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8년, 사람들에게 주어진 전 지구적 이야기의 선택지는 세가 지였고, 1968년에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그러다 1998년에는 한가 지 이야기만 득세하는 듯 보였다. 급기야 2018년 우리 앞에는 하나 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세계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던 자유주의 엘리트들이 충격과 혼미의 상태에 빠진 것도 당 연하다. 하나의 이야기만 존재한다는 것은 가장 마음이 놓이는 상 황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작스럽 게 아무런 이야기도 없어진 상태는 끔찍한 일이다. 아무런 의미도 파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흡사 1980년대 소련의 엘리트처럼 지금 자유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서 역사가 예정된 경로에서 벗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현실을 해석할 대안적인 프리즘도 가진 게 없다. 방향감을 잃은 이들은 마치 역사가 자신들이 머릿속에 그린 해피 엔딩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마겟돈을 향해 돌진하는 일이라 도 되는 양 종말론적 사고에 빠져들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정신은 재앙적 시나리오에 집착하게 된다. 지독한 두통을 치명적인 뇌종양의 신호라고 상상하는 사람처럼,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브렉 시트와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이 인류 문명의 종언을 예고한다고 우 려한다.

- 1938년 소련과 독일 혹은 미국에 살았던 보통 사 람은 삶의 조건이 암울했을 수는 있지만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중 요한 존재이며 미래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었다(물론 그가 유대인이거 나 흑인이 아니라 '보통 사람'임을 전제로 했을 때 얘기다). 그는 선전 포스 터를 보았고 여기에는 보통 석탄 캐는 광부, 철강노동자, 영웅적 인 포즈를 취한 가정주부가 그려져 있었다-그 속에서 자신을 봤 다. "저 포스터 속에 있는 건 나야! 나는 미래의 주인공이야!"5
하지만 2018년의 보통 사람은 점점 자신이 사회와 무관하다고 느낀다. 수많은 신비한 단어들 - 세계화, 블록체인, 유전공학, 인공 지능, 기계 학습machine learning이 테드 강연과 정부 싱크탱크, 하 이테크 콘퍼런스 같은 곳에서 신나게 오르내리지만, 보통 사람은 이 중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다고 의심할 법하다. 자 유주의 이야기는 무엇보다 보통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떻게 하면 사이보그와 알고리즘 네트워크의 세계에서도 그런 적실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20세기에 대중은 착취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고, 경제에서의 핵심적 역할을 정치권력으로 환산하려 했다. 이제 대중은 자신이 사회 와 무관해질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너무 늦기 전에 자신에게 남 은 정치권력을 사용하는 데 필사적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부 상은 전통적인 사회주의 혁명과는 반대되는 궤도의 사례를 보여준 것일 수 있다. 러시아, 중국, 쿠바에서 혁명을 일으킨 것은 경제에 서는 핵심적이었으나 정치권력은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었던 반면, 2016년 트럼프와 브렉시트를 지지한 것은 아직 정치권력은 누리고 있지만 자신의 경제 가치를 잃는 것이 두려웠던 많은 사람들이었 다. 아마도 21세기 포퓰리즘 반란은 사람들을 착취하는 경제 엘리 트가 아니라 더 이상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제 엘리트에 맞서 는 구도로 전개될 것이다. 이는 지는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착 취에 반대하는 것보다 사회와 무관해지는 것에 맞서 투쟁하기가 훨 씬 힘들기 때문이다.

- 하지만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모두 이제 신임을 잃었다면 인류는 하나의 전 지구적 이야기라는 생각 자체를 포기해야 할까? 결국 이 모든 지구적 이야기들 - 심지어 공산주의까지 -도서방 제국주 의의 산물 아니었나? 왜 베트남 시골 사람들이 트리어 출신 독일인 (카를 마르크스-옮긴이)과 맨체스터 기업가(프리드리히 엥겔스-옮긴 이)의 머리에서 나온 사상을 믿어야 한단 말인가? 혹시 모든 나라는 저마다 오랜 전통에 따른 고유한 길을 택해야만 할까? 어쩌면 서방 사람들도 세계를 관리하려는 노력을 잠시 멈추고 기분 전환 삼아 자기 일에 집중해야 할까?
단언컨대, 그런 일이 지금 지구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자유주 의의 고장으로 공백이 생기자 잠정적이나마 각 국가의 지나간 황금 시절을 그리워하는 환상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는 미국의 고립주의에 대한 촉구에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자'는 약속을 연결했다. 마치 1980년대나 1950년대의 미국이 21세기에도 미국인들이 어떻게든 되살려야 하는 완벽한 사회였다는 듯이 브렉시트 지지자들 역시 영국을 독립 강국으로 만드는 꿈을 꾼 다. 마치 아직도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살고 있는 듯이, 그리고 지난 시절에나 통했던 '영광의 고립'이 인터넷과 지구온난화 시대에도 실행 가능한 정책이라는 것처럼. 중국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제국과 유교의 유산에 다시 눈을 뜨면서 그것을 서방에서 수입해 온 미심쩍은 마르크스 이데올로기의 보완재나 대용품으로까지 생 각한다. 러시아에서 푸틴이 공식적으로 제시하는 청사진도 부패한 과두제의 건설이 아니라 옛 차르 제국의 재건이다. 볼셰비키 혁명 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난 지금 푸틴은 러시아 민족주의와 정교회 의 신앙심에 힘입은 전제 정부를 통해 옛 제정 시대의 영광을 되찾 는 한편 발트해에서 캅카스까지 세력을 확장하겠다고 약속한다.

-이처럼 민족주의적 애착과 종교적 전통을 뒤섞은 향수 어린 꿈은 인도와 폴란드 외에도 수많은 체제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환상의 힘이 중동만큼 극단적인 곳도 없다. 이곳 이슬람주의 자들은 1,400년 전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디나 시에서 세운 체제를 그대로 모방하고 싶어 한다. 이스라엘의 근본주의 유대교도들은 한 술 더 뜬다. 2,500년 전 성경 시대로 돌아가려는 꿈을 꾼다는 점에 서 그들은 이슬람주의자들마저 능가한다. 이스라엘 집권 연립정부 의 각료들은 지금 이스라엘의 국경을 성경 속의 이스라엘에 좀 더 가깝게 확장하려는 희망을 공공연히 밝힌다.

