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흑역사

역사 2024. 2. 16. 07:25

- 유대인은 경제 사회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유대인은 그들의 정교한 금융 구조, 비즈니스 구조를 이용해 전 세계 각국 경제에서 중추 역할을 맡아 왔다. 세계사에 등장하는 여러 경 제 대국의 이면에는 반드시 유대인이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은 교활한 고 리대금업자로 묘사된다. 근대 상업 은행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 스차일드 Rothschild 역시 유대인이다. 이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금 융업, 대부업에 종사했다. 기록에 남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부업체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의 '무라슈 상회'이다. 여 기에 자금을 댄 유대인 70명의 이름이 아직도 남았다. 기원전 5세기 이집트의 오래된 파피루스 문서에도 유대인들이 대부업 을 했다고 기록되었다.
유대인들은 고대부터 환전, 환율 등의 분야에서도 크게 활약 했다. 이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분야로, 오늘날에도 금융의 핵 심이다. 전설적 투자자로 불리는 조지 소로스George Soros 역시 환 차익(환율 변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익)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어떻게 유대인은 전 세계 금융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 게 되었을까? 이는 그들의 '이산', 즉 '전 세계로 흩어짐'과 관 련된다.
유대인들은 고대부터 율법에 따라 1년에 반 세겔을 교회에 헌납해야 했다. 이는 《구약 성경》에 '가난한 자에게 베풀어라', '수확물 10분의 1은 신의 것' 등으로 기술된 내용에서 비롯된 규 칙이며, 나중에는 기독교의 '십일조'로 이어지는 제도이다.
- 유대인은 방랑생활을 하면서 무역업과 금융업에 뛰어난 능 력을 발휘했다. 그들에게 무역업은 천직이었다. 친척과 지인이 전 세계로 흩어져 거래처를 만들기도 쉬웠다. 또 세계 각지를 오가는 무역상이라는 직업은 박해를 받으면 바로 도망칠 수 있 었다. 상당수의 유대인이 무역업에 종사하게 된 이유였다.
중세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격렬하게 대립하는 동안 유대인들 은 양측을 오가며 무역을 했다. 유대인 무역상들은 대체로 양 측으로부터 온당한 대우를 받았다. 유대인은 무역 중개업자로 서 양측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은 표면적으로 대립했기 때문에 직거래를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무역은 양측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 상인의 중개로 무역을 했다. 유대 상인들이 양측을 오가며 물품을 교역시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 전세계 무역의 중심이 되다
유대인은 서구 여러 나라에 아랍 국가들의 진귀한 물품을 들 여왔고, 아랍 국가에는 비단, 향료 등을 들여왔다.
서유럽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13~15세기에 걸쳐 네덜란드 에 도달했다. 네덜란드의 세계 진출과 함께 유대인들도 중남미 의 브라질에 진출했다. 중남미의 설탕, 커피 무역에는 유대인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유대인의 활약은 북아메리카와의 무역에서도 두드러졌다. 1701년 미국 인구의 1퍼센트밖에 안 되는 유대인들이 무역업자 의 12퍼센트를 차지할 정도였다. 유대인들은 보석, 산호, 직물, 노예, 코코아 등의 무역을 주도했다.
이처럼 그들은 세계 무역사의 거의 모든 장면에서 등장한다.
- 유대인 무역상들은 때때로 밀수에도 손을 댔다. 유대인 부자들 중에는 밀수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도 많다. 로스차일드 가 문도 그중 하나이다.
근대 유럽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이다. 각국은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고, 전쟁 중에는 당연히 물자의 수출입을 금지했다.
이는 이내 각국의 물자 부족을 불러왔고, 밀수를 막대한 이익을 낳는 장사로 만들었다.
나폴레옹이 이끌었던 프랑스와 영국 전쟁 당시 로스차일드가 밀수로 큰 이익을 얻은 사례는 매우 유명하다. 프랑스와 영국 은 서로 경제적 봉쇄를 펼치고 있었는데, 로스차일드는 양측에 뇌물을 주면서 봉쇄 조치를 비껴 나갔다. 로스차일드는 이때의 자산을 밑천 삼아 세계적 은행가가 되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유대 상인의 밀수가 횡행했다. 남북 전쟁에서는 당연히 남부와 북부 사이에 물자 이송이 금지였다.
그 때문에 북부에서는 남부에서 생산되는 면화가 크게 부족했고, 남부에서는 북부 공산품과 커피가 부족했다. 이러한 물자를 밀수하면 막대한 이익을 거둘 수 있기에 밀수업자가 수도 없이 생겨났다.
