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
- 엄청나게 다양한 오늘날의 개들은 모두 늑대의 후손들이다. 여우, 자칼, 코요테, 심지어는 들개도 아니다. 오직 늑대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유럽의 회색늑대들, 오늘날의 개들은 이 회색늑대와 유전자 서열의 99.5퍼센트를 공유한다. 무엇이 늑대를 우리 곁에 오게 했을까? 과거의 고고학자들은 농업 이 시작되면서 그렇게 되었으리라 추측했다. 기회주의적인 포식자들 인 인간에게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가축의 존재는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었으리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인간의 새로운 시대, 즉 신석기시대를 출발시킨 농업의 가장 오래된 증거는 약 1만 2천 년 전 중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의 골격은 이보다 훨씬 오래된 고고학 유적들에서 발견된다. 인간과 가깝게 접촉해 동맹을 맺음으로써 변화를 겪은 동식물들 가운데 아마도 개가 우리의 가장 오래된 친구인 듯하다. 개를 기른 최초의 사람들은 농부가 아니라 방하기의 수렵채집인들이었으니 말이다. 그 동맹의 시초를 찾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먼 선사시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 지난 몇 년 동안 개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은 엄청나게 뜨거웠다. 새로운 기법들과 새로운 발견들은 이론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잠재력을 안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이야기는 계속 바뀌고 있다. 하지만 고고학적 발견물에 대한 더 정밀한 연대측정법에서부터 더 빠른 DNA서열 분석에 이르는 이 모든 발전에 힘입어, 우리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가까운 친구의 기원을 둘러싼 실제 역사가 마침내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잘 아는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복잡하지 한번 보라. 우리 종 또는 다른 종의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역사인 선사시대에 접근할 때 우리는 수천 년에 걸친 상호작용의 복잡성을 깔끔하게 요약하는 단순한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매우 순진하게 출발한다. 하지만 더 많은 과학적 분석이 실시되고 더 자세한 내막이 드러남에 따라 전체 그림이 변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타이미르 늑대와 고대 및 현대에 존재하는 그 사촌들의 DNA에 대한 연구는 가축화의 뿌리를 찾는 일이 얼마나 험난한지 잘 보여준다. 개의 기원을 빙하기로 밀어 넣었다면, 그다음에 떠오르는 질문은 “개는 어디서 가축화되었을까?”다. 하나의 독립된 지역에서 시작된 다음 다른 곳으로 퍼져나갔을까? 아니면 각기 다른 시기와 장소에서 야생 늑대가 여러 번 개로 변모했을까?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개의 가축화는 지금으로부터 4만 년 전 시작된 듯하지만, 늑대와의 교잡은 그 이후로 오랫동안 계속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고대와 현대의 유전체에 간직된 비밀을 풀 수 있는 최신 유전자 기법 덕분에 우리는 적어도, 시도는 해볼 수 있다.
- 1959년 러시아 과학자 드미트리 벨라예프는 특정 행동을 골라내는 선택 육종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동물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개 가축화의 열쇠가 되는 기본 형질들이 존재했으며, 새끼 늑대에게서 순한 성격이 적극적으로 선택된 반면 공격적인 성향은 가차 없이 제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늑대와 유연관계가 상당히 가까운 종인 은여우 Vaulpesupes를 데리고 그 유명한 가축화 실험에 착수했다. 매 세대 가장 순한 여우들을 선택해 그들끼리 교배시키자 순한 성격이 개체군 내에 빠르게 퍼졌다. 집중적인 선택 육종을 여섯 세대 반복한 뒤에는 매우 순한 개체들이 개체군의 2퍼센트를 차지했다. 열 세대가 지나자 순한 개체들은 18퍼센트로 들었고, 서른 세대 뒤에는 절반에 이르렀다. 실험이 계속되어 2006년이 되었을 땐 거의 모든 여우가 가축화된 개와 똑같이 ? 인간에게 매우 친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변한 것은 여우의 행동만이 아니었다. 여우들 일부는 체색이 여전히 은빛이었지만, 몇몇 여우들은 붉게 변했다. 붉은색도 은여우의 표준 체색이므로 여기까지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개체들은 흰 몸에 검은 반점이 찍힌 모습으로 변했다. 이른바 '조지 화이트Georgian White' 품종으로, 야생에는 없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다. 조지 화이트 품종의 은여우는 여우처럼 생긴 자그마한 양치기 개와 묘하게 닮았다. 어떤 여우들은 은백색 바탕에 갈색이 얼룩덜룩하게 섞인 털색을 가지게 되었고, 어떤 여우들은 축 처진 귀를 가졌다. 게다가 다리와 주둥이가 짧아지고 두개골이 넓적해지는 등, 골격 구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번식 양상도 변했다. 야생 여우는 1년에 한 번만 짝짓기 를 하지만, 순한 암여우는 1년에 두 번 발정기에 들어간다. 또한 순한 여우는 야생 여우보다 성적으로 더 빨리 성숙했다. 인간에게 친근하게 굴고 공격성이 없는 등 실험을 통해 특별하게 선택된 특정 속성 외에도 순한 여우는 우리에게 익숙한 다른 행동 유형들을 보였다. 그들은 꼬리를 위로 들어 흔들었다. 주의를 끌기 위해 낑낑거리기도 했다. 킁킁대며 사육자를 핥는가 하면 인간의 손짓과 시선의 방향에 주의를 기울였다. 여우 육종 실험을 실시한 러시아 과학자들은 그들이 선택한 형질에 함께 딸려 온 듯하지만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개와 비슷한 수많은 기타 형질들을 얻었다. 이 여우 육종 실험은 수천 년 전 가장 친근하고 공격성이 덜한 늑대들이 어떤 식으로 세대를 거치며 빠르게 순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수렵채집인들은 러시아 과학자들처럼 매 세대 10퍼센트의 가장 친근 한 여우들만을 선택적으로 번식시키는 엄밀한 프로토콜에 따라 선택 육종을 실시할 필요가 없었다. 개의 조상인 늑대들이 어느 정도까지 는 자가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가장 친근한 녀석들만 인간 가까이에서 살도록 허락되었을 테니 말이다. 늑대 무리는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로 유연관계가 매우 가깝다. 한 마리가 인간을 용인하거나 나아가 친근하게 굴면 그 무리의 나머지 개체들도 같은 유전자와 행동 경향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따라서 무리 전체, 혹은 무리의 대다수가 인간과 동맹을 맺을 수 있었으리라. 순한 늑대는 인간과 애착을 형성해 손짓과 눈짓 같은 인간의 사회적 단서들을 따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 늑대가 개로 가축화되는 초기 과정은 비록 50년 만에 가축화된 야생 은여우의 경우만큼은 아니더라도, 비교적 빨랐을 것이다. 변화를 일으키는 분자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거의 모든 이론이 다면 발현을 거론한다. 온순함과 너그러움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선택된 특정 유전자 변종들은 연쇄적인 불안정화 효과를 통해 해부 구조와 생리, 행동의 다른 측면들을 광범위하게, 그리고 충분히 빠르게 바꿀 수 있다. 이러한 잠재력을 알면,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던 야생종에서 가축종의로의 변화가 갑자기 훨씬 쉽고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보인다. 어쩌면 늑대가 개, 또는 거의 개'로 변하는 일은 수없이 많이 일어났고, 우리는 그 시험들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계통으로 발전한 한두개의 유전적 흔적만을 찾을 수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빙하기가 절정에 이르렀던 2만 1천 년 전에서 1만 7천 년 전
사이, 유라시아 전역의 동물들이 스트레스 상황에 놓였다. 빙상이 내려와 유럽을 뒤덮었고, 시베리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춥고 건조해졌다. 많은 계통이 멸종했다. 때로는 종 전체가 사라졌다. 갯과 동물의 가축화 실험이 이 환경 재앙으로 주춤했다 해도 놀라울 게 없다. 하지만 어쩌면 빙하기가 정점으로 치닫던 시기에 수렵채집인의 야영지 가장자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던 먹이가 일부 늑대 무리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 모두가 추웠다.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일찍 가축화된 개의 일부 계통이 멸종했다 해도, 개를 곁에 두는 것은 마지막 빙하기의 정점에 수렵채집인의 생존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으리라고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현대 인류가 혹독한 마지막 빙하기를 무사히 지난 반면 네안데르탈인은 그렇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깔끔하고 그럴듯한 설명이긴 한데 그래서 오히려 꺼림칙하다. 너무 간단하지 않은가. 역사는 복잡하다. 가설은 얼마든지 제안할 수 있지만, 그것을 검증할 엄두도 내지 못할 때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개가 일부 수렵채집인 부족들의 생존과 성공을 도왔음을 의심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빙하기 이후로 가축 개의 화석 증거는 유라시아 전역에 나타난다. 8천 년 전 무렵부터는 서유럽에서부터 동아시아에 이르는 광범위한 장소에서 개 화석이 발견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고대 개와 현대 개에서 얻은 최신 유전자 데이터는 단일 기원을 암시하므로 이 모든 홀로세Holocene의 개들이 각 지역의 늑대 개체군에서 따로 가축화되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오히려 개는 이주하는 인간을 따라왔거나, 아니면 인간이 다른 지역에서 데려온 것이 틀림없다.
