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전 지식경제부 장관을 역임했던 최중경 작가가 전작이었던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에서 제기했던 문제의식을 심화 발전시키고 새로운 주제를 추가해 지은 책이다.
저자는 우리 역사를 돌이켜보면 내부 집안싸움에 외세를 불러들여 망한 경우가 너무 많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정권을 잡은 세력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익에 반하는 결정을 많이 내렸는데, 제대로 된 학습을 통해 역사적 교훈을 얻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나 외교와 안보문제를 국내에서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게 역사가 요즘의 우리 시대에 주는 교훈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배워온 역사적 내용 중에서 15가지 주요 사건들이 왜곡되어 전해지고 있다는 점을 탄탄한 근거와 논리적 주장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경제적 관점에서 조선이 몰락한 사건으로 해금정책을 꼽았다. 조선은 건국이후 민간인의 해상무역활동을 금지하는 해금정책을 실시했다. 저자는 조선의 해금정책이 중국의 해금정책과 맞물리며 세계경제의 주도권이 바뀌었다고 평가한다. 해금정책으로 중국이 유일한 대외교역 창구가 되면서 중국의존도가 심화되고 조선의 자주독립국으로서의 지위가 약해진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정화의 해외원정 이후 해금정책을 통해 주변의 바닷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게 된 가운데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국가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의 대부분을 식민지로 만들고 무역을 독점하여 선진국으로 올라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역사는 이긴 자가 쓰게 된다. 이러면 승자의 왜곡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이 책에서는 위화도회군에 대해서도 승자의 왜곡을 비판하고 있다. 저자는 위화도회군을 역사의식을 망각한 권력추구집단이 주도한 명분없는 군사쿠데타라고 간주하고 있다. 위화도회군이 사전에 기획된 쿠데타라는 점은 이성계가문의 사병집단의 행보가 증명한다. 이성계가 전쟁터에 나갈 때마다 늘 따라다니며 큰 활약을 하던 약 2천명의 사병집단은 요동정벌에 참여하는 대신 개경으로 침투해 이성계 등 원정군 장수들의 가족을 관리했다. 이성계의 회유에 원정군 장수들이 가족의 안위를 고려해 가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특정집단이 민족의 염원이 담긴 국가의 명령을 거부하고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 영토를 회복할 수 있던 절호의 기회가 날아갔다.
요즘의 역사교육은 사실을 암기하고 선택형이나 단답형 문제를 풀어 점수를 따는 형태로 고정되어 버렸다. 이런 교육하에서는 역사를 통해 전략적 사고능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암기를 위한 인내력 테스트로 전락하게 된다. 이 책에서 제시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하고 최적의 대안을 얻기 위한 생각을 루트를 열고자 하는 것이 저자의 바램이다. 전략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 본 리뷰는 출판사 도서지원 이후 자유롭게 작성된 글입니다
- 조선은 건국 이후 문을 닫을 때까지 민간인의 무역 활동을 금 지하는 해금정책을 실시했다. 그런데 우리 역사 교실에서 조선이 해금정책을 500년 동안 고수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한 파행을 지 적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의 해금정책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조선의 해금정책은 해양을 중요한 활동 무대로 해야 하는 반 도 국가 조선의 경제를 절름발이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을 바깥 세계로부터 단절시켰다. 또 경제, 외교 분야에서 중국에 의 종속을 심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중국과의 조공무역이 거의 유일한 대외교역 창구가 되면서 주요 상품과 자원을 중국에 의 존하게 됐다.
이에 따라 조선은 형식적인 조공외교를 통한 독립 국가라기보다 시간이 흐르면서 문자 그대로 중국의 제후국으로 추락했다.
또 해금정책은 조선의 눈과 귀를 닫아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 명의 흐름에서 소외되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은 개국 출발선에선 금속활자, 측우기, 로켓의 원형인 신 기전 등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수준급의 과학기술 국가였지만 500년을 거쳐 결국 삼류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 지 이유가 있겠지만 해금정책으로 눈과 귀를 닫은 채 바깥세상 이 돌아가는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고 지낸 무사안일이 크게 작 용했다고 본다.
