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진

역사 2021. 2. 6. 22:37

- 약 3000만 년 전에 북동아프리카 지하에서 뜨거운 맨틀 기둥이 솟아올랐다. 이 때문에 땅덩어리가 약 1km나 위로 거대한 여드름처럼 부풀어 올랐다. 이 부풀어 오른 돔 위를 지나가는 대륙지각 껍질이 길게 늘어나면서 얇아지다가 결국 일련의 열곡들 가운데에서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 동아프리카 지구대는 대체로 남북 방향으로 생겨났는데, 동쪽 갈래는 오늘날의 에티오피아, 케냐, 탄자니아, 말리를 지나가고, 서쪽 갈래는 콩고를 지나 콩고 와 탄자니아 국경을 따라 뻗어 있다. 지구를 가르는 이 과정은 북쪽에서 더 강렬하게 일어났는데, 지각에 생긴 긴 상처를 따라 마그마가 솟아올라 새로운 현무암 지각이 생겨났다. 그러고 나서 이 깊은 열곡에 물이 채워져 홍해 가 생겨났다. 또 다른 열곡은 아덴만이 되었다. 해저 확장 열곡들은 아프리카의 뿔(아덴만 남쪽에서 아라비아해로 돌출된 동아프리카의 반도 지역) 일부를 떨어져나가게 해 새로운 판인 아라비아판을 만들었다. 동아프리카 지구대와 홍해와 걸프만이 만나는 Y자 모양 지역은 삼중 교차점이라 부르는데, 이 교차 지점 중심에 아파르 지역이라는 삼각형 모양의 저지대가 에티오피아 북동부와 지부 티와 에리트레아를 가로지르며 뻗어 있다. 이 중요한 지역은 나 중에 다시 다룰 것이다. 동아프리카 지구대는 에티오피아에서 모잠비크까지 수천 킬로미터나 뻗어 있다. 그 아래에서 마그마 기둥이 계속 솟아오르기 때문에 동아프리카 지구대는 아직도 양쪽으로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판들의 확장' 과정은 단층을 따라 전체 암석판에 균열을 일으켜 암석판을 절단시킨다. 그리고 양 측면이 밀려 올라가 가파른 경사면이 생기고, 그 사이의 블록은 아래로 가라앉아 골짜기 바닥이 된다. 550만~370만 년 전에 이 과정을 통해 현재 와 같은 동아프리카 지구대 지형이 만들어졌다. 해발 약 800m 지점에 넓고 깊은 골짜기가 지나가고, 양 옆에는 산맥이 우뚝 솟 아 있다.  이러한 지각 융기와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높은 산맥이 가져온 한 가지 주요 효과는 대다수 동아프리카 지역에 비가 내리지 않게 된 것이다. 인도양에서 습기를 많이 머금고 불어오는 공기 는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지형 때문에 더 높은 고도로 상승하다 가 냉각되면서 응결해 해안 지역에 비를 뿌린다. 이 때문에 내륙 지역은 비가 내리지 않아 건조한 기후가 나타나는데, 이것을 비 그들(in shadow 현상이라고 부른다. 그와 동시에 동아프리카 지구 대의 고지대는 중앙아프리카 우림 지역의 습한 공기가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차단한다.이러한 판들의 활동 -히말라야산맥 생성, 인도네시아 해로 봉 쇄, 특히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높은 산맥 융기 은 동아프리카 지역의 기후를 건조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동아프 리카 지구대의 생성은 기후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생태계를 변 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자연 경관까지 변화시켰다. 무성한 열대 숲으로 뒤덮여 있고 균일하게 편평한 지역이던 동아프리카는 고 원과 깊은 골짜기가 곳곳에 널려 있는 울퉁불퉁한 산악 지역으 로 변모했고, 식생도 운무림에서 사바나와 사막 관목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게 분포하게 되었다. 거대한 열곡은 약 3000만 년 전부터 생기기 시작했지만, 융기와 기후의 건조화는 대부분 지난 300만~400만 년 동안 일어났 다. 우리가 진화한 것과 같은 시기인 이 기간에 동아프리카의 풍경은 〈타잔)의 무대에서 〈라이언 킹>의 무대로 변모했다. 나무 에서 살아가던 유인원으로부터 호미닌의 분기를 촉진한 주요 요 인 중 하나는 바로 장기간 지속된 동아프리카의 건조 기후와 그 로 인해 숲 서식지가 감소하고 쪼개지거나 사바나로 변모해간 환경 변화였다. 또한 건조한 초원 지역의 확대는 대형 초식 포유류, 즉 사람이 사냥할 수 있는 영양과 얼룩말 같은 유제류의 번성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이 한 가지 요인만으로 그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판의 활동으로 생겨난 동아프리카 지구대는 숲과 초원, 산맥, 가파른 경사면, 언덕, 고원과 평원, 골짜기 그리고 동아프리카 지구대 바닥의 깊은 민물 호수 등 다양한 지형들이 인접해 나타나면서 아주 복잡한 환경이 되었다. 이 모자이크 환경은 호미닌에게 다양한 식량원과 자원과 기회를 제공했다.
