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의 세계사

역사 2019. 7. 8. 12:45

- 근대이전의 경우 기본적 화폐는 놀라울 정도로 일관적이었다. 약 4그램의 작은 금화가 주로 통용되었으며 오늘날 미국의 10센트 동전 크기. 프랑스의 리브르, 피렌체의 플로린, 스페인이나 베네치아의 두카트, 포르투갈의 크루사도, 이슬람권의 디나르, 비잔틴의 베잔트, 로마후기 솔리두스가 이러한 예이다. 오늘날 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80달러 정도의 가치를 지님. 이와 관련하여 세가지 예외가 있다. 네덜란드의 길더는 무게가 5분의 1정도였으며, 영국의 1파운드 금화와 로마초기 아우레우스는 무게가 2배정도였다. 이슬람권의 디르함, 그리스의 드라크마, 로마의 데나리온은 은화로, 크기와 무게가 거의 비슷했다. 가치는 반숙련 근로자의 하루임금 수준이었으며, 금화와 은화의 교환비는 1대 12정도였다.

1. 메소포타미아의 초기교역
- 기원전 2500년에는 신분을 과시하는 상징이 소라껍데기 잔과 등에서 구리로 만든 단지, 도구, 장신구로 바뀜. 이 시대에도 구리의 운반비용은 여전히 비쌌고, 평민은 금속이 아닌 석재로 만든 도구를 사용. 설사 평민이 구리로 만든 훌륭한 기구를 손에 넣을 능력을 가졌더라도 구리로 된 고급제품은 지배계층과 군인차지였을 것이다. 이후 500년 동안 금속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구리로 만든 도구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 청동기 시대에는 구리가 귀했기에 소, 곡물과 더불어 교역품으로 활용됨. 하지만 기원전 2000년 경 구리공급이 증가하면서 가치도 하락. 그러자 구리대신 은이 교환수단, 즉 오늘날 화폐라 일컫는 대상으로 자리잡음. 은이 화폐로 통용되면서 다른 산물의 구입과 판매도 촉진되어 상업이 활성화됨.
- 과거 로마인에게 후추무역이란 오늘날 야심만만하고 물욕이 강한 사람들의 투자은행과도 같았음. 다시 말해 최고 부유층에게 직접 닿을 수 있는 방법이었음. 제국 초기에는 탐욕스러운 사람을 가리켜 "낙타 등에서 방금 구매한 후추를 처음으로 가져가는 자"라고 표현했다.
- 서로마제국의 멸망은 세계무역이 그 요람지인 인도양 밖으로 뻗어나가는 속도를 둔화시켰다. 그러나 교역 자체가 멈춘 것은 아니었음. 강력한 신흥 유일신교인 이슬람이 발원하면서 인도양을 통한 교역이 새롭게 확대됨. 이에 따라 교역은 아시아의 드넓은 평원에서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의 변경에서도 일어남. 한나라-로마 축을 중심으로 한 교역은 막대한 거리를 아울렀지만 통합의 정도는 강하지 않았다. 화물은 생산지에서 목적지까지 수많은 인종, 종교, 문화, 법전통의 상인들을 거쳐야 했다.
- 성직자의 탄생을 계기로 파편적이고 다민족을 거치는 고대의 교역은 자취를 감춤. 무함마드가 사망한 이후 몇 세기만에 하나의 문화, 하나의 종교, 하나의 법이 구세계 3개 대륙간 교역을 통합시켰다. 이러한 상태는 최초의 유럽 선박이 동양에 도착하기 전까지 1000년 가까이 유지됐다.

2. 그리스 교역 해협을 누가 장악하는가
- 그리스가 서양문명의 요람이라면, 그리스 특유의 전략적 지리요소는 해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서양의 해군전략에도 영향을 미쳤다. 베네치아, 네덜란드, 잉글랜드는 각각 13, 17, 19세기판 아테네였음. 식량을 자급할 수 없는 수준으로 몸집이 커지자 번영과 생존이 해로와 머너먼 카테가트(유틀란트아 스웨덴 사이의 해협), 영국 해협, 수에즈, 아덴, 지브롤터, 말라카, 헬레스폰트와 보스포루스 같은 전략적 요충지의 장악 여부에 달려 있었음. 오늘날 사우디, 이라크, 이란의 거대한 유전에서 생산되는 원유가 페르시아만을 통과하면서 미국, 영국, 인도, 중국의 국방장관은 좁은 물길을 자유롭게 통과하는 항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느끼고 있다.

3. 대상의 길_낙타와 선지자
- 기원전 1500년까지는 주로 당나귀가 짐을 나르는 짐승으로 쓰였다. 이후 유목민은 이동을 위해 낙타를 대거 사육. 당나귀가 부드럽고 가벼운 짐을 실을 수 있는 가정용 세단이라면, 낙타는 푹신한 발굽이 있어 길도 없는 장거리의 황무지를 두 배의 짐을 싣고 두 배로 빠르게 갈 수 있는 랜드로버였다. 이 같은 낙타의 능력은 중동 사막과 아시아 스텝 지대의 교역에 혁명을 일으킴. 몰이꾼 한 사람이 끌고 갈 수 있는 낙타는 3-6마리 정도였고, 하루에 1-2톤의 짐을 30-100킬로미터 나를 수 있었다.
- 유황과 몰약은 종교적 이유와 세속적 이유 모두에서 사치품으로 각광받음. 현대인은 고대문명을 상상할 때 주로 시각과 청각요소를 떠올리고 후각적 요소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위생시설이 변변치 않은 비좁은 도시에서는 지도 없이 냄새로도 장소를 식별할 수 있었다. 주요 하수시설과 도축장에서 나오는 오수는 악취를 풍기고 관청, 신전, 극장 주변에서는 소변냄새가 진동했다. 특히 무두질 공장, 생선가게, 묘지에서 풍기는 악취는 후신경을 강하게 자극. 게다가 깨끗한 물로 자주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는 특권은 부유층만 누릴 수 있는 시대였기에 몰약만큼 가치있는 물건도 드물었음. 몰약은 바디로션처럼 간편하게 바를 수 있었고 일상적 악취를 가려주었음. 의사들은 의약품에 듬뿍 첨가했으며, 고대의 방부제로도 활용됨. 또한 향은 성적 용도로도 사용되었음.
