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진화

역사 2023. 10. 27. 11:39

- 한번 갈라져 나간 나뭇가지가 다시 만나지 않듯이 두 계통으로 분화된 인류는 각자 나름의 진화 역사를 만들며 새로운 종이 되어 다시는 만나지 않게 됩니다. 수없이 많은 화석종 중 현재의 인류로 이어져 온 '정통'의 가지가 있고 나머지는 '곁'가지라는 생각이 자리 잡았습니다. 곁가지는 막다른 골목길에 마주친 것처럼 더 이상 진화하지 못하고 인류의 진화 무대에서 사라지고 마는 '루저'의 역할입니다. 호모 사피엔스처럼 성공한 자손에게 유전자를 물려주지 못했다고 생각했죠. 네안데르탈인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 다시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서로 유전 자 교환을 하지 않았어야 할 종끼리 유전자 교환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이 고유전학의 발달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조상을 찾는 작업은 '정통'의 가지를 따라 올라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원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0세기에는 네안데르탈인이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인 지, 호모 사피엔스에 네안데르탈인이 유전적으로 기여했는지가 관건이 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호모 사피엔스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가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데니소바인에서부터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X 집단까지 다양한 고인류 집단이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임이 밝혀졌습니 다. 해수면이 낮아져 바다가 뭍으로 드러나 있던 시기에 고인류 집단은 아프리카와 유라시아가 이어진 땅덩어리 위에서 서로 만나 아이를 낳 기도, 갈등으로 서로를 죽이기도, 석기를 만드는 방법과 추위를 피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집단이 어우러져서 호모 사피엔스를 만들어 냈습니다.
20세기 전반 우리의 생각을 지배했던 계단식 진화, 20세기 후반 우리 의 생각을 지배했던 나무식 진화, 이 둘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을 표현 하기에는 모자라는 은유였습니다. 인류의 진화는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앞으로 행진하는 모습도, 곁가지와 본가지로 갈라져서 울창한 아름드 리나무가 되어 뻗어가는 모습도 아닙니다. 차라리 갈라졌다가 다시 만 나고 다시 갈라지는 강줄기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많은 물줄기를 이루었던 인류 계통의 다양성은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큽 니다. 작은 물줄기에서 큰 물줄기로 모여 지구 전체를 덮고 있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다양한 집단의 다양한 기원이 만들어 낸 모습입니다.

- 인류 계통의 역사가 고작 수백만 년에 불과하다는 것이 학계에 일반 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인류 계통을 가리키는 말도 바뀌었습니 다. 인류 계통을 새로 지칭하게 된 말은 바로 사람아족(호미닌hominin)입 니다. 인류 계통의 정통성은 과(사람과, 호미니드hominid)도, 족(사람족, 호미 나인hominine)도 아닌 일개 하위 단위인 아족(사람아족, 호미닌hominin)에 불 과합니다.
분류 단위가 바뀌는 일은 언뜻 별로 중요하지 않은 변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과든 아족이든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게 그거라고 생각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인류의 기원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인류 계통이 시작한 시점이, 그러니까 인류가 침 팬지와 하나의 계통이었다가 서로 다른 계통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시 점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오래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류 계통이 과 단위가 아닌 아족 단위로 분류되었다는 것은 인류 계통이 침팬지 계통과 여태까지 생각했던 정도보다 더 가깝다는 뜻입니다. 인류가 그 다지 특별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인류학의 역사는 어떻게 보 면 사람이 다른 동물에 비해 얼마나 특별하지 않은지를 밝혀온 역사이 기도 합니다.
유전적으로 이렇게 가깝고 고생물학적으로도 아주 최근까지 한 계통 에 속해 있었던 사람과 침팬지는 계통이 갈라진 이후에도 지금 함께 살 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겉보기로는 두 생물의 모습이 판이합니다. 하 나의 조상에서 갈라진 다음 사람이 그만큼 많이 달라진 것일까요? 아니 면 침팬지가 많이 달라진 것일까요? 혹은 두 계통 모두 달라진 것일까 요? 사람과 침팬지의 공통 조상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사람과 침팬 지의 공통조상에 가까운 화석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모릅니다.
- 엄지손가락처럼 나뭇가지를 휘감을 수 있는 엄지발가락을 가진 고인류는 440만 년 전에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360만 년 전에도 살아 있었습니 다. 사람의 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고인류와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나란히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초기 인류가 사람과 같이 두 발 걷기만을 할 수 있도록 적응했다는 가설이 조금씩 깨지고 있습니다. 인류는 다른 어떤 특징보다도 직립보행 을 함으로써 인류다워졌다는 정설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게 되었습 니다. 300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하나 뿐이 아니었습니다. 직립보행을 하는 방법은 하나뿐이 아니었습니다. 아파렌시스가 살았던 동아프리카에는 엄지손가락같이 생긴 엄지발가 락으로 두 발 걷기를 하던 의문의 고인류가 함께 있었습니다. 이들은 아 파렌시스와 만났을까요?
- 고인류의 시작이 당당한 두 발 걷기에서 시작했다는 가설이 주류 가 설로 받아들여지기까지 20~30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440 만 년 전 아르디와 같이 두 발로 (당당하게) 땅 위를 걷고 나무도 탈 수 있 는 모양새를 갖춘 고인류가 366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아파렌시스와 같은 지역을 걸었다는 놀라운 가설이 제시되었습니다. 이 가설은 앞으 로 좀 더 많은 자료의 검증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단지 루시와 같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다른 고인류와 함께 따뜻한 화 산재를 밟으면서 걸어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 호모 하빌리스 다음에 등장한 호모 에렉투스는 도구를 이용해서 사 냥하고 도축하는 포식자의 위치에 올라서는 데 성공했습니다. 에렉투 스가 사용한 아슐리안Acheulean 돌도끼의 칼자국 위에 다른 동물의 이 빨 자국이 나 있었습니다. 아슐리안 돌도끼를 사용해서 한번 처리가 끝 난 사체에 다른 동물이 왔다는 뜻입니다. 호모 하빌리스는 다른 포식자 가 먹고 남긴 뼈를 깨서 골수를 먹었고 호모 에렉투스는 상위 포식자로 서 동물을 직접 사냥하고 도축했다는 가설은 정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석기와 함께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아마도 도축당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있었지만 정식 논문으로 발표된 예는 없습니다. 그만큼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석기를 만들어 썼다는 가 설도, 호모(아마도 에렉투스)가 석기를 써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사냥 했다는 가설도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1996년, 약 250만 년 전에 살았던 고인류 화석종인 오스트랄 로피테쿠스 가르히가 동물 뼈와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가르히와 함께 발견된 동물 뼈에는 칼자국이 나 있었습니다. 가르히가 석기와 발견되 지는 않았지만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석기를 사용해서 남긴 동물 뼈의 흔적은 고인류학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 스가 도구를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도구를 사용했다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석기를 사용했다면 석기를 제작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게 됩니다.
칼자국이 난 동물 뼈는 계속 발견되었습니다. 340만 년 전 에티오피 아의 디키카Dikika 유적에서 발견된 동물 뼈에 남겨진 칼자국은 분명히 호모속이 아닌 고인류가 도구를 써서 동물 뼈를 처리했다는 자료입니 다. 340만 년 전에는 호모속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330만 년 전 숲이 우거진 케냐의 롬퀴Lomekwi 유적에서 발견된 석기는 최초의 석기인 올도완 석기를 만드는 방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돌을 깨서 날을 세 운 찍개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석기를 만든 고인류는 누구였을까요? 물 론 330만 년 전의 석기는 200만 년 전 석기에서와 같이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도구라는 분명한 흔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의도를 가지고 석기를 만든 고인류가 호모속 외에도 있었다는 가설이 받아들여 지려면 좀 더 기다려 봐야 합니다. 그러나 사바나 환경에 적응하면서 인류가 두 발 걷기를 하고 도구를 만들어 쓰게 되었다는 가설은 조금씩 도전받고 있습니다.
