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사역사학과 환국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후기에 『삼국유사』를 오독해서 '환국' 이 등장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因의 이체자 문제를 넘어서서 당 대의 많은 사료가 '확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유학자의 오독 때문에 '환국'이 등장하고 민족 자존감을 앙양시켜야 했던 역사가들이 '한국'을 주창하면서 잘못 읽은 단어가 널리 퍼지고 말았다. 그리고 해방 후 이 과정이 바로잡혀가던 중에 유사역사가들이 '위대한 환국'을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그 결정판이 바로 『환단고기』다. 애초에 잘못된, 있지도 않은, 사상누각이라는 말도 아까운 해프닝이 바로 '환국이다.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고 했는데, 환국의 난이야 말로 우리 역사상 사료 오독 제1대 사건이라 할 것이다.
1966년에 문정창이 단군조선사기연구檀君朝鮮史記研究를 내놓 으면서 일제가 '환국을 말살하려 했다는 주장을 폈다. 식민사학자 이마 니시 류가 사서를 변조해가면서 환국을 말살하려고 했다는 주장은 반일 감정에 편승해 시민들에게 먹혀들었고, 이후 유사역사가들의 단골 메뉴 가 되었다. 문정창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부터 일제의 공무원으로 근무 하기 시작해서 1932년에는 '조선쇼와5년국세조사기념장'을 수여받았고, 1942년에는 충청북도 내무부 사회과 사회주사(고등관 7등), 1943년에는 황해도 은율군수, 1945년에는 이사관으로 승진하여 황해도 내무부 사회 과장을 지낸 친일파다.
- 흑백논리를 벗어나야
유사역사가들의 큰 문제점은 흑백논리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들은 신 채호가 한 말을 금과옥조로 알고 그것에서 벗어나면 식민사학이 된다는 흑백논리를 가지고 있다. 신채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역사 연 구를 병행했다. 그가 볼 수 있는 자료에는 한계가 있었고, 시대도 그를 학 문에만 매진하게 도와주고 있지 않았다. 당연히 그의 주장 중에는 오늘 날 잘못된 것이 있으며 학문이라는 것은 그런 잘못된 부분을 보완하고 수정하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유사역사가들은 강단의 식민사학자들이 이병도의 학설을 하나도 수정하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처럼 자꾸 거짓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이병도의 학설 역시 엄청나게 많은 부분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유사역사가들은 신채호의 주장 중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이 나타나면 식민사학이라고 하고, 이병도의 주장 중 받 아들이는 것이 있으면 그것도 식민사학이라고 한다. 이런 식의 흑백논리 라면 학문은 전혀 발전할 수 없는 고정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유사역사학은 1960년대부터 발현해서 1970년대를 거치 며 증폭되었다. 우리나라의 유사역사학이 태동도 하기 전에 살았던 신채 호가 유사역사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앞으로는 신채호를 역사학계에 서 유사역사가라고 한다는 등의 거짓 선전선동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신 채호는 그렇게 유사역사학의 방패막이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우리 역 사학의 소중한 사람이다.

- 서로 다른 해석이 모여 발전을 이룬다
백제의 요서경략설은 교과서에 실리면서 학계의 주류 통설처럼 여겨 진 면이 있다. 하지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만든 『한국사』(1995)에서는 백 제의 요서경략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역사학의 통설은 사실이 아닌 쪽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1974년 요서경략설이 실린 이후 2007년 한국사 교과서 개정안에 와서 야 요서경략설과 관련해 논란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라고 했고, 2015년 개정안 집필 기준에서 요서경략설이 빠졌다. 역사학에서 하나의 설이 교 과서에서 조정되기가 이렇게 오래 걸리고 어려운 것이다.
백제가 요서 지방을 차지하고 군을 설치하였다는 기사는 중국 정사에서 확인된다. 기사 작성 시점과 그 일이 있었던 시점이 멀지 않고, 백제와 중국 사 이에 사절의 왕래가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사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해 석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의 논란이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여 신중을 기하 도록 한다. (07개정 역사과 집필기준)
백제가 요서경략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논문이 나오자 그에 반대하여 요서와 백제 간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논 문이 또 나오고, 그에 대해 다시 연구하는 논문이 나오면서 역사학계는 요서 지방의 변천을 두고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가령 385년 요서 지방에 서는 후연 장군 여암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여암은 후연에 잡혀온 부여인 후예로 여겨진다. 그런데 백제 왕실은 부여 씨로 보통 여 씨로 쓴다. 이런 사실이 백제가 요서를 경략한 것처럼 혼동하게 되는 요소였을 가능성도 높다. 반론 속에서 연구가 깊어지지 않았다면 이런 사실을 밝혀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시립대 안정준 교수는 백제가 남조 국가들을 속여넘긴 것이 아니 라, 내막을 뻔히 알면서도 중화 중심의 국제적 권위를 내세움과 동시에 정권의 안정을 기하고자 백제가요서를 차지했다고 허풍을 친 것을 받아 들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백제 요서경략설에 대한 새로운 학설이 등장한 것이다. 앞으로 이 주장을 두고 더욱 치밀한 검증이 있을 것이다.
역사학은 이와 같이 같은 사료를 놓고도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으면서 발전해 나간다.
- 백제인의 선택
그럼 임나일본부라는 건 대체 뭘까? 왜 「일본서기』 안에 들어 있을까? 『일본서기』 안에는 백제 관련 사료가 많이 있다. 어떤 기록은 『삼국사 기보다 양도 많고 정확하여 백제 역사를 복원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백제 기록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신라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 상당히 많은 백제인이 왜로 도망쳤기 때문에 벌어 진 일이다. 백제 망명객은 당시 왜에 비하면 학식이 훨씬 뛰어난 사람들 이었다. 이들은 신라를 향한 커다란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고, 왜가 자신 들과 같은 이해관계에 놓이길 바랐다. 그런 결과 진구 황후가 신라를 정 벌했다는 이야기에 이리저리 살을 붙였고, 더 나아가 백제는 왜에 충성 하던 나라고 가야 연맹은 모두 왜가 지배한 곳이라는 역사 왜곡을 감행 한 것이다.
