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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3.08.07 죽음의 역사
  3. 2023.06.30 에너지 세계사
  4. 2023.06.09 호모 히브리스 17
  5. 2023.05.24 인류의 여정
  6. 2023.01.09 맛의 세계사 1
  7. 2022.10.13 자원쟁탈의 세계사 1
  8. 2022.10.09 날씨가 바꾼 세계의 역사 1
  9. 2022.07.30 패션의 흑역사
  10. 2022.07.07 우편함 속 세계사

- 한나라와 로마는 온난한 기후 덕분에 농업 생산성과 경제력이 크게 증가하면서 부강한 나라로 성장했고, 오늘날 동아시아와 유럽 문화권의 기초를 이룬 대제국으로 자리 매김할 수 있었지요. 몽골제국 역시 칭기즈칸이 몽골을 통일할 무 렵 때맞춰 척박한 스텝 지대에 많은 비가 내려 인구와 경제력, 군사력이 크게 성장하면서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세계 제국으로 발 전할 수 있었습니다.

- 1만 2,000년쯤 전에는 플라이스토세의 매섭던 추위가 잦아들 고, 극지나 고산 지대 정도를 제외한 땅에서는 빙하가 녹았다. 빙 하기의 기후와 환경에 적합하게끔 진화했던 매머드, 검치호 등은 멸종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동식물이 지구상에 모습을 드러내거 나 번성했다. 즉, 우리에게 익숙한 기후와 자연환경은 홀로세라 불 리는 1만 2,000여 년 전에야 비로소 형성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1만 2,000여 년 전에 단지 간빙기가 시작되었을 뿐이며,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또 다른 빙하기가 올 수 있다고 주 장한다. 반면 인류가 문명을 발달시키면서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 를 많이 배출한 덕분에, 빙하기가 오지 않고 인류 문명이 이어질 거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물론 50억여 년 전에 탄생한 이후로 지 구의 기후가 계속해서 변해왔음을 상기한다면, 언젠가 지구에 또다시 빙하기가 도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이산 화탄소를 비롯한 온실가스 배출을 억제하기 위해 전 세계가 노력 하고 있는 오늘날의 상식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자연적인 기 후변화는 아무리 짧아도 수백 년, 길게는 수천만 년에서 1억 년이 상의 주기로 이루어지는데, 최근에는 인간의 무절제함 때문에 몇 년에서 몇십 년으로 눈에 띄게 그 주기가 짧아졌다. 이처럼 급격하 고 인위적인 기후변화는 생태계는 물론 인류 문명에도 심각한 위 기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기후위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온실가스를 마음대로 방출해도 괜찮다고 여겨서는 곤란한 이유다.
-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12만~9만여 년 전에 드디어 남아프리카를 벗어났다. 이 무렵에 접어들어 지구 자전축이 바뀌면서 사하라사 막에는 습기를 가득 품은 계절풍이 불었다. 때마침 지구 기온도 계속해서 낮아졌다. 그 덕분에 메마른 사막에는 비가 자주 내렸고, 기온이 낮아지니 수분의 증발량도 줄었다. 사하라사막은 강물이 흐르고 동물이 뛰노는 초원으로 바뀌었다. 기후변화가 아프리카 의 지리적 환경을 바꾸면서 인류는 한층 넓은 세계를 향해 발걸음 을 내딛을 수 있었다.
- 초원으로 변한 사하라사막은 인류에게는 신천지나 다름없었다. 수많은 인류는 새로운 삶의 터전과 먹거리를 찾아 북쪽으로 이주 했다. 수만 년에 걸친 이주 끝에 인류가 분포하는 영역은 아라비 아반도가 있는 서남아시아까지 확대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주 행렬은 7만~6만여 년 전에 일어난 기후변화 때문에 잠시 멈추게 되었다. 빙하기로 인한 기후변화가 사하라 지역을 또다시 사막으 로 만들면서 사하라 북쪽으로 이주한 현생인류는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잃고 말았다.
빙하기는 인류가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를 넘어 지구 전역으로 퍼져 나갈 기회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빙하기에 접어들면서 해 수면이 오늘날보다 최대 90미터까지 낮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유라시아 대륙과 가까이 있는 영국, 일본, 인도네시아와 필리 핀, 뉴기니 등의 섬은 물론, 호주와 아메리카 대륙까지 육지로 이 어졌다. 그 덕분에 인류는 유라시아 각지는 물론, 오늘날에는 바다 로 분리된 다른 대륙과 섬들에까지 이주할 수 있었다.
- 6만~4만여 년 전에는 빙하기와 더불어 서남아시아가 건조한 불모지로 변했다. 인류는 새로운 삶터를 찾아야 했다. 사하라사막 에 가로막힌 옛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인류는 북쪽과 동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때마침 유럽에는 습윤한 계절풍이 불었다. 북유럽은 빙하에 덮여 있었고 중부 유럽에도 척 박한 툰드라가 넓게 펼쳐져 있었지만, 남유럽과 동유럽의 넓은 평 야에는 스텝뿐만 아니라 비교적 비옥한 초원과 삼림이 펼쳐져 있 었다. 이러한 환경은 인류가 수렵 채집 생활을 하며 지내기에 알 맞았다. 남유럽과 동유럽의 비옥한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인류는 불과 도구 그리고 털가죽 옷의 힘을 빌려 중부 유럽의 툰드라까지 진출했다.
- 한편 인류가 이주하기 수만~수십만 년 전부터 유럽에는 네안 데르탈인, 아시아 각지에는 자바원인과 베이징원인 같은 호모에 렉투스의 분파들이 살고 있었다. 호모에렉투스는 현생인류와 네 안데르탈인의 직계 조상 격인 고인류이고, 네안데르탈인은 현생 인류의 사촌격에 해당하는 고인류이다. 이들은 인류가 유럽과 아 시아에 이주한 뒤에도 2~3만 년 이상 인류와 공존했다. 네안데르 탈인과 호모에렉투스는 현생인류와 마찬가지로 불과 도구를 사용 했고, 문화생활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호모에렉투스와 네안데르 탈인은 2~3만 년쯤 전에 지구상에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이들 이 왜 멸종했는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결과적으로 호모에렉투스와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와의 경쟁에서 패한 셈이다
- 인류는 동남아시아에서 동쪽과 북쪽으로 계속 이주를 하다가 1만 5,000년쯤 전에 드디어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발을 들였다. 아직 빙하기였지만, 전성기를 지나 끝물에 접어든 무렵이었다. 빙하기가 절정을 이루었던 1만 8,000년 전이라면 인류는 베링해협 근처
까지 갈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하지만 빙하기의 절정기가 지나 고 기후가 조금 온난해지면서 인류가 유라시아의 북동쪽 끝인 축 치반도 일대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빙하기의 끝물에 이르러 해수 면이 조금씩 상승했지만, 아직은 빙하기였기에 베링해협은 여전 히 땅으로 이어져 있었다. 빙하기와 간빙기가 교차하는 절묘한 타 이밍에 축치반도까지 도달한 인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베링해 협을 건넜다.
베링해협 너머에는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이 펼쳐져 있었고, 인류는 수천 년에 걸쳐 아메리카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로써 인 류는 빙하기의 기후변화 덕분에 지구 전역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 다. 10만 년 가까이 아프리카 남부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빙하 타고 내려와 친구를 만난 둘리처럼, 빙하를 타고 전 세계로 뻗어 나 갈 수 있었던 셈이다.

- 지금으로부터 1만 2,000여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났다. 지표면의 3분의 1을 뒤덮었던 빙하가 녹기 시작했고, 지구는 수천 년 에 걸쳐 온난한 기후로 변했다. 이에 따라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유라시아와 이어졌던 호주, 아메리카는 별개의 대륙이 되었고, 영 국, 일본, 뉴기니, 인도네시아 등은 섬이 되었다. 빙하기가 끝나면 서 지구는 오늘날의 지형도에 나타난 모습과 닮은 땅과 바다를 갖 추었다.
따듯해진 홀로세의 지구에서, 인류는 야생 식물과 동물을 작물 화·가축화하여 식량을 생산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땅의 모습과 환경이 바뀐 덕분에, 인류는 거대하고 체계화된 집단을 이루며 살 아갈 힘을 얻었다. 식량 생산 능력이 발달할수록 인간 집단은 더 한층 규모가 커지고 체계화·전문화되었다. 기후변화가 불러온 전 지구에 걸친 환경 변화는 문명이 태동할 수 있는 지리적 밑그림을 그려주었다.
- 문명의 탄생과 발전이 기후의 축복을 받아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달리 말하면 기후가 변함에 따라 문명이 쇠퇴할 수도 있음을 의미 한다. 실제로 한때 번성했던 문명이 언제부터인가 몰락하거나 자 취를 감춘 까닭은 기후변화와 깊이 관련된 경우가 적지 않다.
메소포타미아 일대는 기후가 문명의 흥망성쇠를 좌우한 대표 적인 사례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농경이 시작된 지역이며, 선구적인 고대 문명인 메 소포타미아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메소포타 미아는 '비옥한 초승달과는 거리가 멀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 스강의 강물을 이용한 관개농업이 지금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 지만,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곳에 분포한 사막은 이곳이 정말 인류최고의 농경과 문명을 잉태했던 땅인가를 의심케 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는 강수량이 적었지만, 문명의 탄생에 적합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다. 밀, 보리 등 작물화할 만한 야생식물이 자 생했고, 광물자원도 풍부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은 대규모 관개농업을 가능하게 했고, 수로를 통한 교역로 기능도 했다. 그 덕분 에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일찍부터 문명이 고도로 발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관개농업은 토양에 염분이 쌓이는 염해를 입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암석과 토양에 미세하게 존재하는 염분이 관개수로의 물에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메소포타미아는 강수 량이 적었기 때문에 토양에 축적된 염분이 빗물에 씻겨 가기를 기 대하기도 어려웠다. 하천이 흘러넘쳐야 토양의 염분을 제거해줄 수 있는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강의 범람을 막으려고 체계적인 치수 사업을 시행 해왔기 때문이다. 기원전 2,400년 무렵부터 염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재난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관개농업이 계속될수록 염해도 악화됐고, 이는 메소포타미아의 농업 생산성을 낮추고 사막화를 불러왔다. 이에 따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라는 위치를 결국 잃어버렸다. 기원전 539년 신바빌로니아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한 이후, 메소포타미아는 로마, 사산조페르시아, 이슬람 왕 조 등의 영지로 전락했다. 서구 문명의 중심지는 기후 조건이 더 나았던 지중해 연안, 아나톨리아반도, 페르시아 등지로 옮겨 갔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관개농업을 통해 강수량이 적은 기후를 극복 하고 고대 문명을 꽃피웠지만, 부족한 강수량은 관개농업이 불러 온 염해를 악화하여 결국 문명을 쇠락하게 만든 것이다.

- 에쿠우스 페루스가 뛰놀던 북아메리카와 유라시아 스텝은 비록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기후나 지형은 비슷했을 것이다. 사실 인간이 아닌 다른 동식물은 기후나 환경이 크게 달라지면 살아남 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경위야 어찌 되었든 유라시아 스텝의 인 류는 북아메리카의 동족과 달리 에쿠우스 페루스를 가축으로 삼 았다. 그리고 이 작은 차이는 말이라는 가축을 가진 유라시아 대 륙과 그렇지 못한 아메리카 대륙 간의 문명사적·인문지리적 차이 로 이어졌다.
인류가 처음에는 다른 가축과 마찬가지로 식량을 얻기 위해 말을 길들였으리라고 추정된다. 하지만 기원전 2,500~2,000년 무렵에 메소포타미아와 유라시아의 스텝 지대에서 마차가 발명되면서 말의 운명이 크게 바뀌었다. 말은 다른 가축들과 차별화된 빠 른 속도와 지구력을 갖춰 독보적인 군사적 가치를 지녔다. 즉, 운 송 수단이자 전략물자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물론 소나 당나귀도 사람을 태우거나 수레를 끌 수는 있지만, 말보다 느리고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아 교통수단이나 군용으로 활용하기에는 한 계가 있었다. 낙타는 말의 장점을 갖고 있지만, 다양한 기후와 환 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보병을 압도하는 기동력과 돌파 력을 갖춘 군용 마차, 즉 전차는 머지않아 전장을 지배했고, 전차의 보유 대수는 곧 그 나라의 국력, 군사력과 동일시되었다.
기원전 10세기 즈음부터 전차는 서서히 기병으로 변모해갔다. 지속적인 품종개량의 결과 말의 신체 구조가 사람을 등에 태운 채 질주하는 데 점점 적합해졌기 때문이다. 전차는 제작과 유지에 많 은 노력과 비용이 들 뿐만 아니라, 급격한 방향 전환이 힘들고 평 지가 아닌 지형에서는 운용하기도 어려웠다. 반면 기병은 전차보 다양성과 유지가 쉬울 뿐만 아니라 구릉지 등에서도 운용할 수 있고 방향 전환이 쉬우며 무거운 차체를 끌 필요가 없어서 속도도 더 빨랐다. 말과 혼연일체가 되어 말 위에서 활을 쏘고 창검을 휘 두르는 기병은 전차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적군을 격파할 수 있었 다. 기원전 6~7세기 무렵에서 늦어도 기원 전후에 이르러 기병은 유라시아 문명 대부분에서 전차를 대체했다.

- 미노스문명은 해상무역을 통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선진 적인 문명을 받아들였다. 북쪽에 인접한 키클라데스문명과도 교 류하며 문물을 받아들였다. 관개수로를 비롯한 수준 높은 농업 기 술을 통해 크레타섬 각지를 개간했고, 예술성과 실용성을 겸비한 도자기와 청동기도 만들었다. 선형문자 A라는 독자적인 문자 체 계도 개발했다. 나아가 강대한 해양 문명의 유지와 발전에 필수적 인 우수한 선박과 함선도 건조했고, 이를 바탕으로 석고, 상아, 금 속 등을 수입하고 세련된 도자기, 직물, 금속 공예품 등과 품질 좋 은 올리브유를 지중해 각지에 수출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그 덕분에 미노스문명은 계속해서 부강해졌고, 기원전 1,800년 무렵에는 당시로서는 강력한 왕권에 토대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 축했다. 미노스문명의 도읍 크노소스는 지중해 동부의 해상무역 중심지로 크게 번영했다. 오늘날에도 전해지는 화려하고 수준 높 은 유적과 유물은 고대 미노스문명이 얼마나 선진적이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처럼 찬란했던 미노스문명은 기원전 1,900년 무렵부터 그리스 본토에 정착한 미케네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그들이 고대 미케네 문명을 이룩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 그토록 화려하고 찬란했던 미노스문명은 기원전 1,200년 무렵 완 전히 멸망했다. 그리고 크레타섬은 그리스 본토에서 온 미케네인 에게 지배받았다. 미케네 문명은 아테네, 스파르타 등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문명과는 차이가 있지만, 그리스신화가 정 립되는 등 그리스문명의 직접적인 모태라고 할 수 있다. 《일리아 스》와 《오디세이> 역시 미케네 문명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즉, 미노스문명의 몰락은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하는 에게해의 고대 문명이 그리스 본토로 옮겨 가기 시작한 계기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미노스문명은 왜 사라졌을까? 과거에는 미노스문명이 크레타섬 북쪽에 있는 산토리니섬 화산의 대규모 분화로 인해 쇠 약해진 데다, 예기치 않았던 이민족 미케네인의 침입을 버티지 못 하고 멸망했다는 논의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 결과는 이러한 논의에 대해 중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우선 1980년대 이후 이루어진 일련의 고고학 연구 결과에 따르 면, 산토리니섬의 화산 분출은 크레타섬의 소멸보다 수 세기 이상 이른 기원전 1,600년 이전이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즉, 산 토리니섬의 화산 분출 시점은 미노스문명의 몰락을 가져오기에는 너무 이르다. 사실 미노스문명이 화산 분출로 멸망했다는 과거의 견해 역시, 미노스문명이 여러 차례의 크고 작은 지진을 극복해내며 1,000년이 훨씬 넘도록 지속되었음을 인정했다."
미노스문명이 몰락한 뒤 크레타섬이 미케네 문명의 영역에 포섭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을 근거로 미노스문명이 미케네인의 침 공으로 멸망했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일례로 미노스문명의 전 성기를 상징하는 크노소스의 왕궁이 기원전 1,450년경 어떤 이유 로 인해 파괴되기는 했지만, 이것이 미케네인의 침략으로 미노스문 명이 멸망했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 1980~1990년대 이후 이루어진 고고학적 분석 결과, 왕궁 잔해나 시신의 상태 등 이 전쟁이나 학살 등으로 파괴 및 살해되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깔끔했기 때문이다."
- 미국 위스콘신대학교의 초니스Anastasios Tsonis 교수 등이 2010년에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노스문명의 몰락은 엘니뇨 남방진동에 따른 크레타섬의 장기간에 걸친 극심한 가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초니스 교수는 지난 500년간의 유럽 강수량 데이터 를 분석한 결과,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일부 지역의 강수량은 엘니 뇨 현상이 나타나면 감소하고 라니냐 현상이 나타나면 증가하는 패턴을 띤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크레타섬은 이러한 기후 패턴이 유별날 정도로 강하게 나타났다. 이를테면 크레타섬은 엘 니뇨로 인해 서기 1,000년부터 1,500년까지, 무려 500여 년 동안 가뭄을 겪었다. 심지어 마찬가지의 기후 패턴을 지녔고 크레타섬 과 가까운 키프로스섬에는 가뭄이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기 크레타섬에는 엘니뇨로 인한 극심한 가뭄이 들었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초니스 교수는 기원전 3,000년을 전후해서 엘니뇨 남방진동의 강도가 눈에 띄게 강해졌으며 이에 따라 기원전 1,450년부터 수 백 년에 걸친 강력한 엘니뇨가 이어졌다는 분석 결과를 도출했 다." 이 시기는 미노스문명이 전성기를 지나 쇠퇴를 거듭하다 멸 망한 시기와 일치한다. 즉, 미노스문명은 엘니뇨 남방진동의 강도 변화에 따른 유난스러울 정도로 강한 엘니뇨 현상, 그리고 엘니뇨 에 유독 취약한 크레타섬의 입지 조건 때문에 가뭄이 수 세기 동 안 이어지면서 식량과 식수 부족에 시달린 끝에 몰락을 거듭했던 것이다. 항해술과 해상무역에 탁월한 노하우를 축적하고 강력한 해군력까지 갖추었다고 한들, 인구를 부양할 만한 물과 식량을 구 하지 못해서야 문명을 유지하기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한 상 황에서 기원전 1,200년 무렵, 북쪽에서 내려온 미케네인들이 가뭄 으로 힘을 잃은 미노스문명을 대신해 크레타섬을 차지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에게해와 지중해 동부의 교역 요지라는 입지 조건 덕분에 눈부 시게 발전했던 미노스문명은, 하필이면 그 입지 조건이 엘니뇨 현상에 따른 가뭄에 특히 취약했다는 이유로 인해 결국 몰락할 운명을 맞았던 셈이다.

- 아프리카의 열대우림과 사바나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동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이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거나 인간이 통과해서 문명의 교역로로 삼기에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우선 열대우림은 너무 무더웠다. 적절한 강수량과 온난한 기후는 농업 생산성을 높여 로마, 한나라와 당나라, 중세 서유럽 등의 문명이 전 성기를 맞이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하지만 열대우림의 너무 높 은 기온과 과다한 강수량은 오히려 인간의 활동과 문명의 발전을 저해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진 열대우림은 얼핏 보기에는 농사가 잘될 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강수량이 너무 많아 유기물과 무기염류가 빗물에 씻겨 내려갔기 때문이다. 이런 토양은 농사를 짓는 데 부적합했다. 물론 아마존이나 아프리카의 열대우림에도 수렵 채집을 하며 살아가는 부족들이 있지만, 이들은 이러한 환경의 제약 때문에 본격적으로 농경 생활을 하며 체계적인 문명을 발달시키지 못했다. 아프리카의 열대 사바나 역시 우기와 건기가 너무 뚜렷해서 강수량의 변동 폭이 지 나치게 큰 데다, 이로 인해 토양까지 척박해지기 때문에 농사짓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사바나와 유라시아의 스텝은 드넓은 초원이 분포한 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문명 발달의 측면에서 보면 결정적인 차이 가 존재한다. 바로 동물이다. 에쿠우스 페루스, 즉 말의 직계 조상 을 인류에게 선사한 유라시아 스텝과 달리, 아프리카 사바나에는 인류가 길들일 만한 동물이 거의 없었다. 생각해보라. 사자나 표범, 아프리카코끼리, 기린, 하마, 악어 같은 거대하고 사납기 그지없는 동물을 인류가 어떻게 길들일 수 있을까? 사바나를 대표하는 또 다른 야생동물인 얼룩말 역시, 말과 생김새만 비슷할 뿐 인 간이 길들일 만한 동물이 아니었다. 얼룩말은 생김새와는 달리 유 전적으로는 말과 거리가 제법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길들여 가축으로 삼기에는 성질이 너무 사나웠다." 물론 아프리카의 사 바나에도 여러 유목민 부족이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소 나 염소 등을 몰고 다닐 뿐, 유라시아의 기마유목민과 달리 말이 나 말의 역할을 할 만한 가축을 길들이는 데는 결국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열대수렴대가 아프리카에 만든 거대한 사하라사막 과 사바나, 열대우림은 북아프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문 명 교류를 가로막고 말았다. 이 때문에 낙타를 타고 사하라사막 북부의 오아시스를 따라 이동하던 북아프리카의 대상들과, 소와 염소를 몰고 다니며 가족과 가축을 위협하는 맹수들과 용감히 맞서 싸우는 강인한 전사였던 아프리카 사바나의 유목민들은 아 프리카를 남북으로 잇는 문명 교류를 주관하지 못했다. 유라시아 및 이들 지역과 교류했던 북아프리카와는 달리, 현생인류의 발상지이며 일부 지역에서는 수천 년 전부터 식량을 생산했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고도의 문명이 뚜렷하게 발달하지 못했던 데 에는 열대수렴대가 빚어낸 아프리카 기후의 특성이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 밀림이 우거진 유카탄반도와 중앙아메리카의 경관을 살펴보면, 어떻게 이런 곳에서 수천 년 전에 고대 문명이 싹틀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유카탄반도는 엄밀히 말해서 열대우림기후가 아니라 사바나기후가 나타나는 지역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지나는 열대수렴대는 1월에는 유카탄반도 남쪽으로 내려가고, 7월에는 북상하여 그 북단이 유카탄반도 저지대를 지나간다. 이러다 보니 유 카탄반도는 겨울에는 건조하고 여름에는 많은 비가 내리는 사바나 기후가 나타나는 것이다. 다만 바람과 기압대의 영향, 바다나 사막 과의 거리 등 기후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인들이 아프리카 사바나와는 다르기에, 아프리카의 열대기후에 속하는 땅의 무려 60퍼센트를 차지하는 아프리카 사바나보다 그 규모가 훨씬 작다. 사바나기후가 열대우림, 열대 계절풍 등 다른 형태의 기후와 뒤섞여 나 타나는 옛 마야 땅의 자연경관은 아프리카 사바나와는 사뭇 다르다.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고 맹그로브 같은 열대우림에서 자생하 는 식물이 자라나 언뜻 봐서는 열대우림 같은 모습을 연출한다.
사바나기후 역시 고도의 문명이 발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 다. 하지만 아프리카 사바나와는 달리 유카탄반도의 기후와 지리 적 조건은 이곳에서 수천 년도 더 전에 고대 문명이 발달할 만한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우선 유카탄반도의 강수량은 연교차가 크 지만, 아프리카 사바나만큼 극심하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유카탄 반도에서는 아프리카 사바나에 비해 수목이 많이 자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마야인들이 농사짓고 주변 지역과 교역하며 문명을
이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유카탄반도 남부의 미라도르 분지와 페텐 분지 일대의 지형은 석회암 기반암 위에 습지가 많이 분포하 여 마야인들에게 건기에도 물을 구할 수 있는 수원을 제공했 다. 또한 토질까지 비옥하게 만들어 마야인이 고대 문명을 이룩하 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마야 땅에 인접한 카리브해는 유 카탄반도 저지대의 환경을 한결 쾌적하게 만들어주었을 뿐만 아 니라, 마야인들이 배를 타고 교역을 할 수 있는 무대로도 작용했 다. 게다가 마야인이 주식으로 삼았던 옥수수는 유카탄반도라는 땅이 마야인에게 내린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쌀, 밀, 보리 등 다른 곡물에 비해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랐기 때문이다.
- 마야인은 유카탄반도의 저지대를 개간해서 얻은 농지에 옥수 수 그리고 호박, 콩 등의 작물을 심으며 식량을 생산했다. 그들은 맛과 영양소, 생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식량작물의 품종개량에 힘썼고, 강수량의 연교차가 큰 환경 속에서 농업용수와 생활용수 를 저장할 저수지 등과 같은 시설을 건설하는 일에도 노력을 많 이 기울였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지만 유독 지력 소모 가 큰 옥수수를 안정적으로 재배하기 위해서 콩, 호박 등 다른 작 물과 섞어 재배하거나 경작지를 주기적으로 휴경하는 등의 농법 도 개발했다.25 농사를 잘 짓기 위해 계절의 변화를 정확히 이해 하여 수준 높은 천문학에 기반한 정교한 역법도 발달시켰다. 한때 2012년에 세계가 멸망한다는 예언을 담고 있다며 화제가 되었던 마야인의 역법은 사실 유카탄반도 저지대에서 풍년을 기원하던 고대 마야인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낸 결실이었다.
한편 마야문명은 잉카, 아스테카와는 확연하게 차별화되는 특 성이 있었다. 잉카, 아스테카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주변 부족 과 지역을 무력으로 병합한 중앙집권적 정복 왕조 성격이 강했다. 반면 마야문명은 도시국가의 연합체 형태로 발달했으며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마야문명은 농업 생산성이 증가함에 따라 인구가 늘어났을 뿐 만 아니라 사회구조 역시 복잡하고 체계적인 형태로 진화해갔다. 마야문명의 천문학과 역법은 마야인 고유의 우주관과 세계관에 토대한 고유의 종교를 배태했다. 농업과 치수를 위한 기술은 자연히 건축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아울러 마야인은 체계적인 문 자를 고안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한편으로 비교적 수심이 얕고 잔 잔하며 섬이 많은 카리브해에도 눈을 돌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카 리브해를 통한 해상무역은 마야 사회에서 농업 못지않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유카탄반도 남부 저지대에 건설된 마야의 도시 엘 미라도르EL Mirador 는 선고전기 마야문명 의 수준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엘 미라도르는 전성기 인구가 10만 명을 넘었다. 전근대 시대의 도시는 오늘날보다 훨씬 규모가 작았고, 산업혁명 이전에는 인구 10만~20만 명 정도만 되어도 세계적인 규모의 대도시였음을 고려하면, 엘미라도르가 어느 정도로 번 영한 도시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는 높이 70미터가 넘는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의 신전인 라 단타La Danta "를 비롯한 다수의 석조 유적과 유물이 지금도 전해져 온다.
기원후 300년을 전후하여 마야문명은 선고전기에서 고전기로 접어든다. 이는 마야문명이 부족사회 또는 초기 도시국가 수준을 넘어 세련된 문명을 꽃피우는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티 칼(오늘날 과테말라 소재), 칼라크물(오늘날 멕시코 남동부 캄페체주 소재) 등은 인구 10만 명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했고, 이들 지역에 세워진 거대한 석조 피라미드는 오늘날에도 그 위용을 뽐내고 있 다. 6세기 중반에는 유카탄반도 북동부 해안 지대에 무역항 툴룸 이 세워졌다. 오늘날 마야문명을 대표하는 유적지이자 관광지인 툴룸은 마야문명이 카리브해에서 활발한 해상무역 활동을 벌였음 을 보여주는 장소다. 8세기 초중반에 최전성기를 맞이한 고전기 마야문명의 총인구는 300만~1,300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 가뭄은 왜 일어났을까? 마야문명 연구의 세계적인 권 위자 한센 Richard D. Hansen 은 고전기, 아울러 선고전기 마야문명을 몰락하게 한 가뭄을 해당 시기에 이루어진 기후의 한랭화가 강수 량을 감소시킨 결과로 해석한다." 한편 스위스의 게랄트 하우크 Gerald H. Haug 교수 등의 연구는, 고전기 마야문명의 몰락을 불러온 극심한 가뭄은 마야문명을 번성케 한 여름철 열대수렴대의 위치가 바뀌면서 유카탄반도 남부 저지대의 강수량이 눈에 띄게 감소했기 때문이라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정확한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극 심한 가뭄이 고전기 마야문명의 몰락으로 이어졌다는 논의는 학계 에서 인정받고 있다. 2~3세기의 가뭄이 마야문명을 주도하는 도시의 위치와 문명의 흐름에 영향을 주었다면, 8~10세기의 가뭄은 마 야문명의 공간적 배경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놓은 것이다.
- 고전기 마야문명의 몰락이 마야문명의 완전한 소멸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마야인들은 10~11세기 무렵부터 유카탄반도 남부 와 중앙아메리카 일대 대신, 유카탄반도 북부로 옮겨 새롭게 문명 을 발전시켰다. 이 시기를 후고전기라 부른다.
후고전기 마야문명을 주도하기 시작한 도시는 바로 치첸이트 사였다. 치첸이트사는 카리브해의 해상무역을 통해 대두한 도시 였다. 치첸이트사의 유적, 그중에서도 쿠쿨칸의 신전으로 쓰인 피 라미드 엘 카스티요 Castillo 는 마야문명건축과 예술의 정수이다. 고전기에 건설된 툴룸 역시, 후고전기에 접어들면서 치첸이트사 와 더불어 전성기를 맞았다.
- 치첸이트사의 전성기는 13세기에 막을 내렸다. 서쪽에 있는 마 야판 Mayapan"의 침공을 받아 도시가 황폐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후고전기 마야에서 내륙의 농업 세력과 카리브해를 무대로 한 해 상세력 간의 경쟁에 따른 결과로 보기도 한다." 마야문명의 마지 막 패자로 등극한 마야판 역시, 15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극심한 가뭄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16세기 에스파냐인들이 유카탄반도와 중앙아메리카에 침입했 을 때, 마야문명은 이미 문명으로서의 생명이 끝나 있었다. 한때 마야문명이 번성했던 이곳은 에스파냐인들에게는 그저 목초지로 쓸 만한 땅 정도로나 여겨졌다. 이미 문명이라 부르기도 힘들 정 도로 몰락한 데다 잉카, 아스테카와 달리 금이나 은, 주석 같은 가 치 있는 자원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마야인은 그 맥을 현대까 지 이어오며 중앙아메리카에 1,000만 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몰락한 마야문명은 잊힌 채 3,000년이 훨씬 넘는 긴 세월 을 보내다 19세기 이후에야 본격적인 발굴과 연구가 이루어지며 세상에 그 모습을 다시금 드러낼 수 있었다.

- 한나라는 어떻게 중국을 통일된 땅으로 거듭나게 하고, 나아가 동아시아 문화권의 공간적 기틀까지 다질 수 있었을까? 이는 한 건국 직후인 기원전 200년 무렵부터 중국 전역의 기후가 온난습 윤해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한나라는 수백 년간 이어진 춘추전국시대, 그리고 진나라 멸망 이후 벌어진 초한 전쟁의 혼란과 분열을 딛고 건국된 왕조였다. 게다가 한고조 유방이 기원전 200년 흉노와의 전쟁에서 참패하는 바람에 흉노를 상국으로 섬기며 막 대한 공물을 바쳐야 했다. 하지만 《사기》·《한서》·《후한서》 등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한나라가 건국될 무렵부터 중국 땅의 기후가 온난습윤해지면서 농업 생산성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 덕분 에 한나라는 길게 보면 수백 년에 걸친 중국 땅의 분열과 혼란 그 리고 상국 흉노에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 한다는 부담을 극복하고 경제력과 국력을 점점 강화하여 중앙집권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아울러 한나라의 공물로 인해 흉노의 지배층은 물론 평민층까도 한나라의 문물에 심취하면서 흉노 제국의 경제는 날이 갈수록 한나라에 종속되어갔다." 이렇듯 한나라가 건국될 무렵 이루어진 중국의 기후변화는 무제 재위기에 이르러 한나라가 흉노를 정벌 하고 대외 팽창에 나설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주었다.
흉노의 군사들은 한나라 군대의 대대적인 공세 앞에 패퇴를 거 듭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원전 100년을 전후해 흉노는 근 거지인 몽골의 스텝 지대에 극심한 한파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국 력과 군사력에 치명타를 입었다." 흉노 제국은 결국 붕괴했고, 수 많은 흉노족이 고향을 버린 채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머나먼 이주 에 나서야 했다. 물론 만리장성 북쪽의 흉노족은 5세기까지 그 명 맥을 이어갔지만, 흉노족의 제국은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두 번 다 시 수립되지 못했다.

- 한랭화가 초래한 삼국지의 시대와 난세
184년 일어난 황건적의 난은 한나라 전역을 헤집었다. 한 조정은 황건적의 난을 간신히 진압했지만, 이 때문에 권위를 실추하며 동 탁, 조조 등의 권신들에 휘둘린 끝에 220년 멸망했다. 《삼국지연의》의 주역이기도 한 위 오梟. 촉한의 세 나라로 분열된 중 국 땅은 280년 위나라의 뒤를 이은 진晉 왕조에 의해 통일되나 싶었지만, 진 역시 316년 내분과 북방 유목민의 침입을 이기지 못한 채 분열되고 말았다. 이후 중국 땅에서는 581년 통일왕조가 성립할 때까지 3세기가 넘는 분열이 이어졌다.
이러한 중국 땅의 혼란과 분열은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조짐 을 보이다 2세기 중후반부터 극심해진 중국 땅의 한랭건조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소빙하기라 불릴 정도로 춥고 건조한 기후가 이어지면서 기원전 50년 전후부터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던 한 나라의 농업 생산력"은 치명타를 맞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 염병까지 창궐하기 시작했다. 한나라는 농촌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수준 높은 사회보장제도를 갖추고 있었지만, 농업경제의 파 탄과 이에 따른 한 조정의 재정난은 사회보장제도를 마비시켰다. 농촌 공동체는 와해했고, 한나라의 기반이었던 농민층은 농토를 잃고 유랑민, 심지어는 산적으로까지 전락했다. 끝날 줄 모르는 흉 년과 역병으로 농촌 공동체와 사회보장제도가 파탄 난 한나라의 백성들에게 식량과 의술을 베풀며 희망을 준 인물은 도교의 분파 인 태평도의 지도자 장각이었다." 태평도는 순식간에 중국 전역으로 퍼져 수십에서 수백만 명이 넘는 신도를 모았고, 새로운 세상을 부르짖던 그들은 어느 순간 황건적으로 변모했다. 기후 변화로 인한 농촌 경제의 파탄이 황건적의 난으로 이어지며 연달아 치명타를 맞은 한 왕조는 결국 220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한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한랭건조한 기후가 계속되어 농업 생 생산성은 계속 낮아졌다. 이는 중국 땅이 진나라에 의해 통일된 지 고작 36년 만에 분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진 왕조가 통일 제 국의 기틀을 다지기도 전에 내분에 빠진 틈을 타, 한족이 오호 라 불렀던 북방의 유목민 집단(흉노, 선비鮮卑, 갈羯, 저氐, 강)들이 침입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나마 덜 춥고 건조한 땅을 찾아 진
나라의 영토를 대대적으로 침범했고, 양쯔강 이북 영토를 빼앗아 수많은 나라를 세웠다. 이후 중국 대륙의 북부에서는 유목민 계통 의 왕조가 남부에서는 한족 계통의 왕조가 난립했고, 얼마 버티지 못한 채 다른 왕조에게 찬탈당하는 일이 이어졌다. 300년이 넘도 록 제대로 된 통일 왕조가 들어서지 못하고 오랫동안 나라가 안정 적으로 이어지지도 못했던 이 난세를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라 부른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신출귀몰한 능력을 갖춘 여러 영웅호걸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이어진 난세는 기후변화 로 인한 재난의 영향이 컸다.
- 540년 이후 중국에는 수백 년에 걸친 한랭기가 끝나고 온난습 윤기후가 다시금 찾아왔다. 이러한 기후변화로 중국 땅의 농업 생 산성과 인구 부양력은 증가했고, 6세기 후반에는 한나라가 전성기 를 구가하던 시절에 비견될 정도로까지 회복되었다." 즉, 혼란기 를 벗어나 재통일이 이루어질 환경적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수 문제는 개인 역량이 출중한 명군이었지만, 그가 중국을 재통일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기후의 도움을 받은 부분도 적지 않았다.
- 수나라는 통일을 이룩한 지 40년도 지나지 않은 619년 멸망했 다. 2대 황제 양제가 감행한 무리한 고구려 원정의 실패, 과도 한 토목 공사와 사치 등에 따른 결과였다. 하지만 수나라 멸망 직후 중국은 분열하는 대신 당왕조에 의해 다시금 통일되었다. 7세 기에도 계속된 온난습윤기후 덕분에 중국의 농업 생산성이 향상 하면서 인구 부양력과 경제력 또한 탄탄해졌기 때문이다.
건국 이후 1세기가 넘도록 흉노를 상국으로 섬겨야 했던 한나 라와 달리, 당나라는 건국 직후 바로 세계적인 제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북방의 유목민 제국 동돌궐은 전성기 흉노 못지않은 강적이었지만, 당나라 건국 직후인 627년에 이르러 그들의 근거 지인 몽골의 스텝 지대를 강타한 주드 dzud에 의해 치명타를 입었다. 주드는 몽골에서 평균 10년 주기로 발생하는 한파인데, 당시 일어난 주드의 피해가 특히 심각했다. 당나라 사신 정원숙은 주드에 피해를 받은 동돌궐이 3년 안에 멸망할 거라고 조정에 보 고할 정도였다. 당 태종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동돌궐을 격파하 여 멸망시켰다. 이후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한반도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통일신라 및 발해와 선린관계를 맺은 뒤, 중 앙아시아에까지 진출해 동서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세웠다. 세계 제국 당나라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제를 도입하는 등 외 국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주변국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동서 문화를 융합한 찬란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러는 가운데 동아시 아 문화권에 속한 나라들은 당나라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중국문화를 더욱 적극적으로 흡수하면서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문화를 재창조했다. 서라벌, 하슬라와 같은 한반도 고유어 지명이 경주 ■, 강릉 등의 한자식 지명으로 바뀌기 시작한 때도 바로 통 일신라와 당나라 간의 교류가 활발했던 남북국시대였다.
당나라 역시 8세기 중후반 이후 한랭화에 따른 농업 생산성 저 하와 연이은 반란으로 몰락하여 10세기에 결국 멸망했다. 하지만 한대에 기틀이 다져지고 수. 당대에 공고화된 통일 중국의 땅은 주변 지역과의 문명 교류를 통해 동아시아라는 문화권의 지도를 그려냈다. 이처럼 우리나라가 속해 있는 동아시아 문화권이 형성 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는, 한나라와 수당이 통일 제국을 형성하고 북방의 유목민마저 격퇴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준 기후변화에 서도 찾을 수 있다.