- 사실 석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놀라울 정도의 인지 능력이 필요합니 다. 석기 제작은 알맞은 원석을 고르는 일부터 시작됩니다. 크고 울퉁불 퉁한 돌을 보면서 완성품을 상상하는 일은 지금 이곳 눈앞에 있는 시간 과 공간을 넘어선 가상의 세계를 생각해 낼 수 있는 사고 능력이 필요합 니다. 그리고 완성품에 이르기까지 거쳐나가야 하는 한 단계 한 단계가 눈에 그려져야 합니다. 생각과 다른 형태로 깨진 돌조각은 다시 붙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석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은 고등한 지능과 인 지체계를 가진 사람에게만 있는 능력이라는 가정이 받아들여집니다. 450cc에서 시작하여 600cc를 채 넘지 않은 두뇌 용량을 가지고 있는 오 스트랄로피테쿠스가 돌로 도구를 만들어 쓴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반 전이었습니다.
- 가령 사람과 가까운 침팬지를 비롯한 유인원은 사람처 럼 행위를 배워서 다음 세대로 전승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놀랍게 도 흰개미를 잡아먹기 위한 도구인 나뭇가지를 다듬는 방법이 집단마 다 다르다는 사실이 관찰되었습니다. 나뭇가지를 다듬는 방법이 집단 내에서 대대로 전승되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나뭇가지를 다듬어 흰개 미를 잡아먹는 모습을 유심히 보면서 따라 하는 아이는 커서 그 방법을 자신의 아이에게 가르치게 됩니다. 침팬지에게도 집단마다 독특한 문 화(?)가 있다는 주장이 처음 제기된 1990년대 이후 침팬지뿐만 아니라 오랑우탄에게도 대대로 전승하는 도구 제작 방법이 있다는 것이 밝혀 졌습니다. 문화 전통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침팬지가 돌을 깨서 도구를 만드는 모습이 관찰되었고, 돌을 깨는 방법을 그다음 세대로 전승하는 모습도 관찰되었습니다. 두뇌 용량이 450cc 남짓한 침팬지가 돌을 깨서 도구를 만들어 쓸 줄 알고 그 방법을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서 전승한다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또한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사람만이 도구를 제작하여 사용한다고 생 각했지만 그 생각은 틀렸음이 밝혀졌습니다. 사람만이 도구 제작 및 사 용 방법을 가르치고 배우고 다음 세대로 전승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 각 역시 틀렸음이 밝혀졌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다른 동물과 양적, 질적 으로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인류의 진화 역사 속에서도 사람이 속한 호모속은 그 이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과 양적,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인류와 다른 동물 사이에 놓인 벽, 호모속과 오스 트랄로피테쿠스속사이에 놓인 벽은 의외로 두껍지 않았습니다.

- 50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인류는 그 후 300만 년가량을 아프 리카에서만 살았습니다. 인류 계통이 시작할 즈음의 아프리카는 지금 보다 섭씨 3~4도가량 높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후 조금씩 기온이 내려갔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기온이 높았습니다(인류세Anthropocene 에 들어서면서 다시 기온이 올라가고 있지만 그래도 수백만 년 전보다는 낮은 기온입니 다). 인류는 따뜻한 곳에서 기원하여 수백만 년 동안 따뜻한 곳에서 적응 한 셈입니다.
200만 년 전에 기원한 호모속의 몸집은 그 이전의 고인류에 비해서 확연히 커졌습니다. 500만 년 전부터 300만 년 동안 오스트랄로피테쿠 스속의 키는 100센티미터 남짓했지만 호모속의 키는 180센티미터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호모속의 큰 몸집은 그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을 그대로 뻥튀기하듯 비율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커진 몸집이 아닙니다. 커진 몸집의 대부분은 길어진 다리가 차지합니다. 따 뜻한 기후에 적응할수록 몸통은 호리호리하고 팔다리는 길어집니다. 지금도 적도 지역에서 오랜 기간 살아온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몸이 호리호리하고 팔다리가 깁니다. 전체 몸집에 비해 표면적이 크도록 적응 한 것입니다. 몸집에 비해 표면적이 큰 몸에는 땀을 증발시켜서 체온을 조절하는 새로운 적응 양식이 숨어 있습니다. 땀을 증발시킬 수 있는 표 면적이 넓을수록 체온 조절에 도움이 됩니다. 몸의 표면적 변화는 지금 남아 있는 고인류의 화석을 통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

- 파란트로푸스의 큰 어금니는 큰 몸집을 보여주는 자료가 아니라 어 쩌면 척박했던 환경을 보여주는 자료인 셈입니다. 고릴라 어금니의 2배 크기라고 해서 반드시 고릴라 몸집의 2배라는 관계는 성립하지 않습니 다. 그렇다면 기간토피테쿠스와 메간트로푸스도 거인이 아닐 수 있을 까요? 기간토피테쿠스의 큰 어금니 역시 고릴라보다 큰 몸집을 나타내 는 것이 아니라 고릴라보다 훨씬 더 척박한 먹거리를 많이 먹어야 했음 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기간토피테쿠스가 영양이 부실했다는 놀라운 내용은 진즉 발표된 바 가 있습니다. 영미권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중국의 고인류학 자장인원은 1987년에 기간토피테쿠스의 앞니를 조사한 결과 상당수가 법랑질 형성 부전enamel hypoplasia을 보인다고 발표했습니다. 영장류는 자랄 때 치아도 만들어집니다. 성장기에 영양이 부족하면 치 아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부족한 영양 때문에 치아의 법랑질 (에나멜질)이 만들어지다 말다 하면서 법랑질에 가로로 줄이 생기게 됩니 다. 이 줄은 한번 만들어진 다음에는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성장기 동 안 겪었을 영양부족을 알려주는 좋은 지표입니다. 어른 인골의 앞니에 법랑질 형성 부전을 나타내는 금을 관찰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랄 때 극심한 영양부족을 겪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법랑질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기간토피테쿠스는 자랄 때 먹거리 가 부족했을 것입니다. 고릴라만큼 많이 먹어야 하는 기간토피테쿠스 는 그 먹거리를 구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기간토피테쿠스는 고릴라만큼의 몸집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 지 영양이 부족하고 열악한 먹거리를 많이 먹어야 했던 것뿐일지도 모 릅니다.

- 결국 고인류 역사에 몸집이 큰 거인족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단 현생인류의 어금니보다 더 큰 어금니를 가지고 있던 화석종은 있습 니다. 이들의 큰 어금니는 큰 몸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척박한 환경 의 징표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먹거리를 먹고서도 그 다지 크지 않은 몸집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먹거리의 질이 낮았음을 말해줍니다. 척박해져 가는 환경에서 고인류는 나무껍질이라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나무껍질도 훌륭히 먹어내는 파란트로푸스속과 먹거리 경쟁을 할 수 없었던 호모속은 파란트로푸스속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 는 동물성 먹거리에 운명을 걸었습니다. 높은 열량을 섭취하게 된 호모 속은 키가 100센티미터 전후였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이나 파란트로 푸스속과 달리 180센티미터도 쉽게 볼 수 있는 계통이 되었습니다. 100 센티미터의 단신 파란트로푸스에게 180센티미터의 장신 호모 에렉 투스는 거인으로 보였겠지요? 하지만 평균적으로 그보다 더 큰 인류 계 통은 없었습니다.

