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저 고대인의 계절 감각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 사용되던 한자 에 주목해보자. 원래 '일'은 태양, '월月', '석'은 달, '조朝’는 달빛 아래에서 잔디 사이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양, '년年'은 곡물이 열리 는 모양을 나타내는 상형 문자다. 또 '춘'은 초목이 싹트는 모양, '추秋'는 귀뚜라미 같은 곤충 모양을 나타내는 상형 문자라는 게 일 반적인 해석이다. 결국 먼 옛날에 살았던 사람들은 천문, 곡물, 생물의 모양을 보고 시간과 계절을 감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달력은 중요했다. 각 시대의 군주들도 천체 관측을 통해 달력 만드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여기에는 백성들의 삶 을 지킨다는 명목도 있었지만, 하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해 제사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였다. 이렇게 천문 관측을 통해 달력을 만드는 일을 관상수시觀象授時라고 부른다. 그런 가운데 1년을 사계절로 나누는 인식도 생겨났다. ‘하夏’와 '동'이라는 글자는 은나라 때(BC 11세기에 멸망)는 존재하지 않았 다. 그럼에도 동지冬至, 춘분春分, 하지夏至, 추분秋分에 관한 인식과 일출, 일몰을 관측하는 시스템은 은나라 이전부터 이미 정비되고 있었다. 이처럼 고대 중국인들도 대략적으로나마 계절과 달력을 파악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 아직 해가 뜰 시간은 되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들어 있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평단 (아침 6시경)이 되면 조정에서는 조회가 시작된다. 그 때문에 회의가 있는 날에는 이미 궁성 앞에 관리들이 모여 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실제로 전한의 무제는 평단 에 조서를 내리고 관리들은 '식시 (아침 9시경)'까지 그에 대한 자신 들의 의견을 올렸다.23 우리들 미래인에 관한 일이 황제의 귀에 들 어간 것도 어느 날 이 시간대에 일어난 일이다.
황제가 참석하는 회의는 매일 열리지는 않으며, 황제가 5일에 하 루 정도 정무를 돌본다면 성실한 편이다.  매월 1일과 15일에는 정 책을 결정하는 회의인 공경의公卿議가 열리는데, 이때는 일부 정부 고관뿐만 아니라 황제도 이른 아침부터 출석해야 한다. 3세기 말 에 쓰인 시는 '새벽부터 문서를 정리하고, 밤이 되어도 잠을 잘 여가가 없다'고 노래했는데, 한창 바쁜 시기에는 회의가 없는 날에도 관리들은 이미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조정의 관계자가 이렇게 아침 일찍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밤에 일찍 잠들기 때문 이다.
- 치의학적으로 생각해보면, 충치를 만드는 원인 중 하나는 전분 이다. 현대 일본인은 쌀알을 조리해서 먹는 입식粒食과 면이나 떡 처럼 밀로 만든 분식粉食 등을 통해 끈적거리는 전분을 섭취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충치의 한 원인이 된다. 하지만 당나라 이전 시대의 식생활은 그렇지 않다. 한나라 때 사람들은 대개 점성이 별 로 없는 좁쌀을 입식으로 먹었으며 밀을 재료로 하는 분식도 아직 많지 않았다. 이런 식생활이 당시에 충치를 억제했던 한 원인일지 도 모르겠다.
- 다음으로 머리카락을 정돈한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남녀 모두 머 리를 길러서 묶었다. 머리를 묶는 모양은 다양하지만, 머리카락 끝 을 숨기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 습관의 기원은 BC 1000년보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찍이 은나라 사 람들은 머리카락 끝으로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믿었기에 머리카락 끝을 숨기지 않으면 죽는다고 여겼다. 춘추 시대가 되자 사람들은 신분에 맞게 관을 써서 자신의 신분 을 드러내게 되었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상하관계가 눈에 보이게 드러나고 사회질서가 안정되었다. 공자는 이런 신분질서의 안 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관례는 남자의 통과의례 중 하나로, 성인과 마찬가지로 관을 쓰고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다. 결국 지식인 과 관리들은 의무적으로 관을 쓰게 되었다. 그런데 군주 앞에서 절 을 할 때 상투가 없으면 관을 고정할 수 없어서 관이 툭 떨어지고 만다. 그래서 상투가 점점 중요해졌다. 한편 주변 여러 민족은 대개 피발被을 하고 있었다. 피발이란 풀어 헤친 머리로, 지금의 일본 인이 하고 있는 일반적인 헤어스타일(똥 머리는 제외)이 바로 피발 이다. 남중국은 특히 피발이 많아서 중원과는 달랐다.