- 신석기에 인간이 농업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개도 처음으로 유라시아 밖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개는 농업의 확산을 따라갔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개가 등장한 것은 5600년 전 그 지역에 신석기가 시작된 뒤였고, 남아프리카에 도달하기까지는 4천 년이 더 걸렸다. 멕시코의 고고학 유적에 개가 등장한 것은 5천 년 전 무렵으로, 이 역시 최초의 농부가 등장한 시기와 같다. 하지만 남아메리카 남단에 도달한 것은 그로부터 4천 년 뒤였다.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는 아메리 카 대륙에 유럽인이 들어오면서 아메리카 개의 초기 계통들이 완전히 대체되었음을 암시한다. 반면 최근에 이루어진 유전체 전체 조사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지난 5백 년 동안 이주자들과 함께 도착한 유럽 개들이 신세계에 원래 살던 개들과 섞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현대 품종들이 생긴 것은 훨씬 나중이다. 그들은 최신 발명품이다. 그 역사가 유전자에 반영되어 있다. 개의 유전자에는 조상들이 두 차례의 큰 유전적 병목을 통과한 흔적이 있다. 가축화가 시작된 시점에 한 번, 그리고 지난 2백 년에 걸쳐 현대 품종들이 등장 한 시기에 또 한 번이다. 육종가들은 사냥과 목축에 큰 도움이 되는 놀 랍도록 순종적인 개를 생산하기 위해 특정 형질들을 집중적으로 골라냈다. 하지만 선택 육종으로 형질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 그자체가 육종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특정한 모양이나 크기, 색깔, 질감 등을 가진 개들도 육종되기 시작했다. 현대 개 품종들에서 볼 수 있는 형태적 다양성은 여우와 자칼, 늑대를 포함한 갯과의 나머지 동물들을 전부 합한 것보다 훨씬 더 크다.
- 인간과 늑대가 이 행성에서 공존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서로를 피하는 것인 듯싶다. 우리 조상들은 야생 늑대를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그들이 가축이 될 정도로 오랫동안, 하지만 지금의 늑대는 과거보다 더 인간을 기피하는 듯하다. 늑대는 가축화된 개가 됨으로써 여러 모로 변했고 야생 늑대도 변했을 것이다. 야생 늑대를 괴롭히고 사냥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자연선택을 일으키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결국 살아남은 늑대는 인간에게 접근하지 않는 늑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두려움이 많고 우리를 피하는 늑대는 인간이 매개하는 선택의 결과물인 셈이다. 개가 인간이 매개하는 선택의 산물이듯이. 회색늑대와 개의 유전자를 조사하면 개가 된 늑대 계통이 지금은멸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 빙하기가 정점으로 치닫던 무렵은 모든 생물들에게 힘든 시기였으므로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하지만 계통수를 달리 볼 수도 있는데, 그렇게 보면 늑대의 특정 계통은 결코 멸종하지 않았다. 그 계통은 사실 늑대 계통수에서 가장 북적이는 가지, 즉 개다. 유전적으로 말하면 개는 회색늑대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개를 카니스 루푸스Canis nupus라는 회색늑대종 내의 아종으로 명명한다. 즉, 별개의 종canisfamiliaris’이 아니라, 아종 canishutpusfan 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아는 테리어, 스패니얼, 레트리버는 내면은 늑대인 셈이다. 야생의 사촌들보다 꼬리를 더 잘 흔들고 손을 더 잘 핥고 덜 위험한, 훨씬 친근한 늑대 말이다. 농업이 시작되기 수백 년 전에 이미 빵이 중동의 주식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신석기 혁명을 이해하기가 더 쉬워진다. 사람들이 일단 야 생의 곡물을 모아 가공하기 시작하면, 그런 종들 - 보리뿐 아니라 밀 과 그 밖의 곡물들 - 이 작물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한 가지 음식에 의존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얻을 방법이 야생 곡물을 수확하는 것밖에 없다면 리스크가 너무 크다. 일부라도 직접 재배하면 도움이 될 것이 다. 하지만 이는 우리 조상들이 야생식물 재배를 의도적으로 시작했
음을 암시한다. 사실 농업의 시작은 신중하게 세운 계획보다는 우연에 훨씬 더 많은 빚을 졌을 가능성이 높다.
2. 밀
- 야생의 조상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작물화된 곡물의 변화들 중 적어도 일부는 우연히 발생했거나, 적어도 인간 행동의 의도치 않은 결과인 듯하다. 야생 곡물과 작물화된 곡물의 한 가지 중요한 차이는 씨가 달리는 중심축, 즉 (밀의 이삭을 이루는) 이삭 가지의 힘에 있다. 야생형의 이삭 가지는 잘 부러진다. 다시 말해, 익으면 씨가 든 작은 이삭들이 이삭에서 떨어져 바람에 흩어진다. 반면 작물화된 곡물의 이삭은 익은 뒤에도 작은이삭들이 그대로 붙어 있다. 이삭 가지가 질겨서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 이것은 야생풀이라면 심각하게 불리한 형질이다. 씨가 바람에 자유롭게 날려 흩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야생에서라면 이 문제 많은 돌연변이는 자연선택에 의해 신속히 제거될 것이다. 하지만 작물에서 단단한 이삭 가지는 이점이 된다. 만일 대부분의 이삭이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수확한다면 잘 부러지는 이삭 가지를 가진 이삭은 이미 씨의 대부분을 잃은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단단한 이삭 가지를 가진 돌연변이 식물은 작은이삭들 전부를 붙잡고 있다. 아직 달려 있는 씨는 고스란히 타작마당으로 가, 일부는 식량으로 먹히고 일부는 다시 뿌려진다. 결국 단단한 이삭 가지를 만드는 씨와 식물의 비율은 매 세대 증가하게 된다. 이는 자가선택을 하 는 형질의 또 다른 사례다. 농부들은 모든 씨를 붙잡고 있는 식물을 굳이 적극적으로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저 밀의 대부분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이 수확하는 밀 중에는 이삭 가지가 단단한 유형이 많을 테니 말이다. 즉, 이 특정 형질의 확산은 초기 농업 관행의 의도치 않은 결과였을 공산이 크다.
- 초기 농부들이 큰 날알이 달리는 식물을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선택함으로써 낟알 크기가 커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꽤나 합리적인 추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 형질은 우연히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초기 농부들은 개별 낱알의 크기보다는 밭의 크기와 생산성을 키우는 데 집중했을 텐데, 낟알이 커서 모종이 더 왕성하게 자라는 변종은 낟알이 작은 변종과의 경쟁에서 유리했을 것이다. 모종 사이의 경쟁은 바람에 흩어지는 야생종에서는 일어나지 않지만 씨가 촘촘하게 뿌려진 밭에서는 심해질 수 있다. 해가 가면서 밭은 서서히 난알이 큰 변종으로 채워져 농부들을 기쁘게 했을 것이다.
- 괴베클리 테페의 정말 놀라운 점은 그 연대다. 그 유적은 1만 2천년 전에 건설되었으니 농부가 아니라 수렵채집인들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은 신석기 초기의 인류 사회 발달에 관한 이론에 균열을 일으켰다. 기존의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전개되었다.
팽창하는 인류 집단에는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하고, 사람들은 이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농업을 채택한다. 농업은 잉여 식량의 축적을 촉진한다. 소수의 권력자들이 잉여 식량을 통제하면서 계층화된 복잡한 사회가 탄생하고, 이 새로운 권력 구조는 새로운 발명품인 조직된 종교로 더 받쳐진다.
괴베클리 테페는 이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기념비적 골칫거리임이 분명하다. 메소포타미아 고지대의 귀퉁이인 이곳에서, 적어도 하나의 복잡한 사회가 수렵채집인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괴베클리 테페가 전례 없는 노동 분업의 증거를 제공한다고 판단했다. “우리가 관점을 바꿔야 해요. 수렵채집인들은 보통 우리가 아는 방식의 일을 하지 않죠.” 하지만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달랐다. “그들은 채석장에서 일했어요. 기술자들이 생겨나 돌을 운반하고 세우는 방법을 알아내기 시작했죠. 석공 전문가들도 있었는데, 그들의 일은 돌로 조각과 기둥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그에게 괴베클리 테페는 권력과 비전을 가진 지도자를 갖추고 노동력을 조직할 수 있으며 예술가를 지원할 수 있는 사회가 존재했다는 구체적인 증거였다. 그리고 장식이 새겨진 환상 거석은 조직된 종교를 나타낸다고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강력한 상징을 지니며 사원 건설자들을 위한 신화와 의미를 풍부하게 갖춘, 실로 완연한 모습의 종교였다. 괴베클리 테페 이전까지, 조직된 종교가 농업 이전에 존재했을 가능성은 떠올릴 수 없는 것이었다.
3. 소
- 젖은 미세 화석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매우 특징적인 분자들이 존재하고, 그중 하나는 중요한 단서임이 밝혀졌다. 바로 젖의 유청 단백질, 공식 명칭으로 베타 - 락토글로불린-Lactoglobulin이다. 고고학자들에게 중요한 대목은, 베타 - 락토글로불린이 동물 젖에는 존재하지만 인간의 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베타 - 락토글로불린은 세균에 잘 분해되지 않아서 오랫동안 잔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 단백질의 유용한 특징이 하나 더 있는데, 종마다 달라서 소, 물소, 양, 염소, 말의 베타 - 락토글로불린을 구별할 수 있다는 점이다. 2014년에 한 국제 연구 팀이 광범위한 고고학 샘플에서 베타-락토글로불린을 찾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들은 낙농업의 증거가 풍부한 유럽과 러시아의 청동기시대(기원전 3000년) 치아의 치석에서 소, 양, 염소의 베타 - 락토글로불린을 다량 발견했지만, 낙농업의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 서아프리카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치아의 치석에서는 베타 - 글로불린을 찾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훌륭하다. 게다가 이 연구는 그린란드의 중세 북유럽 유적들이 결국 버려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밝혀주었다.