밀수업자 중에는 유대 상인들이 많았다. 당시 유대교의 랍비 (종교 지도자)는 '밀수는 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라고 거듭 비 난했지만, 이는 거꾸로 당시 유대인의 밀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를 보여 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시기 미국에서는 반유대주의가 강했다.
- 현재 사용되는 금융 제도 중에는 유대인이 개발하고, 발명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에 없어서는 안 될 '유가증권'을 발명한 사람도 유대인이다.
이미 말했다시피, 유대인들 중에는 금융업자가 많았는데 그 들은 돈을 빌려줄 때 차용증서를 채권으로 유통했다. 차용증 서를 팔거나 할인을 한 것이다. 이것이 서양 유가증권의 시작 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에게 유가증권은 매우 중요한 재산이었다. 언제 추방 당할지, 언제 재산을 몰수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산을 '현물' 로 가지는 일은 위험했다. 현물은 한번 빼앗기면 되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가증권은 그것을 가진 본인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빼앗길 염려가 없었다. 또 추방당할 때도 종이 한 장만 가지고 가면 된다. 유대인에게 유가증권은 여행자용 수표와 같았다.
그래서 증권거래소가 설치됐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들은 유대인이었다. 그들은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와 서인 도 회사의 주식을 대량으로 보유했다. 영국 최초의 전문 주식 중개인도 유대인이라고 한다. 또 무기명 채권을 만든 사람도 유대인이었다.
-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이 갑자기 재산을 몰수 당하는 일은 종종 벌어졌다. 특히 지중해 무역을 할 때 스페인 해군 등은 배나 선적물이 유대인의 소유임을 알게 되면 합법적 으로 몰수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해상 보험을 포함해 무역과 관련된 모든 서류에 허위로 기독교인 이름을 기재했다. 이것이 나중에 무기명 채권으로 발전하게 된다.
신용 대출을 시작한 사람도 유대인이라고 한다. 신용 대출은 담보를 잡지 않고 돈을 빌려 주는 제도이다. 담보의 가치로 대 출할 금액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빌리는 사람의 신용도에 따라 대출 금액과 이자를 결정한다. 이로써 담보가 없는 사람 도 사업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되었다.

- 각종 복음서에는 교회를 불편하게 하는 내용도 많았다. 따라 서 교회에서는 그런 복음서를 거두어들여 가능한 한 세상에 퍼 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180년 무렵에는 '너무 많은 복음서가 세상에 나돌고 있다'는 이유로 주교 에이레나이오스는 몇몇 복 음서를 정리한 문헌을 만들었다. 그것이 오늘날 《신약 성경>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정통으로 인정받은 아타나시우스 는 367년 당시 떠돌던 책자 가운데 스물일곱 권을 선별해 그의 부활절 편지에 제시했다. 이것이 393년 히포 공의회를 거쳐 397 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신약 성경》으로 정식 인정받는다. 즉, 《신약 성경>은 기독교 종파 중 하나가 만든 문서이다. 물론 신약 성경》에는 아타나시우스파의 생각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 교회에 가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신약 성경>은 편찬될 당시부터 교회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세상에 나도는 숱한 복음서 중 마태(가톨릭은 마태오), 마가(마르 코), 누가(루카), 요한 네 사람이 쓴 것만 정통 복음서로서 《신약 성경》에 실었다. 그밖의 복음서는 모두 배제되었다.
- 《신약 성경>에는 철저한 '편집 방침'이 있었다. 기독교교회로 서는 가급적 많은 신도를 확보해야 하고, 신도들을 교회로 끌어 들여야 한다. 그래서 신을 매우 무서운 존재로 만들고 교회에 오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했다. <신약 성경에는 죄를 지으면 지옥 불에 던져진다는 구절이 거듭 나온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복음서 (도마 복음, 유다 복음 등)에는 그런 기술이 별로 없다. 이 부분은 교회가 의도적으로 써넣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는 지점이다.
- 《신약 성경>은 교회에 유리하게 작용하게끔 만들어졌다. 그 런데도 편찬의 통일성이 불충분했는지 성경 속에도 모순점이 많다. 가령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고귀한 집안의 출신으로 묘사되었는데, <누가 복음>에서는 서민 계급이 되고, <마가 복 음>에서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각각의 복음서에서 저자의 의도에 따라 예수의 출신이 서로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 <신약 성경>을 편찬할 때 확인과 조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실어버린 탓이다. 즉, 예수가 어떤 집안에 서 태어났는가 하는 정보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모호한 정보를 모아 《신약 성경>을 편찬한 것이다.