- 예술에서 의료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전통적인 일자리 다수가 사라지면 새로운 인간 일자리 창출로 상쇄될 것이다. 알려진 질병을 진단하고 익숙한 치료를 관장하는 데 집중하는 일반 의사들은 AI 의사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획기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신약이나 수술 절차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인간 의사와 연구소 조교에게 훨씬 더 많은 돈을 지급해 야 할 것이다."
AI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인간 일자리 창출을 도울 수 있다. 인 간은 AI와 경쟁하는 대신 AI를 정비하고 활용하는 데 집중할 수 있 을 것이다. 가령, 드론이 인간 비행사를 대체하면서 일자리가 사라졌지만 정비와 원격 조종, 데이터 분석, 사이버 보안 분야에서는 새 로운 기회가 많이 생겨났다. 미군의 경우 무인기 프레데터나 리퍼 드론 한 대를 시리아 상공으로 날려보내는 데 30명이 필요한데, 그 렇게 수집해 온 정보를 분석하는 데는 최소 80명이 더 필요하다. 2015년 미 공군은 이 직무를 맡을 숙련자가 부족해, 무인 항공기 운용 인력 부족이라는 역설적인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2050년 고용시장은 인간-AI의 경쟁보다는 상호 협력 이 두드러진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경찰부터 은행 업무에 이르 기까지 인간과 AI가 한 팀을 이루면서 인간과 컴퓨터 모두를 능가 할 수 있을 것이다. 1997년 IBM의 체스 프로그램인 딥 블루가 세 계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를 꺾은 후에도 인간이 체스를 그만두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AI 트레이너 덕분에 인간 체스 챔피 언은 실력이 유례없이 좋아졌고, 잠시나마 '켄타우로스'로 알려진 인간-AI 팀이 체스에서 인간과 컴퓨터 모두를 능가했다. 마찬가지 로 AI는 인간이 사상 최고의 형사, 은행원, 군인으로 단장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생겨난 새로운 일자리는 모두 고도의 전 문성을 필요로 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비숙련 노동자의 실직 문 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거라는 점이다. 그런 일자리를 실제로 메울 사람을 재교육하기보다 아예 새로운 인간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 이 더 쉬운 일로 판명될 수 있다. 이전에 자동화 물결이 밀려들었을 때, 사람들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기계적인 직업을 또 다른 비 슷한 수준의 일로 바꿀 수 있었다. 1920년 농업이 기계화하면서 해 고된 농장의 일꾼은 트랙터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새 일을 찾을 수 있었다. 1980년 공장 노동자는 실직하더라도 슈퍼마켓의 현금출납 원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직업 변화가 가능했다. 농장 에서 공장으로, 다시 공장에서 슈퍼마켓으로 옮겨가는 데는 훈련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2050년에는 현금출납원이나 방직공장 노동자가 로봇에 게 일자리를 잃고 나서 암 연구원이나 드론 조종사, 혹은 은행의 인 간-AI 팀원으로 새 일을 시작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 결과적으로, 인간 일자리가 많이 생긴다 해도 새로운 '무용' 계급 의 부상은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두 세계의 최악을 함께 겪을 수도 있다. 높은 실업률과 숙련 노동력의 부족이 동시에 닥치 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19세기의 마차 몰이꾼이 아닌 말의 운명을 맞을 수 있다. 마차 몰이꾼은 택시 기사로 전환할 수 있었지만, 말은 점점 고용 시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해 결국에는 완전히 퇴출됐다. 5 더욱이 남은 인간 일자리도 결코 미래 자동화 위협으로부터 안전 할 수 없을 것이다. 기계 학습과 로봇은 계속 개선될 것이기 때문이 다. 40세에 실직한 월마트 현금출납원이 초인적인 노력 끝에 간신 히 드론 조종사가 됐다 해도 10년 후에 그는 다시 자기 변신을 해 야만 할 수 있다. 그때쯤이면 드론을 날리는 일도 자동화됐을 수 있 기 때문이다. 이처럼 직업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노조를 조직하거나 노동권을 확보하는 일도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이미 오늘날에도 선 진국에서 생겨나는 많은 신규 일자리는 보호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이거나 자유계약직, 혹은 일회성 업무직이다." 버섯구름처럼 급속 하게 생겨났다가 10년도 안 돼 사라지는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노 조를 결성할까?

[- 앞으로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노동자들 을 재훈련할 수 있다 하더라도, 평균적인 인간이 그런 끝없는 격변 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감정의 근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 아해할 수도 있다. 변화는 늘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21세기 초 세 계는 미친 듯 바빠지면서 온 지구는 스트레스라는 유행병을 앓고 있다." 고용 시장과 개인 직업의 변동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사람 들은 현실에 잘 대처해나갈 수 있을까? 아마도 사피엔스의 정신 이 나가는 것을 막으려면 지금보다 훨씬 효과가 큰 스트레스 경감 기술- 약물부터 뉴로피드백neuro-feedback (뇌파 측정을 통한 조절 훈 련- 옮긴이), 명상에 이르기까지 -이 필요할 것이다. 2050년 '무용' 계급이 출현하는 원인에는 일자리의 절대 부족이나 관련 교육의 결여뿐 아니라 정신 근력의 부족도 포함될 것이다.

-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두고 어떤 정의를 따르든, 일단 한 번 누 구에게나 그것을 무료로 제공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시하게 될 것이다. 그다음에는 기본이 아닌 사치 - 호화 자율주행차량, 가상 현실 공원 접속 혹은 생명공학적으로 증강된 신체를 두고 치열 한 사회 경쟁과 정치적 투쟁이 집중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실업 대중이 그만한 경제 자산을 갖고 있지 않은 다음에야 어떻게 그런 사치를 누리기를 희망할 수 있을지 알기 어렵다. 그 결과, 부유 층(텐센트 매니저와 구글 주주)과 빈곤층(보편기본소득으로 생활하는 사람) 간의 격차는 점점 커질 뿐 아니라 사실상 메울 수 없게 될 것이다.

