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의 기원

역사 2024. 4. 26. 07:02

- 막걸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탁주다. 탁주는 증류주를 만들 기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만들어 마신 주종이다. 막걸리의 기 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술 자체가 고고학 유적 에 남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정보를 조합 해 처음으로 만들어 먹기 시작했던 시기를 짐작할 수는 있다. 막 걸리의 기원을 따져보자면, 주재료인 쌀이 재배되기 시작한 이후 에야 만들어 마셨을 테니 우리나라에서 쌀이 재배되기 시작한 시 점, 즉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이후부터 주조했다고 보는 게 적 절할 것이다. 하지만 막걸리 재료가 꼭 쌀뿐인 것은 아니므로 그전부터 만들어 먹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대체로 후기 구석기시대에 빙하기가 끝나가면서 곡물이나 구근류(칡이나 감자같이 뿌리를 먹는 식물), 과일 이 풍부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술을 만들게 되었다고 본다. 근동 지 역에서는 1만 5,000년 전부터 야생에서 풍부하게 자라는 밀을 이 용해 맥주를 만들었고, 이후 이집트 문명에서도 맥주를 널리 만들 어 마셨다. 그런데 이때의 맥주는 지금처럼 청량하고 맑은 음료가 아니었다. 오히려 탁하고 걸쭉한 막걸리 같은 것이었다. 즉, 초기 에는 맥주와 막걸리가 같은 종류의 술이었다.

- 경남 창녕군 비봉리에서 발견된 8,000년 전 신석기시대 유적에 서는 흐르는 물에 도토리가 담긴 망을 넣어서 타닌을 빼고 도토리 를 가공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살림터가 발견되었다. 도토리를 묵 형태로 가공해서 먹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뿐이다.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에도 도토리묵이라는 요리가 없다.
세계의 수많은 고고학자들은 신석기인들이 도토리를 먹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을 가공한 식품을 실제로 먹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해외에서 한국을 찾은 고고학자들과 막걸리를 마시게 되 면 나는 꼭 도토리묵을 소개한다. 맛을 본 동료들은 젤리처럼 독 특한 식감을 지닌 안주가 1만 년의 역사를 지닌 그 전설의 음식이 냐며 경탄한다. 그러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우리는 1만 년 동안 이어진 고고학적 안주를 보유한 나라의 후손들이니 말이다.

- 소주가 '세계의 술'이 된 것은 몽골제국 건국 시기부터다. 거대 한 제국이었던 몽골의 정복 활동과 역참으로 세계는 하나가 되었 다. 동서양 할 것 없이 몽골제국의 영향력이 미친 곳에서는 저마 다의 방법으로 증류주를 만들었다. 황실에서 증류주 제조를 관리 했던 거란과 달리 몽골제국은 증류 기술을 숨기지 않고 널리 확 산시켰다. 여기에는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정복지에 소주 제조법을 전해주면 현지인들이 그 소주를 즐기는 가운데에 자연히 몽골제국에 대한 반감을 누그러뜨릴 것이라는 전략이었 다. 일종의 동화 정책이다.
피지배인들을 알코올로 다스렸던 것은 몽골뿐만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술 식민주의 (alchoolosialisme)'라는 용어가 따로 있을 정도다. 지배 국가가 피지배인들에게 술을 공급하여 저항의 의지를 상실시키는 식민주의 전략이다. 러시아가 시베리아 원주민을 정 복할 때,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정벌할 때, 현지인의 반발을 누르 고자 사용한 방법이 바로 술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몽골제국의 영향력은 소주를 뜻하는 단어 '아라기'를 통해 짐 작할 수 있다. 몽골, 카자흐스탄, 튀르키예 등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은 물론이고, 동남아 일대에도 증류주를 가리키는 말에 '아라 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에서 소주를 '아랄길(阿剌吉)'이라고 표현한 기록이 존재한다. 경상도 일대 방언에서는 '아라기'가 술 또는 술지게미를 가리킨다. 아라기는 아랍 지역의 증류 시설인 '알렘빅'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아랍어로 '땀'이라는 뜻이다. 증류 과정에서 술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땀과 같았기 때문 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나라는 소주를 '이슬'에 비유하곤 한다. 고려 시인 목은이색이 자신의 시에서 소주를 이슬로 표현 한 이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역시 불순물을 걸러내고 정 화된 술을 만드는 증류 과정을 담고 있는 비유다. 오늘날 우리가 인터넷으로 소통하기 훨씬 전에 이미 세계는 소주(증류주)로 대동 단결하고 있던 셈이다.