- 고대의 향료 교역은 오늘날 코카인이나 헤로인 거래와 다를 바가 없었음. 원료를 재배하는 농가에서는 상대적으로 안전하지만, 완제품 형태로 최종 소비자에게 전달될 때는 매우 위험한 물건이 되었다. 향료가 최종목적지 로마에 미친 영향은 그리 유익하지 못했음. 실크와 더불어 향료의 수입은 제국 내부에 유통되던 은을 고갈시킴. 나이젤 그룸은 제국의 수도로 모인 낙타 1만마리 분량의 향료를 구입하는 데 연간 1500만 데나리온 가량이 들었다고 추정. 해외에서 약탈한 물건이라도 부두에 도착하기만 하면 문제가 없었다. 세네카가 축적한 부만 해도 1억 데나리온에 달했다고 전해짐. 하지만 2세기에 정복활동이 중단된 반면 로마인의 낭비는 절정에 달하면서 제국의 힘은 향을 태운 연기 속에 사라져갔다
- 지중해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섬에 속하던 키프로스가 649년 아랍의 첫 공격에 함락된 이후 827년에 크레타, 870년 몰타가 차례로 아랍인의 차지가 됨. 지중해 최대 거점인 시칠리아도 100년 이상의 갈등 끝에 965년 아랍인의 손에 넘어감. 새 천년이 밝을 때 기독교 세력은 한때 로마가 우리 바다라 부르던 지중해가 무슬림 선박으로 뒤덮인 모습을 보았을 것임. 유럽에서 무슬림은 정복활동을 이어나가 교역을 장악. 9-10세기에 주조된 이슬람 주화가 유럽중부, 스칸디나비아, 잉글랜드, 아이슬란드에서까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 750년을 기준으로 이전에는 초기 우마이야 왕조가, 이후에는 아바스 왕조가 지배. 이들은 로마제국보다 더 넓은 영토를 다스렸는데, 대대적 정복활동이 마무리되어 전리품 공급이 줄어들자 상업적 요소가 군사적 우선순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 이들에게는 가난하고 후진적인 서유럽보다 실크 교역로가 지나가는 부유한 중앙아시아가 더 매력적이었음. 우마이야조는 732년 프랑스의 도시 푸아티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갈리아로 돌아오지 않았다. 또한 718년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레콩키스타(에스파냐의 그리스도교가 이슬람교도에 대해 벌인 회복운동)가 일어났지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레콩키스타는 1492년 마지막 무어인(과 유대인)을 축출하면서 마무리됨. 반면 무슬림 군대는 먼 중앙아시아 지역을 거듭 공략했으며, 751년 탈라스(오늘날 카자흐스탄)에서 처음으로 당나라 군대에 승리를 거둠. 탈라스와 더불어 이익이 나는 대상 교역로가 무슬림의 손에 들어왔고,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극적인 정복은 종종 놀라운 행운을 안겨주기도 함. 탈라스에서 무슬림이 얻은 가장 중요한 소득은 영토도 실크도 아닌 평범하면서도 귀중한 자원이었다. 탈라스에 억류되어 있던 중국인 죄수 가운데 제지업자가 있었고, 이들은 이슬람 세계와 유럽에 놀라운 기술을 전파했다. 인류의 문화와 역사를 바꾼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 초기에 무슬림 정복자들은 기본적으로 팍스 로마나를 재현했는데 규모가 그보다 더 컸다. 우마이야와 아바스 제국은 사실상 옛 국경과 장벽을 없앤 거대한 자유무역지대로 기능했다. 특히 아득한 고대에서부터 동과 서를 가르는 경계 역할을 하던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자유무역이 이루어짐. 더 이상 아시아로 향하는 세가지 경로, 즉 홍해와 페르시아만, 실크로드가 경쟁을 벌이지 않았다. 대신 글로벌 물류체계가 통합되었고, 칼리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세력은 누구나 길을 이용할 수 있었음. 이후 1000년 가까이 무슬림의 항해는 정복과 개종활동을 능가했음. 놀랍게도 선지자의 죽음 이후 100년이 흐른 8세기 중반에 페르시아인으로 추정되는 무슬림 상인 수천 명이 중국의 항구뿐 아니라 내륙의 도시까지 진출. 반면 중국 최초의 대형 정크는 1000년 쯤에야 인도양을 항해했다. 이후로도 400년이 지난 후 전설적 환관 정화가 대형선박으로 스리랑카와 잔지바르를 항해했다.
- 팍스 이슬라미카에 온전히 축복만 따른 것은 아니었다. 서양과 동양의 경계가 서쪽의 지중해로 이동하면서 무슬림이나 기독교도 모두 자유로운 통행이 불가능해짐. 역사학자 조지 후라니는 "고속도로 대신 지중해가 변경이 되자 곧 전쟁의 바다로 변했다. 이런 변화로 알렉산드리아가 쇠락했다"고 지적. 무슬림의 상업적 연결망은 환어음, 정교한 대출제도, 선물시장 등 여러 선진적 기능을 했다. 하지만 어떤 이슬람 국가도 현대 세계의 금융제도 기반인 국영은행 혹은 중앙은행을 설립하는 데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이는 핵심에서 벗어난 지적이다. 로마가 멸망한 수백 년 동안 옛 제국은 세계 상업에서 변두리로 몰락했고 중동, 인도, 중국에서 진행되던 상업과 기술의 혁명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지중해 항해에 선박의 방향을 바꿔주는 아랍의 대형 삼각돛이 도입되면서 혜택을 받음. 고대 서양의 사각돛으로는 방향전환이 불가능했다.
- 팍스 이슬라미카는 어떤 도전도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다가 11세기에 기독교 세력이 부활하면서 스페인, 시칠리아, 몰타에서 상당부분의 영토를 상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영토 회복에 힘입어 클레르몽 공의회를 열고 1차 십자군 원정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며, 일시적으로나마 성지를 탈환. 12세기 살라딘은 파티마 왕조 정복에 이어 예루살렘의 십자군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으며(다만 살라딘은 적인 기독교도와 교역하는 데 더 만족했다), 중동에서 무슬림 세력을 통합. 살라딘의 승리로 이슬람은 절정을 맞았지만 이후 처참한 울분이 이어짐. 13세기에 몽골이 침입했고, 14세기에는 흑사병이 유행했으며, 15-16세기에는 바스코다가마가 인도양을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이슬람은 오랜 세월에 걸쳐 쇠락. 하지만 무슬림 상인들은 16세기까지 장거리 교역을 장악했고, 근대 초까지도 여러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4. 상인들이 종교_범이슬람 상권의 등장
- '중국과 인도 여행기'에 따르면 중국인은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들에게 구리, 상아, 향, 별갑을 샀고 광저우에 도착한 무슬림은 금, 진주, 실크와 양단을 배에 실었다. 물건을 교환하는 과정은 무척 까다로웠으며 정부가 독점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은 바그다드에서 들여온 물건을 '다음번 선원들이 들어올 때까지' 6개월 동안 광저우의 창고에 보관했다. 물건의 30%를 수입관세로 지불했는데 "정부는 어떤 물건을 원하든 가장 높은 가격에 구입했고 대금도 즉시 결제했으며 거래를 불공정하게 진행하는 부분도 없었다" '중국과 인도 여행기'는 중국 여행기에 대한 서양의 전통을 세우는 역할을 했고, 훗날 마르코폴로와 이븐 바투타 등 수많은 여행자들이 이 책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중국과 인도 여행기'에서 기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익명의 저자들은 천조의 규모와 세련된 수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중국에는 대도시가 200곳 이상 있었고, 생활양식이 이국적이었으며, 제도가 발전한 상태였다. "중국에 사는 사람들은 빈부노소를 막론하고 서예를 배웠고 글쓰기 기법을 익혔다. 오늘날 사회보장 제도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은 '중국과 인도 여행기'에 설명된 중국의 세제, 노인 연금체계를 참고할 만하다.
세금은 개인이 보유한 부와 토지를 기반으로 징수되었다. 누구라도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관청에 등록했다. 18세가 되면 인두세를 부과했고 80세에 이르면 더 이상 장수하지 않았다. 그때부터는 국고에서 연금을 지급했다. 중국인은 젊을 때 세금을 거둬들였으니 늙었을 때 급여를 지급한다고 말한다.
- 중국이 해양기술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 상인들이 말라카 서부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중국은 단지 1405-33년에만 인도양에서 위력을 과시했을 뿐이다. 상인들이 기를 펴지 못한 이유는 유교에서 상업을 천시하고, 가장 뛰어나고 야심찬 인재들을 교역보다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관료사회에 집중시킨 영향으로 보임. 당시에도 중국(과 훗날의 일본)의 중앙집권적 정치구조는 외세와의 접촉을 신속히 차단할 수 있었음. 반면 고도로 분권화된 중세 인도양 교역에서는 다윈식 경쟁이 벌어짐. 정치적 돌연변이가 교역과 상업에 적합한 나라는 번창했지만 제도적으로 뒤떨어진 나라는 힘이 약해졌음. 이와 유사하게 유럽의 정치환경을 살펴보변 지형적으로 산과 강이 많아 수천개로 쪼개진 국가가 경쟁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제도를 갖춘 나라에게 유리했다. 그중 하나인 잉글랜드는 역사상 최초로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 얼마전부터 정화의 원정은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주제로 떠올랐다. 영국의 퇴역한 잠수함 사령관 개빈 멘지스는 '1421 :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에서 정화의 6차 원정파견대가 아메리카 대륙(과 더불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브라질 대서양 해안, 카보베르데 제도)을 방문했을 가능성을 시사. 해양사학자들은 멘지스의 주장 대부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오늘날 중국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기지개를 켜면서, 정화의 원정이 중국 외교의 따뜻하고 비공격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라고 설명. 하지만 그런 의도라면 정화의 원정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지 않는 편이 나을 것임. 당시 원정대는 황제의 권위에 어울리는 경의를 표현하지 않는 현지인을 납치하고 도륙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 예를 들어 1차 원정 당시 정화는 말라카 해협에서 해적을 5000명 이상 살해. 해적의 우두머리는 황제에게 올리는 선물로 중국으로 끌려가 참수당함. 나중에 떠난 원정에서 정화는 스리랑카, 수마트라 동부의 팔렘방, 세무데라(오늘날 반다아체 인근)의 통치자들을 사로잡았다가 풀어주었으며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벌인 적도 많았다.
