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경제사

역사 2020. 7. 22. 08:18

- "식물은 흙과 물과 돌과 바람과 빛으로 스스로를 만들고, 나아가 흙을 모든 동물이 생명을 의존하는 음식으로 변형시킨다. 식물은 이후 자신을 보호하고 친구를 피기 위해서 색깔과 맛과 향을 가졌다. 우리가 채소와 과일과 곡식과 향신료를 먹는 것은 바로 우리 존재를 가능케 만든 음식, 우리 인생 앞 에 감각과 쾌락의 만화경 세상을 열어젖힌 그 음식 들을 먹는 것이다.” (해럴드 맥기 Harold McGee)
- 애덤 스미스는 중국을 한심하게 보았다. “중국은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던 것 같다. 그들이 법률과 제도적 본질에 어울리는 부를 갖춘 것은 아마 오래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법률과 제도 때문에 이러한 부는 가능한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반면 유럽은 지중해를 끼고 있어서 해운으로 국가 간 교류를 해 왔다. 기후와 토양을 가리는 밀의 속성 때문에 유럽의 먹거리는 동양처럼 풍족하지 않았다. 특히 단단한 밀의 씨앗을 고운 가루로 만들기까지는 상당한 기술 발전이 필요했다. 완벽한 제 분은 시계 공업이 발달한 스위스인이 증기기관을 이용하기 시작한 1800년대에나 가능했다.
- 동양의 곡창지대에 견주어 한참 북쪽에 있는 유럽은 편서풍 의 영향으로 연중 비가 내리는 서안해양성기후를 보인다. 이런 기후에서는 풀이 잘 자라므로 유럽은 목축으로 곡식 부족을 충 당했다. 그러나 밀은 단위면적당 생산력이 쌀에 견주어 낮기 에 강력한 왕권 국가를 설립하기 어려웠으며 백성들의 국가 개 념도 약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백년전쟁은 프랑스에 있는 영국 귀족의 땅 때문에 시작된 것인데, 프랑스 백성은 누가 자 기가 사는 땅을 다스리는지에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 농노였기 때문이다.
- 수천 년 동안 동양의 국가들은 너무 중앙집권적이고 강력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역사의 흐름이 멈추어 버렸다. (마르크스)
- 비가 내리지 않아도 잘 자라는 밀과 보리가 주식인 유럽과 중동에 견주어 동양은 우기와 장마 때 내리는 비로 한 해 농사가 좌우된다. 동양과 서양이 신 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뭇 달랐다. 동양의 지배층은 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자신에게 투사되도록 많은 장치를 고안했다. 계급이 처음 등장한 청동기시대에 통치자와 제사장이 일치한 것도 이런 이유다. 왕은 청동검과 청동거울, 황금 장신구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피지배 층을 세뇌했다. 이들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농사에는 물이 필요하므로 모든 문명은 강 주변에서 시작되었다. 관개는 지금도 많은 예산이 들어가는 대규모 사업이다. 인간의 노동에 의존하던 때 관개 사업은 강력한 왕권에서 비롯되었다. 곡식농사는 채집이나 수렵과 달리 강제 혹은 착취가 동원되었다. 사유재산과 노예제도도 여기서 나온다. 고대의 왕은 여러 씨족공동체를 무력으로 통합한 뒤 이들을 노예로 부려, 원가가 거의 들지 않는 많은 양의 곡식을 생산했다. 이렇게 축적한 자본은 피라미드 건설 같은 일에 퍼부어졌다. 황허강과 양쯔강 사이에 있는 중국은 놀라운 자본축적에 성 공했다. 황허강 위로는 밀을, 아래에서는 쌀을 재배했으며, 쟁기 · 시비법 · 이앙법 등 첨단 기술을 재빠르게 도입했다. 7세기 초반 건설한 중국의 대운하는 유럽보다 무려 1,0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진시황 이후 중국 황제들이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 로, 그리고 자신을 '왕 중의 왕'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벼농사의 높은 생산력 덕분이었다.
- 20세기 이전까지 질소를 농작물에 공급하는 방법은 뿌리혹박테리아로 질소를 공급받는 콩과 식물을 길러서 썩혀 퇴비로 주는 것과 번개가 치는 것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번개는 삼중결합으로 단단히 밀착되어 있는 공기 중의 질소 분자를 질소원자로 분리해 질소화합물을 생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질소비료가 나오기 전부터 질소를 공급받을 수 있었던 쌀은 천혜의 작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동양의 농부는 씨앗을 파종해 묘판에서 모를 키우는 이앙법을 도입했다. 이앙법은 풀을 뽑는 데 들어가는 노동력의 80퍼센트를 절감해 수확을 2배로 늘려주는 혁신적인 기술이었 다. 이앙법은 당나라 때 고안되어 송나라 때 정착되었다. 게다. 가 중국 남부의 아열대몬순기후에서는 1년에 2번 벼를 재배할 수 있다. 1,000년 전 중국에서는 이런 농업혁명이 차근차근 진 행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서양은 1200년경 시비법이 개발되기 전까지 휴경 지로 지력을 살리는 방법이 고작이었다. 쌀의 우월한 생산력 때문에 동양 국가들은 안정적인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로마가 지주들의 토지 독점과 토지 황폐화 때 문에 멸망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쌀은 밀이나 보리에 견주어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다. 쌀은 1헥타르당 생산량이 밀(820킬로그램)에 견주어 1.7배나 많 은 1,440킬로그램이다. 옥수수의 생산량인 860킬로그램보다 도 많다. 인류가 보리와 함께 가장 먼저 재배한 것으로 알려진 수수의 생산량(1헥타르당 400킬로그램)에 견주면 무려 3.6배나 차이가 난다. 쌀을 키우는 민족은 빠르게 고대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 한반도의 쌀 생산력은 아열대몬순기후부터 냉대기후대에 퍼져 있는 중국과 비교하면 정말 작은 규모다. 통계청 국제통계연감 2017년 자료를 보면, 중국의 쌀 생산량은 전 세계 쌀 생산량의 28.5퍼센트를 차지했다. 우리나라의 생산량은 0.8퍼센트로, 무려 35.6배 차이가 난다. 이런 낮은 생산량 때문에 우리 조상은 쌀 가운데 찰기가 있는 단립형 자포니카japonica를 먹은 것으로 보인다. 쌀의 전분은 퍼석한 느낌을 주는 아밀로스amylose와 찰기가 많은 아밀로펙틴 amylopectin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밀로스가 많은 쌀이 장립형 인디카(일명 안남미)다. 떡을 만드는 찹쌀은 아밀로스가 아예 없다. 아밀로스를 만드는 유전자가 우성이다. 3대 1로 인디카 쌀이 많다는 뜻이다. 우리 조상은 아밀로스가 없는 열성유 전자 쌀을 고른 것이다. 우리 조상이 찰기 있는 쌀을 선택한 이유는 밥이 주는 포만감 때문이다. 자포니카와 인디카 2가지 쌀을 모두 재배해온 중국인들이 이름도 알기 힘든 수많은 요리와 함께 인디카 쌀을 먹는 것은 그만큼 먹을 것이 풍족하다는 뜻이다. 향신료로 만드는 인도의 카레나 볶음 요리가 많은 동남아시아 요리에는 인디카 쌀이 잘 어울린다. 반면 우리나라와 일본의 식단이 유독 밥 중심인 것은 낮은 쌀 생산량을 고려한 조상의 선택으로 보아야 한다.
- 역사는 우리가 죽음을 맞는 전쟁터는 기념하면서, 번영의 터전인 밀밭은 비웃는다. 역사는 왕의 서자 이름은 줄줄이 꿰고 있지만 밀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못한다. 인간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이다. (장 앙리 파브르)
- 역사를 움직이는 결정적인 열쇠는 신이나 '보이지 않는 손'같은 형이상학적 힘, 위대한 지도자의 영도력이 아니라 개인의 사유재산에 대한 욕망이었고 사회 시스템이 이런 욕망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였다. 서양은 동양보다 훨씬 빠른 중세 때 이미 이런 욕망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반면 동양의 지배층은 이 욕망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일부 이슬람 세력과 북한 등은 지금도 이를 인정하길 꺼리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신념이나 영도력은 초기 확산 속도는 빠르지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지속력이 떨어진다. 진秦나라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뒤 불과 15년 만 에 망했다. 스페인의 선교사들은 모든 인간을 하느님이 창조했 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잊고 노예무역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반면 자기 땅에 대한 농민의 집착과 경제활동에 대한 상공인의 자유의지는 꾸준한 방향성으로 역사를 움직였다. 농민들은 늘 배가 고팠던 까닭이다. 개인의 생각을 만드는 기초는 먹거리다. 우리가 황혼 녘 밥짓는 냄새를 맡으면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하고 뭉클한 기운을 느끼는 것은 우리 민족이 1만 년 가까이 한반도에서 쌀을 먹으면서 삶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곡식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한다. 밀도 마찬가지다. 호메로스Homeros는 『오디세이아Odysseia』 에서 밀과 보리를 '인간의 골수'에 비유하기도 했다.
- 배고픈 유럽인의 살길은 땅을 떠나 바다로 나가는 것이었 다. 물고기를 잡거나 무역을 해야 했다. 이렇게 살길을 찾은 대표적인 나라가 고대 그리스다. 그리스는 빙하가 깎아놓은 노르웨이와 마찬가지로 바위가 많다. 게다가 석회암이 많아서 흙이 기름지지 않다. 그리스인의 주식은 보리였다. 보리에는 탄성을 만드는 단백질인 글루텐이 없어 빵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죽 으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인에게는 바다밖에 없었다. 뱃사람은 농사짓는 사람 에 견주어 거칠 수밖에 없다. 땅의 가혹함은 굶주림이지만 바 다의 가혹함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들은 살기 위해 거칠었고 모든 것에 회의적이었으며 셈에 밝았다. 보리죽을 먹던 그리스 인에게 새의 얼굴을 한 이집트의 신과 종교는 우스꽝스러웠겠지만, 그들이 만드는 기기묘묘한 모양의 빵은 기적처럼 보였을 것임.
- 기원전 6세기 솔론Solon의 개혁으로 평 민의 참정권이 보장되었으며, 이후 모든 시민이 참석하는 직접 민주주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시민들이 재판에 참석하는 배심원 제도도 이때 도입되었다. 하지만 로마는 여기서 더 나아갔다. 농사꾼들로 이루어진 평민회의 대표에게 최고 권력 자리인 호민관을 내주었다. 로마 가 이 같은 혁신을 채택한 것은 귀족과 평민의 화합으로 번영 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로마가 번영하려면 빵이 필요했고 이 빵은 이탈리아의 밀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들은 지중해 무역을 로마보다 앞서 개척한 이웃 나라 그리스와 북아프리카 페니키아와 맞서야 했다.
- 밀 외에 보리와 귀리도 있지만 이미 빵 맛을 알게 된 로마인은 보리를 가축이나 노예가 먹는 음식쯤으로 여겼다. 검투사를 로마에서는 호르데아리 hordearii라고 불렀는데 이는 ‘보리를 먹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기록에 따르면 검투사는 보리죽에 고수를 띄워서 먹었다. 로마에서는 문제가 있는 군인과 관리에게는 밀 대신 보리를 급여로 지급하기도 했다. 이런 전통은 근대까지 유럽에 남아 있었다. 로마는 지중해의 밀 생산 지대를 차지해야 했고 그러려면 다른 나라와 경쟁이 불가피했다. 살아남으려고 로마식 정치 혁신을 선택한 것이다. 로마의 선택은 옳았다. 로마는 주변 나라를 차례차례 격파하고 100여 년이 넘는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에 승리를 거두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다. 로마가 얼마나 카르타고에 이를 갈았는지는 카르타고를 정복 이후 한 짓을 보면 알 수 있다. 로마는 카르타고 남자를 모두 학살하고 카르타고의 곡창지대에 소금을 뿌려 영원히 밀을 키우지 못하도록 했다. 그만큼 밀은 로마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이제 북아프리카와 이스파니아의 곡창지대도 로마의 것이었다. 로마는 로마 시민을 먹여 살릴 빵 창고인 이집트마저 정복했다. 그러고는 이집트의 화학책을 모두 불살랐다. 로마인이 보기에는 마법 같던 이집트 빵 기술을 독점하려는 생각이었다. 로마는 드디어 서양 세계의 빵을 독점했다.
- 유럽에서 경쟁의 주체는 귀족이나 왕족처럼 권력과 토지를 독점한 자가 아니라 상인과 장인이었다. 12세기 유럽은 낮은 농업생산력을 무역과 기술 혁신으로 메워나가고 있었다. 유럽의 상인과 장인은 동업조합인 길드를 만들어 지배 세력에 맞서 자치권을 확보했다. 이들은 영주가 갖고 있던 경제행위에 대한 통제권은 물론이고 사법권 행사와 행정관리 선출에도 직접 개 입했다. 길드를 중심으로 한 상공업과 무역의 발달로 유럽의 작은 도시들에는 활력이 생겨났고, 농노들은 종교 공동체인 장 원을 빠져나와 도시에서 자유인으로 살기 시작했다. 영주와 종교인도 일부 권리를 상공인에게 넘기면 훨씬 사치스럽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13세기에는 석탄을 이용한 증기기관 같은 대대적인 혁명은 아니었지만, '연성 원시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에너지 혁명의 전조가 감지되었다. 1185년 영국 요크셔 지방에서 발명된 풍 차는 영주와 교회의 소유이던 수력 장치와 경쟁하는 평민의 에너지'였다. 풍차 설비 1대는 20명의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었다. 방아의 가장 중요한 기술적 진전은 회전운동을 왕복운동으 로 바꾸어주는 캠cam이었다. 방아 덕분에 양모를 천으로 바꾸는 가공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유럽 번영의 기초가 되었다. 이를 간파한 상공인들은 풍차와 수력 장치를 소유했고 어느덧 평민의 에너지 총량은 기득권층의 에너지 총량을 넘어섰다. 중세 기사도를 숭배한 라만차의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른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중세의 풍차와 수차에 대해 연구한 역사학자 린 화이트 Lynn White는 중세에 이미 산업혁명이 준비되었다고 진단했다. “15세기 후반 유럽은 그 이전의 어떤 문화권보다 훨씬 다양한 동력원 뿐만 아니라 그 에너지를 포착하고 전달하고 이용하는 데 필요 한 일단의 기술 수단까지 갖추었다. 1492년(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전개된 유럽의 확장은 상당 부분 에너지 소비의 증가와 그에 따른 생산성 향상, 경제력 · 군사력 증강에 기초한다.” 에너지와 기술 수단뿐 아니라 사회 시스템 역시 혁신적으로 진화 중이었다. 이는 중세 도시가 서로를 의식하며 치열하게 경쟁했던 탓인데 그리스와 로마, 카르타고가 지중해의 밀을 비롯한 무역권을 놓고 경쟁하던 것과 비슷하다. 13세기 이탈리 아의 피렌체 · 피사 · 베네치아 · 제노바는 부와 권력을 키우려고 이웃 도시와 전혀 다른 정책을 채택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인간이 고안해낼 수 있는 각종 창의적인 정책의 풀pool이 형성 되었다. 이탈리아인들이 실험 끝에 내린 결론은 제조업과 무역 이 번영의 핵심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다. 1112년 세워진 피렌체공화국은 은행업과 양모업 등 21개 길드의 대표 자가 운영하는 시뇨리아signoria를 통해 다스려졌다. 1532년 메 디치가가 세습군주제로 피렌체를 다스리기 전까지 이 대의 기구는 계속 운영되었다.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화정을 만든 점은 로마와 닮았 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피렌체는 로마와 달랐다. 피렌체는 귀족을 혁신의 걸림돌로 보고 대주주와 귀족이 정치 세력이 되지 못하도록 철저히 견제했다. 심지어 피렌체는 지주를 영구적인 위협 세력 혹은 적과 내통할 수 있는 세력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지주를 견제하는 대신 비봉건 사회의 특징인 예술인을 우 대해 예술의 번영을 일구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의 많은 거장이 피렌체에서 활동했다.
- 밀은 유럽인을 배고프게 만든 대신 그들에게 분석력이라는 눈을 선사했다. 서양인은 작은 개체를 낱낱이 파헤친 뒤 원칙을 세워 나머지를 묶어내는 분석 능력이 동양인보다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관찰과 경험을 중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야말로 진정한 실체다”라고 말했다. 서양인에게 집단은 개체가 모인 것인 반면 동양은 개체보다 관계와 전체를 중요시했다. 서양의 면도날 같은 분석 전통은 학문뿐 아니라 사회 발전에도 밑거름이 되었다. 정치가는 사회를 이루는 주체들을 각각의 변수로 놓고 이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제도와 법규 같은 시스템을 조율했다. 동양의 세계관이 부모와 왕과 국가(혹은 신)의 관계를 강조해 선과 도형으로 이루어진 평면적인 것이었다면 서양의 세계관은 입체적이고 역동적이었다는 분석을 하는 이유다. 어쩌면 이런 차이는 쌀보다 훨씬 제분이 어려운 밀의 속성에서 온 것인지 모른다. 밀은 쌀에 견주어 껍질은 단단하지만 속살(배젖)은 부드럽다. 껍질을 까면 밀은 쉽게 깨져버린다. 따라서 밀은 쌀과 보리와 달리 도정精 대신 분쇄를 해야 했다. 속도 차를 이용해 고운 가루를 내는 3중 분쇄 기술은 1800년에나 개발되었을 정도로 밀의 분쇄는 까다로운 일이었다. 서양인이 생산력의 열악함을 뛰어넘어 자본주의와 함께 그 대안인 사회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저력은 작지만 쉽게 제 몸을 내어 주지 않는 밀알을 좀더 치밀하게 깨려는 그들의 오랜 식습관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 유라시아인들이 식칼을 만들어 서로의 땅을 빼앗으려고 혈 안일 때 농업생산력이 높은 아즈텍인과 잉카인은 인신 공양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왜 이들은 인신 공양에 빠져 있었을까? 학자들은 옥수수의 기적적인 생산 조건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옥수수는 밀이나 쌀처럼 노동 집약적 곡식이 아니다. 심지 어 쟁기질도 타작도 도정도 필요 없다. 심는 법도 단순하기 그 지없다. 남자 농민이 큰 막대기로 땅에 구멍을 뚫으면 그 구멍에 부인이 씨앗을 심는다. 1년에 2번 씨앗을 심으면 50일 안에 열매가 열린다. 옥수수는 빨리 익을 뿐 아니라 익기 전에도 낱알을 먹을 수 있다. 1알을 심으면 보통 150알 이상을 거둘 수 있으며 심지어 800알을 얻기도 한다. 이것은 계절에 따라 7~8일 정도만 일하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약적 노동의 자유로움이 결국 지나치게 전제적인 신정국가에 이르게 한 것이다.
- 아메리카의 옥수수는 유럽으로 건너가서는 전혀 다른 역사를 일구었다. 호기심 많은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으로 건너간 옥 수수는 감자와 함께 근대적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두 식물의 가장 큰 공은 빠른 식량화를 통한 인구 팽창이었다. 페스트 확산으로 급감했던 유럽 인구는 17세기부터 급증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이후 2억 명가량이던 인구는 1650년 약 5억 명으로 2배가량 늘었고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해 1850년 에는 10억 명을 기록했다. 중국의 인구 증가도 옥수수가 전파 되었던 17세기 청나라 때부터였다. 유럽에서 최초로 옥수수에 주목한 나라는 전쟁광 스페인이 아니라 전통의 부호 이탈리아였다. 중남미의 인신 공양 행위를 유럽 최초로 지켜보고 기록했던 스페인 사람들은 남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옥수수를 불길한 음식으로 취급해 아예 먹지 않으 려 했다. 그러나 무역으로 부를 일군 도시국가 베네치아는 달랐다. 베네치아를 비롯해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노동력 대비 높은 옥수수의 생산성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시칠리아에 옥수수를 키워 식량으로 삼고 대신 옥수수에 견주어 2배 이상 비싼 밀을 시장에 팔았다. 17세기 베네치아는 생산된 곡물의 15~20퍼센트를 수출한 반면 프랑스는 2퍼센트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곡물을 소비했다.
- 아즈텍제국 멸망 후 멕시코로 건너온 스페인 사람들은 현지에서 앓던 설사와 고열 등의 병을 목테수마의 복수'라고 불렀다. 목테수마는 아즈텍제국의 마지막 왕이었다. 아직 GM 농산 물의 폐해가 구체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세계보건기구 WHO가 2015년 10월 가공육을 석면과 같은 1급 발암물질로, 붉 은 살코기를 2급 발암물질로 규정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판 목테수마의 복수는 옥수수를 통해 더 근본적이고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 그리스인은 기원전 8세기부터 페니키아인에게 배운 대로 식 민지의 광산을 개발해 화폐를 만들었고 곡물을 비롯해 특산품 을 본국으로 나르거나 다른 나라에 파는 삼각무역에 눈을 떴다. 따지기 좋아하고 매사 삐딱한 그리스인은 적성에 꼭 맞는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들은 보리로 된 빵 마자maza가 아니라 밀로 된 빵 아르토스artos를 먹을 수 있었 다. 기원전 6세기 전까지만 해도 아르토스는 평소에는 맛보기 힘든 음식이었다. 우리나라 서민들이 평소 보리밥을 먹다가 명 절 때 소고기 국에 쌀밥을 먹던 것과 비슷했다. 폴리스 가운데 아테네는 상업 활동이 가장 활발한 도시였다. 특히 아테네는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실시하던 폴리스였다. 인류 최초로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은 당시에는 특이하게도 사유재산을 인정한 덕분이었다. 2,000여 년 뒤 로크가 비로소 정리하고 옹호한 사유재산의 개념을 아테네가 이렇게 빨리 도입했던 것은 게오르고스georgo' 로 불리던 소농들 덕분이다. 소농들은 땅 부자인 귀족이 별 관심을 두지 않던 아테네 외곽 아티카 언덕의 척박한 땅을 개간하고 거기에 보리를 키워 가족을 부양했다. 그들은 종교의 자유와 땅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프로테스탄트처럼 끊임없이 참정권과 재산권을 요구했다. 미국이 1776년 독립전쟁으로 세계 최초로 귀족을 배제하고 사유재산을 인정한 헌법을 만들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테네의 소농은 진정한 혁신가였다. 그리스 공동체들은 기원전 7세기 무렵 중동의 패권 국가 아시리아에서 건너온 것으로 보이는 중장 보병 밀집 전술을 도입해 발전시켰다. 투구와 갑옷으로 중무장한 보병이 어깨를 맞댈정도로 밀집한 뒤 원형 방패로 몸을 최대한 가리고 3미터에 이르는 긴 창과 긴 칼을 들고 전진하는 방식이다. 팔랑크스phalanx 로 불린 전투 대형은 등껍질이 단단한 거북이가 긴 창을 꽂고 전진하는 모양새다. 팔랑크스는 전진 속도가 느렸지만 앞에 있는 것은 모조리 부수고 지나갔다. 그게 적이건 귀족이건 말이다. 팔랑크스는 『일리아스(lias』에 묘사되었던, 귀족이 주도하고 평민은 시종으로 따라나서던 전쟁을 평민 주도의 전쟁으로 바꾼 분수령이 되었다. 그리스 폴리스들은 이 전술을 앞다투어 도입했다. 그만큼 죽거나 다치는 병사도 많았다. 전쟁에 참여했던 시민들은 폴리 스를 위해 목숨을 건 대가로 정치 참여를 요구했다. 폴리스 간 의 경쟁이 치열했던 상황이어서 귀족은 이를 들어줄 수밖에 없 었다. 그리스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한 것은 고된 노동과 목숨을 건 전쟁을 감당해야 했던 소농을 포함한 시민들이었던 그리스 보리밭에서 자라난 민주주의 셈이다.
- 17세기 유럽에는 1,000개의 국가가 존재했으나 200년이 지난 뒤에는 40~50개로 통합되었다.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 기 지중해 인근의 정세와 비슷하다. 영국은 이 시기 아테네식 의 정치·경제개혁으로 유럽에서 가장 앞서 나갔다. 그러나 영국인은 아테네의 정치·경제 시스템에 스파르타의 정신을 이식했다. 기숙학교를 만들고 학생에게 럭비를 시켜 진 흙탕에서 뒹굴게 했다. 그들이 먹던 음식은 스파르타처럼 맛이 없었다. 지금도 유럽에는 “지옥의 요리사는 영국인" 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실제 영국은 스파르타처럼 쾌락보다는 절제 와 명예를 존중하는 전통을 강조해왔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적절하게 섞어놓은 영국은 20세기 초까지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로 성장했다. 후발 자본주의 국 가는 물론 중국과 같은 반봉건 국가들에도 영국은 벤치마킹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낯선 여러 국가는 스파르타의 전통에 경도되었다. 나치와 일본 제국주의가 대표적이다. 사회주의국가인 스탈린 시대 소련과 지금의 북한도 스파르타와 닮았다. 19세기 말부터 일본식 자본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도 스파르타의 전통이 강하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획일화된 학교 교육, 고루한 서열 문화 등은 찬란한 아테네보 다는 칙칙한 스파르타를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수능이나 토익 따위에 청춘을 소진하는 젊은이들은 전사가 되기 위해 집단생활에 내몰린 스파르타 젊은이들과 닮았다. 먹는 것도 비슷하다. 잡코리아 등이 취업 준비생 1,147명을 대상으로 2017년 6월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면,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취업 준비생은 17퍼센트에 불과했다. 이들이 가장 자주 사 먹는 식사 메뉴는 편의점 도시락과 삼각 김밥(23.7퍼센트)이었다. 조모스와 딱딱한 보리 빵을 먹던 스파르타 전사의 한 끼를 떠올리게 한다.
- 나는 폴리비우스가 조영관(로마 지방의회 관리)으로 뽑혔으면 좋겠다. 그는 우리에게 맛있는 빵을 공급해준다. (폼페이 유적 낙서)
- 로마의 실체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전재 국가였 다. 전쟁에 승리해 전리품과 노예가 확보되면 노예의 노동력을 토대로 다시 전쟁을 벌였다. 대부분 농민이던 로마의 시민군은 수백 년 동안 이 지겨운 무한 반복을 묵묵히 따랐다. 동맹국과 속주屬州의 시민 역시 전쟁에 참여했다. 그들은 애국심으로 무 장한 '전쟁 기계'였다. 그러나 전쟁에 참여한 시민에게 돌아온 것은 황당한 현실이 었다. 시민이 전쟁에 나간 사이 귀족이 시민의 토지를 독점했다. 토지 독점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로마가 민회와 원로원이 절대왕정을 견제하기 위한 대의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어가던 기원전 2세기 공화정 때였다. '강성 대국'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 아래 토지를 잃은 농민들 이 로마로 밀려들었다. 로마 시민의 99퍼센트는 빈민이었고 굶 주림을 걱정해야 했다. 이게 로마제국의 민낯이다. 번영하면 번영할수록 불안해지는 것이 로마의 숙명이었다. 노예제와 귀 족정, 군사독재라는 최악의 정치·경제 시스템은 어떤 개혁도 불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로마 정부는 개혁에 나서지 않고 시민에게 공짜 빵을 돌렸다. 시민들은 정치인이 던져준 공짜 빵을 짜고 냄새나는 생선젓인 가룸garum에 찍어 먹었다. 가룸은 멸치를 비롯해 전갱이 · 고등어 등 지중해에서 흔히 잡히는 생선으로 만들었다. 가룸은 오늘날 이탈리아 지역에서 즐겨 먹는 올리브유와 소 금에 절인 안초비anchovy와는 다르다. 오히려 냄새가 짙은 동남아시아의 생선젓과 비슷했다. 가룸은 고대 로마에서 가장 값싼 음식의 하나로, 서민의 주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공화정 말기부터 공짜 빵에 값싼 가룸을 찍어 먹으며 영광스럽던 로마의 붕괴를 지켜보아야 했다. 빵과 가룸은 단순히 먹거리가 아니라 로마의 역사를 상징한다. 그러나 구수한 빵과 냄새나는 가룸의 역할은 묘하게 달랐다. 빵은 무상이었지만 가룸은 돈을 내고 사먹어야 했다.
- 서양의 식탁에 단백질 공급원인 가축의 살과 우유가 풍족하게 공급된 시기는 유럽에서조차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세 기 말일 정도로 고기와 우유는 귀한 음식이었다. 게다가 척박 한 석회암 토양의 지중해 인근에서는 염소나 양처럼 작고 생명력 강한 가축을 키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배고픈 로마인은 자신보다 먼저 바다로 뛰어들어 빛나는 문 명을 만든 그리스인의 식탁에서 영감을 얻었다. 보리의 나라 그리스는 밀을 대부분 수입했다. 그리고 바다에 무궁무진한 어패류를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선은 쉽게 상한다. 그리스인은 생선을 소금에 절인 액젓 가로스garos를 만들었다. 가로스는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흑해 연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로마인은 그리스 신화에 기초해 로마 신화를 만들었듯이 가로스를 토대로 가룸을 만들었다. 가룸은 멸치를 비롯한 각종 생선에 소금을 넣어 만들었다. 주로 여름철에 3개월 정도 햇빛 에 노출해 발효시켰는데, 엄청난 냄새로 악명이 높았다. 발효 뒤 맨 위에 뜬 맑은 갈색 액체를 걸러낸 것이 가룸이다. 가룸을 따르고 남은 생선 찌꺼기를 알렉allec이라고 불렀는데, 알렉으 가장 값싼 서민 음식이었다. 가룸은 지중해 사람들의 지혜가 만든 지중해 경제의 산물이었다.
- 영어 케첩의 어원은 중국 푸젠성 방언으로 '생선으로 만든 소스'를 의미하는 꿰짭姓에서 유래했다. 17세기에 등장한 케첩은 굴·생선·계란 흰자 등을 넣고 발효시킨 일종의 생선젓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버섯 · 호두 등을 이용한 새로운 소스가 등장했고 이 소스는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실용적인 영국인들은 말레이시아에서 이 소스를 발견하고는 이를 이용하면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 다. 그래서 이 소스를 유럽에 전파했다. 유럽에서는 토마토를 이용한 새로운 케첩이 만들어졌다. 기름진 요리를 즐겨 먹던 19세기 미국에서 토마토케첩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지금은 마치 케첩이 미국의 소스인 것처럼 생각할 정도다. 중국에서 는 미국이 표준화시킨 토마토케첩을 양가장洋書·번가장語市書 이라는 별도의 말로 부른다. 토마토케첩의 재료는 제조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토마토 과육에 정향clove · 계피·후추·고추·마늘·육두구 등을 넣고 조린다. 제품에 따라 많게는 17종이나 되는 향신료를 쓰기도도한다. 서양인에게 이런 향신료는 대항해시대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하던 사치품이었을 것이다. 토마토 역시 남아메리카가 원산지다. 케첩은 소아시아의 생선젓에 취향대로 허브와 향신료를 넣 고 참치와 고등어로 만든 로마의 가룸과 많이 닮았다. 로마는 지중해를 통해 얻은 빵과 가룸으로 제국을 다스렸다. 지중해는 로마의 젖줄이었다. 서양인들은 로마가 어디서 어떻게 젖과 꿀을 얻었는지 잊지 않았고, 가룸을 부활시켰다.
- 수도원에는 중세에 보기 드문 잉여생산물이 쌓이기 시작했 다. 로마 시대에는 콜로세움보다 큰 식량 창고를 능수능란하게 만들었으나 그런 건축 기술이 없었던 중세 수도원은 잉여생산물이 변질되거나 손실되기 전에 가공해 팔아야 했다. 그들의 선택은 맥주였다. 그러나 빵을 액체로 만든 맥주는 보름도 안 되어 변질되기 일쑤였다. 중세의 도로 환경을 고려하면 그들은 맥주의 보존 기간을 늘려야 했다.수도사들은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하다가 늪지대에서 자라 는 뽕나뭇과의 여러해살이풀인 홉을 찾아냈다. 9세기 수도사 들은 홉을 넣으면 맥주의 맛이 상큼해질 뿐 아니라 보존 기간도 늘어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수도원은 홉을 넣은 맥주를 유럽의 방방곡곡에 팔기 시작했다. 로마 시대 이후 흔적만 남았 던 유럽의 길이 수도원 맥주를 실은 수레를 따라 다시 모습을드러냈다.
- 봉건제가 정착되고 이민족 침입이 잦아들면서 11세기에는 배 고픔에 대한 공포가 현저하게 누그러졌다. 넉넉해진 먹거리 덕 분에 인구도 급등했다. 볼로냐 ·케임브리지 · 파리 · 마인츠 등 에 대학이 생겨났다. 대학은 아랍인들만 읽었던 그리스·로마 의 고전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500여 년간의 암흑 끝에 빛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교회는 암흑을 택했다. 중세 초기에 낮은 곳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설파했던 교회가 변심했다. 중세 교회가 누려온 열매가 너무 달콤했던 탓이다. 교회는 1077년 이탈리아 카노사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굴복시키며 유럽 최고의 정치권 력임을 증명했다. 그들의 욕심은 정치에만 미치지 않았다. 교 회는 왕보다 넓은 토지를 가진 대지주이자 유럽에서 보기 드문 지속 발전 가능한 상공인이었다. 중세 교회는 규모가 작을 뿐이지 20세기 등장한 스탠더드오일이나 포드자동차 같은 독점기업과 유사했다. 수도원은 청빈의 삶을 버리고 농노들과 소작 계약을 맺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곡식을 빻고 빵을 만들고 술을 빚는 일도 교회가 독점하기 시작했다. 로마법에 따라서 물레방아는 토지를 가진 사람의 소유였다. 방앗간 주인은 물레방아를 교회나 영주에게 바친 뒤 고용 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재산을 빼앗긴 방앗간 주인은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곡식의 양을 속이는 것은 물론이고 모래를 섞기도 했다. 종교가 앞장서서 지역 사회에 뿌리 깊은 불신을 조장한 셈이다. 장터를 여는 이권 역시 교회가 영주와 함께 독점했으며 다리나 성문을 지나는 사람 에게 통행세를 걷기도 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전리품으로 타락했다가 결국 이민족의 침입으로 무너졌다. 갈취로 돈을 벌던 중세 교 회도 비슷했다. 외부에서 결정타를 맞았다. 페스트가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것이다.
- 유럽인이 청어를 많이 먹은 데는 2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단백질 공급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서양인이 고기를 손쉽게 접하게 된 것은 19세기 냉동선이 발명되면서다. 그전까지 붉은 고기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사치품이었다. 게다가 유럽은 후추 등 향신료가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기 요리는 지금과는 다 른 고약한 냄새가 나는 염장 육류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염 장 생선은 위도 탓에 낮부터 컴컴해지는 북유럽의 겨울철을 지 탱해주는 긴요한 음식이었다. 발효를 하면 원래보다 풍부한 맛 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염장하면 맛이 없어지는 육류와 큰 차 이였다. 지금도 스웨덴에서는 수르스트뢰밍 sutstromming이라는 염장 발효 청어를 즐겨 먹는다. 이 음식은 세계에서 가장 냄새가 고 약한 음식으로 선정되었으며 일부 국가에서는 발효 가스의 폭 발 위험 때문에 수르스트뢰밍 통조림의 비행기 반입을 금지하 기도 했다. 그래도 스웨덴 사람들은 빵에 수르스트뢰밍을 올려 별미로 즐겨 먹는다.
- 청어의 수요 증가에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었다. 부활절 등 각종 종교적 행사를 앞두고 소고기나 가축의 육식을 금지하던 중세 그리스도교의 전통 탓에 염장 청어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청어의 수요 증가는 필연적으로 소금 거래량을 늘렸다. '배 위에 올라오면서부터 썩기 시작한다'는 등 푸른 생선을 오래 두고 먹으려면 염장이 필수기 때문이다. 청어 염장에 사용된 최초의 소금은 폴란드 등 동유럽 내륙지역에서 나는 암염이었다. 이 암염을 나르면서 북유럽의 교역로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 교역로는 남유럽의 해상 무역로와 함께 유럽의 주요한 상업 루트가 되었다. 이 상업 루트는 이슬람 제국의 무역로와 연 결되면서 북유럽 국가에 중국·인도 등 다른 대륙의 상품을 전 달했다. 암염의 무역로를 따라 북유럽의 핵심 상품인 모피·목재·구 리 등이 유럽 시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소금과 청어가 생존 필수품이라면 모피는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동양의 비단이나 도자기에 견줄 수 있는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이 때문에 모피 는 유럽 왕과 귀족의 주요 자금원으로 사용되었다. 유럽의 시장은 이슬람 시장과 연계되었다. 바그다드 시장에서 북유럽의 모피를 살 수 있었고 북유럽에서도 아랍의 향신료와 설탕, 동 양의 도자기와 비단을 구입할 수 있었다.
- 초기 자본주의 네트워킹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영국인은 자국 상품을 사지 않던 중국에 마약을 팔았고 영국보다 면사를 잘 만들던 인도 기술자들을 고문하고 죽였다. 피해 국가가 항 의하면 전쟁을 선포했다. 은행이 후원하고 국회가 인준하는 전 쟁에서 영국을 비롯해 유럽은 승승장구였다. 18세기까지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이었던 중국과 인도조차 이들을 당해낼 수 없 었다. 중국과 인도가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은 유럽 국가를 제외 하면 유럽 국가의 오만을 견제할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는 이 야기다. 세계대전으로 불린 유럽 국가 간의 엄청난 전쟁은 자본주의 초기부터 예정되어 있던 셈이다.
- 중세에서 자본주의로 가는 변곡점은 스페인의 1492년 아메리카의 발견이었다(인류사 혹은 인권의 관점에서 본다면 스페인의 침략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여기서는 경제사의 관점에서 발견이라고 쓰겠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럽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상 품 시장이라는 종속적인 지위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전 지 구적인 경제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왔다. 유럽인은 본의 아니게 몇몇 권역별로 운영되던 세계경제를 하나로 묶기 시작했고, 유럽에서 발생한 상공업 혁명을 전 세계에 퍼뜨렸다. 그 계기는 우연처럼 보인다. 포르투갈의 형님 격인 스페인 역시 새로운 무역로를 찾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사기꾼처 럼 보이는 벤처 사업가 한 명이 찾아왔다. 콜럼버스는 인도에 가는 길을 알고 있으니 스페인 왕실에서 투자를 해달라고 했 다. 그는 영국 왕 헨리8세Henry III에게도 투자 설명회를 열었는 데 거절당했다. 그래서 스페인에 온 것이다.
- 영국은 세계 최초로 자본주의경제를 선보이고 19세기에는 세계의 공장' 이라고 불릴 정도로 산업이 발달했지만 경제 구조는 스페인의 노예무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국은 1807년 인권을 이유로 세계 최초로 노예무역을 철폐했다. 흑인 인권을 생각해야 한다는 인식도 있었지만, 서구 열강이 너도나도 플랜테이션 농업에 나서면서 설탕 가격이 떨어진 것도 주요한 이유였다. 영국은 광대한 식민지에서 나오는 설탕 · 향신료·차·고무·면화를 독점으로 싼값에 확보해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기계로 가공해 공급하는 식민지 의존 경제 시스템이었다. 말이 공업 국가였지 영국 경제의 기초는 식민지형 플랜테이션 농업 생산물이었다. 바다를 지배한다는 자만감은 16세기 스페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눈을 가렸고 영국의 자본가들은 혁신을 등한시하는 부자의 저주에 빠졌다. 반면 미국과 독일 같은 후발 국가들은 식민지가 거의 없었 다. 그들은 영국처럼 식민지 플랜테이션에 의존한 경공업 대신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켰다. 결국 이 두 나라는 석유 기반 내연 기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쫓아낸 넓은 국토에 미친 듯이 철도를 깔았다. 영국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미국 철도에 투자했고 미국은 철강과 기계 산업을 발 전시켰다. 중공업 중심으로 발전한 미국의 공업 생산량은 19세기 말 이미 영국을 초월했다. | 미국과 독일이 유럽 귀족들이 장난감 취급했던 내연기관 자 동차를 만들려고 고민하고 있을 때, 영국은 자동차는 마차보다 빨라서는 안 된다는 '붉은 깃발법Locomotive Act'을 통과시켰다. 이 말도 안 되는 법은 무려 30년간 지속되었다. 이 법안은 내연 기관 분야에서 영국이 미국이나 독일에 비해 뒤처지게 했다. 후추와 설탕 같은 아열대 식민지 농업에 의존한 초기 자본주 의경제는 대량생산 · 대량 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자본주의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유럽 국가들이 깨달은 것은 두 차례 의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영국·프랑스·스페인 · 네덜란드 등 의 지배에 신음하던 제3세계 식민지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뒤 대부분 해방되었다. 그러나 식민지를 경험한 많은 국가가 폭력으로 이식된 자본주의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저개발국가로 남아 있다. 후추와 설탕이 밀고 끈 자본주의가 마냥 달콤하지 않은 이유다.
- 광고는 미국 노동자 계층에게 자동차와 집을 소비하기만 하면 중산층으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19세기 싱어 재봉틀이 최초로 고안한 할부 제도는 이 환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환상의 최전선에 있 던 전위부대는 코카콜라였다. 코카콜라 역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영웅이라기보다는 1920년대 미디어에 의해 탄생한 스타들과 비슷한 존재였다. 코카콜라는 남아메리카의 코카잎과 아프리카의 콜라잎으로 만 든 미국 남부 지역의 민간 약품 중 하나였다. 코카잎에 든 마약성분이 진통이나 피로 해소에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의약품에 매기는 세금을 음료수에 매기는 세금보다 높 이자 코카콜라는 코카잎 성분을 빼버렸다. 그리고 '진통’, ‘강장' 대신 '상쾌함', '행복'이라는 단어로 슬로건을 바꾸었다. 본질은 가고 거죽만 남은 셈인데 미국 대중은 본질과 상관없 이 코카콜라에 열광했다. 광고 덕분에 물로도 풀 수 없는 갈증을 콜라가 풀어준다고 소비자가 '욕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가치가 없는 코카콜라에 다른 소다수에 없는 상쾌함이 있다는 신화적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수많은 기업이 코카콜라의 마케팅 기법을 바이블로 삼게 된 이유다. 코카콜라의 광고에 대한 집착은 오랜 전통이었다. 1886년 코카콜라를 만든 존 펨버턴 John Pemberton은 한 해 뒤 동업자와 상의 없이 자신의 이름으로 상표를 등록한 뒤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2만 5,000달러가 있다면 2만 4,000달러를 광고비로 쓰고 나머지로 콜라 원액을 생산할 거야. 그렇게 하면 부자가될 수 있어.”
- 다이아몬드가 영원한 사랑을 뜻하게 된 것은 1947년 다이아몬드 회사인 드비어스의 광고 때문이다. 미국 청년이 1,500만 명 이나 파병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사회적으로 결혼에 대한 욕구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드비어스는 그런 예비부부에게 다이아몬드를 판매하고 싶었다. 광고를 맡은 회사는 '다이아몬드 영원한 사랑의 증표'라고 콘셉트를 잡았고, 이 광고는 미국 젊은이뿐 아니라 전세계의 젊은이에게 기존에 없던 욕망을 만들어냈다. 다이아몬드 반 지가 결혼식에 쓰인 유래는 1477년 오스트리아 막시밀리안 대 공(훗날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다)이 부르고뉴의 마리 공주에게 청혼하면서부터였다. 마리는 프랑스 일부와 벨기에·네덜란 드·룩셈부르크에 이르는 영토의 상속인이었다. 미모도 상당 해 당시 유럽 최고의 신붓감으로 꼽혔다. 이런 세기의 결혼식을 후원했던 사람은 유럽 광산업의 큰손이었던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 가문이었다. 500년 동안 대중은 전혀 몰랐던 유럽 왕족의 결혼 관습을 미국의 광고가 확산시킨 것이었다.
- 지금 우리는 과학의 초기 성공이 가져다준 기분 좋은 술기운이 아니라 다음 날 아침에 찾아온 끔찍한 두통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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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흑역사