- 어떤 식으로든 보편 지원 구상 덕분에 2050년에는 빈곤 층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의료 서비스와 교육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들은 전 지구에 불평등이 만연하고 사회적 이동성이 사라진 것 에 극도로 분노할 수 있다. 사람들은 시스템이 자신들에게 불리하 게 조작돼 있고, 정부는 초부유층에만 봉사하며, 미래는 자신과 자 녀들에게 더욱 나빠질 거라고 느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만족을 위해서만 설계되지는 않았다. 인간의 행 복은 객관적 조건보다는 우리 자신의 기대에 더 크게 좌우된다. 하지만 기대는 조건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의 조건 도 포함된다. 상황이 좋아지면 기대도 높아지며, 그 결과 여건이 극 적으로 좋아진 후에도 이전처럼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보편 기본 지원이 2050년 평균인의 객관적 조건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 로 한다면 성공할 가능성은 꽤 높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 에 대해 주관적으로 더 만족하는 것과 사회적 불만을 막는 것을 목 표로 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 아마존의 답이 늘 옳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데이터 부족, 프로그램 오류, 목표 설정 혼란, 삶의 근본적인 무질서 때문에 알고리즘은 반복해서 실수를 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마존이 완벽해야 할 필요는 없다. 평균적으로 우리 인간보다 낫 기만 하면 된다. 그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 부분의 사람은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 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서도 끔찍한 실수를 저지를 때가 많 다. 데이터 부족과 (유전적이고 문화적인) 프로그램 오류, 목표 설정 혼란과 인생의 무질서로 인한 고충도 인간이 알고리즘보다 훨씬 더 크게 겪는다.
당신은 알고리즘을 둘러싼 많은 문제들을 열거하고 나서는, 그렇 기 때문에 사람들은 결코 알고리즘을 신뢰하지 않을 거라고 결론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민주주의의 모든 결점들을 나열한 후에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그런 체제는 지지하려 들지 않을 거라고 결론짓는 것과 비슷하다. 윈스턴 처칠의 유명한 말이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정치 체제다, 다른 모든 체제를 제 외하면.' 빅데이터 알고리즘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그런 판단이 옳 든 그르든 똑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즉, 알고리즘은 장애도 많 지만 더 나은 대안이 없다
- 사람들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기계적인 직업을 또 다른 비 슷한 수준의 일로 바꿀 수 있었다. 1920년 농업이 기계화하면서 해 고된 농장의 일꾼은 트랙터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새 일을 찾을 수 있었다. 1980년 공장 노동자는 실직하더라도 슈퍼마켓의 현금출납 원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직업 변화가 가능했다. 농장 에서 공장으로, 다시 공장에서 슈퍼마켓으로 옮겨가는 데는 훈련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2050년에는 현금출납원이나 방직공장 노동자가 로봇에 게 일자리를 잃고 나서 암 연구원이나 드론 조종사, 혹은 은행의 인 간-AI 팀원으로 새 일을 시작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 결과적으로, 인간 일자리가 많이 생긴다 해도 새로운 '무용' 계급 의 부상은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두 세계의 최악을 함께 겪을 수도 있다. 높은 실업률과 숙련 노동력의 부족이 동시에 닥치 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19세기의 마차 몰이꾼이 아닌 말의 운명을 맞을 수 있다. 마차 몰이꾼은 택시 기사로 전환할 수 있었지만, 말은 점점 고용 시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해 결국에는 완전히 퇴출됐다. 5 더욱이 남은 인간 일자리도 결코 미래 자동화 위협으로부터 안전 할 수 없을 것이다. 기계 학습과 로봇은 계속 개선될 것이기 때문이 다. 40세에 실직한 월마트 현금출납원이 초인적인 노력 끝에 간신 히 드론 조종사가 됐다 해도 10년 후에 그는 다시 자기 변신을 해 야만 할 수 있다. 그때쯤이면 드론을 날리는 일도 자동화됐을 수 있 기 때문이다. 이처럼 직업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노조를 조직하거나 노동권을 확보하는 일도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이미 오늘날에도 선 진국에서 생겨나는 많은 신규 일자리는 보호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이거나 자유계약직, 혹은 일회성 업무직이다." 버섯구름처럼 급속 하게 생겨났다가 10년도 안 돼 사라지는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노 조를 결성할까?
- 앞으로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노동자들 을 재훈련할 수 있다 하더라도, 평균적인 인간이 그런 끝없는 격변 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감정의 근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 아해할 수도 있다. 변화는 늘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21세기 초 세 계는 미친 듯 바빠지면서 온 지구는 스트레스라는 유행병을 앓고 있다." 고용 시장과 개인 직업의 변동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사람 들은 현실에 잘 대처해나갈 수 있을까? 아마도 사피엔스의 정신 이 나가는 것을 막으려면 지금보다 훨씬 효과가 큰 스트레스 경감 기술- 약물부터 뉴로피드백neuro-feedback (뇌파 측정을 통한 조절 훈 련- 옮긴이), 명상에 이르기까지 -이 필요할 것이다. 2050년 '무용' 계급이 출현하는 원인에는 일자리의 절대 부족이나 관련 교육의 결여뿐 아니라 정신 근력의 부족도 포함될 것이다.

-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두고 어떤 정의를 따르든, 일단 한 번 누 구에게나 그것을 무료로 제공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시하게 될 것이다. 그다음에는 기본이 아닌 사치 - 호화 자율주행차량, 가상 현실 공원 접속 혹은 생명공학적으로 증강된 신체를 두고 치열 한 사회 경쟁과 정치적 투쟁이 집중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실업 대중이 그만한 경제 자산을 갖고 있지 않은 다음에야 어떻게 그런 사치를 누리기를 희망할 수 있을지 알기 어렵다. 그 결과, 부유 층(텐센트 매니저와 구글 주주)과 빈곤층(보편기본소득으로 생활하는 사람) 간의 격차는 점점 커질 뿐 아니라 사실상 메울 수 없게 될 것이다.
-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보편 지원 구상 덕분에 2050년에는 빈곤 층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의료 서비스와 교육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들은 전 지구에 불평등이 만연하고 사회적 이동성이 사라진 것 에 극도로 분노할 수 있다. 사람들은 시스템이 자신들에게 불리하 게 조작돼 있고, 정부는 초부유층에만 봉사하며, 미래는 자신과 자 녀들에게 더욱 나빠질 거라고 느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만족을 위해서만 설계되지는 않았다. 인간의 행 복은 객관적 조건보다는 우리 자신의 기대에 더 크게 좌우된다. 하지만 기대는 조건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의 조건 도 포함된다. 상황이 좋아지면 기대도 높아지며, 그 결과 여건이 극 적으로 좋아진 후에도 이전처럼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보편 기본 지원이 2050년 평균인의 객관적 조건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 로 한다면 성공할 가능성은 꽤 높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 에 대해 주관적으로 더 만족하는 것과 사회적 불만을 막는 것을 목 표로 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 물론 아마존의 답이 늘 옳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데이터 부족, 프로그램 오류, 목표 설정 혼란, 삶의 근본적인 무질서 때문에 알고리즘은 반복해서 실수를 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마존이 완벽해야 할 필요는 없다. 평균적으로 우리 인간보다 낫 기만 하면 된다. 그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 부분의 사람은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 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서도 끔찍한 실수를 저지를 때가 많 다. 데이터 부족과 (유전적이고 문화적인) 프로그램 오류, 목표 설정 혼란과 인생의 무질서로 인한 고충도 인간이 알고리즘보다 훨씬 더 크게 겪는다.
당신은 알고리즘을 둘러싼 많은 문제들을 열거하고 나서는, 그렇 기 때문에 사람들은 결코 알고리즘을 신뢰하지 않을 거라고 결론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민주주의의 모든 결점들을 나열한 후에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그런 체제는 지지하려 들지 않을 거라고 결론짓는 것과 비슷하다. 윈스턴 처칠의 유명한 말이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정치 체제다, 다른 모든 체제를 제 외하면.' 빅데이터 알고리즘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그런 판단이 옳 든 그르든 똑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즉, 알고리즘은 장애도 많 지만 더 나은 대안이 없다.

