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경생활이 정착생활에 선행되었을 것이라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실제 벌어진 일은 그 반대였음. 일단 한 곳에 머물러 살게 된 이후에야 농경같이 오랜 시간 땅에 묶여 있어야 하는 활동이 가능해짐. 풍부한 야생곡물과 그로 인해 가능해진 정착생활은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선행요소였다. 곡물을 주식으로 삼던 수렵채집민들은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그 자리에서 싹이 돋고 몇 개월 후면 열매가 맺힌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을 아는 것과 그 동안 유지해왔던 생활방식을 버리고 농경을 주 생활수단으로 삼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농경이 효율적 식량확보수단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고되고 반복적 노동을 필요로 했음. 야생에 충분한 식량이 존재한다면 수렵채집민들은 굳이 힘들게 농사를 짓는 것보다 자연이 주는 것을 그대로 거두어들이는 쪽을 택했다.
- 결국에는 풍족한 식량공급에 안정적 정착생활이 더해져 나타난 인구증가가 이곳의 수렵채집민들을 농민으로 변화시킴. 한동안은 주변의 자연자원을 더욱 집약적으로 채집하여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어느 시점ㄴ에서 인구는 자연이 지탱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자연으로부터 그것이 허용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수렵채집민들은 자연에 기술과 노동을 투입해 그것을 변형시켜야 했음. 농경이 시작된 것이다. 레반트의 나투프 문화에서는 정착생활이 시작되고 3천년이 지난 후에야 농경사회가 나타났는데, 이는 수렵채집민들이 과거의 생활방식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보여줌
- 불리한 환경 때문에 농업생산력은 낮은 수준에 머물렀던 서유럽은 동방에 비해 발전이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적 불리함은 중세 이후에 오히려 서유럽을 전근대적인 고착상태에서 끌어올리는 조건으로 작용. 불리한 자연환경에서 농업생산력이 증가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힘에 의한 생산력의 증폭효과가 필요했음. 달리 말하면 서유럽에서는 농업생산력의 증가가 시장이 성장한 이후에야 일어날 수 있었다. 무력집단이 시장의 확장에 의해 증가된 농업잉여의 일부를 흡수하며 성장했지만 시장을 억누를 만큼 충분히 강해지지 못했다
- 지방분권적 무력집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전투에 참여하는 인원의 수는 보통 많아야 수천 명 정도. 당시의 낮은 생산력으로 이보다 큰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일. 이렇게 전투가 소규모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소수의 귀족 전사들이 전장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면서 더 많은 병사들을 먹이고 무장시키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 결과 전장에 동원되는 병사들의 숫자가 과거에 비해 10배 이상으로 증가. 전국시대에 중원의 왕국들은 작으면 수만에서 많게는 십만 이상의 병사들을 전쟁터에 보냈다.
- 귀족전사는 농민들에게 기생하며 군림하는 이들의 계급적 특성상 그 수가 적었다. 서기 981년 독일제국에는 다 합해야 5천~6천 정도의 기사가 있었고, 1200년경 일본에는 비슷한 숫자의 사무라이가 있었다. 수만 명 이상이 맞붙어 싸우는 대규모 전장에서 소수의 귀족전사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평민병사는 일반대중이라는 거대한 인적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적은 비용으로 무장할 수 있는 보병으로 싸웠음. 장평에서 희생된 조나라 병사들은 대다수가 보병이었고, 마우리아 군대의 주축도 엄청난 수의 보병이었음.
- 양질의 무장을 갖추고 잘 훈련받은 평민병사는 귀족적 군대를 상대로 대등함 이상의 싸움을 할 수 있었다. 오만한 귀족들은 전장에서도 제멋대로 행동하려는 경향이 강했음. 중세 유럽의 전쟁사를 보면 귀족기사들이 지휘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전투를 패배로 이끄는 장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음. 이러한 반항적 군대를 가지고 정교한 전술을 펼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돌격해서 상대진영을 흐트러뜨리는 것이 기사군대가 사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전술이었다. 이들이 지배하던 시대에 전투는 귀족전사들이 서로를 향해 돌격하여 싸움을 벌이는 단순한 결투의 성격이 강했음. 반면 평민병사는 귀족들보다 상관의 명령을 잘 따랐다. 비록 이들은 개인적 전투능력은 떨어져도 다양한 병과를 이루어 효율적 전술을 운용하기에 용이했음.
- 백년 전쟁 동안 영국군의 보병중심 군대가 그들보다 규모가 큰 프랑스의 기사중심 군대를 상대로 연속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평민군대의 이점이 작용한 결과. 프랑스의 기사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지형에서도 무모하게 돌격을 고집하다가 진영을 잘 갖춘 궁수와 보병에게 거듭 참패를 당했음. 귀족전사들은 전장을 주도하던 위치에서 밀려났고 그 자리는 대규모의 평민보병에게 돌아갔다. 유럽에서 이러한 전환이 가장 앞서서 일어났던 곳은 남쪽에 위치해 상대적으로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빨랐던 스페인이었다. 테르시오라는 밀집보병 전술을 사용한 스페인군은 1503년 체리뇨랄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한 이후 수십만의 압도적 병력규모를 바탕으로 140년 동안 군사적 패권을 유지했다. 대규모화된 전투에서 귀족기사들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 돈키호테는 기사의 영광이 이야기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환상으로 전락한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 전사귀족이 지배하는 지방분권적 사회질서가 무너진 이후 세 지역에 나타난 변화상을 보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처럼 보임. 역사학자 에버하르트에 의하면 "만약 그 후 역사의 진행과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당시의 중국을 관찰한다면 명백한 변화의 흐름에 따라 자본주의 사회로의 발전을 예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중국에는 시장경제 대신 전제적 황제들이 나타났고 이들이 20세기초까지 중국을 지배. 그 원인은 이 시대에 새로운 형태의 무력집단이 성장해 나왔기 때문.
