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작의 역사

역사 2019. 9. 15. 11:48

- 네발 동물들에게서 앞다리와 뒷다리의 차이, 곧 앞다리는 방향을 정하면서 시각적으로 가까운 주변을 함께 살피고, 뒷다리는 추진력을 제공한다는 차이가 이미 중력에 반하는 것이다. 두발걷기는 다리와 발에 심지어 일부 퇴행을 불러왔다. 앞다리가 손이 되면서 그 사이 얻었던 것, 곧 조종기능을 도로 빼앗긴 것이다. 그러니까 원숭이가 두 다리로 일어서서, 이를테면 돌던지기로 장거리 공격자가 되면서 단번에 인류가 생겨났다는 것은 (큐브릭의 인간형성 장면을 좀더 평화롭게 변형시킨 것) 그냥 전설일 뿐이다. 이런 전설은 믿을 수 없이 긴 시간을 요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를 방해할 뿐이다
- 몸무게 50킬로그램의 두발걷기 동물은 (인간 직전 원숭이는 대강 그정도 무게에 키는 120센티) 45킬로 수컷 침팬지가 10킬로미터 구간을 뒤지는 데 필요한 것과 동일한 에너지를 들이면, 16킬로미터의 길을 걸을 수 있었따. 실제로 원숭이들은 오늘날에도 하루 2킬로 정도를 전진하는데, 채집꾼 인간공동체는 13킬로 정도를 나아간다. 먼 거리를 나갈수록 직립보행에 따른 에너지 비축이 12-16% 정도 커짐.
- 암컷이 보호를 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새끼를 데리고 먹이를 찾으며 먼 거리를 이동하기가 위험하므로, 성별에 따른 노동분하가 나타남. 섹스와 먹이의 교환, 또는 일부일처 방식이 나타난 것. 덕분에 암컷은 더 많은 출산을 견딜 수 있었음. 새끼를 데리고 이동하지 않아도 되고, 맹수들로부터 새끼를 더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암컷들은 더 많이 출산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면 직립보행이 소가족제도의 형성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셈. 또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광범위한 영역에서 먹이를 찾을 경우, 직립보행의 이점과 수컷들 사이의 갈등을 줄이는 일부일처제가 서로를 보강해주었다는 뜻. 인간직전의 원숭이들에게 송곳니가 없다는 것은 이런 이미지와 잘 들어맞아 보임. 일부일처 상황에서는 서로 물어뜯을 필요가 적고, 먹이를 찾을 영역이 늘어나는 만큼, 영역방어는 어차피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 침팬지들의 관점에서 보면, 좋아하는 먹이는 두 발로 운반하고 덜 달가운 식물은 네다리로 운반하는데, 이것 또한 경쟁이 두려울 때면 두 발 운반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러브조이의 논제는 원숭이 세계에 일부일처방식이 없으므로, 원숭이 세계와의 유추를 포기해야만 하는데, 게다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일부일처 생활을 햇따는 강력한 암시도 없다는 것이 난점. 수컷 인간직전 원수잉의 몸무게가 암컷에 비해 훨신 많이 나간다는 사실은 많은 연구자에게 오히려 그 반대를 알려줌. 이런 성적 이종현상, 즉 수컷과 암컷 사이의 뚜렷한 신체차이에 대한 설명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일지도 모름. 운동기관이 인간과 비슷하건 더 큰 호미니드 수컷들은 탁 트인 초원지대에서 먹이를 찾을 때 암컷들을 숲 가장자리에 남겨두는데, 암컷들은 그곳에서 계속 나무타기 능력을 유지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방어책도 없었을 것임. 수컷들은 직립보행과 더 강한 신체구조로 채집 영역의 생태적 여건과 위험에 더 빨리 적응했을 것임. 암컷들은 해부학자 랜들 서스먼이 요약한 대로 더 적은 몸무게로 더 오랫동안 부분적인 나무 거주자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 주변 지역의 초원화가 진행되면서 강가 숲에 사는 원숭이들이 고립되었기에, 유전적으로 분리된 그들의 진화는 이 서식 구역의 우기와 건기, 기온의 높낮이, 생태계 변화에 의해 결정되었다. 