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흑역사

역사 2020. 6. 21. 14:04

- 인류가 아무리 눈부시게 발전하고 아무리 많은 난관을 극복했다. 해도, 파국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역사 속에서 예를 찾아보자. 9세 기 북유럽의 장수였던 '천하장사 시구르드’는 적장 뻐드렁니 마엘 브릭테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고 의기양양하게 귀환했다. 그러나 마엘 브릭테의 뻐드렁니가 말 타고 달리던 시구르드의 다 리를 계속 긁었고, 그 상처의 감염으로 시구르드는 며칠 만에 죽고 만다. 천하장사 시구르드는 자기가 이미 죽인 적에 의해 죽임을 당한 불 명예스런 주인공으로 전쟁사에 길이 남았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두 가진다. 첫째 자만은 금물이다. 둘째, 적의 치아 위생에 유의하자. 이 정도일 것이다. 이 책의 중심 주제는 자만과 그로 인한 파멸이니, 옛사람들의 구강 위생에 더 관심 있는 독자에게는 양해를 구한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간다면, 두 사람이 맞붙은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시구르드가 마엘 브릭테에게 각자 병사 40명씩 데리고 싸우자고 도전했기 때 문이다. 도전을 수락한 마엘 브릭테 앞에, 시구르드는 병사 80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러니 이 이야기의 또 한 가지 교훈은 철저하게 나쁜 놈은 되지 말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 흥미롭게도 이 또한 이 책에서 반복되는 주제이 기도 하다.
- 우리 머리는 교향곡을 작곡하고 도시를 계획하고, 상대성이론을 생각해내지만, 가게에서 포테이토칩 하나를 살 때도 무슨 종류를 살지 족히 5분은 고민해야 기우 결정할 수 있다.
- 진화라는 과정은 영리함과 거리가 멀다. 멍청 할 뿐 아니라 아주 고집스럽게 멍청하다. 진화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래저래 죽을 수 있는 수천 가지 시나리오를 피하고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잘 넘어갈 때까지만 죽지 않고 사는 것, 그것 뿐이다. 그렇게만 되면 성공이다.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다시 말해 진화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 지금 당장' 이익이 되는 특성 은 무조건 선택된다. 그 결과 훗날 9대손쯤에서 너무 구닥다리 특성으로 고생하지 않을지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미래를 내다보고 반영한다든지 하는 것도 물론 전혀 없다. 이를테면 “아, 이 특성은 지금은 좀 거추장스러워도 100만 년 후에는 후손들한테 진짜 유용 하겠군. 좋아, 선택하자”, 그런 경우는 없다. 진화의 원리는 앞을 내다보는 것이 아니다. 그냥 먹을 것과 짝짓기에 굶주린 개체들을 인 정사정없는 세상에 무진장 많이 풀어놓고 누가 제일 덜 망하나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뇌는 최고의 사고 기계를 목표로 세심하게 설계한 결과물이 아니라, 그저 요령과 땜질과 편법을 덕지덕지 모아놓은 것 에 불과하다. 그 모든 것은 예컨대 우리의 먼 조상이 먹을 것을 찾는 데 2퍼센트 더 유리했거나, 아니면 '앗, 조심해, 사자야!'라는 개념 을 전달하는 데 3퍼센트 더 유리했기에 선택된 요령들이다.
- 기준점 휴리스틱이란 뭔가를 결정할 때, 특히 사전 정보가 부족할 수록 제일 처음 얻은 정보에 따라 결정이 크게 좌우되는 것을 가리킨다.
- 한편 가용성 휴리스틱은, 우리가 모든 정보를 신중히 따지기보다. 는 무엇이든 제일 쉽게 떠오르는 정보를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가장 최근의 사건이라든지 더 극적이고 기억에 남는 사실을 기준으로 세계를 바라보려는 엄청난 편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현실을 더 정확히 반영할 만한 평범하고 시시한 정보는 그냥 흘려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끔찍한 범죄를 보도하는 자극적인 뉴스를 보고 나면 범죄율이 실제보다 높다고 생각하게 되는 반면, 범죄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무미건조한 뉴스는 봐도 생각이 잘 바뀌지 않는다. 이는 (더 찾고 상대적으로 덜 충격적인) 자동차 사고보다 (드물고 더 충격적인) 비행기사고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대중도 정치인도 테러라고 하면 즉각적, 반사적으로 반응하지만, 훨씬 더 치 명적이면서 동시에 평범한 위험 요소는 뒷전으로 취급하는 이유다. 2007년에서 2017년까지 10년 동안 미국에서는 테러보다 잔디 깎는 기계 때문에 죽은 사람이 더 많지만, 아직까지 미국 정부가 '잔디 깎는 기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 기준점 휴리스틱과 가용성 휴리스틱을 함께 쓰면 위급한 순간에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라든가 일상생활에서 소소한 결정을 내리는 데는 아주 효과적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복잡한 특성을 다 고려해 좀 현명한 결정을 내릴라치면 이 두 휴리스틱이 골칫거리가 된다. 우리 뇌는 가장 먼저 들은 것이나 가장 빨리 머리에 떠오르는 것에 자꾸 이끌리면서 늘 안전지대에 머무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 ‘더닝 크루거 효과'라고 하는 유명한 인지 편향 현상이 있는데, 이 책을 대표하는 이론으로 삼아도 될 듯하다. 이는 심리학자 데이비 드 더닝과 저스틴 크루거가 무능에 대한 무지Unskilled and Unaware of It」라는 논문에서 제안한 효과로, 우리가 살면서 익히 알던 현상을 입증한 것이다. 즉, 어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 가하는 경향이 있고, 잘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엄청나게 과 대평가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결점을 말 그대로 잘 모르니, 그 결점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당연히 모른다. 그래서 마냥 낙관하고 과신하다가 사고를 치고 일을 그르치기를 끝없이 반복한다(이 책을 읽다 보면 알겠지만, 우리 뇌가 저지르는 온갖 실수 중에서도 ‘과신’과 ‘낙관'이야말로 가장 위험하다.
