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의 역사를 음식과 연관 지어보면, 네 번의 사회적 격변이 새로운 기원을 열었고 새로운 식자재와 요리군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전환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약 1만 년 전의 농업 혁명
2) 15~16세기의 대항해 시대
3) 18세기 후반 이후의 산업혁명
4) 20세기 후반 이후의 하이테크 혁명

- 인류의 요리법은 크게 날것, 가열한 것, 발효한 것 등 세 가지를 들 수 있는데, 토기의 출현은 가열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켰다. 토기 는 부드러운 음식과 수프를 만들어냈고, 세련된 미각을 만드는 데 크 게 공헌했다. 이렇게 보면 토기의 발명에 따른 요리 혁명과 농업 혁 명을 하나로 묶어 '음식의 제1차 혁명'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 후 지역별로 식자재의 개발과 교류, 요리의 체계화가 진행되 고, 기원전 2500년부터 기원전 2000년 사이 각지에 출현한 거대 제 국 아래에서 요리권이 형성된다. 그리고 초원길과 비단길, 바닷길을 통한 유라시아 대륙의 음식 교류가 이어진다.
- 제철 음식을 먹는 문화
식문화의 기초는 자연이라는 식량 창고에서 획득한 제철 식자재 를 있는 그대로 먹는 생식(生)이다. 긴 시간 이어진 수렵 채집 사회 에서는 생식의 원형을 유지했고 식탁 위에서는 사계절이 돌고 돌았 다. 일본에서는 도토리를 채집하여 떫은맛을 없애 주식으로 삼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현재, 일부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도토리떡으로 그 원형을 짐작할 수 있다.
식탁 극장에서는 뜻밖의 형태로 옛 식문화가 보존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홋카이도에 사는 일본의 아이누족은 가을에 잡은 연어를 잘게 저민 뒤 물기 없이 바짝 말려 포를 만들어 보관했는데, 겨울에 는 매서운 추위를 이용하여 얼린 생선(루이)을 썰어 먹는 방법 을 개발했다. 이 요리법은 현재에도 남아 있다.
제철 식자재를 가리킬 때 쓰는 순(旬)이라는 말은 고대 중국의 은 (殷, 기원전 17세기 전반~기원전 11세기)에서 열흘을 뜻하던 같은 단어에서 왔다. 오늘날에도 상순(上), 하순(下) 등으로 널리 사용된다. 은나 라 사람들은 10개의 태양이 있어, 날마다 지하에서 나와 하늘을 비 춘다고 생각했다. 각각의 태양에는 갑(甲), 을(乙), 병(丙), 정(丁)・・・ 계(癸)라는 이름을 붙였고, 전체를 십간(十干)이라고 불렀다. 은의 왕은 새로운 태양의 교대가 시작되기 전에 뼈를 태워서 새로운 순에 닥칠 재앙의 유무를 점쳤다. 그 결과를 뼈에 새긴 것이 한자의 원형인 갑 골문이다. 순은 순환하는 시간을 나눈 생활의 단위였던 것이다.
플라톤이 '연못 주변에 모여든 개구리'라고 비유할 정도로 에게 해 주변에 많은 폴리스를 건설한 그리스인도 제철에 민감했다고 한 다. 미식가였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돔이 가장 맛있는 제철은 봄이고, 문어의 제철은 가을부터 겨울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 고대 중국에서는 날생선이나 날고기를 젓갈로 만들어 보존하였다. 해산물이나 육류에 소금을 넣고 절여 자연스럽게 발효시킨 것이다. 전국 시대
부터 한으로 이어지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지라 는 생선 절임과 해라는 고기 절임을 많이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 다. 한대(기원전 202~220)에는 양쯔강 이남의 강남 지역을 개발하 여 경작지를 넓혔고, 이때 쌀을 발효시키는 보존법이 등장했다고 한 다. 고기나 생선에 소금과 쌀밥을 섞어 3개월에서 1년간 발효시키는 방법이다. 잘게 저민 생고기나 생선, 또는 그것을 식초에 절인 회도 만들어졌다. 아세트산균이 발효하면서 만들어진 식초는 식품 보존에 유용하였다.
살균과 방부 작용을 하는 소금이나 식초를 식품 보존에 이용한 것은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식초는 와인으로 만들었는데, 영어로 식초를 의미하는 비니거(vinegar)는 프랑스어의 뱅(vin, 와인)과 시큼하다 는 의미의 에그르(aigre)의 합성어이다. 식초는 발효되어 시큼해진 와 인이었던 것이다.
- 맛의 미묘한 균형을 연출하는 것은 조미료이다. 소금이나 생 강 같은 조미료 없이 좋은 맛을 그려낼 수 있을까? 조미료는 식탁이 라는 극장의 훌륭한 연출가인 것이다. 조미료는 미각을 세련되게 만 드는 과정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시대가 지나면서 그 가짓수가 계속 늘고 있다.
미각은 크게 짠맛, 신맛, 단맛, 매운맛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짠맛과 단맛을 가장 기본으로 여긴다. 일본 요리에는 조미 료를 더하는 순서로 '맛의 사시스세소'를 따른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설탕의 사사토), 소금의 시시오), 식초의 스(스), 간장의 세(소유), 된장의 소(미소)를 따온 것이다. 간을 할 때는 단맛에서 시작 해서 짠맛을 넣는 것이 좋다는 의미이다.
- 동물의 생고기를 많이 먹던 시절에는 생고기에 포함된 나트륨 등의 미네랄 성분 때문에 소금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곡물 이 주식이 되고 나서부터 염분은 부수적으로 반드시 섭취해야 하는 식품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모든 문명권은 소금을 확보할 수 있는 장소에서 성립되었다.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에서는 생리 적으로 꼭 필요한 소금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문제였다. 「신약성서 의 「마태복음」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 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5장 13절)라는 구절이 있다. 소금은 땅의 힘이며, 땅의 맛이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소금의 제조법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를 거쳐 그리스, 로마 로 전해졌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필수불가결하게 공유해야 하는 것 이라는 의미에서 우정과 관대함을 상징했으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맛이라는 특성에 따라 약속의 상징으로도 여겨졌다. 기원전 9세기 의 시인 호메로스는 '소금은 신성'하다고 서술했는데, 소금을 부정을 없애는 데 사용하고 산 제물로 신에게 바치는 동물의 머리에 뿌렸던 까닭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문어나 생선을 매우 좋아했는데, 소금은 냉장 기술이 없던 시절에 멀리 있는 어장으로부터 운반해 올 때 반 드시 필요한 방부제이기도 했다. 고대 중국에서도 짐승의 고기를 소 금으로 보존하는 함)이라고 불리던 햄과 비슷한 보존 식품을 만들었다.
- 유대인은 소금의 성질이 변하지 않는 것을 주목하여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상징으로 보았다. 『구약성서에 는 '소금 계약'이란 문구가 나오는데, 소금을 섭취하는 것으로 깊은 신뢰 관계가 생겼다는 것을 뜻한다. 소금이 신성함의 상징이었다는 것은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레위기 2장 13절)라는 구절에서도 엿볼 수 있다.
섬나라인 일본에서는 소금을 부정을 쫓는 해수의 화신이라고 여 겨 신에게 바쳤다. 오늘날에도 각 가정에서는 신을 모시는 제단에 쌀, 물과 함께 소금을 놓는다. 스모 경기를 할 때 경기장에 소금을 뿌린다든가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와 부정을 없애는 의미로 소금을 쓰는 것도 비슷한 풍습의 흔적이다.