역사 2020. 6. 21. 14:04

- 인류가 아무리 눈부시게 발전하고 아무리 많은 난관을 극복했다. 해도, 파국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역사 속에서 예를 찾아보자. 9세 기 북유럽의 장수였던 '천하장사 시구르드’는 적장 뻐드렁니 마엘 브릭테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고 의기양양하게 귀환했다. 그러나 마엘 브릭테의 뻐드렁니가 말 타고 달리던 시구르드의 다 리를 계속 긁었고, 그 상처의 감염으로 시구르드는 며칠 만에 죽고 만다. 천하장사 시구르드는 자기가 이미 죽인 적에 의해 죽임을 당한 불 명예스런 주인공으로 전쟁사에 길이 남았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두 가진다. 첫째 자만은 금물이다. 둘째, 적의 치아 위생에 유의하자. 이 정도일 것이다. 이 책의 중심 주제는 자만과 그로 인한 파멸이니, 옛사람들의 구강 위생에 더 관심 있는 독자에게는 양해를 구한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간다면, 두 사람이 맞붙은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시구르드가 마엘 브릭테에게 각자 병사 40명씩 데리고 싸우자고 도전했기 때 문이다. 도전을 수락한 마엘 브릭테 앞에, 시구르드는 병사 80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러니 이 이야기의 또 한 가지 교훈은 철저하게 나쁜 놈은 되지 말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 흥미롭게도 이 또한 이 책에서 반복되는 주제이 기도 하다.
- 우리 머리는 교향곡을 작곡하고 도시를 계획하고, 상대성이론을 생각해내지만, 가게에서 포테이토칩 하나를 살 때도 무슨 종류를 살지 족히 5분은 고민해야 기우 결정할 수 있다.
- 진화라는 과정은 영리함과 거리가 멀다. 멍청 할 뿐 아니라 아주 고집스럽게 멍청하다. 진화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래저래 죽을 수 있는 수천 가지 시나리오를 피하고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잘 넘어갈 때까지만 죽지 않고 사는 것, 그것 뿐이다. 그렇게만 되면 성공이다.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다시 말해 진화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 지금 당장' 이익이 되는 특성 은 무조건 선택된다. 그 결과 훗날 9대손쯤에서 너무 구닥다리 특성으로 고생하지 않을지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미래를 내다보고 반영한다든지 하는 것도 물론 전혀 없다. 이를테면 “아, 이 특성은 지금은 좀 거추장스러워도 100만 년 후에는 후손들한테 진짜 유용 하겠군. 좋아, 선택하자”, 그런 경우는 없다. 진화의 원리는 앞을 내다보는 것이 아니다. 그냥 먹을 것과 짝짓기에 굶주린 개체들을 인 정사정없는 세상에 무진장 많이 풀어놓고 누가 제일 덜 망하나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뇌는 최고의 사고 기계를 목표로 세심하게 설계한 결과물이 아니라, 그저 요령과 땜질과 편법을 덕지덕지 모아놓은 것 에 불과하다. 그 모든 것은 예컨대 우리의 먼 조상이 먹을 것을 찾는 데 2퍼센트 더 유리했거나, 아니면 '앗, 조심해, 사자야!'라는 개념 을 전달하는 데 3퍼센트 더 유리했기에 선택된 요령들이다.
- 기준점 휴리스틱이란 뭔가를 결정할 때, 특히 사전 정보가 부족할 수록 제일 처음 얻은 정보에 따라 결정이 크게 좌우되는 것을 가리킨다.
- 한편 가용성 휴리스틱은, 우리가 모든 정보를 신중히 따지기보다. 는 무엇이든 제일 쉽게 떠오르는 정보를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가장 최근의 사건이라든지 더 극적이고 기억에 남는 사실을 기준으로 세계를 바라보려는 엄청난 편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현실을 더 정확히 반영할 만한 평범하고 시시한 정보는 그냥 흘려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끔찍한 범죄를 보도하는 자극적인 뉴스를 보고 나면 범죄율이 실제보다 높다고 생각하게 되는 반면, 범죄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무미건조한 뉴스는 봐도 생각이 잘 바뀌지 않는다. 이는 (더 찾고 상대적으로 덜 충격적인) 자동차 사고보다 (드물고 더 충격적인) 비행기사고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대중도 정치인도 테러라고 하면 즉각적, 반사적으로 반응하지만, 훨씬 더 치 명적이면서 동시에 평범한 위험 요소는 뒷전으로 취급하는 이유다. 2007년에서 2017년까지 10년 동안 미국에서는 테러보다 잔디 깎는 기계 때문에 죽은 사람이 더 많지만, 아직까지 미국 정부가 '잔디 깎는 기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 기준점 휴리스틱과 가용성 휴리스틱을 함께 쓰면 위급한 순간에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라든가 일상생활에서 소소한 결정을 내리는 데는 아주 효과적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복잡한 특성을 다 고려해 좀 현명한 결정을 내릴라치면 이 두 휴리스틱이 골칫거리가 된다. 우리 뇌는 가장 먼저 들은 것이나 가장 빨리 머리에 떠오르는 것에 자꾸 이끌리면서 늘 안전지대에 머무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 ‘더닝 크루거 효과'라고 하는 유명한 인지 편향 현상이 있는데, 이 책을 대표하는 이론으로 삼아도 될 듯하다. 이는 심리학자 데이비 드 더닝과 저스틴 크루거가 무능에 대한 무지Unskilled and Unaware of It」라는 논문에서 제안한 효과로, 우리가 살면서 익히 알던 현상을 입증한 것이다. 즉, 어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 가하는 경향이 있고, 잘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엄청나게 과 대평가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결점을 말 그대로 잘 모르니, 그 결점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당연히 모른다. 그래서 마냥 낙관하고 과신하다가 사고를 치고 일을 그르치기를 끝없이 반복한다(이 책을 읽다 보면 알겠지만, 우리 뇌가 저지르는 온갖 실수 중에서도 ‘과신’과 ‘낙관'이야말로 가장 위험하다.
- 우리는 군중에 편승하려는 욕구 때문에 각종 유행과 열풍과 광풍에 까딱하면 휩쓸린다. 한 사회 전체가 이성을 내동댕이치고 광란의 집착에 일시적으로 휘몰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순수하게 신체적인 형태로는 중세에 약 700년에 걸쳐 주기적으로 유럽을 덮쳤던 불가해한 춤바람, '무도 광'을 예로 들 수 있다. 갑자기 춤을 추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수십 만 명에게 전염병처럼 확산된 현상으로, 춤추다가 탈진해 죽는 사람 들까지 있었다. 돈과 관련된 형태도 많았다. 군중 편승 욕구와 일확천금 기회라면 믿고 보는 습성이 돈 욕심과 결합해 벌어진 일들이다. 이렇게 해서 생겨나는 것이 실제 가치보다 평가 가치가 훨씬 높아지는 금융 거품 이다. 본래 가치가 높지 않은 대상이라 해도 남들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돈을 벌 수 있으니 너도나도 투자한다. 물론 거품은 꺼 지기 마련이고, 많은 사람이 큰돈을 잃고 경제 전체가 몰락해버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집단적 공황이라는 형태도 있다. 그 시발점은 주로 우리의 공포를 조장하는 헛소문이다. 전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건 역사적으로 마녀사냥 비슷한 광풍이 꼭 벌어졌다(유럽에서는 16세기에 서 18세기까지 벌어진 마녀사냥에 약 5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 인간은 발길 닿는 곳마다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존재다
- 농경이 지속된 것은 농경으로 모든 이들의 삶이 더 나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농경사회가 이전 사회 보다 생존 경쟁에서 유리했기 때문이다. 즉, 농경사회는 자손 번식 속도가 빠른 데다가(농경은 더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고, 한곳에 머물러 살면 아이가 걸음마를 하기 전에 다음 아이를 또 낳을 수 있다), 집단적으 로 점점 더 넓은 땅을 차지하면서 농사짓지 않는 이들을 다 밀어내 게 된다. '농경은 끔찍한 실수였다' 설의 지지자인 저술가 재러드 다 이아몬드가 1987년 「디스커버」에 쓴 표현을 빌면, 인구 제한이냐 식량 증산이냐, 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후자를 선택했고, 그 결과 기아, 전쟁, 폭정을 떠안았다. 한마디로 우리는 질보다 양을 선 택한 것이다. 역시 인간답다. 세상이 이 꼴이 된 게 '다 농경 때문이다!'라고 막연히 사방에 손 가락질을 하고 싶지만, 농경의 시작은 그 밖에도 더 직접적이고 스 펙터클한 각종 참사를 빚어냈다. 농경에 착수하면서 인간은 주변 환 경을 마음대로 바꾸기 시작했으니, 농사라는 게 그런 것일 수밖에 없다. 식물을 가져다가 본래 있을 곳이 아닌 어디 다른 곳에 꽂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주변 풍광을 변화시키게 된다. 필요 없는 것은 없 애고, 그 자리에 필요한 것을 더 채워넣으려고 궁리하게 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인간이란 그런 일이 낳을 여파를 잘 따져볼 줄 모른다는 게 확실하다.
- 라파누이인들은 운이 나빴던 데다가 바보짓을 벌여 자멸하고 만 것. 일단 운이 나빴던 것이 라파누이섬은 지리적, 생태적으로 삼림 파괴에 유달리 취약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앞서 등장했던 '농업은 인류 최악의 실수' 설의 주창자)가 라파누이 문명을 집중 조명한 저서 『문명의 붕괴 Collapse』에서 설명하듯, 이스터섬은 폴리네시아 지역 의 다른 섬들에 비해 후미진 곳에 위치한 데다가 좁고 평탄한 지형 에 춥고 건조한 기후였다. 한마디로 나무를 베면 자연적으로 보충되 기 힘든 조건이었던 것이다.
- 그리고 바보짓을 했던 것이, 라파누이인들은 더 좋은 집을 짓고 더 좋은 카누를 만들고 석상을 운반하는 설비를 더 좋게 개선하려고 열을 올린 나머지 나무를 계속 베어내기만 하고 나무가 다시 자라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별안간 나무가 한 그루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전형적인 공유지의 비극' 이었다. 나무 한 그루를 벤 한 사람은 잘못이 없었을지라도, 결국 모든 사람의 잘 못으로 상황은 회복 불능이 되어버렸다. 숲이 사라지자 라파누이 사회는 막심한 타격을 입었다. 나무가 없 으니 고기잡이할 카누도 만들 수 없었고, 토양이 비바람에 깎여나가 황폐해지면서 산사태가 일어나 마을이 파묻혔으며, 추운 겨울을 나 려니 그나마 남은 초목마저 긁어모아 불을 때야 했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날로 희소해지는 자원을 놓고 집단 간에 경쟁이 거세졌다. 이는 비극적이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수순으로 이어진 듯하다. 절박한 인간은 사회적 지위를 갈망하거나 사기충천이 필요하거나 자신이 큰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위안이 필요할 때, 왕왕 그 러는 습성이 있으니까. 즉, 그들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오히려 더 강 하게 밀어붙였다. 라파누이인들은 점점 더 큰 석상을 만드는 데 사 활을 건 것으로 보인다. 왜 그랬느냐고? 그러게 말이다. 인간이란 해 결이 난망해 보이는 문제에 부닥쳤을 때 원래 잘 그런다. 섬에서 최 후로 제작된 석상은 아예 채석장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다른 석 상들도 놓일 자리까지 가다 말고 길가에 나뒹굴었다. 일이 갑자기 엎어진 것이다. 폴리네시아인들은 절대 필자나 독자보다 덜 똑똑한 사람들이 아 니었다. 미개하지도 않았고 환경에 무지하지도 않았다. 혹시라도 '와, 환경이 파탄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문제를 외면하고 문제의 발단이 된 일을 더 벌였다니, 바보 아냐?' 하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 다면....... 음, 주변을 좀 둘러보시죠? 실내 난방 온도 좀 적당히 맞추고 쓰레기 재활용도 좀 잘 하시고요. 『문명의 붕괴』에서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 야자수를 벤 이스터섬 주민은 뭐라고 하면서 그 나무를 베었을 까?” 정말 좋은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 이다. 아마 “인생 뭐 있나!”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더 좋은 질문은 마지막에서 두 번째 나무나 마지막에서 세 번째, 네 번째 나무를 벤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베었느냐가 아 닐까? 우리 인류사 전반을 예리하게 통찰해볼 때, 그 정답은 '내 문 제도 아닌데 뭐' 정도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 10억 마리의 천적이 갑자기 사라지자 중국의 메뚜기들은 매일매 일이 잔칫날이었다. 여기저기서 곡식을 조금씩 쪼아 먹는 참새와 달리 메뚜기 떼는 거대한 공포의 구름을 이루어 중국의 논밭을 통째로 싹쓸이했다. 1959년 마침내 전문가(참새 소탕 작전은 위험하다고 일찍 이 경고했던 조류학자 정줘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졌고, 공식 유해 동 물 명단에서 참새가 빠지고 대신 빈대가 들어갔다. 그러나 때는 이 미 늦었으니, 참새 10억 마리를 박멸하고 나서 '어, 이게 아니네, 취 소' 하고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 물론 1959년에서 1962년까지 중국을 덮친 대기근은 참새 소탕 뿐 아니라 여러 잘못된 결정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게 원인이 었다. 당의 주도에 따른 전통적 자급 농업에서 고부가가치 상품작물 재배로의 전환, 소련 생물학자 트로핌 리센코의 유사 과학 이론에 기반한 파괴적 농경 기법 도입, 농산물을 몰수해 지역사회 내에서의 소비를 막은 중앙정부의 정책 등이 모두 제각기 몫을 했다. 게다. 가 고위직이든 하위직이든 우수한 실적을 보고한 공무원들에게 포 상이 주어지다 보니 국가 지도자들은 모든 게 잘되고 있고 식량 수 급이 넉넉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홍수와 가뭄 등 기상 악조건이 몇 년간 이어지던 끝에 별안간 식량 비축분이 바닥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참새 박멸과 그로 인한 메뚜기 떼의 창궐이 대재앙을 낳 은 주요 원인이었음은 분명하다. 당시 대기근으로 인한 사망자 수 는 적게는 1,500만 명에서 많게는 3,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무려 1,500만 명의 인간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조차 확실치 않다니 더 오싹해질 따름이다.이 참사가 남긴 교훈은 자명하다. 뒷일을 아주 확실하게 장담할 수 없다면 자연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장담할 수 있어도 웬만하 면 건드리지 말자. 앞으로라도 명심하면 좋겠지만......... 그럴 것 같지 않다. 2004년, 중국 정부는 사스SARS 바이러스 확산을 막고자 사향고양이에서 오소리까지 각종 포유동물을 집단 살처분하라고 명령했다. 역시 인간은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능력이 모자라는 것일까.
- 나서서 남에게 명령하길 좋아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것이 옳은 일인지는 의문이지만
- 절대 권력자들이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막장짓을 벌이곤 했기 때문에 역사상 여러나라에서 그 폐단을 줄이고자 민주주의라는 것을 시도하곤 했다.
- `절대 권력자들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막장짓을 벌이곤 했 기에, 역사상 여러 나라에서 그 폐단을 줄여보고자 이따금씩 '민주 주의'라는 것을 시도하곤 했다. 그리고 그 성패 여부는 다양했다. 민주주의가 처음 어디서 시도되었느냐 하는 것은 논란이 있다. 먼 옛날 소규모 사회에서도 틀림없이 다양한 형태로 집단적 의사 결정 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또 2,500년 전 인도에도 민주주의에 근접 한 제도가 존재했다는 근거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와 비슷 한 시기인 기원전 508년,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민주정치를 처음으로 도입하고 법제화한 것으로 본다. 물론 민주주의의 주요 요건은 (요컨대 모든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 시민이 마음에 들지 않는 정부를 교체할 권리 등) 누구까지를 '시민' 으로 보느냐의 문제와 직결된다. 역사를 통틀어 여러 나라에서 여성, 빈민, 소수민족 등 보잘것없는 약자들은 시민으로 보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권력을 아무한테나 줄 수야 없지 않았겠는가? 민주주의의 또 한 가지 문제는, 누구든 민주적 절차에 의해 권력 을 잡는 것은 좋아하지만 권력을 빼앗길 것 같으면 갑자기 영 달가 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계속 유지하는 데만도 참으로 엄청난 노력이 들어간다. 예컨대 로마에서는 민주주의가 전제정치로 퇴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각종 묘책을 시도한 바 있다. 한 가지 방법은 행정과 군사를 모 두 관할하는 선출직 최고 통치자 집정관의 역할을 두 사람에게 나누어 맡기는 것이었다. 임기는 1년이었고, 두 사람이 한 달마다 번 갈아 주요 통치권을 행사했으며, 로마군 4개 군단을 한 사람이 2개 군단씩 맡아 지휘했다. 이는 어느 한 사람도 절대 권력을 손에 쥐지 못하게 하는 꽤 영리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4개 군단을 모두 전투에 투입해야 할 때는 이상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가령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 때가 그랬으니, 로마 군은 코끼리 애호가였다는 한니발 장군이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결 전을 벌여야 했다. 이 전투에서 두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군 지휘권을 '하루마다' 번갈아 행사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전술적 견해가 충돌한다는 게 문제였다. 하루는 신중한 파울루스가 지휘를 맡고, 또 하루는 과감 한 바로가 지휘를 맡았으니 말이다. 로마군을 전장으로 끌어들이고 자 했던 한니발은 바로가 지휘권을 잡을 때까지 그냥 하루를 기다렸 고, 간단히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전투는 로마군의 전멸에 가까운 참 패로 끝났다. 사실 로마는 이런 내분을 막기 위해 마련해둔 방책이 있었다. 비상시에 전권을 위임받는 '독재관'을 임명해두는 것. 독재관은 일단 임무를 완수하고 나면 바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어 있었다 (공교롭 게도 로마 원로원은 칸나이 전투 직전에 독재관이 쓰는 전술이 마음에 들지 않아 독재관을 해임해버렸다). 이 역시 원론적으로는 좋은 생각이었지 만, 절대 권력에다가 대군의 지휘권까지 손에 넣은 사람이 인간적으 로 순순히 자리에서 물러나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독재관들 대다수는 별 탈 없이 물러났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야망가가 '권력 맛을 보니 참 괜찮은데 불만 없으시면 제가 좀 갖고 있겠다'라고 했다. 카이사르의 끝은 결국 좋지 않았지만, 그의 후계 자들 역시 절대 권력을 맛보고는 절대 놓지 않으려 했으니, 로마 공 화국'은 금방 '로마 제국'으로 변해버렸다.
- 히틀러는 집단 학살광이라는 점 외에도 우리가 흔히 간과 하기 쉬운 일면이 있었다. 대중문화 속에서 히틀러는 오랫동안 조롱 거리로 묘사되어왔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나치의 조직은 무자비하 리만치 능률적이었으며 독재자 히틀러는 자기 일, 즉 독재에는 밤낮 으로 열심히 임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히틀러는 무능하고 게으르고 병적으로 자기중심 주의적인 사람이었고 그의 정부는 완전히 코미디였다는 사실을 알 아둘 만하지 않을까. 사실 오히려 그 덕분에 그가 득세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독일 지도층은 그를 시종일관 과소평가했다. 그가 총리가 되 기 전, 정적들은 그의 투박한 연설과 유치한 유세를 들어 그를 한낱 웃음거리로 치부했다. 어느 잡지에 따르면 그는 한심한 얼간이'였다. 또 어느 잡지는 그의 당이 '무능력자 집단'이며 '어중이떠중이 들 잔치를 과대평가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선거를 통해 나치가 독일 의회 최대 정당이 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히틀러가 허세에 찬 바보이고 호구이니 똑똑한 사람들에게 쉽게 조종당하리라 생각했다. 당시 독일 총리 자리에서 밀려난 프란츠 폰 파펜은 권력을 되찾으려고 칼을 갈고 있었다. 그는 히틀러를 봉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그와 함께 연립내각을 수립하기 위 한 논의에 들어갔다. 마침내 1933년 1월, 협상이 성공해 히틀러가 총리, 파펜이 부총리가 되고 내각은 파펜에 우호적인 보수 관료들로 채워졌다. 파펜은 승리를 확신했다. 자기에게 실수했다고 경고하는 지인에게 ‘그자는 우리 하수인'이라며 안심시켰다. 그리고 다른 지인에게는 두 달이면 히틀러는 구석에 몰려 찍소리 못 하게 될 것이 라고 자신했다.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두 달 만에 히틀러는 오히려 나라를 완전히 장악했고, 자신에게 초헌법적 권한과 대통령직에다 의회까지 통째로 넘겨주게 될 법을 통과시켜달라고 의회를 설득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국가가 순식간에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게 되었다. 독일의 지도적 인사들은 왜 그렇게 시종일관 히틀러를 얕잡아 보 았을까? 히틀러의 무능함을 제대로 짚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능함도 히틀러의 야욕 앞에서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실제 로 히틀러는 정부를 운영하는 능력이 형편없었다. 그의 공보 담당관 오토 디트리히는 훗날 회고록 『내가 알던 히틀러』에 이렇게 적기도 했다. “히틀러는 독일을 12년간 통치하면서 문명국가에서는 유례가 없을 만큼 정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았다.”
- 히틀러는 문서 읽기를 질색했다. 보좌관들이 올린 문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일이 잦았다. 부하들과는 정책을 의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머리에 떠오르는 내용으로 일장 연설만 일방적으로 늘어놓았다. 말이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하고 꼼짝없이 듣고 있어야 했으므로, 부하들에게는 공포의 시간이었다. 히틀러 정부는 늘 난장판이었다. 관료들은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 몰랐고, 누가 무슨 일을 맡고 있는지 잘 몰랐다. 히틀러는 어려운 결 정을 해달라고 하면 결정을 한없이 미뤘고, 결국 느낌대로 결정해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니 측근들도 그가 뭘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 에른스트 한프슈팅글은 훗날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그는 어찌나 종잡을 수 없는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렇다 보니 관료들은 나랏일 수행은 뒷전이고 종일 서로 갈라져 싸우고 헐뜯기에 바빴고, 그날그날 히틀러의 기분 상태에 따라 어떻게든 그의 눈에 들거나 그의 눈을 피할 생각뿐이었다.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히틀러가 매사를 제 뜻대로 하려고 일부러 수를 쓴 것이냐, 아니면 그냥 업무 지휘 능력이 형편없이 떨 어졌던 것이냐, 하는 논란이 좀 있다. 디트리히는 이것이 분열과 혼 돈을 조장하기 위한 계책이었다는 입장이다. 히틀러가 그 방면의 선수였던 건 맞다. 하지만 히틀러의 개인적인 습관을 볼 때, 그냥 일하기 싫어하는 자아도취증 환자에게 나라를 맡겨놓으니 그리 될 수밖 에 없었을 것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 히틀러는 엄청나게 게을렀다. 그의 보좌관 프리츠 비데만에 따르 면, 그는 베를린에 있을 때도 11시가 넘어서야 일어났고, 점심 전까 지 하는 일이라고는 신문에 실린 자기 기사를 읽는 것 정도가 고작 이었다(디트리히가 꼬박꼬박 기사 스크랩을 가져다주었다). 그래도 사람 들이 자꾸 자기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하니까 베를린에 있기를 좋아 하지 않았다. 기회만 되면 집무실을 떠나 오버잘츠베르크의 개인 별 장에 갔고, 거기서는 당연히 일을 더 안 했다. 그곳에서는 아예 오후 2시까지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하는 일은 산책 아니면 새벽까 지 영화 보기가 거의 전부였다. 그는 대중매체와 유명인에 집착했으며, 그러한 시각으로 자기 자신을 종종 바라보았던 것 같다. 스스로를 가리켜 “유럽 최고의 배 우”라 하기도 했고, 한번은 친구에게 쓴 편지에 “내 인생은 세계사를 통틀어 최고의 소설이라고 생각하네”라고 했다. 그의 개인적 습관은 특이하거나 어린아이 같아 보이는 것이 많았다. 낮에는 꼭 낮 잠을 잤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단 것을 엄청 나게 좋아해 “케이크를 엄청나게 많이 먹었으며 “찻잔에 설탕 덩어리를 어찌나 많이 집어 넣는지 차를 부을 공간이 거의 없을 정도” 였다. 자신의 무식함에 콤플렉스가 심했기에, 자기 선입견에 맞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다른 사람이 식견을 말할 때면 폭언을 퍼붓곤 했다. 누가 자기에게 반박하면 “호랑이처럼 격노했다”고 한다. “사 실을 말해줘도 자기 마음에 안 들면 화부터 내고 보는 사람에게 누 가 사실을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비데만은 개탄했다. 히틀러는 남 들이 자기를 비웃는 것을 질색했지만, 남을 놀림감으로 삼는 것은 좋아했다(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흉내를 내며 조소하곤 했다). 그러 면서도 자기가 멸시하는 대상이 자기를 인정해주기를 갈망했으며, 신문에 자기를 칭찬하는 글이 실리면 기분이 금방 좋아지곤 했다.
- 역사상 최악으로 꼽히는 인재人災들은 대개 천재 악당의 소행이 아니다. 오히려 바보와 광인들 이 줄지어 등장해 이랬다저랬다 아무렇게나 일을 벌인 결과다. 그리 고 그 공범은 그들을 뜻대로 부릴 수 있으리라고 착각한, 자신감이 넘쳤던 사람들이다.
- 역사상 러시아를 대규모로 침공해 성공한 주인공은 몽골이 유일하다(당시는 러시아가 아니라 키예프 공국이었다.), 폴란드는 잠깐 성공해 모스크바를 몇 년간 점령하기까 지 했지만 결국 쫓겨났고, 스웨덴은 한 번 시도했다가 참패한 후 사 실상 스웨덴 제국 몰락의 길로 들어서는 엄청난 화를 입었다. 그러니 '러시아는 웬만하면 쳐들어가지 말자'라는 교훈을 새길 만하다. 두 사람 중에서는 나폴레옹이 히틀러보다 그나마 조금 더 합리적 인 이유에서 계획을 단행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선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의 실패'라는 참고 사례가 없었다. 휘하의 육군이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으니 승리를 자신할 만도 했다. 더군다나 유럽에서 러시아를 제외하고 아직 버티고 있는 유일한 적수 영국을 경제적으로 봉쇄하는 데 러시아가 협조하지 않는다고 보았으므로 차르 알렉산드르 1세에게 충분히 불만을 품을 만했다. 물론 무역 봉쇄에 협조 하지 않는다고 대국에 쳐들어간다는 것은 그리 현명한 생각이라고 보기 어렵다. 나폴레옹의 가장 큰 실수라면, 매사에 뜻을 관철하는 수단이 거의 전쟁으로 시작해 전쟁으로 끝났다는 점. 나폴레옹은 외 교와 협상에는 영 재주가 없었다. 나폴레옹은 누군가를 공격하긴 해야겠다고 일단 마음을 먹은 상태에서, 러시아가 그나마 영국처럼 섬은 아니니 만만하다고 생각했 을 것이다. 그리고 기후를 고려했을 때 러시아를 침공할 시간이 사실상 석 달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전략을 이렇게 짰다. '모스크바로 곧장 쳐들어가 그곳에서 러시아와 총력전을 벌인다. 러시아 군대는 귀족들이 부리는 용병 무리에 지나지 않으니 우리처럼 사기가 드높 고 전투력이 월등한 군대의 적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계획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적이 예상대로 나오지 않으면 실제로는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 계획도 그런 경우였 다. 러시아군은 예상과 달리 나폴레옹 군대의 진격에 별 저항을 하 지 않았다. 계속 후퇴를 거듭하면서 큰 전투를 가급적 피하고, 동시 에 초토화 전술로 프랑스군이 물자를 확보할 수 없도록 하면서 겨울 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수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빠져나오기엔 늦은 상황이었다. 이제 지칠대로 지친 프랑스군 앞에 놓인 운명은 이역만리에서 고국까지 다시 돌아가는 죽음의 행군뿐이었다. 나폴레옹의 철옹성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이로써 나폴레옹은 몰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1941년 히틀러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히틀러도 섬나라인 영국 침 공의 어려움을 깨닫고, 대신 소련을 침공하되 여름이 지나가기 전에 신속히 해치워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당시 히틀러는 소련 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었지만, 자기는 나치이고 소련은 공산주의 자들이니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히틀러는 사실 나폴레옹의 전략을 연구했다. 그리고 같은 실수를 피하기 위한 묘책을 마련해두었다. 병력을 모조리 모스크바로 보내지 않고 셋으로 나누어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와 키예프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폴레옹과 달리 겨울이 다가와도 바로 퇴각하지 않고 버티며 싸울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두 선택 모두 파멸을 자초하고 말았다. 히틀러가 깨닫지 못한 사실은 나폴레옹 때와 전술이 조금 달랐다고 해도 결국 기본 작전은 똑같았다는 것이다(신속 과감하게 적을 치고, 큰 전투를 가뿐히 이기면, 적은 금방 무너진다는 것). 그러니 문제점도 똑같았다(적이 예상대로 행동하리라 철석같이 믿었고, 러시아 겨울의 위력을 여전히 무시함). 독일 수뇌부에는 이러한 문제점을 히틀러에게 지적해줄 수 있을 만한 참모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반대하거나 회의 하는 낌새만 있으면 작전 내용을 참모들에게 꽁꽁 숨기거나 철저히 거짓말로 둘러댔다. 이는 ‘자만심', '소망적 사고', '현실 회피' 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의사 결정 방식이었다.
- 미국이 피그스만에 상륙해 쿠바를 침공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은 집단 사고의 전형적 사례일 뿐 아니라, 집단 사고groupthink'라는 말 자체의 기원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가 케네디 행정부의 이 대실패 사례를 연구하고 나서 만들어낸 말이 바로 집단 사고다.미국은 바로 지척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 쿠바의 정부를 전복시키 려고 오랜 세월 온갖 삽질을 했지만, 피그스만 작전은 그중에서도 가장 굴욕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만하다 (단, 가장 '엽기적' 이었던 사건 은 따로 있는데, CIA가 조개에 폭발물을 장착, 스쿠버다이빙하는 피델 카스트로를 유인해 암살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조개를 대량 구입했던 일을 꼽아야 할 것이다). 기본 계획은 이랬다. 카스트로에 반대하는 쿠바 망명자들을 훈련 시켜, 이들로 하여금 미국의 공중 지원하에 침공에 나서게 한다는 것. 이들은 오합지졸 쿠바군과의 전투에서 쉽게 승기를 잡을 것이 고, 이를 본 쿠바 주민들은 그들을 해방군으로 환영하며 공산주의 정권에 맞서 들고일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아주 간단했다. 미국은 이미 과테말라도 그런 식으로 처리한 적이 있었다.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존 F. 케네디가 리처드 닉슨을 이기고 대통령이 되면서였다. 이 작전은 애초에 부통령이던 닉슨이 지지했고 그가 백악관의 새 주인이 되리라는 전제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그리 호방한 기질이 아니었고, 자칫 소련의 심기를 건드려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우려했다(실제로 우려할 만했다). 그 래서 작전의 일부 변경을 주장했다. 미국의 작전 지원은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즉 공중 지원 불가), 또 상륙 지점도 인구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바꿀 것을 요구 했는데, 그렇다면 '민중 봉기 유도' 시나리오는 실현이 어려워질 게 뻔했다. 원래부터도 상당히 낙관적인 작전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누가 봐도 폐기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전혀 그럴듯한 작전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당국자들은, 마치 그럴듯한 작전이라는 듯 일을 계속 진행해나갔다. 질문하는 사람도 없었고 따지고 드는 사람도 없었다. 당시 케네디 행정부의 고문이었고 이 계획을 반대했던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가 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누구나 동의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묘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열렸고, 자신은 어이없는 계획 이라고 생각했지만 회의 석상에서는 왠지 잠자코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그때 내가 소심하게 질문 몇 개를 던지는 것 이상으로 나서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하자면, 그 허튼짓을 고발하고 싶은 충동이 당시의 회의 분위기에 눌려버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살다 보면 그런 회의를 경험하게 되니,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다.
- 케네디는 이 의사결정의 실패를 통해 교훈을 톡톡히 얻었다. 그 덕분에 그다음 해에 찾아온 쿠바 미사일 위 기에서 수뇌부가 더 냉철한 판단을 할 수 있었고, 이로써 전 세계가 파국을 모면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사건의 충격이 워낙 컸기에, 미국은 다시는 집단 사고에 빠져 부실한 침공 작전 을 허술한 정보에 기대어 뚜렷한 계획도 출구 전략도 없이 밀어붙이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 콜럼버스의 탐험 계획은 자기가 직접 구한 두 계산값에 전적으 로 기반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지구의 크기고 다른 하나는 아시아 의 크기였다. 그런데 두 계산값 다 오차가 심했다. 일단 아시아가 실제보다 훨씬 길다고 계산해서(실제도 무척 길지만), 순풍만 불면 일본 을 실제보다 수천 킬로미터 더 동쪽에서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 각했다. 더 큰 실수는 지구 둘레의 계산에 9세기 페르시아 천문학자 알파르가니의 연구를 참고했다는 것. 그건 좋은 참고 자료가 아니었 다. 일찍이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 수학자 에라토스테네스도 제대 로 구해냈고, 그 밖에도 꽤 정확한 추정값이 많이 나와 있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는 따로 있었다.
- 콜럼버스의 가장 큰 실수는 알파르가니가 언급한 마일'이 당연히 로마 마일(약 1,500미터)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알파르가니가 사용한 단위는 아랍 마일(약 2,000~2,100미터)이었다. 즉, 알파르가니가 언급한 거리들은 콜럼버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길었다. 콜럼버스는 세상의 크기를 실제의 약 4분의 3으로 착각했다. 게 다가 일본의 위치를 실제보다 수천 킬로미터 더 가깝다고 착각했으 니, 결과적으로 항해 일정을 실제 필요한 일정보다 훨씬 짧게 잡고 그에 맞추어 식량과 물자를 준비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 네 세상 크기를 잘못 안 것 같은데” 하며 의문을 표했지만 콜럼버스 는 자기 계산을 꿋꿋이 믿었다. 그러니 콜럼버스가 카리브 제도를 덜컥 맞닥뜨린 건 사실 천만다행이었다(아시아까지 가기 전에 웬 다른 대륙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여기서 콜럼버스가 알파르가니가 쓴 단위를 오해한 것은 퍽이나 유럽 중심적 사고였음을 짚고 넘어갈 만하다. 그러나 그가 그 지독 한 유럽 중심적 사고로 그 후에 벌인 일들에 비하면 이건 잘못 축에 도 들지 않는다. | 만약 콜럼버스가 계산을 좀 제대로 해서 항해를 포기했더라면 세 계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포르투갈어 사용 인구는 좀 더 늘었을지 몰라도 포르투갈인들은 당 시 유럽 최고의 항해 기술자들이었고, 콜럼버스보다 몇 년 늦게 아 메리카 대륙 곳곳에 도달했다
- 오늘날까지도 다리엔 사건은 스코틀랜드를 양분하고 있다.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투표 때는 양편 모두 다리엔을 상징 적 사건으로 거론했다. 민족주의자들은 다리엔을 잉글랜드가 스코 틀랜드를 항상 훼방 놓고 탄압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우화로 삼았고, 통합주의자들은 안정을 버리고 비현실적 야망을 좇는 위험성을 보 여준 교훈으로 삼았다. 다리엔 이야기가 상징하는 바는 크다. 그것은 한 나라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교역 상대국과의 정치적 연합을 외면하고 무한한 세계적 영향력이라는 환상을 찾는 한편, 이를 부추긴 제국주의적 자유 무역 광신자들이 막연한 계획을 애국적 피해 의식으로 포장하면서 현실 상황에 대한 전문가들의 경고를 시종일관 무시한 이야기다.그렇다면 오늘날의 상황을 상징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생각해 볼 문제다.
- 외교란 한마디로, 대규모 인간집단끼리 서로 개자식처럼 굴지 않는 기술이다.
- 우리는 외교적 선택이란 어찌 보면 세력 판도 변화를 예 측하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그걸 정확히 예측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니, 오판이 잦은 것도 놀랍지 않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늦봄의 스위스, 우스꽝스러운 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내가 독일 정부에 제안을 해왔다. 러시아인인 그는 정변에 휩싸인 고국으 로 돌아가고자 간절히 원했지만, 전쟁 통이라 유럽을 가로질러 이동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최선의 귀국 경로는 독일을 통과해 북쪽 으로 도달하는 길이었지만, 그러려면 독일의 허가가 필요했다. 하지 만 독일 정부는 그의 정치 이념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그가 주장한 논리는 간단했다. 자신과 독일은 여러모로 다르지만 공동의 적을 두고 있다고 했다. 그 적은 그가 타도하고자 하는 현 러 시아 정부였다. 현재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고 있던 독일은, 러시아가 뭔가 소요를 겪어 최전선에 자원을 집중하지 못한다면 좋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독일은 그의 요구를 수락했다. 사내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가 거느린 러시아인 30명을 열차에 태워 북쪽 항 구로 보내주었고, 일행은 그곳에서 스웨덴과 핀란드를 경유하는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대단해 보이는 반군 무리는 아니었지만 없 는 것보다는 나을 듯 보였다. 독일 당국은 그들에게 돈까지 쥐어주 었고, 이후 몇 달에 걸쳐 계속 자금을 지원한다. 독일은 특이한 이념 을 가진 이 정치인이 소란을 좀 피우도록 지원하면 러시아가 한동안 교란되고, 결국 세상에서 조용히 잊히리라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내가 레닌이었다. 독일의 계책은 여러모로 완벽히 먹혀들었다. 오히려 예상보다 큰 성공이었다. 레닌의 볼셰비키는 러시아 당국을 괴롭히고 교란하기 만 한 게 아니라, 완전히 박살내버렸다. 6개월 남짓 후, 러시아 임시 정부는 전복되었고, 레닌은 권력을 잡고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했다. 독일은 휴전을 얻어냈다. 레닌을 열차에 실어 보냈던 4월까지만 해도 가망이 없어 보였던 일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 계책은 대성공이라고 볼 수 없었다. 일단 동부 전선에서 얻어낸 휴전은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았다. 또 그 후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린 소련 과 독일과의 관계는 급속히 틀어졌다. 그리고 수십 년 뒤 또 한 차례 세계대전이 지나간 후, 독일 땅의 절반은 소련이 점령하고 만다.독일은 '적의 적은 동지'라는 흔한 착각에 빠진 것이다. 그게 꼭 틀린 말은 아니다. 동지애의 유효기간이 엄청 짧을 뿐이다.
- 국제정치라는 게 참 어렵다. 숭고한 이상이 설 자리는 별로 없고, 실리를 생각하면 마음에 꼭 드는 상대가 아니더라도 아쉬운 대로 손을 잡아야 할 때가 많다.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도 번번이 곤경을 자초하는 일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적의 적도 대개는 처음 적 못지않게 나쁜 놈이라는 것.
- 몽골 제국은 몇 세대 후에 파벌 싸움과 내분에 휘말려 분열됨으로써 제국의 전형적 말로를 맞았지만, 그 유산은 일부 지역에서 계승 되어 20세기까지 이어졌다.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들이 통치하던 부하라 토후국이 1920년 볼셰비키에게 정복되면서, 칸 왕조는 마침내 막을 내린다.(1838년, 찰스 스토더트라는 영국 군인이 부하라 토후국을 영국 제국의 우방으로 포섭하려고 외교사절로 방문했다가 공교롭게도 무함마드의 바보짓을 축소판으로 재현하고 만다. 나스룰라 칸을 별 이유 없이 무심코 모욕하는 바람에, '벌레 구덩이'로 알려진 대단히 불쾌한 곳에 던져진 것. 그곳에서 그는 곤충 떼에 살을 뜯어먹히는 끔찍한 형벌을 몇 년 동안 받다가 결국 처형당했다. 이름에 '칸'이 붙은 사람에게 허튼짓하지 말자.)
- 몽골이 정복했던 많은 지역은 문화와 역사와 문헌이 모두 파괴되었고, 주민들이 송두리째 추방되었으며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긍정적인 면을 찾자면, 그 모든 사태의 발단이 되었던 교역로가 통합되고 안정화되면서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문화 교류를 가능케 했고, 이는 유라시아 전역에 근대 문명기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부정적인 면이라면 그 교역로를 통해 문화뿐 아니라 질병도 옮겨졌다는 것이며, 특히 흑사병은 또 한 차례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모든 사달은 콤플렉스 덩어리인 한 사내가 외교는 애송이들이 나 하는 짓이라 여기고 단순한 통상 요청을 사악한 계략으로 착각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 과학, 기술, 산업시대의 태동은 인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제 우리는 우주에서도 사고를 칠 수 있게 되었다.
-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세계는 토머스 미즐리가 남 긴 유산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의 두 주요 발명품이 모두 전 세계 대다수의 나라에서 금지되거나 퇴출되었다. 환경 속에 이 미 엄청난 양으로 퍼진 납은 현재 그대로다. 납은 분해되지도 사라 지지도 않으며, 제거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힘든 작업이다. 하지 만 좋은 소식은 적어도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아이들이 예전처 럼 납을 많이 들이마시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의 혈중 납 농도가 이제 대부분 중독 수준 밑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만세다. 한편 오존층은 CFC가 널리 금지된 이후로 서서히 회복되어가고 있 다. 앞으로 별 문제 없으면, 오존층이 미즐리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 는 시점은 아마도, 음, 2050년쯤일 것으로 보인다. 인류 파이팅! 어쨌거나 미즐리는 확고한 명성을 남겼다. 「뉴 사이언티스트」에 따르면 그는 “그 자체가 환경 재앙이 된 인간" 이었다. 역사학자 J. R. 맥닐은 저서 『20세기 환경의 역사Something New Under the Sun」에서 그를 “지구 역사상 환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단일 생명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그가 현대 세계의 모습을 예기치 못한 여러 면으로 바꾸어놓은 것 또한 사실이다. 노킹 방지 연료의 보급으로 자동차는 세계적으로 주요한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단순한 이 동 수단을 넘어 지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개인의 정체성 과 개성을 강력히 드러내는 심볼 역할을 하게 되었다. CFC는 우리 가 집에서 쓰는 냉장고뿐 아니라 에어컨이란 물건을 가능하게 했으 니, 그것이 없었더라면 세계의 대도시들은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두 발명품은 서로 결합해 시너지를 일으키기까지 했다. 강력한 파워의 자동차와 차량용 에어컨이 결합하면서, 일상적인 장거리 운전이 어렵지 않고 즐겁기까지 한 일이 되었다. 예컨대 광활한 미국 서부와 중동 지역 대부분의 땅만 생각해보아도, 토머스 미즐리의 발명이 없었다면 세상의 모습은 아마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또 문화 전반적으로도 파급 효과가 있었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영 화관이 냉방 시설을 초창기부터 도입한 덕분에 대공황 시절 여가 활 동으로 영화가 인기를 누릴 수 있었고, 영화 산업은 황금기를 맞으 며 문화적 영향력을 굳혔고 실로 20세기를 대표한다고 할 만한 엔 터테인먼트 장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토머스 미 즐리는 LA를 통째로 발명해낸 것이다. 자동차와 에어컨으로 돌아가는 도시, 영화 산업의 중심지 LA 말이다. 그러니 다음에 영화관에 앉아 범죄 조직과 맞서 독불장군처럼 싸우는 경찰 이야기가 나오는 심심풀이 땅콩용 할리우드 영화를 보게 되면, 그 모든 것이 다 토머스 미즐리가 자기가 발견한 화학물질이 별 탈 없을 것이며 갤런당 3센트를 더 벌 수 있으리라 생각한 덕분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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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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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반일 종족주의'라는 쓰레기 같은 책을 집필한 이영훈, 이우연 등의 또라이 보수주의자들은 무슨 생각으로 대한민국에 발을 딛고 살고 있는 것일까. 무슨 경제적 이익을 위해 반일 종족주의라는 새로운 용어까지 만들어내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저자는 이영훈이다. 서울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고 하는데, 서울대씩이나 나온 지식인이 왜 이러나 싶을 정도다. 아무리 학문연구의 자유가 있을지라도, 아직도 살아계신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미안하지도 않은가. 전공인 경제에 대해서나 연구할 것이지, 왜 갑자기 역사학에 집적대는지 모르겠다.

