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인은 나일강을 통해 다른 지역과 물자나 문화를 교류하며 더욱 번성하게 됩니다. 게다가 서쪽으로는 광활한 사 막이 펼쳐지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바다가 둘러싸니 외세의 침략 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환경까지 갖췄던 셈입니다.
이집트인들의 삶은 평화롭고 여유로웠기 때문에, 이 행복을 죽음 이후에도 누리고자 했어요. 사후 세계를 믿으며 영혼불멸 사상을 가진 이집트인들의 세계관을 '내세적 세계관'이라고 합 니다. 반면 외적이 사방에서 침입하기 좋은 개방적 지형에서 살 던 메소포타미아문명인은 사후 세계까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당장 먹고살기가 바쁘고 힘들었기 때문에 현생의 행복에 집중하는 '현세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지요.
시간이 흘러 이집트에는 도시와 계급, 국가가 형성됐는데요. 기원전 4천 년경에 이르자 남쪽의 상이집트와 북쪽의 하이집트 라는 두 개의 왕국이 탄생했고, 기원전 3000년경에는 메네스가 이집트를 통일하며 본격적인 초기 왕조시대를 열었습니다. 그 뒤의 이집트 통일 왕조는 크게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시대로 나 뉘는데요. 고왕국 시대는 피라미드가 건설되기 시작한 이집트
최초의 융성기라 피라미드 시대라고도 불립니다.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은 팔레스타인에서 손을 뗐지만, 이제는 아랍인과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을 서로 가지려고 싸 우기 시작했어요. 이스라엘의 독립선언에 반발한 시리아, 레바 논, 이라크, 이집트, 요르단이 아랍 연합군을 결성하여 공격을 개 시한 이른바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합니다. 보잘것없는 전력의 이스라엘군과 영국식 군사 교육을 받은 아랍 연합의 싸움. 언뜻 봐도 게임이 안 될 것 같지만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군은 절박감이라는 최종 병기로 결국 도시를 지켜냈 고, 이집트가 속한 아랍 연합군은 분열되며 결국 전쟁에서 패배 합니다. 당시 이집트의 국왕 파루크 1세는 사치에 빠져 있고 나 랏일에 관심이 없었는데, 이 와중에 전쟁에서 패전까지 하니 나 라가 시끄러웠죠. 이 틈을 타 이집트 군인 출신 가말 압델 나세 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1956년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이로써 이집트의 군주제는 사라지고 공화국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집트 초대 대통령 나세르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 습니다. 이에 반발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선박 통과를 금지당 해서 뿔이 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합니다. 이것이 1956년 에 일어난 제2차 중동전쟁입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자신들과 상 의도 없이 과격한 전쟁을 벌인 세 국가에 분노했고, 유엔의 중재 로 1년 뒤 전쟁이 종결됩니다. 전쟁의 결과로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운하의 소유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나세르를 중심으로 아 랍민족주의가 단결하게 됩니다.
1958년에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한 나라로 합쳐 아랍연합공 화국이 됩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국가를 무리하게 합치려니 통 합 운영에 문제가 발생했고, 3년 뒤 시리아의 독립선언으로 다시 분리됩니다. 이후 1967년 이스라엘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에 선제공격을 감행한 뒤 단 6일 만에 대승을 거둔 6일 전쟁'이라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이 일어나지요.
1971년에는 나세르에 이어 안와르 사다트가 대통령이 됩니 다. 사다트는 잃어버린 수에즈운하 동쪽, 시나이반도를 되찾기 위해 이를 갈고 복수를 계획했어요. 2년 뒤 제4차 중동전쟁이 발 생합니다. 이 전쟁으로 중동의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가들이 석 유 수출을 줄이고 원유 가격을 인상하면서 오일쇼크가 일어나죠. 1981년 사다트는 이슬람 과격파에 의해 암살당하고, 부통령 인 호스니 무바라크 Hosni Mubarak가 대통령이 되어 철권을 휘두릅니다.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로 무바라크가 축출되고 민주주의 정부가 세워지는데요. 하지만 이슬람주의를 강조하며 종교와 정치를 결합하려는 세력과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려는 세 속주의 세력 사이의 긴장이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집권 1년 만에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면서 이슬람주의인 무르시 정권이 축출되고, 2014년 세속주의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은 압델 파타 엘시시Abdel Fatah al-Sisi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오늘날에 이르게 됩니다.