- 왕의 통제하에 있고 항시적으로 유지되는 군대를 얻은 중앙권력은 그것을 적군가 싸우는 데뿐만 아니라 내부의 불만을 억누르는 데도 사용. 강력한 군사력을 얻은 중앙무력집단은 반항적 귀족들을 제압하고 지배력을 확장해감. 그렇다고 귀족들이 단순한 희생양이 된 것은 아님. 군사적으로 무력해져 생산자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 귀족들은 중앙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관직을 차지함으로써 다시금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됨. 다만 과거와 같이 귀족들이 권력을 사적인 세습재산으로 소유하지는 못했다. 관직을 잃으면 그에 따르는 권력도 사라짐. 시장과 중앙권력은 농업생산력의 발달에 의해 증가한 농업잉여를 흡수하며 동시에 성장. 당시 인도와 중국사회를 보면 한편에서 상인들이 거부를 모으는 동안 다른 한편에선 거대한 제국이 잉태되고 있었다. 인도에서 불교는 자신들을 하층 카스트로 취급하는 브라만교에 반발한 부유한 상인들의 후원에 힙입어 브라만교를 위협할 정도로 교세를 확장. 역시 불교를 후원했던 아소카는 인도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을 다스렸다. 여불위는 상업을 통해 모은 막대한 재산을 이용해 재상의 자리에 오름. 그의 아들로 의심받은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했고, 그것을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다스렸다. 유럽에서도 상공업이 발달한 근대 초기는 절대왕정의 시대였음. 이 시기는 지방분권적 무력집단의 지배에서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의 지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였음. 지방귀족들의 권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아직 중앙 무력집단도 충분히 성장하지 못하자 일시적으로 무력집단 지배력의 공백기가 생겨남. 그 결과 무력집단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잉여가 시장에 공급되며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활기넘치는 시대가 나타남. 그러나 일단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강력한 형태를 갖추고 나면 시장과 무력집단의 부자연스런 동거는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의 집중된 힘은 지방분권적 무력집단보다 훨씬 강한 중압감으로 사회와 시장을 짓누르기 시작.
- 무력집단의 중앙집권화가 진행될수록 지배계급이 문인화되는 현상이 나타남. 군대가 미천한 평민들로 채워지자 군인이 되는 대신 귀족들은 거대한 군대와 그 군대에 의해 뒷받침되는 관료조직을 관리하는 문인관료로 탈바굼. 지배계급이 문인화되었다고 해서 무력집단이 생산자들을 지배하는 근본적 수단이 바뀐 것은 아님. 관료들은 그 수하에 그들을 대신해 폭력을 행사할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음. 과거 귀족들이 무기를 들고 직접적 무력을 행사했다면 이제는 국가의 군사조직을 통제함으로써 무력을 행사하게 된 것.
- 일본은 250개간 넘는 번국으로 나누어져 있었음. 이렇게 잘게 분열되어 있는 일본의 무력집단은 사회에 대한 장악력이 중앙집권적인 사회보다 상대적으로 약했음. 때문에 지속적으로 농업산출량이 증가하는 동안에도 다이묘들은 농민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늘리는 데 어려움을 겪음. 그 결과 농민들에게 지워진 세금부담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벼워짐. 덕분에 일본 농민들의 생활수준은 상당히 높았음. 19세기 일본인의 평균수명은 35-45세 정도였는데, 이는 동시대 청나라보다 10년 이상 높고 동시대 서유럽과 비슷한 수준이었음. 메이지 유신 이전부터 이미 일반대중들도 자식들을 학교에 보낼 정도의 여유가 있었음. 에도막부 말기에는 전체 남성의 40%와 여성의 10%가 정규교육을 받음. 덕분에 남성 인구중 절반 이상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당시의 기준으로 봤을 때 아주 높은 수준이었던 일본의 교육수준은 이후 근대화의 과정에서 큰 이점으로 작용. 농민들의 손에 남은 잉여는 시장에 공급되었고 그 결과 경제의 상업화가 진행되었음. 막부 말기에 이르면 일본의 많은 지역에서 과거의 자급자족적 농업은 시장에 판매하기 위해 생산하는 상업적 농업에 자리를 내주었다. 농경사회에서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농업이 상업화는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서유럽에서 시장경제로의 이행이 일어날 수 있었던 전제조건이었다.
- 에도 시대에 시장에 공급된 농업잉여는 각종 사적 기업을 번창시켰다. 이 시기에 형성된 기업전통, 상업자본, 상업망과 금융망 등은 산업화의 기반이 되었음. 상업화된 농업은 높은 생산력은 근대화에 필요한 비용을 무리없이 소화해냈다. 또한 상업적 농업하에서 임금노동에 익숙해진 일본의 농민들은 새로운 사회에 필요한 노동형태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였다.