- 우리는 군중에 편승하려는 욕구 때문에 각종 유행과 열풍과 광풍에 까딱하면 휩쓸린다. 한 사회 전체가 이성을 내동댕이치고 광란의 집착에 일시적으로 휘몰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순수하게 신체적인 형태로는 중세에 약 700년에 걸쳐 주기적으로 유럽을 덮쳤던 불가해한 춤바람, '무도 광'을 예로 들 수 있다. 갑자기 춤을 추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수십 만 명에게 전염병처럼 확산된 현상으로, 춤추다가 탈진해 죽는 사람 들까지 있었다. 돈과 관련된 형태도 많았다. 군중 편승 욕구와 일확천금 기회라면 믿고 보는 습성이 돈 욕심과 결합해 벌어진 일들이다. 이렇게 해서 생겨나는 것이 실제 가치보다 평가 가치가 훨씬 높아지는 금융 거품 이다. 본래 가치가 높지 않은 대상이라 해도 남들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돈을 벌 수 있으니 너도나도 투자한다. 물론 거품은 꺼 지기 마련이고, 많은 사람이 큰돈을 잃고 경제 전체가 몰락해버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집단적 공황이라는 형태도 있다. 그 시발점은 주로 우리의 공포를 조장하는 헛소문이다. 전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건 역사적으로 마녀사냥 비슷한 광풍이 꼭 벌어졌다(유럽에서는 16세기에 서 18세기까지 벌어진 마녀사냥에 약 5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 인간은 발길 닿는 곳마다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존재다
- 농경이 지속된 것은 농경으로 모든 이들의 삶이 더 나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농경사회가 이전 사회 보다 생존 경쟁에서 유리했기 때문이다. 즉, 농경사회는 자손 번식 속도가 빠른 데다가(농경은 더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고, 한곳에 머물러 살면 아이가 걸음마를 하기 전에 다음 아이를 또 낳을 수 있다), 집단적으 로 점점 더 넓은 땅을 차지하면서 농사짓지 않는 이들을 다 밀어내 게 된다. '농경은 끔찍한 실수였다' 설의 지지자인 저술가 재러드 다 이아몬드가 1987년 「디스커버」에 쓴 표현을 빌면, 인구 제한이냐 식량 증산이냐, 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후자를 선택했고, 그 결과 기아, 전쟁, 폭정을 떠안았다. 한마디로 우리는 질보다 양을 선 택한 것이다. 역시 인간답다. 세상이 이 꼴이 된 게 '다 농경 때문이다!'라고 막연히 사방에 손 가락질을 하고 싶지만, 농경의 시작은 그 밖에도 더 직접적이고 스 펙터클한 각종 참사를 빚어냈다. 농경에 착수하면서 인간은 주변 환 경을 마음대로 바꾸기 시작했으니, 농사라는 게 그런 것일 수밖에 없다. 식물을 가져다가 본래 있을 곳이 아닌 어디 다른 곳에 꽂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주변 풍광을 변화시키게 된다. 필요 없는 것은 없 애고, 그 자리에 필요한 것을 더 채워넣으려고 궁리하게 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인간이란 그런 일이 낳을 여파를 잘 따져볼 줄 모른다는 게 확실하다.
- 라파누이인들은 운이 나빴던 데다가 바보짓을 벌여 자멸하고 만 것. 일단 운이 나빴던 것이 라파누이섬은 지리적, 생태적으로 삼림 파괴에 유달리 취약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앞서 등장했던 '농업은 인류 최악의 실수' 설의 주창자)가 라파누이 문명을 집중 조명한 저서 『문명의 붕괴 Collapse』에서 설명하듯, 이스터섬은 폴리네시아 지역 의 다른 섬들에 비해 후미진 곳에 위치한 데다가 좁고 평탄한 지형 에 춥고 건조한 기후였다. 한마디로 나무를 베면 자연적으로 보충되 기 힘든 조건이었던 것이다.
