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고대 지중해에 식민지가 건설된 이유는 무엇일까?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막스 베버는 고대 경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사람들이 먼 곳에서 수입된 곡물에 의존했다는 점을 들었는데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 카르타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스와 로마는 곡물이 부족해 다른 지역을 침략했다. 그중에서도 고대 로마는 많은 노예를 부렸는데, 특히 속주의 대농장(라티푼디움)에서 노예의 노동력을 많이 활용했다. 요컨대 지중해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노예 등의 저렴한 노동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노예가 없었다면 그들의 경제는 제대로 기능하 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중해 경제 성장의 큰 한계였다. 또 그리스가 정치적으로 대제국을 형성하지 않고 상인의 상업 네트워크를 이용했던 반면, 카르타고와 로마는 제국을 형성해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로마에게 카르타고는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광대한 영토에서 생산된 물자를 자국 선박으로 수입하는 것이 로마의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 원래 중국은 해상 무역을 중시한 나라였다. 마르코 폴로도 저서 『동방견문록』에서 저장성의 항구 도시인 항저우가 매우 번성했다고 말했다. 항저우는 원래 견직물 생산으로 유명했던 도시지만 원나라 때 상업 도시로 더욱 유명해진 것이다. 무슬림 상인들은 당나라 초기부터 푸젠성의 취안저우에서 무역활동을 했다. 당의 수도인 장안까지 무슬림 상인이 들어와 있었으니, 당의 대표적 항구인 취안저우에 무슬림 상인이 있었던 것은 당 연한 일이다. 취안저우는 원나라 때 남방 해양 무역으로 한층 더 번 성했다. 일반적으로 원나라, 즉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 부에 위치한 육상 제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나라는 해상 무역에도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대략 요약하자면 중국의 해상 무역은 당나라 때부터 왕성해져 송나라 때 크게 발전했다. 상업을 중시한 원나라도 무역을 장려했다. 이런 점에서 원나라 역시 이전 왕조의 연장선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는 해상을 중심으로 한 상업 네트워크를 통해 인도의 면직물이 홍해로, 또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로 보내져서 아프리카의 세네갈과 감비아까지 도달했다. 아마도 이 면직물은 도중에 카이로, 누비아(이집트 남부와 수단에 위치한 지역), 아비시니아(현 에티오피아)의 상품 집산지를 경유한 다음 사하라 사막을 종단하는 대상에 합류해 육상으로 운송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원나라 때 인도와 중국 사이의 해상 무역이 매우 활발했 고 해상, 육상을 망라한 네트워크가 아프리카까지 뻗어나갔다. 그리고 그 중심에 무슬림 상인이 있었다. 게다가 다른 곳에서 온 상인들도 동시에 활약하고 있었다.
- 조공 무역은 당나라 때 시작되었다. 중국 주변 나라들은 금, 은, 노예, 축산 원료를 중국에 보냈고 중국은 도자기, 견직물, 철기, 동기, 칠기, 서적 등을 하사했다. 이후 송나라 때에는 조공 무역 대신 민간 무역이 발달하기도 했다. 요, 금, 원나라에서도 민간 무역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명의 초대 황제 홍무제(재위 1368~1398년)는 대외적으로 해금 정책을 채택해 해외 무역을 중단시키고 대형선 건조를 금지했다. 3대 영락제 때 해외 무역을 다시 활발하게 전개하는가 싶더니 앞에서 말했다시피 영락제 사후 다시 해금 정책이 실시되었다. 한편 조공 무역은 계속되었다. 청나라 때도 이런 추세가 이어졌지만 스페인과도 활발히 교류하는 등 조공 무역의 비중은 명나라만큼 크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생사, 도자기, 차 등을 수출했고 스페인에서는 은을 수출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1757년부터는 광저우에서만 외국 무역을 할 수 있게되었다.
