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애리조나 대학 환경유지센터 소장인 게리 나반Gary Nabhan은 "우리는 우 리 조상이 먹고 마신 결과물이다"라고 했다. 만약 우리 조상이 한 지역에 오래 살았다면 우리가 이 환경의 음식들에 유전적으로 적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동식물 등의 환경이 다른 낯선 장 소로 이주한다면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음식에 노출될 것이고 우리의 몸은 새 로운 음식들에 알레르기나 질병 같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다. 반면 우리는 특정 음식이 싫다는 감정을(심지어 고추처럼 고통을 일으키는 것까지도) 문화적 압 력에 의해 극복할 수 있고 나아가 싫었던 음식을 좋아하도록 자신을 움직일 수 도 있다. 결국 맛 감각은 학습되는 것이다.
과거에 우리가 기억한 식재료의 맛이 현재에는 더 이상 같은 감각을 주지 않는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유럽의 포도원은 필록세라라는 기생충에 의해 19세기경에 거의 다 파괴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포도는 그 이 전의 포도와 동일한 유전형질을 가진 것이 아니며 맛과 향기 또한 달라졌다.
- 처음으로 경작된 작물은 보리이며, 밀은 잡풀들에서 나왔는데 전 세계에 약 3만여 종이 있다. 엠머, 스펠트, 엔콘 품종의 고대 밀은 여러 겹의 껍질로 싸여 있는데, 특히 겉껍질은 매우 단단해 불에 구워야 제거할 수 있었고 그런 뒤 껍질을 비벼서 벗기는 타작을 거쳐야 비 로소 먹을 수 있는 밀알을 분리해낼 수 있 었다. 타작은 주로 소가 곡식을 밟아서 껍질을 벗기는 방식으로 하였고 그런 다 음 켜에 쳐서 가벼운 왕겨를 날려보내고 남은 알곡들만 모아서 이를 돌절구에 빻 아 가루로 만들었다. 기원전 800년대부 터는 가축의 힘을 빌리면서 타작이 쉬워 졌지만 그 전까지는 사람이 일일이 손으 로 해야 하는 고된 노동이 필요한 작업이 었다. 밀가루는 왕겨나 돌가루가 섞여 거친 밀가루에서 왕겨를 제거하기 위해 굽거나 치거나 부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는 밀반죽을 부풀게 만드는 성분인 글루텐을 파괴했다. 이에 따라 당시의 밀로 만든 빵은 부풀지 않은 납작한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아마 오늘날의 크래커와 비슷했을 것이다. 이처럼 납작한 빵 모양은 밀과 물을 반죽하여 뜨거 운 팬에서 구워낸 인도의 차파티chapati (철판에 굽는 납작한 빵)나 기름에 튀겨낸 푸리 poori(유월절에 먹는,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빵), 오븐에서 구워낸 유대인들의 무교병matzo 같은 것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기원전 7000년경에는 밀의 돌연변이 중에서 껍질이 부드러운 품종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연질밀이라고 부 르는 새 품종은 불에 굽지 않아도 껍질을 벗길 수 있었고 그 결과 반죽할 때 글 루텐이 만들어져 빵을 부풀게 하였다. 부풀린 빵은 이집트에서 처음 발명되었 는데 이는 아마도 우연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 꿀을 발효시킨 꿀술은 아마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발효된 음료일 것이다. 최 초의 꿀술은 들판에 남겨진 꿀 위에 비가 떨어져 고이고 거기에 이스트가 자라 면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와인을 발명하기 전 그리스와 로마에서 꿀 술은 신에게 바치는 귀중한 제물이었고, 꿀은 고대인에게 신비로운 물질이었 다. 그리스인들은 꿀이 꿀벌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떻게 만들어지 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으므로 로마인들은 하늘에서 떨어져 나뭇잎 위에 내 려앉은 '별들의 타액이라고 믿었다. 꿀벌들이 새끼를 먹이기 위해 이꽃 저꽃 을 날아다니며 화분을 모으면 대부분의 화분에서 물이 증발되고 꿀이 남는데, 35~40%의 과당과 30~35%의 전화당 그리고 17~20%의 물과 약간의 효소들을 가진 복합물이 바로 그것이다.
- 인류는 매우 일찍부터 와인을 마셨다. 와인은 신화에 나오듯 디오니소스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면 아마도 또 다른 우연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잘 익은 포 도를 으깨어 상온에 놓아두면 자연적으로 발효가 되는데 어느 날 우연히 동물 가죽 주머니에 남아 있던 포도가 와인으로 변했을 것이다. 한편 동물 가죽은 단 시간에 와인을 숙성시키거나 옮기는 데는 제격이지만 장기간 보관하기에는 부 적당한 용기였다. 기원전 6000년경에는 진흙으로 만든 도기 호리병을 사용한 흔적이 있는데, 가느다란 병목과 마개를 가진 도기병은 와인이 공기와 접촉해 산화되어 식초로 변하지 않도록 했다. 고대인의 거주지에서 발굴되는 진흙 술 병들의 바닥에는 타르타르산이 가라앉아 있으며 이 물질은 와인이 증발하고 남 은 찌꺼기로 이를 통해 우리는 고대인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와인을 마셨는지 알 수 있다. 와인이 상류층 음료였다면 맥주는 대중 음료였고 맥주 역시 우연의 결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음식을 준비하는 여자들은 밀이나 보리에 싹이 자 라면 단맛이 생기고 껍질을 까거나 빵을 만들기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 이고, 그 뒤로 그들은 의도적으로 싹이 자라도록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그러다 가 어느 날 싹을 틔운 곡식에 물이 들어가 발효가 시작되어 얼마 후에는 알코올 음료로 변하는 과정을 눈여겨본 여자들이 인류 최초의 주류제조자가 아닐까?
- 이집트인들은 시신을 보존해야 죽은 후에 영혼이 그 육체를 찾아올 수 있다고 믿 었다. 먼저 코를 통해서 뇌를 다 빼내고 상체를 절개하여 위와 내장을 제거한 후 텅 빈 공간을 몰약이나 계피 같은 향신료로 채워 다시 꿰맸다. 그런 다음 시신을 나트론Na2CO3-10H20 이라는 미네랄 소금에 70일간 절인 다음 소금을 씻어내고 시 신을 면포로 감쌌다. 즉, 미라를 만든 것이다.
- 미라 만들기는 고위급 사제의 일이었다. 그들은 순결함의 상징이라며 삭발을 했는데 방충제가 없던 시절, 머리의 이를 미라가 된 파라오에게 옮기지 않 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제들은 방부 처리를 하면서 인체의 내장 구 조에 대해 많이 알았을 것이다. 이집트의 의술은 매우 발달하여 사제들이 부러 진 뼈를 맞추고 기원전 2500년경에는 뇌 수술까지 수행했다고 한다. 상처에는 꿀과 곰팡이 핀 빵을 발라 치료했다고 전해지는데,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꿀의 높은 당분이 세포에서 수분을 끌어냈을 것이고 곰팡이 핀 빵은 항생 효과를 냈 을 것이다. 이는 1928년 영국의 플레밍A. Fleming이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추출하면서 확인한 바 있다.