예를 들면 긴 건고기간 동안 나무들이 작아지고 계절에 따른 특정한 과일들이 나타나지 않고, 잎들이 썩어감에 따라 땅의 식물들과 꽃들이 더 풍성해졌다는 것, 그리고 덕분에 원숭이들이 더 체계적으로 땅바닥을 뒤지게 되었따는 것 등도 이런 생태계 변화의 특징들이다. 이 원숭이들은 처음에는 땅에 일어나 앉아서 작은 먹이들을 (씨앗, 곤충, 파충류, 딸기류) 찾아 먹었다. 일어서기에 앞서 웅크리고 앉기가 먼저 나타난 것이고, 일어나서 걷는 인간직전 원숭이 이전에 조너선 킹던의 용어로 땅원숭이가 나타난 것이다.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뿌리옆의 땅원숭이가 된다. 똑바로 서서 걷기가 아니라 웅크리고 앉아 먹이를 먿는 방식이 인간직전 원숭이들의 상체, 곧 척추와 골반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 고기식사가 개인의 몸을 강하게 만들고, 고기를 장만하는 일이 사회적 영혼을 강하게 만들었따는 주장은 몇 가지 의문을 던진다. 우선 이는 대단히 남자에게 의존하는 문명의 스케치다. 여기서 여자들은 자식을 낳고 간식거리를 마련하는 정도의 역할밖에 할 일이 없다. 그에 반해 식물 및 음식 익히기가 초기인간의 섭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치면, 여자에게도 더 중요한 의미가 주어짐. 그 밖에도 고기를 먹으면 뼈가 남고, 뼈는 100만년이 지나도 학자들이 연구를 할 수 있는데 반해, 식물먹이는 그런 흔적을 훨씬 덜 남긴다는 우연한 상황은, 사냥꾼 태고남자를 옹호하는 학자들에게 과도하게 유리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고기먹이가 우리 몸에 이롭고 에너지 결산에서 사냥이 채집보다 더 좋다는 증거가 있는가? 일단 동물을 죽이면 단백질 결핍은 없지만, 그것을 죽이기까지는 그토록 불확실한 성공을 위해 상당한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지 않는가. 그것 말고도 인간의 경우 몸에 이로운 단백질 공급에 상한선이 있다. 단백질이 일상에서 섭취하는 열량의 3분의 1을 넘기면 (통상 6-15%) 겨우 몇 주만에 죽을 수도 있음. 초기인간이 사냥을 했다면 이런 위험은 더욱 컸을 것임. 야생돌물의 고기에는 지방분과 수분이 적기 때문이다. 사냥의 사회적 성과에 대해서도 의문점은 남는다. 고기 먹이로 넘어간 것이 더 많은 갈등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동물이 클수록 고기에 대한 욕구는 높아지는데, 고기가 분배되었다는 사실이 곧 소유자에게 분배의 주도권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님. 인류학자들이 참아주는 도둑질이라 부르는 것도 있음. 빈털터리들은 사냥감에서 제 몫을 얻기 위해 사냥꾼이 방어에 투자하려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로 싸우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자면 사냥에서 추가 소비의 쓸모가 처음에는 매우 높지만 그 다음에는 급격히 낮아지므로 고기의 재분배가 이루어짐. 그 밖에도 사냥꾼이 죽은 짐승의 임자로 인정되는지도 의문이다. 오늘날 탄자니아에 있는 수렵채집 사회의 사냥행위와 사냥감 분배를 다룬 연구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어째서 사냥꾼들이 고기를 나누느냐'가 아니라, '사냥감이 자기 것도 아니라면, 사냥꾼들은 어째서 애초에 사냥하러 가느냐'를 물어야 함. 성공의 공로를 차지하는 것과 고기의 분배는 전혀 다른 일. 성공한 사냥꾼에게는 더 많은 고기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주목과 인기가 주어진다. 그는 특별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특볗리 유명해지는데, 이는 진화생물학자들에게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가 (생물학자 말고 사냥꾼이) 특별히 인기 있는 짝짓기 상대일 것이라는 추측을 불러들인다.