- 고대 서구 세계의 수많은 강국 중에서 로마가 유럽 문명권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앞선 그리스 문 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등 타 문화를 받아들이고 배울 줄 알았던 로마인의 유연함, 군단병으로 대표되는 로마군의 우수성,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수준 높은 로마의 법률과 건축술 등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로마의 팽창과 번영은 한나라가 그랬듯 기후변화, 정확히는 기후 온난화에 힘입은 부분도 크다. 즉, 로마 는 온난습윤기후 덕분에 국력을 키울 수 있었고, 이는 로마가 수많은 외부의 강적을 상대로 연승하며 유럽 문명의 토대를 다진 제국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후한과 마찬가지로, 로마 역시 기후의 한랭화 로 점점 쇠퇴하며 결국 동서로 분열하고 말았다. 서로마는 기후변 화의 직격탄을 맞아 유럽의 지정학적 질서의 격동을 이겨낼 힘을 잃은 채 멸망했고, 이후 중국과 달리 통일 왕조가 두 번 다시 들어 서지 못한 서유럽은 수많은 국가와 민족집단의 영역으로 계속 분 열되었다. 요컨대 로마와 한나라의 흥망성쇠는 기후변화라는 지 구환경의 거대한 흐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 중세 유럽을 흔히들 '암흑시대'라 부른다. 르네상스와 근대를 거치 면서 서구의 수많은 지식인과 문인, 예술가들이 중세를 고대 그리 스·로마의 찬란한 문화·예술과 수준 높은 학문적 업적이 단절되 고, 미신과 비이성이 판치던 암흑시대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러 한 견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널리 퍼져 있으며, 심지어 2000년 대 이후 발표된 학술논문 중에도 서양 중세사를 암흑시대로 간주 한 사례가 적지 않다.
실상은 달랐다. 7~8세기 이후 유럽에는 온난기가 무려 500년에 걸쳐 계속되면서 봉건혁명이라 불리는 경제와 사회의 대대적 인 확장이 이어졌다. 인구와 경제력이 계속해서 커진 유럽 세계는 십자군 전쟁 등을 일으키며 외부로 팽창했고, 이 과정에서 제지술, 화약 등의 신문물을 받아들이며 더한층 발전할 수 있었다.
1,000년을 이어간 서양의 중세는 그리스도교와 봉건제라는 새로운 질서 속에서 서구 세계가 고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 으로 발전한 시기였다. 그리고 중세의 영광과 종언은 기후변화와 맥을 같이했다.
- 카롤루스 르네상스 무렵에 본격화한 유 럽의 온난기는 13세기까지 무려 500년에 걸쳐 이어졌다. 이 시기 유럽의 여름철 평균 기온은 20세기 평균치보다 0.7~1.4도나 높 았고 강수량도 적절했기에, 농업 생산성이 많이 늘어났고 심지어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힘들 영국산 포도주가 유럽 전역에 널리 퍼 졌다." 그 덕분에 경제력과 인구 부양력이 증가한 유럽에서는 인 구가 늘어나고 농촌이 풍요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도시도 자치권 을 누리며 발달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니, 유럽의 군주와 제 후들은 북쪽에서 침입해 온 노르만족에게 영지를 주어 그들을 회유하고 포섭할 수 있었다.
- 서유럽은 분열한 프랑크왕국이 남긴 봉건제의 유산을 발판으로 질서를 구축하며 성장을 거듭해갔다. 삼분된 프랑크는 각기 프랑 스, 이탈리아, 독일의 토대를 이루었다. 영국, 폴란드, 보헤미아 그 리고 마자르족의 땅(헝가리)과 노르만족의 정착지도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중세 유럽의 영역에 통합되었다. 권력이 봉건 영주들에 게 분산되어 왕권은 상대적으로 약했지만, 반란의 위험이 줄면서 역설적으로 사회는 안정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유럽에서는 삼포 식 농업, 바퀴 달린 큰 쟁기 등 농업기술의 혁신으로 생산량이 크 게 증가했고, 이에 따라 인구 역시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수도원 과 성당에서는 그리스도교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그리스·로마 의 학문적 유산은 물론 이슬람 세계로부터 수입된 문헌까지 연구 해 얻은 철학과 자연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교리를 합 리적으로 재해석하고 재조명하는 한편, 의학 연구를 통해 환자 치료와 빈민 구제에도 힘썼다."
- 11세기에 이르러 봉건제는 서유럽 전역에 완전히 정착했다. 장 자 상속제까지 확립되면서 서유럽의 봉건사회는 정치적으로 안정 되었고, 계속되는 온난기 덕분에 그 안정 속에서 더욱 번영을 구 가할 수 있었다. 이를 '봉건혁명'이라 부른다. 봉건혁명으로 인해 축적된 에너지는 중세 서유럽의 팽창으로 이어졌다. 서유럽은 발 트해 연안과 북유럽 등으로 진출하여 이들 영역을 유럽 문화권으 로 포섭했다. 십자군 전쟁 역시 성지 예루살렘의 수복이라는 명분 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유럽인의 세계관을 크게 넓히며 그들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즉, 유럽의 중세는 초반의 혼란기를 제외하면 '암흑시대'는커녕 봉건혁명을 통해 한 걸음 더 도약해갔다.
- 때마침 유럽의 온난기는 끝날 조짐이 보였다. 14세기 초반부터 이상기후와 그에 따른 기근이 눈에 띄게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1,400~1,420년에 걸쳐 그전까지 비교적 안정적이던 대서양의 대기 순환이 불안정해지고 이로 인해 북대서양 진동까지 이전보다 급격 하게 변동했다." 이에 따라 유럽에는 가뭄, 한파, 폭우, 폭풍 등의 이 상기후 현상이 자주 일어나더니 기온이 예전이 비해 눈에 띄게 낮 아졌다. 이후 500년 가까이 이어질 유럽 소빙기의 서막이었다."
이상기후와 소빙기에 직면한 유럽은 어떤 상황에 내몰렸을까? 흉작이 이어지며 경제적·사회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500년 동 안 지속된 온난기의 영향으로 풍요를 누리며 인구가 최대로 늘어 난 상황이었기에 그 피해는 더욱 감당하기 어려웠다. 수많은 유럽 인이 농사를 망쳐 굶주림에 시달렸고, 농토를 버린 채 유랑민이나 도적으로 전락하는 농민도 생겨났다. 심지어 가축의 분뇨와 썩은 포도주로 가짜 식량을 만드는 사기꾼이나 무덤을 파헤쳐 값나가 는 부장품을 훔쳐 가는 도굴꾼마저 횡행했다."
- 카롤루스대제는 500년 동안 이어질 중세 온난화의 영향으로 카롤루스 르네상스를 이룩했고, 그 덕분에 유럽은 로마 말기부터 중세 초기까지 이어진 혼란과 분열을 딛고 유럽 문화권의 토대를 공고히 다질 수 있었다. 그 후 온난화가 끝나면서 일어난 흑사병 의 범유행은 전례 없는 규모의 대재난과 더불어 서양 중세의 종말 을 불러왔다. 이어진 르네상스와 근대 역시 소빙기의 시대였다. 세 련되고 고아한 르네상스, 바로크 예술 그리고 과학과 학문의 급속 한 발달이 이루어진 르네상스 시대와 근대의 이면에는, 아이러니 하게도 소빙기가 불러온 가난과 혼란, 분쟁이 자리 잡고 있었다.

- 갖은 고생을 다 해가며 몽골을 통일한 칭기즈칸의 앞에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결코 녹록한 여건은 아니었다. 금나라는 여전히 중원과 만주를 호령하는 대제국이었고, 실크로드 서쪽에 는 호라즘이라는 이슬람계 정복 왕조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동아시아에서는 13세기 초반에 접어들면서 태 양의 활동 약화로 기온이 낮아졌다. 이는 금나라에는 중대한 타격 을 주었지만, 몽골에는 오히려 축복을 가져다주었다. 기온이 낮아 지며 몽골 스텝에는 유사 이래 가장 많은 비가 내렸기 때문이다.
- 하버드대학교의 닐 페더슨 연구원 등은 시베리아잣나무 나이테를 분석하여 몽골의 기후 변화사를 연구했는데, 이 무렵의 몽골은 스 텝 지대에 범람이 일어날 정도로 비가 많이 내린 우기 pluvial" 였다 고 표현했다. 비가 많이 내린 덕분에 척박한 몽골의 스텝 지대에 는 유례없을 정도로 풀이 무성하게 자라났고, 심지어 고비사막 등 의 오아시스까지 초원으로 바뀌었다.
몽골 스텝의 초원이 몰라볼 정도로 무성해지면서 몽골인의 생명줄이자 비장의 무기였던 말은 눈에 띄게 튼튼해졌을 뿐만 아니라 개체 수도 크게 늘어났다. 그 덕분에 몽골의 인구 또한 증가했다. 갓 통일을 이룬 몽골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어갔다. 강인한 군마가 예전보다 훨씬 풍족하게 공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강건한 장정들의 수까지 늘어나면서 원래부터 기마술과 기병 전투의 달인이었던 몽골인들은 무적의 기마 군단으로 거듭 났다.
-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력과 군사력까지 비약적으로 상승한 몽골은 몽골 땅을 통일한 데 그치지 않고 밖으로 팽창해나가기 시작했 다. 몽골의 힘이 뻗어 나간 방향은 어디였을까? 크게 두 방향이었 다. 한쪽은 몽골을 잔혹하게 핍박했던 금나라에 대한 보복이었다. 다른 한쪽은 유사 이래 유라시아 스텝의 기마유목민이 활동하는 무대였던 실크로드 무역로였다. 때마침 이 두 지역은 중대한 취약 점을 안고 있었다. 금나라는 한족의 왕조 송을 공격해 중국 북 부를 정복했지만, 송을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한 채 중국 남부에 서 재건한 송 왕조인 남송과 장기간 대치하며 국력을 소모하 고 있었다. 게다가 감정정책과 같은 금나라의 강압적인 지배는 피 지배 민족들의 저항을 불러왔다. 그런 마당에 한랭화로 인해 농업 생산력까지 악화되면서 금나라는 말 그대로 이중고, 삼중고의 위 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실크로드 서쪽에서 새로 대두한 호라즘 제국은 겉으로는 대제국이었지만, 칭기즈칸의 지도력 아래 하나로 결속한 몽골제국과는 달리 갑작스럽게 확장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지 못해 내부 결속이 취약해진 상태였다.
1211년 금나라를 처음 침공한 칭기즈칸은 금나라에 핍박받던 거란족 등의 피지배민을 포섭해가며 1215년 금나라의 수도인 중 도中都(오늘날의 베이징)를 점령했다. 금나라는 1234년까지 항전을 이어갔지만, 이미 몽골과 금나라의 역학관계는 뒤집혀 있었다. 몽 골은 유라시아 북동부의 강자로 떠올랐다.
그런 와중에 1218년, 호라즘 제국과의 무역 협정을 체결하러 간 몽골제국의 사신단이 그들의 재물을 노린 호라즘의 지방 영주 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호라즘의 술탄 무함마드 2세 Muhammad II는 이에 항의하기 위해 파견된 몽골제국의 또 다른 사신단마저 모욕을 준 뒤 살해했다. 칭기즈칸은 결국 금나라 정벌을 잠시 미룬 뒤 정예 병력을 이끌고 호라즘 제국을 침공한다. 무함 마드 2세로부터 당한 모욕도 모욕이었지만, 호라즘에 실크로드의 무역로를 빼앗긴다면 몽골제국의 운명에는 큰 그림자가 드리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부 결속력이 취약한 데다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 지위를 노리 고 서쪽의 아라비아 방면에 전력을 집중했던 호라즘 제국은 동쪽 에서 쳐들어온 몽골제국군의 전광석화 같은 기습과 기동전에 제 대로 대처하지 못하며 연패를 거듭했다. 1220년 사실상 와해한 호라즘은 1231년 완전히 멸망했다.

-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6세기 후반부터 동아시아에는 소빙기가 시작되었다. 소빙기의 연평균 기온 감소의 지구 평균치는 0.3~0.4도 정도였다. 그런데 당시 동아시아 소빙기는 평균 기온이 무려 1도 가까이 떨어질 정도로 심했다. 게다가 1580~1660년까지는 장마전선을 형성하는 원동력인 동아시아 하 계 계절풍이 약해지면서 장맛비가 줄어드는 바람에 중국 중북부, 한반도, 몽골 등지에 극심한 가뭄까지 들었다." 조선과 명나라는 대규모 전쟁에 이어 기근까지 들이닥쳐 식량이 부족해졌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곡물 교역 규모를 크게 확대해야 했다.
그런데 랴오둥반도와 압록강 유역 등지는 중국 북부나 몽골 등지에 비해 소빙기의 피해를 비교적 덜 입었다. 바다에 인접한 덕 분에 내륙 지대인 중국 중북부나 몽골보다 기온 하락 폭이 비교적 작았고, 가뭄 또한 내륙 지대만큼 극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온 이 떨어지기는 했으나 그 정도가 중국 중북부, 몽골 스텝 등지에 비해 미미했고, 소빙기가 불러온 강수량의 감소는 오히려 이들 지 역의 골칫거리였던 장마철 홍수 피해를 줄여주었다. 그 덕분에 명 나라의 곡창지대라 할 수 있는 황허강 유역의 농경지 그리고 몽 골의 스텝 지대가 한랭화로 초토화되었던 것과는 달리, 랴오둥반 도와 압록강 유역은 오히려 다양한 곡물을 재배하며 번창할 수 있 었다"
- 이 무렵 랴오둥반도 동단에서 압록강 북안 일대에 이르는 지역 은 명나라가 여진족을 간접 지배하기 위해 세운 건주위에 속 했다. 소빙기가 흉작과 기근 대신 오히려 풍작을 가져다준 땅에 살았던 건주여진은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이은 소빙기로 쇠퇴하는 동안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인구도 늘어나 큰 세력을 키웠다. 건주여진의 지도자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愛新覺羅努爾는 소빙 기가 불러온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건주여진에 대한 통제가 임진왜란, 그리고 소빙기로 인한 국력 저 하 등으로 인해 느슨해진 틈을 타, 만주 중부의 쑹화강松江이흐 르는 오늘날 헤이룽장성 일대에 살던 해서여진西"그리고 그 북쪽 너머에 살던 야인여진 통합한 뒤, 1616년 금나라 "을의 후예라는 뜻을 가진 후금을 세웠다.
만주를 통일한 누르하치는 명나라 정벌에 나섰다. 1619년에 일 어난 사르후(오늘날 중국 랴오닝성 푸순시) 전투에서 후금군은 명군을 섬멸한 뒤 랴오둥반도를 장악했다. 사르후 전투는 동아시 아의 세력 균형을 크게 흔들어놓았다. 명나라의 도읍 순천부順天府 (오늘날 베이징)에서 동쪽으로 500~600킬로미터 떨어진 랴오둥반 도는 명나라의 대여진 전략 및 수도 방어에 있어 중추와도 같은 땅이었다. 명나라가 건국 초부터 요동도사遼東都, 요동총병관遼東 摠 등의 기구와 직책을 설치한 까닭도 랴오둥반도의 지정학적 이고 군사지리적인 중요성이 막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랴오둥 반도는 동아시아에서 17세기 소빙기에 쇠퇴하는 대신 발전의 전 기를 맞은 몇 안 되는 땅이었다. 즉, 후금은 사르후 전투를 통해 명 나라를 상대로 전략적 · 전술적 우위는 물론 경제적 우위에 있는 요지 중의 요지를 확보했던 셈이다.

- 현재위기였던 1670년 경술년과 1671년 신해년 辛亥 후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보다도 더 참혹했다고 회자되는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기근인 경신대기근이 일어났다. 1670년에 는 봄부터 초가을까지 우박과 서리가 내렸고, 봄에는 극심한 가뭄 이 닥치더니 여름에는 너무 많은 비가 왔고 초가을인 음력 7월에 는 눈까지 내렸다." 대흉작은 당연한 결과였고, 이상기후 속에서 전염병까지 번져갔다. 이에 조정은 도성에 질병 치료소인 확인서를 설치해 전염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고 끼니를 거르는 백성에게 죽을 제공하는 진휼소賑恤를 세우는 등 대기근에 대한 대책을 마련했다. 농사를 망친 1670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에 이르는 춘궁기의 고난을 줄이기 위해 곡물을 빌려주고 추수할 때 갚도 록 하는 환곡또한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하지만 경신대기근으로 인한 기아와 전염병의 규모는 이러한 노력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활인서가 되레 전염병 유행의 진 원지가 되는가 하면, 농사짓는 데 필수적인 소까지 전염병에 걸려 대량으로 폐사하는 바람에 조선의 농업 생산력은 더욱 심하게 떨어졌다. 1670년 겨울을 지나면서 조선은 글자 그대로 생지옥으로 변했다. 양반과 왕족마저 길거리에 나와서 구걸을 할 정도로 상황 이 악화되고, 급기야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길거리에 방치된 채 부패해가는, 전쟁통에서도 보기 힘든 극심한 참상이 일어났다. 조선군 최정예 부대인 훈련도감 소속 군인들이 떼강도 행각을 벌이는가 하면, 굶주림을 못 이긴 어느 여성 노비 가 어린 자녀를 삶아 먹은 직후 숨을 거두는 끔찍한 일까지 벌어 질 정도였다. 경신대기근으로 인해 조선 인구의 최대 14퍼센트에 달하는 100만~140만 명이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1671년 말부터 이상저온 현상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면서 조선은 참혹했던 대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소빙기의 대기근으로 무너진 명나라와 달리 조선은 그 뒤로도 체제를 유지했다. 청나라와 일본이 대기근 속에서 내부 체제 정비 에 주력한 덕에 조선은 외세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았다. 대기근을 극복하기 위한 조선 조정과 관리들의 대책 마련과 노력 역시 조선 의 사회와 체제를 유지하는 데 이바지했다.
경신대기근은 이후 조선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기근 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조선 조정이 바닥난 재정을 충 당하기 위해 대량의 화폐를 주조했고, 그로 인해 현물과 물물교환 의 비중이 컸던 조선의 경제는 화폐경제로 변모해갔다." 특히 복 지 혜택의 사각지대에 있던 노비 계층에서 막대한 사망자가 나오 고, 화폐경제의 발달 덕분에 상공업에 종사하는 상민 계층의 경제력이 커지면서 엄격한 신분제에도 동요가 일어났다. 한랭해진 기 후로 인해 조선의 주요 수출품인 함경도 산삼이 대량으로 말라 죽 어 인삼 재배가 본격화되었고, 한편으로 방한복의 필요성도 늘어 나면서 모피와 산삼을 구하기 위해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 을 넘어 간도와 만주에 진출했다.
경신대기근을 비롯한 17세기 소빙기의 기근은 당장 조선을 멸 망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중세 말 유럽을 뒤흔든 흑사병이 서양 중 세를 종식시킨 것처럼, 17세기 소빙기가 불러온 대기근은 조선을 점점 변화시키며 한반도를 새로운 사회, 새로운 시대로 인도했다.

- 14세기 흑사병이 대유행한 이후 유럽에서도 소빙기가 이어졌다. 중간중간에 기후 변동이 있었지만, 중세 말부터 19세기까지 유럽 의 기온은 확실히 낮았다. 중세에 500년에 걸친 온난기가 이어 졌다면, 중세의 끝자락부터는 소빙기라는 또 다른 500년이 펼쳐 진 셈이었다.
중세 말부터 시작된 소빙기에는 서로마제국 멸망 후의 서유럽 과는 달리 분열과 혼란이 계속되지 않았다. 중세의 황혼과 더불어 시작된 르네상스는 유럽의 문화와 학문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 올렸고, 유럽은 봉건제를 벗어나 국민국가가 지배하는 땅으로 변모해갔다. 근대 유럽에서 일어난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계몽주의와 시민혁명은 인류의 삶과 문명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소빙기가 민중의 삶은 물론 국가의 재정까지도 팍팍하 게 만들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농업 생산성이 악화한 유럽에서는 식량과 자원, 땅을 얻기 위한 전쟁이 한층 치열해졌다. 그런 한편으로 수많은 유럽인은 유럽을 벗어나 더욱 살기 좋은 땅을 찾기 위해 배에 몸을 싣고 해외로, 신대륙으로 향했다. 그 결과 유럽은 물론 전 세계의 지도와 지정학적 질서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 부농, 자영농조차 절대빈곤에 시달리며 그 고통을 '마녀'에게 풀어야 했던 소빙기 유럽의 참상은 세련된 궁정 문화와 절대왕정의 권 력을 누리던 각국의 군주와 지배층에게도 중대한 위기로 다가왔 다. 아무리 공권력을 동원해 민중을 쥐어짠들 농업 생산력 자체가 나빠진 데다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해 인구마저 증가하지 않으니 세수가 줄어듦은 물론 병력 확보에도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유럽 각국은 이러한 위기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농업기술의 혁 신을 꾀하기도 했지만, 전근대 농업기술의 발전에는 뚜렷한 한계 가 있었다. 각국의 지도층이 소빙기의 위기에 대처한 주된 방식은 식량과 돈을 얻기 위한 장거리 해상무역 그리고 새로운 땅을 얻기 위한 전쟁이었다.
소빙기가 닥친 유럽에서는 전쟁의 횟수가 증가하고 그 규모도 커졌다. 소빙기가 절정에 달한 17세기에는 전쟁 역시 절정에 달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30년 전쟁(1618~1648년)이 다. 신성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던 독일, 보헤미아의 가톨릭 세 력과 개신교 세력 사이에 일어난 이 종교전쟁은 프랑스, 에스파냐, 스웨덴, 네덜란드, 덴마크 등 유럽 각국이 개입한 국제전으로 번지 며 무려 30년이 넘게 이어졌다. 유럽 각국은 겉으로야 종교적 신 념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소빙기라는 기후위기 속에서 더 넓은 땅을 확보하고 더 많은 재원을 마련하려는 의도가 컸다. 30년 전쟁이 끝난 뒤에도 유럽에서는 땅과 권력을 둘러싸고 왕실과 국가 간의 전쟁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 원양항해와 해상무역은 유럽의 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혁했다." 우선 신대륙과 동남아시아, 인도 등지에서 대량으로 유입된 고가의 귀금속과 향신료 덕에 경제 규모가 눈에 띄게 커졌고, 특 히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화폐경제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막대한 자본이 드는 데다 위험성도 작지 않은 원 거리 해상무역을 좀 더 안정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유럽인들은 주 식회사, 보험 등의 금융업을 고안하고 발전시켰다. 현물이나 '생돈'에 바탕을 뒀던 경제구조가 금융 기반의 경제구조로 바뀐 것이다. 이는 유럽 경제가 자본주의 경제구조로 변화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금융업 덕분에 거액의 돈을 대출받고 투자하는 일이 자유로워지고 불의의 사고로 사업이 파산할 위험도 줄어들면서 유럽의 경제 규모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소빙기에 잦아진 전쟁은 당대 유럽의 민중에게는 비참한 현실 이었겠지만, 역설적으로 유럽의 과학기술과 군사력이 다른 대륙 을 압도할 정도로 발전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전쟁이 잦아지며 우수한 무기의 도입과 군사제도·전략· 전술의 혁신이 자연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 아울러 소빙기에 수립된 유럽의 절대왕정은 민중의 삶이 땅에 떨어진 끝에 결국 몰락했다. 프랑스 왕실의 계속된 전쟁과 사치스 러운 생활로 재정난이 누적되면서 극심한 빈곤에 허덕였던 프랑 스 민중의 삶은 끝도 없이 피폐해져갔다. 소빙기라는 기후 재난에 프랑스 정치사회의 부조리까지 더해지며 생겨난 심각한 식량 부 족은 결국 1789년 프랑스혁명을 촉발하여 부르봉왕조를 무너뜨 렸다." 이어진 19세기에는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시 민혁명이 유럽 각지에서 일어나 입헌정치와 민주주의의 싹을 틔 웠다. 어찌 보면 유럽의 소빙기는 근현대 민주주의를 불러온 직접 적인 계기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초중반에 이르러 유럽 열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중국, 인도 등 비유럽 세계의 전통적인 강자들을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유럽 세계가 소빙기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한 수많은 전쟁과 해상무역 활동이 경제와 과학기술의 발전을 촉진한 끝에 산업혁명의 불길까지 지피게 된 것이었다. 비유럽 세계의 전통 경제는 공장에 서 대량 생산된 품질 좋고 값싼 상품을 앞세운 유럽 열강의 경제에 종속되어갔고, 화승총이나 창검으로 무장한 비유럽 세계의 군대는 기관총과 철제 증기선 군함,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제국주의 열강 의 군대에 적수가 되지 못했다. 유럽이 소빙기에서 벗어난 19세기 말~20세기 초반에 이르러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부분은 제국주의 유럽 열강의 식민지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요약하자면, 소빙기가 부추긴 유럽의 잦은 전쟁과 유럽인의 대 대적인 해외 이주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유럽을 몰락의 길로 이끄 는 대신, 유럽인들이 전 세계로 뻗어가며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오늘날 서구 중심적인 세계질서와 세 계지도는 500년간 유럽을 덮친 소빙기, 그리고 원거리 해상무역 과 대규모 해외 이주라는 유럽인의 소빙기에 대한 대처 방식에 뿌 리를 두는 측면도 적지 않다. 나아가 소빙기의 끝자락에 놓인 유 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인류가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주체로 떠오르면서 인류의 지속가능성과 미래를 뒤흔들 새로운 양상의 기후위기를 불러오는 시발점이 된다.

- 사하라사막은 왜 이렇게 계속 넓어지는 것일까?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기후위기가 불러온 열대 수렴대의 변화이다. 대기 중의 과다한 온실가스로 인해 기온 상승 이 자연스러운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이루어지면, 바람의 방향과 세기 그리고 바닷물을 비롯한 수분의 증발량과 증발 속도가 눈에 띄게 달라지면서 해수와 대기의 순환에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다. 그러다 보니 지구온난화가 심해질수록 해들리순환도 눈에 띄 게 변하면서 열대수렴대가 남하하게 되는 것이다. 열대수렴대가 남하하면 고온건조한 공기가 남쪽까지 뻗어가고 그로 인해 사헬 과 열대우림에도 사막화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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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