이 책(신친일파)은 호사카 유지가 쓴 책이다. 저자는 88년부터 한일관계 연구를 위해 서울에 거주하고 있으며, 03년에는 대한민국으로 귀화했으며, 현재 세종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런 책이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에 의해 씌어졌을까하는 부끄러움이 앞섰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오히려 일본과 한국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중간자적인 입장에서 객관적 사실과 사료를 바탕으로 조목조목 '반일 종족주의'의 주장을 반박하는 저자의 필력과 지식에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가장 적임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주제는 강제징용, 위안부, 독도 및 일제강점이다.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이영훈은 이들은 자발적으로 돈을 벌러 일본에 간 것이라고 주장한다. 상식적으로 어느 누가 목숨을 내걸고 전쟁통에 남의 나라의 탄광으로 전장의 위안부로 자발적으로 가겠는가? 모두 납치, 사기에 의한 일본의 범죄일 뿐이다.

참고로 이영훈, 이우연 등은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속이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87년 경제사학자 안병직과 이대근이 공동으로 설립한 연구소라고 한다. 안병직은 뉴라이트 재단의 초대 이사장이기도 하며,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결국 '반일종족주의' 저자들은 보수정권의 정권재창출을 목표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활동을 한 친일파에 대한 단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의 역사현실 앞에 정권창출을 목적으로 친일행각을 벌이는 이들이 아직도 버젓이 학문이라는 탈을 쓰고 활동하고 있다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 악마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면 안된다. 악마는 거짓말에 교묘히 진실을 섞는다. (엑소시스트 중)

- 한국인의 정신문화를 '반일 종족주의'라고 폄하하는 이영훈의 논리는 일본 극우세력에게 면죄부를 주는 '이적행위'와도 같다. 필자는 '노예근성'을 되풀이하는 이영훈의 논리와 글이 한국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우려스러움을 떨쳐낼 수가 없다. 필자는 그 우려스러움을 확실히 해결하기 위해 본서를 썼다. 독자 여러분은 본서를 통해 거짓에 사실을 섞어 사람을 속이고 나라를 파멸로 몰아가려는 악마가 있다면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 이우연은 조선인들이 위험한 일에 종사한 것은 조선인들이 돈 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갔고, 당시 노동수요와 노동공급이 맞아떨어진 결과이지 결코 민족차별'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본 기업의 변호사 역할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이우연 의 주장은 당시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간 조선인들과 '모집', '관 알선’, '징용'으로 강제연행된 조선인을 고의적으로 혼동해서 한 말이다. 1945년 8월 15일 패전 시점에서 강제적으로 동원되어 작업 현 장에 있던 조선인 노동자 수는 32만 2,890명이었고, 조선인 군인과 군속은 11만 2,718명이었기 때문에 양자를 합하면 패전시 일본에 있던 '징용'과 '징병’의 범주에 속하는 조선인들은 모두 43만 5,608명이었다. 이 수치는 패전 시 일본에 있던 조선인 총인구 약 200만 명의 22% 정도이자 1939년부터 1945년의 전시 동원 기 간에 증가한 일본 내 조선인 인구 약 120만 명의 약 36%에 해당한다.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이 많았기 때문에 강제 동원이나 강제연행이라는 단어 자체가 잘못 사용되고 있다고 하면서, '강제연행설 허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 돈을 벌기 위해 도일한 조선인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제연행이나 강제 동원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실제로 조선인 약 43만 5,000명은 강제연행된 사 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우연이 말하는 “젊고 건장한 조선 청년들은 주로 일본 정부 와 기업에 의해 전시 동원되었고, 나이가 많거나 어린 조선인들은 전시 동원 기간에 도일한 120만 명 중 나머지 64%에 해당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그러므로 전시 동원 기간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 3명 중 1명은 강제연행되었다는 이야기다.
- 일본이 조선인들을 강제연행해 데려간 곳은 주로 탄광이었다. 그러므로 일본 측이 처음부터 강제연행의 대상으로 삼은 조선인 들은 젊고 건장한 남자들'이었다. 마찬가지로 당시 젊고 건강한 여자들은 ‘위안부나 근로 정신대'로 끌려갔다. 일본 기업들은 자신들의 수요를 보충하기 위해 식민지 주민이 라는 약한 입장에 있는 젊고 건강한 조선인 노동자들을 강제연행 했다. 전쟁 시 동원이니 당연하다는 논리는 타당치 않다. 전범 기업들은 조선인들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만 신경을 썼고, 일본인들과 평등한 대우를 해주지도 않았다. 강제로 시킨 저축은 계약 기간 만기가 된 조선인 노동자에만 돌려주었고, 도주하거나 중 도 퇴직자의 저금은 모두 기업이 가로챘다. 작업장에서의 대우가 일본인과 조선인이 완전히 평등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으므로 '민족차별’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인 노동자의 불만이 쌓여서 패전 후에도 그 한이 풀리지 않는 이유는 불평등한 대우뿐만이 아니라, 불법적 인 일제 강점으로 인해 일어난 부당한 동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침략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한민족을 강제로 가담시킨 일제의 만행 때문이다.
- 일본 기업들은 조선인 노동자와 중국인 노동자, 전쟁 포로들을 착취할 수 있는 만큼 착취하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조선인 노동자 등을 죽지 않을 정도로 혹사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달에 10엔 정도의 용돈은 현재 가치로 2만엔, 즉 20만 원 정도라고 하니 고등학생이 받는 용돈 수준이었다. 이렇게 기업의 관리자들은 여러 명목으로 월급의 많은 부분을 조선인 노동자가 관리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 1965년 청구권 협정과 함께 일본이 지급한 무상 3억 달러의 보상금으로 모두 탕감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지만, 일본이 당시 보상금을 지급할 때 생환자, 즉 살아서 귀환한 자에게 보상금을 줄 수 없고 사망한 자에게만 준다고 했다. 따라서 1945년 시점에 서 생존해 있던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1965년의 청구권 협정의 지 급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중요한 사실을 이우연이나 일본 우파 는 절대로 밝히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일부 부분적인 사실만을 부풀려 그것이 마치 전체적인 진실인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일본 우파 논리의 노예가 된 사람들의 정신 상태 는 구제하기가 어렵다. '노예근성'이 정신을 파괴해버린 것이다.
-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일본군에 의 한 취업 사기 및 납치의 좋은 사례이자, 군이 통제하면서 형식은 여성들을 포주의 사창으로 만들어 일본군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대단히 악덕한 장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탄광에서 기업 들이 사용한 나야納屋 제도와 흡사하다. 기업이 나야 관리인과 계약하고 나야 관리인이 광부의 모집, 나야라는 숙소 관리, 광부들 의 생활 관리, 노동 관리 등을 모두 책임지는 것이 나야 제도였다. 즉 광부들이 기업과 직접 계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나야 관리인 과 계약하는 형태였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 역시 일본군은 포주 를 선정하고, 포주가 여성들의 모집, 인솔, 현지에서의 위안소 관 리 등을 모두 맡았다. 그러므로 ‘위안부'들은 일본군과 직접 계약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지시로 포주와 계약한 것이다
-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문제가 된 이유는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전쟁터가 된 중국, 동남아 등 최전선에는 일본인 여성들보다 훨씬 많은 타민족인 조선인이나 대만인 여성들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이영훈은 “기생제, 공창제, 위안소제는 그 본질적 속성을 변치 않 은 채 한 계열로 죽 이어져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본군 '위안 부들이 모두 원래부터 창부들이었다고 주장하여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범죄성을 물타기 하려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조선의 기생제나 공창제와는 관계없는, 취업 사기와 납치 등으로 여성들을 조선이 아닌 타국으로 강제연행해 일본군 각 부대의 사창으로 만든 새로운 시스템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일본이 타민족 여러 계층의 여성들을 취업 사기나 납치 형식으로 연행해 무력으로 위협하는 환경 속에서 성적 착취를 정당화한 제도이자, 일정한 기간 동안 그녀들을 '성 노예로 만들어서 ‘위안부'들의 자유를 박탈한 범죄였다. 한편 조선시대의 기생은 제도화된 계층적 존재였고, 기생이나 사비를 쓰는 사람들은 같은 민족인 조선인들이었다. 고려나 조선 에서 타민족을 기생이나 사비로 강제 동원했다면 한국은 그 타민 족으로부터 지금도 큰 비판을 받고 있을 것이다. 결국 조선의 기생제와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몽골(원나라)과 명나라, 청나라가 한반도를 영향하에 두었 을 때 고려나 조선은 그 나라의 명령으로 공녀를 바쳤다. 공녀들은 고국에 돌아와도 '환향녀'라고 불리며 사람들의 경멸 대상이 되었다. 한국사의 비극 중 하나인 셈이다. 그런데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처럼 타민족을 성노예로 만든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면 한국은 왜 몽골과 명나라, 청나라 등 중국 왕조에는 강력한 항의와 배상 요구를 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 문제에 대해 일부에서는 한국인들이 일본에는 엄격하지만 중국에는 약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여러 역사적 사실로 일본군 '위안부와 중국에 보내진 공녀는 큰 차이가 있다. '위안부'와 공녀의 차이는 '위안부'가 불특정 다수인 일본 병사들의 성노예였는 데 비해, 공녀들은 중국인의 성 노리개가 되었다기보다 왕궁에 들어가 궁녀가 되거나 중국인의 첩이나 본처가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공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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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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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
- 엄청나게 다양한 오늘날의 개들은 모두 늑대의 후손들이다. 여우, 자칼, 코요테, 심지어는 들개도 아니다. 오직 늑대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유럽의 회색늑대들, 오늘날의 개들은 이 회색늑대와 유전자 서열의 99.5퍼센트를 공유한다. 무엇이 늑대를 우리 곁에 오게 했을까? 과거의 고고학자들은 농업 이 시작되면서 그렇게 되었으리라 추측했다. 기회주의적인 포식자들 인 인간에게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가축의 존재는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었으리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인간의 새로운 시대, 즉 신석기시대를 출발시킨 농업의 가장 오래된 증거는 약 1만 2천 년 전 중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의 골격은 이보다 훨씬 오래된 고고학 유적들에서 발견된다. 인간과 가깝게 접촉해 동맹을 맺음으로써 변화를 겪은 동식물들 가운데 아마도 개가 우리의 가장 오래된 친구인 듯하다. 개를 기른 최초의 사람들은 농부가 아니라 방하기의 수렵채집인들이었으니 말이다. 그 동맹의 시초를 찾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먼 선사시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 지난 몇 년 동안 개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은 엄청나게 뜨거웠다. 새로운 기법들과 새로운 발견들은 이론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잠재력을 안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이야기는 계속 바뀌고 있다. 하지만 고고학적 발견물에 대한 더 정밀한 연대측정법에서부터 더 빠른 DNA서열 분석에 이르는 이 모든 발전에 힘입어, 우리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가까운 친구의 기원을 둘러싼 실제 역사가 마침내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잘 아는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복잡하지 한번 보라. 우리 종 또는 다른 종의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역사인 선사시대에 접근할 때 우리는 수천 년에 걸친 상호작용의 복잡성을 깔끔하게 요약하는 단순한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매우 순진하게 출발한다. 하지만 더 많은 과학적 분석이 실시되고 더 자세한 내막이 드러남에 따라 전체 그림이 변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타이미르 늑대와 고대 및 현대에 존재하는 그 사촌들의 DNA에 대한 연구는 가축화의 뿌리를 찾는 일이 얼마나 험난한지 잘 보여준다. 개의 기원을 빙하기로 밀어 넣었다면, 그다음에 떠오르는 질문은 “개는 어디서 가축화되었을까?”다. 하나의 독립된 지역에서 시작된 다음 다른 곳으로 퍼져나갔을까? 아니면 각기 다른 시기와 장소에서 야생 늑대가 여러 번 개로 변모했을까?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개의 가축화는 지금으로부터 4만 년 전 시작된 듯하지만, 늑대와의 교잡은 그 이후로 오랫동안 계속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고대와 현대의 유전체에 간직된 비밀을 풀 수 있는 최신 유전자 기법 덕분에 우리는 적어도, 시도는 해볼 수 있다.
- 1959년 러시아 과학자 드미트리 벨라예프는 특정 행동을 골라내는 선택 육종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동물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개 가축화의 열쇠가 되는 기본 형질들이 존재했으며, 새끼 늑대에게서 순한 성격이 적극적으로 선택된 반면 공격적인 성향은 가차 없이 제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늑대와 유연관계가 상당히 가까운 종인 은여우 Vaulpesupes를 데리고 그 유명한 가축화 실험에 착수했다. 매 세대 가장 순한 여우들을 선택해 그들끼리 교배시키자 순한 성격이 개체군 내에 빠르게 퍼졌다. 집중적인 선택 육종을 여섯 세대 반복한 뒤에는 매우 순한 개체들이 개체군의 2퍼센트를 차지했다. 열 세대가 지나자 순한 개체들은 18퍼센트로 들었고, 서른 세대 뒤에는 절반에 이르렀다. 실험이 계속되어 2006년이 되었을 땐 거의 모든 여우가 가축화된 개와 똑같이 ? 인간에게 매우 친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변한 것은 여우의 행동만이 아니었다. 여우들 일부는 체색이 여전히 은빛이었지만, 몇몇 여우들은 붉게 변했다. 붉은색도 은여우의 표준 체색이므로 여기까지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개체들은 흰 몸에 검은 반점이 찍힌 모습으로 변했다. 이른바 '조지 화이트Georgian White' 품종으로, 야생에는 없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다. 조지 화이트 품종의 은여우는 여우처럼 생긴 자그마한 양치기 개와 묘하게 닮았다. 어떤 여우들은 은백색 바탕에 갈색이 얼룩덜룩하게 섞인 털색을 가지게 되었고, 어떤 여우들은 축 처진 귀를 가졌다. 게다가 다리와 주둥이가 짧아지고 두개골이 넓적해지는 등, 골격 구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번식 양상도 변했다. 야생 여우는 1년에 한 번만 짝짓기 를 하지만, 순한 암여우는 1년에 두 번 발정기에 들어간다. 또한 순한 여우는 야생 여우보다 성적으로 더 빨리 성숙했다. 인간에게 친근하게 굴고 공격성이 없는 등 실험을 통해 특별하게 선택된 특정 속성 외에도 순한 여우는 우리에게 익숙한 다른 행동 유형들을 보였다. 그들은 꼬리를 위로 들어 흔들었다. 주의를 끌기 위해 낑낑거리기도 했다. 킁킁대며 사육자를 핥는가 하면 인간의 손짓과 시선의 방향에 주의를 기울였다. 여우 육종 실험을 실시한 러시아 과학자들은 그들이 선택한 형질에 함께 딸려 온 듯하지만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개와 비슷한 수많은 기타 형질들을 얻었다. 이 여우 육종 실험은 수천 년 전 가장 친근하고 공격성이 덜한 늑대들이 어떤 식으로 세대를 거치며 빠르게 순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수렵채집인들은 러시아 과학자들처럼 매 세대 10퍼센트의 가장 친근 한 여우들만을 선택적으로 번식시키는 엄밀한 프로토콜에 따라 선택 육종을 실시할 필요가 없었다. 개의 조상인 늑대들이 어느 정도까지 는 자가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가장 친근한 녀석들만 인간 가까이에서 살도록 허락되었을 테니 말이다. 늑대 무리는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로 유연관계가 매우 가깝다. 한 마리가 인간을 용인하거나 나아가 친근하게 굴면 그 무리의 나머지 개체들도 같은 유전자와 행동 경향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따라서 무리 전체, 혹은 무리의 대다수가 인간과 동맹을 맺을 수 있었으리라. 순한 늑대는 인간과 애착을 형성해 손짓과 눈짓 같은 인간의 사회적 단서들을 따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 늑대가 개로 가축화되는 초기 과정은 비록 50년 만에 가축화된 야생 은여우의 경우만큼은 아니더라도, 비교적 빨랐을 것이다. 변화를 일으키는 분자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거의 모든 이론이 다면 발현을 거론한다. 온순함과 너그러움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선택된 특정 유전자 변종들은 연쇄적인 불안정화 효과를 통해 해부 구조와 생리, 행동의 다른 측면들을 광범위하게, 그리고 충분히 빠르게 바꿀 수 있다. 이러한 잠재력을 알면,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던 야생종에서 가축종의로의 변화가 갑자기 훨씬 쉽고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보인다. 어쩌면 늑대가 개, 또는 거의 개'로 변하는 일은 수없이 많이 일어났고, 우리는 그 시험들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계통으로 발전한 한두개의 유전적 흔적만을 찾을 수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빙하기가 절정에 이르렀던 2만 1천 년 전에서 1만 7천 년 전
사이, 유라시아 전역의 동물들이 스트레스 상황에 놓였다. 빙상이 내려와 유럽을 뒤덮었고, 시베리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춥고 건조해졌다. 많은 계통이 멸종했다. 때로는 종 전체가 사라졌다. 갯과 동물의 가축화 실험이 이 환경 재앙으로 주춤했다 해도 놀라울 게 없다. 하지만 어쩌면 빙하기가 정점으로 치닫던 시기에 수렵채집인의 야영지 가장자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던 먹이가 일부 늑대 무리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 모두가 추웠다.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일찍 가축화된 개의 일부 계통이 멸종했다 해도, 개를 곁에 두는 것은 마지막 빙하기의 정점에 수렵채집인의 생존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으리라고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현대 인류가 혹독한 마지막 빙하기를 무사히 지난 반면 네안데르탈인은 그렇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깔끔하고 그럴듯한 설명이긴 한데 그래서 오히려 꺼림칙하다. 너무 간단하지 않은가. 역사는 복잡하다. 가설은 얼마든지 제안할 수 있지만, 그것을 검증할 엄두도 내지 못할 때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개가 일부 수렵채집인 부족들의 생존과 성공을 도왔음을 의심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빙하기 이후로 가축 개의 화석 증거는 유라시아 전역에 나타난다. 8천 년 전 무렵부터는 서유럽에서부터 동아시아에 이르는 광범위한 장소에서 개 화석이 발견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고대 개와 현대 개에서 얻은 최신 유전자 데이터는 단일 기원을 암시하므로 이 모든 홀로세Holocene의 개들이 각 지역의 늑대 개체군에서 따로 가축화되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오히려 개는 이주하는 인간을 따라왔거나, 아니면 인간이 다른 지역에서 데려온 것이 틀림없다.
- 신석기에 인간이 농업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개도 처음으로 유라시아 밖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개는 농업의 확산을 따라갔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개가 등장한 것은 5600년 전 그 지역에 신석기가 시작된 뒤였고, 남아프리카에 도달하기까지는 4천 년이 더 걸렸다. 멕시코의 고고학 유적에 개가 등장한 것은 5천 년 전 무렵으로, 이 역시 최초의 농부가 등장한 시기와 같다. 하지만 남아메리카 남단에 도달한 것은 그로부터 4천 년 뒤였다.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는 아메리 카 대륙에 유럽인이 들어오면서 아메리카 개의 초기 계통들이 완전히 대체되었음을 암시한다. 반면 최근에 이루어진 유전체 전체 조사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지난 5백 년 동안 이주자들과 함께 도착한 유럽 개들이 신세계에 원래 살던 개들과 섞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현대 품종들이 생긴 것은 훨씬 나중이다. 그들은 최신 발명품이다. 그 역사가 유전자에 반영되어 있다. 개의 유전자에는 조상들이 두 차례의 큰 유전적 병목을 통과한 흔적이 있다. 가축화가 시작된 시점에 한 번, 그리고 지난 2백 년에 걸쳐 현대 품종들이 등장 한 시기에 또 한 번이다. 육종가들은 사냥과 목축에 큰 도움이 되는 놀 랍도록 순종적인 개를 생산하기 위해 특정 형질들을 집중적으로 골라냈다. 하지만 선택 육종으로 형질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 그자체가 육종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특정한 모양이나 크기, 색깔, 질감 등을 가진 개들도 육종되기 시작했다. 현대 개 품종들에서 볼 수 있는 형태적 다양성은 여우와 자칼, 늑대를 포함한 갯과의 나머지 동물들을 전부 합한 것보다 훨씬 더 크다.
- 인간과 늑대가 이 행성에서 공존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서로를 피하는 것인 듯싶다. 우리 조상들은 야생 늑대를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그들이 가축이 될 정도로 오랫동안, 하지만 지금의 늑대는 과거보다 더 인간을 기피하는 듯하다. 늑대는 가축화된 개가 됨으로써 여러 모로 변했고 야생 늑대도 변했을 것이다. 야생 늑대를 괴롭히고 사냥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자연선택을 일으키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결국 살아남은 늑대는 인간에게 접근하지 않는 늑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두려움이 많고 우리를 피하는 늑대는 인간이 매개하는 선택의 결과물인 셈이다. 개가 인간이 매개하는 선택의 산물이듯이. 회색늑대와 개의 유전자를 조사하면 개가 된 늑대 계통이 지금은멸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 빙하기가 정점으로 치닫던 무렵은 모든 생물들에게 힘든 시기였으므로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하지만 계통수를 달리 볼 수도 있는데, 그렇게 보면 늑대의 특정 계통은 결코 멸종하지 않았다. 그 계통은 사실 늑대 계통수에서 가장 북적이는 가지, 즉 개다. 유전적으로 말하면 개는 회색늑대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개를 카니스 루푸스Canis nupus라는 회색늑대종 내의 아종으로 명명한다. 즉, 별개의 종canisfamiliaris’이 아니라, 아종 canishutpusfan 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아는 테리어, 스패니얼, 레트리버는 내면은 늑대인 셈이다. 야생의 사촌들보다 꼬리를 더 잘 흔들고 손을 더 잘 핥고 덜 위험한, 훨씬 친근한 늑대 말이다. 농업이 시작되기 수백 년 전에 이미 빵이 중동의 주식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신석기 혁명을 이해하기가 더 쉬워진다. 사람들이 일단 야 생의 곡물을 모아 가공하기 시작하면, 그런 종들 - 보리뿐 아니라 밀 과 그 밖의 곡물들 - 이 작물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한 가지 음식에 의존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얻을 방법이 야생 곡물을 수확하는 것밖에 없다면 리스크가 너무 크다. 일부라도 직접 재배하면 도움이 될 것이 다. 하지만 이는 우리 조상들이 야생식물 재배를 의도적으로 시작했
음을 암시한다. 사실 농업의 시작은 신중하게 세운 계획보다는 우연에 훨씬 더 많은 빚을 졌을 가능성이 높다.


