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경제사

역사 2020. 7. 22. 08:18

- "식물은 흙과 물과 돌과 바람과 빛으로 스스로를 만들고, 나아가 흙을 모든 동물이 생명을 의존하는 음식으로 변형시킨다. 식물은 이후 자신을 보호하고 친구를 피기 위해서 색깔과 맛과 향을 가졌다. 우리가 채소와 과일과 곡식과 향신료를 먹는 것은 바로 우리 존재를 가능케 만든 음식, 우리 인생 앞 에 감각과 쾌락의 만화경 세상을 열어젖힌 그 음식 들을 먹는 것이다.” (해럴드 맥기 Harold McGee)
- 애덤 스미스는 중국을 한심하게 보았다. “중국은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던 것 같다. 그들이 법률과 제도적 본질에 어울리는 부를 갖춘 것은 아마 오래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법률과 제도 때문에 이러한 부는 가능한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반면 유럽은 지중해를 끼고 있어서 해운으로 국가 간 교류를 해 왔다. 기후와 토양을 가리는 밀의 속성 때문에 유럽의 먹거리는 동양처럼 풍족하지 않았다. 특히 단단한 밀의 씨앗을 고운 가루로 만들기까지는 상당한 기술 발전이 필요했다. 완벽한 제 분은 시계 공업이 발달한 스위스인이 증기기관을 이용하기 시작한 1800년대에나 가능했다.
- 동양의 곡창지대에 견주어 한참 북쪽에 있는 유럽은 편서풍 의 영향으로 연중 비가 내리는 서안해양성기후를 보인다. 이런 기후에서는 풀이 잘 자라므로 유럽은 목축으로 곡식 부족을 충 당했다. 그러나 밀은 단위면적당 생산력이 쌀에 견주어 낮기 에 강력한 왕권 국가를 설립하기 어려웠으며 백성들의 국가 개 념도 약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백년전쟁은 프랑스에 있는 영국 귀족의 땅 때문에 시작된 것인데, 프랑스 백성은 누가 자 기가 사는 땅을 다스리는지에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 농노였기 때문이다.
- 수천 년 동안 동양의 국가들은 너무 중앙집권적이고 강력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역사의 흐름이 멈추어 버렸다. (마르크스)
- 비가 내리지 않아도 잘 자라는 밀과 보리가 주식인 유럽과 중동에 견주어 동양은 우기와 장마 때 내리는 비로 한 해 농사가 좌우된다. 동양과 서양이 신 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뭇 달랐다. 동양의 지배층은 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자신에게 투사되도록 많은 장치를 고안했다. 계급이 처음 등장한 청동기시대에 통치자와 제사장이 일치한 것도 이런 이유다. 왕은 청동검과 청동거울, 황금 장신구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피지배 층을 세뇌했다. 이들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농사에는 물이 필요하므로 모든 문명은 강 주변에서 시작되었다. 관개는 지금도 많은 예산이 들어가는 대규모 사업이다. 인간의 노동에 의존하던 때 관개 사업은 강력한 왕권에서 비롯되었다. 곡식농사는 채집이나 수렵과 달리 강제 혹은 착취가 동원되었다. 사유재산과 노예제도도 여기서 나온다. 고대의 왕은 여러 씨족공동체를 무력으로 통합한 뒤 이들을 노예로 부려, 원가가 거의 들지 않는 많은 양의 곡식을 생산했다. 이렇게 축적한 자본은 피라미드 건설 같은 일에 퍼부어졌다. 황허강과 양쯔강 사이에 있는 중국은 놀라운 자본축적에 성 공했다. 황허강 위로는 밀을, 아래에서는 쌀을 재배했으며, 쟁기 · 시비법 · 이앙법 등 첨단 기술을 재빠르게 도입했다. 7세기 초반 건설한 중국의 대운하는 유럽보다 무려 1,0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진시황 이후 중국 황제들이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 로, 그리고 자신을 '왕 중의 왕'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벼농사의 높은 생산력 덕분이었다.
- 20세기 이전까지 질소를 농작물에 공급하는 방법은 뿌리혹박테리아로 질소를 공급받는 콩과 식물을 길러서 썩혀 퇴비로 주는 것과 번개가 치는 것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번개는 삼중결합으로 단단히 밀착되어 있는 공기 중의 질소 분자를 질소원자로 분리해 질소화합물을 생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질소비료가 나오기 전부터 질소를 공급받을 수 있었던 쌀은 천혜의 작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동양의 농부는 씨앗을 파종해 묘판에서 모를 키우는 이앙법을 도입했다. 이앙법은 풀을 뽑는 데 들어가는 노동력의 80퍼센트를 절감해 수확을 2배로 늘려주는 혁신적인 기술이었 다. 이앙법은 당나라 때 고안되어 송나라 때 정착되었다. 게다. 가 중국 남부의 아열대몬순기후에서는 1년에 2번 벼를 재배할 수 있다. 1,000년 전 중국에서는 이런 농업혁명이 차근차근 진 행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서양은 1200년경 시비법이 개발되기 전까지 휴경 지로 지력을 살리는 방법이 고작이었다. 쌀의 우월한 생산력 때문에 동양 국가들은 안정적인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로마가 지주들의 토지 독점과 토지 황폐화 때 문에 멸망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쌀은 밀이나 보리에 견주어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다. 쌀은 1헥타르당 생산량이 밀(820킬로그램)에 견주어 1.7배나 많 은 1,440킬로그램이다. 