소스, 소시지, 샐러드라는 단어도 소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 랑스 요리의 꽃인 소스(sauce)는 라틴어로 소금을 의미하는 살(sal)을 기원으로 한다. 식탁 위에 소금을 놓고 식사를 할 때 각자의 취향에 맞춰 간을 맞추는 영국, 미국과 소스를 중시하는 프랑스의 요리는 외 견상 스타일이 전혀 다르게 보이지만, 그 어원을 보면 출발점이 같 다. 프랑스의 소스는 살을 가장 세련되게 만든 것이다.
소시지 (sausage)는 염장한 돼지, 양, 소의 고기를 다져서 창자에 넣 은 후 삶거나 훈연, 건조한 것으로 원래는 햄이나 베이컨을 만든 후 남은 고기를 사용했다. 소시지는 영어이지만 소금에 절인 고기라는 의미는 라틴어 'salsus'에서 온 것으로, 원래는 살에서 유래한다. 소 시지의 종류인 살라미 (salami)도 같은 어원이다. 참고로 햄은 돼지의 넓적다리 살을 소금에 절인 후 훈연하거나 삶은 가공식품인데, 본래는 돼지 넓적다리 살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고기, 어류, 달걀을 넣어 드레싱으로 버무리기 도 하지만, 생채소가 주가 되는 샐러드(salad)도 살에서 나온 말일 것 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소금을 곁들여 생채소를 먹던 습관에 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최근 대형 마트나 백화점 식품관에서는 여러 지역산 소금을 판매하고 있는데, 새삼 소금이 식문화를 지탱하는 위대한 존재임을 느끼게 된다.
- 요리는 날것, 가열한 것, 발효한 것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 는데, 이 중에서 종류가 가장 다양한 것은 가열한 요리이다. 가열은 인간의 식문화를 크게 바꾼 혁신적인 방법인데, 이를 주목한 사람으 로 프랑스의 역사가 자크 바로(Jacques Barrau, 1937~2014)를 들 수 있 다. 그는 인간이 질그릇(pot)을 만들어 요리하게 된 것을 높이 평가하 면서 세라믹 혁명이라고까지 했다. 질그릇(pot)이란 말에서 물을 넣고 식재료를 끓여서 만드는 걸쭉한 수프 포타주(potage)가 나왔다. 음식을 익혀 먹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류는 식자재를 덩어리 상태로 조리하거나 액체 상태의 수프로 만들어 먹는 등 다양한 방식 으로 즐기게 되었다.
불은 문명 발달의 핵심이고, 최초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인은 불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그들이 남긴 3,800년 전의 도시 유적 우르(UF)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로 만든 화덕이나 오븐이 다수 발굴되었다.
- 변형된 쌀 요리의 하나로 터키가 원조인 필라프(pilaff)가 있다. 터키어로 밥 한 공기를 뜻하는 필라프는 먼저 쌀알과 잘게 썬 양파를 버터에 볶은 다음 부이용(bouillon, 고기나 채소를 끓인 액체로, 다른 재료를 삶을 때 물 대신 사용하거나 소스, 포타주 등을 만들 때 베이스로 쓰는 국물-역주)으로 만든 수프를 넣어 마저 볶는다. 여기에 추가로 양고기나 해산물, 버섯 등 의 건더기를 넣은 일종의 영양밥이다. 중국의 차오판(飯)은 딱딱하 게 볶은 밥을 라드(lard, 돼지의 비계를 식용으로 활용하기 위해 정제한 반고체의 기 름-역주), 건더기와 함께 볶아 소금, 후추, 간장으로 간을 한 것으로 필라프와는 발상이 완전히 다르다. 
필라프와 같은 계열에 속하는 이탈리아의 리조토(risotto)는 쌀을 올리브유, 버터와 함께 볶아 만든다. 스페인 동부의 발렌시아 지방을 대표하는 요리 파에야(paella)는 일찍이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한 이슬 람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요리로 쌀과 건더기를 올리브유로 볶 은 후 수프를 추가해 볶는다. 지역마다 쌀 요리법도 조금씩 다른 것 이 흥미롭다. 쌀이라는 같은 재료가 들어가도 소비하는 양식에는 저 마다의 역사가 반영되는 법이다.
- 밀은 껍질이 딱딱하기 때문에 가루로 만들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 매우 손이 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좋은 점이 있었다. 밀을 가 루로 만들자 발효가 쉬워진 것이다. 밀은 효모균이 방출한 가스를 반 죽에 담아주는 역할을 하는 글루텐의 함유량이 다른 곡물보다 월등 히 높기 때문이다. 인도, 파키스탄, 이란의 '난', 이라크, 시리아, 이집 트의 '탄나와', 서양의 '빵' 등은 모두 밀반죽을 발효해 만든 것이다. 일찍이 고대 이집트에서도 밀을 발효시켜 부풀린 빵을 먹었다. 이집트의 빵은 제빵사가 대량으로 빵을 굽는 작업을 하다가 깜박하 고 넣지 않아 발효가 일어난 반죽을 구워봤다가 알게 된 우연의 산 물이다.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나일강의 은혜를 입어 밀을 경작했고, 밀은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풍작의 여 신이시스가 머리에 밀을 이고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 콜럼버스가 1492년에 신대륙에서 스페인으로 가져온 또 다른 볏과의 곡물 옥수수는 안데스 산악 지대가 원산지이다. 멕시코의 테와 칸 골짜기에서 발견된 7,000년 전의 유적에서 가장 오래된 옥수수 알갱이가 발견된 것을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이 일대에서 옥수수를 재배해 온 것 같다. 마야 문명부터 아즈텍 제국, 잉카제국에 이르는 신대륙의 문명은 옥수수에 의해 유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옥수수는 낟알 1개로 800배에 달하는 수확이 가능한 생산성을 자랑하는데, 약 100배 정도 수확할 수 있는 쌀보다도 월등한 수치이 다. 현재 옥수수는 식량과 가축 사료 용도로 세계적으로 수천 품목이 재배되고 있으며, 곡물의 왕으로 꼽히고 있다.
옥수수를 사용한 요리로는 스위트 콘(sweet corn)에 베샤멜 소스 (bechamel sauce)와 우유를 넣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콘 수프와 멕 시코 요리인 토르티야(tortilla) 등이 있다. 토르티야는 옥수수 가루 를 개어서 만든 반죽을 원형으로 얇게 늘린 뒤 도자기로 된 판 위에 서 평평하게 구운 빵이다. 여기에 고기, 해산물, 소시지, 치즈, 토마 토, 아보카도 같은 다양한 재료를 넣으면 멕시코 농민이 간식으로 먹는 타코스(tacos)가 된다. 토르티야는 아즈텍 제국에서 틀락스칼리(tlaxcalli)라고 불리던 전통 요리에서 나온 말인데, 원래는 말린 옥수수 가루를 연한 석회수로 처리한 후 갈아서 점성이 있는 반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 인류가 식용으로 이용한 주된 가축은 돼지, 양, 염소, 소, 오리, 닭, 칠면조 등이다. 현재 지구상에는 약 7억 마리의 돼지, 약 12억 마리 의양, 약 4억 8,000만 마리의 염소, 약 13억 마리의 소, 약 6,000만 마리의 말, 약 1억 마리의 오리, 약 60억 마리의 닭, 1억 마리 이하의 칠면조가 사육되고 있다. 이것들이 요리로 모습을 바꿔서 식탁 극장에 등장했다.