- 말라카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무엇인가? 말라카가 해양 세계에서 중요한 관문으로 번성한 이유는 단순히 계절충의 종착지이기 때문은 아님. 해협은 말레이와 수마트라 해안을 따라 수백킬로나 뻗어 있었고 좁은 싱가폴에서 통제하기가 쉬웠다. 게다가 말레이와 수마트라에는 파라메스와라가 1400년 말라카를 발견하기 이전부터 수 백년 동안 존재해온 교역도시가 있었다. 도시의 부와 명성은 파라메스와라와 후손이 남긴 천재적 제도 덕분으로 봐야 함. 해협에 있는 수많은 교역도시 가운데 말라카만 유일하게 교역할 것인가, 침략할 것인가, 아니면 보호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디. 말라카인은 전통적 이슬람법에 따라 부과되는 정도보다 가볍게 책정. 서쪽, 즉 인도인과 아랍인이 들여오는 물건에 (통상적인 10%가 아니라) 최대 6%의 관세를 적용한 것이다. 만약 서쪽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 아내와 더불에 항구에 정착하면 3%만 내면 됨. 동쪽에서 온 사람, 즉 말레이인, 인도네시아인(귀한 향신료를 가져오는 몰루카 제도 사람), 시암인, 중국인은 관세를 전혀 내지 않음. 동쪽 사람들의 물건을 포함한 모든 수입품에서 술탄과 신하들에게 바치는 선물을 공제했는데, 피레스는 이를 전체 물건가치의 1-2% 정도로 추산. 수출세는 상인, 동쪽사람, 서쪽사람, 현지인 어느 누구도 낼 필요가 없었다

5. 중세 향료교역과 노예교역
- 향신료를 대규모로 거래했다는 대목에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음. 서양에서는 막대한 향신료 수요를 무슨 돈을 해결했느냐 하는 것. 16세기에 페루와 멕시코의 광산에서 채굴된 은이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전가지, 유럽에는 수입품 가격을 지불할 수 있는 주화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음. 게다가 서양에서 생산하는 물건 중 동양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 만한 상품도 별로 없었음. 현대 이전에는 제조업과 섬유산업이라는 말이 사실상 동의어였음. 유럽에서 생산되는 양대 직물 가운데 리넨은 인도의 면직물보다 질이 떨어졌으며 양모 역시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대신 지중해에서는 붉은 산호가 대량으로 채취되고 이탈리아에서는 고급 유리를 생산했지만, 동양에 사치품을 판매해서 벌어들이는 이익은 중세 서양의 무역적자를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음. 유럽인은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에서 탐나는 향신료와 교환할 상품을 생산했는가? 그럴 만한 상품이 없지는 않았다. 당시 군사를 탐욕스레 모집하던 무슬림 군대에게 노예는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1200-1500년경 이탈리아 상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노예 상인들이었으며, 흑해의 동부해안에서 사람을 사서 이집트와 레반트에서 팔아넘겼음. 노예를 실은 선박은 다르다넬스(고대 헬레스폰트)와 한대 강성해던 비잔틴 제국이 지키던 보스포루스라는 두 곳의 요충지를 거쳐갔음. 이제 비잔틴 제국은 이탈리아 교역의 양대 세력인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사정거링 놓이는 신세로 전락
- 유럽인과 무슬림은 육두고, 메이스, 정향이 서양에 처음 전파된 이후 1000년 동안 재배지의 저오확한 위치를 몰랐다. 10세기에 활동한 아랍의 역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는 정향과 육두구를 인도에서 나는 품목에 포함시켰는데, 실제 생산지와의 오차가 6500킬로미터에 달함. 마르코 폴로, 이븐 바투타, (이 두 여행가가 향료 교역에 대한 지식의 상당부분을 의존했을) 중국인은 향료가 자바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향료 제도는 자바에서 동북동 방향으로 1600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었다.

6. 흑사병과 질병교역
- 과거 세계는 서로 완전히 분리된 질병 풀로 구성되어 있는 전염병 부싯깃통과 같았음. 각 풀안의 인구는 해당 질병이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지만 다른 풀에서 건너온 질명에는 취약했음. 한 지역에 1000년 동안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잠복해 있던 병원체가 수백 킬로 떨어진 지역에서는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임. 14-18세기에 세계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질병 풀이 서로 뒤섞였고 마침내 대재앙이 벌어짐. 현대인에게는 희소식이 있다면, 앞으로 질병의 혼합이 추가로 일어날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 이제 세계적 유행병은 HIV 바이러스 같이 인간 이외의 숙주에서 머물던 병원체가 변이를 일으켜 인간을 감염시키는 경우에만 가능
- 최초의 전염병은 벼룩을 통해서 사람 사이에 전염됨. 벼룩을 통한 전염병은 14세기 유럽에 영향을 미친 폐렴형 전염에 비해 전염속도가 느렸음. 동로마 제국에서는 최초로 질병이 창궐한 후 5-10년간격으로 역병이 찾아왔고 면역력이 떨어지는 어린아이들이 특히 큰 피해를 입음 541-42년에는 콘스탄티노플 인구의 4분의 1 가량이 사망했는데, 프로코피우스는 사망률이 정점에 달했을 때 하루 1만명이 죽었따고 기록. 700년에는 인구가 반으로 감소. 역병이 돌기 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제국의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 페스트가 통일의 희망을 산산조각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전염병이 휩쓸고 간 유럽은 암흑시대에 들어갔다. 반면 사막기후가 펼쳐지고 대도시가 없어 질병에서 보호받은 초기 이슬람 신자들은 지정학적 진공상태를 기회로 세력을 넓힐 수 있었음. 또한 전염병은 무슬림이 더 동쪽으로 진출하도록 도와주었음. 프로코피우스는 페르시아가 황폐화되었다면서, 연이은 역병으로 무슬림이 636년 크테시폰(이라크)에서 역사적 승리를 거뒀다고 기록. 동로마제국에서 전염병의 기세가 꺾였을 당시에는 이미 동방과의 교역이 쇠퇴하는 추세였다. 622년 콘스탄티노플에 마지막으로 역병이 돌았는데, 같은 해 쿠라이시는 무함마드와 추종자들을 메카에서 쫓아내 메디나로의 헤지라를 촉발시킴. 8년 사이에 무함마드의 군대는 아라비아 전역을 장악했고, 이후 1000년 동안 서양의 선박이 바브엘만데브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차단함. 이후 여러 세대 동안 서양인은 실크로드에도 접근할 수 없었음. 유럽은 서력기원이 시작된 이래 줄곧 아시아로 자유롭게 접근했지만 이슬람 군대에게 길을 빼앗김. 이처럼 뼈아픈 패배에서 유럽에 비친 한줄기 희망을 찾자면, 길이 차단된 덕분에 이후 700년 동안 아시아의 전염원에서 보호받았다는 점이다.