머리카락을 묶을 때 사용하는 빗은 주로 대나무나 대모玳瑁(바 다거북 등껍데기)로 만들며, 촘촘한 빗인 비와 듬성한 빗인 소梳가 있었다. 머리카락을 정리해서 얇은 검정색 비단으로 감싼 다음, 비 녀로 둘둘 감아서 상투를 튼다. 상투 아래쪽을 정련한 비단絹으로 묶고, 남는 끈 부분은 뒤로 늘어뜨린다. 비녀는 남녀 공용인 비 녀와 남성 전용인 비녀가 있다. 상투 모양은 다양하다.(도판 2-3) 또 한 문관은 붓을 비녀 대신 쓰기도 하고 귀에 끼우고 있기도 했으며, 보라색 주머니에 넣어두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관리에게 머리와 관은 아주 중요했다.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야 했기에 이발을 자주 하지 않았으며 전문적인 미용실도 없 었다. 그 대신 친구끼리 이발을 해주었다. 노년이 되면서 머리가 빠 진남성은 체(가발)를 썼다. 한나라 때의 벽화 중에는 관리들끼리 교제가 모티프인 그림들이 보이는데, 거기에는 대머리인데도 가 발을 쓰지 않고 버티는 관리들이 자주 나오며 그림에서 그들의 괴 로움을 엿볼 수 있다.(도판 2-4) 현대 남성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탈모는 큰 고민이었다. 전국 시대에는 '머리가 빠질까 봐 머리를 감 지 않으면 머리가 더 많이 빠진다'는 속담이 있었을 정도다.
- 그 밖에도 노인들은 보통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 당시 예법에서 50세 이상은 집 안에서, 60세 이상은 향리에서, 70세 이상은 도都에 서, 80세 이상은 조정 내에서도 지팡이를 들고 다닐 수 있도록 허 용해주었다. 또 50세에는 노역을, 60세에는 병역을 면제해주었고, 70세인데도 조정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잔업 없이 정시에 퇴근 할 수 있게 하는 등 노인들에게는 여러 가지 특전이 주어졌다." 70 세가 넘으면 정부에서 표창을 받기도 했는데, 그때는 구장鳩杖이라 고 하는 특별한 지팡이를 하사받았다. 구장은 손잡이 부분에 비둘 기장식이 붙어 있는 지팡이를 말한다.(도판 3-2) 왜 하필 비둘기인 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당시 말단 관리들도 잘 몰랐던 듯하다.
- 한 번 구장을 하사받은 노인은 경력이 있는 관리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으며, 관공서 안에서도 천천히 걸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노인을 폭행한 사람은 국가반역죄로 처벌받는 등 여러 가지 특전 을 받을 수 있었다.
전한 후기의 인구 통계를 살펴보면, 산둥반도 부근의 동해군東海 에는 남자가 70만 6064명, 여자가 68만 8132명이었는데, 그중에 서 6세 이하는 26만 2588명, 80세 이상은 3만 3871명, 90세 이상은 1만 670명, 70세 이상에서 구장을 받은 사람은 2823명이었다. 즉 노인 중에서도 구장을 하사받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 도시에 사는 아가씨들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은 화장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시에는 조장朝粧이라고 해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화 장하는 게 보통이었다. 전국 시대에는 '모장毛이나 서시西라는 미녀를 찬양해봤자 자신이 미녀가 되는 건 아니지만, 립밤, 페이스 파우더, 아이브로펜슬이 있으면 2배는 예뻐질 수 있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화장은 여성의 미모를 향상시키는 지름길이었다. 
