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리석은 사람은 경험에서 배우고,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서 배운다. (비스마르크)
-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왜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을까? 이 질문은 동시에 '왜 고대 그리스와 지중해 세계에서는 그토록 일찍 문명이 탄생했을까?'라는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그 대답 중 하나를 나는 말[馬]' 이라는 동물에서 찾고자 한다. 사실 나는 다른 책에서 “만약 말이 없었다면 21세기는 아직 고대를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라고 쓰기도 했다.
문명의 발상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말의 유무로 문명 발달 속 도가 크게 달라졌다는 주장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세기 를 대표하는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년)도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말을 언급했다.
- 말은 사람과 물자를 더 멀리 더 빠르게 전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 전차와 기마부대로 막강한 무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기도 했다. 한마디로 말은 인간사회가 문명 단계에 접어드는 결정적 견인차 구실을 했다.
이 시점에 이렇게 반문하고 싶은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아 메리카 원주민도 말을 타고 다니지 않았나요?'라고. 그렇지 않다. 이는 미국 서부극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집어넣은 그릇된 정보다. 15세기에 유럽인이 찾아오기 전까지 아메리카 대륙에는 말이 없 었다. 그렇다면 이 대륙에는 원래부터 말이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오래전에는 아메리카 대륙에도 말이 존재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1만 년 전까지만 해도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말이 뛰어노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증거가 있다. 실제로 그곳에서 말 화석이 수없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많은 말이 왜 모두 사라졌을까? 놀랍게도 초기에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사람들이 수천 년간 모조리 잡아먹어 멸종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1. Tolerance : 로마는 '관용'의 힘으로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 로마는 어떻게 번영을 이루었으며 쇠퇴하고 멸망했는가
- “로마인은 갈리아인 (켈트계·게르만계)에게는 체력과 활력에서 뒤 지고 히스파니아인 (이베리아반도인)에게는 머릿수에 밀린다. 그들은 또 에트루리아인에게는 대장장이 기술에서 뒤처지고 그리스인 에게는 학예 능력 면에서 당해낼 수 없다. 그렇다면 로마인은 어떤 점에서 뛰어날까? 바로 '종교적 경건함' 이다.” (키케로)
폴리비오스는 키케로가 언급한 로마인의 종교적 성실성이 개인 의 이익보다 공공의 안녕을 중시하는 국민성을 낳았고 그 정신이 로마를 하나의 강력한 국가를 이루는 근원적 힘이 되었다고 본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적용한 국정 시스템이 국력을 나라 밖으로 쏟을 여지를 마련해준 덕분에 강대한 로마제국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 그리스의 패전 장수는 죽을 때까지 싸우거나 패 배하고 비루하게 목숨을 부지한 경우 다른 나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달리 로마의 패전 장수는 전쟁에서 맛본 쓰라린 치욕을 떨쳐내기 위해 다음 전쟁에서 그야말로 죽을 각오로 싸움에 임했다.
로마인들은 그런 마음에 기대를 걸고 패전 장수에게 기꺼이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주었다. 그런 로마인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기원전 100~44년)를 꼽을 수 있다. 카이사르는 자신도 실패를 딛고 일어선 경험이 있어서인지 부하 장수나 병사들의 실수나 실패를 무조건 질책하지 않고 관대하게 대하며 스스로 만회할 기회를 주고자 항상 노력했다.
로마인이 지닌 '관용'과 '패자 부활전을 허용하는 자세는 로마를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하고 수백 년 동안 패권을 유지하게 해준 근원적인 힘이 되었다. 실제로 로마의 유명한 장수들은 누구나 한 번쯤 쓰라린 패배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보다 더한 굴욕감을 딛고 자신에게 주어진 다음 전쟁을 승리로 이기는 데 크게 공헌했다.
