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의 맥주가 언제 양조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기원 전 1만년 전에 맥주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기원전 4000년경에는 근동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의 이라크에 해당하는 지역인 메소포타미아의 그림문자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림에는 커다란 항아리에 갈대로 된 빨대를 꽂아 맥주를 마시는 두 사람이 그려져 있다. (고대 맥주는 표면에 곡물의 입자나 다른 찌꺼기들이 떠 있었기 때문에 부유물을 피해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는 빨대가 필요했다.)
현존하는 인류 최초의 기록물은 기원전 3400년경의 것인데 이들 문 서에도 맥주의 기원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맥주의 등장은 농경의 도입과 맥주의 원료인 곡물의 재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인류의 생활 방식이 유목 생활에서 정착 생활로 전환되었고, 이어 최초의 도시들이 등장하고 사회의 복잡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던 인류 역사의 격변기에 맥주가 등장한 것이다. 맥주는 선사 시대의 유산이며 그 기원은 문명의 기원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 곡물은 처음에는 그렇게 중요한 식재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2가지 놀라운 특성이 발견되면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하나는 곡물을 물에 담그면 발아가 시작되고 단맛을 낸다는 성질이다. 완벽하게 물을 차단하여 방수가 되는 저장 구덩이를 만드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인간이 곡물 저장을 처음으로 시작하자마자 이러한 특성을 바로 발견했을 것으로 보인다. 달콤한 맛이 생기는 원인은 지금은 분명하다. 습기에 찬 곡물은 디아스타제diastase라는 효소를 만들어내고, 그 효소가 전 분을 맥아당麥芽糖, maltose sugar 또는 맥아麥芽, malt로 변환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어느 곡물에서도 발생하지만 특히 보리의 경우 훨씬 많은 디아스타제를 배출하고, 따라서 가장 많은 맥아당을 만들어낸다.) 당분糖分을 섭취할 수 있는 다른 식재가 거의 없었던 당시에 “맥아화 麥芽化, malted"한 곡물이 내는 단맛은 매우 중요했고, 자연스럽게 곡물을 물에 담갔다가 건조시키는 맥아 공법의 기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두 번째의 발견은 더욱 중요했다. 수일간 방치되어 있던 곡물의 옅은 죽에서, 특히 맥아화한 곡물이 들어있었던 경우에는 불가사의한 변화가 발생했다. 죽에서 가벼운 거품이 발생했고 그것을 마시면 기분 좋게 취했다. 즉 공기 중에 있는 천연 효모의 활동에 의해 죽에 함유되 어 있던 당분이 발효되어 죽이 알코올로 변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곡 물의 죽이 맥주로 변한 것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맥주가 인간의 입술을 적신 최초의 알코올이라는 말은 아니다. 맥주가 발견된 당시에도 사람들이 과일이나 꿀을 저장하 려고 했을 때, 과즙 또는 꿀이 물과 섞인 상태에서 우연히 발효가 이루어져 (이는 와인이나 벌꿀 술을 만들기 위한 과정) 소량이지만 알코올이 자연적 으로 생겨났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일은 제철이 지나면 쉽게 부 패하고 야생 꿀은 매우 제한적인 양만 채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5000년경에 최초로 등장하는 도기 없이는 와인이나 벌꿀 술은 오랜 기간 저장할 수 없었다. 반면, 맥주의 원료가 되는 곡물은 풍부했으며 쉽게 저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맥주는 언제든지 필요한 만큼의 양을 확실하게 양조할 수 있었다. 도기가 등장하기 오래전부터 맥주는 역청을 칠한 바구니, 가죽으로 만든 가방, 짐승의 위장, 속이 텅 빈 나무, 커다란 조개 또는 돌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여 양조되었다. 아마존 유역에서는 19세기까지도 요리의 도구로 조개를 사용했고, 핀란드의 전통 맥주인 사티sahti는 지금도 속이 텅 빈 나무를 사용하여 양조되고 있다.
맥주라는 중요한 발견이 있은 후 사람들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맥주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예를 들면, 옅은 죽 형태의 곡물에 맥아가 많고 발효 기간이 길수록 알코올 강한 맥주가 되었다
- 맥아가 많다는 것은 당질이 많다는 것이며, 발효 기간이 길다는 것은 더욱 많은 당질이 알코올로 변환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죽이 끊을 정도로 열을 높이면 맥주의 도수가 강해진다. 맥아 과정에서 보리 안 에 있는 전분의 약 15퍼센트만이 당질로 변환되지만, 맥아화된 보리를 물을 넣고 끓이면 고온에서 활성화되는 다른 전분 당화 효소들이 더욱 많은 전분을 당질로 변환시키고, 이처럼 많은 당질은 발효 과정을 통해 알코올로 변환된다.
- 메소포타미아의 양조자들은 바피르bappir라고 하는 맥주를 만드는 빵beer-bread의 첨가량을 조절함으로써 맥주의 맛과 색깔을 조절했다. 바피르는 발아한 보리를 작은 덩어리로 만들어 2번 구워 만드는데, 어두운 갈색에 이스트를 넣지 않은 단단한 빵으로 몇 년간 보전할 수 있었다. 양조자는 맥주를 만들 때 바피르를 꺼내어 잘게 부수어서 사용 했다. 기록에 따르면 바피르는 마을의 저장 창고에 보관되었고 식량이 부족했을 때에만 바피르를 먹었다고 한다. 따라서 바피르는 식재료라 기보다는 맥주의 원재료를 저장하기 위한 편리한 방법으로 중요한 의 미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맥주를 양조하는 데 빵을 사용하는 메소포타미아의 방법은 고고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쟁을 야기했다. 일부 학자는 빵은 맥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등장한 파생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학자들은 빵 이 먼저 등장했고, 따라서 그 후에 맥주 양조의 한 요소로서 빵이 사용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빵과 맥주가 모두 곡물의 죽에서 파생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걸쭉한 죽은 햇볕 아래에서나 뜨 거운 돌 위에서 구워지면 편편하고 둥근 모양의 빵이 되었고, 맑은 죽은 발효가 되도록 내버려두면 맥주가 되었다. 둘 다 같은 동전의 양면 이었다. 빵은 딱딱한 맥주였고, 맥주는 액체화된 빵이었다.