- 호모 에렉투스부터 비롯된 고인류의 고기 사랑을 보여주는 화석 뼈가 있습니다. KNM-ER 1808은 1974년 케냐에서 발굴된 약 170만년전 고인류 호모 에렉투스의 화석입니다. 골반뼈의 생김새로 보아 여자라 고 추정하고 남아 있는 다리뼈의 길이와 두께를 통해 키 173센티미터, 몸무게 50~60킬로그램의 성인이었다고 추정합니다. 다 큰 성인이라 도 100센티미터 정도에 불과했던 루시와 같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 보다 키가 훌쩍 커진 셈입니다. 그런데 다리뼈 조각에는 염증의 흔적이 있습니다. 고인류학자 앨런 워커Alan Walker는 고인류 화석 뼈에서 보 이는 염증의 원인이 비타민 A가 축적된 육식동물의 간을 너무 많이 섭취하여 생긴 비타민 A 과다증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간 등 내장은 최상 위 포식자만이 먹을 수 있는 부위입니다. 이 추정이 사실이라면 생태계 에서 다른 맹수가 먹고 남긴 사체에서 겨우 골수를 먹는 2차 포식자였 던 고인류가 최상위 포식자에게만 허락된 부위를 먹게 되었을 뿐만 아 니라 넘치도록 많이 먹을 수도 있게 된 것입니다. 인류 진화사에서 실로 기록적인 지점이 됩니다.
고인류가 고기를 즐겨 먹음으로써 몸과 머리가 커졌고, 최상위 사냥 꾼이 될 수 있었으며, 먹잇감을 쫓아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로 퍼져나갔다는 이른바 '사냥 가설'은 수십 년 동안 인류의 진화를 설명하는 유력한 가설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이 가설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습니다.
화석 자료를 살펴보았을 때, 호모 에렉투스가 등장하는 시기와 맞물 려 돌날 흔적이 새겨진 동물 뼈 또한 증가합니다. 이는 그동안 호모 에 렉투스가 뛰어난 사냥꾼이었다는 가설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022년에 브리아나 포비너 Briana Pobiner가 이끄는 스미소니언 박물관 의 연구팀은 호모 에렉투스가 등장한 이후 돌날 흔적이 남겨진 동물 뼈 가 증가했지만 그 이전의 연구에서는 호모 에렉투스 이전의 고인류와 함께 발견되는 동물 뼈를 그다지 조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혔습니 다. 그 이전의 고인류와 함께 발견되는 동물 뼈 자체가 그렇게 많지 않 았기 때문일까요? 그게 아니라 동물 뼈 화석이 있어도 돌날 흔적을 분 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 진화 과정에서 고인류의 두뇌 용량은 계속 늘어났기 때문에, 만약 동 물성 먹거리와 두뇌 용량 증가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면 돌날 흔적이 있는 동물 뼈가 계속 늘어났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호모 에렉투스 이후 에 돌날 흔적이 남겨진 동물 뼈가 계속 증가하지도 않았습니다. 저우커 우뎬에서 호모 에렉투스의 화석과 함께 발견된 동물 뼈에는 짐승 이빨 의 흔적이 난 다음에 고인류의 돌날 흔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뛰어난 사냥꾼이 되었지만 여전히 다른 짐승이 먹고 지나간 찌꺼기도 먹었다 는 뜻입니다. 이는 사냥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기존의 기술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더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모 에렉투스가 뛰어난 사냥꾼으로서 점차 발달한 사냥 기술로 고 기를 얻은 것이 아니라면, 두뇌가 커지면서 필요로 하는 고열량의 먹거 리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고인류학자 줄리 레스닉Julie Lesnik은 이에 대 한 기발한 해답으로 곤충식을 제시합니다. 인류가 곤충식을 통해 고칼 로리를 확보했다는 주장입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곤충을 먹는 다고 하면 역겨움과 혐오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제대로 된' 먹 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기근에 나무껍질을 먹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곤 충을 먹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둘 다 지극히 유럽 중심 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도 불과 수 세대 전까지 메뚜기를 잡아먹는 것은 평범한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곤충식을 하는 문화권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다른 먹거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곤충을 먹 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먹거리의 하나로 곤충을 먹습니다.
- 곤충식을 일상의 식생활로 여기는 문화권은 주로 열대 지역에 분포 합니다. 사실 인류 진화사에서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인류는 열대 지역에 서 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식생활에서 곤충식이 먹거리의 적 지 않은 부분을 차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열대의 환경이 주는 다양한 생물을 골고루 섭취하는 열대 지역에서 곤충은 다양한 먹 거리의 일부일 뿐입니다. 열대에서 멀어지면서 생태계의 다양성이 줄 고 먹거리의 종류 역시 감소합니다. 곤충식에 대해 역겨움이나 혐오감 을 드러내는 것은 어쩌면 열대 지역의 문화에 대한 혐오감을 가진 유럽중심주의의 소산이 아닐까요?
앞서 언급했던 ER 1808의 비타민 A 과다증이 몸집이 큰 동물의 간을 너무 많이 먹어서 온 것이 아니라 벌집 bee brood을 너무 많이 먹어서 얻 었다는 주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고인류에게 곤충을 비롯한 다양한 단백질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렇다면 곤충을 잡아먹기 위해 사용한 도구 등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왜일까요? 나뭇가지로 도구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가 령 침팬지는 지금도 나뭇가지를 이용해서 흰개미를 잡아먹습니다. 어 른 침팬지보다 큰 두뇌를 가지고 있는 고인류 역시 나뭇가지를 이용해 서 곤충을 먹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류의 진화에서 곤충식의 중요 성을 역설한 레스닉은 파란트로푸스 보이세이 등 200만 년 전후 호모 에렉투스와 같은 시기에 동아프리카에서 살았던 초기 고인류 화석의 유적에서 흰개미집 둔덕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 인류의 진화 역사에서 호모 에렉투스보다 나중에 등장하는 네안데르 탈인은 분명히 상위 포식자였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동물 사냥에 최 적화된 고인류 집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의 몸은 추운 빙하기에 바깥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적응했습니다. 또한 네안데르탈인이 하이 에나에 버금갈 만큼 육식을 즐겨 했다는 가설이 정설로 자리 잡았을 정 도로 네안데르탈인의 고기 사랑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고기 사 랑은 그들이 남긴 사냥도구, 가죽 다듬는 도구 등의 고고학 유물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들은 사냥 도구를 써서 많은 짐승을 잡아 도축했으며, 가 죽옷을 만들어 추운 겨울을 견뎠습니다. 가죽을 처리할 때 앞니로 잘근잘근 씹어서 부드럽게 만들어 썼기 때문에 그들의 앞니에는 특이하게 닳은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가죽을 다듬을 때 쓰는 도구는 짐승 뼈로 만들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먹거리뿐만 아니라 생활의 여러 면에서 짐승에게 의지했던 것입니다. 고기 사랑으로 유명한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하여 비슷한 시기의 유라시아 고인류 집단에게 외이도골종이 높은 비율로 나타난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귀뼈에 생기는 종양인 외이도골종은 잠수 어로 생활을 많이 하는 집단에서 자주 보이는 병리 현상입니다.
