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누이트족은 전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그들이 전쟁을 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살고 있는 얼음 황무지에서는 권력과 영토를 추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 더 많이 가지거나 더 나은 것을 가진 그룹도 없다. 모두가 바다가 주는 선물로 먹고 살았다. 그러나 이누이트 역시 여러 이유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함. 이들에게도 살인은 낯선 것이 아님. 하지만 이누이트의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학살한다거나 마을 주민이 모조리 다른 마을 주민의 노예가 된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조직적 학살이라는 뜻의 전쟁은 한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다. 이는 전쟁이 인간의 보편적 행위가 아니라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다.
- 공격성과 권력욕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인간의 공격성이 최악의 형태로 발현된 전쟁을 과연 이 세상에서 추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된다. 그에 관해서는 진지한 검토가 필요. 공격성은 단추 하나를 누른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님. 물론 억제할 수는 있지만 공격성을 억제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다. 공격성은 차곡차곡 쌓이다가 언젠가 격렬한 폭력으로 폭발하고야 만다. 20세기, 축적된 폭력의 에너지는 두 차례에 걸친 대형 재앙으로 터졌다. 계몽된 현대는 전쟁을 이성의 수단으로 없앨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였다. 인류는 자멸의 벼랑까지 내몰렸다. 그러므로 수백년을 거치면서 사람들이 전쟁을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생각은 전쟁을 평화의 단절로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를 전쟁이라는 정상상태의 중단으로 보았던 고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근대에 와서도 전쟁은 정당화가 필요없는 행위로 보았다. 분명 전쟁은 고난을 의미하지만, 삶이란 결국 끝없는 투쟁과 고난, 인내의 연속이 아니던다. 사람들은 전쟁을 추앙하지는 않지만 전사를 숭배하면 전사의 지도력과 무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했고 전사만이 자신들이 타고난 불행을 막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때문에 19세기까지 군인은 귀족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직업의 관문이었다.
- 현대의 군국주의는 전쟁을 자연상태로 보았던 과거의 세계관에 빚지고 있음. 그 결과 프로이센의 군국주의자였던 헬무트 폰 몰트케는 전쟁을 '신이 만든 세계질서의 일원'이라고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영원한 평화란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결코 '아름답지 않은 꿈'이라고 말이다. 그는 말했다. "전쟁이 없다면 세상은 유물론의 수렁에 빠지고 말 것이다." 대부분의 전재이 순수 유물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몰트케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 전쟁은 자연성의 일반적 표현은 아니지만,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폭력성을 근거로 한다. 전쟁은 자연재해처럼 외부에서 닥쳐 온 낯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나온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인간이 전쟁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증오와 평화를 향한 동경 역시 인간의 본성에 뿌리 내리고 있다. 그렇기에 전재이란 극도로 모순되며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인류 사회의 현상인 것이다. 인간은 전쟁과 평화, 증오와 사랑, 권력과 무욕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며 줄타기를 하고 있다.
- 20세기의 참혹한 전쟁들에서는 과거의 기사도 정신 같은 것은 희미한 불꽃 정도만 살아 숨 쉴 뿐이었고, 그마저 전쟁의 와중에 자행된 온갖 대량 학살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기사도의 이상이 인류의 문화 발전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대부분이 환상이고 희망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기사도는 교육과 공공생활에 잠재적 영향을 미쳤고, 사회의 윤리수준을 높여 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투행위나 전쟁을 위대한 교육자로 치켜세우는 것은 과도한 주장이다. 기사도는 한 시대를 풍미한 정신이었지만 기사들의 숭고한 시대는 지나간지 이미 오래다.