- 처음부터 맥주는 사회적인 음료로서 중요한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000~2000년 사이에 수메르인이 그린 그림은 두 사람이 빨대를 통해 하나의 항아리에 담긴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당시에 맥주를 마시는 일반적인 모습이었던 것으로 추측된 다. 그러나 수메르 시대에는 곡물이나 찌꺼기 또는 맥주의 다른 불순물을 거르는 것이 가능했고, 또한 도기가 출현하면서 사람들은 각자의 컵을 사용해서 맥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빨대를 사용하여 맥주를 마시는 그림이 매우 넓게 퍼져 있었던 것은 빨대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의식으로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 그 이유는 어쩌면 음료야말로 음식과는 다르게 진정으로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러 사람이 같은 항아리에서 맥주를 마 실 때 그들은 같은 액체를 소비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기의 경우는 잘랐을 때 특정 부위가 다른 부분과 차이가 생기는 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음료를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마신다는 것은 호의와 우정을 표현하는 세계 공통의 상징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 음료를 함께 나눈다는 것은 독이 들어 있지 않고 마셔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제공하는 사람을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의도가 담겨져 있다. 개인적인 컵을 사용하기 이전의 시대에 원시적인 용기에서 양조되었던 초창기의 맥주는 같은 용기에서 함 께 마셔야만 했을 것이다. 오늘날 맥주를 마실 때 손님에게 빨대를 제공하고 커다란 맥주 통에서 빨대를 이용하여 같이 맥주를 마시는 관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차나 커피의 경우에는 같은 포트pot를 이 용하여 와인이나 증류주는 같은 병에 담긴 것을 각자의 글라스에 따라 마시기도 한다. 그리고 사회적인 모임에서 술을 마실 때 잔을 부딪치 며 건배하는 것은 동일한 용기에 들어 있던 동일한 음료를 같이 마심 으로써 서로의 단합과 단결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다. 이런 것들은 고대에서부터 비롯된 전통들이다.
- 고대에는 음료, 특히 알코올음료에는 초자연적인 성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맥주를 마시면 취하게 되고 의식 상태에 변화가 생기는 현상은 불가사의하게 보였다. 동시에 보통의 죽이 맥주로 변화되는 신비로운 발효 과정 역시 불가사의하게 보였다. 그들이 내린 명백한 결론은 맥주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라는 것 이다. 따라서 많은 문명이 어떻게 신이 맥주를 창조했으며, 어떻게 인 간에게 맥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는지에 대한 신화를 가지고 있 는 것은 당연했다. 예를 들어, 이집트인은 맥주는 농업의 신이며 사후 세계의 왕인 오시리스Osiris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것이라고 믿었다. 어느 날 그는 발아한 곡물에 물을 섞어놓고는 잊어버린 채 햇볕에 내버려 두었다. 나중에 돌아왔을 때 곡물이 발효되었고, 그것을 마시고 기분이 너무 즐거워진 오시리스는 그 지식을 인간에게 전해 주었다는 것이다. 
- 맥주는 또한 건강과 더욱 직결되어 있었고, 메소포타미아인과 이집 트인 모두 맥주를 의약용으로 사용했다. 기원전 21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니퍼라는 수메르 도시에서 출토된 설형문자 점토판 에는 맥주를 사용한 약제법 또는 의약 처방 리스트가 기록되어 있었 다. 그것은 알코올을 의약용으로 사용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 다. 이집트에서 맥주는 부드러운 진정제로 인정되었고, 그리고 허브와 향신료 등 여러 의학용 혼합물을 섞는 기본 재료였다. 맥주는 끓는 물 로 만들기 때문에 보통 물보다는 오염이 덜 되며, 다른 혼합 요소들이 맥주 안에서 쉽게 용해된다는 장점이 있다. 기원전 1550년경의 이집트 의 의학 사료인 “에버스 파피루스The Ebers Papyrus" - 보다 오래된 문헌 에 근거를 두고 있긴 하지만 - 는 약초를 이용한 수백 개의 처방전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그들 중 많은 것이 맥주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 면, 양파 반쪽과 거품이 있는 맥주를 혼합하면 변비에 효과가 있다고 했고, 올리브를 분말화해서 맥주와 혼합하면 소화불량을 치료한다고했다. 샤프란 (saffron, 크로커스 꽃으로 만드는 샛노란 가루로 음식에 색을 낼 때 쓴다. 역주)과 맥주를 섞은 것으로 여성의 배를 마사지하면 출산의 진통을 완화한다고 했다.
- 맥주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메소포타미아인과 이집트인의 모든 삶 속에 침투해 있었다. 그들이 맥주를 사랑했다는 것은 필연이라고 볼 수 있다. 복잡한 사회의 등장, 문자로 기록해야 할 필요성, 그리고 맥주의 대중화는 잉여 농산물이 없었다면 가능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 곡물 재배를 위한 최상의 기후 조건을 가졌기에 그곳에서 농경이 시작되었고, 그곳에서 최초의 문명이 탄생했고, 그곳 에서 문자에 의한 기록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맥주가 아주 풍부했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맥주는 홉hops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지만 - 홉은 중세가 되어서야 맥주의 표준적인 요소가 되었다 - 맥주와 관련된 일부 관습들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맥주가 더 이상 노동의 대가로 사용되지 않고, 사람들이 더 이상 “빵과 맥주”라는 말로 인사하지는 않지만, 맥주는 지금도 세계의 많은 지역에 서 여전히 노동자를 위한 중요한 음료로 여겨지고 있다. 맥주를 마시기 전에 건강을 기원하며 건배하는 것은 맥주에 마력과 같은 힘이 있다는 고대인의 믿음의 유산이다. 그리고 친밀하고 편안한 사회적 교류를 위한 맥주의 역할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 그것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음료라는 의미다. 맥주는 문명화의 새벽 이후 석기 시대의 촌락 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연회장에서, 현대의 선술집이나 바에서 사람들 을 함께 어울리게 만들었다.

