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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독의 즐거움

사회 2024. 4. 17. 08:11

- 베트남전쟁이라는 엄청난 기회를 맞은 맥린은 드디어 성공했을까? 그렇지 않다. 이제는 아예 일본, 대만에 한국까지 가세해서 더 싸고 더 빠른 배를 찍 어냈다. 국가가 나서서 대형 항구와 컨테이너선을 만든 동아시아는 빠르게 치고 올라왔다. 2014년 기준으로 세계 10대 무역항 중 7곳이 동아시아에 있다. 첫 컨테이너 선을 띄운 뉴욕항은 순위에서 보이지도 않는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혁신이 성공으로 이어지려면,
1) 그 혁신이 사업성이 있어야 하고(제록스),
2) 정치적 문제를 돌파해야 하고(타다),
3) 언제가 될지 모를 '그때'를 기다려야 하고(테슬라),
4) 누가 승자가 될지 모르는 무한경쟁을 이겨내야 하며(삼성전자),
5) 대중화를 이룰 이벤트도 있어야 한다(애플).
이런저런 굴곡이 있는데, 여하튼 맥린은 나중에 파산하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 결국 1990년대 들어 컨테이너는 세상을 바꿨지만, 혁명을 완성하 기까지 첫 출항 후 40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할 줄은 몰랐던 거다. 물론 그는 컨테이너화의 선구자로 역사에 남았고, 그가 죽었을 때 전 세계의 컨테이너 선은 뱃고동을 울려 예의를 표했다.
책을 읽는 내내 이미 혁명이 일어났다거나 '사실상 완성됐다거나 '이건 실 패할 수 없는 혁명'이라고 생각하는 테슬라에 대한 시선이 떠올랐다. 1960년 대에 컨테이너화는 전기차보다 덜 매력적인 아이템이었을까?
컨테이너는 세계 경제를 넘어 '동아시아의 부상(上)'이라는 지정학적 격 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컨테이너 선사에 투자해서 돈을 번 사람은 없었다. 혁 신은 참 먼 길이다.