- 놀랍게도 서양세계에서는 전투기술을 숭고함의 영역으로 승화시킨 적이 없었다. 중세 기사도 시대의 검술은 전혀 그 맥을 잊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기독교가 너무 철학적이지 않은 종교였다. 유럽의 기사는 검술을 분쟁해결의 기술로 생각했을 뿐, 그들의 검술에는 철학이 없었다. 아시아인의 시각은 달랐다. 검술은 고도의 기술적 숙련일 뿐 아니라 정신적 깨달음을 이르는 길이었다. 뛰어난 기술과 정신적 깨달음은 둘이 아니다. 서로를 더 높여 주는 조건이 된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기사도가 처음부터 불교나 도교철학과 결합되어 발전했다. 불교나 도교는 삶과 죽음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의 무사 사무라이는 생과 사, 흥망성쇠를 초월하며 언제라도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검은 사무라이의 영혼이다." 이 말은 사무라이의 충절과 자기희생, 경외심과 선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헌신을 상징. 동양 사상에서는 철학과 종교가 별개의 것이 아님. 사무라이의 검에도 영혼이 있다. 그래야만 검은 사무라이의 영혼이 될 수 있다. 이는 다시 검을 제작하는 기술의 철학을 요구. 때문에 일본에서는 검을 만드는 장인들이 존경을 받고 명성을 누렸다. 사무라이의 검은 죽음을 부르는 물건이 아니라 삶을 체현하는 방편이었다. 검은 평화와 정의를 수호하고 인간성을 해치는 악과 싸워 지상에 정신적 안녕을 불러오는 힘의 대변자다. 사무라이에게 전쟁은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님. 무사는 죽을 수 있으나 악에 맞서는 전쟁 자체는 항상 삶에 기여. 그러나 정작 무사는 그런 생각조차 없다. 무사의 정신은 텅 비어 있다. 사무라이는 직관으로 싸운다. 모든 동작은 저절로, 동작 그 자체를 위해 탄생한다. 전쟁은 기술이다. 그림이나 음악, 다도, 꽃꽂이와 다르지 않다. 전쟁은 무엇보다 진리를 찾는 길이며 지혜에 이르는 길이다. 무사는 한가지만 생각한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싸운다. 적을 이기기 위해 앞만 보며 전진하는 것, 이것이 사무라이에게 필요한 전부임. 그렇게 하자만 정신과 신체가 완전히 자유로워야 함. 무사가 되려면 의지력과 혹독한 훈련과 철학, 종교가 뒷받침되어야 함. 이런 기초가 없다면 절대 대가에 이를 수 없다.
- 손자병법은 전쟁의 일반전술을 설명한 최초의 저서이자 가장 천재적 작품임. 보통 우리는 전략이라는 말을 군의 지휘와 전쟁계획에 관한 이론으로 생각함. 그러나 손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음. 그의 학설은 다양한 관심, 특히 이해관계와 목표가 충돌하는 경우, 다시 말해 개인이나 집단사이에 갈등이 빚어지는 경우 등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상호행동의 모든 분야에 적용 가능. 나의 이념과 목표를 관철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 손자볍법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제시
- 종교는 사랑의 계명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인류사의 일부이기에 어쩔 수 없이 전쟁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는 걸까? 전쟁이 먼저일까? 종교가 먼저일까? 그건 알 수 없지만, 처음부터 둘이 공존했다는 주장이 우세. 성경에서도 그런 면모가 엿보임. 기독교 최초의 전쟁이라 할 수 있는 카인과 아벨의 형제간 대립과 살해는 신과 직접적 관련이 있음. 인간의 본성인 호전성이 종교에도 반영되고 있는 것임. 종교는 자기모순을 안고 있다. 인간의 선한 면이 종교에도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종교는 자기모순을 안고 있다. 인간의 선한 면이 승리하도록 돕지만, 승리라는 말 자체가 이미 전쟁을 전제로 함. 사랑과 폭력, 이 둘의 대립은 수많은 종교에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물론 종교에 따라 정도이 차이가 있어서 동양의 종교가 서양종교보다 훨씬 평화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는 일신론과 관련이 있음. 유일신은 다른 신을 허용하지 않음. 이같은 신의 이기주의는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을 허락하지 않음. 신지어 다른 종교를 이단으로 몰아붙임. 반대로 힌두교처럼 많은 신을 숭배하는 종교는 타 종교이 신에게서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다. 더구나 불교와 도교는 애당초 신이 없다. 동북아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종교전쟁이 덜 일어났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 이는 동양의 종교가 교권을 형성하지 않았다는 사실과도 관련됨. 동양의 성직자들은 명망은 누렸지만 세속적 권력은 갖지 않았다. 전쟁과 권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 십자군 전쟁은 이른바 성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를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성전은 광신주의에서 태어나며 예외없이 실패하고 만다. 십자군 전쟁 전체(1096~1270)도 엄청난 실패로 평가할 수 밖에 없다. 이후의 역사가 입증하듯 종교전쟁은 절대 승리할 수 없다. 종교적 박해와 전쟁은 적의 신앙심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 뿐이다.