그 방법을 소개하면, 한나라 때는 눈물을 흘린 듯한 화장, 근심 있어 보이는 눈썹, 옆으로 기울어진 헤어스타일을 하고 살랑살랑 교태를 부리는 절요보折腰歩로 걸으며 치통으로 괴로운 듯한 표정 의 미소까지 지으면 어떤 남자도 단번에 무너졌다. 55 재미있게도 일부러 눈썹을 찌푸리는 여성도 있었다. 전설적인 미녀 서시가 아 픈 가슴을 부여잡고 눈썹을 찡그린 적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시골의 어떤 추녀가 그걸 따라했더니 너무나 추한 모습에 부유한 사람은 문을 닫고 가난한 사람은 보자마자 줄행랑을 놓았다는 풍문도 있다.' 이 이야기에서 '찡그린 얼굴을 따라 한다'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교태도 아무나 부릴 수 있는 게 아니다.
- 다음으로 화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눈썹은 누에더듬이를 닮은 모습인 아미峨眉를 선호한다. 털을 뽑아서 눈썹을 가지런하게 정리하고 아이브로펜슬에 해당하는 대로 눈썹을 그린다. '남도南都의 석대'라는 브랜드 제품이 유명하다. 눈썹모양에도 유행이 있어서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마의 절반을 가리는 눈썹을 그리는 게 붐이었던 시대도 있다. 물론 모두가 같은 화 장을 했다고 할 수는 없다.
페이스파우더는 납, 수은, 쌀가루를 이용해 만들었는데, 특히 납으로 만든 파우더는 호분胡粉이라고 불렸다." 호분을 바른다고 해도 가부키 배우처럼 새하얗게 되기보다는 얼룩 없이 투명한 느낌이 드는 흰색으로 마무리되었던 것 같다. "분을 바른 다음에는 즉 시 실크 퍼프를 사용해 닦아두자. 화장 때문에 피부가 거칠어지거 나 여드름을 터트렸다가는 도리어 악화될 수도 있기 때문에 옛날 에도 이런 부분에는 신경을 많이 썼다. 
화장품 상자인 염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내 천으로 문질러 얼룩을 닦아낸 다음,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도판 3-6) 일부러 보조개를 붙이는 화장도 있다.  화장할 때 남편이 도와주기도 했는데 부임지에서 혼자 근무하던 남편이 아내에게 '내가 돌아가면 눈썹 을 그려주겠소'라는 시가를 보낸 일도 있다. 하지만 애정 표현도 너 무 지나치면 주변 사람들이 뒤에서 험담을 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옻칠한 화장품 상자에는 향료인 산초를 가득 담고 그 안에 화장 도구를 넣어두었기 때문에 어느 화장 도구에서나 좋은 향기가 난다.
- 식사에는 탄수화물이나 단백질이 빠질 수 없다. 탄수화물은 생명 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원으로, 과일이나 꿀 혹은 곡물 속에 있는 전분을 통해 섭취한다. 전분은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다는 점 에서 귀중하다. 한편 단백질은 보존하기 어려운데, 대두는 예외적 으로 보존하기 매우 쉬운 식품이다. 한나라 때는 북중국에서 대두를 즐겨 먹었다
하지만 다른 고단백 식재료는 보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건조, 탈수, 발효, 가열, 냉장, 냉동, 훈증, 밀폐 등을 통해 신선도를 유지 하는 기술이 꼭 필요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탄수화물과 단백질 이외에도 다양한 영양분을 섭취해야 한다. 그래서 부식 즉, 반찬이 필요하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대표적인 반찬은 채소다. 저렴한 채소로는 파, 부추 (야생 파나 달래를 포함할 수도 있음), 숙주가 있다. 32 한나라 때 시가에서 '출세했다고 해서 조강지처를 버리지 마라. 생선과 고 기가 싸다고 파와 부추를 버리지 마라. 삼베가 싸졌다고 골풀과 볏 짚을 버리지 마라'라고 했듯이, 빈민들 대부분은 골풀이나 볏짚을 엮어 몸을 가리고 파와 부추를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추는 계란 과 함께 볶아서 먹는 게 일반적이었다.
- 부추, 파, 숙주 외에도 다양한 채소를 먹었는데, 예를 들어 장안 에서는 진나라의 귀족인 소평이 심기 시작한 동릉과東陵瓜, 즉 오이가 유명했다.  오이는 음력 8월경에 껍질을 벗기고 절임으로 만들어서 먹는다. 그 밖에도 명아주 잎이나 콩잎 등이 저렴한 식 재료로 알려져 있다.  또 기근이 들었을 때는 뽕나무 열매, 부들, 돌콩, 달팽이, 우렁이 등도 먹었다.