- 무수히 많은 다른 상황에서도 인간의 감정은 철학적 이론을 이긴 다. 이 때문에 세계가 보아온 윤리와 철학의 역사는, 이상은 훌륭하 나 행동은 이상에 못 미치는 우울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얼마나 많 은 기독교인이 실제로 상대를 관대히 용서하고, 얼마나 많은 불교 도가 이기적인 집착을 초월해서 행동하며,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일상에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가? 이는 자연선택이 호모 사 피엔스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포유류와 마찬가지로 호 모 사피엔스도 감정을 사용해 재빨리 생사의 결정을 내린다. 우리 는 분노와 두려움, 탐욕을 수백만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는데, 이들 모두는 자연선택이라는 가장 엄격한 품질 관리 시험을 통과했다.
- 수백만 년 전 아프리카 사바나에서의 생존과 재생산에 유리했던 것이 반드시 21세기 고속도로 위의 책임 있는 행동에도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주의가 산만하거나 화가 났거나 불안에 쫓기는 인간 운전자가 일으키는 교통사고로 숨지는 사람이 매년 100만 명이 넘는다. 우리는 이 운전자들에게 우리의 모든 철 학자와 예언가, 사제들을 보내 윤리를 설교할 수 있다. 하지만 도 로 위에서는 여전히 포유류의 감정과 사바나의 본능이 운전석을 차 지할 것이다. 그 결과, 서둘러 가는 신학생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고, 위급 상황의 운전자는 무기력한 보행자를 치고 지나갈 것이다.

- 생명기술과 정보기술이 융합하는 시대에 민주주의는 현재 형태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민주 주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해야 한다. 안 그러면 인 간은 '디지털 독재' 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
히틀러와 스탈린 시대로 회귀한다는 말은 아니다. 나치 독일이 '구체제' 프랑스와는 달랐듯이, 디지털 독재도 나치 독일과는 다를 것이다. 루이 14세는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였지만 근대 전체주의 국 가를 건설할 기술은 없었다. 그의 지배에 반대하는 세력은 없었지 만, 그에게는 라디오, 텔레비전, 기차도 없었기에 외딴 브르타뉴 시골 농민은커녕 심장부 파리 도회인의 일상조차 거의 통제하지 못했다. 그는 대중 정당이나 전국 단위의 청년 운동, 국민교육 체계를 수립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히틀러에게 그런 것들을 실행할 동기와 힘을 준 것이 20세기 신기술이었다. 우리는 2084년 디지털 독재의 동기와 힘이 무엇이 될지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히틀러와 스탈린을 모방하는 데만 머무를 리는 만무하다. 1930년 대의 전투를 다시 치를 준비만 하다가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날 아드는 공격에 허를 찔릴 수도 있다.

-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위험은 디지털 독재만이 아니다. 자유주의 질서는 자유와 더불어 평등의 가치도 중시해왔다. 자유주의는 늘 정치적 평등을 소중히 여겨왔을 뿐 아니라, 경제적 평등 또한 중요 하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사회 안전망 없이 쥐꼬리만 한 경제적 평등만 가지고서는 자유도 의미가 없다. 하지만 빅데이 터 알고리즘은 자유를 없앨 수 있는 것과 같이 유례없는 최고의 불 평등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 모든 부와 권력은 극소수 엘리트의 손 에 집중되는 반면, 대다수 사람들은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정 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나쁜 처지에 놓일 수 있다. 바로 사회와의 관련성을 잃는 것이다.

- 만약 모든 부와 권력이 소수 엘리트의 수중에 집중되는 것을 막고 싶다면, 그 열쇠는 데이터 소유를 규제하는 것이다. 고대에는 토지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이었다. 정치는 땅을 지배하기 위한 투쟁이었는데, 너무나 많은 땅이 너무나 적은 수의 손에 집중되었고 사회는 귀족과 평민으로 갈라졌다. 근대에 와서는 기계와 공장이 토지보다 더 중요해졌고, 정치 투쟁도 이런 핵심적 인 생산 수단을 지배하는 데 집중됐다. 너무나 많은 기계가 너무나 적은 손에 집중되면서 사회는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양 분됐다. 하지만 21세기에는 데이터가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 부상하
면서 토지와 기계는 밀려났다. 정치는 데이터 흐름을 지배하기 위 한 투쟁이 될 것이다. 앞으로 데이터가 너무나 적은 손에 집중되면 인류는 서로 다른 종으로 나뉠 것이다.

- 인간에게는 몸이 있다. 지난 세기 동안 기술은 우리를 우리 몸으 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우리는 우리가 냄새를 맡고 맛을 보는 것에 집중하는 능력을 잃어왔다. 대신 스마트폰과 컴퓨터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길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사이버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에 더 관심이 많다. 스위스에 사는 사촌과 이야기하기는 어느 때보다 쉬 워졌는데 아침 식사를 할 때 남편과 대화하기는 더 힘들어졌다. 눈 은 끊임없이 나 대신 스마트폰에 가 있다.'
과거에 인간은 그런 부주의를 누릴 형편도 못 됐다. 고대 수렵 . 채집인은 언제나 주의를 살피고 경계했다. 버섯을 찾아 숲속을 헤 맬 때는 땅 위로 조금이라도 볼록하게 튀어나온 것이 있는지 예의 주시했다. 행여 뱀이 숨어 있을지도 몰라 풀 속의 사소한 움직임에도 귀를 세웠다. 먹을 수 있는 버섯을 찾았을 때도 독버섯과 분간하 기 위해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맛을 봤다. 지금처럼 풍요로운 사회 에 사는 사람은 그때만큼 예민한 경각심이 필요 없다. 우리는 슈퍼 마켓 복도 사이를 돌아다닐 때도 문자 메시지를 보내며 수많은 음 식을 골라서 살 수 있다. 하나같이 보건 당국의 안전검사를 거친 것 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무슨 음식을 고르든 다음 수순은 똑같다. 화 면을 앞에 두고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서둘러 먹 을 뿐, 정작 실제 음식 맛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 원자폭탄은 너무나 명확하고 즉각적인 위협이어서 아무도 무시 할 수 없다. 반면 지구온난화는 상대적으로 불분명하고 오래 계속 된 위협이다. 따라서 장기적인 환경을 고려하다가도 단기적으로 고 통스러운 희생이 요구될 때마다 민족주의자들은 당장의 국가 이익 을 우선시하고 환경 문제는 나중에 걱정해도 된다거나 다른 누군가 에게 떠넘기는 쪽으로 행동하기 쉽다. 아니면 아예 문제 자체를 부 인할 수도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회의주의를 민족주의 우파가 옹 호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좌파 사회주의 자가 "기후변화는 중국의 농간"이라고 트윗을 날리는 경우는 드물 다. 지구온난화 문제에 민족주의식 해답이란 없다 보니 민족주의 정치인들은 아예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어 한다. 