-'2050년 탄소중립' 목표에 따르면, 가스는 언젠가는 사라져야 한다. 공급까 지 넘쳐서 석유 같은 영향력을 갖긴 어렵지 않을까? 언제나 심각하고 무거웠 던 예긴의 저서를 처음으로 여유로운 마음으로 읽은 건 그런 이유에서다. 너 무 많은 전략가가 이미 '셰일혁명'을 다루기도 했다.
물론 화석연료가 짧은 기간에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15세기에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에 간 후에도 지중해 무역은 융성했다. 베네치아는 16세기에도 오히려 무역량이 늘었다. 하지만 천천히 쇠락했고, 결국은 멸망했다.
- 이 책에서 가스의 지정학을 얘기한 예긴은 여러 차례 '무례한 환경운동가'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그가 책에서 이렇게 불쾌함을 드러낸 건 처음이다. 석 유기업에 대한 투자 철회 압박,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 방식의 여론전, 석유 의 죄악화 등에 대해 얘기할 때는 이 나이 든 신사도 혈압이 오르는 모양이다. 이 책이 유독 명쾌한 느낌이 없는 건 예긴이 기후변화를 부정하지 않아서 다. 모호한 표현은 쓰지만 그는 2050년까지 지구 온도 상승 1.5도 제한'이란 목표를 비판하진 않는다. 매우 어려울 것이고, 화석연료는 없앨 수 없다고 변 호하는 선에 그친다. 아마도 평생을 화석연료에 바쳤고, 지금도 화석연료 컨 설팅을 하는 그의 한계일 것이다.
확실히 한 시대는 저물고 있다. 탄소중립으로 가는 길의 '과도기'를 책임질 운명인가스는 질풍노도의 시간을 견뎌내야만 한다. 이른바 '가스의 시간'이 다. 검은 황금이 그저 탄소덩어리 취급으로 추락하는 게 겨우 한 세대에 일어 났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탄소의 시대가 저무는 시점에 많은 기회 가 열리고 있다.
- 빌 게이츠는 화력발전소의 탄소 포집을 정색을 하며 비판한다. 최근 나온 IEA(국제에너지기구)의 자료를 봐도 (가스)화력발전은 잠깐 역할을 하고 사라 질 존재일 뿐 타당한 선택지가 아니다. 그는 결국 대안이 원자력뿐이라고 말 한다. 국토가 축복 받은 땅덩이가 아닌 한 원자력 확대는 피할 수 없어 보인 다. 물론 빌 게이츠가 원자력 기업 '테라 파워' 창업자라는 점은 고려하고 그 의 주장을 이해해야 한다.
한국에는 암담한 얘기다. 국토는 좁고, 산업 구조는 탄소를 뿜어내는 중후 장대 제조업 중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 243개 지방자치단체가 2050 년 탄소중립 선언을 했다. 포항시장은 포스코가 뿜어내는 탄소의 양을 알고 그런 선언을 한 걸까. 수소환원제철은 당장 상용화가 어렵다 해도, 철을 생산하는 고로를 용광로 대신 전기로로 모두 대체하면 제조원가가 크게 상승한다는 사실을 진정 모르는 걸까.
수조 달러의 비용이 필요하고, 우리의 거의 모든 삶을 바꿔야 한다는 걸 알 고 나면 '탄소중립, 이게 과연 가능할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되고 말 고를 떠나 앞으로 모든 산업을 송두리째 흔들 '메가 트렌드'인 것만은 틀림 없다. 이른바 '혁명'이라고 야단법석을 떤 전기차 보급은 이 큰 그림 안에서 는 애피타이저 수준의 작은 문제로 쪼그라든다.
가스보일러를 만드는 회사는 기울어갈 것이고, 전기식 열펌프를 만드는 회사는 성장할 것이다. 이런 변화가 모든 국가, 모든 산업에서 일어날 것 같다.
그런데 이 와중에 한국전력은 인도네시아에 가서 석탄 사업을 하겠다고 하 고, 심지어 화력발전소를 짓겠다는 철강회사를 보면 걱정이 앞선다.
삶의 방식과 산업 구조를 바꾸려면 인센티브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세금 을 물려야 한다는 얘기다. 탈탄소기술보다 저렴한 기존 제품이나 탄소 배출 기업에 높은 '탄소세를 부과해야 구조를 바꾸는데 속도를 낼 수 있다. 유럽 이나 미국에선 예상되는 탄소세의 파급력이 너무 커서 심지어 탄소세 인플 레이션을 우려할 정도다. 그런데 탈탄소 드라이브가 본격화해도 여론은 동 의할까. 중요한 포인트다.
탈탄소는 또 다른 패권 경쟁이 될 수도 있다. 중국은 태양광에서 압도적인 선두 국가다. 이미 풍력은 화력발전보다 저렴해졌고 태양광도 시간문제다. 전 세계가 태양광 패널을 깔려면 중국으로 가야할 처지다. 미국은 환경에서 다시 한 번 패권을 잡을 수 있을까. 이 판은 커도 너무 큰 판이다. 이제는 피 할 수가 없다.
- '셰일가스의 아버지' 조지 미첼George P. Mitchell " 이 석유도 아닌 셰일가스에 인생 을 건 계기는, 그가 1972년에 읽은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라는 보고서였다. '로마클럽(Club of Rome)'이라는 환경단체가 쓴 보고서인데, 요 지는 인류의 수가 감당 못할 만큼 늘 것이고 천연자원 고갈될 거란 경고였 다. 석유가 고갈되기 시작했다는 '오일 피크' 공포는 전 세계를 떨게 했다. 이 런 전망에 따르면 고유가는 필연이었다. 조지 미첼은 1970년대에는 경제성 이 낮았던 셰일가스도 향후에는 개발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 다만 현재로서는, 이 보고서는 틀렸다. 석유 매장량은 파도 파도 늘고 있고 지금은 수요 피크 가능성이 훨씬 높다. 아메드 자키 야마니Ahmed Zaki Yamani 전사 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이 2000년에 예언한 대로 석유가 떨어져서 우리가 다 른 자원을 쏠리는 없다. 결국 대체할 더 좋은 에너지원을 찾아낼 것이다. 로 마클럽 보고서는 문명의 원천은 땅이 아니라 인간의 창의성이란 걸 놓쳤다. 뒤늦게 로마클럽의 빗나간 예언을 꼬집으려는 건 아니다. 이 에피소드가 흥미로운 건 세계 석유 산업의 패권 구도를 뒤집은 셰일혁명이 틀린 전망에 서 시작됐다는 점이다. '석유는 끝났다'는 착각에 빠진 텍사스 아저씨, 조지 미첼은 기어코 미국을 세계 최대 에너지 부국으로 만들었다.
요즘도 기후위기를 의심하는 이들이 있다. 기후변화 부정론자들이다. 비록 과학자의 거의 모두가 기후변화가 인간에 의한 결과라는 점에 동의하더라도, 부정론자들은 며칠 뒤 날씨도 알기 힘든 인간이 한 세대 후의 기후를 '예측' 하는 건 터무니없다고 주장한다.
부정론자들이 만에 하나 먼 미래에 옳았다는 게 드러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 전 세계는 이미 '지구는 뜨거워질 것이다'라는 예측에 따라 흐르고 있 다는 사실이다. 전 세계는 파리기후협정이라는 게임의 룰에 합의했다. 도장 찍고 나선 다른 소리해 봐야 소용없다. 탈탄소를 향한 레이스의 총성은 이미 울렸다. 이젠 '틀려도 맞는 예측이다.