- 유사역사학과 임나
유사역사가들은 임나와 임나일본부를 구별하지 않는 전략을 쓰고 있 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우리나라 역사가 중에 임나일본부를 인정 하는 학자는 한 명도 없는데, 유사역사가들은 역사가들이 임나일본부를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임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고 들이민다.
임나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광개토왕비를 비롯해서 여러 사료에 등장 하는 나라 이름이다. 임나와 임나일본부는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유사역사가들은 이것을 섞어버리고는 아예 임나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 하게 만들고자 하고 있다.
유사역사가들은 가야 문화인 옥전고분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다라국 같은 경우도 『일본서기에 그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부정 하고 있는 실정인데, 이 말은 <양직공도>라는 중국 사료에도 등장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모든 말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일본서기를 이용해서 천황의 가계가 백제에서 온 것이라는 걸 증명하는 데 큰 힘을 기울인다. 그야말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자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엄정한 사료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견해 에 맞으면 집어오고 다르면 버리는 것뿐이다.
세계적으로도 임나일본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임나일본부는 역사의 전반적인 추세에서 말이 안 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케임브리지 중국사의 경우에도 임나일본부의 허상을 잘 지적하 고 있다. 그런데도 유사역사가들은 우리나라 역사가들이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여 되풀이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좋을 일이 뭐가 있을까? 일본이 학계에 돈을 뿌려서 그렇다는 말도 한다. 그런 돈이 어디에 있는지 진짜 궁금하다.

- 다이나믹한 고대
고대에 문화가 전파되는 가장 빠른 길은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인도에서 승려들이 이동해서 중국으로 들어가 불교를 전파했듯이, 사람 들이 직접 이동했다. 왜와 가까운 곳의 신라는 왜와 늘 충돌하면서 불편 한 관계였는데, 좀 더 멀리 있던 백제는 왜와 가깝게 지냈다. 신라라는 적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른다.
두 나라가 가까웠던 만큼 많은 인적 교류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왕 인. 담징화 등을 생각하며 한반도에서 일방적으로 일본에 문화 전 파가 있었다고 여기기 쉬운데, 몽골과 고려 사이에도 문화를 주고받은 것처럼 백제와 왜, 가야와 왜도 많은 교류가 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
신라도 마찬가지다. 신라 초기에 대신이던 호공은 왜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탈해 이사금尼師今(재위 57~80)도 왜국의 동북쪽에서 건너왔다고 나온다.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뿐만 아니라 남해안가에 있는 일본식 고분, 부여·공주 인근에서도 발견되는 일본식 고분은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 하지만 교류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점을 잊지 말자. 어떤 세 력이라고 하기에는 고분의 수가 너무 적다. 이들 고분은 6세기에 들어가 면 모두 사라진다. 이들 왜인은 한반도에 흡수되어 버렸을 가능성이 크 다. 또한 당시 일본 열도에 있던 왜는 한반도에 있는 국가를 뒤흔들 수 있 는 강대한 세력이 아니었다.
역사학자들은 고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어떻게 해서 일본식 고분 이 한반도에 존재하는지를 치열한 논쟁을 통해 규명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논쟁을 보면 역사가 완성된 형태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논쟁을 거쳐 재구성된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 무영탑 전설은 1740년에 나온 화엄불국사 고금역대 제현 계창기佛國寺古今歷代諸賢繼에 처음 실렸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이 전설의 내용을 채록하면서 누이를 아내로 기록했다. 일본에서는 누이가 흔히 아내를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에 혼동을 일으킨 것이다.
『무영탑』전설은 맺어지지 않는 사랑 이야기로 끝났기 때문에 현진건 이후로도 그 결말이 수시로 변했다. 함세덕이 만든 연극 『무영탑에서 는 아사녀가 자살에 실패해서 아사달과 재회하는 해피엔딩이 되었고, 해 방 후 만들어진 여성국극에서는 아사달이 아사녀의 시신을 안고 영지로 걸어 들어가 자살한다. 아사달이 불상을 만드는 이야기는 사라져버렸다.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 <무영탑>에서는 아사달이 아사녀의 환상 을 보면서 영지로 뛰어들고 아사달을 사모했던 귀족 딸도 불 속에 뛰어 들어 죽는 것으로 표현했다.
옛날 이야기는 전설이 되고 다시금 재창작되어 마치 그 이야기가 있었 던 사실처럼 변하기도 한다. 아사달, 아사녀와 무영탑도 그런 이야기라 할 수 있다.
- 조선시대에도 피가 돌에 스며들어 흔적을 남긴다든가, 그 피에서 대나무가 자란다든가 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 후기 문인 홍세태洪世泰는 『유하집에서 피가 돌 속에 스며들 리 에서 없다는 점을, 정동유鄭東愈는『주영편에서 송도에 전해오는 글 가 운데 선죽교 전설을 전하는 것이 없다는 점을 들어 사실일 리 없다고 주장했다.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선죽교 변善竹橋(1938)이라는 글에서 남 효온의 글에 정몽주가 죽은 장소가 적혀 있다는 점을 지적했고, 광운대 김인호 교수가 「정몽주 숭배의 변화와 위인상」(2010)에서도 잘 논증한 바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상징물의 큰 힘에 매료되면 재미도 없는 '사실'은 굳이 따르려 하지 않는다. 조선 중기 이후 형성된 믿음, 선죽교에서 정몽주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깨어지지 않고 오늘날에도 일반 대중 에게 굳건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다는 것도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된다. 우리는 왜 진짜 사실보다 허황한 이야기에 더 마음 이 끌리는 것일까?
해방이 되자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민족 비하로 망가진 한국인의 자존 심을 채워줄 위인들이 필요했다. 이때 소환된 위인 중 하나가 충절의 상 징 정몽주였다. 이때부터 개성 관광의 필수적인 역사 코스로 선죽교가 등장했다. 선죽교의 핏자국, 대나무 전설은 눈으로 보면서 더욱 확실하 게 각인되었다.
전설은 전설로서 가치가 있다. 관광지를 만들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야 기 창작의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믿어온 이야기에는 그만한 힘이 있다. 그러니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무시할 필요 는 없다. 하지만 역사를 논할 때는 전설과 사실 자체를 분리해서 생각해 야 한다. 그것이 역사학의 의무이기도 하다.

