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일본책

사회 2024. 4. 6. 20:15

- 한국인들은 20세기 내내 '민족주의'에 기대 살아온 사람들이다. 유교적 보편문명의 사고에 너무 익숙한 나머 지, '민족nation'이라는 근대의 발명품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고, '민족'을 막 알아가려던 참에 망국의 비운을 당했다. 어쩌면 나라가 망한 후 타국의 압제하에서 '민족'을 온전히 알게 되었 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민족'이란 한국인들에 게 마치 가질 수 없는 연인처럼 더 절절한, 어떤 것이 되어버 렸다.
'민족주의자nationalist'가 우리말의 국수주의자와 비슷한 어감 으로 통용되는 다른 선진국에서와는 달리, 한국에서 그 말은 여전히 칭찬이다. 그러니 이제 민족주의는 그만'이라는 말에 많은 한국인들은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그렇지만 민족주의의 만연이 더 이상 우리 민족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시점에 와 있다고, 나는 본다. 예전의 민족주의가 한국인들을 단결시키고 그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면, 지금은 우 리를 배타적. 폐쇄적으로 만들고, 과학과 학문이 제시하는 곳 과는 다른 길로 오도하는 데 쓰이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북한을 보라. 주체사상의 나라, 북한만큼 민족주의적인 나라 는 지구상에 달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나라만큼 민 족주의의 폐해를 선명히 보여주는 경우도 없다.
이 세상에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나 좋은 것은 없다. 절대 적 가치인 것처럼 보이던 것도 때와 장소에 따라 전혀 다른 의 미를 갖게 된다. 만인의 우러름을 받던 민족주의자가 정작 독 립이 되어 집권하고는 자기 민족에 학정을 펴는 경우는 비일 비재하다. 민족주의는 영원한 진리도, 절대적 선도 아닌, 많은 얼굴을 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 일본에서 음식 차리는 것을 보면 밥은 두어 홉을 넘지 않고 반찬도 두어 가지에 지나지 않아 몹시 간소하다. 다 먹으면 다시 덜어 서 먹기 때문에 남기는 일이 없다. (중략) 여름에 파리와 모기가 매우 드문데, 이는 실내가 정결하고 지저분한 물건이 없기 때문 이다. (중략) 길가에서 행렬을 구경하는 사람들도 모두 질서정연 하고 엄숙한 분위기라 떠드는 사람이 없다. 인파가 수천 리 길에 이르렀는데 단 한 명도 제멋대로 행동하여 행렬을 방해하는 사람 이 없다.
내가 20여 년 전 일본 유학을 갔을 때 일본의 인상이 딱 이 랬다. 일본을 가보신 독자들도 비슷한 인상을 갖고 계실 것이 다. 그런데 이건 내 얘기가 아니고 1719년 일본에 갔던 조선통신사 신유한이 한 말이다. 《조선 문인의 일본견문록: 해유록》)
'질서를 잘 지키고 줄을 잘 선다', '깨끗하고 위생적이다', '친 절하다. 우리가 일본을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들이다. 일본이 근대화를 빨리 해서 앞서 있으니, 우리도 부지런히 따 라가야 한다고. 하지만 신유한이 전했듯 그들이 줄 잘 서고 말 잘 듣는 건, 근대화 때문이 아니라 도쿠가와 시대부터 원래(?) 그랬다.
신유한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일본인들은 상하관계가 한 번 정해지면 위아래의 구별이 엄격하여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공경하고 두렵게 여기며 (중략) 엎드려 기면서 시키는 일을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받들어 행한다." 지하철이 운행을 멈춰도, 세습 의원들이 국회의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해도 그저 조용하기만 한 지금의 일본 국민과 비슷하지 않은가.
그럼 조선인은 어땠나. "조선에서는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경쟁하는 데 몰두한다. (중략) 이 나라에서는 아랫사람이 윗자 리로 올라가는 일이 곧잘 벌어지기 때문에 자연히 사람들이 머리를 굴리는 일이 많고 뇌물도 행해져 아침에는 출세하고 저녁에는 망하니 조용할 날이 없다.” 누가 한 말인지 참 신랄 하지만 고개가 끄덕여지며 웃음이 피식 나온다. 도쿠가와 시 대 일본 최고의 조선통이었던 아메노모리 호雨의 조선 평이다. 