- 다른 연구에서 질소 동위원소비를 조사한 결과, 5백 년에 걸쳐 기후가 악화되어 그린란드의 바이킹들이 가축 식량을 줄이고 바다표범을 포함한 해양 식량원을 늘리는 쪽으로 식생활을 바꾸었으며, 그런 다음 15세기에 이르러 결국 자신들의 거주지를 포기했다고 추측했다. 생선 뼈는 고고학 유적에 잘 보존되지 않지만, 바이킹들은 아마 바다.표범뿐 아니라 물고기도 먹었을 것이다. 과학자이자 저술가인 재레드 다이아몬드 Jared Mason Diamond가 《문명의 붕괴Collapse)에서 말했듯이, 그린란드의 바이킹들은 기존의 식생활을 병적으로 고집하기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했던 듯하다. 그린란드 거주지를 버린 이유가 무엇이었든, 바다에서 나오는 음식을 먹기 싫어서는 아니었다. 바이킹 치아의 치석 분석은 또 하나의 식생활 변화를 밝혀준다. 서기 1000년에 그린란드의 초기 바이킹들은 유제품을 많이 먹었다. 하지만 4세기 뒤 베타 - 락토글로불린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그들은 더 이상 가축 동물을 먹지 않았고, 유제품도 이용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어쩌면 낙농 동물의 몰락이 이 바이킹 거주지의 종말을 앞당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린란드가 버려진 진짜 이유는 악화된 경제 상황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린란드 바이킹은 바다코끼리와 일각고래 상아를 교역했지만, 아프리카산 상아가 공급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상품은 더 이상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상아 시장이 바닥을 치자, 치즈 한 조각조차 얻을 수 없는 장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소, 양, 염소, 돼지는 인간과 협력 관계를 맺으면서 변모했다. 재배되면서 더욱 굵어진 밀 낱알과 달리, 소와 여타 동물들은 더 작아졌다. 그중에서도 소는 이상하게도 양, 염소, 돼지와 달리 - 신석기, 청동기, 철기를 거치며 유독 계속 작아졌다. 게다가 상당히 작아졌다. 고고학자들은 유럽 소의 고대 뼈를 조사해 신석기 동안 소가 얼마나 작아졌는지 측정했다. 유럽에서 농업은 약 7500년 전(기원전 5500년)에 시작되었다. 3천 년 뒤인 신석기 말, 소는 농업이 시작될 때보다 평균 3분의 1가량 더 작았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 농부들이 인위적 교배를 통해 더 작고 다루기 쉬운 동물을 고의적으로 선택했으리라는 결론으로 도약하기 쉽다. 그러나 가축화 초기라면 몰라도, 농부들이 수 세대 수천 년에 걸쳐 계속 해서 점점 더 작은 동물을 선택했을 확률은 낮아 보인다. 그러면 소는 왜 계속 작아졌을까?
- 중유럽의 신석기 유적에서 출토된 고대 소뼈들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크기가 작아질 뿐 아니라 어린 소의 개체수가 증가한다. 이는 목축의 초점이 고기 생산으로 옮겨 왔음을 암시한다. 어린 소는 빨리 자 란다. 3~4년이면 거의 성숙하고, 이때부터는 성장률이 떨어진다. 성
숙한 동물을 계속 살려두어서는 고기를 많이 얻을 수 없으므로, 보통은 동물들이 성숙하기 전에, 혹은 성숙하자마자 도태시킨다. 거주지 주변의 두엄 더미에 어린 뼈의 비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자체로 보면 이것이 소의 크기 축소와 무슨 관계인지 알기 힘들다. 크 기 축소는 성체 소에서 확인된 현상이고, 어린 소는 표본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체에 이르지 못한 뼈의 비율이 높다는 것에서 간파해야 할 사실이 있다. 바로, 송아지를 낳는 암소들도 대체로 완전히 성숙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번식할 수는 있으나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암소들은 무리 내의 성숙한 자매들에 비해 체중이 적게 나가는 송아지를 낳는 경향이 있다. 더 작고 가벼운 송아지는 더 작고 가벼운 소로 자란다. 이는 유럽의 신석기 소떼에서 젖을 짜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고기가 최우선 목적이 되면서 유럽의 소가 신석기 초보다 신석기말에 33퍼센트가량 작아졌다는 뜻이다.
- 선진국에서는 인공수정을 이용해 번식을 엄격하게 통제하면서부터 소 품종들 사이의 교잡 가능성이 사실상 제거되었다. 육종에 대한 이러한 엄격한 제약은 강력한 선택과 함께, 다수의 독립적이고 분절된 개체군으로 구성되는 종을 초래했다. 각 개체군은 유전병과 불임발생률이 높아지고 개체군 전체가 감염병에 취약해지는 등, 동계교배에 내재된 모든 위험에 노출된다. 유전적 변이가 적은 분절된 개체군은 야생에서 멸종 위험이 가장 높은 집단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엄격하게 통제되는 산업 품종이 전통적인 품종보다 더 생산적일 수 있다. 전통적인 품종을 산업 품종으로 바꾸는 것은 농부들에게 경제성 면에서 생각할 필요도 없는 간단한 결정일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한 가축 품종이 멸종하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모든 유전적 유산' 도 사라진다. 유전학자들은 개체군 분절화와 동계교배가 계속될 경우 소의 미래와 인류의 식량 안보에 미칠 위험을 우려하고 있다. 가축 양과 염소에 대한 우려도 있지만, 이런 동물들의 상황은 소와는 다르다. 여러 종이 존재하며 야생종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소를 현존하는 다른 소과 동물과 교배시켜 잡종을 만들 수 있고 그것이 미래에 유용한 유전적 자산이 될지도 모르지만, 소의 야생 조상은 이미 수백 년 전에 멸종했다.
4. 옥수수
- 옥수수는 별로 까다롭지 않다. 옥수수는 식물계의 코즈모포 리턴'인 듯하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곳에 자라는 곡물이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옥수수는 남위 40도인 칠레 남부의 밭에서부터 북위 50도인 캐나다에서까지 자란다. 또한 해발 3400미터인 안데스산맥에서부터 저지대와 카리브해안까지 번성한다. 옥수수의 세계적인 성공 비결은 그 겉모습과 습성, 그리고 유전자의 엄청난 다양성에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세계적 작물인 만큼 그 역사를 풀기는 엄청나게 어렵다. 옥수수가 전 세계로 퍼진 것은 겨우 5백 년 동안의 일이지만,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옥수수가 도입된 경위에 대한 문서 자료는 매우 모호하다. DNA가 추가 단서를 제공하긴 해도, 세계적인 무역과 교환이 옥수수의 유전적 역사를 뒤엉킨 거미줄로 만들어 버림. 옥수수의 세계화는 인간의 역사(탐사 항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무역로, 제국의 확장과 몰락)와 얽히며 그 흥망성쇠를 뒤따랐다.
- 표현형 가소성과 새로운 유전자 돌연변이는 새로운 형질을 만드는 두 가지 중요한 원천으로서 뛰어나고 독보적인' 옥수수의 다양성을 낳는 데 일조한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 에 기여한 또 다른 요인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야생 친척으로부터 받은 약간의 도움이었다. 초기 옥수수는 멕시코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퍼져나가면서 산지에 사는 테오신트의 아종인 제아 메이스 멕시카나와 교잡했다. 유전학 연구 결과, 고지대 옥수수가 가진 게놈의 약 20퍼센트가 멕시카나로부터 왔음이 밝혀졌다. 작물화된 보리가 시리아사막에서 자라던 야생 변종의 가뭄 저항성을 가져온 것처럼, 옥수수도 확산하는 동안 야생의 친척종들과 교잡함으로써 현지의 유전적 ‘지식'을 최대한 활용했던 셈이다.
