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내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반일 종족주의'라는 쓰레기 같은 책을 집필한 이영훈, 이우연 등의 또라이 보수주의자들은 무슨 생각으로 대한민국에 발을 딛고 살고 있는 것일까. 무슨 경제적 이익을 위해 반일 종족주의라는 새로운 용어까지 만들어내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저자는 이영훈이다. 서울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고 하는데, 서울대씩이나 나온 지식인이 왜 이러나 싶을 정도다. 아무리 학문연구의 자유가 있을지라도, 아직도 살아계신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미안하지도 않은가. 전공인 경제에 대해서나 연구할 것이지, 왜 갑자기 역사학에 집적대는지 모르겠다.

이 책(신친일파)은 호사카 유지가 쓴 책이다. 저자는 88년부터 한일관계 연구를 위해 서울에 거주하고 있으며, 03년에는 대한민국으로 귀화했으며, 현재 세종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런 책이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에 의해 씌어졌을까하는 부끄러움이 앞섰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오히려 일본과 한국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중간자적인 입장에서 객관적 사실과 사료를 바탕으로 조목조목 '반일 종족주의'의 주장을 반박하는 저자의 필력과 지식에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가장 적임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주제는 강제징용, 위안부, 독도 및 일제강점이다.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이영훈은 이들은 자발적으로 돈을 벌러 일본에 간 것이라고 주장한다. 상식적으로 어느 누가 목숨을 내걸고 전쟁통에 남의 나라의 탄광으로 전장의 위안부로 자발적으로 가겠는가? 모두 납치, 사기에 의한 일본의 범죄일 뿐이다.

참고로 이영훈, 이우연 등은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속이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87년 경제사학자 안병직과 이대근이 공동으로 설립한 연구소라고 한다. 안병직은 뉴라이트 재단의 초대 이사장이기도 하며,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결국 '반일종족주의' 저자들은 보수정권의 정권재창출을 목표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활동을 한 친일파에 대한 단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의 역사현실 앞에 정권창출을 목적으로 친일행각을 벌이는 이들이 아직도 버젓이 학문이라는 탈을 쓰고 활동하고 있다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 악마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면 안된다. 악마는 거짓말에 교묘히 진실을 섞는다. (엑소시스트 중)