- 이탈리아와 그 주변국들은 정말로 선진적이었을까? 이탈리아에서 세계 최초로 은행업이 발달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 다. 1406년 제노바에 창설된 산조르조 은행이 세계 최초의 은행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은행에서는 환전과 대출, 투자 기능이 크게 발달했을 뿐 오늘날 은행의 금융 중개 기능(개인에게서 받은 돈을 기업에 빌려주는 기능)은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 이 기능은 19세기가 되 어서야 유럽에서 발달했다. 18세기에 들어서 영국에서도 비슷한 시스템이 등장했다. 중앙은행인 잉글랜드 은행이 국채를 발행하고 의회가 그 변제를 보증하는, 소위 '펀딩 시스템'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이탈리아에서는 그런 시스템을 구축할 수 없었다. 또 이탈리아는 다른 지역에 앞서서 해상 보험업을 도입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보험에 반드시 필요한 확률론이 도입되지 않았으므로 발전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떤 사고가 어느 정도의 비율로 일어날지 모른다면 진짜 보험업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은 보험을 들었을 때 생길 수 있는 현실적인 위험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원래 중세의 회사란 일정한 목적을 위해 조직되었다가 사업이 종 료되면 해산하는 조직이었다. 그러므로 확률론이 당시 이탈리아에 존재했다 해도, 보험회사의 사업이 영속할 것을 전제했다면 매우 유 효했겠지만 영속화를 전제하지 않은 사업에는 그다지 쓸모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탈리아에서 발달했던 보험업은 그 상태 그대로는 결코 근대적인 보험업이 될 수 없었다. 이탈리아 경제가 몰락한지 상당히 오래된 19세기에야 드디어 확률론을 이용할 만한 수학적 지식이 보험업계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이탈리아의 은행업, 보험업에는 결정적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중근세 이탈리아의 경제 시스템은 근대적 시스템으로 발전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이탈리아에는 생태적 한계가 있었다. 조선업 때문에 삼림을 개간한 것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지중해 연안에서는 한 번 벌채한 삼림이 두 번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그 결과 조선업과 해운업이 쇠퇴해 북유럽 같은 대규모 상선단을 보유할 수 없게 되었다. 16세기 내내 이탈리아에서는 대규모 벌채가 이어졌다. 그래서 베네치아는 목재뿐만 아니라 선체까지 외국에서 구입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완 성된 배를 외국에서 구입하는 것을 정부가 법률로 금했지만 결국은 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목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에너지 공급에 있어서의 한계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영국은 북해 연안의 덴마크(노르웨이), 독일, 네덜란드에 석탄을 수출했다. 영국이 북해 경제권의 에너지 공급원으로 기능한 것이다. 또 삼림 자원이 풍부한 발트해 지방에서도 대량의 목탄이 생산되었다. 반면 삼림 자원이 고갈된 지중해 경제권에서는 목탄을 조달하기가 어려웠다. 이탈리아는 지금도 석탄을 전혀 생산하지 못한다. 이탈리아의 경제 성장은 천연 자원의 고갈이라는 점에서 큰 한계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지중해에서는 오랫동안 노예가 노를 젓는 갤리선을 활용했다. 노잡이로는 죄수나 포로, 노예, 간혹 자유민까지도 동원 되었다. 지중해의 상인이 이처럼 노동 집약적인 선박을 활용한 것은 그들이 향신료 같은 고가의 상품을 거래했고 임금수준이 낮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해운업은 기본적으로 값싼 노동력으로 유지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탈리아의 번영은 저렴한 노동력이 사라지면 끝날 운명에 처해 있었다.
- 인도양과 동남아시아에는 다양한 종파의 상인 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세력이 가장 강했던 집단이 무슬림상인이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상인, 네덜란드 상인, 영국 상인이 차례차례 세력을 키우면서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물류가 유럽 상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17세기에는 네덜란드인이 동남아시아산 향신료를, 18세기에는 영국인이 인도산 면을 운송하게 되었다. 인도와 중국의 차도 유럽 선박으로 운송되었다. 동남아시아 내 무역에서도 유럽 선박의 비중이 높아졌다. 아시아의 물류 시스템이 완전히 유럽인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럽인과 아시아인이 서로 적대한 끝에 유럽인이 이겼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가 아니었다. 유럽은 대항해 시대를 경험했으므로 아시아보다 항해 기술이 뛰어났을 것이다. 아시아인은 희망봉을 돌아 유럽까지 항해한 적이 없었지만 유럽인은 나침반을 써서 원거리를 항해했다. 게다가 중국이 해금 정책을 취함으로써 경쟁 상대를 없앤 것도 중국의 항해 기술 발전을 늦추는 데 한몫했다. 어쨌든 유럽이 우월한 군사 기술로 전쟁에 이겨 물류 시스템을 변혁한 것이 아니었다. 국가 권력과 관계없는 상인들 스스로가 물류 시스템을 변혁한 것이다.