- '주초위왕'이 처음 등장한 때는?
정말 벌레가 나뭇잎에 발라놓은 꿀을 따라서 파먹을 수 있을까? 나뭇 잎을 파먹고 사는 벌레가 꿀을 좋아할까? 평생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꿀 을 좋아할 리가. 마치 사슴을 잡으려고 날고기를 놓아두었다거나, 늑대 를 잡으려고 당근을 놓아두었다는 것과 같다.
인하대 생명과학과 연구진에서는 실제 나뭇잎에 글자를 꿀물로 써서 벌레가 이것을 먹는지 실험을 해보기도 했다. 이 실험 결과는 2018년 한 국곤충학회 학회지 『Entomological Research』 48호에 'Validation of 走肖 爲王: Can insects write letters on leaves?"라는 제목으로 실리기까지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벌레는 이 꿀물 글자에 입도 안 댔다. 이 실험에서 총40종의 나뭇잎이 동원되었다.
벌레가 꿀물 글자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증명되었다. 그럼 나뭇잎에 '주초위왕'이라는 글자가 어떻게든지 있긴 있었을까? 나뭇잎에 '주초위 왕'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기묘사화가 발생한 제11대 왕 중종 때가 아니 라 그보다 한참 후인 제14대 왕 선조 때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실록」에 사관이 따로 적어놓은 이야기다.
남곤은 유감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뭇잎의 감즙을 갉아 먹는 벌레를 잡아 모으고 꿀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 네 글자를 많이 쓰고서 벌레를 놓아 갉아먹게 하였다. (중략) 남곤의 집이 백악산 아래 경복궁 뒤에 있었는데 자기 집에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 워 대궐 안의 어구(개천)에 흘려보내어 중종이 보고 매우 놀라게 하고서 고변하여 화를 조성하였다. 이 일은 「중종실록」에 누락된 것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략 기록하였다.
기묘사화는 1519년에 일어났고, 「중종실록」은 1550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선조실록은 1616년 광해군 때 완성되었다. 사관은 '주초위왕' 전설을 진짜로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종실록」에 빠졌기 때문에 굳이 적어놓겠다고 말한 걸 봐도 알 수 있다.
- '주초'라는 전설이 있었다
「중종실록」에는 심정이 조광조를 모함한 내용이 적혀 있다. 심정 이 '주초대부走肖'이라는 말을 적어서 궁궐 안에 던져 넣었다는 것이다.
앞서 본 「선조실록에서는 남곤이 한 일로 되어 있었는데, 여기선 심 정이 한 일로 달라져 있다. 남곤과 심정은 한 세트처럼 같이 묶어 이야기 하는 때가 많으니까 그건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럼 '주초대부필'이란 무슨 뜻일까? '주초'는 조씨를 가리키는 것이라 고 이미 말했다. '대부'는 벼슬 이름이다. '필'은 붓이라는 뜻이다. 즉, '주 초대부필'은 '조 대부의 붓'이라는 말이다. 이런 말이 대체 무슨 모함에 이 용된다는 것인지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 사실 이 글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조선이 건국하기 전에 있던 수보록이라는 예언서에 적혀 있던 글이다.
수보록에는 '목자장군검 주초대부필 비의군자지
부정삼한격'이라는 말이 있었다. '목자'는 이 씨를, '비의'는 배 씨를 가리키는데, 각각 태조 이성계, 조준趙浚, 배극렴克廉 을 뜻했다. 조준과 배극렴은 조선의 개국공신이다.
말하자면, '주초대부필'은 조선 개국과 관련된 예언 문장이었기에 문제가 된 것이다.
태종은 수보록」은 말이 안 된다며 이런 예언서를 모두 수거해버렸다. 「수보록」에 있는 내용도 '주초위왕' 이야기처럼 시시각각 달라졌다. 다시 말해 이 책 역시 조작되었음이 분명하다. 태종은 수보록」 같은 예언서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빨리 불살라버리게 함이 이씨 사직에 있어서 반드시 손실됨이 없을 것이다."
조선 개국을 위해서는 예언이 필요했지만 개국 이후에는 이런 말이 반란에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도고의 찬양과 이순신 자살설에 대하여
러일전쟁 때 러시아 해군을 격파한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 鄕가 러일전쟁 축하연에서 이순신을 존경하고 자신을 넬슨Horatio Nelson에 비교할 수는 있지만 이순신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 이 역시 출전을 알 수 없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 야기로 보인다. 어떤 책에서는 영국 해군사관학교에서 한 말이라고 나오 기도 한다. 처음 이 일화가 언급된 책은 1964년에 나왔고 그 책에도 출처 는 밝혀져 있지 않다.
일본은 러일전쟁 이전에는 이순신을 높이 평가하며 넬슨에 비교하곤 했는데, 러일전쟁 이후에는 도고를 동양의 넬슨이라고 부르며 칭송한다. 일본에서도 이순신을 높이 평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있지도 않 았던 도고의 말을 넣어서 이순신을 칭송할 필요는 없다.
- 이순신이 최후의 전투였던 노량해전에서 일부러 자살하고자 갑옷을 벗고 싸웠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 역시 잘못 알려진 이야기다. 이순신 은 이전에도 일본군의 조총에 어깨를 맞은 적이 있다. 이순신이 갑옷을 벗고 일부러 총탄에 노출되었다는 이야기는 임진왜란 한참 뒤인 숙종 때 처음 나온 이야기다. 갑옷을 벗었다고 반드시 죽으리란 보장도 없다. 노량해전은 야간에 접근전으로 펼쳐진 처절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 전함은 200척이 침몰되었고 50척만 빠져 나갔다. 일본으로 돌아가 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순신은 악착같이 싸웠고 그러다가 유탄에 맞아 운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이순신이 자살하기 위해 행동했다고 말하는 것 은 목숨을 걸고 싸운 이순신에 대한 모독일 수밖에 없다.

- 사도세자의 광증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였던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関 中을 보면 정조가 세손 시절 지워버린 듣지도 보지도 못할 끔찍한 일 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사도세자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연쇄 살인마 였다.
사도세자는 스물세 살인 1757년 6월부터 살인을 시작했다. 내시를 죽 인 뒤 그 머리를 잘라 사람들에게 내보이기까지 했다. 사도세자가 죽인 내시, 궁녀가 백여 명이라는 말까지 있다. 광증이 깊어진 것이다.