- 나일 강이 생명을 주는 신이라면 빵은 생명 그 자체였다. 실제로 고대 이집트에 서는 빵과 생명을 가리키는 말이 같다. 초기의 빵은 아주 단순했다. 밀가루와 물을 섞어서 동그랗고 납작한 반죽을 만들어 불가의 뜨거운 바윗돌에 올려놓 아서 구워내면 끝이었다. 나중에는 좀 더 다양하고 독특한 모양의 빵이 만들어 졌다. 음식 역사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부푼 빵은 이집트인이 처음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우연이었을 것이다.
한 학설에 따르면 굽고 남은 빵 반죽을 불가에 두었는데 공기 중의 이스트 균이 표면에 묻어 자라면서 부풀었을 것이고, 이 반죽을 구워 보니 맛과 질감이 더 좋아져 그 일부를 남겨 다음 반죽을 만들 때 넣었다는 추측이 있다. 다른 가 설은 이집트인이 빵을 반죽할 때 물 대신 맥주를 넣었는데 그 속에 있던 이스트 균이 자랐다는 이야기다.
- 어쨌든 물과 닿은 밀가루에서는 글루텐이라는 단백질이 확장되면서 켜를 만들고 그 켜에 이스트가 내뿜은 이산화탄소가 차면서 놀라운 조직과 질감 을 갖춘 부푼 빵이 만들어진다. 반죽이 확실히 부풀어 오르면 다음의 반죽에 넣 기 위하여 그 일부를 떼어놓는다. 이렇게 해서 사워도우sourdough 빵이 등장했 다. 예전의 반죽을 일부 넣거나 맥주를 붓거나 맥주 발효통의 찌꺼기를 이용하 면 반죽이 부푼다는 것을 알게 되자 새로운 제빵기술들이 나왔다. 밀폐 공간에 서 가열할 때 빵이 더 잘 부푼다는 것을 알면서 오븐이 발명되었고, 빵의 형태 를 잡기 위해 쓰는 삼각 또는 사각형 틀도 만들어졌다. 직업 제빵사들은 최소한 40여 가지 종류의 빵과 과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은 파라오의 축제 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 유대인은 식사와 관련해 많은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코셔 Kosher 도살법이다. 이것에 따르면 신의 창조물 중 하나인 동물을 도살 할 때는 되도록 고통을 주지 않아야 한다. 유대인은 동물을 거꾸로 매달아 아 주 날카로운 칼로 단숨에 경동맥을 끊었다. 이 방법은 사람이나 동물 모두에게 유익했다. 동물은 바로 의식을 잃어 고통이 짧았다. 그리고 몸속의 피가 중력에 의해 모두 빠져나와 사람에게 해롭다고 알려진 흰색 조직들을 모두 분별하여 떼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규칙을 따르지 않고 도살된 고기는 불결한 것으로 간 주되었다. 가축이 병이나 사고로 죽어도 마찬가지로 트레이프treyf(부정한 고기)라 며 금기시되었다. 코셔의 과정은 주방에서도 이어졌다. 고기는 물에 담갔다가 소금에 절이고 다시 씻기면서 남은 핏자국을 모두 제거했다. '코셔'나 '트레이 프'라는 단어는 나중에 영국으로 건너가 음식과는 관계없지만 원래의 의미를 살리는 쪽으로 그 뜻이 바뀌었는데, 예를 들어 영어로 코셔는 '정직하다, 고상 하다, 깨끗하다', 트레이프는 '불결하다'라는 뜻이 되었다.

- 지중해의 고대 음식들은 빵과 와인 그리고 올리브유 이 세 가지로 집약된다. 이러한 음식들은 일상생활의 주식인 동시에 신성시되는 대상이기도 하였다. 곡식의 여신인 데메떼르, 와인의 신 디오니소스 그리고 올리브 나무를 아테네인들에게 준 아테네는 특별한 숭배를 받았다. 로마는 카르타고산 밀로 만든 공짜 빵을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고, 프랑스까지 이르는 넓은 식민지에 포도나무를 심었으며, 동방에서 난 정향과 계피에 열광하였다.
- 팍스 로마나 시대에 로마는 다른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제국 의 내부는 줄곧 분열에 시달렸다.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신들에게 경배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무신론자로 치부되어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신앙을 위해 헌신하고 죽음까지 불사해 제국의 권력을 위협하 는 존재로 여겨졌다. 게다가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상류층에 의해 저질러지는 잔혹과 사치에 반발하는 유일한 종교였으므로 로마인들은 이들을 콜로세움에 서 다른사람이나 맹수와 유혈이 낭자한 검투를 벌이게 함으로써 징벌했다. 5만여 명을 수용할수 있었던 콜로세움에서 사람과 짐승의 혈투가 끝나면 곰 과 같은 동물들은 도살되어 상류층의 저녁거리가 되었다.
로마 제국은 80년경에 건축된 콜로세움 colosseum이나 서커스 막시무스cir- cus maximus (가장 큰 원형 경기장) 또는 다른 경기장을 활용해 하층민을 세 가지 방식 으로 다루었다. 첫째는 도시 빈민이 배고픔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무 상으로 빵을 배급한 것이고, 둘째는 그들을 한곳에 모아 고문과 폭력의 구경거 리를 제공함으로써 마음속 분노와 적개심을 발산할 대상을 부여한 것이다. 끝으로 국가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데도 콜로세움의 혈투를 이용했다. 로마의 권력층은 이러한 구경거리를 통해 하층민에게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도 저 아래 경기장에 서게 된다'는 경고를 보낸 것이다.

- 로마의 영광이 사라진 뒤, 중세 농촌은 보릿고개와 기아로 허덕이는 농민들로 넘쳐났다. 그러다 보니 배고픈 농민들은 맥각균에 오염된 호밀로 빵을 만들어 먹었는데, 이 빵은 종종 환각 증상을 일으켜 '미친 빵'이라고 불렸다. 서구에서 맥각 중독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는 동안 동방에서는 반짝거리는 녹색 잎과 빨간색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졸음을 쫓아주고 머리를 맑게하는 음료인 커피가 출현하였다. 커피는 새로운 종교인 이슬람과 함께 동서양으로 퍼져 나갔다.
- 중세 온난기와 북유럽의 농업 혁명
950~1300년 사이에 빙하가 녹기 시작하면서 전 지구상의 온난화가 진행됨에 따라, 얼어 있던 북쪽 바다에서도 선박의 항해가 가능해졌고 작물의 생장기간 연장으로 곡식의 수확량도 크게 늘었다. 바이킹은 약탈을 중지하고 탐험을 시 작하여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 정착했는데, 그린란드는 사실 아이슬란드보 다 더 추웠다. 하지만 정착민을 유도하기 위해 희망적인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린란드로부터 남서로 이동한 사람들은 오늘날의 캐나다에 해당하는 뉴펀들 랜드로 들어갔다. '포도의 땅'이라는 뜻의 바인랜드vineland라고도 불리는 이곳 에서 이주민들은 야생 크랜베리 등의 덩굴식물을 발견하고 경작했다. 지금도 캐나다의 샌트로랜스 강 입구에는 바이킹 거주민의 흔적이 발굴되고 있다.