- 그리스와 동양의 제국들 사이에 존재했던 정치체제의 차이는 무력집단과 생산자 사이의 힘의 역학관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스의 특수한 환경에 의해 무력집단의 성장이 억제되었기 때문에 보다 민주적인 정치체제가 나타났던 것이다. 민주적인 정치체제는 고대 그리스 이전에도 많은 지역에서 나타났다. 사실 인류가 수렵채집민으로 유랑하던 시절 인간사회는 전체적으로 아주 평등했다. 권력이 소수에 의해 독점되는 현상은 농경생활이 시작된 이후 무력집단이 성장하면서 나타났다. 고대그리스처럼 농경문명이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이후에도 민주적 체제가 시행된 경우는 예외적이기는 했지만 고대 그리스 이외에도 여럿이 존재했다
- 기원전 8세기 그리스는 급속한 경제적 팽창을 경험했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으로 인해 인구가 전례없이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그리스인들은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부족해진 토지를 찾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림. 그리스인에 의한 지중해 연안의 식민활동이 시작된 것이 이때부터였다. 외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져 금속이 보다 싼 가격으로 유입되었고 동방에서 새로운 금속기술이 도입되어 무기를 만드는 비용이 내려감.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데다 무기의 평민들이 가담하면서 중장보병의 규모가 커지자 과거 소수의 귀족들이 개별적으로 전투를 벌이는 모습은 사라졌다. 대신 대규모 보병군대에 적합한 밀집방진 전술인 팔랑크스가 나타났다. 무장을 갖춘 평민들은 귀족들의 권력독점에 도전했다. 견고하게 뿌리박힌 귀족 셀겨에 맞서기 위해 평민들은 구심점을 필요로 했고 참주가 그 역할을 맡았다. 기원전 7세기 중반부터 일련의 야심가들이 평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귀족들이 장악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독재정권을 수립. 참주의 권력은 평민을 지지기반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평민들이 귀족들에 대항하기 위해 그를 필요로 했을 때에만 유지될 수 있었음. 평민들이 귀족들을 억제할 자신감을 갖게 되자 참주의 필요성은 사라졌고 그의 권력기반은 침식되어 갔다. 그리하여 참주정은 독재정권에 염증을 느낀 평민들과 귀족들의 연합에 의해 전복되었다. 이후 그리스에는 시민중장보병인 호플리테스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체제가 형성됨.
- 비록 경제발전으로 더 넓은 계층이 무장을 갖출 수 있게 되었지만 모두가 청동갑옷을 마련할 만한 경제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음. 아테네의 경우 남성시민의 40-60%는 무장을 갖출만한 여력이 없었따. 테테스라 불린 이들은 관직을 소유할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 가난한 시민들이 국가의 군사력에 기여할 기회는 바다에서 찾아왔다.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이 해안가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상 그리스에서는 해양활동이 활발했고 해군의 중요도가 높았다. 영화 벤허에서는 쇠사슬에 묶인 노예들이 채찍을 맞아가며 노를 젓는 것으로 묘사됐지만 사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갤리선의 노를 젓는 자리에는 노예가 아닌 시민들이 선호되었다. 국가에 대한 아무런 권리도 없는 노예들에게 함대의 운명을 맡기는 것은 꺼림칙한 일로 여겨졌다. 그래서 노예들에게 노를 젓는 자리를 맡길 때는 전투가 끝난 후 시민권을 주기로 약속하거나, 아니면 노예들을 먼저 시민권자로 만든 후에 노를 잡게 했다.
- 그리스의 민주적 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음. 비록 그리스의 민주적 전통이 최후를 맞이한 것은 필리포스 2세의 마케도니아 군대에 짓밟힌 이후였지만, 그리스의 시민권력은 마케도니아에 의한 정복 이전부터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서로간에 거의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이러한 만성적인 전쟁상태에서는 전문적인 군대가 필요했음. 농지를 돌봐야 하는 시민군대를 무한정 전쟁터에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이 시기 그리스에서는 시민들의 권력기반이었던 시민전사의 전통이 부식되었고 용병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적으로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유력자들에게 권력의 주도권이 넘어가게 만들었다. 또한 점증하는 군사적 분쟁은 그 안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군지도자들의 입지를 강화시킴. 그 결과 군대를 기반으로 한 군주제가 자라났다.
- 동부 지중해 연안을 지배한 일련의 대제국인 아시리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는 모두 상대적으로 척박한 농경지역에서 기원한 민족들에 의해 건설됨. 사막의 유목민 베두인들로부터 주로 병력을 제공받았던 초기 아랍제국의 군대는 농민출신은 아니었지만 역시 가진 것이 많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그리스 로마인들의 군사적 성공은 가난했기에 더 강한 보병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던 민족들이 부유한 문명들을 정복하고 대제국을 건설하던 당시의 역사적 흐름의 일부였다.