- 젓갈은 한국 김치만의 독특한 풍미를 만들어내는 일등 공신이 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에서는 생선 발효 문화가 발달 했다. 한반도의 서남해안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인들의 음식 문화 에서도 가자미식해(식해는 생선에 약간의 소금과 밥을 섞어 숙성시킨 식 품을 가리킨다)가 발달했다. 중국 기록에도 한 무제가 동이족의 땅에 서 젓갈류의 맛에 반해 '축이 오랑캐를 몰아냄)'라고 이름을 붙일 정 도였다고 한다. '오랑캐를 몰아낸다'라는 말의 뜻은 '오랑캐의 맛 을 따라간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돼지 한 마리 잡으러 갈까?" 라는 말이 "돼지고기 먹으러 갑시다"라는 말로도 통하는 것과 같 은 이치인 셈이다. 전 세계의 수많은 채소 절임 요리 중에서도 한 국의 김치만큼 다양한 젓갈류로 그 풍미를 끌어올린 것은 거의 없다.

- 우리나라에서 삼겹살 구이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 것은 1970년대 말이다. 하지만 비계가 낀 돼지고기에 대한 사랑은 그 역사가 무척 오래되어서 일제강점기에 출간된 요리책에도 '세겹 살(삼겹살)은 돼지 중에 최고'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삼겹살 구이가 비교적 최근에야 유행하게 된 데는 비 계가 가진 특유의 잡내가 한몫했다. 지방이 가득한 비계는 고기의 여러 부위 중에서 인기가 없는 부위다. 자연스레 값도 싸다. 하지 만 돼지 종자 개량을 통해 특유의 잡내를 없애고 비계 사이에 살 이 들어차도록 한 결과, 삼겹살 구이라는 맛있는 음식으로 재탄생 할 수 있었다.
돼지비계 요리를 사랑하는 한국과 우크라이나는 여러모로 공 통점이 많다. 지정학적으로 유라시아의 끝자락에 위치해서 유목 문화의 영향이 강하다는 점, 주변 강대국들의 침탈로 인한 질곡의 역사를 경험했다는 점 등이 그렇다. 또한,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으나) 두 나라 모두 오래전부터 농업이 주요한 산업이었지만 다양한 육가공 문화가 발달했다. 육류 단백질은 농경민들에게 결핍되 기 쉬운 영양소다. 그렇기 때문에 돼지비계처럼 저렴하고 구하기 쉬운 부위를 가공해서 영양분을 섭취할 방법을 모색하다 보니 살 로나 삼겹살 구이 같은 요리를 개발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살로와 삼겹살의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최고의 술안주라는 점 이다. 삼겹살에 소주이듯이 살로에는 보드카가 제격이다. 여기 에 상큼하고 아삭한 양배추 절임까지 곁들이면 우크라이나에서는 가히 최고의 안주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살로와 삼겹살 구이가 각각 우크라이나와 대한민 국의 국민 음식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단순히 맛 때문만은 아닌 듯 하다. 그보다는 이 음식들 속에는 척박한 역사와 가난 속에서도 기어이 살아내고자 했던 두 나라 민초들의 강인한 생존력이 담 겨 있기에 서민들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조선 후기에 인기가 많았던 소불고기 요리로는 설하멱(下) 을 꼽을 수 있다. '눈 오는 날 찾는다'라는 뜻의 설하멱은 일종의 꼬치구이로, 소고기를 불에 구웠다가 찬물이나 눈에 넣어 식힌 후 기름을 발라서 다시 한번 구워 먹는 요리다. 지금도 유라시아 일 대에서 널리 유행하는 꼬치구이인 샤슬릭도 분무기 같은 것으로 물을 뿌리면서 고기를 구우니, 요리법이 비슷하다.
보다 대중적인 소고기 요리의 대표로 설렁탕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소의 머리, 내장, 뼈다귀, 발, 도가니 따위를 푹 삶아서 만든 국 또는 그 국에 밥을 만 음식인 설렁탕은 말뼈나 양뼈를 고아서 만든 몽골과 카자흐스탄 요리인 슈르파(또는 소르포)와 그 맛이 거 의 똑같다. 가축의 뼈를 푹 고아서 만든 이 음식들은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부위까지 살뜰하게 조리해 영양 섭취를 해야만 했던 민중 들의 지혜가 담긴 레시피라고 할 수 있다.