이처럼 몇몇 채소가 반찬으로 인기를 얻은 반면, 평소에 쇠고기 를 반찬으로 먹는 서민은 거의 없었다. 이는 쇠고기가 입에 맞지 않 아서 그런 게 아니라 소가 귀한 데다 농사를 짓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전국·진한 시대에는 농사를 지을 때 부리는 소를 죽이 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도 있었으며, 함부로 쇠고기를 먹은 백성은 천벌을 받는다고도 했다. 그러므로 쇠고기는 제삿날이나 되어야 맛볼 수 있을 정도였고, 대신 개고기를 먹으며 참는 수밖에 없었다. 양고기 꼬치도 현대 중국에서는 싸지만 한나라 때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음식이었다. 하급 관리조차 매일 찐 쌀과 채소를 먹었고 공무 출장 중에도 역사驛舍에서 곡물, 조미료, 부추나 파를 넣고 끓 인국을 먹는 게 고작이었다.  어쨌든 고기는 상당히 비쌌던 것으 로 보인다.
바다에 가까운 지역이나 하천 유역에서는 빈부에 상관없이 쉽 게 생선을 먹을 수 있었고, 활어회가 나오는 곳도 있었다.  내륙 지방에서도 생선을 좋아했는데, 예를 들면 전국 시대 노나라의 장 관이었던 공의휴公儀休가 생선을 좋아하기로 유명했다. 그러한 요 구에 부응하기 위해 물고기를 양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생선은 특정 지역에 한정된 식재료였다. 여기서는 가장 대중적인 채소를 먹는 걸로 하자.
- 채소의 조리 방법으로는 우선 수프(국)를 들 수 있다. 수프는 전 형적인 가정 요리로, 건더기가 많아서 프랑스 요리인 포토푀pot- au-feu와 비슷하며 서민들도 집에서 먹었던 듯하다. 어른이 되고 나 서 어머니가 만들어준 수프의 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니 현대 일본인에게는 된장국에 해당하는 음식이다. 다른 레시피도 여러 가지 알려져 있었지만, 청동제 조리 기구를 사용하던 상 류계급과는 달리 서민은 토기나 와기瓦器로 조리하기 때문에 기름 과 화력이 필요한 볶음 요리나 튀김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민의 조리 방법은 굉장히 제한적이었다.
- 상류계급의 부식
서민 요리와는 대조적으로 상류계급들은 소양·돼지·말·사슴·개. 토끼 등의 가축, 닭·꿩·오리·메추리·참새·기러기·백조·학 등의 조 류, 잉어·붕어·쏘가리 등의 생선을 먹었다. 특히 송아지, 새끼 양, 어린 새처럼 부드러운 고기를 선호했으며, 봄에는 번식기에 있는 거위를, 가을에는 어린 닭을, 겨울에는 온실에서 기른 아욱과 부 추를 먹는 등 계절마다 호화롭고 현란하기 그지없는 요리를 먹었다.  전국 시대의 왕 중에는 곰 발바닥이나 닭발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잉어회, 알배기새우 수프, 구운 자라 같은 메뉴도 있다.
- 부자들 중에는 식재료가 어떻게 길러졌는지부터 깐깐하게 신경 쓰는 미식가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사람의 모유로 키운 돼지를 먹 는 미식가가 있어서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비난을 받았다.47 현대 에도 이베리코 돼지에게 도토리를 충분히 먹여서 맛있는 하몽을 만드는 방법이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사료를 통해 식재료의 맛을 좋게 만든다는 점에서 당시의 발상 자체는 지금과 비슷한 점이 있 다. 그렇게 하면 맛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필자도 이베리코 돼지로 만든 하몽을 굉장히 좋아한다.
하지만 너무 호화로운 식사를 하면 서민들이 시기하므로 정치 인이라도 검소한 식사를 하는 게 바람직했다. 또 좋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 비만, 통풍, 당뇨병에 걸릴 수 있는데, 그때도 이미 그 런 식단의 위험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있었기에 독한 술이나 기름진 고기는 건강에 좋지 않다고 여겼다.
