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코어 히스토리

역사 2020. 12. 29. 12:12

- 1929년 당시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대통령 밑에서 재무부 장관을 지낸 앤드루 멜런(Andrew Mellon)은 10년 이상 이어진 경제 공황의 시발점이 된 주식 시장 붕괴를 보며 다가올 시련이 사회적으로는 잘된 일이라고 판단했다. 후버의 회고록에 따르면 멜런은 “대공황이 체제 내 썩은 부분을 도려내 줄 것”이라고 말했다. 멜런은 이렇게 덧붙 였다. “높은 생활비가 줄어들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도덕적으로 살아가겠죠. 가치관이 조정될 것이며 진취적인 사람들은 덜 진취적인 사람들의 난파선에서 보물을 찾아낼 것입니다.” 어쩌면 멜런의 소망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도 있겠다. 높은 생활 수준, 주류 밀매점, 재즈, 플래퍼(전통적인 여성다움을 거부하는 1920년대 신여성 ― 옮긴이), 찰스턴(재즈에 맞춰 추는 사교적인 춤 - 옮긴이), 영화의 출현 등으로 대표되던 '광란의 1920년대(Roaring Twenties)가 대공황으로 끝나 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멜런이 천박한 사치라고 생각했던 대부분은 일반인의 오락에 불과했다. 돈이 점점 귀해지자 삶의 즐거움 역시 급격히 줄어들었다. 물론 대공황이 닥쳤을 때 미국인이 모두 파멸에 이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의 절반에 달하는 인구가 일순간에 빈곤선 아래 놓이게 됐으며 이런 혹독한 시기는 10여 년이나 지속됐다. 당시 증언을 들어 보면 죄다 가슴 미어지는 이야기들뿐이라 뭐라도 좋은 일이 있었겠지하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단언하건대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 중에서 혹시 모를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며 대공황 같은 경제 재난을 경험하겠다고 할 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다.
- 20세기 초 독일 군사사가 한스 델브뤼크(Hans Delbrick)'는 현대식 군대를 특징짓는 온갖 요소(조직, 전략, 훈련, 병참, 지도력 등)가 문명수준이 낮을 때 자연스레 얻게 되는 강인함이라는 강점을 상쇄하기 위해 고 안됐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그는 고대 게르만 민족이 잘 교육받은 로 마 군대에 연전연패당한 사실을 두고 이렇게 지적했다. “문명 수준이 높은 사람들에 비해 야만인은 호전적인 에너지를 마음껏 뿜어낸다는 강점이 있다. 마치 고삐 풀린 짐승의 본능 같은 근원적인 강인함을 내 뿜는 것이다. 문명은 인간을 개화해 더욱 감성적으로 만들며 그 과정 에서 신체적인 능력이나 용맹함 같은 군사적 자질을 약화한다. 이처럼 문명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약점을 상쇄하려면 반드시 인위적인 수단이 필요하다. ...... 상비군을 조직하는 주된 목적에는 문명화한 사람들을 규율로 단련하여 덜 문명화한 사람들을 저지할 능력을 갖추는 것이 포함된다.” 델브뤼크에 따르면 애초에 도시 국가에서 국경 너머의 야만인들에 비해 훨씬 온순한 농부들을 훈련과 규율을 통해 군대로 조직화한 것 은 혹독한 자연환경에서 사납고 호전적 으로 변한 이들에 대적하기 위해서였다. “시민이나 소작농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로마인을 한 무리 데려다가 인원수가 같은 야만인 무리와 싸움을 붙이면 틀림없이 로마인 무리가 패배할 것이다. 사실 제대로 싸우기 전에 도망갈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을 상쇄하기 위해 로마군은 전술적으로 긴밀하게 단 결된 보병대를 편성할 수밖에 없었다.”