- 매주처럼 와인의 기원도 선사 시대이지만 상세한 내용은 알수가 없다. 와인의 발명 또는 발견은 너무 고대의 일이어서 단지 신화나 전설을 통한 간접적인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는 와인이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9000년에서 4000년 사이에 현대의 아르메니아와 이란 북부에 해당하는 자그로스 산악지대에서 처음으 로 생산된 것으로 제시된다. 세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이 지역에서 와인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첫째로 야생의 유라시안 포도 품종인 비티스 비니페라 실베스트리스 Vitis vinifera sylvestris가 자생 하고 있었고, 둘째로 곡물 생산이 풍부해서 와인을 만드는 지역사회에 1년 내내 곡물을 식량으로 제공할 수 있었고, 셋째로 기원전 6000년경에 와인을 양조하고, 저장하고, 제공serving할 수 있는 도구인 도기가 발명되었다는 점이다.
- 고대 그리스인에게 있어서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문명' 또는 '세련’과 동의어였다. 어떤 종류의, 그리고 언제 생산된 와인을 마시느냐가 그 사람의 문화적 세련미를 알려주는 지표였다. 맥주보다는 와인을, 보통 와인보다는 좋은 와인을, 연식이 짧은 와인보다는 오래된 와인을 선호했다. 그러나 어떤 와인을 선택하느냐보다도 중요시되었던 것은 와인을 마실 때의 태도였다. 와인을 마실 때 그 사람의 본성이 드러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6세기 때 그리스의 시인이었던 아실루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청동은 외모를 비추는 거울이지만, 와인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 물은 와인을 안전하게 만들지만, 와인 역시 물을 안전한 상태로 바꾸었다. 와인에는 병원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발효 과정에서 생성되는천연 항균물질을 함유하고 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지만 오염된 물을 마시는 위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샘물이나 깊은 우물 또는 수조에 저장된 빗물을 선호했다. 와인으로 상처를 처리하는 것이 물로 씻어내는 것보다 감염의 위험이 적다는 사실 때문에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와인에는 병원균이 없고 항균물질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와인에는 소독이나 정화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본질적으로 심포지엄은 지적 · 사회적 · 성적인 면에서 다양한 형태로 진행될 수 있지만 그 핵심은 쾌락의 추구였다. 그것은 주체할 수 없었던 모든 종류의 열정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분출구였기도 했다. 심포지엄에는 심포지엄을 탄생시켰던 그리스 문화의 최고와 최악 의 요소들이 공존했다. 심포지엄에서 마셨던 물과 와인의 혼합물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비옥한 은유적 토양을 제공했다. 그들은 그러한 조합을 개개의 인간에게나 크게는 사회 안에 혼재하는 선과 악의 공존에 비유했다. 심포지엄에는 참석자들이 절제를 벗어나 위험한 상태로 나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여러 규칙이 존재했고, 따라서 심포지엄은 플라톤을 비롯한 다른 철학자들이 그리스 사회를 바라보는 렌즈 역할을 했다.
- 요약하면, 심포지엄은 인간의 본성을 반영하면서 좋은 면과 나쁜 면 모두를 내포하고 있지만, 플라톤은 적절한 규칙들이 준수된다면 심포지엄의 좋은 면이 나쁜 면을 넘어설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실제로 그가 아테네 교외에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그곳에서 40년 이상 철학을 가 르치고 자신의 작품의 대부분을 저술했을 때 심포지엄은 그에게 교육 방법의 모델을 제공했다. 어느 연대기에 따르면 플라톤은 매일 강의와 토론이 끝나고 나면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셨는데, 이는 “서로 친목을 도모하고, 무엇보다도 배우고 토론한 내용을 반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모임의 주목적은 지적인 측면에서의 재충전이었고, 플라 톤의 지시에 따라 적당한 양의 와인이 제공되었다. 당시의 기록에 따 르면 플라톤과 함께 식사했던 사람들은 다음 날 몸 상태가 아주 상쾌 했다고 했다. 그 모임에는 악대나 댄서들은 없었다. 플라톤은 교양이 있는 사람들은 “질서 있는 방법에 따라 순서대로 말하고, 그리고 듣는 것”을 통해 서로가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플라톤이 시작했던 이러한 모임은 오늘날까지 학문의 세계에 남아 있는데, 참가자들이 순서대로 발표하고 일정한 규칙에 따라 토론하고 논쟁하는 학문적 세미나 또는 심포지엄의 기본적인 형식이 되었다.