- 사람이 아무리 치욕적인 일을 겪는다고 해도 이후 그가 어떤 자세로 임하고 또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그 치욕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큼 큰 명예를 얻을 수 있다. 이 진리를 잘 아는 로마인은 무슨 일이든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매달렸다. 또 근성과 인내력을 바탕으로 그리스와는 달리 마침내 대제국을 건설했으며 오랫동안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 로마제국에서 관용 정책을 가장 탁월하게 활용한 지도자는 카이사르다. 라틴어에 '클레멘티아 카이사리스(Clementia Caesaris, 카이 사르의 관용)'라는 말이 널리 회자하고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그렇다면 카이사르는 과연 뼛속까지 관용으로 가득 채운 관용의 화신 같은 인물이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카이사르는 본래 매우 입체적인 인물이었지만 '관용'의 측면에 서도 그러했다. 오늘날 누구나 관용 하면 카이사르를 머릿속에 떠올릴 정도로 그는 관용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그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카이 사르가 관용적인 사람인 것은 일면 맞지만 그가 관용을 베푼 대 상은 어디까지나 로마 시민과 로마에 철저히 복종하는 사람뿐이었다. 반대로 그는 로마에 끝까지 맞서고 저항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벌할 때 갈리아인들에게 보인 그의 자 세와 대처는 유명하다. 그는 로마의 목에 칼을 들이댄 갈리아인을 막강한 군사력으로 가차 없이 제압한 뒤 많은 사람을 잔혹하게 처형했다. 이후 갈리아인이 복종의 뜻을 표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백 팔십도 태도를 바꿔 관용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 기원전 427?~3472년)은 인간의 '흥미'와 관련해 유익한 통찰을 남겼다. 플라톤은 인간에게 세 종류의 흥미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첫째 '지식', 둘째 '돈벌이’, 셋째 '승리'다. 그는 사람은 대부분 이 세 가지 중 하 나로 움직인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이 주장은 그리스, 카르타고, 로마에 딱 들어맞는다. 실제로 그리스인은 지식, 카르타고인은 돈벌이, 로마인은 승리에 강한 흥미를 보였다. 플라톤이 활동하던 시대에 로마는 아직 작은 도시국가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플라톤이 로마라는 나라의 존재를 알았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런 터라 플라톤이 한 위의 말이 딱히 로마를 두고 한 말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레고 조각을 끼워 맞추듯 그리스인과 카르타고인과 로마인에 적용해보면 신기할 정도로 각 민족의 성향과 잘 맞아떨어진다. 일본 평론가 모리모토 데쓰로(森本哲?)는 『어느 통상국가의 흥망 - 카르타고의 유서」에서 “로마는 미국, 그리스는 유럽, 카르타고는 일본을 닮았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고대 그리스와 유럽은 둘 다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무한한 긍지를 느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며 지식을 얻는 일에 강한 흥미를 보인다는 특징이 있다. 카르타고는 비교적 작은 영토를 가진 나라지만 당대 무역을 독 점하던 경제 대국이었다. 제2차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에 패배한 후 카르타고는 군사력을 상실했으나 경제 부흥을 통해 다시 나라를 일으켰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이 경제력으로 국력을 회복한 모습과 절묘하게 겹친다. 카르타고인과 일본인은 모두 돈벌이에 매우 관심이 많은 민족이다.
- “내일 죽을 것처럼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워라."
Live as if you were to die tomorrow. Learn as if you were to live forever. (간디)

2. Simultaneity : '동시대성'이 역사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다. - 한제국과 로마제국, 공자와 소크라테스, 석가모니와 조로아스터의 탄생
- 3세기 거의 동시에 찾아온 절체절명의 위기를 로마제국은 위태위태하게 넘어간 반면 한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두 나라의 결말이 일란성 쌍둥이처럼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같은 해에 등장한 동양과 서양의 세계제국이 거의 같은 시기에 존망의 기로를 맞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흥미롭고 주목할 만한 '역사의 동시대성'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 기원전 1000년대에도 흥미로운 '동시대성'이 존재했다. 바로 '사상'의 탄생이다. 당시 문명 선진지역인 그 리스, 오리엔트, 인도, 중국 등지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우후죽순 사상과 철학이 태동했다.