- 19세기 유럽을 세 단어로 정리하자면 '산업혁명', '제국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입니다. 프랑스 나폴레옹이 유럽을 휩쓸고 다 닐 때 유럽 전역에 민족주의가 퍼지기 시작했어요. 특히 독일의 민족주의는 정말 강력했어요. 중부 유럽을 느슨하게 묶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이 나폴레옹에 의해 결국 해체된 19세기, 제각각 쪼개진 나라들이 다시 민족주의 정신하에 독일연방으로 묶이게 됩니다.
당시 독일연방 중에 오스트리아가 힘이 제일 셌고, 그 뒤를 프로이센이 바짝 따라오고 있었죠. 느슨한 연방을 강력히 통일하자는 여론 속에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수상 자리에 앉힙니다. 과격파 비스마르크는 연설을 통해 그 유명한 철혈정책을 발표했어요.
- "독일의 통일 문제는 철과 피, 즉 군대와 병력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프로이센 주도하에 독일 통일을 이루겠다는 집념으로 비스마 르크는 의회와 대립하며 군비를 확장해갔고, 이 모습이 상당히 거슬렸던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게 바로 1866년 6월 14일 발생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 서 프로이센이 승리하면서, 프로이센은 독일연방 내의 주도권을 거머쥐게 되었어요.
모두가 잘나가던 오스트리아를 눌렀다는 승리감에 취해 있었 지만 비스마르크는 냉정히 지금 상황을 계산합니다. 지금 오스트 리아에 굴욕을 주는 것보다는 독립국으로 놔두고 자존심 좀 챙겨 줘야 나중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프로이센을 돕거나 최소한 중립 이라도 취할 것이라는 똑똑한 생각을 했던 거죠. 세계 정세 파악 이며, 몇 수 앞을 내다보며 머리 돌아가는 것이 장난이 아니죠? 이미 눈치챘겠지만 비스마르크는 외교 천재였습니다. 그는 전쟁 전부터 이미 능수능란하게 오스트리아를 고립시켜둔 상태였죠. 비스마르크의 물밑 작전 덕분에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에서 퇴출됐습니다. 그리고 프로이센은 1867년 북독일연 방을 수립해요. 유럽 국가들은 독일의 통일을 견제했습니다. 특 히 이웃 나라 프랑스가 통일에 부정적이라고 파악한 프로이센은 먼저 프랑스부터 치기로 결정합니다. 3년 뒤에 일어난 '프로이 센-프랑스 전쟁'에서도 프로이센은 승리를 일궈냈죠.
이때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기도 합니다. 고작 여러 개로 쪼개진 독일연방 중 하나에 불과한 프로이센이 당시 유럽의 강대국 프랑스를 꺾어버리다니, 프랑스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가 납니다. 이렇게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로 가는 마 지막 장벽, 프랑스를 격파하면서 마침내 독일 통일을 완성해요. 1871년 1월 18일,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는 침략한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에서 황제로 즉위하며 독일제국을 선포합니다.
- 1964년, 미국 군함이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의 습격을 받 았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습니다. 이 통킹만 사건을 명분으로 미 국은 북베트남에 폭격을 퍼부으며 전쟁에 뛰어드는데요. 나중에 <뉴욕타임스>는 통킹만 사건에 대한 주요 정보가 왜곡된 상태로 전달됐음을 폭로해 파문이 일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허위 보고 를 근거로 베트남전쟁 개입을 결정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 는데, 개입의 궁극적인 원인은 도미노 이론이었습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전쟁은 남북의 전면전으로 확 대됐습니다. 미국이 뛰어든 이 전쟁을 통상 '베트남전쟁'이라고 부르는데요.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과 구분하기 위해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프 랑스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려는 베트남의 독립 전쟁이었다면 제 2차 인도차이나전쟁은 남베트남을 지원하는 미국과 공산주의 북베트남 사이의 이념 전쟁이었습니다.