- 현재는 군사용 무기와 기술이 엄청나게 발달한 상황이다. 급기야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미국 캔자스의 방구석에 앉아 아프가니스탄의 적군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다. 이때 그 무인 비행기 조종사는 마치 도장에서 오랫동안 검술을 연마하며 미래의 결투를 대비해 온 19세기 일본 소년처럼 비디오 게임으로 조종 기술을 연마했을 터다. 사살한 표적의 시체를 가까이서 본 경험도 거의 없을 요즘 킬러 들은 전투 무기를 다루는 법을 훈련하는 대신 드론을 날려 보내 험준 한 산악 지대에 적응한 강인한 부족 전사들을 쏴 죽인다. 델브뤼크의 로마 군대 이야기에서 나타나듯 오늘날의 군대도 부족한 강인함을 상쇄하는 여러 방법들을 찾아냈다. 하지만 강인함이라는 특성은 여전히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특히 계속 늘어나는 전사자 수와 전쟁 비용을 어디까지 감당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강인함이 핵심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역사가가 동료 심사를 거쳐야 하는 논문에서 그 사실을 무슨 수로 확증할 수 있을까?
- 어마어마한 사망자가 나온 결과 사회는 극심하게 침체되었으며 사 람들의 머릿속에는 어두운 생각만이 가득 찼다. 이웃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수없이 지켜본 생존자들은 삶이 오래 지속 되리라는 확신을 잃었다. 이런 태도는 예술에도 반영되었다. 당시 많 은 예술 작품들은 트라우마에 빠진 사람들의 정신을 들여다보는 창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일단 해골 같은 것들로 죽음을 물리적으로 표현하 려는 풍조가 여기저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망률이 급격히 높아지 자 사람들은 자신을 지켜 줄 것 같은 성유물이나 기도에 의지했다. 하 지만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자 자신의 믿음 체계에 대한 확신이 흔들렸다. 흑사병이 서방 세계를 강타하고 나서 한 세대 후에는 끔찍한 회의주의가 사회에 스며들었다. 당시 서방 세계 인구 의 절반에 달하는 7500만 명이 시체로 실려 나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 중 일부는 무모하게도 엉터리 치료법이나 신비주의에 빠져들었다. 아니면 오늘만을 산다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난교, 강간, 강도, 살인 등을 저질렀다. 15세기 잉글랜드에서는 전체 인구 중 4분의 1이 결혼을 하지 않았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굉장한 수치였다. 한편 이 끔찍한 상황을 책임질 누군가를 찾으려는 움직임도 나타 다. 중세 유럽에서 그 희생양은 유대인이었다. 이 시기 유대인에게 닥 친 일들은 가히 끔찍하기가 홀로코스트에 버금갔다. 당시 유럽인은 마을 우물에 독을 풀어 사람들을 병들게 함으로써 기독교 세계를 장악하려 했다는 혐의로 유대인을 고발했다. 흑사병 피해자들도 질병을 퍼뜨리는 주범이라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마법이나 주술을 행한다고 의심받는 사람들 역시 비난의 표적이 됐다. 14세기 흑사병이 시작될 무렵 잉글랜드 인구는 약 600만 명이었다. 이는 많은 전문가들이 당시 잉글랜드에서 최대로 수용할 수 있는 인구수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 수치다. 흑사병이 창궐한 후 단 몇 년 만에 잉글랜드 인구는 2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인구가 다시 예전수준으로 회복되기까지는 300년 이상이 필요했다.