- 이전의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로마인 역시 와인을 만민이 즐기는 음료로 생각했다. 카이사르나 노예 모두 똑같이 와인을 마셨다. 그렇 지만 로마인은 와인 감평에 있어서 그리스인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마 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집주인은 자신이 마시는 낮은 수준의 와인을 안 토니우스에게 대접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와인은 부를 상징하고 음용자의 사회적 신분을 드러내면서 사회적 차별의 상징이 되었다. 로마 사회에서 가장 부유한 자들과 가장 가난한 자들의 차이는 와인 잔에 담기는 내용물에 의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로마의 부유층에게 있어서 최고급 와인의 이름을 알고,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은 과시적 소비를 드러내는 중요한 방식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최고의 와인을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부자이며, 그리고 와인의 종류에 대해 공부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 저급하고 값싼 와인들에는 보존제로서 쓰이거나 또는 부패한 것을 은폐하기 위해 첨가제들이 가미되었다. 예를 들면, 암포라를 봉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역청pitch 을 가끔 보존제로서 와인에 첨가했 고, 그리스인이 그랬던 것처럼 소량의 소금이나 바닷물을 첨가하기도 했다. 서기 1세기의 로마의 농업에 대해서 썼던 콜룸멜라Columella는 그러한 보존제는 조심스럽게 사용하면 와인 맛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 면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남긴 레시피에 따르면 첨가물을 가미해서 더욱 좋은 맛을 낼 수 있다고 했는데, 화이트 와인에 바닷물과 호로파(fenugreek, 장미목 콩과의 한해살이 풀로 높이 약 50cm까지 자란다. 잎은 복엽(겹잎)으로 3장의 작은 잎으로 이루어져 있다-역주, 두산백과 참조)를 넣어 발효시 키면 오늘날의 드라이 셰리(dry sherry, 스페인 남부에서 주로 생산되는 화이트 와인으로 식사하기 전에 마시는 와인으로 알려져 있다. 역주)와 매우 유사한, 강하면서 견과 맛이 나는 와인을 만들 수 있다. 와인에 꿀을 섞은 물섬Mulsum은 1세기 초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에 식전에 마시는 와인으로 인기가 있었고, 장미향이 나는 로자툼rosatum 도 같이 식전주로 즐겨 마셨다. 그러나 허브, 꿀 그리고 다른 첨가물들이 저급하고 질이 낮은 와인의 부족한 부분을 은폐하기 위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일부 로마 인은 여행을 할 때 질이 낮은 와인의 맛을 높이기 위해 허브나 다른 향료를 휴대하기도 했다. 현대의 와인 애주가들은 첨가물을 사용했던 그 리스인이나 로마인의 방법에 대해서 코웃음을 칠 수 있겠지만, 사실 그러한 방법은 평범한 와인을 더욱 풍미 있게 만들기 위해 오크를 사용하는 현대의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 모하메드가 알코올을 금지한 것은 주연 자리에서 두 명의 제자가 충 돌했던 사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예언자가 그러한 사고를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지 알라신에게 거룩한 가르침을 구했을 때 알라신의 답변은 단호했다. “와인과 도박은 (중략) 사탄이 만들어낸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것들을 피하면 번성할 것이다. 사탄은 와인과 도박을 수단으로 해서 너희들 사이에 반목과 증오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너희들은 알라의 존재를 기억하고, 기도를 소홀히 하지 말라. 그것 들을 삼갈 수 있겠는가?” 이 명령을 위반하는 사람에게는 40대의 태형이라는 처벌이 가해졌다. 그러나 무슬림에게 있어 알코올에 대한 금지는 여러 문화적 요소가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이슬람의 부상과 함께 권력의 중심이 지중해 연안의 사람들로부터 아라비아사막의 부족에게로 이동했다. 이들 부족은 바퀴 달린 이동 수단 대신 낙타를, 의자와 테이블 대신 쿠션을 사용했고, 최고의 세련미를 상징했던 와인을 금지 함으로써 이전의 엘리트들, 즉 그리스인과 로마인보다도 자신들이 우 월하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슬림은 기존 문명에 대한 그들의 거부감을 드러냈다. 라이벌 신앙인 기독교에서 와인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무슬림이 와인을 적대시한 이유 중 하나다. 심지어 와인을 의약적 용도로 사용하는 것조차 금지했다. 

- 대부분의 사람은 아쿠아 비태의 매력은 잠재적인 의학적 효과가 아니라 단시간 내에 쉽게 취하게 만드는 힘에 있다고 생각했다. 증류주는 와인이 귀하고 비싼 북부 유럽의 추운 지역에서 특히 인기가 있었다. 맥주를 증류함으로써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가지고 강한 알코올음료를 만드는 것이 처음으로 가능해졌다. 아쿠아 비태를 의미 하는 게일어 (gaelic, 스코틀랜드 켈트어-역주) uisge beatha(발음은 이슈커 바허로 하고, 이슈커는 '물'을, 바허는 '생명'을 뜻한다-역주)는 현대어인 whisky 위스키의 어원이다. 이 새로운 음료는 빠르게 아일랜드인의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다. 어느 연대기 작가는 아일랜드 족장의 아들인 리처드 맥라 네일의 1405년의 죽음에 대해 “생명의 물을 지나치게 많이 마신 후에 죽었는데 그것이 리처드에게는 죽음의 물이 되었다”라고 기록했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아쿠아 비태가 “번트 와인burnt wine, 불타는 와인”으로 불렸고, 독일어로는 Branntwein 브란트바인으로, 영어로는 brandywine 브랜디와인 또는 줄여서 brandy 브랜디라고 번역되었다. 사람 들은 집에서 와인을 증류하기 시작했고 축제일에 그것을 판매하기도 했다. 그러한 관행은 널리 퍼졌고, 또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했기 때문에 독일의 뉴렘베르그에서는 1496년에 그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 영국 해군이 맥주 대신에 그로그를 마셨다는 것은 18세기에 영국이 해상의 지배권을 확립해나가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역할을 했다. 