옥수수의 생산량인 860킬로그램보다 도 많다. 인류가 보리와 함께 가장 먼저 재배한 것으로 알려진 수수의 생산량(1헥타르당 400킬로그램)에 견주면 무려 3.6배나 차이가 난다. 쌀을 키우는 민족은 빠르게 고대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 한반도의 쌀 생산력은 아열대몬순기후부터 냉대기후대에 퍼져 있는 중국과 비교하면 정말 작은 규모다. 통계청 국제통계연감 2017년 자료를 보면, 중국의 쌀 생산량은 전 세계 쌀 생산량의 28.5퍼센트를 차지했다. 우리나라의 생산량은 0.8퍼센트로, 무려 35.6배 차이가 난다. 이런 낮은 생산량 때문에 우리 조상은 쌀 가운데 찰기가 있는 단립형 자포니카japonica를 먹은 것으로 보인다. 쌀의 전분은 퍼석한 느낌을 주는 아밀로스amylose와 찰기가 많은 아밀로펙틴 amylopectin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밀로스가 많은 쌀이 장립형 인디카(일명 안남미)다. 떡을 만드는 찹쌀은 아밀로스가 아예 없다. 아밀로스를 만드는 유전자가 우성이다. 3대 1로 인디카 쌀이 많다는 뜻이다. 우리 조상은 아밀로스가 없는 열성유 전자 쌀을 고른 것이다. 우리 조상이 찰기 있는 쌀을 선택한 이유는 밥이 주는 포만감 때문이다. 자포니카와 인디카 2가지 쌀을 모두 재배해온 중국인들이 이름도 알기 힘든 수많은 요리와 함께 인디카 쌀을 먹는 것은 그만큼 먹을 것이 풍족하다는 뜻이다. 향신료로 만드는 인도의 카레나 볶음 요리가 많은 동남아시아 요리에는 인디카 쌀이 잘 어울린다. 반면 우리나라와 일본의 식단이 유독 밥 중심인 것은 낮은 쌀 생산량을 고려한 조상의 선택으로 보아야 한다.
- 역사는 우리가 죽음을 맞는 전쟁터는 기념하면서, 번영의 터전인 밀밭은 비웃는다. 역사는 왕의 서자 이름은 줄줄이 꿰고 있지만 밀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못한다. 인간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이다. (장 앙리 파브르)
- 역사를 움직이는 결정적인 열쇠는 신이나 '보이지 않는 손'같은 형이상학적 힘, 위대한 지도자의 영도력이 아니라 개인의 사유재산에 대한 욕망이었고 사회 시스템이 이런 욕망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였다. 서양은 동양보다 훨씬 빠른 중세 때 이미 이런 욕망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반면 동양의 지배층은 이 욕망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일부 이슬람 세력과 북한 등은 지금도 이를 인정하길 꺼리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신념이나 영도력은 초기 확산 속도는 빠르지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지속력이 떨어진다. 진秦나라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뒤 불과 15년 만 에 망했다. 스페인의 선교사들은 모든 인간을 하느님이 창조했 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잊고 노예무역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반면 자기 땅에 대한 농민의 집착과 경제활동에 대한 상공인의 자유의지는 꾸준한 방향성으로 역사를 움직였다. 농민들은 늘 배가 고팠던 까닭이다. 개인의 생각을 만드는 기초는 먹거리다. 우리가 황혼 녘 밥짓는 냄새를 맡으면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하고 뭉클한 기운을 느끼는 것은 우리 민족이 1만 년 가까이 한반도에서 쌀을 먹으면서 삶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곡식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한다. 밀도 마찬가지다. 호메로스Homeros는 『오디세이아Odysseia』 에서 밀과 보리를 '인간의 골수'에 비유하기도 했다.
- 배고픈 유럽인의 살길은 땅을 떠나 바다로 나가는 것이었 다. 물고기를 잡거나 무역을 해야 했다. 이렇게 살길을 찾은 대표적인 나라가 고대 그리스다. 그리스는 빙하가 깎아놓은 노르웨이와 마찬가지로 바위가 많다. 게다가 석회암이 많아서 흙이 기름지지 않다. 그리스인의 주식은 보리였다. 보리에는 탄성을 만드는 단백질인 글루텐이 없어 빵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죽 으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인에게는 바다밖에 없었다. 뱃사람은 농사짓는 사람 에 견주어 거칠 수밖에 없다. 땅의 가혹함은 굶주림이지만 바 다의 가혹함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들은 살기 위해 거칠었고 모든 것에 회의적이었으며 셈에 밝았다. 보리죽을 먹던 그리스 인에게 새의 얼굴을 한 이집트의 신과 종교는 우스꽝스러웠겠지만, 그들이 만드는 기기묘묘한 모양의 빵은 기적처럼 보였을 것임.
- 기원전 6세기 솔론Solon의 개혁으로 평 민의 참정권이 보장되었으며, 이후 모든 시민이 참석하는 직접 민주주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시민들이 재판에 참석하는 배심원 제도도 이때 도입되었다. 하지만 로마는 여기서 더 나아갔다. 농사꾼들로 이루어진 평민회의 대표에게 최고 권력 자리인 호민관을 내주었다. 로마 가 이 같은 혁신을 채택한 것은 귀족과 평민의 화합으로 번영 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로마가 번영하려면 빵이 필요했고 이 빵은 이탈리아의 밀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들은 지중해 무역을 로마보다 앞서 개척한 이웃 나라 그리스와 북아프리카 페니키아와 맞서야 했다.
