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지구 역사상 환상을 믿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들은 상상력을 통해 수십억의 집단지성을 이룩할 수 있었다. 다른 동물집단은 일정 숫자가 넘어가면 서로를 신뢰하고 협력하기 어려움. 한 개체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숫자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동물 무리와 달랐다. 그들은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강력한 이야기의 토대만 있다면 수백만 명이 넘어가도 똘똘 뭉칠 수 있었다. 그 시작은 단연 신화이자 종교였으며 국가와 사상, 철학과 문화로 발전했다. 모든 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였다. 시끄럽고, 거짓말 잘하며, 이야기를 부풀리는 동물, 즐거운 환상의 토대 위에서 살아가는 동물, 그들은 천생 이야기꾼이었다
- 그들은 연금술사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쇠를 자유롭게 붙이고 모양을 만드는 능력이 당시로서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모습이었다. 실제로 대장장이가 만드는 말편자의 경우, 오늘날의 부적처럼 행운을 가져다주고 악마를 쫓는다고 믿었다. 그를 보면 당시 대장장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주술사나 마법사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연금술의 대가는 혹독했다. 그들은 중금속 중독에 걸려 각종 질병을 몸에 달고 살았다. 특히 비소는 신경마비, 색소침착, 탈모 등의 부작용을 일으켰고, 심할 경우 통증, 구토, 하혈과 함께 사망에 이르는 위험한 물질임. 대장장이이자 불의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괴팍한 성격에 절름발이, 두꺼운 목, 흉측한 얼굴로 그려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 조선시대 왕의 업무는 처리하는 직무가 만 가지나 된다고 하여 만기라고 불림. 4시에 일어나 늦은 밤 11시 취침까지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16시간을 노동한 셈.
- 인간은 광물을 언제부터 캐냈을까? 그 서사는 꽤나 오래전으로 4만 3천년 전에도 광산은 존재했음. 구석기인들은 아프리카에 있는 가장 오래된 강산 라이언 케이브에서 적철광을 캐냈으며, 네안데르탈인은 헝가리에서 부싯돌을 캐냈고, 고대 이집트인들 또한 시나이 반도에서 터키옥을 채굴한 흔적이 있다. 인간은 땅속에서 무언가를 캐내 무기나 도구를 만들고, 유용한 에너지로 썼으며, 금으로 장식을 만들어 목에 걸었다.
- 숫자의 탄생은 7천년전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 이들은 나일강 범람으로 인해 매번 토지의 구분선이 사라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하학을 발전시킴. 또한 숫자는 곡식을 저장하고, 재산을 측정하고, 갚아야 할 빚을 계산하기 위해 필수적이었음. 놀라운 것은 이 숫자가 인간에게 엄청난 힘을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건축술이었음. 피라미드 또한 치밀한 수학을 바탕으로 지어진 정교한 건축물이었으며, 기원전 3천년 경 고대 인더스 문명에서는 자와 컴퍼스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도시를 설계. 이 때문에 이들 땅에는 직각의 도로와 원기둥, 직육면체와 같은 건물이 등장할 수 있었음. 그래서인지 현대 수학의 근본을 탄생시킨 고대 그리스에서 수는 종교적 성향을 띄었음. 실제로 피타고라스 학파는 1부터 10까지의 수를 숭배하기도 했음
- 사실 처음 신대륙을 발견한 건 우리가 흔히 아는 콜럼버스가 아님. 오히려 그는 모험가나 발견자라기보다 침략자에 가까웠음. 그의 항해 일지에는 금과 보물에 관헌 언급이 수백 차례나 등장. 그 스스로도 엄청난 수의 노예를 원했음. 그는 1억명 이상의 원주민 학살의 시초이자, 노예무역의 대표주자였다. 신대륙의 발견은 기원전 1200년경에서 900년경에 살았던 페니키아인을 살펴봐야 한다. 페니키아 문명은 최초의 갤리선을 사용했으며, 지중해를 가로질러 해상무역을 시도. 고대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당시 페니키아인의 이야기를 듣고 정오의 해가 오른편에 떠 있었다니 믿기 어렵다고 기록했고, 그의 기록은 오늘날 그들이 아프리카를 일주했다는 근거가 됨. 적도 남쪽으로 들어서면 한낮의 해가 북쪽과 오른쪽에 위치하기 때문. 페니키아인들은 일명 침묵의 거래를 했다. 원주민이 상품을 갖다 놓으면, 그에 걸맞는 금을 놓고 가는 방식이었다.
- 인류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일했을까? 그것은 행복이나 자아실현, 위대한 목적의식 같은 게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초창기의 원시인처럼 여전히 생존을 위해 살아갔음. 근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90%의 사람들은 땀 흘리던 농부였고, 이후에도 공장 노동자나 단순 서비스 직종에 종사. 현재에도 한국 직장인 60.7%가 생계유지를 위해 일한다고 하니, 과거 신분제나 계급사회, 걸핏하면 목숨이 날아가던 시절에는 거의 모두가 생존을 위해 일했다고 봐야 한다. 지구를 살다 간 대부분의 인간이 하고 싶은 일보다는, 그저 살아가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것은 꽤나 슬픈일이다.
