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역사

역사 2019. 7. 21. 19:37

1. 서구 역사의 창시자,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2500여 년 전 사람이지만 사유능력은 현대의 역사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 역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직면했던 어려움과 해결해야 했던 과제, 역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직면했던 어려움과 해결해야 했던 과제, 역사를 서술한 목적도 비슷했다. 그들은 모든 시대의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영원성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었기에 책의 첫머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 역사가는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건을 선택해서 의미있다고 여기는 사실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함. 어떤 사건이 중요한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경험의 영향을 받음. 직접 체험한 전쟁보다 더 의미있게 다가오는 사건이 달리 있겠는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서술 대상의 차이가 아니라 역사의 대사건을 서술하면서 취한 두 역사가의 태도다. 세계대전의 역사를 쓴 그리스 사람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와 페르시아를 공정하게 대했고, 내전의 역사를 쓴 아테네 시민 투키디데스는 델로스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공정하게 다루었음. 그들이 어느 한쪽을 감정적으로 편들었다면 사실을 편향되게 기록하고 해석했을 것이고, '역사'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인류 문화자산이 되기 어려웠을지도 모름
- 역사는 역사가의 목적과 사실, 사실에 대한 해석과 역사가의 상상력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복합적 피드백의 산물이라고 본 카는 매우 간결하고 우아한 문장으로 그 생각을 표현했음.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소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다."
-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가 서구에서 역사의 창시자 대접을 받는 것은 책이 훌륭해서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었고 지금도 읽기 때문이기도 함. 역사의 역사에 남은 역사서를 쓴 서구 역사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그리스 고전에 통달했고, '역사'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들의 책은 왜 그렇게 오래 그리고 널리 읽혔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핵심은 서사의 힘이다. 그들은 뚜렷한 목적을 품고, 명확하게 특정할 수 있는 대상에 관하여, 최대한 사실에 토대를 두고, 사람들이 귀 기울여 들으면서 지적 자극을 받고 정서적 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이야기를 꾸몄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가 지적자극을 받고 정서적으로 공감을 할 수 있는 서사를 만드는 일이다.

2. 사마천이 그린 인간과 권력과 시대의 풍경화
- 사기가 그저 가치 있는 역사기록일 뿐이라면 전문 역사연구자들이나 들여다보는 책으로 남았을 것임. 수많은 역사 애호가들이 지금도 사기를 읽는 것은 그 안에 인간의 이야기가 있어사다. 사기에서 우리는 사람답고 훌륭한 삶을 추구하면서도 부질없는 욕망과 야수같은 충동에 휘둘리는 인간존재의 모순을 발견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남을 지배하는 데 요긴한 처세술을 배우려고 읽으며, 또 어떤 이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인생의 의미를 만들어나가야 할지 고민하면서 읽는다
- 인물과 사건이 역사의 뼈와 살이라면, 제도와 문화는 혈관과 신경이다. 사회와 시대를 입체로 재현하려면 제도와 문화를 함께 보아야 한다. 사마천은 단순히 제도 변경사실만 기록한 게 아니라 제도에 적응하고 허점을 이용하는 사람의 행동을 함께 살피면서 제도사와 문화사를 썼다. 이런 측면까지 인식하고 역사를 서술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인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역사서를 한권만 뽑는다면 사기가 가장 강력한 후보다. 사마천은 역사를 역사답게 쓴 중국문명 최초의 역사가였다. 민간의 역사서와 다양한 국가기록을 참고해 사기를 집필했지만 사기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 이전의 역사서가 저마다 별 하나를 그렸다면 사마천은 우주를 그렸다. 사기는 시대와 문명의 과거를 언어로 재구성한 전체사였다. 인류 역사에서 혼자 힘으로 그런 작업을 해낸 역사가는 오로지 그 한사람뿐이었다. 사마천은 역사를 쓰는 사람이 반드시 부딪히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섰음. 자연인 한 사람이 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작업량이 많았음. 종이도 아닌 죽간에 먹으로 글을 쓰면서도 모든 역사적 사건의 발생시점과 상관관계를 크게 어긋남 없이 기록하고 서술. 영웅과 군주와 왕조의 명멸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추적하면서 세상의 변화에 큰 영향을 준 인물들의 삶과 업적을 함께 이야기했다. 조수를 여럿 썼다면 그나마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어떤 방식으로 이렇게 방대한 작업을 해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 사마천은 국가와 사회는 정치권력과 경제제도, 사회제도, 법률, 예술과 문화양식의 복합체이며 그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 구조와 양상을 분석. 권세와 지위는 없었지만 독특하고 자주적인 인생을 살아나감으로써 인간의 본성과 삶의 의미를 사유할 실마리를 던진 이들을 망각의 어둠에서 건져냈다. 사기는 또한 개인사의 치욕을 견뎌낸 사마천이 역사의 수많은 사실을 마주하면서 느꼈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과 감정도 전해준다.