상류계급 사람들은 육류도 마음껏 먹었다. 조리법으로는 양념 을 한 육포인 오, 고기가 들어간 수프인 갱, 고기를 넣은 채소 수프인 탁濯, 육회·고기를 불에 구운 자, 조림 요리인 유濡 등이 있다. 수프는 누룩·소금·술 등을 기본으로 해서 어떤 재료를 추가 하느냐에 따라 메뉴가 달라지는데 잘게 자른 육포를 넣은 해갱醢 羹, 쌀가루와 고기를 넣은 백갱羹, 미나리와 고기를 넣은 건갱 羹, 순무와 고기를 넣은 봉갱羹, 씀바귀와 고기를 넣은 고갱苦羹, 이렇게 5개가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곡물과 고기를 함께 조리하 는 요리도 있었다. 예를 들면 삼慘은 소·양·돼지 고기를 작게 자른 다음 찹쌀과 고기를 2:1의 비율로 섞어서 구운 요리다.
- 고기로 만든 꼬치구이도 부자들이 자주 먹던 음식으로, 요리사 가 고기를 나무 꼬치에 꿴 다음 뽕나무 숯과 같은 고급 숯으로 구워 서 만든다.  고기 부위도 세밀하게 나누었는데, 마왕퇴1호한묘馬 王堆一號漢墓에서 나온 부장품 목록인 유책遺冊을 보면, 지금과 마 찬가지로 고기를 등심, 삼겹살, 부채살, 간, 위, 천엽, 혀, 염통 등으 로 따로따로 나누어 부장副한 점이 흥미롭다.
상류계급이 사용하는 조미료도 아주 다양하다. 사탕수수즙인 탁장은 중요한 조미료였고 후한 시대에는 음료로도 먹었다. 사 탕수수는 고대에도 씹어 먹는 게 일반적이었으며, 탁장은 특히나 손이 많이 가는 조미료나 음료로 여겨졌다. 당시에는 아직 설탕 이 없었기 때문에 사탕수수는 중요한 감미료였다. 또 곰 발바닥을 먹을 때는 작약 뿌리를 섞은 장을 사용했다.
- 장은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조미료 중 하나로 콩이나 고기, 생선에 다 소금, 누룩, 향신료를 더해서 만들며 거기에 젓갈을 섞어서 사 용할 때도 많다. 젓갈은 말린 고기 다진 것과 소금, 좁쌀로 만든 누 룩, 술을 섞어서 항아리에 넣고 밀폐한 다음, 백일 동안 숙성시켜서 만든다. 콩에 소금을 섞은 후에 어두운 곳에서 차분히 숙성시킨 메 주도 인기가 많다.  향신료로는 생강, 산초, 계피, 양하荷, 염교, 목련이 있고 전한 중기 이후에는 서역에서 마늘도 전해져 원래 중 국에 있었던 마늘과 함께 고기 요리에 사용되었다.  일반 가정에 서 먹을 수 있었던 양조棗는 대추의 일종으로, 입안을 깔끔하게 하는 데 좋다. 고추와 두부는 아직 없었기 때문에 마파두부는 당시 에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 고대 요리는 지금의 중국 요리와는 전혀 다르다고 보면 된다. 어쨌든 당시 사람들도 알고 있듯이 강렬한 양 념, 강한 향신료, 진한 술은 몸에 나쁘니까 여기서는 담백한 요리 를 먹기로 하자.
- 상류계급의 식탁에는 또 다른 진미가 있다. 후한 말 승상이었던 조조는 북방 지역에서 생산되는 요구르트(낙酪)를 입수해 신하들에게 나눠줬고, 동진 시대에는 승상인 왕도導가 방문객에게 대접하기도 했다. 그 후에 낙은 남쪽에도 전해졌다. 북위 시대 의「제민요술齊民要術』이라는 책에는 건조한 치즈(乾酪)와 버터 오 일등의 유제품을 만드는 방법이 적혀 있다. 유제품은 목축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식품인데 그 무렵에 북방 유목민 이 화북으로 몰려들면서 그 영향으로 북방의 식문화도 함께 유입 된 것으로 보인다. 장강 유역에서 나는 식해, 마름 열매, 창포무침도 화북에 진미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59 다만 이런 진미는 어디까지나 상류계급의 입에나 들어갈 뿐이었고, 서민과는 관계가 없는 음식이었다.