- 옥수수는 멕시코에서 고지대와 저지대의 개별 경로를 통해 과테말라로, 그런 다음 더 남쪽으로 이주한 듯하다. 그리고 마침내 7500년전 남아메리카 북단에 도착했다. 이어 4700년에는 브라질 저지대에서 재배되고 있었고, 4천 년 전에는 안데스산맥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옥수수는 남아메리카 북단에서부터 북쪽의 트리니다드섬과 토바고섬, 카리브해의 다른 섬들로 퍼져나갔다. 북아메리카로의 확산은 훨씬 늦어서, 2천 년 전에 와서야 남서쪽 모퉁이에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곧장, 단 2백 년 만에 북동쪽으로 퍼 져나가 오늘날의 캐나다에 해당하는 지역까지 이르렀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접촉이 시작될 때쯤에는 이미 엄청나게 다양한 옥수수 변종들이 생겨나 멕시코에서부터 북동 아메리카까지, 카리브해 연안과 브라질 계곡에서부터 안데스산맥 고지까지 모든 지역에서자라고 있었다. 그 모든 형태의 옥수수는 각기 매우 잘 적응되어 있었고 변이가 풍부한 작물이었다. 즉,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해변에 발을 디디자마자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하드자족과 함께 잠시 시간을 보냈던 경험은, 뭐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의 생활 방식과 나 자신의 생활 방식에 대해 깨우침을 주었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추는 것에서부터 식습관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문화를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 우리는 과거와 다른 현 재의 문화를 장밋빛 안경을 통해 보기 쉽다. 하지만 '서구' 세계의 우리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전통적 생활 식 역시 전부 장밋빛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그들은 가족과 공동체에 중심을 두었다. 그들의 삶에는 '직업'이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실업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이에겐 각각의 역할이 있었다. 아이들도 한 부분을 담당했다. 자식을 낳는 것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해를 끼칠 수있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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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감자
- - 광합성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으며, 각각은 서로 다른 화학 경로를 이용한다. 나무와 관목이 이용하는 형태의 광합성은 광합성의 최초 산물로 탄소원자 세 개를 가진 분자를 만든다. 창의력 넘치는 식물학자들이 그런 식물을 'C3 식물'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다음으로, 풀과 사초 같은 식물들은 약간 다른 광합성을 이용해 탄소 원자가 네 개인 분자를 만든다. 이 식물들은 뭐라고 부를까? 물론 C4 식물이다. CA 경로는 물 분자를 더 효율적으로 이용할 뿐 아니라(건조한 환경에서 유용한 적응이다), 그 경로를 이용하는 식물은 보다 무겁고 안정한 동위 원소인 탄소-13을 더 많이 포획한다. 따라서 C4 식물들에는 탄소-13 이 비교적 풍부하다. 만일 한 동물이 C4 식물(예컨대 사초의 뿌리와 구경이 여기에 포함된다)을 많이 먹는다면, 그 동물의 뼈에도 탄소-13이 풍부해질 것이다. C3 식물과 C4 식물 사이의 이런 차이를 이용해 인류학자들은 유용한 결과를 얻어냈다. 침팬지의 식생활은 주로 잎이 무성한 C3 식물들로 이루어지므로 그들의 뼈에는 C-13이 풍부하지 않다. 약 450만 년전 우리의 초기 호미닌 조상들은 침팬지와 비슷한 C3 식물 위주의 식생활을 한 듯하다. 그러다 기후가 변동을 거듭하던 4백만 년 전~1백만 년 전, 그들이 거주하던 지역은 대체로 더 건조한 초원이 되어갔다. 우리는 약 350만 년 전에 그들이 C3 식물과 C4 식물을 함께 먹고 있었음을 알고 있다. 아마 C4 식물로는 대체로 녹말이 풍부한 뿌리와 덩이줄기를 먹었을 것이다. 땅 밑에 감추어져 있지만 어디에나 존재한 그 식량 덕분에 고대 조상들은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환경에서도 인구를 불리며 번성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어 250만 년 전에 식생활이 둘로 갈라지게 된다. 매우 튼튼한 치아와 턱을 가지고 있는 일부 호미닌은 주로 C4 식물을 먹었다(아마 계절에 따라 풀잎, 씨, 사초, 구경 등을 먹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가 속한 호모속의 초기 구성원들을 포함한 다른 호미닌들은 C3 식물과 C4식물을 계속 함께 먹었다. 정기적인 육식이 우리 조상들의 뇌를 더 크게 진화시키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했다고들 하지만, 최근 몇몇 연구자들이 식물 식량, 특히 덩이줄기처럼 녹말이 풍부한 식물 식량의 역할이 그동안 간과되었음을 주장하고 나섰다. 하나는 문화와 관련이 있고 하나는 유전자와 관련이 있는 두 가지 중요한 발전이 녹말에 묶인 에너지를 꺼내 쓰는 데 엄청난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문화적 발전은 요리의 탄생이고 유전적 발전은 녹말을 분해하는 침 속 효소를 생산하는 유전자의 중복이었다. 이 유전자 중복은 1백만 년 전 이후의 어느 시점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침 속 아밀라아제는 날것인 녹말보다 조리된 녹말에 훨씬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이 유전자 사본의 수가 늘어난 것은 요리가 도입된 직후였을 것이다
- 작물화가 어디서 처음 시작되었든, 그 사건은 야생 감자를 인 간에게 훨씬 더 유용한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야생 감자와 작물 감자의 가장 인상적인 차이는 덩이줄기의 크기와 기는줄기의 길이에 있다. 기는줄기란 새로운 식물을 싹 틔우기 위해 수평으로 뻗는 가느다란 줄기를 말한다. 야생 감자는 기는줄기가 매우 긴데, 이는 새로운 식물이 부모 식물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증식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야생 감자는 덩이줄기가 작다. 작물화는 기는줄기의 길이를 단축 시키고 덩이줄기의 크기를 키웠다. 두 가지 특징 모두 야생에서는 적 응도를 떨어뜨리지만 수확을 쉽게 만든다. 밀의 질긴 이삭 가지 형질 과 비슷하게 야생식물에는 극도로 불리한 특징이지만, 인간과 협력 관계를 맺은 식물에게는 요긴하게 쓰이는 셈이다. 작물화된 감자에는 또한 일부 야생 감자의 맛을 매우 쓰게 만들고 심지어는 독성을 띠게 하는 글리코알칼로이드도 적다.
- 북유럽에서 감자를 늦게 받아들인 데는 금기와 미신 외에 더 세속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순수하게 기능적인 관점에서 보면, 로마 시대 이래 유럽 전역에서 시행된 삼포식 돌려짓기 제도에 감자를 끼워 넣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다른 농부들과 공유하는 큰 밭에서 농부 개개인이 어느 한 뙈기만을 바꾸려면 눈치가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은 감자 확장을 가로막고 있던 문화적 장벽들이, 폭삭 내려앉은 것까지는 아니었을지라도 점차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종교와 정치의 흥미로운 합작으로 감자가 남유럽에서 북쪽과 동쪽으로 진출한 것이다. 17세기 말, 위그노와 여타 개신교 집단이 프랑스에서 쫓겨나면서 가는 곳마다 은세공, 조산술, 감자 재배 같은 다 양한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가져갔다. 18세기 말에는 칠년전쟁의 여파속에서 감자의 또 다른 이점이 입증되었다. 이 작물은 다른 곡물들과 달리 땅속에 있기 때문에 불에 타고 짓밟힌 밭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 프랑스군에서 약사로 일했던 앙투안 오귀스탱 파르망티에r는 프로이센에 포로로 잡혔을 때 감옥에서 감자를 먹었다. 감자를 가축 사료로만 생각했던 그는 이런 대우에 좌절하기보다는 감 옥 식사로 나오는 감자의 영양적 가치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1763년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는 감자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명망 높은 사람들을 초대해 감자 위주의 만찬을 열었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감자 꽃다발을 선물했다. 하지만 프랑스 요리에 이 보잘것없는 덩이줄기의 자리를 확고히 자리매김한 계기는 흉작, 혁명, 기근 같은 연속된 악운이었다. 파르망티에의 개척자 정신은 오늘날 이런저런 형태로 감자를 포함하는 많은 프랑스 요리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지금 파리에 있는 그의 무덤은 그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그 식물에 둘러싸여 있다.
- 다른 아메리카산 수입 작물인 옥수수와 함께 감자는 유럽 인구의 놀라운 증가에 기여했다. 1750년에서 1850년까지 1백 년 사이에 유럽인구는 1억 4천만에서 2억 7천만으로 거의 두 배나 늘어났다. 잉카제 국 건설자들에게 열량을 제공했던 감자는 이제 중유럽과 북유럽 국가 들에서 성장하는 인구에 에너지를 제공하고 도시화와 산업화의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경제성장을 견인했다. 증기로 돌아가는 산업혁명 시대 기계들이 석탄을 먹고 일하는 동안, 노동자들은 값싸고 믿을 수 있고 양이 풍부한 감자를 먹고 일했다. 이어 유럽 정치권력의 균형은 따뜻하고 화창한 남쪽 나라들에서 춥고 칙칙한 북쪽 나라들로 옮겨가기 시작했는데, 18세기와 19세기에 유럽 열강이 부상한 이면에는 여러 복잡한 요인들과 함께 어두컴컴한 땅 밑의 감자도 한몫을 했다. 그리 고 20세기에 찾아온 위기 때도 감자는 군대 식량으로서 제 몫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용 배급품 중에는 안데스 지역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용했던 건조 감자가 있었다.
- 수렵채집 생활 방식은 농경에 비하면 불안정하다. 수렵채집인은 자연에 의존하는 반면, 농부는 수확량을 제어하고 남은 식량을 비상시를 대비해 저장할 뿐 아니라, 잉여 농산물로 부와 권력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연을 통제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심지어는 우리의 착각일수도 있다. 자연의 기본 방식이 변화인데도, 우리는 생물을 고정시켜 변화를 막으려 하고 있다. 우리는 재배종의 진화를 제한함으로써 재배종을 매우 취약하게 만든다.
6. 닭
- 닭 생산이 거대한 글로벌 산업으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전례 없는 규모의 선택 육종뿐 아니라, 육종에 대한 매우 엄격한 규제가 필요했 다. 오늘날 닭 육종과 닭 사육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닭이 낳은 알 을 암탉이 아닌 기계로 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이런 완전한 분업 을 가능하게 한다. 닭 농장주들은 흔히 닭을 대규모로 사육하지만 닭 을 육종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 일은 육종 기업이 한다. 그리고 아비 아젠Aviagen과 코브-밴트리스Cobb-Vantress라는 단 두 개의 거대 다국적기 업이 육종 시장을 지배한다. 이 회사들은 종자닭(순계) 집단을 매우 엄격하게 통제한다. 그들이 보호하는 순계에서 3대째에 이르러 생산된 '종계(부모계)를 육계 육종 농장에 팔면, 그곳에서 개별 유전 계통의 닭들을 함께 교배해 최종 잡종을 만든다. 그 병아리들은 육계 사육 농장으로 보내진다. 우리가 먹는 방목 유기 닭조차 이런 산업적인 육계 육종사에서 온 것일 수 있다. 전통적인 유기농 시장을 위해 천천히 자라는 닭을 전문으로 취급 하는 더 작은 육종 회사들이 몇 곳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닭은 빨리 자라서 단 6주 만에 도축된다. 사실상 우리는 너무 커진 병아리를 먹는 셈이다. 심지어 뼈끝이 연골에서 뼈로 변하기도 전의 병아리 말이 다. 순계인 증조할머니 닭 한 마리가 3백 만 마리의 육계 후손을 볼 수 있고, 이들은 성체가 되지 못한다.