- 최근에 극심한 기후 변동이 일어난 세 시기는 270만~250만 년 전, 190만~170만 년 전, 110만~90만 년 전이다. 화석 기록을 살 펴보던 과학자들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새로운 호미닌 종(대개 뇌 용량 증가와 연관이 있는)이 출현하거나 멸종한 시기는 바로 습한 기후와 건조한 기후가 요동한 이 시기들과 일치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인류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190만~170만 년 전의 기후 변동 시기에 일어났는데, 이 시기에 7개의 주요 호수 분지 중 5개가 물로 채워졌다 말라붙는 일이 반 복적으로 일어났다. 바로 이 시기에 호미닌 종수가 정점에 이르렀으며, 뇌 용량이 극적으로 증가한 호모 에렉투스도 이때 나타났다. 우리가 아는 호미닌 15종 중에서 처음에 출현한 12종이 이 세 가지 기후 변동 시기에 나타났다. 게다가 제각각 다른 도구 기 술 올도완 공작, 아슐리안 공작, 무스테리안 공작 단계의 발달 과 확산이 일어난 시기도 극단적인 기후 변동 시기와 일치한다. | 그리고 기후 변동 시기들은 우리의 진화를 결정하는 데 중요 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호미닌 종을 태어난 곳에서 떠 나 유라시아로 이주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다음 장에서 우리 종인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지구 전체로 확산할 수 있었는지 자세히 살펴볼 테지만, 그 전에 호미닌을 아프리카 밖으로 내몬 조건들은 동아프리카 지구대에 일어난 기후 변동에서 생겨났다.  강수량이 많은 시기에는 큰 증폭기 호수들이 물로 채워지고 여분의 물과 먹이를 구할 수 있어 인구가 급증한 반면, 그와 동시에 나무가 늘어선 지구대 어깨 부분에 해당하는 서식지 공간이 줄어 들었다. 이 때문에 세차 운동의 주기에 따라 강수량이 많은 단계 로 접어들 때마다 호미닌은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관을 따라 이동하다가 결국에는 동아프리카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습한 기후는 또한 호미닌을 나일강 지류를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시나이반도와 레반트 지역의 푸르른 회랑을 지나 유라 시아로 건너가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호모 에 렉투스는 약 180만 년 전의 기후 변동 시기에 아프리카를 떠났고, 결국에는 멀리 중국까지 퍼져갔다. H. 에렉투스는 유럽에서는 네안데르탈인으로 진화해갔고, 동아프리카에 남아 있던 H. 에렉투스 개체군은 결국 30만~20만 년 전에 현생 인류로 진화했다.
- 인간이라는 동물은 지난 수백만 년 동안 동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모든 지구 과정들의 특별한 조합이 만들어낸 존재이다. 땅속에서 솟아오른 마그마 기둥 때문에 지각이 부풀어 올랐고, 그 결과로 우리 영장류 조상이 살던 비교적 편평하고 숲이 우거진 서식지가 메마른 사바나로 변해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단순히 건조한 지역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전체 자연 경관 은 가파른 단층 절벽과 용암이 굳어서 생긴 산등성이가 이리저리 뻗어 있는 기복이 심한 지형으로 변했다. 이곳은 갈기갈기 쪼개진 다양한 서식지들이 복잡한 모자이크를 이루어 존재하는 세계였고,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변해갔다. 특히 동아프리카에서 지각을 확장시킨 판들의 활동으로 동아프리카 지구대가 갈라지면서 비를 붙들어 쏟아지게 하는 거대한 벽들과 뜨거운 골짜기 바닥으로 이루어진, 이곳만의 독특한 지형이 생겨났다. 지구의 궤도와 자전축의 기울기에 일어난 우주적 변화는 주 기적으로 지구대 바닥에 있는 분지들을 물로 채웠는데, 증폭기 호수들은 사소한 기후 변동에도 급격히 반응함으로써 이 지역에 서 살아간 모든 생물에게 강한 진화 압력을 가했다. 호미닌이 살았던 이 고향의 독특한 환경이 적응력과 재주가 뛰어난 종의 발달을 견인했다. 우리 조상은 갈수록 지능에 더 많이 의존하고 사회적 집단을 이루어 협력하게 되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난 이 다양한 자연 환경이 호미닌을 진화시킨 요람이었고, 거기에서 털이 없고 수다스럽고 자 신의 기원을 이해할 만큼 충분히 똑똑한 유인원이 나타났다.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농업을 발전시키고 도시에서 살고 문명을 건설하게 한 지능과 언어, 도구 사용, 사회 학습, 협력 행동)은 이러한 극단적인 기후 변동이 낳은 결과이자,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특별한 환경 이 만들어낸 것이다. 모든 종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환경의 산물이다. 우리는 동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기후 변화와 판들의 활동이 낳은 유인원 종이다.
- 현재 우리는 기온이 비교적 높고, 육지를 덮은 얼음이 줄어들어 그 결과로 해수면이 높아지는 간빙기에 있다. 하지만 지난 260만 년 동안의 평균 조건은 현재보다 훨씬 추웠다. 아마도 여러분은 박물관의 전시물과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통해 마지막 빙기 때 세상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거대한 대륙 빙하가 북반구 대부분을 뒤덮고, 털매머드가 툰드라 비슷 한 곳을 걸어 다니고, 검치호가 그런 털매머드를 공격하고, 털가죽을 입은 구석기 시대 인류가 돌을 매단 창으로 사냥을 하던 시절이었다.하지만 이것은 최근의 지구 역사에서 일어난 많은 빙기들 중 마지막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260만 년 동안 빙기는 40~50번이나 있었는데, 갈수록 그 기간은 점점 더 길어지고 기온은 더 내려갔다. 사실, 제4기는 지구 기후가 예외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는데, 혹독한 빙기와 따뜻한 간빙기가 반복되면서 거대한 대륙 빙하가 주기적으로 팽창과 수축을 거듭했다. 빙기는 평균적으로 8만 년 동안 계속되고, 빙기들 사이의 간빙기는 그보다 훨씬 짧은 1만 5000년 정도만 지속된다. 1만 1700년 전 부터 시작된 홀로세(약 1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지질 시대. 충적세沖積 世 또는 현세現世라고도 한다)처럼 각각의 간빙기는 기후가 다시 빙기 로 돌아가기 전의 짧은 휴식기에 지나지 않는다.