- 신자 수를 늘리기 위한 교회의 전략
앞서 말했듯이 신약 성경>은 누군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면 밀히 구성해서 쓴 책이 아니라, 수십 명, 수백 명이 쓴 문서를 모아 묶은 책이다. 교회에 유리한 문헌만 모았을 것이 분명하 지만, 전체 내용을 세세하게 확인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일단 정식 성경으로 인정되어 세상에 퍼지고 나면 그 뒤에 수 정하기는 훨씬 더 어렵다. <신약 성경>에는 '수정하지 못한 부 분'이 꽤 있다. 그러한 부분은 교회의 의도에서 벗어난 사실이 며, 본질은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과 연결되려면 굳이 교회를 통할 필요가 없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교 회는 '교회는 신과 연결하는 유일한 창구'라는 방침을 취해 왔 다. 이는 신자 수를 늘리고, 신자를 교회에 묶기 위한 '비즈니스 전략'이었을 뿐이다.
- 교회세는 기독교 보급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바꿔 말해 유럽의 여러 나라가 세계를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교회 를 만들면 지역에서 교회세를 징수할 수 있기 때문에 아직 교회 가 없는 '미개척지'에 점점 더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교회를 세우는 측에게는 '이것은 기독교 포교를 위한 것이다 라는 대의명분이었다. 교회세라는 이권을 얻기 위해 교회를 세 우면서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라며 스스로에게도 핑계를 댈 수 있었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 없이 탐욕스럽게 교 회를 세워 나갔다.
'교회를 세우면 징세권이 생긴다'라는 '교회세 시스템'은 곧 인류에게 큰 재앙을 가져왔다.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유럽에 만족하지 못하고 전 세계에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알 려진 바와 같이 15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한다. 이른바 '대항해 시대'이다.
대항해 시대는 유럽 국가들이 '아시아의 향료를 구하기 위한 것'이 가장 큰 동기였다. 또 하나는 '기독교 포교'였다. 15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나침반, 조선기술이 발달하면서 세계 각 지의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 나갔다. 대항해 시대는 포르투갈의 왕자이자 항해왕 엔히크 Henrique의 후원 등 국가적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들에게 대항해는 곧 국가사업이기도 했다. 국가 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늘 기독교 포교가 따랐다.
- 유럽의 왕들은 생각보다 가난했다
중세 유럽의 국왕이라고 하면 '절대 왕정'이라는 말이 떠오르 며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넉넉한 경제력을 갖추었으리라 는 이미지가 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십일조 때문에 중 세 유럽 국가들은 큰 부담을 안았다. 대부분의 시민이 교회에 이미 세금을 냈기 때문에 국가에 세금을 낼 여유가 없었던 것이 다. 그래서 중세 유럽의 왕들은 재정적으로 매우 궁핍했다. 중세 유럽 국가에서는 국가 전체가 왕의 영토가 아니라 교회, 귀족, 제후가 각각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세수는 국왕 이 직접 통치하는 영토인 '직할령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 영토는 결코 넓다고 할 수 없었다. 귀족이 통치하는 영토는 '귀족령' 이라고 했다.
국왕은 재원이 부족하면 직할령을 팔기도 했다. 게다가 중세 부터 근대에 걸쳐 유럽의 국왕들은 쉴 새 없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전쟁 중에 특별히 세금을 걷기도 했지만 서민과 귀족, 제후들의 반발이 심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중세 유럽 국가들의 세금은 주로 관세나 간접세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는 세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유럽 각국은 어떻게든 교회세를 회피할 방법이 없는지 모색하게 되었다.

-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촉발되어, 국가 단위로 가톨릭교회에서 떨어져 나오는 경우도 생겼다.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나라 들은 교회세 부담 때문에 고통을 겪어 종교 개혁은 뜻밖에 찾아 온 행운과 같았다. 대표적인 예가 영국이다.
헨리 8세 Henry Vill가 다스리던 16세기 초반, 영국 기독교인들 은 성경을 따라 십일조를 냈다. 십일조는 4등분이 되어 일부가 로마 교황에게 보내졌다. 세수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던 헨리 8 세는 종교 개혁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534년 '영국 국교회'라는 새로운 교회를 만들고 '국왕지상법'에 따라 스스로 영국 국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했다.
이로써 헨리 8세는 영국 기독교교회의 재산을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십일조도 자신에게 내도록 했다.
- 헨리 8세의 이혼문제
기존의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이렇게 배웠을 것이다.
헨리 8세는 스페인 왕녀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로 교황에게 파문을 당한다. 그래서 영국 국교회는 가톨릭교회로부터 떨 어져 나왔다.
그러나 사실 헨리 8세의 파문은 단순한 구실이었다. 간단히 말해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당하도록 일부러 가톨릭교회와 영국의 관계를 끊고 가톨릭교회의 수입을 빼앗은 것이다.