반면 개국 초기 조선에 비해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 후진국이 었던 일본은 조선이 버린 바다를 통해 유럽과 활발하게 교역하 면서 산업혁명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 조선은 출범할 당시 명나라에 나라 이름까지 정해달라며 저자세 를 취했다." 명나라의 신하 국가를 자처한 것이다. 따라서 많은 분야에서 명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베꼈다.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 제주원장은 해금정책을 실시했다. 홍무제는 왜구의 노략질을 막 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속내는 해안 지역의 경쟁 군벌 잔당 이 해양 군사력으로 커 재기하는 걸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명나라는 해안 지역이 안정된 이후에도 해금정책을 계속 실시 했다. 중국의 땅이 넓고 생산물이 많아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강했기에 민간의 해상무역을 허용할 경우 생 기는 부작용, 특히 해상 군사력의 대두 가능성을 경계한 거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청나라는 북경을 점령당한 후 남쪽으로 내려간 명나라의 잔존 세력이 해상 군사력으로 전환되는 걸 경계해 해 금정책을 계속 유지했다.
- 고려시대에는 활발한 무역 활동이 있었고 건국 세력 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고려시대 벽란도에는 멀리 아라비 아에서 온 상선들도 드나들었다고 하는데 건국 세력이 민간무역 의 역할과 중요성을 몰랐을 리 없다.
이 와중에 홍무제가 해금정책을 채택한 건 조선 건국 세력이 볼 때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 격이었을지 모른다. 조선 건국 세 력의 고민이었던 건국 명분의 부족은 정권의 안정성을 떨어뜨렸 다. 상당수의 고려 신하들이 이성계 세력을 비토하며 협력을 거 부하는 상황이었기에 고려를 받드는 세력에 의해 언제든지 역공 당할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 그렇기에 해양 군사력의 등장을 미연에 막을 수 있는 해금정책은 단비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해금정책으로 일단 정권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가 왕조가 안정된 이후에 되돌리지 않고 그대로 굳어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은 현상 유지를 국가 운영의 목표로 했다. 사농공상이라 는 엄격한 신분 질서를 유지했고 충성과 예의를 강조하는 유교 를 국시로 채택했다.
조선은 광업 발전에 소극적이었고 사실상 폐광정책을 썼다.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는 획기적인 은 제련기술을 발명했 지만 왕의 명령으로 사장되어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됐다.
광산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해 젊은 장정들이 많이 모이고 곡괭이와 같은 강철 도구와 폭파용 화약을 쓰므로 유사시 군대로 전환하는 게 상대적으로 쉬웠다.
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벽지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광산은 중앙의 감시와 통제가 쉽지 않았기에 지배층의 기득권을 유지하 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소지가 분명히 존재했다. 19세기 초반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 때 홍경래가 광산노동자를 모아 거병한 사 실이 있다."
조선은 역량이 형성되고 사람이 모이는 걸 경계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민간무역을 허용할 경우 장보고와 같은 해상 세 력이 생겨 왕권을 위협하는 걸 경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된다.
- 조선의 해금정책은 중국의 해금정책과 맞물리며 세계 경제의 주 도권이 중화 세계에서 유럽과 일본으로 넘어가는 데 일조했다. 중국이 해금정책을 통해 동남아시아, 서아시아, 아프리카의 바다 를 무방비로 열어 놓은 가운데 대항해 시대에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 국가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대부분을 식민지로 만들고 무역을 독점해 커다란 부를 쌓았다.
일본도 유럽과의 교역을 통해 성장했다. 해금정책은 경제적 측면의 이슈이긴 하나 동시에 안보 이슈이기도 했다. 해금정책은 중화 세계가 제국주의 열강에 시달리게 만드는 근본 원인을 제 공했다. 유럽이 주도한 산업혁명이 식민지 경영과 무역 독점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두며 유럽 국가의 국력을 획기적으로 늘림에 따라 화포 체계와 군함을 혁신했고 군사 패권까지 유럽과 일본 으로 넘어갔다.