- 산맥 생성과 그에 잇따른 침식으로 일어난 대기 중 이산화탄소 감소, 남극 대륙을 남극점 위에 고립시키면서 파나마 지협을 만들어 해류의 패턴을 변화시킨 판들의 활동, 대부분의 육지를 한쪽 반구로 몰아넣은 대륙 이동, 이 모든 효과들이 합쳐져 지구 를 얼음 저장고로 변화시키는 조건이 만들어졌다. 260만 년 전에 북반구에 거대한 대륙 빙하가 생기는 단계까지 지구가 냉각된 것이 결정적 문턱이었고, 그러자 지구 전체의 기후가 완전히 불안정한 상태로 돌입했다. 이제 밀란코비치 주기의 작용으로 북극점 부근이 약간 냉각될 때마다 두꺼운 얼음층이 유럽과 아시 아와 북아메리카로 팽창해갔고, 대륙 빙하가 북반구의 이 거대 한 대륙들을 두껍게 뒤덮었다. 하얀 얼음으로 뒤덮인 면적이 조금만 증가해도 더 많은 햇빛이 반사되어 냉각 효과가 더 커졌고, 그 결과로 폭주 과정이 시작되어 대륙 빙하가 더 넓게 팽창하면서 더 많은 바닷물을 얼음에 가두어 해수면이 낮아졌다. 신생대에 접어들어 지난 5500만 년 동안 이러한 지구의 지속 적인 냉각은 지구 자체와 우리의 진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앞 장에서 본 것처럼 기후가 더 차갑고 건조하게 변하자 동아프리카의 숲이 줄어들면서 초원으로 변했고, 이것은 호미닌의 발달을 촉진하는 조건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를 다재다능하고 지능이 높은 종으로 발달하게 한 동아프리카 지구대 증폭기 호수들의 급격한 요동은 밀란코비치 주기 중 세차 운동의 리듬이 그 원인이었다. 약 10만 년 전부터 지구의 주기들이 서서히 일치하기 시작했 다. 북반구에 여름을 가져오는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가 지구가 타원 궤도를 도는 중에 태양으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시점과 일치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북반구의 여름이 더 서늘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로 겨울철에 생긴 얼음이 녹지 않고 쌓이기 시작했다. 지구가 또 한 번의 빙기로 접어들면서 북쪽의 대륙 빙하가 성장했고, 남쪽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 인류의 확산이 세계 모든 곳으로 빠르게 그리고 심지어 방향성을 가지고 일어났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마치 우리 조상들이 불굴의 의지가 이글거리는, 눈살 을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아프리카의 고향에 결연히 등을 돌리고 지평선을 향해 과감하게 걸어가 대륙들 가장자리에 위치한 온 구석구석을 체계적으로 채워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수렵 채집인 집단들이 인구 밀도가 매우 낮은 상태에서 온 사방을 배회하면서 전 세계로 퍼져갔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 다. 그들은 국지적 기후 변화에 따라 추위와 가뭄을 피해 그리고 더 따뜻하고 강수량이 더 많고 식량을 구하기에 더 좋은 곳을 찾아, 계절에 따라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이동해갔다. 세대가 지날수록 우리는 점점 더 멀리 나아갔다. 예를 들면, 아라비아반도에서 남유라시아 해안을 따라 중국까지 인류가 확산해간 평균 속도는 1년에 0.5km도 안 되었다.
- 인류가 전 세계로 확산해간 사건이 마지막 빙기의 혹독하게 추운 기후 속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놀랍게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얼음 저장고 환경 덕분이었다. 북쪽 대륙 빙하가 성장하면서 바다에서 다량의 물을 흡수한 덕분에 해수면이 낮아져 광대한 대륙붕 지역이 마른 땅으로 드러났다. 우리가 마른 땅을 걸어 인도네시 아로 건너가고, 얕은 바다를 건너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하고, 베링 육교를 지나 아메리카로 건너갈 수 있었던 건 바로 빙기가 가져다준 조건 덕분이었다. 또한 낮은 해수면은 살아갈 육지 면 적이 더 늘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2500만 km2의 땅이 새로 생겼 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북아메리카와 거의 비슷한 크기이다.
