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 일본에서 서구 과학기술은 오로지 군사기술 측면에서 습득되기 시작했음. 의사의 난학이 무사의 양학으로 대체됐다지만 양학은 당시에 병학이었던 셈. 주된 학습목적은 어디까지나 기술, 즉 군사기술에 있었고, 과학은 기술습득에 필요한 범위내에서 학습됐다. 해군 전습소에서는 수학과 물리학을 가리치긴 했지만, 수학과 물리학 자체를 중시해서가 아니라 조선기술과 항해술 습득을 위한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근대 서구문명의 우월성을 사회사사과 정치사상이 아닌 과학을 통해 인식했다. 그 과학은 증기로 움직이며 강력한 대포를 갖춘 군함, 다시 말해 군사기술로 구체화됐던 것이다.
- 본래 대학 아카데미즘의 학문은 언어의 학문이자 논증의 학문이고, 고대 문헌의 열독과 풀이로 일관했다. 중세말 영국과 프랑스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을 때도, 이론의 정밀함만이 문제시됐을 뿐 실험으로 검증하려던 이는 없었다. 의료 행위와 연결되는 의학세계에서조차 수술과 약의 조합처럼 손을 더럽히는 일은 직무교육을 대학 밖에서 받는 등 직인 취급을 받던 외과의와 약제사에게 맡겨짐. 아카데미즘 세계에서는 직인도 그 기술도 천시됐던 것이다. 서구 중세에서 문자문화는 오로지 라틴어로 표기됐고, 아카데미즘 학자와 교회 성직자들이 독점했다. 그러나 16세기 들어 인쇄 서적 출현과 종교개혁 영향으로 속어의 국어와 움직임과 함께 성직자와 대학 지식인의 문자문하 독점에 구멍이 뚫렸고, 직인들이 자신의 경험을 속어 서적으로 표현하기 시작. 이는 16세기 문화혁명이라고 할 지적세계의 지각변동이었다. 이런 변동에 호응해 아카데미즘 내부에서도 수작업을 꺼려하지 않고, 실험장치를 조립해 관찰과 측정을 중시하는 새로운 유형의 학자들이 등장. 갈릴레오나 토리첼리, 훅이나 보일 등으로, 이들에 의해 관측과 실험에 근거한 실증과학이 등장. 이것이 17세기 과학혁명이다
- 일본의 근대화는 산업근대화, 공업화인 동시에 군의 근대화, 서구화였다. 보통은 산업근대화가 일본의 자본주의화로 인식되고 있지만, 군의 근대화가 일본 자본주의화에서 수행한 역할은 막대함. "당시 일본 기술전반의 발전에서 정부의 군사공업은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입장에 있었다."(호시노) 군의 무기 자급화 욕구와 군사목적으로 시작한 조선업이야말로 메이지 시대 중공업, 기계공업, 화학공업 발전의 커다란 추진력이었음. 군과 산업의 근대화가 동시에 병행해 위로부터 추진된 것이 일본 자본주의화의 특징. 군의 무기자급욕구가 이윽고 이를 위한 자원을 추구하며 아시아 침략으로 일본을 몰아가게 된다.
