어난 성지 메카의 카바 신 전으로 순례를 다녀오라는 가르침이다. 하루에 5번이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의무는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인간 뇌의 집중력은 2시간 남짓밖에 유지되지 않는다. 뇌과학적 관점에서 5번의 예배를 일종의 기분전환으로 본다면 의외로 합리적인 가르침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육신오행은 누구나 지킬 수 있는 수준이라고 여겨진다. 다만 질병 등의 이유로 단식을 버티기 힘든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단식은 건강 측면에서는 도움이 되는 수행이다. 직업 사제나 승려가 존재하지 않는 이슬람교에서는 신자들이 지키기 쉽고 실천하기 쉬운 육신오행을 각자 주체적으로 준수함으로써, 자립할 수 있는 강인함이 생겨나는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 무함마드는 남존여비가 일반적이던 시대에 여성의 재산권을 인정했다. 동등하지는 않았고 남성의 절반 수준이었으나 당시 유럽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었다. 『쿠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남녀평등에 가까운 발상이 많다. 여성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사상은 결코 아니다. 여 성이 머리카락을 가리는 히잡을 착용하는 것은 차별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히잡을 단순하게 관습의 발전이라고 보면 넥타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사막이 많고 건조한 중동 및 근동에서는 히잡이 뜨거운 열기로부터 머리를 보호하는 합리적인 복장이었다. 남성도 터번처럼 생긴 케피예라는 두건을 머리에 쓴다.
- 2018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최초로 여성에게 자동차 운전이 허용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여성의 사회 진출 이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교 중에 서도 와하브파라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특수한 국가임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 등 무슬림 인구가 많은 나라들에서는 여성이 활발하게 사회에 진출하여 일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이 네 나라는 모두 여성 대통령과 총리를 배출했다.
모세의 가르침도, 예수의 가르침도, 붓다의 가르침도 그들이 살던 시대에 사람들에게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며 받아들여졌다. 그 시대의 가르침에 현대의 도덕적 잣대를 적용하며 비판하는 태도는 무책임하다. 그들이 생 각한 진리에 항구적인 인류애로 이어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세계 종교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마땅히 인식해야 한다.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이슬람교는 여성 경시와 지하드에 관해서 편견이 생기기 쉽다.
- 12세기 르네상스
이슬람 세계에서 그리스 로마 고전이 유럽으로 귀향한 시대를 12세기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20세기의 역사학자 찰스 호머 해스킨스 (1870-1937)가 붙인 이름이다. 이 시대에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 부활과 함께 학문과 신학이 크게 발전했는데, 이슬람(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서유럽 에서는 기사도 문화가 발전하며 기사도 문학이 탄생했다. 아서 왕 이야기(Arthurian Legend)』나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 등 우리도 잘 아는 이야기이다. 또 하늘을 찌를 듯이 아찔하게 솟은 고딕 양식 건축이 발달하여, 파리 노트르담 성당으로 대표되는 대성당들이 줄줄이 지어졌다.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는 신앙도 이 시대에 발전했다. 이 시대는 지구 온난화가 진행되어 농사가 활발해졌고, 삼포식 농법처 럼 새로운 농사기술이 등장하여 경작지를 개발했으며, 시토회처럼 적극 적으로 농지 개간 운동을 추진하는 종교 집단도 등장하여 생산력이 향상 되었다. 생산력 향상은 곧 문화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14세기에 마침내 찾아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큰 물결로 이어지는 첫 번째 물결이 바로 12세기 르네상스였다.