- 동물의 대사뿐 아니라 행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호르몬은 가축 닭의 행동에서 필수적인 한 측면에 기여했다. 바로 모성 본능의 완 전한 상실이다. 이는 야생에서라면 분명 생존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 다. 알을 낳은 뒤 알을 두고 가버리는 암탉은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로 전달할 확률이 낮다. 하지만 가축 닭에서는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알 낳기를 멈추고 알을 품는 암탉은 달걀 생산에 득이 될 리 없다. 야생의 붉은산닭은 1년에 달걀을 열 개도 낳지 못하는 반면, 오늘날의 가축화된 산란계는 3백 개를 낳을 수 있다. 알을 품는 본능이 어떤 식으로든 닭에게서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닭 농장의 농부들이 인공부 화 기술을 개발했을 때 비로소 가능해졌다. 최초의 달걀 부화기는 오래전,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닭의 모성 행동이 눈에 띄게 사라진 것과 관련이 있는 유전적 변화는 훨씬 더 최근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밀과 옥수수의 비탈립성 이삭 가지처럼 알 품는 본능의 상실도 야생에서는 성공적인 번식을 방해하지만, 가축화에서는득이 된다. 유전학자들은 이 행동 변화의 유전적 바탕을 확인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들은 모성 본능에 큰 차이를 보이는 두 품종의 닭에서 유전체를 서로 비교했다. 하나는 알 품는 행동을 상실한 산란용 순계로 잘 알려져 있는 화이트 레그혼White Leghorn 품종이고, 다른 하나는 알 품기를 좋아하는 실키silkie 품종(오골계)이다. 유전학자들은 두 품종의 유전체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두 부위를 찾아냈다. 하나는 5번 염색체에, 다른 하나는 8번 염색체에 있었다. 두 부위 모두, 이번에도 갑상샘 호르모 시스템과 관련이 있었다. 게다가 5번 염색체상의 부위는 TSH 수용체 유전자가 있는 곳이다. 이 유전자의 몇 가지 변화가 1천 년 전 닭의 계군들 사이로 퍼져나갔고, 지금은 산란용으로 육종된 닭과 육계로 육종된 닭 모두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TSH 수용체 유전자에는 더 최근에 일어난 변화도 있는 듯한데, 이는 화이트 레그혼과 실키 같은 현대 품종들에서 나타나는 달걀 생산과 모성 행동의 차이를 설명해준다. 결과적으로 닭의 갑상샘호르몬 시스템을 조작함으로써 한 번의 유전적 변화로 두 가지 표현형 변화를 일으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둔 셈이다. 이번에도 우리는 한 특정 형질에 대한 선택이 또 다른 형질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엔 하나의 유전자가 포동포동한 살집과 산란 행동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유전자, 몸, 행동에 일어난 비교적 최근의 변화들은 가축화가 실제로는 하나의 단독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임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유전자 편집 기술의 도래는, 교황 칙령의 힘을 빌려야 했던 10세기보다 훨씬 빠르게 유용한 변화가 도입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7. 쌀
- 벼의 작물화가 시작된 시점은 중요하다. 같은 시점에 아시아의 반대편 끝에서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자라는 야생 곡류 호밀, 보리, 귀리, 밀를 경작하기 시작했다. 1만 1천 년 전~8천 년 전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자라던 그런 곡류들은 주곡이 되었고, 조와 쌀이 극동지역에서 그랬듯이 야생 풀에서 작물로 변모했다.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절묘하다. 아시아의 정반대 쪽에사는 두 집단의 수렵채집인들이 동시에 야생 풀을 좋아하게 되고 그 풀에 점점 더 의존하다가 결국에는 그것을 작물로 경작하게 되었다. 인간 행동에 일어난 이런 동일한 변화들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 65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양쯔강 계곡에서 동시에 작동한 뭔가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뭔가'는 기후변화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지막 빙하기가 절정에 이른 춥고 건조했던 시기, 야생 벼는 동아시아 열대지방의 습한 레퓨지아에서만 자랐을 것이다. 그러다 약 1만 5천 년 전부터 기온이 올라가면서 대기 중에 증가하는 이산화탄소에 힘입어 야생 벼가 퍼져나간다. 빽빽하게 자라고 낟알이 촘촘하게 맺히는 야생 곡류는 아시아 전역의 수렵채집인들에게 든든하고 수확이 용이한 식량을 제공했다. 유리한 기후 조건 아래 자라고 있던 야생 벼와 조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매력적인 식량 후보였을지도 모른다. 아마 옥수수의 경우처럼, 작물화 과정에서 모든 개체군들이 갖게 되는 형질들을 이미 얼추 지니고 있던 식물 낟알이 더 크고 곁가지가 적은 식물은 이미 훌륭한 식량원처럼 보였으며 수확하기도 쉬웠으리라. 하지만 약 1만 2900년 전, 춥고 건조한 시기가 1천 년 이상 지속된 신드리아스기가 왔다. 야생 식량의 감소에 직면한 사람들은 필사적으 로 자원을 통제하려 했을 테고, 이미 의존하게 된 야생 풀을 경작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신드리아스기 직전에 인구가 증가해 있었기에, 기후가 악화하기 시작했을 때 자원 압박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서아시아의 밀과 동아시아의 쌀, 그리고 아마도 중앙아메리카의 옥수수까지, 모두 신드리아스기를 계기로 인류와 손을 잡고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동안 이어지는 동맹을 맺었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의존할 수 있는 자원인 곡류는 식생활에서 더 중요해졌고, 결국에는 주곡이 되었다. 경작은 그다음이었을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관과는 매우 다른 관점이다. 독창성과 창의력에 힘입은 승리의 전진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일. 어려운 시기에 처해 어쩔 수 없이 생활 방식을 바꾸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순응한 사람들, 아시아의 정반대쪽에서 동시에 곡류가 주곡이 되고 그런 다음 경작이 이루어진 상황도, 선택이 아니라 기후 악화가 가져온 필연으로 본다면 충분히 납득이 된다.
- 콜럼버스의 '발견의 항해’ 이후, 작물화된 벼는 대서양 교역의 일부
가 되어 구세계에서 신세계로 건너갔다. 오늘날 열대 국가에 거주하
는 라틴아메리카인들에게 쌀은 설탕 다음으로 중요한 단일 열량 공
급원이다. 쌀과 콩의 조합은 카리브해 지역의 요리에서 특히 상징적
이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만, 둘의 제휴는 비교적 최근에 시작되
었다. 두 재료를 섞은 요리는 겨우 몇 백 년 전의 발명품으로 세계화의 초기 요리'로 불렸다. 하지만 기본 개념인 풀의 씨와 콩을 섞는다는 생각은 농업이 시작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있다. 두 음식은 맛과 질감에서 서로를 보완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을 한다. 바로 서로의 결핍을 벌충하는 것이다. 둘의 결합은 인체가 필요로 하지만 만들 수는 없는 모든 아미노산 단백질의기본단위 - 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단백질 꾸러미를 창조한다.
8. 말
- 그건 다른 존재와의 아주 특별한 동반자 관계였다. 인간과 말은 수 백 년에 걸쳐 서로를 알아가고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알아내고, 신뢰를구축했다. 이 관계는 말의 타고난 성향, 그들의 본성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뭔가에 의존하는 듯도 하다. 즉, 그들도 개와 마찬가지로 종을 뛰어넘는 동반자 관계를 적극적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타고나기를 사교적인 생물이다. 우리가 가는 도중에, 또는 야영지에 멈출 때마다 조리타는 다른 말들에게 가까이 가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출발 준비를 할 때는 다른 말들을 가볍게 밀기도 했다. 머리로 그들의 옆구리와 어깨를 밀고 코를 비볐다. 다른 말들도 조리타에게 똑같이 했다. 우리는 말 몇 마리를 야영지에 묶어둔 채 떠났는 데, 산을 내려와 야영지로 돌아왔을 때 조리타는 그들을 보자마자 신 이 나 히이잉 하고 울었다. 그들도 똑같이 응답했다. 누가 봐도 서로를 다시 만나 기뻐하는 행동이었다.
- 소 치는 사람들은 야생말을 아직은 길들이지 않고 평소와 같이 사냥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앤서니David Anthony는 얼음장 같은 기후가 말을 길들이게 된 동인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소와 양의 경우, 눈 속에서 먹이를 파먹는 일에는 젬병이다. 눈 위에 얼음이 덮이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물을 얻기 위해 얼음을 깨지도 못한다. 하지만 말은 발굽을 이용해 이 모두를 한다. 말은 차가운 초원에 잘 적응된 생물이다. 앤서니에 따르면, 인류는 6200년 전~5800년 전 기후가 나빠졌을 때 소떼가 혹독한 겨울을 헤쳐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고 스텝의 말과科 동물을 잡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가능성으로, 말을 사냥하는 문화에서 자연스럽게 말을 길들이게 되었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동안 말을 사냥해왔고, 그래서 말을 잘 이해했던 사람들이 다른 야생말을 사냥하려는 목적으로 말을 잡아서 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 너무 의도적이고 너무 전략적인 설명 같다. 야생말의 등에 처음 올라탄 이들은 그동안 상상도 못했던 일, 바보 아니면 용감한 자만이 할 수 있었을 이 일을 해보라고 서로를 부추긴 10대들이었음이 틀림없다.