먼저, 그리스에서는 호메로스부터 이오니아 철학을 거쳐 소크 라테스와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그리스철학이 탄생했다. 오리엔 트에서는 예레미야 등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예언자가 나 타났다. 오늘날 이란 부근에서는 배화교의 시조 조로아스터가 태 어났다.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 철학이 출현했고 뒤이어 불교  창시자 고타마 싯다르타가 탄생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공자, 노자 를 필두로 '제자백가'라고 부를 정도로 무수히 많은 사상가가 등장했다.
- 물론 이들 사이에는 200~300년의 시간 차이가 있지만 오늘날 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상과 철학이 왜 이 시기에 일제히 꽃을 피웠는지는 아직도 역사학의 수수께끼의 하나로 남아 있다.
이 시기에 특별히 주목한 철학자가 있다. 20세기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다. 그는 이 시대를 축의 시대 (Achsenzeit)'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이 시기에 꽃피운 사상이 모두 이후 인류 사상의 근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 나는 동시대에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사상가가 출현한 이 현상 을 기원전 2000년대에 일어난 문자, 일신교, 화폐 등의 탄생과 별 개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간소화한 문자가 널리 보급 되면서 민중 사이에 읽고 쓸 줄 아는 지식계급이 탄생했으리라는 점은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또 화폐 탄생이 교역을 활발하게 만들어 사람들이 더 광범위한 정보를 얻게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으리라고 본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일신교가 등장한 배경에는 신들 사이에 위계질서가 생겨나 인간의 사상과 가치관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한데 초월 신 개념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친숙하게 느끼던 신의 세계와 다소 멀어지게 만들지 않았을까? 아 무튼 사람들은 기존 신을 대체할 새로운 삶의 길라잡이를 찾아야 했다. 광범위한 곳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다양한 정보를 비교하고 융합하다 보면 새로운 관점과 사상이 생겨난다. 그것을 문자로 기록 할 경우 더 먼 지역 사람들과 후대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현대 역사학은 알파벳과 일신교 등장, 화폐 탄생을 각각 별개의 사건으로 취급해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나는 이들 사건이 모두 당시 인간의 사고방식에서 같은 부분에 뿌리를 내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원전 2000년대 후반부터 일어난 간소화 움직임 덕분에 '축의 시대'가 올 수 있었다고 본다.

3. Deficiency : ‘결핍(건조화)'이 문명을 탄생시켰다.- 문명 태동부터 도시국가를 거쳐 민주정 탄생에 이르기까지
-  '왜 유독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다른 나라,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 질문에 기존과 달리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한 사람이 있다. 미국 역사학자 케네스 포메란츠(Kenneth Pomeranz)가 바로 그다. 그는 『대분기(The Great Divergence ? 중국과 유럽 그리고 근대세계 경제의 형성)』에서 각 지역의 생태환경 차이에 주목했다.
이 연구는 일종의 최신 지정학 연구로 보아도 좋을 만큼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영국은 다른 지역에 없는 행운을 누렸고 그 덕분에 산업혁명에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런던 등 일정 수준의 인구가 밀집한 지역 근처에 에너지 원인 양질의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에너지 자원 획득이 행운의 실체라는 얘기다. 세계는 인구 증가와 함께 에너지 자원인 목재가 부족해졌다. 산 업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이다. 18세기 이후 수백 년간 영국과 중국의 공업지대인 양쯔강 삼각주 지역의 연료용 목재 가격은 일곱 배나 폭등했다. 이처럼 전 세계가 에너지 부족에 시달리던 중 영국은 목재를 대신할 에너지원으로 석탄을 이용할 수 있었다. 새로운 에너지원을 획득한 영국은 생산성이 높아졌다. 사람들 의 생활 수준은 점점 좋아졌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인구 과잉 현상 이 일어났다. 자원이 있다고 물건을 너무 많이 생산하면 문제가 불거지게 마련이라는 것이 그 시절 사회적 인식이기도 했다.