2. 밀
- 야생의 조상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작물화된 곡물의 변화들 중 적어도 일부는 우연히 발생했거나, 적어도 인간 행동의 의도치 않은 결과인 듯하다. 야생 곡물과 작물화된 곡물의 한 가지 중요한 차이는 씨가 달리는 중심축, 즉 (밀의 이삭을 이루는) 이삭 가지의 힘에 있다. 야생형의 이삭 가지는 잘 부러진다. 다시 말해, 익으면 씨가 든 작은 이삭들이 이삭에서 떨어져 바람에 흩어진다. 반면 작물화된 곡물의 이삭은 익은 뒤에도 작은이삭들이 그대로 붙어 있다. 이삭 가지가 질겨서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 이것은 야생풀이라면 심각하게 불리한 형질이다. 씨가 바람에 자유롭게 날려 흩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야생에서라면 이 문제 많은 돌연변이는 자연선택에 의해 신속히 제거될 것이다. 하지만 작물에서 단단한 이삭 가지는 이점이 된다. 만일 대부분의 이삭이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수확한다면 잘 부러지는 이삭 가지를 가진 이삭은 이미 씨의 대부분을 잃은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단단한 이삭 가지를 가진 돌연변이 식물은 작은이삭들 전부를 붙잡고 있다. 아직 달려 있는 씨는 고스란히 타작마당으로 가, 일부는 식량으로 먹히고 일부는 다시 뿌려진다. 결국 단단한 이삭 가지를 만드는 씨와 식물의 비율은 매 세대 증가하게 된다. 이는 자가선택을 하 는 형질의 또 다른 사례다. 농부들은 모든 씨를 붙잡고 있는 식물을 굳이 적극적으로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저 밀의 대부분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이 수확하는 밀 중에는 이삭 가지가 단단한 유형이 많을 테니 말이다. 즉, 이 특정 형질의 확산은 초기 농업 관행의 의도치 않은 결과였을 공산이 크다.
- 초기 농부들이 큰 날알이 달리는 식물을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선택함으로써 낟알 크기가 커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꽤나 합리적인 추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 형질은 우연히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초기 농부들은 개별 낱알의 크기보다는 밭의 크기와 생산성을 키우는 데 집중했을 텐데, 낟알이 커서 모종이 더 왕성하게 자라는 변종은 낟알이 작은 변종과의 경쟁에서 유리했을 것이다. 모종 사이의 경쟁은 바람에 흩어지는 야생종에서는 일어나지 않지만 씨가 촘촘하게 뿌려진 밭에서는 심해질 수 있다. 해가 가면서 밭은 서서히 난알이 큰 변종으로 채워져 농부들을 기쁘게 했을 것이다.
- 괴베클리 테페의 정말 놀라운 점은 그 연대다. 그 유적은 1만 2천년 전에 건설되었으니 농부가 아니라 수렵채집인들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은 신석기 초기의 인류 사회 발달에 관한 이론에 균열을 일으켰다. 기존의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전개되었다.
팽창하는 인류 집단에는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하고, 사람들은 이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농업을 채택한다. 농업은 잉여 식량의 축적을 촉진한다. 소수의 권력자들이 잉여 식량을 통제하면서 계층화된 복잡한 사회가 탄생하고, 이 새로운 권력 구조는 새로운 발명품인 조직된 종교로 더 받쳐진다.
괴베클리 테페는 이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기념비적 골칫거리임이 분명하다. 메소포타미아 고지대의 귀퉁이인 이곳에서, 적어도 하나의 복잡한 사회가 수렵채집인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괴베클리 테페가 전례 없는 노동 분업의 증거를 제공한다고 판단했다. “우리가 관점을 바꿔야 해요. 수렵채집인들은 보통 우리가 아는 방식의 일을 하지 않죠.” 하지만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달랐다. “그들은 채석장에서 일했어요. 기술자들이 생겨나 돌을 운반하고 세우는 방법을 알아내기 시작했죠. 석공 전문가들도 있었는데, 그들의 일은 돌로 조각과 기둥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그에게 괴베클리 테페는 권력과 비전을 가진 지도자를 갖추고 노동력을 조직할 수 있으며 예술가를 지원할 수 있는 사회가 존재했다는 구체적인 증거였다. 그리고 장식이 새겨진 환상 거석은 조직된 종교를 나타낸다고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강력한 상징을 지니며 사원 건설자들을 위한 신화와 의미를 풍부하게 갖춘, 실로 완연한 모습의 종교였다. 괴베클리 테페 이전까지, 조직된 종교가 농업 이전에 존재했을 가능성은 떠올릴 수 없는 것이었다.

3. 소
- 젖은 미세 화석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매우 특징적인 분자들이 존재하고, 그중 하나는 중요한 단서임이 밝혀졌다. 바로 젖의 유청 단백질, 공식 명칭으로 베타 - 락토글로불린-Lactoglobulin이다. 고고학자들에게 중요한 대목은, 베타 - 락토글로불린이 동물 젖에는 존재하지만 인간의 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베타 - 락토글로불린은 세균에 잘 분해되지 않아서 오랫동안 잔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 단백질의 유용한 특징이 하나 더 있는데, 종마다 달라서 소, 물소, 양, 염소, 말의 베타 - 락토글로불린을 구별할 수 있다는 점이다. 2014년에 한 국제 연구 팀이 광범위한 고고학 샘플에서 베타-락토글로불린을 찾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들은 낙농업의 증거가 풍부한 유럽과 러시아의 청동기시대(기원전 3000년) 치아의 치석에서 소, 양, 염소의 베타 - 락토글로불린을 다량 발견했지만, 낙농업의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 서아프리카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치아의 치석에서는 베타 - 글로불린을 찾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훌륭하다. 게다가 이 연구는 그린란드의 중세 북유럽 유적들이 결국 버려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밝혀주었다.
- 다른 연구에서 질소 동위원소비를 조사한 결과, 5백 년에 걸쳐 기후가 악화되어 그린란드의 바이킹들이 가축 식량을 줄이고 바다표범을 포함한 해양 식량원을 늘리는 쪽으로 식생활을 바꾸었으며, 그런 다음 15세기에 이르러 결국 자신들의 거주지를 포기했다고 추측했다. 생선 뼈는 고고학 유적에 잘 보존되지 않지만, 바이킹들은 아마 바다.표범뿐 아니라 물고기도 먹었을 것이다. 과학자이자 저술가인 재레드 다이아몬드 Jared Mason Diamond가 《문명의 붕괴Collapse)에서 말했듯이, 그린란드의 바이킹들은 기존의 식생활을 병적으로 고집하기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했던 듯하다. 그린란드 거주지를 버린 이유가 무엇이었든, 바다에서 나오는 음식을 먹기 싫어서는 아니었다. 바이킹 치아의 치석 분석은 또 하나의 식생활 변화를 밝혀준다. 서기 1000년에 그린란드의 초기 바이킹들은 유제품을 많이 먹었다. 하지만 4세기 뒤 베타 - 락토글로불린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그들은 더 이상 가축 동물을 먹지 않았고, 유제품도 이용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어쩌면 낙농 동물의 몰락이 이 바이킹 거주지의 종말을 앞당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린란드가 버려진 진짜 이유는 악화된 경제 상황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린란드 바이킹은 바다코끼리와 일각고래 상아를 교역했지만, 아프리카산 상아가 공급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상품은 더 이상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상아 시장이 바닥을 치자, 치즈 한 조각조차 얻을 수 없는 장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소, 양, 염소, 돼지는 인간과 협력 관계를 맺으면서 변모했다. 재배되면서 더욱 굵어진 밀 낱알과 달리, 소와 여타 동물들은 더 작아졌다. 그중에서도 소는 이상하게도 양, 염소, 돼지와 달리 - 신석기, 청동기, 철기를 거치며 유독 계속 작아졌다. 게다가 상당히 작아졌다. 고고학자들은 유럽 소의 고대 뼈를 조사해 신석기 동안 소가 얼마나 작아졌는지 측정했다. 유럽에서 농업은 약 7500년 전(기원전 5500년)에 시작되었다. 3천 년 뒤인 신석기 말, 소는 농업이 시작될 때보다 평균 3분의 1가량 더 작았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 농부들이 인위적 교배를 통해 더 작고 다루기 쉬운 동물을 고의적으로 선택했으리라는 결론으로 도약하기 쉽다. 그러나 가축화 초기라면 몰라도, 농부들이 수 세대 수천 년에 걸쳐 계속 해서 점점 더 작은 동물을 선택했을 확률은 낮아 보인다. 그러면 소는 왜 계속 작아졌을까?
- 중유럽의 신석기 유적에서 출토된 고대 소뼈들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크기가 작아질 뿐 아니라 어린 소의 개체수가 증가한다. 이는 목축의 초점이 고기 생산으로 옮겨 왔음을 암시한다. 어린 소는 빨리 자 란다. 3~4년이면 거의 성숙하고, 이때부터는 성장률이 떨어진다. 성
숙한 동물을 계속 살려두어서는 고기를 많이 얻을 수 없으므로, 보통은 동물들이 성숙하기 전에, 혹은 성숙하자마자 도태시킨다. 거주지 주변의 두엄 더미에 어린 뼈의 비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자체로 보면 이것이 소의 크기 축소와 무슨 관계인지 알기 힘들다. 크 기 축소는 성체 소에서 확인된 현상이고, 어린 소는 표본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체에 이르지 못한 뼈의 비율이 높다는 것에서 간파해야 할 사실이 있다. 바로, 송아지를 낳는 암소들도 대체로 완전히 성숙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번식할 수는 있으나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암소들은 무리 내의 성숙한 자매들에 비해 체중이 적게 나가는 송아지를 낳는 경향이 있다. 더 작고 가벼운 송아지는 더 작고 가벼운 소로 자란다. 이는 유럽의 신석기 소떼에서 젖을 짜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고기가 최우선 목적이 되면서 유럽의 소가 신석기 초보다 신석기말에 33퍼센트가량 작아졌다는 뜻이다.
- 선진국에서는 인공수정을 이용해 번식을 엄격하게 통제하면서부터 소 품종들 사이의 교잡 가능성이 사실상 제거되었다. 육종에 대한 이러한 엄격한 제약은 강력한 선택과 함께, 다수의 독립적이고 분절된 개체군으로 구성되는 종을 초래했다. 각 개체군은 유전병과 불임발생률이 높아지고 개체군 전체가 감염병에 취약해지는 등, 동계교배에 내재된 모든 위험에 노출된다. 유전적 변이가 적은 분절된 개체군은 야생에서 멸종 위험이 가장 높은 집단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엄격하게 통제되는 산업 품종이 전통적인 품종보다 더 생산적일 수 있다. 전통적인 품종을 산업 품종으로 바꾸는 것은 농부들에게 경제성 면에서 생각할 필요도 없는 간단한 결정일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한 가축 품종이 멸종하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모든 유전적 유산' 도 사라진다. 유전학자들은 개체군 분절화와 동계교배가 계속될 경우 소의 미래와 인류의 식량 안보에 미칠 위험을 우려하고 있다. 가축 양과 염소에 대한 우려도 있지만, 이런 동물들의 상황은 소와는 다르다. 여러 종이 존재하며 야생종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소를 현존하는 다른 소과 동물과 교배시켜 잡종을 만들 수 있고 그것이 미래에 유용한 유전적 자산이 될지도 모르지만, 소의 야생 조상은 이미 수백 년 전에 멸종했다.

4. 옥수수
- 옥수수는 별로 까다롭지 않다. 옥수수는 식물계의 코즈모포 리턴'인 듯하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곳에 자라는 곡물이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옥수수는 남위 40도인 칠레 남부의 밭에서부터 북위 50도인 캐나다에서까지 자란다. 또한 해발 3400미터인 안데스산맥에서부터 저지대와 카리브해안까지 번성한다. 옥수수의 세계적인 성공 비결은 그 겉모습과 습성, 그리고 유전자의 엄청난 다양성에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세계적 작물인 만큼 그 역사를 풀기는 엄청나게 어렵다. 옥수수가 전 세계로 퍼진 것은 겨우 5백 년 동안의 일이지만,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옥수수가 도입된 경위에 대한 문서 자료는 매우 모호하다. DNA가 추가 단서를 제공하긴 해도, 세계적인 무역과 교환이 옥수수의 유전적 역사를 뒤엉킨 거미줄로 만들어 버림. 옥수수의 세계화는 인간의 역사(탐사 항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무역로, 제국의 확장과 몰락)와 얽히며 그 흥망성쇠를 뒤따랐다.
- 표현형 가소성과 새로운 유전자 돌연변이는 새로운 형질을 만드는 두 가지 중요한 원천으로서 뛰어나고 독보적인' 옥수수의 다양성을 낳는 데 일조한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 에 기여한 또 다른 요인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야생 친척으로부터 받은 약간의 도움이었다. 초기 옥수수는 멕시코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퍼져나가면서 산지에 사는 테오신트의 아종인 제아 메이스 멕시카나와 교잡했다. 유전학 연구 결과, 고지대 옥수수가 가진 게놈의 약 20퍼센트가 멕시카나로부터 왔음이 밝혀졌다. 작물화된 보리가 시리아사막에서 자라던 야생 변종의 가뭄 저항성을 가져온 것처럼, 옥수수도 확산하는 동안 야생의 친척종들과 교잡함으로써 현지의 유전적 ‘지식'을 최대한 활용했던 셈이다.
- 옥수수는 멕시코에서 고지대와 저지대의 개별 경로를 통해 과테말라로, 그런 다음 더 남쪽으로 이주한 듯하다. 그리고 마침내 7500년전 남아메리카 북단에 도착했다. 이어 4700년에는 브라질 저지대에서 재배되고 있었고, 4천 년 전에는 안데스산맥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옥수수는 남아메리카 북단에서부터 북쪽의 트리니다드섬과 토바고섬, 카리브해의 다른 섬들로 퍼져나갔다. 북아메리카로의 확산은 훨씬 늦어서, 2천 년 전에 와서야 남서쪽 모퉁이에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곧장, 단 2백 년 만에 북동쪽으로 퍼 져나가 오늘날의 캐나다에 해당하는 지역까지 이르렀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접촉이 시작될 때쯤에는 이미 엄청나게 다양한 옥수수 변종들이 생겨나 멕시코에서부터 북동 아메리카까지, 카리브해 연안과 브라질 계곡에서부터 안데스산맥 고지까지 모든 지역에서자라고 있었다. 그 모든 형태의 옥수수는 각기 매우 잘 적응되어 있었고 변이가 풍부한 작물이었다. 즉,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해변에 발을 디디자마자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하드자족과 함께 잠시 시간을 보냈던 경험은, 뭐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의 생활 방식과 나 자신의 생활 방식에 대해 깨우침을 주었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추는 것에서부터 식습관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문화를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 우리는 과거와 다른 현 재의 문화를 장밋빛 안경을 통해 보기 쉽다. 하지만 '서구' 세계의 우리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전통적 생활 식 역시 전부 장밋빛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그들은 가족과 공동체에 중심을 두었다. 그들의 삶에는 '직업'이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실업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이에겐 각각의 역할이 있었다. 아이들도 한 부분을 담당했다. 자식을 낳는 것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해를 끼칠 수있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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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감자
- - 광합성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으며, 각각은 서로 다른 화학 경로를 이용한다. 나무와 관목이 이용하는 형태의 광합성은 광합성의 최초 산물로 탄소원자 세 개를 가진 분자를 만든다. 창의력 넘치는 식물학자들이 그런 식물을 'C3 식물'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다음으로, 풀과 사초 같은 식물들은 약간 다른 광합성을 이용해 탄소 원자가 네 개인 분자를 만든다. 이 식물들은 뭐라고 부를까? 물론 C4 식물이다. CA 경로는 물 분자를 더 효율적으로 이용할 뿐 아니라(건조한 환경에서 유용한 적응이다), 그 경로를 이용하는 식물은 보다 무겁고 안정한 동위 원소인 탄소-13을 더 많이 포획한다. 따라서 C4 식물들에는 탄소-13 이 비교적 풍부하다. 만일 한 동물이 C4 식물(예컨대 사초의 뿌리와 구경이 여기에 포함된다)을 많이 먹는다면, 그 동물의 뼈에도 탄소-13이 풍부해질 것이다. C3 식물과 C4 식물 사이의 이런 차이를 이용해 인류학자들은 유용한 결과를 얻어냈다. 침팬지의 식생활은 주로 잎이 무성한 C3 식물들로 이루어지므로 그들의 뼈에는 C-13이 풍부하지 않다. 약 450만 년전 우리의 초기 호미닌 조상들은 침팬지와 비슷한 C3 식물 위주의 식생활을 한 듯하다. 그러다 기후가 변동을 거듭하던 4백만 년 전~1백만 년 전, 그들이 거주하던 지역은 대체로 더 건조한 초원이 되어갔다. 우리는 약 350만 년 전에 그들이 C3 식물과 C4 식물을 함께 먹고 있었음을 알고 있다. 아마 C4 식물로는 대체로 녹말이 풍부한 뿌리와 덩이줄기를 먹었을 것이다. 땅 밑에 감추어져 있지만 어디에나 존재한 그 식량 덕분에 고대 조상들은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환경에서도 인구를 불리며 번성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어 250만 년 전에 식생활이 둘로 갈라지게 된다. 매우 튼튼한 치아와 턱을 가지고 있는 일부 호미닌은 주로 C4 식물을 먹었다(아마 계절에 따라 풀잎, 씨, 사초, 구경 등을 먹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가 속한 호모속의 초기 구성원들을 포함한 다른 호미닌들은 C3 식물과 C4식물을 계속 함께 먹었다. 정기적인 육식이 우리 조상들의 뇌를 더 크게 진화시키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했다고들 하지만, 최근 몇몇 연구자들이 식물 식량, 특히 덩이줄기처럼 녹말이 풍부한 식물 식량의 역할이 그동안 간과되었음을 주장하고 나섰다. 하나는 문화와 관련이 있고 하나는 유전자와 관련이 있는 두 가지 중요한 발전이 녹말에 묶인 에너지를 꺼내 쓰는 데 엄청난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문화적 발전은 요리의 탄생이고 유전적 발전은 녹말을 분해하는 침 속 효소를 생산하는 유전자의 중복이었다. 이 유전자 중복은 1백만 년 전 이후의 어느 시점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침 속 아밀라아제는 날것인 녹말보다 조리된 녹말에 훨씬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이 유전자 사본의 수가 늘어난 것은 요리가 도입된 직후였을 것이다
- 작물화가 어디서 처음 시작되었든, 그 사건은 야생 감자를 인 간에게 훨씬 더 유용한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야생 감자와 작물 감자의 가장 인상적인 차이는 덩이줄기의 크기와 기는줄기의 길이에 있다. 기는줄기란 새로운 식물을 싹 틔우기 위해 수평으로 뻗는 가느다란 줄기를 말한다. 야생 감자는 기는줄기가 매우 긴데, 이는 새로운 식물이 부모 식물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증식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야생 감자는 덩이줄기가 작다. 작물화는 기는줄기의 길이를 단축 시키고 덩이줄기의 크기를 키웠다. 두 가지 특징 모두 야생에서는 적 응도를 떨어뜨리지만 수확을 쉽게 만든다. 밀의 질긴 이삭 가지 형질 과 비슷하게 야생식물에는 극도로 불리한 특징이지만, 인간과 협력 관계를 맺은 식물에게는 요긴하게 쓰이는 셈이다. 작물화된 감자에는 또한 일부 야생 감자의 맛을 매우 쓰게 만들고 심지어는 독성을 띠게 하는 글리코알칼로이드도 적다.
- 북유럽에서 감자를 늦게 받아들인 데는 금기와 미신 외에 더 세속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순수하게 기능적인 관점에서 보면, 로마 시대 이래 유럽 전역에서 시행된 삼포식 돌려짓기 제도에 감자를 끼워 넣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다른 농부들과 공유하는 큰 밭에서 농부 개개인이 어느 한 뙈기만을 바꾸려면 눈치가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은 감자 확장을 가로막고 있던 문화적 장벽들이, 폭삭 내려앉은 것까지는 아니었을지라도 점차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종교와 정치의 흥미로운 합작으로 감자가 남유럽에서 북쪽과 동쪽으로 진출한 것이다. 17세기 말, 위그노와 여타 개신교 집단이 프랑스에서 쫓겨나면서 가는 곳마다 은세공, 조산술, 감자 재배 같은 다 양한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가져갔다. 18세기 말에는 칠년전쟁의 여파속에서 감자의 또 다른 이점이 입증되었다. 이 작물은 다른 곡물들과 달리 땅속에 있기 때문에 불에 타고 짓밟힌 밭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 프랑스군에서 약사로 일했던 앙투안 오귀스탱 파르망티에r는 프로이센에 포로로 잡혔을 때 감옥에서 감자를 먹었다. 감자를 가축 사료로만 생각했던 그는 이런 대우에 좌절하기보다는 감 옥 식사로 나오는 감자의 영양적 가치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1763년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는 감자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명망 높은 사람들을 초대해 감자 위주의 만찬을 열었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감자 꽃다발을 선물했다. 하지만 프랑스 요리에 이 보잘것없는 덩이줄기의 자리를 확고히 자리매김한 계기는 흉작, 혁명, 기근 같은 연속된 악운이었다. 파르망티에의 개척자 정신은 오늘날 이런저런 형태로 감자를 포함하는 많은 프랑스 요리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지금 파리에 있는 그의 무덤은 그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그 식물에 둘러싸여 있다.
- 다른 아메리카산 수입 작물인 옥수수와 함께 감자는 유럽 인구의 놀라운 증가에 기여했다. 1750년에서 1850년까지 1백 년 사이에 유럽인구는 1억 4천만에서 2억 7천만으로 거의 두 배나 늘어났다. 잉카제 국 건설자들에게 열량을 제공했던 감자는 이제 중유럽과 북유럽 국가 들에서 성장하는 인구에 에너지를 제공하고 도시화와 산업화의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경제성장을 견인했다. 증기로 돌아가는 산업혁명 시대 기계들이 석탄을 먹고 일하는 동안, 노동자들은 값싸고 믿을 수 있고 양이 풍부한 감자를 먹고 일했다. 이어 유럽 정치권력의 균형은 따뜻하고 화창한 남쪽 나라들에서 춥고 칙칙한 북쪽 나라들로 옮겨가기 시작했는데, 18세기와 19세기에 유럽 열강이 부상한 이면에는 여러 복잡한 요인들과 함께 어두컴컴한 땅 밑의 감자도 한몫을 했다. 그리 고 20세기에 찾아온 위기 때도 감자는 군대 식량으로서 제 몫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용 배급품 중에는 안데스 지역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용했던 건조 감자가 있었다.
- 수렵채집 생활 방식은 농경에 비하면 불안정하다. 수렵채집인은 자연에 의존하는 반면, 농부는 수확량을 제어하고 남은 식량을 비상시를 대비해 저장할 뿐 아니라, 잉여 농산물로 부와 권력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연을 통제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심지어는 우리의 착각일수도 있다. 자연의 기본 방식이 변화인데도, 우리는 생물을 고정시켜 변화를 막으려 하고 있다. 우리는 재배종의 진화를 제한함으로써 재배종을 매우 취약하게 만든다.