- 솔직히 말해 전통 종교가 그토록 많은 영역을 뺏긴 것은 애당초 농사나 의료에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제와 구루의 진짜 특 기는 비가 오게 하거나, 병을 치료하거나, 예언하거나 마술을 부리 는 것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의 특기는 언제나 해석이었 다. 사제는 기우제 춤을 추거나 가뭄을 끝내는 법을 아는 사람이 아 니었다. 오히려 기우제 춤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나, 신이 우리의 기 도를 못 알아듣는 것처럼 보일 때도 왜 신을 믿어야 하는지 정당화 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종교 지도자가 과학자와의 경쟁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하 게 된 것도 바로 그 해석의 천재성 때문이다. 과학자도 지름길을 찾 아내고 증거를 비트는 법을 안다. 하지만 궁극에 가서 과학이 보여주는 특징은, 언제든지 잘못을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시도하는 것 이다. 그래서 과학자는 점점 더 농작물을 잘 키우고 더 나은 의약품 을 개발하는 법을 알게 되는 데 반해, 사제와 구루는 더 나은 변명 거리를 내놓는 법만 익히게 된다. 수 세기에 걸쳐 참된 신앙인들조 차 그런 차이에 주목해왔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종교는 기술적인 영역에서 갈수록 권위를 잃어왔다. 전 세계가 점점 단일 문명이 되 어온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무엇이든 실제로 효과가 있으면 누 구나 그것을 받아들인다.
- 전통 종교는 인류가 당면한 문제의 치유책이 아니라 일부이다. 종교는 여전히 민족의 정체성을 다지고 제 3차 세계대전을 촉발할 수 있을 만큼의 정치적 힘을 갖고 있다. 하 지만 21세기 지구촌이 직면한 문제를 추가하기보다 해결하는 데 이 르면 종교가 제공할 것은 많지 않다. 많은 전통적 종교들이 보편 가 치를 옹호하고 우주적 타당성을 주장해도, 지금은 근대 민족주의의 시녀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북한이나 러시아나 이란이나 이스라엘 이나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민족적 차이를 넘어 핵전쟁과 생태 붕 괴와 기술적 파괴 위협에 대한 지구적 해법을 찾기가 어렵다.
- 지구온난화나 핵확산을 다룰 때 시아파 성직자는 이란 국민에게 이 문제를 이란의 관점에서 보게 한다. 마찬가지로 유대인 랍비는 이스라엘인에게 무엇이 이스라엘에 좋은지에 대해 주로 관심을 갖 도록 부추기고, 동방정교회 사제는 러시아인에게 러시아인을 먼저 생각하고 러시아의 이익을 우선 생각하라고 한다. 결국 우리는 신 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니 우리 민족에게 좋은 것이 신도 기쁘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민족주의의 과열을 배격하고 보편적인 전망 을 앞세우는 종교계 현자들도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그런 현자 들이 행사하는 정치적 영향력은 열세에 있다.
우리는 진퇴양난에 빠져 있다. 인류는 지금 단일 문명을 이뤄 살고 있으며, 핵전쟁과 생태 붕괴, 기술적 파괴의 문제는 지구촌 차원 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민족주의와 종교는 여전히 우리 인류의 문명을 다양한 진영들로 사분오열시키고 있다. 상호 적대감을 조장할 때도 많다. 이런 지구 차원의 문제와 지역 정체성 의 충돌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현재 위기에 처한 세계 최대 다 문화 실험의 장, 유럽연합이다. 유럽연합은 보편 자유주의 가치의 약속 위에 건설되었지만, 지금은 통합과 이민 문제의 어려움 때문 에 와해될 지경에 이르렀다.

- 지난 수십 년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농업 사회 초기에는 인간의 폭력으로 인한 사망이 전체 사망률의 15퍼센트까 지 올라갔지만, 20세기에는 5퍼센트로 낮아졌고 지금은 1퍼센트에 불과하다! 하지만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국제 상황은 급속 히 나빠지고 있다. 전쟁 도발이 다시 유행인 데다 군비 지출 규모는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다. 일반인과 전문가 모두, 1914년에 일어난 오스트리아 대공의 피살이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했던 것 처럼, 2018년 시리아 사막에서의 어떤 사고나 한반도에서의 현명 하지 못한 움직임이 글로벌 분쟁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세계의 긴장이 갈수록 고조되는 상황에서 워싱턴과 평양, 또 다 른 몇몇 나라 지도자들의 인성까지 감안하면 분명히 우려할 만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1914년과 2018년 사이에는 몇 가지 핵심적인 차이가 있다. 특히 1914년에는 전쟁이 세계 전역 엘리트들의 구미 를 당겼다. 전쟁을 잘만 치르면 자국의 경제 번영과 정치권력에 도 움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반면, 2018년의 상황에서 전쟁은 이겨봐야 수많은 종이 사라질 위 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아시리아와 진나라 때부터 대제국들은 대개 폭력적인 정복을 통해 건설됐다. 1914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모든 강대국들은 전 쟁에서 승리한 덕분에 그만한 지위를 누렸다. 예를 들어, 일본 제국 은 중국,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덕분에 지역 강국으로 부상했고, 독일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과 프랑스를 각각 전쟁에서 이기고 유럽의 맹주가 되었다. 영국 역시 지구 곳곳에서 잇따라 벌 인 화려한 소小전쟁들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영화로운 제국을 건설했다. 1882년 영국이 이집트를 쳐들어가 점령했을 때도, 승부 처가 된 텔엘케비르 전투에서 숨진 영국군 병사는 57명에 불과했 다. 오늘날 서방 국가에 무슬림 국가 점령이란 악몽의 불쏘시개이 지만, 당시 영국은 텔엘케비르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는 무장 저항 에 거의 시달리지 않았다. 그 뒤로 영국은 나일 계곡과 요충지인 수 에즈 운하를 60년 이상 지배했다. 다른 유럽 강국들도 영국을 따라 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벨기에가 각각 베트남과 리비아, 콩고의 군사 점령을 꾀했을 때 유일한 걱정거리는 다른 나라가 선수를 치는 것이었다.
미국이 강대국 지위에 오르는 데는 경제 사업뿐 아니라 군사 행동 덕도 톡톡히 봤다. 1846년에는 멕시코를 침공했고, 캘리포니아 와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뉴멕시코, 콜로라도, 캔자스 일부, 와이 오밍, 오클라호마를 차례로 정복했다. 평화협정으로 미국의 이전 텍사스 병합까지 확정했다. 약 1만 3,000명의 미군 병사들이 전쟁 터에서 사망한 끝에 미국의 영토는 230만 제곱킬로미터 더 늘어났 다(프랑스와 영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를 합친 것보다 넓은 규모다. 그것 은 새천년의 거래였다.
그렇기 때문에 1914년 미국과 영국, 독일의 엘리트들은 전쟁에 서 이기면 어떻게 되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정확히 알았다. 반면 2018년 글로벌 엘리트들로서는 이런 유형의 전쟁이 더 이상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 모스크바는 호기로운 말을 쏟아내지만 러시아 엘리트 자신이 십 중팔구 군사적 모험의 실제 비용과 이득을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 상황을 더 이상 키우지 않으려고 대단히 조심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니까 러시아는 '제일 약한 아이를 골라서 때리되 선생님이 개 입할 정도로 너무 많이 때리지는 말라'는 학교 내 '왕따' 원칙을 따 르고 있는 것이다. 만약 푸틴이 스탈린이나 표트르 대제, 칭기즈칸 의 정신으로 전쟁을 수행했다면, 이미 오래전에 러시아 탱크는 바 르샤바와 베를린은 아니라도 트빌리시와 키예프까지 진격했을 것 이다. 하지만 푸틴은 칭기즈칸도 스탈린도 아니다. 그는 21세기에 와서 군사력만으로는 멀리 갈 수 없으며, 성공적인 전쟁이란 제한 적인 전쟁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처럼 보인다. 시리아 에서도 러시아는 공중 폭격은 인정사정없이 퍼부었지만 보병 투입 은 최소화했고, 다른 당사자들이 심각한 전투를 벌이도록 하되 전 쟁이 인접국들로 번지는 것은 막았다.
실제로 러시아의 관점에서 볼 때, 최근 몇 년 사이에 취한 이른바 공격적인 행보는 새로운 글로벌 전쟁으로 가기 위한 포석이라기보 다 노출된 방어벽을 보강하려는 시도였다. 

