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역사

역사 2021. 3. 28. 15:00

- 크리스트교가 《신약성서》에서 청빈을 주창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유대교에서는 부와 재화를 쌓는 것이 가치 있는 일로 칭찬받습니다. 유대인 격언에 “돈은 무자비한 주인이지만 유익한 종이 되기도 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유대인은 돈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사유 재산을 적극 보호합니다. 그래서 타인의 재물 을 훔치거나 빼앗는 사람에게는 극형을 포함한 엄격한 형벌을 주고 벌금이나 배상을 꼼꼼하게 규정합니다. 유대교가 재산권과 소유권 불가침을 율법으로 정한 것에는 그들 나름대로 합리적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인은 이런 율법을 지킴으로 써 유대인 이외의 민족에게 신용을 얻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 전에 금고를 설치해 각지 부유층들의 금은보화를 맡을 수 있었고 맡기는 쪽도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재산을 맡길 때에 보관료를 걷었습니다. 그리고 재산 소유자에게 양해를 얻은 뒤 제3자에게 금과 은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유대교에서는 금리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를 인정합니다. 유대인은 맡긴 재산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하고 거액의 투자금을 모으고 그것을 건설업 등의 개발 사업으로 돌려서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역사적으로 세계를 석권하는 유대인의 금융 비즈니스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대교는 경제적 부와 재화를 둘러싼 문제가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야기한다는 것을 꿰뚫어보고 그것을 조정하는 시스템을 율법 속에 포함시켰습니다. 신이 감독해서 인간의 소유권을 확정하고 관리했 지요. 쓸데없는 소유권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규칙을 법제화했습니다. 소유권의 불가침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금융업 같은 신용 경제를 낳았습니다. 유대교는 모든 면에서 경제 사회의 조화를 우선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했습니다. 법치국가가 없었던 시대에 유대교는 율법과 율령으로 시장에서의 신용과 여신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신이라는 절대 이념을 신용의 원천으로 삼았기에 고대에도 고도로 발전된 결제 시스템이 가능할 수 있었지요.
- 정신적인 종교가 물질적인 경제를 만들어냈다니,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운 개념입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신성한 것을 정치와 경제 등의 세속적인 것에서 분리한다는 생각은 근대 이후에 생긴 사고방 식입니다. 전근대시대에 성聖과 속俗은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근대 이후를 사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융화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은 종교와 경제를 하나로 보아야만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약자가 필연적으로 가진 심리와 그 충동을 알고 절묘하게 마음을 사로잡았고 곧 큰 세력으로 발전했습니다. 약자를 구제하는 구조는 이슬람교와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에 서는 어느 정도 공통적인 것이지요. 약자가 강자에게 분노, 원한, 증오의 감정을 갖는 것을 르상티 망ressentiment 이라고 합니다. 철학자 니체는 저서 《도덕의 계보 zur Genealogie der Moral》에서 크리스트교가 르상티망에 의해서 발상한 종교 라고 밝힙니다.  부유층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 보수파에게 예수를 따르는 개혁 파들의 선교는 자신들의 존립 기반을 위협하는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보수파의 음모에 휘말려 십자가형으로 처형되고 맙니다.