- 그리고 바보짓을 했던 것이, 라파누이인들은 더 좋은 집을 짓고 더 좋은 카누를 만들고 석상을 운반하는 설비를 더 좋게 개선하려고 열을 올린 나머지 나무를 계속 베어내기만 하고 나무가 다시 자라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별안간 나무가 한 그루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전형적인 공유지의 비극' 이었다. 나무 한 그루를 벤 한 사람은 잘못이 없었을지라도, 결국 모든 사람의 잘 못으로 상황은 회복 불능이 되어버렸다. 숲이 사라지자 라파누이 사회는 막심한 타격을 입었다. 나무가 없 으니 고기잡이할 카누도 만들 수 없었고, 토양이 비바람에 깎여나가 황폐해지면서 산사태가 일어나 마을이 파묻혔으며, 추운 겨울을 나 려니 그나마 남은 초목마저 긁어모아 불을 때야 했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날로 희소해지는 자원을 놓고 집단 간에 경쟁이 거세졌다. 이는 비극적이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수순으로 이어진 듯하다. 절박한 인간은 사회적 지위를 갈망하거나 사기충천이 필요하거나 자신이 큰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위안이 필요할 때, 왕왕 그 러는 습성이 있으니까. 즉, 그들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오히려 더 강 하게 밀어붙였다. 라파누이인들은 점점 더 큰 석상을 만드는 데 사 활을 건 것으로 보인다. 왜 그랬느냐고? 그러게 말이다. 인간이란 해 결이 난망해 보이는 문제에 부닥쳤을 때 원래 잘 그런다. 섬에서 최 후로 제작된 석상은 아예 채석장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다른 석 상들도 놓일 자리까지 가다 말고 길가에 나뒹굴었다. 일이 갑자기 엎어진 것이다. 폴리네시아인들은 절대 필자나 독자보다 덜 똑똑한 사람들이 아 니었다. 미개하지도 않았고 환경에 무지하지도 않았다. 혹시라도 '와, 환경이 파탄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문제를 외면하고 문제의 발단이 된 일을 더 벌였다니, 바보 아냐?' 하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 다면....... 음, 주변을 좀 둘러보시죠? 실내 난방 온도 좀 적당히 맞추고 쓰레기 재활용도 좀 잘 하시고요. 『문명의 붕괴』에서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 야자수를 벤 이스터섬 주민은 뭐라고 하면서 그 나무를 베었을 까?” 정말 좋은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 이다. 아마 “인생 뭐 있나!”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더 좋은 질문은 마지막에서 두 번째 나무나 마지막에서 세 번째, 네 번째 나무를 벤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베었느냐가 아 닐까? 우리 인류사 전반을 예리하게 통찰해볼 때, 그 정답은 '내 문 제도 아닌데 뭐' 정도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 10억 마리의 천적이 갑자기 사라지자 중국의 메뚜기들은 매일매 일이 잔칫날이었다. 여기저기서 곡식을 조금씩 쪼아 먹는 참새와 달리 메뚜기 떼는 거대한 공포의 구름을 이루어 중국의 논밭을 통째로 싹쓸이했다. 1959년 마침내 전문가(참새 소탕 작전은 위험하다고 일찍 이 경고했던 조류학자 정줘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졌고, 공식 유해 동 물 명단에서 참새가 빠지고 대신 빈대가 들어갔다. 그러나 때는 이 미 늦었으니, 참새 10억 마리를 박멸하고 나서 '어, 이게 아니네, 취 소' 하고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 물론 1959년에서 1962년까지 중국을 덮친 대기근은 참새 소탕 뿐 아니라 여러 잘못된 결정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게 원인이 었다. 당의 주도에 따른 전통적 자급 농업에서 고부가가치 상품작물 재배로의 전환, 소련 생물학자 트로핌 리센코의 유사 과학 이론에 기반한 파괴적 농경 기법 도입, 농산물을 몰수해 지역사회 내에서의 소비를 막은 중앙정부의 정책 등이 모두 제각기 몫을 했다. 게다. 가 고위직이든 하위직이든 우수한 실적을 보고한 공무원들에게 포 상이 주어지다 보니 국가 지도자들은 모든 게 잘되고 있고 식량 수 급이 넉넉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홍수와 가뭄 등 기상 악조건이 몇 년간 이어지던 끝에 별안간 식량 비축분이 바닥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참새 박멸과 그로 인한 메뚜기 떼의 창궐이 대재앙을 낳 은 주요 원인이었음은 분명하다. 당시 대기근으로 인한 사망자 수 는 적게는 1,500만 명에서 많게는 3,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무려 1,500만 명의 인간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조차 확실치 않다니 더 오싹해질 따름이다.이 참사가 남긴 교훈은 자명하다. 뒷일을 아주 확실하게 장담할 수 없다면 자연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장담할 수 있어도 웬만하 면 건드리지 말자. 앞으로라도 명심하면 좋겠지만......... 그럴 것 같지 않다. 2004년, 중국 정부는 사스SARS 바이러스 확산을 막고자 사향고양이에서 오소리까지 각종 포유동물을 집단 살처분하라고 명령했다. 역시 인간은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능력이 모자라는 것일까.
- 나서서 남에게 명령하길 좋아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것이 옳은 일인지는 의문이지만
- 절대 권력자들이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막장짓을 벌이곤 했기 때문에 역사상 여러나라에서 그 폐단을 줄이고자 민주주의라는 것을 시도하곤 했다.