- 십자군 전쟁을 촉구한 표면적 이유는 그리스 정교를 이슬람의 침공으로부터 구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비잔티움 전체가 이슬람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기독교인에 대한 이슬람교도의 박해는 십자군 기사들의 만행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이슬람 세계에서 존경을 받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도 많았음. 이 모든 것이 십자군 기사들의 탐욕과 거짓 신앙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슬람을 향한 그들의 증오는 이슬람의 증오를 낳았고, 결국 양측은 편협한 광신으로 맞섬. 그리고 광신주의의 대결은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이슬람 세계는 두터운 신앙의 커튼 뒤로 숨어버렸고 일부는 서구식 진보를 거부한 채 오늘날가지 커튼을 걷지 않고 있다. 십자군전쟁의 역사가 불행했던 이유는 순수한 신앙심이 후안무치의 탐욕과 인간 멸시로 뒤덮여 버렸다는 사실에 있다. 종교는 자기에게 이익만 된다면 인간의 나쁜 측면까지도 아무 문제 없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살인과 약탈도 쉽사리 신의 뜻으로 해석해버림. 그렇기에 종교는 그 어떤 파렴치한 행동에도 악용될 수가 있고 지금까지도 가장 위험한 문화의 폭발물로 남아 있는 것이다.
- 유럽은 과거의 끔찍했던 역사 때문에 성급한 대응을 자제하고 있는 듯하다. 그 참담했던 세월 동안 유럽은 어쩔 수 없이 종교전쟁을 피하는 방법을 학습해야 했다. 그러나 미국은 다름. 미국은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에 대해 현대문명의 십자군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 한때 미국민 대다수가 현대의 십자군 이념에 휩쓸린 가운데 부시가 속한 감리교의 열성분자들이 이런 주장을 펼침. 유럽의 경험이 절대적으로 필요함. 유럽은 유럽연합에 터키를 받아들여 종교, 문화간 갈등을 완화하려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음. 이스라엘까지 가입시킨다면 금상첨화일 것임
- 30년 전쟁은 아직 미완성인 세 개의 나라가 유럽대륙의 패권을 놓고 벌인 전쟁이었다. 스페인을 거느린 합스부르크 제국, 그리고 제국과 정치적 경계가 불확실했던 프랑스, 마지막으로 발트해의 지배자로 만족하지 못한 스웨덴이 그들이다. 이 3개국 모두 근본적으로 유럽의 지배라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했다.
-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의 협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위협에 시달렸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이 원하는 것은 뻔했다. 고대 서로마 제국의 유산, 다시 말해 교황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상에 건설된 신의 왕국의 유산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국의 바람은 기독교가 분열되면서 갈가리 찢어졌다. 교회의 분열과 신, 구교의 대립은 수백 개의 소국들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품고서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던 독일제국을 위협.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적 위치도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합스부르크가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보헤미아의 저항이 제국에 결정차를 날렸다. 한마디로 말해 전쟁의 진짜 원인은 제국이 분열될지도 모른다는 지배자들의 위기의식이었던 것. 이같은 권력욕의 소용돌이에서 30션 전쟁이 자라났다. 전체적 갈등은 기틀이 제대로 잡힌 국가들의 대립이 아니라 도저히 파악하기 힘든 대립, 이해관계, 목표/조직형태의 뒤죽박죽 속에서 탄생했다. 30년 전쟁은 전통적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었다. 당시 유럽에는 안정된 국가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음. 따라서 30년 전쟁은 18세기까지 이어진 국가형성 과정 속에서 일어난 대립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국가들이 유럽대륙의 선도자가 되기 위해서 다투는 과정에서 생겨난 격렬한 충돌이었다. 제 기능을 다하는 국가 시스템끼리의 충돌이 아니라 현대적 국가조직으로 향하는 과도기에 일어난 전쟁이었기에 그렇게나 혼란스럽과 복잡했던 것이다. 그 혼란을 거치는 동안 각 나라와 세력은 전 유럽을 손아귀에 넣고 싶다는 욕망을 접어야 했다. 모두 다른 나라가 최강자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할 뿐이었다. 일종의 예선경기였던 셈. 어쨌든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으며 패권을 추구했던 다양한 세력들은 불안하나마 균형을 회복. 열강들은 네덜란드나 보헤미아 같은 소국들에게도 국가로서의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간의 갈등이 그토록 끔찍한 결과를 낳은 데는 종교와 정치와 경제의 결합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전쟁의 경제적 원인에 대해서는 이후로도 오래도록 간과되었음. 전쟁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원인은 안전한 무역로와 지하자원을 확보하는 문제 등을 들 수 있음. 전쟁의 당사자들이 종교적 대립보다는 무역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은 여러가지 사건을 통해 확인됨. 그리하여 구교 지역이었던 쾰른은 신교국가인 네덜란드에 대해 엄격한 중립정책을 고수. 이웃한 네덜란드와의 다각적 무역관계가 신앙보다 훨씬 중요했기 때문.