- 사농공상 신분이 고정된 봉건사회에서 지배층인 무사가 피지배층의 직업으로 간주돼온 공업의 담당자가 되는 것이 일본 공업화의 특징 중 하나다. 일본에서 직인은 그 지위가 변함없었던 반면 무사가 공업화 기수로 등장했다
- 서구 특히 영국 기술자가 시민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직인층 내부에서 기술혁신의 주체로 등장한 것과는 달리 일본은 지배계급 출신의 기술관료가 시민사회 탄생이전에 국가교육을 받고 갑자기 공업화 주체로 등장했던 것이다.일본 과학기술 요람기의 이런 특징 때문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학 공학부에서 강론된 전문의 지에 과대한 권위가 부여되고 있음. 동시에 과학기술의 주체, 특히 상급 기술자들은 엘리트 의식과잉과 배타적 성격, 한편으로는 관료적이고 조직이나 국가에 대해서는 순종하는 특성을 갖게 됨. 실제로도 이미 메이지 중기에 "대학 밖에서는 대학을 졸업한 학사 기술자와 종래 직인 간에 알력이 생기고 있었다. ... 공학사는 실업을 낮춰보고 현장 직인과 거리가 생겼다. ... 제국대학 출신자가 이미 관의 권위를 얻어 민을 지배하는 구조가 성립했다"고 한다. 사족에 의해 관료기구가 형성된 메이지에는 에도시대 무사의 농민, 조닌에 대한 차별의식이 민간인에 대한 관리의 차별의식으로 그대로 이동했다. 공부대학교와 제국대학 공과대학에서 교육받은 엘리트 기술자가 재래직인에 대한 우월감과 차별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 증기와 전기 사용이라는 에너지 혁명이 서구에서 일어난 시점부터 메이지유신까지는 기껏해야 반세기로 간신히 추격이 가능한 시간차였다. 오히려 일본은 후발국인만큼 증기기관을 예로 들면 세이버리아 뉴커먼의 대기압 기관에서 시작해 와트에 의한 개량, 19세기의 전반의 증기기관차와 증기선 같은 다방면 응용에 이르는, 1세기를 넘는 영국의 모색과 시행과정을 건너뛰었다. 즉 결말부터 습득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런 의미에서 유리한 지점에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는 "선진국에서 기계수출으 제한은 없었고, 일본은... 모든 선진국으로부터 최신기계를 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었다"는 사정도 있었다. 한술 더 떠 "선진국은 완성된 기계기술을 일본에 판매하는 것에 열심"이었을 정도였다. 결정적인 차이 혹은 늦었던 것은 민간의 자본축적이 너무 빈약했다는 점. 이 때문에 일본의 근대화는 당장은 거의 100% 정치권력 주도로 추진됐고, 군과 관료기구가 커다란 영향력을 갖게 됨. 특히 메이지 정부의 전신과 철도에 대한 움직임은 공부성의 전신인 민부성이 이미 1869년 계획을 세웠을 정도로 신속했다.
- 일본 메이지 시대 기계공업 발전은 군의 근대화가 이끌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수입된 최신예 플랜트의 저변에 재래의 의욕적인 직인들이 수입된 기계를 모델로 인력이나 수력구동, 목재 내지 일부 금속제의 비교적 저렴하고 재래 직인이 사용하기 좋은 양화절충의 기계, 또는 비교적 단순하고 소형화된 모방품을 만들어낸 데 있다. 또 이런 국산기계제조 혹은 수입기계부품제조에 종사하는 중소기업이 지방도시에 속속 생겨난 것에 의해 달성됨
- 프랑스 전기조명의 보급을 묘사한 '전기의 힘과 파리'의 서문에슨 '본서를 통해 전기가 승리를 거두는 데는 오랜시간이 필요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가스조명과의 오랜 싸움도 있었다. 조명의 혁명에는 석유, 아세틸렌, 합성양초도 가세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프랑스에서 백열전등이 정착한 것은 20세기 초엽이다.'라고 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가스등이 충분히 보급되지 않았던 것은 전등보급에는 행운이었다. 어쨌거나 일본의 산업혁명은 서구에 크게 뒤처진 상태로 시작됐으나, 에너지 혁명은 그다지 뒤지지 않고 달성됐다고 할 수 있다.
- 자본론에는 '기계장치가 근력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한에서는 그것은 근력이 없는 노동자, 또는 육체발달이 미숙하되 사지 유연성이 풍부한 노동자를 사용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그러므로 부인노동가 아동노동은 기계장치의 자본주의적 사용의 표현이었다'라고 되어 있지만 말 그대로의 상황이 메이지 일본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 자본론의 내용을 넘어서는 것조차 있다. 다이쇼 시대 호소이 와키조는 '여공애사'에서 '대체로 방적공장 정도로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는 곳은 없다'면서 특히 여성과 어린아이의 12시간 교대 심야노동에 대해 '이것은 어디까지나 근대 공업의 소산이고, 게다가 일본이 그 창시자인 것은 변명할 말이 없다'고 했다. 생산시설의 가동률을 올리기 위한 주야 2교대제는 산업혁명기 영국에도 없던 일. '일본 면사 경쟁력의 기본적 조건은 한마디로 아시아적 저임금과 서양의 최첨단 기술의 결합에 있다' 이렇게 해서 1897년에는 일본의 면사 수출량이 수입량을 넘어서게됨
- 경제학 서적에는 '일본 산업의 극히 빠른 근대화는 식산흥업정책의 성과라고 해도 좋다. 그것은 세계사에서 거의 예를 찾을 수 없는 성공이었다고 해도 좋고, 그 때문에 종종 기적이라 불릴 정도의 것이었다'고 돼 있다. 일본의 급속한 자본주의화의 성공과 기적은 개국과 근대 과학기술 습득 개시의 적시성, 국가의 강력한 지도와 진취적 경영자의 출현, 에도시대 이래 민중의 높은 문자해독률, 능력도 의욕도 있던 사족의 자제가 능력을 발휘하도록 한 효과적인 교육제도의 형성, 재래직인층 내부 풀뿌리 발명가의 탄생 등을 원인으로 열거할 수 있음. 하지만 농촌 노동력의 가혹한 수탈과 농촌 공동체의 무참한 파괴도 불가결의 요인이 됐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후쿠자와는 이 시점에서 중국, 조선의 근대화가 가망없다고 단념한 것. 이런 자타에 대한 현상 인식에서 나온 결론이 '탈아입구'였다.