나침반과 화약은 동양에서 서양으로 넘어간 발명품이었지만 유럽 국가들이 중국의 입김이 닿지 않는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 고 산업혁명을 이루면서 동양 우위의 세계가 점차 서양 우위의 세계로 바뀌었다.
- 미국은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창의력을 존중하는 시스템을 만 들었기에 독립 후 1세기도 채 지나지 않아 농업국가에서 산업국 가로 탈바꿈해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랐다. 시장에서의 경쟁을 통 해 보상 수준이 정해지는 미국의 시스템이 어떻게 창의력을 이끌어내고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지 제대로 들여다봐야 한다.
기업의 기본 시스템은 어떤가? 한국 기업은 CEO에게 충분한 임기를 보장하지 않아 CEO가 빈 카운터 (Bean Counter)'로 전락하 고 있다. 단기 이익을 추구해 자리를 보전해야 하는 CEO가 장기 적인 안목으로 미래를 준비하고자 신기술을 개발하고 시스템을 혁신하길 기대하는 건 무리다. CEO 자리를 가급적 많은 사람이 돌아가며 해야 한다는 잠재적 인식은 평등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고 지도자의 무게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조선의 실패와 미국의 성공을 교훈 삼아 기업도 영속성을 갖춘 기본 시스템 설계에 관한 인식을 새로이 해야 한다.
- 민족사 최대 치욕 중 하나인 병자호란은 겪지 않아도 될 전쟁이었지만 조선 지배층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었다. 그 재앙을 부른 게 재조지은이라는 망령이었다.
대북이 장악했던 광해군 조정에서 소외되었던 서인은 광해군 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명목상 모친인 인목대비의 폐비를 계기로 명나라와 만주족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자 한 광해군의 실리외 교가 명나라가 베푼 재조지은을 저버리는 거라 하여 반정을 일 으켰다. 반정 이후 등극한 인조와 서인 세력은 대륙의 세력 판도 추이를 무시했다. 반정의 명분인 재조지은에 입각해 친명배청을 분명히 하며 만주족을 향해 날카롭게 날을 세워 정묘호란과 병 자호란을 불러들였다.
형제의 맹을 맺고 마무리된 정묘호란은 비교적 소규모인 만주 군 3만 명이 침입하고 평안도 이남으로 내려오지 않아 큰 피해가 없었지만, 병자호란은 만주철갑기병대 팔기군의 주력이 남하해 한양까지 점령했으며 최대 50만 명으로 추산되는 조선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는 비극을 초래했다. 병자호란이라는 비극을 감수 하면서까지 친명배청을 고수한 이유는 재조지은에 집착했기 때 문이다.
명나라를 배척하고 만주족에 다가가는 건 반정 세력 스스로 본인들의 정치적 입지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청태종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를 알리려 입국한 청나라 사신들을 내쫓은 뒤 인조가 백성에게 내린 유시 내용이 고뇌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 "강약과 존망을 헤아리지 않고 의로운 결단을 내려, 서울 사람들 은 전쟁의 참화가 눈앞에 박두했음을 알면서도 오히려 오랑캐를 배척하고 거절한 일을 통쾌하게 여기고 있다. 충의로운 선비는 각 자의 책략을 다하고 용감한 사람은 종군을 자원해."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국정 책임자가 한 이야기 치고는 무책임의 극치라고 아니할 수 없다. 결국 본인들의 집권 명분인 재조지은을 지켜 반정으로 얻은 지위를 지키겠으며 그 결과 만주군의 침입으로 발생할 백성의 피해는 백성이 알아서 감당하라는 황당한 논리를 '존망을 헤아리지 않는 의로운 결단' 이라고 포장하고 있다.
'존망을 헤아리지 않는 의로운 결단'이 허용되는 정치체제는 없다. 절대군주라 해도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마음대로 내던지는 순간 권위를 잃고 자리에서 쫓겨나는 게 역사의 상식이다. 그런 데도 조선 조정은 어떻게 명맥을 이어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두 차례의 큰 전란을 치르는 과정에서 비뚤어진 군주들과 그 신하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날조한 재조지은과 소중화론이 조선의 생명을 빼앗았을 뿐만 아 니라 조선의 부활까지 가로막은 암적 존재가 된 것이다.