6. 닭
- 닭 생산이 거대한 글로벌 산업으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전례 없는 규모의 선택 육종뿐 아니라, 육종에 대한 매우 엄격한 규제가 필요했 다. 오늘날 닭 육종과 닭 사육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닭이 낳은 알 을 암탉이 아닌 기계로 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이런 완전한 분업 을 가능하게 한다. 닭 농장주들은 흔히 닭을 대규모로 사육하지만 닭 을 육종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 일은 육종 기업이 한다. 그리고 아비 아젠Aviagen과 코브-밴트리스Cobb-Vantress라는 단 두 개의 거대 다국적기 업이 육종 시장을 지배한다. 이 회사들은 종자닭(순계) 집단을 매우 엄격하게 통제한다. 그들이 보호하는 순계에서 3대째에 이르러 생산된 '종계(부모계)를 육계 육종 농장에 팔면, 그곳에서 개별 유전 계통의 닭들을 함께 교배해 최종 잡종을 만든다. 그 병아리들은 육계 사육 농장으로 보내진다. 우리가 먹는 방목 유기 닭조차 이런 산업적인 육계 육종사에서 온 것일 수 있다. 전통적인 유기농 시장을 위해 천천히 자라는 닭을 전문으로 취급 하는 더 작은 육종 회사들이 몇 곳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닭은 빨리 자라서 단 6주 만에 도축된다. 사실상 우리는 너무 커진 병아리를 먹는 셈이다. 심지어 뼈끝이 연골에서 뼈로 변하기도 전의 병아리 말이 다. 순계인 증조할머니 닭 한 마리가 3백 만 마리의 육계 후손을 볼 수 있고, 이들은 성체가 되지 못한다.
- 동물의 대사뿐 아니라 행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호르몬은 가축 닭의 행동에서 필수적인 한 측면에 기여했다. 바로 모성 본능의 완 전한 상실이다. 이는 야생에서라면 분명 생존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 다. 알을 낳은 뒤 알을 두고 가버리는 암탉은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로 전달할 확률이 낮다. 하지만 가축 닭에서는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알 낳기를 멈추고 알을 품는 암탉은 달걀 생산에 득이 될 리 없다. 야생의 붉은산닭은 1년에 달걀을 열 개도 낳지 못하는 반면, 오늘날의 가축화된 산란계는 3백 개를 낳을 수 있다. 알을 품는 본능이 어떤 식으로든 닭에게서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닭 농장의 농부들이 인공부 화 기술을 개발했을 때 비로소 가능해졌다. 최초의 달걀 부화기는 오래전,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닭의 모성 행동이 눈에 띄게 사라진 것과 관련이 있는 유전적 변화는 훨씬 더 최근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밀과 옥수수의 비탈립성 이삭 가지처럼 알 품는 본능의 상실도 야생에서는 성공적인 번식을 방해하지만, 가축화에서는득이 된다. 유전학자들은 이 행동 변화의 유전적 바탕을 확인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들은 모성 본능에 큰 차이를 보이는 두 품종의 닭에서 유전체를 서로 비교했다. 하나는 알 품는 행동을 상실한 산란용 순계로 잘 알려져 있는 화이트 레그혼White Leghorn 품종이고, 다른 하나는 알 품기를 좋아하는 실키silkie 품종(오골계)이다. 유전학자들은 두 품종의 유전체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두 부위를 찾아냈다. 하나는 5번 염색체에, 다른 하나는 8번 염색체에 있었다. 두 부위 모두, 이번에도 갑상샘 호르모 시스템과 관련이 있었다. 게다가 5번 염색체상의 부위는 TSH 수용체 유전자가 있는 곳이다. 이 유전자의 몇 가지 변화가 1천 년 전 닭의 계군들 사이로 퍼져나갔고, 지금은 산란용으로 육종된 닭과 육계로 육종된 닭 모두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TSH 수용체 유전자에는 더 최근에 일어난 변화도 있는 듯한데, 이는 화이트 레그혼과 실키 같은 현대 품종들에서 나타나는 달걀 생산과 모성 행동의 차이를 설명해준다. 결과적으로 닭의 갑상샘호르몬 시스템을 조작함으로써 한 번의 유전적 변화로 두 가지 표현형 변화를 일으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둔 셈이다. 이번에도 우리는 한 특정 형질에 대한 선택이 또 다른 형질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엔 하나의 유전자가 포동포동한 살집과 산란 행동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유전자, 몸, 행동에 일어난 비교적 최근의 변화들은 가축화가 실제로는 하나의 단독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임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유전자 편집 기술의 도래는, 교황 칙령의 힘을 빌려야 했던 10세기보다 훨씬 빠르게 유용한 변화가 도입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7. 쌀
- 벼의 작물화가 시작된 시점은 중요하다. 같은 시점에 아시아의 반대편 끝에서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자라는 야생 곡류 호밀, 보리, 귀리, 밀를 경작하기 시작했다. 1만 1천 년 전~8천 년 전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자라던 그런 곡류들은 주곡이 되었고, 조와 쌀이 극동지역에서 그랬듯이 야생 풀에서 작물로 변모했다.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절묘하다. 아시아의 정반대 쪽에사는 두 집단의 수렵채집인들이 동시에 야생 풀을 좋아하게 되고 그 풀에 점점 더 의존하다가 결국에는 그것을 작물로 경작하게 되었다. 인간 행동에 일어난 이런 동일한 변화들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 65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양쯔강 계곡에서 동시에 작동한 뭔가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뭔가'는 기후변화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지막 빙하기가 절정에 이른 춥고 건조했던 시기, 야생 벼는 동아시아 열대지방의 습한 레퓨지아에서만 자랐을 것이다. 그러다 약 1만 5천 년 전부터 기온이 올라가면서 대기 중에 증가하는 이산화탄소에 힘입어 야생 벼가 퍼져나간다. 빽빽하게 자라고 낟알이 촘촘하게 맺히는 야생 곡류는 아시아 전역의 수렵채집인들에게 든든하고 수확이 용이한 식량을 제공했다. 유리한 기후 조건 아래 자라고 있던 야생 벼와 조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매력적인 식량 후보였을지도 모른다. 아마 옥수수의 경우처럼, 작물화 과정에서 모든 개체군들이 갖게 되는 형질들을 이미 얼추 지니고 있던 식물 낟알이 더 크고 곁가지가 적은 식물은 이미 훌륭한 식량원처럼 보였으며 수확하기도 쉬웠으리라. 하지만 약 1만 2900년 전, 춥고 건조한 시기가 1천 년 이상 지속된 신드리아스기가 왔다. 야생 식량의 감소에 직면한 사람들은 필사적으 로 자원을 통제하려 했을 테고, 이미 의존하게 된 야생 풀을 경작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신드리아스기 직전에 인구가 증가해 있었기에, 기후가 악화하기 시작했을 때 자원 압박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서아시아의 밀과 동아시아의 쌀, 그리고 아마도 중앙아메리카의 옥수수까지, 모두 신드리아스기를 계기로 인류와 손을 잡고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동안 이어지는 동맹을 맺었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의존할 수 있는 자원인 곡류는 식생활에서 더 중요해졌고, 결국에는 주곡이 되었다. 경작은 그다음이었을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관과는 매우 다른 관점이다. 독창성과 창의력에 힘입은 승리의 전진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일. 어려운 시기에 처해 어쩔 수 없이 생활 방식을 바꾸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순응한 사람들, 아시아의 정반대쪽에서 동시에 곡류가 주곡이 되고 그런 다음 경작이 이루어진 상황도, 선택이 아니라 기후 악화가 가져온 필연으로 본다면 충분히 납득이 된다.
- 콜럼버스의 '발견의 항해’ 이후, 작물화된 벼는 대서양 교역의 일부
가 되어 구세계에서 신세계로 건너갔다. 오늘날 열대 국가에 거주하
는 라틴아메리카인들에게 쌀은 설탕 다음으로 중요한 단일 열량 공
급원이다. 쌀과 콩의 조합은 카리브해 지역의 요리에서 특히 상징적
이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만, 둘의 제휴는 비교적 최근에 시작되
었다. 두 재료를 섞은 요리는 겨우 몇 백 년 전의 발명품으로 세계화의 초기 요리'로 불렸다. 하지만 기본 개념인 풀의 씨와 콩을 섞는다는 생각은 농업이 시작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있다. 두 음식은 맛과 질감에서 서로를 보완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을 한다. 바로 서로의 결핍을 벌충하는 것이다. 둘의 결합은 인체가 필요로 하지만 만들 수는 없는 모든 아미노산 단백질의기본단위 - 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단백질 꾸러미를 창조한다.

8. 말
- 그건 다른 존재와의 아주 특별한 동반자 관계였다. 인간과 말은 수 백 년에 걸쳐 서로를 알아가고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알아내고, 신뢰를구축했다. 이 관계는 말의 타고난 성향, 그들의 본성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뭔가에 의존하는 듯도 하다. 즉, 그들도 개와 마찬가지로 종을 뛰어넘는 동반자 관계를 적극적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타고나기를 사교적인 생물이다. 우리가 가는 도중에, 또는 야영지에 멈출 때마다 조리타는 다른 말들에게 가까이 가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출발 준비를 할 때는 다른 말들을 가볍게 밀기도 했다. 머리로 그들의 옆구리와 어깨를 밀고 코를 비볐다. 다른 말들도 조리타에게 똑같이 했다. 우리는 말 몇 마리를 야영지에 묶어둔 채 떠났는 데, 산을 내려와 야영지로 돌아왔을 때 조리타는 그들을 보자마자 신 이 나 히이잉 하고 울었다. 그들도 똑같이 응답했다. 누가 봐도 서로를 다시 만나 기뻐하는 행동이었다.
- 소 치는 사람들은 야생말을 아직은 길들이지 않고 평소와 같이 사냥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앤서니David Anthony는 얼음장 같은 기후가 말을 길들이게 된 동인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소와 양의 경우, 눈 속에서 먹이를 파먹는 일에는 젬병이다. 눈 위에 얼음이 덮이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물을 얻기 위해 얼음을 깨지도 못한다. 하지만 말은 발굽을 이용해 이 모두를 한다. 말은 차가운 초원에 잘 적응된 생물이다. 앤서니에 따르면, 인류는 6200년 전~5800년 전 기후가 나빠졌을 때 소떼가 혹독한 겨울을 헤쳐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고 스텝의 말과科 동물을 잡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가능성으로, 말을 사냥하는 문화에서 자연스럽게 말을 길들이게 되었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동안 말을 사냥해왔고, 그래서 말을 잘 이해했던 사람들이 다른 야생말을 사냥하려는 목적으로 말을 잡아서 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 너무 의도적이고 너무 전략적인 설명 같다. 야생말의 등에 처음 올라탄 이들은 그동안 상상도 못했던 일, 바보 아니면 용감한 자만이 할 수 있었을 이 일을 해보라고 서로를 부추긴 10대들이었음이 틀림없다.
- 말을 탐으로써 일어난 진전은 말의 가축화만이 아니었다. 기마를 통해 인간은 다른 동물들을 훨씬 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한사람이 걸어서 다니고 개의 도움을 받을 때 2백 마리의 양을 기를 수 있다면, 말을 타고 개의 도움을 받는 경우엔 5백 마리를 통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훨씬 더 넓은 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영역 확장은 분명 목축인들 사이에 무력 충돌을 유발했을 것이고, 따라서 동맹을 맺거나 선물을 주는 것이 중요해졌을 것이다. 고고학 기록에 구리와 금 으로 만든 보석이 급증하는 것은 사람들이 전과 달리 지위를 추구하 고 부를 과시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랐다. 바로 이 시점에 마제석기인 전곤도 출현하기 시작하는데 그중 일부는 말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기마와 전투가 초기 단계부터 밀접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식 기병대는 약 3천년 전 철기시대에 와서야 출현하지만, 다른 부족의 동물을 훔치기 위한 마상 습격과 내전은 말을 타기 시작함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 유전자분석은 진정한 말의 가계도를 복원하고 그 연대를 밝히는 이을 가능하게 했다. 가축 말의 야생 조상들은 가축화되기 훨씬 전인 약 4만 5천 년 전, 프르제발스키 말의 조상들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계통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계통이 갈라진 뒤에도 어느 정도의 이종교배는 계속되었다. 상호 유전자 이동의 증거가 오늘날의 유전체에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종교배의 대부분이 일어난 시점은 오래 전인 약 2만년 전으로, 마지막 빙하기가 정점에 이르기 전이었다. 하지만 빙하기 이후에도 프르제발스키 말의 유전자가 가축 말의 조상들로 일부 유입 되었으며, 심지어는 가축화 이후까지도 유전자 이동이 계속되었다. 더 나중인 20세기 초반에는 거꾸로 현대 말에서 프르제발스키 말로 유전자가 이동한 증거가 존재하는데, 가축 말 유전자가 프르제발스키 말로 유입된 이 마지막 사건은 인간이 프르제발스키 말을 기르며 포획상태에서 교배시키기 시작한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두 종류의 말 집단이 실제로 교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둘은 별개의 종으로 간주될 만큼 형태적으로나 유전적으로나 뚜렷이 구분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염색체 개수도 다른데, 염색체 개수 차이는 흔히 이종교배를 가로막는 완벽한 장벽으로 간주된다. 가축 말은 예순네 개의 염색체(서른두 쌍)를 가지는 반면, 프르제발스키 말은 예순여섯 개(서른세 쌍)를 가진다. 포유류의 난자 또는 정자 가 만들어질 때 정자와 난자에는 몸의 다른 세포들에 있는 유전물질의 절반만 들어가게 되고, 수정 시 난자의 유전물질이 정자의 유전물질과 결합해 다시 완전한 한 벌을 만든다. 난자에서 온 각 염색체가 정자에서 온 짝과 쌍을 이루어야 수정란이 분열을 시작해 배아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 가축 말과 프르제발스키 말이 짝짓기하면, 수정란은 서른두 개짜리 염색체 한 벌과 서른세 개짜리 염색체 한 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식으로든 (심지어 유전학자들조차 깜짝 놀라는 데) 염색체들은 쌍을 이룬다. 쌍을 이루지 못하면 생식력을 갖춘 자손 이 태어날 수 없다. 그리고 현대 가축 말과 프르제발스키 말의 유전체에 남겨진 이종교배의 흔적들은 그 자손들이 생식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후대를 생산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말과 종들 사이에서 탄생한 잡종은 잘 알려져 있다. 버새는 수말과 암탕나귀 사이에서 탄생한 잡종이다. 노새는 반대로 암말과 수탕나귀 사이의 잡종이다. 버새와 노새는 대개 불임이지만, 이따금씩은 그들도 번식에 성공한다. 당나귀가 서른한 쌍의 염색체를 가지고 말이 서른두 쌍의 염색체를 가진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역시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말과 종의 유전체에는 훨씬 더 놀라운 사건의 증거가 들어 있다. 바로, 서른한 쌍의 염색체를 가진 소말리 당나귀와 스물세 쌍의 염색체를 가진 그레비얼룩말 사이에 이종교배와 유전자 이동이 일어난 일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생물학의 작동 방식과 관련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종의 경계에는 유전체학 이전에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구멍이 많은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염색체 개수의 차이조차 우리 생각과 달리 번식의 장벽이 되지 못하는 듯하다.
- 말 소유자들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 적어도 짐작은 하고 있었 을 말의 매혹적인 행동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과학 연구에 의해 이제 막 해명되기 시작했다. 증거들에 따르면 고양이와 개는 신체와 음성 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듯하다. 실제로 개는 어떤 것이 행복한 사람의 얼굴인지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들도 표정을 지을 뿐 아니라 다른 말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최근 한 연구에서는 말들에게 화난 표정, 찡그린 표정, 행복한 표정을 짓는 사람의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웃는 얼굴에 비해 화난 얼굴을 볼 때 말의 심박수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말들이 사람의 감정을 읽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능력을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오래전부터 다른 말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해석할 수 있었던 말들이 가축화된 뒤 인간에 대해서도 똑같이 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말이 인간과 지내며 학습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예컨대 분노를 나타내는 다른 행동 단서들을 화난 사람의 얼굴과 연결 짓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 능력은 그들의 야생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몸짓에서 감정을 유추하는 타고난 성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신중하게 설계된 또 다른 최신 연구에서는, 말이 우리 행동을 해석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행동에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말의 몇몇 몸짓들은 실제로 의도를 가진 의사소통으로 보인다. 실험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먹이가 담겨 있지만 가닿을 수 없는 양동이를 향해 목을 쭉 늘이는 말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들은 인간 실험자를 쳐다본 뒤 양동이를 가리켰고', 그런 다음 다시 실험자를 쳐다보았다. 실험자가 멀리 가버리면 그런 행동을 멈추었으며, 실험자가 가까이 다가오면 시선을 더 자주 교차시켰다. 또한 말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흔드는 몸짓을 이용해 주의를 끌었다. 이는 말들이 의사소통을 원할 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들의 신호를 수신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말들이 가축화되는 단 몇 천 년 사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진화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것이 타고난 능력일 가능성도 낮다. 그보다 말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다른 말들과 그리고 지금은 인간과도 상호작용 할 때 이런 종류의 행동을 학습할 수 있는 유전적 소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즉, 그 행동 자체는 아닐지언정, 행동을 발달시킬 수 있는 성향은 타고난다는 얘기다. 말이 개처럼 사교적인 본성을 가진 동물이라는 것은 말이 또 다른 사교적인 동물과 협력하기에 적합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9. 사과
-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는 작은 열매를 맺는 나무들의 한 계통이 곰이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과가 열리는 새로운 종으로 바뀐다. 작은 사과는 매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소화관을 그대로 통과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나올 경우 성공적으로 발아할 확률이 낮다. 사과안에 박힌 사과 씨는 발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불리하게 생겨먹었나 싶겠지만, 새로운 사과나무가 부모 나무 밑에서 싹을 틔워 부모와 경쟁하는 것을 막는 방편이다. 큰 사과의 경우 씹어 먹을 수 밖에 없으므로 씨가 노출된다. 발아로 가는 필수적인 단계다. 이빨에 깨물려 떨어져 나온 사과 씨는 장을 그대로 통과하고, 그것이 항문으로 나오면 부모에게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장소에서 새로운 나무가 될 확률이 높다. 곰의 항문에서 나온 사과 씨는, 말하자면 비옥한 두엄더미에 실려 숲 바닥에 떨어지는 셈이다. 하지만 곰 배설물이라는 비료가 있다고 감안해도, 숲 바닥은 싹을 틔우는 데 이상적인 환경이 아니다. 다행히 숲속에는 사과 씨를 파묻어줄 다른 대형 포유류가 존재한다. 멧돼지는 흙을 헤집고 휘젓는 위대한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씨 가 성공적으로 발아할 확률을 높인다. 하지만, 갈색곰(그리고 멧돼지)이 중앙아시아의 숲에 사과 씨를 퍼뜨리는 놀라운 일을 해냈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해도, 이 과일이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마침내 전 세계로 흩어지도록 촉진한 것은 인간과 그들의 말이었다.
- 밀과 보리는 서쪽에서, 조는 동쪽에서 중앙아시아로 왔다. 이제는 중앙아시아가 나머지 세계에 선물을 줄 차례였다. 야생 사과나무 숲을 관통하는 원시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하던 사람들과 그들의 말은, 사과를 안장주머니에 넣고 다니거나 먹으며 이를 고향 밖으로 널리 퍼뜨렸다. 따지고 보면 사과나무의 열매는 씨를 퍼뜨리는 수단으로 진화한 셈이다. 사과가 맛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니, 자신의 씨를 널리 퍼뜨리게 하려는 방책이었던 것이다. 인간과 말은 곰만큼이나 사과를 좋아한다. 그리고 말은 곰과 멧돼지의 일을 둘 다 할 수 있다. 사과의 과육을 씨에서 떼어내고 그 씨를 퇴비 더미에 파묻는 일뿐아니라 발굽으로 땅 속에 씨를 박아 넣는 것까지. 이렇게 해서 사과는 자유롭게 꽃가루받이가 되고 자연적으로 씨뿌리기가 이루어지는 묘목으로서 널리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본질적으로 야생식물이었지만, 두 발로 걷고 네발로 걷는 친구들이 그들을 도왔다.
- 접붙이기는 우리가 한 그루 '부모'에게서 수백 그루의 사과를
복제할 수 있음을 뜻한다(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부모가 아니라 일란성쌍둥
이다). 접붙이기에는 다른 이점들도 있다. 만일 씨를 심는다면, 그것이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수년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미성숙한 대목에 성숙한 나무의 접가지를 붙이면 금방 열매가 맺히기 시작할 것이다. 미성숙한 단계를 건너뛰는 것이다. 언제든 새로운 재배종을 대목에 붙일 수 있다. 대목을 신중하게 고르면 나무의 크기에도 영향을 미쳐, 원래는 거대한 나무인 재배종에서 난쟁이나무를 만들 수도 있다. 어떤 대목은 재배하고자 하는 품종에는 없는 유리한 특징, 예컨대 해충 저항성이나 가뭄 저항성을 가져다준다. 게다가 접붙이기는 병든 나무를 살리는 방법으로도 이용된다.
-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근동 지역에서 유럽 전역으로 달콤하고 통통한 재배종 사과가 - 대체로는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아 - 확산된 것을 사과의 최초의 대규모 확산으로 볼 수 있다. 로마제국의 몰락과 함께 과수원은 버려지게 되지만, 서유럽의 경우 사과는 수도원 정원에서 살아남아 12세기에 시토 수도회의 확장과 함께 다시 한번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98년 웨일스의 바드시섬에서, 붉은색 황금사과가 열리는 사과나무 한 그루(아마 그곳 수도원 과수원의 마지막 생존자였을 것이다)가 자라고 있는 것이 발견되어 지금은 다시 재배되고 있다. 한편 동유럽에서는 사과가 8세기 비잔틴제국의 몰락을 딛고 살아남아 이슬람 세계에서 신중하게 관리 재배되고 있었다. 그러다 16~18세기, 유럽 식민주의 국가들이 남북 아메리카와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태즈메이니아에서 재배종 사과를 심기 시작하면서 사과의 두 번째 큰 확산이 일어났다. 1835년 칠레에 상륙한 다윈은 사과 과수원으로 둘러싸인 발디비아 항구를 발견했다. 태즈메이 니아는 훗날 '사과 섬'으로 알려지게 되니, 말하자면 아발론의 대척점 인 셈이다. 사과의 두 번째 '디아스포라'는 온대 전역의 다양한 기후에 적합한 엄청나게 다양한 품종의 사과를 낳았다. 북아메리카에서 사과가 성공한 것은 '야생으로의 회귀'가 수반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야생으로 돌아 간 사과는 씨에서 묘목이 자라났고, 그런 다음에 혹독한 겨울을 나야 하는 새로운 서식지에서 발육이 어려운 개체들이 자연선택에 의해 제거되었다. 자연선택의 체질을 통해 새로운 변종들이 등장한 한편, 재배 품종들은 아메리카 토종 꽃사과들과의 교잡으로 현지의 유용한 적응을 가져왔다. 사과는 새로운 서식지에 맞게 자신을 개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과가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 묘목에 대한 자연선택이 다시 한 번 이루어진 결과, 우리가 아는 현대 재배 품종들이 19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 사과의 다양성은 현대 재배종에서는 비록 억제되어 있지만, 다른종에 비하면 여전히 인상적인 수준이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식물학 탐사 보고서들은 바빌로프가 1929년 알마아타 주변 과수원들을 방문했을 때 내린 결론이 사실임을 확인해주는 듯 보였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먹는 재배품종 사과의 이 엄청난 다양성이 모두 카자흐스탄의 고대 과수원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10. 인류
- 수만 년 동안 호모 사피엔스는 대체로 아프리카 대륙에 한정되어 살았지만, 그런 다음 그 집단은 범위를 확장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최근에 이루어진 매우 포괄적인 유전체 전체 조사는 현생인류가10만 년 전에서 5만 년 전 사이에 일어난 한차례의 대이주로 아프리카를 빠져나와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로 퍼져나갔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아프리카를 떠난 뒤 개척자들은 갈라졌다. 하나의 흐름은 동쪽으로 향해 인도양 해안을 따라 퍼져나가 결국 동남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에 도달했다. 또 하나의 흐름은 북쪽과 서쪽으로 향해 서아시아와 유럽으로 갔다. 동쪽으로 간 이주자들은 아마 훨씬 더 이전에 일어난 이주 때 아프리카에서 나와 오스트레일리아와 파푸아뉴기니까지 도달한 현생인류의 자손들과 만났을지도 모른다. 현재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화석 기록이 너무 적어서, 초기에 동쪽으로의 이주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된 유럽 토착민인 네안데르탈인과의 교잡 시점은 5만 년 전~6만 5천 년 전으로 추정된다. 현생인류가 아프리카 밖으로 확산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이다. 비아프리카인들은 평균 2퍼센트 정도의 네안데르탈인 DNA를 가지고 있는 반면, 아프리카 계통 사람들의 유전체에는 네안데르탈인 DNA가 거의, 혹은 아예 없다. DNA 검사 결과, 나에게는 2.7퍼센트의 네안데르탈인 DNA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나는 '순혈'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다. (아무도 순혈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다. 실제로 종과 아종의 '순혈성'이라는 개념은 환상이요, 현대 유전학이 마침내 잠재운 19세기의 유물이다.) 동아시아인은 대체로 서아시아인이나 유럽인보다 약간 더 많은 네안데르탈인 DNA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추측해볼 수 있다.
첫째는 동아시아인의 조상들이 서유럽인 집단에서 갈라져 나온 뒤 네안데르탈인과 다른 집단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교배했을 가능성이다.
둘째, 우리는 네안데르탈인 DNA가 현생인류 유전체에 처음 들어온 뒤로 약한 자연선택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서쪽 집단과 동쪽 집단 모두의 조상들은 애초에 네안데르탈인에게서 이입된 같은 양의 DNA를 가지고 있었고, 그런 다음 자연선택이 서유라시아인 유전체에서 더 많은 양을 제거했을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서쪽 집단에 네안데르탈인 DNA가 적은 것은 네안데르탈인 DNA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북아프리카 이주 집단들과 섞임으로써 일어난 희석 효과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현생인류 조상들과 엮인 것은 네안데르탈인만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 태평양 남서쪽 멜라네시아의 섬들에 사는 현대인의 유전체에서 또 다른 구인류 집단과의 교잡 흔적이 발견된다. 멜라네시아인 유전체 DNA 중 3~6퍼센트는 또 다른 유형의 조상에게서 온 것이다. 그 조상은 시베리아의 데니소바 동굴Denisova Coin에서 나온 손가락 뼈 한 점과 치아 두 점으로만 알려져 있는 종이다. 화석 증거가 너무 적어서 우리는 이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뼈와 치아에서 추출한 고대 DNA를 통해 그들이 현생인류도, 네안데르탈인도 아니라는 점만은 알 수 있다. 이 사람들에게 그 들만의 종명을 부여하기에는 화석 증거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현재로 서는 그들은 그냥 '데니소바인' 이라고 부른다. 현생인류와 데니소바인 사이의 교잡은 아마 오스트레일리아와 태평양의 섬들로의 이주가 있기 전에, 아시아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한편 아프리카 내 다른 미확인 구인류 종과의 교배를 암시하는 증거도 존재한다. 오늘날의 아프리카 유전체에는 다른 고대 인류들에 대한 기억이 새겨져 있다. 비록 그 유전자 유령들과 연결 지을 만한 화석 증 거는 아직 없지만 말이다.
- 흰 피부가 북쪽 지방의 햇빛 부족에 대한 적응으로 진화했다는 비타민 D 가설은 설득력 있게 들린다. 오늘날 영국과 북아메리카에서 피부가 검은 사람들이 피부가 흰 사람들보다 비타민 D 결핍에 더 잘 걸린다는 관찰 사례는 분명 이 가설을 뒷받침해준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을 대상으로 측정한 비타민 D 수치는 가설대로 착착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비타민 D 수치와 햇빛 노출을 추적한 연구들은 예상치 못한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았다. 예측한 대로 햇빛에 대한 노출이 증가할수록 (어느 정도까지는) 비타민 D 수치가 증가했다. 옷으로 몸을 덮으면 혈중 비타민 농도가 낮아지는 것도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얇게 바른 자외선 차단제가 일광 화상은 막아줘도 비타민 D 생산을 줄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은 검은 피부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뜻밖에도, 같은 양의 햇빛에 노출되었을 때 비타민 D 생산이 촉진되는 정도는 피부가 검은 사람들과 흰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이 연구는 분명 피부가 검은 사람들도 피부가 흰 사람들만큼이나 효과적으로 비타민 D를 만들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새로운 결과는 언뜻 인간의 피부색 진화에 대한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 인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설명이 필요한 몇 가지 관찰 사례가 아직 남아 있다. 토착민의 피부색은 실제로 북쪽에서 더 하얗고, 북쪽 나라들에서는 예상대로 피부가 검은 사람들이 비타민 D 결핍을 더 많이 겪는 경향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관찰 사례는 '진화적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을 초래한다. 특정 돌연변이가 이점을 줄 때만 진화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은 거의 중립적인 돌연변이가 '유전적 부동'이라는 과정을 통해 개체군 내로 퍼지면서 진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것은 사실상 무작위 과정으로, '우연'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의 조상들이 북쪽으로 이주할 때 일어난 일을 짐작해 보면 대략 이렇지 않았을까. 열대에서 일광 화상과 피부암을 막아주므로 자연선택 된 검은 피부가 더 이상 그렇게 강력한 선택을 받지 않게 되었을 것이고, 그런 다음 더 흰 피부를 만드는 돌연변이가 우연히 발생했을 때 제거되지 않고 유전적 부동을 통해 퍼져나간 것이다. 실제로 적도에서부터 북쪽 위도로 갈수록 피부색이 일정한 비율로 밝아지는 것은 아니며, 밝은 피부색은 - 아마 훨씬 나중에 유럽과 아시아의 극북 지역 집단들에서만 진화했다. 유럽과 아시아의 나머지 지역은 위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하다.
- 약 1만 1천 년 전 서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농업이 거의 동시에 출현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을 것이다. 세계적인 기후변화가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사람들과 초원에 영향을 미쳤다. 1만 5천 년전부터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하면서 식물 생산을 촉진했다. 야생 곡식이 저절로 밭을 이루어 인간은 줍기만 하면 되었다. 그 런 다음 1만 2900년 전에서 1만 1700년 전까지 이어진 신드리아스기 동안 기후가 악화되었다. 사냥꾼이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이 많아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쉽게 딸 수 있는 열매와 딸기는 얼마 되지 않았다. 수렵채집인은 예비 자원에 기댔을 것이다. 채집하기 어렵지만 열량이 풍부한 풀의 씨앗들이 그중 하나였다. 서쪽에서는 귀리, 보리, 호밀, 밀을 먹었고, 동쪽에서는 기장, 조, 쌀을 먹었다. 나투프인들이 사용한 낫과 돌절구처럼 수확의 효율을 높이고 딱딱한 씨를 가루로 빻는 도구는 작물화와 농업 이전에 생겼다. 기후가 좋아지기 시작할 무렵에는, 곡물에 대한 의존이 이미 원시 농업으로 발전해 있었다. 이러한 초기 작물화 중심의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메소포타미아의 광대한 '농업의 요람'은 서유라시아 신석기의 시조 작물들을 제공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의 비옥한 땅에서 최초의 작물인 콩, 렌틸콩, 비터베치, 아마, 보리, 엠머밀, 일립계밀이 나왔다. 황허강과 양쯔강 주변의 땅에서는 조, 쌀, 대두가 나왔다. 하지만 그 밖에도 전 세계의 많은 다른 장소에서 작물화가 시작되었다. 신드리아스기 말엽, 아프리카의 남쪽 절반에 살던 사람들이 북쪽으로 이주해 비옥한 녹색 사하라를 점유했다. 그들은 사냥한 동물들과 더불어 과일, 덩이줄기, 곡물을 먹고 사는 수렵채집인들이었다.
- 1만 2천 년 전 이래로 맷돌을 사용해왔던 그들은, 곧이어 토종 수수와 진주조를 경작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하라의 농업은 약5500년 전 계절풍이 남쪽으로 이동해 비옥했던 땅을 사막으로 바꾸었을 때 전멸했다. 사탕수수는 약 9천 년 전 뉴기니에서 작물화되었고, 테오신트는 동시대에 메소아메리카에서 옥수수로 작물화되었다. 찾으면 찾을수록 더 많은 작물화 중심이 나타나는 듯하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매혹적이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신석기의 다른 요들로부터 시선을 빼앗는다. 바빌로프는 일곱 개의 작물화 중심을 찾아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전 세계에 10여 곳의 작물화 중심이 있다고 상정했다. 더 최근 연구들은 스물네 곳이라고 주장한다. 종 길들이기는 서로 다른 많은 장소에서 여러 차례 일어났다. 그런 장소 가운데 상당수가 바빌로프가 지적했듯이 산악 지대였다. 산악 지대는 다양성이 풍부한 경향이 있는데, 고도에 따라 물리적 조건이 달라지는 탓이다. 하지만 작물과 가축이 되기 위해서는 타이밍이 맞아야 했을 뿐 아니라 인간과 장단이 맞아야 했다. 인간이 생활 방식을 바꾸려는 시점에 인간의 개입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종. 그것이야말로 이 결정적 결속이 맺어지게 만든 승리의 조합이었다. 사실 의식적인 의사 결정이 모종의 역할을 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 작물화는 많은 경우, 무의식적인 과정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종들이 서로 만나 우연히 부딪치고 가까워지면서 진화적 역사가 한데 얽히게 되었다. 우리는 인류를 지배자로 여기고 다른 종들을 자발적인 하인, 나아가 노예로 여기는 데 너무 익숙하다. 하지만 우리가 동식물과 이런 협약을 맺은 방식은 다양하고도 미묘했고, 공생과 공진화 상태로 유기적으로 진화했다. 이 동반자 관계가 구축되기 시작할 때 의도가 개입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인류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동물을 길들이는 세 가지 경로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어떤 사건' 이라기보다는 길고 오랜 진화적 과정이었다.
한 경로는 동물이 인간을 선택해 우리에게서 자원을 빌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며 우리와 공진화하기 시작했고, 지난 몇 백 년 사이 창조된 개 품종들에서와 같은 인간 주도적인 선택이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길들여지게 되었다. 개와 닭이 이런식으로 우리의 동맹이 되었다. 두 번째 경로는 먹잇감 경로다. 이 경우에도 초반에는 동물들을 길들이려는 그들을 자원으로서 관리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양, 염소, 소 같은 중대형 초식동물이 이 경로를 따라 처음에는 먹잇감으로 사냥되고 이후에는 사냥감으로 관리되다가, 마침내 가축으로 길러졌을 것이다. 마지막은 가장 의도적인 경로로, 인간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동물을 잡아 길들인 경우다. 고기 외에도 뭔가 유용한 쓰임새가 있어 보인 가축들이 대개 이런 경로를 따랐다. 승마용 말로 길들여진 말이 대표적 사례다.
- 차탈회위크에는 그보다 앞선 수렵채집 집단들에 비해 생리적 스트레스와 건강 문제가 증가한 정황이 나타난다. 곡물을 중심으로 하는 식생활은 풍부한 열량을 공급하지만, 몸이 필요로 하는 모든 필수아미노산과 비타민까지 제공할 수는 없다. 다른 유적들처럼 성장률이 감소한 증거가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뼈 감염을 포함한 낮은 수준의 생리적 스트레스뿐 아니라, 녹말이 풍부한 식생활과 관련이 있는 듯한 높은 충치 발생률을 짐작하게 하는 충분한 증거가 존재한다.
- 오늘날의 산업화된 농업에서는 농업의 중노동을 인간 대신 기계가 짊어진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수렵채집인 조상들의 예비 식량이었던 곡류가 주식의 자리를 차지한 식량 생산 시스템에 속박되었다. 차탈회위크에 살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세계화된 식품 공급 덕분에 중요한 비타민의 다른 공급원들을 이용할 수 있지만(게다가 지금은 유전자 편집을 통해 곡물에 비타민을 집어넣을 수도 있다), 우리의 치아는 여전히 신석기 혁명의 영향으로 고통 받고 있다. 가장 해로운 악당 중 하나는 옥수수에서 파생된 액상 과당이다. 액상 과당은 신석기 유산의 최선과 최악을 담고 있는 식품이 아닐까 싶다. 즉, 환상적인 에너지 공급원임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그 위험을 이 제 막 알아차리기 시작한, 건강을 위협하는 교활한 적이기도 하다. 옥 수수 그 자체는 인류 역사에 막대한 역할을 했다. 잉카와 아스테카 문 명을 건설하는 연료였고, 콜럼버스가(그리고 아마도 캐벗이) 신세계에 도 착한 뒤로는 세계로 진출했다. 무게로만 따지자면, 오늘날 우리는 다 른 어떤 곡물보다 옥수수를 많이 생산한다. 옥수수는 우리가 먹는 음식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인간이 먹는 양의 네 배를 가축을 먹이기 위해 재배하고, 생물 연료를 만들기 위해 또다시 그만큼을 재배한다.
- 우리가 길들인 동물들과 우리 사이에는 또 하나의 신기한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 우리 역시 동물이 길들여졌을 때 등장한 형질들 중 일부를 드러내보이는 것 같다. 개처럼, 그리고 벨라예프가 길들인 은여우처럼, 우리는 선조들보다 작은 턱과 치아, 납작한 얼굴을 지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남성의 공격성이 줄었다. 이 일군의 연관된 형질들을 가축화 증후군domestication syndrome'이라고 부른다.
- 현생인류의 초기 화석들을 보면 대체로 최근 화석에 비해 눈썹 위 융기부가 훨씬 발달한 모습이다. 이러한 눈썹 위 융기부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 실제로 언제였는지, 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을까? 미국의 한 진화인류학 연구 팀이 이를 알아내고자 두개골 표본들 을 측정하고 비교했다. 표본의 일부는 20만 년 전~9만 년 전에, 일부는 8만 년 전 이후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며, 그 외의 많은 표본들은 지난 1만 년 내에 드는 최근 표본들이었다. 연구 팀은 9만 년 전보다 오래된 표본들이 이후 표본들에 비해 두개골의 눈썹 위 융기부가 더 발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얼굴의 길이도 오래된 표본에서 더 길었다. 얼 굴 모양의 여성화'는 홀로세까지 계속되었다. 테스토스테론 수치의 변화가 얼굴 모양의 이런 변화를 매개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양성 모두에서 나타나는 더 가냘프고 여성적인 두개골은 인간집단이 커짐에 따라 사회적 관용이 자연선택 되면서 생긴 부산물일 수 있다. 그런 선택이 어떤 식으로 일어났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유전 학자 스티브 존스의 기발한 표현처럼, 진화는 “두 번의 시험을 치르는" 셈이다. 단순히 살아남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번식에도 성공해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해야 한다. 만일 사회적 추방자 신세라면, 두 번째 시험에서 합격하기는커녕 시험을 치르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다. 공격성이 적은 남성들이 번식에 성공할 확률이 더 높다면, 그 형질이 집단 내로 빠르게 퍼질 것이다. 인간 사회가 진화함에 따라,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더 조밀하게 살게 되고 나아가 생존을 위해 광범위한 관계망에 의존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의도하지 않게 우리 자신을 길들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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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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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인간의 모험