- 분명하게 설정된 천연 국경과 비교적 작은 면적 덕분에 영국 은 봉건 영주들이 지배하던 영지들을 일찍 통일해 단일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1215년의 마그나 카르타 Magna Carta 부터 시작해 오늘날의 의회 제도 확립에 이르기까지 영국이 전제 군주제로부터 더 균형 잡힌 민주주의 제도로 점진적으로 이행하는 데에는 외부의 위협에 대한 상대적 안전성이 큰 도움을 주었다는 주장도 있다. 게다가 방어해야 할 육상 국경이 없는 영국은 유럽 대륙의 경쟁국에 비해 군사비 지출을 아주 낮은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대신에 해군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는데, 영국 해군은 단지 국가를 방어하는(1805년에 프랑스와 에스파냐 연합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영국을 침공하려던 나폴레옹의 꿈을 수장시킨 트라팔가르 해전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데에만 몰두한 게 아니라, 에스파냐와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대체해 해상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해외 식민지를 방어하고 상업적 이익과 교역로를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
-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 같은 간빙기는 비교적 안정적인 기후 조건이 특징이다. 실제로 지난 1만 1000년 동안 지속된 홀로세 간빙기는 지난 50만 년 사이에 따뜻한 기후가 가장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된 시기였다. 그리고 식물의 생장에 도움을 주었을 마지막 빙기 이후의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는 전 지구적으로 작용한 효과였다. 전 세계 각지의 문화들에서 거의 동시에 농업이 발달한 이유는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안정적이고 따뜻하고 강수량이 많은 조건은 큰 낟알이 열리는 초본 식물을 믿을 수 있게 생산하는 지역들에서 사람들이 광범 위한 지역을 배회하며 살아가는 대신에 선별된 일부 종들을 직 접 재배하면서 정착 생활을 하는 동기가 되었을 수 있다. 간빙기 는 농부에게 필수 조건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 우리가 영장류로 진화하고 수렵 채집인으로 발달한 과정은 속 씨식물의 열매와 덩이줄기와 잎에 의존해 일어났다. 우리가 채 택한 농업 또한 거의 전적으로 속씨식물에 의존했다. 곡류는 속씨식물이다. 사실, 우리가 수확하는 곡물은 식물학적으로 초 본 식물의 열매이다. 초본 식물이 존재했다는 최초의 증거는 약 5500만 년 전에 생긴 화석에서 발견되지만, 신생대 내내 지구가 지속적으로 냉각되고 건조해짐에 따라 2000만~1000만 년 전에 초본 식물이 지배하는 생태계가 세계 곳곳의 많은 지역에 생겼 다. 따라서 우리의 진화를 이끈 요인은 단지 동아프리카가 건조 한 기후로 변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길들임으로써 역사 를 통해 문명들을 먹여 살린 곡식들이 된 식물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갈 조건은 바로 지구 전체적인 냉각화와 건조화 과정이 만들 어냈다. 그리고 우리가 먹는 식물은 대부분 여덟 가지 속씨식물과 중 하나에 속한다.
- 놀라운 사실은 우제류와 기제류가 영장류와 함께 모두 5550만년 전에 폭발적으로 일어난 진화적 분화를 통해 약 1만 년 이내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이다. 나중에 동아프리카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게 될 우리 조상들과 가축화와 문명의 발달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동물 집단들이 모두 지구의 역사에서 눈 깜짝할 순간에 해당하는 같은 시기에 출현했다. 그리고 이 중요한 APP 포유류들의 급속한 출현을 촉발한 것은 세계 평균 기온 이 급격히 치솟은 발작적 사건이었다. 세계 기후가 이렇게 급작스럽게 따뜻해진 사건은 팔레오세와 에오세를 구분하는 경계에 해당하는 시기에 일어났으며, 팔레오세-에오세 최고온기 Palaeocene-Focene Thermal Maximum, 줄여서 PETM이라 부른다. 지질학적으로 아주 짧은 시간인 1만 년 미만의 시간에 엄 청난 양의 탄소(이산화탄소와 메탄)가 대기 중으로 방출되면서 온 실 효과가 크게 증가해 세계 평균 기온이 5~8°C나 급상승했다.  이러한 환경 급변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생태계들이 크게 변하긴 했지만, 백악기 말이나 페름기 말에 일어난 것과 같은 규모의 대멸종은 일어나지 않았다. 열대 지역의 환경이 극지방까 지 확대되면서 활엽수와 악어와 개구리가 극지방에서도 번성했 다. 팔레오세-에오세 최고온기는 유공충이라는 일부 심해 아메 바를 사라지게 했는데, 이들은 따뜻해진 수온과 심해에서 줄어 든 산소에 견뎌낼 수 없었던 반면, 와편모충류 같은 플랑크톤은 햇빛이 환하게 비치고 따뜻한 대양 표면에서 크게 불어났다. 팔레오세-에오세 최고온기 같은 전 지구적 환경 교란은 많은 동물에게 급속한 진화를 촉진했는데, 특히 온도 급상승은 새로운 APP 포유류 목들의 출현에 중요한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 중국이 티베트 고원을 지배하려고 하는 데에는 중요한 전략적 이유가 두 가지 있다. 첫째는 군사적 이유 때문이다. 인도가 티베 트 고원을 차지해 문자 그대로 중국 심장부가 내려다보이는 요 지를 차지하고, 그와 동시에 그곳을 그 아래의 평원을 침공하는 전진 기지로 삼을 가능성을 중국은 좌시할 수 없었다. 설사 인도 가 티베트 고원을 점령하지 않더라도, 만약 티베트에 정치적 자 치를 허용한다면, 티베트 정부의 허락을 받아 인도가 그곳에 군 사 기지를 건설할 가능성이 있어 중국은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중요한 이유는 티베트 고원이 공급하는 단순하지만 아주 중요한 자원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물이다.티베트는 세상에서 가장 높고 넓은 고원이며, 이곳에 있는 수 만 개의 빙하에는 북극 지방과 남극 대륙을 제외하고는 세상에 서 가장 많은 빙하 얼음과 영구 동토층이 있다. 그래서 이 높은 고원은 지구의 세 번째 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빙하와 눈에서 녹은 물은 황허강, 양쯔강, 메콩강, 인더스강, 브라마푸트라강, 살윈강을 포함해 동남아시아 전제로 부챗살처럼 뻗어나가는 큰 강 10개의 원류가 된다. 이 근 강들은 모두 산에서 침식된 엄청난 양의 퇴적물도 실어가 주변의 범람원과 논을 기름지게 만든다. 따라서 티베트 고원은 전체 대륙 지역의 급수탑 역할을 하는 데, 소중한 자원을 저장하고 이 강들을 따라 그것을 분배하면서 2억 명 이상의 사람에게 식수와 관개용수, 수력 발전 용수를 공 급한다. 중국이 성장하는 인구와 경제를 부양하기 위해 이곳을 확보하려는 이유는 풍부한 구리 광석과 철광석뿐만 아니라 방대 한 양의 민물 저장고 때문이다.