- 가난했기 때문에 무력집단의 성장이 억제되서 군사적으로 강력했던 민족이 제국의 주인이 된 후 부유해졌지만 그 결과 무력집단의 지배력이 강해지면서 오히려 군사적으로 약화되어 제국의 붕괴로 이어지는, 말하자면 배고픈 늑대가 배부른 돼지가 되는 과정은 아시리아 이후에 등장했던 다른 제국들도 겪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전설을 가진 로마제국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기원전 7세기까지 로마인들이 전투를 치르는 방식은 고전시대 초기의 그리스와 비슷했다. 무장을 갖춘 귀족전사들은 개별적으로 적과 전투를 벌였고 이들의 뒤에는 무장을 갖추지 못한 평민들이 소리를 지르며 따라다녔다. 이후 그리스에서 나타났던 것과 비슷한 변화과정이 일어났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서 더 넓은 계층의 사람들이 무장을 갖출 수 있게 된 것이다. 6세기를 거치면서 부유해진 로마는 오두막집들이 모여 있던 촌락에서 세련된 도시로 탈바꿈했다. 같은 시기에 그리스의 팔랑크스 전술이 되입되어 4천명 정도로 이루어진 중장보병 군단이 조직되었다. 병사들은 대부분 자비로 무장을 갖출 여유가 있는, 토지를 보유한 농민들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철기제조술의 전래이후 로마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경제성장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를 뒤덮고 있던 울창한 숲이 철제 도끼에 의해 잘려나가 농경지로 바뀌었고 철제보습을 단 쟁기로 보다 수월하게 땅을 갈 수 있었다. 농업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수많은 단위로 쪼개져 있던 부족들이 통합되어 갔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났다. 로마가 이탈리아를 통일해 가던 이 시기에 이탈리아의 성인 남성중 10%는 군대에 있었는데 한국으로 치면 2백만명 이상이 군복무를 하고 있었던 셈. 이탈리아 남성들은 평생동안 최소 4년을 군대에서 보냈음. 당시 마넝적 전쟁상태에 있던 이탈리아에서 이들의 군생활은 거의 항상 실전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로마와 이탈리아의 병사들은 오랜 실전경험으로 단련된 베테랑 군인들이었다. 이탈리아가 로마에 의해 통합된 후 이탈리아의 강인한 병사들은 로마의 군대로 편입되었다. 동방과 서방의 정복을 완료시킬 동력을 제공한 것이 바로 이 범이탈리아출신 중장보병이었다.
- 전쟁은 로마인들에게 있어 일상적 삶의 일부였다. 그래서 그들의 사회는 전쟁을 위해 짜여졌고 무를 숭상하는 문화가 자리잡음.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군사적 업적이 필수. 로마역사상 최고 부호였떤 크라수스가 굳이 말년에 그에게 비참한 죽음을 선사해준 파르티아 원정을 떠난 이유도 그에게 모자랐던 전쟁터에서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였음. 로마인들은 이웃민족들과 싸우면서 그들의 군사기술을 다듬어갔다. 초기에는 단순히 그리스의 팔랑크스를 모방한 수준이었던 로마군단은 수많은 전투와 패배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개조를 거듭해 극도로 효율적인 전쟁기계로 진화해감
- 농업생산력이 낮은 서유럽에 중앙집권적 제국이라는 유지비가 많이 들어가는 형태이 정부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고대의 고속도로였떤 지중해를 통해 농업생산력이 높은 동방엣 생산된 잉여를 서방으로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 군사력에서 우위에 있던 서방이 동방을 정복하고 그 부를 강탈하여 제국의 지배도구인 상비군과 관료조직을 지탱시킨 것. 당시 제국의 세입에 대한 자세한 수치상의 정보를 알 수는 없지만 이집트 한 지역에서 거두어들인 세입이 제국의 전체 세입의 최소 3분의 1에서 많게는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방의 군사력이 약화되자 동방으로부터 제국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잉여를 빼앗아 올 수 없게 되었다. 3세기 이후 로마시는 더 이상 제국의 권력중심지가 아니었다. 북부 발칸 출신 장군들은 그들의 군사기지에서 제국을 통치하다가 324년에는 발칸반도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겨버림. 이제 동방의 잉여는 로마시가 아니라 콘스탄티노플로 흘러들어감. 로마시로 향하던 이집트의 곡물 수송선들은 새로운 로마시로 방향을 바꿈. 이후 동방의 잉여로 유지되던 서방의 제국은 필연적 붕괴를 향해 나아갔다.
- 부유한 동양의 문명들에서도 과거 농업생산력이 낮았던 시기에는 지방분권적 사회가 나타나지만 그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 있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서유럽보다 2천년 정도 앞서서 서유럽에서 나타났던 것과 아주 유사한 형태의 봉건적 사회가 형성되었음. 중세의 서유럽이나 동시대의 동양이나 정부가 운영되는 방식은 달랐어도 그것은 근본적 원리는 동일했다. 바로 폭력이었다. 중세 서유럽을 지배하던 자들은 전사계급이었다. 이들은 견고한 성채에 거점을 두고 군사력을 통해 주변지역을 지배했다.
- 우리에게 익숙한 말을 탄 기사는 9세기 이후에야 널리 퍼졌다. 그 이전까지는 귀족들도 주로 보병으로 싸웠다. 자유민 전사들이 주축을 이루었던 초기 프랑크 왕국의 군대는 거의 전적으로 보병이었다. 가난한 자유민 병사들은 방어장비를 거의 갖추지 않고 전장에 나감. 갑옷은 고사하고 투구를 쓴 자도 많지 않았다. 이 시기 프랑크족과 전투를 치른 비잔틴 사람들은 이들을 반쯤 벌거벗은 보병으로 묘사. 군대의 귀족화가 진행되면서 값비싼 장비인 중장갑과 말의 사용이 늘어났다. 그러나 8세기가지는 과거의 보병중심적인 성향이 이어졌다. 프랑크족 기병들은 말을 전장으로 이동한 뒤 말에서 내려 보병으로 싸웠다.
- 1439년 국왕에게 프랑스 최초의 상비군이 주어졌고, 또한 그것의 유지를 위해 전국적인 세금을 부과할 권한이 부여됨. 전문적이고 규율잡힌 군대를 얻은 프랑스는 곧 영국의 침략군을 그들의 국토에서 몰아냈다. 새로운 형태의 군대는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더 우월한 군사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18세기까지 귀족기병에 의존한 폴란드처럼 변화에 뒤처진 국가는 외국군대에게 정복당해 지도상에서 사라짐. 프로이센은 30년 전쟁 동안 스웨덴의 군대에게 짓밟힌 후 국왕에게 강력한 상비군을 쥐어줌. 이 변방의 소국은 약 2세기 후 독일 전역을 통일. 강력한 군대를 손에 넣은 유럽의 군주들은 약 2천년 전 전국시대 중국의 군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1500년에서 1700년 사이의 기간은 유럽 역사상 가장 호전적인 시기였는데, 이 시기 동안 전쟁이 없었던 해는 다 합해 10년 정도에 불과. 주변국들과의 군사력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각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군대의 규모를 늘려감. 유럽 주요 국가들의 군대규모는 1530년과 1710년 사이에 10배로 증가.