- 도시와 상업이 이렇게 발달했다면 사회적, 지역적 유동성도 일본 쪽이 높을 것 같지만 실제는 달랐다. 일본은 조선보다 더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사무라이-상인(조닌町人)-농민-부락민 (천민)으로 엄격히 구분됐을 뿐만 아니라 각 신분 내에서도 계 층 차는 강력하게 유지되었다.
신분만이 아니라 직업도 잘 바꾸지 못했다(않았다). 초밥집 을 하는 이에의 자손은 으레 그 일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 았다. 대가 끊기거나, 자손이 있더라도 초밥집을 감당할 능력 이 없다고 생각될 때는 재능 있는 양자를 들여 초밥집을 유지했다. 때로는 성이 다른 사람이 양자로 들어오기도 했다. 혈연보다 가업을 앞세우는 것이다. 이러니 그 초밥이 맛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 초밥집이 오래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성은 혈연의 이름이자, 이에의 상호였다. 일본 회사나 가게 이름 에 스즈키, 다나카 등 곧잘 성이 붙어 있는 이유다.
거기에 비하면 조선의 가문은 무엇보다 혈연이 최우선이다. 대가 끊기면 재능보다는 같은 혈연의 양자를 들였다. 타성양 자란 생각하기 어려웠다. 직업은 자주 바뀌었다. 구한 말 서울 종로를 방문한 한 일본인이 "어떻게 1년을 가는 가게 가 없냐”며 놀라더라는 기록을 본 적이 있다. 

- 사무라이의 나라, 무의 나라 일본이 어쩌다가 세계가 주목 하는 문의 국가가 되었느냐는 것이다. 그 연원을 찾으려면 조 금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퇴계 이황이 고봉 기대승과 수준 높 은 철학적 논쟁을 벌이고 있던 시대에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 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 같은 무장들이 군웅할 거하고 있었다(전국시대), 서원이나 향교, 과거나 상서 같 은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있는 것은 오로지 근육과 칼, 힘과 전투뿐이었다. 과연 양국은 문의 나라, 무의 나라라고 불릴 만 했다.
그런데 끝날 것 같지 않던 전쟁이 마침내 끝났다. 모두 무기 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언제 다시 전투가 벌어질지 알 수 없으 니, 사무라이는 전투 대기 상태였다. 칼도 허리춤에 차고 군대도 유지한 채 이게 그대로 행정조직이 되었다. 군주인 쇼군은 이름 그대로 최고사령관이었고, 이하 사무라이들은 계급별 로 신분이 고정된 채 자신의 직무를 세습하며 수행했다(가업).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전쟁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다. 조만간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조차 할 수 없을 정도 로 세상은 태평성대로 접어들었다.
1600년경 1200만 명 정도였던 인구는 1720년경 3000만 명 을 가볍게 넘었고(조선은 1300만 명 정도), 얼마 안 있어 에도 인구는 100만 명(한양 30만 명)에 이르렀다. 경제는 농업 혁신과 상업 발달에 힘입어 약진했다.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세상은 점점 군인인 사무라이들에게 무예 대신 지식을 요구했 다. 전투 능력은 아무 쓸모가 없는 시대였으므로. 아닌 게 아 니라 차고 다니던 칼도 다 녹슬었기 때문에 궁한 김에 상인에 게 팔아치우고 목도를 대신 차고 다니는 자들도 있었다. 때마침 막부나 봉건국가) 정부도 번교를 세우고 향 교를 지원하며 학문을 장려했다. 이전부터 있던 사숙私들은 더욱 번성했다. 요즘으로 치면 지방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번 교들이 우후죽순 세워졌다(막부 말기에 이미 200개가 넘었다). 그 속도는 어느 학자가 '교육 폭발의 시대'라고 칭할 정도로 놀라웠다. 19세기 초 다산 정약용은 벌써 일본의 학문 수준이 범상치 않음을 간파하고 일본 유학자들의 고전 주석을 인용했다. 이미 유학 교육이 한풀 꺾이고 심지어는 사회적 병폐로까지 변질되었던 조선, 중국과 달리 19세기 일본은 유학중심은 주자 학朱子學)을 비롯하여 학문과 교육 열풍에 휩싸였다. 번 정부는 사무라이들의 번교 출석을 엄격하게 확인했다.
한편 무예로 전투에서 공을 세워 출세하는 것이 더 이상 불 가능해진 현실에서 젊은 사무라이들은 학문과 학교에서 돌파 구를 찾으려 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사무라이 간의 학적 네 트워크가 결국 정치화되어 메이지유신의 촉매제가 되었다.
<1987>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1980년대 이념 서클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19세기부터 시작된 맹렬한 공부 붐이 근대 일본을 만들었 다. 그 추세는 20세기 100년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독서 대국 도, 노벨상도, 세계적 동아시아학도 그 기반 위에서 만들어졌 다. '문의 나라 한국은 언제쯤 이뤄질 것인가?