- 고대부터 중세가지 대부분 국가들의 회계는 매우 형편없었음. 과거에는 국왕의 개인지출이나 소득은 비밀리에 부쳐졌고, 이를 조사하거나 검문하지 않았음. 오히려 모두 쉬쉬하는 분위기.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로마 부실장부를 비판했다고 머리와 손이 잘려 광장에 전시됐으며, 루이 14세는 죽기 직전에 과도한 지출로 프랑스를 파산시켰음을 시인. 회계가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이탈리아. 그들은 매우 부유했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새로운 회계기술이 필요했음. 그때 등장한 것이 복식부기였는데, 이는 단순히 수입과 지출만을 계산하는 게 아닌, 자산과 부채라는 개념을 포함해 돈을 관리하는 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인류는 사업의 총이익을 투자자들에게 분배하는 데 효과적인 계산을 할 수 있게 됨. 인간은 회계를 통해 더욱 효율적인 경영을 할 수 있게 됨. 올바르고 뛰어난 기업, 투명하고 튼튼한 국가는 바로 이 회계에서 시작됨
- 사실 16세기까지만 해도 외로움은 잘 쓰이지 않는 개념이었다. 1674년 존 레이가 '흔히 쓰이지 않는 용어'에서 처음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정의했는데, '이웃헤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나 장소'를 의미. 과거에는 지금보다 훨씬 강한 집단의식, 공동체 속에 살았기에 좀처럼 외로움이란 감정이 자리잡지 못했을 것임. 하지만 16세기 르네상스 이후 개인주의가 들어서면서 외로움이 급부상.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자녀를 거부하는 딩크족에서 결혼을 거부하고 혼자 살아가는 나홀로족까지. 오늘날 우리가 개개인으로 분리될 수록 외로움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외로움이 깊어지는 동안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바 형태의 술집이 처음 생김. 당시에는 위스키나 브랜디 같은 독주가 성행했는데, 이는 노동자들이 빠르게 일터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 이에 용이한 것이 바였다. 산업 노동자들은 그 속에서 10분 남짓한 시간 안에 독한 술을 입에 털어 넣고 급히 돌아갔다.
- 스포츠는 disport와 라틴어 deporto에서 유래. 이것을 해석하면 '지루한 일상을 떠나보내고, 신나게 논다'는 의미. 인간은 오래전부터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체조가, 이집트에서는 전차경주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창던지기가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9세기 고대 그리스는 권투, 레슬링, 원반던지기, 종합격투기의 근원인 판크라티온을 포함해 주기적으로 올림피아 제전을 열었고, 이런 정신을 계승하여 최초의 올림픽이 개최됨
- 상담은 아주 오래전 종교로부터 시작. 성직자들은 사람들의 고민을 종교라는 테두리안에서 상담해줌. 그들은 마음 속 짐을 덜어주고, 평온함을 안겨주었다. 오늘날 상담치료가 발달한 계기는 슬프게도 1,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였음. 전쟁은 많은 군인과 그 가족들에게 처참한 고통을 안겨주었고, 이는 우울증, 발작, 공황장애 등 정신질환을 일으킴. 이들에게는 정신적 치료가 절실히 필요했고, 사람들 통해 치유되어야만 했다. 2차 대전 이전에 일어난 경제 대공황 또한 효율적인 직무상담이 크게 발전한 계기가 됨. 당대의 파슨스나 로저스는 "인간은 모두 자아실현 욕구가 있다"고 말하며, 새로운 상담이론을 제시. 절망적 상황에서 상담은 빛을 발했다. 위기가 왔을 때 한 인간이 한 인간을 돕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는 지금도 정신병을 앓고 있다. 범죄, 테러, 전쟁으로 죽는 사람보다 자살로 죽는 사람이 훨씬 많다. WHO에 따르면 39초당 1명 꼴로 자살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오늘날 상담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단적으로 보여줌
- 원시시대 결혼은 분업과 협력의 성격이 강했음. 원시인들은 생존을 위해 부족 간 협력을 원했다. 그 과정에서 결혼은 효과적 수단이 되었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인간의 유년기는 무척 길었고, 책임감 있게 지켜 줄 가족이 필요했다. 그들은 결혼을 통해 번식했고 생존력을 강화했다. 가족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러나 전략적 분업으로서의 결혼은 시간이 지나 그 본질을 잃어갔다. 1만년 전 시작된 농업사회는 사유재산과 계급을 탄생시킴. 상류계층은 그 지위를 유지할 방법으로 정략결호을 선택. 결혼이 권력과 부의 상속수단이 된 셈. 그 과정에서 개인의 뜻은 묵살됐다. 15세기 중반까지 결혼에 관한 한 여성은 속박의 대상이었고, 토지가 없는 이들에게도 결혼은 소원한 일이었다. 영혼의 동반이라는 의미로 부상되기 시작한 것은 약 2세기 전으로, 그 역사가 길지 않음. 하지만 기대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영원이라는 수사는 빠지게 될지도 모름. 110년 동안의 결혼새활이 타당할까? 세계적으로 황혼이혼이 대두되고,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며, 그 빈자리에는 동거라는 대안이 자리잡고 있다. 결혼이 사라지기는 힘들겠지만 연속 결혼, 즉 끝을 정해 놓은 계약결혼이 보편화될지도 모르는 일. 더 나아가 서로의 자유를 허락하는 새로운 종류의 결혼이 등장할지도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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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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