1965년에 약 18만 명을 투입했던 미군은 4년 뒤에는 두 배 이상인 약 48만 명, 최대 54만 명까지 병력을 증강해 투입했습 니다. 또한 미국은 한국,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에도 파병을 요 청했는데요. 베트남전쟁에서 미군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투입한 나라가 바로 한국입니다. 한국은 1964년에 의료진들을 파견한 후 백마부대, 맹호부대, 청룡부대 등 30만 명이 넘는 병력을 파병했지요. 베트남 옆에 있는 라오스, 캄보디아까지 군대가 개입되면 서 전장은 베트남을 넘어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됐습니다.
신무기로 무장한 미군의 전투력은 세계 최강이었습니다. 하 지만 외세에 대해 끝없이 투쟁해 온 베트남 역시 만만치는 않았 습니다. 미국 역시 베트콩들의 게릴라 공격에 당하고만 있어 답 답한 상황이었어요. 꾸찌Cu Chi 지역의 정글 아래로 만들어진 약 250킬로미터의 '꾸찌 땅굴'은 베트콩들의 근거지였습니다. 밤이 되면 땅굴에서 튀어나와 미군을 습격하고 다시 땅굴로 들어가는 데, 바로 뒤쫓아도 미군의 커다란 덩치로는 그 작은 땅굴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엄청나게 어둡고 비좁은 땅굴 안으로 들어가면 여러 방향으로 뚫린 통로가 있는데, 땅굴은 지하 4층까지 뚫려 있고, 중간중간에는 식당이나 작전 회의실 같은 공간도 있었습니다.
공중전에 자신 있었던 미군, 하지만 공중에서는 울창한 숲밖 에 보이질 않고, 숲속에 숨어 있던 지대공미사일이 여기저기서 항공기를 격추했어요.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본능적인 불안감 이 치솟았죠. 베트남전쟁에서 그토록 민간인 학살이 많았던 이 유도 이 때문입니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보이지 않는 적, 게다가 지역 주민들은 베트콩을 도와주거나 숨겨주며 게릴라에 합세했기에 저 사람이 민간인인지 게릴라군인지 구별하기가 어 려웠다고 하죠.
- 19세기에 들어서자 중세 시대는 점차 막을 내리고, 서양 열 강에 의해 이스라엘 땅은 새 대륙을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이 됩 니다. 19세기 말에 이르자 예루살렘의 유대인 인구는 점차 늘어 났고, 20세기 초에는 과반수를 차지하면서 히브리어도 부활했어 요. 시온주의 운동이 시작될 발판이 마련된 것이죠. '시온주의'란 팔레스타인에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유대인들의 민족주의 운 동으로, 예부터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과 동의어로 사용된 '시 온'에서 딴 이름입니다.
그동안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살던 유대인은 소수민족으로서 늘 공동체의 주변에만 머물러 있었고, 너무도 쉽게 집단증오의 희생양이 되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유럽에서 흑사병이 발생했을 땐,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집어넣었다는 소문으로 학살당하는가 하면, 십자군 전쟁에서도 유대인 학살이 수도 없 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종교·문화·경제적인 원인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면서 중세 유럽에 반유대주의 정서가 만연했기 때문입니 다. 유럽인은 유대인을 경멸했으며, 유대 민족은 사회적 차별에 환멸을 느껴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땅을 향한 유대 인의 애착은 유대 민족이 조상의 땅을 되찾는다는 시온주의 사 상까지 이어진 거죠.
-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오스만제국이 해체되었고, 1917년 에 승전국 중 하나인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하게 되었어 요. 영국은 불과 2년 전, 팔레스타인에 사는 아랍인에게 전쟁이 끝나면 팔레스타인 독립을 보장한다고 약속하고선, "유대인, 너 희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 라고 당시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Arthur Balfour가 유대인에 게는 이와 정반대의 약속을 한 겁니다. 이러한 '푸어 선언'으로 아랍인은 뒤통수를 맞았고, 유대인의 시온주의에 기름을 들이붓 게 됩니다. 결국 벨푸어 선언이 이스라엘 건국에 촉매 역할을 하 면서 현대 팔레스타인 분쟁의 씨앗이 된 셈이죠.