사도세자에 동정적이던 남인 쪽 사람이 쓴 『대천록待錄』이라는 책에 도 사도세자가 백여 명을 죽였다고 나온다. 심지어 인두로 지지는 고문 도 가했다는 사실까지 적혀 있다.
사도세자는 대체 왜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 것일까?
- 1757년 2월에 사도세자를 아끼고 영조와의 관계를 잘 풀어보려고 노 력했던 정성왕후가 숨졌다. 잇달아 숙종의 계비였던 인원왕후 숨지자 사도세자는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고 결국 그런 불안감이 살인으로 나타난 것 같다.
혜경궁 홍씨는 이 참혹한 일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게 알렸다. 영빈 이씨가 놀라며 영조에게 고하자고 했으나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지만 사람이 연달아 죽어 나가니 영조도 결 국 눈치를 채고 말았다. 1758년 2월에 사도세자를 불러 물었는데 그때 이렇게 대답했다.
"심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이라도 죽이거나 해야 마음이 낫나이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엇나간 원인에 자기의 엄한 훈육이 있는 것을 알고 자책했는데, 이미 때가 늦은 셈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런 기록이 보인다.
"정축년·무인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 는 궁녀와 내시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 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사도세자는 옷을 갈아입다 성질이 나 시중을 들던 후궁 경빈 박씨를 때려죽였다. 그뿐 아니라 경빈 박씨 소생의 두 살짜리 아들에게도 칼을 휘두른 뒤 연못에 던져버렸는데,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연잎에 걸린 아이를 건져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 정조는 아버지의 광증을 부인하지도, 그것을 드러내어 이야기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정조는 아버지를 위해서 현륭원隆閱라는 묘지명(석판에 새겨 무덤 에 함께 넣는 글)을 썼다. 이 묘지명에는 사도세자의 광증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런데 영조가 지은 묘지명이 이미 있었다. 정조는 이 묘지명을 없애 버리고 자신이 지은, 아버지를 찬양한 묘지명을 넣었는데, 1968년에 영 조의 묘지명이 발굴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영조가 지은 묘지명에 는 사도세자의 광증이 기록되어 있었다.
자고로 무도한 임금이 어찌 없었겠느냐마는 세자 때로부터 이와 같은 것은 내가 들은 바 없다. 본래 풍요롭고 편안한 곳에 태어났으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미쳐버리기에 이르렀다.
- 변화하는 역사적 사건의 해석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잘못된 말 두가지를 비판했다.
하나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는 주장이다. 사 도세자가 죽을죄를 저질러 죽었다는 이야기가 되니, 정조는 반역자의 아 들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이 말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 다른 하나는 사도세자가 병이 없었는데 영조가 모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죽였다는 말이다. 이 점 역시 사도세자의 광증을 자세히 기술해서 잘 못이라는 점을 밝혔다.
어떤 사건은 일어난 뒤에 정치적 사건으로 변하게 된다. 사도세자 사 건도 그러했다. 사도세자가 비극적으로 죽었을 때 정권은 노론에게 있었 으므로, 이 비극의 책임이 노론에게 있다는 정치적 공세가 생겨났다. 정조는 이런 정치적 갈등을 조정의 질서를 잡는 데 이용했다. 물론 아 버지의 잘못을 가려주고 추대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사도세자가 소론에 동정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 세자가 소론을 위해서 뭔가를 계획했다는 증거는 없다. 정조 즉위 후에 소론이 이 사건을 이용해서 노론을 공격했다. 후대에 벌어진 일로 과거 사건에 대한 추론을 만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증거(사료)가 있어야 한다.
영조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미쳐버린 세자는 폐해야 했고, 총명한 세손이 왕위를 이을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영조는 세자를 서인으 로 만들어서 죽게 한 후 다시 세자의 지위를 복원해서 세손이 왕위를 이 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1960년대부터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다는 주장이 있어 왔는데, 최근에 와서 이 해석은 심각한 도전에 부딪혔다. 새로운 증거와 역사적 사건의 해석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 기존의 당쟁설 주장은 광증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중록』을 거짓 말 책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세자의 광 증 관련 증거는 매우 많다. 따라서 사도세자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이 제 더는 주장할 수 없게 된 셈이다. 당쟁설은 사도세자가 총명하고 개혁 의지가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전제가 무너진 셈 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이용한 당파간 싸움은 임오화변의 결과이지 그 원 인이 아니다.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은 결론을 내려 놓고 증거를 수집하는 일과 비슷하다. 이렇게 되면 역사의 진실을 찾아 내기가 어려워진다. 역사 연구는 새로운 증거와 해석에 따라 기존의 관 념이 변화할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 정조의 어찰 정치
정조는 신하들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보내는 공작 정치를 운용했다. 왕 이 보내는 편지를 '어찰'이라고 부른다. 특히 비밀리에 보내는 어찰은 '밀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조만 이렇게 보낸 것은 아니고 다른 임금도 비밀리에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선조, 효종孝宗(재위 1649~1659)도 신하에게 비밀 편지를 보냈 다. 그러나 정조는 다른 임금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편지를 보냈다. 신 하에게만 보낸 것이 아니라 어머니 혜경궁 홍씨나 외조부 홍봉한 에게도 편지를 자주 쓴 걸 보면 편지 쓰는 걸 무척 즐긴 모양이다.
- 정조가 신하에게 보낸 어찰 중 채제공, 조심태, 홍취영에게 보낸 것도 지금까지 남아 있다. 정조의 어찰 중 심환지에게 보낸 것이 제일 많아 지금까지 297통이 공개되었다. 1796년 8월부터 정 조가 죽기 직전이던 1800년 6월까지 4년 동안의 어찰이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어찰을 모두 없애라고 여러 차례 당부했다. 하지만 심환지는 이것을 없애지 않고 보관했다. 이렇게 해서 정조의 비밀 정치가 오늘날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다.
심환지는 영조 후반기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다. 사도세자가 비명에 죽은 임오화변 이후 세손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세력을 노론 벽파라고 부르는데, 심환지는 노론 벽파의 영수였다.