- 사회나 공동체보다 개인을 우위에 두고, 사회에 대한 개인의 비판, 저항, 이탈을 용인하는 것을 개인주의라고 한다면, 일본은 개인주의가 매우 희박한 사회다. 소속 집단보다 개인 이 더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보통의 일본인은 거의 없을 것이 며, 집단을 상대로 대의 혹은 자기 이익을 내걸고 투쟁하는 개 인도 드물다. 우선 일본 사람들은 말수가 적으며, 입을 열어도 자기주장을 하려는 게 아닌 경우가 많다. 주변 공기를 읽고서 그에 맞춰 말한다(분위기 파악이라는 일본말은 '空氣讀', 즉 '공 기를 읽는다'다). 한국에서 분위기 파악을 못 하면 핀잔 좀 받는 데 그치지만, 일본에서 공기를 읽지 못하면 진지하게(!) 주목 의 대상이 된다. 거듭되면 아웃된다.
이런 사회에서 한 개인이 사회를 상대로 도도하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거나, 사회 전체의 원리를 비판하며 그것을 초월하려는 행동이나 발상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런 사회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모두가 모두를 배려 혹은 의 식하며 질서와 규율을 지키고 공동의 이익(예를 들면 국익)을 추구하기에 용이하다. 그 속에서 터져 나올 수 있는 긴장과 반 발의 에너지를 무마하는 장치가 '고립의 허용'이다. 개인이 집 단에 저항하여 집단 전체의 원리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용서 하지 않지만, 그 원리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나는 따로 살겠다는 사람들을 용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집단 전체의 원리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 안에서다. 교토대학교 학생들이 면벽식사를 하도록 배려해주고, 어떤 친구가 도깨비 같은 패션으로 지하철을 타도 간섭하거나 나무라지 않는 것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고립 허용주의'다(오타쿠御는 사회에 당당 하게 발언하는 '개인'들이 아니라 허용된 고립의 공간에서 뛰노는 존재 들이다).