실제로 헨리 8세가 캐서린과의 이혼을 인정하도록 교황에게 요구했을 때, 이미 헨리 8세와 교황의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 국왕 자신은 가톨릭교회에 대한 십일조 헌납을 중단한 상태였 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는 교황에게 좋은 대답을 들을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혼은 인정되지 못했고 파 문을 당하고 말았다. 헨리 8세가 의도한 결과였다.
- 고대부터 근대까지 유럽에서 절대적인 재정 권력을 쟁취한 로마 가톨릭교회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 의 등장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재정 권력 또한 크게 약화되었다.
프랑스 혁명이라고 하면 흔히 '사치를 일삼던 왕실'에 분노 한 '과도한 세금에 허덕이던 민중'이라는 구도로 설명된다. "빵 을 달라”라며 외치는 민중을 향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Maria Antonia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라고 했다 는 이야기도 전해진다(그러나 이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실제로 한 말이 아니라고 알려졌다).
- 어쨌든 막대한 재물과 권리를 가진 프랑스 국왕과 고통을 받 는 민중이라는 이미지는 우리의 역사관 속에 깊게 자리 잡았 다. 그리고 프랑스 국왕이라고 하면 '절대 왕정'이라는 말이 떠 오르듯 절대 권력을 거머쥐고 국민을 괴롭혔다는 인상이 있다. 하지만 사실 프랑스 국왕은 그 정도로 막강한 권력도, 막대한 재산도 없었다. 도리어 역대 프랑스 국왕들은 여러 차례 파산 을 하기도 했다. 유럽의 다른 국왕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 유산으로 빚을 물려준 프랑스 국왕들
프랑스 국왕은 왜 몇 차례나 파산 지경에 몰려야만 했을까? 바로 재정 기반이 약했기 때문이다. 성직자(교회)와 귀족은 막 강한 힘을 지녔고, 이들은 국가에 대한 세금을 면제받았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프랑스 인구는 2,300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중 성직자는 10만 명에 불과한데도 그들이 소유한 토지는 전 국의 10분의 1에 이르렀다. 성직자들은 정해진 세금을 내는 대 신 자신들이 정한 금액을 국가에 납부했다.
귀족 또한 40만 명이 채 안 되었지만, 프랑스의 90퍼센트 이 상의 부를 독차지했다. 즉, 당시 프랑스에서 성직자와 귀족을 제외한 민중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던 것이다. 국왕은 그런 민중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주변국과 전쟁을 치르는 데 필요한 비용 등을 확보해야 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국왕 루이 16세 Louis XI도 엄청난 빚을 안고 있었다. 전임 국왕의 7년 전쟁과 미국의 독립전쟁 지원 등의 전 쟁 비용 때문에 프랑스의 빚은 30억 리브르(한화 약 8천 억)에 달 했다.
그때까지 몇 차례 채무불이행을 선언했던 프랑스는 금융가로 부터 신용을 잃었다. 이 때문에 이자는 5~6퍼센트로 높았고, 이 자만 해도 연간 2억 리브르 가까이 지급해야 했다. 당시 프랑스 의 국가 수입이 2억 6,000만 리브르 정도였고, 세입의 대부분이 이자를 무는 데 쓰였다.
- 사실 루이 16세는 상당히 국민을 염려했던 왕이었던 듯하다. 재정 위기 때 국민에게 더 이상의 세금은 걷지 않고, 귀족이나 교회(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역대 프랑 스 국왕들도 사실은 귀족이나 교회에 세금을 더 내라고 압박하 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왕이 귀족과 교회의 심한 반발 로 과세를 포기하고 말았다.

- 초기 불교 경전에 따르면 붓다는 제자들에게 어려운 가르침 을 설파하거나 수행을 시킨 일도 없었으며, 누구나 알기 쉬운 말로 세상의 도리를 설명했다. 붓다는 죽기 직전에도 제자들에 게 “앞으로는 세상의 도리와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의지하며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붓다는 생전에 누구에 게도 엄격한 수행과 어려운 교리로 짐을 지우지 않았으며, “누 구나 자기 자신을 믿고 살아가면 된다"라고 전했다.
- 초기 불교 경전에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바로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이 담겼다는 사실은 예로부터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불경에 기록된 설화 가운데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바로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이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후세의 불교 교단은 이를 불교의 본질로 삼지 않았 다. 불교의 본질은 '오랜 수행 끝에 터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내 세웠다. 붓다의 가르침처럼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바로 실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불교 교단과 승려들은 더 존재할 의미가 없어진다. 누구나 바로 실천할 수 있다면 지도하는 승려가 필 요 없기 때문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설령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불교는 어렵고 엄격해야만 했다. 이후 붓다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교단을 만들었고, 경제 규모가 커져감에 따라 교리는 점점 어려워졌다. 엄격한 수행도 하게 되었다.