서기 1000년경에는 식물의 생장기가 더 길어짐에 따라 곡류 생산이 갑자 기 늘어나는 농업혁명이 시작되었다. 한해 농사를 짓고 나서 그 이듬해에는 휴 경을 해야 했던 농지를 세 부분으로 구획하여, 2년 농사짓고 1년 휴경하는 윤작 을 시행하였다. 한편 휴경기에는 농지의 지력을 증대하고 양분을 높이기 위 해 동물의 배설물을 묻는 방법을 고안했으며 말에 마구를 매어 쟁기를 좀 더 효 과적으로 끄는 방법으로 수확률을 높였다. 하지만 병충해에 따른 피해가 발생 하기도 했다.
- 맥각균에 오염된 '미친 빵'
중세 식품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빵이다. 지난해의 수확을 다 소진했을 늦겨울, 곡식은 자라지만 아직 거둘 수 없는 한여름, 해마다 이렇게 두 차례씩 기아 가 반복되었다. 다급해진 사람들은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설혹 그 작물 이 질병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도 상관하지 않고 먹어치웠다. 호밀 은 종종 맥각균麥菌에 오염되었는데, 이 균에 중독되면 헛것을 보거나 경련을 일으키거나 팔다리에 괴저가 생겨 검게 변하거나 마비가 온다. 맥각균은 수확과 건조, 제분 심지어 제빵 과정을 거쳐도 없어지지 않았고, 이 균에 오염된 빵 은 무서운 병을 자주 일으켜 '미친 빵'이라고 불렸다. 11~16세기까지 500년 동 안 맥각 중독이 널리 퍼지자 중세인들은 이를 전염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위험한 맥각을 생활에 이용할 때도 있었는데, 아주 적은 양의 맥각을 출 산 촉진제로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중세 유럽인의 생활은 온난화 덕분에 어느 정도 나아졌지만 여전히 더 개 선할 게 많았다. 농노들은 영주의 토지에 구속되어 질 나쁜 빵을 먹으며 단조로 운 노동에 매달렸고,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설교했다. 하지만 이에 반하여 하나님이 좀 더 혁신적인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 하는 새로운 교황들도 나타났다. 한편 로마 제국이 유럽에서 쓰러져갈 때 지중 해동부 지역에서는 새로운 종교가 폭넓게 힘을 얻고 있었다.
- 무슬림들은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생긴 힘의 공백을 메우며 로마의 영토를 그대로 접수했다. 그들은 유럽에서 스페인을 침략하고 사하라 사막을 포함 하는 북아프리카를 정복했으며, 동쪽으로는 인도양까지, 아시아에서는 페르시 아의 영토인 이라크와 이란과 서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고 지금 의 이라크에 있는 바그다드를 수도로 삼았다. 바그다드는 100만에 이르는 인구 와 상업의 중심지로 새로운 로마로 떠올랐다. 무슬림의 배들은 지중해와 아라 비아 해 그리고 인도양까지 휘젓고 다녔으며 낙타를 모는 카라반들은 실크로 드를 따라 중국에서부터 아프리카의 사막까지 가서 교역을 벌였다.
이슬람교는 무슬림 제국의 건설을 도왔으며 이들의 음식과 문화에 다채로 운 색깔을 입혔다. 무슬림들은 순례 여행을 의무로 믿었고 그 여행길에서 다른 무슬림 상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같은 종교를 믿고 같은 언어를 쓰며, 단일한 통화 체계를 사용함으로써 세계적인 대국의 면모를 갖추었다. 또 사회 내부의 신뢰도가 높아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의 신용 거래를 위해 오늘날의 수표 결제 같은 방식의 지불보증서를 썼다. 수표check의 어원이 무슬림들의 지불보 증서인 새크saqq에서 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 음양의 조화를 중시하는 중국의 요리는 송나라 시대에 크게 발달해 이때 이미 중국의 3대 요리가 확립되었다. 페스트가 휩쓴 유럽에서는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이 먹을 것으로 가득 찬 무릉도원을 꿈꾸었다. 15세기의 이탈리아에서는 인쇄된 요리책이 처음으로 등장했고, 향신료를 더 싼 값에 구하고자 했던 유럽인들은 향신료를 찾아 대탐험에 나섰다. 한편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 아메리카의 고대 제국들은 각각 독자적인 문화와 농업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 당시대부터 시와 음악 등의 예술이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요리의 발달은 이후 송나라 시대에 두드러져서 특히 960~1279년에 중국의 3대 요리가 확립 되었다. 북부와 양쯔 강 주변의 남부 그리고 사천 지방 요리가 그것이다. 광둥 요리는 그 이후에 확립된 것이다. 북경에서 주도한 북부 요리는 조나 수수 같은 곡물과 육류, 유제품이 중심이었다. 밀도 재배되어 밀가루를 이용하여 만두나 튀긴 빵,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북부 요리는 남부 요리에 비해 그 맛이 덜 자극 적인 특징이 있다. 남부 요리는 주로 양쯔 강 유역의 광활한 논에서 나온 쌀, 생 선, 돼지, 채소, 과일이 주식이었다. 사천 요리 역시 쌀이 중심이었으며 차를 많 이 활용했다. 이 시기의 사천요리에는 오늘날과 달리 매운 고추나 땅콩이 들어 가지 않았다. 신세계에서 온 이런 작물들이 아직 중국에 선보이기 전이었기 때 문이다. 그럼에도 전통적으로 사천 요리가 몹시 매운 까닭은 '숨을 못 쉴 만큼 매운 맛을 내는 콩과 비슷한 식물'로 향을 내었기 때문인데, 이 식물은 산초일 것으로 추측된다.
- 중국을 정복하는 과정 에서 몽골인은 유목민에서 정착민으로, 나아가 도시인으로 순식간에 변모했 다. 그들의 음식 역시 요리로 발전했다. 그전까지 유목민이었던 몽골인들은 초 원에서 가축 치는 것을 주업으로 삼았으며, 주로 양과 염소의 젖으로 만든 우 유, 버터, 치즈 등을 주식으로 삼았다. 그들이 가장 좋아한 음식은 마유를 발효 시킨 쿠미스koumiss라는 술이었는데, 마유에는 소의 유즙과는 달리 비타민 C가 많이 들어 있다. 그들은 마실 것이 없거나 말을 멈추고 쉴 만한 상황이 아니면 말의 목 동맥을 째고 말이 죽지 않을 정도의 피를 빨아 마셨고, 때로는 말고기 도 먹었다. 또 시베리아의 호랑이, 늑대, 곰, 멧돼지를 잡아 채소와 함께 뼈째 삶 아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렇게 끓인 걸쭉한 수프의 이름은 몽골어로 '음식'과 동의어인 쉴렌shülen이었다.