- 밀 외에 보리와 귀리도 있지만 이미 빵 맛을 알게 된 로마인은 보리를 가축이나 노예가 먹는 음식쯤으로 여겼다. 검투사를 로마에서는 호르데아리 hordearii라고 불렀는데 이는 ‘보리를 먹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기록에 따르면 검투사는 보리죽에 고수를 띄워서 먹었다. 로마에서는 문제가 있는 군인과 관리에게는 밀 대신 보리를 급여로 지급하기도 했다. 이런 전통은 근대까지 유럽에 남아 있었다. 로마는 지중해의 밀 생산 지대를 차지해야 했고 그러려면 다른 나라와 경쟁이 불가피했다. 살아남으려고 로마식 정치 혁신을 선택한 것이다. 로마의 선택은 옳았다. 로마는 주변 나라를 차례차례 격파하고 100여 년이 넘는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에 승리를 거두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다. 로마가 얼마나 카르타고에 이를 갈았는지는 카르타고를 정복 이후 한 짓을 보면 알 수 있다. 로마는 카르타고 남자를 모두 학살하고 카르타고의 곡창지대에 소금을 뿌려 영원히 밀을 키우지 못하도록 했다. 그만큼 밀은 로마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이제 북아프리카와 이스파니아의 곡창지대도 로마의 것이었다. 로마는 로마 시민을 먹여 살릴 빵 창고인 이집트마저 정복했다. 그러고는 이집트의 화학책을 모두 불살랐다. 로마인이 보기에는 마법 같던 이집트 빵 기술을 독점하려는 생각이었다. 로마는 드디어 서양 세계의 빵을 독점했다.
- 유럽에서 경쟁의 주체는 귀족이나 왕족처럼 권력과 토지를 독점한 자가 아니라 상인과 장인이었다. 12세기 유럽은 낮은 농업생산력을 무역과 기술 혁신으로 메워나가고 있었다. 유럽의 상인과 장인은 동업조합인 길드를 만들어 지배 세력에 맞서 자치권을 확보했다. 이들은 영주가 갖고 있던 경제행위에 대한 통제권은 물론이고 사법권 행사와 행정관리 선출에도 직접 개 입했다. 길드를 중심으로 한 상공업과 무역의 발달로 유럽의 작은 도시들에는 활력이 생겨났고, 농노들은 종교 공동체인 장 원을 빠져나와 도시에서 자유인으로 살기 시작했다. 영주와 종교인도 일부 권리를 상공인에게 넘기면 훨씬 사치스럽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13세기에는 석탄을 이용한 증기기관 같은 대대적인 혁명은 아니었지만, '연성 원시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에너지 혁명의 전조가 감지되었다. 1185년 영국 요크셔 지방에서 발명된 풍 차는 영주와 교회의 소유이던 수력 장치와 경쟁하는 평민의 에너지'였다. 풍차 설비 1대는 20명의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었다. 방아의 가장 중요한 기술적 진전은 회전운동을 왕복운동으 로 바꾸어주는 캠cam이었다. 방아 덕분에 양모를 천으로 바꾸는 가공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유럽 번영의 기초가 되었다. 이를 간파한 상공인들은 풍차와 수력 장치를 소유했고 어느덧 평민의 에너지 총량은 기득권층의 에너지 총량을 넘어섰다. 중세 기사도를 숭배한 라만차의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른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중세의 풍차와 수차에 대해 연구한 역사학자 린 화이트 Lynn White는 중세에 이미 산업혁명이 준비되었다고 진단했다. “15세기 후반 유럽은 그 이전의 어떤 문화권보다 훨씬 다양한 동력원 뿐만 아니라 그 에너지를 포착하고 전달하고 이용하는 데 필요 한 일단의 기술 수단까지 갖추었다. 1492년(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전개된 유럽의 확장은 상당 부분 에너지 소비의 증가와 그에 따른 생산성 향상, 경제력 · 군사력 증강에 기초한다.” 에너지와 기술 수단뿐 아니라 사회 시스템 역시 혁신적으로 진화 중이었다. 이는 중세 도시가 서로를 의식하며 치열하게 경쟁했던 탓인데 그리스와 로마, 카르타고가 지중해의 밀을 비롯한 무역권을 놓고 경쟁하던 것과 비슷하다. 13세기 이탈리 아의 피렌체 · 피사 · 베네치아 · 제노바는 부와 권력을 키우려고 이웃 도시와 전혀 다른 정책을 채택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인간이 고안해낼 수 있는 각종 창의적인 정책의 풀pool이 형성 되었다. 이탈리아인들이 실험 끝에 내린 결론은 제조업과 무역 이 번영의 핵심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다. 1112년 세워진 피렌체공화국은 은행업과 양모업 등 21개 길드의 대표 자가 운영하는 시뇨리아signoria를 통해 다스려졌다. 1532년 메 디치가가 세습군주제로 피렌체를 다스리기 전까지 이 대의 기구는 계속 운영되었다.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화정을 만든 점은 로마와 닮았 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피렌체는 로마와 달랐다. 피렌체는 귀족을 혁신의 걸림돌로 보고 대주주와 귀족이 정치 세력이 되지 못하도록 철저히 견제했다. 심지어 피렌체는 지주를 영구적인 위협 세력 혹은 적과 내통할 수 있는 세력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지주를 견제하는 대신 비봉건 사회의 특징인 예술인을 우 대해 예술의 번영을 일구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의 많은 거장이 피렌체에서 활동했다.