신도를 확보하고 기부를 늘리기 위해서는 불교의 가르침에 '고마움'을 느끼도록 해야 했다. 고마움을 한층 더 크게 만들려 면 불교의 가르침은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인 편이 유리했다. 승 려들은 교리를 어렵게 만들고 엄격하게 수행함으로써 자신들 에게 위엄을 부여하고 신도와 기부를 늘리고자 했다.
기독교에서 '교회를 통해서만 신과 연결될 수 있다', '교회는 신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라는 방향으로 기울어진 논지 와 흡사하다. 종교는 이런 식으로 비즈니스화 되어 간다. 전통 이 깊은 종교든 신흥 종교든 종교 비즈니스화의 기본 구조는 앞 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 돈이 돈을 벌게 만든 기부문화
사찰은 어떻게 이토록 막대한 재력을 지닐 수 있었을까? 중세 부터 사찰은 농지와 금전 등을 기부받았는데, 그것이 장원으로 발전해 갔다. 그러한 장원만으로도 넓이가 상당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사찰은 '신의 사자'이기도 했으므로 많은 사 람들이 '사찰에 기부하면 구원을 받는다'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 어, 교토의 니치렌 종파의 사찰 16곳의 회합 기록에는 1576년 기부를 요청한 지 불과 열흘 만에 1,200관문이 모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200관문은 쌀로 치면 1,000석(석은 다이묘나 무 가의 봉록 단위로 성인 한 명이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쌀의 양에 해당한 다) 안팎이다. 그만한 양이 불과 열흘 만에 모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광대한 장원을 이용해 대부업도 겸했다. 장원 에서 나는 쌀이나 기부된 쌀은 전부 다 사찰에서 소비하기에는 양이 많았다. 그래서 남은 쌀을 이자를 받고 빌려주는 '출거'를 했다. 출거는 원래 국가가 가난한 농민에게 벼를 빌려주고 가 을에 이자를 붙여 반환하도록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에는 빈민 대책이었지만 점차 이자 수입에 무게가 실리면서 어느새 국가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개인이 출거하는 일도 생겨 이를 '사출거'라고 불렀 다. 사출거는 이자가 매우 높았다. 즉, 고리대금이다. 이 고리대 금을 대대적으로 행했던 곳이 사찰 세력이었다. 그중에서도 히 에이잔은 중심적인 존재였다.
- 전국 시대의 일본은 불교 외에 또 다른 종교 문제를 안고 있 었다. 유럽 여러 나라들의 기독교 비즈니스가 일본에도 밀려왔 던 것이다. 기독교 비즈니스가 대항해 시대를 가져왔다는 사실 은 앞에서도 말했는데, 유럽의 대항해 시대는 일본의 전국 시대 와 시기적으로 거의 겹친다.
1543년부터 1587년 반세기 동안 포르투갈, 스페인 등 유럽에 서 온 무역선, 이른바 '남만선'들은 일본 각지에서 활발하게 교 역을 했다. 그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예수회 선교사의 국외 추방을 명령한 '바테렌(신부) 추방령'을 내리기 직전이었다.
'남만무역'이라고 하면 유럽의 희귀한 생산품을 실어 오는 '특별한 무역'이며, 이들 '외래품은 일부 다이묘나 부유한 상인들 손에만 들어갔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남만무역으로 들어온 수입품은 당시 일본 사회에 깊숙이 파 고들었다. 특히 무기, 군수물자는 다이묘에게는 꼭 필요한 물품 이었다. 총포는 일본에서도 만들었지만, 총탄을 만들 때 사용되 는 납과 탄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은 당시 일본에서 생산이 되지 않아 해외에서 수입해 올 수밖에 없었다. 남만무역을 거치지 않고서는 총포의 탄약, 화약의 원료 같은 물품은 구할 수 없었 다. 당시의 남만무역상들은 독점적으로 총포 관련 군수물자를 전국 시대 다이묘들에게 공급해 이익을 챙겼다고 할 수 있다.
- 남만선이 한 차례 뜨면 유럽의 무역상들에게는 막대한 부가 굴러들어 갔다. 당시 일본과 포르투갈의 무역 거래액은 1570년 대부터 1630년대까지 290~440만 크루자도(당시 포르투갈의 독자 적 화폐 단위)였다. 쌀값으로 치면 200만 석에서 400만 석 정도 로, 도쿠가와 정권의 1년 치 세금 수입에 버금가는 액수이다. 남만무역은 그 정도로 막대한 이익을 봤기 때문에 당연히 의무 도 따랐다. 앞서 언급했듯이 로마 교황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전 세계에 기독교를 포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 라 양국은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가지는 대가로 각지에 선교사를 파견해 교회를 세워야 할 의무를 지었다. 그 결과 양국이 세력을 넓힐 때마다 기독교 또한 그만큼 퍼지게 된 것이다.