3. 이븐 할둔, 최초의 인류사를 쓰다
- 600년 전 북아프리카에 살았던 이븐할둔(1332-1406)은 문명을 환경의 산물로 간주하고 세계를 일곱기후대로 나누어 환경과 문명의 관계를 살피면서 인류사를 썼음. 그가 쓴 역사서설은 인류사의 원형으로 역사의 역사에서 합당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
- 역사서설에서 오늘날까지 역사서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는 보편적 역사법칙을 밝혀서가 아니라 귀중한 역사기록을 남겼기 때문. 그는 자신이 발견했다고 믿었던 역사법칙을 논증하는 과정에서 7세기에 탄생한 이슬람 문명과 아랍사회의 현황 및 특징을 기록했고, 당시 아랍지식인들이 인간과 문명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정밀하게 서술. 이런 정보 덕에 역사서설은 이슬람 문명의 발생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귀한 길잡이가 되었음. 이 책은 또한 시대를 한참 앞서간 과학적 사고방식과 인문학적 상상력을 담고 있어서 만만치 않은 재미를 맛볼 수 있다.
-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는 신을 섬기는 종교는 근보적으로 독선적일 수밖에 없다.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마찬가지. 그런데 이슬람 세계의 불행은 교리 그 자치게 아니라 무함마드가 세속의 왕이 된데서 비롯했음.그는 영혼과 도덕을 다루는 종교를 합법적 강제력 행사를 본서응로 하는 국가권력과 하나로 묶었다. 독점적 진리에 대한 확신을 기본으로 삼은 종교라 할지라도 종교의 영역에만 있을 때는 해악이 적고, 세속권력이 할 수 없는 사회적 선을 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종교가 국가권력과 일체가 되면 사회의 내적 평화가 뿌리내리지못함. 무함마드가 죽은 후 이슬람 세계에서 벌어진 일을 보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 오스만제국은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의 세 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차니한 다종교, 다문화, 다언어 국가였음. 만약 그 시점에서 인류문명을 대표하는 세계의 수도를 하나 정한다면 단연 이스탄불이었다. 산업혁명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축적한 단연 이스탄불이었다. 산업혁명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축적한 서유럽 열강이 영토를 잠식하고 그 지원을 받은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민족이 독립함으로써 수백년에 걸쳐 영토를 조금씩 잃었지만, 추축국 진영에 가담했따가 1차대전의 패전으로 무너진 20년까지 오스만 제국은 5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이었다.