- `절대 권력자들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막장짓을 벌이곤 했 기에, 역사상 여러 나라에서 그 폐단을 줄여보고자 이따금씩 '민주 주의'라는 것을 시도하곤 했다. 그리고 그 성패 여부는 다양했다. 민주주의가 처음 어디서 시도되었느냐 하는 것은 논란이 있다. 먼 옛날 소규모 사회에서도 틀림없이 다양한 형태로 집단적 의사 결정 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또 2,500년 전 인도에도 민주주의에 근접 한 제도가 존재했다는 근거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와 비슷 한 시기인 기원전 508년,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민주정치를 처음으로 도입하고 법제화한 것으로 본다. 물론 민주주의의 주요 요건은 (요컨대 모든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 시민이 마음에 들지 않는 정부를 교체할 권리 등) 누구까지를 '시민' 으로 보느냐의 문제와 직결된다. 역사를 통틀어 여러 나라에서 여성, 빈민, 소수민족 등 보잘것없는 약자들은 시민으로 보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권력을 아무한테나 줄 수야 없지 않았겠는가? 민주주의의 또 한 가지 문제는, 누구든 민주적 절차에 의해 권력 을 잡는 것은 좋아하지만 권력을 빼앗길 것 같으면 갑자기 영 달가 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계속 유지하는 데만도 참으로 엄청난 노력이 들어간다. 예컨대 로마에서는 민주주의가 전제정치로 퇴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각종 묘책을 시도한 바 있다. 한 가지 방법은 행정과 군사를 모 두 관할하는 선출직 최고 통치자 집정관의 역할을 두 사람에게 나누어 맡기는 것이었다. 임기는 1년이었고, 두 사람이 한 달마다 번 갈아 주요 통치권을 행사했으며, 로마군 4개 군단을 한 사람이 2개 군단씩 맡아 지휘했다. 이는 어느 한 사람도 절대 권력을 손에 쥐지 못하게 하는 꽤 영리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4개 군단을 모두 전투에 투입해야 할 때는 이상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가령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 때가 그랬으니, 로마 군은 코끼리 애호가였다는 한니발 장군이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결 전을 벌여야 했다. 이 전투에서 두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군 지휘권을 '하루마다' 번갈아 행사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전술적 견해가 충돌한다는 게 문제였다. 하루는 신중한 파울루스가 지휘를 맡고, 또 하루는 과감 한 바로가 지휘를 맡았으니 말이다. 로마군을 전장으로 끌어들이고 자 했던 한니발은 바로가 지휘권을 잡을 때까지 그냥 하루를 기다렸 고, 간단히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전투는 로마군의 전멸에 가까운 참 패로 끝났다. 사실 로마는 이런 내분을 막기 위해 마련해둔 방책이 있었다. 비상시에 전권을 위임받는 '독재관'을 임명해두는 것. 독재관은 일단 임무를 완수하고 나면 바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어 있었다 (공교롭 게도 로마 원로원은 칸나이 전투 직전에 독재관이 쓰는 전술이 마음에 들지 않아 독재관을 해임해버렸다). 이 역시 원론적으로는 좋은 생각이었지 만, 절대 권력에다가 대군의 지휘권까지 손에 넣은 사람이 인간적으 로 순순히 자리에서 물러나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독재관들 대다수는 별 탈 없이 물러났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야망가가 '권력 맛을 보니 참 괜찮은데 불만 없으시면 제가 좀 갖고 있겠다'라고 했다. 카이사르의 끝은 결국 좋지 않았지만, 그의 후계 자들 역시 절대 권력을 맛보고는 절대 놓지 않으려 했으니, 로마 공 화국'은 금방 '로마 제국'으로 변해버렸다.
- 히틀러는 집단 학살광이라는 점 외에도 우리가 흔히 간과 하기 쉬운 일면이 있었다. 대중문화 속에서 히틀러는 오랫동안 조롱 거리로 묘사되어왔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나치의 조직은 무자비하 리만치 능률적이었으며 독재자 히틀러는 자기 일, 즉 독재에는 밤낮 으로 열심히 임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히틀러는 무능하고 게으르고 병적으로 자기중심 주의적인 사람이었고 그의 정부는 완전히 코미디였다는 사실을 알 아둘 만하지 않을까. 사실 오히려 그 덕분에 그가 득세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독일 지도층은 그를 시종일관 과소평가했다. 그가 총리가 되 기 전, 정적들은 그의 투박한 연설과 유치한 유세를 들어 그를 한낱 웃음거리로 치부했다. 어느 잡지에 따르면 그는 한심한 얼간이'였다. 또 어느 잡지는 그의 당이 '무능력자 집단'이며 '어중이떠중이 들 잔치를 과대평가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선거를 통해 나치가 독일 의회 최대 정당이 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히틀러가 허세에 찬 바보이고 호구이니 똑똑한 사람들에게 쉽게 조종당하리라 생각했다. 당시 독일 총리 자리에서 밀려난 프란츠 폰 파펜은 권력을 되찾으려고 칼을 갈고 있었다. 그는 히틀러를 봉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그와 함께 연립내각을 수립하기 위 한 논의에 들어갔다. 마침내 1933년 1월, 협상이 성공해 히틀러가 총리, 파펜이 부총리가 되고 내각은 파펜에 우호적인 보수 관료들로 채워졌다. 파펜은 승리를 확신했다. 자기에게 실수했다고 경고하는 지인에게 ‘그자는 우리 하수인'이라며 안심시켰다. 그리고 다른 지인에게는 두 달이면 히틀러는 구석에 몰려 찍소리 못 하게 될 것이 라고 자신했다.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두 달 만에 히틀러는 오히려 나라를 완전히 장악했고, 자신에게 초헌법적 권한과 대통령직에다 의회까지 통째로 넘겨주게 될 법을 통과시켜달라고 의회를 설득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국가가 순식간에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게 되었다. 독일의 지도적 인사들은 왜 그렇게 시종일관 히틀러를 얕잡아 보 았을까? 히틀러의 무능함을 제대로 짚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능함도 히틀러의 야욕 앞에서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실제 로 히틀러는 정부를 운영하는 능력이 형편없었다. 그의 공보 담당관 오토 디트리히는 훗날 회고록 『내가 알던 히틀러』에 이렇게 적기도 했다. “히틀러는 독일을 12년간 통치하면서 문명국가에서는 유례가 없을 만큼 정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았다.”