- 어째서 하필 인류의 정착시기에 포도와 곡식의 발표가 나타났을까? 그 시기에 축제들이 특별한 기능을 했다는 설명이 설득력이 있음. 우선 기후변화가 특권적인 축제에서 소비될 식량의 과잉을 가능케 했다. 무언가를 넉넉하게 가진 사람은 축하할 계기가 있어야 함. 또한 예를 들어 예배소를 건축하는 것과 같은 집단적 업적은 거대한 연회의 형태로 보상받았다. 축제는 성취된 것을 강조하지만, 그것을 성취할 동기도 만들어냄.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렵채집 공동체에서 집단의 크기가 커지면서 마을 생활로 바뀌었으니, 이제 더는 곤궁때문에 서로 뭉친 것이 아닌 사람들의 사회적 결속을 축제가 강하게 해주었기 때문. 축제는 사람들을 결합시킨다. 이미 최초의 신화들이 축하연 이야기로 가득하다. 물론 오로지 신들 사이에서, 또는 상류층 구성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축하연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축제는 계급을 드러냄. 더 많은 식량 여분을 얻었기에 더욱 큰 축제를 거행할 수 있는 사람은, 명성뿐만 아니라 더 많은 재원도 얻음. 이런 특권은 축제가 손님들에게 알콜 음료를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는 분명한 조직능력과 지시권한을 암시한다는 사실에 주로 근거함. 이런 축제음료는 생산 이후 며칠 (밀맥주, 보리맥주, 엠머맥주의 경우), 한달 (용설란 와인), 또는 1년 (쌀술과 포도주) 안에 사용해야 함. 곡물맥주의 생산에 필요한 날짜가 6-14일 이므로 맥주를 축제에 제공하려면 전체 분량이 사용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한꺼번에 생산되어야 함. 고대 이집트의 축제 양조장 한 곳이 하루에 390리터까지 맥주를 공급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산됨. 여기서 이런 도취음료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집중된 연쇄명령이 이루어졌던 것이 아주 분명함. 포도주가 비로소 생산과 소비를 나누고, 그를 통해 무역에도 쓰일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축제에서의 맥주소비는 거의 초기국가라 부를 만한 조직에 의한 것이었고, 따라서 기원전 4000년 무렵 중동에서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으로 시작된 도시왕국의 발생이라는 방향에 딱 들어맞음
- 수컷 붉은 사슴과 다마 사슴에게서 인간과 견줄 만한, 아니 오히려 훨씬 더 아래로 내려간 후두를 볼 수 있다. 덕분에 목구멍과 구강의 비욜이 분명히 목구멍에 유리하도록 변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낮은 소리가 음향적으로 과장된 자기 이미지를 다른 사슴들에게 만들어내기 때문으로 추측됨. 일반적으로 소리길의 길이와 그에 따른 주파수의 다양성은 척추동물의 몸크기를 알리는 신뢰할 만한 신호로 여겨짐. 포효하는 사슴은 목구멍 크기를 두배로 만들어서 특히 어둠속에서, 그리고 전체를 조망할 수 없는 지역에서, 경쟁자와 암컷에게 원래 자신의 모습보다 더욱 강력한 인상을 만들어냄. 이런 으스대기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퍽 잘 알려진 일이다. 인간 남자의 변성기도 이 과정으로 설명됨. 이는 사춘기에 후두가 한 전 더 아래로 내려앉으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깊은 목소리는 문화차이를 가리지않고 거의 동일하게 확정, 권위와 위협, 자신감, 크기 등과 연결됨. 물론 모든 사슴이 그렇게 포효하고 과장한다면 과연 낮은 목소리에는 어떤 이점이 있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은 아직도 탐구해야 할 부분이다.