죽음의 역사

역사 2023. 8. 7. 12:19

- 수렵채취인의 식단은 채소, 과일, 견과와 뿌리가 대부분이었다. 유제품, 가공유, 소금, 알코올, 카페인은 없었다고 봐도 된다. 당은 과일이나 꿀로만 섭취했을 것이다. 선조들은 놀랍도록 많은 식물을 식량과 생필품으로 활용했다. 1만 2,000년 전 수렵채취인들이 살 았던 시리아의 마을 아부 후레이라Abu Hureyra에서는 192종의 식물이 발견됐다. 다양한 식단과 활동적인 생활양식으로 보아 수렵채취 인은 신체가 건강했으며 현대인보다 키가 그다지 작지 않았을 것이 다. 비만은 드물었지만, 영아사망률은 높았다. 생활 터전을 옮기면 서 아기들을 데려갈 수 없을 때나 인구 통제가 필요할 때 영아 살해 가 발생했을 수 있다. 동물의 젖이 없는 상황이니 장기간의 모유 수 유가 자연 피임법 역할을 하여 출산간격을 벌렸을 것이다. 추락, 골 절, 익사, 사냥 중 동물에게 물리는 부상 등을 포함하여 사고사는 흔 했다. 또한 오염된 물을 마시거나 동물에게 물린 상처가 세균에 감 염되어 우리가 알고 있는 병에 걸리기도 했을 것이다. 나이가 들 때 까지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으니 암이나 신경퇴화 질환, 관절염도 있 었을 것이다.
- 낚시나 사냥, 채집과 비교하면 농사일은 뼈 빠지는 노동이었고, 시간도 훨씬 많이 들었다. 잡초, 쥐, 균류, 해충을 꾸준히 막아주지 않으면 곡식은 상해버렸다. 아부 후레이라에서 기원전 9,000년에 농경사회로의 전환이 일어났음을 알려준 사료는 무릎이 변형되 고 발가락이 휜 여성의 유골이었다. 곡식을 빻아 가루로 만드느라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다양한 식단 대신 곡식을 주식으로 먹게 되면서 필수 영양소가 부족해졌다. 단백질, 지방, 철분이 풍부한 고기를 전혀 먹지 않기도 했다. 몸집이 작아졌고, 뼈와 치아에서 영양 부족의 흔적이 드러났다. 대표적인 문제는 빈혈이 었다. 사람들이 주로 먹던 곡물에는 철분 흡수에 필요한 지방산이 없었다. 탄수화물로만 구성된 식단에는 단백질과 비타민이 부족하다. 열량을 충분히 섭취했는데도 펠라그라(니코틴산결핍증후군), 각기 병, 콰시오커(단백열량부족증) 등 영양 부족과 관련된 새로운 질병이 발생했다. 남녀 모두 불임을 겪기도 했다.
- 고대 전염병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유골에서 흔적을 발견하 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기록할 만한 사람이 모두 죽었다면 이야기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원전 1만 년에 400만이었던 세계 인구가 농경의 발명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5,000년까지 겨우 500 만으로밖에 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놀랍다. 수많은 결점이 있지만 어쨌든 농경은 수렵과 채취보다 식량 생산량이 월등히 많다. 게다가 아이를 많이 데리고 다닐 수 없어 출산 간격을 조정해야 하 는 유목 생활과 달리, 정착 생활을 하면 여성은 아이를 더 많이 낳을 수 있다. 농부들이 식량을 훨씬 많이 생산하고 여성은 아이를 더 많이 낳을 수 있게 되었는데, 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지 않은 것일까?
- 영양 문제 외에도 수많은 질병이 새로 나타났다. 현재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전염병 1,000종 이상은 한때 동물의 몸에 살았으나 지 난 1만 년 사이 어느 시점에 종의 장벽을 넘어온 미생물로 인해 발 생한다. 예를 들어 홍역은 소의 우역 바이러스에서 왔고, 인플루엔 자는 가금류에서 왔다. 동물과 가까이, 심지어 같은 건물 안에 살면 서 동물의 병과 기생충이 인간에게 옮을 위험이 커졌다. 도시에서 수천 명이 부대끼며 살다 보니 한 명만 새로운 병에 걸려도 쉽사리 퍼졌다. 약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현 이라크)의 초기 국가들은 감 염의 중대성을 알고 있었고, 감염된 사람을 피하고 이들이 사용한 컵이나 수저, 침대보를 함께 쓰지 않으면서 질병의 전파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일단 병에 걸리면 치료법이 없었다.
고고학 사료나 당시 문헌을 보면 초기 국가들은 쉽게 무너졌다. 인구가 대규모로 줄거나 도시가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정착지를 버 리고 떠나곤 했다. 8. 물론 악천후로 인한 추수 실패, 외부의 침략, 홍수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전염병이 원인인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새로운 병에 처음으로 노출되면 자연 면역이 없어 도시 전체가 황 폐해질 수 있다. 결핵, 티푸스, 천연두는 농경의 결과로 나타난 최초 의 질병으로 여겨진다. 10 이들 질병을 이겨내는 유전자를 가진 몇몇 행운아와 그 자손이 살아남았다. 이렇게 자연 선택이 이뤄져 질병에 저항성이 있는 유전자가 후대에 전해졌다. 인구가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이 질병은 전염성이 강한 유아기 질병으로 자리 잡았다. 질병 에 적응한 인구 집단은 같은 병을 겪은 적이 없는 다른 인구 집단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이 수천 년 이상 지속되면서 농경 공동체마다 여러 인 간과 가축의 전염병을 보유한 채 살게 됐다. 이런 각각의 공동체가 무역, 확장이나 이민을 통해 연결되면 언제든 재앙이 닥칠 수 있었 다. 약 2,000년 전, 중국, 인도, 중동, 로마 제국이 최초로 정기적인 무역을 시작했을 때가 그랬다. 이들은 비단과 은뿐 아니라 다양한 질병을 서로 교환했고, 그 결과 전염병이 창궐했다. 서기 165년, 로 마군은 동쪽으로 진군해서 라이벌이었던 파르티아 제국을 공격하고 현재의 이라크인 티그리스강 근처의 셀레우키아를 포위했다. 이 때 군대에 퍼진 치명적인 안토니우스 역병 Antonine Plague은 로마군과 함께 유럽으로 유입됐다. 로마 인구의 4분의 1을 죽이고 로마군을 초토화한 전염병이다. 중국의 한 왕조 또한 동시에 전염병의 파도 에 휩쓸려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왕조가 무너졌다. 안토니우스 역병의 정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천연두라는 설이 유력하다.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무역로가 질병을 옮기고 대유행을 촉발한 사례다.
-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처음 나타난 이후 200년간 종종 다시 유 행했고, 750년에 마지막으로 발발한 뒤 사라졌다. 점점 발생 지역이 좁아지고 치명률도 떨어졌는데, 생존자들이 면역을 갖췄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600년간 유럽에 이 병이 발생하지 않다가, 흑사병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작가가 남긴 역병 에 대한 섬뜩한 묘사를 보면, 유스티니아누스 역병과 흑사병 둘 다 전형적인 림프절 페스트 증상이 진행된다. 먼저 극심한 두통이 오 고, 몇 시간 후 열이 오르고 피로감이 든다. 다음날이면 환자는 탈진 해서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한다. 허리와 팔다리가 아프고, 메스꺼 움이 일면서 구토가 잦아진다. 하루 더 지나면 타는 듯한 통증과 함 께 목과 허벅지 안쪽, 겨드랑이가 심하게 부어오른다. 일반적인 질 병이 아님을 알려주는 새로운 증상이었다. 부종은 오렌지만큼 커져 검게 변하고, 피부가 터져 악취가 나는 피와 고름이 나오기도 한다.
가족들은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고, 괴로워하는 환자를 옆에서 위로할지 병이 옮지 않도록 피할지 고민한다. 몸 전체에서 내출혈이 일어나 토사물과 소변, 대변, 가래에 피가 섞여 나온다. 피하 출혈로 검은 종기와 반점이 나타나고, 전신에 어마어마한 통증이 번진다. 손가락, 발가락, 입술과 코가 검게 변하고 피부 조직이 괴사한다. 환 자가 살아남더라도 이런 부위는 떨어져 나가거나 영구적으로 변형 된다. 모든 체액에서 역겨운 냄새가 난다. 이윽고 섬망이나 혼수상 태에 빠진 환자는 감염으로부터 1주, 최초의 증상 발현으로부터 며 칠 안에 사망한다. 이때쯤이면 같은 집에 사는 사람도 모두 병에 걸 린 뒤다.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오늘날 현대 의학 과 항생제의 도움을 받아도 치명률이 10%이고, 치료하지 않으면 80%에 달한다. 가래톳이라고 불리는 검은 부종은 체액을 온몸에 전가족들은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고, 괴로워하는 환자를 옆에서 위로할지 병이 옮지 않도록 피할지 고민한다. 몸 전체에서 내출혈이 일어나 토사물과 소변, 대변, 가래에 피가 섞여 나온다. 피하 출혈로 검은 종기와 반점이 나타나고, 전신에 어마어마한 통증이 번진다. 손가락, 발가락, 입술과 코가 검게 변하고 피부 조직이 괴사한다. 환 자가 살아남더라도 이런 부위는 떨어져 나가거나 영구적으로 변형 된다. 모든 체액에서 역겨운 냄새가 난다. 이윽고 섬망이나 혼수상 태에 빠진 환자는 감염으로부터 1주, 최초의 증상 발현으로부터 며 칠 안에 사망한다. 이때쯤이면 같은 집에 사는 사람도 모두 병에 걸 린 뒤다.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오늘날 현대 의학 과 항생제의 도움을 받아도 치명률이 10%이고, 치료하지 않으면 80%에 달한다. 가래톳이라고 불리는 검은 부종은 체액을 온몸에 전달하는 림프계에 박테리아가 모여서 생긴다. 그래서 이 병에는 가래톳 페스트 또는 림프절 페스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림프절 페스트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지만, 더 심각한 병 도 있다. 림프절 페스트보다 드물게 발생하는 폐 페스트의 치명률 은 더 높다. 폐 페스트는 감염된 사람이나 동물이 공기 중에 뱉은 비 말을 흡입하여 박테리아가 폐에 들어갔을 때 발생한다. 순식간에 고 열, 두통, 탈진, 메스꺼움이 발생하고, 숨가쁨, 흉부 통증, 각혈이 나 타난다. 항생제 치료를 하지 않으면 폐렴과 비슷한 단계가 2~4일 지 속되다가 호흡부전이 발생하고 결국 사망한다. 박테리아가 혈액에 들어가면 패혈증 페스트를 일으킨다. 혈전과 피하 출혈, 조직 괴사 가 나타난다. 패혈증 페스트에 걸리면 거의 사망한다고 봐야 하는데, 심지어 증상이 나타난 날 바로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페스트를 일으키는 페스트균은 현재 아프리카, 아시아, 미국 시 골 지역에서 발견되는 소형 설치류(쥐, 다람쥐, 토끼, 마멋, 프레리도그, 얼 룩다람쥐 등)에 산다. 감염된 벼룩에 물리거나, 피부에 상처가 난 상태 로 감염된 동물을 만지거나, 감염된 인간·동물의 비밀을 흡입했을 때 전염될 수 있다.
- 그렇다면 스페인독감의 근원지는 어디일까? 현대 염기서열 분석 기법은 바이러스의 진화에 대한 이해도를 혁신적으로 높였다. 빠르 게 변이하는 바이러스의 다른 종을 비교할 수 있게 되면서 매년 바 이러스가 어떻게 퍼지는지 알 수 있게 됐다. 현재는 수천 종의 플루 RNA 염기서열이 밝혀져 있다. 플루 바이러스는 인간 외에 닭과 돼 지에도 영향을 준다. 현재 짐작하는 바로는 1905년경 H1이라는 종 류의 플루가 새에서 인간으로 옮았을 것이다. H1은 큰 문제가 아니 었지만, 1917년 인간 H1은 새들의 N1종으로부터 유전자 변형을 획 득했다. 이 새로운 H1N1 이 치명적인 스페인 독감이었다. 인간은 돼 지에게도 H1N1을 옮겼다. H1N1은 다시 몇 년 만에 덜 치명적인 형 태로 변이했으므로 스페인독감 유행 기간은 길지 않았다. 
- 1957년에는 홍콩에서 유행병이 발생해 25만 명이 감염됐지만, 1919년 스페인독감과 같은 위기는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다른 종류 의 플루가 나타났다고 생각한 모리스 힐먼이 나섰다. 나중에 아시아 독감Asian flu으로 불리게 된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의 혈액 샘플을 구한 힐먼의 연구팀은 홍콩 바이러스를 정제해서 세계 다른 곳의 혈액 샘 플에서 얻은 항체로 실험을 했다. 전 세계 혈액 샘플의 항체 중 어느 것도 새로운 바이러스를 인식하지 못했다. 신종플루에 면역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뜻이었다. 또 세계적인 대유행이 일어날 가능성 이 높았다. 세계 여행이 가능한 상태에서 홍콩에서 시작된 전염성 높은 플루의 대유행은 시간문제였다.
힐먼이 비상사태를 알렸다. 급히 새로운 백신을 개발해야 했다. 그는 바이러스를 몇몇 백신 제조사에 보내 달걀에 바이러스를 배양하게 했다. 이윽고 바이러스는 이에 적응했고, 사람에게는 잘 맞지 않고 닭의 몸에 살아갈 수 있는 형태로 변이했다. 결국 바이러스는 사람에게 접종했을 때 덜 위험한 종이 됐다. 그리고 이 닭에서 키운 종을 인간에게 접종했을 때 생성되는 항체는 홍콩의 신종 바이러스 를 인식했다. 바로 연구팀이 원하던 백신이었다. 아시아독감이 1957 년 미국에 도달했을 때, 제조사들은 이미 플루 백신 4,000만 회분을 만들어 두었기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때맞춰 보호할 수 있었다. 1958년 말, 미국에서 아시아독감으로 6만 9,000명이 사망했다. 힐먼과 연구팀이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사망자 수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신종 플루는 언제든 다시 나타날 것이다. 새로운 백신을 빨리 개발하고 대량 생산하여 유통하지 않으면 수백만 명이 죽을 수 있다.
- 백신 접종은 사전에 병원체 노출을 통해 항체를 생성하여 미래 의 감염에 대비하는 전략이다. 병원균에 따라 이 과정이 통하지 않 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임질은 임균Neisseria gonorrhoeae 때문에 생기며 항생제로 치료할 수 있지만, 저항력이 문제다.  이미 임질에 걸렸 던 사람도 몇 번이고 다시 감염될 수 있다. 인간의 면역 체계는 임균 에 대한 면역을 형성하지 못한다. 임균은 항체가 인식하는 표면을 매우 쉽게 변형하고 일반적인 면역 반응을 교묘하게 교란한다. 병원 균은 교묘한 방법으로 인간의 면역 체계를 피해 숨는다. 면역 반응 을 억제해서 살아남아 번식한다. 물론 백신이 여러 치명적인 감염을 예방하는 기적의 전략이긴 하지만, 모든 병을 해결할 수는 없다. 사 람과 전염병의 전쟁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을 파악하고 배양할 수 있다면, 이 세균을 죽이는 법도 실험할 수 있다. 1907년 로버트 코흐의 전 동료인 독일 계 유대인 파울에를리히 Paul Ehrlich는 인간 세포에 영향을 끼치지 않 고 세균을 죽이는 화학 물질을 찾아 나섰다. 에를리히의 꿈은 '마법 의 탄환', 즉 표적 유기체를 죽이지만 다른 세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약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전쟁터의 아수라장 속에서 오직 적군 만을 맞히는 기관총을 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쉽지 않은 일이 었다. 99% 이상의 화학 물질은 세포에 따른 효과의 차이가 거의 없 다. 예를 들면 청산가리는 모든 세포를 죽이기 때문에 약으로 쓸 수 없다. 에를리히는 한 종류의 세포만 선택적으로 죽이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 에를리히는 세포를 염료로 물들이는 자신의 이전 연구에서 마 법의 탄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당시 빠르게 성장하던 화학 산업 에 힘입어 새로운 염료가 수백 가지 쏟아졌다. 그는 세포 준비 과정 에서 다양한 염료를 더하면 다른 종류의 세포를 현미경으로 보았을 때 서로 다른 색깔로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방법으로 새로 운 종류의 세포를 발견했다. 그래서 세포가 염료에 다르게 반응한다 면, 세포를 죽이는 분자에도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고 추론한 것이 다. 질병을 유발하는 세균만 선별적으로 죽이는 분자가 있다면 그것 이 바로 마법의 탄환이었다.
에를리히는 마법의 탄환을 찾기 위해 일단 적합성을 따지지 않 고 표적을 죽이는 데 효과가 있는 화학 물질부터 찾았다. 인간 세포 에 바람직하지 않은 독성을 보이더라도 일단 포함했다. 이 처음 분자를 단서 화합물 lead compound이라 했다. 이 단서 화합물을 화학적으 로 조작하여 표적 세포에 대한 효력을 높이는 한편, 독성을 줄여나 가서 의약품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개선했다. 화학 물질의 구조 변 화에 따라 유기체에 미치는 영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확인하면서 화학의 세계를 생물의 세계와 연결하는 작업이었다.
에를리히는 아프리카수면병에 이 접근법을 시험했다. 이 병은 체체파리를 매개로 파동편모충trypanosome에 감염되어 생긴다. 아톡 실Atoxy!이라는 화합물이 시작점이었다. 아톡실은 1905년 수면병 치 료제로 사용되어 일부 성공을 거뒀으나, 장기 사용하면 시신경이 손 상되어 실명에 이르렀다. 에를리히 팀은 먼저 아톡실의 정확한 구조 를 파악했고, 이를 바탕으로 수백 가지 다른 형태를 합성하며 개선 을 꾀했다. 418번 화합물이 가장 좋은 성과를 보였다. 생쥐 실험에서 파동편모충을 죽이면서도 독성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1907년, 연구팀은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했고, 종종 부작용이 나타났으나 가장 심각한 종류의 수면병에 효과가 있었다."
에를리히는 희망을 얻어 이번에는 매독을 겨냥했다. 1905년 프 리츠 샤우딘Fritz Schaudinn과 에릭 호프만Erich Hoffmann은 매독이 매독 균Treponema pallidum이라는 세균에 감염되어 생긴다는 사실을 밝혀냈 다. 5 호프만은 에를리히에게 수면병을 위해 개발한 화합물 중 매독 에 효과가 있는 것이 있는지 확인해보자고 제안했다. 에를리히는 일 본인 동료 사하치로 하타sahachiro Hata에게 프로젝트를 넘겼고, 하타 는 토끼를 매독균에 감염시켜 실험을 진행했다. 인고의 노력 끝에 606번 화합물이 토끼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매독균을 죽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것이 아르스페나민arsphenamine, 에를리히가 찾던 마법의 탄환이었다.
추가로 동물 실험을 진행하여 아르스페나민의 효력과 안전성을 확인한 에를리히는 매독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 실험을 진행했다. 실 험이 성공하자 수요가 폭발했다. 에를리히는 제약사 훼이스트Hoechst 와 손잡고 살바르산Salvarsan 이라는 명칭으로 약을 제조하여 판매했 다. 이어 1914년 부작용을 개선한 네오살바르산Neosalvarsan을 출시했 다. 살바르산과 네오살바르산은 페니실린이 도입되기 전까지 30년 간 매독 치료제로 쓰였다. 아톡실을 기반으로 한 에를리히의 약은 1930년대 설포나마이드sulphonamide라는 새로운 종류의 약이 개발되 기 전까지 유일한 합성 항생제였다. 뛰어난 실력에도 겸손했던 에를 리히는 살바르산의 발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7년 동안 운이 좋지 않다가 한 번 행운이 찾아왔다."
- 극도의 굶주림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지방 저장량과 건강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인간 신체는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약 8주간 버틸 수 있다. 매우 춥거나 신체 활동을 해야 한다면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열량이 필요하다. 신체는 오랜 굶주림에 어 떻게 적응할까?
탄수화물을 먹으면 혈액 속 포도당 농도가 높아지고 간으로 전 달된다. 간에 포도당 분자가 모여 글리코겐이라는 녹말 비슷한 고분 자가 된다. 기아의 첫 단계에서는 글리코겐을 다시 포도당으로 분 해하여 에너지로 쓴다. 글리코겐이 모두 소모되면 혈당을 유지하기 위해 지방과 단백질을 분해한다. 지방은 글리세롤과 지방산으로 분 해된다. 이때부터 근육 등 지방산을 에너지원으로 쓰는 조직에서는 지방산을 쓰고, 혈중 포도당은 포도당을 에너지원으로 쓰는 기관(예 를 들어, 뇌)을 위해 남겨둔다. 마라톤 선수들이 '벽'이라고 부르는 순 간이 바로 글리코겐에서 지방으로 에너지원을 전환하는 시점이다. 잘 훈련된 마라톤 선수라면 처음 30km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게 달 릴 수 있다. 그러나 갑자기 에너지가 급격히 고갈되면서 한 걸음 내 디딜 때마다 발가락부터 고관절까지 고통이 느껴질 것이다. 아무리 마라톤 전 며칠 동안 탄수화물을 먹어서 글리코겐 저장량을 최대한 늘려놨다고 해도 보통은 정식 마라톤의 4분의 3 정도를 버틸 힘밖에 낼 수 없다.
- 보통 몇 주간 지속되는 기아의 두 번째 단계에서는 지방이 주요 에너지원이다. 간은 대사 작용을 통해 지방산을 뇌의 대용 에너지로 쓸 수 있는 케톤체로 바꾼다. 케톤체는 아세톤으로 바뀌기 때문에 고약한 입 냄새가 난다.
지방 저장량이 떨어지면 단백질이 주요 에너지원으로 쓰인다. 근육은 가장 큰 단백질 저장고인 데다 어느 정도 없어도 인간이 살 수 있으므로 근육이 먼저 사라진다. 자연히 힘이 없어진다. 근육이 없어진 후에는 세포 기능에 필수적인 단백질이 분해되기 시작하고, 상태는 더 심각해진다. 이제 면역 체계의 기능이 떨어져서 감염에 취약해진다. 추가로 피부 건조, 머리카락 색 변화, 탈수, 수면욕 상 실, 두통, 소음과 빛에 대한 민감성, 청각 및 시각 장애, 복부 팽창 등 의 증상이 나타난다. 신체가 에너지 사용을 최소화하면서 체온이 낮아지고 심박과 호흡이 약해진다. 면역 체계가 이제 형편없어져서 전염병을 견딜 수 없다. 치명적인 감염을 피한다 해도 결국 심정지로 사망할 것이다.
- 체구가 작으면 음식이 덜 필요하다. 오늘날 일반적인 남성은 키가 177cm, 몸무게가 78kg이다. 아무 활동을 하지 않아도 이 신장과 체중을 유지하는 데만 하루 2,280kcal가 필요하다. 250년 전에 이 정 도로 체격이 컸다면 굶어 죽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구할 수 있는 식 량이 빈약했고, 음식을 먹으면 기생충이나 설사성 감염이 동반되어 사람들은 작고 말랐었다. 임신한 산모가 잘 먹지 못하고, 태어난 아 이가 어린 시절에도 계속 음식이 부족하면 성인이 되어서도 체구가 작다. 그러면 음식이 덜 필요해서 아사를 방지할 수 있었다. 1750년 대 유럽인들은 지금 시각에서 보면 심각하게 저체중이었다. 1705년 프랑스인의 평균 신장은 161cm, 체중은 46kg, BMI는 18이었다. 현대 기준으로는 우려될 정도로 낮은 수치다. 1967년 프랑스인의 평균 신장은 12cm 커졌고, 체중은 놀랍게도 27kg이나 늘었다. 20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체구가 50% 커진 것이다.
키가 작고 마른 체형은 식량이 부족할 때 생존에 유리했지만, 그 대가는 컸다. 키에 비해 너무 마르면 다양한 만성 질병의 발병률이 높아진다. 근육, 뼈, 심장, 폐, 기타 모든 신체 체계에 장기적인 건강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 18세기 후반, 미국과 영국, 이어서 기타 유럽 지역을 시작으로 상황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식량이 조금 더 늘어났다는 것은 일할 수 있는 에너지가 남는다는 것을 뜻했다. 일을 더 하면서 생활수준이 개선되었고, 굶어 죽을 위기에 허덕이 며 필사적으로 목숨만 부지하던 삶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제 더 생산적으로 일하고 의복과 주거를 개선할 시간과 에너지가 생긴 것이다. 키가 더 크고 건강해진 사람들은 만성 질병, 기생충 감 염, 기타 건강 문제와 싸워 이길 수 있게 됐다. 세대가 거듭될수록 이전 세대보다 나아지는 선순환이 이어졌다.
- 비타민C 결핍은 왜 괴혈병을 일으키는가? 체내에 압도적으로 풍부한 단백질은 콜라겐이다. 콜라겐은 피부, 뼈, 인대, 힘줄은 물론 근육, 혈관, 내장의 주요 구성 성분이다. 콜라겐의 구조는 세 가닥의 끈을 얽어 만든 밧줄을 닮았다. 그리고 콜라겐 사슬에 산소 원자를 더해주는 비타민C는 콜라겐 합성에 필수적이다. 산소 원자는 가닥 을 따라 결합력을 형성하여 밧줄 구조를 안정시킨다. 그러므로 비타 민C가 없으면 산소 원자가 없어 콜라겐 구조가 취약해진다. 그래서 괴혈병의 증상은 콜라겐이 필요한 부위를 따라 나타난다. 예를 들면 치아 뿌리와 치아가 박혀 있는 턱뼈를 연결하는 치주인대가 있는데, 콜라겐 구조가 약하면 치주인대가 약해져서 이가 빠진다.
동물은 대부분 자체적으로 비타민C를 합성할 수 있다. 기니피 그, 어류 일부, 박쥐, 새와 영장류(인간 포함)는 예외다. 유인원에서 진 화하는 어느 시점에서, 비타민C 합성의 마지막 단계에서 효소를 만 드는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기능하지 않게 됐다. 인간 DNA에는 여전히 그 유전자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돌연변이가 심하게 진행되어 효소로 쓰일 수 없다. 이러한 돌연변이는 고대 영장류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과일을 많이 먹었기 때문에 비타민C를 만드는 능력 없이도 잘 살 수 있었다. 현대의 야생 고릴라 역시 늘 필요량보 다 훨씬 많은 비타민C를 먹어서 절대 괴혈병에 걸리지 않는다. 기능 하지 않는 비타민C 유전자는 인류의 먼 조상에겐 나쁜 점이 없었으 므로 세대를 내려와 전해졌다. 그러나 인류가 과일과 채소가 부족한 식단을 먹기 시작하면서 효소의 결핍이 문제가 됐다. 19
비타민C는 물론 여러 비타민 중 하나일 뿐이다. 수천 년 동안 사 람들은 너무 제한된 식단을 먹었을 때 비타민 결핍으로 발생하는 질 병으로 고생했다. 20 비타민D(와 햇빛)의 부족은 골연화와 구루 병을 일으킨다. 비타민B3의 부족은 뱀파이어와 증상이 비슷한 펠라 그라pellagra를 유발한다. 즉, 햇볕을 받으면 피부에 물집이 잡히고, 창백해지고, 생고기를 원하며, 입에서 피가 나고 공격성과 정신 이 상이 나타난다. 비타민B12의 부족은 혈액질환을 유발하고 뇌 기능을 저해한다.
- 아우트리거 카누를 타고 미지의 대양으로 나섰던 용감무쌍한 뱃사람들은 언제 육지에 닿을지, 육지를 찾을 수는 있을 지 알 수 없었다. 선원들은 항해에서 식량이 떨어져 굶주렸다. 체지 방이 적은 사람이 가장 먼저 죽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남은 태 평양 섬 주민들은 항해에 나섰던 비만인의 후손일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여러 차례의 유전적 병목현상(후손들의 유전적 다양성이 줄어드는 현 상-역주)으로 마른 선원들이 죽었고, 그래서 비만의 성향이 강력하 게 남았다. 1"궂은 날씨에 개방된 카누를 타고 몇 주 동안 여행하면 물에 젖은 채로 지내야 한다. 태평양 항해는 보통 열대지방에서 이뤄지지만 때때로 끔찍하게 추운 날도 있었다. 이런 조건에 잘 대처 하고 저체온증을 이길 수 있는 신체 유형이 자연의 선택을 받았을 것이다.
- 오키나와 사람들이 건강한 식단을 유지한다는 사실은 당연해 보인다. 고구마, 콩, 녹색 채소, 뿌리, 여주, 과일, 해산물 약간, 살코기가 전통적 식단이고, 재스민차를 즐겨 마신다. 전반적으로, 이들의 식단에는 복합탄수화물이 많고, 열량은 낮으며, 단백질 함량이 적 절하고 육류와 정제 곡류, 당, 유제품은 거의 없다. 단백질과 탄수 화물 비율도 중요하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은 보통의 일본인과 마찬 가지로 하라하치분메分, 즉 배가 80% 찰 때까지만 먹는다. 서 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식습관이다. 그래서 비만은 드물다. 1960 년 이전에 쌀이 주식일 때, 오키나와인들은 일반적인 추천 열량보다 10~15% 적게 먹었다.  장기적으로 열량을 제한하면 수명이 길어진다는 가설은 많은 동물 실험에서 유효하다고 증명됐다.  그러므로 단순하지만 어려운 장수의 비결은 매일 조금씩 덜 먹는 것이다.
다이어트를 하고 싶다면 식욕을 떨어뜨리거나 지방 흡수를 줄여 주는 비만 치료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보통 불쾌한 부작용이 따른다. 비만을 극복하는 약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열량을 덜 섭취하고 운동을 통해 더 소비하는 단순한 전략이 최선이다.
- 생물학적으로 Y염색체가 있으면 남성이 된다. 남성을 만드는 Y염색체가 없으면 기본값인 여성이 되는 셈이다. 열성 유전병에서 보 았듯 염색체는 한 쌍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의 모든 유전자에는 여분의 사본이 하나 있다. 하지만 남성의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X와 Y염색체가 하나씩밖에 없다. 단백질을 암호화하는 인간 유전자는 2 만 개 정도인데, Y염색체에는 70개 정도로 가장 적게 존재한다. 남 성을 만드는 핵심 유전자는 Y염색체 성결정영역 sex-determining region Y, SRY이라고 한다. Y염색체의 SRY는 여러 유전자를 활성화하여 생식 선이 난소가 아니라 고환으로 발달하게 한다. 그러면 고환은 남성의 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을 만들기 시작한다. 똑같은 발달 과정으 로 시작한 남성과 여성 태아는 여기서부터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여성보다 남성에게 훨씬 흔한 유전병은 X염색체에 있는 유전자 의 결함으로 발생한다. 남자에게는 X염색체가 하나뿐이라 여분의 사본이 없다. X염색체 돌연변이로 발생하는 질병은 여성의 기대수 명이 남성보다 긴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뒤센 근위축 Duchenne muscular dystrophy은 X염색체에 있는 디스트로핀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인해 발생하는 심각한 근육 위축 질병이다. 디스트로핀 은 근섬유를 묶어주는 거대 단백질로, 디스트로핀에 문제가 있거나 부재하면 근육이 약해지고 괴사한다. 아이는 걷기 시작하면서 근육 쇠약이 뚜렷이 나타난다. 10세 전후로 휠체어가 필요하고, 보통 21 세쯤 목 아래가 마비되며, 기대수명은 26세에 불과하다. 여자아이는 돌연변이 디스트로핀 유전자가 있어도 여분의 X염색체 사본에 정 상 유전자가 있으면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남자아이에겐 그런 행운이 없다. 이런 식으로 성별과 관련된 질병은 다양하다. 적록색 맹이 그러하며, 유럽 왕실의 혈우병도 전형적인 사례다.
빅토리아 여왕은 혈우병 보인자로 유명하다. 그녀는 혈액 응고 에 필수적인 단백질인 혈액응고인자 9번에서 하나의 염기가 달랐다 (A가 G로 바뀜). 이 작은 차이가 역사를 바꿨다. 
- 인간의 생명이 수정 시에 시작된다고 생각한다면, 사망 원인 1위는 암, 심장질환, 전염병이 아니라 착상 실패다. 언제나 그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수정된 배아가 불멸의 영혼을 얻는다고 믿는 다면, 사후세계에 있는 영혼의 절반은 낭포일 것이다.
낭포는 종종 알 수 없는 이유로 반으로 쪼개진다. 각 반쪽은 유전 물질이 같지만 분리된 태아가 되는데, 이것이 일란성 쌍둥이다. 또 한 수정란 두 개가 동시에 자궁에 착상되면 이란성 쌍둥이가 된다. 쌍둥이는 45명 중 1명꼴로 태어나는데, 일란성보다 이란성이 흔하 다. 그러나 임신 8건 중 1건은 쌍둥이로 시작해서 한 태아가 조기에 사망하거나 흡수되는데, 이를 '쌍둥이소실vanishing twin'이라고 한다. 우리도 쌍둥이로 발달을 시작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 인간의 알코올음료 사랑은 지난 1만 년 사이에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중동과 중국 사람들이 와인과 맥주를 만들기 시작 한 시점이다. 그러나 최근 DNA 연구에서 더 오랜 옛날부터 알코올 소비가 시작됐음을 시사하는 증거가 발견됐다.
알코올은 독이다. 그래서 알코올을 섭취하면 독성이 덜한 물질 로 분해해야 한다. 이 과정의 첫 단계는 알코올탈수소효소를 촉매로 에탄올을 아세트알데히드로 산화하는 것이다. 알코올탈수소효소는 간에 고농도로 존재하지만 위에도 있어서 에탄올을 섭취하는 즉시 분해가 시작된다. 알코올탈수소효소 중 ADHA는 다양한 분자의 분 해를 촉진하는데, 대부분 중에서 에탄올과는 관련이 없다. 다른 영 장류에 비해 ADHA가 에탄올을 40배 빨리 분해하는 인간과 유인원 이 예외다. 인간의 조상은 1,000만 년 전쯤 알코올을 빠르게 분해하 는 ADHA를 갖도록 진화했다. 이 시기에 에탄올을 먹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고릴라와 침팬지, 인간의 공통조상인 이 초기 유인원이 맥주나 와인을 양조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자연 효모로 발효되어 에탄올이 생성된 과숙 과일을 먹었다. 가지에서 과일을 따먹지 않고 숲 바닥에 떨어진 과일을 주워 먹는 대형 유인원의 행동과 유사하 다.  그러니 에탄올은 1,000만년 전, 현대 인간이 존재하기 훨씬 전 부터 식단의 일부였을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이 나무 위에서 살지 않 고 땅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시점과 비슷하다.
에탄올을 대사 작용하는 알코올탈수소효소를 만드는 인간 유전 자는 20개 정도다. DNA 염기서열의 차이에 따라 조금씩 다른 효소 가 생산되기 때문에 에탄올은 사람마다 상당히 다른 효과를 유발한 다. 예를 들어, 아시아에서 흔한 염기서열 변이는 알코올에 부작용 을 일으켜 얼굴이 붉어지게 하고 두통과 어지럼증을 유발한다. 23 이 런 유전적 차이 때문에 동아시아와 폴리네시아에는 유럽보다 알코 올 중독자가 드물다. 
- 흡연에 대한 반응은 유전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니코틴은 피에 녹아 신체를 순환하며, 간에서 CYP2A6라는 효소에 의해 분해되어 영향력이 약한 화학물인 코티닌으로 전환되면서 사라진다. 15 인간 의 CYP2A6 효소에는 여러 형태가 있고, 니코틴을 코티닌으로 전환 하는 효율에는 차이가 난다. 니코틴을 빨리 분해하는 사람은 니코틴 농도를 유지하려면 더 자주 담배를 피워야 해서 흡연에 중독될 확률 이 높다. 또한 담배를 끊기도 더 어렵다. 반대로 CYP2A6가 니코틴 을 천천히 분해하는 사람들은 담배를 더 적게 피우고, 덜 깊게 들이 마신다. 니코틴을 덜 원하고, 금연 시도 시 심각한 금단 증상을 겪을 확률도 낮다.
- 일부러 중독을 유발하는 제품을 만들려고 해도 담배를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손대는 약물이 얼마나 될까? 하지 만 골초들은 하루에 수십 번도 담배를 피운다. 궐련형 담배는 중독 성을 강화하는 특징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 시가보다 훨씬 심하 다. 저렴하고, 열량이 없고, 사용이 쉽고, 약물 반응이 몇 초 안에 나 타났다 몇 시간 만에 사라진다. 흡연은 식욕을 억제하므로, 담배를 끊으면 살이 쪄서 금연 결심이 약해지곤 한다. 또한 불법도 아니다. 담배가 건강에 너무나 치명적이지만 않다면, 중독성이 높아도 지금 처럼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 흡연은 왜 암을 유발하는가? 세포가 자라지 않아야 할 때 자라 면서 암이 시작된다. 신체의 모든 세포는 단 하나의 세포, 수정란에 서 유래한다. 수정란은 분열하고 분화되어 인간의 모든 조직과 기관 이 된다. 어떤 세포는 계속 분열해서 죽은 세포를 대체해야 한다. 골 수, 피부, 내장 세포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어떤 세포는 부상 후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분열한다. 보통 세포의 성장은 강력하게 통제된다. 세포가 성장을 막는 신호에 정상적으로 반응하지 못하면 암 조 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세포의 DNA가 돌연변이를 획득하여 세포 성장 통제와 관련된 단백질이 작용하는 방식을 바꿨을 때 성장 억제 에 실패하게 된다. 종양 유전자는 돌연변이가 일어났을 때 세포 성 장을 자극하는 유전자다. 종양 억제 유전자는 손상된 세포의 성장을 막는 단백질을 암호화한다. 종양 억제 단백질이 변이하면 세포는 자 라지 않아야 할 때 자란다. 세포의 DNA가 심하게 손상됐을 때 활성 화되는 종양 억제 유전자의 한 예는 p53이라는 단백질을 암호화하 는 TP53이다. 보통 p53은 손상된 세포의 분열을 막고 심한 경우 사 멸하도록 유도한다. 종양으로 발전할 수 있는 세포를 신체에서 없애 는 것이다.
- DNA에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물질은 모두 암을 유발하기 쉽다. 담배는 매우 뛰어난 돌연변이 유발 물질이다. 종양 형성 유전자와 종양 억제 유전자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다양한 돌연변이 유발 화학 물질을 폐로 바로 전달한다. 벤조피렌이 그중 하나다. DNA의 구아닌 염기와 반응하여 DNA 구조를 파괴하고 돌연변이를 일으킨 다. 벤조피렌은 특히 p53 유전자의 중요한 구아닌 세 개에 돌연변 이를 잘 일으켜서, p53이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 폐 세포가 암세포로 변한다. 
벤조피렌은 담배 연기에 있는 수십 가지 발암물질 중 하나일 뿐 이다. 담배에는 유기화학물질뿐 아니라 납, 비소, 카드뮴 등 유독성 금속도 들어 있다. 
- 포드 모델 T는 최초로 대중화된 자동차였지만 매우 위험했다. 비 효율적인 후륜 브레이크를 사용했고, 전륜 브레이크는 없었다. 수 동 크랭크로 시동을 걸다 엔진이 걸리면 팔이 부러질 수 있었고(당시 에는 라디에이터 그릴 아래 쇠로 된 크랭크핸들을 끼우고 돌려 시동을 걸었는데, 힘 센 남자가 사력을 다해 돌려야 했다-역주), 무쇠로 된 운전대는 심장을 향 하고 있어 충돌이 일어나면 언제든 찔릴 수 있었다. 연료 탱크는 운 전자를 산 채로 태워 버리기 좋게 좌석 아래에 있었다. 라이트는 약 했다. 사고가 나서 평판으로 된 앞 유리를 뚫고 날아가면 온몸이 썰 렸다. 안전벨트는 없었고, 방향 지시등도, 앞 유리 와이퍼도, 속도계 도, 백미러도, 물론 에어백, 컵홀더, 스테레오 시스템, 에어컨, 내비게이션도 없었다. 차가 뒤집히는 일도 적지 않았는데, 그러면 사람은 머리부터 떨어져 차에 깔렸다. 시속 72km 이상 속도를 낼 수는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 인생에서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이해해야 할 뿐이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덜 두려워할 수 있도록, 더 이해해야 할 때다. (마리 퀴리 Marie Curie, <위태로운 터전Our Precarious Habitat>)
- 전염병에 승리를 거둔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눈부시고 중요한 아이디어들 덕분이었다. 지금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서 이들 아이디어가 널리 적용되지 않던 시기가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 정도다. 중요한 아이디어의 첫 번째는 바로 데이터 수집과 분석이다. 1600년쯤 런던의 사망자 통계표를 시작으로 체계적으로 사망에 대한 정보를 기록하기 전에는 사망 원인을 어림짐작하는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존 그랜트가 사망자 통계표 데이터를 연구하면서 객관적인 수치를 근거로 도시 생활이 시골 생활보다 건강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존 스노우는 소호의 환자 발생 가구를 하나하나 찾아가 모두 브로드 거리의 펌프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아냄으로써 오염된 물이 콜레라를 유발한다고 당국을 설득 할 수 있었다.
의료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고의 혁명은 '맨눈으로 볼 수 없는 작 은 유기체가 질병의 주요 원인'이라는 세균유래설이다. 세균유래설 은 왜 깨끗한 물을 마시고, 몸을 씻고, 옷을 빨고, 생활공간을 청소 하고, 신선한 음식을 먹고, 멸균 상태에서 수술을 해야 하는지 등을 설명했다. 위생 관리를 도입하면서 병원이 감염의 온상이 아닌 안전 하게 회복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질적, 양적으로 더 나은 음식으 로 기근과 영양실조를 해결하면 신체는 질병에 저항할 수 있다. 어 떤 세균이 어떤 질병을 일으키는지 파악하게 되자, 선구자들은 이 세균을 죽이거나 백신을 만들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특정 치료법이 효과가 있는지 알아내려면 임상시험이 필요하다. 이는 제임스 린드 가 선원들을 둘씩 나눠 괴혈병을 예방하는 다양한 음식을 시험할 때 처럼, 다른 부분은 모두 같고 연구 대상 치료법만 다른 집단을 대조 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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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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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세계사

역사 2023. 6. 30. 11:23

- 이 책의 분명한 교훈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즉, 1500년대 대항해시대 의 등장과 같은 시기에 새로운 논리를 세우고, 새로운 세계관을 확장하고 보완할 방법을 찾은 국가들은 이후의 세기 동안 뜻밖의 기회를 찾았다. 마찬가지로 20세기 화석연료 사용의 확대는 이에 요구되는 자원과 기술 을 지닌 국가들의 국제적 위상을 상승시켰다. 이제 새로운 현실과 지식이 등장하면서 우리 종은 미래를 보장해줄 방향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게 되 었다. 앞으로의 역사는 더 지속 가능한 에너지 사용 방식으로 향하는 운 동에 동참하고 이끄는 국가들이 누구이고 그렇지 못하는 국가들이 누구 인지 알려줄 것이다.
- 초기의 무역선들이 근해를 오가게 되면서 왕래가 잦은 뱃길을 따라 자 연스럽게 항구가 생겨났다. 중세 유럽은 대부분 (교회 소유이든 개인 소유 이든) 장원제를 중심으로 한 하향식 사회로 구성되어 있던 반면, 네덜란 드 지방의 땅은 귀족 계급에 속하지 않았다. 이런 독립성 덕분에 네덜란 드는 때마침 등장한 새로운 기회를 붙잡을 수 있었다. 대규모 무역 시스 템에 대한 인식과 초기의 공학적 아이디어가 결합되며 1300년대부터 암 스테르담에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내구성이 강한 인공 운하가 건설 되었고, 운하 주변은 곧 초기 무역상들이 거주지이자 물품 저장고로 사용 하던 '운하 집 Cannal house'이라는 개인 소유 창고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처럼 계획 하에 건설된 원형 운하들은 넓은 바다와 물품 창고를 연결하는 데 필요한 뱃길 역할을 하면서 무역상들의 경제적 지위를 위한 토대가 되었다.
대항해시대가 제대로 정의되기도 전에 암스테르담은 현대의 아마존닷 컴과 같은 위치에 올라섰다. 무역 시스템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전 세계 에서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의 주문과 구매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암스 테르담이 유통과 저장의 허브로 부상한 것이다. 이 시스템은 1599년에 암 스테르담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가 설립되면서 더욱 공식화되었다. 쇼토는 “동인도회사가 세계를 다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대체로 암스테르담이 동인도회사를 만들었다”라고 적고 있다.
암스테르담 사람들은 생물학적 구체제에서 흩어져 있는 이런저런 혁신 적 기술들을 이용하여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도시를 형성했다. 적용할 기 술적 지식이 별로 없던 시기에 그들은 기술자로 활약했다. 하지만 이 초 창기 무역항의 주민들은 중심지로 모여들려는 인간의 욕구를 수용하고, 자신들의 환경을 이해하며 두려움 없이 그 환경에 맞서는 동시에 때마 침 출현한 신기술을 지혜롭게 적용함으로써, 암스테르담을 산업화의 첨단 도시로 만들었다.
- 황소와 소의 움직임과 힘을 조정하는 데 쓰이는 쟁기 및 멍에 등의 도구는 일반적으로 아득한 메소포타미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농업 발 전의 초기에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이런 도구들이 흔히 사용되었다. 가슴에 다는 도구와 목에 다는 도구 모두 중국의 발명품으로 여겨지는데, 중국에 서는 소와 말 모두 농사에 쓰였다.25 소는 무게가 앞쪽으로 집중되어 있 기 때문에, 스밀에 따르면 "몸의 질량이 앞쪽과 뒤쪽에 거의 균등하게 분 배되어 있는 동물”인 말이야말로 짐을 운반하는 가장 힘센 동물이었다. 농사에 동물을 사용했는데도, 에너지 사이클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동물 의 사료로 사용하기 위한 곡물을 키워야 할 필요성 또한 커졌기 때문이 다. 말이 이동수단뿐만 아니라 노동에서도 더 중요해지면서 더 풍부하게 말을 이용하기 위해 많은 기술적 혁신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중국, 아프 리카 및 인도에서 소가 밭일에 가장 흔하게 사용된 주된 까닭은 섬유질 만 먹고도 생존할 수 있는 소의 능력 때문이었다.26 되새김 동물인 소는 비공식적 방목에서 얻을 수 있는 짚을 먹었는데, 덕분에 소는 스밀의 표현에 따르면 "에너지 면에서 분명 저렴한 물건"이었다.