- 힌두교도는 소에 3억 3,000만 명의 신이 깃들었다고 여겨 소고기를 피하고, 소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신성하다고 믿었다. 이에 반 해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는 돼지고기를 부정한 것으로 여겨 피했 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돼지를 역 병의 매개로 여겼다거나, 유대인 일부가 이주해서 살던 이집트에서 돼지를 사육하는 일을 천민이 했기 때문이라는 등의 설이 있다. 이슬 람교의 성전인 『코란에는 "그대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은 죽은 짐 승의 고기, 피, 돼지고기, 사신에게 바친 것, 목이 졸려 죽은 동물, 맞아 죽은 동물, 추락사한 동물, 뿔에 찔려 죽은 동물, 또한 맹수가 먹은 것이나 우상 신의 석단에서 도살한 것, 내기를 이용해 나누는 것 이다"라고 쓰여 있다. 이슬람교도에게는 돼지고기뿐만 아니라 육식 에 관한 엄격한 금기가 부여된 것이고, 관습에 따라 알라의 이름 아 래 살해된 고기만을 식용으로 해야 한다.
유대교도는 동물의 피를 빼면 혼이 빠져나간 단순한 고깃덩어리 가 된다고 해석하여 고기를 먹는 죄악감을 해소하려 했다. 하지만 피 를 안 뺀 고기를 입에 대는 일은 없었다. 『구약성서』의 「신명기 12장 23~24절에는 "다만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 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못하리니 너는 그것을 먹지 말 고 물같이 땅에 쏟으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물에게서 뺀 피는 신 에게 바치는 공물로 보존되어 제단에 부어졌다.
- 일조 시간이 짧고 토양이 메마른 유럽에는 이러한 관습이 없었다. 하지만 가축을 고깃덩어리로 바꾸는 푸줏간 주인은 비밀스러운 일을 수행하는 특권을 지닌 직업으로 여겨져 존중되었다. 사람들은 푸줏간에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믿으며 안심하고 고기를 먹었다.
채소가 부족한 몽골고원에서는 가축의 생피가 중요한 비타민과 영양 보충의 수단이었다. 몽골인은 가축의 피를 창자에 넣고 가열해 서 먹었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는 『동방견문록』에서 하루에 약 70km에 달하는 속도로 머나먼 원정길을 떠나는 몽골군 이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서 한 사람당 18마리의 말을 끌고 갔으며, 허기가 지면 말의 혈관을 찔러 나온 피를 마시며 행군을 이어갔다고 썼다.
한편 칭기즈 칸(재위 1206~1227)이 모든 몽골의 관습법을 통합하 여 만든 위대한 야사(Great Yassa), 즉 몽골대법전에는 "짐승을 먹을 때 는 사지를 묶고 배를 갈라 짐승이 죽기 전까지 손으로 심장을 압박 해야만 한다. 이슬람교도처럼 짐승의 머리를 잘라서 죽이는 자는, 마 찬가지로 머리가 잘려 살해당할 것이다"라는 규정이 있었다. 심장을 압박하면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칭기즈 칸은 이슬 람교도의 관습이 몽골에 퍼지는 것을 막고 자신들의 전통적인 식습 관을 유지하려고 했다.
생존을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동물의 생명을 빼앗는 일에는 심 적인 고통이 따른다. 함께 생활하는 가축이라면 그 고통은 배가 된 다. 음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는 심리적·종교적인 벽을 넘어서 가축을 대상화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슈퍼마켓에서 스티로폼 접시에 보기 좋게 담겨져 있는 생선 토막은 결코 쉽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 돼지는 사료에 쓰인 에너지 중 3분의 1을 고기로 바꾸는 것이 가 능해 효율이 아주 좋은 가축이다. 양의 경우는 10%를 조금 넘고, 소 는 10% 정도에 그치는 것과 비교하면 돼지 사육의 효용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젖을 전혀 활용할 수 없고, 무리를 이루는 성격이 아니 어서 유목 사회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로마 제국 시대, 현재의 프랑스인 갈리아 지방은 대부분이 숲이 었다. 갈리아의 주민들은 숲에서 나는 잡초나 도토리로 돼지를 키웠 고, 염장하거나 훈제한 고기를 수도 로마로 보냈다. 중세 유럽에서는 가을에서 겨울이 될 무렵, 사료가 떨어지는 혹독한 겨울을 대비하여 도토리를 배불리 먹인 돼지를 대량으로 처분해 햄과 소시지, 베이컨 등의 보존식을 만들었다. 11월 11일 성 마틴의 축일을 시작으로 크리스마스에 이르는 이 시기는 서민이 일 년에 한 번 배불리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유럽의 다채로운 햄과 소시 지 등은 놀라울 정도인데, 유럽의 혹독하고 매서운 풍토가 낳은 음식 재료란 것을 생각하면 의미를 더할 수 있다. 참고로 소시지(sausage) 는 영어 단어이고, 본고장인 독일에서는 소시지를 부르스트(wurst)라 고 부르니 기억해 두자.
- 소: 19세기에 대중화된 육식의 대표 주자
오늘날 소는 육식의 대표 주자로 여겨지지만, 예전에는 농작과 제물용으로 주로 쓰이고 식자재로는 유제품을 만들 용도로만 제한 적으로 활용되었다. 소고기가 식자재로 일반화된 것은 19세기 이후 의 일이다. 중국인과 이슬람교도는 소고기를 질 낮은 고기로 보았고 힌두교도는 금기시하여 먹지 않았다.
소고기의 역사가 오래되었을 것 같은 유럽에서도 주로 돼지를 소 비했을 뿐, 소는 어디까지나 쟁기를 끌어야 하는 일손이었다. 소는 노령이 되어 농사용으로 쓸 수 없게 되었을 때나 먹을 수 있는 딱딱 한 고기였다. 영어로 소고기를 뜻하는 비프(beef)는 다 자란 고기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딱딱한 소고기는 19세기 후반까지 왕이나 귀족의 지위를 드러내는 식자재로 여겨졌다. 워낙 귀했기 때 문일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헤리퍼드(hereford, 영국산 식용 소의 하나 역주) 종처럼 식용을 목적으로 교배한 부드러운 육질의 소고기가 테이블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 소고기는 돈이 많이 드는 식자재이다. 소를 곡물을 먹여 살을 찌울 때 사료로 쓰는 곡물 에너지의 90%, 단백질의 80%가 손실된다. 곡물을 그대로 먹으면 10명이 먹을 분량을 고기로 만들면 한 명에서 두 명밖에 먹지 못할 양이 되는 것이다.
"대영 제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발전한 것은 본국의 요리에 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인이 세계로 뻗어나갔기 때문이다"란 뒷말이 있을 정도로 영국 요리는 맛없기로 정평이 나있다. 좋은 식재료가 그 다지 많지 않았던 영국이지만, 대표 요리로 자랑하는 것 중 하나가 로스트비프(roast beef)이다. 로스트비프는 잉글랜드에 주둔한 고대 로마군이 정복지 잉글랜드의 소를 보고 고안한 요리로, 소고기 부위 중 비교적 부드럽고 큰 고깃덩어리를 골라 소금과 후추를 뿌린 후 무명실로 묶어서, 기름을 두른 오븐에 강한 불로 고기가 마르지 않도 록 육즙을 부어가며 구워 만든다. 고깃덩어리가 커서 불이 다 닿지 않기 때문에, 고기를 불길에서 조금 멀리해서 정성껏 로스트(roast, 열 을 가해 찜)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다른 대표적인 소고기 요리로 두껍게 자른 고기를 평평한 철 판 위에서 구운 스테이크가 있다. 스테이크는 화형을 치를 때 사람을 묶던 말뚝에서 따온 말이라고 하는데, 요리하는 과정을 보면 이해가 된다. 스테이크용 고기로는 비교적 부드러운 등뼈 안쪽의 안심과 등심을 귀하게 여겼다.