- 키도 작지 않은 편이 좋다. 진한 시대에는 백성에게 노역을 시 킬 때 키와 나이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국가가 백성들의 키를 기 록하고 있었다. 평균 신장을 명기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사서史書를 읽어보면 성인 남성은 대체로 7척(약 161cm)이라고 적혀 있다. 또한 문헌에는 특별히 키가 컸던 사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 는데, 8척(약 184cm) 이상인 사람은 대체로 “그 모습이 굉장히 크다 姿貌甚偉.", "용모가 아주 남다르다容貌絶異.”, “용모가 긍엄하다容貌 嚴"고 할 정도의 거구로 여겨졌다. 『삼국지』를 예로 들자면, 유비 의 키가 7척 5촌이라고 적은 것 외에는, 대개 8척 이상의 사람만 특별히 키가 크다며 언급하고 있다. '키가 8척이라도 병에 걸리지 않신장은 몸이 건강하고 튼튼하다는 증거였다.
한편 6척 (138cm) 미만은 노역에서도 면제받고, 신체에 장애가 있 는 사람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아무리 고위관직에 오르고 영화를 누리려고 해도, 전국 시대의 맹상군孟嘗君처럼 키가 작으면 바보 취급을 당했다. 예를 들어 풍근馮勤의 일가친척은 모두 키가 컸는 데 오직 풍근만 키가 7척이 되지 않았다. 자식이 자기를 닮아 키가 작을까 봐 걱정이 된 풍근은 키가 큰 여성을 부인으로 맞았다. 
-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가문, 자금, 인맥, 운이 없으면 애초에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 라 시험에서 합격하기란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했다.
현대 사회에서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면 좋은 교육을 받는 편 이 좋고, 경제 자본, 인적 자본, 사회 자본 등의 주변 환경도 중요하 지 않는가. 다시 말하면 부모의 격차가 아이의 격차로 이어지기 때 문에 아이가 장래에 성공할지 여부가 아이의 능력만으로 결정된 다고 할 수는 없다. 진한 시대에는 그런 경향이 지금보다 더 심했던 것으로 보이며, 위진 시대가 되면 그런 경향성은 더욱 심화된다.' 이런 상황에서 특급 관리로의 승진은 어떤 의미에서는 로또 당첨 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역사책에는 '어렸을 때 가난했다'는 인물이 여기저기에서 나오는데, 나중에 고위 관료가 된 경우도 있지만 사 실 그 내용을 무턱대고 믿어서는 안 된다. 역사책에 나오는 사례는 어디까지나 성공 스토리로 윤색된 내용이며, 중국 역사책에서는 이런 윤색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특급 관리는 부잣집 자제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 므로 그들은 개인적인 이해득실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았고, 정치 적으로 언쟁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관리의 세 계는 이권을 다투는 아수라장이며, 현실 정치에 민의가 얼마나 반 영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백성은 관리들이 가진 엘리트로서의 긍 지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 요컨대 당시에는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 '불완전한 정보'에 둘러 싸여 있었고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는 '정보의 비대칭성'이 가로 놓여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판매자가 구매자의 무지를 이용해 조 악한 물건을 질 좋은 상품으로 속여서 판매할 위험성이 있다. 구매자도 이런 점을 미리 경계해서 모든 상품의 품질을 의심하고 무조 건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려고 한다. 그 결과, 질 좋은 상품은 제값 에 팔리지 않고 전반적인 상품의 품질이 떨어질 수 있다. 36 그러면 고대 중국인들이 언제나 그런 의심 귀신에 사로잡혀 있었는가 하 면 사실 그렇지도 않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시제와 고 객 관계일 듯하다.
이미 말했듯이 당시 대부분의 상거래는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 인 시장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만큼 상품 정보의 비대칭성을 줄일 수 있다. 지금의 일본에서는 일용잡화를 판매하는 가게가 시내 여 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보니 정말 싸고 좋은 물건을 사고 싶다면 시 내를 돌아다니며 가게들을 둘러봐야 하고 어느 가게에서 세일을 하는지도 알아봐야 한다.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상점들이 시장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느 가게가 가장 저렴한지는 의외로 알아내기 쉬우며 가격 경쟁도 예상보다 치열하다.