- 인류는 이미 흑사병 부류의 병원균을 무기화하려는 의도로 활용한 적 이 있다. 흑사병에 관한 오래된 이론 중 몽골인이 유럽에 흑사병을 들여와 중심 도시를 공격하며 퍼뜨렸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따르면 몽골인은 감염된 시체를 도시 외벽 너머로 던졌다고 한다. 이런 주장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일본군이 의도적으로 벼룩에 페스트를 주입해 중국의 도시에 투하했던 것은 확실하다. 그때 이후로 세균전은 많은 진전을 보였다. 사실 공기로 전파되는 병원균을 무기로 사용한다는 생각은 전 세계 무기고에 있는 다른 어 떤 무기를 활용하는 것보다 더욱 무시무시하고 더욱 파괴적일 수 있다. 물론 핵무기나 화학 무기 역시 끔찍하지만 둘 다 치명성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살상력이 있는 병균이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파되며 퍼져 나가고 여러 세대에 걸쳐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인간이 만들어 낸 전염병은 지금까지 자연이 인류에게 가한 그 어떤 위협보다 끔찍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새로운 질병들도 나타난다. 거의 매년 새로운 종류의 독감이 대지, 가금류, 조류로부터 인간에게 옮는다. 스페인 독감은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질병이었다. 에이즈 역시 마찬가 지였다. 또 우리가 박멸한 질병이라도 자체적으로 변이가 일어나 거나 질병 억제를 위한 백신, 치료제, 항생제, 해독제의 효과가 떨어지 면서 그 위험이 되살아날 수도 있다. 아무래도 팬데믹에 따르는 직접적인 결과인 대규모 사망 사태에 집 중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 외에 다른 많은 사회 분야에 미치는 파 급 효과 역시 상당하다. 정부나 보건 당국이 미래에 질병이 초래할 수 있는 직접적인 위협뿐 아니라 대중의 공포나 불안, 불합리한 행동 등 으로 촉발될 위협도 똑같이 염려하고 있다는 것이 최근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역사를 고려하면 당연하다.
- 천연두는 사상자를 낼 만한 무기로 사용하기에 충분히 강력한 질병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쉽게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 데다 백신이 이미 존재하거나 없더라도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탄저균이 훨씬 더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를 공황 상태에 빠뜨리고 공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해하게 만들 의도라면 천연두는 우리의 집단 기억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병균 가운데 하나다. 세균학 전문가 휴 페닝턴(Hugh Pennington)은 “천연두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을 두려워하는 마음 이 불합리할 정도로 크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또 “물론 천연두가 사람을 죽이기는 할 것이다. 하지 만 천연두에 딸려 오는 공포심이 그것을 더 효과적인 무기로 만들어 준다. 천연두는 대량 살상을 위한 무기가 아니라 대량 공포를 위한 무기다.” 실제로 오늘날 천연두를 두려워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수많은 사상자를 낸 이 질병이 다시 창궐했 을 때 대중이 빠질 공황 상태다. 예컨대 1947년 뉴욕에서 천연두 사태가 벌어졌을 때 홀로코스트 사 망자 숫자에 맞먹는 600만 명에 달하는 뉴요커가 단시간 내에 백신 접종을 받았다. 예전에 매년 규칙적으로 600만 명씩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병균을 물리치기 위해서였다.