이 최근의 연구 성과들이 시사하는 점은 무엇일까요? 두 발 걷기, 두 뇌 용량, 사냥 도구의 제작과 사용이 패키지를 이룬 '사냥 가설'은 그자 체로 뛰어난 논리적 정합성을 갖춘 것처럼 보였으며 20세기까지 주류 가설로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두 발 걷기'가 떨어져 나가고 이제는 두뇌 용량과 사냥, 도구 제작 간의 연결고리조차 끊어지 려고 하고 있습니다. 동물성 먹거리를 얻기 위해서는 고기를 얻을 수 있 는 큰 짐승을 사냥할 수밖에 없다는 기존의 공식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또 다른 시각이 생기고 있습니다. 동물성 먹거리를 얻기 위한 행동으로 서 사냥이 남성의 전유물이었고 여성은 채집을 통해 식물성 먹거리를 확보했다는 경제 분업 가설이 와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동물성 먹거 리의 확보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면 사실상 이러한 분업은 존재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곤충 등 다양한 동물성 먹거리와 씨앗, 구근류, 해산물 등으로 고칼로리 고단백질의 먹거리 섭취가 가능해지 면서 두뇌는 점차 커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호모 에렉투스만이 아니 라약 200만 년 전에 살았던 모든 고인류가 공통적으로 겪은 진화입니 다. 어른 침팬지보다 큰 머리를 가지고 있는 고인류가 서로 살아가는 방 식을 보고 따라했을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 동물성 단백질이 쉽게 상하지 않게 하는 방법은 불로 익히는 것입니 다. 호모 에렉투스가 사용한 사냥법은 사냥감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몇 날 며칠을 뒤쫓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냥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 한데 고기를 씹고 소화하는 일에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쓸 수는 없습니 다. 그런데 호모 에렉투스가 이러한 사냥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사냥에 오랜 시간을 들여도 효율적으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 다는 뜻입니다. 불을 이용하여 음식을 익혔다면 시간을 적게 들여 먹을 수 있습니다. 결국 호모 에렉투스의 큰 몸집과 큰 두뇌에는 화식이 중요 한 역할을 했다고 추정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익힌 음식은 고인류에게 많은 이 익을 가져다주었지만 대가 또한 치러야 했습니다. 음식을 익히다 보면 불에 타기도 합니다. 지금이라면 탄 고기는 그냥 버릴 수도 있겠지만 먹 거리가 귀한 고인류는 웬만큼 탄 음식은 그냥 먹었을 것입니다. 탄 음식 을 먹으면서 발암물질이 체내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고기를 굽거나 장 작이 불에 탈 때 발생하는 연기를 너무 많이 마시면 유전자의 돌연변이 와 암을 발생시킬 가능성이 커집니다. 구운 고기나 연기에서 나오는 발 암물질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작용을 하는 효소를 너무 많이 만들면 그 역시 독성을 띠게 됩니다. 그래서 발암물질을 분해하는 효소를 너무 많이 만들지 않게 하는 유전자가 사람에게는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 에 비해 발암물질에 대한 내성을 키워야 했던 것입니다. 또한 음식을 익 히면서 열에 파괴된 비타민을 보충하기 위해 별도로 날음식을 꼭 섭취 해야 했을 것입니다. 날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다양한 비타민 결핍으 로 치명적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불맛'이 유행입니다. 불맛 입힌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어딘지 모르는 익숙함은 어쩌면 저우커우뎬 동굴 속에서 말고기를 불에 익혀 먹던 호모 에렉투스 시절의 기억일지도 모릅니다.
- 벽화가 남겨진 동굴이 어떤 동굴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고인 류는 그냥 아무 동굴에 들어가서 벽화를 그렸을까요? 아니면 특별한 기 준을 가지고 동굴을 선택했을까요? 프랑스의 한 절벽에는 43개의 비슷 비슷한 동굴이 있지만 이 중 벽화가 그려진 동굴은 8개뿐입니다. 동굴 의 음향 성질을 비교 분석한 결과 벽화가 그려져 있는 동굴은 특히 메아 리 효과가 뛰어났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는 동굴 벽화가 음향 효 과를 이용한 의례의 한 부분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에 힘을 실 어줍니다. 이렇게 벽화가 그려진 동굴 자체가 특별한 장소였다면 지금 우리가 그 앞에 섰을 때 묘한 느낌을 받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메아리효과가 좋은 동굴에 들어가서 돌로 벽과 바닥을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 르는 모습, 노래를 부르면서 벽화를 그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매우 익숙한 모습이 떠오르지 않나요?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사람다운 모습은 세계 어느 곳보다 먼저, 3~4만 년 전 유럽 의 후기 구석기 시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의 후기 구석기 문화 요소가 유럽이 아닌 곳에서 발견되거 나 후기 구석기 시대 이전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큰 반향을 일으 킬 수밖에 없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꾸준히 발표되는 연구들은 유럽 후기 구석기 문화 요소가 유럽이 아닌 곳에서도, 후기 구석기 시대 이전에도 나타났음을 알려줍니다. 스페인에서 발견된 세 군데 벽화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7만 4,000년 전까지도 올려볼 수 있다고 발표되었 습니다. 7만 4,000년 전 스페인은 현생인류가 아닌 네안데르탈인이 살 던 시대와 지역입니다.
그동안 네안데르탈인이 동굴 벽화를 그렸다는 연구 결과는 간혹 있 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석은 네안데르탈인의 독자적인 발명이 아니라 옆 동네(?)에 들어온 현생인류가 그리는 행위를 보고 따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독자적으로 창안했든, 남의 것을 보고 따라 그렸든 그렸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인지 능력이긴 합니다. 아무나 따라 그 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인류의 문화를 단지 따라 했을 뿐이라는 입장의 밑바닥에는 네안데르탈인은 인지 능 력의 한계 때문에 독자적으로 창안해 낼 수 없다는 생각, 네안데르탈인 은 '부족하다'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페인의 벽화가 7만4,000 년 전의 것이라는 이야기는 네안데르탈인이 독자적으로 창안해 낸 문 화요소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발견입니다.
- 동굴 벽화가 호모 사피엔스만의 독창적 문화 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밝혀낸 논문에 이어서 동굴 벽화가 유럽인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 는 논문도 발표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에서 발견된 벽화는 5 만년 전에 만들어졌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 그림이 그려진 벽화 역시 인도네시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반인반수, 사람과 동물이 합쳐진 모습은 온전히 상상의 결과입니다. 독일에서 발견된 30센티미 터 길이의 '사자 사람' 조각상은 4만 년 전 고인류의 상상력을 잘 보여 줍니다. 사자와 같은 고양잇과의 큰 맹수류가, 지금의 독일에 살았던 고 인류가 상상하는 세계에 출현하고 사람과 합쳐졌습니다. 이 시기의 반 인반수 조각상으로는 거의 유일무이한 예입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Sulawesi섬에서 발견된 4만 4,000년 전의 벽화에는 동물뿐만 아니라 동물과 사람이 혼합된 형태인 반인반수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유럽이 아닌 곳에서 이렇게 이른 시기에 벽화를 그렸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벽화에 반인반수가 그려져 있다는 것은 더더욱 놀랍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발견된 4만 4,000년 전의 벽화의 연대에 대해서 의 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벽화의 연대를 재는 일은 까다롭거든요. 벽화가 그려진 암벽의 연대를 측정해 봤자 그 연대는 암벽이 만들어진 시기일 뿐 벽화가 그려진 시기는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벽화는 암 벽이 생기고 한참 뒤에 그려졌을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정확한 방법은 벽화에 사용된 안료의 연대를 측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료를 연대 측정의 시료로 사용하면 안료가 파괴되고 맙니다. 소중한 고고학 자료를 파괴하는 셈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해서 측정한 연대가 안료로 사용 된 재료 자체가 만들어진 연대인지 혹은 벽화에 안료로 쓰인 연대, 그러 니까 벽화를 그린 연대인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래된 나무를 갈 아서 안료를 만들었다면 측정된 연대는 벽화가 그려진 시기보다 훨씬 더 오래전, 나무가 만들어진 시기입니다. 따라서 동굴 벽화의 연대는 벽 화가 그려진 면 안쪽과 벽화가 그려진 면 바깥쪽을 덮고 있는 동굴 지층 의 연대를 측정하여 추정합니다. 그렇게 꼼꼼하고 철저한 방법을 통해 측정한 인도네시아 벽화의 연대입니다.