- 한국인의 정신문화를 '반일 종족주의'라고 폄하하는 이영훈의 논리는 일본 극우세력에게 면죄부를 주는 '이적행위'와도 같다. 필자는 '노예근성'을 되풀이하는 이영훈의 논리와 글이 한국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우려스러움을 떨쳐낼 수가 없다. 필자는 그 우려스러움을 확실히 해결하기 위해 본서를 썼다. 독자 여러분은 본서를 통해 거짓에 사실을 섞어 사람을 속이고 나라를 파멸로 몰아가려는 악마가 있다면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 이우연은 조선인들이 위험한 일에 종사한 것은 조선인들이 돈 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갔고, 당시 노동수요와 노동공급이 맞아떨어진 결과이지 결코 민족차별'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본 기업의 변호사 역할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이우연 의 주장은 당시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간 조선인들과 '모집', '관 알선’, '징용'으로 강제연행된 조선인을 고의적으로 혼동해서 한 말이다. 1945년 8월 15일 패전 시점에서 강제적으로 동원되어 작업 현 장에 있던 조선인 노동자 수는 32만 2,890명이었고, 조선인 군인과 군속은 11만 2,718명이었기 때문에 양자를 합하면 패전시 일본에 있던 '징용'과 '징병’의 범주에 속하는 조선인들은 모두 43만 5,608명이었다. 이 수치는 패전 시 일본에 있던 조선인 총인구 약 200만 명의 22% 정도이자 1939년부터 1945년의 전시 동원 기 간에 증가한 일본 내 조선인 인구 약 120만 명의 약 36%에 해당한다.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이 많았기 때문에 강제 동원이나 강제연행이라는 단어 자체가 잘못 사용되고 있다고 하면서, '강제연행설 허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 돈을 벌기 위해 도일한 조선인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제연행이나 강제 동원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실제로 조선인 약 43만 5,000명은 강제연행된 사 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우연이 말하는 “젊고 건장한 조선 청년들은 주로 일본 정부 와 기업에 의해 전시 동원되었고, 나이가 많거나 어린 조선인들은 전시 동원 기간에 도일한 120만 명 중 나머지 64%에 해당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그러므로 전시 동원 기간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 3명 중 1명은 강제연행되었다는 이야기다.
- 일본이 조선인들을 강제연행해 데려간 곳은 주로 탄광이었다. 그러므로 일본 측이 처음부터 강제연행의 대상으로 삼은 조선인 들은 젊고 건장한 남자들'이었다. 마찬가지로 당시 젊고 건강한 여자들은 ‘위안부나 근로 정신대'로 끌려갔다. 일본 기업들은 자신들의 수요를 보충하기 위해 식민지 주민이 라는 약한 입장에 있는 젊고 건강한 조선인 노동자들을 강제연행 했다. 전쟁 시 동원이니 당연하다는 논리는 타당치 않다. 전범 기업들은 조선인들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만 신경을 썼고, 일본인들과 평등한 대우를 해주지도 않았다. 강제로 시킨 저축은 계약 기간 만기가 된 조선인 노동자에만 돌려주었고, 도주하거나 중 도 퇴직자의 저금은 모두 기업이 가로챘다. 작업장에서의 대우가 일본인과 조선인이 완전히 평등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으므로 '민족차별’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인 노동자의 불만이 쌓여서 패전 후에도 그 한이 풀리지 않는 이유는 불평등한 대우뿐만이 아니라, 불법적 인 일제 강점으로 인해 일어난 부당한 동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침략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한민족을 강제로 가담시킨 일제의 만행 때문이다.
- 일본 기업들은 조선인 노동자와 중국인 노동자, 전쟁 포로들을 착취할 수 있는 만큼 착취하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조선인 노동자 등을 죽지 않을 정도로 혹사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달에 10엔 정도의 용돈은 현재 가치로 2만엔, 즉 20만 원 정도라고 하니 고등학생이 받는 용돈 수준이었다. 이렇게 기업의 관리자들은 여러 명목으로 월급의 많은 부분을 조선인 노동자가 관리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 1965년 청구권 협정과 함께 일본이 지급한 무상 3억 달러의 보상금으로 모두 탕감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지만, 일본이 당시 보상금을 지급할 때 생환자, 즉 살아서 귀환한 자에게 보상금을 줄 수 없고 사망한 자에게만 준다고 했다. 따라서 1945년 시점에 서 생존해 있던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1965년의 청구권 협정의 지 급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중요한 사실을 이우연이나 일본 우파 는 절대로 밝히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일부 부분적인 사실만을 부풀려 그것이 마치 전체적인 진실인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일본 우파 논리의 노예가 된 사람들의 정신 상태 는 구제하기가 어렵다. '노예근성'이 정신을 파괴해버린 것이다.
-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일본군에 의 한 취업 사기 및 납치의 좋은 사례이자, 군이 통제하면서 형식은 여성들을 포주의 사창으로 만들어 일본군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대단히 악덕한 장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탄광에서 기업 들이 사용한 나야納屋 제도와 흡사하다. 기업이 나야 관리인과 계약하고 나야 관리인이 광부의 모집, 나야라는 숙소 관리, 광부들 의 생활 관리, 노동 관리 등을 모두 책임지는 것이 나야 제도였다. 즉 광부들이 기업과 직접 계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나야 관리인 과 계약하는 형태였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 역시 일본군은 포주 를 선정하고, 포주가 여성들의 모집, 인솔, 현지에서의 위안소 관 리 등을 모두 맡았다. 그러므로 ‘위안부'들은 일본군과 직접 계약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지시로 포주와 계약한 것이다
-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문제가 된 이유는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전쟁터가 된 중국, 동남아 등 최전선에는 일본인 여성들보다 훨씬 많은 타민족인 조선인이나 대만인 여성들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이영훈은 “기생제, 공창제, 위안소제는 그 본질적 속성을 변치 않 은 채 한 계열로 죽 이어져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본군 '위안 부들이 모두 원래부터 창부들이었다고 주장하여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범죄성을 물타기 하려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조선의 기생제나 공창제와는 관계없는, 취업 사기와 납치 등으로 여성들을 조선이 아닌 타국으로 강제연행해 일본군 각 부대의 사창으로 만든 새로운 시스템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일본이 타민족 여러 계층의 여성들을 취업 사기나 납치 형식으로 연행해 무력으로 위협하는 환경 속에서 성적 착취를 정당화한 제도이자, 일정한 기간 동안 그녀들을 '성 노예로 만들어서 ‘위안부'들의 자유를 박탈한 범죄였다. 한편 조선시대의 기생은 제도화된 계층적 존재였고, 기생이나 사비를 쓰는 사람들은 같은 민족인 조선인들이었다. 고려나 조선 에서 타민족을 기생이나 사비로 강제 동원했다면 한국은 그 타민 족으로부터 지금도 큰 비판을 받고 있을 것이다. 결국 조선의 기생제와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몽골(원나라)과 명나라, 청나라가 한반도를 영향하에 두었 을 때 고려나 조선은 그 나라의 명령으로 공녀를 바쳤다. 공녀들은 고국에 돌아와도 '환향녀'라고 불리며 사람들의 경멸 대상이 되었다. 한국사의 비극 중 하나인 셈이다. 그런데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처럼 타민족을 성노예로 만든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면 한국은 왜 몽골과 명나라, 청나라 등 중국 왕조에는 강력한 항의와 배상 요구를 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 문제에 대해 일부에서는 한국인들이 일본에는 엄격하지만 중국에는 약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여러 역사적 사실로 일본군 '위안부와 중국에 보내진 공녀는 큰 차이가 있다. '위안부'와 공녀의 차이는 '위안부'가 불특정 다수인 일본 병사들의 성노예였는 데 비해, 공녀들은 중국인의 성 노리개가 되었다기보다 왕궁에 들어가 궁녀가 되거나 중국인의 첩이나 본처가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공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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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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