- 알코올 분해 효소가 선천적으로 많은 서양인들은 이처럼 주로 도수가 낮은 술을 마시며 해장한다. 위스키의 본고장이자 술꾼 많 기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에서는 해장술을 '개털(hair of the dog)'이 라고 한다. 늑대 같은 맹수에게 물린 상처는 그 짐승의 털을 문지 르면 낫는다는 미신에서 비롯된 말로, 쉽게 말해 '술병은 술로 고 친다'라는 뜻이다.
반면, 알코올 분해 효소가 서양인에 비해 선천적으로 적은 아 시아인들의 경우에는 술로 해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중국 사람 들은 해장 음식으로 연두부와 쌀죽, 일본 사람들은 된장국(미소시 루)에 낫토를 먹는다. 몽골 사람들은 원래 우유를 발효시켜 약하게 알코올 성분이 함유된 쿠미스를 마시며 해장을 했지만, 요즘에는 러시아의 영향으로 맥주를 많이 먹는다.
각 나라마다 저마다의 해장 문화가 있지만, 우리나라만큼 '해 장'이란 단어가 널리 쓰이는 나라는 없는 것 같다. 한국에는 아예 '해장국'이라는 음식이 따로 존재할 정도다. 한국에서 해장국을 마시는 행위는 일종의 사회생활의 한 부분으로 깊숙이 자리를 잡 았다. 요즘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예전에는 회식을 한 다음 날이면 으레 함께 술자리를 한 이들 중 한 명이 "오늘은 해장국이나 할 까?" 하며 전날 멤버들을 다시 불러내어 합동으로 숙취 해소를 하 기도 했다.
다 같이 모여 해장을 하면서 전날 과음으로 인해 상했을 서로 의 건강을 생각해주고, 간밤의 여흥을 맑은 정신으로 거듭 이어가 는 해장 문화는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한국 특유의 문화라고 여겨 진다. 우리나라보다 술을 더 좋아하는 러시아나 폴란드에도 이런 지혜로운 해장 문화가 없다. 지금 당신이 마시는 한 잔의 술이 더 욱 행복한 이유는 아마도 내일의 따뜻한 해장국이 있기 때문은 아 닐까?

- 그렇다면 농사는 언제,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예전에는 근동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지중해 동안의 팔레스타인에서 북부 메소 포타미아, 이란 고원에 이르는 지역)'에서 처음 발생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는 설이 우세했다. 하지만 오늘날 고고학계에서는 다지역 기원설을 더 지지한다. 중국에서도 약 1만 년 전부터 농사가 시 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나왔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약 1만 2,000년 전부터 호박, 박, 구근류 같은 것을 재배한 흔적이 발견되 었다. 즉, 농사는 동시다발적으로, 지역마다 독자적으로 발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 사실 농사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농경의 도입은 직립보행과도 견줄 수 있다. 직립보행은 동물적인 능력을 희생함으로써 당장의 생존 가능성은 줄어들게 만들었지만, 그 대신 두뇌의 폭발적인 발 전을 가져왔다. 이로써 장기적 관점에서 인간의 생존 가능성은 훨 씬 더 늘어났다. 농사도 마찬가지다. 사냥과 채집은 자연의 변화 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환경 적응성이 강한 활동이다. 눈앞의 먹잇감을 쫓거나 열매를 따면 그만이다. 만일 사냥감이 보 이지 않거나 더 이상 채집할 거리가 없으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 면 된다.