-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던 몽골의 문화는 13~14세기에 확연히 바뀌었다. 그들의 새로운 요리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을 받아들인 결과로 얻어 졌는데, 수프는 이제 이국적인 허브와 스파이스로 맛을 내었다. 음식 역사학자 인폴 부엘 Paul Buell에 따르면, 이 변화의 중심에는 투르크족이 있었다고 한다. 몽골인들은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다른 문화권보다 상류층인 투르크족에게 확장한 영토의 관리직을 맡겼는데, 그들은 무슬림 상인들과 접촉했고 아랍과 페르시아의 음식을 알고 있었다. 또 몽골인이 몰랐던 곡류 음식에 익숙했으며 여러 종류의 빵과 국수, 페이스트리를 만들 수 있었고 인도의 탄누르tannur 같 은 이동식 진흙 화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처럼 투르크족을 통하여 중동 지역 의 다양한 식재료가 중국에 소개되었는데, 음식 문화사에서 음식명에 식재료 의 이동이 이 시기처럼 분명하게 나타나는 일은 드물다. 
-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거쳐 통일신라에 이르는 동 안 곡물이 주가 되고 채소를 반찬으로 하는 한국 전통 식생활의 구조와 체 계가 완성되었다. 이후 삼국이 통일되면서 음식문화가 더욱 발전하게 되 었는데, 특히 벼농사 기술이 크게 발달하고 솥을 이용한 밥짓기가 일반화 되면서 쌀밥이 주식으로 자리잡았다. 여기에 콩으로 만든 장, 고기나 어패 류로 만든 포, 젓갈, 채소절임 등이 밑반찬이 되는 상차림이 일상식의 기 본으로 정착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이미 삼국 시대부터 술, 장, 채소절임과 같은 발효 음식이 발달하였다. 고려시대에 불교를 숭상하면서 각종 채소 음식이 늘어나 단 순한 장아찌류의 발효식품이 오늘날 우리가 김치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 로 발전하여 한국 김치의 전통을 확립했다. 또 통일신라시대에 유입된 차 재배가 활발해지면서 차문화가 고도로 발달하였으며, 양주법도 크게 발 전해 소주가 등장했다. 쌈을 싸먹는 문화를 즐겼던 것도 이 시대의 특징 이다.
- 소빙하기
중세의 온난기 이후 1300년경부터 소빙하기가 이어졌다. 온도 변화가 그리 크지는 않아서 오늘날에 비하면 1~1.5°C 낮은 정도지만 이런 저온 현상이 농업 이나 해운업에 미친 영향은 심각했다. 빙하가 계곡으로 굴러떨어져 농장을 망 치고 표토가 쓸려 내려가는 바람에 경작지가 사라졌다. 식물의 생장기가 짧아지자 식품 생산량도 크게 감소했으며, 밀이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했고 제대로 건조되지 않아 썩어들어 갔다. 포도는 곰팡이로 뒤덮여 아예 와인을 빚을 수 없 거나 빚더라도 신맛이 강했다. 영국에서는 포도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할 정도 로 온도가 내려가 와인 산업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데, 그러자 북유럽인들은 맥주, 위스키, 보드카 등과 같은 곡물 양조주로 눈을 돌렸다. 빙하 때문에 위험 해진 바다에서는 선박이 줄어들었고 인근 해역에서의 항해조차 어려워졌다. 그에 따라 수백 년 전에 덴마크의 식민지가 된 그린란드가 고립되었다. 그린란 드에 정착한 유럽인들은 원주민인 이누이트로부터 혹독한 추위 속에서 식량을 구하고 생존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유럽인은 이누이트가 기독교를 믿지 않 는다는 이유로 그들은 비문명인으로 여긴 나머지, 그들과 융화되기를 거부했 다. 그 결과 문화적 편견을 극복할 수 없었던 유럽인들은 굶어 죽었고 식민지는 사라졌다.
유럽에서는 굶주린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거리를 떠돌며 음식을 구걸하거나 훔쳤다. 수천구의 시신이 길거리에서 썩어가거나 공동묘지에 묻 히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먹히기도 했다. 용케 살아남았다 해도 빈혈 같은 결핍 성 질환에 시달렸고, 단백질 부족으로 몸이 부어오르고 기력이 쇠약해져서 농 사를 짓거나 요리를 할 수도 없었다. 동물들 역시 영양실조로 고통받았다. 사람 이든 동물이든 영양실조가 대물림되어 그 자식들 또한 병약하게 태어났고 기 생충 감염이나 설사는 물론, 치명적인 질병에도 쉽게 걸렸다.
- 페스트로 인한 심각한 인구 감소는 유럽인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높은 임금을 요구했다. 하지만 빵을 비롯한 모든 상품의 공급이 부족했기 때문에 물가 역시 따라서 올랐다. 키프로스나 시칠리아 같은 설탕 생산지에서는 인구가 심각하게 줄어들어 설탕 생산도 감소했다. 유럽의 일 부 지역에서는 대혼란이 일어났는데, 땅을 소유했던 귀족들이 죽자 불법 거주자 들이 들어와서로 권리를 주장하며 싸웠고, 농노들은 도시로 달아나 십자군의 뒤 를 따랐다. 페스트는 교회의 권위마저 약화시켰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페스트가 왜 창궐하는지 설명하지도, 그것을 막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상업 활동을 금지한 교회를 무시하고 어디서나 장사를 벌이기 시작했 는데, 부자들이 생겨났고 특히 이탈리아에서 큰 부자가 많이 나왔다.
- 15세기 초 유럽의 가장 서쪽에 있는 나라가 향신료를 찾기 위한 새로운 항로 발견의 선두에 나섰다. 포르투갈의 항해 왕 엔리케 Henrique O Navegador는 이 를 위해 항해 학교를 세웠다. 4500년 전 세 가지 중요한 기술, 즉 바퀴, 쟁기, 돛 의 발명이 수메르인의 교역을 도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새로운 세 가지 기술의 발견이 유럽인의 항해를 도왔다. 중국인이 발명한 자석 나침반은 광활한 바다 에서 방향을 잡도록 도왔고, 아랍의 발명품인 아스트롤라베astrolabe는 별의 위 치를 이용한 측량을 가능하게 했으며, 새로 등장한 삼각 돛 덕분에 배는 순행 뿐 아니라 역행도 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서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의 동해안까지 다다른 최초의 유럽인은 포르투갈인이 었다.
- 중국인 역시 오랜 세월을 통해 완성된 실크로드의 대안으로써 더 짧은 노선, 즉 해상로를 찾고 있었다. 1405~1433년에 명나라는 정화和중국 명나라의 환 관겸 전략가)로 하여금 일곱 차례나 원정에 나서게 함으로써 남태평양을 포함하여 페르시아 만과 아프리카까지 탐험하였다. 122m 길이의 돛대 아홉 개와 붉은 비 단 돛을 휘날리는 3백 척의 배로 이루어진 중국 함대는 분명 대단히 인상적인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메리카까지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지만 중간에 멈췄다. 정치권력의 이양이 대함대를 되돌아가게 한 것이다. 당시 중국을 지배 하고 있던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나라가 외국과의 교역에 참여함으로써 '오염'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두 개 이상의 돛대를 단 선박의 건조를 불법으로 간주했고, 결국 장거리 항해가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상인에게는 무거운 세금 을 부과하고 농민에게는 면제를 해주어 상업을 억제하고 농업을 장려했다.