기독교 포교와 '무역'은 표리일체,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선 교사가 각지에 파견되면 상인들도 함께 건너가 교역을 했다. 교역으로 얻은 이익의 일부는 교회에 환원되었고, 교회는 그 수 익으로 선교사들을 각지로 더욱 파견했다. 일본에 온 남만선도 마찬가지였다.
남만선이 일본에 왔을 때, 거래하는 조건으로 반드시 기독교 의 포교를 허가하라고 요청했다. '우리와 무역을 하고 싶다면 기독교 포교를 허가하라'라는 뜻이었다. 남만선과 교역을 하기 위해 다이묘들은 기독교의 포교를 인정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일본에 기독교가 급속하게 퍼져 나간 것이다.
- 남만무역이라고 하면 아주 먼 유럽에서 물자를 싣고 온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대부분은 마카오나 중국 항구에서 물자를 실어 왔다. 유럽의 물자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의 화물은 아시 아에서 조달했다.
왜 아시아의 생산품을 남만선이 실어 왔을까? 남만선이 등장 하기 전, 일본의 해외 무역은 왜구(일본 해적)가 지배하고 있었 다. 다만, 명나라 조정의 강력한 진압으로 16세기에는 왜구 세 력이 급속히 쇠퇴했다. 이 왜구를 진압하는 데 도움을 준 나라 가 바로,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1510년 인도의 고아를 점령하고, 고아를 근거지로 삼아 이듬해에는 말라카를 손에 넣으면서 동남아시아에서 본격적인 무역에 나섰다. 1513년에는 명나라와 통상 관계를 맺었다.
1557년에는 해적을 토벌한 보상으로 명나라로부터 마카오를 임대받았다. 그리고 마카오를 거점으로 일본을 포함한 동남아 시아 일대에서 무역을 했다. 즉, 포르투갈은 왜구를 대신해 일 본의 해외 무역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전 세계에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 오스만 제국을 우회해 아시아와 교역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했 다. 이로써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오스만 제국을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으나 오스만 제국도 가만히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오스만 제국은 1535년 프랑스와 특별 협정을 맺고 통상 특권 을 부여했다. 이는 프랑스 상인이 오스만 제국에서 장사를 할 경우에는 치외법권, 영사재판권, 개인세 면제, 재산·주거·통행 의 자유 등을 인정한 것이다. 관세도 일률적으로 부과했다. 결 과적으로 향신료에 붙던 특별 관세가 없어진 셈이다.
- 왜 기독교 국가인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과 협정을 맺었을까? 당시 프랑스는 스페인과 적대적 관계였기 때문에 '적의 적은 아 군'이라는 의미에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후 오스 만 제국은 1580년에 영국, 1612년에 네덜란드와 이와 유사한 특별 협정을 맺었다. 이처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에는 향신 료를 싸게 팔아 스페인과 포르투갈 세력의 향신료 무역을 방해 하려고 했다.
- 7세기 '알리'라는 인물이 칼리프가 되었는데, 이를 인정하는 파와 인정하지 않는 파로 분열했다. 알리를 인정하는 파가 '알 리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시아파'가 되었다. 그리고 시 아파에서는 알리의 후손이 칼리프에 올랐다. 알리를 인정하 지 않는 파는 '이슬람의 관행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수 니파가 되었다. 이후 시아파와 수니파는 서로 적대하는 관계가 된다.
시아파는 10세기 무렵에 세력이 약해졌으나 16세기에 이란 지방에서 일어난 사파비 왕조Safavid dynasty가 시아파를 국교로 정하면서 부활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 이란 지방에 들어 선 이슬람 왕조이다.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대항 세력이었으며, 한때 이란 지방은 물론 아제르바이잔, 이라크 남부까지 넓은 영역을 점령했다. 자연히 사파비 왕조의 영향력은 컸다. 지금도 시아파의 총본산은 이란인데, 이는 사파비 왕조에서 유래한 것 이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은 수니파였다.
-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왕조는 사사건건 대립했으며, 소규모 충돌이 영유권 문제로 발전하기도 했다. 특히 티그리스강과 유 프라테스강의 하류에 있는 샤트 알 아랍 수로의 영유권을 놓고 오랫동안 갈등을 빚었다. 샤트 알 아랍 수로는 메소포타미아 문 명의 발상지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길이 200킬로미터, 가장 넓은 지점의 폭은 800미터에 이른다. 샤트 알 아랍 수로의 영유권 문제는 지금으로부터 400~500년 전에 시작되었다.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양쪽은 오 래전부터 아무런 득도 없는 소모전을 끝내고 싶어 했다. 1639 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처음으로 국경선이 정해졌다. 이때는 샤트 알 아랍 수로의 동쪽 지역에 국경선이 그어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 지역에서는 끊임없이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국경이 확정되고서 200년 뒤, 근대에 접어들어 사파비 왕조 의 뒤를 이어 카자르 왕조가 등장했다. 하지만 국경 분쟁은 끝 나지 않았다.