- 대화사회학에 따르면,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처음에 날씨나 열차 연착, 또는 뉴스에서 얻은 정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런 말로 상대의 후원을 받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라고 함. 인류학자 브로니스라프 말리노프스키는 이를 두고 의례적 언어사용이라는 개념을 썼다. 이는 확인기능으로만 쓰이는 것으로, 정보를 거의 전달하지 않은 채, 간단한 말의 교환을 통해 공동체 의식을 만들어냄. 접촉 자체를 위한 것으로,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 믿을 만한 사람, 무언가 도와줄 사람을 더듬어 찾는데 쓸모가 있음.
- 언어는 단 하나의 시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작에서 나왔다. 자식을 너무 일찍 낳고 오래 교육하는 어떤 생명체의 협동적 천성에서 나왔다. 또한 이름 붙이기의 논리와 공동의도에 주목하게 하는 몸짓 레퍼토리에서 나왔다. 소리로 된 애정의 신뢰 형성효과에서 나온 것이며, 노래의 소리 여부에서도 나왔다. 그렇게 보면 언어가 나오기까지 그토록 오래 걸린 것이 이상하지도 않다. 해부학적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4만년 전에 많은 우회로를 거치며 이동해서 호주와 아메리카로도 넘어갔고, 유럽에도 정착했음. 그리고 유럽에서 호모 에렉투스와 네안데르탈인 등 친척들에 맞서 유일한 인류로 살아남음. 마지막 네안데르탈인들은 아마도 2만8천년 전에 스페인 남부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다른 종과 섞이지 않은 하나의 종이라는 까다로운 준거가 여기서는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해야 함.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사이에서 얼마나 온갖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것은, 무엇이든 제3의 뼛조각이 나오기만 하면 새로운 종의 초기인간으로 분류될 수 있느냐는 의문만큼이나 아직 확정되지 않은 채 열려 있는 의문이다. 어쨌든 네안데르탈인에 대해서는 저 유명한 FOXP2 유전자의 변종을 지녔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 돌연변이는 언어능력에 해를 끼치는 것이고, 그로써 그들이 언어능력을 지녔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됨. 다시 말하자면 호모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30만년 전 두 종으로 나뉘기 이전에 이미 언어가 있었다는 뜻. 그렇다면 맨 처음 말을 한 종은 아마도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였을 것임. 네안데르탈인들은 작은 무리를 이루어 20만년을 견뎠다. 그것은 대규모 기후변동의 시기였다. 그들은 무기를 이용하기는 했으나 아마도 아궁이나 화덕 같은 불 피울 장소를 갖지는 못했고, 상징을 사용하는 확장된 문화를 이루지는 못했을 것임. 고고학적 발굴에 대한 온갖 조심성을 갖고 말하자면, 그들이 색소 사용을 (신체 단장 같은) 넘어 그림작품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작은 무리를 이룬 생활과 문화적 소박함이라는 두가지를 합쳐보면, 네안데르탈인이 언어의 문턱에 이르러 있었지만, 자기들 사회 형태에 어울리는 정도의 몸짓 또는 소리 어휘의 단계를 넘어서지는 모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음. 