- 밀은 유럽인을 배고프게 만든 대신 그들에게 분석력이라는 눈을 선사했다. 서양인은 작은 개체를 낱낱이 파헤친 뒤 원칙을 세워 나머지를 묶어내는 분석 능력이 동양인보다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관찰과 경험을 중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야말로 진정한 실체다”라고 말했다. 서양인에게 집단은 개체가 모인 것인 반면 동양은 개체보다 관계와 전체를 중요시했다. 서양의 면도날 같은 분석 전통은 학문뿐 아니라 사회 발전에도 밑거름이 되었다. 정치가는 사회를 이루는 주체들을 각각의 변수로 놓고 이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제도와 법규 같은 시스템을 조율했다. 동양의 세계관이 부모와 왕과 국가(혹은 신)의 관계를 강조해 선과 도형으로 이루어진 평면적인 것이었다면 서양의 세계관은 입체적이고 역동적이었다는 분석을 하는 이유다. 어쩌면 이런 차이는 쌀보다 훨씬 제분이 어려운 밀의 속성에서 온 것인지 모른다. 밀은 쌀에 견주어 껍질은 단단하지만 속살(배젖)은 부드럽다. 껍질을 까면 밀은 쉽게 깨져버린다. 따라서 밀은 쌀과 보리와 달리 도정精 대신 분쇄를 해야 했다. 속도 차를 이용해 고운 가루를 내는 3중 분쇄 기술은 1800년에나 개발되었을 정도로 밀의 분쇄는 까다로운 일이었다. 서양인이 생산력의 열악함을 뛰어넘어 자본주의와 함께 그 대안인 사회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저력은 작지만 쉽게 제 몸을 내어 주지 않는 밀알을 좀더 치밀하게 깨려는 그들의 오랜 식습관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 유라시아인들이 식칼을 만들어 서로의 땅을 빼앗으려고 혈 안일 때 농업생산력이 높은 아즈텍인과 잉카인은 인신 공양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왜 이들은 인신 공양에 빠져 있었을까? 학자들은 옥수수의 기적적인 생산 조건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옥수수는 밀이나 쌀처럼 노동 집약적 곡식이 아니다. 심지 어 쟁기질도 타작도 도정도 필요 없다. 심는 법도 단순하기 그 지없다. 남자 농민이 큰 막대기로 땅에 구멍을 뚫으면 그 구멍에 부인이 씨앗을 심는다. 1년에 2번 씨앗을 심으면 50일 안에 열매가 열린다. 옥수수는 빨리 익을 뿐 아니라 익기 전에도 낱알을 먹을 수 있다. 1알을 심으면 보통 150알 이상을 거둘 수 있으며 심지어 800알을 얻기도 한다. 이것은 계절에 따라 7~8일 정도만 일하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약적 노동의 자유로움이 결국 지나치게 전제적인 신정국가에 이르게 한 것이다.
- 아메리카의 옥수수는 유럽으로 건너가서는 전혀 다른 역사를 일구었다. 호기심 많은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으로 건너간 옥 수수는 감자와 함께 근대적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두 식물의 가장 큰 공은 빠른 식량화를 통한 인구 팽창이었다. 페스트 확산으로 급감했던 유럽 인구는 17세기부터 급증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이후 2억 명가량이던 인구는 1650년 약 5억 명으로 2배가량 늘었고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해 1850년 에는 10억 명을 기록했다. 중국의 인구 증가도 옥수수가 전파 되었던 17세기 청나라 때부터였다. 유럽에서 최초로 옥수수에 주목한 나라는 전쟁광 스페인이 아니라 전통의 부호 이탈리아였다. 중남미의 인신 공양 행위를 유럽 최초로 지켜보고 기록했던 스페인 사람들은 남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옥수수를 불길한 음식으로 취급해 아예 먹지 않으 려 했다. 그러나 무역으로 부를 일군 도시국가 베네치아는 달랐다. 베네치아를 비롯해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노동력 대비 높은 옥수수의 생산성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시칠리아에 옥수수를 키워 식량으로 삼고 대신 옥수수에 견주어 2배 이상 비싼 밀을 시장에 팔았다. 17세기 베네치아는 생산된 곡물의 15~20퍼센트를 수출한 반면 프랑스는 2퍼센트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곡물을 소비했다.
- 아즈텍제국 멸망 후 멕시코로 건너온 스페인 사람들은 현지에서 앓던 설사와 고열 등의 병을 목테수마의 복수'라고 불렀다. 목테수마는 아즈텍제국의 마지막 왕이었다. 아직 GM 농산 물의 폐해가 구체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세계보건기구 WHO가 2015년 10월 가공육을 석면과 같은 1급 발암물질로, 붉 은 살코기를 2급 발암물질로 규정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판 목테수마의 복수는 옥수수를 통해 더 근본적이고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 그리스인은 기원전 8세기부터 페니키아인에게 배운 대로 식 민지의 광산을 개발해 화폐를 만들었고 곡물을 비롯해 특산품 을 본국으로 나르거나 다른 나라에 파는 삼각무역에 눈을 떴다. 따지기 좋아하고 매사 삐딱한 그리스인은 적성에 꼭 맞는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들은 보리로 된 빵 마자maza가 아니라 밀로 된 빵 아르토스artos를 먹을 수 있었 다. 기원전 6세기 전까지만 해도 아르토스는 평소에는 맛보기 힘든 음식이었다. 우리나라 서민들이 평소 보리밥을 먹다가 명 절 때 소고기 국에 쌀밥을 먹던 것과 비슷했다. 폴리스 가운데 아테네는 상업 활동이 가장 활발한 도시였다. 특히 아테네는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실시하던 폴리스였다. 인류 최초로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은 당시에는 특이하게도 사유재산을 인정한 덕분이었다. 2,000여 년 뒤 로크가 비로소 정리하고 옹호한 사유재산의 개념을 아테네가 이렇게 빨리 도입했던 것은 게오르고스georgo' 로 불리던 소농들 덕분이다. 