- 지금처럼 무력 위협과 흉흉한 기운이 가득한 세계에서 그나마 우 리가 평화를 기대해볼 수 있는 것은, 주요 강대국들이 최근의 성공 적인 전쟁 사례는 별로 접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과거 칭기즈 칸이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외국을 침공하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지만 오늘날 에르도안이나 모디, 네타냐후 같은 민족주의 지도 자들은 목소리만 클 뿐 실제 개전에 관해서는 대단히 조심스러워한 다. 물론 누군가 21세기의 조건하에서도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르는 묘수를 찾아낸다면 일거에 지옥의 문들이 열릴 수 있다. 러시아가 크림 반도 침공에 성공한 일이 특별히 무서운 징조로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부디 그것은 두고두고 예외로 남기를 바랄 뿐이다.
- 이 문제에 대해서도 옥신각신할지 모른다. 유일신의 첫 번째 분명한 증거는 기원전 1350년경 파라오 아케나톤의 종교혁명에서 나왔 으며, 메사 석비(기원전 9세기경 모아브 왕국의 메사 왕이 이스라엘에 승리 하고 세운 기념비-옮긴이) 같은 기록은 성경 시대 이스라엘의 종교 가 당시 모아브 같은 이웃 왕국들의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메사 왕이 자신들의 위대한 신 그모스를 묘사한 방식을 보면 구약 성경에서 야훼를 묘사한 것과 거의 같다. 하지만 유대교 가 유일신 사상에 공헌했다는 생각의 진짜 문제는 그것이 좀처럼 자랑스러워할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윤리적 관점에서 봤을 때 유일신 사상이야말로 인류 역사에서 최악의 사상 중 하나였다는 주 장도 있다.
- 유일신교는 인간의 도덕적 기준을 개선하는 데 별로 기여한 게 없다. 단지 힌두교도는 여러 신을 믿는 반면 무슬림은 유일신을 믿 기 때문에 무슬림이 힌두교도보다 더 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 람은 없을 것이다. 기독교도 정복자들이 이교도인 아메리카 원주 민 부족들보다 더 윤리적이었던가? 유일신교가 한 가지 확실하게 했던 일은, 사람들을 이전보다 훨씬 더 편협하게 만들어 종교적 처 형과 성전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한 것이다. 다신교를 믿는 사람들 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신을 섬기고 다양한 의식과 의례를 수행하는 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반 면 일신교 신자들은 자신들의 신이야말로 유일한 신이며 이 신은 보편적인 복종을 요구한다고 믿었다. 그 결과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세계로 확산될 때마다 십자군과 지하드, 종교재판과 종교적 차별도 함께 늘어났다."

- 1800년대 이전까지 유대인이 과학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당연히 유대인은 중국이나 인도, 마야 문명에서 진행된 과학의 진 보에 아무런 중요한 역할도 하지 않았다. 유럽과 중동에서 마이모 니데스 같은 일부 유대인 사상가들이 비유대인 동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봤을 때 유대인이 미친 영향은 대체로 인구 비중에 비례했다.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일어난 과 학혁명에도 유대교가 기여한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스피노자(그 도 유대 공동체의 눈 밖에 나 파문당했다)를 제외하면, 유대인으로서 근 대물리학, 화학, 생물학, 사회과학의 탄생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 물은 단 한 명도 찾기 어렵다. 아인슈타인의 조상들이 갈릴레이와 뉴턴 시절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십중팔구 는 빛을 연구하기보다 탈무드를 공부하는 데 훨씬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
- 거대한 변화는 19세기와 20세기에 와서야 일어났다. 세속화와 유대인의 계몽주의가 진행되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비유대교도의 세계관과 생활방식을 채택했다. 그런 다음 유대인들은 독일과 프랑 스, 미국 같은 나라의 대학교와 연구소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유대 인 학자들은 게토와 슈테틀(과거 동유럽에 있던 소규모 유대인 마을 - 옮 긴이)에서 자신들이 누렸던 중요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갔다. 교육을 중심 가치로 여기는 유대 문화는 유대인 과학자들이 학계에서 비범 한 성공을 거두는 데 밑거름이 됐다. 여기에는 다른 요인들도 작용했다. 박해받는 소수자로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 보이려는 욕망도 있었고, 군이나 행정기관 같은 반유대 성향이 더 강한 제도권에서 는 재능 있는 유대인의 승진이 막힌 탓도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 과학자들이 예시바에서 체득한 강한 기율과 지식 의 가치에 대한 깊은 믿음은 외부로 가져가긴 했어도, 구체적으로 도움이 될 아이디어와 통찰의 묶음을 가져간 것은 아니었다. 아인 슈타인은 유대인이었지만 그가 창안한 상대성 이론은 '유대 물리 학'이 아니었다. 토라의 신성함을 믿는 것과 '에너지는 질량 곱하기 빛의 속도 제곱'이라는 과학적 통찰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 신을 믿는 사람들은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묻는 질문을 받으 면, 먼저 우주의 불가해한 신비와 인간 이해력의 한계에 관한 이야 기부터 한다. 이들은 “과학은 빅뱅을 설명할 수 없다"라고 운을 뗀 뒤 “그래서 신이 있을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마치 마술사가 카드 한 장을 다른 카드와 감쪽같이 바꿔치 기해 관객을 속이는 것처럼, 우주의 신비를 재빨리 세상의 입법자 로 대체한다. 알 수 없는 우주의 비밀에 '신'의 이름을 갖다 붙이고 서 그다음에는 그것을 어떻게든 비키니와 이혼을 비난하는 데 활용 한다. "우리는 빅뱅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공장소 에서는 두발을 가려야 하고 동성애 결혼 합법화에 반대표를 던져야 한다." 이 두 명제는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을뿐더러 사실은 상충 된다. 우주의 신비가 깊을수록, 그것에 책임이 있는 것은 무엇이 됐 건 여성의 복장이나 인간의 성적 행동에 관심을 가질 가능성은 희 박하다.
- 우주의 신비와 세상의 입법자 간의 빠진 연결고리는 흔히 어떤 신성한 책이 제공한다. 이 책은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규제들로 가 득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우주의 신비 탓으로 돌린다. 신도들의 설명대로라면 그 책도 시간과 공간을 창조한 신이 지었다. 그 신은 어리석은 우리 인간을 깨우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그 내 용은 주로 어떤 불가사의한 신전의 의식과 음식 터부에 관한 것들 이다. 사실은 성경이 됐건, 쿠란이 됐건, 모르몬 경전이 됐건, 베다 가 됐건, 다른 어떤 신성한 책이 됐건, 그 책이 에너지는 질량 곱하 기 빛의 속도의 제곱이며 양성자의 질량은 전자의 1,837 배라는 법 칙을 결정한 것과 같은 힘에 의해 씌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아는 최선의 과학 지식에 따르면, 이 모든 성스러운 텍스트들은 상상력이 뛰어난 호모 사피엔스가 쓴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선조가 사회 규범과 정치 구조를 정당화하려고 발명 한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존재의 신비에 관해 늘 궁금해해왔다. 하지만 그것이 유대교와 기독교, 힌두교의 성가신 법률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법률들은 수천 년 동안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데에는 확실히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바로 그 점에서 이 법률들도 세속 국가와 제도의 법률과 근본적으 로 다르지 않다.
- 모든 종교와 이데올로기, 신조에는 그늘이 있다. 어떤 신조를 따 르든지 불가피한 그늘을 인정하고, "우리에게는 일어날 리 없다”라 는 안일한 확신을 피해야 한다. 세속주의 과학은 전통 종교 대다수 와 비교하면 한 가지 큰 이점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그늘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은 원리상 기꺼이 자신의 실수와 맹점 을 인정한다. 그것이 아니라 어떤 초월적인 힘이 계시한 절대 진리 를 믿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실수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경 우 자신이 믿는 이야기 전체를 무효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 만 오류를 범하기 마련인 인간의 진리 추구를 믿는다면, 실수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게임의 일부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독단적이지 않은 세속주의 운동은 상대적으로 겸 손한 약속들을 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알기 때문에 작고 점진적인 변화를 일으키길 희망한다. 최저임금을 몇 달러라도 올리고 아동 사망률을 몇 퍼센트라도 낮추려는 식이다. 반면, 독단 적인 이데올로기는 자기 확신이 지나친 나머지 습관적으로 불가능 한 것을 이루겠다고 서약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의 지도자는 너 무나 거침없이 '영원'과 '순수', '구원'에 관해 이야기한다. 마치 어 떤 법률을 시행하거나, 어떤 사원을 짓거나, 어떤 영토를 정복하면 일거에 전 세계를 구할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지금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기를 맞고 있다. 이런 때 나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무오류성을 주 장하는 사람보다 무지를 인정하는 사람을 더 신뢰할 것이다. 만약 자신의 종교나 이데올로기나 세계관이 세계를 이끌기를 바란다면, 내가 던지고 싶은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의 종교, 이데올 로기, 세계관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무엇이었나요? 무엇을 잘못 했지요?" 아무런 심각한 잘못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나는 당신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 호모 사피엔스 종으로서 인간은 진실보다는 힘을 선호한다. 세계 를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통제하려는 데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도, 그러면 통제하기가 쉬 워질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따라서 진실이 지배하고 신화는 무시 되는 사회를 꿈꾼다면 '호모 사피엔스'에게서 기대할 것은 거의 없 다. 차라리 침팬지에게 운을 시험해보는 게 낫다.