- 한국이 민심의 나라라면, 일본은 엘리트, 그중에서도 '야쿠닌'(관리 혹은 공무원)의 나라다. 일본인들의 감각에 관리나 정치인은 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일반 시민은 일반 시민의 세 계와 일이 있고, 그들은 그들의 세계와 일이 있다. 각자의 '야 쿠役'(역할)가 있는 것이다. 이러니 우리가 볼 때 의아할 정도 로 일본인들은 정치에 대해 관심도 비판도 없다. 알아서 해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의 위정자, 엘리트들 은 그에 부응해 자신들의 '야쿠'를 잘 수행해왔다. 일본 사회에서 대대로 관리를 비롯한 엘리트의 신뢰도가 높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대략 1990년대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야쿠 닌'들이 부패하고 무능해진 것이다. 일본 최고의 엘리트 그룹 인 오쿠라성省(우리의 재정경제부) 부패 사건이 잇달아 발생 한 것을 계기로, 일본의 리더십은 관료사회에서 정치가로 넘 어갔다. 그런데 정치가들은 더 무능했다.
일본 사회의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정치의 '야쿠'를 담당 하는 엘리트들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데도 일본 시민들은 자기 '야쿠'만 수행할 뿐 이에 간섭하거나 항의하지 않는 다. 그 사이에 거대한 공백이 생긴다. 이 틈새에서 일본 사회 는 기능부전에 빠졌다. 3.11 동일본대지진 때도 그랬고, 코로 나 사태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의 '야쿠'가 제대로 회복되든 지, 아니면 오래된 전통을 깨고 '야쿠'의 사회를 바꿔 '야쿠' 밖 으로 소리치고 감시하고 저항하지 않는 한 21세기 일본은 매 우 힘든 난관에 거듭 봉착할 것이다.
그 대척점에 한국이 있다. 한국에는 애초에 '야쿠'라는 게 없다. 직업은 언제든 바꿀 준비가 돼 있고, 내 직업을 굳이 자식이 하길 원하지 않는다. 내 일보다는 '남 일'에 관심 많은 사람이 부지기수다. 가장 만만한 '남 일'은 정치다. 내 일을 팽개 치고 '남일'인 정치에 비말을 날리며 울부짖는 건 한국 시민 의 일상사다. 놀랄 만큼 많은 수의 시민들이 자기 분야보다 정 치에 더 해박한 지식과 정밀한 분석을 선보이는 신공을 갖고 있다. 그만큼 한국 민심의 수준도 높다. 이러니 민심이 무서울 수밖에 없다. 늘 각자도생이 먼저이면서도 공동체 붕괴의 위 기 때는 온갖 아이디어와 충심을 발휘하며 다이나믹하게 대응 한다. 금 모으기 운동과 코로나 대응은 그 백미였다.

- 한반도 세력에게 일본제국은 약 40년간 패자였고 이후 샌프란시스코 체제에 의해 미국이 그 자리를 대신한 지 60년이 되었다. 그 샌프란시스코 체제도 동요하기 시작한 지 이미 오 래다. 명청 교체기, 구한말 같은 지역 질서의 격변기가 코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 북한은 중국에 점점 목을 매고 있고, 남한의 전략가들은 미래에 대한 합의를 좀처럼 이루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중국은 당 고종의 신라 정복 실패 이후 포기했던 '한반도 직할 카드를 혹시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남한에서는 조만간 구한말 때처럼 친미파와 친중파가 요란스레 대립하게 되지는 않을지...
일본은 쓰나미에 당했다지만 나는 저만치서 다가오고 있는 '지정학 쓰나미'가 더 두렵다.

- 1987년 이후 한국 현대사는 혁명보다는 유신에 가깝다. 변 혁을 밀어붙인 핵심 세력은 반체제가 아니라 체제 내 비주류 세력이었다. 예비 엘리트인 대학생들, 야권 정치 세력과 사회 세력, 합리적 사회를 바라는 광범한 시민과 노동자들이 그들 이다.
커다란 변혁을 달성했으면서도 사회질서가 붕괴되거나 대 규모 폭력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다. '질서 있는 변혁', 그것도 메이지유신보다는 훨씬 시민의 힘에 기댄 바가 크다. '위로부 터의 질서 있는 변혁'이 아니라 '아래에 기댄 질서 있는 변혁'.
- 이 미증유의 실험 한가운데에 586이 있다. 그들은 당연히 기성 체제의 핵심이다. 그것도 장기간 그러했다. 영화 <1987> 에 대한 586들의 나르시시즘적 반응은 자기도취다.
586세대는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오랫동안 누리고 있다는 것 을 칼바람 맞듯,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혁신, 자기연마 해야 한다. 역사는 아직 586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586에게 는 유신의 길밖에 없다. 만약 우리 사회에 정말 혁명이 일어난 다면, 그들이 대상이 될 것이므로.