- 군대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것을 통제하는 국왕의 권력도 증대됨. 과거 지방에서 독자적 지배자로 행세하던 귀족들은 중앙권력에 복속되었고,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여 왕의 통제를 받는 관료조직이 들어섰다. 거대한 국가권력기구의 정점에 선 왕은 유일한 정치적 권위의 원천이 되었다. 이른바 절대왕정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유럽에서 절대주의의 시대를 연 것은 가장 남쪽에 위치해 농업생산력이 높았던 스페인이었다. 16세기 카스티야의 몇몇 농장에서는 밀의 파종량 대비 수확량이 8배에서 9배정도였는데 이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1500년 무렵 영국과 프랑스의 수확량은 파종량의 5배를 조금 넘는 정도였고 독일에서는 이 수치가 5배 아래였다.
- 무거운 쟁기의 보급에 의해 촉발되었던 농업생산력의 증가는 13세기에 이르러 한계에 다다랐다.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정체되었고 그 세기 말부터는 늘어난 인구를 먹이기 위해 고지대나, 모래땅, 습지같이 척박한 한계지까지 경작지가 지나치게 확장된 영향으로 평균 산출량이 감소하기 시작. 무거운 쟁기는 산업시대 이전에 농경에 적용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의 기술이었다. 중세 초기 무거운 쟁기의 확산 이후 19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농업에서 그와 같은 기술상의 혁신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서유럽이 과거 동방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천 년 동안의 정체상태에 빠져들 차례인 듯 보였다. 그러나 서유럽의 농민들은 기술상의 혁신이 아닌 새로운 동력에 의해 다시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이루어내다. 이 새로운 동력은 바로 시장이었다.
- 파종량 대 수확량 비율 1:4라는 저조한 수치가 일반적이었던 13세기에도 예외적으로 높은 수확고를 거둔 몇몇 지역들이 있었다. 도시가 만들어낸 시장에 접근할 수 있었던 지역들이 그곳이었다. 됫의 시장은 농민들에게 그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판매하여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 농민들은 더 많은 수익을 얻기 위해 그들이 가진 한정된 토지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최대한 많은 식량을 생산하도록 노력했다. 높은 생산성은 노동과 자본을 아끼지 않고 투자함으로써 달성되었다. 도시의 시장과 연결된 지역에서 농민들은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과거보다 더 많은 시간동안 일했다. 일손이 더 필요하면 임금노동자들이 고용됨. 지력을 높이기 위해 많은 양의 거름이 시비되었는데, 이 중 상당부분은 외부로부터 구입되었다. 토지를 보다 집약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휴한지를 줄일 수 있는 농법과 가축의 수를 늘려 보다 많은 거름을 얻을 수 있는 농법이 시도되었다. 종종 근대농업의 혁신으로 지목되는 이러한 변화들은 근대에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중세 후기에도 이미 존재했더 것이었다.
- 종종 근대 농업의 혁신으로 지목되는 이러한 변화들은 근대에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중세 후기에도 이미 존재했던 것이었음. 다만 근대에 이르러 시장의 영향력이 확장된 이후에야 많은 노동과 자본이 소요되더라도 생산성이 높은 이러한 집약적 농경방식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됨. 시장이 발달함에 따라 또한 각 지역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지역의 자연환경에 가장 적합한 작물과 가축에 집중해서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음. 과거 자급자족적 사회에선 각 지역이 거의 모든것을 스스로 생산해야 했기에 그 지역에서 잘 자라지 못하는 농작물도 재배해야 했다. 시장이 발달하여 교역을 통해 생활에 필요한 다른 산물들을 얻을 수 있게 된 이후에야 각 지역에 가장 적합한 작물로 생산의 집중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 서유럽은 정말 딱 적장한 환경에 위치해 있었다. 무겅누 쟁기의 도입 이후 기술적 요인에 의한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서유럽의 농업생산력은 사회를 과도기적 단계로 들어서게 할 정도의 수준에 있었다. 이 시기에 서유럽에서는 지방 분권적 무력집단의 지배가 해체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중앙집권적 무력집단 역시 아직 미미한 수준으로밖에 성장하지 못했다. 이러한 무력집단 지배력의 공백상태는 무력집단의 통제에서 벗어난 잉여가 시장에 공급되게 만들어 시장이 성장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제공했음. 이후 시장의 성장에 의해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면서 늘어난 잉여 중 일부가 중앙 무력집단에 공급되었고, 그 결과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조금씩 성장했다. 그러나 서유럽에서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의 성장은 전적으로 시장의 성장이라는 1차적인 현상이 의존해 일어난 2차적 현상이었다. 시장이 먼저 성장한 다음에야 그것에 의해 증가한 잉여를 배분받아 중앙권력이 성장할 수 있었음. 따라서 중앙 무력집단의 성장은 시장의 성장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었음.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어느정도 성숙한 형태를 갖추었을 때 시장은 이미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장해 있었다. 일시적으로 중앙 무력집단이 과도하게 성장해 시장을 위축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장이 위축되면 시장에 의해 증가했던 농업생산력이 감소했음. 그 결과 농업잉여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중앙 무력집단 역시 위축됐고, 시장은 다시 성장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 과정은 시장이 마침내 폭력에 이한 강제력을 밀어내고 사회의 지배적 원리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 영국의 젠트리 역시 중세시대 전사귀족의 하부계층이었음. 그런데 중국의 소귀족들과 달리 젠트리들은 관료조직이라는 새로운 보금자리에 의존할 수 없었음. 영국의 빈약한 중앙권력은 관료들을 먹여살릴 만한 자원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 지방 관리들은 거의 무료로 관직에 봉사했으며, 수입이 있는 관직이라도 수입이 일시적이고 변변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전장에서 평민병사들에게 자리를 빼앗겨 더 이상 전사 지배계급으로 행세할 수 없게 된 영국의 소귀족들은 따라서 뭔가 다른 부분에서 수입을 올릴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당시 역동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시장이 그 해답을 제공.