- 뛰어난 관료 선발과 고위직 관료들의 큰 재량권, 효율적인 전략 수립에 따른 고성장은 중국식 자본주의의 핵심 요소로 꼽힌다. 반면, 부패는 그 대가다. 재량권이 있는 곳엔 부패가 있다. '권력필부 '다. 부패를 없앤다는 건 중국식 자본주의의 핵심인 재량권을 없앤다는 의미다.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부패에도 중국식 자본주의 가 지지받는 이유는 뭘까? 눈부신 경제 성장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는 이 계약이 신기해 보일지 몰라도 동아시아 끝에 있는 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퍽 익숙한 얘기다. '독재할 테니 잘 먹고 살게는 해 주겠다'는 약속, 우리는 개발독재 때 이미 경험했다.

- 큰 시장 규모와 유통 채널의 변화는 왜 유독 케이팝만 그 수혜를 입었는지 는 설명하지 못한다. 케이팝의 핵심은 미국식 팝의 보편성과 한국 특유의 색 깔이 묘하게 섞인 '혼종성'이다. 케이팝은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도 '보편성' 의 문을 열 많은 열쇠도 품고 있다. 한 때는 콤플렉스였던 '정체불명'이 이젠 아이덴티티가 된 것이다. 케이팝 한 곡 안에 힙합부터 록, EDM에서 라틴음악 까지 모두 섞여있다.
케이팝은 미국의 흑인음악과 제이팝의 영향을 받았고 그 특성을 모두 품 었다. 케이팝의 시초로 보는 서태지는 당시로선 낯선 흑인음악의 코드를 들여왔다. 우리가 익숙한 아이돌 시스템은 일본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아이 돌 시스템을 수출한 일본은 '일본스러움'에 갇혀 내수에 머물렀지만, 케이 팝은 아이돌 시스템에 보편성을 갖춘 음악을 실어 혼종 그 자체인 문화를 만 들었다.
아시아의 특수성과 미국이 대표하는 주류 시장의 특징이 만나 결합할 경 우 나오는 폭발력은 홍콩 문화가 보여줬다. 90년대 아시아에서 강한 영향력 을 보인 홍콩 문화는 중국 문화와 자유로운 홍콩의 세련된 특성이 묘하게 결 합돼 탄생했다. 중국과 영국이 닿는 경계에서 변이가 일어난 사례다.
- '변이'를 기획하는 기획사
기획사는 이런 전파자를 더 활용하기 위한 요소를 알고 있다. 바로 '떡밥'이 다. 보통 케이팝 덕질을 시작하면 유튜브에서 검색해서 나오는 영상은 모두 보고, 소셜 미디어에서 한 말 한마디까지 꼼꼼하게 살핀 후 팬덤 커뮤니티에 모여 재조합하는 과정을 거친다. 스타는 여러 채널을 통해 많은 떡밥을 뿌린 다. 아예 데뷔 전부터 콘텐츠를 찍어 소셜 미디어에 뿌리며 떡밥을 만든다. 라이브나 비하인드 콘텐츠도 이런 역할에 충실하다.
이런 과정은 바이러스가 활발하게 '변이'하는 과정과 닮아 있다. 케이팝 기 회사는 이런 변이 가능성을 높일 여러 장치를 만든다. 한 그룹을 여러 조합으 로 쪼개 다양한 콘셉트를 소화하게 만드는 유닛(unit) 활동이 대표적이다. 멤 버가 거의 20명에 가까운 그룹을 만드는 건 애초에 그 안에서 수많은 조합을 만들어내려는 의도다. 그 안에서 알파, 베타, 델타・・・・・・ 끝없이 새로운 조합을 만들고 실험해 전파 가능성을 높인다.
여러 성공을 거듭하며 다양한 덕질 콘텐츠를 만드는 시스템도 자리를 잡고 있다. 신곡 하나가 나오면 우선 티저(teaser)부터 여러 개를 제작해 발표한다. 그러다 공식 뮤직비디오가 나오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다. 퍼포먼스 버전, 세로버전, 직캠버전, 무대 뒤 영상, 각 멤버별 영상, 무대 전체 영상이 쏟아진 다. 여기에 '광야' 같은 독특한 코드를 넣어서 세계관을 구축하며, 또 한 번 콘텐츠를 만든다.
케이팝의 부상에서 기획에만 초점을 맞추면 반쪽짜리 정답이 나온다. 기획 사는 성공을 기획하지 않는다. 애초에 한국의 작은 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신 대중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킬 포인트를 찾고 배치한다. 얻 어 걸리는 것도 실력이라고 하지 않는가. 케이팝 그룹이 갑자기 '빵'하고 뜨 면 대체 무슨 일인가 싶지만, 그 또한 기획이 행운을 만나 터진 결과다.
변이를 거치며 케이팝은 강해지고 있다. 2010년대 벌어진 불공정 계약 논 란은 진통 끝에 표준계약서 문화를 낳았다. 변이 가능성을 강화하기 위해 적 극적으로 도입한 외국인 멤버 구성은 국가주의(애국심 논란) 리스크를 키웠 다. 이런 문제에 여러 번 부딪히면서 기획사들은 다국적 그룹의 경우 철저하 게 정치적 이슈를 피해가게 만들었다. 아예 가상의 세계관을 만드는 기획도 이런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작업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벼농사의 특징은 '공동생산개별소유'다. 함께 농사를 짓지만 산출물은 각 자 나눠 갖는다. 내 집, 내 밭에 씨 뿌리고 유유자적 사는 삶을 버리고 이런 집단노동에 투신한 까닭은 쌀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면적당 생산 열량을 비교하면 밀의 2배가 넘는다. 열량이 높을 뿐 아니라 육류와 함께 먹어야 하 는 밀이나, 콩이 필요한 옥수수와 달리 쌀은 완전식품이다. 이런 쌀의 매력에 빠진 선조들은 압록강을 넘어 건조한 기후의 만주에 가서도 불가능해보였던 쌀농사를 기어이 해냈다.