소농들은 땅 부자인 귀족이 별 관심을 두지 않던 아테네 외곽 아티카 언덕의 척박한 땅을 개간하고 거기에 보리를 키워 가족을 부양했다. 그들은 종교의 자유와 땅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프로테스탄트처럼 끊임없이 참정권과 재산권을 요구했다. 미국이 1776년 독립전쟁으로 세계 최초로 귀족을 배제하고 사유재산을 인정한 헌법을 만들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테네의 소농은 진정한 혁신가였다. 그리스 공동체들은 기원전 7세기 무렵 중동의 패권 국가 아시리아에서 건너온 것으로 보이는 중장 보병 밀집 전술을 도입해 발전시켰다. 투구와 갑옷으로 중무장한 보병이 어깨를 맞댈정도로 밀집한 뒤 원형 방패로 몸을 최대한 가리고 3미터에 이르는 긴 창과 긴 칼을 들고 전진하는 방식이다. 팔랑크스phalanx 로 불린 전투 대형은 등껍질이 단단한 거북이가 긴 창을 꽂고 전진하는 모양새다. 팔랑크스는 전진 속도가 느렸지만 앞에 있는 것은 모조리 부수고 지나갔다. 그게 적이건 귀족이건 말이다. 팔랑크스는 『일리아스(lias』에 묘사되었던, 귀족이 주도하고 평민은 시종으로 따라나서던 전쟁을 평민 주도의 전쟁으로 바꾼 분수령이 되었다. 그리스 폴리스들은 이 전술을 앞다투어 도입했다. 그만큼 죽거나 다치는 병사도 많았다. 전쟁에 참여했던 시민들은 폴리 스를 위해 목숨을 건 대가로 정치 참여를 요구했다. 폴리스 간 의 경쟁이 치열했던 상황이어서 귀족은 이를 들어줄 수밖에 없 었다. 그리스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한 것은 고된 노동과 목숨을 건 전쟁을 감당해야 했던 소농을 포함한 시민들이었던 그리스 보리밭에서 자라난 민주주의 셈이다.
- 17세기 유럽에는 1,000개의 국가가 존재했으나 200년이 지난 뒤에는 40~50개로 통합되었다.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 기 지중해 인근의 정세와 비슷하다. 영국은 이 시기 아테네식 의 정치·경제개혁으로 유럽에서 가장 앞서 나갔다. 그러나 영국인은 아테네의 정치·경제 시스템에 스파르타의 정신을 이식했다. 기숙학교를 만들고 학생에게 럭비를 시켜 진 흙탕에서 뒹굴게 했다. 그들이 먹던 음식은 스파르타처럼 맛이 없었다. 지금도 유럽에는 “지옥의 요리사는 영국인" 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실제 영국은 스파르타처럼 쾌락보다는 절제 와 명예를 존중하는 전통을 강조해왔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적절하게 섞어놓은 영국은 20세기 초까지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로 성장했다. 후발 자본주의 국 가는 물론 중국과 같은 반봉건 국가들에도 영국은 벤치마킹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낯선 여러 국가는 스파르타의 전통에 경도되었다. 나치와 일본 제국주의가 대표적이다. 사회주의국가인 스탈린 시대 소련과 지금의 북한도 스파르타와 닮았다. 19세기 말부터 일본식 자본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도 스파르타의 전통이 강하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획일화된 학교 교육, 고루한 서열 문화 등은 찬란한 아테네보 다는 칙칙한 스파르타를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수능이나 토익 따위에 청춘을 소진하는 젊은이들은 전사가 되기 위해 집단생활에 내몰린 스파르타 젊은이들과 닮았다. 먹는 것도 비슷하다. 잡코리아 등이 취업 준비생 1,147명을 대상으로 2017년 6월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면,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취업 준비생은 17퍼센트에 불과했다. 이들이 가장 자주 사 먹는 식사 메뉴는 편의점 도시락과 삼각 김밥(23.7퍼센트)이었다. 조모스와 딱딱한 보리 빵을 먹던 스파르타 전사의 한 끼를 떠올리게 한다.
- 나는 폴리비우스가 조영관(로마 지방의회 관리)으로 뽑혔으면 좋겠다. 그는 우리에게 맛있는 빵을 공급해준다. (폼페이 유적 낙서)
- 로마의 실체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전재 국가였 다. 전쟁에 승리해 전리품과 노예가 확보되면 노예의 노동력을 토대로 다시 전쟁을 벌였다. 대부분 농민이던 로마의 시민군은 수백 년 동안 이 지겨운 무한 반복을 묵묵히 따랐다. 동맹국과 속주屬州의 시민 역시 전쟁에 참여했다. 그들은 애국심으로 무 장한 '전쟁 기계'였다. 그러나 전쟁에 참여한 시민에게 돌아온 것은 황당한 현실이 었다. 시민이 전쟁에 나간 사이 귀족이 시민의 토지를 독점했다. 토지 독점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로마가 민회와 원로원이 절대왕정을 견제하기 위한 대의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어가던 기원전 2세기 공화정 때였다. '강성 대국'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 아래 토지를 잃은 농민들 이 로마로 밀려들었다. 로마 시민의 99퍼센트는 빈민이었고 굶 주림을 걱정해야 했다. 이게 로마제국의 민낯이다. 번영하면 번영할수록 불안해지는 것이 로마의 숙명이었다. 노예제와 귀 족정, 군사독재라는 최악의 정치·경제 시스템은 어떤 개혁도 불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로마 정부는 개혁에 나서지 않고 시민에게 공짜 빵을 돌렸다. 시민들은 정치인이 던져준 공짜 빵을 짜고 냄새나는 생선젓인 가룸garum에 찍어 먹었다. 가룸은 멸치를 비롯해 전갱이 · 고등어 등 지중해에서 흔히 잡히는 생선으로 만들었다. 가룸은 오늘날 이탈리아 지역에서 즐겨 먹는 올리브유와 소 금에 절인 안초비anchovy와는 다르다. 오히려 냄새가 짙은 동남아시아의 생선젓과 비슷했다. 가룸은 고대 로마에서 가장 값싼 음식의 하나로, 서민의 주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공화정 말기부터 공짜 빵에 값싼 가룸을 찍어 먹으며 영광스럽던 로마의 붕괴를 지켜보아야 했다. 빵과 가룸은 단순히 먹거리가 아니라 로마의 역사를 상징한다. 그러나 구수한 빵과 냄새나는 가룸의 역할은 묘하게 달랐다. 빵은 무상이었지만 가룸은 돈을 내고 사먹어야 했다.