- 젠트리들은 그들의 토지를 세심히 관리하고 충분한 노동과 자본을 투자하여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늘어난 산물은 시장에 판매하여 많은 이익을 거둘 수 있었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적용됐음. 이미 자본을 소유하고 있던 귀족들은 경제활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만 하면 시장의 성장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볼 수 있었고 시장경제를 지배하는 자본가로 변모할 수 있었음. 젠트리들은 상업적 농업 외에도 상공업에 투자하는 등 생산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여 새로운 경제적 환경에서 가장 번영하는 계층이 되었다. 워릭셔 주에서 젠트리들의 평균 자산가치는 1530년대로부터 100년 동안 거의 4배로 증가. 평민 계층 중에서 농업과 상공업으로 재산을 모은 자들은 젠트리 계층으로 편입되었음. 대귀족들은 경제적 논리가 지배적이 되어가는 시대에 그들의 하급자들보다 더디게 적응했다. 지나간 시대에서 누렸던 권력이 컸던 자일수록 과거의 영광에 매달려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 그 결과 대귀족들은 16세기말 한때 심각한 재정적 위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영국의 조그만한 왕실은 대귀족들 중 아주 일부에게만 충분한 수입을 제공해줄 수 있었다. 때문에 대귀족들도 결국에는 생산활동에 발을 들여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자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데로 관심을 돌린 대귀족들은 17세기에 상당한 경제적 회복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17세기에 이르면 영국의 귀족계급은, 특히 그 중 젠트리는 훗날의 자본가계층의 시조와 비슷한 존재로 변해 있었다. 영국에서는 귀족들이 이미 생산자로 전환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에서 나타났던 귀족과 생산자들 사이의 대결이 일어나지 않았다. 생산자와 충돌을 일으킬만한, 진정한 의미에서 무력집단이라고 할 만한 것은 허약한 국왕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 한때 학계에서는 왕당파와 의회파의 싸움을 봉건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투쟁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후 학자들이 양측의 구성원들의 사회경제적 상태를 세미랗게 조사해본 결과 이러한 부르즈아 혁명이라는 틀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의 싸움은 무력집단과 생산자 사이의 싸움이 아니었다. 양측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젠트리들은 이미 시장으로 돌아서 있었다. 한 역사가의 말에 의하면 "문제는 부르주아가 양쪽에 있었다는 것이다." 양측에서 가장 지배적이라 할 수 있는 차이는 종교였다. 랭커셔에서 의회파에 가담한 귀족의 73.6%가 청교도였던 반면 왕당파에 가담한 귀족의 65.5%가 카톨릭 신자였다. 많은 수가 그들이 속한 지역이 어느 쪽에 서기로 결정했느냐에 따라, 또는 점령당했는가에 따라 편을 정했다. 그 외에 각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이상, 왕에 대한 충성심 및 동정심, 혹은 전쟁에 뛰어들어 한 몫 잡아보려는 계산 등이 어느 편을 택할지에 영향을 미쳤다. 대다수 젠트리들은 내전에 무관심했고 분쟁에 끌려들어가는 것을 꺼려했다. 젠트리의 60% 이상은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이미 지방에서 사법권과 행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중앙에서도 의회를 통해 왕권을 제약할 수 있었던 젠트리들은 왕권의 소멸에서 얻을 것이 별로 없었다. 기득권층인 이들은 현재의 사회가 격변하는 것을 원치 않았음. 그래서 의회파의 편에 섰던 의원들에게도 국왕자리를 없애버리는 것은 고려사항이 아니었음. 의회파와 왕당파 의원들의 정치적 견해의 차이는 이미 제한적인 왕권을 더 깎아낼 것인지 말 것인지에 있었다. 의회파는 왕당파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에도 찰스 1세게에 입헌군주제를 제안했다. 그가 이 제안을 거부하고 스코틀랜드 군대를 끌어들여 일어난 2차 내전이 진압된 후에도 의회는 여전히 국왕과 협상하는 쪽을 택했다.