- 유교의 통치는 모두가 자신의 마음속에 달아놓은 CCTV의 통제를 스스로 받는 저비용 통치 구조다. 불행은 개인 탓이요, 모두가 성공은 할 수 있다. 다 만 처지가 딱한 건 수양이 부족해서다. 이 얼마나 성군의 치세인가. 작은 법 위반에도 팔다리를 자르고 사사건건 개입하는 '나쁜 나라님'이 다스리는 법 가의 통치보다 비용이 적게 든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결국 이기지 않았을까. 이런 피통치자의 마음속에 CCTV를 다는 일을 아주 넓게 우리는 '문화'라 고 부른다. 적어도 수천 년의 동아시아 역사에서 위력을 검증한 통치 수단이 다. '충(忠)'과 '효(孝)'를 실천한 미담을 발굴하고 이런 원리를 담은 철학을 바탕으로 관리를 선발해 많은 이들이 자나깨나 읊고 외우게 만들었다. 피통 치자가 자발적으로 유순하고 체제에 순응하는 신민(臣民)이 되는 시스템의 기반을 소프트웨어에서 찾은 것이다.

- '조선은 왜 망했는가?'는 일제 강점의 역사가 있는 한국에서 중요한 질문 이다. 하지만 그렇게 문제가 많은 나라가 500여 년이나 유지된 이유도 고민 해봐야 균형이 맞지 않을까. 전 근대 역사에서 한 왕조가 100년을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말이다. 비록 500여 년의 끄트머리는 처참하고 굴욕적인 결말로 귀결됐지만, 그 앞의 긴 역사를 이끈 원동력은 생각해볼 점 이 있다.
굴욕의 역사를 겪은 한국 사람들은 철두철미한 하드웨어의 힘에 천착해 전진해왔다. 그 결과 명실상부한 선진국이자 'G8'을 논하는 데까지 왔다. 동 시에 하나의 성적표를 더 받았다. 삶에 대한 만족도는 세계 꼴찌 (42.3%)이고 사회가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건 1등이며 자녀가 기쁨보다는 부담이라는 생각도 세계 1등을 차지했다. 세계에서 가장 우울하고 불행하고 자녀까지 부담스러운 자칭 'G8'이 한국의 성적표다.
전통적인 유교의 가치를 되살리자거나 논어의 가르침을 받들자는 의미가 아니다. 필자는 유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지금 한국 사회가 마주한 문제가 단순히 경제와 같은 '하드웨어'만으로 해결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오천만 명이 모인 이 공동체가 하나의 국가와 사회를 이루고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소프트웨어'의 엔진이 꺼졌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수천 년의 역사를 지배해온 '마음속의 CCTV'를 우리는 이제 어떻게 활용 해야 할까. '문화'라는 소프트웨어는 이 불행한 나라에 어떤 답을 찾아줄 수 있을까.

- <신뢰이동>에는 공유경제의 3단계 과정을 '아이디어 -플랫폼-신뢰 형성'으로 나눈다. '겨우 앱으로 차와 사람을 이어주는 게 무슨 혁신?'이라는 비 판은 플랫폼만 갖춘 기업에 적용된다. 타다는 그 위에서 신뢰까지 성공적으 로 만들어냈다.
'부르면 제때 올까?', '불친절하진 않을까?', '불쾌한 일을 당할 때 책임져 줄까?' 이 3가지는 신뢰의 문제다. 원래는 국가의 보증(= 면허)이 해야 하지 만 잘 해결하지 못했다. 타다는 알고리즘과 적극적인 차량 투자로 이 3가지 신뢰 문제를 해결했다. 별점은 정보비대칭 문제를 해소했다. 이 별점을 믿는 것도 타다를 믿기 때문이다. 타다는 신뢰를 면허에서 플랫폼으로 빨아들였 다. 모빌리티 시장의 신뢰가 국가에서 플랫폼으로 이동한 것이다.
- 글로벌 PR기업인 에델만의 신뢰지표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은 정부 관계자보다 페이스북 친구를 두 배 이상 믿는다고 한다. 사람들의 믿음이 점차 자기 랑 비슷한 사람에게 옮겨가 플랫폼으로 모이는 것이다.
국가나 대기업 브랜드와 마찬가지의 역할을 해온 매스 미디어의 고민도 여기서 나온다. 과거에는 매스 미디어가 전문성과 사실에 대한 '도장'을 찍어 줬다. 신문에 나와야 전문가이고 팩트였다. 지금은? 소셜 미디어에서 인정받 고, 유튜브 채널에서 구독자를 모으며 영향력이 쌓인다. 여전히 레거시 미디 어의 영향력은 크지만 고민도 커지는 지점이다.
앞으로 유니콘은 훨씬 더 많아질 전망이다. 반면, 그들이 평가받는 가치만 큼 국가와 대기업의 기득권은 줄어들 것이다. 17세기에 스코틀랜드 금세공업자들은 금 보관증을 화폐로 만들어 왕실의 시뇨리지(seigniorage, 주조차익)를 잠식해갔다. 왕이 도장을 찍어야 인정받던 화폐를 금 보관증이 대신한 것 이다. 훗날 정부가 이걸 깨닫고 규제하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꼭 플랫폼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흐름을 알아채고 신뢰를 쌓은 '신뢰 부자' 도 더욱 많아질 것이다. 개업한 별점 5점짜리 맛집이 100년 노포를 이기는 게 현실이다. 1인 유튜버가 기자가 수백 명인 전문 매체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소셜 미디어에서의 평판이나 계정의 신뢰성은 그 사람의 중요한 자산이 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신뢰 시스템은 기존 시스템보다 훨씬 냉정하다. 유명 인플루언서도 '광고' 한 번에 무너지곤 한다. 광고비를 받고 신뢰를 팔았기 때문이다.