- 북해의 자연은 현대 세계를 만드는 데 또 한 가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저지대 국가들인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북유럽 평원의 편평한 해안선에 자리잡고 있는데, 13세기부터 네덜란드인은 바다와 습지에 새로운 농경지를 만들기 위해 물을 빼 내는 데 풍차를 사용했다. 사실상 이들은 빙기의 도거랜드 일부를 복구한 셈인데, 이곳은 해수면 상승으로 다시 물속으로 잠겼 던 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땅을 개간하기 위해 제방과 풍차를 건설하는 데에는 비용이 많이 들었는데, 공동체의 자원을 공유 함으로써 그 비용을 댈 수 있었다. 필요한 자금은 지역 교회나 의 회가 주민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방식으로 모았고, 새로 개간한 땅에서 농사를 지어 얻은 이익을 투자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곧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 거대한 계획에 자금을 대기 위한 채권에 잉여 자금을 투자하게 되었고, 이것은 다시 신용 대출 시 장을 크게 활성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자연 환경의 요구와 바 다를 관리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네덜란드는 자본주의자들의 땅이 되었다. 이 시스템은 자연히 17세기에 국제 통상으로 옮아갔다. 지역의 풍차 건설에 필요한 주식을 사던 행위에서 향료 제도로 가는 교역선에 자금을 대는 행위로 옮겨가는 데에는 아주 작은 발걸음만 내디디면 되었다. 어떤 계획에 드는 전체 비용을 작은 지분 들로 쪼개는 관행은 투자자들의 위험을 분산시켜 주었다. 여러 항해 계획에 돈을 조금씩 나누어 투자하면, 설령 배 한 척을 잃더 라도 과도한 손실을 피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돈을 꽁꽁 숨겨두는 대신에 투자를 하도록 자극했고, 그러자 대출금에 대한 이자율이 낮아지면서 모험적 사업에 필요한 자본 비용이 낮아졌다. 네덜란드인은 또한 선물 시장 개념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크게 개선했다. 
- 지중해는 아프리카판이 계속 북쪽으로 밀고 올라옴에 따라 지금도 계속 줄어들고 있는데, 결국에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지중해 북쪽과 남쪽 해안선에서 나타나는 지질학적 차이는 이러한 판의 활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지중해 남쪽 해안선은 비교적 반 반하고 천연 항구가 별로 없는데, 아프리카판이 아래쪽으로 기 울어지면서 유라시아판 밑으로 들어가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러한 충돌의 결과로 지중해 북쪽 해안선에는 산맥이 많다. 여기에 판의 침강과 지금이 해수면이 높은 간빙기라는 조건이 결합해 해안선이 점점 물밑으로 잠기는 결과를 낳았다. 수많은 섬과 갑, 만과 함께 천연 항구가 풍부한 지중해 북해안의 매 우 복잡한 구조는 이렇게 자연 지형이 물에 잠기면서 나타난 결 과이다. 이 기본적인 판의 활동은 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해상 활동 문화들에 큰 이점을 가져다주었고, 청동기 시대부터 현재까 지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홍해는 아프리카 지각 아래에서 거대한 마그마 기둥이 솟아오를 때 지표면을 갈라지게 한 Y자 열곡계의 세 가지 중 하나이다. 남쪽 가지인 동아프리카 지 구대는 우리가 종으로 진화하는 무대를 마련한 반면, 북서쪽의 더 깊은 균열은 아라비아 반도를 아프리카에서 떼어냈고, 길이 약 2000km의 이 균열에 물이 흘러들면서 홍해가 생겨났다. 
아라비아반도는 여전히 아프리카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는데, 북쪽의 좁은 힘줄 시나이 사막을 통해서만 붙어 있고, 홍해 가 넓어짐에 따라 아라비아 블록은 동쪽으로 돌면서 유라시아판 남쪽 가장자리에 충돌했다. 그 결과로 이란에서 자그로스산맥이 솟아올랐고, 지각이 침강하면서 쐐기 모양의 전면 분지가 생긴 이 산맥 기슭을 따라 인도양의 물이 흘러들어와 페르시아만이 생겼다. 홍해와 페르시아만에서 인도로 가는 최초의 교역로는 해안선을 따라 뻗어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 100년경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 상인들이 여름에 남서풍 계절풍을 이용해 불 과 몇 주일 만에 바브엘만데브 해협에서 곧장 인도양을 가로질 러 인도 서해안으로 갔다가 계절풍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는 계 울에 되돌아오는 방법을 발견했다. 지구의 대기 패턴에 나타나는 이 특징을 활용하면서 유라시아 전역에서 해상 교역이 급증했다. 하지만 7세기 말에 이슬람 세력이 아라비아와 북아프리카, 서남아시아를 정복하자, 유럽인 항해자 들에게 바브엘만데브 해협의 관문이 닫히고 말았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이슬람 상인의 다우(큰 삼각돛을 단 아랍인의 배)와 대상이 아시아를 지나는 세 갈래의 큰 동서 교역로를 지배했다. 세 교역 로는 홍해와 페르시아만에서 인도양을 건너는 두 갈래의 해상로 와 중앙아시아를 지나가는 실크 로드였다. 이것은 《천일야화》에 나오는 신드바드의 세계였는데, 신드바드는 바그다드에서 상품 을 싣고 바스라로 가 그곳에서 배를 타고 페르시아만을 내려가 는 모험 항해를 일곱 차례나 한 상인이다.