- 르네상스(renaissance)는 프랑스어로 “재생”이라는 의미이다. 무엇이 르네 상스를 일으킨 원동력일까? 이슬람 세계를 거쳐 대량으로 유럽에 들어온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이 시발점이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책이라고 는 성서와 기독교 관련 서적밖에 없던 유럽에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과 문 학, 그리고 자유로운 학예(liberal arts)라고 불린 문법, 논리학, 수사학, 수학, 기하학, 천문, 음악 등의 서적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1347년, 남이탈리아에 상륙한 페스트도 르네상스를 촉발한 큰 원동력이 되었다. 흑사병이라고 불린 이 역병은 몇 년 사이에 북유럽과 동유럽까지 번져나갔고, 이로 인해서 유럽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이 사망했다. 맹위를 떨친 페스트에 화들짝 놀란 사람들은 삶과 죽음에 관해서 어떤 관 점을 가지게 되었을까? 우선,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로 대표되는 사고방식이 등장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는 덧없는 인생이기 때문에 경건 하게 살고자 하는 삶의 방식이다. 요컨대, 인생을 신에게 맡기는 사고방식이다. 이와 상반되는 새로운 삶의 방식도 등장했다. 언제 페스트에 희생될지 모른다. 게다가 페스트에 걸려도 신이 도와주지 않는다. 그러니 차라리 한 세상 즐겁게 살다가 떠나겠다는 사고방식이다. 신의 손길에 자신의 인생 을 맡기지 않고, 신에게서 해방된 삶을 추구하는 인생관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직역하면 “현재를 잡아라” 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사는 순 간을 즐기라는 말도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데카메론(Decameron)』은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집필된 책이다. 저자는 단테를 이해 하고 지지했던 이탈리아의 조반니 보카치오(1313-1375)였다. 이 책에는 신 에 대한 두려움이나 신을 경애하는 태도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신에 의지하지 말라, 신의 손바닥 위에서만 인생을 살지 말고 벗어나라. 페스트라는 참혹한 역병의 유행은 그리스 로마 고전을 부활시키는 동시에 인간이 신과 인생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하고 르네상스의 물결을 불러오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
- 토마스 아퀴나스 시대에 스콜라 철학은 신앙 우위의 세계관을 확립했다. 스콜라 철학의 논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활용하여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이렇게 신을 정점으로 하는 세계의 질서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 질서는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의 큰 파도가 덮치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매사를 합리적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는 지성의 중요성을 인간 이 자각했기 때문이다. 루터와 칼뱅이 제기한 문제도 합리적인 사고를 바 탕으로 성립되었다.
신앙 우위의 세계에서 합리성과 자연과학의 세계로 넘어가는 시대가 발을 내디디며 근대의 막이 올랐다. 그 선두에 선 사상가가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이었다. 그는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와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와 동시대 사람이다. 갈릴레오와 케플러는 “지동설을 뒷받침한 과학자들이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 자체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세계관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것이었다. 인간이 신이 만든 세계 질서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으며 유럽에서는 철학과 자연과학의 세계에 합리성의 성과가 실현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의미에서 “지구가 움직였던 시대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방법서설은 인간이 자신의 의식을 높이는 인식 방법도 다루었다. 이 인식의 방법은 무척 이해하기 쉬워서 현재에도 충분히 통용된다. 베이컨 이 생각한 인간의 네 가지 우상도 우리의 사고 방법에 경종을 울렸으나, 데카르트의 방법론이 좀더 명쾌하다.
* 명증 : 그것이 진리임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를 먼저 찾아라.
* 분석 : 수집한 증거를 세부까지 꼼꼼하게 분석한다. 세부 사항까지 샅샅이 검토하라.
* 종합 : 세부까지 검토했다고 끝내지 않는다. 종합해서 전체적으로 검증하라.
* 음미 : 마지막으로 음미하라. 빠진 곳은 없는가. 못 보고 놓치거나 잘못 본 곳은 없는가.
-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
미네르바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혜와 예술의 여신이다(그리스 신화에서 의 아테네 여신), 사람들은 그녀가 데리고 다니는 부엉이를 지혜의 상징으 로 여겼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 라는 수수께끼 같은 문구는 헤겔의 저서 『법철학(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의 서문에 등장한다.
“부엉이가 뉘엿뉘엿 해가 지는 해거름에 활동을 시작하듯이, 지혜의 화 신인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하나의 사건과 역사가 혼란해져서 암흑에 이 르렀을 때에 인간에게 진실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날아오른다.”