유럽의 가톨릭교회가 상업에 대한 제한을 풀 때 중국은 반대로 엄격하게 통제했다. 단기적으로는 자국을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해서였지만, 장기적으로 는 나라의 기반을 취약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자 중국의 상인 계층 중 많은 이들이 본토를 떠나 인도네시아로 이주했다. 부강하고 자부심이 강한 중국은 이후 4백 년 동안 서양과의 교역을 경시하고 세계로부터 스스로 문을 닫았다. 그러는 동안 서양은 중국을 완전히 압도할 기술의 진보를 이루어냈고 마침내 중국의 문을 두드렸다. 이들은 과거 중국인의 발명에 의해 가능해진 새로운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총이었다.
- 고추는 영양가가 높고 비타민 A와 C, 리보플라빈이 풍부하며, 특효 성분인 캡사이신은 입 안의 통증기관을 자극한다. 신기하게도 고추의 화학적 구성은 또 다른 신세계 식물인 바닐라와 비슷하다. 식물 속의 매운 성분은 도대체 왜 생기 는 것일까? 고추의 매운맛은 씨를 퍼뜨리는 데 불리한 조건, 즉 동물에게 먹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생존 수단일 것이다. 고추 씨는 토끼 같은 작은 포유류에게 먹히면 왕성한 소화력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다. 반면 새의 소화기관은 칠리 씨의 바깥쪽 보호막만 제거하기 때문에 개체가 퍼지는 데 완벽한 조건이 된다.

-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후 구세계와 신세계 사이에서는 수많은 식재료들이 오고갔다. '콜럼버스 교환'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교류는 양 대륙의 음식문화에 변화를 가져왔다. 카리브해에서는 설탕 농장이 세워졌고 삼각무역을 통해 수많은 흑인노예들이 아메리카로 건너갔다.
- '콜럼버스의 교환'이란 동반구의 구세계와 서반구의 신세계가 충돌하면서 서 로의 음식, 동식물, 질병 등이 이동한 역사적 현상을 가리킨다. 역사학자들이 '접촉의 시대'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 자연스럽게 진화해온 생물들을 수백만 년 동안 지구 이곳저곳으로 옮겨놓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겨우 5백여 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교환이 장기간에 미칠 영향에 대해 언급하기는 너무 이르다.
- 16세기에 콜럼버스를 따라 신세계에 온 스페인 정복자들은 원주민의 문화까지 점령했고 곧 자신들의 문화, 특히 음식을 새로운 스페인에 이식하기 시작 했다. 콜럼버스는 그 이듬해인 1493년 소, 말, 돼지, 염소, 양 같은 구세계의 가 축을 아메리카로 들여왔다. 양을 제외한 다른 가축들은 모두 황무지를 좋아하 여 선사시대의 상태로 돌아갔다. 돼지는 야생 멧돼지가 되었고, 양떼를 지키던 개는 자기 조상인 늑대처럼 변해 양을 잡아먹었으며, 말은 훌륭한 목초지를 따라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그리고 그 너머의 북아메리카 평원 야노스를 달렸다.
- 역사학자 알프레드 크로스비 Alfred Crosby가 강조했듯, 1600년에는 대부분의 구세계 주요 작물들이 아메리카에서 재배되었다. 식물성 식품들은 원주민 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새로 유입된 동물과 그것으로 만든 식품들 은 그들의 토착 음식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이에 따라 자연 풍광이 변하고 나아 가 생태계의 재앙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축은 경이로운 속도로 번식해 돼지 13 마리가 3년 안에 700마리로 불어날 정도였다. 원주민이 식용 작물을 재배하던 땅에 소를 방목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직접 동물을 사육하는 경우도 있었다.
구세계에서 서반구로 유입된 동식물 중 일부는 밀항을 통해 들여왔고 잡 초 씨는 밀이나 거름 또는 동물 사료에 섞여 들어왔으며 구세계의 민들레와 데 이지도 같은 방법으로 옮겨왔다. 페스트와 발진티푸스를 옮겨온 검은쥐도 마찬가지였다. 버뮤다에서는 쥐가 유발한 기근이 일어났는데, 천적이 없는 쥐는 땅속을 파고 들어가 나무에 집을 짓고 닥치는 대로 식량을 먹어치워서 주민들 을 기아로 몰아넣었다. 감기, 디프테리아, 말라리아, 홍역, 천연두, 발진티푸스, 백일해 같은 질병 역시 대서양을 건너왔다. 스페인 사람들이 멕시코에 들어온 지 10년 후 토착 인구는 거의 1,000만 명 정도가 줄었다. 100년 후에는 원주민 의 90%가 사망했으며, 2,500만 명이던 인구가 100만 명 정도로 감소하였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유럽의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다. 제러드 다이아몬 드Jared Diamond는 『총, 균, 쇠 Guns, Germs, and Steel』에서 '접촉의 시대'에 일어난 문제의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왜 신세계의 사람들은 면역력을 갖고 있지 않 았는가? 왜 그들에게는 유럽인을 거꾸로 전염시킬 자신들의 질병이 없었는가? 이에 대해 다이아몬드는 몇몇 가설을 제시한다. 그중 하나는 신세계 사람들에 겐 유럽인이 기르던 가축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 가축의 몸속에 살고 있는 수많은 기생충이 신세계로 건너가 원주민들을 괴롭힌 것이다. 비슷한 예로, 로마를 전멸시킨 천연두는 소를 통해 전해진 것이다. 다른 가설은 원주민들이 흩어져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도시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으면 인체 간 접촉에 의 해 다양한 질병에 노출되고 그러면서 면역력도 강해진다. 이유가 무엇이든 이 '접촉의 시대'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 유럽의 이주민들은 이미 소비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구세계의 식품을 신세계 에서 더 값싼 비용으로 대량 생산하는 데 관심이 많았는데, 한 가지 식품이 이 런 목적에 딱 들어맞았다. 이 식품은 세계 시장을 빠른 속도로 잠식했고, 대서 양 양안 모두에서 엄청난 부를 창출했으며, 수백만의 원주민을 노예로 만들었 다. 그리고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냈으며, 호모 사피엔스의 식습관을 완전히 바 꾸어놓았다. 그것은 바로 사카룸 오피시나룸Saccharum officinarum이라는 학명을 지닌 설탕이었다.
설탕은 초콜릿과 커피, 차가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그 수요가 증가했다. 그 후 설탕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자 이번에는 거꾸로 초콜릿, 커피, 차의 수요가 증가했는데, 이는 설탕의 수요를 더욱 늘렸다. 설탕이 점점 더 구하기 쉬운 식 품이 되자 가격이 떨어졌고, 자연히 더 많은 사람들이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중세에는 부유층의 약품이던 것이 18세기 중엽에는 가난한 사람들까지 일상적 으로 즐기는 식품이 되었다. 하지만 사탕수수를 기르고 수확하고 가공하는 일 은 극도로 고된 노동을 필요로 했으며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들이 그 고통을 떠 안았다.