정조의 등극을 반대한 세력이니 정조 즉위 이후 세력을 잃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았다. 정조는 세손 시절 자신을 호위한 홍국영洪國榮을 중용했는데, 홍국영이 과도하게 권력을 부리기 시작하자 홍국영을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상소를 올린 사람은 당시 노론 벽파의 영수 김종수였다.
얼핏 보기에는 정조와 대립한 노론 벽파가 정조에게 도전한 것 같지 만, 이 상소는 사실은 정조가 김종수를 시켜서 올리게 한 것이었다. 즉 정 조는 홍국영을 내치려 마음먹고 그를 위해 노론 벽파의 신하를 부리는 공작 정치를 한 것이다. 김종수가 올린 상소문을 지은 사람이 정조였으 니, 자기가 지은 상소문을 시치미 뚝 떼고 받아보았다는 이야기다.
정조는 이처럼 신하들을 어찰을 통해 비밀리에 부리는 무서운 정치가였다.

- 김정호의 업적은 대단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동여지도>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부터 잘못 알고 있는 것의 사실을 정리 해보자.
첫째, 김정호는 <대동여지도> 하나만 만들지 않았다. 김정호는 <대동 여지도>뿐 아니라 지리인문서 동여도지東輿志」, 『여도비지輿圖備誌」, 대동지지를 편찬하였고, 지도는 <청구도靑邱圖>, <동여도東輿圖〉, 〈대동여지도>, <수선전도> 등을 제작하였다.
둘째, <대동여지도> 판목은 대원군에 의해 불살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판목이 남아 있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판목을 통한 연 구로 <대동여지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더 정확히 알아낼 수 있었다. 셋째, 김정호는 옥에 갇혀 죽지 않았다. 김정호에 대해서 남겨진 기록 을 보면 지도가 압수당한 바도 없고 옥에 갇힌 죄인이 되었다고 볼 근거 도 없다.
넷째, 지도 유통이 금지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지도를 민간 이 제작하거나 유통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조선 전기의 상 황이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상업이 발달하고 물품 유통이 활발해지자 지도가 꼭 필요하게 되었다. 관리와 사대부는 옷소매에 넣을 수 있는 수진본 지도를 애용했고 목장지도, 궁궐도, 역사부도 등 다양한 지도 가 등장했을 정도였다.
다섯째, <대동여지도>는 조선 지도의 계승자다. 최한기崔漢綺는『청구 도제에서 김정호가 어려서부터 지도에 깊은 뜻을 두고 지도 제 작의 장단점을 검토했다고 말하고 있다. 김정호가 최초로 만든 지도인 <청구도>는 정조 때 만들어진 <해동여지도海東輿地圖>를 참고한 것이고 <해동여지도>는 신경준이 만든 <조선지도朝鮮地圖>를 변형한 것이다. 여섯째, 김정호가 직접 팔도를 답사하고 백두산을 올랐다는 말은 근거 가 없다. 김정호 당대의 현실을 보아도 타당성이 없다. 이 이야기는 일본 지도제작자 이노 다다타카의 일화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일곱째,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내용은 더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있지 않다. 김정호에 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이우형, 이상태 등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1997년에 제대로 된 내용으로 김정호 이야기가 개정되었다.
김정호는 고위 관료인 신헌과 최한기, 최성환煥 등 사대부들의 도움을 받아 지도를 제작하였고 판각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기존의 지도를 섭렵하여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각종 지리서를 편찬한 위대한 지도 편집자였다.

- 간도 문제가 일어나다
청나라는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일정 구간을 공터로 비워두고 사람들 이 살지 못하게 했다. 이것을 '봉금령封禁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조 선과 불필요한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한 것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지켜 지지는 않았고, 조선 사람들이 종종 땔감을 구하러 넘어가곤 하다 그곳 에 정착한 청나라 사람과 충돌하기도 했다. 그런데 두만강 쪽은 청나라 에서도 아주 변경이어서 그랬는지 청나라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것 같 다. 조선 말의 어지러운 상황을 피해 두만강을 넘어가는 유민이 있었다. 이들은 청과 조선의 국경 사이 빈 공간, 즉 간도에 정착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간도란 이렇게 두만강 북쪽 일부 지역이다. 지금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의 투먼시와 룽징시 일부다.
일본이 근대에 들어와 만든 조선 지도를 보면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 약간을 조선의 영토로 그린 지도가 있다. 바로 그 지역이 봉금령으로 사 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한 곳이다. 일본은 그 땅을 청나라가 영토로 간 주하지 않은 땅으로 생각해서 조선의 영토로 잡았다. 이런 사고 방식은 후일 간도 문제에 영향을 주었다.
청나라는 공식적으로 1880년(고종 17년)에 봉금령을 해제했는데, 그제 야 두만강 너머에 수많은 조선인이 넘어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청나라는 조선 조정에 이를 항의했다. 이런 문제는 쉽 게 생각해볼 수 있다. 조선은 울릉도를 비워두는 공도空島 정책을 썼는데, 그렇다고 울릉도를 영토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이곳을 정기 적으로 순시하며 일본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방비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인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가면 안 되었다. 그것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두만강 너머에 조선인이 다수 넘어가 땅을 개간하고 있다는 (그래서 이 지역을 개간한 땅이라는 뜻으로 '간도'라고 부른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을 청나라가 알았기 때문에 국경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회담을 열게 되었다. 이 회담은 1885년(고종 22년)과 1887년(고종 24년)에 두 번 열렸다. 1차 회담 때 조선 측 대표 이중하는 청나라가 깜짝 놀랄 주장을 했다.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 지류 이름이라고 한 것이다. 이중하는 어떻게든지 이미 조선인이 개척한 간도를 유지하고, 싶어서 무리수를 둔 것이었다. 청나라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반발하여 1차 회담은 종결되었다. 2차 회담 때 이중하는 토문강이 송화강 지류라 는 주장은 포기했다. 이중하는 1차 회담 후 직접 백두산에 올라가 답사를 해보았고, 그 결과 이런 주장이 통할 수 없음을 알았던 것 같다. 이때 청 나라 측은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두만강 지류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지류 를 국경선으로 잡고자 했고, 이중하는 가장 북쪽에 있는 지류를 잡고자 했다. 이 회담에서 이중하는 비분강개하여 말했다.