반면, 농사는 한번 시작하면 그 지역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모든 삶을 농사에 걸어야 했다. 또한, 의외로 영양 상태의 불균형을 초래했다. 사냥과 채집을 하다 보면 다양한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었던 데 반해, 농사를 지을 경우 자연에서 나는 다양한 음식 자 원을 포기하고 오로지 선택해서 키운 작물만 먹어야 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비자발적 '원 푸드 다이어트'인 셈이다. 아이 러니하게도 농사를 지으면서 인간의 신장은 더 작아졌고 각종 질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또한, 농사로 인해 전쟁이나 갈등의 빈도 도 더욱 심해졌다. 사냥과 채집 대신 농사를 선택한 상황에서 곡 물 생산량이 떨어질 경우, 생존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약탈이다. 비축해둔 식량은 인간뿐만 아니라 야생동물로부터도 지켜야 했 다. 신경 써야 할 일들이 한층 더 많아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농사만의 장점들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주요한 장점은 인간 삶의 예측할 수 없는 요인 들을 최대한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령, 농사를 잘 지으려 면 치수(水)가 관건인데, 수리와 관개 시설에 관심을 기울임에 따라 인류는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 울 수 있었다. 또한, 사회 갈등을 줄이기 위해 공동체 내에서의 감 시와 통제를 강화하게 됨에 따라 법과 규칙 체계를 만들어나갔다. 그 결과, 장기적으로 인간의 수명은 늘어났고,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명도 빠르게 발전해갔다. 이처럼 농경이 도입되면서 인류는 급 격한 도약을 하는데 고고학계에서는 이를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 른다.

- 맨몸 격투기에 숨은 인류의 지혜
맨몸으로 하는 격투기가 인명 사상을 줄인다는 사실은 최근의 역사적 사례로도 확인된다. 1960년대 중국과 소련 양국은 국경 지역 영유권을 두고 우수리 강의다만스키 섬에서 큰 분쟁을 겪 었다. 이때 양측은 화력 동원은 자제하면서 주먹만 사용한 싸움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덩치 좋은 군인들을 내세웠다가 나중에 육박 전이 격해지자 다른 부대에서 권투나 무술 경력이 있는 선수를 데 려와 투입했을 정도다. 하지만 끝내 육박전으로 해결이 되지 않자 양측은 화력을 사용하긴 한다. 그 결과, 양측 도합 수백 명의 사상 자가 발생하는 수준에서 분쟁이 마무리된다. 어떠한 전쟁도 일어 나지 않는 것이 백번 옳지만, 애초부터 화력을 사용했더라면 피해 수준은 훨씬 더 커졌을 것이다.
선사시대 이래로 인간은 끊임없이 전쟁을 해왔다. 한 연구에 따르면 선사시대 사회의 90퍼센트에서 폭력 분쟁이 있었으며 적 어도 2년에 한 번꼴로 실제 분쟁을 겪었다고 한다. 폭력성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 내면에 내재된 본능 중 하나다. 그렇다고 해서 폭력성을 아무 때나 드러냈다면 인간은 이미 멸종했을지도 모른다. 맨몸으로 하는 격투기는 선사시대 이래로 인간 내면의 폭력성 을 적절한 방식으로 표출하면서 재미있는 의식으로 승화시킨 결 과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무용의 <각저도>에 그려진 고구려인과 서역에서 온 호인의 결투 장면은 새롭게 다가온다. 인간은 자신 과 다른 타인에게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이 두려움이 커지 면 적개심이 되기도 한다. 고구려인들이 즐겼던 씨름은 이방인에 대한 적개심을 격투 경기를 통해 해소하는 방편이었으리라. 또한, 경기가 열리는 장을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축제의 장으로 만듦으 로써 모두가 하나로 화합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 사슴뿔 금관, 하늘과 땅을 잇다
1921년 발굴된 신라 금관총 금관은 사슴뿔과 나뭇가지를 모티 브로 하고, 곡옥(曲玉, 반달 모양으로 다듬은 옥구슬)을 단 화려하고 독특한 형태로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사실 사슴뿔과 나무를 형상화한 금관은 흑해 연안,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도 발견된 바 있 다. 나아가서는 서쪽으로는 북유럽, 동쪽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유적에서도 비슷한 모티브의 관들이 발견되었다.
북반구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발견되는 사슴뿔 모양의 관은 하늘의 대리인인 샤먼의 의식에 사용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사 슴뿔은 매년 자라므로 무한한 생명력을 뜻한다. 또한, 하늘로 뻗 어나가는 아름드리나무는 마치 하늘로 이어지는 통로를 연상하게 한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상징이었던 사슴뿔과 나무가 (금관 장식에 쓰인 이유다. 오늘날에도 유라시아 곳곳의 샤먼들은 신성 한 나무 아래에서 하늘과 통하는 의식을 치른다. 만주족은 20세기 초반까지도 신라 금관과 유사한 형태의 관을 쓰고 그들이 신성하 게 모시는 자작나무 앞에서 샤먼이 부족을 대표하여 하늘에 제사 를 올렸다. 사슴뿔과 나무 모양으로 장식된 샤먼의 관은 신과 인 간이 소통하는 다리의 역할을 했다.