- 우리는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할까? 많은 교육 전문 가들은 학교의 교육 내용을 'C', 즉 비판적 사고 critical thinking, 의사 소통communication, 협력collaboration, 창의성creativity으로 전환해야 한다 고 주장한다. 보다 포괄적으로 말하면, 학교는 기술적 기량의 교육 비중을 낮추고 종합적인 목적의 삶의 기술을 강조해야 한다.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에 대처하고, 새로운 것을 학습하며, 낯선 상 황에서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일 것이다. 2050년의 세계에 발맞춰 살아가려면 새로운 생각과 상품을 발명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반복해서 재발명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변화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경제뿐 아니라 '인간이 라는 것'의 의미 자체가 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미 1848년 에 《공산당 선언>은 “모든 단단한 것들은 공중으로 분해된다"고 선 포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로 염두에 둔 것은 사회적, 경제적 구조였다. 2048년이면 물리적, 인지적 구조 또한 공중이나 클라우드 속 데이터 비트로 분해될 것이다.
1848년에는 수백만 명이 시골 농장에서 일자리를 잃고서 대도시 로 이주한 후 공장에서 일했다. 하지만 대도시에 이르렀다고 그들의 젠더가 바뀌어 있거나 여섯 번째 감각이 더해져 있을 가능성은 없 었다. 만일 도시의 어떤 방직공장에 일자리를 얻었다면, 노동자로서 남은 인생을 그 일을 하며 보내리라 기대할 수 있었다.
반면, 2048년이 되면 사람들은 사이버 공간으로의 이민이라든가 유동적인 젠더 정체성, 컴퓨터 체내이식을 통한 새로운 감각 체험 등에 대처해야 할지도 모른다. 설령 자신이 3D 가상현실 게임에 쓸 최신 유행 패션을 디자인하는 데서 일과 의미를 찾았다 해도, 10년안에 이런 특정 직업뿐 아니라 이 정도 수준의 예술적 창의력을 요 구하는 모든 직업이 AI에 의해 대체될 수도 있다. 25세 때는 데이 트 사이트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런던에 살며 패션숍에서 일하는 25세 이성애자 여성'이라 하고, 35세가 되어서는 '젠더 불특정 인 간으로, 나이 조정 시술을 거쳤으며, 신피질 활동은 주로 뉴코스모 스 가상세계에서 이뤄지고 있고, 평생의 목표는 어떤 패션디자이너 도 가본 적 없는 곳에 가는 것"이라고 소개할지도 모른다. 45세 때 는 데이트며 자기소개 따위는 다 한물간 것이 된다. 그냥 알고리즘 이 내게 꼭 맞는 짝을 찾아주기만(혹은 만들어주기만 기다리면 된다. 패션디자인이라는 예술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만 하더라도, 이때가 되면 알고리즘에 의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추월당해 10년 전 자신의 최고 성과물을 보면 자부심보다 수치감에 휩싸이게 된다. 더구나 이제 겨우 45세다. 아직도 자기 앞에는 급격한 변화의 시간 이 수십 년 더 남아 있다.