역사 2020. 2. 11. 08:11

- 타자수의 일은 주로 여성들의 몫이 되었다. 타자기가 유행하던 당시 기존의 고된 육체노동에 노출되던 여성들은 신종 직업을 눈여겨보게 되었고, 사회로 활발하게 진출. 점차 사무직은 육체노동에 비해 덜 힘든 일, 여성에게 적합한 일이라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 국내에도 타자기가 도입되던 시기에는 전문학원이 생길 정도였다. 타자수는 신종직업으로 각광받았다. 1800년대 후반의 초기 타자수들은 그저 주어진 글을 빠르게 쓰는 것에 중점을 두었지만, 숙련된 여성 타자수는 자신의 문장구성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단순히 글자를 쳐내는 다른 타자수들에 비해 인정받을 능력을 확보한 것이었다. 타자기의 등장으로 인해 남성 직원이 주로 전담하던 비서 업무에도 변화가 생겼다. 타자기를 통해 사회로 진출한 여성들이 점차 선망받던 비서업무를 맡기 시작했다.
- 타자기의 등장은 사무 일거리의 증가에 따른 결과물이었고, 이로 인해 사무원은 보다 높은 지위를 보장받았다. 역사적으로 단순하고 창의성이 가미되지 않은 노동은 대개 무시받았지만, 타이핑만큼은 단순하지만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 자본주의 체제는 표준화, 단순화를 엄어 사회와 문화 전반에 여러 영향을 끼쳤다. 패션과 관련해서도 선택의 범위가 많아지면서 무어을 입을지에 대한 고민에 지쳐갔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눈에 띄려는 욕구도 다소 가라앉았다. 이때 영국 국왕 에드워드 8세(1894-1972)의 신사복 차림은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조합으로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 개성을 부리지 않고 편하게 선택해 입을 수 있는 옷을 선호하기 시작했고, 남자들은 유일한 패션수단으로 넥타이에 집중하기 시작. 한정적인 정장의 색과 대비되는 넥타이의 무늬와 색은 다채롭게 변해감. 오늘날의 남성들도 정장색깔보다는 어떤 넥타이를 맬까 아침마다 고민하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개성을 나타내던 넥타이가 비즈니스맨의 상징이 된 데는 미국 은행의 면접방식이 큰 영향일 미쳤음. 하얀 얼굴과 금발이 아니면 취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외모의 비중이 컸고, 입사한 이후에는 정장과 넥타이를 착용해야 했다. 프랑스 절대왕정 시대의 귀족처럼 비슷한 외모에 똑같은 옷차림이었다. 화이트칼라의 전형적 모습은 이처럼 같은 옷차림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직장인에 의해 만들어졌다
- 넥타이는 패션의 의미뿐 아니라 자신을 육체노동과 구분짓는 경계선 같은 역할을 했따. 의자에 앉아 땀을 흘릴 필요가 없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작은 특권을 나타냈다. 한편 회사에서는 규칙과 질서를 상징하기도 했음. 일을 한 지 몇 시간이 흘러도 바람이 불지 않으면 미동조차 없는 넥타이는 표준화, 타협, 속박뿐 아니라 권위를 상징하는 지표이기도 했다.
- 산업화 초기 사무원에 대한 조서는 조금씩 피어오르는 두려움의 표출이었다. 사무원의 존재에 불편함을 느끼다 그들의 영향력이 높아지자 곧 긴장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 산업혁명을 거치며 사회는 상공업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점차 더 많은 사무원을 필요로 했다. 사무원은 그렇게 점차 산업의 중심 영역으로 진출. 고대 사회에서 하위의 노동으로 여겼던 사무업무는 산업화를 맞이하며 변화의 시기를 거쳐 마침내 노동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시작한다. 기존 노동과의 차이점은 명확했다. 같은 직군에 있는 동료들이 점점 많아지면 마음이 든든해졌다. 하지만 불어난 숫자만큼이나 직군간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다는 것은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 19세기 들어 사무원은 더 증가했지만 사무실의 주인은 아니었다. 지금은 회계사, 세무사, 변호사가 사무실의 주인이 되어 인턴을 고용하고 월급을 지급하기도 하지만, 산업화 초기 사무원은 경영주의 자리 한편에 마련된 책상에 멀거니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일을 찾아서 하기보다는 서류작업이 주어질 때만 열심히 일했다. 계산과 필사로 서류더미를 만들어내고 다시 버리기를 반복했다. 이때까지 사무실의 주인은 대부분 상업가였다. 요즘 컨텐츠 생산부터 영업, 마케팅까지 혼자 해내는 1인기업가가 늘어나고 있는데, 19세기 초반 상업가도 혼자 모든 것을 해내야 했다. 도매상이면서 소매상이 되기도 하고 수출과 수입은 물론 운반까지 책임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며 산업화의 요충지인 미국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겨났다. 업무가 분화되기 시작한 것. 상업가가 혼자 하던 업무들을 따로 분리해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 보험사무소, 운반업소, 은행이 대표적이었다. 상업가 또한 다양한 업무를 덜어내고 자신은 큰 의사결정에 집중했다. 반복되는 업무나 허드렛일은 사무실에 남아 있던 사무원이 해나갔다. 상업가들은 거래를 위해 사무실 밖으로 나갔고, 사무원들은 회계실에서 그들만의 영역을 확보. 분업화와 함께 점차 유통이 활성화됨. 만드는 곳과 파는 곳이 분리된 것. 자연히 매출을 기록할 인력이 필요하게 됐다. 사무원은 증가. 가내수공업을 들여다보면 노동자와 판매업자가 같이 있었다. 직접 땀을 흘리는 자와 옆에서 보조하는 사람이 함께 했다. 하지만 분업화가 진행되며 노동 역시 분리됐다. 육체노동자와 사무원으로.
- 포드주의, 테일러주의가 낳은 기계적 효율성은 생산성 면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산업의 발전에 있어서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노동자의 시각에서는 중간관리자라는 새로운 존재가 갈등을 부추겼다. 1900년대 접어들며 초시계와 카메라를 들고 공장에 견학을 온듯한 차리므이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새하얀 셔츠를 입은 그들은 기름때를 묻힐 만한 기계공이 아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엇을 할지 몰라 고성으로 업무지시를 내리던 중간 관리자들이었다. 그들은 이제 경영자의 지시하에 노동을 관리하고 분석하는 요원이 됨. 초시계로 노동자의 작업시간을 체크해서 임금에 적용했음. 이처럼 사무의 본질은 이전 시대와 다르게 변화. 양적인 면에서 사무원의 증가가 있었고, 계급의 분화, 노동의 분리, 분할의 시대를 맞이함.
- 80년대 전후로 서양의 사무실에는 이전과 또 다른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자리가 안정적이지 않았기 때문. 철옹성으로 여겨지던 관리자의 자리는 위태롭게 여겨지기 시작함. 승진의 튼튼한 동아줄만 잘 붙들고 있으면 꼭대기층까지 입성할 수 있다는 인식도 깨져버림. 더 이상 안정된 자리는 없었다. 80년을 전후로 미국에서만 100만명 가량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책상을 내주었다. 조직은 탈산업화와 공장의 해외이전 등으로 살을 뺐다. 구조조정의 첫번째 타겟은 중간관리자였다. 공장과 사무실에서 고군분투한 조직인간에 대한 대대적 감축이었다. 이제 실무능력과 생산성이 떨어져 하급 사무원으로 되돌아갈수도 없었다.
- 우리나라 사무공간에 파티션이 도입된 시기는 80년대. 그 전에는 공장도 개방된 구조로 되어 있었고, 사무실 또한 커다란 공간에 책상만 이어붙인 형태였음. 옆 사람의 작은 움직임도 눈에 보였고, 몇 미터 떨어진 사람과도 목소리만 조금 높니면 얼마든지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었다. 이와 다르게 서양에서는 일찌감치 파티션이 도입됨. 주로 최소한의 프라이버시와 보안을 확보하고 업무 효율성을 올리기 위한 방편. 미국을 비롯한 서양 국가들은 6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파티션이 늘어났고 70년대에는 보편화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80년대에 들어 해외 기업들이 국내에 둥지를 틀면서 자연스레 파티션으로 사무공간을 나누기 시작했다. 화이트칼라 직장인이 한동안 막강했던 지위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파티션의 도입과 연관이 있다. 중역들에게 개인 사무공간을 마련해주던 회사들은 이제 그들의 자리를 재배치했다. 장기간 출장에서 돌아와 보니 5분의 1도 되지 않는 작은 공간으로 옮겨져 있었다. 줄어든 공간은 자신들의 불안한 입지를 상기시켰다. 한편 파티션은 점점 이중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개방된 공간에서 프라이버시를 보장해주었지만, 동시에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유발하기도 했다. 똑같은 모습, 비슷한 표정을 한 사람들을 한정된 공간에 몰아넣다보니 몰개성화의 진원지로 지목되기도 했다. 70년대에서 80년대를 관통하며 파티션의 이중성이 부각되는 사이, 그 안에는 침입자가 발생했다. 경영자의 일정을 관리하던 여성 비서들의 입지도 이 침입자로 인해 줄어들게 되었음. 바로 컴퓨터의 등장이다. 인력감축의 중심에 컴퓨터가 있었다. 그나마 있던 개인의 공간에 또 다른 물체가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 직후에 비해 2000년대 노동자들은 물리적 노동강도뿐 아니라 업무강도와 스트레스도 계속해서 늘어왔다. 20여년전부터 바람이 분 글로벌화, 정보화의 어두운 이면이다. 글로벌 기업의 국내진출로 임금 깎아먹기 경쟁이 일어나고, 정보화로 인해 어디서나 일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뀌면서 삶과 일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경향이 짙어졌다. 24시간 가동되는 경제체제하에서 사무직은 온종일 일하는 경우가 만연해졌다. 게다가 고용의 비정규화 현상은 비정규직뿐 아니라 정규직 직원들에게도 부담을 가져왔다. 비정규직이 늘어나면서 적유직 인원은 이전보다 줄어들었고 업무강도도 높아지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비정규직, 정규직이라는 양대 축 외에도 하청, 파견, 자영업 계약직 등 기업이 제시하는 고용형태는 다양해졌고, 개인은 자신의 조건에 따라 그것을 받아들일지 선택하게 되었다. 노동조합도 없고 파업권도 없이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일하던 시대에 비해 여러 법제가 갖춰졌지만, 법망을 피해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계약은 만연해졌다. 약자 입장에 놓인 노동자는 경영자를 향해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정직원이라는 신분을 차지한 이들은 자기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회사형 인간이 되어야 했다.
- 밀려오는 구조조정의 물결에 화이트칼라의 수난사는 이어졌다. 종신고용의 희망은 사라지고 난공불락이던 연공서열조차 휘청거리고 있다. 자기자리가 어디든 자생력을 길러 각자도생을 해야하는 시대다. 90년대부터 정리해고라는 말은 심심찮게 들렸고 칼을 빼든 기업은 어쩔 수 없다는 유약한 항변만 반복했다. 더 나아가 이제는 사내실업이라는 말이 만연할 정도로 생산성이 낮아진 중간관리자들의 방황도 늘어나고 있다. 그렇게 회사 내에 생긴 다양한 신분은 본인이 어느 자리에 있든 상관없이 사무원들을 고난으로 몰아넣었다.
- 사무원들이 한데 모여 자신의 일자리와 업무의 자율성을 지켜내지 못하는 것을 이기주의 탓이라고 한다. 능력주의라는 추상적 신념을 원인으로 지적하기도 함. 하지만 의사, 언론인, 블루칼라도 능력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사무직원들이 직장에서의 생존에 있어 특히나 취약한 위치에 놓여 있는 이유는, 좋든 싫든 자신을 고용주, 경영진과 동일시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입장에 서 있기 때문. 교수, 변호사, 의사, 과학자 등은 스스로를 그 직업에 종사하는 인간으로 인식하지, 자신을 대학, 변호사 사무실, 병원, 실험실과 동일시하려 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사무지은 높은 자리를 목표로 바라보고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충성을 맹세해야만 조직 내 자신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고, 자신의 직업을 보장받을 수 있다. 경영진이 각종 갑질로 사회적 이슈에 오르고, 타락하거나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지라도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며 울며 겨자먹기로 사다리를 올라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일방적 충성의 대가는 아웃소싱과 정리해고였다. 회사는 이렇듯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개인의 힘으로는 피할 길이 없는 고용불안의 빨간불은 이렇게 현재 진행형이다.
- 미국 사회학자 찰스 라이트 밀스는 1960년대 들어 사무직 종사자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사했다. 그들은 "특징이 있는 것 같음에도 특징이 없는 존재"라고 새로이 생겨난 중산계급인 스스로를 정의했다. 즉 역사적으로 족적을 남길만큼 뛰어난 업무역량이 없으며, 그렇다고 정치 세력화를 할 집단도 아니고, 단지 조금 더 강한 세력을 따라가는 성향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다른 조사도 있었다. 우선 사무직 종사들에게 설문지를 나눠주며 공장 노동자와 경영진, 사무직 노동자에게 일정 점수를 매기도록 했다. 항목은 신뢰성, 양심성, 의존성 등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사무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육체노동자나 경영진과는 차별화된 존재로 인식했다. 다만 경영진에는 후한 점수를 주었고 육체 노동자에게는 낮은 점수를 주었다. 중간 성향을 가진 것을 스스로로 확인한 결과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저 조직의 안위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다른 생각을 가지는 집단 또한 생겨났다. 한 조직내에서 생과 사를 함께하는 조직인간이 아닌, 자신이 키운 능력대로 조직을 옮겨 다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 조직이 만들어낸 질서에 반하지 않고 경영진의 그림자를 따랐던 일반 사무직과는 달리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자신의 직무를 발전시켜 자신이 가진 지식의 대가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신흥세력이었다. 지식노동자였다. 사무직원들은 한 조직에 충성을 다했고 기력이 소진될 때까지 버틸지, 능력본위제의 삶에 충실할지의 기로에 서기 시작. 가장 최악의 상황에 놓인 이들은 한 자리에서 일가를 이루지도 못하고 새 둥지를 틀 수도 없는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이었다. 미래에 대한 고민과 사무직에 대한 회의감 사이에 이들은 조직에서 입지를 다질지, 제2의 업을 만들어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지식노동자는 지식산업 시대를 이끌어가는 사회의 주역 계급을 지칭하며 전문 기술직에 종사하는 이들을 말함. 골드칼라라 부르기도 함. 이보다 앞서 지식노동자에 대한 개념은 존재했다. 꾸준한 학습과 지식습득을 통해 일하는 방식을 혁신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 활용함으로써 생산성과 효율, 부가가치를 높여가는 사람을 일컬었다. 주변의 정보를 해석하고 이를 활용해 부가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이들이었다. 이는 피터 드러커가 지식사회를 다루며 제시한 용어임. 평생 직장인보다는 평생 직업인의 신념을 가지면서 광범위한 지적 재산, 혁신적 기업가 정신, 평생 학습정신, 창의성, 유연성 등을 갖추고 있는 사람으로, 이 시기에 등장한 지식노동자라는 개념은 기존 노동자들과는 차별적 존재로 부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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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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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기원