- 히틀러는 문서 읽기를 질색했다. 보좌관들이 올린 문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일이 잦았다. 부하들과는 정책을 의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머리에 떠오르는 내용으로 일장 연설만 일방적으로 늘어놓았다. 말이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하고 꼼짝없이 듣고 있어야 했으므로, 부하들에게는 공포의 시간이었다. 히틀러 정부는 늘 난장판이었다. 관료들은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 몰랐고, 누가 무슨 일을 맡고 있는지 잘 몰랐다. 히틀러는 어려운 결 정을 해달라고 하면 결정을 한없이 미뤘고, 결국 느낌대로 결정해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니 측근들도 그가 뭘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 에른스트 한프슈팅글은 훗날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그는 어찌나 종잡을 수 없는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렇다 보니 관료들은 나랏일 수행은 뒷전이고 종일 서로 갈라져 싸우고 헐뜯기에 바빴고, 그날그날 히틀러의 기분 상태에 따라 어떻게든 그의 눈에 들거나 그의 눈을 피할 생각뿐이었다.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히틀러가 매사를 제 뜻대로 하려고 일부러 수를 쓴 것이냐, 아니면 그냥 업무 지휘 능력이 형편없이 떨 어졌던 것이냐, 하는 논란이 좀 있다. 디트리히는 이것이 분열과 혼 돈을 조장하기 위한 계책이었다는 입장이다. 히틀러가 그 방면의 선수였던 건 맞다. 하지만 히틀러의 개인적인 습관을 볼 때, 그냥 일하기 싫어하는 자아도취증 환자에게 나라를 맡겨놓으니 그리 될 수밖 에 없었을 것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 히틀러는 엄청나게 게을렀다. 그의 보좌관 프리츠 비데만에 따르 면, 그는 베를린에 있을 때도 11시가 넘어서야 일어났고, 점심 전까 지 하는 일이라고는 신문에 실린 자기 기사를 읽는 것 정도가 고작 이었다(디트리히가 꼬박꼬박 기사 스크랩을 가져다주었다). 그래도 사람 들이 자꾸 자기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하니까 베를린에 있기를 좋아 하지 않았다. 기회만 되면 집무실을 떠나 오버잘츠베르크의 개인 별 장에 갔고, 거기서는 당연히 일을 더 안 했다. 그곳에서는 아예 오후 2시까지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하는 일은 산책 아니면 새벽까 지 영화 보기가 거의 전부였다. 그는 대중매체와 유명인에 집착했으며, 그러한 시각으로 자기 자신을 종종 바라보았던 것 같다. 스스로를 가리켜 “유럽 최고의 배 우”라 하기도 했고, 한번은 친구에게 쓴 편지에 “내 인생은 세계사를 통틀어 최고의 소설이라고 생각하네”라고 했다. 그의 개인적 습관은 특이하거나 어린아이 같아 보이는 것이 많았다. 낮에는 꼭 낮 잠을 잤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단 것을 엄청 나게 좋아해 “케이크를 엄청나게 많이 먹었으며 “찻잔에 설탕 덩어리를 어찌나 많이 집어 넣는지 차를 부을 공간이 거의 없을 정도” 였다. 자신의 무식함에 콤플렉스가 심했기에, 자기 선입견에 맞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다른 사람이 식견을 말할 때면 폭언을 퍼붓곤 했다. 누가 자기에게 반박하면 “호랑이처럼 격노했다”고 한다. “사 실을 말해줘도 자기 마음에 안 들면 화부터 내고 보는 사람에게 누 가 사실을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비데만은 개탄했다. 히틀러는 남 들이 자기를 비웃는 것을 질색했지만, 남을 놀림감으로 삼는 것은 좋아했다(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흉내를 내며 조소하곤 했다). 그러 면서도 자기가 멸시하는 대상이 자기를 인정해주기를 갈망했으며, 신문에 자기를 칭찬하는 글이 실리면 기분이 금방 좋아지곤 했다.
- 역사상 최악으로 꼽히는 인재人災들은 대개 천재 악당의 소행이 아니다. 오히려 바보와 광인들 이 줄지어 등장해 이랬다저랬다 아무렇게나 일을 벌인 결과다. 그리 고 그 공범은 그들을 뜻대로 부릴 수 있으리라고 착각한, 자신감이 넘쳤던 사람들이다.
- 역사상 러시아를 대규모로 침공해 성공한 주인공은 몽골이 유일하다(당시는 러시아가 아니라 키예프 공국이었다.), 폴란드는 잠깐 성공해 모스크바를 몇 년간 점령하기까 지 했지만 결국 쫓겨났고, 스웨덴은 한 번 시도했다가 참패한 후 사 실상 스웨덴 제국 몰락의 길로 들어서는 엄청난 화를 입었다. 그러니 '러시아는 웬만하면 쳐들어가지 말자'라는 교훈을 새길 만하다. 두 사람 중에서는 나폴레옹이 히틀러보다 그나마 조금 더 합리적 인 이유에서 계획을 단행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선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의 실패'라는 참고 사례가 없었다. 휘하의 육군이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으니 승리를 자신할 만도 했다. 더군다나 유럽에서 러시아를 제외하고 아직 버티고 있는 유일한 적수 영국을 경제적으로 봉쇄하는 데 러시아가 협조하지 않는다고 보았으므로 차르 알렉산드르 1세에게 충분히 불만을 품을 만했다. 물론 무역 봉쇄에 협조 하지 않는다고 대국에 쳐들어간다는 것은 그리 현명한 생각이라고 보기 어렵다. 나폴레옹의 가장 큰 실수라면, 매사에 뜻을 관철하는 수단이 거의 전쟁으로 시작해 전쟁으로 끝났다는 점. 나폴레옹은 외 교와 협상에는 영 재주가 없었다. 나폴레옹은 누군가를 공격하긴 해야겠다고 일단 마음을 먹은 상태에서, 러시아가 그나마 영국처럼 섬은 아니니 만만하다고 생각했 을 것이다. 그리고 기후를 고려했을 때 러시아를 침공할 시간이 사실상 석 달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전략을 이렇게 짰다. '모스크바로 곧장 쳐들어가 그곳에서 러시아와 총력전을 벌인다. 러시아 군대는 귀족들이 부리는 용병 무리에 지나지 않으니 우리처럼 사기가 드높 고 전투력이 월등한 군대의 적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계획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적이 예상대로 나오지 않으면 실제로는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 계획도 그런 경우였 다. 러시아군은 예상과 달리 나폴레옹 군대의 진격에 별 저항을 하 지 않았다. 계속 후퇴를 거듭하면서 큰 전투를 가급적 피하고, 동시 에 초토화 전술로 프랑스군이 물자를 확보할 수 없도록 하면서 겨울 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수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빠져나오기엔 늦은 상황이었다. 이제 지칠대로 지친 프랑스군 앞에 놓인 운명은 이역만리에서 고국까지 다시 돌아가는 죽음의 행군뿐이었다. 