바로 그 시점에 행운의 여신은 또 한 번 영국을 향해 미소 지었 다. 사실 영국은 멀리 떨어진 곳에 식민지를 두고 있었다. 그때까 지 영국은 잉여생산물 처리 시장 측면에서만 식민지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국의 남아도는 인구를 식민지로 내보냈을 때 얻는 이득도 상당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국은 공업지역 근교에 있는 석탄을 에너지원으로 확보했고 광대한 식민지 덕분에 거대한 시장을 개척했다. 또 토지에 예속되어 있던 인구 부양력이라는 제약에서 풀려나 인구가 급증하면서도 일인당 소비량이 상승하는 기적이 발생했는데 바로 이것이 산업혁명을 촉발했다. 산업혁명 하면 가장 먼저 증기기관 발명에 따른 동력 쇄신이 동서의 명암을 갈라놓았다' 라는 말이 나온다. 사실 증기의 열을 기 계 작동 에너지로 활용하는 기술은 고대 지중해 세계의 사람들이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로마제국에서조차 산업 근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생태환경이 기술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것도 그래서다.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은 이처럼 축복받은 생태환경에서 착실하게 성장했지만 아시아는 산업혁명을 일으킬 힘이 있으면서도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지 못해 저 멀리 뒤처졌다. 그렇게 한 번 뒤처진 간격을 따라잡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 19세기 제국주의 시 대로 접어들었고 격차는 더 많이 벌어졌다. 만약 산업혁명이 로마제국이나 한제국 시절에 일어났다면 이 정도로 큰 격차가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령 100년의 격차 가 있었더라도 양 제국은 제각각 세계제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 하지만 18세기에 벌어진 50년 정도의 격차는 결정적이고도 치명적인 차이를 만들어냈다. 비교사 관점에서 아시아는 아직도 그 시절에 벌어진 격차를 완전히 따라잡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가 령 '국제화'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미국과 영국의 영어권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국제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영어권 국가가 줄지어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면서 그들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국제화 환 경을 만든 결과다.
케네스 포메란츠는 자신의 책에 '대분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는 산업혁명을 불러일으킨 약간의 생태환경 차이가 그야말로 서유럽과 동아시아의 이후 명암을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분기점이 되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 대규모 건조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이 물가 로 몰려든 일이 어떻게 문명 태동으로 이어진 걸까?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겨낸 땅속 식물 뿌리나 씨앗이 봄에 새싹을 틔우고 나무 를 키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과 비슷한 이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건조화'와 '물 부족'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맞닥뜨린 인류는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지혜를 짜내야 했을 것이다. 살아남 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했을 것이다. 현실에 순응하 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맞서야 했을 것이다. 그런 역동적인 과정에 그 시대의 인간들은 좀 더 영리해지고 유능해졌을 것이다. 새로운 도구를 개발하고 기술을 발전시키고 마침내 찬란 한 문명을 이룩했을 것이다. 마치 식물이 겨울이라는 역경을 이겨 내고 이듬해에 싱싱한 새싹을 틔우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듯 말이 다. 이렇듯 문명이 태동하고 성장하는 원리도 자연의 이치와 맥을 같이한다.
지구가 건조화해가는 열악한 환경에서 인류는 어떻게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이룩했을까? 잠시 이 점을 살펴보자. 먼저 생존을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소인 '물(강)'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크고 작은 마을이 만들어지고 그 마을 들이 통합되며 차츰 도시라고 부를만한 규모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 마을과 마을, 집단과 집단 사이에 물을 둘러싸고 하루가 멀다고 분쟁이 벌어졌다. 도시나 국가의 통치자는 이런 물 분쟁 문제를 무 엇보다 우선적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 필요에 따라 물 분쟁을 방지하는 '물 사용 시스템'이 개발되고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통치 자와 지배 계층은 이런 사실을 후세에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 이고 기록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문자가 탄생했을 것이다.