오늘날 궁리해보니 우리나라는 이웃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여유가 없다. 오히려 이 대열에서 벗어나 서구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하고 중국, 조선을 대하는 방식도 이웃나라라고 특별히 대할 것 없이 바로 서양인들이 그들을 대하는 식에 따라 처분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메이지 중기 일본에서 열강주의 내셔널리즘이 태동. 일본은 1894-95년의 청일전쟁을 거쳐 1890년대 본격화된 세계분할 경쟁에 최후 멤버로 끼어들게 됐다.
- 1차대전은 최초의 과학전으로 불림. 첫째 당시 최첨단 고도 과학기술이 전면적으로 전쟁에 사용됐다는 점, 둘째 과학자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 때문이다. 둘째 이유와 관련해 과학과 기술이 본래는 별개이던 서구에서는 학자란 속세와 동떨어져 공상적인 일에 몰두할 뿐 실제에는 대체로 도움이 안되는 집단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서구에서 과학자에 대한 평가를 180도 바꾼 것이 전쟁이었다. 독일에서는 암모니아 합성법을 개발한 프리츠 하버와 후일 핵분열 반응을 발견하는 오토 한 등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일류 화학자들이 모두 독가스 연구에 종사했음. 영국에서도 조셉 존 톰슨과 어니스트 러더퍼드 같은 초일류 물리학자들이 무선전신과 잠수함 탐지 등 군사연구에 종사하며 모두 유능함을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그뿐 아니다. 전쟁 직전까지 서구 각국의 자연과학자들 사이에서는 국제협력이 이뤄졌다. 외국 대학에서 공부하고 외국교수의 지도로 학위를 취득했다. 외국의 연구자와 공동연구하는 것은 당연하고, 연구자들의 국제회의도 종종 열림. 국적을 초월한 과학자공화국 일원으로 연구에 종사하는 듯 행동했다. 그러나 개전과 동시에 아인슈타인 같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일제히 애국자가 돼 자국의 전쟁에 솔선해 협력했던 것이다. 서구 각국은 이로써 과학자가 전쟁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알게 됐고, 이에 따라 국가에 의한 과학동원, 즉 국가에 의한 과학자의 과학기술 연구동원 정책이 생김. 그러나 일본에서는 막말 이래 과학은 군사에 편중된 과학기술의 부속물로 간주됐고, 메이지 시대에 이미 군학 협동이 시작된 만큼 과학자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은 특별히 새로운 발견이라곤 할 수 없다.
- 총력전 체제는 연구활동과 생산활동, 경제조직에 대해 능률화와 이를 위한 합리화를 요구했던 것이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총력전에서는 국민을 인적자원으로 간주해 물적자원과 같은 차원으로 취급하면서 효율적인 배치와 활용을 지향한 만큼 사회 전체의 합리적 재편성도 필요로 했다. 야마노우치 야스시가 말한 것처럼 '총력전 체제는 ... 전 인민을 국민공동체의 운명적 일체성이라는 슬로건 하에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 그것은 인적자원의 전면적 동원을 위해 실시한 개혁이 사회혁명이 되어 여러가지 제도의 합리화를 촉진했던 것이다.
- 전쟁이 끝나고 모두가 미국의 물량과 과학기술에 패배했다고 납득하면 할수록 중국에 패했다는 의식은 희박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메이지 이래 서구에 배우는 자세가 패전으로 다시 강화됐지만 아시아에 배운다거나,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을 제국에 강제로 편입시킨 것에 대한 책임의 엄중함을 생각하는 기술자는 적었다. 이렇게 해서 유일 피폭국이라는 전후 일본의 상투적 언사가 등장. 이는 아시아 각국을 침략한 가해자임을 지우고 은폐하는 것이다.