- 이슬람은 세력을 확대하면서도 빈곤층을 배려했습니다. 《코란》에는 부가 한쪽으로 집중되는 것과 물건이나 화폐를 쓰지 않고 묵혀두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계율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토지는 알라가 부여해준 것이기 때문에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제한됩니다. 그렇게 일부 사람들이 토지를 독점하는 것을 막고 있지요. 또 부유층은 자카트라는 기부금을 내야 합니다. 그에 더해서 코란은 부유층에게 종교세를 걷어서 부가 빈곤층에게 재분배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카트의 일환으로서 와크프라는 것이 있습니다. 와크프는 단순하게 재산을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 학교, 모스크 등 공익과 복지를 위해 재산의 소유권 행사를 멈추는 것입니다. 와크프 역시 일정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 부과됩니다. 《코란》에서 설명한 자카트와 와크프 규정은 시대와 함께 유명무 실해졌습니다. 그래서 현재 이슬람 사회의 빈부 격차는 늘어나기만 하고 줄어들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슬람 초창기에는 자카트와 와크프를 철저하게 지켰고 부가 잘 분배돼서 이슬람 사회가 강하게 결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 이슬람에서는 공공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면 모든 생산 기관에 국가가 개입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일부 사업자가 이익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이슬람에서는 화폐가 자가 증식하는 형태인 이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슬람은 경제 격차가 벌어질 때 빈곤층에게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슬람교가 부의 편중을 막고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경제 시스템 설계를 교의 안에 포함시킨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크리스트교가 가져온 자본주의의 맹아 : 중세시대 교황이 유럽을 다스린 것은 유럽 경제 성장에 영향을 줬습 니다. 교황이라는 종교 권위자를 정점으로 교황의 영향력이 미치는 성직자와 지방 호족이 지배 피라미드를 만들었고 그 피라미드는 유럽 전역으로 넓어졌습니다. 따라서 중세 유럽에서는 크리스트교를 바탕으로 한 연대와 이에 따라 종교 조직에 귀속하려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반면에 국가의 정체성과 국가 의식은 약했습니다. 종교가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는 연대의 중심핵이 되었습니다. 중세에서 프랑스 왕국, 영국 왕국, 독일 황제 등의 국가 군주는 이름만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교황은 지방 정치를 지방 성직자와 호족들에게 통째로 맡겼습니다. 결국 지방분권적이고 평온한 교황 연합체가 형성됐습니다. 중앙집권적 국가는 나타나지 않았고 지방이 저마다 의 방법으로 통치를 맡았습니다.  이 온화한 지방분권 체제 속에서 중세 도시가 성장했습니다. 도시는 상공업으로 더 발전했고 시장도 생겼습니다. 시장에서 화폐와 물건을 교환했고 유통 경제가 확산되어 유럽 경제 전체가 살아났습니다. 12세기 유럽은 전에 없던 호경기를 만났고 유럽 각지에서 상공업도시가 형성됐습니다. 그중 북부 도시 뤼베크를 맹주로 하는 한자 동맹권(13~15세기 독일 북부 연안과 발트해 연안의 여러 도시가 맺은 연맹이 다. 해상 교통의 안전 보장, 공동 방호, 상권 확장 따위를 목적으로 했다)과 안트베르펜의 플랑드르(벨기에) 교역권인 북부시장은 북해와 발 트해를 무대로 번영했습니다. 한편 남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하는 롬바르디아 동맹권은 남부시장이었고 지중해를 무대로 번성했습니다. 이 북부 시장과 남부 시장은 뉘른베르크, 아우구스부르크 등의 독일 도시를 경유해서 만났습니다. 또 롬바르디아 동맹권은 지중해 를 넘어서 카이로 등의 오리엔트 경제권과 만났습니다.  이처럼 중세 도시를 중심으로 했던 경제 활동 전반을 자본주의의 맹아로 볼 수 있습니다. 지방분권적 체제 속에서 도시 상인들은 자 신들의 재량과 책임으로 비즈니스를 운영했고 번영을 이뤘습니다. 교황이 이 체제를 보증했고 도시 상인들과 크리스트교는 더 유연하게 연대했습니다. 종교가 12세기 유럽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기반과 요인을 만든 것입니다.