- 신라 금관은 유라시아 네트워크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반도 동 남쪽에 위치한 신라의 왕과 귀족이 쓰던 관이 북방 유라시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에 주목하면 이해의 실마리가 보인다. 금은 무르고 변형이 쉬운 물질이다. 따라서 금관을 착용하려면 가죽이 나 천으로 만든 관모(모자)를 쓰고 그 위에 금관을 덧써야 한다. 흥 미로운 점은 신라 귀족의 무덤에서 거의 빠짐없이 발견되는 관모 의 재료다. 이 관모의 재료는 섬세하게 가공한 자작나무 껍질이 었다.
자작나무는 한반도 남쪽 신라에서는 자라지 않는 나무로 주로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에서만 자라는 대표적인 북방계 수종이다.
- 오늘날에도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자작나무의 껍질로 그릇, 모자, 가방 등의 생필품을 만들어 사용한다. 천마총의 말다래도 자작나 무 껍질을 복잡하게 가공해서 만들었는데, 그 위에 복잡한 그림을 그릴 정도로 신라에서는 자작나무 공예술이 발달했다. 이는 당시 신라가 북방 지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자작나무를 공급받는 무역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또한, 그것을 가공하여 예 술품을 만드는 장인들의 기술이 출중했음도 의미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재인 신라 금관에는 이처럼 우리 역사의 다양한 장면들이 숨어 있다. 유라시아 대륙과 맞닿고자 했던 고대 신라 왕족들의 열망에서부터 일제강점기 문화재 약탈의 아 픔, 그리고 이에 대항하고자 했던 우리 민족의 문화에 대한 자부 심과 항일 의식까지 화려한 외양속에 반만년 역사가 고스란히 담 겨 있는 것이다.
-  중국인들은 인삼을 직접 캐지 않고 굉장히 먼 데서 수입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삼의 대표적인 산지 는 백두산 일대다. 인삼은 일교차, 계절에 따른 기온차가 뚜렷하 고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약용작물이다. 중국과 인삼 교역을 시작한 시기는 고조선 때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백두산 일 대에서 얻은 모피를 중국과 교역한 흔적이 있는데, 이때 한반도 인삼의 존재가 중국에 알려졌던 것 같다.
우리 인삼이 본격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삼국시대에 들 어서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진상품으로 중국에 인삼을 선물했 다. 고구려와 백제의 인삼이 유명하다는 기록은 6세기경부터 등 장한다. 통일신라도 당나라에 인삼을 보낸 기록이 있지만, 인삼의 품질이 고구려나 백제 인삼에 미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심지어 당나라가 통일신라에서 보낸 인삼을 받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통일신라가 인삼의 주요 산지인 백두산 일대와 멀어서 생산 량이 적었던 데다 채취한 인삼을 저장하는 기술도 발달하지 못했 던 탓도 있다.
우리 역사에서 인삼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국가가 발 해다. 신라 인삼에 대한 기록은 8세기 말 이후에 사라진다. 이 시 기는 발해가 한반도에서 인삼의 주요 거래 국가로 등장하는 시점 과 맞물린다. 발해의 영토는 시베리아 호랑이로 유명한 연해주 시 호테알린산맥과 백두산 일대로까지 확장되었는데, 이 지역이 바 로 인삼의 주요 산지였다. 일본도 8세기 초에 발해를 통해서 인삼을 처음 접한다. 발해는 기후가 냉랭하고 산세가 험한 지형에 위치했지만 그러한 토양에서 잘 자랐던 특산품 인삼 덕분에 이를 수 출해 국고를 쌓을 수 있었다.
최근 러시아의 발해 유적에서 발해가 인삼 산지로 유명했음을 밝혀주는 물건이 발견되었다. 바로 인삼을 채취하는 도구다. 이 도구는 동물의 뼈로 만들어졌다. 오늘날에도 삼과 쇠는 상극이기 때문에 인삼을 채취할 때 나무나 골제로 된 도구를 사용한다. 흥 미롭게도 인삼 캐는 도구가 발견된 곳들은 발해 유적들 중에서도 최북단 산악 지역들이었다.