- 지금은 희귀금속 생산량의 대부분을 중국이 차지하지만, 1980년대까지는 미국이 이 시장을 지배했다. 이게 중국으로 넘어간 건 한마디로 '너무 더러워 서'다. 개발도상국의 오지로 넘길 만큼 심각한 오염을 초래하는 산업이란 얘 기다. 여기에 환경주의 진영에서 기겁하는 방사능까지 배출한다. 바오터우의 취수장 방사능 수치는 체르노빌의 2배나 된다. 희귀금속에서 방사능이 나오 는건 아니지만, 정제 과정에서 배출량이 상당하다.
유럽과 미국의 신재생에너지 발전 드라이브의 이면에는 중국이나 아프리 카의 희귀금속 채굴이 자리잡고 있다. 서울에 전기차가 늘어나면 서울의 대 기오염은 줄지만, 화력발전소가 몰려 있는 충청남도의 대기는 더러워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테슬라 차주가 늘어나면 콩고민주공화국 킨샤사의 코발트 광산에는 더 많은 아이 노동자가 투입된다.
경제적 문제도 남아있다. 전 세계 희토류 시장 규모는 7조원 정도다. 이 시 장의 95%를 중국이 지배한다. 여기에 반도체와 앞으로 수십 배 성장할 신재 생에너지, 전기차가 올라타 있다. 반도체만 해도 시장 규모가 600조 원이 넘 는다. 희귀한 한 줌의 흙에 세계 경제가 올라탄 셈이다.
1970년대까지 석유 공급에 출렁이던 세계 경제는, 산유국이 늘고 결정적 으로 미국발 셰일혁명을 겪으며 안정을 찾았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미사일이 떨어지면 세계 경제가 하루 이틀은 충격을 받겠지만, 그 이상 휘청거리진 않 는다. 반면, 스마트폰이나 전기차에 20~30가지씩 들어가는 희귀금속 중 몇 가지만 병목이 걸려도 애플과 삼성, 테슬라 같은 거대 공룡들의 생산 체계가 삐걱대면서 글로벌 경제를 위태롭게 만든다.
1980년대 들어 서구사회는 희귀금속 시장을 중국에 완전히 넘겨줬다. 하지만 중국은 그저 돈이나 많이 벌려고 이 시장을 선택한 게 아니다. 1992년에 덩 샤오핑은 "중동에는 석유가 있고, 중국에는 희토류가 있다"고 말했다. 이미 30여 년 전부터 중국은 희귀금속에 대해 전략자원으로 접근한 것이다.

- 우리가 알던 룰이 바뀌었다. 가장 큰 변화는 '공짜' 세계화가 끝나간다는 것이다. 상황이 변했고 세계의 규칙도 바뀌고 있다. '주식회사 미국 그룹의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미국의 계열사로 남으려면 더 이상 공짜는 없다. 호주처럼 자원 기지가 되든지, 폴란드처럼 최전선 보루가 되든지, 일본처럼 바다를 나눠 지키든지. 이제는 본사 미국에 보낼 수표에 얼마를 써서 낼지 정할 시간이다.