- 중앙집권적 행정 시스템을 가진 관료기구의 지도에 의해 추진된 전후부흥, 관료기구와 산업계와 대학의 협동에 의한 60년대 경제성장은 전후판 총력전이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국내조건으로
첫째, 20년대 시작돼 전시에 급속히 추진된 중화학공업이 전후 생산의 기조가 됨. 중화학공업에서는 잔존한 생산설비가 37년 당시보다 많았다.
둘째, 전시하 과학동원과 이공계 붐으로 급팽창한 군사부문에서 성장, 축적된 기술과 기술자층의 존재다. 전시에 군 연구기관과 군수산업에 편입돼 군사연구에 종사했던 유능한 기술자, 특히 정밀가공과 고급소재기술 등의 전문가가 기술개발에 큰 힘을 발휘했다. 전쟁 수행을 위해 창설된 도쿄대 제2공학부에서 육성된 기술자도 전후 고도성장을 떠받친 주역이 됐다. 실제로 전시 레이더 개발이 전후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를 기초로 한 전기통신분야 발전의 기초가 된 점은 잘 알려져 있음. 전기산업에서 도시바, 히타치, 마쓰시타는 모두 전시 군수생산으로 크게 성장한 기업이다. 전후 생겨난 기업으로 소니가 알려져 있지만 소니도 모체는 거의 대부분 해군기술 연구소 인맥이다. 자동차산업도 도요타, 닛산, 이스즈는 앞서 기술한 자동자제조사업법의 혜택을 입었고, 쇼와 10년대 정부보호하에 생겨난 기업. 더욱이 미군 점령하에서 항공기 생산이 완전히 금지됨에 따라 전시하에서 군용기 개발과 생산에 종사했던 미쓰비시 중공업 이외 군용기 업체와 군연구소 기술자들 다수가 자동차산업으로 옮긴 것으로 알려짐. 전후 국산 승용차 개발에 전전, 전시 항공기산업의 기술적 축적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군 기술자는 국철과 철도연구소에도 대거 자리를 잡았고, 이것이 철도기술 발전을 가져왔다. 일본 고도성장을 대표하는 기술 중 하나가 신칸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신기술의 집대성인 신칸센 개발에서 육해군, 항공 기술자의 활약이 돋보였던 것이다. 세번째, 전전부터 교육수준이 높았던 노동자층과 전후의 급속한 인구증가를 들 수 있다. 노동력과 함께 국내시장이 확충됨에 따라 공장건설, 생산확대는 물론 제품 판매를 국내에서 소화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국내적 조건만이 전후 부흥과 고도성장을 가능케 한 것은 아니다. 당시의 국제환경도 그만큼 중요했다. 전후 경제성장의 외적조건으로는 미 점령군이 배상보류내지 연기조치를 취한 것, IMF/GAAT 체제하의 국제교역 확대흐름. 석유수출국기구의 원유가격 대폭 인상에 따른 1차 오일쇼크 이전까지 석유값이 매우 저렴했던 점을 꼽을 수 있음. 그와 함께 혹은 그 이상으로, 다음 사실이 중요. 50년대 일본 본토가 부흥에 전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키나와가 미 군정에 편입되면서 섬 전체가 군사기지가 됐고, 한국에서 미군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군사정권이 존재하고 있었던 데 있다. 미 점령군이 일본을 비군사화, 민주화한 것은 성공한 점령의 흔치 않은 예로 종종 거론되곤 하지만, 이는 오키나와와 한국에서 미군 또는 독재정권에 의한 가혹하고 비민주적인 군정지배에 의해 뒷받침된 것이다.
- 한국전쟁 특수야 말로 일본 경제가 신속히 회복할 수 있었던 최대 요인. 특수는 네이팜탄과 로켓포, 박격포, 바주카포를 포함한 포탄류, 권총/소총/기관총과 탄약 등 무기류, 군용 트럭과 자동차 부품, 석탄과 마대, 군복과 모포 등 물자, 전차와 무선장치 등의 수리와 기지건설에 이름. 미군 특수에 의한 트럭발주가 하늘의 은혜가 돼 도요타, 닛산, 이스즈 3사를 소생시킴. 50년부터 5년간 특수로 일본에는 30억불이 유입됐고, 기업은 이로써 생긴 이익을 낡은 설비의 갱신과 최신기술 도입에 돌리면서 이후의 발전, 60년대 고도성장의 기초를 쌓음. 고도성장이 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자동차, 철강, TV 수출의 호조세와 함께 65년 본격화된 베트남전쟁 특수에 힘입은 바 크다. 조선과 베트남 인민들을 살육하기 위한 많은 무기가 평화헌법이 지배하는 일본에서 제작됨. 이렇게 해서 일본은 부흥을 달성하고 경이적이라 평가받은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일본은 다시 아시아 인민들을 발판으로 대국으로 향한 길을 걸어간 것.