- 우리는 어떤 기록이나 이야기를 해석하는 방식이 다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 머릿속에는 황금기'나 '흥망성쇠'같은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이 너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리하여 사물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곤 한다. 인류학자 조지프 테인터(Joseph Tainter)에 따 르면 로마 제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세금을 지나치게 높게 책정한 반 면 공공 서비스는 제대로 보장하지 않아 심지어 일부 시민은 쳐들어 오는 야만인'을 구세주라며 환영했다고 한다. 청동기 시대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이론이 존재한다. 지나치게 관료 주의적인 데다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는 지중해 국가들의 궁정 문화는 대다수 백성에게 하등 쓸모없었으며 그 때문에 그들은 결국 어떤 식 으로든 궁정 문화를 외면하거나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는 않기로 결심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체계가 너무 복잡해서 제대로 작동 하지 않거나 지나치게 중앙 집권화한 사회가 하층민의 문제에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에 훨씬 단순한 체계나 지방 자치 체제로 회귀하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누구에게 질문하는지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우리가 그들이 살았던 '호시절'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다. 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로마 제국의 후계자들은 수백 년에 걸쳐 제 국을 (어떤 식으로든) 다시 원래대로 합치기 위해 애썼으며, 청동기 시대 가 막을 내리고 나서 여러 세기 후에 호메로스라는 눈먼 시인은 영웅이 활개 치던 호시절을 이야기로 되풀이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 어떤 면에서 아시리아 제국은 그 성공들 때문에 몰락했다고 할 수 있 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아시리아인은 중동에서 가장 포악하고 강력하다는 민족들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일부 역사가는 아시리아 에 정복당한 대부분의 민족이 아시리아가 무대를 떠난 뒤에도 고분고 분하게 굴었다고 주장한다. 아시리아에 이어 페르시아 제국이 등장했 을 때 페르시아인은 아시리아인만큼 잔혹해질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 른다. 아시리아가 이미 위협이 될 만한 부족, 민족, 국가를 제압해 놓았 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 역사가는 그로부터 300년 후 알렉산더 대 왕의 페르시아 원정이 모두의 예상보다 쉬워 보였던 이유 역시 해당 지역이 여러 세기에 걸쳐 아시리아와 전쟁을 벌인 결과 제국 체제에 길들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거대한 제국이 쇠락하거나 멸망한 이유를 추적하기란 언제나 어렵다. 아시리아의 경우에는 주로 내전과 지나친 군사적 확장이 몰락의 범인으로 지목된다. 아시리아의 마지막 위대한 왕들 가운데 바빌론을 파멸시킨 센나케리브 왕은 아들들에게 암살당했다. 전승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센나케리브는 기도를 하다가 뒤에서 두개골을 강타당해 죽었으며 그를 내리친 무기는 바빌로니아의 신을 대표하는 종교적 성상이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센나케리브가 바빌론에 저지른 짓에 복수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겼다. 후계자 에사르하돈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왕위에 오르고 난 뒤 위대한 도시 바빌론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 로마군은 언제부터 로마군이라기보다는 게르만군 같아졌을까? 애초에 이 사실이 중요하기는 했을까? 로마인에게는 이것이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인 질 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대부분 게르만 부족민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로마가 가장 어두운 시기를 마주했을 때 결국 서로마 제국을 뒤흔들어 놓을 군대로부터 나라를 수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불과 몇 세기 만에 게르만 전사들이 군 지휘부로 올라갈 정도로 로마 군대는 지나치게 게르만화되었다. 심지어 서로마와 동로마의 주요야전군을 모두 게르만계 장교가 통솔하는 시기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군은 과거와 외양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전투 방식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게르만 부대들은 (갈리아 부대가 그랬듯이) 군단에 통합되어 로마군처럼 바뀌는 대신 점점 더 자신들의 전통대로 야만적인 무기와 갑옷, 지도자, 전투 기술을 사용했다. 이런 변화가 로마의 운명에 얼마만큼 기여했는지 정량화하기는 어렵다. 물론 최근 고고학자들은 과거 야만족 철의 장막 뒤에 가려 있 던 발전 과정을 어느 정도 밝혀냈다. 베일에 가려 있던 유럽 중부 및 부부 지역 안쪽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가 증가 하고 경제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정치 시스템이 발전하고 새로운 농업 기술이 등장했다. 