- 메디치가의 카테리나가 프랑스에 온 지 100년 후 프랑스 요리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라 바렌느의 등장은 중세요리에서 벗어나 섬세한 오트 퀴진의 시작을 알렸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는 화려한 연회가 이어졌고, 커피하우스는 정치적인 토론의 장으로 이용되었다. 한편 러시아의 근대화를 꿈꾸던 표트르 대제는 새로운 러시아 요리를 만들어냈다.
- 메디치가의 카테리나가 프랑스에 온 지 100년 후 프랑스 요리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1651년에 라 바렌느La Varenne라는 요리사가 『프랑스 요리 Le Cuisinier françois』라는 책을 출간함으로써 중세 요리의 종말과 오트 퀴진 haute cuisine의 시 작을 알렸다. 그의 이름을 따서 요리 학교를 세운 앤 윌란Anne Willan은 이 책을 독창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하였으며, 이 책이 등장한 지 2년 후에 라 바렌느는 『프랑스 제과 Le Patissier françois』를 펴냈다.
『프랑스 요리는 육류용과 생선용의 두 가지 부용 bouillon (육류나 생선을 재료로 진 하게 끓인 국물)을 끓이는 방법으로 시작한다. 또 현대 소스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 는 최초의 루roux인 기름과 밀가루 농축제가 등장한다. 라 바렌느의 조리법의 특징은 섬세함이다. 일단 중세에 비해 향신료의 사용량이 크게 줄었고, 소금과 후추를 양념으로 사용하며 여기에 레몬즙을 짜 넣고 부케 가르니 bouquet garni를 곁들였으며, 엄청난 양의 계피, 메이스mace, 정향, 생강은 사라졌다. 특히 이 책 에는 육식하는 날과 육식하지 않는 날이 구별되어 있어 여전히 가톨릭교회의 영향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 요리에 송로버섯을 사용하여 중세의 체액 설이 사라졌음을 말해주었다.
- 커피를 사랑한 프랑스인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프로코페 Procope라는 이탈리아 사람이 1689년 파리에 열었다. 커피를 받아들인 거의 모든 곳에서는 두 가지 공통된 반응이 일어났 다. 첫째는 커피를 맛본 사람들의 열광이었고, 둘째는 정부의 억압이었다. 메카 에서는 커피하우스에서 단골손님들이 모여 자신을 조롱한다는 말을 들은 통치 자가 커피하우스의 문을 닫을 것을 명했으며 영국의 조지 2세도 같은 이유로 커피하우스를 폐쇄했다. 프랑스에서는 커피가 국가적인 음료였던 와인의 자리 를 뺐을까 염려하여 커피를 금지하려고 했고, 독일은 맥주 때문에 걱정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계속 커피를 마셨고 결국 금지령은 흐지부지됐다. 이탈리아에서는 예외적으로 커피를 마시는 것이 자유로웠다. 가톨릭 성직자들이 교황에게 이 무슬림의 음료를 금하라고 청원했음에도 커피는 금지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교황은 커피를 맛보더니 그것에 축복을 내렸다.
커피를 마시는 방법 역시 변했다. 9세기 이후부터 커피 빈을 갈아 가루로 만들어 이용했는데 그 전까지는 커피 빈을 동물기름과 함께 갈아 페이스트 형 태로 만들어 사용했었다. 커피를 갈아 만든 가루는 컵 밑바닥에 찌꺼기로 가라 앉아 마치 읽을 수 있는 형상처럼 보였는데, 이 때문에 점쟁이가 증가하기도 하였 다. 1710년, 치밀하고 효율적인 프랑스인들은 가루 커피를 천 자루에 넣고 그 위 에 뜨거운 물을 부어 커피를 추출하는 방법을 발명하였다. 또 프랑스인들은 우유 를 첨가해 카페오레를 만들었는데, 이것으로 커피는 공공장소에서 마시는 상류 층의 저녁 음료에서 사적인 공간에서 아침에 즐기는 고급스런 중독제로 탈바꿈 했다. 이렇게 카페라테는 일반인에게로 퍼졌으며, 노동자층의 기호품이 되었다.
- 커피는 식습관 이상의 것을 변화시켰고, 나아가 사회적·정치적 관습까지 바꾸었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알코올 없는 공공장소와 모임의 의미를 알게 되 었다. 사교적인 취미로 시작한 커피가 이후에는 정치 토론의 수단으로 변했다. 사람들이 커피하우스에 모여 정부에 대해 격론을 벌이는 풍조를 지배층이 걱 정한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실제로 커피하우스에 서 퍼진 여론이 프랑스혁명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다.
커피가 세계로 전파되는 데에는 한 프랑스 남자의 공이 컸다. 1723년 가브 리엘 마티유 드클리외 Gabriel Mathieu de Clieu는 커피가 카리브해에서 잘 자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커피나무 한 그루를 가지고 대서양을 건너는 내내 마치 아픈 아기를 달래듯 자기가 마시는 물까지 부어주었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커 피나무는 카리브해에 잘 맞았고, 오늘날 세계에서 자라고 있는 수많은 커피나 무의 역사가 바로 이 묘목에서 비롯됐다.
- 메이플 시럽(단풍당)은 미국 원주민 요리에서 제일의 음식이었고 몇몇 부족에서 는 유일한 양념이었다. 메이플 시럽은 말린 옥수수 가루로 만든 죽의 맛을 돋우 기 위해 원주민이 꺼리는 소금 대신 사용되었다. 곰의 기름과 섞어 구운 사슴 고기의 소스에 넣거나, 끓인 생선에 뿌리거나, 베리와 곁들이거나, 그냥 그대로 먹거나 해서 하루에 450g을 섭취했다. 또 이 시럽으로 달콤한 음료를 만들기도 했는데, 부족끼리 화친을 맺을 때 피우는 담배와 함께 의식에 사용되었다.
메이플 시럽은 단풍나무, 호두나무, 히코리, 네군도단풍, 버터너트, 자작나 무, 플라타너스의 수액을 끓여 설탕 결정을 얻었다. 주로 여자들이 이 일을 했 는데 유럽인이 오기 전까지는 금속 냄비가 없었기 때문에 아주 힘든 일이었다.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그릇은 부피가 3~5L에 불과했고 자작나무 껍질이나 호 리병박으로 만든 탓에 불 위에 직접 놓을 수도 없었다. 이런 용기에 액체를 끓 이기 위해서는 불에 데운 돌을 던져넣을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식은 돌을 꺼 내고 다시 데운 돌을 넣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그런 다음 무스 가죽으로 만든 370L짜리 통에 부어졌다. 유럽인이 금속 냄비와 도구를 들여오자마자 원주민 이 물물교환에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시럽을 가공하는 또 다른 방법은 밤에 얼도록 밖에 두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위쪽의 얼음을 긁어냈다. 그렇게 해서 시럽만 남을 때까지는 며칠 밤이 걸렸 다. 완성된 메이플 시럽은 선물용으로 거푸집에 부어 모양을 만들기도 했다. 곰 발바닥, 꽃, 별, 작은 들짐승 등 다양한 모양을 본 어느 유럽인은 마치 유럽의 어 느 박람회에서 제과사들이 만드는 생강빵 같다고 감상을 남기기도 했다.