- 말을 탐으로써 일어난 진전은 말의 가축화만이 아니었다. 기마를 통해 인간은 다른 동물들을 훨씬 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한사람이 걸어서 다니고 개의 도움을 받을 때 2백 마리의 양을 기를 수 있다면, 말을 타고 개의 도움을 받는 경우엔 5백 마리를 통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훨씬 더 넓은 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영역 확장은 분명 목축인들 사이에 무력 충돌을 유발했을 것이고, 따라서 동맹을 맺거나 선물을 주는 것이 중요해졌을 것이다. 고고학 기록에 구리와 금 으로 만든 보석이 급증하는 것은 사람들이 전과 달리 지위를 추구하 고 부를 과시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랐다. 바로 이 시점에 마제석기인 전곤도 출현하기 시작하는데 그중 일부는 말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기마와 전투가 초기 단계부터 밀접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식 기병대는 약 3천년 전 철기시대에 와서야 출현하지만, 다른 부족의 동물을 훔치기 위한 마상 습격과 내전은 말을 타기 시작함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 유전자분석은 진정한 말의 가계도를 복원하고 그 연대를 밝히는 이을 가능하게 했다. 가축 말의 야생 조상들은 가축화되기 훨씬 전인 약 4만 5천 년 전, 프르제발스키 말의 조상들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계통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계통이 갈라진 뒤에도 어느 정도의 이종교배는 계속되었다. 상호 유전자 이동의 증거가 오늘날의 유전체에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종교배의 대부분이 일어난 시점은 오래 전인 약 2만년 전으로, 마지막 빙하기가 정점에 이르기 전이었다. 하지만 빙하기 이후에도 프르제발스키 말의 유전자가 가축 말의 조상들로 일부 유입 되었으며, 심지어는 가축화 이후까지도 유전자 이동이 계속되었다. 더 나중인 20세기 초반에는 거꾸로 현대 말에서 프르제발스키 말로 유전자가 이동한 증거가 존재하는데, 가축 말 유전자가 프르제발스키 말로 유입된 이 마지막 사건은 인간이 프르제발스키 말을 기르며 포획상태에서 교배시키기 시작한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두 종류의 말 집단이 실제로 교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둘은 별개의 종으로 간주될 만큼 형태적으로나 유전적으로나 뚜렷이 구분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염색체 개수도 다른데, 염색체 개수 차이는 흔히 이종교배를 가로막는 완벽한 장벽으로 간주된다. 가축 말은 예순네 개의 염색체(서른두 쌍)를 가지는 반면, 프르제발스키 말은 예순여섯 개(서른세 쌍)를 가진다. 포유류의 난자 또는 정자 가 만들어질 때 정자와 난자에는 몸의 다른 세포들에 있는 유전물질의 절반만 들어가게 되고, 수정 시 난자의 유전물질이 정자의 유전물질과 결합해 다시 완전한 한 벌을 만든다. 난자에서 온 각 염색체가 정자에서 온 짝과 쌍을 이루어야 수정란이 분열을 시작해 배아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 가축 말과 프르제발스키 말이 짝짓기하면, 수정란은 서른두 개짜리 염색체 한 벌과 서른세 개짜리 염색체 한 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식으로든 (심지어 유전학자들조차 깜짝 놀라는 데) 염색체들은 쌍을 이룬다. 쌍을 이루지 못하면 생식력을 갖춘 자손 이 태어날 수 없다. 그리고 현대 가축 말과 프르제발스키 말의 유전체에 남겨진 이종교배의 흔적들은 그 자손들이 생식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후대를 생산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말과 종들 사이에서 탄생한 잡종은 잘 알려져 있다. 버새는 수말과 암탕나귀 사이에서 탄생한 잡종이다. 노새는 반대로 암말과 수탕나귀 사이의 잡종이다. 버새와 노새는 대개 불임이지만, 이따금씩은 그들도 번식에 성공한다. 당나귀가 서른한 쌍의 염색체를 가지고 말이 서른두 쌍의 염색체를 가진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역시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말과 종의 유전체에는 훨씬 더 놀라운 사건의 증거가 들어 있다. 바로, 서른한 쌍의 염색체를 가진 소말리 당나귀와 스물세 쌍의 염색체를 가진 그레비얼룩말 사이에 이종교배와 유전자 이동이 일어난 일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생물학의 작동 방식과 관련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종의 경계에는 유전체학 이전에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구멍이 많은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염색체 개수의 차이조차 우리 생각과 달리 번식의 장벽이 되지 못하는 듯하다.
- 말 소유자들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 적어도 짐작은 하고 있었 을 말의 매혹적인 행동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과학 연구에 의해 이제 막 해명되기 시작했다. 증거들에 따르면 고양이와 개는 신체와 음성 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듯하다. 실제로 개는 어떤 것이 행복한 사람의 얼굴인지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들도 표정을 지을 뿐 아니라 다른 말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최근 한 연구에서는 말들에게 화난 표정, 찡그린 표정, 행복한 표정을 짓는 사람의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웃는 얼굴에 비해 화난 얼굴을 볼 때 말의 심박수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말들이 사람의 감정을 읽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능력을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오래전부터 다른 말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해석할 수 있었던 말들이 가축화된 뒤 인간에 대해서도 똑같이 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말이 인간과 지내며 학습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예컨대 분노를 나타내는 다른 행동 단서들을 화난 사람의 얼굴과 연결 짓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 능력은 그들의 야생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몸짓에서 감정을 유추하는 타고난 성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신중하게 설계된 또 다른 최신 연구에서는, 말이 우리 행동을 해석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행동에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말의 몇몇 몸짓들은 실제로 의도를 가진 의사소통으로 보인다. 실험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먹이가 담겨 있지만 가닿을 수 없는 양동이를 향해 목을 쭉 늘이는 말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들은 인간 실험자를 쳐다본 뒤 양동이를 가리켰고', 그런 다음 다시 실험자를 쳐다보았다. 실험자가 멀리 가버리면 그런 행동을 멈추었으며, 실험자가 가까이 다가오면 시선을 더 자주 교차시켰다. 또한 말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흔드는 몸짓을 이용해 주의를 끌었다. 이는 말들이 의사소통을 원할 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들의 신호를 수신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말들이 가축화되는 단 몇 천 년 사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진화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것이 타고난 능력일 가능성도 낮다. 그보다 말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다른 말들과 그리고 지금은 인간과도 상호작용 할 때 이런 종류의 행동을 학습할 수 있는 유전적 소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즉, 그 행동 자체는 아닐지언정, 행동을 발달시킬 수 있는 성향은 타고난다는 얘기다. 말이 개처럼 사교적인 본성을 가진 동물이라는 것은 말이 또 다른 사교적인 동물과 협력하기에 적합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9. 사과
-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는 작은 열매를 맺는 나무들의 한 계통이 곰이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과가 열리는 새로운 종으로 바뀐다. 작은 사과는 매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소화관을 그대로 통과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나올 경우 성공적으로 발아할 확률이 낮다. 사과안에 박힌 사과 씨는 발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불리하게 생겨먹었나 싶겠지만, 새로운 사과나무가 부모 나무 밑에서 싹을 틔워 부모와 경쟁하는 것을 막는 방편이다. 큰 사과의 경우 씹어 먹을 수 밖에 없으므로 씨가 노출된다. 발아로 가는 필수적인 단계다. 이빨에 깨물려 떨어져 나온 사과 씨는 장을 그대로 통과하고, 그것이 항문으로 나오면 부모에게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장소에서 새로운 나무가 될 확률이 높다. 곰의 항문에서 나온 사과 씨는, 말하자면 비옥한 두엄더미에 실려 숲 바닥에 떨어지는 셈이다. 하지만 곰 배설물이라는 비료가 있다고 감안해도, 숲 바닥은 싹을 틔우는 데 이상적인 환경이 아니다. 다행히 숲속에는 사과 씨를 파묻어줄 다른 대형 포유류가 존재한다. 멧돼지는 흙을 헤집고 휘젓는 위대한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씨 가 성공적으로 발아할 확률을 높인다. 하지만, 갈색곰(그리고 멧돼지)이 중앙아시아의 숲에 사과 씨를 퍼뜨리는 놀라운 일을 해냈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해도, 이 과일이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마침내 전 세계로 흩어지도록 촉진한 것은 인간과 그들의 말이었다.
- 밀과 보리는 서쪽에서, 조는 동쪽에서 중앙아시아로 왔다. 이제는 중앙아시아가 나머지 세계에 선물을 줄 차례였다. 야생 사과나무 숲을 관통하는 원시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하던 사람들과 그들의 말은, 사과를 안장주머니에 넣고 다니거나 먹으며 이를 고향 밖으로 널리 퍼뜨렸다. 따지고 보면 사과나무의 열매는 씨를 퍼뜨리는 수단으로 진화한 셈이다. 사과가 맛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니, 자신의 씨를 널리 퍼뜨리게 하려는 방책이었던 것이다. 인간과 말은 곰만큼이나 사과를 좋아한다. 그리고 말은 곰과 멧돼지의 일을 둘 다 할 수 있다. 사과의 과육을 씨에서 떼어내고 그 씨를 퇴비 더미에 파묻는 일뿐아니라 발굽으로 땅 속에 씨를 박아 넣는 것까지. 이렇게 해서 사과는 자유롭게 꽃가루받이가 되고 자연적으로 씨뿌리기가 이루어지는 묘목으로서 널리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본질적으로 야생식물이었지만, 두 발로 걷고 네발로 걷는 친구들이 그들을 도왔다.