- 네덜란드에 이어 세계사상 두 번째로 패권 국가가 된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세계에 팍스 브리태니카 (직역하면 영국의 평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실제로 이 말은 영국이 가져온 평화가 아니라 영국이 빅토리아 여왕 시대(재위 1837~1901년)에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가진 대제국이 된 것을 뜻할 때가 많다. 이때 영국은 [지도 13]에서처럼 대단히 광대한 식민지를 확보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이 상징적 인 말이야말로 팍스 브리태니카의 실상을 드러낸다. 영국은 세계 최대의 함대를 갖추어 팍스 브리태니카를 유지했다. 이 함대는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세계 평화는 군사력으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영국의 세력 범위 안에는 영국의 식민지 및 자치령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식민지가 아니면서 경제적으로 거의 식민지가 된 곳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대표가 중국과 라틴아메리카(중남미)였다. 그들은 영국의 정치적 지배를 받는 식민지, 즉 '공식 제국이 아니라 식민지가 아니면서도 실질적으로 영국의 지배를 받아들였다는 의미에서 '비공식 제국으로 불린다. 다른 서양 제국들도 영국만큼은 아니지만 식민지를 많이 건설했다. 거기에는 일본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비공식 제국은 영국에게만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영국이 세계 물류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팍스 브리태니카 시대에 영국은 전 세계에 함대뿐만 아니라 상선 단을 파견해 영국 '제국을 유지했다. 영국은 분명 세계 최대의 해군 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제국을 군사적으 로 유지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였다. 그러나 영국 제국이 군사력으로 만 유지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세계화가 진행된 19세기에 영국이 세 계 최대의 상선단으로 전 세계의 물품을 운송했다는 사실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영국이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산업혁명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영국의 경제력이 강해진 것은 세계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영국의 증기선이 많은 상품과 사람을 운송하게 된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영국의 증기선이 없었다면 세계경제는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 영국은 자국의 선박을 이용함으로써 외국인, 그중에서도 네덜란드인에게 지불하는 운송료를 줄여 국제 수지를 크게 개선했다. 다시말해 근세의 잉글랜드, 더 넓게 보아 영국은 보호 무역이 아닌 '보호 해운업 정책을 쓴 것이다. 영국이 이 정책을 채택한 것은 타국과의 물류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20세기 초에는 톤수로 환산했을 때 영국 선박이 세계 선박의 약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영국 선박들이 전 세계의 상품을 운반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이 한창이던 18세기 말에 영국이 네덜란드를 제치고 유럽 최대의 해운 국가로 발돋움했다고 한다. 요컨대 제국주의 시대였던 19세기에 영국이 세계의 상품을 운송하는 국가, 즉 세계 물류를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다는 뜻이다.
- 프로토 공업화 이론의 핵심은 '인구 증가다. 앞서 말했다시피 근세 유럽에서는 인구 증가로 말미암은 식량 부족 사태가 발생하고 있었 다. 그러나 농촌이 농업 지대와 공업 지대로 나뉨으로써 농업 생산 성이 높아져 식량 부족이 해결된다는 멘델스의 주장과는 달리, 발 트해 지방에서 수입된 곡물 덕분에 식량 부족이 해소되었다. 이것이 멘델스의 오류였다. 그렇다면 유럽의 아마, 마, 리넨의 생산량이 늘 어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항해 시대가 시작된 16세기 초 서유럽 국가들은 아마도 가까 운 지역에서 해운 자재를 조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먼 곳까지 가기 위해선 턱없이 부족했으므로 발트해 지방의 해운 자재를 점점 더 많이 수입하게 되었다. 따라서 발트해 지역의 무역 흑자는 곧 서유럽 측의 적자로 이어졌다. 폴란드도 곡물을 수출함으로써 무역 흑자를 냈고 발트해 연안의 다른 지역들도 해운 자재를 수출해 무역흑자를 냈다. 이렇게 발트해 연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가처분 소득이 늘어났다. 앞서 말했다시피 프로토 공업화의 주 생산품은 아마, 마, 리넨 등 이었다. 