4.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 랑케
-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랑케의 야심,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쓴 역사를 과학적 역사라고 한 추종자들의 호언은 인간정신과 문자 텍스트의 한계에 대한 인식부족이 빚어낸 착각이 있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랑케의 역사이론은 역사가에게 명분있는 도피처를 마련해주었다. 과거를 평가하는 일에서 손을떼고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도록 동시대인을 일깨우는 과업을 외면하면, 역사가는 역사 서술작업에 따르는 정치적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사라져 버린 문명의 파편을 탐사하고 이미 죽고 없는 사람들이 남긴 문서를 뒤져 지나간 시대의 고유한 가치를 탐사하는 것으로 역사가의 임무를 다할 수 있다면, 굳이 그 과거의 연장선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사건에 개입하거나 끌려들어가지 않아도 됨.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역사가들이 우리 민족사를 우리 스스로 연구한다는 취지 아래 1934년 진단학회를 결성하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만 기술한다는 랑케의 구호를 차용한 것은 영리한 선택이었음. 일제의 식민사관 구축에 협력한 학자들도 같은 이론을 내걸었기 때문에 나중에 도매금으로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긴 했지만, 이러한 실증주의 역사관을 표방함으로써 총독부의 감시와 박해를 피하는 데 잠시 효과를 보았다.
- 랑케는 배울 것이 많지만 반면교사로 삼기에도 좋은 역사가다. 역사가는 해부학을 배우는 학생이 아니라 노련한 과학수사대 요원과 법의학자가 시신을 다루는 자세로 역사의 사실을 대면해야 함. 시신을 해부해서 거기 무엇이 있는지를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신의 상태를 코고 사망원인과 시간을 알아낼 뿐만 아니라 망자의 직업과 생활환경, 생전의 건강상태와 습관까지 추론해 내야 하며, 유류품이 담고 있는 정보를 연결해 그 사람의 인생행로를 추측할 수 있어야 함. 니체가 아프게 지적한 것처럼, 랑케는 역사의 사실에서 인간의 이야기를 끌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쓴 책들은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귀중한 문헌을 보관하는 도서관 깊은 곳에 잠겨 있는 것이다.

5. 역사를 비껴간 마르크스의 역사법칙
- 마르크스는 다른 사람의 사상과 이론을 빠르게 흡수하면서도 그 결점과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해 자신만의 사상과 이론을 구축하는 데 활용. 유물사관의 방법론인 변증법으 헤겔에게서, 철학적 토대인 유물론은 신의 존재를 부정한 논문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발표해 젊은 지식인들을 매료시켰던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마흐(1804-72)에게서 가져왔다. 마르크스의 대표적 자본론의 핵심인 잉여가치론은 고전파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을 개정 증보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글도 잘 썼다. 공산당 선언 같은 정치적 격문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을 비롯한 정치비평, 자본론처럼 방대한 학술서를 모두 최고 수준으로 쓴 지식인은 문명사에 흔치 않다.
- 역사의 종말은 철학, 경제학, 정치학을 뒤섞은 사변적 정치선언문으로, 역사와 역사학에 대한 구체적이고 진지한 질문에는 전혀 응답하지 않는다. 헌팅턴의 표현에 따르면, 이 책은 서구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지식인이 터뜨린 환상과 편견의 꽃망울일 뿐이다. 그러나 후쿠야마가 되살려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함. 인간은 일관된 방향을 가진 역사를 구축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역사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많은 역사가들이 대답을 제시했지만, 실제 역사는 그 모든 대답을 비겨갔다. 결국 후쿠야마이 대답 역시 터무니 없는 것으로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그가 되살려낸 질문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6. 민족주의 역사학의 고단한 여정, 박은식, 신채호, 백남운
- 헤로도토스에게 역사서술은 돈이 되는 사업이었고, 사마천에게는 실존적 인간의 존재 증명이었으며, 할둔에게는 학문연구였다. 마르크스에게는 혁명의 무기를 제작하는 활동이었고, 박은식과 신채호에게는 민족의 광복을 위한 투쟁이었다. 사피엔스의 뇌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지만 뇌에 자리잡는 철학적 자아는 사회적 환경을 반영한다. 그들은 각자 다른 시대에 살면서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이야기를 남겼다.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게 되는 이유가 무얼까? 그들은 철학적 자아와 공명하기 때문. 민족주의자든 아나키스트든 마르크스 주의자든, 식민지 시대 지식인들이 쓴 역사를 읽으면 가슴이 아리다. 그들이 살았던 사회적 환경과 오늘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같지 않은데도 이러는 이유가 무엇일까?

