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인간의 모험

역사 2020. 2. 11. 08:11

- 타자수의 일은 주로 여성들의 몫이 되었다. 타자기가 유행하던 당시 기존의 고된 육체노동에 노출되던 여성들은 신종 직업을 눈여겨보게 되었고, 사회로 활발하게 진출. 점차 사무직은 육체노동에 비해 덜 힘든 일, 여성에게 적합한 일이라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 국내에도 타자기가 도입되던 시기에는 전문학원이 생길 정도였다. 타자수는 신종직업으로 각광받았다. 1800년대 후반의 초기 타자수들은 그저 주어진 글을 빠르게 쓰는 것에 중점을 두었지만, 숙련된 여성 타자수는 자신의 문장구성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단순히 글자를 쳐내는 다른 타자수들에 비해 인정받을 능력을 확보한 것이었다. 타자기의 등장으로 인해 남성 직원이 주로 전담하던 비서 업무에도 변화가 생겼다. 타자기를 통해 사회로 진출한 여성들이 점차 선망받던 비서업무를 맡기 시작했다.
- 타자기의 등장은 사무 일거리의 증가에 따른 결과물이었고, 이로 인해 사무원은 보다 높은 지위를 보장받았다. 역사적으로 단순하고 창의성이 가미되지 않은 노동은 대개 무시받았지만, 타이핑만큼은 단순하지만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 자본주의 체제는 표준화, 단순화를 엄어 사회와 문화 전반에 여러 영향을 끼쳤다. 패션과 관련해서도 선택의 범위가 많아지면서 무어을 입을지에 대한 고민에 지쳐갔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눈에 띄려는 욕구도 다소 가라앉았다. 이때 영국 국왕 에드워드 8세(1894-1972)의 신사복 차림은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조합으로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 개성을 부리지 않고 편하게 선택해 입을 수 있는 옷을 선호하기 시작했고, 남자들은 유일한 패션수단으로 넥타이에 집중하기 시작. 한정적인 정장의 색과 대비되는 넥타이의 무늬와 색은 다채롭게 변해감. 오늘날의 남성들도 정장색깔보다는 어떤 넥타이를 맬까 아침마다 고민하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개성을 나타내던 넥타이가 비즈니스맨의 상징이 된 데는 미국 은행의 면접방식이 큰 영향일 미쳤음. 하얀 얼굴과 금발이 아니면 취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외모의 비중이 컸고, 입사한 이후에는 정장과 넥타이를 착용해야 했다. 프랑스 절대왕정 시대의 귀족처럼 비슷한 외모에 똑같은 옷차림이었다. 화이트칼라의 전형적 모습은 이처럼 같은 옷차림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직장인에 의해 만들어졌다
- 넥타이는 패션의 의미뿐 아니라 자신을 육체노동과 구분짓는 경계선 같은 역할을 했따. 의자에 앉아 땀을 흘릴 필요가 없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작은 특권을 나타냈다. 한편 회사에서는 규칙과 질서를 상징하기도 했음. 일을 한 지 몇 시간이 흘러도 바람이 불지 않으면 미동조차 없는 넥타이는 표준화, 타협, 속박뿐 아니라 권위를 상징하는 지표이기도 했다.