-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시바에는 방위장비 부분이 있어 지대공미사일을 개발, 제조. 한편으로 원자로는 발전장비이자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 제조장치이기도 함. 두가지 기술을 보유한 도시바는 핵미사일을 만들 수 있는 회사다. 이런 양면성은 종합전기업체에 공통되는 특성. 도시바는 이 밖에 방위성에 레이더 시스템도 납품하고, 매년 방위성에서 500억엔 전후의 수주를 확보함. 레이더, 공대공 미사일, 적외선 탐지장치 등을 다룸. 미쓰비시 전기는 약 1000억 엔, NEC는 무선통신장치 등으로 약 800억엔, 후지쓰는 통신전자기기로 약 400억엔을 방위성에서 수주.('13), NEC는 전성기에 사장, 회장을 역힘한 세키모토 다다히로는 "새해 업무를 시작할 때 맨 처음 인사를 간 곳은 방위청"이라 했다. 일본의 종합전기는 방위라는 끈으로 국가와 깊이 연결돼 있다
- 일본 자본주의가 70년대 두 차례의 석유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위 노동조합이 노사협조노선을 통해 임금인상을 강하게 요구하지 않았고 기업의 합리하에 협조적이었던 것과 함께 많은 기업이 생산거점을 해외로 옮긴 것에 있다. 공장을 해외에서 찾은 것은 노동임금이 저렴하기 때문만은 아님. 와타나베 도쿠지와 사에키 야스하루는 84년 출판된 '전환기에 선 석유화학공업'에서 욧카이치 공해 소송결과로 74년 지역전체에서 유해물질배출에 대한 총량규제가 도입된 것에 대해 "즉시 철강, 전력, 석유, 화학 4대업체가 즉시 반대의향을 표명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총량규제 정책은 차츰 기업들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등 기본적으로 정책은 효과를 발휘. 이에 대응한 기업들의 행동은 첫째 재래지역 이외에 새로운 콤비나트 입지를 찾는 것이었다. 홋카이도 도마코마이, 아오모리현 무쓰오가와라, 세토나이카이 서부 스오우나다, 나아가 한국의 여수, 싱가폴 등에 대형 콤비나트를 조성하는 계획이 내세워짐. 그러나 이후 석유화학공업의 성정장체로 일부 외국에서의 계획을 제외하고는 실현되지 못함.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공해규제가 느슨한 국외를 선택한다는 것. 간단히 말해 일본은 자본을 공해를 끼워 수출한 것이다. 이는 전시 대동아공영권 구상의 전후 복제라고까지 할 수 있다.
- 일본은 대일 무배상을 원칙으로 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이의를 제기했던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 남베트남 등 4개국과 과거 전쟁에 대한 배상협정을 맺어 76년까지 총액 10억불 남짓의 배상금을 지불했음. 하지만 지불은 현금이 아니라 공장과 발전소 건설, 항만과 철도 등 인프라 건설공사 서비스, 또는 기계와 플랜트 제공방식으로 행해졌고 이후 일본 기업 및 상품의 동아시아 진출 거점이 됐다. 전시 아시아 군사침략에 대한 배상이 전후 아시아 경제진출의 길을 열었던 것.