-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지한다는 영국의 표명으로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는 이주민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고, 유대인은 이를 민족적으로 부응해 국가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이어갑니다. 하지 만 아랍인들 입장에서는 황당한 일이었죠. 유대인의 시온주의와 아랍 민족주의는 양극으로 치달으며, 거의 폭발 직전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두 민족 간의 갈등이 고조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1939년에 발발합니다. 전쟁 중 나치 정권은 유럽의 유대인 공동 체를 말살하려는 계획인 '홀로코스트'를 치밀하게 수행하는데요. 이 과정에서 히틀러는 6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학살했고, 이로 인해 또다시 유대인의 민족주의 운동인 시오니즘은 급 격히 발전합니다.
영국은 두 민족의 대립을 중재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다 가, 결국 1947년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넘겨버립니다.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로 쪼개서 아랍인 구역과 유대인 구역으로 분할하자고 제안하는데요. 유대인은 이 제안을 받아들 였으나, 아랍인은 거부합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인 이 가진 땅은 전체의 6퍼센트였는데, 유엔의 권고대로 땅을 분할 하게 되면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의 56퍼센트나 차지하게 되는 거 라, 아랍인 입장에서는 불평등한 제안이었죠.
- 유엔의 투표 후, 유엔의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는 아랍인은 이스라엘 땅으로 규정된 지역에서도 떠나지 않고 싸웠고, 이스 라엘은 아랍권의 반대에 맞서 텔아비브에서 건국을 선포하면서 아예 쐐기를 박아버립니다. 1948년, 마침내 팔레스타인 땅에 이 스라엘이 건국된 것이었죠. 이스라엘이 건국되며 팔레스타인 땅 에 살고 있던 70만 명이 내쫓깁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나라 없는 민족으로서 2,000년의 유랑 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우리의 고향 땅을 되찾아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였지만, 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랍인들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난민 이 된 대재앙이었어요.
이때 이스라엘의 국제적인 입지는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요.
이슬람교를 믿는 주변 국가들 속에서 이스라엘은 유대교와 기독 교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건국 다음 날, 아랍 국가들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시작되었고, 이후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 국가와 총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먼저 1948년에 발발한 제1차 중동전쟁을 두고 이스라엘은 독립 전쟁이라고 부르고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전쟁이라고 부 르는데요. 당시 이스라엘의 전력은 아랍 국가들에 비해 모든 면 에서 열세했어요. 당연히 전쟁은 아랍 국가들의 승리로 끝날 것 만 같았지만 이스라엘은 독립된 나라를 지키겠다며 죽기 살기로 싸웠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신무기로 전투력을 보강하며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과소평가한 데다 각자의 이익을 챙기려다 보니 서로 불신이 가득한 상태였고요.
결국 유엔의 중재로 휴전협정을 맺으면서 전쟁이 종결됐는 데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의 대략 80퍼센트를 차 지하게 됩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주민 약 80만 명이 인근 아랍 국가로 이동하면서 대규모 피난민이 발생하게 되었어요.
이후에도 유대인과 아랍인의 싸움은 계속 이어지다가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이 발발합니다. 두 번째 전쟁은 '수에즈전쟁'이 라고도 불리는데요.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운하를 봉 쇄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선박 통행을 금지한 이후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겠다고 선언하자, 당시 이스라엘은 물론 수에즈운하의 대주주였던 영국과 프랑스가 이에 대응해 공격하면서 제2차 중 동전쟁이 시작되었지요. 그러나 미국이 즉시 전쟁을 멈출 것을 요구하고 소련도 이를 지지하면서 결국 정전이 이뤄지게 됩니 다. 결국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은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인정 받으며 아랍권에서 입지를 높이게 됩니다. 또한 제2차 중동전쟁 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물러난 중동 지역에 미국과 소련이 앞다 투어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1967년에 발발한 제3차 중동전쟁은 '6일 전쟁'이라고도 부릅 니다. 인근 아랍 국가로 뿔뿔이 흩어져 난민이 된 팔레스타인인 중에서 유대인을 향한 테러 활동이 이어지며 중동 세계의 긴장 이 계속된 가운데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이 이스라엘과 한판 붙게 됐는데요.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은 6일 만에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 며 예루살렘 성지 획득과 함께 독립 초기의 여덟 배가 넘는 영토 를 지배하게 됩니다. 팔레스타인 난민은 더 많아지고 아랍 국가 의 반미 감정도 더욱 심해집니다.