역사 2019. 11. 4. 08:06

- 기원전 12000년에서 8000년에 이르는 중석기 시대와 초기의 신석기 시대(이 시기를 합쳐서 중석기 시대로 부름)에 무기기술의 혁명적 발달이 있었고, 그 무기기술의 혁명은 오늘날의 화약, 기차, 항공기, 탱크 그리고 원자탄의 발명에 필적하는 것이다. 그 당시 처음 나타난 네가지 종류의 무기들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지배했던 무기들이다. 그 네가지란 활, 돌팔매, 단검과 손도끼였다. 이와 같은 혁명적 무기기술의 진보는 군사전술의 발명과 결합되었으며 역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진정한 의미의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 신석기 시대 초기의 인간들은 새로운 공격무기 체계의 화력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 이같은 요새화된 지역은 군사적 대변혁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유물이며 전쟁이 인간의 문화에 가한 충격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것임. 어떤 지역의 경우 다양한 형태로 건설된 대규모의 요새는 오히려 농업의 발견과 동물의 가축화를 초래했거나, 혹은 농업의 필요성을 요구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 우리는 전쟁이란 본질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길 주저한다. 비로 그것이 책에 쓰여진 가장 단순한 진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마샬)
- 기원전 1200년 이전에 금속은 보석, 또는 의식용 무기의 제조에 사용되었지만, 그것은 순수하게 연철이었으며 구리보다도 더 약한 것이었음. 고대 대장장이들은 금속을 주조할 수 있을 정도의 열(1530도)을 발생시키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 그러나 궁극적으로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쳐, 고대 대장장이들이 벌겋게 달아오른 강철에 탄소를 투입함으로써 탄화된 또는 강철과 같은 철을 생산하는 방법을 발견. 그 과정은 복잡했고 완전히 이해되지는 못했다. 그 과정은 강철이 부서짐을 방지하기 위한 가열, 재가열 또는 단련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900년 고대 근동지방의 대장장이들은 이런 절차를 발견했고, 아시리아는 자국의 전사들을 새로운 강철기술에 의한 진보된 무기로 등장시킴. 철은 급격히 적나라한 폭력과 동의어가 되기 시작. 욥기 40장 18절에 베헤모쓰(거대한 바다짐승)는 무쇠와 같은 단단한 뼈를 갖고 있었고, 바빌로니아의 격언집은 여자는 남자의 혀를 자르는 예리한 강철단검이니라, 라고 쓰고 있다. 청동기 시대부터 철기 시대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모습은 구리를 청동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주석, 특히 층적토의 주석을 구하기 어려운 반면, 철은 지구 곳곳에서 풍부하게 발견되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새로운 무기는 더욱 훌륭하였고 벽이고를 바닥나게 만드는 금속의 결핍은 없었다.
- 기원전 900년에서 612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철제병기로 장비한 아시리아군은 고대 근동지방을 점령하였고, 그 지역을 아시리아 왕들의 직접적 감독을 받는 지역으로 만듦으로써, 세계 최초의 제국을 건설. 신왕조의 이집트 왕국도 때로 제국이라 불림. 그러나 당시 파라오는 나일강 유역에 대해서만 직접 통치를 할 수 있었고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해서는 단지 패권 또는 영향권을 유지했을 뿐이다. 반면 아시리아 왕들은 정복당한 방위체제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새로운 대전략을 개발해야 할 필요성에 당면했으며, 새로운 대전략에서 메소포타미아 상부지역의 아시리아 본토 방위는 더 광범한 안전보장체계의 일부가 되는 것이었다.
- 아시리아인에 의한 전쟁의 전문화에 관한 두가지 사례, 즉 말의 공급과 포위작전은 아시리아 야전군이 얼마나 잘 조직되었으며 전술적으로 효과적이었는가를 말해주는 것 같다. 아시리아군은 천 마일이나 떨어진 먼 곳에서도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있었으며 어떠한 적군 병사나 적의 요새도 아시리아 군의 전략적 목표달성을 위축시키는 장애요소가 될 수 없었다. 기원전 900-612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아시리아 군은 고대 근동에서 최강의 지상군이었다.
- 페르시아 이후 기병대는 전쟁에서 엘리트 기동타격력이 되었으며 나폴레옹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인간과 비교했을 때 말은 더 크고 상대를 놀라게 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말을 탄 기병이 공격해올 때 보병이 자기의 위치를 고수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반면에 말들은 쉽게 무서움을 타며 흐트러지지 않는 적군의 창병 전열에 대한 공격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기병은 접전하기 전 선회하였으며, 즉 기마병은 창에 찔리길 원치 않았으며, 창병에 대한 정면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창병의 전열을 향한 기병대의 위댛나 공격이란 낭만적 개념은 존 키간의 '전투의 얼굴'이라는 책을 통해서 사실과 다른 것이라고 널리 알려질 수 있게 됨. 사실 전쟁사가들은 이러한 비밀을 항상 알고 있었고, 기병 지휘관도 물론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마디 경고가 필요할 것 같다. 무너지지 앟는 전열을 향해 기병이 공격하지 않았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열이 기병대의 공격 때문에 넘어지거나 또는 당황스런 상황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병은 성공적으로 보병에 대한 직접 공격을 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병대 사령관이 내려야 할 가장 어려운 결정중의 하나는, 적군의 보병 전열이 현재는 상당히 강력한 대형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언제 사기를 잃을 것이며 공격앞에 취약할 것인가를 알아내는 일이었다.
- 신석기 시대의 요새, 활의 출현, 돌팔매와 창, 그리고 역사 시대 이후 상당 규모의 조직화된 군대의 출현 등은 고대 전쟁의 모습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로부터 폐르시아 왕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은 전쟁수행능력을 갈고 닦았다. 종대와 횡대로서의 병력배치, 병참제도, 무기의 개발과 운용, 포위전쟁 기술과 더불어 수많은 종류의 전술적으로 전문화된 부대의 배치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나폴레옹 시대에 이르기까지 실제 전쟁의 대부분의 요소들은 고대 근동지방에서 이미 형성되었던 것이다. 페르시아 왕들이 통치했을 당시, 나폴레옹의 해군과 육군에 버금가는 군사력이 그 지역을 지배하였고, 기병, 보병, 척후병 및 함대 등의 구분이 정교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페르시아가 결여하고 있었던 군사력은 훌륭한 중장갑보병이었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인들이 이 같은 공백을 메꿀 것이다. 고대 근동지방 전쟁의 군사기술들을 채택한 그리스의 군대는 필립과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 이르러 페르시아와 비옥한 초생달 지역에 자신의 문명을 강요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했다는 사실이 장갑보병 사회의 군사적 우둔성의 지속에 기여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비록 일부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의 실수 때문에 그리스의 승리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더 널리 퍼졌던 바는 활에 대한 창의 승리, 경보병에 대한 중보병의 승리라는 믿음이었다. 해상 전쟁에서 그리스인들은 더 많은 창조성을 발휘하였고 페르시아 전쟁 당시 그리스 해군은 그리스 장갑보병보다 페르시아를 격파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함.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육상에서의 전투가 더 많았지만, 육상에서의 전쟁 역시 바다에서의 싸움에 의해 결판이 났으며, 함대에 의해 장갑보병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는 한, 그리스인들은 과거에도 그래왔던 것처럼 육상전쟁에서 중무장 보병의 우수성을 계속 믿으려고 하였다. 마케도니아의 필립은 그리스인의 믿음이 틀렸음을 증명하였다. 장갑보병 때문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다른 종류의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페르시아에게 많이 뒤처지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의 요새 및 포위전쟁은 원시적인 것이었다. 중무장 장갑보병은 아주 단순한 장애물을 향해 돌진하고 공격하기에도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중장갑 보병을 활용할 경우 요새화된 도시에 대한 가능한 전략은 오직 봉쇄 뿐이었고, 잘 요새화되지 못한 도시에 대해서도 도시 거주민들이 문을 열도록 설득당하지 않은 한 봉쇄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었다. 요새의 기술은 중장갑 보병 때문에 불필요한 일이 되었으며, 그리스가 고대 중근동 비장에 비해 낙후되어지도록 한 것이었따. 스파르타인들은 자기 도시에 성벽이 없다는 사실을 자랑으로 삼았고, 아테네인들 중에도 도시의 성벽을 허물어뜨림으로써 더욱 더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만약 성벽을 허물게 된다면 그것은 아테네로 하여금 스파르타만큼 강력한 중장갑보병을 양성케 하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병참에 관한 부분 또한 그리스인들이 정교하게 발전시키지 못했던 군사적 기예중 한 분야였다. 소규모의 병력은 (대부분의 그리스병력은 소규모였다) 그다지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고 이동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전쟁터가 이스트무스에 있던 그리스 요새로부터 불과 몇 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479년 플라테이아 전투에서 4만명의 병력에 대한 물자를 공급할 방법이 없었다. 고대 근동지방의 대규모 군대는 그들이 행군할 거리에 맞추어서 어느 정도 정교화된 병참지원체계를 개발. 그러나 그리스군은 수많은 하인들을 뱀처럼 길게 늘어뜨려 행군했고 행군속도는 대단히 느렸다. 행군속도는 보급품을 실은 우마차의 속도에 맞추는 것이었으며, 때로 조직화된 병참부대가 전혀 없어서 병사들을 따라다니는 개인적 장사꾼들이 병사들에게 물건을 비싸게 팔기도 했다.
- 오늘날에는 제식훈련 그 자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현대전쟁 기술발달로 인한 화력의 증대가 병사들로 하여금 근접대형을 이룰 수 없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전쟁의 경우 병사들은 근접된 상태로 전투를 실시했으며 그들이 퍼레이드를 특히 잘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전쟁에서도 훌륭하게 전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근거였던 것이다. 퍼레이드를 잘 할 수 있다는 사실의 심리적 효과는 결코 과대평가될 수 없는 일이었따. 비록 병사들이 적군과 직접 맞부딪쳤을 때 심리적 두려움이 가장 강력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되겠지만, 현명한 기동작전의 수행은 언제라도 전투에 불안을 느끼는 병사들을 통제할 수 있는 더 없이 중요한 수단이었음. 어떤 병사에게 있어서도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은 적군병사들 그 자체가 아니었다. 병사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아군부대가 당황한 상태에서 도망쳐 버림으로써 그들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했다. 훈련을 통해서 이처럼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팀워크가 훌륭한 군사력을 건설할 수 있는 것이다.
- 필립의 새로운 병참체계가 갖는 가장 큰 이점은 나폴레옹의 병참체계와 비교함으로써 가장 잘 이해되어 질 수 있을 것임. 나폴레옹과 필립의 병참체계는 비슷한 점이 많이 있는데 데이빗 챈들러의 걸작 '나폴레옹의 전역'에서 잘 관찰되어졌다.
행군중인 프랑스군은 약탈, 강간, 방화 이외의 또 다른 특징적인 성격 때문에 유명했다. 그 특징이란 그들의 행군속도였다. 훨씬 더 다루기 어려운 오스트리아군과 신성 로마제국의 군대는 이러한 면에서 나폴레옹 군대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병참지원에 관한 상이한 개념 때문이다. 프랑스군은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의 대부분을 전투의 현장에서 충족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프랑스군의 개념은 느릿느릿 움직이는 병참부대와 미리 채워진 화약고나 보충시설의 존재에 기반을 두는 전략적 답답함으로부터 프랑스군을 자유스럽게 했다. 그들은 결코 3일분 이상의 보급물자를 지니고 다니지 않았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습관적으로 9일분에 해당하는 식량전부를 수레에 싣고 다녔던 것이다. 프랑스군이 잘 지휘되었을 경우, 느릿느릿 움직이는 적군을 전술적, 전략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최근 역사학자 한 명은 고대 전쟁기술에 관한 이해로 가득 채워진 책에서, 알렉산더보다 필립이 더 우수한 전략가였다고 주장
필립은 이해심이 있었고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 이러한 것들은 알렉산더도 그러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알렉산더가 전술가로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의 후손들로 하여금 그의 전략적 능력은 덜 찬란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그의 행동 동기는 지속적으로 부주의한, 비이성적인 욕망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었다. 군인의 기예는 합리적인 계산을 요구하는 것이다. 필립은 이러한 점을 결여하고 있지 않았다.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에 관한 군사적 감각은 그의 아들보다 작지 않았다. 쌀울 것이냐 말 것이냐에 관한 정치적 감각은 또 다른 사항이다. 필립은 가장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은 또 다른 사항이다. 필립은 가장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의 정치적 감각에 대한 평가는 심사숙고되어야 할 것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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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일본에서 서구 과학기술은 오로지 군사기술 측면에서 습득되기 시작했음. 의사의 난학이 무사의 양학으로 대체됐다지만 양학은 당시에 병학이었던 셈. 주된 학습목적은 어디까지나 기술, 즉 군사기술에 있었고, 과학은 기술습득에 필요한 범위내에서 학습됐다. 해군 전습소에서는 수학과 물리학을 가리치긴 했지만, 수학과 물리학 자체를 중시해서가 아니라 조선기술과 항해술 습득을 위한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근대 서구문명의 우월성을 사회사사과 정치사상이 아닌 과학을 통해 인식했다. 그 과학은 증기로 움직이며 강력한 대포를 갖춘 군함, 다시 말해 군사기술로 구체화됐던 것이다.
- 본래 대학 아카데미즘의 학문은 언어의 학문이자 논증의 학문이고, 고대 문헌의 열독과 풀이로 일관했다. 중세말 영국과 프랑스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을 때도, 이론의 정밀함만이 문제시됐을 뿐 실험으로 검증하려던 이는 없었다. 의료 행위와 연결되는 의학세계에서조차 수술과 약의 조합처럼 손을 더럽히는 일은 직무교육을 대학 밖에서 받는 등 직인 취급을 받던 외과의와 약제사에게 맡겨짐. 아카데미즘 세계에서는 직인도 그 기술도 천시됐던 것이다. 서구 중세에서 문자문화는 오로지 라틴어로 표기됐고, 아카데미즘 학자와 교회 성직자들이 독점했다. 그러나 16세기 들어 인쇄 서적 출현과 종교개혁 영향으로 속어의 국어와 움직임과 함께 성직자와 대학 지식인의 문자문하 독점에 구멍이 뚫렸고, 직인들이 자신의 경험을 속어 서적으로 표현하기 시작. 이는 16세기 문화혁명이라고 할 지적세계의 지각변동이었다. 이런 변동에 호응해 아카데미즘 내부에서도 수작업을 꺼려하지 않고, 실험장치를 조립해 관찰과 측정을 중시하는 새로운 유형의 학자들이 등장. 갈릴레오나 토리첼리, 훅이나 보일 등으로, 이들에 의해 관측과 실험에 근거한 실증과학이 등장. 이것이 17세기 과학혁명이다
- 일본의 근대화는 산업근대화, 공업화인 동시에 군의 근대화, 서구화였다. 보통은 산업근대화가 일본의 자본주의화로 인식되고 있지만, 군의 근대화가 일본 자본주의화에서 수행한 역할은 막대함. "당시 일본 기술전반의 발전에서 정부의 군사공업은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입장에 있었다."(호시노) 군의 무기 자급화 욕구와 군사목적으로 시작한 조선업이야말로 메이지 시대 중공업, 기계공업, 화학공업 발전의 커다란 추진력이었음. 군과 산업의 근대화가 동시에 병행해 위로부터 추진된 것이 일본 자본주의화의 특징. 군의 무기자급욕구가 이윽고 이를 위한 자원을 추구하며 아시아 침략으로 일본을 몰아가게 된다.
- 사농공상 신분이 고정된 봉건사회에서 지배층인 무사가 피지배층의 직업으로 간주돼온 공업의 담당자가 되는 것이 일본 공업화의 특징 중 하나다. 일본에서 직인은 그 지위가 변함없었던 반면 무사가 공업화 기수로 등장했다
- 서구 특히 영국 기술자가 시민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직인층 내부에서 기술혁신의 주체로 등장한 것과는 달리 일본은 지배계급 출신의 기술관료가 시민사회 탄생이전에 국가교육을 받고 갑자기 공업화 주체로 등장했던 것이다.일본 과학기술 요람기의 이런 특징 때문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학 공학부에서 강론된 전문의 지에 과대한 권위가 부여되고 있음. 동시에 과학기술의 주체, 특히 상급 기술자들은 엘리트 의식과잉과 배타적 성격, 한편으로는 관료적이고 조직이나 국가에 대해서는 순종하는 특성을 갖게 됨. 실제로도 이미 메이지 중기에 "대학 밖에서는 대학을 졸업한 학사 기술자와 종래 직인 간에 알력이 생기고 있었다. ... 공학사는 실업을 낮춰보고 현장 직인과 거리가 생겼다. ... 제국대학 출신자가 이미 관의 권위를 얻어 민을 지배하는 구조가 성립했다"고 한다. 사족에 의해 관료기구가 형성된 메이지에는 에도시대 무사의 농민, 조닌에 대한 차별의식이 민간인에 대한 관리의 차별의식으로 그대로 이동했다. 공부대학교와 제국대학 공과대학에서 교육받은 엘리트 기술자가 재래직인에 대한 우월감과 차별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 증기와 전기 사용이라는 에너지 혁명이 서구에서 일어난 시점부터 메이지유신까지는 기껏해야 반세기로 간신히 추격이 가능한 시간차였다. 오히려 일본은 후발국인만큼 증기기관을 예로 들면 세이버리아 뉴커먼의 대기압 기관에서 시작해 와트에 의한 개량, 19세기의 전반의 증기기관차와 증기선 같은 다방면 응용에 이르는, 1세기를 넘는 영국의 모색과 시행과정을 건너뛰었다. 즉 결말부터 습득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런 의미에서 유리한 지점에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는 "선진국에서 기계수출으 제한은 없었고, 일본은... 모든 선진국으로부터 최신기계를 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었다"는 사정도 있었다. 한술 더 떠 "선진국은 완성된 기계기술을 일본에 판매하는 것에 열심"이었을 정도였다. 결정적인 차이 혹은 늦었던 것은 민간의 자본축적이 너무 빈약했다는 점. 이 때문에 일본의 근대화는 당장은 거의 100% 정치권력 주도로 추진됐고, 군과 관료기구가 커다란 영향력을 갖게 됨. 특히 메이지 정부의 전신과 철도에 대한 움직임은 공부성의 전신인 민부성이 이미 1869년 계획을 세웠을 정도로 신속했다.
- 일본 메이지 시대 기계공업 발전은 군의 근대화가 이끌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수입된 최신예 플랜트의 저변에 재래의 의욕적인 직인들이 수입된 기계를 모델로 인력이나 수력구동, 목재 내지 일부 금속제의 비교적 저렴하고 재래 직인이 사용하기 좋은 양화절충의 기계, 또는 비교적 단순하고 소형화된 모방품을 만들어낸 데 있다. 또 이런 국산기계제조 혹은 수입기계부품제조에 종사하는 중소기업이 지방도시에 속속 생겨난 것에 의해 달성됨
- 프랑스 전기조명의 보급을 묘사한 '전기의 힘과 파리'의 서문에슨 '본서를 통해 전기가 승리를 거두는 데는 오랜시간이 필요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가스조명과의 오랜 싸움도 있었다. 조명의 혁명에는 석유, 아세틸렌, 합성양초도 가세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프랑스에서 백열전등이 정착한 것은 20세기 초엽이다.'라고 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가스등이 충분히 보급되지 않았던 것은 전등보급에는 행운이었다. 어쨌거나 일본의 산업혁명은 서구에 크게 뒤처진 상태로 시작됐으나, 에너지 혁명은 그다지 뒤지지 않고 달성됐다고 할 수 있다.
- 자본론에는 '기계장치가 근력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한에서는 그것은 근력이 없는 노동자, 또는 육체발달이 미숙하되 사지 유연성이 풍부한 노동자를 사용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그러므로 부인노동가 아동노동은 기계장치의 자본주의적 사용의 표현이었다'라고 되어 있지만 말 그대로의 상황이 메이지 일본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 자본론의 내용을 넘어서는 것조차 있다. 다이쇼 시대 호소이 와키조는 '여공애사'에서 '대체로 방적공장 정도로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는 곳은 없다'면서 특히 여성과 어린아이의 12시간 교대 심야노동에 대해 '이것은 어디까지나 근대 공업의 소산이고, 게다가 일본이 그 창시자인 것은 변명할 말이 없다'고 했다. 생산시설의 가동률을 올리기 위한 주야 2교대제는 산업혁명기 영국에도 없던 일. '일본 면사 경쟁력의 기본적 조건은 한마디로 아시아적 저임금과 서양의 최첨단 기술의 결합에 있다' 이렇게 해서 1897년에는 일본의 면사 수출량이 수입량을 넘어서게됨
- 경제학 서적에는 '일본 산업의 극히 빠른 근대화는 식산흥업정책의 성과라고 해도 좋다. 그것은 세계사에서 거의 예를 찾을 수 없는 성공이었다고 해도 좋고, 그 때문에 종종 기적이라 불릴 정도의 것이었다'고 돼 있다. 일본의 급속한 자본주의화의 성공과 기적은 개국과 근대 과학기술 습득 개시의 적시성, 국가의 강력한 지도와 진취적 경영자의 출현, 에도시대 이래 민중의 높은 문자해독률, 능력도 의욕도 있던 사족의 자제가 능력을 발휘하도록 한 효과적인 교육제도의 형성, 재래직인층 내부 풀뿌리 발명가의 탄생 등을 원인으로 열거할 수 있음. 하지만 농촌 노동력의 가혹한 수탈과 농촌 공동체의 무참한 파괴도 불가결의 요인이 됐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후쿠자와는 이 시점에서 중국, 조선의 근대화가 가망없다고 단념한 것. 이런 자타에 대한 현상 인식에서 나온 결론이 '탈아입구'였다.
오늘날 궁리해보니 우리나라는 이웃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여유가 없다. 오히려 이 대열에서 벗어나 서구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하고 중국, 조선을 대하는 방식도 이웃나라라고 특별히 대할 것 없이 바로 서양인들이 그들을 대하는 식에 따라 처분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메이지 중기 일본에서 열강주의 내셔널리즘이 태동. 일본은 1894-95년의 청일전쟁을 거쳐 1890년대 본격화된 세계분할 경쟁에 최후 멤버로 끼어들게 됐다.
- 1차대전은 최초의 과학전으로 불림. 첫째 당시 최첨단 고도 과학기술이 전면적으로 전쟁에 사용됐다는 점, 둘째 과학자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 때문이다. 둘째 이유와 관련해 과학과 기술이 본래는 별개이던 서구에서는 학자란 속세와 동떨어져 공상적인 일에 몰두할 뿐 실제에는 대체로 도움이 안되는 집단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서구에서 과학자에 대한 평가를 180도 바꾼 것이 전쟁이었다. 독일에서는 암모니아 합성법을 개발한 프리츠 하버와 후일 핵분열 반응을 발견하는 오토 한 등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일류 화학자들이 모두 독가스 연구에 종사했음. 영국에서도 조셉 존 톰슨과 어니스트 러더퍼드 같은 초일류 물리학자들이 무선전신과 잠수함 탐지 등 군사연구에 종사하며 모두 유능함을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그뿐 아니다. 전쟁 직전까지 서구 각국의 자연과학자들 사이에서는 국제협력이 이뤄졌다. 외국 대학에서 공부하고 외국교수의 지도로 학위를 취득했다. 외국의 연구자와 공동연구하는 것은 당연하고, 연구자들의 국제회의도 종종 열림. 국적을 초월한 과학자공화국 일원으로 연구에 종사하는 듯 행동했다. 그러나 개전과 동시에 아인슈타인 같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일제히 애국자가 돼 자국의 전쟁에 솔선해 협력했던 것이다. 서구 각국은 이로써 과학자가 전쟁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알게 됐고, 이에 따라 국가에 의한 과학동원, 즉 국가에 의한 과학자의 과학기술 연구동원 정책이 생김. 그러나 일본에서는 막말 이래 과학은 군사에 편중된 과학기술의 부속물로 간주됐고, 메이지 시대에 이미 군학 협동이 시작된 만큼 과학자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은 특별히 새로운 발견이라곤 할 수 없다.
- 총력전 체제는 연구활동과 생산활동, 경제조직에 대해 능률화와 이를 위한 합리화를 요구했던 것이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총력전에서는 국민을 인적자원으로 간주해 물적자원과 같은 차원으로 취급하면서 효율적인 배치와 활용을 지향한 만큼 사회 전체의 합리적 재편성도 필요로 했다. 야마노우치 야스시가 말한 것처럼 '총력전 체제는 ... 전 인민을 국민공동체의 운명적 일체성이라는 슬로건 하에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 그것은 인적자원의 전면적 동원을 위해 실시한 개혁이 사회혁명이 되어 여러가지 제도의 합리화를 촉진했던 것이다.
- 전쟁이 끝나고 모두가 미국의 물량과 과학기술에 패배했다고 납득하면 할수록 중국에 패했다는 의식은 희박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메이지 이래 서구에 배우는 자세가 패전으로 다시 강화됐지만 아시아에 배운다거나,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을 제국에 강제로 편입시킨 것에 대한 책임의 엄중함을 생각하는 기술자는 적었다. 이렇게 해서 유일 피폭국이라는 전후 일본의 상투적 언사가 등장. 이는 아시아 각국을 침략한 가해자임을 지우고 은폐하는 것이다.
- 중앙집권적 행정 시스템을 가진 관료기구의 지도에 의해 추진된 전후부흥, 관료기구와 산업계와 대학의 협동에 의한 60년대 경제성장은 전후판 총력전이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국내조건으로
첫째, 20년대 시작돼 전시에 급속히 추진된 중화학공업이 전후 생산의 기조가 됨. 중화학공업에서는 잔존한 생산설비가 37년 당시보다 많았다.
둘째, 전시하 과학동원과 이공계 붐으로 급팽창한 군사부문에서 성장, 축적된 기술과 기술자층의 존재다. 전시에 군 연구기관과 군수산업에 편입돼 군사연구에 종사했던 유능한 기술자, 특히 정밀가공과 고급소재기술 등의 전문가가 기술개발에 큰 힘을 발휘했다. 전쟁 수행을 위해 창설된 도쿄대 제2공학부에서 육성된 기술자도 전후 고도성장을 떠받친 주역이 됐다. 실제로 전시 레이더 개발이 전후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를 기초로 한 전기통신분야 발전의 기초가 된 점은 잘 알려져 있음. 전기산업에서 도시바, 히타치, 마쓰시타는 모두 전시 군수생산으로 크게 성장한 기업이다. 전후 생겨난 기업으로 소니가 알려져 있지만 소니도 모체는 거의 대부분 해군기술 연구소 인맥이다. 자동차산업도 도요타, 닛산, 이스즈는 앞서 기술한 자동자제조사업법의 혜택을 입었고, 쇼와 10년대 정부보호하에 생겨난 기업. 더욱이 미군 점령하에서 항공기 생산이 완전히 금지됨에 따라 전시하에서 군용기 개발과 생산에 종사했던 미쓰비시 중공업 이외 군용기 업체와 군연구소 기술자들 다수가 자동차산업으로 옮긴 것으로 알려짐. 전후 국산 승용차 개발에 전전, 전시 항공기산업의 기술적 축적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군 기술자는 국철과 철도연구소에도 대거 자리를 잡았고, 이것이 철도기술 발전을 가져왔다. 일본 고도성장을 대표하는 기술 중 하나가 신칸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신기술의 집대성인 신칸센 개발에서 육해군, 항공 기술자의 활약이 돋보였던 것이다. 세번째, 전전부터 교육수준이 높았던 노동자층과 전후의 급속한 인구증가를 들 수 있다. 노동력과 함께 국내시장이 확충됨에 따라 공장건설, 생산확대는 물론 제품 판매를 국내에서 소화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국내적 조건만이 전후 부흥과 고도성장을 가능케 한 것은 아니다. 당시의 국제환경도 그만큼 중요했다. 전후 경제성장의 외적조건으로는 미 점령군이 배상보류내지 연기조치를 취한 것, IMF/GAAT 체제하의 국제교역 확대흐름. 석유수출국기구의 원유가격 대폭 인상에 따른 1차 오일쇼크 이전까지 석유값이 매우 저렴했던 점을 꼽을 수 있음. 그와 함께 혹은 그 이상으로, 다음 사실이 중요. 50년대 일본 본토가 부흥에 전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키나와가 미 군정에 편입되면서 섬 전체가 군사기지가 됐고, 한국에서 미군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군사정권이 존재하고 있었던 데 있다. 미 점령군이 일본을 비군사화, 민주화한 것은 성공한 점령의 흔치 않은 예로 종종 거론되곤 하지만, 이는 오키나와와 한국에서 미군 또는 독재정권에 의한 가혹하고 비민주적인 군정지배에 의해 뒷받침된 것이다.
- 한국전쟁 특수야 말로 일본 경제가 신속히 회복할 수 있었던 최대 요인. 특수는 네이팜탄과 로켓포, 박격포, 바주카포를 포함한 포탄류, 권총/소총/기관총과 탄약 등 무기류, 군용 트럭과 자동차 부품, 석탄과 마대, 군복과 모포 등 물자, 전차와 무선장치 등의 수리와 기지건설에 이름. 미군 특수에 의한 트럭발주가 하늘의 은혜가 돼 도요타, 닛산, 이스즈 3사를 소생시킴. 50년부터 5년간 특수로 일본에는 30억불이 유입됐고, 기업은 이로써 생긴 이익을 낡은 설비의 갱신과 최신기술 도입에 돌리면서 이후의 발전, 60년대 고도성장의 기초를 쌓음. 고도성장이 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자동차, 철강, TV 수출의 호조세와 함께 65년 본격화된 베트남전쟁 특수에 힘입은 바 크다. 조선과 베트남 인민들을 살육하기 위한 많은 무기가 평화헌법이 지배하는 일본에서 제작됨. 이렇게 해서 일본은 부흥을 달성하고 경이적이라 평가받은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일본은 다시 아시아 인민들을 발판으로 대국으로 향한 길을 걸어간 것.
-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시바에는 방위장비 부분이 있어 지대공미사일을 개발, 제조. 한편으로 원자로는 발전장비이자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 제조장치이기도 함. 두가지 기술을 보유한 도시바는 핵미사일을 만들 수 있는 회사다. 이런 양면성은 종합전기업체에 공통되는 특성. 도시바는 이 밖에 방위성에 레이더 시스템도 납품하고, 매년 방위성에서 500억엔 전후의 수주를 확보함. 레이더, 공대공 미사일, 적외선 탐지장치 등을 다룸. 미쓰비시 전기는 약 1000억 엔, NEC는 무선통신장치 등으로 약 800억엔, 후지쓰는 통신전자기기로 약 400억엔을 방위성에서 수주.('13), NEC는 전성기에 사장, 회장을 역힘한 세키모토 다다히로는 "새해 업무를 시작할 때 맨 처음 인사를 간 곳은 방위청"이라 했다. 일본의 종합전기는 방위라는 끈으로 국가와 깊이 연결돼 있다
- 일본 자본주의가 70년대 두 차례의 석유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위 노동조합이 노사협조노선을 통해 임금인상을 강하게 요구하지 않았고 기업의 합리하에 협조적이었던 것과 함께 많은 기업이 생산거점을 해외로 옮긴 것에 있다. 공장을 해외에서 찾은 것은 노동임금이 저렴하기 때문만은 아님. 와타나베 도쿠지와 사에키 야스하루는 84년 출판된 '전환기에 선 석유화학공업'에서 욧카이치 공해 소송결과로 74년 지역전체에서 유해물질배출에 대한 총량규제가 도입된 것에 대해 "즉시 철강, 전력, 석유, 화학 4대업체가 즉시 반대의향을 표명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총량규제 정책은 차츰 기업들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등 기본적으로 정책은 효과를 발휘. 이에 대응한 기업들의 행동은 첫째 재래지역 이외에 새로운 콤비나트 입지를 찾는 것이었다. 홋카이도 도마코마이, 아오모리현 무쓰오가와라, 세토나이카이 서부 스오우나다, 나아가 한국의 여수, 싱가폴 등에 대형 콤비나트를 조성하는 계획이 내세워짐. 그러나 이후 석유화학공업의 성정장체로 일부 외국에서의 계획을 제외하고는 실현되지 못함.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공해규제가 느슨한 국외를 선택한다는 것. 간단히 말해 일본은 자본을 공해를 끼워 수출한 것이다. 이는 전시 대동아공영권 구상의 전후 복제라고까지 할 수 있다.
- 일본은 대일 무배상을 원칙으로 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이의를 제기했던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 남베트남 등 4개국과 과거 전쟁에 대한 배상협정을 맺어 76년까지 총액 10억불 남짓의 배상금을 지불했음. 하지만 지불은 현금이 아니라 공장과 발전소 건설, 항만과 철도 등 인프라 건설공사 서비스, 또는 기계와 플랜트 제공방식으로 행해졌고 이후 일본 기업 및 상품의 동아시아 진출 거점이 됐다. 전시 아시아 군사침략에 대한 배상이 전후 아시아 경제진출의 길을 열었던 것.
- 환율이 변동환율제로 이행한 73년 이후, 90년대 불황으로 불리는 시대까지 일본기업은 생산거점을 해외로 옮기며 경영의 합리화와 효율화를 꾀함. 특히 자동차 관련 배기가스 규제와 에너지 절감기술, 전자업체의 반도체 생산, 여기에 고도성장기 축적된 기술력이 만든 쿼츠 시계와 VHS 비디오, 디지털 카메라, 워크맨 등 독창적인 발명으로 미국 시장을 중심으로 수출확대를 지속하면서 일본 자본주의는 80년대 말 거품시기까지 연 3%를 넘는 안정성장을 유지. 60년대에는 IBM을 거느린 미국이 세계시장을 지배했던 컴퓨터 산업에서도 통산성의 지원으로 70년대 전반에는 일본기업이 IBM을 따라잡음. 일본은 많은 희생을 지불하면서도 철강, 자동차, 화학공업, 전자기기산업 등 20세기 후반의 자본주의 기간산업 부문에서 세계 선두에 서게 됐고, 국제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글로벌화된 세계경제에서 경쟁려을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신자유주의 깃발아래 구조개혁이 추진됐지만 그 결과 초래된 것은 격차확대와 20년 가까운 디플레이션이었음
- 이제 더 이상 이윤을 올릴 공간이 없는 곳에서 무리하게 이윤을 추구하면 그 악영향은 격차와 빈곤의 형태를 띠고 약자에 집중될 것입니다. 그리고 ... 약자는 압도적 다수의 중간층이 몰락하는 형태로 나타날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의 많은 노동자들은 결혼조차 불가능한 상태에 놓임. 그렇게 되면 간단히 말해 물건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고, 금융완화가 추진되더라도 기업이 국내에서 설비투자에 적극 나서지도 않음. 무엇보다도, 결혼도 불가능하고 아이를 키울 수도 없게 되면 저출산, 고령화는 필연이 됨. 이렇게 해서 인구가 감소하는 지금, 미래 시장확대는 바랄 여지도 없고, 경제성장은 현실적 조건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미즈노의 책에 있듯이 '기술혁신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21세기에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 이같은 상황에서 현재 일본정부와 재계가 획책하고 있는 것이 원전수출과 경제의 군사화, 즉 군수생산의 확대와 무기수출이다.
- 현재 일본은 군산학복합체의 입구에 서 있다. 그 두개의 축이 무기수출과 군학 협동연구다. 여기서 중단시키지 못하면 일본은 전쟁할 수 있는 나라에서 전쟁을 원하는 나라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역사적 분기점에 서 있다.
- 19세기 서구에서 과학기술이 태동한 이래 오늘날까지 200년간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성장이 세계를 석권해왔다. 일본도 개국이래 거의 50년 늦게 이 세계사의 급류에 휩쓸려 많은 희생을 지불하면서 따라잡기에 매진해옴. 그러나 증식로 개발계획의 사실상 파탄과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는 과학기술의 한계를 상징하고, 막말/메이지 이래 150년에 걸쳐 일본을 지배해온 과학기술에 대한 환상의 종언을 의미한다.
- 과학기술의 진보로 에너지 사용을 얼마든 늘릴 수 있고 그로써 얼마든지 경제성장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원전만이 아님. 17년 12월 신칸센 노조미의 중대사고는 과학기술의 과신 위에서 차체 경량화에 의한 고속화를 추구하다 벌어질 수 있는 대참사를 예고했다. 게다가 11년부터 시작된 인구감소는 개국 이래 1세기 반에 걸쳐 추진해온 경제성장의 현실적 조건이 상실됐음을 나타냄. 마이니치 신문의 나카하타류반노센류의 투고에 무기원전 카지노가 성장전략인가 라는 게 있다. 정상적 상품경제로는 빠른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아베 정권 경제정책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임.
- 식산흥업, 부국강병에서 시작해 총력전 체제에 의한 고도국방국가 건설을 거쳐 경제성장/국제경쟁이라는 서사, 즉 대국주의 내셔널리즘과 결합한 과학기술 진보에 기반해 생산력을 증강하고 경제성장을 추구해온 근대 일본 150년의 흐름과 결별해야 할 때가 온 것. 요컨대 경제성장을 지속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명제 자체가 의문시 되고 있는 것이다.
- 거품경제 붕괴과정에서 스스로가 범한 소비실패의 후유증에 상처받은 국민은 괴로운 체험에 비춰 시기와 의심의 눈길을 위정자에게 돌리고 있음. 정부의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은 세계의 소비자에게 절약, 검약, 심플 라이프는 고통이 아니라 가치 높은 삶의 방식의 하나가 됐으며 적정 소비를 넘는 낭비는 비속한 인간적 욕망의 상징으로 바뀌고 있음. 소비생활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물건을 사지 않을까'를 고심한다. 이는 단지 소비자의 생활방어라는 차원을 넘어 지구환경과 자원문제에 대처하는 바람직한 태도임. 당연히 그래야 할 소비자의 이런 선택이 경제를 위축시키고 실업을 늘리는 것이 된다면 그런 경제순환 자체가 개혁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념형 경제사회로의 전환, 우치하시,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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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