일본에게 선전포고만 하고 실제 전투에는 깃발을 앞세우고 참 전하지 못해 전승국 지위를 얻지 못한 채 남북분단을 지켜보기 만 한 상해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 는 검증받아야 한다. 어떤 학문적 근거와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상해 임시정부가 적통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지 설득력 있는 설 명이 필요해 보인다.
- 재조지은의 망령은 우리의 외교정책에까지 나쁜 영향을 미치며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17세기 초에 잘못 설정된 재조지은이라는 어젠다가 조선을 갉아 먹으며 존재하더니 21세기에 들어선 지 한참 지난 지금까 지도 우리 주변에서 서성거리며 폐를 끼치고 있는 걸 보면 한번 설정된 어젠다. 그것도 최고 권력자가 설정한 어젠다가 갖는 위 력과 지속성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 경우가 있지 않을까? 창업주가 설정한 어젠 다가 절대적 권위를 발하며 대를 이어 계승되고 있는 게 목격된다. 그렇다면 창업주의 어젠다가 현재의 경영전략에 절대적인 영 향을 미친다는 얘기다.
수십 수백 년을 관통할 만한 어젠다가 설정되어 있다면 다행 이지만 시대를 넘어설 수 없는 어젠다가 시대를 넘어 계승되어 온다면 기업 성장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창업 주의 어젠다를 계승하며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미덕이 반드시 바람직한 게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업들은 창업주의 어젠다가 시의성이 있는지 한 번 쯤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월급쟁이 고용 사장은 감히 입 밖에 도 내지 못할 것이니 경영을 승계한 그룹 총수만이 할 수 있는 역사적 과업이다.
- 조선왕조의 수명이 길었다고 해서 조선의 시스템이 훌륭했다고 자랑하는 이들도 있는데, 개인이 오래 살았으니 무척 행복했 을 거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 수준의 논리 비약이다.
기업의 혁신도 마찬가지다. 기업 활동의 결과인 이익이 발 생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고 개선될 전망이 없으면 즉시 구조 조정에 들어가야 기업이 살 수 있다. 회계가 투명하지 못해 이익 을 자의적으로 부풀리기 시작하면 구조조정의 타이밍을 놓칠 수 밖에 없다.
대우조선해양의 구조조정 실기 원인도 회계 투명성이 확보되 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업의 매출 추이와 영업이익 추이 를 분석하면 기업이 돌아올 수 없는 실패의 경로로 들어섰을 가 능성을 탐지할 수 있다.
그러한 가능성을 탐지했을 때 기업이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의 고객 만족도, 기업 종사 인력의 스킬 믹스(skill-mix)가 기술 발전 수준을 소화할 수 있는지 여부 등을 외부의 전문가 집단과 함께 면밀히 분석해 신속히 해결책을 마련하고 즉시 실행에 옮겨 야 한다.
- 임진왜란은 조선과 왜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중국과 왜 사이의 전쟁이며 더 넓게 보면 서양 국가와의 무역을 통해 국력을 키운 왜가 해양 세력을 대표해 대륙 세력에게 도전장을 내민 동아 시아 패권 전쟁이었다.
왜의 목표는 분명하게 명나라 정벌이었으며 달성 가능한 목표 였다. 위기를 인식한 명나라가 조선 군민의 힘을 빌려 왜군의 대 륙 진출을 막은 전쟁이었으므로 고마워해야 할 당사자는 명나라 이지 조선이 아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
히데요시의 전쟁 목표는 한반도 정벌이 아니라 명나라가 지배하 는 중국 대륙 정벌이었다.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도 '정명향도 가 도입명'이라고 명시해 조선으로의 진군 목적이 명나라를 공격하 기 위함임을 분명히 했다."
명나라를 공격하는 데 조선이 길을 내어주고 또 앞장서라고 요구한 것이다. 조선을 거의 신하국 수준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히데요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도 자신 의 중국 대륙 정벌 계획을 사전에 통보했다."