뿌리 깊은 갈등이 계속 심화되는 가운데 1973년 10월 6일에 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합니다. 이 전쟁이 벌어진 시기는 이슬 람의 신성한 라마단 기간이자 유대교의 최대 명절이자 속죄일인 욤키푸르Yom Kippur였기 때문에 '라마단 전쟁' 혹은 '욤키푸르 전쟁'이라고도 부릅니다.
- 16세기 중반까지 화려했던 영광의 시대는 쉴레이만 1세가 사망하면서 점차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오스만제국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동양과 서양의 중심을 통제하자 유럽 열강들은 아시아와 직접 무역하기 위해 새로운 무역로를 모색했어요. 유럽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포르투갈은 일찍이 세계지도를 그리며 모험을 시 작했고, 1492년에는 콜럼버스가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신대륙인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습니다.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후 유럽 열강들은 아메리카와 아시아 곳곳에 식민지를 세우며 세계적인 영향력을 키웠고, 오스만제국은 16세기 후반부터 쇠약 해지기 시작했습니다.
- 로마군이 철수한 후 브리튼섬은 혼란의 시기를 겪었습니다. 로마의 빈자리로 사회 시스템이 와르르 무너진 거지요. 계속해 서 주변의 침략을 받자, 브리튼 사람들은 땅을 지키기 위해 용병 을 불러들였어요. 그들은 바로 유럽 대륙에서 건너온 앵글로·색 슨족 전사들이었지요. 앵글로색슨족은 브리튼섬 원주민들에게 땅을 제공받는 대신 섬을 방어해주기로 합니다.
그러나 사회가 혼란한 틈에 앵글로 색슨족은 오히려 브리튼섬을 장악해버립니다. 침략에 맞서 싸워달라고 부른 용병들이 오히려 정복자가 되어버린 거죠. 이렇게 앵글로 색슨족은 이 땅 의 새로운 주인이 됩니다. 원래 브리타니아로 불리던 브리튼섬은 이후 '앵글로인의 땅'이라는 뜻에서 잉글랜드라고 불리게 됩니다. 앵글로 색슨족은 서로 지역을 나눠 일곱 개의 작은 왕국을 세웠고, 이 왕국은 약 200년 동안 끊임없이 지배권 전쟁을 벌였습니다.