영국 인류학자 스티븐 미슨은 특히 네안데르탈인이 노래하고 웅얼거리기는 했으나 말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 수컷보다 암컷의 번식비용이 훨씬 더 높기 때문에 암컷은 훨씬 더 까다롭게 고름. 정보, 곧 노래는 자기가 모험적이라는 내용을 포함한다고 요약할 수 있음. 노래하는 새는 동시에 먹이를 찾을 수 없고, 심지어 맹수를 끌어들일 수도 있음. 오래 복잡하게 노래하는 새는 그로써 자신의 영역이 먹이가 풍부하며 따라서 생존능력이 있음을 알리는 셈. 이것은 불리한 조건(핸디캡) 선택이론에 따른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아무나 보내는 신호는 안 되며, 곧 쉽사리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닐 경우에만 정보능력이 있음. 다른 말로 하자면 다음과 같음. 비용이 높을 경우에만 광고를 믿을 수 있다. 오직 성공적 공급자만이 그런 비용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 이런 점이 광고의 반대 결론을 성공으로 연결시켠 줌. 높은 비용을 들여 노래를 하는데, 아직도 살아 있다면 이미 한 가지 시험에 통과한 것임. 신호가 인상적일수록 더욱 엄격한 시험에 통과했다.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힘이라는 결론을 허용하지는 않아도 간접적으로는 그렇다. 그것이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라면, 오로지 힘 있는 자만이 그런 것에 투자하는 위험을 감당할 수 있다
- 미국 여성인류학자들인 엘렌 디사나야케완 딘 포크는 몹시 흥미로운 사색을 펼쳤다. 인간 아기들은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어찌 할바를 모르는 상황에서 자기들이 홀로 방치된게 아니라는 신호를 필요로 했다. 아기를 안는 팔 대신 마음을 진정시키는 전 단계 음악을 통한 소통이 나타났다는 것임. 어째서 그런 음악이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있었을까. 바로 어머니 목소리 때문이고, 반복을 통해 안정적 기대감을 만들고 음높이과 고요함을 통해서는 위험이 없다는 상황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울부짖는 아기가 맹수들로 가득찬 세계에서 자신과 어머니를 극한 위험으로 몰아가는 것이니 이런 진정효과는 생존전쟁 상황에서도 도움이 된다. 이렇게 보면 음악의 시작은 위안이었다.
- 음악은 개인을, 함께 행동을 조율하지 않을 수 없는 상대방에게로 보내는데, 상대의 생존을 후원하는 것이 동시에 생존도 강화해 줌. 진화에서 멜로디의 기능은 진정시키는 어머니 목소리라는 특질에 있었고, 리듬의 기능은 집단행동을 통해 자기와 타자의 대립을 덮어버리는 것에 있었다. 음악에서 정서의 차이들은 사라진다. 듣는 사람들이 음악의 정서에 빠져들기 때문이고, 음악의 정서에 빠져 있는 한은 그렇다. 이것은 선사시대에 인간무리가 특정 규모 이상으로 커졌을 때, 특히 그런 무리들의 행동에 이점이 될 수 있었다.
- 가장 중요한 식량공급방법으로서 사냥과 채집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그리고 식물과 동물의 품종을 개량하지도 않은 채로, 먼저 정착이 이루어짐. 기원전 4000년 무렴 아시아에서 기장과 벼농사의 시작도 마찬가지. 그곳에서는 먼저 야생식물을 생산하고 수확하고 저장했다. 특히 벼는 재배종 벼와 야생 벼를 체계적으로 구분하지도 못하던 수렵채집 공동체에 의해 재배됨. 중국에서는 그보다 4000년도 저 전에 날시가 서늘해지면서 최초의 마을들이 건설됨. 여기서도 정착, 재배, 품종개량 사이의 맥락은 느슨했다.