또 시장에서는 종종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 오래된 고객 관계 가 구축되어 있었다. 가령 유방劉邦은 젊었을 때 두 군데의 선술집 을 들락거리며 일 년 내내 외상으로 술을 마셨다. 이런 외상 매입을 세貰라고 부른다. 세는 전세, 월세라고 할 때의 그 세로, 무언가를 빌려 쓰고 내는 대가를 말한다. 이때 판매자는 구매자를 속이지 않 으며 상품 가격도 요동치듯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외상값 을 받지도 못하고 고객도 잃고 만다. 이런 고객 관계 역시 상품 가 격을 안정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참고로 집, 가축, 노예 등의 큰 거래에서는 한 번에 수천 전이 넘는 큰돈이 움직이기 때문에 실랑이를 피하기 위해 중개인인 쾌 가 활약한다. 중개인은 백성들 중에서 선정되는데, 상거래가 공정 하고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며 거래가 성사되면 수수료를 받 는다. 대개는 현지의 유지 중에서 선정된다. 어쨌든 참고로 한나 라 때 물가의 일부를 정리해두었다.(표 7-1) 표를 보면 곡물은 저렴 할 때 20l에 100전 정도, 말 한 마리는 5000전 정도, 소 한 마리는 3000전 정도였다. 노예는 1만 5000전 전후로 살 수 있었다고 한다.
- 화전민은 봄에 삼림을 베어내고 건조시킨 뒤에 불을 놓아 태우고, 그곳에 볍씨를 뿌린다. 이렇게 땅에 불을 지르면 몇 가지 이점 이 있다. 첫째, 초목을 태워서 나오는 재에는 미네랄이 많이 들어 있다. 둘째, 토양에 포함되는 염류도 열을 받으면 곡물에 잘 흡수된 다. 셋째, 땅에 불을 지르면 잡초·해충·병원균 등의 미생물을 제거 할 수 있다. 넷째, 흙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흙 속에 잠자고 있던 식물이 싹을 틔운다. 다섯째, 숲에 동물이 너무 많이 늘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전에서는 첫해에는 잡초가 거의 나지 않고 해충도 적고 수확량도 많다. 하지만 3년이 지나면 다시 잡초가 늘 어나기 시작하고 땅속 영양이 부족해지므로 별도의 화전 후보지 두 곳을 선정한다. 원래의 밭은 휴경지, 휴한지로 만들어서 지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불을 지른다. 
불로 인해서 손실되는 양분도 있어서 이를 보충해줘야 하기 때 문에 휴경 기간이 너무 짧으면 좋지 않다. 현대에 화전을 일굴 때 사용하는 도구는 불에 탄 나무를 베는 칼과 씨를 뿌릴 구멍을 내는 막대기 정도로 아주 단순하다. 따라서 고대의 화전민들도 간단한 도구들을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 농촌의 평균 수확량은 어땠을까?
이상을 바탕으로 농촌의 평균 수확량을 살펴보자. 빈부 격차는 크지만, 보통 마을 하나에는 약 100호가 있고 1호에 4~5명이 살고 있으며 일할 수 있는 노동 인구는 한 호당 2~3명이다. 결국 호는 대 체로 핵가족을 의미한다. 대개는 1호, 즉 한 집마다 30무畝 정도의 땅을 경작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데, 이는 어른 3명이 빠듯하 게 생활할 수 있는 수입이라서 당시에도 그들은 '빈(가난뱅이)'이라고 불렸다.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야 예나 지금이나 마 찬가지겠지만 고작 그 정도의 수입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여기서 말하는 '무畝'는 원래 100보步, 지금으로는 약 190m2에 해 당하는 토지 면적을 가리키지만, 적어도 한나라 초 이후로는 240보(약 457m2)의 토지 면적을 의미하게 된다. 당시 화전 1무에서 생 산되는 조의 수확량은 대체로 4곡斛, 즉 800에 조금 못 미치는 양이었다. 따라서 30무라면 120곡이 채 안 된다.
전국 시대 법률을 보면 벼·삼씨는 1무당 약 2.6두화(약 5.23l), 조. 보리는 1무당 약 1두(약 28), 기장·팥은 약 0.6두(약 1.2ml), 콩은 약 0.5 두(약 10)의 씨를 뿌리도록 되어 있다.19 1곡은 10두다. 품종 개량을 하지 않는 한 파종하는 양은 변하지 않으므로, 한나라 때도 대체로 비슷했을 것이다. 따라서 30무에 조를 심으려면 씨앗으로 조 3곡 이 필요하다.