이 문구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헤겔이 말한 황혼은 무엇일 까? 프랑스 혁명이 초래한 유럽의 시대적인 혼란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주 장도 있다. “해가 지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이 찾아오기 전의 어슴푸레한 상태인 유럽에 헤겔의 변증법 이론이 미네르바의 부엉이 역할을 한다”고 암시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헤겔은 프랑스 혁명 전후로 일어난 변혁의 이유를 열심히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 과정에서 진보적 역사관에 이르지 않았을까. 대립하던 가치가 하나로 합쳐지며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설명하면, 다소 투박하더 라도 크게 틀리지 않은 생각이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헤겔의 발상 은 말 그대로 '황혼에 날아오르는 부엉이”로서의 역할을 혼란한 시대에 다했다고 볼 수 있다.
- "초인과 “힘에 대한 의지, 니체의 강한 실존주의 
시간도, 역사도 진보하지 않는다. 운명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인생 길을 묵묵히 성실하게 걸어가는 사람. 그 강인한 인간을 니체는 “초인(超人)”이 라고 불렀다. 니체는 인간이 강인하게 살아갈 때에 무엇을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삼아야 하는지를 생각하여 이를 힘에 대한 의지라고 결론 내렸다. 강하고 멋지게 살고 싶다는 태도이다. 키르케고르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도 어차피 허무하며, 개인은 단독자라고 생각했고 최후에는 신에게 의지했다. 신을 믿으며 살면 마음은 평안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시간도 역사도 진보하지 않는다면 의지할 곳은 오직 자신밖에 없다고 보았다. 신도 없고 진보도 없다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초인이며, 그 힘에 대한 의지로 세상이 움직인다고 니체는 생각했다. 키르케고르의 종교적 실존주의와 비교하면, 니체는 더욱 강하게 인생을 긍정하는 실존주의를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니체의 “초인 사상은 헬레니즘 시대의 스토아 학파의 철학과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페니키아인 제논에게서 시작된 스토아 학파는 요동치 는 감정(파토스)을 이성(로고스)으로 제어하고 마음의 평안(아파테이아)을 얻으라고 가르쳤다. 운명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덕을 추구하며 사는 인 생이 이상적이라는 철학 사조이다. 로마 제국의 황제와 귀족들은 스토아 학파의 가르침에 깊이 공감했다.  니체와 스토아 학파의 공통점을 생각해보면, 인간의 생각이 거기서 거기이며, 유행이 돌고 돌듯 인간의 사고 역시 반복된다는 생각이 든다. 전율을 느낄 정도로 참신한 사상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인간은 우리의 생각보다 현명하지 않다.
- 니체는 기독교가 인간의 르상티망을 교묘하게 이용했다고 비판했다.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는 프랑스어가 있다. 사전에는 “원한, 증오, 질투 따위의 감정이 되풀이되어 마음속에 쌓인 상태”라는 설명이 실려 있다. 주로 약자가 강자에게 품는 감정으로, 민중이 군주 또는 제후에게 가지는 원한이나 질투를 말한다. 몇 명의 철학자들이 이 단어를 사용했는데, 주로 키르케고르가 철학상의 개념으로 사용했고, 니체가 받아 대담하게 이용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는데, 뼈 빠지게 일해도 가난한 살림살이가 도통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사람에게 기독교는 말했 다. “가난한 사람이 천국에 간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그러니 부자에게 신경 쓰지 말라. 그들은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라. 천국으로 가는 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다.”
이는 니체가 말하는 “노예 도덕과 같다. 기독교는 지배층과 부유층의 압제 정치에 허덕이는 빈곤층이 품고 있는 르상티망을 교묘하게 이용하 여, 천국을 미끼로 내보이는 형태로 가난한 사람들을 포섭해서 신자로 만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원래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강인하게 살아가겠다는 마음, 즉 “힘에 대한 의지”를 포기했다. 그들은 운명을 감수하고 신에게 몸을 맡기는 수동적인 허무주의에 빠져들었다. 니체는 그렇게 기독교를 비판했다. 비판이라기보다는 정면충돌이었다. 그러고 보면 마르크스도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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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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