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기원

역사 2019. 11. 4. 08:06

- 기원전 12000년에서 8000년에 이르는 중석기 시대와 초기의 신석기 시대(이 시기를 합쳐서 중석기 시대로 부름)에 무기기술의 혁명적 발달이 있었고, 그 무기기술의 혁명은 오늘날의 화약, 기차, 항공기, 탱크 그리고 원자탄의 발명에 필적하는 것이다. 그 당시 처음 나타난 네가지 종류의 무기들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지배했던 무기들이다. 그 네가지란 활, 돌팔매, 단검과 손도끼였다. 이와 같은 혁명적 무기기술의 진보는 군사전술의 발명과 결합되었으며 역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진정한 의미의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 신석기 시대 초기의 인간들은 새로운 공격무기 체계의 화력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 이같은 요새화된 지역은 군사적 대변혁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유물이며 전쟁이 인간의 문화에 가한 충격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것임. 어떤 지역의 경우 다양한 형태로 건설된 대규모의 요새는 오히려 농업의 발견과 동물의 가축화를 초래했거나, 혹은 농업의 필요성을 요구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 우리는 전쟁이란 본질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길 주저한다. 비로 그것이 책에 쓰여진 가장 단순한 진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마샬)
- 기원전 1200년 이전에 금속은 보석, 또는 의식용 무기의 제조에 사용되었지만, 그것은 순수하게 연철이었으며 구리보다도 더 약한 것이었음. 고대 대장장이들은 금속을 주조할 수 있을 정도의 열(1530도)을 발생시키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 그러나 궁극적으로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쳐, 고대 대장장이들이 벌겋게 달아오른 강철에 탄소를 투입함으로써 탄화된 또는 강철과 같은 철을 생산하는 방법을 발견. 그 과정은 복잡했고 완전히 이해되지는 못했다. 그 과정은 강철이 부서짐을 방지하기 위한 가열, 재가열 또는 단련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900년 고대 근동지방의 대장장이들은 이런 절차를 발견했고, 아시리아는 자국의 전사들을 새로운 강철기술에 의한 진보된 무기로 등장시킴. 철은 급격히 적나라한 폭력과 동의어가 되기 시작. 욥기 40장 18절에 베헤모쓰(거대한 바다짐승)는 무쇠와 같은 단단한 뼈를 갖고 있었고, 바빌로니아의 격언집은 여자는 남자의 혀를 자르는 예리한 강철단검이니라, 라고 쓰고 있다. 청동기 시대부터 철기 시대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모습은 구리를 청동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주석, 특히 층적토의 주석을 구하기 어려운 반면, 철은 지구 곳곳에서 풍부하게 발견되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새로운 무기는 더욱 훌륭하였고 벽이고를 바닥나게 만드는 금속의 결핍은 없었다.
- 기원전 900년에서 612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철제병기로 장비한 아시리아군은 고대 근동지방을 점령하였고, 그 지역을 아시리아 왕들의 직접적 감독을 받는 지역으로 만듦으로써, 세계 최초의 제국을 건설. 신왕조의 이집트 왕국도 때로 제국이라 불림. 그러나 당시 파라오는 나일강 유역에 대해서만 직접 통치를 할 수 있었고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해서는 단지 패권 또는 영향권을 유지했을 뿐이다. 반면 아시리아 왕들은 정복당한 방위체제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새로운 대전략을 개발해야 할 필요성에 당면했으며, 새로운 대전략에서 메소포타미아 상부지역의 아시리아 본토 방위는 더 광범한 안전보장체계의 일부가 되는 것이었다.
- 아시리아인에 의한 전쟁의 전문화에 관한 두가지 사례, 즉 말의 공급과 포위작전은 아시리아 야전군이 얼마나 잘 조직되었으며 전술적으로 효과적이었는가를 말해주는 것 같다. 아시리아군은 천 마일이나 떨어진 먼 곳에서도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있었으며 어떠한 적군 병사나 적의 요새도 아시리아 군의 전략적 목표달성을 위축시키는 장애요소가 될 수 없었다. 기원전 900-612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아시리아 군은 고대 근동에서 최강의 지상군이었다.