- 이슬람 세력이 이 교역로들을 지배하기 이전에 인도는 스트라본과 프톨레마이오스같은 그리스와 로마의 지리학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지만, 홍해의 통행로가 막힌 이후에는 그 위치에 대한 지식이 점차 희미해져 전설에 가까운 수준으로 변하고 말았다. 8장에서 보게 되겠지만, 유럽인이 다시 인도양을 항해하기까지는 이후 거의 1000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렇게 했을 때, 유럽인은 동남아시아에서 지중해 못지않게 활기 찬 교역망을 발견했다.
- 미국의 지질도를 살펴보면, 파란색 카운티들의 패턴이 8600 만~6600만 년 전의 백악기 후기에 퇴적된 지표면 암석의 띠를 따 라 구부러지면서 뻗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지표면에 노출된 백 악기 암석들로 이루어진 비교적 좁은 이 띠는 우뚝 솟은 애팔래치아산맥을 포함해 북쪽 내륙의 더 오래된 암석들을 빙 돌아 뻗어가다가 더 최근에 생긴 퇴적암 밑으로 들어가면서 남쪽의 땅속으로 사라진다. 
- 오늘날보다 기후가 더 따뜻하고 해수면도 훨씬 높았던 백악 기 동안에 오늘날의 미국 땅 중 상당 부분은 물밑에 잠겨 있었다. 서부 내륙 해로라는 바다가 미국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면서 대륙 동부를 따라 애팔래치아산맥 기슭을 빙 두르고 있었다. 애팔래치아산맥에서 침식된 물질이 강물에 실려 이 얕은 바다로 흘러 가 해저에 점토층으로 퇴적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이 해저 점토 층이 셰일층으로 변했다. 해수면이 다시 낮아지자 오늘날 우리 가 아는 것과 같은 미국의 윤곽이 드러났고, 지표면이 침식되자 해저에 퇴적된 이 퇴적층 띠가 연안 평야 위에 다시 드러났다. 이 셰일 기반암 띠에서 유래한 토양은 어두운 색이고 영양 물질이 많았는데, 그 물질이 원래 산맥에서 침식된 것이기 때문이다. '블랙 벨트 Black Belt 라는 용어는 원래는 앨라배마주와 미시시피주를 지나가며 뻗어 있는, 농업 생산성이 높은 독특한 색의 이 띠를 가리켰다. 백악기의 셰일에서 유래한 어두운 색의 이 비옥한 토양은 농작물을 재배하기에 이상적이었는데, 특히 목화를 재배하기에 좋 았다. 산업 혁명이 진행되고 목화를 옷으로 만드는 과정이 가속 화되면서(목화 섬유를 씨에서 분리하고 실로 자은 뒤에 천으로 만드는 과정이 기계화됨으로써) 목화 수요가 크게 치솟자 목화는 중요한 환 금 작물이 되었다. 하지만 목화 재배는 매우 노동 집약적인 일이 었다. 탈곡기를 사용해 식물 줄기에서 낟알을 쉽게 훑어낼 수 있는 곡물과 달리 초기에 목화를 재배할 때에는 목화솜이 붙은 고투리를 일일이 사람의 민첩한 손가락으로 떼어내야 했다. 그리고 18세기 후반부터 남부 주들에서는 그 노동력을 노예들이 제공했다. 1830년경에 노예 제도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와 미시시피 강 주변 지역에서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고, 1860년경에는 앨라배마 주의 멕시코만 해안 지역에서 위쪽으로 그리고 조지아주까지 퍼 져갔다. 노예의 노동력을 이용한 목화 농장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 '블랙 벨트'라는 용어는 다른 의미로 쓰이게 되었는데, 디 프사우스 Deep South(미국 남부의 여러 주를 통틀어 이르는 말. 주로 남부의 특징이 두드러진 루이지애나주, 미시시피주, 앨라배마주, 조지아주의 네 주를 가리킨다)에서 많이 발견되는 인구 집단이 분포하는 지역을 가리켰다. 즉, 미시시피강 양안을 따라 그리고 땅 밑에 백악 기 암석층의 띠가 늘어선 곡선을 따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을 가리켰다.