- 6세기 페스트는 바다를 통해 유입된 반면, 14세기에는 육로로 전파됨. 몽골 칸들이 정치적 화합을 이루면서 실크로드가 열렸고, 중국의 진귀한 물건과 함께 카파의 포위자들을 감염시킨 쥐와 벼룩도 같이 이동. 몽골군과 동맹이 감염당한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맥닐은 스텝지역의 전사들이 1252년 북쪽 방향에서 중국 남부와 버마의 히말라야 산기슭을 공격할 당시 감염된 설치류를 통해 질병에 걸린 것으로 추정. 중국에서는 1331년 페스트가 돌아왔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 거의 동시에 페스트는 몽골의 지배로 왕래가 손쉬워진 실크로드를 타고 빠르게 퍼짐. 감염된 벼룩은 서쪽으로 향하는 군마의 갈기, 낙타의 머리털, 짐칸과 안장주머니에 숨어 있던 곰쥐에 올라탔다. 장거리 상품교역은 간접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실크와 향신료가 도중에 중개인에게 인도되는 방식이었음. 이 과정에서 간균은 여러 차례 여정에 합류했다.
- 흑사병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유럽의 농민들은 숲으로 피하여 삶을 새로 시작할 수 있었음. 하지만 이집트에선 그런 선택권이 없었음. 나일강에서 불과 몇 킬로 떨어진 지역에서부터 태양이 작열한느 사막이 끝없이 펼쳐졌다. 당시 이집트 기록에는 사람이 자취를 감춘 마을에 대한 언급이 종종 등장. 이후 이집트는 과거의 부, 권력, 영향력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음. 페스트 발생 직전의 이집트 인구는 800만으로 추산되는데, 1789년 나폴레옹이 침입했을 당시에는 300만에 불과했음. 최근 신뢰할 만한 추정에 따르면, 근대 초 이집트의 인구는 예수가 탄생할 때와 동일한 수준에 머물렀다.
- 기원전에 교역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질병 풀이 뒤섞일 정도로 빠르고 광범위하게 진행되지 않았음. 역병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 진원지로 추정되는 히말라야 산기슭에 고립되었고, 천연두와 홍역도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머물렀다. 하지만 로마-한나라 시대에 장거리 교역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이슬람과 몽골세력이 영향을 미치면서 질병은 먼 거리에 있는 무방비 상태의 사람들을 공격. 구세계에 서로 분리되어 있던 질병 풀은 이후 1500년 동안 충돌하고 결합되어 대재앙을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아시아인과 유럽인의 면역성이 향상됨. 신세계에 처음 발을 디딘 서양의 이주자들은 자신과 함께 이동한 미생물이 원주민 사회를 짓밟으리라고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윌리엄맥닐의 말을 빌리자면, 탐험 시대의 막이 오를 때 "유럽은 새로운 인간 감염 측면에서 줄 것은 많고 받을 것은 적은" 상태였음. 더 놀라운 사실은 아시아의 좁은 지역 일부에 머물던 전염병균이 전세계로 확산되었다는 것. 그렇다면 페스트가 근대까지 계속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이유는 무얼까? 1346년 이후 간균이 여러 종에 미치는 영향은 이전보다 약해졌음. 14세기에는 개, 고양이, 새가 인간과 함께 떼죽음을 당했지만 이제는 질병에 이전처럼 취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쥐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도 역시 덜할 것이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1666년 런던 대화재 이후 영국에서 페스트가 자취를 감췄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음. 더 이상 목재 틀을 쓰지 않고 벽돌집을 세우면서 쥐가 숨어들기 어려웠고, 벼룩도 초가지붕이 아닌 기와지붕에서 사라에게 뛰어들기 힘들었다. 서유럽에서 목재로 만든 가옥이 사라지고 벽돌집이 보편화되면서 쥐와 인간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고 질병 감염경로로 차단됨. 21세기 들어 위생개념이 철저해지고 항생제를 사용하면서 치명적 병원체를 지닌 지하 전염원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막이 한 겹 더 늘었다.

7. 대항해 시대_포르투갈 교역제국
- 위대한 모험이 으레 그렇듯 비전, 용기, 지식, 세밀한 관심, 끈질긴 노력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음. 콜럼버스는 1492년 항해에 나서기 전에 배 세척의 모든 목재를 꼼꼼히 살폈다. 운도 따라야만 했다. 만약 주앙 2세가 콜럼버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가 훤히 알고 있는 포르투갈 아조레스 탐험에 나섰다면 해당 위도에서 부는 사나운 바람 때문에 배가 침몰했을 것임. 공교롭게도 콜럼버스가 떠난 네 차례 탐험은 모두 아조레스 남쪽의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에서 출발하여 카리브해 쪽으로 부는 북동 무역풍을 이용할 수 있었다. 결국 콜럼버스, 산탄젤, 이사벨의 판단은 옳은 것으로 드러났지만 그 근거는 빗나갔음. 반면 포르투갈, 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 왕에게 조언한 학자들은 콜럼버스보다 지리적 지식이 더 풍부했기 때문에 콜럼버스가 인도제도를 탐험한 기념비적 1차 항해에서 돌아왔을 때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임. 신세계의 해안선은 일찍이 스칸디나비아 탐험가들도 어렵풋이 인지했고, 컬럼버스보다 수세기 전 활동안 유럽과 아시아의 탐험가들도 알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어느 누구도 거대한 신세계의 코앞까지 다가갔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했다. 훗날 유능한 정복자들은 탐험을 나서며 본능적으로 전문가들과 동행했따. 하지만 고집불통인 콜럼버스는 서쪽 항해에 전문가를 데려가지 않았다. 배에는 그가 스펭니으로 데러간 원시적 카리브 인도인이 사실은 인도의 원주민이 아님을 지적할 아랍 통역가들이 없었고, 선박을 짓누르는 거대한 무게의 노란색 금속이 황철석이라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보석상이 없었다. 콜럼버스가 항해에서 돌아와 페르난도와 이사벨에게 진상한 계피와 후추가 구세계에서는 본 적 없지만 그저 나무껍질과 고추일 뿐이라고 경고해 줄 피레스 같은 약재상도 없었다. 콜럼버스는 설사 전문가와 동행했더라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임. 그는 3차 항해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아시아와 전혀 다른 장소에 도착했음을 서서히 깨달을 정도로 둔했다.
- 다 가마는 1498년 동아프리카와 인도땅을 밟은 지 5년만에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는 교역기반을 다짐. 하지만 동시에 인도로 가는 길에 위치한 모든 항구에서 적을 만들었다. 가볍게 지나가는 지역에서조차 포르투갈인 때문에 추방된 무슬림 상인들의 원한을 샀다. 새로 구축된 향료 교역로는 길고 취약했기 때문에 요새화된 포르투갈 기지로 보호하고 지켜야 했음. 오늘날에도 아조레스에서 마카오에 이르는 길목에 당시의 문화와 건축물이 남아 있다.
- 제국은 신속히 건설되었고, 1505년에는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가 인도의 초대 식민지 총독으로 취임했다. 먼저 그는 킬와 (오늘날 탄자니아 해변)를 들러 공격하고 진압했으며, 아랍 술탄을 꼭두각시로 세우고 거대한 요새를 구축. 다음에는 몸바사를 약탈했는데, 그가 인도로 이동하는 동안 수배대는 모잠비크의 섬을 장악했다. 포르투갈은 몇 개월만에 동아프리카의 주요 항구를 대부분 차지. 점령한 기지와 교역소는 아프리카의 금을 인도 향료와 거래하는 장소가 되었다. 여기에서 확보한 금으로는 구자라트의 옷감을 사들였다. 옷감, 금, 향신료의 삼각무역은 사실 새로운 발상이 아니었음. 이미 아랍과 아시아 상인들은 수백 년 동안 삼각 무역을 해왔음. 하지만 유럽인은 삼각무역을 통해 인도양에서 추가로 이익을 낼 수 있었고 희망봉을 돌아가는 위험천만한 항해도 피할 수 있었음.