- 1400년의 세계는 다양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구에 사는 3억 8,000만 명의 사람들 중 다수는 여전히 시골에 살았다. 1400년에 (인구가 많은 순 으로 50만 명에서 8만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25개의 도시들은 전 세계 인 구의 대략 1퍼센트만을 차지했다. 이런 인구 중심지들 중 아홉 곳이 중국 에 있었으며, 세계 최대의 도시는 난징이었다. 순위로 볼 때, 그다음 으로 가장 큰 도시들로는 비자야나가르(14세기에서 17세기 사이 남인도에서 번성한 힌두왕조 비자야나가르 왕국의 수도-옮긴이)와 카이로였고, 그다음 네번째에야 유럽 도시인 파리가 등장한다.30 세계의 부가 아시아에 집중되 어 있었지만, 명백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도시 지역의 성장과 더불어 은행업에 그리고 제조업을 뒷받침하는 기 술에 변화가 일어났다. 큰 사업가들의 계층이 생겨나면서 도시의 노동자 계층, 즉 프롤레타리아도 생겨났다. 이 새로운 도시 사회에서는 새로운 유형의 법률 제도와 재산권이 마련되어야 했다. 우선 교역 분쟁에서 생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상사법이 발전했다. 재산 소유는 이전부터 족 쇄로 작용했던 복잡하게 얽힌 관계와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졌기에, 도시 주민이 재산을 공식적으로 소유하는 게 가능해졌다.
도시 생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봉건적 농촌에서는 찾을 수 없던 새로운 자유였다. 소도시가 성장하여 번성했고, 교역, 은행업 및 제 조업이 새로운 규모로 확립되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인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얻었다. 이런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 이전에는 거주가 불가 능했던 숲이나 늪이었던 광대한 토지에 벌채와 배수가 이루어지고 경작 가능한 땅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질서와 긴급성이 생산과 산업의 풍경 속 으로 들어왔다.
많은 부분을 차지한 늪지를 관리하기 위해 댐과 운하 건설이 특기였 던 특별한 도시 암스테르담에서 유럽 저지대국가의 사람들은 봉건 체제 의 제약이 없는 생활 방식을 자랑했다. 그들은 재산을 사고팔며 상호 동 업자 관계를 맺는 개인들로 살아갔다. 바로 이런 정신에 힘입어 암스테 르담 사람들은 1599년에 자신들이 건설한 댐이나 도랑 위에서 만나서 세 계 최초의 다국적 회사를 설립했다. 바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였다. 곧 이 회사는 전 세계 항구들의 배에 등장하게 될 자사의 로고로 널리 유명해졌다.31 담락Damrak이라는 운하 거리 를 따라서, 1602년에 사업 지도자들이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동인도회사 의 주식을 사도록 권유했다. 나중에 인류 역사상 가장 값진 것 중 하나가 된 이 주식은 거래가 가능했다. 러셀 쇼토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 회사가 통달했던 바다와 마찬가지로,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옹호하는 관점에서 말하자면, 역사상 어느 회사도 그 런 영향을 세계에 끼친 적이 없었다. ...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다양한 방법으 로 동인도회사는 세계를 확장했으며 지구의 광대한 지역을 한데 결합시켰다. 세계화를 선도했으며 최초의 근대적 관료주의라고 할 만한 것을 발명해냈 다. 지도 제작법과 선박 제조술도 발전시켰다. 반면 이전에는 결코 상상한 적 없는 규모로 질병을 확산시키고 노예제와 착취를 강화했다. 또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전 세계의 생태계를 뒤섞어버렸다... 동인도회사의 천재성은 이 고도로 발전된 네트워크 속으로 자신을 엮어넣는 데 있었다. 한 세기 후 황 금시대의 끝 무렵에 네덜란드인들은 향신료를 유럽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및 심지어 향신료 제도Spice Islands (향신료 산지로 유명한 인도네시아의 말루쿠 제도를 가리킨다-옮긴이) 사람들에게까지 향신료를 팔고 있었다.
요약하자면, 암스테르담 사람들은 다음 혁명이 국가들 및 지역들 사이의 연결에서 나올 것임을 알아차렸다. 아직 생산 능력이 생물학적 구체제로부 터 완전히 벗어나는 극적인 변화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풍력으로 인 해 가능해진 새로운 세계관과 연결망이 1600년 이후 세계를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 1400년 즈음 농업 덕분에 전 세계 사람들은 생존을 위한 다양한 활동에 태양 에너지를 이용하게 되었다. 농업에 태양 에너지를 이용하면서 발달한 이 특별한 문명 지역들 사이에서 천천히 아이디어와 농작물의 교류가 진행 되었다. 이처럼 여러 지역들을 한데 이어준 것은 인간이나 동물의 힘이 아 닌 태양 에너지의 확대였다. 이에 대해 크로스비는 이렇게 적고 있다.
태양은 어디에서 비치든 공기 덩어리들을 각각 다른 온도로 가열한다. 태 양 에너지로 인해 팽창한 공기 덩어리들은 지구 자전에 따라 이리저리 방향 을 바꾸면서 바람을 만들어낸다. 바람은 땅과 바다에서 이용할 수 있는 태양 에너지의 일종이다.
- 대항해시대가 시작되던 이 시기에 서양 탐험가들과 동양 함대의 동기 는 확연히 달랐다. 중국인들은 기본적으로 문명세계를 여행했으며, 어느 곳도 정복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 값진 조 공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즉, 그들의 노력은 경제적 이익을 위한 것이라 기보다는 상징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유럽 탐험가들은 이슬람과 힘겨운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늘 황금과 이익을 갈구했다. 마침내 중국은 해양 활동이란 불필요하게 경제를 고갈시키는 짓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 결 과 중국인들의 경제적 활동은 국내로 국한되었다. 이와 달리 유럽인들의 탐험은 유럽 국가 간의 경쟁 속에서 더욱 확대되었다. 반면에 중국은 경 쟁자가 없다고 여겼다. 역사학자 로버트 마크스Robert Marks는 외부 세계 에 대한 이런 상이한 문화적 접근법의 이유를 중국이 1400년대에 바다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오랜 세월 동안 내홍을 겪은 중국 정책의 핵심은 광대한 국가의 내적 발달에 집중하는 것이었 다. 하지만 유럽은 완전히 다른 경제 개발 모델을 따랐는데, 이는 바람을 이용하고 관리하는 기술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 식물이 보통 죽으면, 산소가 식물의 세포 속으로 침투하여 세포를 이산화탄소와 물로 분해한다. 이와 달리 빽빽한 정글에서 성장한 석 탄기 식물들은 죽으면서 산소가 부족한 물속이나 진흙 속에 빠져 다른 부패하는 식물들에 의해 둘러싸인 채 매우 천천히 오랫동안 매장되었다. 바닷물이 뒤덮었다가 다시 빠져나갔을 때에도 산소가 닿지 않아서 부패 과정이 완성되지 못했다. 탄소가 풍부한 식물에서 만들어진 작은 구멍 투 성이의 이 물질은 처음에는 토탄이 되었다가 천천히 압착되며 단단 해져 마침내 석탄이 되었다. 프리스는 이 과정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석탄 안에 갇힌 것은 숲의 탄소만이 아니라, 수억 년 동안 태양으로부터 축적된 에너지였다. 그 에너지는 식물의 부패와 함께 방출되지 않은 채 지구의 어둡고 후미진 곳에 파묻혔다. 적어도 숲 바닥을 기어 다니던 양서류가 그걸 파낼 수 있는 생명체로 진화하기 이전까지 말이다!”
- 석탄을 때서 증기를 만드는 능력은 에너지 전환을 촉진하는 놀라운 요 소였다. 제임스 와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기본적인 증기기관 설계를 채택한 다음에 그것을 다양한 산업적 용도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770년 대에 이르러 이런 엔진들은 여전히 석탄으로 증기를 가열하긴 하지만, 같 은 양의 석탄에서 이전보다 네 배나 많은 동력을 뽑아냈다. 제임스 와트 의 증기기관은 제철, 양수는 물론이고 마침내 운송과 같은 목적 등 다양 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증기기관으로 석탄과 철, 모두에 대한 수요가 증 가했고, 그 결과 각 제품의 생산이 더 쉬워졌다. 석탄 생산이 더 쉬워지자,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다양한 용도에서 증기기관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 결과 증기기관은 인간의 생활방식에 진정한 혁명을 가져다준 동력이 되었다. 프리스는 "증기력이 공장 시스템을 창조한 것은 아니지만, 산업 활동 의 규모와 속성 및 위치를 돌이킬 수 없게 변화시켰다”라고 말했다.
- 잔혹한 역설이긴 하지만, 1800년대 후반에 발전한 산업 시대는 본질적 으로 교통에 의존했다. 길고 가느다란 산들이 펜실베이니아와 같은 애팔 래치아 지역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탓에, 미국은 원자재를 운송하는 데 지극히 불리한 지형이었다. 고립된 산악 지역을 개척하려면 자본가와 정치인의 노력이 필요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자원과 영향력을 이용하 여 석탄 혁명을 가능하게 만든 교통망을 만들어냈다. 운하는 탄전의 위대 한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한 첫 단계였다. 하지만 곧 사업가들은 어디에나 놓을 수 있는 더 유연한 교통 시스템인 철도에 초점을 맞추었다. 철, 강철 및 다른 제품을 만들기 위한 원자재들을 한데 이어주던 철도는 산업화의 과정인 동시에 산물이었다.
- 강철 제조와 기반시설의 설립
철도의 건설 그리고 석탄 연소를 통한 동력 확보 방식 덕분에 전례 없던 규모와 범위로 온갖 산업 활동이 시작되었다. 철 제조는 1850년 이후 더욱 강력해진 산업화 방식으로 규모가 확대되었으며, 강철이야말로 이 새로운 시대의 능력들 중 가장 탁월한 사례일 것이다. 연결 장치로 철도를 이용함으로써 앤드루 카네기 Andrew Carnegie는 강철 제조 과정을 완성 하여, 역사상 가장 큰 부를 일구었다.
카네기가 관찰하기로, 1파운드의 강철에는 미네소타에서 1,000마일을 건너온 2파운드의 철광석이 들어갔고, 배로 피츠버그까지 50마일을 건너 온 1.3파운드의 석탄이 들어갔으며, 피츠버그로부터 150마일 건너온 3분 의 1파운드의 석회가 들어갔다. 강과 철도가 피츠버그의 머논가힐라 강 을 따라 원자재를 카네기철강회사로 가져왔다. 그곳에서 베세머 용광로 가 원자재를 녹여서 강철을 만들었다.
미국의 산업이 급성장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유연했기 때문이다. 철도 건설이 다양한 산업들 속으로 재빠르게 통합될 수 있었기에, 미국은 새로운 베세머 강철 제조 기술을 즉시 수용할 수 있 었다. 반면 영국과 같은 나라들은 고착된 기존의 방법을 재빨리 바꾸기가 어려웠다.
- 요컨대 1850년 이후 상당수의 사람들이 우리 종의 능력에 관해 근 본적으로 새로운 개념을 갖게 되었다. 이 새로운 생활 방식의 도입 여부 에 따라 가진 자들과 갖지 못한 자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형성되었다. 그 리고 이런 생활 방식은 20세기 인간에 대한 기대를 재정의한 시간, 공간, 이동 및 건강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들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발전 은 에너지가 인간 생활에 필수적이며 에너지는 많을수록 좋다는 것을 인 식하고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1851년 건설된 수정궁과 그 출발점이 같다 고 할 수 있다.
- 석유가 농업 생산력을 결정하다
인류가 생물학적 구체제에서 벗어나면서 농업은 여러 면에서 기계화되 어 전 세계적으로 생산이 증가했다(비록 1900년 즈음엔 대다수의 경작 가능 토지가 이미 경작되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산업화의 첫 시기 동안 유럽 및 그 밖의 지역에서 농업은 교통 혁신에 의해 크게 변화했다. 서유럽과 미 국에서는 철도 덕분에 식량 생산과 유통을 위한 기반시설이 마련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증기선 덕분에 막대한 양의 곡식들이 바다를 통해 전 세계 로 운송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초기 단계는 변화의 서막에 불과했다. 풍부한 석유 공급을 토대로 화학 비료와 살충제, 관개시설, 농기계 및 품종 개량을 통해 농업 생산량이 증가했다. 1900년에 농업은 과거 수천 년 동안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새로운 도구들을 통해 화석연 료를 이용하면서 생산력이 높아졌고, 이런 경향은 특히 미국, 소련, 캐나다, 아르헨티나 및 호주에서 두드러졌다. 경제사학자인 크리스티안 스메 드세우 Christian Smedshaug는 선진국의 농업이 "건초와 귀리와 같은 신선한 탄화수소가 아니라 경유와 휘발유 등의 화석연료에서 에너지를 얻으면서 넓은 면적의 땅을 농경지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27 트 랙터 등의 장치를 통한 기계화 덕분에 이전보다 더 넓은 땅을 경작할 수 되었는데, 이는 농사용 가축을 먹이려고 남겨둔 땅을 경작용으로 돌린 덕분이었다. 1915년은 짐을 끄는 동물의 사용이 정점에 달한 해였다. 
이후로 휘발유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트랙터를 사용하게 되면서 더 적 은 농부들이 더 많은 땅을 경작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에서 1차 세계대 전 후에, 그리고 소련에서 1930년대부터 농업이 축력에서 벗어나기 시작 했다. 콤바인을 이용해 수확을 한 덕분에 농부들은 하나의 작물만 기르는 단일 경작을 하면서도 경작 가능한 땅이 엄청나게 넓어졌다. 이와 같은 장비의 사용은 곧 일을 시키는 동물의 사료를 위해 작물을 경작할 필요 가 없어졌다는 의미였다. 전반적으로 현대 농업의 특징은 체계적 시스템 이 자리를 잡고 식량 생산에 대한 신뢰도가 증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농업이 다른 요인들과 결합되어 더 넓은 분야에서 기계를 이용하 게 된 덕분에 산업화된 국가들은 19세기 후반 즈음엔 상당한 잉여 식량을 생산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0년 이후 석유의 사용으로 잉여 식량은 더욱 늘어났다.29 작물 신뢰성 또한 비료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능력을 바탕으 로 향상되었다. 1900년 무렵에는 구아노와 같은 천연비료가 고갈되었고, 초석과 같은 필수적인 공업용 재료는 군수품으로만 사용되었다. 그런 와중에 암모니아의 합성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질소 비료 덕분에 생물학 적 구체제의 자연적 한계에서 벗어나 인구 성장이 촉진되었다.
- 석유탄화수소를 기본 원료 내지 유효 성분으로 이용하여 해충과 해초 와 관련된 농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화학물질도 개발되었다. 이렇게 개발된 다양한 화학물질들은 모두 석유 에너지로부터 얻거나 석유 에너 지를 사용하여 생산된 것이었다. 농부들은 이런 화학물질을 이용하여 식 물의 성장을 촉진하거나 해충을 구제했다. 화학물질은 특히 제초제와 살 충제로 많이 쓰였다. 1900년대 중반에 석유화학 산업이 생겨나며 거대한 실험실과 같은 대규모 공장에서 이런 제품들이 제조되었다. 제조업체들 은 화학 연구를 통해 기름을 선진국 농업에 필수적인 화학물질의 기본 재료로 사용했고, 기름을 각각의 연료 제품으로 만들려면 정제 시설이 필 요했다. 그렇게 대다수의 석유화학 산업은 이제 세계 최대의 오염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 화학물질이 제조되면 어떤 형태로든 독성 폐기물이 남았기 때문이다.
- 20세기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화학자들이 경작 능력을 향상시키 는 합성질소를 만드는 방법을 발견했다는 것인데, 이 과정에도 역시 석 유가 필요했다. 지구의 질소 공급량은 제한적이지만, 모든 생명은 아미노 산, 단백질 및 핵산 합성의 기본 재료로 질소를 사용한다. 식물은 질소 없 이는 자라지 않으며, 지구의 사용 가능한 질소 공급량의 대부분은 콩과 식물의 뿌리에 붙잡혀 있다. 합성질소는 이 질소를 '고정시키는' 방법, 즉 열을 가하여 질소 원자들을 분리시킨 다음 이 원자들을 수소와 결합시켜 합성 복제품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다. 1909년에 프리츠 하버 Fritz Harber와 카를 보슈Carl Bosch가 이와 같은 질소 고정 방법을 발견해냈 는데, 20세기의 합성 비료는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질소와 수소를 강한 열과 압력으로 결합시키는 하버-보슈의 방식에서 강한 열과 압력은 전기를 이용해 발생시키고, 수소는 화석연료, 주로 석유, 석탄 또는 천연가스를 이용해 발생시킨다. 기자인 마이클 폴란Michael Pollan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인류가 질소를 고정시키는 능력을 획득하자, 전적으로 태양 에너지에 의존하던 토양 비옥도가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것으로 바뀌었다!”30 질소 비료의 공급이 짧은 시간 동안 거의 무한정 이 루어지면서 인간은 자연적 한계에서 해방되었고, 농부들, 특히 미국의 농 부들은 산업적 원리에 따라 작물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폴란은 이렇 게 덧붙인다. “질소를 고정시키는 방법으로 먹이연쇄가 생물학의 논리에 서 벗어나 산업의 논리를 끌어안게 되었다. 오로지 태양으로부터 먹이를 얻는 대신에 인류는 이제 석유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이른바 하버-보슈 과정은 이후의 세계사를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식물 성장의 자연적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하며 인류의 식량 생 산 능력을 엄청나게 증대시켰기 때문이다. 
- 에너지의 새로운 대량 공급 위에서 생겨난 새로운 생활방식은 인간 생 활의 모든 측면을 바꾸었는데, 특히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더 욱 그랬다. 어디서나 조명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1800년대 중반으 로서는 대단히 혁명적인 도구였던 성냥은 이제 아득한 원시 시대의 상징 물처럼 보였다. 역사가 존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미국의 총 에너지 소 비가 1900년에서 1930년 사이에 2.5배 늘어난 반면에, 전기 사용은 스무 배 넘게 증가했다."49 공장과 산업체는 거의 어디든 전기를 이용했으며, 가장 낮은 요율의 전기료가 부과되었다. 1927년 미국 인구의 20퍼센트를 차지하는 동부 연안 지역의 산업체들이 총 전기 사용량의 30퍼센트 이상 을 소비했다. 20세기의 첫 30년 만에 에너지 소비는 250퍼센트 증가했는 데, 이는 인구 증가율의 두 배 이상이다.
- 가정에서 전기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1922년에서 1927년 사이에 미 국인들은 9만 5,000개가 넘는 다리미, 5만 4,000개의 진공청소기, 2만 1,000개의 세탁기, 2,000개의 재봉틀 그리고 500개의 냉장고를 구입했 다. 1935년에는 전체 미국인의 약 3분의 1이 냉장고를 사용하게 되었다. "전기화는 미국과 나머지 세계 사이의 간극을 더 벌렸다”라고 존스는 적 고 있다. "1929년 미국의 전기 생산은 다른 모든 국가의 총합을 능가했 다.” 이런 에너지 변화는 미국을 모범적인 현대 국가로 만들 정도로 미국 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다.50 미국에서 광물 에너지 자원은 이제 사치품 이 아니라 필수품이었다.
- 냉전이 불러온 원자력 경쟁
핵에 대한 지식은 군사 전략을 바꾸어놓았고, 거의 무제한적인 에너지원인 핵 기술은 냉전 시대의 경제와 함께 성장했다. 역사가 막스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냉전이야말로 경제 전쟁이었다”라고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은 소비를 강조했고 소련은 생산을 강조했다. 현 시대의 상징으로서 각각의 경제 모델은 실제로 원자력 에너지 개발의 가 능성에 주목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각각의 모델은 아주 다른 결과 를 내놓은 듯하다.
미국의 경우, 정부 지원금과 규제 조치가 원자력 에너지 개발을 이끌었 다. 하지만 원자력 에너지는 여전히 경쟁 시장에서 전력 생산 방식의 한 종류일 뿐이었다. 이런 초기의 실증주의적 '핵 문화'는 미국의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고, 각 공동체는 2차 세계대전 후에 저마다의 원자력발전소 설립 계획을 원했다. 일반적으로 이런 소비주의적 접근법으로 인해 원자력 산업은 시장의 취향에 따라 변하기 쉬웠다.
반대로 생산주의적 접근은 처음에는 소련에서 하향식 조치를 통해 원 자력 산업이 강력한 입지를 다지게 만들었고, 이후 권위주의나 사회주의 국가들로까지 확장되었다. 특히 소련에서는 이런 접근법 때문에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철저한 규제와 안전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맥네일은 다 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원자력은 유럽의 과학계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미국에서 성숙했고 이후 전 세계로 퍼졌다. 세계 최초의 스스로 유지되는 핵반응은 1942년 미국의 핵무 기 개발을 위한 연구 도중에 시카고대학교의 스쿼시 코트에서 일어났다. 민간 용 원자력 개발은 1954년 소련에서 시작되었다가 1955년 영국이 뒤를 이었고 1956년에는 미국의 원자력 개발이 댐 건설과 같은 정치적 매력을 얻게 되었 다. 원자력은 활력과 현대성을 상징했다.
- 1976년이 되자 플라스틱은 모든 강철, 구리 및 알루미늄 제품을 합친 양 보다 더 많이 제조되었다. 플라스틱의 확산은 어느 정도 생산의 특이성에 서 기인했다. 다른 제품들에 비해서 플라스틱은 소량으로 제작하기에는 비쌌다. 왜냐하면 주형과 생산 설비를 만드는 데 드는 고정비용이 높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들은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 만큼 대량으로 생산 해야만 했다. 과시적 소비를 부추기는 상황이었다.
- 오늘날 다섯 가지 합성수지가 소비자들이 사용하는 모든 플라스틱의 60퍼센트 가량을 차지한다. 저밀도의 폴리에틸렌이 쓰레기봉투에 사용되 고, 폴리염화비닐이 요리용 기름병에 사용되며, 고밀도의 폴리에틸렌이 우유 담는 병에 사용되고, 폴리프로필렌이 자동차 배터리 케이스에 사용 되며, 폴리스티렌이 일회용 음식 용기에 사용된다. 일상생활에 플라스틱 이 대단히 많이 사용되는 오늘날 우리는 이 물질이 형태의 유연성 이외에 도 다른 속성이 하나 더 있음을 알게 되었다. 놀랍도록 내구성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실제로 플라스틱을 처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 일본은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차량 설계를 지원할 만큼 원유를 충분 하게 공급받지 못했다. 1973년 일본은 첫 번째 석유 위기로 휘발유 가격 이 217퍼센트나 치솟았다. 석유 절약은 국가 정책이 되었고, 일본 자동차 제조업체들도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배기가스 규제를 시행했다. 일본 자 동차 제조업체들은 휘발유 한 방울당 최대의 주행거리를 짜내는 데 능 했다.
차량 무게를 최대한 가볍게 하는 것도 연료 효율 향상에 이바지하는 요 인이었다. 무게를 줄일 확실한 방법은 차량 크기를 줄이는 것이었고, 미 국과 유럽 제조업체와는 달리 이것은 수십 년 동안 소형차를 생산해온 일본 제조업체들로서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게를 줄이는 방 법 중 하나는 전륜 구동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 방법은 고장력 high-tension 강판, 알루미늄 및 플라스틱과 같은 가벼운 부품과 재료 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연료 효율을 높이는 또 다른 방법은 전기적으로 제어되는 연료 주입 시스템, 공기 저항 감소 그리고 섬유강화 금속, 플라 스틱 및 세라믹과 같은 신기술을 이용한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1975년에서 1985년까지 소형 승용차와 대중적인 가격의 소형 차량들 간의 경쟁이 특히 일본에서 신제품 개발과 시장 확대를 이끈 동력이었 다. 소형 승용차 판매는 석유 위기의 여파로 시장을 선도했다. 왜냐하면 정부의 엄격한 배기가스 규제에 따르면서도 가격 경쟁력이 높은 새로운 모델들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가 끝날 무렵 미국의 도로에 포 드 핀토, 셰보레 베가, AMC 그렘린을 포함하여 수입된 플리머스 크리켓, 닷지 콜트 그리고 폭스바겐 비틀이 등장했는데, 이 모두는 일본 디자인을 따른 차들이었다.
- 오늘날 미국의 전략비축유는 대략 7억 배럴까지 증가했는데, 이 물량을 15억 배럴까지 올리는 계획이 추진 중이다. 이 계획을 추진하는 이들은 이런 조치가 석유 수입에 대한 불안을 크게 해소해주며 외교정책의 핵심 수단이 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석유 생산이 감소하는 시기에 전략비축유 덕분에 미국은 '에너지 무능력'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각국이 저마다 그런 시도를 한다면 과연 전략비축유가 효과적일까? 한번 알아보 자. 2006까지 나름의 방식의 전략비축유를 선언한 국가들에는 유럽연합 각국(이는 27개국의 연합을 구성하는 지시의 한 요건이다), 중국, 이스라엘, 요 르단, 싱가포르, 한국, 대만, 태국, 일본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이 포함 되었다. 게다가 비축유 저장고를 개발 중인 국가들로는 인도, 러시아, 이 란,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필리핀이 있다.
미국 에너지정보국Energy Information Agency, EIA에 따르면 대략 41억 배럴 의 원유가 전략적 저장고에 비축되어 있는데, 그중에 14억 배럴이 정부에 의해 관리되고 나머지는 민간 기업이 보유한다. 현재 미국의 보유고는 세계 최대인데, 텍사스에 두 곳(프리포트 근처에 위치한 브라이언마운드 그리고 비니 근처의 빅힐), 루이지애나에 두 곳(레이크 찰스 근처의 웨스트핵베리 그 리고 배턴루지 근처의 베이유토)이 있으며, 미시시피 주의 리치턴이 추가 될 마지막 장소이다. 이런 개발은 원유 생산 기업들에게는 두말할 것 없 이 수익이 나는 일이지만, 진정한 석유 부족 시대가 낳은 경쟁적 시장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것은 1973년 금수 조치 때와 같은 거짓 희소 성의 장면이 아니다. 이 희소성은 '원유 생산의 정점'이라는 개념에서 도 출되었으며 막바지라는 느낌을 풍긴다. 이 혁신적인 새로운 논리 속에서 석유 공급량이 제한적이라는 과학적 현실이 소비문화와 맞물리면서 석유 사용국들은 저마다 사회의 기반이 되는 희소한 자원을 가장 먼저 확보하 려고 치닫고 만다.
- 석유 확보를 위한 치열한 전쟁
선진국의 관점에서 보면, 석유의 정치 무기화는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 을 점점 더 요구하고 있다. 1989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조지 W. 부 시는 중동과 석유독재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놓고 말했다. "그들이 맞 이한 미국 대통령은 석유와 가스 업계 출신이기 때문에 그 업계를 알아 도 너무 잘 아는 사람입니다.” 부시의 세계관은 자신의 사업 경험과 잘 맞 아떨어졌다. 그는 (당시 세계 석유 생산의 3분의 2를 담당하던) OPEC 주도의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지닌 전략적 중요성을 확고하게 (그리고 드러 내놓고) 믿는 최초의 서구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 이 역사적인 분기점에서 OPEC은 모든 회원국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석 유 가격을 고정시키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지만, 개별 국가들은 자국의 경제적 한계 때문에 석유 생산 억제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1990년 후세 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미국 대통령이자 석유 기업가인 부시는 유엔 군의 합동 작전을 통해 후세인의 진격을 막았으며, 최종적으로 이라크 군 대를 자국으로 철수시켰다. 이라크 군대는 쿠웨이트에서 철수하면서 그 나라의 많은 유정에 불을 질렀다. 이 테러 행위는 환경 재앙을 초래했으 며, 쿠웨이트가 곧바로 원유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훼손시켰다.
하지만 가장 큰 손해는 후세인의 계산착오로 말미암아 미국이 세계의 석유 지역에서 군사 활동을 개시했다는 사실이었다. 부시는 페르시아만 의 국가들과 미국 사이에 상호 의존적인 관계 수립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격 안정이 지속된다는 의미는 아니었 다. 1990년대 후반에는 생산 감소와 관련된 더 많은 문제들이 나타났다. 생산 불균형으로 인해 1999~2000년 사이에 휘발유 가격이 세 배로 올랐 다. 칼도어 Kaldor와 동료들은 이라크에서 벌어진 21세기 전쟁의 근원을 추 적했다. 그들에 의하면 미국은 석유를 통해 전쟁에 대한 결심을 쉽게 내 릴 수 있었고, 이후 석유를 둘러싸고 이어진 '구식 전쟁'에 전면으로 나서 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이라크 전쟁에서 드는 비용은 그곳에서 얻게 될 "석유 수익"으로 충당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 역사의 장난인지,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이전 대통령의 아들인 조지 부시가 당선되었다. 이라크의 지도자 후세인과 중동 석유 공급 문제가 아 들 부시의 우려 사항이긴 했지만, 석유 가격은 조금 낮게 유지되었다. 하 지만 에너지 안보는 2001년 9·11 공격으로 대중의 관심사로 등극했다. 비 록 후세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부시 대통령은 이 공격을 빌미 로 삼아 두 가지 이유에서 이라크 지도자 축출을 미군의 임무로 삼았다. 첫째는 신뢰할 수 없으며 잠재적으로 위험한 후세인이 그런 중요한 석유 보유국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만약 후세인 축출을 위한 침 공이 실행된다면 석유 판매로 인한 수익이 새로운 이라크를 빠르게 안정 화할 테니 미국이나 기타 점령국들이 지원해야할 금융 자원이 줄어들 것 이라는 점이었다. 이 두 가지 전쟁 구실 모두 석유의 중요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바로 지금, 즉 우리에게 현재인 이 놀라운 순간에,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어떤 진화상의 경로가 계속 열려 있을지, 어떤 경로가 영원히 닫히게 될지를 결정하 고 있다. 다른 어떤 생명체도 이렇게 한 적이 없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결정은 우리의 가장 오래가는 유산이 될 것이다.1
《여섯 번째 대멸종The Sixth Extinction 》에서 이 책의 저자 엘리자베스 콜버트 Elizabeth Kolbert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 그리고 인류세라는 개념의 등장을 위와 같 이 적고 있다.
인간은 지구의 역사에서 다른 어느 종보다도 더 공격적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그 렇다 보니 과학기술을 통해 높아진 인식과 이해의 수준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 신이 지구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인류세의 맥락에서 우리 는 인류의 에너지 개발의 다음 국면은 최대한 문젯거리를 덜 일으키는 것이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조만간 이러한 더욱 온순한 에너지원들은 더 이상 '대안'이라 고 불리지 않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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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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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히브리스