당시 수병들의 사망의 주된 원인 중 하나는 괴혈병이었다. 지금은 비타민 C의 부족이 원인으로 알려진 소모성 질환이다. 괴혈병을 예방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18세기에 여러 번 발견되고 또 잊힌 것인데, 레몬 과 라임주스를 정기적으로 섭취하는 것이다. 1795년에는 그로그에 레 몬이나 라임주스를 넣는 것이 필수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괴혈병의 발병률이 극적으로 낮아지게 되었다. 맥주에는 비타민 C가 함유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맥주에서 그로그로 대체한 것은 영국 수병들을 전 반적으로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주었다. 그 반대는 프랑스 해군이었다. 프랑스는 맥주 대신 와인 4분의 3리터(오늘날의 와인 한 병)를 정기적으로 배급했다. 긴 항해를 하는 경우에는 16분의 3리터의 브랜디로 대체되었다. 와인은 소량의 비타민 C를 포함했지만 브랜디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 해군의 저항력이 강화된 것에 비해 프랑스 해군의 괴혈병에 대한 저항력을 감퇴시키는 효과가 초래되었다. 어느 해군 군의관에 따르면, 괴혈병에 대한 영국 왕실 해군의 저항력은 전투력을 2배로 상승시켰고, 이는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이 프랑스와 스페인에 승리할 수 있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럼이 최초로 발명되었을 때의 시점에서 본다면 이 모든 일은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었다. 럼이 가졌던 최초의 중요성은 증류주, 노예 그리고 설탕이라는 삼각 구도를 형성하면서 통화 수단으로 사용되 었다는 점이다. 럼은 노예를 사는 데 사용되었고, 그 노예를 이용하여 설탕을 생산하고, 설탕 생산의 찌꺼기로 럼을 만들고, 그 럼으로 다시 노예를 매수하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해서 진행되었다. 프랑스의 무역 업자인 장 바보트는 1679년에 아프리카의 서쪽 해안을 방문했을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커다란 변화가 발생했다. 나는 해외에 나갈 때마다 항상 많은 양의 프랑스산 브랜디를 가지고 갔는데, 최근에는 그 수요가 점점 줄었다. 그 이유는 아프리카 서안에서 상당한 양의 증류주와 럼이 판매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721년, 어느 영국 무역 업자의 보고에 의하면 노예를 무역하는 아프리카 해안에서 럼은 “중요한 교역품”이 되었다고 했다. 심지어 럼으로 금도 살 수 있었다. 또 한 럼은 해안의 수용소에서 배까지 노예들을 싣고 운반하는 카누 조정자들과 경비원들에게 배급되던 브랜디의 역할을 넘겨받았다. 브랜디는 설탕과 노예를 대상으로 한 대서양 무역을 촉발하는 역할을 했지만, 럼은 그 무역을 더욱 활성화하고 더욱 커다란 이익을 남겨주었다.
- 일반적으로 각지에서 생산되고 소비되었던 맥주와는 다르게, 그리고 특별한 지역에서 생산되고 무역의 대상이 되었던 와인과도 다르게, 럼은 전 세계로부터 재료, 사람 그리고 기술이 총합된 결과물이었고, 또한 여러 역사적인 힘이 상호 교차하면서 빚어낸 결과물이었다. 폴리네시아가 기원이었던 설탕은 아랍인에 의해 유럽에 소개되었고, 콜럼부스에 의해 아메리카에 전해졌고, 그리고 아프리카의 노예들에 의해 재배되었 다. 설탕의 찌꺼기를 증류해 만든 럼은 신세계에서 유럽의 식민주의자 들과 그들의 노예에 의해 소비되었다. 럼은 대항해 시대에 유럽인의 모험과 비즈니스의 산물이었지만, 그들이 오랫동안 의도적으로 시선을 회피했던 노예무역의 잔혹성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음료였다. 럼은 인류 역사에서 최초의 글로벌 시대의 승리와 억압이 체현된 음료였다.
- 럼주와 당밀에 대한 관세는 아메리카 식민지가 영국으로부터의 분리되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와 함께 럼주에 강렬한 혁명의 향을 가미했다. 1781년에 영국이 항복하고, 그리고 아메리카 합중국이 건국되고 많은 세월이 지난 후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인 존 애덤스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당밀이 미국 독립에 있어서 본질적 요소였다는 것을 고백할 때 왜 낯을 붉혀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네. 많은 위대한 사건들이 그보다도 더 작은 요인에서 비롯되지 않았는가?"
- 총기 또는 전염병과 함께 증류주는 구세계의 거주자들이 신세계의 지배자로서 자신들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근대 세 계의 형성에 기여했다. 증류주는 수백만 명의 사람을 노예화하고, 강제로 이동시키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토착 문화를 정복하는 과 정에서 일익을 담당했다. 오늘날 증류주를 볼 때 더 이상 노예제나 착취를 연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에 증류주를 사용했던 방법이 다른 방식으로 남아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항공기의 승객은 면 세품인 증류주 병을 손가방 안에 집어넣는 것은 증류주가 휴대하기 편하고 오랜 여행에도 상하지 않는 알코올음료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금을 싫어하고 면세품인 증류주를 구매하는 사람들은 럼의 밀수업자 또는 위스키 보이즈가 지녔던 반체제적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 17세기에 유럽에 커피가 소개된 충격은 아주 주목할 만한데, 그 시대에 가장 보편적인 음료는 아침 식사의 경우에도 약한 맥주나 와인이 었기 때문이다. 물은 오염되기 쉬웠기 때문에, 특히 지저분하고 사람 이 붐비는 도시에서 맥주나 와인 모두 물보다 훨씬 안전한 음료였다. (증류주는 마시면 취했기 때문에 와인이나 맥주처럼 매일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는 아니었다.) 맥주처럼 커피는 끓인 물로 만들었고, 따라서 알코올음료에 대신 하는 새롭고 안전한 음료가 되었다. 알코올 대신 커피를 마시면 약간 취해 느슨한 상태가 아니라 각성되고 활달하게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 고, 업무의 양이나 질 모두 향상되었다. 커피는 주정 상태가 아니라 깨어 있게 하고, 감각을 둔하게 하여 현실을 잊게 하기보다는 인지 능력을 높여주어 알코올과 아주 반대되는 음료로 여겨졌다. 