8. 에워싸인 세계_기축통화가 된 스페인 달러
- 대체 17세기 중반에 중국인 이발사들은 어떻게 멕시코시티까지 갔을까? 유사한 시기에 포르투갈어를 구사하던 네덜란드 출신의 유대인은 브라질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 뉴암스테르담에서는 왜 민간기업인 서인도 회사가 정부의 정책적 결정을 내렸는가? 어떻게 스페인의 은화를 가득 실은 네덜란드 선박은 제임스쿡 선장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기 한 세기 전에 오스트레일리아 서쪽 끝자락의 해저에 멈춰 섰는가? 이상의 네가지 질문에 답하는 과정은 탐험시대로 시작된 세계경제의 확대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음. 이를 통해 우리는 오늘날의 세계화와 이에 대한 불만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음. 먼저 다음 다섯 가지를 이해해야 함
(1) 1493년 콜럼버스의 2차 항해 이후 수십 년 안에 옥수수, 밀, 커피, 차, 설탕 등의 대륙이 넘나들면서 세계 농업과 노동시장에 혁명이 일어남. 작물의 교환이 인간의 생활조건을 늘 개선한 것은 아니었다.
(2) 17세기 초 스페인과 네덜란드 선원들은 지구 풍향체계의 마지막 비밀을 풀어냈다. 덕분에 드넓은 대양을 비교적 손쉽게 건널 수 있었음. 1650년에는온갖 물건과 전 세계의 사람들이 세계 대다수 지역을 공략할 수 있었음.
(3) 페루와 멕시코에서 거대한 은 광산이 발견되면서 세계적 통화체계가 탄생. 이와 더불어 은화가 지나치게 주조되어 살인적인 인플레가 발생.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스페인의 8레알 동전은 오늘날 미국의 100불 지폐나 비자카드 처럼 통용되었음.
(4) 17세기에는 주식회사가 탄생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무역질서가 형성되었음. 주식회사는 이전의 개인 판매원, 가족기업, 왕족의 독점 등과 비교해 이점이 컸음. 이내 대규모 기업이 세계 교역을 장악했으며, 이후 세계 무대에서 대기업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음.
(5) 변화는 누군가를 불만에 빠뜨렸음. 16-17세기의 새로운 세계경제로 값싸고 질 좋은 물건이 수입되자 섬유제조업자, 농민, 서비스 근로자는 타격을 입음. 오늘날로 따지면 자기권리를 주장하는 프랑스 농민들과 미국의 자동차 산업 근로자들이었음
- 인류가 힘겹게 세계의 풍향을 이용하는 법을 터득하면서 새로운 통화체계가 대두됨. 여러 면에서 오늘날 글로벌 신용과 결제 메커니즘의 전신이라 할 만하며, 구세계와 신세계에서 모두 열망하던 수입사치품의 구입에 사용됨. 노호하는 40도대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선박에는 아시아에서 수요가 높던 유럽산 고급직물과 귀금속이 실려 있었음. 귀금속은 대부분 멕시코와 페루에서 주조된 8레알의 스페인 달러였으며 8등분한 형태도 있었음. 은화는 16세기 유럽의 통화시장에 대량 유입되었고, 달러가 유래한 보헤미아 탈러와 크기나 무게가 거의 비슷했음 (8레알은 1달러의 가치를 지녔는데, 동전을 일상에서 쓰기에 불편했기 때문에 8등분하는 경우가 많았고 각 조각은 1레알의 가치였음. 여기에서 유래하여 스페인 은화는 여덟조각으로도 불렸으며, 25센트는 두조각이라는 별칭을 얻음)
- 스페인은 막대한 양의 은화를 주조. 총주조량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1766-1776년 2억개 이상 발행됨. 각 은화의 무게는 1온스에 못미쳤으며 멕시코에서만 생산됨. 16-19세기에는 멕시코에서 주조한 은화가 시장의 신뢰를 얻으며 사실상 가축통화 역할을 했음. 은화는 강력한 무역회사가 보유하든 하층계급의 지역상인이 보유하든 지니고만 있으면 반다해에서 육두구를, 구자라트에서 캘리코를, 마닐라와 멕시코에서 실크를, 예멘에서 커피를, 스리랑카에서 계피를 살 수 있었다.

9. 기업의 등장_동인도회사
- 유럽에서 평화로운 무역이란 스페인과 네덜란드처럼 부강한 나라에서나 가능했음. 이들은 해적으로부터 바다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기득권 세력이었음. 반면 영국은 16세기의 빈곤하고 후진적인 여러 나라들처럼 해외 선단이 방해 없이 바다를 지나가도록 지켜보는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었음. 약탈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상당했기 때문. 위풍당당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대영제국은 200년 이상 흘러야 만나볼 수 있다. 튜더 왕조의 잉글랜드는 부패한 군주가 다스렸고, 왕은 아첨하는 자들에게 독점사업을 분배했으며, 약탈자에게 나포 면허장을 발부하는 국가였다.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의 전쟁기구 못지 않게 인상적인 부분은 네덜란드 금융이었음. 1602년 투자자들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초기자금 모집에 650만 길더를 투자했음.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1억불로, 인력을 고용하고 선박을 구매하며 향료아 교환할 은과 교역품을 구매하는 데 사용됨. 특히 이 자본은 영구자본이었음. 성과가 좋아 이익이 발생하면 이익금의 상당부분을 기업확장에 투자할 수 있었던 것. 투자자들은 해마다 적당한 수준의 배당을 받더라도 초기에 투자한 650만 길더를 곧 회수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근거가 없었음. 오늘날의 투자자에게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투자로 보이겠지만,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영구자본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네덜란드 금융제도에 대한 신뢰가 매우 컸음을 의미.
- 17세기 초에 모든 길은 네덜란드로 통했다. 네덜란드는 국토가 포르투갈보다 작고 인구도 약간 더 많을 뿐이었으나(1600년에 150만 명 수준)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세계무역 체계를 세운 나라였다. 오늘날까지도 글로벌 시장에서의 성패는 그 규모가 아니라 선진적인 정치, 법, 금융제도에 달려 있다. 1600년 네덜란드는 이런 면에서 단연 세계 최고수준이었으며, 포르투갈이 세운 교역제국에 도전장을 내밀만한 가장 유력한 위치에 있었다. 물로 네덜란드는 스페인에게서 독립하기 위해 투쟁을 벌이는 중이었고,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뮌스터에서 체결된 조약으로 1648년에야 막을 내렸다. 전쟁을 벌이는 중에도 네덜란드는 스페인, 영국, 다른 유럽 나라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었음. 영국은 나포 면허장을 지닌 드레이크의 활약, 무적함대에 거둔 승리, 영국 동인도회사가 근소하게 앞서 있다는 이점이 있었음. 하지만 튜더와 스튜어트 왕조가 종교갈등으로 내홍을 겪고 있었고, 금융시장은 원시적 단계로 불안정했으며, 결국 치명적인 내전을 겪음. 프랑스와 스페인은 왕실의 독점과 만성적 부패로 더 뒤처진 상태였음. 반면 네덜란드 연합주는 유럽에서 절대왕정의 저주로부터 자유로운 몇 안되는 나라였고, 법과 금융제도가 엄격했으며, 야심만만하고 재능있는 인재들에게 종교를 불문하고 관대했다. 두가지 간단한 통계에서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드러난다. 경제사학자들이 추정하는 1600년 잉글랜드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오늘날 가치로 약 1440달러, 네덜란드는 2175달러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각각 1370달러, 1175달러다) 이는 식민지 패권을 차지하기위한 경쟁이 시작된 이래 네덜란드와 영국 사이에 기술과 상업적 격차가 벌어졌으며, 제도와 금융의 차이가 큰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영국에서의 평판 좋은 채무자(대부분의 경우 왕족은 포함되지 않음)의 이자율이 10%인데 비해 네덜란드에서는 4%에 그쳤으며, 네덜란드 정부의 이자율은 최저수준이었다. 반면 영국에서는 왕실이 채무를 거부하기 일쑤여서 채권자들은 왕실에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는 실정이었다.