- 중국의 현재가 '서구식 자본주의 발전 경로'라는 틀로 설명이 안 되면 새로 운 틀이 필요하다. 이 책이 말하는 '중국화'가 바로 그 틀이다. '중국화'라고 하면 대게는 기분 나쁜 인상을 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화는 정확히 말하 면 '송나라화'다. 1000년 전 중국 왕조, 그 송나라다.
저자는, 중국은 '서구화하는 게 아니라 1000년 전 시작한 '송나라화'를 다 시 가열차게 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근대의 기틀을 닦은 근세(近世)가 15세기 유럽이 아니라 9세기 송나라에서 시작됐다는 '송 근세'이다. 이 관 점으로 보면 중국이 외치는 '굴기(起)'가 미스터리하지 않다. 경로이탈에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1000년 전 송나라에서 근세가 시작됐다고? 이는 젊은 재야사학자가 한 얘 기가 아니라 1920년대 일본의 석학 나이토 고난湖南이 한 말이다. 그러니까 이 책 <중국화 하는 일본>은 100년 전 나온 송 근세설을 가져와서 최근 동북 아의 정세를 살짝 풀어냈을 뿐이다.
송나라화의 핵심은 '귀족제도를 폐지하고 황제 전제정치를 시작한 것'이다. 저자는 송나라 때 귀족제가 폐지됐다고 말한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고 본격 도입한 과거제로 선발한 관료에 의한 통치로 대체됐다고 말한다.
한국은 조선사 500년 경험이 있어 과거제도를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당시 송나라 입장에서는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다. 1억 명에 달하는 인구가 통일 된 지식 체계를 공부하고, 시험을 거쳐서 권력을 얻어낸 거니까. 그것도 무려 1000년 전에 말이다.
지방으로 발령 받은 중앙 관료가 귀족(=호족)의 권력을 제압하면서 국가 시스템이 확립된다. 즉, 황제 빼곤 모두가 (상대적으로) 대등하게 경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개작두로 호족의 망나니 아들의 목을 뎅강뎅강 하던 판관 포청천이 바로 송나라 관료다. 저자는, 중국이 송나라 때부터 계급제가 폐지 됐다고 주장한다. 파격적이다.
- 화폐경제도 이때 시작됐다. 세계 최초의 지폐가 사용됐고, 화폐 공급이 경제를 따라가지 못하자 신용 화폐인 어음까지 등장했다. 화폐경제는 국가가 나서서 권장했는데 세금을 물납(物)이 아닌 돈으로 받기 시작한 게 결정적 이다. 1000년 전에 말이다. 지금이야 세금을 화폐로 내는 게 당연하지만, 세 계사를 보면 쌀 같은 현물로 내는 게 대부분 아니었던가
송나라는 중앙 권력이 강했지만,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은 풀어놨다. 봉건 제에서 농민은 귀족의 재산'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었다. 송나라 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지니 농민 입장에선 "어라, 쌀을 팔면 돈이 생기네. 그럼 다른 도시로 가서 사고팔아 볼까"하는 생각이 든다. 화폐경제와 이동의 자유가 만나면서 상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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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