7. 에드워드 H 카의 역사가 된 역사이론서
- 역사가의 선택을 받은 사실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자. 수많은 과거의 사실 가운데 어느 것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지, 그 사실에 얼마나 중요한 지위를 부여할지는 역사가의 주관적 평가와 해석에 달려 있음. 역사적 사실은 순수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면서 발언하는 게 아니라 평가와 해석이라는 주관적 요소의 세례를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존재를 인정받고 무언가 말할 수 있다. 이 주장을 카는 다음과 같이 우아하게 표현했다. 베네데토 크로체가 얼마나 대단한 혁명가, 정치가, 역사가였는지 알면 더 좋겠지만 몰라도 이해하는 데 큰 상관은 없다.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선언했다.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운으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임무는 기록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만약 아무것도 평가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기록할 가치가 있는 사실인지 역사가는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 사실을 다루는 역사가의 태도에는 두 극단이 있다. 하나는 역사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 깎을 것은 깎고 보탤 것은 보탠 공자의 춘추필법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 그 자체가 말하게 함으로써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보여준다는 랑케 필법이다. 춘추필법은 역사가에게 해석이라는 칼로 사실을 난도질할 권리를 주었다. 반면 랑케필법은 사실 앞에서 역사가를 무장 해제했다. 춘추필법은 2000년 동안 중국 문명권의 역사서술을 지배했고, 랑케필법은 100년 동안 서구 역사학계에서 유행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어느 것도 받아등리지 않는다. 그들이 쓴 역사는 모두 춘추필법과 랑케필법 사이 어딘가에 있다.

8. 문명의 역사, 슈펭글러, 토인비, 헌팅턴
- 토인비의 이론에 따르면, 문명은 외부환경의 도전에 대한 성공적 응전의 산물이며 탄생한 후에도 계속 새로운 도전에 직면. 문명은 응전에 성공하면 성장, 발전하고, 실패하면 쇠퇴하며, 실패한 응전이 계속될 경우 해체된다
- 토인비는 문명이 만나는 도전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눔. 척박한 땅이 주는 자극, 새로운 땅이 주는 자극, 갑작스러운 외부의 충격(공격), 외부의 계속적인 압력(압박), 그리고 사회 내부 집단에 대한 제재(압제)다. 새로운 도전이 전혀 없으면 폴리네시아, 에스키모, 유목민 사회처럼 문명이 성장을 멈춘다. 도전이 가혹할수록 응전하는 힘도 커지지만, 지나치게 가혹하면 문명 자체를 말살하기 때문에 지나치지 않은 수준의 적당한 도전이 문명의 성장에 가장 큰 자극을 줌. 그렇다면 문명은 왜 응전에 성공하거나 실패하는가? 응전의 성패를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가? 토인비는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관계에 의거해 다음과 같은 해답을 제시했다. 사회의 진보는 언제나 개인에서 출발. 여기서 개인은 모든 개인이 아니라 소수의 창조적 천재들이다. 어느 사회나 소수의 창조적 천재가 있으며, 그들은 비창조적 다수자가 자신의 비전을 받아들이고 따를 때에만 사회적 창조행위를 성공적으로 수행가능. 비창조적 다수자가 창조적 소수자를 모방하고 따르는 현상을 미메시스라고 한다. 그리스어 미메시스는 모방 또는 재현이라는 의미. 창조적 소수자가 미메시스를 창출하면 사회는 응전에 성공하고, 문명은 성장. 반면 창조적 소수자가 창조력을 상실하면 비창조적 다수가가 미메시스를 철회하는데, 이런 과정을 네메시스라고 함. 네메시스는 화를 내며 비난한다는 의미. 창조적 소수자가 창조력을 잃고 지배적 소수자로 타락하면, 다수자는 미메시스를 철회하고 면종복배하는 내적 프롤레타리아트와 폭력으로 맞서는 외적 프롤레타리아트로 분화하며, 사회는 응전능력을 잃고 혼란에 빠지며 문명은 쇠퇴
- 토인비의 역사 패러다임은 21세기 들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됨. 미국은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다언어를 가진 제국이며 현대 서구문명의 중심국가임. 그런데 백악관의 권력자들은 종종 지배적 소수자의 행태를 보였다. 9/11 테러를 저지른 무슬림 테러리스트 집단은 서구 문명에 포획당안 서구 밖 문명에 속한 사람들(외적 프롤레타리아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16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트럼프 후보의 인종주의적 정치선동에 환호를 보낸 미국의 쇠락한 공장 지대 백인 노동자들은 위에서 말한 "성공한 백인 동료들이 바다 건너에서 데려온 노예와 같은 사회적 지위로 떨어졌다."고 느끼는 내적 프롤레타리아트라 할 수 있음. 이것은 토인비가 문명 해체기의 징후로 지목한 현상과 유사함. 새로운 창조적 소수자가 등장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미메시스를 복원하지 못하면 서구문명뿐만 아니라 인류문명이 직면한 멸망의 위험도 줄이기 어려울 것임. 서구문명이 노예제도를 스스로 폐지했기 때문에 전쟁이라는 쌍둥이 암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토인비의 믿음은 지나친 낙관이었는지도 모름
- 사람들은 조상, 종교, 언어, 역사, 가치관, 관습, 제도를 가지고 자신을 규정한다. 부족, 민족집단, 신앙공동체, 국민, 가장 포괄적인 차원에서는 문명이라고 하는 문화적 집단에 자신을 귀속시킨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도 정치를 이용한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 알 때만, 아니 자신의 적수는 누구인지 알 때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문명의 충돌)