- 여기에 더해 만약 수확의 10%를 세금으로 내고, 성인 남성이 1년 에 36곡, 여성이나 자녀가 25곡 정도를 소비했다면 20 수확한 곡물 은 더 이상 남지 않는다. 한 해 동안 종류가 다른 작물을 여러 번 심 고 수확하는 다모작은 당시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곡물 수입은 더 이상 나올 곳이 없다. 여기에 의류비, 관혼상제비, 제사비 등의 지출이 더해진다. 기근이나 전쟁이라도 있던 시기에는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쑥, 명아주, 뽕나무 열매, 부들, 부추 같은 식물이나 달팽이라도 구해서 연명하는 수밖에 없지만23 어쨌든 30무를 경작하는 가난한 집에서는 농업 이외의 수입도 필 요할 것이다.
- 그런 부수입 중 하나는 농한기에 관청에서 비상근 관리나 노동 자로 일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최소한 식비와 의류 비만이라도 마련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노역형을 받는 죄수가 독 신일 경우 식비와 의류비를 지급했기 때문에  비상근 관리와 노 동자에게도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줬다고 봐도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진한 제국은 일할 의사가 있는 사람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었 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유효 수요를 늘리는 케인스 정책과 같은 역 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여전히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기에 곡물 이외의 수입원을 가진 농민들이 많았다.
- 전국 시대 이전의 귀족 사회에서는 수작을 걸 때 남성이 여성에 게 노래를 부르고 여성이 답가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서 로의 연애 감정을 확인하는 것을 가원垣이라 부른다. 가원을 할 때는 여성들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잘생긴 남자를 찾는다. '미남 을 원했는데 두꺼비가 왔네'라는 여성의 한탄을 담은 재미있는 시 도 있다. 그러나 가원은 시가를 잘 읊을 수 있는 사람이나 주나라 때 귀족들이 하는 방식이며, 서민은 더 직설적으로 수작을 거는 경 우가 많았다.
- 장안의 유흥가는 사람의 왕래가 많은 대로가 아니라 대로에서 벗 어난 좁은 골목을 따라 발달했다. 그래서 유흥가를 협사狹斜라고도 부른다. 협사는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을 의미하는 말이다. 유흥가 의 기원은 전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국가가 공인한 유흥가를 가리키는 말인 여려閭나 부려婦를 문헌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귀를 기울이면 왁자지껄한 남녀의 말소리도 들리고 예기 들이 움직일 때마다 팔찌와 패옥이 짤랑짤랑 부딪치는 소리도 들 린다.
- 예기의 역사는 오래되었고, 술자리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여성 과 몸을 파는 여성을 아주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춘추 시대 말기에는 군대 내부에 위안 시설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매 춘 시설의 기원이 아닐까 한다.  또 한나라 때는 병사의 아내가 몰 래 전쟁터로 따라 가기도 했다. 아내라고 말은 하지만 정황상 이들은 호적에 등록된 정식 부인이 아니라 내연 관계에 있는 여성이거 나 매춘부였다. 
술자리에서 시중을 드는 예기는 흔히 비천하다고 하지만 아름다운 예기는 항상 인기가 많았으며 진나라 때의 녹주綠珠처럼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예기도 있다. 일설에 의하면 녹주는 갑부였던 석 숭이 과거 하노이 부근으로 출장을 갔을 때 그 미모에 대한 명 성을 듣고 사들인 기녀라고 한다. 그렇다면 녹주는 동남아계 미인 일 수도 있다. 또 후한 시대에는 황족인 유강劉이 음악을 잘하는 기녀 송윤閏을 사랑했고, 나중에 황족인 유착劉錯도 그녀에게 빠졌다고 한다. 이런 예기 쟁탈전은 한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 며, 실제로 전한의 애제는 쓸데없이 예기를 둘러싼 다툼이나 일삼는 가신들의 모습을 보며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예기의 삶이 반드시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개중에는 부 자에게 의탁해 기생의 신분에서는 벗어났지만 그 후에 울적하고 쓸쓸한 나날을 보내는 이들도 적지 않아서 '예전에는 유흥가의 여 자, 이제는 방탕한 사람의 아내'라고 노래하는 슬픈 시가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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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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