역사 2023. 6. 9. 13:30

- 수만 년의 시간을 두고 현생인류가 유라시아 대륙에 나타난 것이 왜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후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고고유전학과 인류사의 보편적 이해에 중요한 질 문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계산 수치에 따르면 대략 3만 9000년 전, 늦어도 3만 7000년 전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축출함으 로써, 즉 현생인류가 나타난 직후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졌다. 하지만 새로운 연대 측정에 따르면 완전히 다른 역사가 펼쳐진다. 현생인류 는 최소 5000년 동안 유럽에서 네안데르탈인과 함께 살다가, 현생 인류가 유럽 대륙을 차지한 것이다.
- 어쨌든 현생인류는 최초의 문화 기술을 통해 세계라는 구조에서 고유한 종이라는 독보적인 지위에 올랐다. 지금까지 인류는 이러한 의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우월함이 유전적 차이에서 기인한다는 증 거도 많다. 아프리카에서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이 공통의 조상 으로부터 분화되고 90가지 차이가 생긴 후 현생인류는 우월해지기 시작했다. 이 돌연변이 중 하나가 일종의 망상을 일으켜 그 유전적 토대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개체군에게까지 뻗쳐, 이 개체군이 목적 없는 방랑자가 되지 않고 신비주의, 음악, 동굴 벽화 등을 통해 삶에 더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이 아닐까?
현생인류는 지금으로부터 4만 년 전에 세계를 정복하고 네안데르 탈인과 데니소바인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현생인류의 승리를 유전 자를 통해 입증할 수 있는 날이 오려면 아프리카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은 기존의 설을 반박하는 것이다. 호모 사 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를 거쳐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는 이야기는 고고학계에서 정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현생인류는 오 랜 기간 도움닫기를 하고 숱한 퇴보를 감수해야 했다. 네안데르탈인 과 데니소바인이 자신들만의 거처를 발견했던 북쪽은 우리 조상들 이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이들은 인류의 요람, 남아프리카에서 성 장하다가 성공가도에 올랐다. 남아프리카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유 전적 '인종의 용광로'가 탄생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수많은 만물의 영장 후보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 초기 인류의 방랑벽은 대단했다. 이런 성향은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도 마찬가지였다. 기회만 생기면 각 집단들은 북쪽으로 이 주를 시도했다. 이들이 꼭 이주를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원래 아프 리카 대륙은 이곳에서 세력을 확산시키기에 공간이 충분한 매력적 인 사냥터였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는 유라시아의 절반보다 조금 컸 지만 빙하기에 북반구에서 남쪽의 기온과 그곳의 동식물에 길들여 진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공간은 근동 지방, 인도아대륙, 동남아시아 등 일부에 불과했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비아프리카인 호모 에렉투스는 180만 년 전 캅카스 지역에 살았고 훨씬 더 북쪽으로 이 동을 시도했다. 호모 에렉투스는 일시적으로 날씨가 온화해진 시기 를 이용해 이동했는지도 모른다. 특히 인도양을 따라가는 남방 통로 는 수천 년 동안 호모 에렉투스의 왕래가 활발했던 곳일 수 있다. 아 주 이른 시기부터 이곳에서는 우리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인류 종들 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확산되었음을 입증하는 새로운 발굴물들이 규칙적으로 발견되었다.
- 기저 유라시아인이 유라시아인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차단된 채 살아가는 동안 다른 이들은 세계 정복을 시작했다. 이들은 언젠가 기저 유라시아인과 이웃이 될 터였다. 장벽이 푸르러지거나 녹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것은 3만 년 전, 어쩌면 2만 년 전의 일로 추측 된다. 어쨌든 약 1만 5000년 전의 근동 지방은 유전적으로 거의 균 등하게 2개의 개체군으로 표현된다. 기저 유라시아인들은 네안데르 탈인의 DNA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근동 지방 최초의 농경민들에게서도 이러한 고인류가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8000년 전 기저 유라시아인의 DNA는 유럽으로 이동했다. 아나 톨리아의 농경민은 이 시기에 유럽의 수렵채집인을 밀어냈다. 이 DNA는 유전자 이동으로 네안데르탈인의 비중이 감소해 현재까지 거의 변화가 없다. 반면 아나톨리아인이 진출하지 않았던 아시아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이곳에서 네안데르탈인의 DNA는 일정하게 유 지되었고 유럽인보다 그 비중이 높았다.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 아 원주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조상들이 아프리카에서 나 온 직후부터 분리의 역사는 우리의 유전자에도 새겨져 있다. 그래서 현재의 유럽인들은 평균 2퍼센트의 네안데르탈인 DNA를 가지고 있고,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0.5퍼센트 더 많이 지 니고 있다.
- 아프리카에서 현생인류가 사피엔스로 성숙해지고 아라비아반도에 서 기반을 잡은 후에도 아프리카로 돌아갈 수 있는 다리는 오랫동안 끊어져 있었다. 기후 모델에 따르면 이 지역은 약 3만 년 전 해협양 측의 강우량이 감소해 생명체가 살기 좋은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동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의 통로로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오랜 기간 다른 세계 사람들과 차단되어 있다가 약 1만 년 전 사하라 사막이 푸르러지고 북부 통로로 다시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빙하기 동안 해수면이 낮아져 새로운 고향을 찾아 떠났다가 지구의 기후가 온난해지고 수천 년 동안 유라시아의 초기 개체군과 접점이 없었던,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도 이와 비슷한 운명에 놓여 있었다.
우리 조상들이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늑대와 하이에나, 빙 하와 스텝의 땅을 정복하기 위해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고 성공하기 까지는 수천 년의 세월이 더 흘렀다. 이 길의 끝에서 진화 역사상 최 초로 인간의 문화가 생물학적 특성을 이겼다. 빙하기, 굶주림, 가혹 한 자연의 피해를 덜 입은 고인류들은 문명이 탄생한 후에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그전에 우리 조상들은 이들에게서 유용한 유전자를 빼앗아왔다. 이를테면 우리가 세계의 지붕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운 유전자 말이다.
- 아프리카의 우리 조상들이 근동 지방으로 이주할 때 나타났던 병목 현상은 지금도 비아프리카인의 유전자를 통해 추론할 수 있다. 오늘 날의 세계 인구가 약 1만 명으로 구성된 집단에서 출발했다면 비아 프리카인은 대략 그 절반에서 시작했다. 이주민들은 유전자풀의 일 부만 나타낸다. 따라서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차지하는 비 중을 제외하면 현재 사하라 이남 이외 지역의 DNA는 완벽하게 아 프리카인의 스펙트럼 내에 있다. 이후에 유라시아인이 된 이들의 조 상은 약 5000명으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이러한 집단 규모는 현대 의 관점에서는 크지 않아 쉽게 파악할 수 있지만, 당시 근동 지방에 서는 인구 밀도가 꽤 높은 편에 속한다.
- 마찬가지로 네안데르탈인의 게놈은 최대 약 5000명인 '장기 개체 군 크기'를 나타내고 있지만, 실제로는 유럽 전역과 아시아의 절반 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이 데이터에 따르면 식량 공급량이 감소했 던 혹한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때 네안데르탈인의 수는 500개 체까지 감소했다. 이들은 거의 멸종 직전에 이르렀다. 네안데르탈인 들이 카니발리즘에 빠졌던 시기와 관련이 있다는 추측도 완전히 잘 못된 것은 아니다. 네안데르탈인 게놈에 잠재적으로 유해한 돌연변 이가 축적된 상태였으리라는 추측도 이보다 훨씬 작은 개체군 크기 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와 일치한다. 이는 우리 조상들의 동족들 이 종종 매우 좁은 공간에 함께 있었다는 뜻이다.
-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의 혼혈로 유전자 변형이 생겼다. 가장 먼 저 발견된 유전자 변형 중 하나는 두꺼운 피부를 만드는 데 관여했 다. 이러한 유전자의 특성은 추운 북부 지방에서 틀림없이 유용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 조상들은 확실히 자연선택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현재 살아 있는 유라시아인의 70~80퍼센트에게서 케라틴 생산에 관여하는 게놈의 위치에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변 형이 나타난다. 케라틴은 피부뿐만 아니라 머리카락과 손톱을 형성 하는 단백질이다. 이 단백질 생산량이 증가하면 피부가 더 튼튼하고 두꺼워져 열손실을 감소시킨다.
소위 네안데르탈인의 색소 형성 유전자에 이와 동일한 효과가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피부 두께의 경우처럼 이러한 유전자 변형에 관한 연구 결과는 명확하지 않다. 이것은 어떤 조합이 어떤 반응 을 일으키는지 특정하기 어려운 유전자 유형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안데르탈인의 색소 형성 유전자가 더 어두운 피부와 더 밝은 피부 중 어디에 관여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어쨌든 이러 한 유전자 변형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의 피부색은 어둡게 발현될 수도 있고 밝게 발현될 수도 있다. 물론 네안데르탈인 주변에 있던 현생인류에게서 밝은 피부가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짐작케 하는 증 거도 많다. 예를 들어 이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색소를 더 적게 형성 해 햇빛이 부족한 북부 지방에서 더 효율적으로 비타민 D를 생산했 다는 것이다.
- 네안데르탈인의 색소 형성 유전자는 특히 오늘날의 영국인, 평균 이상이나 평균 이하의 어두운 피부를 가진 모든 영국인에게서 발견 되었다. 이러한 유전자 변형은 피부색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신체적 특징일지라도 유전자의 외적 형태, 소위 표현형이 항상 명확하게 결 정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한 셈이다. 게놈은 이진 코드가 아닌, 수십억 개에 달하는 염기쌍들의 변형과 조합에 숨겨진 정보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우수한 컴퓨터보 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흡연자 유전자'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네안데르탈인 에게서 물려받은 이러한 유전자 변형은 현재 중증·고도 흡연자에게 서 자주 생긴다. 이 유전자는 담배, 구체적으로는 담배의 성분인 니코틴 중독에 훨씬 취약한 특성과 관련이 있다. 어쨌든 다음 두 가지 는 확실하다. 첫째, 네안데르탈인에게는 담배가 없었다. 둘째, 가장 위험한 신경독 가운데 하나인 담배를 선호하는 것과 담배 연기에 포 함되어 있는 발암 물질이 어떤 생명체의 생존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없으므로, 원칙적으로는 진화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다. 이 두 가 지 이유 모두 문제의 유전자 변형이 담배에 대한 친화력 외에, 이유 전자 보유자에게 '자연선택'에서 유리한 다른 특성을 발현시켰을 것 이라는 주장을 입증하는 셈이다. 구체적으로 이것이 어떤 특성인지 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네안데르탈인이 담배 말기와 담배 재배 기술을 터득했더라면 동굴이 유해 물질로 가득했으리라는 사 실만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 유전자 변형은 다른 중독 장애와는 관련이 없다.
- 네안데르탈인에게는 또 다른 유전적 특성이 있었다. 추운 북부 지 방의 현생인류에 비해 신체적으로 건강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현대 유럽인에게서는 선천적 면역 체계를 담당하는 톨유사 수용체 중 하 나에서 작용하는 네안데르탈인 유전자 단편이 발생하는 빈도가 평 균보다 높다. 이것은 당시 유라시아에 나타났던, 인간에게 위험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에 적응하기 위해서였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 만 어떤 병원체가 정확하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세계 유전자풀에 존재하는 다른 네안데르탈인 유전자 단편 을 살펴보아도, 이 단편이 우연히 확산되었는지, 어떤 장점을 가지 고 있는지 명확하게 밝힐 수 없다. 이 유전자 단편을 보유한 사람은 통증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그다지 기뻐할 일은 아닐 것이다. 현 재의 기준에서 네안데르탈인은 이 유전자 단편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고, 오늘날의 8세 어린이와 같은 통증을 느꼈을 것이다. 이것은 네안데르탈인 유전자를 통해 암호화된 통증 수용체를 실험실에서 제 작한 후 전기 신호에 대한 민감성을 측정함으로써 알려진 사실이다. 네안데르탈인의 통증 유전자를 보유한 유럽인은 전체 유럽 인구 의약 1퍼센트이며 드물게 나타난다. 반면 멕시코와 남아메리카의 원주민 가운데 둘 중 한 명은 이 유전자 단편을 가지고 있다. 이 유전자 단편은 통증에 대한 민감도가 더 높거나, 유전자와 관련이 있거 나, 알려지지 않은 특성이 있건 간에, 이 유전자 단편은 자연선택의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로 이주 후 정착되 었거나,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이주할 때 병목 현상이 있었던 개체 군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아메리카에서 이 단편이 확산 된 것은 유전적 우연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을 통해 현생인류가 물려받은 통증에 대한 민감성이 미지의 대륙을 발견했을 때 장점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 다. 통증에 대한 민감성은 독성이 있는 식물 등을 접했을 때 신체에 경고 신호를 보낸다. 이것은 낯선 지역에서 위험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 동식물의 특성을 잘 알았던 네안데 르탈인이 이러한 유전적 특성을 물려준 것인지 그 답은 알 수 없다.
- 네안데르탈인 여성들은 평균적으로 프로게스테론을 더 많이 생 산했기 때문에 다산을 할 수 있는 신체적 조건이 갖춰져 있었고, 이 것은 더 큰 개체군을 형성하는 데 확실한 생물학적 이점이었을 것이 다. 현생인류는 더 온화한 기후와 생존 기회가 더 많았던 남쪽에서 더 많은 것을 채워 나갔다. 북쪽으로 이동해 네안데르탈인과 혼혈을 했던 현생인류는 자연선택의 이점도 함께 물려받았다. 영국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현대 유럽 여성의 약 60퍼센트가 네안데르탈인 여성의 유전자 단편을 보유하고 있다.
-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을 갖기 시작한 이래 동물권을 세 개의 큰 범 주로 분류했던 듯하다. 최대한 많이 먹어치워야 해서 죽여야 하는 동물, 멀리하거나 바로 죽여야 하는 위험한 동물, 위험하지 않지만 먹을 수 없고 성가시면 죽일 수도 있는 동물. 우리 조상들이 유라시 아에서 오스트레일리아까지 거대 동물을 멸종시키는 데는 몇천 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후 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동물을 다루는 법을 발견했다. 공존과 이용이었다. 하지만 야생 동물을 가 축으로 길들이는 것은 아직 먼 훗날의 일이었다. 이 시도는 동남아 시아에서 거대한 낙농 및 도축용 쥐를 사육하면서 시작되었다기보 다는 더 북쪽에 있는 아시아와 유럽에 양, 염소, 소, 돼지를 기른 선 구자들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 전에 석기 시대 유라시아 사람들이 예속물이 아닌 충직한 동반자로 여겼던 동물이 있다. 다름 아닌 개였다.
- 늑대가 가축화되던 초창기에는 틀림없이 새끼 강탈도 있었을 것이 다. 인간은 늑대 새끼에게 젖을 먹일 필요가 없게 되자마자 어미 늑 대를 죽이고 사육을 도맡았을 것이다. 이 행위는 다양한 장소와 시 대에 걸쳐 수차례 시도되었고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어미 늑대가 새끼 늑대를 물었을 때, 때로는 사육자들을 물 었을 때, 종종 주인을 공격해 목숨을 잃는 늑대들에게 이런 일이 벌 어졌다. 여러 세대를 지나자 충직한 짐승들이, 어쩌면 다른 수렵·채 집인 집단에서도 길들여져 유사한 특성을 갖게 된 짐승들과 짝짓기 를 하며 점점 우세해졌다. 현대의 개들은 수백 년이라기보다는 수십년에 가까운, 비교적 짧은 기간에 사육을 통해 길들여졌다. 애완용 여우의 사육에 관한 구소련 출신 학자의 장기 연구 결과를 통해 알 려졌듯이 이러한 성격적 특징에서는 유전자 발현이 중요하다. 1959년 러시아의 유전학자 드미트리 벨라예프Dmitry Belyayev는 대 규모 실험을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 늑대가 개로 진화할 수 있었는 지 밝히고자 했다. 인간에게 충직하게 길들여진 개의 성격적 특징은 의식적인 자연선택의 결과라는 그의 연구 가설이 나중에 사실로 입 증되었다.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벨랴예프는 캐나다의 모피 사육 장에서 사들인 은여우 집단에 대한 진화 모의실험을 빠른 속도로 진 행했다. 그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적고 살짝 무는 습성을 보이는 여우들끼리 교배시켰고, 이 과정을 다음 세대에서 반복 시행했다.
- 10세대에서 20세대가 지난 후에 그는 이 방법으로 여우들이 꼬리 를 흔들고 사육자의 손을 핥는 반응을 하도록 완벽하게 길들였다. 이와 동시에 점점 길들여지는 여우들에게서 처진 귀, 말린 꼬리, 짧 은 주둥이 등 대체로 사람들이 귀엽다고 여기는 외적 특성들이 나타 났다. 하지만 이것은 객관적으로 '귀엽다'고 여겨지는 특성은 아니 었다. 이것은 진화를 통해 학습된 인간의 관점에서 짐승의 충직함을 암시하는 특성이 가축화 과정에서 강화된 것에 불과했다. 벨랴예프 의 실험은 동물이 인간을 좋아하는 특성에 관한 유전적 소인이 특정 한 신체적 특징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이 실험 결과에 따르면 교배된 여우를 길들일 때에도 어미 를 통해 습득한 후천적 특성이 여전히 중요해 보인다. 이 문제를 파 헤치기 위해 나중에 벨랴예프는 쥐를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반복했다. 쥐를 실험 대상으로 선정한 이유는 더블링 타임(배가 시간)이 훨씬 짧고 유전 과정을 관찰하기가 더 좋기 때문이었다. 그사이에 그 는 세상을 떠났지만 실험실에서는 여전히 여우가 사육되고 있다. 쥐 실험에서도 공격적인 쥐들과 온순한 쥐들을 분리했다. 새로 낳은 새 끼 중 가장 온순한 쥐들뿐만 아니라 가장 공격적인 쥐들과도 교배시 켰다. 여기에서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쥐 개체군이 생겼다. 현재 시베 리아의 실험실 방문객들을 황홀함, 두려움, 공포에 빠지게 할 수도 있는 개체군이 탄생한 것이다. 방문객들이 실험실에 들어오자마자 온순한 쥐들은 유순하고 붙임성 있게 행동한 반면, 다른 쥐들은 철 창으로 달려들고 방문객들에게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이 쥐들이 격 리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방문객의 얼굴을 할퀴었을지도 모른다. 쥐 들의 행동은 사회화를 통해 변하지 않았다. 온순한 성격의 새끼 쥐 들은 태어난 후 공격적인 어미에게 보내졌어도 온순한 성격이 변하 지 않았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온순함과 공격성은 후천적 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유전되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 아프리카에서 이미 호모 에렉투스는 사냥을 했기 때문에 온순한 짐승들은 살아남을 기회가 없었다. 이 짐승들의 유전자에 인간에 대 한 두려움이 자리 잡도록, 인간과 거리를 두도록 긍정적 자연선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현생인류의 진화가 지능적으로 동물을 길들 이도록 진행되었을 때, 여기에 필요한 돌연변이는 아프리카의 동물 권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현생인류가 유라시아 대륙에 도착한 후, 그러니까 다채로운 동물권이 개별적으로만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 탈인, 데니소바인과 으르렁거리고 있던 시절이 되어서야 현생인류는 가축화에 적합한 유전체를 보유한 동물을 만났다. 늑대는 물론이고 나중에는 오로크스와 물소 길들이기에도 성공했다.
늑대의 가축화와 목축이 아프리카 이외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이 에 대한 결정적인 이유는 아프리카 동물들의 유전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 가지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고, 여러 요인 들이 상호작용한 결과일 테지만 말이다.  수렵 채집인은 아프리카에서 가축 사육자로 발전할 수 없었다. 그곳의 동물군은 이 볼품없 는 두 발 달린 존재에게 어떤 치명적인 위력이 내재되어 있는지 아 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라비아 해역 뒤에 펼쳐진 새로운 땅은 우리 조상들에게 큰 무리 없이 사냥터가 되었다.
고기를 차지하려는 이주민들의 탐욕은 무자비하고 끝이 없었다. 그들이 정복한 땅에서 인구가 증가했고 땅에 대한 탐욕은 지구 끝에 닿을 때까지 계속 커져갔다. 전 세계적 수렵 채집 시대 말에 다양 한 개체군들이 일부는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살았고 사냥 을 할 때 서로 방해하며 위협했다. 빙하기 말 북반구에서 인간의 주 거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한 동시에, 수확량이 풍부한 생활공간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 시대의 두개골에 뚫린 구멍과 골격에 남은 싸움의 흔적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활과 화살로 대 치했다.
- 농경민들은 북서부에서 유럽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심지어 이 거대 한 대륙의 남쪽까지 진출했다. 신석기 혁명은 동쪽에서는 인도 아대 륙까지, 북쪽에서는 캅카스에서 유럽의 스텝 지대까지 확산되었다. 고고학적으로 이러한 팽창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어떤 방식 으로 진행되었는지에 관해 지난 수십 년 동안 유전자 데이터를 통해 훨씬 더 완벽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때까지 특히 유럽의 관점에서 신석기 시대, 즉 신석기인들의 확 산과 관련해 답을 찾기 위한 논쟁이 치열했다. 신석기시대가 확대된 것인가, 아니면 신석기인들이 확산된 것인가? 유럽의 수렵채집 인이 정착 생활양식을 수입한 것인가, 아니면 이웃에게 밀려난 것 인가? 이 질문의 답을 찾는 데에 유전자 데이터만큼 명확한 것은 없 다. 유럽의 수렵채집인은 우위를 빼앗겼고 옆으로 밀려났다. 그것 도 불과 수백 년 사이에 말이다. 신석기 팽창 이전에 유럽에 살았던 사람들은 유전적으로 농경민들과 완전히 다르다. 이들의 뼈에서는 당시 아나톨리아 거주자들과 동일한 DNA가 발견되었다.
우리 조상들이 나타났을 때 유럽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의 땅을, 아 시아에서는 데니소바인의 땅을 차지했다. 이와 유사하게 최초의 농 경민들에게 이 팽창이 얼마나 공격적으로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들의 생활양식과 더 많은 후손을 낳을 수 있는 기회는 수렵 채집인보다 수적으로 우세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축출에 반드시 몰살이 뒤따른다는 의미는 아니다. 수렵 채집인은 덜 비옥한 땅, 특히 유럽의 북부 지역으로 후퇴했을 가능성이 있다. 유전자 데이터 는 이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결국 수렵 채집인 DNA는 스칸디나비 아인과 발트족에게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데, 농경민 유전자와 거의 동일한 비중을 차지한다. 반면 독일 중부와 프랑스 남부에 펼쳐진 비옥한 지대에서는 신석기 혁명의 출발점에 가까워질수록 수렵·채 집인 요소가 훨씬 적게 나타난다.  유럽에서 기존의 정착민과 새로 운 이주민의 혼혈기는 거의 20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아주 오랜 기간 동안 토착 수렵 채집인과 아나톨리아 이주민의 후손들이 서로를 잘 피하며 지내왔던 듯하다.
- 아나톨리아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농경문화가 번성했고 농경에 사용할 수 있는 경작지는 빠르게 감소하고 있었다. 중국의 초기 농민 들은 약 6000년 전 지금의 태국과 베트남으로 이주한 다음 수마트 라로 진출했다. 소위 호아빈Hoabinhian 문화의 수렵 채집인이 사라지 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보르네오와 자바 지역까지의 DNA에 나타난 중국 남부 농경민의 특성을 들 수 있다. 북부에서도 같은 일 이 벌어졌다. 처음에 농경민은 한반도로 이동했고, 약 3500년 전에 는 배를 타고 일본의 섬들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농경민은 고도로 발달한 수렵 채집 문화를 만났다. 이 문화는 수천 년 전 근동 지방의 나투프인들의 정착생활과 매우 흡사하다. 일본의 원주민들이 초 기 형태의 농경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말이다. 어쨌든 조몬 문화권에 있던 사람들은 1만 5000년 전에 이미 토기를 제작했던 세계 최초의 도공으로 여겨진다. 조몬 문화 후기 토기에서는 놀라운 예술적 기교가 나타났다. 하지만 이들은 중국 대륙에서 밀려들어온 이주민들을 이기지 못 했다. 조몬 문화는 새로운 이주민들이 정착해 수백 년에 걸쳐 일본 전역의 섬으로 확산된 후 사라졌다. 수렵 채집인은 밀려났다. 일본 의 최북단과 최남단의 섬에서는 고대 일본의 수렵 채집인의 DNA 비중이 가장 높다. 오늘날 일본인에게서 이 비중은 평균 10퍼센트이 고, 북부에서는 두 배 이상 높다. 조몬 유전자 비중은 최후의 수렵. 채집인의 후손들인 아이누족에게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들은 일본 북부의 섬 홋카이도에 살고 있으며, 이들 중에는 조몬 유전자를 50퍼센트 이상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중국 남동부에 위치한 섬 타이완은 빙하기에 아시아 대륙의 일부였다. 약 5000년 전에 이주한 동아시아인들이 이 섬을 차지하기 전에는 이곳에도 수렵 채집인이 살았다. 대륙과의 상호작용이 거의 없었던 일본에는 농경민이 이주한 후 놀라울 정도로 동질적인 유전자 구조가 정착되었다. 반면 타이완은 인류의 마지막 대팽창 행렬의 교두보였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 동아시아 유전자는 지구의 절반, 즉 아프리카 해안의 인도양 최서단에서 태평 양의 아메리카 해안까지 확산되었다.
최대 90퍼센트가 물로 덮여 있는 반구를 수반구라고 하는데, 수반 구의 모든 군도를 인류는 커다란 돛이 달린 쌍동선 형태의 배를 타 고 정복했다. 이 배에는 돼지, 닭, 쥐, 옛 고향에서 재배종으로 길들 여진 경제 식물이 실려 있었다. 지구에서 이용 가능한 마지막 땅을 찾아 발견자들은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수백 수천 킬로미터를 항해했다. 전설의 '오스트로네시아 팽창의 유전자 흔적 은 마다가스카르에서 뉴질랜드를 거쳐 하와이와 이스터섬을 향했 다. 특히 태평양의 작은 섬들에서 인류의 정복은 모든 가용 자원을 착취한다는 의미였다. 정착민들은 다른 섬을 발견해야 이러한 자원 의 유한성을 피할 수 있었다. 더는 발견할 섬이 없고 성장 지향적 생 활양식이 많은 지역은 파열되고 있었다.
- 오스트로네시아 팽창 당시 항해자들은 생존에 필요한 것도 함께 가 져왔다. 개, 돼지, 닭, 그리고 쥐까지. 특히 쥐는 바다를 건너는 여행 에서 저항력이 있기 때문에 영양원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던 듯하 다. 코코야자도 인류와 함께 남태평양으로 건너왔다. 물론 섬들, 특 히 미크로네시아의 아주 작은 섬들에서는 유라시아나 아메리카에도 있었고 신석기 문화를 가능하게 했던 농경이라는 선택지에 한 번도 접근할 기회가 없었다. 지금도 오스트로네시아 팽창에 해당하는 전 지역에서 대형 농경지는 거의 볼 수 없고, 뿌리채소 경작이나, 닭과 돼지 등 방목지가 필요 없고 단순 분해자 역할을 하는 짐승 사육이 주를 이룬다.
섬 주민들도 훌륭한 음식 재활용자로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 멀리 떨어진 섬으로 팽창을 시도할 때마다 인류는 확산에 성공했 던 듯하다. 음식 재활용자라는 단어에는, 에너지를 저장하고 분해한 다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인간의 신진대사 체계가 지방과 에너지를 비축해두었다가 수십 일에서 수 주가 걸리는 여행 동안 분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탐사 여행에서 긴 굶주림의 시기를 견 디고, 새로운 섬에서 처음에 농경의 기반을 다지는 시기를 극복해야 할 때, 유전자는 생존에 유리한 혜택을 제공했다. 당시에 이 유전자 는 축복이었다.
반면 당, 지방, 단백질 결핍에 시달릴 일이 없는 오늘날의 후손에 게 이것은 저주가 될 수 있다. 비만증에 걸리기 쉬워 건강을 해칠 위 험성이 매우 높고 평균 수명이 감소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현 재 세계 10대 비만증 국가 중 8개국이 태평양의 군도에 있다. 오스 트로네시아 팽창의 유전적 병목 현상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관련 있는 '절약 유전자'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을지라도 말이다. 세계 20대 비만증 국가를 살펴보면 태평양 연안 국가 외에 8개국은 아랍 지역에 있다. 대부분이 지난 수천 년 동안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오랜 가뭄과 기근을 이겨내야 했던 지역이다. 20대 국가 중 이러한 지리적 분류에 어긋나는 국가는 미국이 유일하다.
- 오스트로네시아 팽창 시기에 태평양 전역과 인도양 일부로 이주한 인간은 우리 종이 배출한 가장 재능이 뛰어나고 대담한 뱃사람들이 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여정은 섬에서 끝이 났다. 이들은 고기 잡이를 하러 떠났으나 여기에서 해상국가가 탄생하지는 않았다. 건 조建造에 필요한 천연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15세기와 16세기 에 세계 대양의 정복자로 부상한 자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람들 이었다. 불과 100년 만에 이들은 중남미를 정복해 유전자 지도를 완 전히 뒤바꿔놓았다. 17세기 초반 영국이 뒤를 이어 주도적인 해상 세력이 되었고, 이후 수백 년 동안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해 전 세계 를 주름잡았다. 아메리카 북부에 잇달아 서유럽인의 DNA가 새겨졌 고 이곳에서도 원주민들이 축출되었다. 이 대목에서는 학살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이후 노예무역의 과도한 성행으로 아프리카 요소가 신세계에, 특히 아메리카 북부에, 이어서 중부와 남부에까지 도달했다. 현재 아메리카는 아프리카 외에 유전적 다양성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대륙이 되었다.
- 인도의 엘리트들
4900년 전 유럽을 뒤집어놓은 스텝 주민들의 이동은 수적 우위를 바 탕으로 했다. 이것은 현대인의 게놈에 쓰여 있으며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우위는 띠무늬 토기 및 종형 토기 문화가 정착되 는 과정뿐만 아니라 유럽 언어에서 뚜렷하게 드러난 문화적 우세와 도 관련이 있다. 이전에 사용되던 거의 모든 언어를 몰아낸 인도유럽 어족은 스텝 지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조상언어가 7000여 년전에 신석기 혁명과 함께 이베리아반도로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 스크어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언어 축출은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 악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 하나로, 거의 모든 구어와 문어 에 이런 표현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외국의 정복자들이 토착민의 언어를 수용했다는 역사적 사례가 존재할 것이다.
인도의 사례에서 이것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가장 최 근의 유전자 데이터에 따르면 스텝 팽창은 안드로노보 문화의 전성 기였던 약 3600년 전에 인도아대륙에 상륙했다. 현재 인도 북부 에는 인도유럽어족 계통인 산스크리트어에서 기원한 힌디어가우 세한 반면, 인구 13억 명의 국가인 인도의 남부로 내려갈수록 인도 유럽어족 계통에 속하지 않는 드라비다어의 비중이 높아진다. 스텝 DNA의 비중도 같은 방식으로 감소한다. 북부에서는 스텝 DNA의 비중이 평균 30퍼센트인 반면, 남부에서는 5퍼센트 미만이다.
- 인도의 북부와 남부뿐만 아니라 계층들 간에도 스텝 요소 비중 이 다르게 분포되어 있다. 하필 사회적 특권 계급, 즉 전통적으로 힌 두교 승려가 많은 '카스트'의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의 경우 북부와 남부에서 동일하게 스텝 DNA 요소가 평균 이상으로 높게 나타났 다. 카스트의 다른 계급에서는 인구 단면도에 걸맞게 DNA의 스텝 요소 비중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갈수록 감소한 반면, 브라만의 경 우에는 북쪽에서 이동한 유전자들이 인도아대륙 전역을 관통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전자 연구 결과가 최소한의 사실을 입증하는 것일지라 도 정치적으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카스트 제도는 인도의 공식적인 신분제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출생해서 결혼하고 사망할 때 까지 현실의 삶에 여전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힌두교 전통에 서 브라만에게는 가장 높은 계층으로서 특별한 역할이 주어진다. 이 들은 구전으로 전승되던 종교 텍스트를 책으로 편찬한 경전 《베다》 를 가르치는 선생이나 학자다. 이러한 전승 문헌에서도 이주민들이 북쪽에서 인도로 정확하게 약 4000년에서 3500년 전에 이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 이주민들을 '인도아리아인'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더 하얀 피부로 인해 다른 인도인과 차이가 나 는 브라만들의 위치가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지 명확해진 셈이다.
새로운 유전자 연구 결과는 브라만이 구별된 계층이 아니라, 이주 민을 통해 유입된 DNA 요소가 평균 이상으로 우세함을 입증할 뿐 이다. 그럼에도 이 연구 결과는 많은 전통주의자들이 최신 생명공학 의 분자 데이터를 제시하며 시대착오적인 카스트 제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다. 브라만의 대부분이 남아시아에 유전적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 20세기는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히브리스 Homo bybris로 만들었다. 호모 히브리스는 자신의 이성을, 즉 다른 모든 생명체와 두드러진 차이를 만드는 기관을 전보다 더 잘 다룰 줄 안다. 이 기관은 인간을 여기까지 인도했고, 지구를 부하 용량의 한계까지, 무엇보다 이런 의미에서 형성하고 착취하는 한계까지 오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 제 지구의 한계가 인간의 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진화의 특성으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팽창, 영원한 진보는 인간에게 더 이상 가능 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영리한 종이기 때문에 이것을 깨달았다. 하 지만 깨달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이 결정권을 가진 종으로 우뚝 선 것은 모든 경쟁을 물리친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 문명의 지속은 신석기시대 이후 자원 경쟁 에서 다른 생물보다 우세하고, 그들을 억압하거나 제거한 것과 불가 분의 관계에 있다. 인간은 돌도끼를 만들고, 최초로 불을 사용하고, 최초의 동굴 벽화를 그려온 이래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거룩해짐으 로써 영생을 보장받고, 더 숭고한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사 로잡혀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전적으로 표현해 거의 모든 진화 과정을 결정하는 사냥꾼과 먹잇감의 관계의 산물이었다. 최근까지 인류는 일시적인 승자의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이러한 통치권이 지 구라는 행성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이제 우리의 마지막 적은 우리 자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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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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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여정