- 르네상스 Renaissance는 영어로 리뉴얼 Renewal, 즉 재생과 갱신이라는 의미입니다. 르네상스는 14세기에 시작해서 16세기까지 이어졌고 이 탈리아를 중심으로 서유럽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르네상스는 중세 의 신 중심 세계관에서 탈피하고 인간성의 자유와 해방을 지향했습니다. 휴머니즘(인문주의, 인간중심주의)에 기초하고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화를 모범으로 해서 인간 존재를 재생하려고 했습니다. 12~13세기에 십자군 원정이 본격적으로 일어났고 동방 이슬람 권과 접촉하면서 지중해 무역이 생겨났습니다. 이탈리아는 서유럽에서 동방으로 가는 현관문이었습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자리한 이탈리아 도시에서 경제가 발달하고 문화적 기반이 단단해졌고 이 엄청난 경제적 번영을 배경으로 르네상스가 시작됐습니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의 전통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중세의 가치 기준을 대체할 고대 문화유산에 근거를 두고 새로운 문화를 양 성할 수 있었습니다. 르네상스시대에 이탈리아는 북이탈리아의 도 시 공화국과 중부의 로마 교황령, 그리고 남부의 나폴리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북이탈리아의 중심 도시는 피렌체였습니다. 피렌체는 동방 및 지중해와의 무역과 모직물 생산과 금융업으로 번 영했습니다. 15세기에 금융 재벌인 메디치가가 피렌체 정치를 장악 했는데 1453년 비잔틴제국이 멸망하고 그리스의 고전 학자들이 이 탈리아로 많이 망명하자 메디치가가 그들을 보호했습니다. 르네상스부터 대항해시대까지 새로운 가치들이 발견되면서 기존 크리스트교 사회의 공통 사상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의 목적은 종교가 아니라 현세의 시점으로 해석됐고 교회 세력이 경제, 상업, 군사, 정치, 복지 등의 세속적인 제반 현상에 대해 서 갖고 있던 지배권의 정당성이 사라졌습니다. 결국 교회 세력은 국가와 관료 제도에 길을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종교적인 지배권과 세속적인 지배권이 명확하게 구분됩니다. 신이 현세 사회에 지침을 주지 않게 되면서 인간이 모든 일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국가 권력은 현세를 통치하는 기관으로서 다양한 고찰, 해석, 합의를 이끌어냈고 주권 sovereign, 즉 소버린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주권의 어원은 라틴어 superanus이고 super은 지상至上, 즉 가장 높은 위'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고대 프랑스어 soverain으로 바뀌 어서 영어의 sovereign이 됐습니다. 따라서 주권은 본래 지상이라 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신을 뜻합니다. 중세 이후 신이 갖고 있던 지상권이 현세로 내려왔을 때 지상권은 인간의 통치권 으로서 새로운 세속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신이 인간에게 양도한 지상권은 주권입니다. 주권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르네상스 말기의 왕권신수설입니다. 왕권신수설은 신이 지상권을 어떤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양도를 했 는가를 이야기합니다. 결국 그 사람이 왕이라는 내용입니다. 르네상스시대에는 세계관이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전환됐 습니다. 또 과학이 발전하면서 신의 절대성이 붕괴됐고 그 대신에 왕이 신의 대리인으로서 현실을 통치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받았 습니다. 왕의 권력은 신이 주신 절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왕권신 수설로 나타난 것입니다. “짐은 곧 국가이다”라고 말한 루이 14세처럼 군주들은 왕권신수 설에 기초한 절대 권력을 가졌습니다. 법과 제도를 만들 권리와 행정 기능을 일차원적으로 장악했습니다. 세속의 통치 지침을 종교계시로부터 독립시키고 현세를 지배했습니다. “짐은 곧 국가이다”라는 말은 왕권과 국가가 하나라는 것이고 실 체가 있는 왕권이 신이라는 추상물을 대신해서 이 세상에 나타났다. 는 의지를 선언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17세기 이후의 근세에서 이른바 절대주의라고 불리는, 국왕 권력을 중심으로 한 왕권 국가가 탄생합니다.