대담한 작전

역사 2024. 4. 17. 08:10

- 농업과 산업 기반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한 소규모 기습은 중세와 근대 초기의 전쟁에서 거의 언제나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기습이 개별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빚어낸 적은 거의 없다. 따라서 그들 역시 특수작전의 정의와는 맞지 않는다. 알레포 시장이나 오리올의 방앗 간 같은 시설들이 특수작전의 대상이 될 만큼 가치를 지니는 것은 오로지 독특한 정황이 갖춰졌을 때뿐이다.
군대에 필요한 장비가 갑옷, 칼, 투구 등 몇 가지밖에 없고, 보급품 을 위해 본국의 산업생산에 기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여기 서 반드시 강조해야겠다." 일반 화살과 석궁 화살은 대량으로 필요했다. 때로는 군주들이 수십만 개의 석궁 화살을 사들이거나 요구하 기도 했다. 잉글랜드 국왕 존은 1212년에 석궁 화살 21만 개를 구매 했고, 아라곤의 하이메 1세는 1272년에 석궁 화살 10만 개를 내놓 으라고 백성들에게 요구했다. 백년전쟁 때 프랑스에서 작전을 치던 잉글랜드 군대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장궁 화살이 필요했 다. 예를 들어 영국 왕이 1421년에 구매한 화살은 42만 5,000개나 된다"
그러나 현대에 비하면 이만한 수량도 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 다. 또한 중세 통치자들은 보통 필요한 만큼의 화살을 현장에서 제 작하거나 외국상인에게서 사들이는 방법을 썼다. 많은 도시와 마을 에 할당량을 정해주기도 했다." 하이메 1세가 1272년에 요구한 10만 개의 석궁 화살은 여러 마을이 나눠서 공급했다. 바르셀로나는 1만 5,000개를 공급하고, 우에스카는 4,000개를 공급하는 식이었다." 도 시와 지방에서 산업생산은 소규모 공방들이 담당했다. 대규모 조립라인에서 똑같은 물건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장인들이 손으로 일일이 물건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군대가 수십만 개의 화살을 본국에서 공급받는다 하더라 도, 전국에 흩어진 소규모 공방에서 많은 장인들이 만들어냈다. 이러 니 어느 한 도시의 공방 몇 군데를 파괴하기 위해 특수작전을 수행하 는 것은 웃기는 일이었다. 예컨대 바르셀로나에서 이런 작전을 시행 했다 해도, 발렌시아나 이탈리아 남부에서 작전 중인 아라곤 군대에 는 아무런 영향이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화약이 혁명을 일으킨 뒤에도 이런 현실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16세기까지는 그랬다. 군대가 요구하는 화약, 포탄, 화 승총탄의 양이 중세 군대가 요구하던 화살의 양보다 확실히 많기는 했다. 1513년에 잉글랜드는 프랑스 침공을 위해 화약 510톤을 실어 보냈고, 투르네 공성전에서는 대포 180문이 매일 최대 32톤까지 화 약을 소비했다." 1565년 몰타 공성전 때 튀르크 군대가 쏜 포탄은 13만 개로 추정된다. 화승총탄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되었다."
- 그러나 생산방법은 여전히 중세와 다를 바 없었으며, 외국 상인들에게서 사들이는 화약과 무기의 비중이 컸다. 특수작전의 유혹을 불러 일으킬 만큼 규모가 큰 무기 공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화약고는 매력적인 표적이었다. 기술적으로 파괴하기가 몹시 쉬웠 기 때문이다." 육군의 화약 운송열차, 함대에 보급되는 화약, 도시의 화약고 등을 날려버린다면 적에게 치명적인 일격이 될 수 있었다. 예 를 들어 1453년 하버러 전투에서 헨트 시민군은 포병의 부주의로 화 약고 일부가 폭발하자 겁에 질려 도망쳐버렸다(헨트 시민들은 부르고뉴의 지나친 과세에 항의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제압되었다-옮긴이) 15세 기 말에는 성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이던 군대가 화약이 떨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포위를 푸는 일이 잦았다. 한편 포위된 도시 또 한 비슷한 문제에 직면하면 적에게 함락되곤 했다."
그러나 화약고가 종종 사고로 폭발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화약고 를 목표로 특수작전이 시행된 기록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당혹스 러운 결과다. 어쩌면 특수작전에 대한 중세식의 인식이 여전히 지배 적이어서, 화약혁명 이후 나타난 새로운 전쟁 양상과 사건들 중 일부 가가려져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 정치, 군사, 종교 지도자들은 특수작전의 주요 표적이 었다. 그들이 적의 군대뿐만 아니라 전쟁 의지 전체를 지탱해주는 유 일한 존재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사도 시대에 상비군이나 상 시적인 군대 위계질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미군에 대 해 말하듯이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군이나 아라곤군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시에는 오로지 다양한 규모의 '프랑스계' 부대나 '아라곤' 부대가 존재했을 뿐이다. 그들은 영지 주둔 병력, 용병대, 민병대, 동맹국 지원대, 떠돌아다니는 개인 등이 임시로 한데 모여 형성된 부대였다. 원정이 끝나면 부대는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또 부대가 만들어질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충성심의 지속기간도 군대의 지속기간보다 아주 조금 더 길 뿐이 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병사 개개인과 지휘관들 사이의 유대가 아주 오랫동안 강력하게 지속되기도 했지만, 군대 전체는 다른 문제였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내내 군대에는 기강 해이, 탈영, 반란, 두말할 여지가 없는 반역이 만연했다. 군대의 동맹관계는 수시로 변할 때가 많았으므로, 오늘의 친구가 내일은 얼마든지 적이 될 수 있었다. 영지 들의 충성심은 특히 내전이나 계승전쟁의 경우 변덕을 부리기 일쑤 였다. 용병들의 충성심은 이보다 훨씬 더 미약했고, 병사들과 장교들 은 물론 분대 전체가 전쟁을 하다 말고 반란을 일으키거나 아예 다른 진영으로 넘어가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당시에도 이런 짓은 밉살스럽게 여겨졌지만, 병사나 장교나 분대 가한 계절에는 이쪽 군주를 위해 싸우다가 다음 계절에는 반대편 군 주를 위해 싸우는 일은 그들의 세계에서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6세기에는 여러 군대들이 거대한 규모의 '의자 뺏기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부대들이 끊임없이 동맹을 바꿨기 때문에, 한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으로 싸우던 분대가 다음 전투에서는 '합스부르크'군으로 나타나곤 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이 이런 군대에 합류하거나 군대를 떠나는 데에는 다양한 개인적인 이유들이 작용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들을 꼽아 보면 자신의 영주나 특정한 친구에 대한 충성심과 의리, 고정된 보수 와 전리품을 받아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사회적 지위를 높 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명예를 얻어 남성성을 확립하고 싶다는 욕 망, 모험에 대한 열망 등이 있다. 애국심이나 신앙심은 대개 이보다 중요도가 떨어졌다. 
이런 식으로 구성된 군대를 하나로 묶어 지탱해주는 것은 순전히 사령관의 능력인 경우가 많았다. 군대를 구성하는 여러 부대의 충성 심은 추상적인 이상이나 정치체제보다 사령관을 향하고 있었다. 사 령관은 경우에 따라 영주이기도 하고, 친구나 동맹이기도 하고, 단순 히 돈을 지불하는 고용주이기도 했다.