- 유럽을 대표하는 스테이크로 설로인(sirloin)과 샤토브리앙 (chateaubriand)이 있는데,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 설로인의 등장은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가 70세에 세상을 뜬 후, 스코 틀랜드의 지지로 잉글랜드 왕이 된 제임스 1세(재위 1603~1625) 시대 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임스 1세는 본인을 인류의 선조인 아담에 빗대 '잉글랜드인의 아버지' 라고 칭하면서 잉글랜드 의 청교도를 혹독하게 탄 압한 것으로 유명한데, 잉 글랜드의 소고기만은 사랑 했다고 한다. 그런 제임스 1세가 어느 연회에서 지방 이 적당히 섞여 풍미가 가 득한 소고기를 먹고 감격하여, 그 고기가 어느 부위 냐고 물었다. 이에 하인이 배 부근의 어깨뼈에서부터 넓적다리 부분까지인 로인(loin, 등심)이라고 대답했는데, 그 부위에 귀족의 칭호인 서(sir)를 붙여 부르게 했다. 그 이후 설로인(sirloin)은 지방이 적은 필레(filet, 영어로는 텐더로인으로 안심을 뜻함)보 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샤토브리앙은 프랑스식 스테이크로, 필레 중에서도 끝에서 8~9cm 들어간 가장 두꺼운 부위를 3.5cm 정도로 두툼하게 썰어 서 석쇠에 구운 스테이크이다. 프랑스 혁명 중에 망명했다가 복귀하 여 부르봉가를 섬긴, 정치인이자 미식가였던 샤토브리앙(1768~1848)남작의 요리사였던 몽미레이유가 고안한 요리법으로 지방이 적으면서도 부드러운 것이 특색이다. 집에서 만든 다갈색의 샤토브리앙 소 스를 뿌리고 버터에 볶은 감자를 곁들인 순살코기 스테이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샤토브리앙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 닭은 일 년에 20개에서 40개의 알을 낳는데 그다지 많은 양은 아니다. 그러나 닭을 함부로 잡지 못하고 달걀만 식재료로 삼다가 달걀을 낳지 못하게 된 닭이 나오면 식용으로 삼던 시절에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닭고기는 인기 있는 식재료도 아니었다. 늙은 닭은 그다지 맛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닭고기는 상하기 쉬워 보관이 용이하지 않아 냉장 기술이 발달한 19세기 이후에야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의 건강한 식자재로 널리 사 랑받게 되었다. 닭은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집약적으로 기르기 때문에 사육이 쉬웠다. 양계 산업의 체계가 잡히자 닭고기는 싼 값에 공급되기 시작했다. 20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통닭구이용으 로 개발된 브로일러(broiler, 고기를 굽는다는 의미의 브로일에서 유래)를 공장 식으로 대량 사육하기에 이르렀다.
- 조류는 알에서 부화한 후 2, 3개월 사이면 급속도로 자라 성체가 되고,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 브로일러는 이러한 특징 을 반영하여 겨우 60일에서 90일 사이에 2kg 정도로 살을 찌운 영 계로 출하된다. 브로일러는 사료로 들어가는 에너지가 고기로 바뀌 는 전환율도 소나 돼지와 비교할 때 다섯 배 정도 효율적이다. 브로 일러의 체중을 1kg 증가시키기 위해 드는 사료는 약 2kg에 불과하다. 비교적 최근에서야 대중화되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제약도 없던 닭은 모두가 사랑하는 식용 고기로 사랑받게 되었다.
- 중국요리는 진한 제국 이후로 2,000년 넘게 중화 제국의 전통 안에서 자랐으며, 송나라(10세기 말~13세기) 때 기본 형태가 정비되었 다. 중국 요리는 복잡다단하지만, 크게 청나라(1616~1912)의 궁정 요 리를 이어받은 베이징(北京) 요리, 양쯔강 하류의 풍부한 쌀과 어패류 를 식자재로 하는 상하이(上海) 요리, 양쯔강 상류의 내륙 분지에 형 성된 쓰촨(四川) 요리, 그리고 남쪽의 풍부한 해산물을 잘 살린 광둥 (廣東)요리로 구분할 수 있다. 각각의 요리에는 지역의 특색을 반영 한 명물 요리가 있으며 폭넓고 깊은 내연을 지니고 있다. 한편 중국 에서는 의술과 요리를 하나로 보곤 하는데, 오랜 세월 동안 자연에서 온 다양한 산물의 효능을 연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중국 요리는 재료와 손질법, 조리법에 따른 분류 체계를 갖추어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
- 터키 요리는 세 대륙에 걸친 넓은 영토를 자랑한 오스만 제국 (1299~1922)하에서 체계화된 것으로, 그다지 오래된 편은 아니다. 흔 히 터키 요리라고 하면 양꼬치구이인 시시 케밥(shish kebob)이나 빵 과 함께 먹는 되네르 케밥(döner kebob) 등을 떠올리지만, 그것뿐만은 아니다. 돌마(dolma) 또는 사르마(sarma)라고 부르는 각종 재료로 속 을 채운 요리도 있고, 불가리아산이 유명한 요구르트도 알고 보면 터 키어의 요우르트(yogurt, 휘젓는다는 의미)에서 온 말이다. 터키 요리는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지중해 요리가 합쳐진 형태로 그야말로 제국다운 요리이다.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 있는 토프카프 궁전의 주방은 매일 6만 명분의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규모와 체제를 자랑 하고 있었다. 하루에 사용되는 식자재가 양 200마리, 새끼 양과 염소 가 100마리, 닭이 600마리 남짓에 이르렀다고 한다. 터키 요리는 오 스만 제국의 궁정 요리를 중심으로 각 지방의 요리가 조합되어 형태 를 갖추어 나갔다.
프랑스 요리는 고대 로마 제국의 궁정 요리를 토대로 세련된 조 리 기술과 지역의 명물 요리를 조합한 것이다. 19세기에 체계화되었 기 때문에 근대 이후의 요리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의 유럽은 세계 각지의 식민지로부터 막대한 부가 흘러들어 오는 제국들의 각축장 이었는데, 프랑스 요리는 이 시대가 낳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맛의 토대를 구축한 세계 4대 요리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 세계의 요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구분도 가능하다.
1. 주로 돼지고기를 기반으로 다양한 장과 기름을 사용한 요리와 특유의 보존 식품이 인상적인 중국 요리권
2. 커리와 기(ghee, 기름)를 이용한다는 특징이 있고, 양과 닭을 주 재료로 쓰는 인도 요리권
3. 이란, 아랍, 터키 등 다수의 요리 문화가 섞여 있어 복잡하지만, 양을 주재료로 강렬한 양념을 많이 사용하는 아라비아 요 리권
4. 빵을 주식으로 하며 햄과 소시지 같은 육류 요리가 특징인 유럽 요리권

- 땅의 상징 사프란
중동 요리는 타빌(tabil)이라고 부르는 향신료 믹스를 많이 이용한 다는 특색이 있다. 타빌 중에서도 예부터 건조 지대의 생활과 관련 있는 향신료 사프란(Saffron)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이슬람 세계에 서 널리 이용하는 고가의 향신료인 사프란은 가을에 피는 크로커스 (crocus)의 암술을 모아서 만든다. 좋은 향을 내는 사프란은 진통, 발 한, 부인병 등에 약효가 있으며 노란빛으로 물들이는 착색제이기도 하다.