- 페르시아 이후 기병대는 전쟁에서 엘리트 기동타격력이 되었으며 나폴레옹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인간과 비교했을 때 말은 더 크고 상대를 놀라게 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말을 탄 기병이 공격해올 때 보병이 자기의 위치를 고수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반면에 말들은 쉽게 무서움을 타며 흐트러지지 않는 적군의 창병 전열에 대한 공격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기병은 접전하기 전 선회하였으며, 즉 기마병은 창에 찔리길 원치 않았으며, 창병에 대한 정면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창병의 전열을 향한 기병대의 위댛나 공격이란 낭만적 개념은 존 키간의 '전투의 얼굴'이라는 책을 통해서 사실과 다른 것이라고 널리 알려질 수 있게 됨. 사실 전쟁사가들은 이러한 비밀을 항상 알고 있었고, 기병 지휘관도 물론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마디 경고가 필요할 것 같다. 무너지지 앟는 전열을 향해 기병이 공격하지 않았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열이 기병대의 공격 때문에 넘어지거나 또는 당황스런 상황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병은 성공적으로 보병에 대한 직접 공격을 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병대 사령관이 내려야 할 가장 어려운 결정중의 하나는, 적군의 보병 전열이 현재는 상당히 강력한 대형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언제 사기를 잃을 것이며 공격앞에 취약할 것인가를 알아내는 일이었다.
- 신석기 시대의 요새, 활의 출현, 돌팔매와 창, 그리고 역사 시대 이후 상당 규모의 조직화된 군대의 출현 등은 고대 전쟁의 모습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로부터 폐르시아 왕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은 전쟁수행능력을 갈고 닦았다. 종대와 횡대로서의 병력배치, 병참제도, 무기의 개발과 운용, 포위전쟁 기술과 더불어 수많은 종류의 전술적으로 전문화된 부대의 배치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나폴레옹 시대에 이르기까지 실제 전쟁의 대부분의 요소들은 고대 근동지방에서 이미 형성되었던 것이다. 페르시아 왕들이 통치했을 당시, 나폴레옹의 해군과 육군에 버금가는 군사력이 그 지역을 지배하였고, 기병, 보병, 척후병 및 함대 등의 구분이 정교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페르시아가 결여하고 있었던 군사력은 훌륭한 중장갑보병이었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인들이 이 같은 공백을 메꿀 것이다. 고대 근동지방 전쟁의 군사기술들을 채택한 그리스의 군대는 필립과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 이르러 페르시아와 비옥한 초생달 지역에 자신의 문명을 강요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했다는 사실이 장갑보병 사회의 군사적 우둔성의 지속에 기여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비록 일부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의 실수 때문에 그리스의 승리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더 널리 퍼졌던 바는 활에 대한 창의 승리, 경보병에 대한 중보병의 승리라는 믿음이었다. 해상 전쟁에서 그리스인들은 더 많은 창조성을 발휘하였고 페르시아 전쟁 당시 그리스 해군은 그리스 장갑보병보다 페르시아를 격파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함.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육상에서의 전투가 더 많았지만, 육상에서의 전쟁 역시 바다에서의 싸움에 의해 결판이 났으며, 함대에 의해 장갑보병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는 한, 그리스인들은 과거에도 그래왔던 것처럼 육상전쟁에서 중무장 보병의 우수성을 계속 믿으려고 하였다. 마케도니아의 필립은 그리스인의 믿음이 틀렸음을 증명하였다. 장갑보병 때문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다른 종류의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페르시아에게 많이 뒤처지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의 요새 및 포위전쟁은 원시적인 것이었다. 중무장 장갑보병은 아주 단순한 장애물을 향해 돌진하고 공격하기에도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중장갑 보병을 활용할 경우 요새화된 도시에 대한 가능한 전략은 오직 봉쇄 뿐이었고, 잘 요새화되지 못한 도시에 대해서도 도시 거주민들이 문을 열도록 설득당하지 않은 한 봉쇄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었다. 요새의 기술은 중장갑 보병 때문에 불필요한 일이 되었으며, 그리스가 고대 중근동 비장에 비해 낙후되어지도록 한 것이었따. 스파르타인들은 자기 도시에 성벽이 없다는 사실을 자랑으로 삼았고, 아테네인들 중에도 도시의 성벽을 허물어뜨림으로써 더욱 더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만약 성벽을 허물게 된다면 그것은 아테네로 하여금 스파르타만큼 강력한 중장갑보병을 양성케 하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병참에 관한 부분 또한 그리스인들이 정교하게 발전시키지 못했던 군사적 기예중 한 분야였다. 소규모의 병력은 (대부분의 그리스병력은 소규모였다) 그다지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고 이동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전쟁터가 이스트무스에 있던 그리스 요새로부터 불과 몇 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479년 플라테이아 전투에서 4만명의 병력에 대한 물자를 공급할 방법이 없었다. 고대 근동지방의 대규모 군대는 그들이 행군할 거리에 맞추어서 어느 정도 정교화된 병참지원체계를 개발. 그러나 그리스군은 수많은 하인들을 뱀처럼 길게 늘어뜨려 행군했고 행군속도는 대단히 느렸다. 행군속도는 보급품을 실은 우마차의 속도에 맞추는 것이었으며, 때로 조직화된 병참부대가 전혀 없어서 병사들을 따라다니는 개인적 장사꾼들이 병사들에게 물건을 비싸게 팔기도 했다.