- 정말 통일신라·고려·조선 왕국은 후진국이고 별 볼 일 없는 나라였나? 예를 들어 18세기 조선은 인구 1300만 명 정도가 먹고살 수 있는 나라였다. 다른 나라에 비해 찢어지게 가난했던 것도 아니었다. 주자학을 비롯한 지적 수준은 잘 알 려진 대로 대단했다. 당시를 지금처럼 국가 랭킹으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 조선이 'G20'과 한참 거리가 멀었으리라 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 흔히 듣는 말 중에 "우리나라가 중국에 앞선 것은 20세 기 몇십 년뿐인데, 그나마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있다. 그게 어디 한국뿐인가. 일본도 베트남도 다 마찬가지다. 일반적인 현상을 두고 나만 못났다고 하니 반성이 아니 라 자학에 가깝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은 매우 특수한, 아마도 세계사에서 유일한 케이스일지도 모른다. 흔히 우리 역 사에 대해 평할 때 "중국 옆에서 살아남은 나라는 우리밖에 없 다”고 하는데 결코 과분한 평가가 아니다. 베트남이 비슷한 경 우라고 볼 수 있겠으나, 베이징과 하노이는 베이징과 서울에 비하면 저 너머 세상이다. 우리 역사를 바라볼 때는 이런 배경 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의 역사는 중국처럼 수천 년간 지역의 패자로, 문명의 센터로 지내온 역사도 아니고, 일본처럼 저 멀리 바다 한가운 데서 지정학적 행운을 즐기며 자폐적으로 살아온 경우도 아니 다. 그만큼 더 복잡하고 깊은 사연이 있다. '고투의 역사'에 대 해 적절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지적으로 이만큼 흥미를 자 극하는 역사도 드물 것이다. 독특한 조건 속에서 분투해온 한 국사의 경험은 역사에서 지혜를 구하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에 게 커다란 교훈과 영감을 줄 것이다.

- 나는 불안하다. 우리가 일본을 너무 일찍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우리 사회의 중추인 50~60대는 일본과 가장 격절된 세대다.
이들은 일제를 경험한 윗세대나, 일본 문화를 통해 일본 사 회를 줄곧 접해온 젊은 세대와 비교할 때 일본을 잘 모르는 세 대에 속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미국 박사학위 소지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 세대 오피니언 리더들과 얘기해보면, 미 국이 보는 시각으로 일본을 내려다본다는 느낌을 자주 받곤 한다. 이런 것이 영향을 끼쳐서일까? 일본은 한물간 나라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일본사 수업에서도 일본어 텍스트 수업이 불가능할 정도로 일본어는 '변방어’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아직 도전자의 자세로 일본을 더 알아야 한다. 알아 도 샅샅이 알아야 한다. 일본이 무서워하는 나라는 큰소리치 는 나라가 아니다.

- 서울 지하철 젊은 여성의 손에 도쿠가와 시대 역사서가 들려 있고, 무라카미 하루키뿐만 아니라 나쓰메 소세키도 베스트셀러가 되며, 중년 남성들의 술집 대화에서 메 이지유신 지도자 이름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오고, 학교 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으로서의 이토 히로부미만이 아니라, 그런 자가 어떻게 근대 일본의 헌법과 정당정치의 아버지로 평가되는지, 그 불편함과 복잡성에 대해 파헤치는 그런 한국 을, 일본은 정말 두려워할 것이다.
화풀이만으로는 일본을 이길 수 없다. 물론 화가 나니 화도 풀어야 한다. 그러나 정말 극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면, 일본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공부와 식견이 좀 더 높아져야 한다. 여기에는 왕도가 없다. 돋보기 들고 차근차근, 엉덩이 붙이고 끈덕지게 공부 또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세계인 모두가 일본 을 존경해도 우리는 그럴 수 없다. 동시에 세계인 모두가 일본 을 무시해도 우리만은 무시해선 안 된다.