17세기 유럽의 저자들은 미국 원주민이 메이플 시럽과 설탕 만드는 법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전혀 의심하지 않았지만 18세기에 들어서자 자기들이 원주민을 가르쳤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풍나무를 연구한 헬렌 니 어링 Helen Nearing과 스콧 니어링 Scott Nearing이 지적한 것처럼 메이플 시럽과 관 련된 언어는 원주민들의 생활 전통에 더 가깝다. 메이플 시럽을 가리키는 모든 단어는 '나무에서 추출한', '수액이 빨리 흐른다', '우리들의 나무' 등으로 번역된다. 한편 이들은 흰설탕을 '프랑스의 눈'이라고 불러 그 기원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어쨌든 원주민 부족의 도움으로 순례자들은 초창기 몇 년을 생존할 수 있었고 이를 자축하기 위해 축제를 열었다.
- 음식 역사학자인 존 헐 브라운John Hull Brown이 『초창기 미국 음료 Early American Beverages』에서 지적한 것처럼 식민지 시대 미국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물론 어 린이도 알코올음료를 마셨다. 영국에서부터 친숙한 맥주는 식민지에서 가장 초기의 음료였다. 주로 여자들이 맥주 양조를 맡았고, 땅에서 자라는 것은 뭐든 지 이용했다. 옥수수, 토마토, 감자, 순무, 호박, 돼지감자를 이용해 만드는 식물 성 맥주를 비롯해, 자작나무와 가문비나무, 사사프라스sassafras 나무의 껍질과 메이플 시럽으로는 나무 맥주를 만들었다. 감, 레몬, 건포도로는 과일 맥주도 만들었다. 윈터그린 winter green으로 허브 맥주를, 생강과 올스파이스 그리고 계 피로는 향신료 맥주를 만들었다. 심지어 꽃으로 만든 장미 맥주와 당밀 맥주도 있다. 그들은 맥아 245kg, 홉 5.4kg, 이스트 4.7L, 물 272L를 가지고 한 번에 두 통의 에일ale을 만들었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인처럼 일단 맥주를 만들면 남겨 두었다가 빵을 부풀리는 데 썼고, 맥주 찌꺼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19세기 독일 인이 새로운 주정 기술을 전해주기 전까지 맥주는 그 맛이 썼다.
또 살구, 복숭아와 체리 씨, 코리앤더, 카르다몸, 아니스 씨 같은 중동에서 온 향신료를 이용해 증류주를 제조했다. 생강, 까치밥나무 열매, 체리로는 와인 을 만들었는데, 스위트 와인은 마데이라, 아조레스, 카나리 군도 같은 '와인 섬' 에서 수입했다. 이후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이 옥수수나 보리 또는 오트밀 로 위스키를 주조했다. 식민지 시대 미국인은 사과를 증류해 만든 강한사이다, 복숭아로 만든 피치 peachy와 배로 만든 페리 perry를 마셨다. 식민지 개척자들 은 알코올음료에 크림, 설탕, 계란, 메이스와 육두구 등을 넣어 만든 에그노그 eggnog를 즐겨 마셨다.

- 1789년 10월 6일, 빵을 구하지 못한 성난 여자들이 베르사유로 향했다. 프랑스혁명은 사람들의 먹는 것, 먹는 곳, 먹는 법 모두를 변화시켰다. 현대적인 레스토랑이 등장했고, 미식가라는 말이 생겨났다. 최초의 미식가라는 평가를 받은 브리야 사바랭에 이어 전설적인 요리사 카렘이 등장했다. 미국에서는 보스턴 차 사건이 미국독립의 불을 당겼다.
- 18세기는 계몽운동, 즉 합리주의의 시대이다. 중세가 미신이 팽배하고 무지한 '암흑의 시대' 였다면, 18세기는 과학이 지배하는 합리적인 시대였다. 또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17세기 과학혁명의 산물이 생활에 이용되었다. 계몽운동은 음식 문화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 새로운 음식을 누벨퀴진 nouvelle cuisine이라 한다. 피에로 캄포레시Piero Camporesi가 『이국적인 음료Exotic Brew』에서 지적했듯이, 계몽운동은 중세 음식 문화에서 탈출을 가능하게 했다. 부담스러운 육류 요리가 고급 식탁에서 사라지면서 쇠고기 소비도 크게 감소했다. 중세의 마지막 유물이라 할 수 있는 공작 요리도 마침내 없어졌고, 비둘기, 메추리, 개똥지빠귀 같은 야생 조류로 만든 요리가 등장했다. 생굴이나 송로버섯처럼 최음 효과가 있다고 여겨지는 음식이 유행했고, 마늘이나 양 파, 양배추, 치즈처럼 성욕을 저해한다고 생각했던 재료들이 고급 요리에 사 용되었다. 식사 전 감사 기도와 손을 닦는 의식도 사라졌다. 체이핑 디시chafing dish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은 상자 위에 접시를 올려놓아 음식의 온도를 유지하는 접시 세트)가 사용되면 서 시중드는 하인이 내내 방에 머물 필요도 없어졌다. 대신 사악한 음식, 즉식 욕이 전혀 없을 때에도 먹고야 말게 하는 그런 먹을거리들이 넘쳐났다. 매혹적 인 와인 덕에 졸음이 오다가도 마지막에 커피가 제공되어 다시 정신을 차리게 했고, 그렇게 밤은 계속되었다.

- 19세기 중반 아일랜드에 퍼진 감자기근은 감자만을 주식으로 하여 살아온 약 100만 명의 아일랜드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살아남은 아일랜드인들은 대거 미국으로 이주했다. 한편 통일된 이탈리아에서는 토마토소스 스파게티나 마르게리타 피자와 같은 전형적인 이탈리아 요리가 등장했고, 프랑스에서는 에스코피에 같은 유명 요리사가 프랑스 요리를 더욱 발전시켰다.