- 서양의 식탁에 단백질 공급원인 가축의 살과 우유가 풍족하게 공급된 시기는 유럽에서조차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세 기 말일 정도로 고기와 우유는 귀한 음식이었다. 게다가 척박 한 석회암 토양의 지중해 인근에서는 염소나 양처럼 작고 생명력 강한 가축을 키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배고픈 로마인은 자신보다 먼저 바다로 뛰어들어 빛나는 문 명을 만든 그리스인의 식탁에서 영감을 얻었다. 보리의 나라 그리스는 밀을 대부분 수입했다. 그리고 바다에 무궁무진한 어패류를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선은 쉽게 상한다. 그리스인은 생선을 소금에 절인 액젓 가로스garos를 만들었다. 가로스는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흑해 연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로마인은 그리스 신화에 기초해 로마 신화를 만들었듯이 가로스를 토대로 가룸을 만들었다. 가룸은 멸치를 비롯한 각종 생선에 소금을 넣어 만들었다. 주로 여름철에 3개월 정도 햇빛 에 노출해 발효시켰는데, 엄청난 냄새로 악명이 높았다. 발효 뒤 맨 위에 뜬 맑은 갈색 액체를 걸러낸 것이 가룸이다. 가룸을 따르고 남은 생선 찌꺼기를 알렉allec이라고 불렀는데, 알렉으 가장 값싼 서민 음식이었다. 가룸은 지중해 사람들의 지혜가 만든 지중해 경제의 산물이었다.
- 영어 케첩의 어원은 중국 푸젠성 방언으로 '생선으로 만든 소스'를 의미하는 꿰짭姓에서 유래했다. 17세기에 등장한 케첩은 굴·생선·계란 흰자 등을 넣고 발효시킨 일종의 생선젓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버섯 · 호두 등을 이용한 새로운 소스가 등장했고 이 소스는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실용적인 영국인들은 말레이시아에서 이 소스를 발견하고는 이를 이용하면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 다. 그래서 이 소스를 유럽에 전파했다. 유럽에서는 토마토를 이용한 새로운 케첩이 만들어졌다. 기름진 요리를 즐겨 먹던 19세기 미국에서 토마토케첩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지금은 마치 케첩이 미국의 소스인 것처럼 생각할 정도다. 중국에서 는 미국이 표준화시킨 토마토케첩을 양가장洋書·번가장語市書 이라는 별도의 말로 부른다. 토마토케첩의 재료는 제조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토마토 과육에 정향clove · 계피·후추·고추·마늘·육두구 등을 넣고 조린다. 제품에 따라 많게는 17종이나 되는 향신료를 쓰기도도한다. 서양인에게 이런 향신료는 대항해시대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하던 사치품이었을 것이다. 토마토 역시 남아메리카가 원산지다. 케첩은 소아시아의 생선젓에 취향대로 허브와 향신료를 넣 고 참치와 고등어로 만든 로마의 가룸과 많이 닮았다. 로마는 지중해를 통해 얻은 빵과 가룸으로 제국을 다스렸다. 지중해는 로마의 젖줄이었다. 서양인들은 로마가 어디서 어떻게 젖과 꿀을 얻었는지 잊지 않았고, 가룸을 부활시켰다.
- 수도원에는 중세에 보기 드문 잉여생산물이 쌓이기 시작했 다. 로마 시대에는 콜로세움보다 큰 식량 창고를 능수능란하게 만들었으나 그런 건축 기술이 없었던 중세 수도원은 잉여생산물이 변질되거나 손실되기 전에 가공해 팔아야 했다. 그들의 선택은 맥주였다. 그러나 빵을 액체로 만든 맥주는 보름도 안 되어 변질되기 일쑤였다. 중세의 도로 환경을 고려하면 그들은 맥주의 보존 기간을 늘려야 했다.수도사들은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하다가 늪지대에서 자라 는 뽕나뭇과의 여러해살이풀인 홉을 찾아냈다. 9세기 수도사 들은 홉을 넣으면 맥주의 맛이 상큼해질 뿐 아니라 보존 기간도 늘어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수도원은 홉을 넣은 맥주를 유럽의 방방곡곡에 팔기 시작했다. 로마 시대 이후 흔적만 남았 던 유럽의 길이 수도원 맥주를 실은 수레를 따라 다시 모습을드러냈다.