또 이런 변화들은 모두 급격한 인구 성장에 기여했 다. 이 중에서 로마인과의 접촉으로 발생한 변화는 무엇이고 게르만 족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한 변화는 무엇인지 구분하기란 쉽지 않 다. 하지만 이러한 로마 제국 말기 게르만 부족의 변화는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 때 그들을 훨씬 더 위협적으로 만든 주요 원인이었다. 역사가 피터 히더(Peter Heath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나타난 인구 급증, 경제 발전, 정치 개혁 덕분에 4세기의 게르마니아는 1세기와 비교했을 때 로마의 유럽 지배 계획에 훨씬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 인류 역사에서 오래된 관행 가운데 유치(乳齒)가 날 때 고통을 덜어 주거나 잠에 잘 들 수 있도록 아이에게 술이나 아편을 먹이는 행위가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의사가 아이에게 수면제를 처방하거 나 부모가 아기 잇몸에 위스키를 문지르는 행위가 꽤나 흔했다. 물론 이제 우리는 그런 행동이 아이들에게 해롭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수백 년 전에도 이런 문제를 인식한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 《유 년기의 역사》에는 흄(Hume)이라는 영국인 의사의 말이 인용되어 있 다. 1799년에 흄은 간호사들이 꽤나 강력한 아편제이자 결국에는 비 소만큼 치명적일 수 있는 고드프리즈 코디얼(Godfrey's cordial, 달콤한 시럽에 아편 팅크를 섞은 영유아용 진정제 ? 옮긴이)을 아이들 목에 부어 넣은 탓에 수천 명의 아이가 목숨을 잃었다고 비판했다. 과거에는 자녀를 공개 처형장에 데려가 처형 장면을 보여 주며 도덕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르치는 것을 바람직한 양육법으로 여겼다. 때로는 교육 효과를 높이기 위해 처형 장면을 지켜보는 동안 일부러 자녀를 때리기도 했다. 물리적 고통에 처형 장면을 영원히 결부 한 것이다. 이렇게 아이들을 때린 이유는 단순히 교육 목적 외에 여러 다른 이유가 있었다. 예컨대 옛 영국인들은 재판에서 증거를 제시하 듯이 합법적인 느낌을 연출하기 위해 아이들을 때려서 그날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을 일종의 공증인 혹은 알림장으로 활용하기 위 해 물리적인 폭력을 가한 셈이다. 현대의 부모들은 자녀가 TV와 비디오 게임에 나오는 가상의 폭력 행위에 노출되는 것, 그리고 지속적인 노출의 결과 실제 잔혹 행위에 도 둔감해지는 것을 걱정한다. 하지만 과거 여러 시대에는 TV 프로그램을 위해 꾸며 낸 폭력이 아니라 실재하는 폭력 때문에 아이들이 또 다른 폭력에 둔감해졌다. 아이들이 유년기부터 진짜 살인이나 고문행위를 눈앞에서 보고 자란 사회를 떠올려 보라. 어떤 경우에는 아이들이 그런 잔혹 행위에 직접 참여했을지도 모른다. 요즘 그처럼 유혈이 낭자하는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가 있 다면 우리는 그 아이가 정신적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었으며 상담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시대나 문화를 막론하고 모든 아이가 그런 경험에서 동일한 영향을 받았을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이전 시대 사람들은 동물이 도륙당하고 사람이 죽임당하는 모습을 당연한 일처럼 보고 자랐기 때문에 현대적 감수성을 지닌 사람에 비해 오히려 폭력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행위가 시대와 무관하게 모든 인간에게 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 나의 행위가 누구에게나 동일한 영향을 끼쳐서 그 사람을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바꾸어 놓지는 않는다. 현재든 과거든 잔혹한 공개 처형 장면을 실시간으로 여러 차례 목격한 아이라면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아이들과는 폭력에 영향을 받는 정도나 방식이 다를 것이다. 반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아이가 그런 경험을 한다면 아마 오래도록 상담이나 약물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
- 과거 많은 사회에서는 오늘날과 달리 부모와 자식이 그리 많이 접 촉하지 않았다.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유대감을 키우는 경험마저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여러 사회와 문 화에서 수천 년 동안 유모 제도가 큰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유모(다.른 여성의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여성) 이야기는 성서 시대는 물론이고 고대바빌론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존재한다. 고대 로마 시대 유모들은 콜룸나 락타리아(Columna Lactaria, 직역하면 '젖 먹는 기둥)라는 장소에 모여 일감을 찾았다. 특히 많은 사회에서 영아에게 동물의 젖을 먹이면 안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산모가 젖을 내놓지 못하거나 출산 도중에 사망한 경우에는 유모를 통해 필요를 채웠다. 하지만 유모에게 자녀를 맡길 경우 자녀는 대개 부모와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으며 때로는 그 기간이 수년에 달했다. 이전 시대에서는 별 거리낌 없이 다른 이에게 자녀를 양도하는 충격적인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 18~19세기의 여러 자료를 보다 보면 자녀를 인격체가 아니라 강아지 정도로 취급했다는 생각이 든다.