- 세계 최초의 벽화가 프랑스든 인도네시아든 어디서 발견되든, '세계 최초'의 명찰을 누구에게 달아야 할지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도 흥미 롭지도 않은 과제입니다. 그보다는 예술성이나 창의성과 같이 사람다 움을 만들어 내는 요소가 3만 년 전 유럽이라는 특정 시점과 특정 지점 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사람다움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동굴 벽화가 유럽의 현생인류가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시 말해 현생인류가 아닌 고인류가 아시아에 서 만든 문화 요소라는 사실은 사람다움이 어느 특정 지역, 특정 시대에서 시작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사람의 창의력으로 창조된 세상의 바탕에는 '상상력'이 있습니다. 이 러한 물건을 만든 사람들이 상상했던 세상을 창의적으로 표현했습니 다. 현재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국한된 사고체계에서 벗어나 눈에 보이 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 냈습니다. 시간으로 따지면 과거와 미래입니다. 지금 있는 곳에서 벗어나 상상의 장소에 있는 시나리오를 상상합니다. 현재를 벗어난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현실 속에서는 실체가 없 지만 사람의 머릿속에 살아 있고 언어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됩 니다. 우리가 '창의력' 하면 쉽게 떠올리는 종교, 예술, 과학은 어쩌면 수만 년, 수십만 년, 수백만 년 동안 인류의 진화와 함께 계속되어 온창 의 역사의 끝머리일지도 모릅니다.
- 일련의 연구 결과가 보여주는 인류 조상의 모습은 공격적이고 살상 무기를 휘두르는 킬러 유인원이 아니라, 맹수와 맹금에게 잡아먹히는 먹잇감입니다. 인류의 기원은 공격성을 지니고 태어나 무기를 휘두르 며 돌진하는 포식자에게서 찾을 수 없습니다. 작은 몸집으로 두 발로 서 서 걷다가 맹수를 만나면 나무 위로 도망가고, 미처 피하지 못해 먹이가 된 나약한 모습이 지금 지구 위를 뒤덮은 사람의 기원이었습니다.
그동안 인류학계에서는 초기 인류의 모델로서 침팬지만을 주목해 왔 습니다. 침팬지의 공격성은 사람의 공격적인 남성성을 설명할 수 있다 고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과 계통상 가장 가까운 유인원은 침팬 지만이 아닙니다. 침팬지속에는 두 종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침팬지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보노보입니다. 보노보에 대한 연구는 뒤늦게 시작되었습니다. 침팬지보다 앞에 나서지 않고 공격적이 지 않아 사람의 관심을 덜 받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보노보에 대한 연 구 결과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보노보는 침팬지와 대척점에 있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닙니다. 침팬지가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라면 보노보는 느 긋하고 평화적입니다. 침팬지는 수컷이 주로 연대하는 것으로 유명하 지만 보노보는 암컷이 연대합니다.
침팬지와 보노보가 계통적으로 갈라진 것은 150만 년 전쯤이라고 알 려져 있습니다. 침팬지 계통이 인류 계통과 갈라진 것이 500~800만년 전에 일어난 일이니까 그보다 훨씬 뒤에 침팬지 내에서 계통이 갈라진 셈입니다. 인류의 처지에서 보면 둘 다 똑같은 사촌입니다. 보노보보다 침팬지가 인류에게 더 가까운 것도 더 먼 것도 아닙니다. 침팬지와 인류가 가깝기 때문에 침팬지가 보이는 폭력성과 공격성이 인류에게 나 타난다면, 보노보가 가지고 있는 특징 역시 인류에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던 폭력성, 살인 등은 침팬지 에게서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던 교감 을 위한 섹스, 혈연을 넘어선 사회성 등은 보노보에게서 보입니다. 킬러 유인원 가설이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조상을 제시했다면, 평화롭고 사회적인 조상을 인류의 기원으로 보는 가설도 가능할까요? 브라이언 헤 어 Brian Hare와 버네스 우즈Vanessa Woods는 공저 다정한 것이 살아남 는다Survival of the Friendliest』 (2020)에서 보노보 연구를 바탕으로 인류 진화의 동력을 자기 가축화와 사회적 협력에서 찾습니다.
물론 침팬지도 보노보도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은 아닙니다. 인류가 500만 년의 역사를 가지고 지금의 모습으로 있는 만큼 침팬지와 보노보 역시 그들의 역사를 지나 지금의 모습으로 있습니다.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모습도, 평화적인 모습도 모두 인류 안에 있는 모습입니다.

- 성공적으로 수렵 적응을 해오던 네안데르탈인에게 큰 시련이 닥친 것은 13만 년 전 기온이 잠깐 상승했던 무렵입니다. 이때 평균 기 온은 현재보다도 섭씨 2도가량 높았습니다. 기온이 따뜻해졌는데 어째 서 시련이 되었을까요? 광활한 초원 지대는 눈 깜짝할 새에 우거진 숲 으로 변했습니다.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숲은 매머드같이 거대한 몸 집의 동물보다는 토끼같이 작고 빠른 동물에게 유리했습니다. 네안데 르탈인에게 고기를 제공했던 몸집 큰 동물들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매머드 대신 토끼로는 턱없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네안데르탈인은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물라 게르시의 네 안데르탈인 화석의 치아에는 성장기에 영양부족을 겪은 흔적이 보입 니다. 굶주림 끝에 네안데르탈인이 선택한 방법은 같은 네안데르탈인 을 먹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현재까지 식인의 증거가 남아 있는 네 안데르탈인의 유적은 스페인의 엘시드론El Sidron과 자파라야Zafarraya, 프랑스의 물라 게르시와 레파드레이 그리고 벨기에의 고예Goyet 동굴입니다. 고예 동굴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에는 같은 동굴에서 발견된 순록뼈와 말뼈에 남아 있는 칼자국과 똑같은 형태의 칼자국 이 발견되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죽은 동료를 먹어야만 살 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빙하기는 유례없는 어려움을 가져왔습니다. 그 빙하기를 살아남지 못한 고인류 집단도 많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이 호모 사피엔스에게 정 복당했다는 주장도, 네안데르탈인의 인구가 줄어들어서 현생인류에 비 해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절멸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네안데르탈인 의 인구가 줄어든 이유에는 열악한 환경이 있을 것입니다. 네안데르탈 인의 출생률 저하로 절멸했다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열악한 환경의 결 과입니다. 출생률의 저하에는 환경이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네안데르탈인뿐만이 아닙니다. 에티오피아의 헤르토Herto 에서는 20만 년전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로 알려진 고인류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들에게는 머리뼈에 섬세한 칼자국이 나 있습니다. 단지 머리뼈 속의 두 뇌를 먹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머리뼈를 바가지 모양으로 다듬어 냈다 고밖에 볼 수 없는 칼자국입니다. 돌칼로 다듬은 흔적은 어른의 머리뼈 에서도, 아이의 머리뼈에서도 보였습니다.
식인의 흔적에서는 다른 사람을 죽여서 신나게 먹는 희희낙락한 모습이 아니라 이것을 먹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되는 극한적인 상황에서 절 박한 마음으로 먹는 비장한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았던 그들이 우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 량부아가 특별한 병을 앓고 있던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호모 플로 레시엔시스라는 새로운 종의 일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섬 왜소화 현상island dwarfism으로 머리와 몸집이 작아졌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거의 200만 년 전부터 고인류의 흔적이 발견되었습 니다. 자바인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인도네시아에 살던 호모 에렉투스 중 한 집단이 섬에 갇히게 되면서 섬 왜소화 현상으로 인해 몸과 머리가 작아졌고 6만 년 전의 작아진 모습의 새로운 종으로 진화했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는 섬 왜소화로 몸집이 작아진 코끼리가 발견되는 한편 섬 비대화로 몸집이 커진 쥐도 발견됩니다. 포식자가 없어진 환경에서 몸집이 커지는 종이 있는가 하면 어떤 종은 먹을 것이 줄어들어서 몸집이 작아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 곳곳에서 살던 호모 에렉투스 중 일부가 플로레스섬에 고립되어 섬 왜소화로 머리와 몸집이 작아진 새로운 화석종 호모 플 로레시엔시스가 되었다면 그 시기는 공교롭게도 인도네시아 수마트 라Sumatra의 토바Toba 화산이 폭발한 시기와 맞물리게 됩니다. 7만 5,000년 전에 일어난 토바 화산의 폭발은 인도네시아와 동남아시아뿐 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화산재는 대기권에서 층을 이루고 막을 형성했습니다. 화산재가 만들어 낸 화산재층은 태양열을 막았습니다. 지표면에 도달하는 태양열이 줄어들어 온 세상은 춥고 어두운 겨울이 계속되었습니다. 토바 화산의 폭발은 지난 10만 년 동 안 발생한 화산 폭발 중 가장 크다고 합니다. 혹자는 지난 200만 년 동 안, 혹자는 지난 2,800만 년 동안 일어난 가장 큰 화산 폭발이라고도 합 니다. 당시 화산 폭발로 생긴 분화구는 우주에서도 보인다고 합니다. 우 리가 달의 분화구를 볼 수 있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폭발로 인해 환경도 엄청나게 바뀌었을 것이며 멸종한 동식물의 규모도 엄청 날 것입니다.