"내 머리는 잘라갈지언정 우리 강역은 축소할 수 없다."
이 말은 간도를 내놓지 못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북쪽 경계를 양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유사역사가 중에는 이 주장을 교묘하게 1차 회담과 연결해서 간도 전체를 내놓을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용하는데, 이는 사실과 맞지 않는 억지 주장이다.
청나라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2차 회담도 결렬되고 간도 문제는 어정쩡하게 그냥 남아버렸다.
대한제국은 1903년 이범윤 간도관리사로 파견하여 간도의 영 을 토화를 적극적으로 꾀했다. 이때부터는 다시 토문강이 송화강 지류라는 주장을 펼쳤다. 청나라는 강하게 반발했다. 청나라 압력이 거세지자 정 부는 이범윤에게 돌아오라고 했는데, 이범윤은 말을 따르지 않고 간도를 지키다가 러시아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 일제와 간도 문제
대한제국은 을사조약(1905년)으로 외교권을 일본제국에 빼앗기고 말았 다. 일제도 간도를 대한제국 땅으로 하는 게 유리했기 때문에 적극적으 로 간도 영토화를 꾀했다. 일제의 논리는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있던 국 경지대는 주인이 없던 땅인데 압록강 너머는 이미 청나라가 차지했으니 두만강 너머는 조선이 차지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었다. 앞서 일본인이 만든 지도가 이미 강 북안을 모두 조선 땅으로 인식했다고 말했는데, 바 로 그런 인식이 여기에도 적용된 것이다.
일제는 조선을 강제 점령했다. 조선의 영토가 크면 클수록 자신들에게 유리했다. 유사역사가들은 흔히 일제가 커다란 조선 영토를 줄이려고 애 썼다고 주장하는데, 일제 입장에서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고대 영토는 축소할 수도 있다고? 강력한 상대를 발 아래 꿇렸다면 더욱 자랑스러워지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다. 상대가 허약해서 볼 것도 없이 제압 했다면 그건 당연한 일에 불과하다.
일제는 1907년 8월에 간도 룽징촌에 통감부 파출소를 설치했다. 이로 인해 청나라와 일촉즉발의 위험한 상황까지 갔다. 그런데 1909년 9월 4일 돌연 간도협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은 간도를 청나라에 넘기고 대신 만주 에 철도를 부설하는 권리를 챙겼다. 일본 안에서도 이 점을 안타깝게 생 각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이듬해에 만주국을 건설해버려서 자연스럽게 간도는 만주국 영토가 되었기 때문 에 이런 불만도 사라져버렸다.
만일 토문강이 정말 송화강 지류였다면, 일제도 그걸 가지고 청나라와 물고 늘어졌을 것이며, 이중하도 그랬을 것이다. 또한 숙종 때 경계표지 물을 세울 때 걱정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목극등이 두만강을 따라 바다 에 이를 때까지 살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역사학에서는 증거를 따라가 논지를 펼쳐야 한다. 그 증거가 오늘날의 현실에 불리한 점이 있다고 해 도, 현실에 맞춰 왜곡해서는 안 된다.
두만강 북쪽 간도 지방은 조선 말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건너가 개척한 땅이다. 그러나 과거부터 조선 영토는 아니었다. 만일 대한제국이 외교 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중하 같은 뛰어난 협상가, 이범윤 같은 뚝심 있는 행정가를 내세워 청나라와 협상을 거듭했다면 간도를 수중에 넣을 수 있 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란 원래 만약이라는 가정을 좋아하지 않는 다.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다. 과거에서 앞으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교 훈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 현재 우리나라 역사가 중에 식민사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식 민사관이란 식민지 치하에 있어야 성립한다. 유사역사학의 선전선동이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는 해방된 지 80년 가까이 되어간다.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으로 모는 프레임은 1960년대 등장해서 50여 년이나 써먹고 있 는 중이다. 아무리 역사학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동네라 해도 이젠 좀새 로운 걸 보여주면 좋겠다.
유사역사학의 기본적인 논리 중 하나는 위대한 한민족의 고대사를 일 제 식민사가들이 감춰왔다는 것이고 그것을 우리나라 역사학자도 답습 한다는 것이다. 일제의 식민사가들은 그럴 이유가 있었다고 이해해줄 수 도 있지만 우리나라 역사학자는 뭐하러 그러겠는가? 그리고 일제 식민 사가들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 일본 고문서학의 체계를 세웠다는 구로이타 가쓰미는 식민지 조선에서는 『조선사 편찬과 조선의 고적과 유적을 조사, 보존하는 일에 전념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16년간 지속된 『조선사』 편찬 사업에서 구 로이타는 봄, 여름의 휴가와 연말연시에 조선으로 건너와 편수 기획을 지도하고 사업을 독려했다. 그는 1916년 발족한 고적조사위원회의 중심 인물이었고 1931년 총독부에서 예산을 삭감하자 조선고적연구회를 설 립하여 외부자금을 조달하여 고적조사 사업을 계속했다.
대체 구로이타는 왜 이렇게 열정적으로 조선의 고적을 조사하고 보존 하려고 했던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를 만 든 것은 식민지 지배의 정당화를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로이타는 바 로 그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조선의 고적은 또 왜 보존하고자 노력했을까? 심지어 고적 보존 유지에 대한 법안은 일본보다도 3년이나 앞서서 시행되었는데 이런 법안 제정에 앞장선 것도 구로이타였다.
구로이타는 1908년부터 1910년까지 2년 동안 유럽과 이집트 등지를 방문하여 발굴 조사 보존 사업 등을 살펴보았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서 구 열강이 식민지의 유적을 어떻게 다루는지 학습했다. 그는 배워온 것 을 조선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그럼 구로이타는 대체 뭘 배웠을까?
열강은, 식민지에 있는 유적 건설자는 위대했지만 그 후손은 몰락하여 과거 영광을 구현할 수 없는 처지로 떨어져버렸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서 유적을 보존했다. 너희는 이제 이런 위대하고 찬란한 문명을 모두 잃 어버린 패배자라는 것을 뼈에 새겨주고 싶어 한 것이다. 따라서 위대한 과거 유적은 바로 식민지인이 있는 그 자리에 보존되어야 했다.