나폴레옹의 철옹성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이로써 나폴레옹은 몰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1941년 히틀러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히틀러도 섬나라인 영국 침 공의 어려움을 깨닫고, 대신 소련을 침공하되 여름이 지나가기 전에 신속히 해치워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당시 히틀러는 소련 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었지만, 자기는 나치이고 소련은 공산주의 자들이니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히틀러는 사실 나폴레옹의 전략을 연구했다. 그리고 같은 실수를 피하기 위한 묘책을 마련해두었다. 병력을 모조리 모스크바로 보내지 않고 셋으로 나누어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와 키예프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폴레옹과 달리 겨울이 다가와도 바로 퇴각하지 않고 버티며 싸울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두 선택 모두 파멸을 자초하고 말았다. 히틀러가 깨닫지 못한 사실은 나폴레옹 때와 전술이 조금 달랐다고 해도 결국 기본 작전은 똑같았다는 것이다(신속 과감하게 적을 치고, 큰 전투를 가뿐히 이기면, 적은 금방 무너진다는 것). 그러니 문제점도 똑같았다(적이 예상대로 행동하리라 철석같이 믿었고, 러시아 겨울의 위력을 여전히 무시함). 독일 수뇌부에는 이러한 문제점을 히틀러에게 지적해줄 수 있을 만한 참모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반대하거나 회의 하는 낌새만 있으면 작전 내용을 참모들에게 꽁꽁 숨기거나 철저히 거짓말로 둘러댔다. 이는 ‘자만심', '소망적 사고', '현실 회피' 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의사 결정 방식이었다.
- 미국이 피그스만에 상륙해 쿠바를 침공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은 집단 사고의 전형적 사례일 뿐 아니라, 집단 사고groupthink'라는 말 자체의 기원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가 케네디 행정부의 이 대실패 사례를 연구하고 나서 만들어낸 말이 바로 집단 사고다.미국은 바로 지척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 쿠바의 정부를 전복시키 려고 오랜 세월 온갖 삽질을 했지만, 피그스만 작전은 그중에서도 가장 굴욕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만하다 (단, 가장 '엽기적' 이었던 사건 은 따로 있는데, CIA가 조개에 폭발물을 장착, 스쿠버다이빙하는 피델 카스트로를 유인해 암살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조개를 대량 구입했던 일을 꼽아야 할 것이다). 기본 계획은 이랬다. 카스트로에 반대하는 쿠바 망명자들을 훈련 시켜, 이들로 하여금 미국의 공중 지원하에 침공에 나서게 한다는 것. 이들은 오합지졸 쿠바군과의 전투에서 쉽게 승기를 잡을 것이 고, 이를 본 쿠바 주민들은 그들을 해방군으로 환영하며 공산주의 정권에 맞서 들고일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아주 간단했다. 미국은 이미 과테말라도 그런 식으로 처리한 적이 있었다.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존 F. 케네디가 리처드 닉슨을 이기고 대통령이 되면서였다. 이 작전은 애초에 부통령이던 닉슨이 지지했고 그가 백악관의 새 주인이 되리라는 전제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그리 호방한 기질이 아니었고, 자칫 소련의 심기를 건드려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우려했다(실제로 우려할 만했다). 그 래서 작전의 일부 변경을 주장했다. 미국의 작전 지원은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즉 공중 지원 불가), 또 상륙 지점도 인구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바꿀 것을 요구 했는데, 그렇다면 '민중 봉기 유도' 시나리오는 실현이 어려워질 게 뻔했다. 원래부터도 상당히 낙관적인 작전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누가 봐도 폐기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전혀 그럴듯한 작전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당국자들은, 마치 그럴듯한 작전이라는 듯 일을 계속 진행해나갔다. 질문하는 사람도 없었고 따지고 드는 사람도 없었다. 당시 케네디 행정부의 고문이었고 이 계획을 반대했던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가 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누구나 동의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묘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열렸고, 자신은 어이없는 계획 이라고 생각했지만 회의 석상에서는 왠지 잠자코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그때 내가 소심하게 질문 몇 개를 던지는 것 이상으로 나서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하자면, 그 허튼짓을 고발하고 싶은 충동이 당시의 회의 분위기에 눌려버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살다 보면 그런 회의를 경험하게 되니,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다.
- 케네디는 이 의사결정의 실패를 통해 교훈을 톡톡히 얻었다. 그 덕분에 그다음 해에 찾아온 쿠바 미사일 위 기에서 수뇌부가 더 냉철한 판단을 할 수 있었고, 이로써 전 세계가 파국을 모면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사건의 충격이 워낙 컸기에, 미국은 다시는 집단 사고에 빠져 부실한 침공 작전 을 허술한 정보에 기대어 뚜렷한 계획도 출구 전략도 없이 밀어붙이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 콜럼버스의 탐험 계획은 자기가 직접 구한 두 계산값에 전적으 로 기반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지구의 크기고 다른 하나는 아시아 의 크기였다. 그런데 두 계산값 다 오차가 심했다. 일단 아시아가 실제보다 훨씬 길다고 계산해서(실제도 무척 길지만), 순풍만 불면 일본 을 실제보다 수천 킬로미터 더 동쪽에서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 각했다. 더 큰 실수는 지구 둘레의 계산에 9세기 페르시아 천문학자 알파르가니의 연구를 참고했다는 것. 그건 좋은 참고 자료가 아니었 다. 일찍이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 수학자 에라토스테네스도 제대 로 구해냈고, 그 밖에도 꽤 정확한 추정값이 많이 나와 있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는 따로 있었다.