토바 화산의 폭발은 아프리카 적도 지역 이외 구대륙 전체에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했습니다. 화산재가 뒤덮인 회색빛의 하늘 아래 간빙기 가 끝나고 빙기가 시작된 이 세상은 춥기만 했습니다. 그동안 따뜻한 간빙기에 적응하며 쌓아 온 지혜는 새로운 잿빛 하늘의 추운 겨울날에 별로 소용이 없었겠지요. 그 결과 아프리카 적도 지역만 제외하고 전 세 계 고인류 집단의 상당수가 절멸했다고 추정됩니다. 당시 북위 30도 이 상의 유라시아에서는 다양한 고인류가 살고 있었습니다. 유럽에는 네 안데르탈인이 있었고, 아시아에는 데니소바인과 고식 호모 사피엔스가 있었습니다.
토바 화산이 폭발한 결과 대다수의 고인류는 절멸하고 아프리카의 적도 지역에서 살아남았던 고인류 집단이 새로운 종,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이라고 보는 입장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때의 화산재 겨울 이 아프리카를 제외한 모든 지역의 인류 집단들을 절멸시키고 아프리카에서 현생인류가 새로운 종으로 출범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현생인류가 유라시아에 도착했을 즈음이면 고인류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빈 지역이었을까요?
그러나 모두 죽지는 않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인류는 살아남았습니 다. 화산재가 뒤덮고 겨울이 계속되는 빙하기의 유라시아에서도 그 수 는 적어졌지만 꿋꿋하게 견뎌낸 고인류가 있습니다. 량부아 동굴에서 는 고인류 화석과 함께 석기도 발견되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만들 었다고는 보기 힘들 정도의 단순한 석기였지만 갓난아기의 두뇌 용량 으로 석기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점은 충분히 충격적입니다.
- 량부아 동굴에서 조금 떨어진 마타멩게Mata Menge 유적에서도 작은 몸집을 가진 고인류와 석기가 함께 발견되면서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와 같이 작은 몸집은 예외적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마타 멩게에서도 두개골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400cc 남짓한 작 은 두뇌를 가진 화석 인류는 량부아에서만 기록됩니다. 량부아의 화석 이 예외적인 개체의 특징이었는지 아니면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라는 새 로운 화석종의 일반적인 특징이었는지는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 습니다.
- 죽은 자에 대한 특별한 행위인 매장은 호모 사피엔스 크기의 두뇌를 가지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만이 가능한, 호모 사피엔스에게 독특한 행 위로 여겨져 왔습니다. 겨우 500cc 용량의 머리를 가지고 있던 호모 날 레디가 호모 에렉투스의 2분의 1가량, 호모 사피엔스의 3분의 1가량 크 기의 두뇌로 깊은 동굴까지 주검을 가지고 가서 매장했다는 주장을 학 계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작은 몸집과 작은 머리의 고인류는 우리가 여태껏 생각해 왔던 인류 의 다양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합니다. 작은 머리로 석기를 만들어 쓰고, 죽은 사람을 매장하고, 벽화를 그릴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20세기의 답은 결단코 '아니요'였습니다. 고인류학계 대부분이 받아들인 정설에 따르면 벽화와 같이 고도의 인지 능력이 있어야 하는 행위는 호모 사피엔스의 특유하고 독특한 행위였기 때문에 당연히 '호모 사피엔스급의 몸과 머리'를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머리가 커야만 가능하다고 생각되던 추상적 사고, 창의력, 복잡한 도구의 제작, 예술 등이 작은 머리로도 가능하다면 도대 체 큰 머리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머리가 커야만 가능하다고 생각되던 일이 작은 머리로도 가능하다는 발견은 새로운 질문을 만듭니다. 인류의 큰 머리가 생물학적으로 특별한 것은 분명합니다. 맹장처럼 이전 기능을 상실하고 이제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라고 하기에는 큰 머리가 너무 대단합니다. 사람처럼 큰 머리를 만들기는 쉽지 않습니다. 큰 머리 를 만들고 유지하려면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인류 의 머리가 커지는 것은 수백만 년 동안 지속된 경향 중 하나입니다. 그 동안 환경은 점점 척박해져 갔습니다. 큰 머리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엄 청난 양의 에너지를 빙하기의 척박한 환경에서 확보해야 했습니다. 큰 머리를 가지고 있는 아기를 출산하는 과정은 지극히 힘들며,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큰 머리를 돌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 너지를 써야 합니다. 큰 머리는 심지어 쉬고 있는 동안에도 기초대사량 의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이렇게 제작비와 유지비가 엄청난 비싼 장 기를 빙하기라는 힘든 환경에서 계속 유지할 만큼 중요한 두뇌는 어떤 기능을 했을까요? 도구를 만들고 예술 활동을 하고 고도의 인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큰 머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큰 머리는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일까요?
- 심리학자 로빈 던바Robin Dunbar는 사회적 두뇌 가설을 주장합니다. 사회적인 동물일수록 머리가 크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의 머리는 부피 가 클 뿐만 아니라 그 안을 채우는 뇌세포가 쭈글쭈글한 주름을 이루면 서 표면적을 최대한 늘렸습니다. 지극히 사회적인 동물인 사람이 서로 에 대한 정보와, 서로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정보를 저장하고 꺼내 쓰 는 장기로서 큰 두뇌가 진화했다는 가설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뇌가 작은 고인류 집단은 복잡한 사회연결망이 없었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큰 두뇌를 생물학적으로 연구하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 두뇌와 다른 동물 두뇌를 비교하여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조직, 단백질, 유전자를 찾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큰 두뇌도 설명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우리는 지금 큰 머리와 지혜, 문화를 하나로 묶어 생각해 왔던 관념이 해체되는 시점에 서 있습니다. 사람다운 지혜와 문화를 만들어 낸 사람 다운 머리는 큰 머리가 아니라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머리라는 가 설이 힘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막상 다양한 인류를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되어 있든 아니든 간에, 다양한 인류는 불쑥불쑥 나타나서 깔끔한 화살표와 도표로 정리되었던 인류의 모습을 복잡하게 만 듭니다. 이 복잡한 그림이 21세기 인류학계에 그려지고 있는 새로운 그 림입니다.
20세기에는 500만 년 전에 시작한 인류 계통이, 200만 년 전에 시작 한 호모속이 적어도 두뇌 용량에서는 꾸준히 증가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21세기 우리가 이제 주목해야 할 것은 호모속이 보여주는 두뇌 용량의 증가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입니다. 우리에게 앞으로 필 요한 것은 새로운 발견만이 아닙니다. 새로운 발견이 만들어 가는 새로 운 그림을 바라보는 프레임의 전환이 함께 요구되고 있습니다.