- 만일 일제가 위대한 환국의 흔적을 발견했다면 그들은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제국주의의 논리다. 유사역사가들은 짐작도 하지 못할.

-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현대에 만든 책이면서 그 지은이들을 고대 인물로 위장해 놓았다. 고대 인물이 고대 관념을 가지고 쓴 것처럼 날조한 책이기 때문에 그 책을 보면서 고대인의 관념을 연구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을 위서라고 한다.
이유립은 북한 출신으로 해방 후 빈 몸으로 남하했다. 그러니 집안에 비전의 책이 있었다 해도 그것을 가져올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70년대 가 되어서 갑자기 자신이 해방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면서 『환단고기』를 꺼내들었으니 이것이 위서가 아닐 도리가 없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고 위서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믿 을 수 있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고 신뢰할 수 있는 사서가 되는 것도 아니 다. 『환단고기』는 70년대까지 알려진 여러 가지 사료가 담겨 있다. 그리고 『환단고기』를 믿는 사람들은 『환단고기』에는 신뢰할 수 있는 역사기록이 들어 있으므로 믿을 수 있는 사서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 안에 민족적 감성을 자극하는 내용을 양념처럼 뿌려놓는다. 우리 민족이 드넓 은 영토를 소유하고 중국, 일본, 여진 등을 모두 지배했다는 망상을 집어 넣은 것이다.
우리 역사는 왜 이렇게 못났는가라고, 중국과 일본한테 침략이나 당하 고 결국은 식민지가 되어버린 못난 역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이 웅장한 가짜 역사에 혹하게 된다. 그리하여 환단고기에 푹 빠진 추종자 즉 '환빠'가 되는 것이다.
『환단고기』는 1979년에 한문본이 출판되었지만 당시에는 아무 반응을 일으키지 못했다. 『환단고기』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1986년에 한단고기』라는 이름으로 한글 번역본이 처음 나왔을 때였다. 이 책을 번 역한 사람은 임승국이라는 사람이었다. 임승국은 『환단고기』를 위조한 이유림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라는 단체에 속했던 사람이고 역시 월간 『자유』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사람이다.
'국사찾기협의회'는 당시 국정교과서였던 『국사 교과서가 식민사관 및 좌경화되어 있다고 공격하면서 국수주의적 역사관으로 『국사 교과 서를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한 단체다. 이들에 의해서 1981년에는 국회 에서 공청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들 멤버는 국회 정치인을 동원할 수 있 을 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들을 이끈 수장은 초대 문교 부장관이었던 안호상浩相이었다.
- 안호상은 이승만 독재철학인 일민주의를 만든 사람이고 학원 의 병영화를 꾀해 학도호국단을 만든 장본인이었다. 임승국도 안호상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국수주의자였다. 이들은 극우적 성 향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점을 별로 숨기지도 않았다. 임승국은 국회에 서 히틀러의 발언으로 훈계를 늘어놓기도 했다. 그는 전두환에게 아첨을 떨며 국사 교과서 개정을 꾀하기도 했다.
『환단고기』가 등장하기 전에도 국사찾기협의회 회원들은 위대한 한민 족의 역사를 떠벌리고 있었다. 사실 『환단고기』는 이런 이야기를 집대성 한 책일 뿐이다.
역사는 고증과 비판의 학문이다. 그러나 위대한 한민족의 역사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가치와 신념에 의해 주장을 펼친다. 자신들의 가치와 신념에 맞는 증거만을 채택하고 그렇지 않은 증거는 기각한다. 그것은 잘 못된 것이거나 음모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민족을 위 해서 유리한 증거를 거론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고 다른 나라도 다 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가 있으니 다 른 아이도 건너도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주장은 언뜻 역사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기 신념을 떠드는 사람을 가리켜 '유사역사가'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 의 활동을 '유사역사학'이라고 말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사이비역사학'이 라는 말을 더 선호하기도 한다. 같은 뜻이다.
- pseudoscience라는 말이 있다. '유사과학' 또는 '사이비과학'이라고 번 역한다. 흔히 쓰이는 단어인데, 이를 두고 유사과학이 있으면 진짜 과학 이 따로 있냐고 묻는 사람은 없다. 유사과학에 '학'이라는 말이 붙어 있으 니 불쾌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이것은 그야말로 당연한 일이다. 눈 사람이 사람이 아니고, 꼭두각시가 각시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유사역사학은 역사학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역사학처럼 보이게 치장 되어 있으나 역사학과는 다른 것이다. 유사역사학이 역사학의 일종이라 고 말하는 것은 마치 인형에도 눈코입이 있고 팔다리가 있으니 사람이라 고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의 이야기이고 암세포도 생명이라고 하는 말이 나 마찬가지다.
- 유사역사가들은 위대한 조상을 창조해서 민족의 구심점을 만들어내고 싶어했다. 일부는 고대 사서의 모호한 구절을 과대해석하는 방법을 사용 했으나 더 대담한 이들은 날조된 역사책을 만들어냈다. 『환단고기』가 가 장유명하지만 이 책 하나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환단고기』 이전에 이 같은 책이 만들어졌고, 1970년대에 여러 사람들이 『환단고기』에 필적할 괴서를 만들었다. 다만 환단 고기가 그 모든 것을 덮을 만큼 유명해졌을 뿐이다.
유사역사가들은 스스로를 '재야사학자', 또는 '민족사학자', 또는 '애국 사학자라고 부르면서 역사학자들을 '식민사학자', '이적사가', '용공사가', '매국사가', '친일파'라고 불러왔다. 이런 인식은 1960년대에 등장해서 1970년대에 확산되었다. 이들은 50년 동안 역사학계를 매도해왔다. 이 들이 사용한 이분법 프레임은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고 상대를 악마화함 으로써 자신들 편을 만들어내는 데도 이용할 수 있다. 이처럼 역사학자 를 악마화하는 방법은 우리나라 유사역사학의 독특한 방법이다.