- 봉건제가 정착되고 이민족 침입이 잦아들면서 11세기에는 배 고픔에 대한 공포가 현저하게 누그러졌다. 넉넉해진 먹거리 덕 분에 인구도 급등했다. 볼로냐 ·케임브리지 · 파리 · 마인츠 등 에 대학이 생겨났다. 대학은 아랍인들만 읽었던 그리스·로마 의 고전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500여 년간의 암흑 끝에 빛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교회는 암흑을 택했다. 중세 초기에 낮은 곳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설파했던 교회가 변심했다. 중세 교회가 누려온 열매가 너무 달콤했던 탓이다. 교회는 1077년 이탈리아 카노사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굴복시키며 유럽 최고의 정치권 력임을 증명했다. 그들의 욕심은 정치에만 미치지 않았다. 교 회는 왕보다 넓은 토지를 가진 대지주이자 유럽에서 보기 드문 지속 발전 가능한 상공인이었다. 중세 교회는 규모가 작을 뿐이지 20세기 등장한 스탠더드오일이나 포드자동차 같은 독점기업과 유사했다. 수도원은 청빈의 삶을 버리고 농노들과 소작 계약을 맺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곡식을 빻고 빵을 만들고 술을 빚는 일도 교회가 독점하기 시작했다. 로마법에 따라서 물레방아는 토지를 가진 사람의 소유였다. 방앗간 주인은 물레방아를 교회나 영주에게 바친 뒤 고용 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재산을 빼앗긴 방앗간 주인은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곡식의 양을 속이는 것은 물론이고 모래를 섞기도 했다. 종교가 앞장서서 지역 사회에 뿌리 깊은 불신을 조장한 셈이다. 장터를 여는 이권 역시 교회가 영주와 함께 독점했으며 다리나 성문을 지나는 사람 에게 통행세를 걷기도 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전리품으로 타락했다가 결국 이민족의 침입으로 무너졌다. 갈취로 돈을 벌던 중세 교 회도 비슷했다. 외부에서 결정타를 맞았다. 페스트가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것이다.
- 유럽인이 청어를 많이 먹은 데는 2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단백질 공급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서양인이 고기를 손쉽게 접하게 된 것은 19세기 냉동선이 발명되면서다. 그전까지 붉은 고기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사치품이었다. 게다가 유럽은 후추 등 향신료가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기 요리는 지금과는 다 른 고약한 냄새가 나는 염장 육류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염 장 생선은 위도 탓에 낮부터 컴컴해지는 북유럽의 겨울철을 지 탱해주는 긴요한 음식이었다. 발효를 하면 원래보다 풍부한 맛 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염장하면 맛이 없어지는 육류와 큰 차 이였다. 지금도 스웨덴에서는 수르스트뢰밍 sutstromming이라는 염장 발효 청어를 즐겨 먹는다. 이 음식은 세계에서 가장 냄새가 고 약한 음식으로 선정되었으며 일부 국가에서는 발효 가스의 폭 발 위험 때문에 수르스트뢰밍 통조림의 비행기 반입을 금지하 기도 했다. 그래도 스웨덴 사람들은 빵에 수르스트뢰밍을 올려 별미로 즐겨 먹는다.
- 청어의 수요 증가에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었다. 부활절 등 각종 종교적 행사를 앞두고 소고기나 가축의 육식을 금지하던 중세 그리스도교의 전통 탓에 염장 청어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청어의 수요 증가는 필연적으로 소금 거래량을 늘렸다. '배 위에 올라오면서부터 썩기 시작한다'는 등 푸른 생선을 오래 두고 먹으려면 염장이 필수기 때문이다. 청어 염장에 사용된 최초의 소금은 폴란드 등 동유럽 내륙지역에서 나는 암염이었다. 이 암염을 나르면서 북유럽의 교역로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 교역로는 남유럽의 해상 무역로와 함께 유럽의 주요한 상업 루트가 되었다. 이 상업 루트는 이슬람 제국의 무역로와 연 결되면서 북유럽 국가에 중국·인도 등 다른 대륙의 상품을 전 달했다. 암염의 무역로를 따라 북유럽의 핵심 상품인 모피·목재·구 리 등이 유럽 시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소금과 청어가 생존 필수품이라면 모피는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동양의 비단이나 도자기에 견줄 수 있는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이 때문에 모피 는 유럽 왕과 귀족의 주요 자금원으로 사용되었다. 유럽의 시장은 이슬람 시장과 연계되었다. 바그다드 시장에서 북유럽의 모피를 살 수 있었고 북유럽에서도 아랍의 향신료와 설탕, 동 양의 도자기와 비단을 구입할 수 있었다.
- 초기 자본주의 네트워킹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영국인은 자국 상품을 사지 않던 중국에 마약을 팔았고 영국보다 면사를 잘 만들던 인도 기술자들을 고문하고 죽였다. 피해 국가가 항 의하면 전쟁을 선포했다. 은행이 후원하고 국회가 인준하는 전 쟁에서 영국을 비롯해 유럽은 승승장구였다. 18세기까지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이었던 중국과 인도조차 이들을 당해낼 수 없 었다. 중국과 인도가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은 유럽 국가를 제외 하면 유럽 국가의 오만을 견제할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는 이 야기다. 세계대전으로 불린 유럽 국가 간의 엄청난 전쟁은 자본주의 초기부터 예정되어 있던 셈이다.
- 중세에서 자본주의로 가는 변곡점은 스페인의 1492년 아메리카의 발견이었다(인류사 혹은 인권의 관점에서 본다면 스페인의 침략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여기서는 경제사의 관점에서 발견이라고 쓰겠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럽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상 품 시장이라는 종속적인 지위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전 지 구적인 경제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왔다. 유럽인은 본의 아니게 몇몇 권역별로 운영되던 세계경제를 하나로 묶기 시작했고, 유럽에서 발생한 상공업 혁명을 전 세계에 퍼뜨렸다. 그 계기는 우연처럼 보인다. 포르투갈의 형님 격인 스페인 역시 새로운 무역로를 찾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사기꾼처 럼 보이는 벤처 사업가 한 명이 찾아왔다. 콜럼버스는 인도에 가는 길을 알고 있으니 스페인 왕실에서 투자를 해달라고 했 다. 그는 영국 왕 헨리8세Henry III에게도 투자 설명회를 열었는 데 거절당했다. 그래서 스페인에 온 것이다.