사프란은 후일 유럽에 전해져 지중해 요리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사프란이라는 명칭은 아랍어 자파란(zafaran)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 황금색의 크로커스는 머지않아 향신료와 약품으로 이용되는데, 이것이 사프란이다. 사프란은 여름에 받은 태양의 은총으로 가을이 면 옅은 자주색의 꽃을 피우는 크로커스의 암술머리를 따서 모아 말 린 향신료로, 특유의 붉은빛은 태양 에너지를 응축한 것으로 여겨졌 다. 사프란은 100g을 만드는 데 4만 개의 암술이 필요한 매우 고가 의 향신료이다. 참고로 사프란은 그 양에 비례해서 15만 배의 물을 노랗게 염색할 수 있을 정도로 착색력이 뛰어나다. 그만큼 요리의 색도 선명하게 만들 수 있다.
- 사프란은 이슬람 시대에도 귀중하게 여겨졌다. 아라비안나이트』에 수록된 「알리 샤르와 즈무루드의 새콤달콤한 사랑」에는 인도 에서 온 쌀과 사프란을 조합해서 만들었다는 사프란 라이스가 등장 한다. 사프란이 인도에 전해진 뒤 만들어졌을 사프란 라이스는 오늘 날에도 인도를 대표하는 요리 중 하나이다.
사프란은 지중해 연안으로도 전해져 프랑스의 부야베스 (bouillabaisse, 생선을 비롯한 해산물과 마늘, 양파, 감자 등을 넣고 끓인 지중해식 생선 스튜로 프랑스 마르세유 지방의 전통 요리-역주)와 스페인의 파에야(paella)에도 빠질 수 없는 향신료가 되었다. 그러나 고가의 사프란은 예상할 수 있겠지만, 빈번하게 가짜가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당시의 짝퉁인 셈 이다. 당연히 가짜를 만든 업자는 엄벌에 처해졌다. 
- 한편 이란과 이라크, 북아프리카의 건조 지대에서는 혹독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대추야자 열매가 만능 식재료로 생활 속에 자리 하였다. 20m에서 30m에 달하는 높이로 성장하는 대추야자는 재배 8년째부터 열매를 맺기 시작하여, 이후 거의 100년간 열매를 계속 해서 맺는다. 한 그루의 나무에서 보통 연 70~90kg의 열매를 생산 하는데, 큰 나무에서는 270kg 정도를 수확하기도 한다. 메소포타미 아에서는 보리보다도 많이 수확할 수 있는 대추야자를 보다 오래된 식자재로 여긴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8,000년 정도 전부 터 대추야자를 재배했다고 한다.
- 오늘날에도 유목민들은 대추야자를 주식이자 간식으로 먹는다. 수많은 낙타에 짐을 싣고 사막을 오가던 대상 카라반의 휴대 식량도 말린 대추야자였다. 대추야자의 씨는 낙타의 사료로도 유용했고, 열 매를 으깨서 만든 시럽은 고대 이후 이 지역 요리에서 빠질 수 없는 조미료였다. 이 시럽은 발효시키면 술이나 식초가 되기도 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유럽에서 발효 빵으로 맥주를 만들던 시대보다 훨 씬 전부터 대추야자를 발효시켜 빚은 술 나비즈(nabiz)를 마셨다. 대 추야자는 건조 지대에서 성장한 서아시아의 모든 문명을 지탱한소 중한 먹거리였으며, 오늘날에도 북아프리카와 이란 그리고 아라비아 사람들의 소중한 재산이다.

- 로마의 맛은 생선장에서부터
생선장(fish sauce, 어장유)은 염장한 해산물을 1년 이상 저장하고 숙 성시켜 만든 조미료이다. 해산물이 썩는 것을 소금을 써서 억제하면 서, 생선 내장에 들어 있는 효소로 단백질을 분해하여 짠맛을 적절하 게 끌어낸 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생선 젓갈을 최대한 액체로 만든 것이다.
바다와 깊은 관련이 있는 지역에는 다양한 종류의 생선장이 있 다. 작은 생선이나 새우를 원료로 하는 태국의 남플라, 정어리의 일 종인 까껌 등을 원료로 하는 베트남의 느억맘, 새우를 원료로 하는 인도네시아의 트라시 등이 대표적이다. 생선장은 동아시아 일대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한국의 새우젓이나 멸치젓, 중국의 위루(露), 일본의 숏쓰루 등이 유명하다.
지중해를 내해(海)로 하던 로마 제국에서도 주된 조미료는 생선 장으로, 로마 요리는 생선장 요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로 마의 생선장은 가룸(garum) 또는 리콰멘(liquamen)이라고 불렀는데, 소금물에 멸치 같은 생선이나 새우를 담가 2~3개월간 발효와 숙성 을 거쳐 여과시킨 조미료이다.
지중해 각지에서는 고대에 침몰한 배의 지하에서 가룸 결정이 붙 어 있는 암포라 항아리가 다수 발견되었는데, 기원전 5세기 무렵부 터 가뭄이 조미료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뭄은 멸치나 청어 의 내장을 염장한 후 햇빛에 말린 다음, 바짝 졸인 향초 물을 넣은 후 걸러서 만든다. 강렬한 향이 나는 상당히 매운 조미료였다고 하는데, 매운맛을 좋아한 로마인의 취향에 맞춤이었을 것이다. 또한 가뭄은 두세 방울로도 요리의 맛을 완전히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개성이 강 한 조미료였는데 값도 매우 고가였다고 한다.

- 요구르트는 우유를 끓여 냉각시킨 것이나 전날 만들어둔 유제품을 소량 섞어 발효한 것으로, 인도에서는 다히(dahi)라는 플레인 요구 르트를 자주 마셨다.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다르타도 금식 수행 으로 체력이 쇠약해졌을 때 수자타라는 이름의 소녀에게 요구르트를 받아 기력을 회복했고, 이윽고 부다가야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좌 선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불살생(不生), 즉 살아 있 는 생명을 죽이지 않는 것을 중시하는 인도에는 당연히 채식 메뉴가 많고, 대부분의 요리에 다히와 더불어 파니르라는 생치즈를 넣는다.
- 인도에서는 요구르트를 항아리 안에서 잘 섞은 뒤 가열, 탈수 작업을 거쳐 기(ghee)라고 하는 버터 오일을 만들어 다양한 요리의 베 이스로 이용했다. 예를 들어 쌀을 기로 볶아 먹거나 커리를 만들 때 도 소스나 건더기를 기로 볶는다. 소고기를 먹지 않는 인도에서 고기 대신 우유를 기로 바꿔 요리에 이용한 것이다. 인도 사람들은 기나 요구르트 같은 우유 가공품을 먹으면 신의 에너지가 인간의 몸속에 들어온다고 믿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소를 농사에 주로 이용했기 때문에 우유를 마 시는 습관이 없었다. 그러다 다른 문화에 관대했던 당나라 시대 (618~907)에 와서 유목민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일시적으로 유제품이 유행했다. 그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도 나라·헤이안 시대(710~1185)에 조정에서 직접 목장을 운영했다거나, 각 지방에서 내야 할 세금을 유 제품으로 내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에도 시대(1603~1867) 에는 네덜란드인의 거주를 허용한 나가사키의 데지마섬을 제외하고 우유를 생산하지 않았다

- 커리에 황금색을 입히고 고유의 향을 내게 하는 향신료 터메릭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생강과의 여러해살이풀인 터메릭은 뿌리줄기 가 커지면 말린 후 가루를 내어 분말 상태의 향신료를 만든다. 인도 상인들이 벵골만과 믈라카 해협을 통과해 진출한 동남아시아에서도 터메릭을 왕성하게 재배하였다. 특유의 황금색은 고귀한 색으로 환 영받았고, 화장품과 염료의 재료일 뿐 아니라 부정한 것을 쫓는 용도 로도 사용되었다. 15세기 후반에는 태국과 믈라카 등지까지 왕성하게 교역했으며 류큐(오늘날 오키나와)에도 터메릭이 전해졌다.