- 1865년에 남부 연합이 남북 전쟁에서 패하고 남부 주들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된 후에도 이 지역의 인구 분포나 경제적 초 점이 갑작스럽게 변하지는 않았다. 이전의 노예들은 여전히 동 일한 목화 농장에서 일했는데, 다만 이제는 자유민 신분이 되어 소작농으로 일했다. 하지만 목화 가격의 지속적인 하락에 이어 1920년대에 목화바구미가 창궐하면서 디프사우스의 경제적 부 는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계 미국 인이 남부주들의 농촌 지역에서 북동부와 중서부의 산업 도시들로 이주했는데, 특히 1930년대의 대공황 이후에 농촌을 떠난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 다수는 처음에 인구 밀도가 가장 높았던 지역들에 그대로 남았다 비옥한 토양의 역사적인 '블랙 벨트'에. 그래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블랙 벨트'는 민권 운동의 심 장부가 되었다. 1955년 12월에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버스 를 타고 가던 로자 파크스는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길 거부했다. 몽고메리는 7500만 년 전에 퇴적된 백악기 암석층이 구부러지며 뻗어 있는 띠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하나의 점에 해당한다. 오늘날에도 미국 내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인구 밀도가 높은 카운티들은 거의 다 남동부 지역의 이 때를 따라 분포한다.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북부와 서부로 이주한 뒤에도 계속 남아 있는 이 인구 집단은 경제적 조수에 수백만 명이 다른 곳으로 휩 쓸려간 뒤에도 그 자리에 계속 남아 있는 침전 잔존물과 같다. 경제적 생산성이 높았던 이 지역은 이후 산업이나 관광을 통 한 큰 발전이 일어나지 않아, 높은 실업률과 빈곤, 낮은 교육 수준, 부실한 보건 관리 등의 사회경제적 문제로 오랫동안 어려움 을 겪어왔다. 따라서 이 지역의 유권자들은 전통적으로 민주당 의 정책과 공약에 표를 몰아주는 경향을 보이면서 대통령 선거 지도에서 선명한 파란색 띠를 드러냈다. 따라서 오늘날의 정치 와 사회경제적 조건을 역사적 농업 시스템에 내재하는 그 뿌리 와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우리 발밑의 땅속에 숨어 있는 지질 학적 구조와 연결하는 인과론적 사슬이 분명히 존재한다. 먼 옛 날 바다에 쌓인 진흙층의 띠는 지금도 우리의 정치적 지도에 새겨진 채 나타나고 있다.
- 우리가 사용하는 금속의 종류는 이처럼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급팽창했다. 오늘날의 마이크로칩에 들어가는 금속의 종류는 60여 가지나 되지만, 1990년대만 해도 20여 가지에 불과했다. 예를 들어 인듐을 살펴보자. 1863년에 발견된 이 금속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항공기 엔진의 베어링을 코팅해 부식을 막는 데 쓰였다. 하지만 인듐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인듐-주석 산화물의 얇은 막을 스크린에 첨가하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인데, 그 희귀한 성질(이 금속 산화물은 투명한 동시에 전도성이 있다)이 소중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듐은 평면 TV에서부터 랩톱 그리고 특히 스마트폰과 태블릿의 터치스크린에 이르기까지 온갖 제품에 사 용된다. 이와 비슷하게 인듐보다 10여 년 뒤에 발견된 갈륨 역시 전자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는 널리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날 갈륨은 집적 회로, 태양 전지판, 블루 LED, 블루레이 디스크의 레이저 다이오드 등에 쓰인다. 이 기묘한 이름을 가진 금속들은 대부분 희토류 금속이나 백 금족 금속 중 한 집단에 속한다. 같은 집단에 속한 금속들은 화학적으로 서로 아주 비슷하다. 그래서 같은 광물 속에 함께 들어 있어 분리 과정에서 동시에 추출될 때가 많다. 이 20여 종의 금속은 현대 기술 시대를 정의하는 원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중 80% 이상은 1980년 이후에야 널리 활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 다. 이 금속들이 현재의 기술 시대에서 핵심 요소라면, 현재의 탄 소 경제에서 탈피하게 될 미래에는 더욱 중요하게 쓰일 것이다. 이 금속들은 풍력 터빈 발전기와 전기 자동차 모터, 고성능 충전 지에 필요한 작지만 강력한 자석을 제공할 것이다.  17종의 희토류 금속은 주기율표에서 여섯째 줄에 있는 '란타 넘족 원소들과 화학적 성질이 이와 비슷한 원소인 스칸듐과 이 트륨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희토류라는 이름은 잘못 지어 진 이름인데, 이 원소들은 실제로는 지각의 암석 속에 그렇게 희귀하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단, 지각 전체에 겨우 5kg밖에 들어있지 않은 방사성 원소 프로메튬을 제외한다면), 예컨대 란타넘(란탄)은 거의 구리와 니켈만큼 풍부하며, 납보다 세 배나 많이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희토류 금속은 금보다 적어도 200배나 더 많이 존재 한다. 문제는 희토류 금속들이 전체적으로 지각에 얼마나 많이 존재 하느냐가 아니라, 그것들을 추출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이다. 희 토류 금속들은 화학적으로 서로 비슷해 같은 종류의 광물에 함께 섞여 산출되기 때문에 각각을 순수한 금속으로 분리하기가 아주 어렵다. 더 성가신 문제는 암석 속에 들어 있는 각 금속의 최대 농도이다. 많은 금속들은 특정 지질학적 과정을 통해 풍부한 광석으로 농축되어 호상 철광층이나 세로리코(볼리비아에 있는 남아메리카의 최대 은광)의 두꺼운 은 매장층 같은 형태로 산출된다. 하지만 희토류 금속은 화학적 성질 때문에 고품질 광석으로 농축되지 못하고, 대신에 암석들 사이에 낮은 농도로 희박하게 흩어져 있다. 따라서 희토류 금속을 채굴하는 것은 대체로 경제 성이 낮은데, 금속의 가치에 비해 추출하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 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 세계에서 희토류 금속을 경제성 있게 채 굴할 수 있는 지역은 제한되어 있다. 오늘날 희토류 금속은 인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적은 양이 채굴되고 있지만, 1990년 대 이후부터는 전 세계 생산량 중 대부분이 중국에서 채굴되고 있다.