- 17세기 말까지 아라비아는 전 세계에 커피의 공급자로서 독점적인 지위를 구축하고 있었다. 1696년에 어느 페르시아 작가는 “커피는 메카 인근에서 재배되었다. 거기에서 지다 항구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수에즈까지는 배로 이동했고, 이후 낙타를 이용해 알렉산드리아까지 운송 했다. 그곳에 있는 이집트의 창고에서 프랑스와 베네치아 상인들은 그들의 고국에서 필요한 만큼의 커피콩을 구입했다” 라고 설명했다. 때 때로 커피는 모카에서 네덜란드까지 직접 운송되기도 했지만 지속되지는 못했다. 이처럼 커피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유럽의 국가들은 외국의 생산품에 의존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고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아랍인이 자신들의 독점을 유지하기 위 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커피콩은 선적되기 전에 살균 처리 되었는데, 이는 커피콩이 새로운 커피나무의 씨앗으로 사용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외국인들은 커피 생산 지역에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같은 아랍의 독점 체제를 처음으로 깨뜨린 것은 네덜란드인이었 다. 그들은 17세기에 걸쳐 동인도제도(East Indies,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제도를 가리켜 부르는 역사적 명칭-역주)를 지배했던 포르투갈을 몰아냈고, 향신료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단숨에 세계 최강의 상업 국가로 부상했 다. 네덜란드 선원들은 아랍의 커피나무에서 잘라낸 가지를 훔쳐서 암스테르담으로 가져갔고 온실에서 재배에 성공했다. 1690년대에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자바에 위치한 바타비아에 커피 플랜테이션을 설치했는데, 그곳은 현재 인도네시아에 속한 섬으로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자바에서 생산된 커피는 로테르담으 로 직접 운송되었고,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커피 시장을 장악했다. 전 문가들은 아라비아의 커피가 향이 더 뛰어나다고 평가했지만 가격에서는 자바의 커피에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 예멘에서 종교적인 음료로 탄생한 커피는 모호한 기원에서 출발해서 먼 길을 지나왔다. 커피는 아랍 세계에 침투했고, 그 후 유럽으로 건너갔고, 유럽의 강대국들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커피는 알코올에 대한 대안으로서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렸고, 특히 지 식인들과 사업가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음료 자체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을 소비하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커피 하우스는 커피뿐만 아니라 대화를 제공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커피하 우스는 사회적·지적 · 상업적 · 정치적 대화를 위한 전적으로 새로운 환경을 제공했다.
-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에서 금융혁신이 빠르게 이루어졌던 시기, 수 많은 주식회사의 설립, 주식의 거래, 보험 산업의 발전, 그리고 국채의 공공 매각 등이 모든 것은 런던이 암스테르담을 대신하여 마침내 세 계 금융의 중심지가 되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이를 가리켜 영국의 금융 혁명으로 부르고 있다. 이 혁명은 비용이 많이 드는 식민지 전쟁의 자금 조달을 위해 필요했고, 또한 커피하우스의 비옥한 지적 환경과 모험 정신 때문에 가능했다. 스코틀랜드의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가 쓴 《국부론》은 금융 분야에서 《원리》에 필적할 만한 책인데, 그는 이 책에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이론을 설명하고 지지했다. 즉 무역과 경제적 번영을 촉진하기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책은 사람들의 자유재량에 맡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미스는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영국의 커피하우스에서 집필했는데, 그곳은 런던에서 스미스의 근거지였고 우편물을 수령하는 주소지였다. 또한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이 모이는 인기 있는 장소였는데, 스미스는 그들에게 국부론의 각 장을 보여주고 비판과 의견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런던의 커 피하우스는 근대 세계를 형성한 과학 혁명과 금융 혁명을 탄생시킨 용광로였다.
- 오늘날 커피와 카페인이 있는 다른 음료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매우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있기 때문에 커피가 도입될 당시의 충격과 초창기 커피하우스에 대한 인기를 상상하기 어렵다. 현대의 카페는 역사적으 로 빛났던 그들의 조상에 가까이 가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커피는 여전히 사람들이 아이디어와 정보를 논하고 발전시키고 교환할 때에 만나서 마시는 음료라는 점이다. 이웃들 의 커피 잡담에서부터 학문적인 콘퍼런스나 비즈니스 미팅까지 커피는 여전히 알코올처럼 자기 통제력을 잃은 염려 없이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는 음료인 것이다.