- 당시 왜의 군사력으로 중국 대륙 평정이 가능했을까? 가능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근거로 왜의 육군은 전국시대를 거치며 총 포를 이용하는 전술의 완성도를 높였고 세계 최고 수준의 소총 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실전 경험이 풍부했다.
일부 군사학자들은 당시 왜의 육군이 무장과 전투 경험에서 볼 때 세계 최강이라고 평가하고 있기에 충분히 해볼 만했다. 훗 날 만주족이 10만 명 수준의 철갑기병을 이끌고 중국 대륙을 평정한 걸 보면 소총으로 무장한 15만 명의 왜 육군이 선전하리라는 관측에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히데요시가 산악 지형으로 군대의 진군과 보급로 확보가 쉽지 않은 데다가 명나라의 조공국인 조선이 순순히 길을 내줄 리 없 는데도 중국 해안 지대로 상륙하지 않고 조선을 공격 루트로 선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중간에서 메신저 역할을 한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그의 장 인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의 입장을 정확히 전하지 않아서 히데요시가 조선이 순순히 협조할 것으로 오판했을 수 있다. 히 데요시의 의욕 과잉으로 조선 군대를 너무 쉽게 본 데다 의병의 활약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히데요시의 서신을 본 필리핀의 스페인 총독은 조선의 산악 지형을 통과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왜의 국서가 필리핀을 공 격하기 위한 기만전술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 한반도 분할론
역사상 한반도 분할론이 최초로 거론된 건 임진왜란 중 명나라 와 왜의 강화 협상 테이블이었다. 당시 거론되었던 강화 조건 중 하나가 조선의 하삼도를 왜에 할양하는 것이었다.
명나라 군대의 조선 지원 의도가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는 근거 가 바로 한반도 분할을 통한 강화 아이디어다. 명나라가 진정 조 선의 안위만을 위해 출병했다면 '한반도 분할론'을 입 밖에도 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명나라의 안전만 확보할 수 있으면 조선이 두 동강 나든 말든 상관할 일이 못 된다는 게 명나라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 해조선 출병은 명나라의 영토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 지 조선의 영토와 백성을 위한 조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의 군관민이 분투함으로써 왜군의 조명 국경 돌파를 저지해 명나라 방위에 보탬을 준 것이다.
전쟁 국면이 조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을 때 명나라 주도로 강화 협상이 이뤄진 사실도 이런 관측에 힘을 실어준다.
- 영국의 힘을 이용할 기회 상실
1885년 3월 1일 영국 해군은 군함 세척을 보내 여수 앞바다의 거문도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1887년 2월 5일까지 주둔했다. 러 시아는 1860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강제로 점령하며 유럽에서 좌절된 남진 정책을 동아시아 극동에서 추진하려는 의지를 보였 으나 블라디보스토크도 부동항은 아니었기에 더 남쪽으로 진출 하고자 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에도 영국과 러시아는 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 여전히 긴장 상태에 있었다. 영국은 러시아의 한반도 점령 의도를 선제적으로 봉쇄할 전진기지로서 주변의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의 기항이 가능한 거문도를 선택 했다. 영국 해군은 거문도를 해밀턴항(Port Hamilton)으로 명명하 고 섬 주위에 기뢰를 설치한 후 섬에 방어진지와 포대를 설치해 군사 요새로 만들었다.