- 적절한 모방은 그 물건이 널리 사용되고 보급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고조선 멸망 후 한반도 남쪽의 국가들은 중국과 직 접 교역하게 되는데 삼한의 우두머리들은 중국에서 사온 관리의 옷과 도장을 비롯해 중국제 명품을 무척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인 기가 있던 제품은 청동거울이었다. 한나라의 청동거울은 중국 내 에서도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청동거울의 뒷면은 화려하게 장 식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둥그런 모양이 태양 같아서 행복과 부 를 상징했다. 청동거울은 실용성과 상징성을 겸비한 도구였다. 청 동거울은 일본에서도 인기가 있었는데, 야요이시대 무덤에서는 청동거울이 같은 장소에도 몇 개씩 발견되기도 한다.
- 그런데 이 중국 명품의 수요가 많아지자 그 대안으로 청동거울 을 모방한 제품이 널리 제작, 사용되기 시작한다. 일명 '본뜬거울' 이라고도 불리는 방제경(製鏡)이다. 방제경은 특히 약 2,000년 전 무렵 삼한이 있던 경상남도 일대에서 널리 유행했다. 얼핏 보 면 한나라 청동거울과 유사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무늬가 조잡해 서 차이가 난다. 거울 뒷면의 무늬는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아무 필요가 없다 보니 문양이 다소 거칠더라도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도록 보급형으로 만들어 널리 사용한 것이다. 방제경 덕분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거울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방제경은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에 있는 초기 백제시대의 집터 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는 이제 거울이 살아생전 귀하게 사용되다 가 무덤에 함께 묻히는 물건이 아니라 집에서 쓰다가 그냥 버릴 정도로 흔한 물건이 되었음을 뜻한다. 이쯤 되면 방제경은 청동거 울의 어설픈 가품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그보다는 더 많은 사람 들이 실용적인 도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보급형으로 발전된 형태 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심지어 방제경은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흑해 연안이나 우크라이나에서도 발견되었다. 실크로드를 통해서 교역이 왕성해지면서 중국제 물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이를 본뜬 방제경이 유통되었던 것이다.

- 전쟁 영화 포스터나 스틸 이미지를 보면 전장에 총을 꽂고 그 위에 철모를 걸어두어 시신이 있는 곳을 표시하는 장면이 종종 묘 사된다. 이는 약 3,000여 년 전 고대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 전사 들이 땅에 낡은 칼을 꽂아 전사자를 위로하던 풍습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동서양을 대표하는 역사서인 헤로도토스의 《역사》 와 사마천의 《사기》에는 초원 사람들이 낡은 칼을 전사의 상징으 로 숭배했다는 내용이 공통적으로 나온다. 이 풍습을 《역사》에서 는 '아키나케스', 《사기》에서는 '경로'라고 불렀는데, 동일한 말을 다르게 음차한 것이다.
이 풍습은 고대 그리스로 건너가서 전쟁의 신 아레스(Ares)의 상징이 된다. 한반도에서도 고인돌 앞에 비파형동검을 꽂아두고 숭배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현대인들의 관점에서는 화려한 황 금 보검이 아니라 날이 빠진 낡은 칼을 꽂아두는 것이 선뜻 이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저승과 이승을 반대로 생각했던 고대 유 목 민족들의 관념에서 비롯되었다. 죽은 자를 위한 유물은 일부러 부러뜨리거나 깨서 기존의 형태를 훼손하여 넣는 경우가 흔하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왕이나 장군의 경우에는 시신을 거둔 뒤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 안치했다. 2,500여 년 전 러시 아 알타이 초원의 파지리크 고분군 유적에서 왕족을 묻은 대형 무 덤을 발굴하던 중 흥미로운 인골이 발견되었다. 미라 형태로 발견된 무덤의 주인공은 머리 가죽이 벗겨진 상태였는데 벗겨진 부분 을 소가죽으로 덧대어둔 것이다. 오래전 동아시아에서는 적장을 죽이고 나면 목을 베어 그의 해골로 술잔을 만들어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풍습으로 유목 민족들의 경우에는 목 을 베는 대신 머리 가죽을 벗겨서 자신이 타고 다니는 말의 꼬리 에 달고 다녔다. 아마도 미라로 발견된 왕족은 전쟁터에서 선봉에 나섰다가 희생을 당한 인물이지 싶다. 