커피하우스의 원래 문화가 오늘날 가장 잘 알기 쉬운 형태로 남아 있는 곳은 카페인이 연료가 되어 정보의 교류를 촉진하는 인터넷 카 페나 무선 인터넷이 제공되는 장소, 그리고 모바일 세대들이 사무실과 미팅 장소 대신으로 사용하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이라 할 수 있다. 현 대 커피 문화의 중심이며 스타벅스 커피 프랜차이즈의 고향인 시애틀 이 세계에서 가장 큰 소프트웨어와 인터넷 회사들의 본거지라는 사실 이 경이롭지 않은가? 커피와 혁신, 이성, 그리고 네트워킹의 관계는 - 여기에 혁명적 열정의 질주까지 더해져서 -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 영국 사회의 정상에서부터 하층민까지 모든 사람이 차를 마셨다. 유해 사업 그리고 사회적 변화는 서로 얽히면서 영국인이 차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말이 되기 전에 이미 외국인들이 주목했던 현상이었다. 1784년에 프랑스에서 온 어느 여행자는 “영국 전역에서 차를 마시는 것은 일반적이었고, (중략) 가 장 가난한 농부조차 부자와 마찬가지로 하루에 두 번 차를 마셨고, 차 의 전체 소비량은 어마어마했다” 라고 말했다. 스웨덴에서 온 어느 방 문자는 “차는 영국인에게 물 다음으로 불가결한 것이었다. 모든 계층이 차를 소비했고, 아침 일찍 런던의 거리에 나가면 많은 장소에서 옥외에 작은 테이블들이 설치되어 있고, 석탄 카트를 끄는 인부나 노동자들이 둘러앉아 컵에 들어있는 맛있는 음료를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차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제국으로부터 세계 각 지로 전파되었고,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새로운 제국의 중심에 뿌리를 내렸다. 영국인은 집에서 차를 마실 때마다 대영제국의 강력한 힘과 광대했던 영토를 생각한다. 차의 부상은 세계 강대국으로서 영국의 성 장과 얽혀 있으며, 영국이 상업적 · 제국주의적 힘을 더욱 팽창시켜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 17세기에 많은 사무직 직원들, 비즈니스맨, 그리고 지식인들이 커 피에 탐닉했던 것처럼 18세기에 새롭게 탄생한 공장 노동자들은 차를 즐겨 마셨다. 차는 이렇게 새롭게 변화된 노동 환경에 최적으로 어울 리는 음료였고 여러 가지 형태로 공업화에 도움을 주었다. 공장의 주 인들은 종업원의 휴식을 위하여 “차 마시는 시간tea breaks"을 허용하 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농업 노동자들에게 제공되었던 맥주는 알코올 때문에 정신을 무디게 만들었지만 차는 카페인 때문에 오히려 정신을 예민하게 해주었다. 차는 길고 지루한 작업 시간 동안에 노동자의 예민함을 유지시켜주고, 빠르게 움직이는 기계를 다룰 때 집중력을 높여주었다. 수작업으로 하는 직공이나 방적공은 필요할 때 휴식을 취할 수 있었지만 공장의 노동자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은 기름칠이 잘 된 기계의 부품처럼 일을 해야만 했고, 차는 공장이 잘 돌아갈 수 있 도록 유지시켜주는 윤활유였다. 
또한 차에는 천연 항균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장점 중 하나였다. 이 때문에 수인성 전염병의 발병 가능성이 크게 줄어들었고, 차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물이 충분히 끊지 않은 경우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 영국에서 이질의 발병률은 1730년대부터 떨어졌다. 1796년의 어느 관찰자는 이질과 다른 수인성 질병들의 “발병률이 크게 낮아져 서 런던에서는 그러한 질병의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기록했다. 19세기 초경에 의사와 통계학자는 영국인의 건강 상태가 향상된 가장 큰 원인이 차의 보급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미들랜드(Midlands, 영국의 중앙부에 위치한 지역의 이름으로 18세기와 19세기의 산업혁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지역이다. 가장 큰 도시로는 버밍햄 이 있다)에 위치한 공업도시들 근처에서 밀집된 형태로 생활하더라도 질병의 발생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차에 들어 있는 항균성분인 페놀이 모유 중에 엄마의 젖으로 쉽게 이동하기 때문에 유아들의 건강에도 도움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유아의 사망률이 감소했고, 마침 산업혁명이 막 시작되었을 때 필요했던 거대한 노동 인력의 공급을 가능하게 했다.
- 불법적인 약품이었던 아편을 차와 직접적으로 교환하는 형태의 무역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동인도회사는 아편 무역이 드러나지 않도록 정교한 거래 구조를 고안했다. 아편은 벵골에서 생산되었고 1년에 한 번 캘커타에서 경매가 이루어졌는데, 회사는 그 이후에 아 편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모른 척했다. 실제로 아편은 인도에 근거를 둔 “지역 무역회사들country firms”이 구입했는데, 이들은 명목적으로는 독립적인 회사로서 동인도회사로부터 중국과 교역을 승인받은 회사 들이었다. 이 회사들은 경매를 통해 구입한 아편을 배에 싣고 광동의 하구까지 가서 은과 교환했고, 이후 린틴이라는 섬에 아편을 하역했다. 이곳에서 아편은 중국 상인에 의해 노를 갖춘 갤리선에 실린 후 해안으로 밀반입되었다. 지역 무역회사들이 아편을 직접 중국으로 보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불법적인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인도회사 역시 어떤 방식으로든 무역에 관여하지 않 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실제로, 동인도회사는 회사의 배를 이용한 아편의 수송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세관 관리들은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중국의 아편 상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으면서 동인도회사의 교묘한 사 기극을 눈감아 주고 있었다. W. C. 헌터라는 미국 상인은 당시의 사정 은 이렇게 설명했다. “아주 완벽했던 (외국인은 일절 관여하지 않은) 뇌물 시스템이 존재했기 때문에 비즈니스는 쉽게 그리고 정기적으로 진행되 었다. 새로 임명된 관리가 부임하는 등 때때로 장애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보상 문제가 제기된다. (중략) 그러나 곧 서로가 만족할 만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중개인들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다시 나타나고 그 지역에 평화와 면책이 다시 허용된다.” 때때로 지방의 관리들은 린틴 주변을 배회하는 외국 배들을 향해 본토의 항구에 기착하 거나 그곳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는 위협적인 포고령을 발동했고, 중국 세관의 배가 외국 배를 최소한 지평선으로 사라질 때까지 추격하는 모 양을 양측이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관리들은 외국 밀수업자를 몰아냈다고 주장하는 보고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 19세기에 아메리카는 경제력을 자국 내에 집중했고, 반면 20세기에는 해외로 경제력을 돌리면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 후 미합중국은 세 번째 국면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소련 과의 냉전 체제였다. 양측은 군사력에서 팽팽했고, 전쟁은 경제전쟁으 로 발전하게 되었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소련은 미국과 더 이상 경쟁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의 세기라고 불릴 수 있던 시대인 20세기가 끝나 면서, 세계 경제가 무역과 통신으로 이전보다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는 글로벌 경제 체제가 되면서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겸비한 미합중국은 세계에서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확고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미국의 대두, 20세기의 전쟁, 정치, 무역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글 로벌화는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고 유명한 브랜드로 미국과 그 가치관 이 체화된 것으로 보편적으로 여겨지는 음료인 코카-콜라가 전 세계에 보급되는 과정과 잘 부합된다. 미합중국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콜라가 아메리칸 드림인 선택과 소비자 중심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경 제적·정치적 자유를 상징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콜라가 무자비한 글로벌 자본주의, 글로벌 기업과 브랜드에 의한 지배, 그리 고 지역문화와 가치를 훼손하면서 미국화 또는 미국식으로 균질화의 시도를 상징했다. 대영제국의 이야기를 한 잔의 차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세계 최강국이 되기까지 미국의 등장에 관한 이야기는 갈색의 달콤한 그리고 거품이 나는 코카-콜라의 이야기 속에 펼쳐져 있다.