- 오늘날에는 제식훈련 그 자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현대전쟁 기술발달로 인한 화력의 증대가 병사들로 하여금 근접대형을 이룰 수 없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전쟁의 경우 병사들은 근접된 상태로 전투를 실시했으며 그들이 퍼레이드를 특히 잘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전쟁에서도 훌륭하게 전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근거였던 것이다. 퍼레이드를 잘 할 수 있다는 사실의 심리적 효과는 결코 과대평가될 수 없는 일이었따. 비록 병사들이 적군과 직접 맞부딪쳤을 때 심리적 두려움이 가장 강력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되겠지만, 현명한 기동작전의 수행은 언제라도 전투에 불안을 느끼는 병사들을 통제할 수 있는 더 없이 중요한 수단이었음. 어떤 병사에게 있어서도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은 적군병사들 그 자체가 아니었다. 병사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아군부대가 당황한 상태에서 도망쳐 버림으로써 그들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했다. 훈련을 통해서 이처럼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팀워크가 훌륭한 군사력을 건설할 수 있는 것이다.
- 필립의 새로운 병참체계가 갖는 가장 큰 이점은 나폴레옹의 병참체계와 비교함으로써 가장 잘 이해되어 질 수 있을 것임. 나폴레옹과 필립의 병참체계는 비슷한 점이 많이 있는데 데이빗 챈들러의 걸작 '나폴레옹의 전역'에서 잘 관찰되어졌다.
행군중인 프랑스군은 약탈, 강간, 방화 이외의 또 다른 특징적인 성격 때문에 유명했다. 그 특징이란 그들의 행군속도였다. 훨씬 더 다루기 어려운 오스트리아군과 신성 로마제국의 군대는 이러한 면에서 나폴레옹 군대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병참지원에 관한 상이한 개념 때문이다. 프랑스군은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의 대부분을 전투의 현장에서 충족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프랑스군의 개념은 느릿느릿 움직이는 병참부대와 미리 채워진 화약고나 보충시설의 존재에 기반을 두는 전략적 답답함으로부터 프랑스군을 자유스럽게 했다. 그들은 결코 3일분 이상의 보급물자를 지니고 다니지 않았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습관적으로 9일분에 해당하는 식량전부를 수레에 싣고 다녔던 것이다. 프랑스군이 잘 지휘되었을 경우, 느릿느릿 움직이는 적군을 전술적, 전략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최근 역사학자 한 명은 고대 전쟁기술에 관한 이해로 가득 채워진 책에서, 알렉산더보다 필립이 더 우수한 전략가였다고 주장
필립은 이해심이 있었고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 이러한 것들은 알렉산더도 그러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알렉산더가 전술가로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의 후손들로 하여금 그의 전략적 능력은 덜 찬란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그의 행동 동기는 지속적으로 부주의한, 비이성적인 욕망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었다. 군인의 기예는 합리적인 계산을 요구하는 것이다. 필립은 이러한 점을 결여하고 있지 않았다.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에 관한 군사적 감각은 그의 아들보다 작지 않았다. 쌀울 것이냐 말 것이냐에 관한 정치적 감각은 또 다른 사항이다. 필립은 가장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은 또 다른 사항이다. 필립은 가장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의 정치적 감각에 대한 평가는 심사숙고되어야 할 것이 요구된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을 바꾼 길들임의 역사  (0) 2020.06.07
사무인간의 모험  (0) 2020.02.11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  (0) 2019.11.04
모든 시작의 역사  (0) 2019.09.15
원시인이었다가 세일즈맨이었다가 로봇이 된 남자  (0) 2019.09.15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