- 콜럼버스의 가장 큰 실수는 알파르가니가 언급한 마일'이 당연히 로마 마일(약 1,500미터)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알파르가니가 사용한 단위는 아랍 마일(약 2,000~2,100미터)이었다. 즉, 알파르가니가 언급한 거리들은 콜럼버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길었다. 콜럼버스는 세상의 크기를 실제의 약 4분의 3으로 착각했다. 게 다가 일본의 위치를 실제보다 수천 킬로미터 더 가깝다고 착각했으 니, 결과적으로 항해 일정을 실제 필요한 일정보다 훨씬 짧게 잡고 그에 맞추어 식량과 물자를 준비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 네 세상 크기를 잘못 안 것 같은데” 하며 의문을 표했지만 콜럼버스 는 자기 계산을 꿋꿋이 믿었다. 그러니 콜럼버스가 카리브 제도를 덜컥 맞닥뜨린 건 사실 천만다행이었다(아시아까지 가기 전에 웬 다른 대륙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여기서 콜럼버스가 알파르가니가 쓴 단위를 오해한 것은 퍽이나 유럽 중심적 사고였음을 짚고 넘어갈 만하다. 그러나 그가 그 지독 한 유럽 중심적 사고로 그 후에 벌인 일들에 비하면 이건 잘못 축에 도 들지 않는다. | 만약 콜럼버스가 계산을 좀 제대로 해서 항해를 포기했더라면 세 계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포르투갈어 사용 인구는 좀 더 늘었을지 몰라도 포르투갈인들은 당 시 유럽 최고의 항해 기술자들이었고, 콜럼버스보다 몇 년 늦게 아 메리카 대륙 곳곳에 도달했다
- 오늘날까지도 다리엔 사건은 스코틀랜드를 양분하고 있다.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투표 때는 양편 모두 다리엔을 상징 적 사건으로 거론했다. 민족주의자들은 다리엔을 잉글랜드가 스코 틀랜드를 항상 훼방 놓고 탄압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우화로 삼았고, 통합주의자들은 안정을 버리고 비현실적 야망을 좇는 위험성을 보 여준 교훈으로 삼았다. 다리엔 이야기가 상징하는 바는 크다. 그것은 한 나라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교역 상대국과의 정치적 연합을 외면하고 무한한 세계적 영향력이라는 환상을 찾는 한편, 이를 부추긴 제국주의적 자유 무역 광신자들이 막연한 계획을 애국적 피해 의식으로 포장하면서 현실 상황에 대한 전문가들의 경고를 시종일관 무시한 이야기다.그렇다면 오늘날의 상황을 상징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생각해 볼 문제다.
- 외교란 한마디로, 대규모 인간집단끼리 서로 개자식처럼 굴지 않는 기술이다.
- 우리는 외교적 선택이란 어찌 보면 세력 판도 변화를 예 측하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그걸 정확히 예측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니, 오판이 잦은 것도 놀랍지 않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늦봄의 스위스, 우스꽝스러운 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내가 독일 정부에 제안을 해왔다. 러시아인인 그는 정변에 휩싸인 고국으 로 돌아가고자 간절히 원했지만, 전쟁 통이라 유럽을 가로질러 이동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최선의 귀국 경로는 독일을 통과해 북쪽 으로 도달하는 길이었지만, 그러려면 독일의 허가가 필요했다. 하지 만 독일 정부는 그의 정치 이념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그가 주장한 논리는 간단했다. 자신과 독일은 여러모로 다르지만 공동의 적을 두고 있다고 했다. 그 적은 그가 타도하고자 하는 현 러 시아 정부였다. 현재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고 있던 독일은, 러시아가 뭔가 소요를 겪어 최전선에 자원을 집중하지 못한다면 좋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독일은 그의 요구를 수락했다. 사내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가 거느린 러시아인 30명을 열차에 태워 북쪽 항 구로 보내주었고, 일행은 그곳에서 스웨덴과 핀란드를 경유하는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대단해 보이는 반군 무리는 아니었지만 없 는 것보다는 나을 듯 보였다. 독일 당국은 그들에게 돈까지 쥐어주 었고, 이후 몇 달에 걸쳐 계속 자금을 지원한다. 독일은 특이한 이념 을 가진 이 정치인이 소란을 좀 피우도록 지원하면 러시아가 한동안 교란되고, 결국 세상에서 조용히 잊히리라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내가 레닌이었다. 독일의 계책은 여러모로 완벽히 먹혀들었다. 오히려 예상보다 큰 성공이었다. 레닌의 볼셰비키는 러시아 당국을 괴롭히고 교란하기 만 한 게 아니라, 완전히 박살내버렸다. 6개월 남짓 후, 러시아 임시 정부는 전복되었고, 레닌은 권력을 잡고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했다. 독일은 휴전을 얻어냈다. 레닌을 열차에 실어 보냈던 4월까지만 해도 가망이 없어 보였던 일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 계책은 대성공이라고 볼 수 없었다. 일단 동부 전선에서 얻어낸 휴전은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았다. 또 그 후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린 소련 과 독일과의 관계는 급속히 틀어졌다. 그리고 수십 년 뒤 또 한 차례 세계대전이 지나간 후, 독일 땅의 절반은 소련이 점령하고 만다.독일은 '적의 적은 동지'라는 흔한 착각에 빠진 것이다. 그게 꼭 틀린 말은 아니다. 동지애의 유효기간이 엄청 짧을 뿐이다.