- 미국의 젊은이들이 군인으로 징집되자 코카-콜라 회사의 사장인 로 버트 우드러프는 “군복을 입은 모든 이들에게 어디에 있는 5센트 코카-콜라 한 병을 제공하고 모든 비용을 회사가 부담하라”고 지시했다. 코카-콜라는 이미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고, 무알코올의 청량 음료는 군사 훈련 중에 지급되었다. 회사가 코카-콜라를 군에 적극적 으로 공급한다는 홍보 전략은 코카-콜라와 애국심, 그리고 전쟁에 대 한 지원 태도와 연결하면서 훌륭한 효과가 있었다. 코카-콜라는 미국 에서 멀리 떨어진 전쟁터에 있는 병사들로부터 진심 어린 환영을 받았 다. 코카-콜라는 고향을 생각나게 하고 병사들의 도덕심 유지에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당신의 회사가 이 비상사태가 진행되는 동안에 우리에게 계속해서 코카-콜라를 제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라고 어느 장교는 코카-콜라 회사에 편지를 보냈다. “나는 코카-콜라가 군 에 복무 중인 젊은이들에게 도덕심을 세워주는 매우 중요한 상품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사는 이러한 수십 통의 편지를 증거 삼아, 그리고 군의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고 워싱턴에 많은 로비를 했다. 그 결과 회사는 코카-콜라는 전쟁 수행에 중요한 상품이라는 이유 로 1942년에 설탕 배급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배급제의 실시로 경쟁 사들은 청량음료의 생산량을 반으로 줄여야 했지만, 코카-콜라는 이 전과 마찬가지로 생산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다.
- 코카-콜라 병을 선적하고 지구의 반을 돌아 군대가 주둔하 는 곳으로 가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무엇보다 군수품을 실어 야 할 귀중한 선적 공간을 코카-콜라 병으로 채울 수는 없었다. 그래 서 군부대 안에 특별한 병 작업 시설과 소다 디스펜서를 설치했고 코카-콜라 원액만 그곳으로 보내도록 했다. 이러한 기계를 설치하고 운 영하는 코카-콜라 직원은 많은 군인들에게 비행기를 수리하고 탱크 를 움직이는 기술자만큼이나 중요했다. 그들은 “기술 감독관technical observer" 이란 특별대우를 받았고 군대의 계급도 부여되었기 때문에 “코카-콜라 대령”으로 불렸다. 그들은 전쟁 기간에 전 세계에 64곳 이상의 군 기지에 병 작업 시설을 설치했고 약 100억 병의 코카-콜라를 공급했다. 기술 감독관들은 정글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도록 휴대용 코카-콜라 기계를 고안했고, 잠수함의 좁은 해치hatch를 통해 들어갈 수 있도록 슬림형 기계도 개발했다. 또한 코카-콜라는 해외의 미국 군사기지 주변에 사는 민간인들에게도 제공되었는데 대부분이 그 맛에 매료되었다. 폴리네시아인 (Polynesia, 폴리네시아는 중앙 및 남태평양에 흩어져 있는 1000개 이상 섬들의 집단을 가리킨다-역주)들부터 줄루족(Zulus, 아프리카 원주민 의 하나로 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살고 있는 민족-역주)까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처음으로 코카-콜라의 맛을 보게 되었다.
- 1945년에 연합군이 최종적으로 승리한 후에도 재건기의 3년간 군 기지에 설치된 코카-콜라의 생산 기계들은 계속 가동되었다. 그 후 생산 시설은 민간에 넘겨졌다. 그러나 그때쯤에는 미군 덕분에 전 세계로 퍼진 코카-콜라는 남극을 제외하고 지구상의 모든 대륙 위에 확고 한 기반을 구축했다. 회사의 어느 간부가 말한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 덕분에 "코카-콜라의 매력이 거의 전 세계에서 인정되었다."
- 1997년에 발간된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에 따르면, 각국에 있어서서 코카-콜라 소비량은 해당 국가의 글로벌화의 수준을 보여주는 좋은 지표라고 밝힌 바 있다. 즉 (국제연합이 정한 기준에 따라 측정된) 풍요로움과 삶의 질, 그리고 사회적·정치적 자유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는 것이다. 매거진은 “발포성의 거대 시장을 가진 상품, 즉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입니다”라고 결론지었다. 물론 코카-콜라가 사람 들을 부유하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만든 것은 아니다. 이는 소비자 중 심주의와 민주주의가 확산될 때 발포성의 갈색 음료는 항상 함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어느날 탄산 소다수는 미합중국에서 가장 널리 소비되는 음료로서 모든 액상 형태의 소비량의 약 3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고, 코카-콜라 회사는 단일 회사로서 가장 커다란 공급자이다. 세계적으로는 회사는 인류가 소비하는 총 액상의 3퍼센트를 공급하고 있다. 코카-콜라는 의 심할 바 없이 20세기의 음료이며, 그리고 20세기에 발생했던 미합중국의 부상,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 그리고 글로벌화의 진전 을 상징하는 음료였다. 코카-콜라를 인정하는 안 하든 그 음료가 가진 매력의 너비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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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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