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사

역사 2023. 12. 7. 11:42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이다. 어려서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아홉살에 자치통감을 외우고, 열네살에 사서삼경을 모두 마쳐서 신동이라 불렸다. 열아홉살에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905년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음날 사직하고 단발을 결행한 뒤 낙향하여 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장지연이 신채호를 발견하고 황성신문 논설위원으로 위촉하여 다시 상경하였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중국에 머무는 동안 여러 역사서를 집필하였다. 1925년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표되어 치안유지법과 유가증권 위조 등의 혐의로 10년형을 받고 뤼순감옥 복역중 1936년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사망하였다. 

조선상고사는 1930년 조선사연구초 발간에 이어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는데, 그 내용이 불완전하여 연재를 중지하고 수정하여 발표할 계획이었으나, 건강악화로 실현되지 못했다. 연재는 계속되어 신채호 사후인 1948년에 총 12편의 단행본으로 종로서원에서 출간되었다. 총론은 앞서 1924년에 완성되었다. 

총론에서는 역사를 연구하고 고증하는 방법, 역사를 개인으로서 바라보지 않고 사회상을 서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려 우왕의 혈통이 왕씨인지 신씨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요동고토를 회복하는 것이 가능했는지 불가능했는지, 또 그 일의 결과가 이로웠을지 해로웠을지 판단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 뒤에 그것을 추진한 우왕과 반대한 이성계의 시비를 밝히는 것이 순서다. 마찬가지로 궁예의 혈통이 궁씨인지 김씨인지를 밝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그것은 기존의 불교를 개혁하고 새로운 불교를 세우려 한 것이 궁예 패망의 도화선이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또 왕건이 아니었다면 궁예의 계획이 성공했을지, 만양 성공했다면 그 결과가 어떠했을지도 확인해야 한다. 그런 뒤에 불교개혁을 시도한 궁예와 그것을 반대한 왕건의 시비를 가리는 것이 타당하다.

신채호는 개인과 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사회가 안정적일 때는 개인이 능력을 발휘하기 곤란하다. 사회가 불안정적일 때는 개인이 능력을 발휘하기가 쉽다. 결국 난세에 영웅이 나올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한다. 신채호는 불안정한 사회에서는 창조적이고 혁명적인 인물이 두각을 보이기 쉽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최치원처럼 작은 칼로 세공이나 하는 하급 재주꾼도, 외국인을 모방해서 말하고 웃고 노래하고 곡하면 힘 들이지 않고도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다. 인격적 자주성 없이 노예적 습성만 발휘하는 이런 이들은 민족적 특성을 매몰시키고 혼란만 조장하는 몹쓸 물건들이다. 사회를 지키려면 이런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

신채호는 조선사다운 조선사를 쓰기 위해 조선상고사를 지었다. 조선사다운 조선사란 인간, 시간, 공간이라는 역사의 3대 요소를 존중하는 가운데서 구현된 조선사를 말한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가 어처구니 없는 내용을 담고 있기에 이를 비판하며,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라 잃은 혼란스러움과 가난한 환경에서 이 정도의 저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충분한 시간과 자료, 그리고 답사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데 더욱 크게 이바지했었을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한국사 #고대사

* 본 리뷰는 출판사 도서지원 이후, 자유롭게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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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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