- 영국은 세계 최초로 자본주의경제를 선보이고 19세기에는 세계의 공장' 이라고 불릴 정도로 산업이 발달했지만 경제 구조는 스페인의 노예무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국은 1807년 인권을 이유로 세계 최초로 노예무역을 철폐했다. 흑인 인권을 생각해야 한다는 인식도 있었지만, 서구 열강이 너도나도 플랜테이션 농업에 나서면서 설탕 가격이 떨어진 것도 주요한 이유였다. 영국은 광대한 식민지에서 나오는 설탕 · 향신료·차·고무·면화를 독점으로 싼값에 확보해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기계로 가공해 공급하는 식민지 의존 경제 시스템이었다. 말이 공업 국가였지 영국 경제의 기초는 식민지형 플랜테이션 농업 생산물이었다. 바다를 지배한다는 자만감은 16세기 스페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눈을 가렸고 영국의 자본가들은 혁신을 등한시하는 부자의 저주에 빠졌다. 반면 미국과 독일 같은 후발 국가들은 식민지가 거의 없었 다. 그들은 영국처럼 식민지 플랜테이션에 의존한 경공업 대신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켰다. 결국 이 두 나라는 석유 기반 내연 기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쫓아낸 넓은 국토에 미친 듯이 철도를 깔았다. 영국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미국 철도에 투자했고 미국은 철강과 기계 산업을 발 전시켰다. 중공업 중심으로 발전한 미국의 공업 생산량은 19세기 말 이미 영국을 초월했다. | 미국과 독일이 유럽 귀족들이 장난감 취급했던 내연기관 자 동차를 만들려고 고민하고 있을 때, 영국은 자동차는 마차보다 빨라서는 안 된다는 '붉은 깃발법Locomotive Act'을 통과시켰다. 이 말도 안 되는 법은 무려 30년간 지속되었다. 이 법안은 내연 기관 분야에서 영국이 미국이나 독일에 비해 뒤처지게 했다. 후추와 설탕 같은 아열대 식민지 농업에 의존한 초기 자본주 의경제는 대량생산 · 대량 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자본주의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유럽 국가들이 깨달은 것은 두 차례 의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영국·프랑스·스페인 · 네덜란드 등 의 지배에 신음하던 제3세계 식민지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뒤 대부분 해방되었다. 그러나 식민지를 경험한 많은 국가가 폭력으로 이식된 자본주의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저개발국가로 남아 있다. 후추와 설탕이 밀고 끈 자본주의가 마냥 달콤하지 않은 이유다.
- 광고는 미국 노동자 계층에게 자동차와 집을 소비하기만 하면 중산층으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19세기 싱어 재봉틀이 최초로 고안한 할부 제도는 이 환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환상의 최전선에 있 던 전위부대는 코카콜라였다. 코카콜라 역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영웅이라기보다는 1920년대 미디어에 의해 탄생한 스타들과 비슷한 존재였다. 코카콜라는 남아메리카의 코카잎과 아프리카의 콜라잎으로 만 든 미국 남부 지역의 민간 약품 중 하나였다. 코카잎에 든 마약성분이 진통이나 피로 해소에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의약품에 매기는 세금을 음료수에 매기는 세금보다 높 이자 코카콜라는 코카잎 성분을 빼버렸다. 그리고 '진통’, ‘강장' 대신 '상쾌함', '행복'이라는 단어로 슬로건을 바꾸었다. 본질은 가고 거죽만 남은 셈인데 미국 대중은 본질과 상관없 이 코카콜라에 열광했다. 광고 덕분에 물로도 풀 수 없는 갈증을 콜라가 풀어준다고 소비자가 '욕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가치가 없는 코카콜라에 다른 소다수에 없는 상쾌함이 있다는 신화적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수많은 기업이 코카콜라의 마케팅 기법을 바이블로 삼게 된 이유다. 코카콜라의 광고에 대한 집착은 오랜 전통이었다. 1886년 코카콜라를 만든 존 펨버턴 John Pemberton은 한 해 뒤 동업자와 상의 없이 자신의 이름으로 상표를 등록한 뒤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2만 5,000달러가 있다면 2만 4,000달러를 광고비로 쓰고 나머지로 콜라 원액을 생산할 거야. 그렇게 하면 부자가될 수 있어.”
- 다이아몬드가 영원한 사랑을 뜻하게 된 것은 1947년 다이아몬드 회사인 드비어스의 광고 때문이다. 미국 청년이 1,500만 명 이나 파병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사회적으로 결혼에 대한 욕구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드비어스는 그런 예비부부에게 다이아몬드를 판매하고 싶었다. 광고를 맡은 회사는 '다이아몬드 영원한 사랑의 증표'라고 콘셉트를 잡았고, 이 광고는 미국 젊은이뿐 아니라 전세계의 젊은이에게 기존에 없던 욕망을 만들어냈다. 다이아몬드 반 지가 결혼식에 쓰인 유래는 1477년 오스트리아 막시밀리안 대 공(훗날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다)이 부르고뉴의 마리 공주에게 청혼하면서부터였다. 마리는 프랑스 일부와 벨기에·네덜란 드·룩셈부르크에 이르는 영토의 상속인이었다. 미모도 상당 해 당시 유럽 최고의 신붓감으로 꼽혔다. 이런 세기의 결혼식을 후원했던 사람은 유럽 광산업의 큰손이었던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 가문이었다. 500년 동안 대중은 전혀 몰랐던 유럽 왕족의 결혼 관습을 미국의 광고가 확산시킨 것이었다.
- 지금 우리는 과학의 초기 성공이 가져다준 기분 좋은 술기운이 아니라 다음 날 아침에 찾아온 끔찍한 두통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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