- 우리에게 의미와 정체성을 부여하는 이야기는 모두가 허구적이지만 인간은 그것을 믿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야기를 실제처럼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인간이 이야 기를 믿고 싶어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실제로 믿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미 수천 년 전에 사제들과 무당들은 답을 찾았다. 그것은 바로 의식이다. 의식은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하 고 허구적인 것을 실제로 만드는 마술적인 행동이다. 의식의 핵심 이 바로 이런 마법의 주문이다. “호쿠스 포쿠스, X는 Y!' (X를 Y로 변하게 할때 외는 주문 - 옮긴이)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신봉자에게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천주교 사제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빵 한 조각과 포도주 한 잔을 들고서는 빵은 그리스도의 살이며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라고 선포한다. 신도는 그것을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의 교감을 얻 는다. 그리스도를 실제로 입안에 넣고 맛보는 것보다 무엇이 더 생생 할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 사제는 성찬식 때 이런 과감한 선포를 라 틴어로 했다. 라틴어는 고대 종교와 법률 그리고 생명의 비밀을 이야 기할 때 쓰는 언어였다. 모여 있던 농민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사제는 빵 한 조각을 높이 들고 이렇게 선포했다. "호크 에스 트 코르푸스!(Hoc est corpus!, 이것은 몸이다!)" 그러면 아마도 그 빵은 그리스도의 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크 에스트 코르푸스” 라는 라틴어를 몰랐던 까막눈의 농민들 머릿속에서는 그 말이 "호 쿠스 포쿠스Hocus pocus!"로 와전됐고, 그 뒤 이것은 개구리를 왕자로 변하게 하고 호박을 마차로 바꿔놓는 강력한 주문으로 거듭났다."
기독교가 탄생하기 1,000년 전에 고대 힌두교도 같은 수를 썼다. 《브리하다라냐카 우파니샤드》는 말을 바치는 의식을 우주의 모든 이야기를 구현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 경전 역시 "호쿠스 포쿠 스, X는 Y!"의 구조를 따라 이렇게 말한다. '제물인 말의 머리는 새 벽이며 눈은 태양, 활력은 공기, 벌린 입은 바이스라바나vaisravana (다 문천왕多聞天王, 불교의 사천왕 중 수미산의 북방을 수호하는 천왕 - 옮긴이)라 불리는 불, 그리고 제물인 말의 몸통은 연年 (...) 사지는 계절, 관 절은 월과 격주, 발은 낮과 밤, 뼈는 별, 살은 구름 (...) 하품은 번개, 전율은 천둥, 소변은 강우, 울음은 음성이다.""그리하여 한 마리의 불쌍한 말은 온 우주가 된다.
초에 불을 붙이거나 종을 치거나 묵주를 굴리는 것 같은 세속적 인 동작도 심오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면 거의 모두가 의식으로 바뀔 수 있다. 머리를 숙이거나(목례) 엎드리거나(부복) 두 손바닥을 맞대는(합장) 식의 몸짓도 마찬가지다. 시크교도의 터번부터 무슬림 의 히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쓰개에도 너무나 깊은 의미가 담긴 나머지, 이 때문에 수 세기 동안 열정적인 투쟁이 계속돼왔다. 음식에도 또한 영양가를 훌쩍 뛰어넘는 영적인 중요성이 부여될 수 있다. 새 생명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부활절 달걀이나 유대인이 유월절에 이집트 노예 시절과 기적적인 탈출을 기억하기 위해 먹어야 하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도 다 마찬가지 다. 뭔가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아온 세상의 음식이 드물 정도다. 그래서 새해 첫날이면 종교적인 유대인은 새해가 달콤하기 를 바라면서 꿀을 먹고, 물고기처럼 다산에 전진만 했으면 하는 마 음에서 생선 대가리를 먹고, 석류의 수많은 씨앗처럼 좋은 행실이 불어났으면 해서 석류를 먹는다.
비슷한 의식들이 정치적 목적으로도 활용돼왔다. 수천 년 동안 왕관과 왕좌, 지휘봉이 왕국과 온 제국을 대표했고, 수백만의 양민이 '왕좌'와 '왕관을 차지하기 위해 벌어진 전쟁에서 죽어갔다. 왕실은 극도로 정교한 의전을 개발했고, 그 복잡함이란 종교 예식과 자웅을 겨룰 정도였다. 군에서도 기율과 의식은 불가분의 관계다. 고대 로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병사들은 오와 열을 맞춰 행진 하고, 상관에게 경례하고, 군화에 광을 내는 데 무수히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나폴레옹이 화려한 색의 리본을 위해 남자들이 목숨을 바 치게 만든 것은 유명하다(나폴레옹은 영국과의 전쟁 개전 1년 후 붉은색 리본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제정해 군인들에게 대거 수여함으로써 사기를 진작했다-옮긴이).
아마 공자만큼 의식의 정치적 중요성을 잘 이해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는 의례를 엄격히 준수하는 것이 사회가 조화를 이루고 정치가 안정을 얻는 열쇠라고 봤다. 공자가 쓴 《예기》와 《주례> <의 례》 같은 고전을 보면 국가 행사에서 따라야 할 의례에 대해 더없 이 상세하게 기록해놓았다. 심지어 예식에 사용되는 제기의 수, 연주에 사용되는 악기 유형, 참가자가 갖춰 입어야 할 의복의 색상 까지 나와 있을 정도다. 중국에 어떤 위기가 닥쳤을 때에도 유학자 들은 곧장 의례를 소홀히 한 탓으로 돌리곤 했다. 마치 군부대의 주 임상사가 군사적인 패배를 두고 군기 빠진 병사들이 군화에 광을 내지 않은 탓으로 돌리는 것과 같다."
- 근대 서구에서는 유교가 의식에 집착한 것을 두고 흔히 인간에 대한 얕은 이해와 고주의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공자야말로 시대를 뛰어넘어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 을 깊이 꿰뚫어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 문화-중국을 필두 로 이웃 나라인 한국과 베트남, 일본에서 극도로 수명이 긴 사 회적, 정치적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아마 우연이 아닐 것이 다. 인생의 궁극적인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의례와 의식이 거대한 장애물이다. 하지만 공자와 같이 사회의 안정과 조화에 관 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실은 골칫거리일 때가 많다. 그런 사람에 게는 의례와 의식이야말로 최선의 동맹이다.
- 성경과 쿠란, 베다를 쓴 것도 우리 인간의 손가락이고, 이들 이야 기에 힘을 부여한 것도 우리의 정신이다. 모두가 아름다운 이야기 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아름다움도 철저히 보는 사람 눈에만 그렇 게 보인다. 예루살렘, 메카, 바라나시와 부다가야(둘 다 인도의 힌두교 성지-옮긴이)는 성스러운 장소이지만, 그 역시 인간이 그곳에 갔을 때 경험하는 느낌 때문이다. 우주도 그 자체로는 의미 없는 원자들 의 뒤죽박죽일 뿐이다. 아무것도 아름답거나 성스럽거나 섹시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의 느낌이 그렇게 만든다. 빨간 사과를 먹음직스럽게 만드는 것도, 똥 덩이를 역겹게 만드는 것도 오로지 인간의 느 낌이다. 인간의 느낌을 제거하면 남는 것은 분자 다발뿐이다.
우리는 의미를 찾고 싶어 하면서도 우주에 관해 이미 다 만들어 진 어떤 이야기에 자신을 맞추려고 한다. 하지만 세계에 관한 자유 주의의 해석에 따르면 진실은 정확히 그 반대다. 우주가 내게 의미 를 주는 게 아니다. 내가 우주에 의미를 준다. 이것은 나의 우주적인 소명이다. 나는 정해진 운명 혹은 다르마가 있다. 만일 내가 심바 나 아르주나 입장이라면 왕국의 왕관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운명 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지금 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나는 유 랑 서커스단에 합류할 수도 있고, 브로드웨이로 가서 뮤지컬 배우 로 노래를 할 수도 있고, 실리콘밸리에 가서 스타트업을 창업할 수 도 있다. 자유롭게 나 자신의 다르마를 창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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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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