- 2022년에 발표된 논문에서는 시베리아의 두 동굴에서 추출한 고유 전체가 밝혀준 네안데르탈인의 첫 가족이 소개되었습니다. 시 베리아의 오클라드니코프Okladnikov 동굴과 차기르스카야 Chagyrskaya 동굴입니다. 이 중 차기르스카야 동굴에서는 80개체 이상의 네안데르 탈인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중 17개체의 유전체, 미토콘드리아, Y 염색체를 분석했습니다. 13개체의 뼈와 치아도 분석할 수 있었습니다. 5만 4,000년 전에 살았던 네안데르탈인 집단은 10~20명 남짓한 규모 입니다. 그들은 혈연으로 이어진 친족집단이었으며, 그중에는 아버지와 딸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부녀지간인지 어떻게 알았을까요? 유전체중 서로 반을 공유하는 남자와 여자가 있었습니다. 유전자의 반을 함 께하는 여자와 남자라면 남매이거나 부녀지간이거나 모자지간이겠지 요? 이들이 부녀지간이었다는 것은 미토콘드리아에서 나타났습니다. 이들이 같은 엄마를 둔 남매지간이었다면 미토콘드리아가 똑같았을 것 입니다. 그러나 부녀지간이었기 때문에 미토콘드리아가 서로 달랐습니 다. 또한 한 다리 건넌 사이도 있었습니다. 소년과 사촌, 이모-고모 혹은 할머니였을 것입니다.
이들의 유전자 정보는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무엇보다 유전적인 다양성이 낮았습니다. 전 세계를 아우르고 있는 현생인류보 다는 멸종 위기에 부닥친 고릴라의 유전자와 엇비슷한 정도의 다양성 이었습니다. 그렇지만 10~20명으로 이루어진 집단 안에서도 서로 다 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Y염색체보다 미 토콘드리아 유전자에서 보이는 다양성이 컸습니다. 남자들보다 여자들 이 다양한 곳에서 왔다는 뜻입니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이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처에서 2만 년 전까지도 살고 있던 데니 소바인보다는, 비슷한 시기에 유럽 반대쪽에서 살고 있던 네안데르탈 인과 더 비슷했습니다. 이제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연구는 대표적인 머리뼈 몇 개를 놓고 또 다른 고인류 화석종과 비교하는 차원에서 한 걸음 나아가 하나의 집단을 이루는 개개인에 대한 연구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연구가 점점 진행되면서 우리가 바라보는 네안 데르탈인의 모습도 그에 따라 변화해 왔습니다. 단순히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게 아니라 단편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다양하고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네안데르탈인은 지극히 '사람다 운' 고인류 종이었습니다.
- 2010년에 발표된 최초의 데니소바인 아이의 생존 연대를 5만 년 전 으로 추정한 것은 손가락뼈와 함께 발견된 동물 뼈와 숯을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법으로 분석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 측정법에 사용되는 방 사성탄소C14는 반감기가 5,730년입니다. 그래서 이를 통해서는 5만 년 전까지의 연대밖에 구분할 수 없습니다. 5만 년 전을 넘어가면 10만 년 전이나 20만 년 전이나 어느 연대의 유물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뜻입니 다.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법으로 측정할 수 없는 시기는 안타깝게도 현 생인류의 기원에 해당하는 연대입니다.
현생인류의 기원에 대해 알려줄 자료는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연대를 측정해야 합니다. 2019년에는 데니소바 동 굴에서의 고인류 역사를 총체적으로 분석해 낸 획기적인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네이처》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동굴에서 100개 이상의 지층 샘플을 채취하여 무려 28만 개의 어마어마한 시료 분석을 통해 OSLOptically Stimulated Luminescence 연대를 측정했습니다. OSL 연대 측 정법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석영이나 장석은 땅에 묻히는 순간부터 빛 입자를 쌓기 시작합니다. 땅에 묻힌 지 오래될수록 많은 빛 입자가 쌓입 니다. 그래서 얼마큼의 빛 입자가 쌓여 있는지를 측정하면 그와 함께 묻 힌 화석이 얼마나 오랫동안 묻혀 있었는지까지 알 수 있습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만큼 탄탄한 측정법은 아니지만 수많은 자료를 분석 하여 일관적인 결과를 낸다면 신빙성이 있습니다. 2019년 논문에서 28 만개의 입자를 분석했듯이 말이죠.
- 알고 보니 인류는 5만 년 전보다 훨씬 이전인 30만 년 전부터 5만 5,000년 전까지 데니소바 동굴에 살았습니다. 이들은 중기 구석기 제작 기법으로 돌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고 동물을 사냥했습니다. 사냥한 동물 뼈에는 돌날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몇 번의 혹독한 추위도 이겨냈 습니다. 데니소바 동굴에서는 지난 4만~5만 년 전 후기 구석기 양식의 석기와 골기 그리고 준보석에 속하는 돌과 뼈로 만든 장식품이 출토되 어 주목을 받았습니다.
2010년에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견된 손가락뼈(여자)에서 추출된 미토 콘드리아 유전체, 뒤이어 추출된 핵 유전체가 현생인류와도 달랐고 네 안데르탈인과도 달랐기 때문에 데니소바인이라는 새로운 고인류 집단 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손가락뼈 하나에서 추출한 고유전체로 데니소바인이라는 집단의 존재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던 고인류학계는 그뒤로 발견된 위 어금니(남자)를 비롯해서 여러 개의 치아에서 추출한 유 전체에서도 거듭 확인되는 데니소바인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네안 데르탈인과 동시대에 아시아에서 살던 고인류가 발견된 것입니다. 게 다가 유라시아의 내륙, 북위 50도보다 더 북쪽,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의 경계선이라는 위치는 어떻게 보아도 살기 좋은 곳은 아니었습니다. 추 위에 적응한 몸과 문화를 겸비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지요. 데니소바 동굴의 천장에는 자연적으로 생긴 구멍이 뚫려 있어서 굴 뚝 역할을 합니다. 불을 피우며 겨울을 나기에 안성맞춤이었고, 겨울이 사시사철 계속되던 빙하기에도 자연히 인류가 애용한 장소였을 것입니다. 천장의 구멍으로 들어온 햇빛은 동굴 속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데니소바 동굴에서 바깥을 내다보면 알타이산맥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아래로는 아누이Anuy강이 흐르고 동물들이 물을 마시러 찾아옵니다. 동굴 속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합니다. 빛이 잘 들고 냉난 방 시설과 최고의 경관까지 갖춘 데니소바 동굴에서 인류가 30만 년 동 안 살았던 것이 놀랍지 않습니다.
그런데 20여만 년 전부터는 같은 동굴에서 네안데르탈인이 살기 시 작했습니다. 네안데르탈인 역시 중기 구석기 제작 기법으로 돌로 도구 를 만들어서 동물을 사냥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 뒤로 10만 년 전까지 10여만 년 동안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번갈아 가면서 간헐적으 로 동굴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 고유전자가 추출된 지층에서 함께 발견된 동물과 식물을 분석하면 고환경, 고기후를 알 수 있습니다. 동식물은 기후에 민감하여 일정한 기 온과 습도에서만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남겨진 동식물 화석이 무슨 종 인지 판별하면 어떤 환경이었을지, 동식물과 함께 발견되는 고인류 화 석이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동굴 지층의 고기후 자료를 분석한 결과, 네안데르탈인은 주로 '추운' 시기의 지층에서 발 견되었고 데니소바인은 주로 '따뜻한' 시기의 지층에서 발견되었습니 다. 네안데르탈인이 '추운' 시기에 살았다니 과연 극히 추운 기후에 최 적화되었다고 알려진 네안데르탈인답습니다.
