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업과 산업 기반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한 소규모 기습은 중세와 근대 초기의 전쟁에서 거의 언제나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기습이 개별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빚어낸 적은 거의 없다. 따라서 그들 역시 특수작전의 정의와는 맞지 않는다. 알레포 시장이나 오리올의 방앗 간 같은 시설들이 특수작전의 대상이 될 만큼 가치를 지니는 것은 오로지 독특한 정황이 갖춰졌을 때뿐이다.
군대에 필요한 장비가 갑옷, 칼, 투구 등 몇 가지밖에 없고, 보급품 을 위해 본국의 산업생산에 기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여기 서 반드시 강조해야겠다." 일반 화살과 석궁 화살은 대량으로 필요했다. 때로는 군주들이 수십만 개의 석궁 화살을 사들이거나 요구하 기도 했다. 잉글랜드 국왕 존은 1212년에 석궁 화살 21만 개를 구매 했고, 아라곤의 하이메 1세는 1272년에 석궁 화살 10만 개를 내놓 으라고 백성들에게 요구했다. 백년전쟁 때 프랑스에서 작전을 치던 잉글랜드 군대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장궁 화살이 필요했 다. 예를 들어 영국 왕이 1421년에 구매한 화살은 42만 5,000개나 된다"
그러나 현대에 비하면 이만한 수량도 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 다. 또한 중세 통치자들은 보통 필요한 만큼의 화살을 현장에서 제 작하거나 외국상인에게서 사들이는 방법을 썼다. 많은 도시와 마을 에 할당량을 정해주기도 했다." 하이메 1세가 1272년에 요구한 10만 개의 석궁 화살은 여러 마을이 나눠서 공급했다. 바르셀로나는 1만 5,000개를 공급하고, 우에스카는 4,000개를 공급하는 식이었다." 도 시와 지방에서 산업생산은 소규모 공방들이 담당했다. 대규모 조립라인에서 똑같은 물건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장인들이 손으로 일일이 물건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군대가 수십만 개의 화살을 본국에서 공급받는다 하더라 도, 전국에 흩어진 소규모 공방에서 많은 장인들이 만들어냈다. 이러 니 어느 한 도시의 공방 몇 군데를 파괴하기 위해 특수작전을 수행하 는 것은 웃기는 일이었다. 예컨대 바르셀로나에서 이런 작전을 시행 했다 해도, 발렌시아나 이탈리아 남부에서 작전 중인 아라곤 군대에 는 아무런 영향이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화약이 혁명을 일으킨 뒤에도 이런 현실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16세기까지는 그랬다. 군대가 요구하는 화약, 포탄, 화 승총탄의 양이 중세 군대가 요구하던 화살의 양보다 확실히 많기는 했다. 1513년에 잉글랜드는 프랑스 침공을 위해 화약 510톤을 실어 보냈고, 투르네 공성전에서는 대포 180문이 매일 최대 32톤까지 화 약을 소비했다." 1565년 몰타 공성전 때 튀르크 군대가 쏜 포탄은 13만 개로 추정된다. 화승총탄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되었다."
- 그러나 생산방법은 여전히 중세와 다를 바 없었으며, 외국 상인들에게서 사들이는 화약과 무기의 비중이 컸다. 특수작전의 유혹을 불러 일으킬 만큼 규모가 큰 무기 공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화약고는 매력적인 표적이었다. 기술적으로 파괴하기가 몹시 쉬웠 기 때문이다." 육군의 화약 운송열차, 함대에 보급되는 화약, 도시의 화약고 등을 날려버린다면 적에게 치명적인 일격이 될 수 있었다. 예 를 들어 1453년 하버러 전투에서 헨트 시민군은 포병의 부주의로 화 약고 일부가 폭발하자 겁에 질려 도망쳐버렸다(헨트 시민들은 부르고뉴의 지나친 과세에 항의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제압되었다-옮긴이) 15세 기 말에는 성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이던 군대가 화약이 떨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포위를 푸는 일이 잦았다. 한편 포위된 도시 또 한 비슷한 문제에 직면하면 적에게 함락되곤 했다."