- 산업화 초기 사무원에 대한 조서는 조금씩 피어오르는 두려움의 표출이었다. 사무원의 존재에 불편함을 느끼다 그들의 영향력이 높아지자 곧 긴장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 산업혁명을 거치며 사회는 상공업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점차 더 많은 사무원을 필요로 했다. 사무원은 그렇게 점차 산업의 중심 영역으로 진출. 고대 사회에서 하위의 노동으로 여겼던 사무업무는 산업화를 맞이하며 변화의 시기를 거쳐 마침내 노동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시작한다. 기존 노동과의 차이점은 명확했다. 같은 직군에 있는 동료들이 점점 많아지면 마음이 든든해졌다. 하지만 불어난 숫자만큼이나 직군간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다는 것은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 19세기 들어 사무원은 더 증가했지만 사무실의 주인은 아니었다. 지금은 회계사, 세무사, 변호사가 사무실의 주인이 되어 인턴을 고용하고 월급을 지급하기도 하지만, 산업화 초기 사무원은 경영주의 자리 한편에 마련된 책상에 멀거니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일을 찾아서 하기보다는 서류작업이 주어질 때만 열심히 일했다. 계산과 필사로 서류더미를 만들어내고 다시 버리기를 반복했다. 이때까지 사무실의 주인은 대부분 상업가였다. 요즘 컨텐츠 생산부터 영업, 마케팅까지 혼자 해내는 1인기업가가 늘어나고 있는데, 19세기 초반 상업가도 혼자 모든 것을 해내야 했다. 도매상이면서 소매상이 되기도 하고 수출과 수입은 물론 운반까지 책임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며 산업화의 요충지인 미국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겨났다. 업무가 분화되기 시작한 것. 상업가가 혼자 하던 업무들을 따로 분리해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 보험사무소, 운반업소, 은행이 대표적이었다. 상업가 또한 다양한 업무를 덜어내고 자신은 큰 의사결정에 집중했다. 반복되는 업무나 허드렛일은 사무실에 남아 있던 사무원이 해나갔다. 상업가들은 거래를 위해 사무실 밖으로 나갔고, 사무원들은 회계실에서 그들만의 영역을 확보. 분업화와 함께 점차 유통이 활성화됨. 만드는 곳과 파는 곳이 분리된 것. 자연히 매출을 기록할 인력이 필요하게 됐다. 사무원은 증가. 가내수공업을 들여다보면 노동자와 판매업자가 같이 있었다. 직접 땀을 흘리는 자와 옆에서 보조하는 사람이 함께 했다. 하지만 분업화가 진행되며 노동 역시 분리됐다. 육체노동자와 사무원으로.
- 포드주의, 테일러주의가 낳은 기계적 효율성은 생산성 면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산업의 발전에 있어서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노동자의 시각에서는 중간관리자라는 새로운 존재가 갈등을 부추겼다. 1900년대 접어들며 초시계와 카메라를 들고 공장에 견학을 온듯한 차리므이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새하얀 셔츠를 입은 그들은 기름때를 묻힐 만한 기계공이 아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엇을 할지 몰라 고성으로 업무지시를 내리던 중간 관리자들이었다. 그들은 이제 경영자의 지시하에 노동을 관리하고 분석하는 요원이 됨. 초시계로 노동자의 작업시간을 체크해서 임금에 적용했음. 이처럼 사무의 본질은 이전 시대와 다르게 변화. 양적인 면에서 사무원의 증가가 있었고, 계급의 분화, 노동의 분리, 분할의 시대를 맞이함.
- 80년대 전후로 서양의 사무실에는 이전과 또 다른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자리가 안정적이지 않았기 때문. 철옹성으로 여겨지던 관리자의 자리는 위태롭게 여겨지기 시작함. 승진의 튼튼한 동아줄만 잘 붙들고 있으면 꼭대기층까지 입성할 수 있다는 인식도 깨져버림. 더 이상 안정된 자리는 없었다. 80년을 전후로 미국에서만 100만명 가량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책상을 내주었다. 조직은 탈산업화와 공장의 해외이전 등으로 살을 뺐다. 구조조정의 첫번째 타겟은 중간관리자였다. 공장과 사무실에서 고군분투한 조직인간에 대한 대대적 감축이었다. 이제 실무능력과 생산성이 떨어져 하급 사무원으로 되돌아갈수도 없었다.