5만5000년 전까지 데니소바 동굴에서 살던 데니소바인은 아마도 아시아 전체에 퍼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생인류와 다양한 접촉을 했을 것입니다. 데니소바인의 유전자는 세계의 다양한 현생인류 안에 퍼져 있는데, 엉뚱하게도 멀리 남쪽에 위치한 파푸아뉴기니와 솔로몬 제도 등 멜라네시아인에게서 발견됩니다. 이들의 DNA 중 약 4퍼센트 가 데니소바인의 것입니다. 이들은 네안데르탈인의 DNA도 4퍼센트 가 지고 있으니 고인류의 DNA를 8퍼센트나 가진 셈입니다. 물론 모두 호 모 사피엔스, 현생인류입니다.
- 유전자가 널리 퍼졌었다고 해서 데니소바인이 널리 퍼졌다는 이야기가 바로 성립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데니소바 유전자가 있다고 해서 '데니소바인'이라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데니소바인' 이라는 집단이 과연 존재하는지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유 전자가 곧 집단이 아니고 곧 종도 아닙니다. 데니소바인이 네안데르탈 인처럼 맨눈으로 구별할 수 있는 형질을 가진 집단인지는 앞으로의 연 구로 확인해 나가야 합니다.
데니소바인은 처음 발표되었을 때 새로운 화석종이라는 선언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발견에 새로운 화석종명을 붙이는 경향에서 벗어나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한 것은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스반테 패보svante Piibo 다운 결정이기도 했습니다. 패보는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 사이에 유전자 교류가 있었고 이 두 집 단간에 유전적 장벽이 두껍지 않았음을 확인한 학자입니다. 그런데 데 니소바인을 처음으로 발표한 연구팀 중에는 새로운 화석종으로 발표하 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연구팀의 일원인 러시아의 대표적인 고인류 학자 아나톨리 데레비안코 Anatoly Derevianko는 데니소바인을 호모 알 타이엔시스Homo altaiensis라는 새로운 화석종으로 발표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호모 사피엔스 알타이엔시스라는 호모 사피엔스의 아종이 라고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결국 데니소바인은 현생인류의 한 집단이 라는 해석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현생인류와 유전자를 교환하던 데니소바인이 호모 사피엔스의 아종 이라면 데니소바인과도 유전자를 교환하고 현생인류와도 유전자를 교 환하던 네안데르탈인 역시 호모 사피엔스의 아종이 됩니다. 데니소바 인도 네안데르탈인도 결국 호모 사피엔스의 다양함을 보여주는 고인류 집단입니다.
-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서 수집한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인류의 진화 역사에 대해 추정하는 연구에서 계속 등장하는 아프리카 기원론은 사실 모호한 개념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기원 했다는 이야기는 지구에서 기원했다는 이야기만큼 어마어마하면서도 애매한 내용의 가설입니다. 아프리카는 엄청난 크기의 대륙이기 때문 입니다.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500만 년 전에 기원하여 그 후 300만 년 동안 아프리카에서만 살았습니다.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오랫동안 살 아온 곳에서 가장 다양한 유전자가 발견되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놀라 운 일이 아닙니다.
미토콘드리아를 통해 분석한 이 연구와 함께 비교해 볼 만한 다른 연 구가 몇 가지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미토콘드리아는 모계를 통 해 유전됩니다. 그렇다면 부계를 통해서만 유전되는 요소는 없을까요? 부계로 유전되는 Y염색체를 통해 인류의 기원을 찾은 연구에서는 현생인류의 Y염색체 조상형이 5~10만 년 전에 서아프리카에서 세계로 확산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편 북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호모 사피 엔스 고인류 화석 턱뼈에 있는 치아의 연대를 측정했을 때 30만 년 전의 것이라는 결과가 나온 연구도 있습니다. 이 연구들을 나란히 비교해 보 자니 이야기가 복잡해집니다. 그렇다면 여자는 남아프리카에서 기원하고, 남자는 서아프리카에서 기원하고, 치아는 북아프리카에서 기원했 다는 이야기가 될까요?
어쩌면 기원이라는 개념을 다시 살펴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기원이라는 단어는 피라미드의 꼭지처럼 하나로 수렴된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런데 현생인류가 복수의 기원점과 복수의 조상 집단을 가지고 있다는 가설을 의외로 많은 자료가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20만 년 전 남아프 리카 오카방고에 살던 고인류가 우리의 조상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 다. 우리의 조상입니다. 30만 년 전 서아프리카에 살던 고인류도 그리고 10만 년 전 북아프리카에 살던 고인류도 우리의 조상입니다. 40만 년 전 유럽에서 살던 네안데르탈인 역시 우리의 조상입니다. 우리의 기원 은 하나가 아닙니다.
- 현생인류의 기원에 대한 논쟁은 현생인류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으로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아 프리카에서 새로운 종으로 기원하여 전 세계로 확산했다면, 전 세계에 서 살고 있던 기존의 고인류 집단과는 서로 다른 종이기 때문에 유전자 를 교환할 수 없었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따라서 호모 사피엔 스와 네안데르탈인이 서로 다른 종인지의 여부는 호모 사피엔스의 기 원과 상관해서 중요한 화두였으며, 둘 사이에 유전적인 교환이 가능했 느냐의 여부로 이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010년에 발표된 네안데 르탈인의 유전체 판독 연구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소량이나마 현생인류의 유전자에 포함되었다는 주장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2010년 이후 새로운 개념이 화두로 등장했습니다. 혼종의 개 념입니다. 서로 다른 종끼리 유전자를 교환할 뿐 아니라 그 사이에서 나 온 후손은 생식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혼종이 처음 대두되었을 때만 해도 고인류학계에서는 혼종이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생각했습니다. '식물에서는 흔한 현상'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양서류에서는 흔한 현상'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고등동물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라 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연구가 거듭되면서 점차 혼종이 '가축화 과정에서 흔한 현상'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급기야는 야생 영장류에서 도 나타나는 현상임이 밝혀졌습니다.
혼종의 개념이 부각되면서 이제 종 단위의 연구에 대해 다시 생각해 야 하는 시점에 왔습니다. 두 집단 사이에서 유전자를 교환했다면 서 로 같은 종이기 때문인지, 서로 다른 종이지만 혼종에 의해서인지 그 둘 을 구별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고인류에게 몇 개의 화석종이 있었는지, 대답할 수 없 는 이 문제보다 더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니 끌어야 하는 것은 과 거에 살았던 고인류종이 어떠한 환경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의 문제여야 할지도 모릅니다.
- 데니소바인이 호모 알타이엔시스라는 화석종인지, 네안데르탈인이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라는 화석종인지의 문제는 차라리 21세기에서 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난 17세기부터 동의한 종 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다양한 종이 섞여 하나의 새로운 종을 탄생시킨다는 관점은 하나의 종에서 두 종으로 분 화해야만 새로운 종의 탄생으로 인정한다는 입장에 전면적으로 도전합 니다. 20세기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던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이 21세 기에서는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 500만 년 전에 시작하여 근 300만 년을 아프리카라는 엄청나게 큰 대 륙에서만 살아온 고인류는 200만 년 전 유라시아라는 새로운 대륙으로 확산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살기 시작했습니다. 적응해 온 환경과 매우 다른 환경에 들어간 동물은 멸종하거나 종 분화를 겪게 됩니다. 그러나 인류는 멸종도 종 분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류는 이미 200만 년 전에 북위 40도보다 더 북쪽으로 진출했습니다. 4만 년 전에는 티베트 고지 대까지 진출했습니다. 깊은 바다에서 어로를 할 수도 있고, 황제 다이어 트처럼 동물성 지방과 단백질에 의존한 식생활도 가능합니다.
특정한 환경에 적응하여 특정한 생김새를 가지게 되는 동식물과는 달리 사람은 계속 하나의 종에 속한 채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으 로 진화해 왔습니다. 인류는 지구의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류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요? 화성이나 금성으 로 이주해서 다른 행성의 환경에 적응하는 것 또한 황당무계한 공상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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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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