- 소버린은 과거 지상권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가졌지만 이 시대에 와 서는 가장 세속적인 의미로 바뀝니다. 금융 세계에서 소버린은 국채를 뜻합니다. 주권이 있는 국가는 자국의 통화를 발행할 수 있고 동시에 정부 의 채무를 짊어진 사람들에게 채권을 발행할 수 있습니다. 주권 국가가 그 빚을 갚겠다는 의무를 보증하는 약속 수표가 바로 국채, 즉 소버린입니다. 국채는 국가의 주권이 직접 반영된 문서이고 국가의 주권이 사람들의 신용을 얻음에 따라서 화폐를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국채를 발행하고 국가 재정을 조절하는 권한은 국가가 주권(소버린)을 가진 증거이기도 하고 그 주권에 의해서 보증된 채권이 또 국채(소버린) 입니다. 국채를 소버린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권 국가가 통화 창출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가는 금리, 인플레율, 경상 수지 등의 경제 현상 전반을 지배 및 장악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국채 상환이 지연되어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면 디폴트, 즉 재정 파탄이 온 것입니다. 디폴트는 재정 파탄뿐만 아니라 국가 주권의 파탄도 의미합니다. 이처럼 국채와 주권은 국가의 정체성으로서 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 소버린이 종교적으로 가장 높은 곳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단어 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소버린은 신이 인간에게 위양한 현세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결정권입니다. 소버린은 지금도 엄숙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재정의 규율을 지키고 국채(소버린)의 가치를 지키는 것은 국가의 주권(소버린)을 지키는 일이고 신이라는 가장 높은 곳에 어울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 루터의 성서중심주의 사상과 그 운동으로 프로테스탄트가 늘어났습니다. 루터는 유럽 각지의 개혁자들에게도 영향을 줬습니다. 개혁자 칼뱅 Jean calvin 이 있던 프랑스에서는 가톨릭 신앙이 강해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스위스에서는 루터의 영향으로 종교개 혁이 한창인 도시가 몇 개나 생겼고 그중에서도 제네바는 칼뱅을 초청해서 종교개혁을 이끌게 했습니다. 칼뱅은 루터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철저하게 교회를 개혁했고 기존의 정치권을 위협했습니다. 때문에 칼뱅은 제네바에서 추방됐지만 1541년 개혁파들이 다시 칼뱅을 제네바로 불렀고 결국 칼뱅은 봉건제 영주를 추방하고 정치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칼뱅은 제네바의 시정을 장악하고 종교와 정치가 하나가 된 신권 정치를 펼쳤습니다. 그렇게 금욕적인 프로테스탄트 교리가 자리를 잡습니다. 시민의 일상생활에서 사치와 오락이 제외됐고 제네바 거 리에서 화려한 의복이나 고가의 기호품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향락적인 언동이나 오락도 엄격하게 규제됐습니다. 부정부패를 적발했고 거리의 치안도 개선시켰습니다. 재정은 규율로 다스렸고 복지 및 의료 예산을 늘려 실업과 빈곤도 박멸했습니다. 칼뱅의 개 혁은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전에 제네바의 로마 가톨릭 세력은 봉건 영주와 결탁해서 금권정치를 하고 일반 시민들을 착취하고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신앙심이 두터웠던 시민들은 교회를 거스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칼뱅이라는 카리스마 있는 이방인이 나타나서 신앙을 지 키면서도 부패를 척결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알려주고 정당성을 설명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새로운 신앙의 틀 속에서 신을 따 르면서도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칼뱅의 주장이 사람들 을 각성시켰습니다. 결국 칼뱅의 탄생은 일반 대중이 기득권 계층을 뒤집은 쿠데타였습니다. 당시 일부 시민은 경제가 성장하면서 부를 얻고 힘을 키웠지만 기득권층의 시장 독점으로 더 큰 성장의 기회를 빼앗겼습니 다. 그런 독점을 파타할 정당성을 프로테스탄트라는 새로운 신앙이 보증해준 것입니다. 기존 크리스트교에서는 부를 쌓고 재산을 관리하는 것을 세속적인 것으로 보고 기피했습니다. 돈을 다루는 상인 등을 멸시하는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을 이끈 루터와 칼뱅은 모든 직업이 존경받을 만하다는 직업 소명을 주창했습니다. 독일어로 직업을 뜻하는 '베루프 Beru'는 부른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신이 인간에게 사명을 주는 것 이 바로 소명이고 그 소명으로 각자에게 합당한 직업이 주어진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 베루프라는 단어를 루터가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베버는 서 술합니다. 일상의 직업 노동에 전념하는 것이 프로테스탄트에게는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는 것이고 일을 해서 얻는 보수는 신의 은혜였습니 다. 근로와 절약으로 쌓은 돈이 자본이 되고 이를 기반으로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해나갔다고 베버는 주장합니다. 칼뱅 이후 기존에 기피했던, 이자를 취득하는 은행업이 공기업으 로 인정받았고 근대적인 금융 자본이 발전했습니다. 베버는 칼뱅이 영리 추구와 재산 축적을 인정한 것이 자본주의 정신의 기반이 되었고 유럽의 근대화를 지탱했고 또 자본주의 사회 가 발전하는 원리가 됐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본주의가 노동을 종교에서 분리시키고 경제 활동을 종교적 모든 구속에서 해방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베버는 신에게 부여받은 소명과 그 소명이 낳은 재물이 대규모 자본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종교에서 분리된 합리주의로 자 본주의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프로테스탄트가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베버의 생각은 20세기에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베버를 비판하 는 학자들이 나타났습니다.