- 30년 전쟁은 유럽이 전쟁을 할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인식 또한 의미가 깊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유럽경제는 전반적으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고, 특히 농업부문의 생산성이 크게 향상. 이 같은 경제성장은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한 세계무역을 통해 시장확대로 이어짐. 한 역사가의 말을 들어보자. "30년 전쟁은 16세기 경제도약으로부터 탄생. 이런 비약적 발전을 통해 부로 목숨을 부지했고 결국 이 부를 파괴하였다." 16세기에는 금속제련 기술이 크게 발달하였고, 이는 전쟁에 필요한 무기 생산을 가능하게 만듬. 또 30년 전쟁동안 10만명의 용병이 다양한 부대에서 활동. 이는 그 전 세기에 유럽의 인구가 약 25% 증가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30년 전쟁은 그 직전까지 아주 잘나갔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전쟁으로 수많은 물적자원과 인적자원을 잃을 수 있었던 것은, 역으로 그 정도로 자원이 풍부했기 때문. 유럽이 도시인구의 4분의 1, 농촌인구의 40% 이상을 잃은 이 엄청난 재앙을 겪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전에 사회 전 분야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던 덕분.
- 30년 전쟁의 끄트머리에 자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커지자 결국 유럽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백기를 들고 평화조약을 체결. 오랫동안 방관하며 체력을 비축해 두었던 두 나라(프랑스, 스페인)만이 평화조약을 체결한 뒤로도 10년을 더 싸움. 모든 나라가 전쟁으로 탈진하자 일시적 세력균형이 찾아옴. 그 결과 처음으로 여러 독립국으로 이루어진 유럽이 가능해짐. 이런 정치적 균형은 종교적 대립마저 약화시켰다. 3대 종교(카톨릭, 루터파, 칼뱅파)의 영향권도 확정됨. 이제 유럽에서 종교는 더 이상 전쟁의 불씨가 되지 못했다. 30년 전쟁은 이후 오랫동안 유럽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별도의 전장보다는 마을과 도시가 주된 전쟁터가 되었기에 더욱 그랬다. 30년 동안 독일의 인구는 1600만에서 1100만으로 감소. 대부분이 기아와 전염병으로 죽었지만 광폭해진 군인들의 잔혹한 만행에 희생된 사람도 많았다. 30년 전쟁은 오랜 전쟁기간과 잔혹함, 이후에 미친 영향 등에서 인간의 극한 체엄이었고, 여러 세대를 넘어서까지 흔적을 남겼다. 더구나 종교전쟁이었기에 수많은 사람드르이 신에 대한 믿음을 철저하게 뒤흔들어 놓았다.
- 조미니와 클라우제비츠 둘 다 나폴레옹의 전쟁방법을 전쟁론의 원칙으로 삼았지만 조미니는 전술, 즉 개별전투에 더 비중을 두었다. 전술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요인이라 보았다. 반면에 클라우제비츠는 전략, 즉 지도 위에서 짜는 장기계획을 더 선호. 물론 두 사람은 전략과 전술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로써 현대 전쟁론의 가장 중요한 두 개념, 전술과 전략이 등장. 전술을 전장에서 싸우는 기술, 병력을 장소와 계절조건에 따라 최적으로 배치하는 기술.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올바른 전술은 전장에서 벌어지는 살육이 질서정연하고 효과적이도록 만들어야 함. 전략은 전장 자체를 굽어보면서 전쟁을 전체적으로 계획하고 전쟁의 목표에 맞게 전투를 활용하는 기술임. 여기에 세번째로 병참학, 즉 군수품 보급조직이 추가됨. 병참을 잘 운영해야 전략과 전술을 제대로 실행할 수 있음.