9. 다이아몬드와 하라리, 역사와 과학을 통합하다.
- 토인비는 문명의 발생원인과 관련해 인종설과 환경설을 모두 배척하고 문명 내부로 눈길을 돌려 사람과 사람의 관계, 기술과 제도와 문화의 변화를 추적. 그러나 다이아몬드는 전적으로 환경설에 손을 들어줌. 피부색과 신체특성이 어떻든 모든 사피엔스는 동등한 지적, 정서적, 육체적 능력을 지녔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문명 발전 속도의 차이를 만들어낸 근본원인은 환경 외에 다른 게 있을 수 없다. 기술과 제도아 문화의 차이도 그 원인을 추적하면 결국 환경 차이에 귀착됨.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을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다이아몬드의 대답은 간단하다. "우연히" 또는 "운이 좋아서"
- 헤로도토스는 이오 공주 납치사건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로 '역사'를 열었다. 사마천은 사기본기 첫머리에 삼황오제의 전설을 실었다. 할둔의 역사서설은 사회조직의 등장과 함께 출발하며, 문명을 역사서술 단위로 설정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도 마찬가지. 김부식은 삼국사이의 신라본기를 박혁거세의 탄생설화에서 시작했고, 신채호는 단군왕검 신화로 조선상고사의 문을 열었다. 모두가 국가 또는 그에 준하는 사회조직의 출현을 역사의 시작으로 잡은 셈. 그런데 하라리는 7만년전 쯤 일어난 인지혁명을 역사의 출발점으로 보았음. 사피엔스가 이 혁명으로 사회조직 또는 문명을 만들어낼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 그렇다면 인지혁명은 어떤 혁명이었을까? 그것은 역사의 사건이 아니라 생물학의 사건이었다.
인지혁명이란 약 7만년전부터 3만년 전 사이에 출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을 말한다. 무엇이 이것을 촉발했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이론은,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돌연변이가 사피엔스 뇌이 내부배선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전에 없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의 나무 돌연변이라 할 수 있다. 왜 하필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라 사피엔스의 유전자에 등장했을까? 우리가 아는 한 그것은 순수한 우연의 산물이었다.
- 하라리가 하고 싶었던 말은 어떤 생물 종의 진화적 성공이 그 후의 인구폭발은 사피엔스의 진화적 성공을 증명함. 그러나 그들이 더 행복해졌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농부가 수렵채집인보다 행복하게 살았다고 확언할 수는 없었다는 말이다. 이 논리를 산업화 또는 과학혁명 이후의 인구폭발에 적용하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근대 이후 노동자의 삶은 중세 농부의 삶보다 행복한가? 아래 글을 보면 하라리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는 소, 돼지, 닭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사피엔스라고 해서 예외가 되는 건 아니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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