인도의 터메릭은 서양에도 파상적으로 전파되었다. 인도양 교역 을 통해 로마 제국에 터메릭이 전해진 것은 1세기 무렵의 일로, 테라 메리타(terra merita, 훌륭한 대지)라고 불리었다. 여기에서 영어 단어 터 메릭(turmeric)이 나왔다. 본격적으로 유럽에 들어온 것은 대항해 시 대 이후인 16세기로 값비싼 착색료인 사프란의 대용품으로 사용되 었다. 인도와 직접 교역을 시작한 포르투갈인은 터메릭을 인도의 사 프란이라고 부르며 사프란의 저렴한 대용품으로 팔았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지에서는 터메릭을 통칭 쿠르쿠마(curcuma)라고 부 르는데, 그 이유는 산스크리트어로 사프란의 원료인 크로커스를 쿤 쿠마(kunkuma)라고 칭한 데 있다. 중국에서는 터메릭을 울금(金)이 라고 하는데 울창한 황색 식물이라는 의미이다.

- 참깨는 서아프리카 니제르강 유역의 사바나 지대가 원산지로,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넓은 지역으로 퍼졌다. 참깨는 유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기에 귀중한 식자재로 대 접받았다.
참깨의 영어 단어 세서미 (sesame)는 메소포타미아를 최초로 통일한 아시리아어 'samssamu'에서 온 그리스어 'sesamon'이 어원이다. 미국의 어린이 대상 텔레비전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리트>로 익 숙한 그 세서미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참깨로 만든 과자를 먹었다고 전해지고, 인 더스 문명에서도 참깨를 식용으로 사용한 흔적이 나왔다. 한편 참기 름에는 피부를 부드럽게 하는 성질이 있어 일찍이 향료를 녹여 미용 목적의 기름으로 사용했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라는 걸출한 인 물을 마음대로 조종한 것으로 유명한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세는 전신에 참기름을 발라 부드러운 피부를 유지했다고 한다. 오늘날에 도 흰깨를 정제하여 짠 기름을 머리를 정돈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는 올리브유의 사용이 늘었기 때문 에 참깨는 환영도 주목도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로마의 박물학 자 플리니우스(24?~79)가 "참깨는 위에 좋지 않다"라는 말도 남겼을 정도였다.

- 양, 염소, 소 등의 젖에 응유효소(rennet)와 유산균 배양액을 섞어 만든 치즈는 유목민이 만든 대표적인 발효 식품이다. 치즈는 중앙아 시아에서 인도에 이르는 지역이 원산지로, 유라시아 각지로 제조법 이 전파되었다. 오늘날에는 전 세계에 800종류 이상의 치즈가 만들 어지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근간을 세운 수메르인은 염소, 양, 소의 젖 을 동물의 위점막 등을 이용하여 굳힌 뒤 미생물을 이용해 발효한 딱딱한 치즈를 만들었다. 참고로 치즈를 제조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수분을 제거하지 않은 반제품이 요구르트이다.
- 치즈의 탄생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중 아라비아의 설화에는 여행 중 마시려고 양의 위를 건조시켜 만든 물통 속에 염소젖을 넣고 다닌 상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일정을 마치고 통을 열어보니 하얀 덩어리와 투명한 물이 고여 있었고, 호기심에 그 맛을 봤더니 풍미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아 그때부터 치즈를 만들게 되 었다는 것이다.
지중해 세계에서도 치즈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기원전 9세기에 그리스의 음유시인 호메로스가 쓴 서정시 『오디세이아』에는 양의 젖으로 만든 페타 치즈가 등장한다. 당시에 이미 치즈를 먹었던 것이다. 올리브유를 식용유로 사용한 그리스에서는 가축으로 염소나 양을 길렀는데, 그 젖은 버터 제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치즈로 만들었다. 당시의 치즈는 말라서 딱딱해질수록 좋은 것으로 여 겼다.
- 치즈를 만드는 기술은 기원전 1000년 무렵에 에트루리아인에 의해 바닷길을 통하여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지방으로 전해졌다. 로마 제국에서는 치즈를 매우 즐겨 먹었고 이미 시장에서 다양한 종 류의 치즈를 팔고 있었다고 한다. 마음에 드는 여성을 나의 치즈(카세 우스, caseus)라고 부를 정도로 로마인은 치즈를 사랑했다. 카세우스에 서치즈(cheese)란 단어가 나왔음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롬바르디아 지방은 특히 치즈 제조가 성행한 곳으로, 이곳에서 여러 명품 치즈가 탄생했다. 푸른곰팡이를 이용한 블루치즈의 한 종류인 반경질의 고 르곤졸라 치즈와 1년에서 3년 동안 숙성시켜 딱딱해진 파르메산 치 즈가 대표적이다. 파르메산 치즈는 수분 함량이 40% 이하여서 보존이 쉽고, 수많은 이탈리아 치즈 중에서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이탈리아 치즈의 여왕이라고도 불린다.
브리야사바랭은 "치즈가 없는 디저트는 한쪽 눈이 먼 미녀와 마 찬가지다"라는 글을 남겼다. 하지만 치즈가 서유럽의 식탁을 장식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서유럽에서 최초로 치즈를 언급한 기록 은 9세기에 이탈리아에서 고르곤졸라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알린 글이다.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재위 768-814)가 이 푸른곰팡이 치즈를 매우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중세 유럽에서 치즈의 품질 개량을 책임진 곳은 수도원이었는데, 그중 프랑스의 시토 수도원이 유명하다. 유명한 치즈의 등장 시기를 보면, 스위스의 에멘탈 치즈가 15세기 영국의 체더 치즈가 16세기, 네덜란드의 하우다(고다) 치즈가 17세기 등으로 역사가 길지는 않다.
- 결론적으로 두부는 당대 이후에 북방 유목민이 가져온 유부의 영향을 받아, 소와 양의 젖을 구하기 어려웠던 중국에서 그 대용품으 로 삶은 콩으로 만든 식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두부는 유목 문 화와 농경문화가 합쳐진 당 제국의 국제적인 성격에 부합하는,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탄생한 작품이다. 몽골이 세운 원제국(1271~1368) 시대가 되면 중국 전역에 두부 가게가 퍼져 나갔고, 두부는 서민이 즐기는 대표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에서 소나 양의 젖으로 치즈를 만들지 않았다는 건, 두부를 좋아하는 이에게는 다행인 일이 었는지도 모르겠다.

- 미나릿과의 채소 고수는 실크로드를 오가던 상인이 낙타 등에 싣고 다니며 해독제나 건위제健胃劑) 용도로 동방에 소개한 채소이다. 고수는 특유의 풋내 나는 향기와 독특한 쓴맛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 는 식자재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요리 중 유난히 먹기 힘든 것이 있다면 십중팔구 고수가 들어간 것이다. 고수의 고향은 지중해 연안 으로, 석류와 마찬가지로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들어왔다.
서양에서는 고수를 코리앤더(coriander)라고 부르는데, 그리스어 로 빈대 같은 벌레(koris)와 향기로운 아니스의 씨앗(annon)을 부르는 말을 합친 것이다. 잎과 미성숙한 열매에서는 벌레가 썩은 것 같은 냄새가 나지만, 다 익은 열매에서는 아니스나 레몬처럼 좋은 향기가 나는 극단적으로 모순된 특징에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 고수는 가느다란 끈 상태로 갈라지며, 매운맛이 나는 잎과 완전히 익은 열매의 쓰임새가 각각 다르다. 고대 이집트에서 식용으로 사 용한 기록이 있을 정도로 역사도 오래되었다. 좋은 향이 나는 익은 열매는 고기나 소시지의 냄새를 없애는 데 쓰거나 건위제나 해독제 로 쓰였다.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 (기원전 460~기원전 337)는 약효가 있는 음식으로 고수를 추천했다. 한편 이슬람 세계나 중세 유럽에서는 최음제나 미약媚藥)으로도 알려졌 는데, 아라비안나이트』에도 미약으로 몇 번 등장한다.