이것들은 선박의 로프나 돛 등에 쓰이는 해운 자재였으며, 그중 리넨은 노예가 입는 옷에도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프로토 공업화와 유럽의 대외 진출이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럽의 농촌이 공업 지대와 농업 지대로 나뉜 것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사실 그 공업 지대란 유럽의 대외 진출에 필요한 해운 자재를 공급하는 지역이었다고 봐야 한다. 독일의 역사학자 클라우스 웨버에 따르면, 현재의 폴란드와 체코에 해당하는 슐레지엔에서 생산된 섬유 제품인 리넨은 주로 의류의 재료로 쓰였다. 그것은 프랑스와 포르투갈을 거쳐 서아프리카로 갔고, 아프리카 노예들의 옷이 되었다. 인도산 면직물은 내구성이 떨어 졌던 반면 리넨은 착용감은 비록 좋지 않았지만 내구성이 뛰어났다. 그래서 노예가 리넨 옷을 입게 된 것이다. 노예들은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뒤에야 리넨이 아닌 면 옷을 입기 시작했다. 발트해 지방의 아마, 마, 리넨이 없었다면 서유럽은 대항해 시대를 열 수도 없었고 18세기에 대서양 무역을 확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 프로토 공업화가 공업화의 첫 번째 국면이고 영국의 산업혁명이 두번째 국면이라는 멘델스의 견해는 이미 오류로 판명되었다고 앞서 말했다. 즉 프로토 공업화는 영국의 산업혁명(공업화)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했다시피 프로토 공업화와 이후의 공업화(산업혁명) 사이에 직접적 연관성은 없지만 간접적 연관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즉 프로토 공업화가 없었다면 대서양 경제가 형성되 지 않았을 것이고 대서양 경제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영국의 산업혁 명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면직물 공업이 발달한 덕분에 일어났다. 신세계 식민지에서 재배된 면화를 이용할 수 있었으므로, 다시 말해 대 서양 경제가 형성되었으므로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대서양 경제의 형성에는 발트해 지방에서 생산된 해운 자재가 반드시 필요했다. 반대로 영양이 부족하기 쉬운 발트해 지방 사람들에게는 신세계에서 생산된 설탕이 중요한 열량 공급원이 되어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토 공업화가 공업화의 첫 국면을 형성한 것은 사실이 다. 이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실제로 영국이 대량의 해운 자재를 발트해 지방에서 수입함으로써 그 지방을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멘델스 이후 진 행된 연구에서는 프로토 공업화로 분류할 수 있는 경제 현상이 세 계 이곳저곳에서 발생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러다 보니 왜 하필 유럽에서, 그중에서도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공업화(산업혁명)가 일어 났느냐 하는 의문에 대답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듯하다. n그러나 만약 내가 제시한 학설이 타당하다면 그 의문에 충분히 대답할 수 있다.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공업화가 일어난 것은 당시 영국이 발트해 지방에서 아마, 마, 리넨 등 해운 자재를 수입해 대서양 무역에 힘쓰는 동시에 미국에서 재배한 면화를 본국으로 가져와 면직물로 가공하는 시스템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 독립하자마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전쟁(1789~1815년)이 발발한 것 역시 미국에게는 행운이었다. 미 대륙에 해운 자재가 풍부했으므로 미국은 조선업을 발전시키기 쉬웠다. 유럽 국가들이 발트해 쪽에서 해운 자재를 수입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 미국은 외국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립을 유지함으로써 해운업을 크게 성장시켰다. 당 시 미국의 주요 항구는 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턴, 볼티모어였다. 또 미국은 프랑스의 도시 보르도와의 해상 무역에 힘썼다. 그 노력의 진가는 1793년에 발발한 프랑스 혁명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 지중해에는 영사관을 설치해 스웨덴, 덴마크와 함께 중립 정책을 펼치며 무역업에 힘썼다. 이 지도에 등 장한 지중해의 항구들은 서로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었으므로 한 항구가 폐쇄되더라도 문제가 없었다. 덕분에 유럽은 전쟁 중에도 상 업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미국은 그런 점을 영리하게 활용해 해운업을 발전시켰다. 미국의 선주들은 중립 정책을 최대한 활용해 선박을 계속 늘렸 다. 그들은 태평양을 횡단해 남미 대륙 남단의 혼 곳을 지난 뒤 아프리카 남부의 희망봉을 돌아 지중해와 발트해까지 가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유럽은 미국의 중립 선박이 없었다면 필요한 물자와 자재를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대서양과 유럽의 결합에 미국 선박이 크게 기여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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