- 식물학자 잭 할런은 50년 전에 선사시대의 돌낫으로 터키에서 야생밀을 수확했는데, 한 시간만에 1킬로그램을 거둠. 3주 이내에 한 가족이 1년간 먹을 식량을 모을 수 있었던 셈. 산업혁명 때까지 지구상 인구의 5분의 1 정도가 그런 수렵채집 공동체에 속했다는 사실은 설사 기후가 좋은 경우에도 농경으로의 이행이 많은 사람들에게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20세기와 21세기 남반구의 채집공동체들은 매우 불리한 환경에서 사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1만년도 더 전에 농경으로 넘어갔는가에 대해 우선 두가지 이론이 대립함. 하나는 기후변화가 닥치면 식물과 동물이 부족해졌고, 그러면 사람들은 식량이 있는 오아시스와 강변지대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고정된 지역에서의 삶에 익숙해졌고, 그곳 식물계와 동물계에 더욱 집중했다는 추정이다. 줄여 말하자면 이렇다. 날씨가 인간을 특정 장소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자연을 탐구할 각오만 한다면, 자연의 변덕에 덜 노출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 많은 지질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이 이런 오아시스 이론에 반대했다. 원래의 건기에 대한 충분한 증거들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날씨 말고 다른 것도 보았다. 정착 생활로의 이행이 자연의 강요로 이루어졌다고는 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 이전에 기후가 건조해진 세 번의 간빙기가 있었는데도, 오아시스에서 동식물의 품종개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은 기후대신 인구압박을 결정적 인자로 보았다. 2만년 전에는 보통 겨우 25명 규모의 수렵채집 공동체들이 250-500명의 짝짓기 네트워크만을 포괄했는데, 그러다 차츰 현존하는 자원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팽창했고, (그것도 다시 날씨가 좋은 덕에!) 따라서 식량 마련의 방식을 바꿀 필요가 절실해졌다는 것. 기원전 1만년 무렵에 점점 인구가 늘어난 나머지, 식량부족에 대한 전래의 가장 쉬운 대응방식인 이동이 더는 효율적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동 대신 다른 전략을 찾아야 했다. 식량 토대의 확장, 일시적 잉여식품의 저장, 그러니까 절약의 훈련, 그리고 (혁명이론가들과 이기적 유전자 이론의 추종자들에게 최후의 방책인) 번식률 하락 등이었다. 오아시스 이론의 또 다른 대표자들은 높은 번식력, 줄어든 영아사망, 더 긴 기대수명을 정착 생활 덕으로 돌림. 지역 식물계와 동물계에 의존하는 더 단일한 영양과 합쳐보면, 정착생활은 식량을 부족하게 만들었고, 혁신 경영을 절실히 필요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자원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정착생활은 어떤 이점을 제공할 수 있었을까? 줄어든 영토는 방어가 더 쉽다. 풍부하고 먼 사냥터와 덜 풍부하지만 가까운 지역을 두고 고려할 때 후자가 이점을 가질 수가 있다. 이런 전략을, 의자뺏기 놀이에서 허락되지 않은 눌러앉기 전략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놀이 참가자와 의자의 비례관계가 커질수록 운동규칙을 어기고 단순히 눌러 앉아 있고자 하는 충동이 더욱 커짐. 예를 들어 맨 처음에 사람 10명에 의자가 9개였다가, 두번째 단계에서는 9명에 8개, 그러다 마지막에는 2명에 1개가 된다고 상상해 보라. 자원갈등에 참가한 모든 집단이 더 많은 의자(영토)를 차지하려 할 것이고, 언제나 외부 참가자가 끼어드는 데다가 의자(영토) 들은 매력의 정도가 서로 다르므로 이런 비교가 매우 제한적인 것이긴 하다. 그래도 의미가 있다. 정착한 집단은 영토를 차지하고, 그로써 나머지 다른 집단들의 활동영역을 줄여버린다. 그러면 나머지 집단들도 동일한 전략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더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게 된다.
- 맨 처음에 신전(사제)와 왕권이 전체를 위한 결정권을 지녔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두 세력 사이의 갈등이 나타나는데, 결국은 군사집단이 제게 유리한 결정을 내린다. 먼저 신전이 재분배 경제를 조직하고 사용료를 만들고 장부를 작성하고, 자체 생산을 한다. 신전, 또는 사제단은 희생제물을 관리함으로써, 그리고 거대한 개인살림인 왕의 궁정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특히 중요한 족속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통해, 이런 모든 일을 먼저 하도록 미리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뒷날에는 자체 수행원을 거느린 군사 지휘자들이 전체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선다. 도시들 사이의 갈등은 늘 있게 마련이고, 특히 식량위기의 시기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도피처를 찾는다. 이들은 대도시에서 군주가 사제집단에 대해 연속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게 만든다.