8세기 이후, 바이킹이라 불리는 북유럽 해적의 등장은 앵글 로 · 색슨족이 세운 칠왕국에도 피바람을 불러왔습니다. 파괴왕 바이킹의 무자비한 약탈로 인해 왕국에는 식량이 남아나질 않았 지요. 칠왕국 중 하나인 웨식스의 앨프레드대왕은 바이킹의 식 량 줄을 끊는 전략을 써서, 결국 바이킹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 땅따먹기 싸움을 계속하는 진짜 이유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새로운 전쟁 의 서막을 열어서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지요. 러시아가 전쟁 을 벌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2014년, 러시아는 우 크라이나에 있던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병합했어요. 세계에서 가 장 광대한 육지 면적을 가진 러시아가 여전히 땅따먹기를 멈추 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먼저 우크라이나 침공의 핵심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 NATO가 있습니다. 1949년에 설립된 나토는 냉전 초기에 미국과 유럽 주요 국가들이 소련의 팽창을 억제하기 위해 만든 군사동 맹이죠. 우크라이나는 나토에 가입해서 친러가 아닌 친서방 진 영에 들어가길 원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절대 두고 볼 수 없었습 니다. 가뜩이나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종식됐을 때 소련 편이었던 옛 소련권 국가들이 줄줄이 나토에 가입했는데, 이제 코앞에 있는 우크라이나까지 나토에 가입한다고 하니 푸틴은 심각한 안보 위기를 느낀 거지요.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원정 할 때도, 2차 대전 때 나치가 러시아를 침공할 때도 우크라이나 를 지나갔듯,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 끼어 있는 우크라이나는 러 시아의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완충지입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집착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크라이나 의 역사적 중요성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는 원래 옛 소련에 소 속되어 있다가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한 국가이기도 하고, 두 나라의 공통적 뿌리는 키이우 공국에서 출발합니다. 현재 우크 라이나 수도가 키우고요. 푸틴과 많은 러시아인은 막강했던 옛 소련 시절의 영광을 되찾고 싶어 하며 언젠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조지아를 잇는 과거 제국을 다시 세우겠다는 꿈을 품었습니다. 더불어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식량 창고'로 유명할 만 큼 기름진 흑토를 가지고 있으니, 그 자체로도 탐나는 땅이죠.
우크라이나뿐만이 아니라, 땅 부자 러시아가 예로부터 더 넓 은 영토를 갈구해온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1년 내내 얼지 않아 배가 출입할 수 있는 항구인 '부동항'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영 토가 아무리 넓다고 해도 대부분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북쪽 에 있으니, 수많은 항구가 겨울마다 얼어버려서 배가 다니지 못 합니다. 그래서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그토록 전력을 쏟 아왔던 거지요. 부동항은 러시아가 연중무휴로 해상 무역할 수 있는 중요한 경제적 수단인 동시에 글로벌 패권을 쥘 수 있는 해군력의 전략적 이동에도 중대한 역할을 합니다.
현재 러시아가 유럽 쪽에 보유한 유일한 부동항은 폴란드 위 쪽에 있는 발트해의 칼리닌그라드인데요. 칼리닌그라드는 원래 독일 땅이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 편입되었습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벨라루스가 독립하자 러시아 본토와 뚝 떨어진 채 러시아의 중요한 부동항으로 자리 하고 있어요.
칼리닌그라드는 독일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데요. 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왕이 즉위 할 때마다 대관식을 치렀던 역사가 있고,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 엘 칸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독일은 다시 칼리닌그라드를 되찾고 싶었지만, 1990년에 러시아가 동서 독일의 통일을 지지해주는 대가로 칼리닌그라드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러 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발트해를 공유하고 있던 핀란 드가 나토에 가입하면서, 발트해도 사실상 나토의 영향을 받게 되었지요.
러시아의 또 다른 부동항은 2014년에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면서 차지한 세바스토폴입니다. 지중해를 지나 대서양으 로 나갈 수 있는 중요한 부동항이죠.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크림반도의 부동항 역시 안전을 보장하기 힘든 상황 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러시아는 어디로 눈을 돌리게 될까요? 지구온난화가 뜻밖에도 러시아에 새로운 돌파구가 되고 있습니다. 꽝꽝 얼었던 북극해의 얼음이 빠르게 녹고 있고, 소멸 시기는 10년 이 빨라진 2030년으로 예측되고 있어요. 이미 푸틴은 북극해에 서 제해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실행해왔습니다.
앞으로 해빙이 녹아 북극해가 활짝 열릴 경우, 러시아는 18세 기 이후 그토록 온 탐해왔던 부동항을 손쉽게 얻게 되며 더 이상 서방 세력의 간섭 없이 강력한 해양 패권을 가질 수 있게 됩니 다. 지구본을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상상했을 때, 지구본 윗부분 의 북극해를 곧장 지나가면 아시아 대륙과 유럽을 최단기간으로 연결해주는 새로운 항로가 만들어지죠. 그래서 북극 항로는 강 대국들의 새로운 지정학적 경쟁 무대로 떠오르게 되었고, 미국 과 중국도 이곳에서 열심히 기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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