- 상인의 짐을 실은 낙타의 등을 타고 실크로드를 건너 중국으로 운반된 고수는 상차이(香, 향채)란 이름으로 정착하였다. 상차이는 꽃눈이 맺히기 전에 수확한 어린잎을 주로 이용하였는데, 고기나 어류의 잡내를 없애거나 요리를 돋보이게 하는 장식으로 썼다. 유목 문 화가 들어와 양고기 요리가 유행한 것도 잡내를 없앨 상차이의 보급 을 부추겼다. 원나라 때는 지배 민족인 몽골의 문화가 유행하여 돼지 고기보다도 양고기를 많이 먹었다. 당시엔 익숙하지 않았던 양고기 의 잡내를 없앨 요량으로 상차이를 이용했지만, 양고기 맛을 즐기게 된 이후에도 여전히 상차이를 썼다. 참고로 상차이는 양고기와 궁합 이 잘 맞는다. 현재도 중국식 양고기 샤부샤부(슈앙양로우, 涮羊肉)에는 얇게 자른 상차이가 양념으로 들어간다. 향이 강한 상차이는 담백한 맛이 특징인 일본 요리와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에 보급되 지는 않았다.

- 몽골 제국의 유산인 햄버그스테이크
몽골 제국에서는 병사 한사람이 6~7마리의 말을 이끌고 원정을 떠났다. 말을 매일 바꿔가며 하루에 70km나 진격했는데, 필요할 경 우에는 말을 죽여서 식량으로도 이용했다. 무기가 그대로 군량이 되 는 시스템으로 매우 효율적이었다. 그들은 잘게 썰거나 덩어리로 만 든 생고기를 안장 밑에 넣고 다녔고, 자연스럽게 숙성되어 부드러워 진 고기를 꺼내 먹으며 체력을 보충했다. 말을 타는 동안 안장 아래 에 있는 고기가 말의 땀과 섞여 적당히 뭉개지면서 먹기 좋은 상태 가 되는 것이다. 이 생고기 스테이크가 바로 타르타르스테이크(tartar steak)이다.
몽골인은 유럽에서 타타르(tatar)인이라고 불렸다. 유럽인은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는 이 강력한 적을 그리스 신화에서 지하세계를 상 징하는 타르타로스(tartaros)의 이미지가 연상되는 이름으로 부른 것 이다. 말고기는 고단백 저지방 식품으로, 비타민이 풍부하고 기생충 이 없기 때문에 생고기로 먹을 수 있었다. 한편 구약성서의 말고기 섭취를 금지한 문구 때문에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는 말고기를 먹 지 않았다. 그들은 몽골인이 생말고기를 먹는 광경을 기이하게 쳐다 봤을 것이다.
- 14세기 들어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로 세력을 넓히자 유목민의 식문화인 생고기 요리가 농경 사회에 진출했다. 비슷한 이유로 몽골 치하의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즐기던 돼지고기 대신에 양고기 요 리가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타타르의 멍에'는 러시아인이 13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약 200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던 시기를 부르는 말로, 그 무렵 생고기를 사용한 타르타르스테이크가 도입되었다. 타르타르스테이크는 몽골 인이 초원에서 즐기던 거친 생고기와 달리, 숙성된 생말고기를 두들 겨서 각종 허브와 향신료, 올리브, 달걀, 조미료 등과 섞어 흑빵 위에 올린 세련된 형태의 음식이다. 지금도 헝가리나 독일에서는 타르타 르스테이크를 즐겨 먹는다.
러시아의 타르타르스테이크가 북부 독일 최대의 항구 도시 함부르크(Hamburg)에 전해지자, 철판 위에서 굽는 햄버그스테이크 (hamburg steak)가 되었다. 생고기를 먹지 않고 소시지를 만드는 전통 이 있던 함부르크에서는 타르타르스테이크를 구워 그들만의 스타일 로 만들었다. 독일 식문화에 편입된 타르타르스테이크의 대변신이 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구운 타르타르스테이크는 1850년대에 독일 계 이민자의 손으로 신흥국 미국으로 옮겨진다. 정작 독일에서는 햄 버그스테이크라고 부르지 않았는데, 새롭게 이 음식을 접하게 된 미 국인이 독일 도시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 몽골이 점령한 한반도에도 몽골의 생고기 요리가 전파되었다. 불교를 신봉한 고려 사람들은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이 시기에 고기의 맛에 눈을 떴다. 한반도의 식문화에 드디어 고기가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중 몽골식 생고기 요리가 변형된 요리로, 소고기를 사 용한 육회(肉膾)를 들 수 있다. 한국인은 말고기를 먹는 문화가 없었 기 때문에 소고기로 바꾼 것이다. 육회는 얇게 썬 생소고기를 조미 료, 마늘, 참깨 등과 버무린 뒤 사과와 무 같은 채소와 함께 내놓는다. 위에는 달걀노른자를 올리기도 한다. 한국의 육회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영국 요리 중에도 소고기를 쓴 타르타르스테이크가 있다. 세 계 역사를 태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몽골 제국은 식문화에 있어서도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 토마토도 신대륙에서 온 작물로 세계 각지의 요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유럽인의 토마토 사랑이 특별한데, 영국에서는 사랑의 사과(love apple), 이탈리아에서는 황금 사과(pomodoro)라는 별칭으로 도 부른다. 이탈리아에서 황금이라고 부른 이유는 처음에 들어온 토 마토가 노란빛을 띠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처음 본 토마토를 사 과의 친척쯤으로 여겼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하지만 토마토는 사과가 아니라 가짓과의 식물로, 고향은 감자와 마찬가지로 안데스의 고지대이다. 야생의 토마토는 기껏해야 지름이 1cm에 불과한 작은 것이었는데, 토마토가 안데스를 넘어 멕시코에 전해진 후 아즈텍 사람들이 품종 개량을 거듭하여 원래보다 수십 배 커진 것이라고 한다. 남미의 원주민들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토마토 를 태양의 선물이라고 부르며 즐겨 먹었는데, 태양의 에너지를 흡수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토마토라는 단어의 어원은 아즈텍에서 토마토를 부르는 말의 끝 에 토마틀(tomatl, 불룩한 열매라는 뜻)이란 수식어를 붙인 데서 유래한다. 스페인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유럽에 전 달했고, 그렇게 토마토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 초콜릿의 원료로 유명한 카카오(cacao)는 아마존강 유역이 원산지로 벽오동나무과에 속한다. 건조해서 분말로 만들면 코코아가 된 다. 카카오라는 이름은 중앙아메리카의 아즈텍과 마야에서 카카오나 무나 열매를 카카우아틀(cacahuatl, 카카오의 물이라는 뜻-역주) 혹은 카카우 (kakaw)라고 부르던 데에서 따왔다. 카카오의 학명은 테오브로마 카 카오(Theobroma Cacao)로, 그리스어인 테오브로마는 남성 신인 테오 와 음식인 브로마가 합쳐진 단어이다. 즉 신의 음식이란 뜻인데, 훌 륭한 맛을 찬양할 때 수식어로 쓰던 말이라고 한다.