-  합스부르크 가문은 처음에 스위스의 소지주로 출발했으나, 16세기 말에는 가문 소유의 영 토가 북해에서부터 지브롤터까지 유럽을 뒤덮고, 필리핀부터 멕시코 까지 세계로 펼쳐져 있었다.
군대와 제국이 가문의 일인 것처럼, 전쟁의 목적 또한 사령관 본인 이나 가문의 이득을 위한 것일 때가 많았다. 전쟁은 왕가의 이익과 상 속권을 위해 군주들이 벌이는 "다른 수단을 이용한 송사의 연장" 8 이 었다." 십자군 전쟁을 제외하고, 이 시기의 모든 주요 분쟁 (아라곤-앙 주 전쟁, 백년전쟁, 장미전쟁, 이탈리아 전쟁 등)은 대체로 왕가의 상속권을 둘러싼 싸움이었다. 유럽의 모든 왕국, 공작령, 백작령이 계승전쟁으 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전쟁에서 지휘관의 비중이 이처럼 컸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적 사령관을 공격해서 쓰러뜨린 것만으로도 더 이상의 전투나 포위 공격이나 원정 없이 완벽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 암살과 납치의 가장 큰 약점은 불명예스러운 싸움방법이라는 점이 었다. 암살과 납치는 당시를 지배하던 정치문화의 약점을 온전히 이 용하는 한편, 바로 그 문화 전체를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고전적인 '죄수의 딜레마'(협력적인 선택이 둘 모두에게 최선인데도,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한 선택으로 인해 둘 모두에게 불리한 결과를 낳는 현상옮긴이) 사례라 고 할 수 있다. 암살과 납치를 가장 먼저 조직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엄청난 보상을 얻을 가능성이 높지만, 곧 모든 사람이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되면 정치질서도 변할 것이고, 이것이 모든 통치자들에 게 달갑지 않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군사적 수단으로 다른 곳보다 훨 씬 더 암살에 의존했던 중세의 중동과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안정적인 왕조와 영지를 찾아보기가 서유럽에 비해 훨씬 더 힘들다는 점 이 좋은 예다. 
서유럽에서도 이단과 이교도에게는 암살과 납치가 널리 사용되었 다. 같은 기독교인에게도 가끔 사용되기는 했으나, 금기의식이 여전 히 남아 있었다. 이것이 봉건 정치체제가 상대적인 안정성을 유지하 는 데 기여한 요소였다. 이탈리아의 일부 군주와 폭군을 제외하면, 중 세나 르네상스 시대 유럽에서 니자리파와 유토피아인의 본을 따라 암살을 정치와 군사의 일반적인 도구로 이용하거나 특수한 암살부대 를 훈련시키려고 시도한 주요 정치세력이나 군대는 없었다. 암살을 군사적인 도구로 이용할 때도, 이것이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 아니라 더럽고 부끄러운 방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암살과 납치에 대한 문화적 금기의식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이 런 작전이 성공을 거뒀을 때조차 명예에 흠집이 났다는 것을 뜻했 다. 실패라도 하는 날에는 언제나 대외적인 이미지 면에서 재앙을 만난 격이었다. 전투의 패배가 흔히 명예롭게 여겨지는 것과는 달랐다.!!"
- 18세기 이후 전쟁을 정당화한 논리들에도 불구하고, 납치와 암살 이 여전히 군사적 금기로 남아 있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하다. 명예 와 계급 이익의 제단에 승리를 제물로 바치는 기사도 시대의 군인정 신이 아직도 남아 세계 지도자들을 적의 손길로부터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토머스는 1983년에 특수작전을 다룬 글에서 명 예에 대한 기사도적 인식이 20세기가 밝은 지 한참 지났을 때까지도 특수작전의 발목을 잡았다고 주장했다. 직업 장교들이 특수작전을 "군인의 명예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머스 본인도 비록 특수작전의 최근 역사와 미래의 잠재력을 포괄적으로 개관하려고 시도하면서도, 암살의 시행방법과 유 용성에 대한 논의는 회피했다.
기사도의 '공정한 경기 규칙을 단순한 환상으로 치부해버리고, 전 장에서는 승리를 위해 어떤 수단이든 쓸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이 라면 표적 사실과 정치적 암살에 부과된 제한과 그런 행위를 둘러싼 현재의 논란을 생각해보기 바란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인류의 완벽한 파멸을 위해 계산된 계획 을 수립하던 대통령, 의장, 원수 등도 다른 지도자들의 암살 사건에 대해서는 떨떠름한 시선을 보냈다. 1976년에 미국의 제럴드 포드 대 통령은 미국 정부의 공무원들이 정치적 암살을 모의하는 것을 불법 으로 규정한 행정명령 제11905호를 발표했다. 레이건 대통령도 행정 명령 제12333호를 통해 이 명령을 지지했고, 그 뒤를 이은 모든 미국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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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7

Quote of the day 2024. 4. 17.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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