- 환율이 변동환율제로 이행한 73년 이후, 90년대 불황으로 불리는 시대까지 일본기업은 생산거점을 해외로 옮기며 경영의 합리화와 효율화를 꾀함. 특히 자동차 관련 배기가스 규제와 에너지 절감기술, 전자업체의 반도체 생산, 여기에 고도성장기 축적된 기술력이 만든 쿼츠 시계와 VHS 비디오, 디지털 카메라, 워크맨 등 독창적인 발명으로 미국 시장을 중심으로 수출확대를 지속하면서 일본 자본주의는 80년대 말 거품시기까지 연 3%를 넘는 안정성장을 유지. 60년대에는 IBM을 거느린 미국이 세계시장을 지배했던 컴퓨터 산업에서도 통산성의 지원으로 70년대 전반에는 일본기업이 IBM을 따라잡음. 일본은 많은 희생을 지불하면서도 철강, 자동차, 화학공업, 전자기기산업 등 20세기 후반의 자본주의 기간산업 부문에서 세계 선두에 서게 됐고, 국제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글로벌화된 세계경제에서 경쟁려을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신자유주의 깃발아래 구조개혁이 추진됐지만 그 결과 초래된 것은 격차확대와 20년 가까운 디플레이션이었음
- 이제 더 이상 이윤을 올릴 공간이 없는 곳에서 무리하게 이윤을 추구하면 그 악영향은 격차와 빈곤의 형태를 띠고 약자에 집중될 것입니다. 그리고 ... 약자는 압도적 다수의 중간층이 몰락하는 형태로 나타날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의 많은 노동자들은 결혼조차 불가능한 상태에 놓임. 그렇게 되면 간단히 말해 물건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고, 금융완화가 추진되더라도 기업이 국내에서 설비투자에 적극 나서지도 않음. 무엇보다도, 결혼도 불가능하고 아이를 키울 수도 없게 되면 저출산, 고령화는 필연이 됨. 이렇게 해서 인구가 감소하는 지금, 미래 시장확대는 바랄 여지도 없고, 경제성장은 현실적 조건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미즈노의 책에 있듯이 '기술혁신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21세기에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 이같은 상황에서 현재 일본정부와 재계가 획책하고 있는 것이 원전수출과 경제의 군사화, 즉 군수생산의 확대와 무기수출이다.
- 현재 일본은 군산학복합체의 입구에 서 있다. 그 두개의 축이 무기수출과 군학 협동연구다. 여기서 중단시키지 못하면 일본은 전쟁할 수 있는 나라에서 전쟁을 원하는 나라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역사적 분기점에 서 있다.
- 19세기 서구에서 과학기술이 태동한 이래 오늘날까지 200년간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성장이 세계를 석권해왔다. 일본도 개국이래 거의 50년 늦게 이 세계사의 급류에 휩쓸려 많은 희생을 지불하면서 따라잡기에 매진해옴. 그러나 증식로 개발계획의 사실상 파탄과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는 과학기술의 한계를 상징하고, 막말/메이지 이래 150년에 걸쳐 일본을 지배해온 과학기술에 대한 환상의 종언을 의미한다.
- 과학기술의 진보로 에너지 사용을 얼마든 늘릴 수 있고 그로써 얼마든지 경제성장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원전만이 아님. 17년 12월 신칸센 노조미의 중대사고는 과학기술의 과신 위에서 차체 경량화에 의한 고속화를 추구하다 벌어질 수 있는 대참사를 예고했다. 게다가 11년부터 시작된 인구감소는 개국 이래 1세기 반에 걸쳐 추진해온 경제성장의 현실적 조건이 상실됐음을 나타냄. 마이니치 신문의 나카하타류반노센류의 투고에 무기원전 카지노가 성장전략인가 라는 게 있다. 정상적 상품경제로는 빠른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아베 정권 경제정책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임.
- 식산흥업, 부국강병에서 시작해 총력전 체제에 의한 고도국방국가 건설을 거쳐 경제성장/국제경쟁이라는 서사, 즉 대국주의 내셔널리즘과 결합한 과학기술 진보에 기반해 생산력을 증강하고 경제성장을 추구해온 근대 일본 150년의 흐름과 결별해야 할 때가 온 것. 요컨대 경제성장을 지속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명제 자체가 의문시 되고 있는 것이다.
- 거품경제 붕괴과정에서 스스로가 범한 소비실패의 후유증에 상처받은 국민은 괴로운 체험에 비춰 시기와 의심의 눈길을 위정자에게 돌리고 있음. 정부의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은 세계의 소비자에게 절약, 검약, 심플 라이프는 고통이 아니라 가치 높은 삶의 방식의 하나가 됐으며 적정 소비를 넘는 낭비는 비속한 인간적 욕망의 상징으로 바뀌고 있음. 소비생활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물건을 사지 않을까'를 고심한다. 이는 단지 소비자의 생활방어라는 차원을 넘어 지구환경과 자원문제에 대처하는 바람직한 태도임. 당연히 그래야 할 소비자의 이런 선택이 경제를 위축시키고 실업을 늘리는 것이 된다면 그런 경제순환 자체가 개혁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념형 경제사회로의 전환, 우치하시,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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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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