역사 2023. 5. 24. 13:16

- 신석기혁명뿐 아니라 문화와 제도, 과학 그리고 기술 측면에서 이 뤄진 일련의 기념비적 진보도 생활수준엔 지속적으로 뚜렷한 효과를 주지 못했다. 그 잣대가 경제적(1인당 소득)이든 생물학적(기대수명)이 든 마찬가지였다. 다른 종과 마찬가지로 인류도 거의 언제나 곤궁과 결핍의 함정에 빠져 겨우 생존을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지역별 로 얼마간 차이는 있었지만 여러 문명에서 비숙련노동자의 1인당 소 득과 임금은 몇천 년간 매우 좁은 범위 안에서만 오르내렸다.
특히 여러 추정에 따르면 3,000여 년 전 바빌론제국과 아시리아 제국의 일당은 각각 밀알 7킬로그램과 5킬로그램에 상당했고, 2,000여 년 전 아테네는 11~15킬로그램, 로마제국 치하의 이집트는 4킬로그램이었다. 산업혁명 전야에도 서유럽 국가의 임금은 좁은 범위 안에 머물렀다. 당시 암스테르담의 일당은 밀 10킬로그램, 파리는 5킬로그램, 마드리드와 나폴리 그리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다른 도시는 3~4킬로그램에 상당했다. 
더욱이 지난 2만 년간 다양한 부족과 문명에서 나온 유골은 지역 과 시간에 따른 차이가 있더라도 인류의 (출생 시) 기대수명이 아주 좁은 범위 내에서 오르내렸음을 보여 준다.  중석기시대 북아프리 카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발굴된 유골은 당시 기대수명이 30세 에 가까웠음을 시사한다. 그 후 농업 혁명 기간에 일부 지역에서는 기대수명이 줄어들었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선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4,000~1만 년 전 신석기혁명 초기 단계의 매장 터에서 발굴된 유골은 당시 인류의 기대수명이 차탈회위크(튀르키예)와 네아니 코메데이아(그리스)에선 약 30~35세, 키로키티아(키프로스)에선 20세, 카라타스(튀르키예)와 레르나(그리스)의 도시 인근 지역에선 30세였음 을 시사한다. 2,500년 전 아테네와 코린토스는 기대수명이 약 40세에 이르렀지만, 로마제국 시대의 묘석은 사망할 때 나이가 대략 20~30세 였음을 보여 준다. 24) 더 최근의 증거로 16세기 중반부터 19세기까지 잉글랜드의 기대수명은 30~40세 안에서 변동했으며, 25) 산업화 이전 프랑스)와 스웨덴,27) 핀란드28)에서도 비슷한 기록이 발견된다.
호모사피엔스 출현 이후 거의 30만 년간 1인당 소득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을 넘길까 말까 했고, 전염병과 기근은 흔한 일이었다. 또한 아기 넷 중 한 명은 첫돌에 이르지 못했고 산모는 출산 중에 죽 는 경우가 흔했으며, 기대수명은 40세를 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 러나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다양한 사회 계층의 생활수준이 역사적으로 전례 없이 급속한 향상을 보이기 시 작했고, 뒤이어 전 세계의 다른 지역도 이런 과정을 경험했다. 놀랍 게도 19세기가 밝아 온 후 전 세계 1인당 소득은 14배로 치솟았고 기대수명은 2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맬서스 연대와 비교하면 그야 말로 눈 깜짝할 사이라고 할 만한 기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였다. 그렇다면 인류는 맬서스가 말한 힘의 지배에서 어떻게 벗어났을까?
- 인류사를 정체기에서 성장기로 전환할 수 있게 한 촉매를 찾을 때, 많은 이들은 산업혁명을 지목한다. 세계가 현대의 성장 국면으로 급격히 전환하도록 산업혁명이 갑작스럽게 외부적 충격을 가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일어난 18~19세기를 살펴보면 그 기간 의 어느 시점에서도 '급격한 전환'은 없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전 환은 인류사 전체 흐름상에서는 빨랐지만, 산업혁명이 이뤄지는 동 안 경험한 생산성 향상은 점진적으로 이뤄졌다. 실제 산업혁명 초기 기술은 점진적으로 변화했으므로, 인구는 급증했지만 평균소득은 아주 완만하게 상승했을 뿐이다. 맬서스가 예견한 그대로였다. 그러나 거의 1세기가 지난 어떤 시점에 맬서스 균형은 정말 신기하게 사라져 버렸고 뒤이어 엄청난 성장기가 도래했다.
지난 몇십 년간 내가 인류 성장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고 안한 개념적 틀은 수학의 한 분야인 분기 이론 bifurcation theory(매개변수 의 작은 변화가 갑자기 질적 변화 혹은 위상 변화를 일으키는 동역학계에 관한 이론- 옮긴이)에서 영감을 얻었다. 복잡동역학계complex dynamical system 행태에 관한 이 이론은 (임계치를 넘은 열이 물을 액체에서 기체로 바꿀 때와 같이)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면 단 하나의 요인이 조금만 달라져도 갑 작스럽고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를 통해 인류사의 표면 아래서 돌아가는 변화의 톱니바퀴 정체를 밝히 는 데 초점을 맞췄다. 맬서스 균형이 작동하던 시대 내내 끊임없이 돌아가던 이 변화의 톱니바퀴가 마침내 그 제약을 벗어나면서 현대 의 성장 체제가 나타났다. 이 과정은 앞에서 말한 난로 위 주전자 안 의 변화와 같다. 그렇다면 맬서스 연대에 끈질기게 작동했고, 지난 2 세기 동안 인류 생활수준의 극적인 변혁을 촉발한 이 수수께끼 같은 변화의 톱니바퀴는 무엇이었을까?
- 변화의 톱니바퀴 중 하나는 인구 규모다. 신석기혁명의 전야인 기원전 1만 년 지구상에는 240만 명이 돌아다녔다. 그러나 로마제 국과 마야문명이 정점에 가까워지던 기원후 1년까지 세계 인구는 78배로 불어나 1억 8,800만 명에 이르렀다. 1,000년 후 바이킹이 유 럽 북부의 여러 해안을 습격하고, 중국이 처음으로 전투에서 화약을 쓸 즈음엔 2억 9,500만 명에 달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던 1500년에는 거의 5억 명 가깝게 늘어났고, 산업화 초기인 19세기 초입에는 10억 명 선을 거의 넘어섰다(도표 6).
인구 규모와 기술 변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다. 맬서스 연대 때 인구는 기술 진보 덕분에 1만 2,000년간 400배로 늘면서 인 구밀도도 높아졌으며, 이렇게 늘어난 인구는 기술혁신의 속도 향상 에 기여했다. 인구가 늘면서 새로운 물건과 도구, 숙련된 업무뿐만 아니라 그것을 발명할 뛰어난 개인에 대한 수요가 더 많이 창출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규모 사회의 경우, 개인의 전문화 범위를 더 넓히고 전문성을 더 키우면서 교역을 통해 더 많은 아이디어를 교환함으로써 인구 증가의 혜택을 누렸다. 이는 다시 신기술의 확산과 침투를 가 속화했다." 인류의 출현 무렵부터 스스로 강화되는 되먹임 고리가 나타나 줄곧 작동한 것이다.
인구 규모가 기술 수준에 미친 영향은 기록이 남은 역사 전 과정 에 걸쳐 모든 문화와 지역에서 명백히 나타났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 처럼 좀 더 일찍 신석기혁명을 경험한 지역에는 가장 큰 규모의 선사 시대 정착지가 생겼고, 그 후로도 계속 기술적으로 앞서 나가는 이 점을 누렸다. 마찬가지로, 농업에 적합해 인구밀도가 높은 특성을 보인 지역은 더 앞선 기술을 가졌다. 흥미롭게도 태평양 폴리네시아 의 소규모 사회가 유럽과 접촉하던 초기, 그중 상대적으로 규모가 컸던 하와이나 통가 같은 공동체는 바누아투 Vanuatu (남태평양의 섬나 라-옮긴이)의 말레쿨라섬과 티코피아섬, 산타크루스섬처럼 더 작은 사회보다 복잡하고 정교한 채집 기술을 더 광범위하게 활용했다."
- 기술적 혁신은 더 많은 인구를 떠받치면서 인류가 생태적 · 기술적 환경에 적응하도록 자극했으며, 규모와 적응력을 키운 인구는 다시 신기술을 고안하고 환경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도록 역량을 키웠다. 이것이 인류사 표면 아래에서 돌아간 변화의 톱니바퀴다. 마침내 인류사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규모로 혁신의 폭발을 불러온 것 역시 변화의 수레바퀴였다. 산업혁명은 그러한 혁신의 폭발이었다.
- 이처럼 광범위한 연구의 결과로 산업혁명기의 기술과 상업 발전 이 인적자본에 대한 다양한 투자를 자극했음이 드러난다. 다만 어떤 사회에서는 인적자본이 문해력 향상과 교육의 형태를 취하는 데 비 해 다른 사회에서는 전문적 기능의 계발로 나타난다. 앞 장에서 논 의한 것처럼 기술 발전과 인적자본이 서로를 강화하는 순환 고리를 만든다는 점을 생각하면, 향상된 인적자본이 추가적 기술 발전을 촉 진했다는 증거도 있다는 것이 놀랍진 않다. 
실제로 산업혁명이 유럽의 다른 국가도 아닌 영국에서 일어난 이 유 중 하나가 인적자본 측면의 비교우위comparative advantage (같은 상품을 더 적은 기회비용으로 생산하는 능력. 반대편은 비교열위comparative disadvantage를 가진다-옮긴이)다. 그 우위는 산업혁명 초기에 특히 유익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증기기관의 연료였던 석탄의 경우 영국이 확실히 풍부했지만, 다른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영국에는 더욱 희소한 원재료가 하나 있었다. 바로 인적 자본이었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영국엔 여러 부류의 전문 목수와 금 속가공인, 유리 제조공, 발명가 뒤에서 그들의 혁신적 설계에 따라 물건을 제작하고 심지어 개선까지 할 수 있는 기술자가 있었다고 설 명한다. 20) 이들은 그 기술을 도제에게 전수했다. 영국의 산업혁명 초 기단계엔 그 도제의 숫자가 급증했으며 산업 기술이 채택되고 발전 되며 확산되는 과정에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27)
실제로 영국에서 이주해 온 기술자의 경우 벨기에와 프랑스, 스 위스, 미국을 포함해 다른 국가에서 산업의 개척자로 활약했다. 실 제로 북아메리카의 첫 섬유 공장은 1793년 로드아일랜드주의 도시 포터킷에 세워졌다. 내가 이 책을 쓴 브라운대학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진 곳이다. 미국 산업가 모지스 브라운 Moses Brown 이 자본을 댄
그 공장의 기획자는 다름 아닌 스물한 살에 미국으로 온 영국계 산 업가 새뮤얼 슬레이터Samuel Slater 였다.
슬레이터는 열 살 때부터 섬유 공장에서 일했는데, 그곳에서 아 크라이트의 방적기를 직접 다루며 기술적 이해도를 높였다. 자국의 기술 우위를 지키기 위해 영국 정부는 방적기 수출을 금지하고 제작 에 필요한 청사진 반출까지 막았다. 하지만 슬레이터는 간단한 방법 을 찾았다. 간단하지만 극히 어려운 그 방법은 설계도를 통째로 외 우는 것이었다. '미국 산업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는 슬레이터의 영향 은 너무나 커서 그가 태어난 영국 도시에서는 '반역자 슬레이터'라며 비난했다.
교육받은 노동자가 기술 발전에 이바지한 사실은 산업화를 일찍 경험한 다른 국가의 역사적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28) 19세기 프로이 센에서는 문해율이 특허등록으로 나타나는 혁신 역량에 긍정적 영 향을 미쳤다. 29) 더 놀라운 사례도 있다. 어떤 연구는 18세기 프랑스 각 도시의 (교육받은 엘리트 집단 규모를 반영하는) 《백과전서 Encyclopédie》 구독자 수가 만 1세기 후 같은 도시에서 활동하는 기업의 기술혁신과 긍정적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3) 그와 비슷한 국가 간 분석에 따르면 각국의 기술자 수가 1인당 소득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31) 오늘날 세계에서 인적자본 형성은 기업가정신을 북돋우고, 새로운 기술과 작업 방식을 채택하도록 장려하며, 더 넓게는 경제 성장을 촉진한다. 
- 산업혁명의 초기 단계에서는 산업화 도중에 있던 대부분 국가의 인구가 급속히 늘어났다.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소득이 높아지던 때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는 그 추세가 반전됐다. 선진국의 인구 증가율과 출산율은 가파르게 낮아졌다. 이 패턴은 20세기에 나머지 지역에서도 더욱 빠른 속도로 되풀이됐다. 1870년부터 1920년까지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 출산율은 30~50퍼센트 낮아졌고(도표 8), 미 국의 하락세는 더욱 급격했다. 이와 같은 출산율 추락은 이에 앞서 나타나는 사망률 하락과 더불어 인구변천이라 일컫는 현상이다.
이 인구변천은 맬서스 기제를 지탱하던 주춧돌 중 하나를 부숴 버렸다. 이제 높아진 소득이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는 데 흘러가지 않았다. 더 많은 자녀가 '남는 빵'을 나눌 필요가 없어졌다. 인류사 에서 처음으로 기술 진보가 장기적인 생활수준 향상을 불러왔다. 정체의 연대에 조종을 울린 셈이다. 맬서스의 덫에서 벗어나 지속적으 로 성장하는 현대의 탄생을 알린 것은 낮아지는 출산율이었다.
- 산업혁명의 기술 진보는 양과 질의 상충 관계에 몇 가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 기술 진보에 따른 부모의 소득 증가다. 즉, 원 한다면 부모가 자녀에게 더 많이 투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다. 이 소득효과income effect는 전체적으로 양육에 투자하는 자원 을 늘려 주는 쪽으로 작용했다. 둘째, 소득 창출 능력이 늘어남에 따 라 양육의 기회비용opportunity cost(무엇을 얻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모든 것. 명시적 비용뿐만 아니라 암묵적 비용도 포함된다-옮긴이)이 늘어났다. 즉, 부모가 일하는 대신 양육을 하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비용이 늘어났 다. 이러한 대체효과 substitution effect는 출산 횟수를 줄이는 쪽으로 작 용했다. 역사적으로는 소득효과가 대체효과를 압도해 출산율이 높 아졌다고 볼 수 있다. 실증 연구는 실제로 맬서스 연대와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는 가구 소득 증가가 정확히 이러한 결과를 낳았음을 보여 준다.
- 19세기 국제무역은 큰 폭으로 늘어났다. 무역 확대는 유럽 북서부의 급속한 산업화가 촉발하고, 식민주의가 기름을 부은 결과였다. 무역은 낮아진 무역 장벽과 운송비에 더욱 고무됐다.
1800년에는 세계의 생산액 중 단 2퍼센트만이 국제적으로 거래 됐다. 이 비율은 1870년까지 5배로 늘어 10퍼센트가 됐다. 1900년 에는 17퍼센트, 1차 세계대전 전야인 1913년에는 21퍼센트에 이르렀다. 이러한 무역의 대부분은 산업화된 국가 사이에서 이뤄졌지 만, 개발도상국의 경제도 중요한 시장으로 주목받으면서 무역 규모 가 커졌다. 당시 무역 패턴은 명백했다. 북서부 유럽 국가는 제조업 상품의 순수출국이었고,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각국은 원재료와 더불어 농업 기반 생산품의 수출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 다." 이때 기술 발전 수준은 국제무역의 도움 없이도 산업혁명을 낳을 정도였다. 하지만 서유럽 국가의 산업화 속도와 성장률은 국제무역 덕분에 더욱 높아졌다. 서유럽의 성장은 그들의 식민지와 자원, 원주민,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과 그 후손에 대한 착취에 더해 이러한 국제무역에 힘입은 결과다. 또한 그 전 몇 세기 동안 절정에 달했던 대서양 삼각무역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상대로 한 무역도 서유럽 경 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상품 교역은 그 자체로 수익성이 매우 높았고 산업화 과정 에 필요한 목재와 고무, 원면 같은 원재료를 공급하는 역할도 했는 데, 이는 모두 노예와 강제 노동을 통해 값싸게 생산됐다. 그렇게 식 민지에서 얻은 밀과 쌀, 설탕, 차 같은 농산물을 통해 서유럽 국가는 공업 제품 생산에서 전문성을 높이고, 식민지에 자국 상품 시장을 확대해 이득을 볼 수 있었다. 
- 사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먼저 시작된 이유는, 이보다 일찍 이뤄진 제도적 개혁 덕분이었을 수도 있다." 2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14세 기의 흑사병으로 영국제도의 거주자 중 거의 40퍼센트가 죽었다. 그 에 따라 노동자가 부족해지면서 농노의 협상력이 세졌고, 지주 귀족 은 소작농의 도시 이주를 막기 위해 임금을 올려 줄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 보면 흑사병은 영국 봉건 체제에 치명타를 안겼고, 포용성을 늘리고 착취를 줄이도록 정치제도를 바꾸었다. 그 제도는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분산하고 사회적 이동성을 장려하며, 사회의 더 많은 부문이 혁신을 이루며 부를 창출하는 데 참여하도록 고무했다.
- 영국과 달리, 동유럽에서는 흑사병이 휩쓸고 간 후 오히려 지주 귀족의 착취가 강화됐다. 상대적으로 도시화가 느렸던 데다 더 가혹 한 봉건 질서가 존속했고, 지역 농산물에 대한 서유럽의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그 수요에 맞추려 동유럽 영주는 농노를 더욱 가혹하게 쥐어짰다-옮긴이). 흑사병 창궐 이전이라면 사소했을 수도 있는 서유 럽과 동유럽 사이의 제도적 차이가 흑사병 후에는 중대한 분기分岐를 초래해 서유럽을 동유럽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장 궤도에 올려놓았다.
다른 국가에 비해 길드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것도 영국이 산업혁명에 앞서 일부 제도적 변화를 이루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유럽 전역에서 운영된 길드는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숙련된 장인을 회원으로 두고 그들의 이익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그들은 독점력 을 기업가정신과 기술 진보를 억누르는 데 썼다. 15세기 후반 파리 의 필경사 길드 Scribes Guild는 파리의 인쇄기 도입을 거의 20년에 걸쳐 막아 냈다. 1561년 뉘른베르크의 적금 선반공 길드Red-Metal Turners Guild(동을 80퍼센트 이상 함유한 황동을 적금이라 한다-옮긴이)는 시의회 에 압력을 가해, 한스 슈파이히Hans Spaichi가 발명한 슬라이드 공구대 선반이 더 퍼지지 못하도록 했고, 심지어 해당 기술이나 제품을 채택 한다면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10) 1579년 폴란드 단치히(그단스크) 시의회는 새로운 직기를 발명한 이를 익사시키도록 명령했다. 전통 방식으로 띠를 짜는 이들을 위협한다는 이유에서였다. 11) 19세기 초 프랑스에서는 직공 길드 Weavers Guild의 분노한 무리가 천 공카드를 쓰는 혁신적 직기의 발명가 조셉-마리 자카르Joseph-Marie Jacquard를 상대로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자카르의 직기는 후에 첫 세대의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영감을 준 기술로 작동했다.
하지만 영국의 길드는 유럽 대륙 길드에 비해 힘이 약했는데, 부 분적으로 여러 지역의 시장이 빠르게 팽창하면서 장인에 대한 수요가 길드의 공급 능력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또한 1666년 대화재 Great Fire 직후 시티 오브 런던 City of London 지역을 신속히 재건하기 위해 대체로 규제하지 않는 방식을 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길드의 힘이 약했기 때문에 의회가 발명가를 보호하고 힘을 실어 주기가 더욱 쉬웠고, 산업가가 새로운 기술을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채택할 수 있었다. 물론 영국이라도 토지에 기반을 둔 엘리트 계층은 기술 진보를 단호히 회피하고 권력을 영속화하려 했다. 하지만 영국이 그들의 이 해관계에 휘둘리기보다는 상인과 기업가의 다양한 이해관계에 영향 을 받은 것은 앞서 이야기한 제도 개혁 덕분이었다. 이를 통해 영국 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현대적 경제로 나아갔고, 서유럽의 다른 국가 는 재빨리 그 뒤를 따라야 했다. 인류 전체가 맬서스 시대의 끝자락 에서 성장의 시대를 눈앞에 둔 상태이긴 했지만, 영국은 곧이어 살펴 볼 다른 요인에 더해 이러한 제도적 발전을 빠르게 이룬 덕분에 인류가 상전이를 맞을 여건이 무르익은 바로 그때, 급속한 기술 발전이 가능했다.
- 문화적 특성과 경제 성장 간의 관계에 대한 현대적 사상은 프로 테스탄티즘이 처음 뿌린 씨앗에서 싹텄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1905 년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이다. 베버는 현 세에서 부를 쌓는 능력은 천국에 이를 가능성을 보여 주는 강력한 표시라는 신념을 굳혀 부 자체를 목적으로 정당화하며, 게으름을 부 끄러운 것으로 재인식시키는 데 프로테스탄티즘이 기여했다고 주장 했다. 서유럽에선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의 원천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베버의 주장은 자본주의의 부상에 대해 마르크스가 강조한 물질적 힘보다 관념의 힘을 우선시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경제 성장에 도움을 주는 문화적 특성이 출현하는데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역할을 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다.
- 19세기 프로이센을 보자. 프로테스탄트 비중이 높은 지역은 실제로 타 지역보다 높은 문해율과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교육에 더 투자하려는 프로테스탄트의 성향은 장기적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이 경제적 번영에 영향을 미치는 데 일조했다. 더욱이 과거에 신성로 마제국 Holy Roman Empire (962년 오토 1세 즉위 때부터 1806년 프란츠 2세가 물러날 때까지의 독일 제국. 로마제국의 부활과 연장, 기독교와의 일체를 강조 하기 위한 국명이다-옮긴이)이었던 지역에서의 증거 역시 프로테스탄 티즘이 오늘날의 기업가를 키울 가능성을 훨씬 높였음을 시사한다.  [Nunziata and Rocco(2016, 2018) 논문은 이 지역의 종교적 소수 집단을 분석 해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따르는 이들이 기업가가 될 확률은 가톨릭교 교도 대비 약 5퍼센트포인트 높다고 밝혔다-옮긴이]
- 중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중앙집권화로 이어진 지리적 연결성 geographical connectivity은 중세 시대에는 분명 경제와 기술 측면에서 유 익했다. 하지만 산업혁명 전야에는 결국 부정적 효과를 냈다. 기술적 패러다임 전환을 촉진하고 이용하기 위해서는 경쟁과 문화적 유동 성이 더욱 유용했기 때문이다. 
지리적 연결성이 상충되는 효과를 낸다는 사실은 경제 발전의 다 양한 단계에 있는 사회가 각기 다른 정도의 연결성에서 그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예를 들어 기술 진보의 잠재적 속도가 비교적 느린 단계라면 중국처럼 높은 지리적 통일성이 경제 성장을 촉진시킨다. 통일성이 경쟁과 혁신에 부정적 효과를 끼침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지배하면서 법의 지배를 확립하고 공공재에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 진보가 가속화될 단계에서는 더 낮은 수준의 연결성이 번영을 촉진한다. 사회적 결속 엔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만 경쟁과 혁신을 원활히 하기 때문이다. 달 리 말하면 변화의 톱니바퀴가 빠르게 움직이고 기술 진보가 속도를 높이면 성장을 위한 지리적 연결성의 최적 수준이 낮아진다는 뜻이 다. 이러한 변화가 두 지역 문명의 운명을 뒤바꿨다.
다만 지금의 중국은 새로운 기술적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거치지 않고도 현대적 성장 체제로 이행한 상태다. 그러므로 중국의 경제 규 모를 고려할 때 지리적 연결성과 정치의 중앙집권화 그리고 사회적 결속이 중국을 세계적 번영의 최전선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
- 대륙 간 혹은 대륙 내에서 농작물 산출률이 불균등하게 분포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도표 17). 실제로 기원후 1500년 이전 유럽 (보리)과 아시아(벼)의 지배적인 작물은 아프리카의 작물(콩류)과 비교 해 에이커당 잠재적 산출 열량이 거의 2배였으나 파종부터 수확까지 의 경작 기간은 3분의 2에 불과했다.
농작물 재배의 잠재적 수익률이 높은 지역 출신자들이 많은 국가 는 실제로 더 장기 지향적 경향이 있음을 실증 자료로도 알 수 있다. 다른 지리적·문화적·역사적 요인을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더욱 이 유럽사회조사 European Social Survey (2002~2014)와 세계가치조사 World Values Survey(1981~2014)가 수행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 분석 역시 농작물 재배의 잠재적 수익률이 높은 지역 출신자들은 미래 지향적 성향이 높음을 시사한다. 
- 늘 그렇듯이, 앞의 연구 결과는 거꾸로 된 인과관계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미래 지향적 사고가 강한 사회는 곧 장기적 투자가 필요 한 농사를 선택하는 사회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농업의 수익 성과 미래지향성의 상관관계는 잠재적 일일 열량 산출률에 관한 것 인데, 이는 특정 지역에서 실제 기른 작물의 산출률이 아니라, 순전 히 농업 기후적 특성으로 추정하는 산출률이다. 농업 기후적 특성이 (대체로 인류의 선택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은 역의 인과성 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와 동시에 잠재적 일일 열량 산출 률이 (아니나 다를까) 실제 산출률과 높은 상관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은 산출률이 정말로 미래 지향적 사고의 강화를 촉발하는 기제라는 것을 시사한다.
미래 지향적 사고가 강한 사회가 장기적 산출률이 높은 작물에 적합한 지역으로 이주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교류 이후 아메리카에서 온 옥수수와 감자처럼 산출률이 높은 작물의 도입은 이미 정착한 구세계 주민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31) 이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선택적 이주가 아니라 문화적 적응 과정을 통해 미래 지향적 사고가 생겼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현재 유럽과 미국에 거주하는 이민자 2세대 에 관한 연구에서 발견된다. 이민자 2세대가 얼마나 미래 지향적 사 고를 갖는지는 그 세대가 태어나서 자란 국가보다 그들 부모의 고 국에서 자라는 농작물의 잠재적 산출률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 다. 이런 경우 농작물 산출률(혹은 그 바탕에 있는 농업 기후적 특성)이 미래 지향적 사고에 주는 영향은 지리적 조건의 직접적 효과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체화해 세대 간에 전해지는 것이다.
지리적 조건을 문화적 특성으로 바꾸는 것은 농작물 산출률뿐만 이 아니다. 농작물에 적합한 경작 유형 또한 그 역할을 한다. 중국의 경우 벼농사에 맞는 토양의 적합성이 집산주의적이고 상호 의존적 인 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음을 시사하는 증거가 있다. 실제로 벼농사를 지으려면 공용의 대규모 관개시설이 필요하다. 반면 비교 적 낮은 수준의 협력이 필요한 밀 재배의 경우 개인주의적 문화 출현 에 이바지했다. 마찬가지로 국가 간 비교를 통해 더 노동집약적인 농작물에 적합한 토지가 집산주의적 문화 출현과 관련이 있음도 알 수 있다.
- 인류가 정체기에서 성장의 시대로 이행하는 데 중요한 동력 중 하나는 여성의 임금노동 참가다. 이는 주로 산업화에 따른 것이었다. 산업화에 따라 성별 임금격차가 줄어들면서 소가족에 대한 유인이 커지고 인구변천이 촉진됐다. 하지만 성별 역할에 대한 각 사회의 지 배적 태도 역시 중요한 요인이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이 요인은 어떤 지역에서는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과 발전 과정을 촉진했지만 다른 곳에서는 방해했다. 여기서도 그러한 문화적 특성이 어디서 비롯됐 는지 추적하면 결국 지리적 조건에 이른다.
1970년 덴마크 경제학자 에스테르 보세루프Esther Boserup는 오늘 날 노동시장에서 여성 역할에 대한 태도 차이는 산업화 이전 경작 방 식의 산물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이 가설에 따르면, 지역별로 토양의 특성과 우세한 작물은 다르기 마련인데 어떤 지역에선 농부가 직접 괭이와 갈퀴로 땅을 갈았지만, 다른 지역에선 말이나 소가 끄는 쟁기를 이용했다. 동물을 다루며 쟁기를 쓰려면 상체의 강한 힘이 필 요하므로 남성이 훨씬 유리했다. 쟁기를 많이 쓰는 지역 여성의 일은 인류사 내내 집안일에 한정됐다. 한마디로 쟁기에 적합한 토양의 특 성이 노동의 성별 분화를 초래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전 세계의 농업사회에서 나온 증거가 보세루프의 가설을 뒷받침한다. 쟁기를 쓰는 지역은 가계 내의 노동 분화가 뚜렷했다. 남성은 주로 농사를, 여성은 가사를 맡았다. 그렇다면 괭이와 갈퀴 를 쓰는 지역은 어땠을까? 물론 가사가 주로 여성의 영역이긴 했지 만, 물을 긷고, 소젖을 짜고, 땔감을 모으는 여타 노동뿐 아니라 농 사도 땅을 가는 일부터 씨를 뿌리고 거두는 일까지 나눠 일하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쟁기는 농사뿐 아니라 모든 활동에서 노동 분화를 초래 했다. 세계가치조사가 수행한 여론조사(2004~2011)를 기초로 한 분 석을 보면, 지금의 다양한 성별 편향성이 쟁기 채택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왜 쟁기를 더 일찍 쓴 지역일수록 노동시장과 기업이 사회, 정치계에 여성이 더 적은지를 부분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다.35) 여성에 대한 태도에 쟁기가 미친 영향은 현재 유럽과 미국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쟁기를 쓰는 국가에서 온 이민자 2세대는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여성에 대한 평등주의적 견해가 희박했고, 여성의 경 우 같은 경제적 유인과 기회가 있더라도 노동시장 참여율이 더 낮은 경향을 보였다. 이들이 선조의 지리적 환경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은 성별 역할에 대한 태도가 세대를 걸쳐 전달됐음을 시사한다. - 언어는 복잡해지는 세계에서 의사소통을 원활히 도울 뿐 아니라 말하는 이의 마음가짐에도 영향을 준다. 생각하고 인식하고 서로 관 련짓는 방식과 세계 전체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렇게 언어는 기존의 문화적 태도를 강화하는 잠재력을 지닌다. 5) 문화와 언어의 특성이 세 가지 핵심적인 쌍을 이뤄 공진화한 것이 이 패턴을 잘 보여 준 다. 40) 그 세 쌍의 특성은 각기 그 언어가 생겨난 지역의 지리적 환경 에 뿌리를 두고 발전 과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첫 번째 쌍은 성별 역할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다. 토양이 쟁기 사 용에 적합해 성별로 뚜렷한 노동 분화가 이뤄진 남유럽 같은 지역은 로망스어 Romance languages (라틴어에서 갈라진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따위 - 옮긴이)처럼 문법상 성을 구분하는 언어가 나타나는 경향을 보였다. 반대로 쟁기 사용이 어려운 지역에선 성별에 중립적인 언어가 생겨나는 경향이 나타났다. 문법상의 성 구분은 성에 대한 편견 과 노동의 성별 분화를 더욱 굳히고 지속시켰으며 여성의 인적자본 형성과 노동시장 참여, 전반적인 경제 발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두 번째 쌍은 사회적 위계질서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다. 한쪽은 사막과, 다른 쪽은 바다와 마주한 산악 지대를 생각해 보자. 이렇게 생태적 다양성이 높은 지역에서는 다양한 생태 환경에 사는 이들이 각자 전문화된 기술과 상품을 개발하고, 이에 따라 공동체 사이의 교역이 촉진된다. 이러한 환경은 교역을 더 원활히 하기 위한 기반 시설을 제공하고 재산권을 보호하는 제도를 출현시킨다.48) 이러한 제도와 통치 권력은 위계적 사회 발전에 기여하며, 사회적 위계를 분 명히 하는 공손성 구분politeness distinction 의 언어 체계가 나타나는 데 일조한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전통적으로 손윗사람이나 낯선 이를 호칭 할 때는 '지sie'(당신-옮긴이)를 쓰고, 자녀나 친구, 친척과 대화할 때 '두'(너, 자네 - 옮긴이)를 쓴다. 스페인어의 '뚜'(너, 자네 옮긴이)와 '우스뗀usted'(당신, 귀하 - 옮긴이)처럼 다른 언어에도 비슷한 구분이 있다. 이러한 언어 체계는 사회적 지위가 다른 이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더 원활하게 했을 것이다. 또한 그 자체로 강력한 힘으로서, 사회적 위계질서를 공고히 하면서 사회적 결속력을 높이지만, 개인주의나 기업가정신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세 번째 쌍은 미래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다. 우리가 보았듯이 열 량이 풍부한 농작물을 키우는 데 유리한 기후와 지리 조건은 미래 지향적 사고를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지역에서는 우회적인 미래 시제가 출현하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 의지와 소 망, 미래 계획을 나타내기 위해 'shall'이나 '월will', '고잉 투 going to 같은 조동사를 쓰는 식이다. 어떤 언어학자들은 (조동사를 사용하 는- 옮긴이) 우회적인 미래 시제가 장기적으로 사고하며 미래의 행동 을 결의하는 성향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런 구문을 쓰는 사회일수록 미래 지향적 사고가 강한 특징을 보인다. 
-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경제의 격차는 수천 년간 이어진 여러 과정에 뿌리를 뒀기 때문에 아무리 효율적인 개혁이라도 빈곤의 늪에 빠 진 국가를 하루아침에 선진 경제로 탈바꿈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먼 과거에 생긴 제도적·문화적 · 지리적·사회적 특성은 문명이 저마다 다른 역사적 경로를 걷도록 추동하며, 국가 간 부의 격차가 더 벌어 지도록 조장했다. 확실히 경제적 번영에 도움이 되는 문화와 제도는 점진적으로 형성되고 채택될 수 있다. 지리와 다양성 측면에서 나타 난 장벽의 영향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하지만 이때 각국의 발전 경 로에서 나타난 특성을 무시하면 어떤 개입으로도 불평등을 줄이기 어렵고, 오히려 좌절과 혼란 그리고 오랜 정체를 불러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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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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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세계사

역사 2023. 1. 9. 20:28

- 곡물은 소금이 필요했다
세계사에서 농업의 시작은 긍정적인 이미지로, 언제나 일면적으 로 평가됐다. 하지만 미각의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곡물 중심의 규 칙적인 식사로 맛이 단순해지면서 일부러 소금을 섭취해야만 하는 결점이 발생하였다. 곡물에 의존하는 생활의 시작으로 인해 소금의 섭취를 빼놓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즉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식물을 통해 섭취할 수 있는 칼륨과 동물의 살코기와 피를 통해 섭취할 수 있는 나트륨의 균형이 중요한데, 농업의 시작으로 다량의 칼륨을 섭취하게 되면서 나트륨과의 균형이 붕괴된 것이다. 곡물 등 식물성 식량의 대량 섭취는 체내의 칼륨 농도를 높이고, 대량의 나트륨을 체외로 배출시킨다. 그래서 소금을 섭취하여 매일매일 잃어버리는 나트륨을 보충할 필요가 생겼다. 소금의 생산과 분배가 인류 사회에 새롭게 투입된 것이다. 약 500만 년 전부터 약 1만 년 전까지 이어진 수렵 채집 사회에서 는 소금을 특별히 섭취하지 않았다. 동물과 생선의 살코기를 먹으면 그들의 체내에 있는 미량의 나트륨이 인간의 몸속에 농축되었기 때 문이다.
- 단맛을 대표하는 것은 당분을 응축시킨 설탕이다. 사탕수수 (감자)를 짜서 바짝 졸이는 설탕은 세계사에서도 크게 활약한다. 식 염으로 한정된 소금에 비해 단맛은 많은 식자재에 함유되어 있다. 그래서 소금은 권력에 의해 통제되었지만, 단맛은 권력으로부터 자 유로웠으며, 다양한 맛으로서 상거래의 대상이 되었다. 그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는 상품이 바로 설탕이었다.
사탕수수는 뉴기니, 벵골만, 인도, 아라비아해, 이슬람 세계, 지중 해, 유럽, 대서양의 여러 섬, 브라질 카리브 해역 등 다양한 곳에 옮 겨 심어지며 대표적인 감미료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 설탕은 세계적 인 상품이 되었으며, 세계사를 크게 바꾸는 원동력이 되었다.
오늘날 사탕수수와 사탕무로 만들어지는 설탕의 연간 생산량은 15억 톤 이상으로, 이는 쌀과 밀의 생산량의 합계보다 크다. 하얀 설 탕은 매혹적인 달콤함을 통해 욕망의 해방이라는 주문을 지구상 에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은 동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잎사귀나 줄기에 동물에 해로운 '알칼로이드'라는 독소를 축적하고 있다. 하 지만 모든 알칼로이드가 해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 유익 한 작용을 하는 것도 있다. 대표적인 알칼로이드는 차의 카페인, 양귀비의 모르핀, 담배의 니코틴 등이다. 한방약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인류는 쓴맛의 세계에 과감하게 도전하면서 몸의 상처를 치유하고,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약효를 가진 식물을 끊임없 이 찾아낸 것이다.
- 쓴맛을 식별하는 미각 세포는 혀의 가장 안쪽인 목과 비강 가까 이에 있다. 그래서 쓴맛은 향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향도 미각 을 구성하는 일부인 것이다. 인류는 후각을 동원해 유익한 쓴맛과 해로운 쓴맛을 구분했다. 그 결과 허브, 향신료 등이 인류의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 십자화과의 머스터드(겨자)는 고대 이집트에서 조미료, 화장용 연고, 향유로 사용되었다. 그리스에서도 머스터드는 조미료, 해독제로 사용되었으며, 철학자 피타고라스가 "머스터드만큼 뇌수와 코를 자극하는 것은 없다"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머스터드는 매운맛 조미료로서 로마의 동부를 중심으로 제국의 전역에 퍼져 있었다.
머스터드는 으깬 흑겨자의 씨앗에 와인 제조에 사용하는 포도즙 을 더해 페이스트과 같은 상태로 만든 향신료다. 머스터드의 씨앗 자체에는 매운맛이나 향기가 없지만, 씨앗을 분말 형태로 만들어 미 온수를 섞으면 효소의 영향으로 분해 작용이 일어나 매운맛과 향을 얻을 수 있다. 머스터드mustard라는 영어의 어원은 '불타는 듯한 포 도즙'을 의미하는 라틴어 '머스텀 알덴트mustum ardens'에서 왔다. 로마인은 머스터드 분말에 미온수를 더해 잘 섞은 후, 3분 정도 방치하여 아무것도 아닌 풀의 씨앗을 매운맛 조미료, 그리고 살균력 이 강한 약제로 바꾸었다. 씨앗 안에 함유되어 있는 '시니그린'이라는 물질이 효소에 의해 가수분해되어 향과 매운맛을 만들어내는 것 이다. 물을 넣고 반죽한 머스터드는 시간이 경과하면 향과 매운맛을 모두 잃어버렸다. 머스터드를 만들 때 포도즙이나 식초를 넣는 이유 는 그에 의해 효소의 작용이 억제되어 매운맛을 비교적 길게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겨울에 목초가 부족했기 때문에 11월 즈음 많은 수의 돼지와 양을 죽여, 엄청난 양의 월동용 염장 고기를 만들었다. 머스터드는 이런 소금에 절인 고기에 곁들이는 향신료로 중요하게 취급되어 유럽의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운맛 조미료가 되었다.
-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프로디테를 한 손에 사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그 시점부터 새콤한 산미를 가진 사과에 최음작용이라는 속성이 더해지게 되었다. 그리스어로 '아프로디시아코 afrodisiaco'는 '최적'이라는 의미이다.
영어로 '아프로디시악aphrodisiac'이라고 하는 최음제는 아프로디 테에서 유래했다. 불의 신 헤파이토스의 아내였던 아프로디테는 군신 아레스 외에도 디오니소스, 헤르메스, 포세이돈 등 많은 신과 사 랑을 나누었으며, 미소년 아도니스와 안키세스를 애인으로 삼기도 했다. 사과를 반으로 가른 모습이 여성의 생식기와 닮았다고 하여 그런 발상이 탄생하였다고도 전해진다.
참고로 'croquer la pomme(사과를 베어 물다)'라는 프랑스 표현 은 '유혹에 넘어가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원래 자연의 소생과 대 지의 순환을 상징하던 사과에 회춘, 청춘, 사랑, 최음이라는 이미지 가 더해진 것이다. 이는 사과의 달콤하고 새콤한 맛에 기인한 것일 지도 모른다.
- 생선을 보존하는 방법에는 건조법과 염장법이 있다. 염분을 포함 한 채 건조하는 것은 가다랑어포 등의 건어물이 되고 염장을 하면 젓갈이 되며, 그보다 더 모양이 망가지면 액체 형태의 생선장이 된 다. 식품의 보존을 위해 소금을 사용하였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소 금에 의해 부패가 억제되어 맛이 변하기 시작한 식품도 맛이 훌륭하 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생선장은 바닷물고기, 어란, 조개, 새우, 게, 모든 민물고기를 소금 에 절여 발효시켜 재료의 원형이 남지 않을 정도로 액체화된 조미료 를 말한다. 다르게 말하면 젓갈을 숙성시키면 만들어지는 조미료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의도치 않게 오랜 기간 방치하여 강렬한 냄새를 풍기는 젓갈 국물을 용기 내서 핥아 보고, 눈이 번쩍 뜨이는 훌륭한 짠맛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생선장은 20~50%의 소금을 더해 어패류의 부패와 단백질의 분 해를 억제하여 짭짤함과 생선 단백질의 농후한 감칠맛을 훌륭하게 혼합한 만능 짠맛 조미료다. 최근에는 슈퍼마켓의 선반에도 생선이 나 새우를 원료로 한 태국의 넘 플라num pla, 정어리의 친구까 껌ca com, 갈고등어와 비슷한 전갱이, 날치 등 다양한 종류의 생선으로 만든 베트남의 느억 맘nuoc mam, 새우로 만든 인도네시아의 테라시 terasi 등 다양한 생선장이 진열되어 있다.
- 생선장은 동남아시아 메콩강 유역의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라 오스 등의 나라에서 시작되었다. 우기에 대량으로 잡히는 민물고기 를 소금에 절여 생선장을 만든다. 장과 생선장은 머지않아 벼농사와 함께 중국으로 전달되었으며, 7~8세기에는 일본에서도 만들게 되 었다. 도루묵으로 만든 아키타현의 쓰루어간장), 오징어로 만든 이시카와현 노토반도의 이시루, 까나리를 사용한 가가와현의 이카 나고 쇼유(까나리액젓), 가다랑어를 사용한 가고시마 섬의 가다랑어 간장 등이 일본의 대표적인 생선장이다.
- 대두와 곡류로 만든 장을 조미료로 이용하는 나라는 중국, 한국, 일본의 동아시아 세계뿐이다. 장은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만능 조미료로서 다양한 요리의 맛의 기본이 되고 있다.
하지만 원래 장은 조미료가 아닌, 소금을 첨가하여 고기와 생선 의 부패를 억제하고 발효시켜 만든 반찬이었다. 여기에 차츰 소금뿐 만 아니라 후추도 첨가하고, 재료가 콩과 조, 보리, 밀 등으로 확대되 면서 발효 조미료의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술을 발효시킬 때 사용하 는 누룩이 동아시아 고유의 맛있는 짭짤함을 만들어낸 것이다.
- 유럽에서 향신료와 허브는 맛을 내기 위한 미각 작용 외에도 향 을 피우는 방향 작용, 색을 입히는 착색 작용, 고기의 악취를 제거하 는 교취작용 등의 기능이 있다고 여겨졌다. 기본적으로 육식 문 화였던 유럽에서는 미각이 시각이나 후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 었으며, 특히 냄새의 비중이 높았다. 향이 좋은 향신료와 허브가 유 럽에서 귀하게 여겨졌던 이유다.
수많은 허브와 향신료 가운데, 매운맛이라는 미각을 중시한 것은 머스터드, 홀스래디시, 생강, 고추 등이고, 방향성을 중시한 것이 바 질, 파슬리, 민트, 시나몬, 육두구 등, 채색용으로 이용한 것이 사프 란, 강황, 파프리카이며,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 이용한 것은 마늘, 타임, 로즈메리, 양파, 세이지, 카르다몸 등이었다.
- 대서양을 횡단하여 '신대륙'에 다다른 콜럼버스의 항로 개발은 재배 작물과 가축의 세계적인 대교류를 단숨에 진행하고, 미각의 세 계를 크게 혁신시켰다. 1만 년 전, 농업의 시작에 따른 먹거리 대변 동을 '음식의 제1차 혁명', 유럽인이 중개하는 '대항해 시대' 이후의 먹거리 교류를 '음식의 제2차 혁명'이라고 부를 정도이다.
지구의 생태계를 바꿀 정도인 재배 작물과 가축의 교류는 '콜럼 버스의 교환'이라고 부르는데, '신대륙'에서 '대륙'으로 옥수수, 감자, 고구마, 호박, 카사바, 토마토, 강낭콩, 땅콩, 고추, 피망, 파프리 카, 카카오, 파인애플, 파파야, 아보카도, 딸기, 바닐라, 칠면조 등이 전달되고, 반대로 '대륙'에서 '신대륙'으로 보리, 밀, 쌀, 채소류, 오렌지, 올리브, 사과, 커피, 소, 양 등이 건너갔다.
이러한 교환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유럽 이었다. 새롭고 다양한 식자재가 전파되면서 먹거리의 안정과 미각 의 확대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신대륙'의 대농장(플랜테이션)과 대목장을 경영하며 많은 식자재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유럽 의 맛의 세계가 다른 여러 지역보다 앞장서 넓게 확장된 것이다. 즉 '음식의 제2차 혁명'은 유럽에 '새로운 맛의 세계'를 탄생시켰다고 할수 있다.
- 대항해 시대 이후에 진행된 '콜럼버스의 교환'은 세계사에서 이 루어진 가장 큰 규모의 맛의 교환이었다. 그 결과, 맛의 세계 지도의 원형을 완성하게 되었다. 서로 다른 '맛의 세계'가 한데 모인 것이다. 일본의 문화 인류학자 이시게 나오미치의 《동아시아의 식의 문화》 에서는 조미료와 약미를 바탕으로 한 전 세계의 '맛의 세계'를 8가지 로 분류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각 지역에는 문명의 탄생이래의 고 유한 맛의 역사가 있으며, 외부 세계에서 가져온 새로운 맛이 수용 되고 맛의 체계가 재조합을 이루어, 각각의 '맛의 세계'가 성립하게 된다. 4대 문명의 맛과 그것의 전파가 맛의 세계의 토대가 되지만, 참깨, 후추 등의 향신료와 '신대륙'의 고추가 맛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게다가 소금, 유럽인에 의해 대량으로 생산된 설탕이 세계적 인 맛의 기본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부터 4대 요리권을 중 심으로 '맛의 세계'의 범위에 관해 서술하겠다.
(1) 장문화권: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곡물, 콩 등을 원료로 하는 만능 조미료인 여러 가지 장이 기본 적인 조미료가 되며, 생강, 후추, 마늘, 참깨 등이 약미로 이용 된다.
(2) 카레 문화권: 인도 세계
복합조미료인 카레와 소의 유지인 기ghee가 기본적인 조미료 이며 강황, 후추, 생강, 카르다몸, 씨앗류, 참깨가 약미로 이용 된다.
(3) 강렬한 향신료 문화권: 페르시아(이란), 아랍, 터키 등의 맛
문화가 서로 겹치는 서아시아
양을 주요 식재로 하고, 고추, 후추, 클로브, 시나몬, 카르다몸, 생강, 마늘 등 강렬한 향신료가 많이 존재한다.
(4) 허브와 향신료 문화권: 유럽
고기 요리가 많아 허브나 후추, 클로브 등의 향신료, 씨앗류, 올리브, 사프란 등이 맛을 내는 데 이용되었다.
4대 요리권의 특징을 비교하면 동아시아나 인도에는 만능 조미료와 복합조미료가 있으며 서아시아와 유럽은 이러한 것이 없고 다양한 향신료 등의 조합에 의해 맛을 만든다는 특색이 있다. 이 외에도 (5) '신대륙은 고추를 주요 조미료로 사용하고, 토마토 등을 이용하는 고추 문화권인데, 이는 전파에 의해 말레이반도, 인 도네시아 등의 동아시아로 날아가 또 하나의 구역을 만들었다. (6) 태국, 베트남, 필리핀 등은 생선장을 중심으로 하는 생선장 문화권 으로, 코코야자, 생강, 후추 등의 향신료가 병용되었다. (7) 광대한 사하라 사막의 주변은 참깨를 중심으로 하는 유료작물 문화권이다.
- 설탕에 의해 생명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가 보장되자, 인류는 생리적인 맛보다 문화적인 맛을 더욱 중시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맛 의 시대로의 전환이 찾아왔다. 향신료의 시대와 설탕의 시대를 거쳐 '식자재의 맛 그 자체를 즐기는 시대로 들어온 것이다. '맛이란 무 엇인가'라는 질문이 새로운 고찰의 대상이 되고, 냉정하고 객관적인 맛을 추구하였다. 가스트로노미의 시대가 온 것이다. 식자재가 가진 본연의 맛과 그 맛의 조합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과도한 향신료와 설 탕은 배척하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식사의 기본은 짠맛이 되고, 단맛이 디저 트를 통솔해야 한다는 맛의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였다. 17세기 말 이후, 단맛과 짝을 지은 쓴맛, 신맛, 향기가 새로운 기호품의 분야를 만들어내고 있다. 아이스크림과 셔벗, 커피, 홍차, 코코아 등 기호품 의 세계가 넓어지면서 서민의 생활을 침투해나갔다. 맛의 세계가 다양화되고 식사도, 기호품도 상품화가 이루어졌다.
맛의 세계를 크게 변혁시킨 저렴한 설탕을 대량으로 생산한 곳이 브라질과 카리브 해의 섬들이었다. 욕망을 해방하는 맛의 설탕은 유 럽으로 유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로 수출되었다. 네덜란드 는 자바섬에서 설탕의 재배를 확장하였으며, 그 욕망의 맛은 일본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거쳐 에도성 깊은 곳의 여성들까지 매료시켰 다. 자본주의 경제는 힘으로 세계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설탕이라 는 매혹적인 맛도 이용한 것이다.
설탕의 달콤함은 유럽에서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로 확산되면 서 자본주의 시스템을 수용하게 했다. 미각의 측면에서 생각하면 욕망 해방의 시대는 카리브 해의 설탕 플랜테이션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영국의 식탁에서 활개를 펼친 단맛
머지않아 상인들은 설탕을 이슬람 세계의 커피, 중국의 홍차, '신 대륙'의 카카오와 결부하여 기호품이라는 새로운 맛의 장르를 만들 어냈다. 홍차와 커피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습관이 지배층에서 민중 으로 확산되고, 설탕의 파트너인 커피, 홍차, 카카오 등이 식탁의 단 골손님이 되었다.
18세기 말, 커피와 홍차에 설탕과 우유를 넣어 빵과 함께 먹는 간단하고 포근한 식사 방식이 민중 사이에 퍼지게 되었다. 식탁 위에서 중앙아메리카의 설탕, 자바 섬과 실론 섬의 커피, 중국의 홍차가 만나면서 유럽의 식탁은 전 세계를 아우르는 범위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식탁 혁명'이라고 한다.
인류학자 시드니 민츠가 그의 저서 《설탕과 권력》에서 “1775년,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설탕 소비량은 1663년에 비해 약 20배 증가 하였다”라고 기술한 것처럼 카리브 해역에서 영국으로 수출되는 설 탕의 양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1600년, 영국인 1인당 설탕 소비 량은 400~500그램이었으나, 17세기에 약 2킬로그램, 18세기에 약 7킬로그램으로 증가하였다. 즉 1650년경에 특권층의 지위를 나타 내는 귀중품이자 약품, 양념이었던 설탕이 1750년경에는 부유층의 사치품이 되고, 1850년에는 고가의 생활필수품으로 모습을 바꾸면서 서민의 맛의 세계까지 침투한 것이다.
- 1900년, 영국인은 칼로리 섭취량의 3분의 1을 설탕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설탕이 영국을 제패한 것이다. 설탕을 소비하는 것이 영국인이라는 증명으로 간주할 될 정도로, 영국인은 달콤한 설 탕의 포로가 되었다. 설탕을 넣은 홍차와 잼을 바른 빵이 서민의 아 침 식사로 정착된 것이다.
설탕의 대유행은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의 정치가 이자 미식가인 브리야 사바랭은 그의 저서 《미식예찬》에서 설탕이 보급된 상황을 보고 “설탕은 루이 13세(재위: 1610~1640) 시대에 프랑스인에게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새로운 식품이지만, 19세기의 우리에게는 이미 빼놓을 수 없는 가장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오늘 날의 부인, 특히 부유층의 부인들은 예외 없이 빵보다 설탕에 더 많 은 돈을 소비할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설탕은 세계를 제패하였으며, 이미 빵을 까마득히 앞지르고 있다.
- 로스팅을 통해 주류가 된 커피
브리야 사바랭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커피의 생명은 커피콩에 열을 가하는 '로스팅'이다. 로스팅이라는 공정이 더해지면서 커피는 처음으로 커피가 되었다. 1450년경 페르시아에서 최초로 로스팅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로스팅이 그렇게 새로운 것일까? 로스팅이 새롭다는 것은 기호품인 커피의 역사도 새롭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커피를 향기가 있는 음료로 인식하게 된 경위를 기록한 서적으 로는 1587년에 저술된 아브달 가딜의 《커피 유래서 커피의 정당성 에 관한 결백한 주장이 유명하다. 1278년, 수행자 오마르가 도덕 적 실수를 저질러 모카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우사브 지 방의 산중으로 추방되었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오마르가 스승 알 샤드힐리의 이름을 외치자 작고 아름다운 새가 날아와 어느 나무의 가지에 앉아 신비한 소리로 울었다. 오마르가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나무에는 커피 열매가 있었다. 그 열매를 먹고 너무 맛있었던 오 마르는 동굴로 열매를 가지고 들어가 끓여보고는, 그것이 훌륭한 향 과 약효를 가진 열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 오마르는 우 려낸 커피로 신자들의 질병을 치료하였는데, 그 평판이 장관의 귀에 도 들어갔다. 그 결과 오마르는 사면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성인으 로도 존경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인 오마르는 13세기의 이슬람 신비주의 교단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커피 열매를 달여 마시는 관습은 아라비아반도 남단부의 예멘 지 방에서 직관과 명상을 통해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이슬람 신비주 의(수피) 수행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커피의 어원은 아랍어로 와인을 의미하는 '카와qahwa'이다. 카와는 달여서 만든 음료를 가리키는데, 원래 과실주의 이름이었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당분이 많은 커피콩 을 가루로 만들고 발효시켜 만든 술이 수행자 사이에서 비밀리에 퍼 졌다고 하는데,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에서는 음주를 금지하고 있 기 때문에 커피콩이 발효하지 않도록 열을 가한 것이 로스팅의 시작 이라고 전해진다. 카와는 터키어로 'kahve(카베)'라고 하며, 이는 영 어 'coffee(커피)'와 프랑스어 'café (카페)'로 바뀌었다고 한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연대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아라 비아반도의 각지에서 생산된 커피를 홍해 동부 연안의 시장에 모아 배를 통해 수에즈로 운반하고, 심지어 낙타의 등에 싣고 알렉산드리아로 운반하였다. 인도와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생산된 향신료와 함께 커피는 홍해를 건너 이집트로 건너간 것이다.
향기 문화의 중심지에서 기른 커피는 당연히 향기 음료이며, 을 볶으면서 식탁의 스타가 되었다. 브리야 사바랭은 "생두를 달인 국물 따위는 일반적으로 의미가 없는 음료이다. 오히려 탄화 덕분에 향기와 기름이 추출되며, 이는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커피의 특징이 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열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커피의 향 기를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기술했다. 정말 맞는 말이다. 16세기로 들어서자 아라비아인 사이에서는 커피콩을 볶아 막자 사발에 간 후, 끓인 물을 넣고 향신료를 추가하여 마시는 습관이 확산되었다.
- 18세기 이후, 프랑스의 요리사는 향신료 등 이국적인 재료의 과도한 사용을 피하고, 요리 기술로 경쟁하게 되었다. 요리는 맛의 균 형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고방식이 강해지면서 식자재의 미묘한 맛 을 끌어내기 위한 요리 기술의 복잡화와 세련화가 요구되었다. 가스 트로노미가 시대의 흐름이 되어, 맛의 주인공은 식자재 그 자체의 감칠맛으로 변하였다. 사치스러운 향신료 등을 사용하지 않고 귀족 요리를 서민 요리와 차별화시키는 것이 프랑스 요리법의 복잡화와 세련화를 진행시켰다.
- 요리사에 의해 기존의 요리법이 세련화되고, 섬세한 맛의 조화를 탐구하게 되었으며, 세계 각지에서 건너온 식자재와 향신료, 조미료 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 등이 연구되었다. 프랑스 요리를 중심 으로 가스트로노미가 유럽의 맛의 세계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플랜테이션으로 대량 생산된 설탕은 커피, 홍차, 코코아, 케이크, 과자 등과 결합하여 새로운 달콤함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식사에서 분리된 기호품이 맛의 세계에서 가장 큰 부분으로 성장한 것이다.
- 프랑스 요리의 가스트로노미로 대표할 수 있듯이 19~20세기의 맛의 세계는 식자재 본연의 맛을 끌어내고 재료의 조화를 통한 미묘 한 맛의 변화를 음미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하지만 장醬을 조미 료로 사용하는 일본 요리와 중화요리, 그리고 생선장을 조미료로 하 는 동남아시아의 여러 요리에서는 예로부터 감칠맛을 맛의 본질이 라고 여겼다. 이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일본에는 '우마이 ( )', 중 국에는 '시안웨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러나 만능 조미료가 존재하지 않는 유럽에서는 다양한 향신료 를 조합하여 맛을 만든다는 전통적인 발상을 바탕으로, '맛있는 맛'은 짠맛, 단맛 등이 혼합되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였다. 요리를 만드는 현장에서는 소스의 감칠맛을 위해 송아지의 뼈나 힘줄을 푹 고아 만든 육수인 'fond'주나 수프에 감칠맛을 더하기 위해
소나 닭, 생선 등과 채소를 푹 우려낸 '부이용bouillon'이라는 국물을 사용하였으나, 감칠맛이라는 특별한 맛의 존재를 생각하지는 못했 다. 하지만 헤닝이 정의한 짠맛, 단맛, 신맛, 쓴맛을 섞어 '감칠맛'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다.
헤닝의 4원미 이후, 짠맛은 나트륨, 단맛은 에너지원이 되는 당류 를 식별하고 신맛과 쓴맛은 신체에 해로운 식자재를 판별하는 센서 라고 여겼다. 하지만 인류는 생명 유지에 빼놓을 수 없는 단백질을 식별하는 센서가 없는지 궁금해졌다. 뒤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감칠맛은 단백질과 핵산을 풍부하게 가진 세포의 원형질에 함유되어 있는데, 20세기에 그를 탐지하는 미각이 '감칠맛'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감칠맛 성분이 밝혀졌으며, 대표적인 감칠맛 성분으로는 아미노산의 한 종류인 글루탐산, 동물에 함유된 핵산의 한 종류인 이노신산이 있다. 아미노산계의 감칠맛 성분과 핵산계의 감칠맛 성분이 어우러지면 시너지효과로 감칠맛이 더욱 깊어진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요즘에는 헤닝의 4원미에 감칠맛을 더해 5원미로 생각하게 되었다.
- 중화요리나 일본 요리는 식자재의 조합과 조화를 중시하는 발상 에 기초하고 있으며, 유럽의 맛의 형상과는 다른 발상이었다. 맛의 세계의 기본 동향이 감칠맛의 추구로 변화하면서 중화요리와 일본 요리의 맛을 내는 기술과 발상이 맛의 세계사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오랫동안 축적된 요리 가운데, 중국과 일본에서는 '감칠맛의 시너 지효과'를 체험적으로 깨닫고 식물성인 아미노산과 동물성인 핵산 을 섞어 감칠맛을 만들어냈다. 프랑스에서 예술이라고도 말할 수 있 는 소스를 통해 감칠맛을 추구했다면, 일본에서는 비교적 간단하게 섬세한 감칠맛을 끌어냈다. 일본 요리의 전형적인 육수 제조 방법인 다시마 육수와 가다랑어 육수의 조합은 그러한 선진성을 나타내고 있다. 중화요리에서는 표고버섯과 닭 뼈 육수 분말을 주로 배합한다.
- 일본 요리는 기름을 베이스로하는 중화요리나 프랑스 요리와는 달리 독특하게 물을 베이스로 사용한다. 중화 냄비를 가열하여 많은 식자재를 한데 섞는 중화요 리나, 버터와 요리용 돼지기름인 라드 등으로 고기를 굽고 소스를 더하는 프랑스 요리에 비해 물을 기본으로 하는 일본 요리는 기름을 더하지 않는다. 초밥처럼 식자재 본연의 맛을 즐기는 요리도 있지만, 무엇보다 일본 요리를 규정하는 요리는 전골 요리이다. 전골요리는 국물이 중요한 열쇠가 되는데, 어묵이나 라멘도 육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전골 요리의 계보를 잇는다고 할 수 있다.
- 제철 식재를 풍부하게 얻을 수 있고 쌀의 진하지 않은 단맛이 미각의 기본이 되며, 담백한 맛을 선호하고, 기름이 고가라는 등의 이 유로 일본 요리는 전골요리에 특화되었을 것이다. 다양한 식자재를 섞어 베이스가 되는 육수 제조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감칠맛'을 위해서는 무엇이 유용한지 경험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유럽 요리는 우여곡절 끝에 식자재가 지닌 감칠맛과 소스에 다다 르지만, 일본에서는 '화합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라는 발상으로 이질적인 식자재를 조화시키며 '감칠맛의 합성을 끊임없이 시도했 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남성과 여성, 노인과 청년, 장애인과 비장애 인, 다른 종교 등을 공존시키는 시스템이다. 간단히 말해 이질성의 공존이라고 할 수 있다. 전골 요리는 맛의 민주주의를 체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감칠맛을 내는 식자재로 다시마, 말린 멸치, 가다랑어, 말린 표고버섯 등 훌륭한 재료들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친화력이 있는 감칠맛은 짠맛, 단맛, 신맛, 쓴맛 등 어떤 맛과도 어 울릴 수 있다. 인공적으로 맛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식자재들의 자 체적인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맛을 중시하는 일본 요리의 발상이 19~20세기, 식자재의 감칠맛을 중요하게 생각한 '맛의 세계'를 주 도하게 되었다.
- 일본에서 뻗어나간 감칠맛
감칠맛의 기본은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과 핵산이다. 짠맛에 식염, 단맛에 설탕이 있듯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에는 감칠맛 물질의 추출에 성공하여 인공적으로 합성할 수 있게 되었다. 맛의 세계사에서 감칠맛 조미료의 출현은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다시마, 가다랑어, 표고버섯을 함께 넣고 푹 끓여 만드는 감칠맛은 확실히 바람직했지만, 수요가 증가하면 대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미생물을 사용해 발효에 가까운 형태로 감칠맛을 생산하는 것이 맛 의 근현대사의 큰 과제가 되었다.
1847년, 독일의 화학자 리비히가 고기의 추출액에서 이노신산을 발견하고, 이것이 고기의 감칠맛을 낸다고 주장하였다. 감칠맛의 발 견이다. 1908년, 일본인이 세계에서 최초로 감칠맛 물질을 추출하 는 쉽지 않은 작업을 시행했다. 당시 도쿄 제국대학 교수였던 이케 다 기쿠나에 박사는 일본 전골요리의 맛의 주역인 다시마 육수의 맛이 감칠맛 물질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고, 감칠맛 물질인 글루탐산나트륨의 결정을 분리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생각해 보면 이 케다 박사의 업적은 일본 식문화를 대표하는 전골 요리의 감칠맛에 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며, 맛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었다. 글루탐산의 존재는 이미 잘 알려져 있었지만, 이케다 박사의 공 적은 알칼리로 중화하여 글루탐산나트륨을 추출한 것이다. 그는 이 맛을 '우마미(감칠맛)'이라고 명명하였다. 영어로 '맛있다'를 의 미하는 'delicious(딜리셔스)'는 어원이 '완전히 사로잡다'인데, 이 는 감칠맛과는 다른 뉘앙스를 가진다. 그래서 감칠맛은 영어로도 'UMAMI(우마미)'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일본어로 맛이 좋다는 의미의 '우마이'는 높은 기술력을 의미하는 'I巧(우마이)'로도 이어지는데, 이는 만드는 사람의 입장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글루탐산의 발견과 합성으로 감칠맛은 단백질의 맛이라는 사실을 인정받았으며, 오늘날에는 헤닝의 4원미에 감칠맛을 더해 맛에 5원 미가 있다는 견해가 일반화되었다. 미각은 소금과 당분을 판별하는 센서일 뿐, 단백질을 느끼는 기능은 없다는 주장은 분명 옳지 않다. 1909년 5월 20일, 스즈키 사부로스케라는 사람이 이케다 박사 의 연구를 기업화하고, 밀가루 단백질의 글루텐을 가수분해하여 감 칠맛 물질과 글루탐산 나트륨을 제조하면서 세상에 감칠맛 조미료 인 '미림'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 일본 식품 제조 기업 '아지노모토'의 전신이다. 한때 일본 경제를 지탱하고 세계적 명성을 얻은 기업을 세운 스즈키 회장의 공적을 칭찬하는 의미에서 가와 사키시에는 아직도 스즈키 마을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오늘날에 는 도요타나 소니 등의 기업이 일본을 대표하지만, 과거에는 아지노 모토가 일본 기업의 대표선수였다. 오늘날 '아지노모토' 등의 감칠 맛조미료는 세계 100개 이상의 국가에서 사용하고 있다.
참고로 오늘날에는 당분을 추출한 후의 사탕수수를 이용하여 미 생물의 발효 작용에 의한 글루탐산을 생성시키고 그것을 수산화나 트륨으로 중화시켜 결정화한 후, 가다랑어의 감칠맛 성분인 이노신 산나트륨, 표고버섯의 감칠맛 성분인 구아닐산나트륨 등을 추가하 여 제품화하고 있다. 화학조미료에서 발효를 통한 조미료로 바뀌는 것이다.
감칠맛은 꽤 복잡한 요소로 이루어진다. 1929년, 미국의 화학자 빙햄은 음식의 탄성(변형)과 점성(유동), 두 가지 측면에서 과학적으 로 분석하는 '리올로지rheology'라는 방법을 제창하였다. 감칠맛에 대해 다른 측면으로 접근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식품의 리올로 지적 특징, 인간의 생리적, 심리적 요인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심리 리올로지psychorheology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맛 문화의 중심을 차 지하는 감칠맛에 대해 과학적으로 해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인류가 자연 속에서 음식을 선별하기 위한 센서였던 미각은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매운맛과 향이 주술력을 가졌던 향신료 시대, 욕 망의 맛인 설탕이 해방되었던 시대, 근대 이후의 감칠맛의 시대 등 '문화적인 맛의 시대를 거쳐 오늘날 혼란스러운 상태인 가스트로아 노미 시대에 진입하였다. 미각이라는 센서를 재편하고 식문화를 잘 정돈해야 하는 시대로 들어온 것이다. 다만 미식을 추구하고 식자재 사이를 헤매며 식재를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계속 축적해 온 맛을 소중히 여기고, 지적이면서도 문화적인 맛의 세계를 재구축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풍부한 사계절의 식자재로 둘러싸여 그를 바탕으로 하는 일본은 자연의 맛을 중시하고 자연이 주는 감칠맛을 끌어내는 데 뛰 어났다. 남북으로 길고, 바다와 산이 제공하는 다채로운 식자재를 돋보이게 하는 일본 고유의 맛 문화를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초밥과 인스턴트 라면이 세계화된 이유를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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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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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쟁탈의 세계사