그러나 화약고가 종종 사고로 폭발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화약고 를 목표로 특수작전이 시행된 기록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당혹스 러운 결과다. 어쩌면 특수작전에 대한 중세식의 인식이 여전히 지배 적이어서, 화약혁명 이후 나타난 새로운 전쟁 양상과 사건들 중 일부 가가려져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 정치, 군사, 종교 지도자들은 특수작전의 주요 표적이 었다. 그들이 적의 군대뿐만 아니라 전쟁 의지 전체를 지탱해주는 유 일한 존재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사도 시대에 상비군이나 상 시적인 군대 위계질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미군에 대 해 말하듯이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군이나 아라곤군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시에는 오로지 다양한 규모의 '프랑스계' 부대나 '아라곤' 부대가 존재했을 뿐이다. 그들은 영지 주둔 병력, 용병대, 민병대, 동맹국 지원대, 떠돌아다니는 개인 등이 임시로 한데 모여 형성된 부대였다. 원정이 끝나면 부대는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또 부대가 만들어질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충성심의 지속기간도 군대의 지속기간보다 아주 조금 더 길 뿐이 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병사 개개인과 지휘관들 사이의 유대가 아주 오랫동안 강력하게 지속되기도 했지만, 군대 전체는 다른 문제였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내내 군대에는 기강 해이, 탈영, 반란, 두말할 여지가 없는 반역이 만연했다. 군대의 동맹관계는 수시로 변할 때가 많았으므로, 오늘의 친구가 내일은 얼마든지 적이 될 수 있었다. 영지 들의 충성심은 특히 내전이나 계승전쟁의 경우 변덕을 부리기 일쑤 였다. 용병들의 충성심은 이보다 훨씬 더 미약했고, 병사들과 장교들 은 물론 분대 전체가 전쟁을 하다 말고 반란을 일으키거나 아예 다른 진영으로 넘어가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당시에도 이런 짓은 밉살스럽게 여겨졌지만, 병사나 장교나 분대 가한 계절에는 이쪽 군주를 위해 싸우다가 다음 계절에는 반대편 군 주를 위해 싸우는 일은 그들의 세계에서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6세기에는 여러 군대들이 거대한 규모의 '의자 뺏기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부대들이 끊임없이 동맹을 바꿨기 때문에, 한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으로 싸우던 분대가 다음 전투에서는 '합스부르크'군으로 나타나곤 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이 이런 군대에 합류하거나 군대를 떠나는 데에는 다양한 개인적인 이유들이 작용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들을 꼽아 보면 자신의 영주나 특정한 친구에 대한 충성심과 의리, 고정된 보수 와 전리품을 받아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사회적 지위를 높 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명예를 얻어 남성성을 확립하고 싶다는 욕 망, 모험에 대한 열망 등이 있다. 애국심이나 신앙심은 대개 이보다 중요도가 떨어졌다.
이런 식으로 구성된 군대를 하나로 묶어 지탱해주는 것은 순전히 사령관의 능력인 경우가 많았다. 군대를 구성하는 여러 부대의 충성 심은 추상적인 이상이나 정치체제보다 사령관을 향하고 있었다. 사 령관은 경우에 따라 영주이기도 하고, 친구나 동맹이기도 하고, 단순 히 돈을 지불하는 고용주이기도 했다.
- 합스부르크 가문은 처음에 스위스의 소지주로 출발했으나, 16세기 말에는 가문 소유의 영 토가 북해에서부터 지브롤터까지 유럽을 뒤덮고, 필리핀부터 멕시코 까지 세계로 펼쳐져 있었다.