- 국제정치라는 게 참 어렵다. 숭고한 이상이 설 자리는 별로 없고, 실리를 생각하면 마음에 꼭 드는 상대가 아니더라도 아쉬운 대로 손을 잡아야 할 때가 많다.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도 번번이 곤경을 자초하는 일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적의 적도 대개는 처음 적 못지않게 나쁜 놈이라는 것.
- 몽골 제국은 몇 세대 후에 파벌 싸움과 내분에 휘말려 분열됨으로써 제국의 전형적 말로를 맞았지만, 그 유산은 일부 지역에서 계승 되어 20세기까지 이어졌다.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들이 통치하던 부하라 토후국이 1920년 볼셰비키에게 정복되면서, 칸 왕조는 마침내 막을 내린다.(1838년, 찰스 스토더트라는 영국 군인이 부하라 토후국을 영국 제국의 우방으로 포섭하려고 외교사절로 방문했다가 공교롭게도 무함마드의 바보짓을 축소판으로 재현하고 만다. 나스룰라 칸을 별 이유 없이 무심코 모욕하는 바람에, '벌레 구덩이'로 알려진 대단히 불쾌한 곳에 던져진 것. 그곳에서 그는 곤충 떼에 살을 뜯어먹히는 끔찍한 형벌을 몇 년 동안 받다가 결국 처형당했다. 이름에 '칸'이 붙은 사람에게 허튼짓하지 말자.)
- 몽골이 정복했던 많은 지역은 문화와 역사와 문헌이 모두 파괴되었고, 주민들이 송두리째 추방되었으며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긍정적인 면을 찾자면, 그 모든 사태의 발단이 되었던 교역로가 통합되고 안정화되면서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문화 교류를 가능케 했고, 이는 유라시아 전역에 근대 문명기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부정적인 면이라면 그 교역로를 통해 문화뿐 아니라 질병도 옮겨졌다는 것이며, 특히 흑사병은 또 한 차례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모든 사달은 콤플렉스 덩어리인 한 사내가 외교는 애송이들이 나 하는 짓이라 여기고 단순한 통상 요청을 사악한 계략으로 착각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 과학, 기술, 산업시대의 태동은 인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제 우리는 우주에서도 사고를 칠 수 있게 되었다.
-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세계는 토머스 미즐리가 남 긴 유산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의 두 주요 발명품이 모두 전 세계 대다수의 나라에서 금지되거나 퇴출되었다. 환경 속에 이 미 엄청난 양으로 퍼진 납은 현재 그대로다. 납은 분해되지도 사라 지지도 않으며, 제거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힘든 작업이다. 하지 만 좋은 소식은 적어도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아이들이 예전처 럼 납을 많이 들이마시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의 혈중 납 농도가 이제 대부분 중독 수준 밑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만세다. 한편 오존층은 CFC가 널리 금지된 이후로 서서히 회복되어가고 있 다. 앞으로 별 문제 없으면, 오존층이 미즐리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 는 시점은 아마도, 음, 2050년쯤일 것으로 보인다. 인류 파이팅! 어쨌거나 미즐리는 확고한 명성을 남겼다. 「뉴 사이언티스트」에 따르면 그는 “그 자체가 환경 재앙이 된 인간" 이었다. 역사학자 J. R. 맥닐은 저서 『20세기 환경의 역사Something New Under the Sun」에서 그를 “지구 역사상 환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단일 생명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그가 현대 세계의 모습을 예기치 못한 여러 면으로 바꾸어놓은 것 또한 사실이다. 노킹 방지 연료의 보급으로 자동차는 세계적으로 주요한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단순한 이 동 수단을 넘어 지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개인의 정체성 과 개성을 강력히 드러내는 심볼 역할을 하게 되었다. CFC는 우리 가 집에서 쓰는 냉장고뿐 아니라 에어컨이란 물건을 가능하게 했으 니, 그것이 없었더라면 세계의 대도시들은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두 발명품은 서로 결합해 시너지를 일으키기까지 했다. 강력한 파워의 자동차와 차량용 에어컨이 결합하면서, 일상적인 장거리 운전이 어렵지 않고 즐겁기까지 한 일이 되었다. 예컨대 광활한 미국 서부와 중동 지역 대부분의 땅만 생각해보아도, 토머스 미즐리의 발명이 없었다면 세상의 모습은 아마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또 문화 전반적으로도 파급 효과가 있었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영 화관이 냉방 시설을 초창기부터 도입한 덕분에 대공황 시절 여가 활 동으로 영화가 인기를 누릴 수 있었고, 영화 산업은 황금기를 맞으 며 문화적 영향력을 굳혔고 실로 20세기를 대표한다고 할 만한 엔 터테인먼트 장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토머스 미 즐리는 LA를 통째로 발명해낸 것이다. 자동차와 에어컨으로 돌아가는 도시, 영화 산업의 중심지 LA 말이다. 그러니 다음에 영화관에 앉아 범죄 조직과 맞서 독불장군처럼 싸우는 경찰 이야기가 나오는 심심풀이 땅콩용 할리우드 영화를 보게 되면, 그 모든 것이 다 토머스 미즐리가 자기가 발견한 화학물질이 별 탈 없을 것이며 갤런당 3센트를 더 벌 수 있으리라 생각한 덕분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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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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