- 네덜란드의 해양기술이 고도로 발전하면서 희망봉을 돌아가는 경로는 신드바드의 길과 홍해 길을 이용하는 것보다 저렴한 수준에 이르렀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향료제도도 완벽하게 장악했으며 해상운송도 효율적이었음. 금융시장이 원활히 돌아갔고 기업의 회계도 양호하게 관리되었음. 17세기 초에는 지브롤터를 통해 서쪽에서 도착하는 후추와 고급향료가 지중해에 과잉공급되었음. 이로 인해 이익은 줄었으나 가격이 저렴해서 육상향료 이동경로가 경제성을 잃었음. 이에 따라 지중해 동쪽 해안을 활용하는 베네치아의 오랜 교역도 막을 내림. 베테치아는 주요 수익원이 사라진 후 한 세기 반 만에 나폴레옹 군대의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 포르투갈의 약재상이자 모험가요 저술가였던 토메피레스는 "말라카를 지배하는 자가 베네치아의 명운을 쥐고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결국 그의 말은 신빙성을 잃고 말았다. 베네치아의 명줄을 쥐려면 말라카뿐 아니라 순다, 희망봉, 향료제도까지 차지해야 했다. 포르투갈인은 이러한 과업을 이룰 수 없었으며, 17세기 중반 네덜란드가 향료시장을 독점하면서 베네치아의 목을 조를 수 있었다.
- 상업에서 발생한 부만큼 다른 나라의 질시를 유발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요소도 없다. 이러한 감정은 17-18세기 영국-네덜란드의 관계를 파고들었고 양국은 네 차례에 걸쳐 전면전을 벌였다. 우리 시대처럼 무익한 상업적, 외교적 무언극을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무역전쟁을 벌였다.

10. 플랜테이션과 삼각무역
- 1700년 이전에 세계의 무역은 이국적 장소에서 가져오는 전설상의 상품을 독점공급하기 위해 중무장을 하는 교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음. 시장독점이라는 이상은 17세기 네덜란드가 몰루카 제도와 스리랑카에서 생산되는 고급향료시장을 독차지했을 때 단 한 번 현실로 이뤄졌다. 1700년 이후에는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커피, 설탕, 차, 면직물같이 이전에 서양에는 덜 알려졌으나 대륙 곳곳에 손쉽게 옮겨 심을 수 있는 새로운 상품이 세계무역을 장악했음. 향료와 실크 또는 향을 안트베르펜, 런던, 리스본, 암스테르담, 베네치아 붇에 몇 톤 정도 하역해 놓고 막대한 이익을 거두는 일은 이제 불가능했다. 게다가 기업은 새로운 대중시장에 어울리는 제품수요도 촉진해야 했다.
- 네덜란드가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자들에게 바가지를 씌울 수 없었다면 최소한 커피나무를 수리남, 스리랑카, 말라바르 해안에 심어 재배측면에서 앞서갈 수 있었다. 예멘에서 말라바르 해안으로 옮겨심은 커피나무는 초기의 시행착오를 거쳐 바타비아 인근의 자바고원에서 성공적으로 재배되었다. 1732년 인도네시아는 연간 120만 파운드의 커피를 생산했고, 수리남과 브라질에서 재배된 원두가 인도제도에서 생산된 원두와 더불어 암스테르담의 부두에 도착했다. 공급량 증가로 예멘의 독점은 깨졌고 마침내 가격이 하락했다. 새로운 산지의 농장주들은 예멘보다 값싼 비용으로 커피를 생산할 수 있어 네덜란드에 양호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인도네시아와 신세계의 새로운 산지 덕분에 가격이 하락하면서 유럽의 커피문화도 바뀜. 갑자기 모두가 기이한 음료를 마실 수 있게 됨.
- 자바 원두의 품질은 모카 항에서 거래되는 원조에 미치지 못했지만, 대체로 유럽인은 그 차이를 분별하지 못했다. (이식된 커피는 예멘산 커피보다 카페인 함량이 50% 이상 높았다) 하지만 예민한 무슬림 소비자들은 원조를 알아봤고 값싼 인도네시아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았음.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17인 위원회가 무슬림이 자바커피를 멀리한다는 보고서에 보인 반응은 자기만족적 면모를 잘 보여준다. 보고서는 자바와 모카 항의 원두 표본을 모두 수집했으나 둘 사이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었다고 밝힘. "천박한 투르크인과 페르시아인이 우리나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보다 미각이 민감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직물이 주요 교역 상품으로 발전한 과정은 설탕과 무척 비슷. 영국 동인도회사가 1600년 탄생할 당시 면직물은 실크에 맞먹는 고급제품이었음. 그나마 사치품으로라도 구입할 수 있는지 여부는 값싼 인도 노동력이 좌우. 목화는 설탕과 마찬가지로 재배가 쉬웠으나 생산과정에 막대한 노동력이 들었다. 산업시대 초기에 목화 섬유와 씨앗이 조잡하게 뒤섞여 있는 목화다래 100파운드를 생산하려면 이틀치 작업이 필요했음. 다래에서 씨앗을 제거하고 섬유를 가지런히 정리하며(소면) 포장하는 데 70일치 작업이 필요했는데, 여기에서 고작 8파운드의 원면을 얻을 수 있었음. 여성 방적공이 다시 35일을 일해야 원면을 실로 만들 수 있었다. 다시 말해 1파운드의 면사를 얻으려면 약 13일의 노동이 필요했음. 반면 무게의 실을 얻는데 양모는 1-2일, 리넨은 2-5일, 실크는 6일의 노동이 들었다. 인도에서는 다수의 값싼 노동력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면직물과 관련하여 수백년 동안 전문기술이 축적되었음. 짧고 약한 목화 섬유를 내구성 있는 실로 만드는 작업은 쉽지 않았음. 1750년 이전에 영국 방적공은 날실로 사용할 정도의 튼튼한 면사를 생산하지 못했음. 따라서 영국 국내에서 생산된 천은 리넨이나 울을 날실로, 면을 씨실로 하여 제조됨. 솜씨가 뛰어난 인도의 방적공이라야 순면직물에 적합한 실을 생산할 수 있었음. 따라서 18세기에 방적기가 개발되기 전에는 서양의 거의 모든 면에 인도에서 방적한 실을 사용.
- 1600년대 초 영국 동인도 회사는 당시 가장 중요했던 향료교역에서 존재감이 미미했음. 동인도회사가 주로 수행한 교역은 페르시아 실크를 낙타에 실어 시리아 사막을 거쳐 투르크의 항구로 운반해 오는 형태였음. 머지않아 영국 동인도회사는인도의 직물시장을 두드리기 시작. 섬유교역이 산업혁명을 촉발하는 역할을 하고 인도의 섬유제조업을 파괴하며, 오늘날 세계화된 경제가 논쟁거리이듯 영국에서 자유무역에 대한 논란을 일으키며 대영제국을 탄생시키는 역할을 하라리고는 초창기에 상상할 수 없었다.
- 17세기가 막을 내릴 무렵 영국에서는 아시아로부터 면직물 수입을 막기 위해 세 집단이 한데 힘을 합쳐 기이한 보호주의 동맹을 형성. 첫번째 집단은 도덕주의자들로 새롭고 화려한 옷가지로 야기된 사회불안에 분노했음. 두번째 집단은 실크와 양모 방직공들로, 값싸고 더 나은 외국제품으로 일자리를 잃음. 세번째 집단은 중상주의자들로, 그저 패션을 위해 은을 유출하는 데 분노를 표현했음. 이 세력들은 영국 동인도 회사에 맞서 회사에 치명적 결과를 입혔고 영국의 경제, 사회구조, 제국에 혁명을 일으켰으며 인도 경제의 근간인 섬유산업을 파괴했다
- 보호주의 조치는 양모산업과 실크방직공들에게 불가피하게 역효과를 일으켰음. 18세기초 캘리코는 고전적인 고부가가치 상품이었따. 큰 부자들은 값싼 원면과 소비자들이 원하는 비싸고 부드러우며 가벼운 옷감 사이의 격차를 좁혀줄 존재를 기다렸다. 캘리고 수요가 아직 높았지만 비싼 가격을 치러도 인도산 옷감을 구할 수 없게 되자, 혁신자들은 방적과 방지과정의 개선을 시도.