조선 조정은 조선이 세계적 규모의 분쟁인 그레이트 게임의 한 가운데 있다는 인식을 갖지 못했고, 더군다나 이 기회가 세계 최강국 영국과 친해지는 행운을 선사할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 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약한 서양 오랑캐가 나타났으니 청나라 에 기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지극히 얌전한 생각밖에 없었다. 미국과 일본은 영국을 지지했고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적극 개입했다. 청나라는 처음에는 종주권도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겸 영국의 거문도 점령과 조차 를 공식적으로 승인하려 했지만, 러시아가 강력히 반발하면서 조 선의 다른 섬을 점령할 수도 있다는 협박을 하자 방침을 바꿨다. 청나라가 영국 해군의 철수를 요청했고 북양대신 이홍장의 중 재로 러시아로부터 조선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 아내자 거문도의 군사전략적 가치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던 영 국 해군은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결국 거문도 사건은 조선 조정의 소극적 태도와 무지로 병든 거인 청나라에 대한 예속만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고, 조선이라 는 나라가 제 문제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허약체임을 만천 하에 알리게 되어 국제사회의 동네북으로 전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 청일전쟁을 통해 청나라의 종주권을 박탈하는 데 성공한 일본으로선 버거운 상대인 러시아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하는 입장이 되었는데, 아관파천은 일본이 필요로 하는 스토리를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는 기막힌 소재였다.
- 즉 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야욕을 부각해 조선과 만주를 두고 일본과 대립하고 있는 러시아에 대한 영국과 미국, 다른 유럽 국 가들의 경계심을 높여 다가오는 러시아와의 일전에서 일본의 우 군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일본은 러일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미국계 자본의 도 움으로 확보한 전쟁 자금으로 영국의 최신식 전함과 대포를 구 입해 승리할 수 있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에 다가가는 조선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면서 조선을 독립국으로 둘 게 아니라 일본의 일부로 관 리하는 편이 조선과 러시아가 가까이 가는 걸 막는 유효한 방안이라는 사실을 영국과 영국의 동맹국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었다.
아관파천으로 친일파 내각이 물러나고 일본이 궁지에 몰리는 듯 보였지만 일본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의 수순을 밟고 있 었다고 볼 수 있다.
아관파천을 주도한 친러파 이완용은 후에 대표적인 친일파가 되는데 아관파천이 결과적으로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입장을 유 리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행적은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운명은 지배층의 지적 능력에 달려있다. 구한말에 지적 능력을 갖춘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났더라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수모는 겪지 않았을지 모른다.
조선은 위대한 지도자가 탄생할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 완고한 계급 사회에서 양반 중에서도 일부에게만 사회 진출을 허용했기에 폭넓은 인재 양성이 될 수 없었다. 소수 핵심 지배층이 관직을 독점함에 따라 정책 관료의 정책 역량을 키우기 어려웠다. 잘하든 못하든 그들만의 리그를 통해 주요 관직을 세습화해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 게다가 해금정책으로 무역 활동이 없다 보니 바깥세상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어 상황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경쟁 이 없고 승자가 언제나 승자인 국가, 바깥세상과 단절된 폐쇄 국 가는 결국 역량 부족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 멸할 수밖에 없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젊었을 때 기업 오너의 측근이었다고 죽 을 때까지 그 역할을 하는 기업이 있다면 결국 집단 사고의 오류 에 빠져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해 쇠망의 길을 가기 쉽다.
기회는 언제나 널리 열려 있어야 하고 평가는 언제나 객관적 이어야 한다. 그래야 조직의 인적 역량이 극대화되고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생존하는 계속기업(Going Concern)의 길이 보장 될 것이다.
- 우리 역사 교실에선 '간악한 일본이 선량한 조선을 총칼로 유린했다'라며 한일강제병합 과정에서 조선이 책임질 일은 없는 것처럼 얘기하는 데 길들여져 있다.
한일 근대사 교실은 '누가 착하고 누가 악한가?'라는 단순한 선악 게임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해 '조선은 왜 힘이 약해지고 일본 은 왜 힘을 기를 수 있었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이 이뤄지 는 사유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일본을 넘어설 길이 보인다.
뭔가 잘못되어 실패했을 경우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자 택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과업은 실패의 원인을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 이다. 대충 넘어가거나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면 실패의 원인을 제거하지 못하므로 실패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식에 담긴 문화 요리에 담긴 역사 (2) | 2023.12.26 |
---|---|
조선상고사 (2) | 2023.12.07 |
침입종 인간 (1) | 2023.11.18 |
인류의 진화 (1) | 2023.10.27 |
처음 읽는 음식의 세계사 (1) | 2023.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