당시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던 영국의 중개로 1847년 다시 국 경 확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샤트 알 아랍 수로 동쪽 연안이 국경으로 정해졌다. 이로써 국경이 약간 서쪽으로 옮겨 지면서 언뜻 카자르 왕조에는 유리해 보였다. 그러나 샤트 알 아랍 수로의 영유권은 오스만 제국에게 있어서 카자르 왕조는 사용할 수 없었다. 이처럼 실질적인 이득이 없는 결과에 카자 르 왕조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 이 문제는 끝나지 않고 현대로 넘어왔다. 현재 카자르 왕조는 이란으로, 오스만 제국은 이라크로 계승되었지만, 샤트 알 아랍 수로의 영유권을 둘러싼 양국의 대립은 계속된다. 고작 수로 하나로 400년이나 싸움을 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샤트 알 아랍 수로는 양 쪽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이다.
페르시아만은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동서양을 잇 는 물류 거점이었다. 샤트 알 아랍 수로는 내륙과 페르시아만 을 연결하는 통로였기 때문에, 통로를 사용할 수 있고 없고는 차이가 컸다. 더구나 페르시아만 일대에서 석유가 채굴되면서 샤트 알 아랍 수로의 가치는 한층 더 높아졌다.
- 지금도 계속되는 수로 분쟁
긴 싸움은 마침내 타협점을 찾아 1937년, 이란과 이라크는 국 경 조약을 체결했다. 종전대로 샤트 알 아랍 수로의 동쪽 연안 이 국경선으로 정해졌지만, 이란도 샤트 알 아랍 수로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사람들은 이로써 양국의 국경 분쟁이 마무리되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1970년대 이란은 미국을 등에 업고 이라크에 국경선을 조정하라고 압박했다. 당시 이란은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친미 국 가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라크도 저항할 수 없었고 1975년 샤트 알 아랍 수로의 중앙선을 국경으로 하는 데 합의했다. 결 과적으로 이라크는 샤트 알 아랍의 영유권을 절반은 빼앗긴 셈 이었다. 이라크는 이 원한을 풀기 위해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조가 무너졌다. 이슬람 원리주의자 호메이니 Ayatollah Ruhollah Khomeini가 이끄는 새로운 정권은 반미 노선을 강화했다. 미국과 이란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1980년 미국이 이란을 지원하지는 않는다는 계산 아래 이라크는 이란을 선제공격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때 미국은 이라크 편에 섰다. 당시의 이라크 지도자는 사담 후세인 Saddam Hussein 이었다. 즉, 미국은 과거에 사담 후세인을 지원했던 것이다.
이란과 이라크 전쟁은 8년 동안 이어지며 100만 명 이상의 사 상자를 냈다. 이처럼 큰 희생을 치렀지만 막상 국경선은 전쟁 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지금도 샤트 알 아랍 수로를 둘러싼 이 란과 이라크의 충돌은 이어지고 있다.
- 밸푸어 선언과 이스라엘의 탄생
현재 중동 지역의 갈등과 혼란은 이때 영국이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며 남긴 불씨로 인해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전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서로 다 른 세 가지를 약속했다. 먼저, 아랍 사회에는 팔레스타인을 포 함해 중동 전체에서 오스만 제국을 대신할 아랍 왕국을 수립해 주기로 한다(후세인-맥마흔 서한, 1915년).
앞서 설명했듯이 당시 이슬람 세계는 대부분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은 부족도 있었기에 전후 독립을 조건으로 각 부족이 반란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또 하나는 동맹국 프랑스를 상대로 한 약속이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 전체를 분할 통치하자는 비밀 약속이다(1915년, 사 이크스-피코 협정). 제1차 세계대전의 동맹국이자 당시 세계적 강 국이었던 프랑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은 유대인에게 약속한 유대인 내셔널 홈(민족적 고향) 건설이다(1917년, 밸푸어선언),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현 재 이스라엘이 있는 팔레스타인 지방도 오스만 제국이 지배했 던 곳이었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독일과 오스만 제국이 속한 동맹국 진영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때 가장 가혹하게 유대인을 박해했던 나라는 러시아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박해한 러시아와 싸우는 독일을 지지했던 것이다. 여러 번 말했다시피 유 대인은 고대부터 금융 분야에 뛰어난 민족이었다. 유명한 부호 로스차일드 가문도 18세기 독일에서 세력을 키운 유대인 은행 가 가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금융 권력을 잡은 유대인 사회가 어느 진영을 지지할지 주목되었다. 물론 두 진영 모두 유대인 사회 를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유대인을 아군으로 두면 전쟁 비용 을 조달하는 데 꽤 유리하기 때문이다. 고전하던 연합국 측 영 국이 꺼낸 비장의 무기는 유대인 사회에 달콤한 사탕 같았다.