- 바라던 혁신은 실제로 일어났음. 1721년 법안이 통과되고 10년 후, 존 케이는 플라잉 셔틀을 개선하여 방직공의 생산성을 높임. 이에 실 수요가 증가했는데, 방적과정은 기계화하기 더 어려웠다. 1738년 루이스 폴과 존 와이엇은 최초의 기계식 방적기를 개발해 특허를 출원. 그러나 1760년 중반에 제임스 하그리브스, 리처드 아크라이트, 새뮤얼 크럼프턴의 기계가 발명되고 나서야 상업적 활용이 가능해짐. 이들은 각각 제니방적기, 수력방적기, 뮬 방적기를 발명. 뮬 방적이는 제니방적기와 수력방적기를 혼합한 형태임
- 경제사학자 에릭 홉스본은 "산업혁명을 노하는 자는 모두 면직물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라고 지적. 거대한 변화의 중심에 있던 새로운 기계의 발명으로 수많은 방적기와 방직기가 쓸모 없어짐. 새로운 공장이 탄생하기 전인 18-19세기에 기계파괴 시도가 일어남. 1721년 법 제정 직후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인기수입품은 인도산 실이었으나 기발한 기계가 발명된 이후에는 원면이 산업혁명의 소재이자 교역품으로 떠오름. 1720년대 초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수입한 원면은 150만 파운드였는데, 1790년대 말에는 3000만 파운드로 급증
- 영국 동인도회사는 17세기에 향료제도를 네덜란드에 빼앗기면서 인도의 섬유로 눈을 돌렸듯, 18세기에는 완성된 면직물과 실크라는 고수익 무역을 빼앗기자 무게중심을 다시 옮겨다. 이번에는 중국과의 차 무역이 새로운 관심분야였다.
- 차와 설탕의 역사는 서로 얽혀 있었으며 소비량이 나란히 증가. 설탕 생산자들은 차 소비가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차 마시기를 장려. 영국 동인도회사 역시 설탕에 같은 입장을 취함. 18세기에는 영국에서 수천 킬로 떨어진 곳, 지구 반대편에서 생산되는 차와 설탕이 귀족부터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애용하는 필수품으로 자리잡았다.
- 17-19세기 신세계에서 유럽으로(커피, 면직물, 설탕, 럼, 담배), 유럽에서 아프리카로(섬유를 비롯한 제조품), 아프리카에서 신세계로(노예) 대성양을 횡단하여 일어난 삼각무역이라는 상거래에 대해 대부분 학생들이 배움. 하지만 전체 그림을 지나치게 간소화하는 과정에서 단거리 교역은 무시되었음. 예를 들어 영국 선박은 자메이카에서 필라델피아로 인디고 염료를 싣고 간 다음 옥수수를 선적하여 런던까지 나르고, 런던에서는 양모를 실어 르아브르로 이동하고, 거기서 프랑스 실크를 실어 아프리카 노예해안으로 떠났을 것이다. 한편 동양에서는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았다. 영국은 캘리코에 열광했고 차에 취했지만, 자급자족하고 자기만족 상태인 중국인의 물건과 교환할만한 교역품을 찾기가 만만치 않았음. 대서양에서처럼 원활히 진행되는 체계가 필요했음. 대서양 삼각무역의 한 축이던 노예무역이 이후 수백년 동안 인종관계를 악화시켰듯, 19세기 인도 및 중국과의 불평등한 교역은 오늘날까지도 동양과 서양의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1. 자유무역의 승리와 비극
- 중국에서 동양과 서양은 단순히 지리적 경계로 나뉜 지역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 중국에는 교역이란 개념이 없었음. 황제는 조공을 받을 뿐이었고 그 대가로 외국의 탄원자에게 하사품을 내리는 식. 하지만 조공을 받고 하사품을 전달하는 교환행위는 현실적으로 다른 아시아 상업중심지에서 일어나는 일반적 교역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 중국은 영국이 시암같은 일반적 속국이라고 크게 착각했고 그 오판으로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 아편으로 중국 전체 인구와 경제가 피폐해졌다는 통념은 오해다. 첫째, 마약은 가격이 꽤 비쌌기 때문에 대체로 고위관리나 상인이 소비. 둘째, 주류와 마찬가지로 마약도 사용자의 일부에서만 치명적 중독현상이 나타남. 악명 높은 아편굴도 지저분한 명성과는 거리가 있었음.
- 황제와 고관들은 아편에 의한 심신약화에 도덕적 분노를 표출. 하지만 그보다 더 우려한 대목은 마약이 무역수지에 미치는 악영향이었음. 중국은 17세기 유럽의 여느 군주들처럼 유럽형 중상주의 이론을 지지. 1800년 이전의 차 교역은 중상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에 매우 유리했음. 영국 동인도회사의 기록에 따르면 1806년을 기점으로 은의 유출입 흐름이 바뀜. 1806년 이후 중국의 아편수입량이 차 수출량을 넘어섰고, 중국 은이 처음 해외로 유출되기 시작. 1818년 이후에는 은이 중국 수출품에서 5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음.
- 사회규범은 대단히 빠른 속도로 변하곤 한다. 예를 들어 1600년에는 개화한 유럽인조차 흑인 노예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따. 1800년에 유럽인이나 다수의 중국인은 영국이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는 무역을 비난하지 않았다. 오늘날 아편 못지 않게 중독성이 강한 담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전 세계에서 윌리엄 자딘과 제임스 매디슨의 후예들이 적극적으로 담배 마케팅을 펼치고 있는 실정이다.
- 1776년 국부론 발간 이후 1846년 곡물법이 폐지되기까지 스미스, 리카도, 코브던은 새로운 글로벌 경제의 이론적 정치적 기반을 닦음. 글로벌 경제는 코브던-슈발리에 조약의 체결 이후 수십년 동안 전성기를 누림. 보호주의자들은 값싼 수입 농산물 때문에 농민들이 재앙을 맞을 것이라 예상. 처음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 유럽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식품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했기 때문. 하지만 곡물법이 폐지되고 한 세대 후 아메리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러시아에서 저렴한 곡물이 쏟아져 등러와 영국과 유럽대륙의 농민들을 덮쳐다. 1913년 영국은 밀 소비량의 80%를 수입했지만, 20세기 초 사리 판단이 분명한 영국인 가운데 나라의 산업기반을 놔두고 과거의 농업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세계 곡물의 침입이 유럽대륙에서는 각기 다른 형태로 전개됨 1880년대에 처음으로 자유무역에 대한 거센반발이 일어난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그러한 흐름이 유지됨. 새로운 글로벌 경제에 대한 19세기의 반응은 21세기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자유무역이 전반적으로는 인류에게 이익을 안겨줬어도, 새로운 질서를 가만히 앉아서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패배자들도 양산했음

12. 기술혁신과 대륙횡단 무역
- 자유무역론자와 보호주의자 사이으 갈등이 남북전쟁 발발에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1861년 남부 6개주의 분리독립과 전쟁이 벌어지면서 북부는 군자금이 필요했으며, 나중에는 연금과 재건에도 자금이 절실했음. 이 모든 비용을 감당하려면 수십억 달러의 수입세를 거두는 수밖에 없었음. 이제는 남부인의 성가신 반대도 없었기에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관세장벽을 거리낌없이 세웠다. 이때 만들어진 가공할만한 관세장벽은 남북전쟁 이후 50년 이상 미국의 산업을 영국과의 경쟁에서 보호하는 방패역할을 했다.
- 역사적으로 교역량의 증가는 늘 승자와 패자를 양산. 운송비의 하락 덕에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우크라이나의 농부와 목장 주인은 유럽대륙에 곡물과 육류를 풍부하게 공급할 수 있었음. 반면 저렴한 국산목재와 범선에 대한 전문지식에 의존하던 미국의 조선사는 영국의 증기선과 철강기술에 자리를 내줌. 1850-1910년에 대서양에서 운반된 화물의 5분의 2는 유니언잭(영국국기)을 게양한 선박으로 이동되었으나, 성조기를 단 선박으로 운반된 비중은 10분의 1에 불과했음. 인도 역시 패자에 속했다. 면직물과 황마 재배자들은 번영을 누렸으나 범선 위주의 해운업은 증기선과 수에즈 운하의 조합으로 황폐화되었음. 1차대전 발발로 인도 선박은 연안무역조차 할 수 없었으며 조선업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특파원처럼 낙관적인 관찰자들은 글로벌 교역이 빚어낸 기적에 놀라워했지만 반발은 반세기 이상 자유무역을 지연시켰으며, 파괴적 양차 대전이 발발하는 데 적잖이 기여. 오늘날 세계화를 둘러싼 투쟁에도 배경을 제공했다.