군대와 제국이 가문의 일인 것처럼, 전쟁의 목적 또한 사령관 본인 이나 가문의 이득을 위한 것일 때가 많았다. 전쟁은 왕가의 이익과 상 속권을 위해 군주들이 벌이는 "다른 수단을 이용한 송사의 연장" 8 이 었다." 십자군 전쟁을 제외하고, 이 시기의 모든 주요 분쟁 (아라곤-앙 주 전쟁, 백년전쟁, 장미전쟁, 이탈리아 전쟁 등)은 대체로 왕가의 상속권을 둘러싼 싸움이었다. 유럽의 모든 왕국, 공작령, 백작령이 계승전쟁으 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전쟁에서 지휘관의 비중이 이처럼 컸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적 사령관을 공격해서 쓰러뜨린 것만으로도 더 이상의 전투나 포위 공격이나 원정 없이 완벽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 암살과 납치의 가장 큰 약점은 불명예스러운 싸움방법이라는 점이 었다. 암살과 납치는 당시를 지배하던 정치문화의 약점을 온전히 이 용하는 한편, 바로 그 문화 전체를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고전적인 '죄수의 딜레마'(협력적인 선택이 둘 모두에게 최선인데도,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한 선택으로 인해 둘 모두에게 불리한 결과를 낳는 현상옮긴이) 사례라 고 할 수 있다. 암살과 납치를 가장 먼저 조직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엄청난 보상을 얻을 가능성이 높지만, 곧 모든 사람이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되면 정치질서도 변할 것이고, 이것이 모든 통치자들에 게 달갑지 않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군사적 수단으로 다른 곳보다 훨 씬 더 암살에 의존했던 중세의 중동과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안정적인 왕조와 영지를 찾아보기가 서유럽에 비해 훨씬 더 힘들다는 점 이 좋은 예다.
서유럽에서도 이단과 이교도에게는 암살과 납치가 널리 사용되었 다. 같은 기독교인에게도 가끔 사용되기는 했으나, 금기의식이 여전 히 남아 있었다. 이것이 봉건 정치체제가 상대적인 안정성을 유지하 는 데 기여한 요소였다. 이탈리아의 일부 군주와 폭군을 제외하면, 중 세나 르네상스 시대 유럽에서 니자리파와 유토피아인의 본을 따라 암살을 정치와 군사의 일반적인 도구로 이용하거나 특수한 암살부대 를 훈련시키려고 시도한 주요 정치세력이나 군대는 없었다. 암살을 군사적인 도구로 이용할 때도, 이것이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 아니라 더럽고 부끄러운 방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암살과 납치에 대한 문화적 금기의식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이 런 작전이 성공을 거뒀을 때조차 명예에 흠집이 났다는 것을 뜻했 다. 실패라도 하는 날에는 언제나 대외적인 이미지 면에서 재앙을 만난 격이었다. 전투의 패배가 흔히 명예롭게 여겨지는 것과는 달랐다.!!"
- 18세기 이후 전쟁을 정당화한 논리들에도 불구하고, 납치와 암살 이 여전히 군사적 금기로 남아 있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하다. 명예 와 계급 이익의 제단에 승리를 제물로 바치는 기사도 시대의 군인정 신이 아직도 남아 세계 지도자들을 적의 손길로부터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토머스는 1983년에 특수작전을 다룬 글에서 명 예에 대한 기사도적 인식이 20세기가 밝은 지 한참 지났을 때까지도 특수작전의 발목을 잡았다고 주장했다. 직업 장교들이 특수작전을 "군인의 명예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머스 본인도 비록 특수작전의 최근 역사와 미래의 잠재력을 포괄적으로 개관하려고 시도하면서도, 암살의 시행방법과 유 용성에 대한 논의는 회피했다.
기사도의 '공정한 경기 규칙을 단순한 환상으로 치부해버리고, 전 장에서는 승리를 위해 어떤 수단이든 쓸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이 라면 표적 사실과 정치적 암살에 부과된 제한과 그런 행위를 둘러싼 현재의 논란을 생각해보기 바란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인류의 완벽한 파멸을 위해 계산된 계획 을 수립하던 대통령, 의장, 원수 등도 다른 지도자들의 암살 사건에 대해서는 떨떠름한 시선을 보냈다. 1976년에 미국의 제럴드 포드 대 통령은 미국 정부의 공무원들이 정치적 암살을 모의하는 것을 불법 으로 규정한 행정명령 제11905호를 발표했다. 레이건 대통령도 행정 명령 제12333호를 통해 이 명령을 지지했고, 그 뒤를 이은 모든 미국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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