실제로 고대 기록을 살펴보면 거래기록 등 실무적인 기록이 꽤 많이 발견된다. 위에 언급한 대로 문자는 필요에 따라 생겨난 것이 므로 '왜 필요했는지' 파악하려면 당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기록했는지 확인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4. Huge Migration : '대이동’ 하며 세계지도를 다시 그린 민족들 - 게르만족 · 몽골제국의 드라마틱한 역사, 대교역시대부터 난민 문제까지
- "내 자손들이 비단옷을 입고 벽돌 집에 사는 날 내 제국은 멸망할 것이다.” (칭기즈칸)
- 4세기 무렵부터 게르만족은 엄청난 규모로 무리 지어 서로마제 국 영토로 물밀듯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왜 갑자기 로마제국 영토 를 침범하기 시작했을까? 아시아에 살던 기마민족인 훈족이 서쪽 으로 옮겨옴에 따라 오랫동안 살아온 삶의 터전을 버리고 좀 더 서 쪽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이렇게 일어난 대규모 이동이 바로 '게르만족 대이동'이다.
전 세계적으로 한랭화가 일어나면 서쪽으로 이동해도 무슨 차 이가 있을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유럽에서도 서유럽은 멕시코 난류가 흐르는 덕분에 기후가 대체로 온난하다. 그때까지 게르만족 유입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무심히 관망하던 로마는 물밀 듯 밀려오는 이주 행렬을 더는 팔짱 낀 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다른 민족이 소규모로 들어올 때는 별 무리가 없다. 그러나 임 계점을 지나 허용치를 넘어설 지경이 되면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 작한다. 정착 세력과 이주 세력 사이에 갈등과 알력이 발생하기 마 련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유럽의 난민 문 제를 보면 어느 정도 실감이 날 것이다.
로마에서는 오늘날의 유럽 난민 문제와 비슷한 문제가 훨씬 큰 규모로 빈번히 일어났다. 평소에는 사소한 다툼으로 끝나던 일도 사람이 많아지면 자칫 폭동으로 발전하기 쉽다. 로마는 더 심각한 문제로 번지는 걸 막기 위해 진압에 나서야 했다. 이런 식으로 폭동과 진압이 반복되면서 잔 매에 장사 없듯 로마의 국력은 차츰 쇠약해져 갔다.

5. Monotheism : 유일신교는 왜 항상 분쟁의 씨앗이 되는가 - 세계사를 바꾼 3대 유일신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탄생과 발전
- - 『길가메시 서사시』나 『일리아스』 같은 고대 작품을 보면 오래된 작품일수록 사람들이 직접 신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대인은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 줄리언 제인스는 고대인이 들은 신의 목소리를 양원 정신'이라고 표현했다. 줄리언 제인스는 양원 정신이 좌우 뇌가 각각 만들어내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현대 대뇌생리학 관점에서 우뇌와 좌뇌가 개별적으로 작동한다는 얘기다. 그는 인간이 명 확한 의식을 소유하면서 좌뇌가 발달하고 우뇌는 퇴화해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즉 신의 목소리는 우뇌 의 목소리'인 셈이다. 과학적으로 볼 때 인간의 뇌에서 그 같은 현상이 정말로 일어날 수 있을까? 이 점이 궁금했던 나는 뇌과학자에게 직접 물어보 았다. 그는 지금의 과학으로는 증명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양원 정신’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 - 사실 서구인에게 로마는 지금도 특별한 존재로 남아 있다. 로마는 광대한 지역을 오랫동안 평화롭게 다스린 강대국이었을 뿐 아니라 서구인의 뿌리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는 서구인의 자존심 원천인 동시에 그들의 이상이다. 서구에서는 이 의식을 '로마 이데아(Rom Idee)'라고 일컫는다. 이는 아시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용어다. 굳이 번역하자면 로마적 이념' 또는 '로마적 이상'에 해당한다. 요컨대 기독교 세계의 정신적 지주로서 로마가 서구인 의 정신세계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다는 의미다.  