그의 부하들은 전장에서 목 숨을 잃고 머리 가죽이 벗겨진 수장의 유해를 고이 모셔와 적군에 게 훼손된 신체를 정성스레 복구시킨 후 무덤에 안장했을 것이다. 이런 풍습이 있다 보니 전사의 유골은 전쟁터에서 획득해야 하는 주요한 전리품이었다. 북방 유목 전사들은 전쟁이 끝나고 승기를 잡 았다고 해도 적의 무덤을 찾아 그 인골을 훼손해야 비로소 전쟁이 끝 났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무덤 에서 발견한 귀금속들을 전리품으 로 챙기기도 했다. 실제로 흉노의 고분을 발굴하다 보면 이미 도굴이 되어서 인골이 사방에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 문신 과정은 침술과도 비슷해 치료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 다. 파지리크 유적에서 발굴된 미라의 허리 아래 부분에는 마치 침을 놓은 듯 일렬로 점을 찍은 문신이 양쪽으로 남아 있다. 이 부 위는 공교롭게도 오래 말을 탈 경우 가장 통증이 심한 요추 부분 이다. 기마민족에게 요통은 피할 수 없는 고질병이었을 터, 바늘 로 아픈 부위를 찔러 허리 통증도 줄이고 신령한 힘을 몸에 불어 넣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신을 완성하려면 바늘로 수백 번, 수천 번 몸이 찔리는 고통 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고통을 동반한 채 우리 몸을 도화지 삼아 새겨 넣은 문신은 고대의 정신문화가 담긴 메모리와 같다. 하지만 근대 이후에 문신은 특유의 주술적, 제의적 의미는 사라지 고 그 의미가 바뀌게 된다. 사람들이 몸의 털을 밀고 문신으로 표 식을 새겨 넣는 대신 신분과 계급에 맞는 옷과 화장으로 자신의 몸을 가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와중에 문신은 근대화하지 못한 야만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또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고고학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문신은 고통을 감내하면 서도 자신의 지위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던 고대인들의 가 장 원초적이며 인간적인 화장술이었다.

- 사실 옛사람들이 언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점을 쳤는지 등을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 많은 편은 아니다. 그나마 점복의 흔적으로 가장 많이 발굴되는 것은 복골이다. 복골은 짐승의 뼈로 만들 어진 점을 치는 데 쓰던 도구인데 짐승의 어깨뼈를 불로 지진 다 음 거기에 새겨진 금을 보고 점괘를 보는 방법, 거북의 껍데기나 짐승의 어깨뼈에 글자를 새겨 놓고 그것으로 점괘를 보는 방법 등 이 있었다. 뼈 부위 중에서도 어깨뼈(견갑골)가 선호된 이유는 가 장 얇은 뼈라서 잘 갈라졌기 때문이다.
- 복골의 풍습은 한반도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다만, 상나라와 달리 글자를 새기지 않았을 뿐이다. 그 외에 점을 치는 방식이나 도구 등은 상나라의 그것과 모두 똑같다. 소나 돼지의 어깨뼈에 구멍을 일정하게 뚫어서 불 위에서 그을린 뒤 잘 갈라지게 한 복 골이 약 2,000년 전의 마한과 가야 사람들이 살던 서해안과 남해 안의 조개무지에서 다수 발견되기도 했다. 요즘에도 유독 어촌에 점집이 많은 편인데, 바다만큼 변화무쌍하게 변하는 자연환경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는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복골 이 발견되기도 했다. 강릉 바닷가에 위치한 강문동의 늪지대에서 말뼈로 만들어진 복골이 발굴된 것이다. 말뼈로 만들어진 복골은 전 세계를 통틀어 강문동에서 발견된 복골이 유일하다. 중국 상나라에서는 남방 바닷가에서 잡아온 귀한 거북의 등딱지를 짐승의 어깨뼈 대신 쓰기도 했지만, 말뼈는 사용한 적이 없다. 말의 사육 과 이용이 가장 활발했던 초원 지역에서도 말뼈로 만들어진 복골 은 거의 없다. 이들에게 말은 귀하게 돌보며 타는 동물이지 잡아 먹고 남은 뼈로 점을 쳐도 되는 동물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들 을 종합해볼 때, 강문동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복골용 뼈로 말 뼈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말을 탈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소 나 돼지 같은 가축으로 인식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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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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