- 말은 처음에 운송 목적이 아니라 고기를 얻을 목적으로 가축화되었다. 소는 눈 틈에서 풀이 보이지 않으면 풀을 뜯어먹 지 않고, 양의 연약한 코는 부드러운 눈 속에 파묻힌 풀만 뜯어먹 을 수 있다. 그래서 이 두 종은 겨울철 초원에서는 발밑에 먹이가 있는데도 그냥 서서 굶어죽기 쉽다. 반면에 말은 추운 초원 지역 에 잘 적응해 차갑고 단단하게 뭉친 눈도 발굽으로 헤치고 그 밑 에 숨어 있는 겨울의 풀을 찾아낼 수 있다. 또한 물을 마시기 위 해 꽁꽁 얼어붙은 얼음을 본능적으로 깬다. 사실, 인간이 말을 가 축화하기 시작한 계기는 유라시아에 추운 겨울을 가져온 기후 변화였을지도 모른다. 말의 가축화는 이르면 기원전 4800년 무렵에 흑해와 카스피해 북쪽의 스텝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사람들은 말을 통제하고 타는 법을 터득했는데, 이것은 아주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3장에서 보았듯이, 양과 소 같은 초식 포유류 종을 가축화하면서 우리는 풀을 영양분이 많은 고기와 젖으로 바꾸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정착 생활을 하 는 농민에게는 가축을 먹여 살릴 풀밭이 얼마 없었고, 그래서 풀 을 뜯어먹는 동물을 기르다 보면 풀밭이 금방 고갈되기 쉬웠다. 하지만 광대한 초원에서 말을 타고 가축을 몰면, 방목지를 훨씬 먼 곳까지 넓힐 수 있고 훨씬 많은 가축을 통제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기원전 33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소가 끄는 일체형 바퀴 수레가 도입되면서 스텝 사람들은 필요한 모든 것- 식량과 물, 천막 등과 함께 가축을 이끌고 광대한 초원을 장기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초식성 유제류 가축과 말을 이용한 빠른 기동성 그리고 이동식 주택 역할을 하는 소가 끄는 수레의 결합으로 스텝 지역은 많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변했다
- 대서양 삼각 무역은 값싼 목화와 설탕, 커피, 담배를 원하는 유럽인의 끝없는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연결했다. 직물과 무기처럼 선진국에서 생산한 상품을 싣고 유럽에서 출발한 배들은 서아프리카 해안으 로 내려가 현지 추장들이 붙잡아온 노예와 유럽의 상품을 교환 했다. 그러고 나서 노예들을 신고 대서양을 건너가 식민지인 브라질과 카리브해와 북아메리카의 농장 소유주들에게 팔았다.* 선장들은 이 인간 화물을 팔아서 얻은 수입으로 농장에서 노예 의 노동력으로 생산한 산물을 구입했다. 노예를 실었던 선창을 식초와 잿물로 박박 문질러 씻은 뒤, 이 원자재를 가득 싣고 유럽 으로 가져가 판매함으로써 삼각 무역의 고리가 완성되었다. 배들의 정확한 항로와 각각의 기항지에서 교환하는 상품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고, 특정 해안선에서 상품을 교환하기 위해 짧게 들르는 곳들도 있었지만, 이것이 16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까 지 유럽 본국과 식민지들 사이를 연결한 대서양 삼각 무역의 핵심 항로였다.  대서양 건너편으로 실어나르기 전에 아프리카 노예들은 공장이라 부르던 해안 요새에 가둬두었는데, 이러한 공장은 내륙에 서 잡아온 노예들을 운송하기에 가장 편리한 하구에 많이 설치 했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아프리카 중동부 지역(적도와 남위 159 사이)과 황금 해안(아프리카 서북부, 기니만에 접한 해안)을 따라 베냉 만과 기니만의 비아프라만에서 배에 실렸다. 여기에도 대기 순 환 패턴과 해류의 역학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장소들에서는 남동 무역풍을 타고 남아메리카로 건너가기가 쉬웠고, 대서양을 건넌 뒤에는 브라질 해류를 타고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브라질 의 커피 농장으로 가거나 북동 무역풍과 북적도 해류를 타고 카리브해의 사탕수수 농장과 앨라배마주와 캐롤라이나주의 목화 농장, 버지니아주의 담배 농장으로 갈 수 있었다. 대서양 노예 무 역은 1807년에 금지되었지만, 1865년에 미국 남북 전쟁이 끝나면서 노예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밀수업자들을 통해 계속 이어졌다. 그때까지 1000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인이 강제로 붙잡혀 아메리카로 실려 갔는데, 많은 노예가 여행 도중에 처참한 조건 을 견뎌내지 못하고 죽거나 농장에서 혹사당해 일이 년 만에 죽 었다. 전체 노예 중 40%는 브라질로, 40%는 카리브해로, 5%는 훗날의 미국 지역으로, 15%는 에스파냐가 지배하던 아메리카 지역으로 실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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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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