- '밸푸어 선언'이라고 불리는 이 약속은 당시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 Arthur Balfour가 유대인 사회를 대표하는 로스차일드 가문에 보낸 편지가 공개되면서 알려졌다. 전쟁이 끝나면 팔레 스타인 지방에 유대인의 내셔널 홈의 건설을 지지한다는 내용 을 담았다. 영국은 유대인의 돈을 빌리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 역을 유대인에게 내주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영국의 제안은 유대인 사회의 오랜 열망을 잘 읽어 냈다고 할 수 있다.
밸푸어 선언에는 '유대 민족을 위한 내셔널 홈 national home 을 팔레스타인에 수립하는 것을 적극 찬성한다'라고 되어 있으며, 유대인의 국가를 세운다고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유대 인들은 이를 자신들의 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해석했다.
- 제1차 세계대전에서 어렵사리 연합국 측이 승리를 거뒀지만, 전후 중동의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은 더 없는 혼란에 빠졌다. 아랍 세계와 이스라엘 사이의 갈등이 싹 탔기 때문이다. 이는 영국의 삼중 외교가 뿌린 씨앗이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국제연맹의 결정에 따라 영국의 위임통치 령으로 지정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팔레스타인에 는 약 75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으며 그중 65만 명이 아랍인 이었다. 유대인도 거주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아랍인과 유대 인은 서로 친밀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대체로 평온하게 공존하 는 사이였다.
그러나 밸푸어 선언이 알려지면서 그들의 사이는 틀어졌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주했다. 제1차 세계대전 종 료 후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5만 명 정도에 불과했 으나, 1931년부터 1935년 사이에 무려 15만 명이 이주한 것이 다. 이를 두고 아랍인 사회는 크게 반발했다. 팔레스타인에서 는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에 충돌이 잦았고 종종 대참사로 발전 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을 둔 유대인과 아랍인의 대립은 한계점에 다다랐다. 영국은 마침내 위임통치를 포기하 고 이 문제를 국제연합에 넘겨 버렸다. 국제연합은 논의 끝에 팔레스타인 지역을 셋으로 분할하여 유대인 자치구, 아랍인 자 치구, 그리고 각 종교의 중요한 성지가 있는 이스라엘의 일부는 국제연합의 관리 아래에 둔다고 제안했다. 독립 국가 건설을 갈망하던 유대인 측은 마지못해 국제연합의 제안을 받아들였 지만 아랍인 측은 이를 거부했다. 유대인 측은 얻는 것이 있지 만 아랍인 측은 잃을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원수가 된 유대교와 이슬람교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통치가 종료되자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했다. 이와 동시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원래 거주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웃 아랍 국가들도 이스라엘의 국가 수립에 반대하며 전쟁이 시작 되었다. 이것이 제1차 중동전쟁이다.
아랍 측에 이집트, 시리아, 모로코, 레바논, 이라크,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예멘이 참전했으며 영국군 장교들도 다수 아 랍군에 동참했다. 수적으로도 아랍군은 15만 명인데 비해 이스 라엘군은 많아야 3만 명이었다. 아랍 측이 압도적으로 유리해 보였다. 아랍 측은 군사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었으나 긴밀한 연계 부족과 내부 균열로 말미암아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이스 라엘군에 패배를 거듭했다. 이스라엘군에는 종군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많았던 데다 아랍군 내부의 응집력이 부족했던 탓에 도리어 이스라엘의 반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 결국 제1차 중동전쟁은 1949년 휴전협정을 체결하며 종결되 었다. 먼저 공격을 시작한 아랍 측이 더 많은 것을 잃었다. 이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이 정한 유대인 자치구 이상의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휴전협정에서 정해진 경계선이 현재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이스라엘의 국경선이다.
전쟁 중에 주변국으로 피신했던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스라엘 정부로부터 귀환을 허가받지 못했다. 그 때문에 수십만 명이 넘는 난민이 생겨났다. 그들 중에는 지금까지 몇 대에 걸 쳐 난민 캠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이슬람교인과 유대교인은 철천지원수 관계가 되고 말았 다. 처음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영토 문제'로 출발한 이스라엘 문제가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종교적 대립으로 발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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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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