- 과거 유사역사학에서는 역사학자를 '강단사학자'라 부르고(이 용어는 원 래 유사역사학이 자신들을 대학 밖에 있는 '재야'라 칭하면서 이분법으로 사용한 것 이다) 식민사관을 추종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역사학 박사학위 를 가지고, 심지어는 대학 강단에 서면서 유사역사학의 논리를 가지고 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서 유사역사학 쪽에서도 강단사학자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 추세로 변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 역사학계의 우려가 있다. 유사역사학이라는 낙인찍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역사라는 것이 대체 어떻게 정의되는가' 라는 문제와 맥을 같이 한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유사역사학'이라고 부르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우려를 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금인지 아닌지 알아내는 돌이 있는데, 그것을 '시금석'이라 한다. 유사 역사학에도 시금석이 있다. 로널드 프리츠는 유사역사학은 역사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역사학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사료를 비판하고 증거를 통한 합리적인 추론을 해나가는 것이다. 유사역사학에 서는 사료 비판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믿음과 일치하는 기록을 보면 사료 비판이라는 과정 없이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한다. 이렇게 해서 시 대와 공간을 뛰어넘으며 사료를 골라 먹으면서 자기만의 논리를 구성한 다. 그리고 기존 학설은 식민사학이라고 비난한다.
- 역사학과 유사역사학이라는 두 대립항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의 반대말이 유사역사학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사학 안에는 다양한 논의가 있고 실체적 진실을 찾아내기 위한 무수한 노력이 존재한다. 역사는 지 나가버린 과거의 흔적이며 그것을 누구도 단 하나의 진실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단 하나의 진실로 모든 사람의 사고를 획일화시키고자 했던 것이 박근혜 정부가 추진했던 국정교과서였다.
유사역사학에서 주장하는 위대한 고대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에게는 이미 정해진 목표가 있고 그 목표에서 위배되는 것은 배척해야 한다. 진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목표에 위배된다면 그것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이들은 한다. 역사학이 민족과 국가에 유용한 도구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며 심지어 유해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학은 인간이 살아온 과거를 살피면서 삶에 대한 성찰을 가져오는 학문이지 다른 국가와 민족의 우위에 서서 지배하고자 하는 학문이 아니다.

- 우리나라 유사역사학의 유래
5.16 쿠데타 후 한일수교 문제가 표면에 떠오르자 반대 시위가 거세 었다. 이때 반일 열기에 힘입어 일제강점기의 수난사를 쓴 책이 등장했 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일제강점기 동안 군수직을 비롯해 고위 공무원을 지낸 문정창이었다. '빼박'친일파인 그는 마치 고급 자료라도 가지고 있 는 척하며 책을 펴냈는데, 이 책 안에서 역사학계가 친일이라 일제강점 기 연구도 안 한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때 역사학계를 친일파로 모는 프 레임이 처음 등장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역사학 전공자 를 친일파 집단으로 몰아서 유사역사가가 도덕적 우위를 장악하는 해괴 한 일이 벌어졌다.
- 한편, 1960년대에 이유립은 대전에서 대종교(단군을 신봉하는 종교)인으로 있다가 독립하여 자기 교를 이끌기 시작했다. 단단학회 교주로 올라 선 이유립은 대종교를 극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가진 비전의 역사서인 『환단고기』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이유립은 자신의 망상을 담은 여러 책을 만들어 각계에 보내며 호응을 해줄 사람들을 찾아 나갔다. 그때 이유립과 손을 잡게 된 사람이 초대 문 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이었다. 이승만에게 일민주의(혈통에 기반한 극단 적 민족주의 이념으로 이승만이 국시로 내세운 이데올로기)라는 파시즘 철학을 전수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극우민족주의자였고 이유립과는 궁합 이 찰떡처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문정창, 안호상, 이유립 등이 모이면서 이들은 점점 더 역사학계를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 여기에 5.16 쿠데 타에 참여했다가 물러나와 군에 납품하는 잡지 『자유를 발행하던 박창암이 합류했다. 박창암은 자유를 유사역사학의 기관지로 변모시켰다. 1975년 10월 국사찾기협의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졌고 『자유는 1976년 1월호부터 유사역사학 주장을 전파했다. 전군에 이런 잡지가 납 품되었으니 그 해악이 얼마나 컸을지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이들은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의 후예라고 공격했고, 집중 공격 타깃이 된 사람이 서울대 이병도 교수였다. 이병도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사편수 회의 수산관보와 촉탁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높은 자리는 아니지만 식 민지의 공공기관에 근무한 것으로 친일파 낙인을 찍기는 충분했다.
이유립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조선에 시를 투고하기도 할 정도로 독립운동에 대한 생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사람이었는데 이병도를 식민사학자로 몰면서 각광을 받았다. 1976년에 이병도는 『한국고대사 연구』라는 책을 냈기 때문에 더더욱 공격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 마침 1974년부터 한국사가 국정교과서로 바뀌었기 때문에 국사찾기 협의회는 국사 교과서를 공격하는 데 집중했다. 국사 교과서에 자신들의 주장을 실을 수 있다면 전 국민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들은 먼저 국사 교과서를 수정하라는 재판을 걸었다. 당연히 재판에서 지고 말았다. 그다음으로는 정치권을 동원해서 역사학계에 압력을 행사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1년에 국회에서 국사 교과서 공청회가 열리는 해프닝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쌍방 토론이 벌어졌는데 이때 유사역사학 쪽에서는 이 유립을 토론자에 끼워주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이유립은 안호상을 매도 하는 글을 썼고, 그 길로 『자유에서도 퇴출되고 말았다.
이유립을 토론자에 넣어주지 않은 이유는 자명했다. 그는 이미 1979년에 『환단고기』라는 위서를 내놓았고, 토론에서 이걸 들고 떠드는 순간 개망신을 당할 거라고 생각한 안호상 등이 이유립을 배제하는 길을 택한 것 이다.
그러나 세상일이 참 공교롭게도 『환단고기』는 일본의 극우 유사역사 가인 가지마 노보루島에게 전달되어 일역본이 나오게 되면서 역전의 길을 가게 된다. 1982년 일본에서 『환단고기』가 출간되었고, 이 일역본을 다시 번역한 한단고기』가 1986년에 우리나라에서 출간되었다.
이 무렵 우리나라에는 국수주의 서적이 범람하고 있었다. 백두산 민족의 대운이 열린다는 식의 이야기가 내놓기만 하면 대박이 나는 상황이었고 「한단고기』는 여기에 결정타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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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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