13. 대공황과 보호무역주의
- 영국과 1900년 이전 미국에서는 노동력과 자본이 같은 입장에 있다. 영국의 경우 보호무역이 유리함. 독일에서 자본과 토지를 가진 집단으 마르크스 주의에 기울던 도시의 노동자들에게 반대. 이 경우 자본가와 지주는 철강과 호밀 연합으로 이름 붙일 수 있을 텐데, 철강은 희소한 자본요소를 막대하게 투입해야 하는 산업임. 독일의 도시 노동자들은 자유무역을 원했음. 풍부한 요소인 노동력을 가진 집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 세계관에도 적합했기 때문. 자유무역은 산업발전과 완전한 자본주의로 이어지고 이후 필연적으로 균열이 일어난 다음 공산주의로 향하는 길이 마련된다는 점에서 혁명이라는 레시피에 반드시 팔요한 재료였음. 지나치게 논리적이었던 마르크스는 관세에 반대했다.
"우리 시대의 보호주의 체제는 보수적인 반면 자유무역 체제는 파괴적이다. 과거의 민족을 해체하고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적대감을 극단적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한마디로 자유무역 체제는 사회혁명을 재촉하는 것이다. 이 같은 혁명차원에서 보자면 나는 자유무역에 찬성한다."
- 20세기 전반 전 세계 애국자들은 세계를 자기 터전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는 큰 고통을 야기했음. 미국은 보호가 보복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았다. 한 나라에 수입이 없으면 수출도 불가능함. 또한 미국은 2차대전에 참전하기 전에도 무역전쟁이 실제 전쟁을 촉발할 수 있음을 깨달았으며, 역사학자들과 정치인들은 고립주의와 보호주의가 대재앙에 기여했음을 감지했다.
- 근대 세계화의 역사는 크게 4개 기간으로 나뉨.
1기는 1830-85년으로 운송 및 통신비용이 빠르게 하락하고, 상대적으로 낮은 관세로 무역량이 크게 증가하며, 임금, 지대, 임차료, 금리가 세계적으로 수렴하던 시대.
2기는 1885-1930년으로 아메리카대륙,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우크라이나의 농산물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유럽의 보호무역론자들의 반발을 일으킨 시기. 운송비가 지속적으로 하락한 덕분에 반발은 간단히 무시되었다.
3기는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통과된 1930년에 시작되었고, 운송기술이 점진적으로 발전했으나 대대적 관세인상에 그 효과가 묻힘.
4기는 1945년에 시작되었으며, 미국이 앞장서서 자유무역을 주창한 시기로서 세계무역의 수문이 열림. 세계무역의 실질가치는 폭발적으로 증가해 이후 50년 동안 연간 6.4% 수준을 기록. 1945-98년 세계 무역량이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5%에서 17.2%로 증가

14. 세계화를 둘러싼 논쟁
- 선박은 과거에도 그랬듯 가까운 미래에도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장거리 운송수단으로 각광받을 것임. 따라서 원활한 해상교역을 위해서는 요충지가 정치적으로 안정되어야 함. 고대 이래 유럽의 상인과 해군은 전략적 해협과 해로의 가치를 인식했고, 차지하는 경로에 따라 기근으로 고통받는 나라가 갈리기도 했음. 헬레스폰트와 보스포루스는 2500년 이상 해상 요충지 역할을 했으며,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 바스코 다가마의 경로로 인도양을 탐험하는 유럽인의 최우선 목표는 말라카, 호르무즈, 바브엘만데브 해협의 통과였으며 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지금도 상황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으며, 과거와 비교해 수에즈와 파나마라는 두 곳의 인공 요충지가 더 생겼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 세계 교역의 80%가 선박을 통해 일어나며 대다수 선박은 요충지 일곱 곳 가운데 한 군데, 때로는 두세 군데를 지나기도 한다.
- 자유무역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유무역에 따른 경제적 효과를 과장해 왔음. 19세기 역사는 무역이 성장의 엔진이라는 주장에 의문부호를 던짐. 만약 자유무역이 국부를 창출하는 길이었다면 역사상 최고수준의 관세를 부과한 미국은 절대 번영할 수 없읐을 것임. 유럽은 관세인하의 황금기인 1860-80년의 성장률이 보호무역주의가 득세하던 1880-1900년보다 더 높아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보호무역주의 기간이 성장류이 더 높았음. 또한 1880년 이후 보후주의자들의 영향력이 강했던 북부유럽의 경제는 자유무역을 지지하던 영국보다 더 빠르게 성장했음.
-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자들도 이 점을 놓치지 않았으며, 1996년 대통령 선거후보였던 패트릭 뷰캐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음
"워싱턴, 해밀턴, 클레이, 링컨과 이후 공화당의 대통령이 쌓아올린 관세장벽의 뒤에서 미국은 농업이 주를 이루던 해안 공화국을 세계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가장 위대한 산업국가로 만들었다. 불과 한세기 만에 이룬 성취는 오늘날 폄하하는 보호무역정책이 성공을 거둔 결과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는 뷰캐넌 만이 아니다. 다수의 경제사학자들이 뷰캐넌과 의견을 같이 하는데, 그중에는 폴 베어록같은 저명한 학자도 있음. 근대의 계량분석기술은 자유무역을 19세기성장의 엔진으로 볼 증거가 취약함을 확인시켜줌. 엄격한 계량적 연구는 오히려 1800년대 보호무역주의가 실제로는 경제발잔을 이끌었음을 시사. 19세기 초 미국 보호무역주의에 대해 마크 빌스가 수행한 민감도 분석은 해밀턴, 애덤스파, 케어리의 주장이 옳았음을 보여줌. 높은 관세가 아니었다면 "뉴잉글랜드의 산업부문은 절반이 파산했을 것이다." 저명한 경제사학자인 케빈 오루크도 19세기 유럽의 부유한 8개국과 미국 및 캐나다에 대해 조사했는데, 놀랍게도 관세수준과 경제성장률 사이에 양의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남. 관세율이 높을수록 나라가 더 나은 성과를 낸 것이다. 그는 경제학자의 절제된 표현을 사용해 다음과 같이 결론내림
"19세기에 관세와 성장률이 양의 상관관계에 있었다는 베어록의 가정은 성장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요소를 통제한 상황에서 최근에 수집할 수 있는 데이터에 적용했을 때 상당히 유효한 것으로 나타났다."
- 미국이 19세기 관세 인상이 이로웠다는 데 동의 하지 않는 무역역사학자들도 있음. 버클리의 브래드포드 들롱은 보호무역주의는 뉴잉글랜드 기업인들이 영국의 최첨단 증기선과 산업기술을 받아들이는 시기를 지연시켰다고 지적. 관세인하가 기존 뉴잉글랜드 공장을 황폐화했을 것이라는 빌스의 주장에 일리가 있더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번영을 누리고 자본집약적인 첨단 산업부문을 육성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결말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들롱은 주장. 하지만 45년 이후에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경제사학자 에드워드 데니슨의 구체적 분석에 따르면, 50-60년 GATT 관세인하는 북부유럽의 성장률을 1% 정도 추가하는데 그쳤으며 미국에는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60년 이후가 되자 자유무역이 특히 개도국에 이롭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가 제시됨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술에 취한 세계사  (0) 2019.09.05
역사의 역사  (0) 2019.07.21
서양은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나  (0) 2019.07.04
전쟁과 평화의 역사_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  (0) 2019.06.13
나쁜 짓들의 역사  (0) 2019.05.07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