로마제국은 멸망했으나 오늘날까지 서구, 특히 유럽인의 마음 에 이런 생각이 뿌리내려 면면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조금 극단적 으로 말해 유럽인의 마음 밑바탕에는 지금도 로마의 재현, 즉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세계 통합'이라는 의식이 은연중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 이 생각은 역사 속에 반복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면 신성로마제국은 이름부터 로마를 표방했고 프랑스혁명도 로마와 떼 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랑스인이 혁명 후 사용한 관직명 '콘술'은 로마 공화정의 관직명을 그대로 채택한 것이다. 그다지 좋은 예는 아니지만 독일 나치스의 밑바탕에도 로마 이데 아'가 자리하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기독교가 이렇듯 전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지 않 았다면 이슬람교도 이렇게까지 커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로마 이데아를 포함해 두 종교의 야망이 거대한 뱀처럼 꿈 틀대며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에서 세계를 양분하는 두 개의 거 대 종교로 성장했을 수도 있다.

6. Openness : 개방성'이 국가와 시대의 운명을 결정한다. - 왜 아테네나 스파르타가 아닌 로마가 강국이 되었다.
-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족이나 게르만족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못한 로마인이 이들 민족보다 뛰어난 점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개방적인 성향이 아닐까.”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 저자))
- 서양에서는 비록 신분 격차는 있어도 왕은 비교적 가까운 존재였다. 그처럼 친근한 존재였기에 민중은 왕의 행동과 관련해 자신에게 발언권이 있다는 의식을 하고 있었다. 이는 앞서 잠깐 소 개했듯 고대 로마의 시인 플로루스가 5현제 중 한 사람인 하드리아누스를 미주알고주알 험담했다는 이야기로도 잘 알 수 있다. 
- 서양에서는 민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최고 권력자의 권위로 이어졌다. 반대로 동양에서는 민중 앞에서 모습을 감춤으로써 권위를 만들었다. 실제로 서양의 위정자들이 민중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아무튼 거리감을 좁히려는 그들의 노력은 민중이 위정자의 국정 운영과 관련해 발언권을 행사해도 좋다는, 즉 어떤 의미에서는 민주주의적인 사고방식을 함양했다. 이러한 민주주의 토양은 서양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길러온 것이다.
- 로마 황제는 사실 민중과 가까운 존재였다. 로마 황제 중 민중과 가깝게 지내며 친근하게 대한 황제는 의외로 많았다. 폭군으로 알려진 네로는 종종 민중 앞에서 노래를 부른 당대 인기 가수이기도 했다. 로마에서 속주로 파견한 총독 등은 당연히 민중 앞에 자주 얼굴을 보여야 했다. 가장 고귀한 신분인 황제마저 그토록 민중과 가깝게 지냈으니 총독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랴.
- 서양에서는 민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최고 권력자의 권위로 이어졌다. 반대로 동양에서는 민중 앞에서 모습을 감춤으로써 권위를 만들었다. 실제로 서양의 위정자들이 민중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아무튼 거리감을 좁히려는 그들의 노력은 민중이 위정자의 국정 운영과 관련해 발언권을 행사해도 좋다는, 즉 어떤 의미에서는 민주주의적인 사고방식을 함양했다. 이러한 민주주의 토양은 서양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길러온 것이다.

7. Nowness : '현재성'이 사라지면 역사도 사라진다 - 모든 역사가 '현재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 과정이자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 (에드워드 H. 카(역사가. 『역사란 무엇인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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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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