- 우리나라 사무공간에 파티션이 도입된 시기는 80년대. 그 전에는 공장도 개방된 구조로 되어 있었고, 사무실 또한 커다란 공간에 책상만 이어붙인 형태였음. 옆 사람의 작은 움직임도 눈에 보였고, 몇 미터 떨어진 사람과도 목소리만 조금 높니면 얼마든지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었다. 이와 다르게 서양에서는 일찌감치 파티션이 도입됨. 주로 최소한의 프라이버시와 보안을 확보하고 업무 효율성을 올리기 위한 방편. 미국을 비롯한 서양 국가들은 6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파티션이 늘어났고 70년대에는 보편화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80년대에 들어 해외 기업들이 국내에 둥지를 틀면서 자연스레 파티션으로 사무공간을 나누기 시작했다. 화이트칼라 직장인이 한동안 막강했던 지위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파티션의 도입과 연관이 있다. 중역들에게 개인 사무공간을 마련해주던 회사들은 이제 그들의 자리를 재배치했다. 장기간 출장에서 돌아와 보니 5분의 1도 되지 않는 작은 공간으로 옮겨져 있었다. 줄어든 공간은 자신들의 불안한 입지를 상기시켰다. 한편 파티션은 점점 이중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개방된 공간에서 프라이버시를 보장해주었지만, 동시에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유발하기도 했다. 똑같은 모습, 비슷한 표정을 한 사람들을 한정된 공간에 몰아넣다보니 몰개성화의 진원지로 지목되기도 했다. 70년대에서 80년대를 관통하며 파티션의 이중성이 부각되는 사이, 그 안에는 침입자가 발생했다. 경영자의 일정을 관리하던 여성 비서들의 입지도 이 침입자로 인해 줄어들게 되었음. 바로 컴퓨터의 등장이다. 인력감축의 중심에 컴퓨터가 있었다. 그나마 있던 개인의 공간에 또 다른 물체가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 직후에 비해 2000년대 노동자들은 물리적 노동강도뿐 아니라 업무강도와 스트레스도 계속해서 늘어왔다. 20여년전부터 바람이 분 글로벌화, 정보화의 어두운 이면이다. 글로벌 기업의 국내진출로 임금 깎아먹기 경쟁이 일어나고, 정보화로 인해 어디서나 일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뀌면서 삶과 일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경향이 짙어졌다. 24시간 가동되는 경제체제하에서 사무직은 온종일 일하는 경우가 만연해졌다. 게다가 고용의 비정규화 현상은 비정규직뿐 아니라 정규직 직원들에게도 부담을 가져왔다. 비정규직이 늘어나면서 적유직 인원은 이전보다 줄어들었고 업무강도도 높아지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비정규직, 정규직이라는 양대 축 외에도 하청, 파견, 자영업 계약직 등 기업이 제시하는 고용형태는 다양해졌고, 개인은 자신의 조건에 따라 그것을 받아들일지 선택하게 되었다. 노동조합도 없고 파업권도 없이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일하던 시대에 비해 여러 법제가 갖춰졌지만, 법망을 피해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계약은 만연해졌다. 약자 입장에 놓인 노동자는 경영자를 향해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정직원이라는 신분을 차지한 이들은 자기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회사형 인간이 되어야 했다.
- 밀려오는 구조조정의 물결에 화이트칼라의 수난사는 이어졌다. 종신고용의 희망은 사라지고 난공불락이던 연공서열조차 휘청거리고 있다. 자기자리가 어디든 자생력을 길러 각자도생을 해야하는 시대다. 90년대부터 정리해고라는 말은 심심찮게 들렸고 칼을 빼든 기업은 어쩔 수 없다는 유약한 항변만 반복했다. 더 나아가 이제는 사내실업이라는 말이 만연할 정도로 생산성이 낮아진 중간관리자들의 방황도 늘어나고 있다. 그렇게 회사 내에 생긴 다양한 신분은 본인이 어느 자리에 있든 상관없이 사무원들을 고난으로 몰아넣었다.