- 맥락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폭탄 실험은 아무 맥락 없이 이루 어지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마지막 해가 어땠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때를 전쟁의 가혹한 본성이 가장 잘 드러난 최악의 해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1945년에는 사실상 지도상에서 도시가 증발해 버리는 일이 일주일에 여러 차례’ 일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증 명된 사실이 하나 있다면 평화기에 아무리 많은 국가가 수많은 무기 조약에 서명하고 서로에게 수많은 제약을 부과했더라도 전쟁 중에는 하나도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여러 사회가 각자의 생존을 걸고 총력전 을 벌이는 와중에 윤리적 신성불가침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이 처음 시작될 때만 해도 도시 폭격에 세계가 경악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 되었기 때문에 1939년에는 도덕적인 분노라는 것이 전쟁 전의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별난 잔재처럼 여겨졌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폭탄이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폭격기 수백 대를 보내 감행해야 했던 공습을 이제 단 한 대의 폭탄으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본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행위의 도덕성을 놓고 토론할 때 이 사실은 자주 묵과된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이 사실을 분명 중요하게 인식했을 것이다. 원래 연합국은 히틀러 치하의 독일을 무너뜨릴 목적으로 재래식 폭탄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 새로운 초강력 폭탄을 독일에 투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독일의 거의 모든 대도시와 중소 도시가 이미 찢겨 나간 상태였다.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하기 두 달 전인 1945년 5월, 결국 나치 독일은 항복했다. 연합국은 아직 일본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1945년에 일본은 독일이 당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일본의 여러 도시가 폭격을 당해 불타고 있었다. 만약 원자 폭 탄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전쟁을 이어 나갔을 것이다. 1945년 3월,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다섯 달 전에 미군은 300대가 넘는 중폭격기를 동원해 도쿄에 소이탄 폭격을 단행했다. 결 과적으로 10만 명이 죽었고 100만 명 이상이 다쳤으며 27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면적이 불탔다. 8월에 원자 폭탄이 투하될 무렵 도쿄는 이미 여러 차례의 소이탄 폭격으로 80~95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면적이 잿더미가 될 정도로 심각하게 황폐한 상태였기 때문에 표적 우선 순위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다른 일본 도시 60여 군데 역시 상태가 비슷했다.
- 오늘날 우리는 미국이 일본에 원자 폭탄 두개 를 투하했던 일을 이야기할 때 '도덕성'의 맥락에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실 당시 의사 결정권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혹은 바라는) 만큼 선택권이 폭넓 지 않았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리는 대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주장은 아마도 당시 정치 현실을 모르고 하는 말일 터다. 역사가 게리 윌스(Garry Wills)는 저서 《폭탄의 힘》(Bomb Power)에서 이렇게 말한다. “미국이 전쟁을 끝낼 만한 무 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면 원 자 폭탄이 개발된 후에 사망한 모든 미군 가족은 분노했을 것이다. 대 중, 언론, 의회가 대통령과 고문들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트루먼 대 통령을 탄핵하고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을 군사 법원에 회부하라는 요 청이 빗발쳤을 것이다. 정부는 수십억 달러의 자금과 막대한 지력과 인력을 다른 군사 프로젝트 대신 원자 폭탄 개발에 투입하고도 아무 런 소득을 거두지 못한 책임을 져야 했을 것이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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