- 영국에서 절대왕권을 세우려고 했던 찰스 1세의 헛된 시도가 야기한 사건들은 당시 사회의 주도권이 이미 무력집단에서 시장으로 넘어와 있었음을 보여준다. 영국에서는 기후적 조건 때문에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시장의 성장이 일어난 후에야 그것에 의해 증가된 농업잉여를 공급받아 성장할 수 있다는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는데, 섬나라의 특성상 군사력까지 갖지 못한 영국의 왕실은 잉여흡수능력이 더욱 떨어져 발육부진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현상은 시장에 더 많은 잉여가 공급될 수 있게 해주었고, 또한 중앙 무력집단에서 수입원을 찾지 못한 지배계층이 생산활동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덕분에 경제성장에 아주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되었다. 1600년에 이를 때까지 영국의 경제는 당시의 최고 선진지역이었던 네덜란드는 물론이고 프랑스와 비교해서도 조금 뒤처져 있었다. 17세기에는 대륙에서 군대의 규모와 함께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급성장하면서 대륙이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퇴보와 정체상태에 빠져들었다. 프랑스에서 국왕의 권세가 절정에 달했던 태양왕의 치세는 경제적으로는 침체의 시기였음. 중세 이후 유럽 상공업의 중심지로 독보적인 경제발전을 구가하던 네덜란드 역시 비대해진 군대와 관료조직에 발목이 잡혔다. 주변이 대국들이 가하는 군사적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17세기말 인구 200만의 네덜란드는 10만의 군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군대와 관료조직은 그 무거운 유지비용으로 경제를 짓눌렀다. 17-18세기 네덜란드의 세금부담은 영국보다 몇 배 이상 무거웠다. 또한 국가의 관료조직이 제공하는 짭짤한 관직은 사람들의 관심이 생산적인 활동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18세기 네덜란드에서 가장 높은 소득을 올리는 자들은 대부분이 관직을 가진 자들이었음.
- 영국에서는 대륙의 국가들이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에 깔려 허우적거리던 시기에 시장이 성장이 지체없이 이어졌다. 시장의 영향력이 확산되면서 과거에 예외적인 일부 지역에서만 달성되었던 높은 수확량이 18세기 말이 되면 영국의 일반적 농업생산력이 되었다. 1600년경까지만 해도 영국 농민들의 노동생산성은 프랑스보다 조금 낮은 수준이었지만 1700년경에 이르면 프랑스보다 15% 이상 높아졌고 1800년경에는 그 차이가 44%로 벌어짐. 시장의 생산력 증폭현상은 농업뿐만 아니라 공업에도 적용되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산업혁명이었다. 최근 들어 학자들은 산업혁명의 연속적 성격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18세기 후반 이전에도 시장의 성장과 함께 공업생산성의 꾸준한 발전이 이어졌음. 우리가 산업혁명기라고 부르는 시기는 이 성장속도에 급격한 가속이 붙은 시기였다.
- 무역과 식민지에 의해 창출된 해외시장도 공업품의 수요를 만들어내는 데 어느정도 역할을 했으나, 당시의 산업성장을 주도한 것은 역동적으로 성장하던 내수시장이었음. 시장의 성장에 의한 농업생산력의 혁명적 발전은 산업사회로의 길을 열어주었다. 식량생산량이 급증함에 다라 16세기 초에 200만명이 조금 넘었던 영국의 인구는 18세기 말에는 800만 이상으로 증가. 늘어난 인구는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상품이 소비될 잠재적 시장을 제공해줌. 또한 농업생산력의 증가는 농가소득을 증가시키고 식품가격을 하락시켜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산업생산품을 구매하는 데 사용할 수 있게 해줌. 1750년경 영국 농업의 노동생산성은 전체 인구의 46%를 차지하는 농업인구가 54%의 비농업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었음. 더 이상 땅을 일굴 필요가 없게 된 사람들은 도시로 유입되어 공장이 돌아가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 인구의 절반 이상이 농업이 아닌 다른 부분에 종사하는 사회는 더이상 농업사회가 아니었다.
- 프랑스에서 중앙무력집단의 성장은 시장의 성장이라는 1차적 현상에 의한 농업생산력이 증가하면서 거기서 나온 잉여를 분배받아 일어난 2차적 현상이었다. 중앙 무력집단은 시장의 성장이 먼저 일어난 이후에야 그것에 뒤따라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학관계는 시장을 중앙무력집단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했음. 17세기에 중앙무력집단이 지나치게 성장하여 시장을 짓누르자 농업생산력이 정체 또는 감소됨. 농업잉여의 공급이 정체 또는 감소하자 중앙무력집단의 성장은 중단되었고 그 결과 시장에 가해지는 압박도 누그러짐. 그리하여 시장은 태양왕의 시대를 살아남았고 18세기에는 다시 성장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1715년 이후 프랑스 경제는 17세기의 정체에서 탈출하여 긴 성장국면에 진입했다. 루이 14세가 사망한 이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까지 프랑스 교역규모는 5배로 증가. 18세기 프랑스의 경제성장은 전에 없이 역동적인 것이었음.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 프랑스의 경제성장률이 연간 1%에 달해 당시 산업혁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영국의 0.7%보다 더 높았다고 추정했다.
- 영국의 귀족들과 달리 프랑스 귀족들은 번듯하게 성장한 관료조직과 군대에서 새로운 부와 지위의 원천을 찾을 수 있었음. 관직은 급료에 더해 수수료와 뇌물 등으로 그것을 소유한 자들에게 추가적 수입을 가져다줌. 왕의 신임을 얻어 고위관작에 오르게 되면 한순간에 부귀영화를 거머쥘 수 있었다. 과거 자신들의 지방을 호령하던 대귀족들은 관직가 관대한 연금, 하사금을 얻기 위해 왕의 궁전 주변으로 모여들었음. 귀족들은 거대하게 팽창한 왕의 군대에서 장교자리를 거의 독점적으로 차지. 루이 14세 시대에는 2만명 가량의 장교가 있었는데, 그중 80%는 귀족출신이었음. 장교들은 일반 병사들보다 최소 10배 이상의 급료를 받았다. 17세기 말에 전체 귀족남성의 1/6, 군복무 연령대 귀족의 약 1/3에서 1/2이 군대에 속해 있었음.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부와 권력을 얻을 상당한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에 프랑스 귀족들은 영국 귀족들과 달리 천한 생산활동으로 거의 돌아서지 않았다. 이는 프랑스의 귀족들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것을 막아 이들에게 오히려 독이 됨. 자본을 소유하고 있던 프랑스 귀족들은 경제활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만 하면 영국의 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본가로서 시장의 성장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임. 그러나 프랑스의 중앙무력집단이 제공한 기회는 귀족들의 관심을 묶어둘 만큼 충분히 화려했다.