역사 2022. 10. 13. 12:58

- 석탄은 고문서에 등장할 정도로 옛날부터 사용되어 왔는데, 어째서 철 제조에 석탄을 사용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탄을 고집한 데는 이유가 있다.
석탄으로 철을 제련하면 석탄에 함유된 유황의 영향으로 철이 물러진 다. 이 단점을 해소하기 위해 오랜 기간 기술개발에 힘썼지만 좀처럼 해결 되지 않았다.
16세기부터 이어져온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한 것이 영국의 에이브러햄 다비 1세다.
공기를 차단한 상태로 석탄을 가열하면 유황 함유율이 낮은 코크스라 는 연료를 얻을 수 있다. 다비 1세는 코크스를 이용한 제철법을 1709년에 개발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다비 2세가 1735년 코크스 용광로로 강철의 원료 가 되는 선철을 생산하는 데 성공하면서 석탄을 사용한 철의 제조는 더욱 진화했다. 석탄을 코크스로 만들어 이용하는 다비 가문의 기술개발 덕분에 오랜기간 목탄이라는 자원에 의존하고 있던 제철 분야는 석탄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변해갔다.
기술의 진화가 목탄이라는 자원을 석탄이라는 자원으로 전환시킨 계기가 된 것이다.
- 석탄이 목적이었던 페리 제독의 내항
당시 구미 각국에서는 양초나 등유, 윤활유를 제조하는 데 고래에서 얻을 수 있는 유분 경랍을 사용했다. 때문에 미국에서는 기름을 얻기 위한 포경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페리 제독이 내항한 것도 일본을 포경선의 중계기지로 삼는 것이 하나의 목적이었지만, 필모어 대통령의 국서에 나와 있듯 석탄 확보 역시 중요한 목적이었다.
당시 일본 염전에서는 소금을 제조할 때 바닷물을 끓이기 위해 장작을 사용했다. 그 결과 유럽과 마찬가지로 삼림 벌채가 횡행했고 일본도 장작 이 점차 고갈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자 장작을 대신할 연료로써 야마구치현 우베 지방과 후쿠오카현 지 쿠고 지방에 있는 석탄이 주목받았고, 18세기 후반에는 제염을 하기 위해 석탄 채굴이 성행했다.
일본에 석탄 자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 무역의 중계기지로 삼고자 했다.
- 미국에서 아시아까지 기나긴 여정을 위해서는 많은 양의 석탄을 싣고 가야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화물을 실을 공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일본 에서 석탄을 보급할 수 있다면 석탄량을 줄이고 더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페리 제독은 1854년 1월 16일 7척의 함대를 이끌고 또다시 일 본에 내항해 화친조약의 체결을 압박했고, 도쿠가와 막부는 3월 3일 요코 하마에서 12개조의 미일화친조약(가나가와조약)을 체결했다.
페리 제독은 일본에서 석탄을 확보하는 것이 곧 미국의 번영에 기여하 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극동의 소국인 일본의 개항을 고집한 이유였다.
- 유럽연합 설립의 계기가 된 석탄
석탄을 위해 페리 제독이 일본에 개항을 압박했듯 석탄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제관계에 다양한 영향을 미쳐왔다. 현재 유럽의 정책을 움직이고 있는 유럽연합의 설립도 사실은 석탄의 영향이 컸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52년에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벨 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이렇게 6개국은 석탄·철강의 생산을 공동관리 하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설립했다. ECSC를 결성한 목적은 독일과 프랑스의 석탄·철강 자원을 공동기관 관 리하에 두고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군사적 대립을 영구히 회피하는 데 있었다.
- 석탄과 철강은 군사 산업의 중핵이었다. 탄광이나 제철소가 집중되어 있 던 독일과 프랑스 국경 부근의 알자스, 로렌, 자르, 루르 지방의 영토적 귀 속을 둘러싸고 양국은 여러 차례 전쟁을 일으켜 왔다. 그래서 군사적 수단 이 아니라 국제적 패러다임의 구축이라는 규칙을 설정해 그 원인을 제거 하기로 한 것이다.
ECSC는 그 효과를 발휘했고 가맹국도 6개국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 증 가해 27개국이 되면서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ECSC는 이후 유럽공동 체(EC), 나아가 현재의 유럽연합(EU)으로 발전하는 유럽 통합의 기반이 되 었다.
이렇게 세계는 석탄이라는 자원이 번영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을 컨트롤하는 것이 국제관계를 좌우한다는 점을 직접 경험하고 자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 3종 기술로 실현된 셰일가스 생산 
셰일가스는 석유나 가스의 근본이 되는 유기물이 많이 포함된 점토암 지 층에 매장되어 있는 비전통 천연가스의 일종이다. 점토암 중에서도 특히 단단하고 층상구조로 쪼개지기 쉬운 성질의 셰일층에 매장되어 있기 때문 에 셰일가스라고 불린다.
전통 천연가스는 드레이크의 기계 굴착법을 이용해 원형으로 채굴한다. 굴착지점에 철탑 같은 구조물을 세우고 회전하면서 암반을 파고 들어가는 '드릴 비트(구멍을 파는 끝날)로 공극이 넓고 천연가스가 모여 있는 수천m 기하 거류층을 향해 수직으로 구멍을 뚫으면서 '드릴 파이프'를 삽입해 채굴이 이루어진다.
한편 셰일가스는 전통 천연가스처럼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땅 속에 수평으로 퍼져 있는 셰일층에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수직으로 구멍 을 뚫는 기존의 방법으로는 채굴이 어렵다.
셰일가스는 북미를 중심으로 그 존재가 알려져 있었는데, 채굴 기술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탓에 개발은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 '수평시추', '수압파쇄(fracking)', '미소진동 (micro-seismic)'이라는 3종 기술을 응용한 혁신적인 방법이 개발되면서 셰일가스를 낮은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수평시추'란 수평으로 퍼져 있는 셰일층을 수평으로 굴착하는 기술을말한다.
전통 가스전은 채굴할 때 수직으로 유정을 파고 들어가지만, 셰일층에 분포된 셰일가스와 접촉면적을 늘리기 위해서는 수평으로 굴착해야 한다. 수평시추' 기술이 개발되면서 기존 수직시추법에 비해 유정 하나당 천연 가스 생산량이 3~5배 늘어났다. | 수압파쇄'는 '수평시추'로 파낸 유정에 물 등을 압축시킨 액체를 흘려보 내 압력을 가함으로써 셰일층에 인공적인 균열을 만들어 셰일에 갇혀 있 던 가스가 쉽게 흐르도록 하는 기술이다.
미소진동은 수압파쇄'로 인공적인 균열을 만들어낼 때 발생하는 지진파를 관측·해석해 균열의 진도를 탐지함으로써 가스 회수율을 향상시키 는 기술이다(도표8). 이 같은 3종 기술을 응용하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지금껏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셰일가스의 채굴이 가능해졌다.
- 셰일오일로 원유 생산 1위가 된 미국 
미국에서 셰일가스 생산이 성행하면서 같은 방법으로 셰일층에 존재하는 원유도 채취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렇게 셰일가스에 이어 셰일 층의 원유, 셰일오일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 2017년 미국의 원유 생산량은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3위였 지만, 셰일오일이 생산되면서 2018년 미국의 원유 생산량은 2017년 대비 17% 증가한 하루 평균 1095만 배럴이 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러시아의 1075만 배럴, 사우디아라비아의 1042만 배 럴을 앞지르며 세계 1위 원유 생산국이 되었다. 미국이 45년 만에 세계 1위 자리를 탈환한 것이다.
- 2019년 9월 미 에너지정보국(EIA)은 미국의 9월 원유 수출량이 수입량을 하루 평균 8만 9000배럴 웃돌아 순수출국이 되었다고 발표했다. 월간 기준으로 수출이 수입을 넘어선 것은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73년 이래 첫 쾌거였다.
원유 생산 세계 1위가 된 2018년에 EIA는 2020년까지 원유 수출이 수입 을 상회하는 순수출국이 될 것으로 전망했는데, 9월 월간 기준 순수출국 으로의 전환은 2020년 연간 기준 순수출국 전환 전망에 힘을 실었다. 이 같은 미국산 셰일오일의 대두는 이후 역사상 첫 원유 마이너스 가격 이라는 사태를 일으키는 등 지금껏 원유 가격 지배권을 쥐고 있던 석유수 출국기구(OPEC)와 주요 산유국인 러시아에 위협이 되어갔다.
- 일본 기업이 세계 점유율에서 밀린 이유 가운데 하나로 태양전지의 원 재료인 실리콘 원료 조달에 실패한 점을 꼽는다. 당시 세계적으로 실리콘을 원재료로 사용하는 태양전지와 반도체의 수 요가 확대되자 실리콘 원료의 수급 핍박이 이어졌고 가격이 상승했다.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가운데 실리콘을 계획대로 조달하지 못한 일본 기업은 생산 규모를 확대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샤프의 2007년 생산량 은 전년 실적을 한참 밑도는 데 그쳤다. 반면 실리콘을 안정적으로 조달하기 위해 장기 구매 계약을 맺었던 기업들은 생산 규모를 확대할 수 있었고, 독일의 큐셀(Q-cells) 등이 세계 점유율을 늘려갔다. 게다가 2008년 무렵부터 중국·대만계 태양전지 제조사들은 당시 수요가 증가하고 있던 유럽 시장을 겨냥해 양산 시설을 늘리는 등 시장 획득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계나 유럽계 태양전지 제조사는 이들의 재빠른 움직임에 뒤처졌기 때문에 시장 점유율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제조 비용에서도 차이가 발생했다. 중국 기업은 단결정 실리콘보다 비용이 저렴한 다결정 실리콘으로 태양 전지를 제조했고, 값싼 인건비 덕분에 대규모 생산이라는 방식으로 생산 비용을 낮추어왔다.
한편 일본 기업은 높은 에너지 변환율이나 실리콘 비율을 낮추는 등의 고부가가치화기술 개발에 힘써왔기 때문에 중국 기업보다 비용 부담이 커 져 있었다.
일본이 개발한 고부가가치 태양전지는 일반주택 지붕 등 소규모 태양광 발전에는 적합했다. 하지만 시장 규모가 커지고 있던 대규모 태양광 발전 소 등에는 에너지 변환율이 다소 낮더라도 비용이 저렴한 태양전지 쪽이 메리트가 있다. 이러한 점도 일본 기업이 시장을 획득할 수 없었던 이유로 꼽힌다.
그 결과 2012년 태양전지의 생산량 기준 점유율은 중국·대만 기업이 62%를 차지했고 일본 기업은 6%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 대규모 화석연료, 원자력을 분리하는 대형 전력회사
전력 도매시장 거래에서 재생에너지가 경쟁력을 높여가자 전통적인 원자 력, 화석연료 같은 대규모 발전에 주력해온 전력회사의 비즈니스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2014년 11월 30일 독일의 4대 전력회사이자 EU에서 발전 규모 4위(2013년 시점)를 자랑하는 에온이 지금까지의 대규모 중앙집중형 원자력 발전과 갈탄, 석탄 등의 화력 발전 사업 등 전통적인 발전 사업을 본사에서 분리 한다고 발표했다.
- 재생에너지 사업, 분산형 발전을 도입하기 위한 스마트그리드 사업, 그리 고 고객 니즈에 대응하는 전력공급서비스 사업 세 부문을 본사의 기간 사 업으로 삼는다는 비즈니스 전략의 대전환을 꾀한 것이다.
에온은 분사함에 따라 종업원 6만 명 가운데 2만 명을 새롭게 설립한 유 니퍼(Uniper)로 이동시키는 동시에 원자력과 갈탄, 석탄 등의 대규모 중앙 집중형 발전 사업을 맡기는 체제로 전환했다. 에온의 이 같은 비즈니스 전략의 대전환은 세계 각국에 충격을 안겼다. 어째서 에온처럼 큰 전력회사가 비즈니스 전략을 180도 전환한 것일까? 그것은 앞서 말했듯 한계비용이 없는 재생에너지의 보급을 중요한 이유로 꼽을 수 있다.
- 아우디는 2013년부터 독일 작센주 남부 베르테에 있는 자사의 P2G 플 랜트에서 풍력 발전 잉여전력으로 물을 전기분해해 수소(H)를 생성하고, 그 수소를 이산화탄소(CO)와 화학반응시켜 천연가스의 주성분인 메탄가 스(CH)를 제조하고 있다.
천연가스 자원이 없는 국가라도 재생에너지 전력과 이산화탄소를 이용 하면 천연가스를 제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수소와 이산화탄소를 이용한 메탄가스 제조를 메타네이션이라고 하며, 아우디는 자사의 P2G 플랜트에서 만든 인공 메탄가스를 아우디 e-가스(Audi e-gas)라고 부른다.
앞서 말했듯 메탄가스는 천연가스의 주성분이기 때문에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에 주입할 수 있다.
e-가스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에 주입되어 가정에서 소비되며, A3 스 포츠백 g-트론' 유저는 독일 전역에 설치된 압축천연가스(CNG) 충전소에서 아우디 e-가스 카드를 사용해 e-가스를 구매할 수 있다.
아우디 e-가스 카드를 사용해 e-가스를 구매하면 아우디는 카드의 구 매 정보를 바탕으로 같은 양의 e-가스를 독일 국내 천연가스 공급 네트워 크에 공급한다. A3 스포츠백 g-트론'은 e-가스를 연소시켜 달리는 천연가스 자동차이므로 주행 시 CO,를 배출하지만, e-가스를 생산할 때 거의 같은 양의 CO, 가 소비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CO, 배출량은 제로가 되는 만큼 탄소중립이라고 할 수 있다.
- 게다가 아우디의 P2G 플랜트는 전력 수급 상황에 따라 5분 이내에 6MW의 전력을 전력계통에 공급하는 테스트에 합격하면서 전력 수급 균 형 시장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아우디의 P2G 플랜트는 재생에너지 잉여전력 제어에도 공헌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아우디 A3 스포츠백 g-트론'이 달리면 탄소중립 천연 가스의 공급과 재생에너지 발전의 수급 균형 제어라는 두 가지 효과를 일 으키는 셈이다.  지금껏 자동차는 에너지를 소비하는 주체였으며, 에너지 시스템에서는 독립된 존재였다. 하지만 에너지 전환은 V2G나 P2G 같은 형태로 자동차 가 에너지 시스템의 일부가 되는 에너지의 신조류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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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

- 지난 1만 2천 년 동안의 기후변동과 기후사를 되돌아보면, 최근 2천~3천 년 사이에 발생한 한 가지 특이점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특이점이란 바로 온난기에는 문화와 사회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가 발전하며 전성기를 누린 반면, 한랭기는 불안과 위기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문자의 발명이나 새로운 문명의 대두, 다양한 조직과 기구의 형성과 발전 등 인류가 이뤄낸 역사적 발전 대부분은 홀로세lolocene라는 지질 시대, 즉 온난기에 집중되어 있다.
홀로세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그 시작은 기후온난화였다. 물론 홀로세 내내 기온이 지속적으로 높았다는 뜻은 아니다. 온도 가 뚝 떨어진 시기도 여러 차례 있었다. 기원전 4100년부터 기원 전 2500년경까지 사하라 사막의 일부가 초원에서 황무지로 변해 버린 사례가 대표적이다. 학자들은 홀로세가 대략 서기 2000년을 기준으로 1만 1,700년 전쯤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독일 아 이펠 산맥 지대의 마르maar형 호수인 마르펠트 호수의 퇴적물을 분 석한 결과 역시 그와 비슷했다. 홀로세의 시작 시점을 대략 기원전 9640년으로 본 것이다.
- 고대 기후최적기의 온난 건조한 날씨는 로마제국이 서유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결정적 길을 열어 주었다. 그 당시 기후는 추위를 견딜 수 있는 작물이나 가축을 키워 식량을 조달하는 켈트식 빙하기 농경보다는 지중해성 기후에서나 재배가 가능한 곡물과 포도 농사에 더 적합했다. 그러나 기원후 300년경부터 기후가 급변하면서 남유럽 전체가 한랭다습한 지역으로 바뀌었고, 이로써 농업에 기반을 둔 로마제국의 경제도 성장을 멈추게 됐다
- 250년경부터는 뚜렷한 냉각 현상이 관찰되었고 536년에는 급 기야 최저 기온을 기록했다. 그토록 급격한 온도 하강을 초래한 원 인을 정확히 짚을 수는 없지만, 거기에는 분명 구체적인 이유가 있 었고, 당시 기록적 혹한은 인구 지형도에도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비가 내리는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고, 곡물이나 포도 농사에서 도 풍년을 기대할 수 없었다. 4세기 전반에는 강수량이 잠시나마 늘어났다.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 통치 하에서 로마제국이 잠시 안정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굳건하게만 보이던 로마제국은 395년 완전히 분열되 고 말았다.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한 서로마제국과 그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살아남은 동로마제국으로 분열된 것이다. 이후 서로마제국에서는 대혼란이 일어난다. 전쟁이 발발하고, 전염병이 창궐했으며, 인구수가 줄어들고, 경작을 포기해야 하는 땅의 면적도 늘어났 다. 한 세대 전만 해도 경작이 가능했던 땅들이었지만 대자연의 어머니는 갑자기 등을 돌렸고, 이후 경작이 불가능한 지역의 주민들은 모두 알 수 없는 곳으로 이주해 버렸다.  나중에 비잔틴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 국보다 정치적으로 더 큰 번영을 누렸고 기후도 더 온난했다. 다습한 여름 날씨 덕분에 풍작은 약속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 덕분에 5세기 동로마제국은 크게 번성할 수 있었다. 서로마제국은 16세의 어린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이민족들로 구성된 군대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반면, 1453년 투르크족에게 정복당하기 전까지 동로마제국은 자신들의 영토로 이주해 오는 이민들을 적극 수용하고 통합하면서 점점 더 큰 번성을 누렸고, 서로마제국의 속주를 정복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6세기 들어 최악의 기후가 동로마제국을 덮쳤고, 유럽 역사상 최대의 재앙이 발생했다.
- 사실 535년에 일어난 화산 폭발로 인한 피해는 선사 시대에 일어난 토바 화산 폭발에 비하면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 인한 기후변화를 모두가 자각할 수 있는 정도로 컸다. 주교이자 교회역사가인 에페소스의 요하네스 Johannes of Ephesos는 그 당시 상황을 이
렇게 표현했다.
"태양은 어두웠고, 그 어둠이 18개월 동안이나 지속됐다. 햇빛은 하루 4시간밖에 비치지 않았다. 그 빛조차 매우 희미했다. 모두가 태양이 다시는 원래의 광력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 미틸레네의 즈카리아스Zacharias of Mytilene 역시 비슷한 의견으로, “대낮의 태양도 밤중의 달빛도 어두컴컴했다” 라고 기술했다. 학식이 매우 높다 해서 수사학자scholasticus'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 즈카 리아스가 체험했던 그 시기는 일찍이 동방에서 볼 수 없었던, 그야 말로 기이한 시기였다. 즈카리아스는 동장군이 맹위를 떨쳤던 그 시절 겨울에 대해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만큼의 많은 눈이 내렸 다. 심지어 새들이 멸종될 정도로 상황이 나빴다” 라고 기록했다. 추 위는 무엇보다 농작물에 큰 피해를 입혔다. 에페소스의 요하네스는 “과실이 익지 못했고 포도주에서는 시큼한 맛이 났다” 라고 썼다.
- 나무의 나이테를 분석한 결과, 생장 속도가 확연히 느려진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현상은 스코틀랜드와 스웨덴, 칠레, 캘리포니 아, 심지어 호주의 태즈메이니아 섬 등 세계 도처에서 동일하게 관 찰됐다. 핀란드의 어느 대학이 실시한 연륜연대학적dendro-chronological 연구 결과, 536년에 기온이 갑자기 급강하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이후 평균 기온은 두 차례에 걸쳐 다시금 뚝 떨어졌고, 542년에는 급기야 1,500년 만에 최저 온도를 기록했다.
일조량 감소, 지속적으로 내리는 눈과 비, 혹은 그 정반대의 경 우인 지속적 가뭄, 가뭄과 가뭄 사이에 내리는 우박을 동반한 폭우 등 극심한 기상이변은 고대 말기 농업 중심의 사회들에게는 크나큰 위협이었다. 그것이 곧 생존을 위협하는 흉년과 대기근으로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6세기 무렵, 그 이전에도 늘 그랬고 그 이후 몇 백년 동안에도 그랬듯, 수많은 이들이 일용할 양식을 확보하기 위해 힘든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심지어 배불리 먹은 경우에도 영양 상 태는 불균형했다. 이상기후로 인한 흉년이 한 차례 지나고 나면 국 민들의 건강 상태는 극도로 악화됐고 면역력도 떨어졌다.
그 시절 나무 표본들을 연륜연대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간격이 좁은 나이테들이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였던 점을 감안하면, 아마 도 흉년은 한차례가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 수차례 발생했을 가능 성이 높다. 어쩌면 지중해 동편에 살고 있던 이들, 즉 동로마제국의 국민들은 비록 풍족하지는 않지만 올리브와 채소를 더 많이 먹을 수 있었던 덕분에 다른 지역에 비해 영양 상태가 그나마 나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날씨가 추워지고 일조량이 줄어들면서 올리브 나무에서 수확할 수 있는 열매의 양도 줄어들었고, 과육의 품질도 저하됐다. 화산 폭발이 초래한 기상 대이변이 지중해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의 식단에도 재앙에 가까운 피해를 입힌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라 불리는 흑사병 역시 기상 대이변 직후에 발생했다.
- 기후를 둘러싼 논의에서 중세 온난기는 다시금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 흥미롭기는 하지만 오래전의 얘기라 큰 관심을 두지 않 던 테마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사람이 기후변화에 최 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이론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자연발생적 기후변화가 늘 있어 왔다는 증거로 흔히 중세 온난기를 꼽곤 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기후변화도 호들갑을 떨어야 할 만큼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중세 중엽에도 이 정도 폭의 기후변화는 있 었다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에서 반박할 수 없는 부분이 하나 있다. 인류와 문명의 발전이 한랭기보다는 온난기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 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온난기를 거론하며 오늘날의 지구온 난화도 인류의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주장에는 도저 히 동의할 수 없다. 현재 진행 중인 지구온난화가 극심한 기상이변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몇몇 섬나라 들과 해안 지역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 최소한 기후학자 중 과반 수는 이러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스웨덴 왕립공과대학은 최근 1천 년도 더 지난 중세 전성기를 자신들의 주장에 맞게 재단하는 행위가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를 입 증하는 분석 자료를 내놓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대용 자료들을 이용해 온도를 추정하는 방식은 정확성이 떨어지기 때문 에 20세기 후반의 기후 상승폭이 중세 온난기의 최고 상승폭보다 더 컸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하지만 그 반대의 주장을 뒷 받침하는 근거는 더더욱 빈약하다. 최근 20년보다 중세 온난기가 더 더웠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 1315~1323년 사이, 기근과 그 여파로 발생한 질병 때문에 사망한 유럽인들의 숫자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 수백만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기근은 사람들의 의식까지 뒤흔들어 놓았다. 기근이라는 형태로 발생한 대멸망의 전령사는 중세 초반의 암흑기 이후 유럽 사 회에 거대한 타격을 입혔다. 어쩌면 그때의 대기근이 사상 최악의 기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1321년에서 1322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여전히 맹추위가 기승을 부렸고 발트 해의 넓은 면적이 꽁꽁 얼어붙었지만, 이후 천만다행으로 날씨가 다시 회복되었다. 사람들 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또 다른 재앙을 예감하지는 못했다. 흑사병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 던 것이다.
- 그 시절의 대기근은 동화와 전설의 소재로도 사용됐다. 어느 사악한 주교가 굶주린 백성은 외면한 채 자기만 살겠다고 식량을 몰래 쌓아 두었다가 결국 쥐들에게 잡아먹힌다는 '빙겐Bingen의 쥐 탑’ 이야기도 당시 대기근에서 기원한 것이고, 그로부터 약 500년뒤 그림 형제가 발굴한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 역시 먹을 것이 극도로 부족하던 당시를 묘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이야기 속 마녀에게는 길을 잃고 우연히 자신의 집에 오게 된 두 아이가 반가운 '식재료'에 불과했던 것이다.
-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의 기상학과 교수 마이클 E. 만은 “북반구의 경우 기온이 최저로 떨어지는 일이 시기적으로는 다르게 나 타났지만, 몇몇 예외 지역을 빼고는 대략의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대체로 15~19세기 사이의 기온이 11~14세기에 비해서는 0.3도가 량 낮았고, 20세기 후반에 비해서는 0.8도가량 낮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그 시기를 통틀어 가장 추웠던 시기는 15세기 후반이었고, 17세기와 19세기가 두 번째로 가장 추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남반구에는 소빙하기의 흔적이 훨씬 더 분산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 소빙하기의 시작과 종료 시점을 정확히 규명하기는 매우 힘들 다. 유럽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많은 이들이 기온이 저하되기 시작한 14세기를 빙하기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지만, 그보다 더 이 전에 시작됐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1315년을 전후한 10년을 소빙하기의 시작점으로 보는 시각은 충분히 개연성 이 있다. 대기근을 초래했던 기상이변이 일어났고, 그 10년 동안 중 세 온난기의 기상 상황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한편 종료 시점은 많은 학자들이 19세기 중반을 지목하고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시기 즈음에 산업화가 점점 더 진행되면서 각종 유해 물질의 배출량이 늘어났고, 그로 인해 기온이다시 상승했다.
소빙하기의 기온을 끌어내린 원인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한 연 구가 진행됐다. 그 결과 태양의 활동 즉, 흑점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 중 가장 중요한 항성인 태양의 흑점 변화에 대한 관찰은 1607년에 이미 시작됐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카메라 오브스쿠라 Camera obscura를 이용해 종이 위에 태양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담았다. 그게 아마도 태양의 흑점을 관찰한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이후 갈릴레이는 태양의 흑점을 보다 면밀하게 관찰하고 연구 했다. 소빙하기 중에서도 가장 추웠던 시절을 즈음하여 태양의 흑 점 활동은 최소로 줄어들었다. 학계에서는 그 시기를 마운더 극소기 Maunder minimum’라 부른다. 영국의 천문학자 에드워드 월터 마운더Edward Walter Maunder의 이름을 딴 것인데, 대략 1645년부터 1715년까지를 가리킨다.
- 기온 저하를 부른 또 다른 유력한 원인은 화산 폭발이다. 화산 이 폭발하면 분출된 미립자들은 대기권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에어로졸을 형성하고, 에어로졸은 지면에 닿는 햇빛의 양을 감소시킨다. 1452~1453년, 태평양의 작은 섬 바누아투에서도 한 차례 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유난히 추웠던 1580~1600년에는 아 시아와 태평양, 라틴아메리카에서 화산이 다섯 차례나 폭발했다.
그중 하나가 1600년 페루에서 일어난 화산 대폭발로, 에스파냐 의 정복자들이 현지에 정착해 살면서 남긴 기록물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화산학자들은 이와 관련해 여름 기온이 평소보다 훨씬 더 낮았던 여덟 개의 시간대를 여덟 차례의 화산 대폭발과 연결시키기 도 했다. 심각한 기상이변을 초래한 화산 대폭발은 현재까지 몇 차 례 발생했다. 1815년과 그 이듬해를 '여름이 없는 해'로 만들어 버 린 인도네시아의 탐보라 Tambora 화산 폭발도 그중 하나다.  한편, 산업화로 인한 각종 환경 문제를 걱정하는 게 일상이 된 21세기에는 납득하기 힘든 기온 저하의 원인이 하나 더 있다. 1347년과 1350년 흑사병 이후 인구가 급감하면서 삼림 면적이 늘 어난 것이 기온 하강의 원인이라는 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얼핏 생 각하기에는 삼림 면적이 늘어나면 무조건 좋을 것 같지만, 이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이산화탄소가 추위를 불러왔다는 이론에서는 숲 면적이 늘어나면서 나무가 흡수하는 이산화탄소의 양도 늘어났다.
- 사실 이산화탄소는 요즘 우리가 말하는 온실가스와 동의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고, 우리 모두는 깨 끗한 지구 환경을 위해 탄소 가스 배출에 대해 모종의 죄책감을 느 껴 어떻게든 '탄소 발자국carbon footprint’을 줄이려고 애쓰고 있다. 쉽 게 말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면 온난화 현상도 줄어들 것이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공기 중에 이산화탄소가 너무 적어도 탈이라는 데 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좀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이산화탄소가 너무 부족하면 온도가 너무 내려가서 소빙하기처럼 추운 시대가 돌아올 수 있다. 나아가 차디찬 날씨는 전쟁이나 사회적 불안, 위기 등을 초래할 수 있고, 이런 혼란 속에서 옛날의 마녀사냥 같은 것이 다시금 되살아나면서 모두들 희생양을 찾으려 혈안 이 될 수도 있다. 마녀사냥은 유럽 근세 초기에 발생한, 아무 죄도 없는 이들을 집단 학살한 비극적 참사였다. 구교, 신교 가릴 것 없 이 수많은 종교계 지도자들이 마녀사냥에 직접 가담했다.
참혹한 사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는 1560~1600년 사이였 다. 우박을 동반한 폭풍이 몰아칠 때에도, 그 이외의 악천후가 발생 했을 때에도 모두들 이 같은 현상을 몰고 온 죄인 색출'에 열을 올 렸다. 죄인들은 물론 아무 죄 없는 희생양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마 을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악마와 결탁을 맺은 마녀들이 술수를 부린다고 굳게 믿었다. 주민의 조급함이나 미신, 흉년 등으로 인해 마녀사냥이 줄지어 일어난 경우도 있었다.
- 20세기 들어 각종 분석 기술과 도구가 발달되면서 탐보라 화산 폭발의 위력이 얼마나 엄청났는지가 입증됐다. 그린란드나 남극에서 채취한 얼음 기둥을 분석하는 방법도 동원됐다. 빙핵 분석법을 활용하면 어느 시대에 어떤 가스 성분이 대기에 포함되어 있었는지 를 알 수 있고, 거기에 나이테 분석법을 추가하여 시대별 연평균 온 도도 추정할 수 있다. 얼음 기둥이나 나이테 같은 대용 자료들은 특 정 시대의 기후나 기후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간접 증거로 작용한 다. 거기에 다시 역사적 기록물들을 조합하면 정확도가 꽤 높은 그 림 하나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제작된 탐보라의 초상 화'에서는 탐보라 화산 폭발이 11~20세기 사이에 일어난 인류 최 대의 기후 재앙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탐보라 화산의 폭발 규모는 그야말로 '폭발적' 이었다. 가스와 화산재가 고도 43킬로미터까지, 다시 말해 성층권까지 치솟았다. 당시 분출된 물질들의 전체 합이 100 입방킬로미터에 달할 정도였 으니,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케임브리지 대 학교의 화산학자 클라이브 오펜하이머는 지난 2천 년 동안의 화산 폭발에서 분출물의 도달 고도가 탐보라보다 높았던 화산 폭발은 단 한 건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뉴질랜드의 타우포Taupo 화산 폭발이 그것인데, 당시 분출물이 무려 51킬로미터 고도까지 치솟았다. 타 우포 화산 폭발은 181년, 로마제국이 황금기를 맞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일어났다.
- 당시 로마제국의 어느 현명한 학자 한 명이 후세의 화산학자들에게 중대한 자료를 남겼다. 소小 플리니우스 Gaius Plinius Secundus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소 플리니우스는 79년에 일어난 베수비오 화산폭발과 폼페이의 멸망 과정을 직접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오 늘날 화산학자들은 소 플리니우스의 공로를 기리는 의미에서 강력 한 화산 폭발을 ‘플리니언 폭발plinian eruption’이라 부르고, 그보다 강도가 더 높은 파국적인 폭발은 '울트라 플리니언 폭발ultra plinian eruption'이라 부른다. 1815년 탐보라 화산의 폭발 강도가 얼마나 엄청났는지는 8단계로 구분되는 화산폭발지수VEI, Volcanic Explosivity Index를 보면 알 수 있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의 강도는 5였고, 1883년 크라 카타우 화산 폭발의 강도는 6이었다. 탐보라의 강도는 7이었는데, 인류 역사상 강도 7의 화산 폭발은 탐보라를 포함해 총 5건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최고 강도인 8에 도달한 폭발도 2건이 있었다. 하지만 이 2건은 모두 역사 이전의 선사 시대에 일어난 것들이다.
- 탐보라 화산 폭발로 인해 인근 지역은 며칠 동안 어둠에 잠겼고, 많은 시설들이 파괴됐다. 4월 10일 자정에는 폭발로 인해 발생 한 쓰나미가 자바 섬 동쪽 해안을 강타했고, 쓰나미로 인한 직접적 인 사망자 수만 해도 7만 1천 명에서 1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후 몇 달 동안 기근과 역병이 이어지면서 희생자 수는 불어났다. 한편, 당시 사람들은 아시아에서 일어난 기상이변이 19세기에 발생한 대 표적 역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파키스탄, 인도, 방글 라데시, 미얀마, 스리랑카 등이 속한 인도 아대륙Indian subcontinent에 서는 계절풍이 중단되는 등 다양한 기상이변이 일어나면서 그때까 지 현지에서 자주 발생하던 벵골 콜레라의 변종 역병이 대두됐다. 1817년부터는 이 변종 콜레라가 전 세계로 널리 퍼졌다.
- 1816년 여름, 중서부 유럽의 낮 평균 기온은 1810~1819년 기온에 비해 1~2도가량 낮았는데, 1810~1819년은 근대에 접어든 이후 가장 추운 10년이었다. 1951~1970년과 비교해도 1816년 여름 의 기온이 3도나 낮았다. '3도 정도야'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기 상학 분야에서는 엄청나게 큰 차이다. 1816년, 북반구는 1400년 이후 두 번째로 추웠다. 1400년 이래 1816년보다 더 추웠던 해는 1601년 단 한 해뿐이었다.
- 여름이 없는 해 1816년은 당연히 인류에게 혜택보다는 고통을 더 많이 안겨 주었다. 하지만 장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기 상층부의 에어로졸 덕분에 비나 눈이 내리지 않는 날이면 형형색색의 일몰 광경이 펼쳐졌던 것이다. 영국 출신의 윌리엄 터너는 그 화려한 장관과 땅이 품은 생동감 넘치는 색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세상 속에서 저녁이 품은 특별한 분위기를 화폭에 담은 대표적인 화가다. 런던 테이트 모던에 소장 중인 풍부한 색감 의 〈치체스터 운하Chichester Canal)를 감상하고 있노라면 당시 사람들 이 비록 기상이변 때문에 고통 받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도 대자연 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을 조금은 즐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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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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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흑역사