- 1910년 조선이 망한 것은 반일 감정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일본을 증오하고 규탄하는 사람들은 전국에 넘쳐흘렀고, 일본 을 깔보고 멸시하는 사람들도 사방에 빽빽했다. 모자랐던 것 은 메이지유신 이후 40여 년간 일본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 게 우리의 운명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었 다. 해방 후 지금만큼 한일 간의 국력 차가 좁혀진 적은 없었 다. 그러나 섣불리 우쭐거리는 것은 독약이다. 장차 우리가 일 본을 정말 앞서는 날이 와도 우리는 일본을 경시하는 맨 마지 막 나라가 되어야 한다. 일본은 정말 경계해야 할 상대이기 때 문이다.

- 일제 치하 조선 민족의 위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논리와 팩 트에 기반하지 않은 주장을 하는 사람에 대해 작가 상허 이태 준은 일갈했다고 한다. "주기율표(화학에서 중시하는 원소 배열표) 대로 하라. 연금술은 반대한다." 역사를 논할 때 입으로는 논 리와 팩트를 말하지만, 사실은 연금술을 부리려는 사람들을 가려내야 한다. 조선 민족의 위대성을 이태준인들 소리쳐 외 치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차근차근 주기율표대로 하지 않고 연금술을 부려 '민족의 위대성'을 만들어낸다면 그건 환 상에 불과하며, 결국 독립은커녕 우리를 더더욱 열등 민족으 로 내몰 것이라는 차가운 사실을 상허는 내뱉고 있는 것이다.

- 그런데 연금술은 뚝딱하고 주장하기 쉽지만 논리와 팩트에 기초한 주장을 하는 데에는 품이 많이 든다. 왜냐하면 논리와 팩트에 하자가 있을 경우 그 사람의 신뢰성이 떨어지므로 거 듭거듭, 단단히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뉴스 프로그램 에 '팩트체크' 코너가 생겨난 것은 반가운 일이나 아직도 우 리 사회에서는 목소리 큰 사람(언론 플레이 잘하는 사람)이 행세 하곤 한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단단한 논리와 팩트로 무장한 사람일 지라도 큰 목소리 한 방에 묻혀버린다. 큰 목소리가 가짜란 게 드러나도 더 큰 소리를 내면 상관없다. 이런 판국에 누가 논리 와 팩트에 공을 들이겠는가. '아니면 말고'는 퇴장해야 한다.

-한국인들(남북한)은 너나없이 제국주의 비판에 열을 올린다.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미제 욕을 해대는 북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남한 사람들도 그에 못 지않다. 대신 미제가 아니라 일제다. 북한만큼은 아니지만 여기도 이견을 내기 어려울 정도로 이 문제만큼은 총화단결 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한국 근대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 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음모의 산물이고, 메이지 정권 수립 (1868년) 당시에는 일개 약소 농업국에 불과하여 제국주의를 하고 싶어도 할 능력이 없었던 일본은 이미 이때부터 '일제' 다. '일제'는 강화도조약(1876년)부터 한국병합(1910년)에 이르 기까지 한반도 침략을 치밀하게 기획하여 결국 실현해냈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이런 시각은 일본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다. 격변의 40년 동안 일관되게 대외 방침을 유지하고 부동의 실천력으로 다른 나라를 집어삼켰으니, 이런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강화도조약 당시 일본은 정한론을 주장하던 국내의 반정부파에 빌미를 주지 않으려 어떻게든 조 약을 성사시키려고 허둥댔고, 조선의 외교 관료들은 무능했다 고만은 매도할 수 없는 교섭력을 보여줬다. 강화도조약의 내 용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불평등하지만은 않았다(서울대 김종학 교수 등의 설). 이때부터 적어도 청일전쟁까지 일본은 능 수능란하게 한국병합을 착착 추진한 것이 아니라 갈팡질팡, 우왕좌왕했다. '일제'를 규탄하려다 본의 아니게 일본을 '무소불위의 능력자'로 만드는 이런 시각은 자연스레 당시 한국인 들의 대응을 '예정된 실패'로 왜소화시켜버린다. 침략에 대한 일본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다가 스스로를 무능력자로 만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민족적 자긍심이 아 니라 패배주의와 콤플렉스다.
패배주의와 콤플렉스는 희한한 현상을 유발한다. 제국주의 라면 핏대부터 올리는 사람이 '대쥬신제국' 운운하며 한국사에 제국을 만들지 못해 안달한다. 이들이 날조한 '조선 제국'은 산둥반도 백제 진출설, 일본열도 삼한 진출설을 넘어 이따금 중앙아시아로도, 심지어는 동유럽으로도 확장한다. 이런 사이비 역사학은 조소와 함께 비교적 쉽게 치지도외置之度外 할 수 있다. 문제는 알게 모르게 우리 사이에 폭넓게 잠재되어 있는 '제국에 대한 은밀한 욕망'이다. 오래전 페이스북에 쓴 적이 있지만 과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고려 관련 전시 는 고려가 가끔 자칭한 '황제국', '천자국'에 대해 과도하게 집 착했다. 내가 볼 때 하나의 '소극笑이었던 대한제국' 수립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려는 심성도, 또 '만주 고토 회복' 운운 에 대해 대중적 인기가 여전한 것도 한국인들이 제국·제국주 의를 비판하면서 내심 그리 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만든다.