카카오는 나무를 심고 4년 남짓 지나면 수확하기 시작하는데, 이후 20년에서 25년간 수확할 수 있다. 길이가 15cm에서 20cm 정도 인 방추형의 열매에 40개 정도의 씨앗이 들어 있고, 한 그루의 나무 에서 연간 70개에서 80개의 열매를 채집한다. 아즈텍인과 마야인은 카카오 씨앗을 고추 씨앗과 함께 갈아 끓인, 걸쭉하면서도 맛이 강열 한 음료를 만들었다. 아즈텍어로 쓴 물이란 뜻의 초콜라틀(chocolatl) 이라고 불린 이 음료가 바로 초콜릿(chocolate)의 기원이다.
아즈텍 제국에서는 카카오콩을 왕에게 바치는 헌납품이나 화폐 로 이용했고, 콩 100개당 노예 한 사람을 교환할 수 있을 정도로 고 가였다. 1521년, 36세의 코르테스가 보병 500명과 대포 14문, 말 16마리만으로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켰을 때, 귀한 카카오 열매도 스 페인에 전해졌다. 아즈텍의 몬테주마 2세를 접견한 코르테스는 황제 가 마시고 있던 초코라틀을 마음에 들어 했고 카카오 콩과 가공 도구를 가지고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 초콜릿은 이내 스페인 왕실과 귀족 사회에서 사치스러운 음료로 유행했는데, 그들의 입맛에 맞게 고추 대신에 신대륙에서 온 바닐라 와 설탕을 넣어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초콜릿을 만들었다. 쓰고 매운 아즈텍의 음료가 스페인 땅에서 달콤한 초콜릿으로 모습을 바꾼 것 이다. 그후 약 100년간, 스페인의 귀족들은 초콜릿을 국외로 내보내 지 않고 자신들만 독점하고자 했다.
17세기 초, 프랑스의 루이 13세(재위 1610~1643)와 스페인의 왕녀 안 도트리슈가 결혼하면서 코코아를 마시는 습관이 프랑스 귀족에게 전해졌다. 이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크게 유행했고, 당연하게도 멕시코산 카카오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재배지를 확대하였다.
- 1828년에는 네덜란드의 화학자 콘라드 반 호텐이 카카오에서 지방을 제거하여 분말로 만드는 기계를 발명해서 초콜릿 파우더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코코아 파우더이다. 현재 세계 최대의 코코아 회사는 창업자의 이름에서 온 반 호텐(Van Houten)이고, 네덜 란드인이 가장 선호하는 음료로 코코아를 들곤 한다. 1847년에는 영국 서부의 항구 도시 브리스톨에서 카카오에서 추출한 유분으로 만든 코코아 버터에 설탕, 카카오 분말을 넣어 굳힌 초콜릿이 만들어졌다. 오늘날 초콜릿 하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형태였다.

- 플랜테이션과 박물학
17세기는 뉴턴으로 대표되는 과학혁명의 시대인 한편, 박물학이 유행한 시기이기도 했다. 세계 각지에서 수집된 방대한 양의 동식 물 표본과 지식이 유럽으로 모여들었다. 상품 가치가 입증된 동식물은 세계 각지로 옮겨져 재배 혹은 사육되었다. 유럽인은 박물학에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지구 생태계를 새로 만들다시피 했다. 당연히 각 지역의 식자재와 요리, 나아가 음식 문화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유럽인이 신대륙을 중심으로 세계 각지에서 전개한 플랜테이션 농업은 원주민이나 이주민, 흑인 노예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유럽 시장에서 내다 팔 상품작물을 대량 생산하는 시스템이다. 이는 유럽 경제와 결합했을 때에만 유지 가능한 것이었다. 설탕, 담배, 커피 등 의 상품 작물은 유럽의 항구로 운반되어 그곳으로부터 재수출되었 다. 예전에는 사치품이었던 향신료와 기호품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일용품이 되었다. 유럽의 식문화는 세계 각지에서 끌어모은 식자재 로 인해 단번에 몸집을 불릴 수 있었다.

- 영국의 노예선은 보다 효율적으로 노예를 수송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네덜란 드 등 다른 나라를 압도했다. 면화, 무기, 화약, 금속 공예품, 유리 세 공품, 술 등을 싣고 노예무역의 거점인 리버풀 항을 출발한 노예선은 아프리카 서쪽 해안으로 가 물건을 팔았다. 그 대금으로 노예를 사서는 노예를 싣고 미국으로 이동하여 노예를 매각하였고, 그 돈으로 설 탕과 면화 등을 구입하여 유럽으로 돌아왔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세 대륙 간의 이른바 삼각 무역이다.
영국의 노예 상인은 아프리카에서 겨우 2~3파운드를 주고 산 노 예를 미국에서 25~30파운드에 팔아 큰 이익을 챙겼다. 16세기에 서 19세 초까지 이어진 노예무역으로 서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팔 려간 노예의 총인원은 1,000만 명에서 2,0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 중 3분의 1이 1760년부터 1810년 50년 사이에 운송되었다.

- 세계를 풍요롭게 만든 아메리칸 비프
1869년 대륙 횡단 철도가 완성되고 식품의 장거리 운송을 가능 하게 한 냉장 화물 열차가 개발되면서, 1870년대에는 미 서부의 소 고기가 영국 등 유럽의 식탁으로 곧바로 배달되었다. 1880년대에 영국에서 수입한 소고기의 대부분이 미국 서부에서 가져온 것이었 다고 한다. 영국인은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목축업에 투자를 계속 하였고, 1880년대 중반에는 서부의 방목지 대부분이 영국 자본가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서부의 11개 주에서 약 3만 명의 목축업자가 110만에 달하는 공유지에서 육우를 사육하고 있다. 이 소들은 카우보이를 따라 철도역으로 이동하여 화물 열차에 실린 후 시카고로 운반되어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가공되었다. 이러한 대 량 생산 방식은 자동차 제조업에서나 볼 법한 것이었다.
육우의 사육이 궤도에 오르자, 영국 시장에서는 더욱 부드러운 지방 함유량이 많은 육우를 찾게 되었다. 그러자 서부의 방목지에서 1, 2년간 사육한 소를 중서부에 위치한 비육장으로 운송하여 콘벨트(미국 중부의 대규모 사료용 옥수수 생산지-역주)에서 재배한 옥수수를 먹여 육 질이 부드러운 소로 키우는 방법이 탄생했다. 이 방식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본격화되었고, 현재 대부분의 소가 이렇게 사육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불과 5%에 지나지 않았던 방법인데 말이 다. 인간이 미식을 좇으면서 소고기도 끝없이 사치스러워졌다.
- 오랜 세월, 인간에 의한 자연 파괴를 막아주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식자재가 썩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냉동 기술이 빠르게 발전 하면서 자연 파괴를 막던 제어가 풀어졌다. 자연은 보다 난폭하게 포 획되기 시작했다. 인간의 식생활이 풍요로워지며 포식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는 동시에 농업, 어업, 목축업의 모습이 혁명적으로 변화 한 것을 의미했다. 식자재 생산의 급증은 자연 파괴의 가속화에 다름 아니었다. 균형 감각을 잃은 인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생 존 기반인 지구 환경을 파괴하게 된 것이다.
자연의 신음소리에도 불구하고, 가정용 냉장고, 냉동식품 공장, 냉장·냉동선, 거대한 냉장창고와 냉동고, 각 업소의 냉장 진열장을 연결한 체계가 미국을 중심으로 20세기 말에 급속하게 정비되었다. 생산 현장에서 식탁까지의 유통 경로를 저온으로 관리하는 이른바 콜드 체인의 형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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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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