-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전술의 문제점을 거의 다루지 않았던 반면 조미니는 주로 전술에 관한 원칙과 사상을 발전시켰음. 조미니의 이론이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에 비해 주목을 덜 받은 이유가 그 때문인지 모름. 현대전에서 전략이 전술보다 중요함. 전술은 개별전투의 승패에 영향을 미치지만 몇 년에 걸쳐 넒은 공간에서 치르는 전쟁 전체를 이기려면 치밀하고 유연한 전략이 필요한 법
- 근본적으로 클라우제비츠는 모든 전쟁이 사회활동이라고 단언했음. 전쟁이 사회 상황의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 혁명적 사회의 군대는 군주제 사회의 군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쟁을 하며, 민주주의 사회의 전쟁방식은 독재사회와는 다름. 그러므로 전쟁의 형태는 전쟁을 하는 사회의 정부형태에 좌우됨. 이로써 전쟁의 주체는 백성이 아니라 국가, 더 정확히 말해서 정부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된 셈. 전쟁은 국가에 의해, 국가를 위해, 국가에 맞서 실행되는 조직화된 폭력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폭력이 존재하지만 그 대부분은 전쟁이라 불리지 않는다
-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수행하는 일반적 원칙을 거론하면서 이렇게 말함.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첫번째 원칙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우리가 가진 힘을 모조리 쏟아붇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절제한다면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성공의 가능성이 분명치 않다 해서 노력을 다하지 않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짓이다. 그러한 최선의 노력이 결코 불이익을 안겨 줄 리는 없기 때문이다. ... 그로 인해 나라가 심한 압박을 받는 다 해도 불이익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압박은 금세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승리에 도움만 된다면 적국에 대한 온갖 만행도 정당화될 수 있다. 히틀러 시대의 독일이 유럽에서 일으킨 전쟁은 바로 이런 클라우제비츠의 원칙을 따랐다.
- 이슬람과 유럽의 식민정책은 지금까지도 아프리카에 심각한 상처로 남아 있음. 1250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노예사냥으로 사라진 사람은 4000만이 넘는다. 이처럼 초기 이슬람의 식민정책(7-8세기)와 유럽의 식민정책(16세기)은 아프리카의 농예화를 낳았지만, 19세기 유럽의 후기 식민정책은 노예제도를 종식시킴. 특히 교회의 지배계급과 달리 노예제도를 비기독교적이라고 비판했던 유럽의 소수 기독교인들이 큰 공을 세움. 유럽 열강들은 자기들끼리 아프리카를 분할한 뒤 짧은 기간 안에 노예무역을 금지. 그 이유는 식민지의 경제적 수탈(커피, 카카오, 차, 지하자원 등)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서였다.
-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과 아랍의 갈등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도 일부는 식민정책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 1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만 해도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고 따라서 터키의 식민지였다.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면서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지만 이 시기만 해도 유대인과 아랍인의 관계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음. 1차대전 중에는 유대-아랍 여단이 오스만제국에 맞서 함께 싸웠고, 50년대 초만 해도 이스라엘에는 유대인과 아랍인이 함께 사는 키부츠가 있었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하다는 것은 역사가 입증하는 사실임
- 1918년의 패배는 독일인의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고, 베르사유 평화 조약의 치욕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듬. 그랬기에 그들은 베르사유 조약을 거부했고, 1차대전의 결과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독일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복수심이 불타고 있었다. 바로 이런 잠재적 복수심을 히틀러는 교묘하게 이용. 복수심을 자극하며 베르사유의 치욕을 갚아주겠노라고 약속. 독일국민은 고무되었고 히틀러를 믿었다. 그가 짧은 시간안에(나치의 박해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생계가 어려워진 사람들을 제외하면) 다수 국민의 생활여건을 개선해주었기 때문. 특히 1차대전 이후 대량실업과 극심한 빈곤 등 재앙 수준에 이른 열악한 경제상황은 사회적 아버지인 지도자를 향한 강렬한 욕구를 일깨움. 황제의 자리를 대신하여 국가의 정상에 서 줄 강력한 인물을 갈망했고, 히틀러는 급진적이고 무자비한 행동, 과거의 영화와 존경을 되돌려 주겠다는 약속으로 독일 국민들의 이상을 충족시켜 줌.