- 사무원들이 한데 모여 자신의 일자리와 업무의 자율성을 지켜내지 못하는 것을 이기주의 탓이라고 한다. 능력주의라는 추상적 신념을 원인으로 지적하기도 함. 하지만 의사, 언론인, 블루칼라도 능력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사무직원들이 직장에서의 생존에 있어 특히나 취약한 위치에 놓여 있는 이유는, 좋든 싫든 자신을 고용주, 경영진과 동일시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입장에 서 있기 때문. 교수, 변호사, 의사, 과학자 등은 스스로를 그 직업에 종사하는 인간으로 인식하지, 자신을 대학, 변호사 사무실, 병원, 실험실과 동일시하려 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사무지은 높은 자리를 목표로 바라보고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충성을 맹세해야만 조직 내 자신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고, 자신의 직업을 보장받을 수 있다. 경영진이 각종 갑질로 사회적 이슈에 오르고, 타락하거나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지라도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며 울며 겨자먹기로 사다리를 올라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일방적 충성의 대가는 아웃소싱과 정리해고였다. 회사는 이렇듯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개인의 힘으로는 피할 길이 없는 고용불안의 빨간불은 이렇게 현재 진행형이다.
- 미국 사회학자 찰스 라이트 밀스는 1960년대 들어 사무직 종사자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사했다. 그들은 "특징이 있는 것 같음에도 특징이 없는 존재"라고 새로이 생겨난 중산계급인 스스로를 정의했다. 즉 역사적으로 족적을 남길만큼 뛰어난 업무역량이 없으며, 그렇다고 정치 세력화를 할 집단도 아니고, 단지 조금 더 강한 세력을 따라가는 성향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다른 조사도 있었다. 우선 사무직 종사들에게 설문지를 나눠주며 공장 노동자와 경영진, 사무직 노동자에게 일정 점수를 매기도록 했다. 항목은 신뢰성, 양심성, 의존성 등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사무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육체노동자나 경영진과는 차별화된 존재로 인식했다. 다만 경영진에는 후한 점수를 주었고 육체 노동자에게는 낮은 점수를 주었다. 중간 성향을 가진 것을 스스로로 확인한 결과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저 조직의 안위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다른 생각을 가지는 집단 또한 생겨났다. 한 조직내에서 생과 사를 함께하는 조직인간이 아닌, 자신이 키운 능력대로 조직을 옮겨 다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 조직이 만들어낸 질서에 반하지 않고 경영진의 그림자를 따랐던 일반 사무직과는 달리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자신의 직무를 발전시켜 자신이 가진 지식의 대가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신흥세력이었다. 지식노동자였다. 사무직원들은 한 조직에 충성을 다했고 기력이 소진될 때까지 버틸지, 능력본위제의 삶에 충실할지의 기로에 서기 시작. 가장 최악의 상황에 놓인 이들은 한 자리에서 일가를 이루지도 못하고 새 둥지를 틀 수도 없는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이었다. 미래에 대한 고민과 사무직에 대한 회의감 사이에 이들은 조직에서 입지를 다질지, 제2의 업을 만들어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지식노동자는 지식산업 시대를 이끌어가는 사회의 주역 계급을 지칭하며 전문 기술직에 종사하는 이들을 말함. 골드칼라라 부르기도 함. 이보다 앞서 지식노동자에 대한 개념은 존재했다. 꾸준한 학습과 지식습득을 통해 일하는 방식을 혁신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 활용함으로써 생산성과 효율, 부가가치를 높여가는 사람을 일컬었다. 주변의 정보를 해석하고 이를 활용해 부가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이들이었다. 이는 피터 드러커가 지식사회를 다루며 제시한 용어임. 평생 직장인보다는 평생 직업인의 신념을 가지면서 광범위한 지적 재산, 혁신적 기업가 정신, 평생 학습정신, 창의성, 유연성 등을 갖추고 있는 사람으로, 이 시기에 등장한 지식노동자라는 개념은 기존 노동자들과는 차별적 존재로 부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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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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