- 전쟁은 도시를 하나의 국가로 만들고, 그와 동시에 사제들을 전쟁 지휘자의 보조자 역할로 낮추어 버린다. 메소포타미아에는 여러 도시들이 이곳저곳의 중심지를 이루었고, 그들 사이의 경쟁과 물물교환이 자주 갈등으로 비화했기 때문에, 도시들은 성벽, 성문, 해자 등을 갖춘 방어시설물이 되었다. 도시 정치조직의 핵심업무는 처음에는 분명하게 농경과 무역이 서로 협동하여 일하고 임금을 받도록 하며, 또한 총 생산을 분배하는 일이었다. 이 점에서는 무역과 이주를 통해 서로 연관된 모든 메소포타미아 도시들이 비슷했다. 하지만 누가 통행권을 갖느냐, 상류 물줄기에서 무엇이 나와야 하느냐, 또는 누가 도시 영역들 사이의 중간구역을 맡느냐 등의 싸움이 일어날 경우에는, 차츰 무기가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되었고, 따라서 모든 자원을 포함하는 정치적 임무는 서서히 신전에서 왕궁으로 이동했다.
- 이론에 따르면 돈은 교환매체로서 가치를 보존하는 수단이며 가치척도로서 상업의 거래비용을 떨으뜨리기 위해 발명됨. 돈은 저장할 수 있고 운반하기도 쉬운 특히 인기있는 물건, 예를 들어 금이나 은에서 발전해 나와 마지막에는 구매력 자체가 됨. 제빵사는 정육업자에게 가서 빵을 내고 고기와 바꾸려고 한다. 하지만 정육업자는 이미 빵을 넉넉하게 갖고 있다. 따라서 제빵사는 어떤 교환상대라도 결코 충분히 가질 수 없는 어떤 것, 곧 돈을 제공해야 한다. 바꾸려는 사람들은 모두가 기꺼이 갖고자 하는 물건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래서 이 물건 일부를 떼어 놓는다. 매력적인 교환제안을 간직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언젠가는 돈이라는 매체가 발전하게 된다. 그렇게 보면 돈의 기원은 비축인 셈이다. 이렇듯 많은 것을 보여주는 이 이론은 물론 한가지 약점이 있음. 실제와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 즉 이중의 우연성 문제에 봉착하는 순수한 교환이란, 역사적으로나 민속학적으로도 입증되지 않는다. 최초의 동전발굴은 그것을 주조한 동전제작소의 근처 일대에서만 나타난다. 그것이 원거리 교역에는 쓰이지 않았거나, 아니면 극히 드물게만 쓰였다는 뜻. 당시 가장 작은 동전이 가졌던 상대적으로 큰 가치는 일상적 근거리 교역에 쓰였다고 보기도 어렵게 함.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아티카에서 1드라크마가 이미 양 1마리 가치를 지녔다. 그런 동전은 소소한 거래에는 쓸 수가 없었다. 동전은 처음에는 일반적 교환수단이 아니었음. 돈이 이후 상업에 꼭 필요한 것으로 입증되었다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 최초의 동전들로 지불된 채무란 대체 어떤 것들이었을까? 최초의 동전들이 정치적 공공조직, 즉 지역조직의 인각을 지닌 것임을 생각한다면, 여기서는 개인채무가 관찰대상이 아니다. 그보다는 정치적 채무를 생각해야 하고, 동전지불을 이용하던 정치적 권위를 향한 개인의 청구권을 생각해야 한다. 즉 군인들의 급료, 관리들의 봉급, 체육선수들에게 주던 상금 등이다. 여기서 동전의 인각은 이렇게 지불된 동전이 실질적 구매력가 연관되어 있음을 보증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정치적 권위는 벌금이나 지대 등을 돈으로 받겠노라고 고집했던 것이다. 동전소지자는 법률을 위반했을 경우 벌금이나 세금을 이 돈으로 낼 수 있었다. 따라서 지불이 표준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나타난 곳은 공공질서 분야였다. 이것은 돈의 두번째 기능, 즉 가치표준이라는 기능으로 연결된다.