- 시장의 발전에 의한 도시의 성장은 많은 수의 생산자들을 도시라는 좁은 공간에 집결시켜 생산자들의 조직력을 강화시켰고, 이 조직력은 필요시에 군사력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중앙집권적인 무력집단의 지배를 받은 문명들에서도 농업의 높은 생산성으로 인해 농업잉여를 소비하는 도시가 발달. 무굴제국에서는 인구의 15%가 도시에 거주했고, 송나라에서는 인구의 20%, 고대 이후 이집트에서는 25%이상이 도시에 거주. 그러나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도시는 생산자가 아니라 무력집단이 한 군데 모여 주변의 농촌지역을 지배하는 행정과 군사중심지로 성장. 상업과 공업 등 생산적 부분이 도시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부수적인 수준일 뿐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에서는 도시의 성장이 생산자들의 조직력과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송나라 카이펑은 파리보다 규모가 더 큰 도시였지만 그 인구 중 25만명은 관료들과 그의 가족들이었고, 도시의 안과 주변에 최대 30만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음. 장인들도 인구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이들 중 다수가 국가가 운영하는 작업장에 속해 있어 사실상 국가에 종속되어 있었다.
- 서유럽에서 도시의 성장을 가능하게 해준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시장의 성장에 의해 이루어졌음. 따라서 도시의 성장은 시장과 연결된 생산적 부분에 의해 주도되었다. 시장의 성장에 의해 증가한 농업잉여의 일부를 제공받은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의 행정조직이 도시에 더해졌지만 도시의 생산자적 성격을 잠식할 정도가 되지 못했다. 루이 16세는 약 2만명의 군대를 파리 인근에 동원했지만 이 병력으로 파리를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음.
- 국가의 더 많은 구성원들에게 정치적 권리가 주어질수록 더 많은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권리를 가진 국가를 위해 기꺼이 군사적 의무를 수행한다. 따라서 사회가 민주적이 될수록 국민의 역량 중 더 많은 부분을 외국과의 무력투쟁에 동원할 수 있게 됨. 즉 국가의 군사적 효율성이 높아짐. 과거 부족적 단계의 사회가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했던 것도 이 때문. 부족들은 정치적 권리를 가진 자유민 남성 전체를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음. 또한 이들은 무력집단에 의해 억지로 끌려나온 피지배자들보다 싸우려는 의지가 더 강했다. 무력집단은 그들 부 중 커다란 부분을 정치권력의 독점에서 얻었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애초에 고려대상이 될 수 없었음. 반면 부르주아들은 무력집단과 달리 그들의 부를 기본적으로 경제적 수단을 통해 얻었기 때문에 정치권력의 독점을 포기하더라도 그들의 경제적 기반은 크게 손상되지 않았다. 따라서 부르주아들은 민주주의와 타협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참아낼 수 있었다. 프랑스군의 무기력한 패배로 부유한 자들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정치체제로는 외국군대를 물리칠만한 국민적 역량을 끌어낼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던 부르주아들은 민중의 협력을 얻기 위해 정치적 양보를 했다. 하인을 제외한 모든 성인 남성에게 선거권이 부여됨. 그로부터 약 한달 후, 갓 입대한 의용군으로 이루어져 훈련도 경험도 부족했지만 높은 사기와 혁명에 대한 열정으로 무장한 프랑스의 의용군은 발미에서 당시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았던 프로이센의 군대를 막아냈다.
- 영국과 프랑스에서 시장의 성장에서 비롯되어 일어난 두개의 혁명은 그것이 가지는 우월성으로 인해 곧 주변국가들로 확산되었다. 두 혁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시장경제도 같이 퍼져나갔다. 대륙의 국가들은 앞다투어 영국에서 일어난 경제적 혁신을 받아들였다. 영국의 산업지역에 기계와 공장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바다 건너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나타남. 기득권층이 가졌던 특권의 포기를 의미했던 정치부분에세의 혁명은 전파가 더뎠고 많은 진통이 야기됨. 1814년 마침내 프랑스를 꺾은 유럽의 강대국들은 프랑스 혁명을 무효로 만들려고 시도. 그러나 시장경제가 퍼져나가면서 무력집단의 정치권 독점은 결국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국가간의 군사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각국은 보다 넓은 계층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해야 했다. 1807년 프로이센은 프랑스군에게 패배하여 영토의 거의 절반을 빼앗긴 이후에 마침내 농노데를 폐지. 그로부터 약 60년 후에는 모든 남성에게 보통 선거권을 부여하여 다른 유럽국가들보다 오히려 앞서 나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개혁의 결과 프로이센은 프랑스를 제압하고 독일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 변화의 근원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국가들은 자발적으로 변화를 수용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 채 식민화라는 결과로 지리적 불운함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월등한 기술력과 생산력, 그리고 정치제도의 뒷받침을 받은 서양의 근대적 군대는 세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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