역사 2022. 7. 30. 09:04

-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퇴각할 당시, 병사들 중 수천 명이 열병에 걸렸다. 빌뉴 스를 거쳐 후퇴하던 25,000명의 병사 중 살아서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은 3,000명이 채 되 지 않았다. 고고학자 및 전염병을 연구하는 일련의 사학자들은 현대의 DNA 분석과 고미생 물학paleomicrobiology의 최신 기법을 적용한 연구를 통해 사망한 군인의 치아속질(ooth pulp 에 서 발진티푸스와 참호열 균을 찾아내었다. 단순히 추위와 굶주림으로 쓰러진 군인도 있었 지만, 사망자의 약 3분의 1 정도는 이가 옮기는 질병에 감염되어 끝내 사망에 이르렀다.
오늘날 우리는 이의 배설물을 통해 옮겨진 박테리아를 통해 치명적인 전염병이 전파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사실에 기초하여 발굴단은 매장지의 흙에서 미세한 기생충을 찾아내 유전자 물질을 추출하는 선구적 기술을 사용하여 분석하려고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발견한 유전자 물질을 통해, 두 세기가 흐른 지금까지도 기생충에 남은 질병 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몸니Pediculus humanus humanus는 머리카락이나 음부에 기생하는 머릿니와 달리 옷의 봉제선 속에 숨어 사는데, 〈그림 2>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을 타고 이동 하는 기마 포병대 장교의 군복 재킷에 기생하고 있었다.
몸니는 숙주가 열이 펄펄 날 때까지 숙주를 물어뜯고, 어느 시점부터는 다른 숙주의 몸 으로 옮아 박테리아를 전염시켰다. 부대원 전체가 제대로 씻지 못한 상태로 지저분한 막사 에서 다닥다닥 붙어 생활하는 환경이었으니, 새로운 숙주를 찾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 다. 나폴레옹 시대까지도 해충과 질병 간의 관계가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발 진티푸스나 참호열 등의 질병은 역사적으로 감옥열 혹은 선박열ship Fever 등으로 불리었고, 사람들은 좁은 곳에서 여러 명이 함께 생활하는 감옥이나 선박 안 같은 환경에서 전염병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항생제가 개발되기 전까지, 발진티푸스와 장 티푸스 같은 질병은 군인에게 치명적이었으며, 통계학적으로 나폴레옹 전쟁이나 크림 전쟁 같은 장기전이 치러질 경우 기생충은 무기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냈다.
- 항생제가 등장한 이래, 티푸스를 포함한 많은 질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개발도상국에서는 20세기 후반까지도 유행성 질병이 만연했지만, 19세기 사람들이 싸구려 기성복이나 중고 의류에 기생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처럼, 오늘날 선진국 사람들이 베트남이나 방글라데시의 노동 착취적인 공장에서 생산된 옷이 전염병을 옮길 것이라고 특별 히 염려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병원은 여전히 옷에 의한 전염병 감염의 온상으로 지목된다. 의료진이 입은 오염된 의류에 대한 최근의 연구를 보면 안심하기엔 아 직 이르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의사의 가운, 넥타이, 청진기 등 의료 전문가의 상징인 옷차림은 환자에게 치명적인 박테리아를 옮길 수 있는데, 이 중에는 항생제인 메티실린에 내성이 있는 포도상구균, 일명 MRSA(항생제 내성 세균)으로 알려져 있는 세균이 포함된다.
- 오염된 흰색 가운은 우리를 치료하고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는 의사라는 존 재에 대한 배신과도 같다. 한편 남성 의사들은 진료할 때 착용한 실크 넥타이를 거의 한 번 도 드라이클리닝한 적이 없다는 조사 결과가 있어 충격을 준다. 2006년에 스코틀랜드의 의사 4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의하면, 70퍼센트의 의사들이 한 번도 넥타이를 세탁한 적 이 없다고 밝혔고, 나머지 30퍼센트도 평균 5개월 간격으로 넥타이를 세탁한다고 밝혔다. 다른 연구에서는 의사가 착용한 넥타이에 적어도 이틀에 한 번씩은 세탁하는 셔츠보다 훨 씬 더 많은 박테리아가 서식하며, 넥타이 50개 중 8개는 항생제 내성 세균이 묻어 있다고 증언한다.
다른 연구에서는 병원 직원과 방문객의 옷에 누룩곰팡이 포자가 묻어 올 수 있으며, 면역력이 약해진 상태의 환자가 이를 들이마시면 치명적인 폐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어른들이 안심시켜 주기 위해 꼭 껴안는 경우가 많은 아이들이 특히 위험하다.
- 《꿈속의 장식 Adorned in Dreams》를 쓴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1844년 작《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The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인용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숙녀가 치장을 위해 사용하는 특 정 물품들이 노동자의 건강에 가장 슬픈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이 참으로 기이하다.” 엥겔스는 여성들의 패션 아이템이 노동자의 건강에 끼치는 악영향에 대 해서는 바르게 판단했지만, 정작 그가 매일 쓰고 다 니는 모자에 독극물이 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는 까맣게 몰랐다. 지금은 펠트지로 만든 모자를 쓰는 남성이 거의 없지만, 엥겔스 시대에 남성이 모자를 쓰지 않고 집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오늘날에는 모자를 쓰는 것이 격식 있는 차림의 필수 요소가 아니지만, 사실 모자는 많은 문화권에서 오랫동안 의복 생활의 중심 아이템이었 다. 중앙난방이 생기기 전에 모자는 실용적인 이유에서도 중요했다. 모자는 착용자의 체온을 유지하고 습기를 막아주어 쾌적한 상태를 유지하게 했다. 모 자를 쓰고, 들어 올리며 인사하고, 휴대하는 방법을 둘러싼 복잡한 의례는 모자가 거의 사 라진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그저 신비로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일상 속에서 계급 간의 구별을 강화하려는 사회적 압력이 작용한 결과이다. 모자는 이러한 이유로 신발과 더 불어, 서양 남성의 옷장 속에서 비싸지만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요소였던 것이다.
- 수은이 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모자 산업에 사용 된 이유는 남성 소비자에게는 위협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해당 산업에 종사 하던 남성 노동자의 상당수는 수은으로 인하여 천천히 죽음에 이르렀지만 말이다. 수은의 사용은 사회적 성별과 계급에 따른 차별의 결과였다. 중상류 계층의 남성은 패션의 유혹과 위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집단으로 여겨졌으며, 패션은 이러한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는다고 간주되었다. 결과적으로 수은의 위험성에 대한 논쟁은 의학계라는 한정된 영역에서 만 이루어졌다.  루이스 캐럴의 미친 모자 장수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독성을 품은 모자 산업 에 대한 우려는 사회 전반으로 퍼지지 못했다. 
- 옥스퍼드 출판부에서 펴낸 《기술의 역사 History of Technology》를 쓴 에릭 존 홈야드Eric John Holmyard는 19세기 전반에는 염색 가능한 색상에 눈에 띄게 추가된 색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옳은 이야기다. 왜냐하면 비소로 내는 녹색은 기술적으로 안료pigment에 속하는데, 안료는 물에 녹지 않는 반면 염색은 물 같은 수용성 용제를 사용해야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물건과 이미지를 훑어보면 눈부신 색채 기술의 혁신이 여실히 드러난다. 당시의 패셔너블한 옷과 각종 소비재, 인테리어는 화학적으로 생산된, 완전히 새로운 녹색으로 아름답게 칠해져 있다.
- 1780년대 이전의 녹색은 복합적인 색으로, 파란색과 노란색 염색을 섞어서 생산했다. 예를 들어 푸른빛이 도는 대청woad 염료 통에 천을 담근 뒤 다시 노란색 염료 통에 담그게 나 그 반대 순서로 염색해 만드는 식이었다. 간신히 녹색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당시의 천 연 염료 중 노란색은 빛에 쉽게 바랬기 때문에 색이 금방 변했다. 천연 염료는 다루기도 상 당히 어려웠다. 한편 구리에서 나온 녹청.verdet이 있었지만, 광물성 도료였기에 부식하거나 독성이 강한 문제가 있어 17세기까지는 극장 장식 등 특별한 용도로만 사용했다.
그러니 밝고 맑은 색을 내는 이 새로운 녹색은 보는 이의 눈을 얼마나 즐겁게 해주었을 까. 햇빛과 인공조명 아래서도 기적처럼 화려한 광채를 뽐내는 녹색의 화학 물질은 가격이 저렴했고 사용법도 비교적 쉬워 발명된 후 80년 이상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뒤늦게 알 려진 독성으로 인해 거부하게 되기 전까지 말이다.
- 1862년 초, 슈어러가 사망한 곳인 세인트 판크라스 교구의 담당 의사였던 힐리어 Hillier 박사는 추밀원에 특별 보고서를 올리고자 하였다. 명망 있는 법의학 교수였던 윌리엄 가이 Tilliam Guy 가 보고서 작성에 고용되었고, 매우 흥미롭지만 꽤나 분노를 부르는 보고서를 완 성하였다. 그는 17세의 조화 제작자로 버저론의 공방에서 일했던 프랜시스 롤로Francis Rollo 의 죽음에 비소가 중요한 역할을 한 사실을 발견했으며, 슈어러를 진찰했던 의사가 버저론 의 사업체에서 일하는 여성 100명 중 50명 정도에게 치료를 권고했다는 사실도 발견하였 다. 후일 해당 공방은 이슬링턴Islington의 에식스Essex 가에 위치한 훨씬 환기가 잘되고 덜 비는 곳으로 이전했으나, 가이가 직접 만난 대부분의 젊은 여성들은 여전히 만성적인 비소 중독에 시달리고 있었고 비교적 나이가 많은 한 여인은 탈모와 더불어 외음부가 감염되어 앉을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는 18세 이하의 어린이가 비소 산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포함해 여러 제안을 했지만, 비소 염료 사용을 완벽하게 제한할 수는 없었다. 생산의 자유를 제한하여영국 경제에 해를 끼칠 만한 방법은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만약 나의 연구가 여러 치명적인 사례를 발견했다면, 비소 염료를 사용하는 산업의 완전한 금지를 제안하는 것이 옳다. 고 생각했을 것이다”라고 덧붙이면서, 사망 사례 단 한 건'으로 전체 산업을 억누르는 것은 과도한 조치라고 주장하였다. 다른 위험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주장하는 경제 논리는 사람의 건강을 누르고 결국 승리하였다. 건강에 대한 위험을 충분히 신경 쓰지 않는 현상은, 영국에서 위험한 물질을 사 용하는 모든 산업에서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성냥 제조에는 인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노동자의 턱뼈를 녹여 괴사에 이르게 하는 끔찍한 증상을 초래하였다. 현존하는 위험 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성냥 제조업계는 1890년대까지 공식적으로 규제를 받지 않았다.
- 아닐린 염료의 원료인 유독성 화학 물질 벤젠은 석탄 채굴과 그 부산물에서 유래한 산업화 의 유산이었다. 가스등과 가스 난방 같은 석탄을 사용한 발전은 19세기 초반 고래기름과 양초수지와 같은 천연 조명 원료의 부족 사태를 겪으며 비약적으로 늘었다. 이에 따라 석탄 에서 나오는 끈적이는 검은색 진흙 형태의 콜타르 coil tam, 부산물이 넘치게 되었다. 당시 화 학자들은 이 진흙을 의학이나 상업 분야에 적용할 방안을 모색하였고, 말라리아 치료제인 퀴닌을 합성하는 데 쓰거나 염료로 활용될 가능성을 찾아내었다.
- 아닐린 염색은 과학적, 의학적 및 상업적 측면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중에는 면 역학과 화학 요법의 발전도 있는데, 결핵균과 콜레라균을 염색해 구별할 수 있게 된 것이 다. 또한 합성 향수와 식료품 염색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아닐린을 기반으로 한 화합물에 남은 치명적인 독성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퍼킨의 발명은 수많은 기념비적인 문헌과 이미지에 반복적 으로 언급되었다. 비소가 선명한 녹색의 잎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면, 한 잡지에 실린 찬사에 드러나듯, 아욱 꽃의 칙칙한 갈색이 도는 보라색’은 퍼킨에 의해 '맛깔스러운 바이올렛 색’ 이란 신세계를 창조하였다.  1859년에는 프랑스의 화학자 에마뉴엘 베르갱Emmanuel Verguin 이 '풍성한 크림슨 레드’ 색으로 군복에 널리 사용되게 된 푹신fuchsine을 제조하였다.
- 염색은 언제나 위험한 일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 직업의 위험성은 더욱 만천하에 공개되게 되었다. 염색을 할 때에는 원래 조색과 표백 및 염료 정착을 위해 매염제로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독성 물질이 사용되었다. 20세기 초반에는 크롬chrome이 가죽 태닝과 염색에 널리 사용되고 있었 다. 이 물질은 노동자의 손에 크롬 홀chrome hole로 알려진 구멍 같은 흔적을 남겼는데, 이 증 상의 별칭은 로시뇰rossignol(밤꾀꼬리) 또는 나이팅게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이 너무 커서 증상이 발현된 노동자는 밤마다 새처럼 울부짖었기 때문이었다.
직업성 피부병에 관한 논문에 실린 한 이미지는 크롬 증기가 스타킹을 염색하던 한 남 성의 팔과 목에 가져온 고통스러운 발진 증상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그림 11). 또 다른 직 업병 관련 논문에는 노동자들이 보호 장갑도 없이 원사에서 염료를 손으로 짜내며 염색 일 을 하고 있고 기껏해야 궂은일 정도로 부른다고 되어 있다. 논문의 저자는 염색 산업에 종 사하는 노동자들이 기관지염과 같은 호흡기 질환, 습진과 같은 피부병, 빈혈 등에 시달리고 있으며 업계 노동자 사이에서는 청색증eyanosis 증상도 보고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청색증은 산소 부족으로 인하여 입술과 사지 끝이 파랗게 변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아닐린은 방광암 및 고환암의 발병률을 크게 높이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세기에 발전하는 염색 산업의 수혜를 맛보며 형형색색으로 차려입었을 여성은 남성 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수가 아닐린 중독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추측해 보는 것은 꽤 합리적인 추론이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염료의 독성으로 인한 최악의 사례는 일부 아 이들 혹은 성인 남성에게서 주로 발견되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중상류층 여성은 아동과 성 인 남성에 비해 차분하고, 우아하며 정적인 태도를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남성과 아이들은 일하고, 걸어 다니고, 심지어 더운 날씨에도 땀을 흘리며 뛰어다닌다. 이들이 입고 있는 셔츠와 양말, 신발, 심지어 모자 밴드는 땀에 흠뻑 젖기 마련이었다. 최근 아디다스 이노베이션 팀의 학술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남성은 땀의 대부분을 등과 이마를 통해 배출하며, 운동을 할 때 여성의 두 배 정도의 땀을 흘린다.
원래 비소를 사용한 에메랄드그린 색이나 아닐린 염색으로 합성한 오색찬란한 색은 피부에 직접 닿는 옷에 사용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빨간색만큼은 오랫동안 남성 과 아이들의 양말, 여성의 스타킹, 플란넬 속옷, 페티코드 및 노동자 계급 남성이 입는 셔츠 에 사용되었다. 전통적으로 빨간색 염색은 꼭두서니라는 식물의 뿌리나 연지벌레와 같은 곤충으로부터 얻은 염료를 사용했는데, 나방과 같은 해충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을 뿐 아니 라 색이 오래가고 무엇보다 피부에 안전했다. 의사들은 빨간색을 류머티즘 관절염 예방에 효과가 있다고 추천하기도 했는데,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당시 대중은 빨간색 플란넬 천을 특별히 위생적일 것이라고 믿어 속옷으로 선호하였다.
- 스타일리시한 19세기 여성들이 마치 반짝이는 에메랄드나 모브 색상 가운을 입은 컬러풀 한 보랏빛 새처럼 보였던 반면, 기계 문명 시대의 민간인 남성은 냉철하고 점잖은 검은색을 선호하였다. 검은색은 티 없이 맑은 흰색만큼이나 유지하기 힘든 색으로 부유층의 특권이었다. 슈트의 경우 저렴한 검은색 염색은 빨리 색이 바래여 지저분한 어두운 녹색이나 노란색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광을 내지 않은 검은색 부츠나 구두는 진흙이 튀긴 자국 때문에 회색으로 보였다.  백인 여성은 피부가 타는 것을 막기 위해 장갑과 양산으로 무장한 채 납 성분이 든 액 상 진주 유액을 얼굴에 발라 부드럽고 온화한 흰색으로 빛나는 피부를 가지려 했다. 이에 대조되는 벨벳처럼 짙은 검은색은 그들의 남성 파트너들이 여인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당시 남성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외모를 가꾸는 데 시간과 공을 엄청나게 들였다. 남성의 액세서리들은 광택을 낸 강철과도 같이 윤기가 흐르 는, 말 그대로 산업사회의 숭고함이 반영된 미학으로 받아들여졌다. 광택을 낸 가죽으로 만든 검정 구두는 자연스러운 윤기가 흐르는 실크 소재 정장 모자와 짝을 이뤘다. 남성 신발 에 요구되는 검은색 허세를 제공하기 위해 검정 구두약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 남성용 신발은 디자인과 유지 비용, 상태에 따라 그가 어떤 사회적 계층에 속해 있는지 단번에 유추할 수 있게 하는 강력한 지표였다. 오늘날 우리는 싫증 나면 바로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하고, 심지어 빨아서 신을 수도 있는 신발을 신고 깨끗한 콘크리트 보도를 지나 는 일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19세기 사람들의 사치품이었던 신발의 위상을 잊고 산다. 오늘 날의 관점에서 보면 19세기의 도로는 위험투성이로 보일 것이다. 지저분하고, 진흙투성이에 다 거의 비포장도로였던 길에 말의 배설물과 다른 쓰레기들이 가득한 장면을 상상할 수 있 겠는가. 오직 일부의 남성들만이 다른 이의 도움 없이 (혹은 마차 없이) 자신의 신발을 완벽 하게 광택이 흐르는 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다.
구두닦이 소년과 새로이 보급된 우산, 그리고 몇몇 건축공학이 일군 혁신적인 공간이 야말로 재력 있는 부르주아 계급의 보행자들이 파리에서 깨끗한 신발을 유지할 수 있는 방 법이었다. 옻칠을 하거나, 래커를 바르거나, 광택을 낸 가죽은 퀴르 베르니cuit vermi 라고 불 렸는데, 이는 보호 기능이 있었다. 몇 겹으로 바니시를 칠해 만든 신발은 방수 효과가 보다 뛰어났고 진흙이 튄 자국도 제거하기 쉬웠다. 그러나 19세기에 바니시를 칠한 가죽은 백랍 이나 유독한 가연성 용제를 사용했으며 그 때문에 끔찍한 악취를 풍기기 일쑤였다. 
- 한편으로는 칭송받던 절약 정신이야말로 20세기의 첫 30년 동안 가장 심각한 연쇄 니트로벤젠 중독 사태를 일으킨 주범이었다. 밝은 갈색이나 노란색의 신발에 때가 많이 묻으면 액상 구두약 용액을 발라 검정이나 갈색으로 다시 염색할 수 있었는데, 이 용액을 미국에서는 프렌치드레싱French Dressing이라고 불렀다(그림 14). 이 용액에서 검정색 염료의 접착 제로 주로 사용한 것은 유독한 액상 아닐린이나 더 독하지만 그보다 저렴했던 니트로벤젠 이었다. 이 용액으로 구두를 적시면 증발 과정에서 인체에 치명적일 수 있는 증기가 발생하 였다. 또한 액상 형태였기 때문에 신발 위쪽의 천 부분이나 가죽에도 스며들었고, 땀이 난 발이나 발목의 피부를 통해 몸에 흡수될 수 있었다. 그로 인한 비극은 주로 일생에서 기념 할 만한 순간에 자주 일어나곤 했다. 예의를 갖춰야 하는 중요한 자리에 최선을 다해 임하려면 구두도 최선을 다해 광택 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 2011년 영국 신문 〈더 가디언 The Guardian)의 뷰티 칼럼니스트 샐리 휴즈Sali Hughes는 '염 색약이 당신을 죽일 수도 있을까? Could Your Hair Dye Kill You?'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그녀 가 기사를 쓴 시점은 스코틀랜드의 17세 소녀 타바사 맥코트Tabatha McCourt가 염색약에 들어 있던 p-페닐린다이아민p-phenylenediamine 또는 PPD라고 불리는 성분에 대한 다수의 부작용으로 사망한 지 한 달이 지난 후였다. 휴즈 자신도 원래 빛나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으나 단골 미용실의 권유로 머리를 염색한 후 비슷한 알레르기 반응을 겪고 입원한 경험도 한몫했을 것이다.
- 비록 색조 화장품에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었지만, PPD는 오늘날에도 로레알L'Oréal, 클레어롤Clairon과 에이본Avon 등 유명 제조사의 제품을 포함한 99퍼센트에 달하는 머리카 락 염색약에 사용되고 있다. 이유는 새치를 효과적으로 물들여 주기 때문이다. 미용용품에 사용되는 수많은 다른 독성 성분들, 예를 들어 립스틱과 옷 속의 납 성분부터 염색약에 든 PPD 성분에 이르기까지, 진즉에 역사 속 유물이 되었어야 할 오염 물질들은 여전히 우리 삶 의 수많은 영역에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각 제조사들의 경제적 필요성과 미용에 대한 사 회적 필요성이 그것들을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 남성이 부 츠를 염색하고 광택을 내기 위해 구두를 손질하는 곳으로 몰려들었듯이, 대부분의 여성은 자신의 새치 섞인 머리카락을 사회적으로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색으로 염색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이다.
- 우리는 몸을 옥죄는 코르셋과 신발에 대한 의학 문헌에는 익숙하나, 다리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중세에는 남성용 양말이 발전하여, 남성은 다리를 드러내기 위 해 두 갈래로 갈라진 옷을 입었던 반면, 여성은 여성성을 드러내기 위해 긴 스커트 착용이 권장되었다. 남성이 스커트를 입는 것은 다른 문화권에서의 일이거나 공장에서 노동을 하 기 위한 경우에 국한되었다. 한편 여성이 바지를 입는 것은 20세기 초에 페미니스트 의상 개 혁가들이 풍성한 실루엣의 여성용 바지인 블루머bloomer와 같은 옷을 도입하려고 시도했으 나 50년 넘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20세기 초까지 스포츠나 오트 쿠튀르의 경우를 제 외하고 여성이 바지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조롱과 저항이 심했다는 뜻이다.
1880년대는 의상 개혁가들이 탐미주의 운동의 산물인 헐렁하고 늘어진 가운을 필수복장으로 만들려고 시도하였고, 주류 패션에서 유행한 무릎 아래에 내부 띠를 두른 폭 좁 은 스커트는 여성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한 시기였다. 한 의상 개혁가는 1880년 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내가 이야기를 나눈 대부분의 사람들은 걷는 데서 오는 즐게 움이 없어졌다고 한다. 체력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몇 발짝 걸을 때마다 무겁고 폭이 좁은 스커트가 주는 피로감을 심각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행동을 제약하는 스커트가 유행 전선을 넘나들고, 아방가르드 시대를 살았던 여성은 배우를 비롯하여 몸매를 온전히 드러내는 시스sheath(칼집이라는 뜻) 스커트 또는 고대 그리 스 의상을 연상시키는 디렉투아르 Directoire(프랑스 혁명기 총재 정부 시대의 양식) 스커트에 몸을 밀어 넣어야 했다. 이러한 몸에 착 달라붙는 스커트는 종아리와 허벅지를 드러내는 슬릿 이 있어 밝은 색깔의 스타킹을 과시하는 한편, 착용자의 다리가 자연스럽게 드러나 선정적으로 느껴졌다. 스커트가 타이트해질수록 이를 입고 걷기도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는 여성의 이동성을 교묘하게 제한하는 스타일인, 호블 스커트로 대체되었다.
- 관객과 부대 담당자가 항상 위험에 처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용수들은 계속 불에 잘 타는 성질의 옷을 입었다. 옷에 불이 붙어 희 생된 무용수의 비극 중 하나는 그녀들이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처 럼 위험한 노동 조건에 대해 불평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들 '밑바닥 요정들 중 다수는 위험수당을 벌기 위해 지상에서 몇 미터나 위에 떠 있는 와이어를 타고 연기하겠다고 조르기까지 했다. 19세기 발레리나는 엄격 한 훈련과 고통을 견디는 거의 초인적인 능력 으로 잘 알려진 육체 노동자였다. 선택받은 극소수의 여성 스타는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됐지만, 발레단의 일반 단원들은 극도로 가난 한 노동 계급 출신이었다. 발레의 공공연한 비 밀 중 하나는 파리 오페라 Paris Opéra처럼 위엄 있는 기관에서조차 젊은 발레리나들이 가계 수입을 올리려는 제 엄마들의 손에 팔려 온, 못 먹고 과로하기 일쑤인 매춘부였다는 사실이다.
- 셀룰로이드는 셀룰로스celulose(섬유소)라는 유기 화학물을 모방한 것으로, 셀룰로이드 제조에 사용하는 면이나 목재 펄프처럼 인화성이 높은 문제가 있었다. 화학자들은 셀룰로 이드를 질산염 처리해 장뇌camphor(지방고리 모양 케톤의 일종 - 역주)와 섞은 다음, 최종 제품 을 만들기 위해 다른 화학 물질과 결합하는데 이때 거의 화약과 비슷한 수준의 폭발력이 생겼다. 질산염 처리가 가장 강하게 된 제품을 면화약uncotton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하지 만 자일로나이트(식물ylos에서 나왔음을 뜻함) 또는 피록실린.pyroxyline(불pyro과 나무xyline를 뜻 함) 등 다른 상표명은 원재료를 유추할 수 있는 수준의 이름이었다. 여기에 셀룰로이드 자 체가 인화성이 높다는 소식이 퍼지자, 불을 연상하게 하는 표현은 빠르게 사라졌다.
1845년 독일계 스위스 화학자 크리스티안 쉽바인Christian Schönbein은 아내가 없는 사 이에 주방에서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질산과 황산을 쏟았고, 아내의 면 앞치마로 닦아 낸 다음 앞치마를 난로 앞에 걸어서 말렸다. 그런데 앞치마가 열을 받자 저절로 불이 붙어 연기도 없이 사라졌다. 쉰바인은 이 발견이 지닌 군사적 잠재력을 재빨리 깨달았고, 자신의 발명품에 면화약 guncotton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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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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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함 속 세계사

역사 2022. 7. 7. 21:00

어느 순간 편지를 주고 받은 기억조차 흐려져 버렸다. 전화가 등장하면서 서로 안부를 묻는 행위는 수화기를 통해 진행되었고,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 메신저를 통해 즉각적으로 진행되는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졌다. 또한 이메일의 등장으로 직접 종이에 글씨를 적어 보내는 일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이따금씩 신문지상에 등장하는 연예인들의 결혼소식을 스스로 알리는 손편지가 새롭게 보일 정도다.

이 책은 켐브리지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작가 사이먼 시벡 몬티피오리가 지은 책이다. 저자는 '예루살렘 전기'라는 책으로 국내에서도 유명한데,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필연적으로 예수살렘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오랜 세월동안 방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예루살렘의 역사를 중립적으로 서술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 책에서도 저자의 이런 방대한 자료조사의 저력이 드러난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129통의 편지를 사랑, 가족, 창조, 용기, 발견, 여행, 전쟁, 피, 파괴, 재앙, 우정, 어리석음, 품위, 해방, 운명, 권력, 몰락, 작별이라는 테마로 구분하였다. 가장 오래된 편지는 기원전 1370년에 씌여진 편지로 바빌로니아의 왕 카다슈만엔릴이 이집트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에게 보낸 것이다.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은 시기라서 점토판에 설형문자로 씌여졌다. 가장 최근의 편지는 2018년 도널드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보낸 편지로, 미국 핵무기의 위력을 자랑하면서 북한을 위협하는 내용이다. 이례적인 편지였으나, 다행히 북한은 화해의 편지로 화답했다.

특히나 공식적인 편지가 아닌 개인적인 편지는 개인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이 아내 조세핀에게 보낸 편지가 그렇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황제를 굴복시키고 아내에게 짧은 메모를 보내는데, 피곤한 몸의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음과 동시에 러시아 군대를 완파한 것에 대한 자랑도 곁들인다. 

동성애자였던 앨런 튜링이 친구 노먼에게 보낸 편지는 안쓰럽기까지 하다. 앨런튜링은 동성애자 친구였던 아널드 머리의 강도피해 사건으로 경찰조사를 받다가 부주의하게 동성애자 성향을 드러내게 된다. 결국 튜링은 외설죄로 기소되었고, 튜링은 유죄를 인정하고 화학적 거세 치료를 받는다는 전제하에 형집행이 면제된다. 이로써 파멸의 길로 들어선 튜링은 청산가리가 든 사과를 먹고 자살한다. 자살하기 전에 친구 노먼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튜링이 느끼는 불안과 비참함이 잘 나타나 있다.

편지는 다시금 더욱더 비밀스런 대화를 추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정치인, 스파이, 범죄자, 혹은 연인 사이에서 그렇다. 이메일과 문자메시지는 해킹되어 누군가에게 노출되어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메일과 문자메시지가 편리하기는 하지만 무언가 덧없는 느낌을 준다. 오랫동안 지낼 인연이라면 손편지를 한번 주고받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 본 리뷰는 출판사 도서지원 이후, 자유롭게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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