- 접붙이기는 우리가 한 그루 '부모'에게서 수백 그루의 사과를
복제할 수 있음을 뜻한다(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부모가 아니라 일란성쌍둥
이다). 접붙이기에는 다른 이점들도 있다. 만일 씨를 심는다면, 그것이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수년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미성숙한 대목에 성숙한 나무의 접가지를 붙이면 금방 열매가 맺히기 시작할 것이다. 미성숙한 단계를 건너뛰는 것이다. 언제든 새로운 재배종을 대목에 붙일 수 있다. 대목을 신중하게 고르면 나무의 크기에도 영향을 미쳐, 원래는 거대한 나무인 재배종에서 난쟁이나무를 만들 수도 있다. 어떤 대목은 재배하고자 하는 품종에는 없는 유리한 특징, 예컨대 해충 저항성이나 가뭄 저항성을 가져다준다. 게다가 접붙이기는 병든 나무를 살리는 방법으로도 이용된다.
-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근동 지역에서 유럽 전역으로 달콤하고 통통한 재배종 사과가 - 대체로는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아 - 확산된 것을 사과의 최초의 대규모 확산으로 볼 수 있다. 로마제국의 몰락과 함께 과수원은 버려지게 되지만, 서유럽의 경우 사과는 수도원 정원에서 살아남아 12세기에 시토 수도회의 확장과 함께 다시 한번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98년 웨일스의 바드시섬에서, 붉은색 황금사과가 열리는 사과나무 한 그루(아마 그곳 수도원 과수원의 마지막 생존자였을 것이다)가 자라고 있는 것이 발견되어 지금은 다시 재배되고 있다. 한편 동유럽에서는 사과가 8세기 비잔틴제국의 몰락을 딛고 살아남아 이슬람 세계에서 신중하게 관리 재배되고 있었다. 그러다 16~18세기, 유럽 식민주의 국가들이 남북 아메리카와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태즈메이니아에서 재배종 사과를 심기 시작하면서 사과의 두 번째 큰 확산이 일어났다. 1835년 칠레에 상륙한 다윈은 사과 과수원으로 둘러싸인 발디비아 항구를 발견했다. 태즈메이 니아는 훗날 '사과 섬'으로 알려지게 되니, 말하자면 아발론의 대척점 인 셈이다. 사과의 두 번째 '디아스포라'는 온대 전역의 다양한 기후에 적합한 엄청나게 다양한 품종의 사과를 낳았다. 북아메리카에서 사과가 성공한 것은 '야생으로의 회귀'가 수반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야생으로 돌아 간 사과는 씨에서 묘목이 자라났고, 그런 다음에 혹독한 겨울을 나야 하는 새로운 서식지에서 발육이 어려운 개체들이 자연선택에 의해 제거되었다. 자연선택의 체질을 통해 새로운 변종들이 등장한 한편, 재배 품종들은 아메리카 토종 꽃사과들과의 교잡으로 현지의 유용한 적응을 가져왔다. 사과는 새로운 서식지에 맞게 자신을 개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과가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 묘목에 대한 자연선택이 다시 한 번 이루어진 결과, 우리가 아는 현대 재배 품종들이 19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 사과의 다양성은 현대 재배종에서는 비록 억제되어 있지만, 다른종에 비하면 여전히 인상적인 수준이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식물학 탐사 보고서들은 바빌로프가 1929년 알마아타 주변 과수원들을 방문했을 때 내린 결론이 사실임을 확인해주는 듯 보였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먹는 재배품종 사과의 이 엄청난 다양성이 모두 카자흐스탄의 고대 과수원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10. 인류
- 수만 년 동안 호모 사피엔스는 대체로 아프리카 대륙에 한정되어 살았지만, 그런 다음 그 집단은 범위를 확장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최근에 이루어진 매우 포괄적인 유전체 전체 조사는 현생인류가10만 년 전에서 5만 년 전 사이에 일어난 한차례의 대이주로 아프리카를 빠져나와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로 퍼져나갔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아프리카를 떠난 뒤 개척자들은 갈라졌다. 하나의 흐름은 동쪽으로 향해 인도양 해안을 따라 퍼져나가 결국 동남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에 도달했다. 또 하나의 흐름은 북쪽과 서쪽으로 향해 서아시아와 유럽으로 갔다. 동쪽으로 간 이주자들은 아마 훨씬 더 이전에 일어난 이주 때 아프리카에서 나와 오스트레일리아와 파푸아뉴기니까지 도달한 현생인류의 자손들과 만났을지도 모른다. 현재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화석 기록이 너무 적어서, 초기에 동쪽으로의 이주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된 유럽 토착민인 네안데르탈인과의 교잡 시점은 5만 년 전~6만 5천 년 전으로 추정된다. 현생인류가 아프리카 밖으로 확산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이다. 비아프리카인들은 평균 2퍼센트 정도의 네안데르탈인 DNA를 가지고 있는 반면, 아프리카 계통 사람들의 유전체에는 네안데르탈인 DNA가 거의, 혹은 아예 없다. DNA 검사 결과, 나에게는 2.7퍼센트의 네안데르탈인 DNA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나는 '순혈'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다. (아무도 순혈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다. 실제로 종과 아종의 '순혈성'이라는 개념은 환상이요, 현대 유전학이 마침내 잠재운 19세기의 유물이다.) 동아시아인은 대체로 서아시아인이나 유럽인보다 약간 더 많은 네안데르탈인 DNA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추측해볼 수 있다.
첫째는 동아시아인의 조상들이 서유럽인 집단에서 갈라져 나온 뒤 네안데르탈인과 다른 집단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교배했을 가능성이다.
둘째, 우리는 네안데르탈인 DNA가 현생인류 유전체에 처음 들어온 뒤로 약한 자연선택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서쪽 집단과 동쪽 집단 모두의 조상들은 애초에 네안데르탈인에게서 이입된 같은 양의 DNA를 가지고 있었고, 그런 다음 자연선택이 서유라시아인 유전체에서 더 많은 양을 제거했을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서쪽 집단에 네안데르탈인 DNA가 적은 것은 네안데르탈인 DNA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북아프리카 이주 집단들과 섞임으로써 일어난 희석 효과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현생인류 조상들과 엮인 것은 네안데르탈인만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 태평양 남서쪽 멜라네시아의 섬들에 사는 현대인의 유전체에서 또 다른 구인류 집단과의 교잡 흔적이 발견된다. 멜라네시아인 유전체 DNA 중 3~6퍼센트는 또 다른 유형의 조상에게서 온 것이다. 그 조상은 시베리아의 데니소바 동굴Denisova Coin에서 나온 손가락 뼈 한 점과 치아 두 점으로만 알려져 있는 종이다. 화석 증거가 너무 적어서 우리는 이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뼈와 치아에서 추출한 고대 DNA를 통해 그들이 현생인류도, 네안데르탈인도 아니라는 점만은 알 수 있다. 이 사람들에게 그 들만의 종명을 부여하기에는 화석 증거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현재로 서는 그들은 그냥 '데니소바인' 이라고 부른다. 현생인류와 데니소바인 사이의 교잡은 아마 오스트레일리아와 태평양의 섬들로의 이주가 있기 전에, 아시아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한편 아프리카 내 다른 미확인 구인류 종과의 교배를 암시하는 증거도 존재한다. 오늘날의 아프리카 유전체에는 다른 고대 인류들에 대한 기억이 새겨져 있다. 비록 그 유전자 유령들과 연결 지을 만한 화석 증 거는 아직 없지만 말이다.
- 흰 피부가 북쪽 지방의 햇빛 부족에 대한 적응으로 진화했다는 비타민 D 가설은 설득력 있게 들린다. 오늘날 영국과 북아메리카에서 피부가 검은 사람들이 피부가 흰 사람들보다 비타민 D 결핍에 더 잘 걸린다는 관찰 사례는 분명 이 가설을 뒷받침해준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을 대상으로 측정한 비타민 D 수치는 가설대로 착착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비타민 D 수치와 햇빛 노출을 추적한 연구들은 예상치 못한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았다. 예측한 대로 햇빛에 대한 노출이 증가할수록 (어느 정도까지는) 비타민 D 수치가 증가했다. 옷으로 몸을 덮으면 혈중 비타민 농도가 낮아지는 것도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얇게 바른 자외선 차단제가 일광 화상은 막아줘도 비타민 D 생산을 줄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은 검은 피부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뜻밖에도, 같은 양의 햇빛에 노출되었을 때 비타민 D 생산이 촉진되는 정도는 피부가 검은 사람들과 흰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이 연구는 분명 피부가 검은 사람들도 피부가 흰 사람들만큼이나 효과적으로 비타민 D를 만들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새로운 결과는 언뜻 인간의 피부색 진화에 대한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 인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설명이 필요한 몇 가지 관찰 사례가 아직 남아 있다. 토착민의 피부색은 실제로 북쪽에서 더 하얗고, 북쪽 나라들에서는 예상대로 피부가 검은 사람들이 비타민 D 결핍을 더 많이 겪는 경향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관찰 사례는 '진화적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을 초래한다. 특정 돌연변이가 이점을 줄 때만 진화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은 거의 중립적인 돌연변이가 '유전적 부동'이라는 과정을 통해 개체군 내로 퍼지면서 진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것은 사실상 무작위 과정으로, '우연'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의 조상들이 북쪽으로 이주할 때 일어난 일을 짐작해 보면 대략 이렇지 않았을까. 열대에서 일광 화상과 피부암을 막아주므로 자연선택 된 검은 피부가 더 이상 그렇게 강력한 선택을 받지 않게 되었을 것이고, 그런 다음 더 흰 피부를 만드는 돌연변이가 우연히 발생했을 때 제거되지 않고 유전적 부동을 통해 퍼져나간 것이다. 실제로 적도에서부터 북쪽 위도로 갈수록 피부색이 일정한 비율로 밝아지는 것은 아니며, 밝은 피부색은 - 아마 훨씬 나중에 유럽과 아시아의 극북 지역 집단들에서만 진화했다. 유럽과 아시아의 나머지 지역은 위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하다.