- 2017년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탄핵되고 이어 전임 대통령이 연이어 구속되었다. 그와 함께 대통령직, 혹은 국가원수의 권 위도 또 한 번 큰 상처를 입었다. 권력과 분리된 권위가 제대 로 존재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권위는 늘 권력의 성패에 의 지하게 된다. 국민 대다수가 심복하는 사회적 권위가 쉽사리 형성되지 않는 이유다. 모든 것이 중앙으로 휘몰아쳐 올라가 는 사회에서 최고 권력은 제왕적인 힘을 갖지만, 그만큼 모든 걸 책임져야 한다.
중앙 권력을 향한 풍압風壓은 가히 초대형 태풍급이다. 그 풍압은 무한한 권력을 주기도 하지만, 한순간에 제왕적 대통 령을 날려버리기도 한다. 권위도 산산조각 낸다. 이런 사회에 선 안정된 권력도 고색창연한 권위도 존재하기 어렵다. 일본 의 권력자가 구름 위에 있다면, 한국의 권력자는 칼날 위에 바 람을 맞으며 서 있는 존재다. 이 풍압을 능란하게 다뤄 거대한 발전의 에너지로 전환시킬 인물을, 우리는 찾고 있다.

- 일본에서는 혐한 분위기가 한창이다. 그 계기는 2012년 한 국 대통령이 천황의 사죄를 요구한 것이었다. 우익에게 좋은 먹잇감을 던져준 것이다. 그 대통령은 독도에도 상륙했지만, 일본 여론에 미치는 영향은 천황 문제에 비교가 안 되었다. 독 도 문제에는 한국에 이해를 표하던 많은 일본 지인들도 천황 사죄 발언 앞에서는 등을 돌렸다. 몇 년 전 비슷한 발언을 했 던 우리 국회의장은 여러 차례 사과하며 곤경에 처했다.
일본인에게 신성불가침의 존재이니, 우리도 존경해야 한다 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천황에 대한 그들의 자세를 감안하고 계산하면서 일본을 대하자는 것이다. 독도·위안부·강제징용 문제에 아무 생각 없이 천황을 끌어들여 일본 우익을 신나게 하고 일본 내 우리 편을 내쫓을 이유가 뭐가 있는가. 우리 국 익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철두철미 전략적이어야 한다. 특히 천황을 상대로는 섣부른 애국심보다는 전략적으로 그 존재의 무게를 이용할 필요가 있 다. 얕은 애국심으로 국익에 깊은 손해를 끼친 것이 어디 한두 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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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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