- "독일의 본질이 세상을 치유한다"는 이미 독일 제국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온 독일의 사명을 히틀러가 다시 일깨움. 프랑스에 대한 복수심과 전 세계, 특히 동유럽 국민들과 비교되는 인종적, 문화적 우월감 등 기존의 편견에도 다시 불을 지폈다. 독일인들은 동유럽 주민들은 야만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추방을 해도, 노예로 삼아도 마땅한 민족으로 취급. 많은 수의 독일국민이 그러한 민족주의적 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 사회에 만연한 그 사상을 그저 급진시켰을 뿐이다. 지배민족은 하류인간들이 점거하고 있는 생활공간을 차지할 권한이 있기에 독일은 동유럽에 식민지 제국을 건설할 세계사적 사명을 안고 있다! 히틀러는 수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숨어 잇는 망상을 자극하며 쉼 없이 떠들어 댔다. 독일 대중은 독일제국의 광신적 이데올로기를 통해 이미 히틀러의 망상을 준비해 왔던 것이다
- 왜 전세계는 범죄국가 나치 독일에 그렇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을까? 장기적으로 볼 때 의기소침하여 골골거리는 독일보다는 군사력으로 당당히 프랑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일이 세계 평화를 위해 더 바람직하다고 믿었기 때문. 프랑스의 군사력을 넘어서지만 않는다면 독일이 무장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동등한 군사력 따위는 애당초 히틀러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초기에 세계의 눈이 무서워 그런 척했을 뿐이다. 프랑스와 세력균형에 도달했어도 독일은 엑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떼지 않고 계속 달려갔다.
- 45년 이후 전쟁에 가장 많이 참전한 나라의 순위를 살펴보면 놀랍게도 영국이 1순위를 차지. 이는 영국이 거대한 식민지를 거느렸고, 식민지 해체가 전쟁을 동반했기 때문. 지난 40년 동안만 살펴보면 미국이 단연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난한 지역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자신의 세력권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느껴짐.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강조해야겠다. 전쟁은 천연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땅에서만 자라는 열매라는 사실을. 따라서 세계의 영원한 화약고는 대부분 값진 천연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된 지역이다. 서아시아가 그렇고 아프리카의 자원이 풍부한 나라들이 그렇고, 특히 카스피해 주변지역이 그렇다. 인종간 민족간 경제적 이해관계가 엄청난 폭발력의 화합물을 만든다. 이 화합물의 폭발력을 더욱 키우는 것은 서구 산업국가들(최근에는 중국까지도)의 생활방식이 온통 석유에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 예컨대 미국은 엄청난 수의 자동차들에 연료를 공급하자면 사우디 같은 독재 산유국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음. 두 차례에 걸친 이라크 전쟁 역시 진짜 이유는 미국과 유럽으로 석유를 자유롭게 수송하자는 목적이었다. 미정부는 모든 유전의 최대한 착취 정책을 옹호. 특히 서아시아 유전들이 목표다. 그러면서도 자원절약이나 대체 에너지 개발에는 큰 관심이 없음. 어쩔 수 없이 석유와 폭력의 위험한 관계가 발생하고, 이는 앞으로 점점 더 첨예한 대립을 낳을 것이다. 재생이 불가능한 천연석유는 서서히 바닥을 드러낼 것이고, 그에 반해 수요는 천정부지로 치솟을 테니 말이다.
- 그럼에도 천연자원과 산업국가들의 이해관계만으로 45년 이후에 발발한 모든 전쟁을 설명할 수는 없음. 또 다른 이유는 서구의 부자나라들이 제3세계에 현대화의 압력을 행사하고 급진적 변혁을 강조하기 때문. 서구는 상품을 수출하느 데 그치지 않고 제3세계에 자신들의 경제형태, 사회질서, 가치관, 이상을 강요. 그로 인해 적지 않은 수의 제3세계 국가들이 붕괴 위험에 처해 있음. 특히 낡은 것은 이미 파괴되었지만 새로운 것이 아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서구식 개혁과 전통의 마찰이 극심한 지역에서 내전이 자주 발발. 물론 이런 상황이 자동적으로 전쟁을 점화하는 건 아님. 평화를 유지하는 가난한 나라들도 많다. 그러므로 상황이 위태로워지려면 인종갈등이나 종교갈등 같은 뭔가 다른 것이 추가되어야 함. 그래야 상황이 위기로 치달아 갑자기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그 전쟁이 인종학살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의 원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환경, 더 정확하게 말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는 환경조건도 전쟁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함. 예를 들어 물 부족이 심각한 경우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 특히 강 상류 국가가 많은 양의 물을 채수하거나 강물을 오염시키면 하류 국가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고, 결국 갈등이 초래됨. 유프라테스강(터키,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강(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 팔레스타인), 나일강(에티오피아, 수단, 이집트) 연안은 물론 과거 소련 연방국이었던 중앙아시아 몇 개국에서 향후 이런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음. 기후 역시 급속도로 악화될 조짐이 강하고, 이런 기후변화 또한 전쟁의 원인이 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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