- 약 1만 1천 년 전 서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농업이 거의 동시에 출현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을 것이다. 세계적인 기후변화가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사람들과 초원에 영향을 미쳤다. 1만 5천 년전부터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하면서 식물 생산을 촉진했다. 야생 곡식이 저절로 밭을 이루어 인간은 줍기만 하면 되었다. 그 런 다음 1만 2900년 전에서 1만 1700년 전까지 이어진 신드리아스기 동안 기후가 악화되었다. 사냥꾼이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이 많아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쉽게 딸 수 있는 열매와 딸기는 얼마 되지 않았다. 수렵채집인은 예비 자원에 기댔을 것이다. 채집하기 어렵지만 열량이 풍부한 풀의 씨앗들이 그중 하나였다. 서쪽에서는 귀리, 보리, 호밀, 밀을 먹었고, 동쪽에서는 기장, 조, 쌀을 먹었다. 나투프인들이 사용한 낫과 돌절구처럼 수확의 효율을 높이고 딱딱한 씨를 가루로 빻는 도구는 작물화와 농업 이전에 생겼다. 기후가 좋아지기 시작할 무렵에는, 곡물에 대한 의존이 이미 원시 농업으로 발전해 있었다. 이러한 초기 작물화 중심의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메소포타미아의 광대한 '농업의 요람'은 서유라시아 신석기의 시조 작물들을 제공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의 비옥한 땅에서 최초의 작물인 콩, 렌틸콩, 비터베치, 아마, 보리, 엠머밀, 일립계밀이 나왔다. 황허강과 양쯔강 주변의 땅에서는 조, 쌀, 대두가 나왔다. 하지만 그 밖에도 전 세계의 많은 다른 장소에서 작물화가 시작되었다. 신드리아스기 말엽, 아프리카의 남쪽 절반에 살던 사람들이 북쪽으로 이주해 비옥한 녹색 사하라를 점유했다. 그들은 사냥한 동물들과 더불어 과일, 덩이줄기, 곡물을 먹고 사는 수렵채집인들이었다.
- 1만 2천 년 전 이래로 맷돌을 사용해왔던 그들은, 곧이어 토종 수수와 진주조를 경작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하라의 농업은 약5500년 전 계절풍이 남쪽으로 이동해 비옥했던 땅을 사막으로 바꾸었을 때 전멸했다. 사탕수수는 약 9천 년 전 뉴기니에서 작물화되었고, 테오신트는 동시대에 메소아메리카에서 옥수수로 작물화되었다. 찾으면 찾을수록 더 많은 작물화 중심이 나타나는 듯하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매혹적이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신석기의 다른 요들로부터 시선을 빼앗는다. 바빌로프는 일곱 개의 작물화 중심을 찾아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전 세계에 10여 곳의 작물화 중심이 있다고 상정했다. 더 최근 연구들은 스물네 곳이라고 주장한다. 종 길들이기는 서로 다른 많은 장소에서 여러 차례 일어났다. 그런 장소 가운데 상당수가 바빌로프가 지적했듯이 산악 지대였다. 산악 지대는 다양성이 풍부한 경향이 있는데, 고도에 따라 물리적 조건이 달라지는 탓이다. 하지만 작물과 가축이 되기 위해서는 타이밍이 맞아야 했을 뿐 아니라 인간과 장단이 맞아야 했다. 인간이 생활 방식을 바꾸려는 시점에 인간의 개입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종. 그것이야말로 이 결정적 결속이 맺어지게 만든 승리의 조합이었다. 사실 의식적인 의사 결정이 모종의 역할을 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 작물화는 많은 경우, 무의식적인 과정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종들이 서로 만나 우연히 부딪치고 가까워지면서 진화적 역사가 한데 얽히게 되었다. 우리는 인류를 지배자로 여기고 다른 종들을 자발적인 하인, 나아가 노예로 여기는 데 너무 익숙하다. 하지만 우리가 동식물과 이런 협약을 맺은 방식은 다양하고도 미묘했고, 공생과 공진화 상태로 유기적으로 진화했다. 이 동반자 관계가 구축되기 시작할 때 의도가 개입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인류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동물을 길들이는 세 가지 경로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어떤 사건' 이라기보다는 길고 오랜 진화적 과정이었다.
한 경로는 동물이 인간을 선택해 우리에게서 자원을 빌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며 우리와 공진화하기 시작했고, 지난 몇 백 년 사이 창조된 개 품종들에서와 같은 인간 주도적인 선택이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길들여지게 되었다. 개와 닭이 이런식으로 우리의 동맹이 되었다. 두 번째 경로는 먹잇감 경로다. 이 경우에도 초반에는 동물들을 길들이려는 그들을 자원으로서 관리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양, 염소, 소 같은 중대형 초식동물이 이 경로를 따라 처음에는 먹잇감으로 사냥되고 이후에는 사냥감으로 관리되다가, 마침내 가축으로 길러졌을 것이다. 마지막은 가장 의도적인 경로로, 인간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동물을 잡아 길들인 경우다. 고기 외에도 뭔가 유용한 쓰임새가 있어 보인 가축들이 대개 이런 경로를 따랐다. 승마용 말로 길들여진 말이 대표적 사례다.
- 차탈회위크에는 그보다 앞선 수렵채집 집단들에 비해 생리적 스트레스와 건강 문제가 증가한 정황이 나타난다. 곡물을 중심으로 하는 식생활은 풍부한 열량을 공급하지만, 몸이 필요로 하는 모든 필수아미노산과 비타민까지 제공할 수는 없다. 다른 유적들처럼 성장률이 감소한 증거가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뼈 감염을 포함한 낮은 수준의 생리적 스트레스뿐 아니라, 녹말이 풍부한 식생활과 관련이 있는 듯한 높은 충치 발생률을 짐작하게 하는 충분한 증거가 존재한다.
- 오늘날의 산업화된 농업에서는 농업의 중노동을 인간 대신 기계가 짊어진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수렵채집인 조상들의 예비 식량이었던 곡류가 주식의 자리를 차지한 식량 생산 시스템에 속박되었다. 차탈회위크에 살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세계화된 식품 공급 덕분에 중요한 비타민의 다른 공급원들을 이용할 수 있지만(게다가 지금은 유전자 편집을 통해 곡물에 비타민을 집어넣을 수도 있다), 우리의 치아는 여전히 신석기 혁명의 영향으로 고통 받고 있다. 가장 해로운 악당 중 하나는 옥수수에서 파생된 액상 과당이다. 액상 과당은 신석기 유산의 최선과 최악을 담고 있는 식품이 아닐까 싶다. 즉, 환상적인 에너지 공급원임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그 위험을 이 제 막 알아차리기 시작한, 건강을 위협하는 교활한 적이기도 하다. 옥 수수 그 자체는 인류 역사에 막대한 역할을 했다. 잉카와 아스테카 문 명을 건설하는 연료였고, 콜럼버스가(그리고 아마도 캐벗이) 신세계에 도 착한 뒤로는 세계로 진출했다. 무게로만 따지자면, 오늘날 우리는 다 른 어떤 곡물보다 옥수수를 많이 생산한다. 옥수수는 우리가 먹는 음식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인간이 먹는 양의 네 배를 가축을 먹이기 위해 재배하고, 생물 연료를 만들기 위해 또다시 그만큼을 재배한다.
- 우리가 길들인 동물들과 우리 사이에는 또 하나의 신기한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 우리 역시 동물이 길들여졌을 때 등장한 형질들 중 일부를 드러내보이는 것 같다. 개처럼, 그리고 벨라예프가 길들인 은여우처럼, 우리는 선조들보다 작은 턱과 치아, 납작한 얼굴을 지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남성의 공격성이 줄었다. 이 일군의 연관된 형질들을 가축화 증후군domestication syndrome'이라고 부른다.
- 현생인류의 초기 화석들을 보면 대체로 최근 화석에 비해 눈썹 위 융기부가 훨씬 발달한 모습이다. 이러한 눈썹 위 융기부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 실제로 언제였는지, 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을까? 미국의 한 진화인류학 연구 팀이 이를 알아내고자 두개골 표본들 을 측정하고 비교했다. 표본의 일부는 20만 년 전~9만 년 전에, 일부는 8만 년 전 이후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며, 그 외의 많은 표본들은 지난 1만 년 내에 드는 최근 표본들이었다. 연구 팀은 9만 년 전보다 오래된 표본들이 이후 표본들에 비해 두개골의 눈썹 위 융기부가 더 발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얼굴의 길이도 오래된 표본에서 더 길었다. 얼 굴 모양의 여성화'는 홀로세까지 계속되었다. 테스토스테론 수치의 변화가 얼굴 모양의 이런 변화를 매개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양성 모두에서 나타나는 더 가냘프고 여성적인 두개골은 인간집단이 커짐에 따라 사회적 관용이 자연선택 되면서 생긴 부산물일 수 있다. 그런 선택이 어떤 식으로 일어났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유전 학자 스티브 존스의 기발한 표현처럼, 진화는 “두 번의 시험을 치르는" 셈이다. 단순히 살아남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번식에도 성공해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해야 한다. 만일 사회적 추방자 신세라면, 두 번째 시험에서 합격하기는커녕 시험을 치르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다. 공격성이 적은 남성들이 번식에 성공할 확률이 더 높다면, 그 형질이 집단 내로 빠르게 퍼질 것이다. 인간 사회가 진화함에 따라,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더 조밀하게 살게 되고 나아가 생존을 위해 광범위한 관계망에 의존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의도하지 않게 우리 자신을 길들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