- 칼뱅이 영리 추구와 재산 축적을 인정해야 한다고 할 때 그 인정은 적극적인 것이 아니라 조건적인 것이었습니다. 칼뱅은 사람들이 사회에 봉사하는 정신으로 일에 전념함으로써 부를 획득하고 풍요롭게 사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부 자체를 사랑 해서는 안 되며 경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칼뱅 교의에서는 자본 주의의 자유경쟁 아래 경제적인 이익을 최대화하는 자세가 허용되 지 않습니다. 칼뱅은 엄격한 도덕규범 아래에서 공공의 복지를 위해서 노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칼뱅의 의도를 넘어서 자본주의가 사람들이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면죄를 준 것도 사실입니다. 영국의 역사가 리처드 헨리 토니 Richard Henry Tawney는 1926년에 발표한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Religion and the Rise of Capitalism》에서 프로테스탄트 개혁이 경제 활동을 종교 규범과 윤리 구속에서 해방시켰다고 했습니다. 종교가 물질적 인 이익 추구를 인정하는 결과가 됐고 그렇게 근대 자본주의가 형성 됐다는 설명입니다.  처음에는 경건한 프로테스탄트였던 중산 계급이 점차 자본을 축적하면서 기업가인 산업 자본가, 다시 말하면 부르주아로 변모합니다. 또 자본이 없는 사람들은 노동자 계급으로서 자본가에게 종속됩니다. 18세기가 되어 종교 색이 옅어지자 자본주의는 이익 추구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칼뱅의 의도를 넘어서 자본주의는 홀로 길을 걷습니다. 토니는 결국 칼뱅이 인정한 영리 추구와 재산 축적이 자본주의를 종교에서 독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베버와 토니의 논의에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이 이익 추구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면죄로부터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데에 반해 토니는 자본주의 정신은 이미 있었고 프로테스탄트 교의를 면죄로 이용해 발전했다고 주장합니다. 토니의 설명이 역사 속에서 보는 실제 모습과 가깝습니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자기 이익을 최대화하고 자유 경쟁을 근본 원리로 하기 때문에 성공하는 자와 탈락하는 자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신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암묵적인 규율에 반하는 현상이 일 어납니다. 따라서 거대한 자본을 가진 성공한 부르주아는 교리가 거래와 사업을 인정하면서도 자신과 타인도 따를 수 있는 방향으로 해석되길 원했습니다. 칼뱅 이전에도 이런 요구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칼뱅 시대 이후 에는 자본가들이 교리를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데 철저하게 사용했습니다. 부르주아는 프로테스탄트 교리와 함께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란 베버가 주장하는 것처럼 종교적인 사명관이 우선하는 세계가 아니라 실리적으로 계산을 따지는 세계입니다.