- 짝짓기란 자신의 번식을 원하는 두 개체가 서로 상대방을 이용하는 것. 여기서 남성측의 기여분이 적어질수록, 일부일처의 가능성은 낮아짐. 처음에 양측의 에너지 비용이 차이가 나지만, 남성이 여러가지를 돌볼 경우, 즉 먹이를 가져오고, 둥지를 짓고, 먹이영역과 여성 및 후손을 보호하고, 후손의 교육에 동참할수록, 양측의 이런 투자비용 차이는 줄어듬. 이렇게 기여한다 해도, 일부일처제와 바람피우기의 결합이라는,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전략을 바꾸지는 못함. 암컷은 두 가지 관점에 따라 이런 가능성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다. 신체적 표지들을 통해 상대방의 유전적 적합성을 살펴보고, 또한 상대방이 훌륭한 부양자가 될 것인지의 개연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 인간 아이들의 양육이 어린 동물의 양육보다 비용이 더 들고 따라서 더욱 후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함. 인간은 훨씬 더 느리게 어른이 된다. 생후 1년이 지나면, 두뇌는 성숙한 두뇌의 절반크기에 도달. 그에 반해 원숭이와 심지어 호모 에렉투스까지도 같은 시기에 어른 두뇌의 80% 정도에 이름. 이렇게 느린 성장은 유인원에 비해 극적으로 긴 기대수명을 동반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경우 자주 여러명의 후손이 동시에 부모의 후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냄. 반면 동물계의 양육은 거의 언제나 차례로 이루어짐. 인간의 일부일처 형성과 노동의 분화는 한편으로는 아이들을 보살피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특히 먹여야 한다는 점에서, 후손에게는 생존에 유리했다. 짝의 형성과 분업은 아이들의 사망률을 크게 낮추고, 서로를 보강했다. 짝의 형성이 분업을 허용하고, 분업은 둘이 서로 더욱 의지하게 만든 것이다. 동시에 인간만이 유일하게 일부일처와 집단생활을 결합시켰다 가족들이 집단을 이루어 생활하는 소수 유인원들의 경우, 이런 가족이란 언제나 수컷 1마리와 그의 하렘으로 구성됨
- 일부다처제로 인해 여성이 부족해지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모두가 결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서로 경쟁상태에 있는 도시국가에서는, 모든 주민이 자신을 전체와 동일시하도록 만들 수단이 될 수 있었다.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다. 일부일처 결혼제도가 규범이 되면, 사회 안에서 남성들의 성적인 경쟁을 줄인다. 그렇게 보면 일부다처에서 사회적 일부일처제로 넘어가는 것은 경쟁을 줄여주는 다른 구조들, 곧 엘리트를 통한 세금지불, 고용주 지분이 들어간 사회보장제도의 도입 등과 비견될 수 있고, 따라서 일종의 정치적 재분배라고 할 수 있다. 아주 늦게야 나타나는 1인1표라는 생각이 이런 관정메서는 1인 1아내라는 공식으로 이미 준비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임. 일부일처 결혼은 정치적 타협의 덕이자, 이익집단을 넘어 집단행동의 의식이 생겨난 덕으로 돌릴 수 있을 것임.
- 일부일처제가 여성에게 실질적으로 내놓는 질문은, 10등 남자가 온전히 제게 속하는 것과 1등 남자의 10분의 1만이라도 제게 속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나은가 하는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
- 한 여자가 자신의 생애 동반자가 자기를 속인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따지면, 그는 무조건 '당신에게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아내나 여자친구가 바람피운 것을 알게 되면,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났어.' 예를 들어 '우리 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라고 그가 말하거나 '그건 아무 의미도 없어'라고 그녀가 말한다면, 이건 그냥 사족일 뿐이다. (독일의 수필가 카를 마르쿠스 미셸) 커플의 사회생물학과 문화사의 배경을 놓고 보면, 두 사람 모두 옳다. 바람피우기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일부일처제에 대한 질문에는 그런 설명이 아무 의미도 없다. 사랑에 찬 결혼이 오로지 바람을 피웠다는 것만으로 해체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감당되고, 용서되고, 심지어 허용될 수도 있음. 물론 이런 진실이 두 사람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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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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