- 역사학자인 앤더슨E. N. Anderson은 『중국의 음식The Food of China』에서 “광둥 식 요리는 중국에서 그리고 세계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요리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중국 전역에서 조달한 가장 신선한 재료, 초를 다투는 타 이밍, 다양한 기법, 수백 가지에 이르는 훌륭한 요리들, 다른 문화로부터 새로 운 음식과 기법을 빠르게 흡수하는 능력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혁신적인 음 식 문화를 가능케 했다. 새콤달콤한 돼지고기, 찹 수웨이chop suey, 차우멘 chow mein, 기름진 에그롤, 볶음밥 등 1950~1960년대 미국에서 유명해진 음식들은 사실 광둥식 요리가 아니다. 이것들은 미국인의 입맛에 맞게 단맛을 가미하고 대중화한 요리에 불과하다. 광둥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디저트를 거의 먹 지 않고, 음식에도 설탕을 많이 쓰지 않는다. 진짜 광둥식 요리에는 칠리 소스, 매운맛 겨자, 식초, 참기름, 간장과 굴 소스 등이 아주 적게 들어간다. 대신에 굴, 해삼, 오징어, 해파리, 민어 등 지역 특산물인 생선과 해산물을 찌거나 기름 에 볶거나 튀겨서 먹는다. 옥수수 전분이나 캔에 든 파인애플 주스, 화학조미료 에 찌든 음식이 아닌 것이다. 광둥인들은 이런 조리법과 그렇게 만든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야만인처럼 여겼다.
- 광둥 요리의 섬세함은 '작은 먹을거리'라는 뜻의 딤섬 dim sum에 잘 나타난다. 딤섬은 한입 크 기의 덤블링으로, 반죽 속에 양념을 한 고기나 해 산물 재료를 채우고 찐 요리이다. 연꽃잎이나 대 나무 잎으로 싸서 찌기도 하는데, 멕시코의 옥수 수 껍질로 타말레 tamales를 싼 요리나 그밖에 문 화권에서의 바나나 잎을 사용한 것도 비슷한 요 리이다.
- 우리나라 식생활문화의 전통은 조선시대를 거치며 한층 정비되었다. 16세기 말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고추, 호박, 감자, 고구마 등의 남방식품이 유입되고 재배에 성공함으로써 음식문화가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고추는 전래된 직후 크게 보급되지는 않았으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김치에 사용되면서 점차 우리의 식문화를 지배하게 되었다. 또 온돌의 보급으로 일상의 상차림이 좌식으로 정착되었으며, 분청사기, 청화백자, 옹기, 유기 등의 식기가 보편화되면서 상차림의 격조와 편이성이 한층 신장되었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은 음식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불교의 상 징인 차문화가 쇠퇴하고 육식복원에 따른 견육식문화가 다시 생겨 나기도 하였다. 또 의약연구가 발달하면서 약식동원藥同源을 근간으로 한 식사관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며, 가부장권 대가족 생활을 바탕으 로 각종 의례음식의 규범이 마련되었다.
조선 말 개화기에는 점차 외국의 식생활문화가 전래되었으며, 1902년 서울 정동에 세워진 손탁Sontag Hotel에서 양식과 커피를 팔기 시작하면서 상 류사회를 중심으로 서양요리가 보급되었다. 또 1890년 고종의 수랏간 내 인으로 일했던 안순환이 세종로에 명월관이라는 한국음식 전문요정을 개점하면서 일반인들도 궁중요리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 식이장애: 거식증과 폭식증
빅토리아 시대 영국과 미국에서의 식욕은 성욕과 함께 금기의 대상이었다. 커피, 차, 초콜릿, 겨자, 식초, 피클, 향신료, 견과류, 건포도, 빵, 패스트리, 캔디, 알 코올 등은 여성에게 건강하지 않은 식욕을 일으키는 음식으로 여겨졌다. 또 육 류는 정신병이나 색정증 또는 둘 모두를 일으키는 가장 나쁜 음식으로 여겼기 때문에 육류와 감자를 먹는 여성을 마치 짐승처럼 보았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 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음식을 먹었다. 여성과 함께 남성의 성적 충동도 사회적으로 통제를 받았는데, 남성들의 불건전한 생각을 자극하지 않도록 피 아노 다리까지도 가렸다. 여성은 무릎까지 버튼이 달린 신발을 신고, 그 위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와 페티코트를 입고, 심지어 불투명한 스타킹까지 신 었기 때문에 각선미를 과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러한 성적 회피 경향은 음 식과 관련된 단어에도 반영되었다. 고상한 사람들은 '가슴'이나 '다리' 같은 단 어를 언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대신해서 흰 살코기', '붉은 살코기' 같은 말로 돌려 표현했다.
여성의 식욕과 성욕을 억제하는 세상에 새로운 매너와 음식이 등장했고 미국 중상류층의 10대 소녀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질병이 나타났다. 음식과 부 가 풍족한 시대임에도 소녀들은 건강을 해치거나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될 때까지도 도통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을 한 영국 의사가 1868년에 처음으로 거식증이라고 명명하였다. 그 후 거식증은 1960년대가 되자 급격히 증가했다.
식이장애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거식증은 식욕 거부를 포함한다. 폭식 증은 폭식을 한 후 억지로 설사를 유도하거나, 관장을 하거나, 구토에 의해 먹 은 것을 다시 몸 밖으로 배출하는데, 처음에는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강제로 토해내야 하지만 나중에는 뜻대로 구토를 유도할 수도 있다. 두 형태의 식이장 애에서 모두, 체중이 정상 최저치보다 15% 이상 감소하며, 월경이 3회 이상 중 단되고, 외모에 집착하는 증세를 보인다. 지나친 체중 미달임에도 소녀들은 거 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뚱뚱하다고 생각한다.
- 건강과 자족을 인생에서 최고의 가치로 끌어올린 사람은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Henry David Thoreau이다. 1845년 7월 4일부터 1847년 9월 6일 까지 그는 인간에게 육식과 문명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 에 나섰다. 소로우는 매사추세츠에 있는 월든 호수 근처의 숲 속에서 평화롭게 살았고, 인간의 삶과 산업혁명의 의미에 대한 통찰을 글로 썼으며, 자기가 먹은 음식과 요리법, 그 비용 등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남겼다. 소로우는 대부분의 미국인과는 다르게 채식주의를 신봉했다.
소로우는 자신이 구입하고 고르고 재배한 식품만 먹고 살았다. 그는 쌀, 엿 당, 호밀, 옥수수, 밀가루, 약간의 염장 돈육, 돼지기름, 설탕 등을 샀다. 그리고 포도, 야생 사과, 밤, 땅콩 등 제철 야생 과일과 견과류로 보충했다. 그는 콩과 감자, 완두콩 등을 재배했고 먹고 남는 것은 내다 팔았다. 소로우의 주당 식품 구입비는 27센트에 불과했다. 그는 육식과 문명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함을 증명 했다.

- 20세기 초 유럽, 에스코피에와 리츠의 만남으로 레스토랑과 호텔업에서 큰 변화가 일 무렵 미국에서는 유럽에서 이주한 이민자들에 의해 다인종 · 다문화의 장이 열리면서 이들의 식문화가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후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은 전 세계 식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때로는 식량이 무기를 대신해 전쟁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 인류는 끊임없이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 식문화를 변화시키고자 하지만 세상만사가 그렇듯 식문화에서도 모든 옛것이 다시 새것이 된다. 오늘날 요리를 하는 모든 사람들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식문화에 큰 공헌을 한 사람들 그리고 사건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고 또 이에 공감을 느낀다. 즉, 우리 모두는 음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과 그 소중한 음식을 함께 나누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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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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