- 경제가 발전하면서 도시 주민인 부르주아의 힘이 강력해졌고 그들은 경제의 자유와 의사 결정의 자유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왕정을 타파하고 부르주아가 의회를 구성했고 의회를 최고 의사 결정 기관으로 만들면서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를 증폭시켰습니다. 프랑스혁명으로 대표되는 근대 시민 혁명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종교 개혁 시대에 칼뱅이 영리 추구와 재산 축적을 인정하면서 경제적인 자유를 얻은 부르주아들은 사회계약설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갖고 정치적인 자유를 획득하려고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성이 신을 대신하는 만능의 능력으로 근대라는 시대의 문을 열었습니다.
- 중국은 유럽과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부유했기 때문에 근대화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18세기 중국을 다스렸던 건륭제는 영국에서 온 사절단에게 “너희 들 나라에는 빈약한 것만 있다. 우리들이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 다”라고 말하고 이들을 쫓아냈습니다. 당시 영국 사절단이 가져온 것은 태엽 감는 시계, 오르골, 소형총, 기계 인형, 기관차 모형이었습니다. 모두 기계화를 국책으로 하는 영국의 독자적인 기술력을 자랑하는 물건이었습니다. 건륭제는 이것들을 보고 “천박한 장인의 착상”라고 웃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건륭제를 비롯한 중국 지배층은 유교적인 세계관을 확고 하게 갖고 있었습니다. 군신서열의 예를 국제 관계에도 적용해서 대국인 중국이 주변 국가들을 종속시키고 세계 질서의 중심이 되어 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른바 중화사상이었습니다. 중화사상에 사로잡혀 있던 지배층들은 영국에서 발명한 총과 산 업 기계의 유용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잔재주라고 생각했습니다. 영국의 과학사가인 조지프 니덤 Joseph Needham은 저서 《중국의 과학과 문명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에서 중국인이 발명한 화약을 총과 대 포로 실용화할 수 없었던 이유는 기술 혁신 같은 새로운 것에 대한 잠재적인 불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서술했습니다. 유교적인 인습과 전통을 고집하는 중국인에게 새로운 것은 이상한 것, 전통을 파괴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기피해야 했습니다. 건륭 제가 영국에서 가져온 물건의 가치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이해 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입니다. 결국 유교적인 중화사상이 변혁의 기회를 빼앗았습니다.  건륭제는 1757년 외국 배가 최남단의 광저우만까지만 들어올 수 있게 제한하는 사실상의 쇄국정책을 취했고 중국의 근대화는 세계 열강보다 늦어졌습니다.
-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빈곤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주요 원인이라고 서술합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풍 요로움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서 그들을 구제해도 그들의 자존심까지 구제할 수 없습니다. 스미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들에게 일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서술합니다. 일을 함으로써 사 회에 공헌할 수 있고 자신이 사회에서 필요하다는 자각을 하면 인간 의 자존심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충만한 인간은 공정함과 정의를 표방하는 마음속의 공평한 관찰자에 적합하고 타인을 믿고 타인에게 주기도 하고 또 받기도 합니다. 서로 필요한 것을 교환하고 서로 돕는 호혜적인 관계를 쌓을 수 있는 사회적 존재가 됩니다. 스미스는 자본주의에는 물질적인 조화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조화에 이르는 기능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경제 활동을 통한 호혜 관계야말로 신이라는 초월자가 인간에게 부여한 이성의 증거이고 인 간은 이성을 통해서만 건전하고 조화롭게 경제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인간 이성은 혼란스러워지고 의심을 많이 하게 됩니다. 신용 불안이 사회를 뒤덮습니다. 미래를 신용할 수 없어 사람들은 소비를 억누르고 저축을 우선으로 하고 자신을 폐쇄적으로 만들어서 몸을 지키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또 경기가 냉각하고 후퇴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경제를 성장시키려면 인간이 인간과 연대하고 협조하고 신뢰해 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공정함과 정의의 이념인데 근대 사상가들은 이성이라고 불렀고 스미스는 마음속의 공평한 관찰자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념을 근원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부여한 존재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다시 종교적인 존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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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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