모든 시작의 역사

역사 2019. 9. 15. 11:48

- 네발 동물들에게서 앞다리와 뒷다리의 차이, 곧 앞다리는 방향을 정하면서 시각적으로 가까운 주변을 함께 살피고, 뒷다리는 추진력을 제공한다는 차이가 이미 중력에 반하는 것이다. 두발걷기는 다리와 발에 심지어 일부 퇴행을 불러왔다. 앞다리가 손이 되면서 그 사이 얻었던 것, 곧 조종기능을 도로 빼앗긴 것이다. 그러니까 원숭이가 두 다리로 일어서서, 이를테면 돌던지기로 장거리 공격자가 되면서 단번에 인류가 생겨났다는 것은 (큐브릭의 인간형성 장면을 좀더 평화롭게 변형시킨 것) 그냥 전설일 뿐이다. 이런 전설은 믿을 수 없이 긴 시간을 요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를 방해할 뿐이다
- 몸무게 50킬로그램의 두발걷기 동물은 (인간 직전 원숭이는 대강 그정도 무게에 키는 120센티) 45킬로 수컷 침팬지가 10킬로미터 구간을 뒤지는 데 필요한 것과 동일한 에너지를 들이면, 16킬로미터의 길을 걸을 수 있었따. 실제로 원숭이들은 오늘날에도 하루 2킬로 정도를 전진하는데, 채집꾼 인간공동체는 13킬로 정도를 나아간다. 먼 거리를 나갈수록 직립보행에 따른 에너지 비축이 12-16% 정도 커짐.
- 암컷이 보호를 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새끼를 데리고 먹이를 찾으며 먼 거리를 이동하기가 위험하므로, 성별에 따른 노동분하가 나타남. 섹스와 먹이의 교환, 또는 일부일처 방식이 나타난 것. 덕분에 암컷은 더 많은 출산을 견딜 수 있었음. 새끼를 데리고 이동하지 않아도 되고, 맹수들로부터 새끼를 더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암컷들은 더 많이 출산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면 직립보행이 소가족제도의 형성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셈. 또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광범위한 영역에서 먹이를 찾을 경우, 직립보행의 이점과 수컷들 사이의 갈등을 줄이는 일부일처제가 서로를 보강해주었다는 뜻. 인간직전의 원숭이들에게 송곳니가 없다는 것은 이런 이미지와 잘 들어맞아 보임. 일부일처 상황에서는 서로 물어뜯을 필요가 적고, 먹이를 찾을 영역이 늘어나는 만큼, 영역방어는 어차피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 침팬지들의 관점에서 보면, 좋아하는 먹이는 두 발로 운반하고 덜 달가운 식물은 네다리로 운반하는데, 이것 또한 경쟁이 두려울 때면 두 발 운반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러브조이의 논제는 원숭이 세계에 일부일처방식이 없으므로, 원숭이 세계와의 유추를 포기해야만 하는데, 게다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일부일처 생활을 햇따는 강력한 암시도 없다는 것이 난점. 수컷 인간직전 원수잉의 몸무게가 암컷에 비해 훨신 많이 나간다는 사실은 많은 연구자에게 오히려 그 반대를 알려줌. 이런 성적 이종현상, 즉 수컷과 암컷 사이의 뚜렷한 신체차이에 대한 설명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일지도 모름. 운동기관이 인간과 비슷하건 더 큰 호미니드 수컷들은 탁 트인 초원지대에서 먹이를 찾을 때 암컷들을 숲 가장자리에 남겨두는데, 암컷들은 그곳에서 계속 나무타기 능력을 유지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방어책도 없었을 것임. 수컷들은 직립보행과 더 강한 신체구조로 채집 영역의 생태적 여건과 위험에 더 빨리 적응했을 것임. 암컷들은 해부학자 랜들 서스먼이 요약한 대로 더 적은 몸무게로 더 오랫동안 부분적인 나무 거주자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 주변 지역의 초원화가 진행되면서 강가 숲에 사는 원숭이들이 고립되었기에, 유전적으로 분리된 그들의 진화는 이 서식 구역의 우기와 건기, 기온의 높낮이, 생태계 변화에 의해 결정되었다. 예를 들면 긴 건고기간 동안 나무들이 작아지고 계절에 따른 특정한 과일들이 나타나지 않고, 잎들이 썩어감에 따라 땅의 식물들과 꽃들이 더 풍성해졌다는 것, 그리고 덕분에 원숭이들이 더 체계적으로 땅바닥을 뒤지게 되었따는 것 등도 이런 생태계 변화의 특징들이다. 이 원숭이들은 처음에는 땅에 일어나 앉아서 작은 먹이들을 (씨앗, 곤충, 파충류, 딸기류) 찾아 먹었다. 일어서기에 앞서 웅크리고 앉기가 먼저 나타난 것이고, 일어나서 걷는 인간직전 원숭이 이전에 조너선 킹던의 용어로 땅원숭이가 나타난 것이다.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뿌리옆의 땅원숭이가 된다. 똑바로 서서 걷기가 아니라 웅크리고 앉아 먹이를 먿는 방식이 인간직전 원숭이들의 상체, 곧 척추와 골반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 고기식사가 개인의 몸을 강하게 만들고, 고기를 장만하는 일이 사회적 영혼을 강하게 만들었따는 주장은 몇 가지 의문을 던진다. 우선 이는 대단히 남자에게 의존하는 문명의 스케치다. 여기서 여자들은 자식을 낳고 간식거리를 마련하는 정도의 역할밖에 할 일이 없다. 그에 반해 식물 및 음식 익히기가 초기인간의 섭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치면, 여자에게도 더 중요한 의미가 주어짐. 그 밖에도 고기를 먹으면 뼈가 남고, 뼈는 100만년이 지나도 학자들이 연구를 할 수 있는데 반해, 식물먹이는 그런 흔적을 훨씬 덜 남긴다는 우연한 상황은, 사냥꾼 태고남자를 옹호하는 학자들에게 과도하게 유리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고기먹이가 우리 몸에 이롭고 에너지 결산에서 사냥이 채집보다 더 좋다는 증거가 있는가? 일단 동물을 죽이면 단백질 결핍은 없지만, 그것을 죽이기까지는 그토록 불확실한 성공을 위해 상당한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지 않는가. 그것 말고도 인간의 경우 몸에 이로운 단백질 공급에 상한선이 있다. 단백질이 일상에서 섭취하는 열량의 3분의 1을 넘기면 (통상 6-15%) 겨우 몇 주만에 죽을 수도 있음. 초기인간이 사냥을 했다면 이런 위험은 더욱 컸을 것임. 야생돌물의 고기에는 지방분과 수분이 적기 때문이다. 사냥의 사회적 성과에 대해서도 의문점은 남는다. 고기 먹이로 넘어간 것이 더 많은 갈등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동물이 클수록 고기에 대한 욕구는 높아지는데, 고기가 분배되었다는 사실이 곧 소유자에게 분배의 주도권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님. 인류학자들이 참아주는 도둑질이라 부르는 것도 있음. 빈털터리들은 사냥감에서 제 몫을 얻기 위해 사냥꾼이 방어에 투자하려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로 싸우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자면 사냥에서 추가 소비의 쓸모가 처음에는 매우 높지만 그 다음에는 급격히 낮아지므로 고기의 재분배가 이루어짐. 그 밖에도 사냥꾼이 죽은 짐승의 임자로 인정되는지도 의문이다. 오늘날 탄자니아에 있는 수렵채집 사회의 사냥행위와 사냥감 분배를 다룬 연구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어째서 사냥꾼들이 고기를 나누느냐'가 아니라, '사냥감이 자기 것도 아니라면, 사냥꾼들은 어째서 애초에 사냥하러 가느냐'를 물어야 함. 성공의 공로를 차지하는 것과 고기의 분배는 전혀 다른 일. 성공한 사냥꾼에게는 더 많은 고기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주목과 인기가 주어진다. 그는 특별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특볗리 유명해지는데, 이는 진화생물학자들에게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가 (생물학자 말고 사냥꾼이) 특별히 인기 있는 짝짓기 상대일 것이라는 추측을 불러들인다.
- 어째서 하필 인류의 정착시기에 포도와 곡식의 발표가 나타났을까? 그 시기에 축제들이 특별한 기능을 했다는 설명이 설득력이 있음. 우선 기후변화가 특권적인 축제에서 소비될 식량의 과잉을 가능케 했다. 무언가를 넉넉하게 가진 사람은 축하할 계기가 있어야 함. 또한 예를 들어 예배소를 건축하는 것과 같은 집단적 업적은 거대한 연회의 형태로 보상받았다. 축제는 성취된 것을 강조하지만, 그것을 성취할 동기도 만들어냄.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렵채집 공동체에서 집단의 크기가 커지면서 마을 생활로 바뀌었으니, 이제 더는 곤궁때문에 서로 뭉친 것이 아닌 사람들의 사회적 결속을 축제가 강하게 해주었기 때문. 축제는 사람들을 결합시킨다. 이미 최초의 신화들이 축하연 이야기로 가득하다. 물론 오로지 신들 사이에서, 또는 상류층 구성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축하연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축제는 계급을 드러냄. 더 많은 식량 여분을 얻었기에 더욱 큰 축제를 거행할 수 있는 사람은, 명성뿐만 아니라 더 많은 재원도 얻음. 이런 특권은 축제가 손님들에게 알콜 음료를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는 분명한 조직능력과 지시권한을 암시한다는 사실에 주로 근거함. 이런 축제음료는 생산 이후 며칠 (밀맥주, 보리맥주, 엠머맥주의 경우), 한달 (용설란 와인), 또는 1년 (쌀술과 포도주) 안에 사용해야 함. 곡물맥주의 생산에 필요한 날짜가 6-14일 이므로 맥주를 축제에 제공하려면 전체 분량이 사용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한꺼번에 생산되어야 함. 고대 이집트의 축제 양조장 한 곳이 하루에 390리터까지 맥주를 공급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산됨. 여기서 이런 도취음료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집중된 연쇄명령이 이루어졌던 것이 아주 분명함. 포도주가 비로소 생산과 소비를 나누고, 그를 통해 무역에도 쓰일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축제에서의 맥주소비는 거의 초기국가라 부를 만한 조직에 의한 것이었고, 따라서 기원전 4000년 무렵 중동에서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으로 시작된 도시왕국의 발생이라는 방향에 딱 들어맞음
- 수컷 붉은 사슴과 다마 사슴에게서 인간과 견줄 만한, 아니 오히려 훨씬 더 아래로 내려간 후두를 볼 수 있다. 덕분에 목구멍과 구강의 비욜이 분명히 목구멍에 유리하도록 변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낮은 소리가 음향적으로 과장된 자기 이미지를 다른 사슴들에게 만들어내기 때문으로 추측됨. 일반적으로 소리길의 길이와 그에 따른 주파수의 다양성은 척추동물의 몸크기를 알리는 신뢰할 만한 신호로 여겨짐. 포효하는 사슴은 목구멍 크기를 두배로 만들어서 특히 어둠속에서, 그리고 전체를 조망할 수 없는 지역에서, 경쟁자와 암컷에게 원래 자신의 모습보다 더욱 강력한 인상을 만들어냄. 이런 으스대기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퍽 잘 알려진 일이다. 인간 남자의 변성기도 이 과정으로 설명됨. 이는 사춘기에 후두가 한 전 더 아래로 내려앉으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깊은 목소리는 문화차이를 가리지않고 거의 동일하게 확정, 권위와 위협, 자신감, 크기 등과 연결됨. 물론 모든 사슴이 그렇게 포효하고 과장한다면 과연 낮은 목소리에는 어떤 이점이 있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은 아직도 탐구해야 할 부분이다.
- 대화사회학에 따르면,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처음에 날씨나 열차 연착, 또는 뉴스에서 얻은 정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런 말로 상대의 후원을 받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라고 함. 인류학자 브로니스라프 말리노프스키는 이를 두고 의례적 언어사용이라는 개념을 썼다. 이는 확인기능으로만 쓰이는 것으로, 정보를 거의 전달하지 않은 채, 간단한 말의 교환을 통해 공동체 의식을 만들어냄. 접촉 자체를 위한 것으로,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 믿을 만한 사람, 무언가 도와줄 사람을 더듬어 찾는데 쓸모가 있음.
- 언어는 단 하나의 시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작에서 나왔다. 자식을 너무 일찍 낳고 오래 교육하는 어떤 생명체의 협동적 천성에서 나왔다. 또한 이름 붙이기의 논리와 공동의도에 주목하게 하는 몸짓 레퍼토리에서 나왔다. 소리로 된 애정의 신뢰 형성효과에서 나온 것이며, 노래의 소리 여부에서도 나왔다. 그렇게 보면 언어가 나오기까지 그토록 오래 걸린 것이 이상하지도 않다. 해부학적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4만년 전에 많은 우회로를 거치며 이동해서 호주와 아메리카로도 넘어갔고, 유럽에도 정착했음. 그리고 유럽에서 호모 에렉투스와 네안데르탈인 등 친척들에 맞서 유일한 인류로 살아남음. 마지막 네안데르탈인들은 아마도 2만8천년 전에 스페인 남부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다른 종과 섞이지 않은 하나의 종이라는 까다로운 준거가 여기서는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해야 함.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사이에서 얼마나 온갖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것은, 무엇이든 제3의 뼛조각이 나오기만 하면 새로운 종의 초기인간으로 분류될 수 있느냐는 의문만큼이나 아직 확정되지 않은 채 열려 있는 의문이다. 어쨌든 네안데르탈인에 대해서는 저 유명한 FOXP2 유전자의 변종을 지녔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 돌연변이는 언어능력에 해를 끼치는 것이고, 그로써 그들이 언어능력을 지녔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됨. 다시 말하자면 호모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30만년 전 두 종으로 나뉘기 이전에 이미 언어가 있었다는 뜻. 그렇다면 맨 처음 말을 한 종은 아마도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였을 것임. 네안데르탈인들은 작은 무리를 이루어 20만년을 견뎠다. 그것은 대규모 기후변동의 시기였다. 그들은 무기를 이용하기는 했으나 아마도 아궁이나 화덕 같은 불 피울 장소를 갖지는 못했고, 상징을 사용하는 확장된 문화를 이루지는 못했을 것임. 고고학적 발굴에 대한 온갖 조심성을 갖고 말하자면, 그들이 색소 사용을 (신체 단장 같은) 넘어 그림작품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작은 무리를 이룬 생활과 문화적 소박함이라는 두가지를 합쳐보면, 네안데르탈인이 언어의 문턱에 이르러 있었지만, 자기들 사회 형태에 어울리는 정도의 몸짓 또는 소리 어휘의 단계를 넘어서지는 모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음. 영국 인류학자 스티븐 미슨은 특히 네안데르탈인이 노래하고 웅얼거리기는 했으나 말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 수컷보다 암컷의 번식비용이 훨씬 더 높기 때문에 암컷은 훨씬 더 까다롭게 고름. 정보, 곧 노래는 자기가 모험적이라는 내용을 포함한다고 요약할 수 있음. 노래하는 새는 동시에 먹이를 찾을 수 없고, 심지어 맹수를 끌어들일 수도 있음. 오래 복잡하게 노래하는 새는 그로써 자신의 영역이 먹이가 풍부하며 따라서 생존능력이 있음을 알리는 셈. 이것은 불리한 조건(핸디캡) 선택이론에 따른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아무나 보내는 신호는 안 되며, 곧 쉽사리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닐 경우에만 정보능력이 있음. 다른 말로 하자면 다음과 같음. 비용이 높을 경우에만 광고를 믿을 수 있다. 오직 성공적 공급자만이 그런 비용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 이런 점이 광고의 반대 결론을 성공으로 연결시켠 줌. 높은 비용을 들여 노래를 하는데, 아직도 살아 있다면 이미 한 가지 시험에 통과한 것임. 신호가 인상적일수록 더욱 엄격한 시험에 통과했다.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힘이라는 결론을 허용하지는 않아도 간접적으로는 그렇다. 그것이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라면, 오로지 힘 있는 자만이 그런 것에 투자하는 위험을 감당할 수 있다
- 미국 여성인류학자들인 엘렌 디사나야케완 딘 포크는 몹시 흥미로운 사색을 펼쳤다. 인간 아기들은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어찌 할바를 모르는 상황에서 자기들이 홀로 방치된게 아니라는 신호를 필요로 했다. 아기를 안는 팔 대신 마음을 진정시키는 전 단계 음악을 통한 소통이 나타났다는 것임. 어째서 그런 음악이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있었을까. 바로 어머니 목소리 때문이고, 반복을 통해 안정적 기대감을 만들고 음높이과 고요함을 통해서는 위험이 없다는 상황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울부짖는 아기가 맹수들로 가득찬 세계에서 자신과 어머니를 극한 위험으로 몰아가는 것이니 이런 진정효과는 생존전쟁 상황에서도 도움이 된다. 이렇게 보면 음악의 시작은 위안이었다.
- 음악은 개인을, 함께 행동을 조율하지 않을 수 없는 상대방에게로 보내는데, 상대의 생존을 후원하는 것이 동시에 생존도 강화해 줌. 진화에서 멜로디의 기능은 진정시키는 어머니 목소리라는 특질에 있었고, 리듬의 기능은 집단행동을 통해 자기와 타자의 대립을 덮어버리는 것에 있었다. 음악에서 정서의 차이들은 사라진다. 듣는 사람들이 음악의 정서에 빠져들기 때문이고, 음악의 정서에 빠져 있는 한은 그렇다. 이것은 선사시대에 인간무리가 특정 규모 이상으로 커졌을 때, 특히 그런 무리들의 행동에 이점이 될 수 있었다.
- 가장 중요한 식량공급방법으로서 사냥과 채집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그리고 식물과 동물의 품종을 개량하지도 않은 채로, 먼저 정착이 이루어짐. 기원전 4000년 무렴 아시아에서 기장과 벼농사의 시작도 마찬가지. 그곳에서는 먼저 야생식물을 생산하고 수확하고 저장했다. 특히 벼는 재배종 벼와 야생 벼를 체계적으로 구분하지도 못하던 수렵채집 공동체에 의해 재배됨. 중국에서는 그보다 4000년도 저 전에 날시가 서늘해지면서 최초의 마을들이 건설됨. 여기서도 정착, 재배, 품종개량 사이의 맥락은 느슨했다.
- 식물학자 잭 할런은 50년 전에 선사시대의 돌낫으로 터키에서 야생밀을 수확했는데, 한 시간만에 1킬로그램을 거둠. 3주 이내에 한 가족이 1년간 먹을 식량을 모을 수 있었던 셈. 산업혁명 때까지 지구상 인구의 5분의 1 정도가 그런 수렵채집 공동체에 속했다는 사실은 설사 기후가 좋은 경우에도 농경으로의 이행이 많은 사람들에게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20세기와 21세기 남반구의 채집공동체들은 매우 불리한 환경에서 사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1만년도 더 전에 농경으로 넘어갔는가에 대해 우선 두가지 이론이 대립함. 하나는 기후변화가 닥치면 식물과 동물이 부족해졌고, 그러면 사람들은 식량이 있는 오아시스와 강변지대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고정된 지역에서의 삶에 익숙해졌고, 그곳 식물계와 동물계에 더욱 집중했다는 추정이다. 줄여 말하자면 이렇다. 날씨가 인간을 특정 장소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자연을 탐구할 각오만 한다면, 자연의 변덕에 덜 노출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 많은 지질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이 이런 오아시스 이론에 반대했다. 원래의 건기에 대한 충분한 증거들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날씨 말고 다른 것도 보았다. 정착 생활로의 이행이 자연의 강요로 이루어졌다고는 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 이전에 기후가 건조해진 세 번의 간빙기가 있었는데도, 오아시스에서 동식물의 품종개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은 기후대신 인구압박을 결정적 인자로 보았다. 2만년 전에는 보통 겨우 25명 규모의 수렵채집 공동체들이 250-500명의 짝짓기 네트워크만을 포괄했는데, 그러다 차츰 현존하는 자원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팽창했고, (그것도 다시 날씨가 좋은 덕에!) 따라서 식량 마련의 방식을 바꿀 필요가 절실해졌다는 것. 기원전 1만년 무렵에 점점 인구가 늘어난 나머지, 식량부족에 대한 전래의 가장 쉬운 대응방식인 이동이 더는 효율적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동 대신 다른 전략을 찾아야 했다. 식량 토대의 확장, 일시적 잉여식품의 저장, 그러니까 절약의 훈련, 그리고 (혁명이론가들과 이기적 유전자 이론의 추종자들에게 최후의 방책인) 번식률 하락 등이었다. 오아시스 이론의 또 다른 대표자들은 높은 번식력, 줄어든 영아사망, 더 긴 기대수명을 정착 생활 덕으로 돌림. 지역 식물계와 동물계에 의존하는 더 단일한 영양과 합쳐보면, 정착생활은 식량을 부족하게 만들었고, 혁신 경영을 절실히 필요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자원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정착생활은 어떤 이점을 제공할 수 있었을까? 줄어든 영토는 방어가 더 쉽다. 풍부하고 먼 사냥터와 덜 풍부하지만 가까운 지역을 두고 고려할 때 후자가 이점을 가질 수가 있다. 이런 전략을, 의자뺏기 놀이에서 허락되지 않은 눌러앉기 전략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놀이 참가자와 의자의 비례관계가 커질수록 운동규칙을 어기고 단순히 눌러 앉아 있고자 하는 충동이 더욱 커짐. 예를 들어 맨 처음에 사람 10명에 의자가 9개였다가, 두번째 단계에서는 9명에 8개, 그러다 마지막에는 2명에 1개가 된다고 상상해 보라. 자원갈등에 참가한 모든 집단이 더 많은 의자(영토)를 차지하려 할 것이고, 언제나 외부 참가자가 끼어드는 데다가 의자(영토) 들은 매력의 정도가 서로 다르므로 이런 비교가 매우 제한적인 것이긴 하다. 그래도 의미가 있다. 정착한 집단은 영토를 차지하고, 그로써 나머지 다른 집단들의 활동영역을 줄여버린다. 그러면 나머지 집단들도 동일한 전략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더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게 된다.
- 맨 처음에 신전(사제)와 왕권이 전체를 위한 결정권을 지녔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두 세력 사이의 갈등이 나타나는데, 결국은 군사집단이 제게 유리한 결정을 내린다. 먼저 신전이 재분배 경제를 조직하고 사용료를 만들고 장부를 작성하고, 자체 생산을 한다. 신전, 또는 사제단은 희생제물을 관리함으로써, 그리고 거대한 개인살림인 왕의 궁정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특히 중요한 족속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통해, 이런 모든 일을 먼저 하도록 미리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뒷날에는 자체 수행원을 거느린 군사 지휘자들이 전체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선다. 도시들 사이의 갈등은 늘 있게 마련이고, 특히 식량위기의 시기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도피처를 찾는다. 이들은 대도시에서 군주가 사제집단에 대해 연속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게 만든다.
- 전쟁은 도시를 하나의 국가로 만들고, 그와 동시에 사제들을 전쟁 지휘자의 보조자 역할로 낮추어 버린다. 메소포타미아에는 여러 도시들이 이곳저곳의 중심지를 이루었고, 그들 사이의 경쟁과 물물교환이 자주 갈등으로 비화했기 때문에, 도시들은 성벽, 성문, 해자 등을 갖춘 방어시설물이 되었다. 도시 정치조직의 핵심업무는 처음에는 분명하게 농경과 무역이 서로 협동하여 일하고 임금을 받도록 하며, 또한 총 생산을 분배하는 일이었다. 이 점에서는 무역과 이주를 통해 서로 연관된 모든 메소포타미아 도시들이 비슷했다. 하지만 누가 통행권을 갖느냐, 상류 물줄기에서 무엇이 나와야 하느냐, 또는 누가 도시 영역들 사이의 중간구역을 맡느냐 등의 싸움이 일어날 경우에는, 차츰 무기가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되었고, 따라서 모든 자원을 포함하는 정치적 임무는 서서히 신전에서 왕궁으로 이동했다.
- 이론에 따르면 돈은 교환매체로서 가치를 보존하는 수단이며 가치척도로서 상업의 거래비용을 떨으뜨리기 위해 발명됨. 돈은 저장할 수 있고 운반하기도 쉬운 특히 인기있는 물건, 예를 들어 금이나 은에서 발전해 나와 마지막에는 구매력 자체가 됨. 제빵사는 정육업자에게 가서 빵을 내고 고기와 바꾸려고 한다. 하지만 정육업자는 이미 빵을 넉넉하게 갖고 있다. 따라서 제빵사는 어떤 교환상대라도 결코 충분히 가질 수 없는 어떤 것, 곧 돈을 제공해야 한다. 바꾸려는 사람들은 모두가 기꺼이 갖고자 하는 물건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래서 이 물건 일부를 떼어 놓는다. 매력적인 교환제안을 간직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언젠가는 돈이라는 매체가 발전하게 된다. 그렇게 보면 돈의 기원은 비축인 셈이다. 이렇듯 많은 것을 보여주는 이 이론은 물론 한가지 약점이 있음. 실제와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 즉 이중의 우연성 문제에 봉착하는 순수한 교환이란, 역사적으로나 민속학적으로도 입증되지 않는다. 최초의 동전발굴은 그것을 주조한 동전제작소의 근처 일대에서만 나타난다. 그것이 원거리 교역에는 쓰이지 않았거나, 아니면 극히 드물게만 쓰였다는 뜻. 당시 가장 작은 동전이 가졌던 상대적으로 큰 가치는 일상적 근거리 교역에 쓰였다고 보기도 어렵게 함.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아티카에서 1드라크마가 이미 양 1마리 가치를 지녔다. 그런 동전은 소소한 거래에는 쓸 수가 없었다. 동전은 처음에는 일반적 교환수단이 아니었음. 돈이 이후 상업에 꼭 필요한 것으로 입증되었다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 최초의 동전들로 지불된 채무란 대체 어떤 것들이었을까? 최초의 동전들이 정치적 공공조직, 즉 지역조직의 인각을 지닌 것임을 생각한다면, 여기서는 개인채무가 관찰대상이 아니다. 그보다는 정치적 채무를 생각해야 하고, 동전지불을 이용하던 정치적 권위를 향한 개인의 청구권을 생각해야 한다. 즉 군인들의 급료, 관리들의 봉급, 체육선수들에게 주던 상금 등이다. 여기서 동전의 인각은 이렇게 지불된 동전이 실질적 구매력가 연관되어 있음을 보증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정치적 권위는 벌금이나 지대 등을 돈으로 받겠노라고 고집했던 것이다. 동전소지자는 법률을 위반했을 경우 벌금이나 세금을 이 돈으로 낼 수 있었다. 따라서 지불이 표준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나타난 곳은 공공질서 분야였다. 이것은 돈의 두번째 기능, 즉 가치표준이라는 기능으로 연결된다.
- 짝짓기란 자신의 번식을 원하는 두 개체가 서로 상대방을 이용하는 것. 여기서 남성측의 기여분이 적어질수록, 일부일처의 가능성은 낮아짐. 처음에 양측의 에너지 비용이 차이가 나지만, 남성이 여러가지를 돌볼 경우, 즉 먹이를 가져오고, 둥지를 짓고, 먹이영역과 여성 및 후손을 보호하고, 후손의 교육에 동참할수록, 양측의 이런 투자비용 차이는 줄어듬. 이렇게 기여한다 해도, 일부일처제와 바람피우기의 결합이라는,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전략을 바꾸지는 못함. 암컷은 두 가지 관점에 따라 이런 가능성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다. 신체적 표지들을 통해 상대방의 유전적 적합성을 살펴보고, 또한 상대방이 훌륭한 부양자가 될 것인지의 개연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 인간 아이들의 양육이 어린 동물의 양육보다 비용이 더 들고 따라서 더욱 후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함. 인간은 훨씬 더 느리게 어른이 된다. 생후 1년이 지나면, 두뇌는 성숙한 두뇌의 절반크기에 도달. 그에 반해 원숭이와 심지어 호모 에렉투스까지도 같은 시기에 어른 두뇌의 80% 정도에 이름. 이렇게 느린 성장은 유인원에 비해 극적으로 긴 기대수명을 동반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경우 자주 여러명의 후손이 동시에 부모의 후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냄. 반면 동물계의 양육은 거의 언제나 차례로 이루어짐. 인간의 일부일처 형성과 노동의 분화는 한편으로는 아이들을 보살피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특히 먹여야 한다는 점에서, 후손에게는 생존에 유리했다. 짝의 형성과 분업은 아이들의 사망률을 크게 낮추고, 서로를 보강했다. 짝의 형성이 분업을 허용하고, 분업은 둘이 서로 더욱 의지하게 만든 것이다. 동시에 인간만이 유일하게 일부일처와 집단생활을 결합시켰다 가족들이 집단을 이루어 생활하는 소수 유인원들의 경우, 이런 가족이란 언제나 수컷 1마리와 그의 하렘으로 구성됨
- 일부다처제로 인해 여성이 부족해지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모두가 결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서로 경쟁상태에 있는 도시국가에서는, 모든 주민이 자신을 전체와 동일시하도록 만들 수단이 될 수 있었다.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다. 일부일처 결혼제도가 규범이 되면, 사회 안에서 남성들의 성적인 경쟁을 줄인다. 그렇게 보면 일부다처에서 사회적 일부일처제로 넘어가는 것은 경쟁을 줄여주는 다른 구조들, 곧 엘리트를 통한 세금지불, 고용주 지분이 들어간 사회보장제도의 도입 등과 비견될 수 있고, 따라서 일종의 정치적 재분배라고 할 수 있다. 아주 늦게야 나타나는 1인1표라는 생각이 이런 관정메서는 1인 1아내라는 공식으로 이미 준비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임. 일부일처 결혼은 정치적 타협의 덕이자, 이익집단을 넘어 집단행동의 의식이 생겨난 덕으로 돌릴 수 있을 것임.
- 일부일처제가 여성에게 실질적으로 내놓는 질문은, 10등 남자가 온전히 제게 속하는 것과 1등 남자의 10분의 1만이라도 제게 속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나은가 하는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
- 한 여자가 자신의 생애 동반자가 자기를 속인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따지면, 그는 무조건 '당신에게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아내나 여자친구가 바람피운 것을 알게 되면,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났어.' 예를 들어 '우리 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라고 그가 말하거나 '그건 아무 의미도 없어'라고 그녀가 말한다면, 이건 그냥 사족일 뿐이다. (독일의 수필가 카를 마르쿠스 미셸) 커플의 사회생물학과 문화사의 배경을 놓고 보면, 두 사람 모두 옳다. 바람피우기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일부일처제에 대한 질문에는 그런 설명이 아무 의미도 없다. 사랑에 찬 결혼이 오로지 바람을 피웠다는 것만으로 해체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감당되고, 용서되고, 심지어 허용될 수도 있음. 물론 이런 진실이 두 사람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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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지구 역사상 환상을 믿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들은 상상력을 통해 수십억의 집단지성을 이룩할 수 있었다. 다른 동물집단은 일정 숫자가 넘어가면 서로를 신뢰하고 협력하기 어려움. 한 개체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숫자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동물 무리와 달랐다. 그들은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강력한 이야기의 토대만 있다면 수백만 명이 넘어가도 똘똘 뭉칠 수 있었다. 그 시작은 단연 신화이자 종교였으며 국가와 사상, 철학과 문화로 발전했다. 모든 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였다. 시끄럽고, 거짓말 잘하며, 이야기를 부풀리는 동물, 즐거운 환상의 토대 위에서 살아가는 동물, 그들은 천생 이야기꾼이었다
- 그들은 연금술사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쇠를 자유롭게 붙이고 모양을 만드는 능력이 당시로서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모습이었다. 실제로 대장장이가 만드는 말편자의 경우, 오늘날의 부적처럼 행운을 가져다주고 악마를 쫓는다고 믿었다. 그를 보면 당시 대장장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주술사나 마법사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연금술의 대가는 혹독했다. 그들은 중금속 중독에 걸려 각종 질병을 몸에 달고 살았다. 특히 비소는 신경마비, 색소침착, 탈모 등의 부작용을 일으켰고, 심할 경우 통증, 구토, 하혈과 함께 사망에 이르는 위험한 물질임. 대장장이이자 불의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괴팍한 성격에 절름발이, 두꺼운 목, 흉측한 얼굴로 그려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 조선시대 왕의 업무는 처리하는 직무가 만 가지나 된다고 하여 만기라고 불림. 4시에 일어나 늦은 밤 11시 취침까지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16시간을 노동한 셈.
- 인간은 광물을 언제부터 캐냈을까? 그 서사는 꽤나 오래전으로 4만 3천년 전에도 광산은 존재했음. 구석기인들은 아프리카에 있는 가장 오래된 강산 라이언 케이브에서 적철광을 캐냈으며, 네안데르탈인은 헝가리에서 부싯돌을 캐냈고, 고대 이집트인들 또한 시나이 반도에서 터키옥을 채굴한 흔적이 있다. 인간은 땅속에서 무언가를 캐내 무기나 도구를 만들고, 유용한 에너지로 썼으며, 금으로 장식을 만들어 목에 걸었다.
- 숫자의 탄생은 7천년전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 이들은 나일강 범람으로 인해 매번 토지의 구분선이 사라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하학을 발전시킴. 또한 숫자는 곡식을 저장하고, 재산을 측정하고, 갚아야 할 빚을 계산하기 위해 필수적이었음. 놀라운 것은 이 숫자가 인간에게 엄청난 힘을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건축술이었음. 피라미드 또한 치밀한 수학을 바탕으로 지어진 정교한 건축물이었으며, 기원전 3천년 경 고대 인더스 문명에서는 자와 컴퍼스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도시를 설계. 이 때문에 이들 땅에는 직각의 도로와 원기둥, 직육면체와 같은 건물이 등장할 수 있었음. 그래서인지 현대 수학의 근본을 탄생시킨 고대 그리스에서 수는 종교적 성향을 띄었음. 실제로 피타고라스 학파는 1부터 10까지의 수를 숭배하기도 했음
- 사실 처음 신대륙을 발견한 건 우리가 흔히 아는 콜럼버스가 아님. 오히려 그는 모험가나 발견자라기보다 침략자에 가까웠음. 그의 항해 일지에는 금과 보물에 관헌 언급이 수백 차례나 등장. 그 스스로도 엄청난 수의 노예를 원했음. 그는 1억명 이상의 원주민 학살의 시초이자, 노예무역의 대표주자였다. 신대륙의 발견은 기원전 1200년경에서 900년경에 살았던 페니키아인을 살펴봐야 한다. 페니키아 문명은 최초의 갤리선을 사용했으며, 지중해를 가로질러 해상무역을 시도. 고대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당시 페니키아인의 이야기를 듣고 정오의 해가 오른편에 떠 있었다니 믿기 어렵다고 기록했고, 그의 기록은 오늘날 그들이 아프리카를 일주했다는 근거가 됨. 적도 남쪽으로 들어서면 한낮의 해가 북쪽과 오른쪽에 위치하기 때문. 페니키아인들은 일명 침묵의 거래를 했다. 원주민이 상품을 갖다 놓으면, 그에 걸맞는 금을 놓고 가는 방식이었다.
- 인류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일했을까? 그것은 행복이나 자아실현, 위대한 목적의식 같은 게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초창기의 원시인처럼 여전히 생존을 위해 살아갔음. 근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90%의 사람들은 땀 흘리던 농부였고, 이후에도 공장 노동자나 단순 서비스 직종에 종사. 현재에도 한국 직장인 60.7%가 생계유지를 위해 일한다고 하니, 과거 신분제나 계급사회, 걸핏하면 목숨이 날아가던 시절에는 거의 모두가 생존을 위해 일했다고 봐야 한다. 지구를 살다 간 대부분의 인간이 하고 싶은 일보다는, 그저 살아가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것은 꽤나 슬픈일이다.
- 고대부터 중세가지 대부분 국가들의 회계는 매우 형편없었음. 과거에는 국왕의 개인지출이나 소득은 비밀리에 부쳐졌고, 이를 조사하거나 검문하지 않았음. 오히려 모두 쉬쉬하는 분위기.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로마 부실장부를 비판했다고 머리와 손이 잘려 광장에 전시됐으며, 루이 14세는 죽기 직전에 과도한 지출로 프랑스를 파산시켰음을 시인. 회계가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이탈리아. 그들은 매우 부유했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새로운 회계기술이 필요했음. 그때 등장한 것이 복식부기였는데, 이는 단순히 수입과 지출만을 계산하는 게 아닌, 자산과 부채라는 개념을 포함해 돈을 관리하는 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인류는 사업의 총이익을 투자자들에게 분배하는 데 효과적인 계산을 할 수 있게 됨. 인간은 회계를 통해 더욱 효율적인 경영을 할 수 있게 됨. 올바르고 뛰어난 기업, 투명하고 튼튼한 국가는 바로 이 회계에서 시작됨
- 사실 16세기까지만 해도 외로움은 잘 쓰이지 않는 개념이었다. 1674년 존 레이가 '흔히 쓰이지 않는 용어'에서 처음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정의했는데, '이웃헤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나 장소'를 의미. 과거에는 지금보다 훨씬 강한 집단의식, 공동체 속에 살았기에 좀처럼 외로움이란 감정이 자리잡지 못했을 것임. 하지만 16세기 르네상스 이후 개인주의가 들어서면서 외로움이 급부상.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자녀를 거부하는 딩크족에서 결혼을 거부하고 혼자 살아가는 나홀로족까지. 오늘날 우리가 개개인으로 분리될 수록 외로움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외로움이 깊어지는 동안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바 형태의 술집이 처음 생김. 당시에는 위스키나 브랜디 같은 독주가 성행했는데, 이는 노동자들이 빠르게 일터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 이에 용이한 것이 바였다. 산업 노동자들은 그 속에서 10분 남짓한 시간 안에 독한 술을 입에 털어 넣고 급히 돌아갔다.
- 스포츠는 disport와 라틴어 deporto에서 유래. 이것을 해석하면 '지루한 일상을 떠나보내고, 신나게 논다'는 의미. 인간은 오래전부터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체조가, 이집트에서는 전차경주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창던지기가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9세기 고대 그리스는 권투, 레슬링, 원반던지기, 종합격투기의 근원인 판크라티온을 포함해 주기적으로 올림피아 제전을 열었고, 이런 정신을 계승하여 최초의 올림픽이 개최됨
- 상담은 아주 오래전 종교로부터 시작. 성직자들은 사람들의 고민을 종교라는 테두리안에서 상담해줌. 그들은 마음 속 짐을 덜어주고, 평온함을 안겨주었다. 오늘날 상담치료가 발달한 계기는 슬프게도 1,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였음. 전쟁은 많은 군인과 그 가족들에게 처참한 고통을 안겨주었고, 이는 우울증, 발작, 공황장애 등 정신질환을 일으킴. 이들에게는 정신적 치료가 절실히 필요했고, 사람들 통해 치유되어야만 했다. 2차 대전 이전에 일어난 경제 대공황 또한 효율적인 직무상담이 크게 발전한 계기가 됨. 당대의 파슨스나 로저스는 "인간은 모두 자아실현 욕구가 있다"고 말하며, 새로운 상담이론을 제시. 절망적 상황에서 상담은 빛을 발했다. 위기가 왔을 때 한 인간이 한 인간을 돕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는 지금도 정신병을 앓고 있다. 범죄, 테러, 전쟁으로 죽는 사람보다 자살로 죽는 사람이 훨씬 많다. WHO에 따르면 39초당 1명 꼴로 자살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오늘날 상담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단적으로 보여줌
- 원시시대 결혼은 분업과 협력의 성격이 강했음. 원시인들은 생존을 위해 부족 간 협력을 원했다. 그 과정에서 결혼은 효과적 수단이 되었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인간의 유년기는 무척 길었고, 책임감 있게 지켜 줄 가족이 필요했다. 그들은 결혼을 통해 번식했고 생존력을 강화했다. 가족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러나 전략적 분업으로서의 결혼은 시간이 지나 그 본질을 잃어갔다. 1만년 전 시작된 농업사회는 사유재산과 계급을 탄생시킴. 상류계층은 그 지위를 유지할 방법으로 정략결호을 선택. 결혼이 권력과 부의 상속수단이 된 셈. 그 과정에서 개인의 뜻은 묵살됐다. 15세기 중반까지 결혼에 관한 한 여성은 속박의 대상이었고, 토지가 없는 이들에게도 결혼은 소원한 일이었다. 영혼의 동반이라는 의미로 부상되기 시작한 것은 약 2세기 전으로, 그 역사가 길지 않음. 하지만 기대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영원이라는 수사는 빠지게 될지도 모름. 110년 동안의 결혼새활이 타당할까? 세계적으로 황혼이혼이 대두되고,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며, 그 빈자리에는 동거라는 대안이 자리잡고 있다. 결혼이 사라지기는 힘들겠지만 연속 결혼, 즉 끝을 정해 놓은 계약결혼이 보편화될지도 모르는 일. 더 나아가 서로의 자유를 허락하는 새로운 종류의 결혼이 등장할지도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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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한 세계사

역사 2019. 9. 5. 12:46

- 다윈은 인간과 원숭이가 똑같은 방식으로 숙취에 대처하는 것을 보고 이 두 종이 친척관계에 있다고 생각했음. 이것이 다윈의 유일한 증거는 아니지만 고위 성직자들도 영장류임을 입증하는 출발점이 됨. 그뿐 아니라 이는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수많은 최근 이론의 선구자가 되었다.
- 우리 인간도 술을 마시도록 진화. 우리 조상은 1000만년 전 나무에서 내려왔다. 왜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지나치게 익어서 나무 밑으로 떨어진 맛난 열매를 주우러 내려왔을 가능성도 있음. 실제 숲에 가면 지표면에 나뒹구는 열매를 볼 수 있다. 그런 열매는 더 많은 당분과 알콜을 함유. 그렇게 해서 인간은 알콜냄새를 맡을 수 있는 코를 지니게 됨. 알콜은 인간에게 당분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판이었다.
- 인간이 농경을 시작한 이유는 식량을 얻기 위해서가 아님. 식량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이유는 술이 필요했기 때문. 이런 이론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 때문
(1) 맥주는 불을 피운 화덕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빵보다 만들기 쉬움
(2) 맥주는 인류가 건강과 튼튼함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타민B를 함유. 수렵인들은 다른 동물의 고기를 섭취함으로써 비타민B를 얻는다. 반면, 농경인은 맥주 없이 빵만 먹다가는 빈혈에 시달리다 약골이 되어 몸집이 크고 건강한 수렵인들에게 죽임을 당하기 십상이었을 것임. 그러나 밀과 ㅂ리가 발효되면 비타민B가 생성된다
(3) 맥주는 빵보다 훨씬 나은 식품이다. 맥주가 좀더 건강에 좋은 이유는 그 안에 함유된 효모가 소화를 돕기 때문.
(4) 맥주는 저장해두었다가 나중에 마실 수 있음.
(5) 맥주의 알콜 성분은 해로운 미생물을 모조리 죽임으로써 맥주의 원료인 물을 정화. 정착생활의 문제점은 인간은 어딘가에 대변을 배설할 수밖에 없으며 그 대변의 일부가 물속으로 들어가 다음에 곧바로 인간의 입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임.
(6) 행동을 바꾸려면 문화적 원동력이 필요함. 괴베클리 테페가 시사하듯이, 맥주가 먼 거리를 여행해서 찾아올 만큼 가치있고 종교적 음료였다면 수렵에 가장 열심인 사람이라 해도 한곳에 정착하여 맥주 양조에 필요한 보리를 재배하자는 설득에 넘어갔을 법하다.
이처럼 기원전 9000년경의 인류는 주기적으로 술에 취하고 싶었기 때문에 농경을 발명했다.
- 알콜이 인류에 끼치는 영향력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인간본성의 신비로운 기능을 자극하는 능력 때문. 대체로 인간본성은 정신이 맑을 때문 냉엄한 현실과 메마른 비판에 짓눌린다. 인간은 맑은 정신일 때는 폄하하고 차별하며 부정한다. 술에 취하면 후해지고 협동하며 긍정한다. 알콜은 실제로 인간의 긍정기능을 효과적으로 촉진함. 알콜은 취객을 차디찬 주변부에서 눈부신 중심부로 이끈다. 취기는 사람을 얼마 동안이나마 진실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알콜을 추구하는 까닭이 비뚤어진 심성 때문만은 아님. 가난하고 학식이 없는 이들에게 알콜은 교향곡 연주회와 문학의 역할을 대신함. 또한 알콜은 삶이 지닌 한층 더 심오한 수수께끼와 비극의 일부로서 전체적으로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독이지만 초반의 짧은 시간 동안에는 우리가 곧바로 뛰어나다고 인식하는 것의 낌새와 조짐을 우리 대다수에게 알려줌. 취한 상태의 자각은 신비로운 자각의 일부이며 우리가 그런 상태에서 도출한 견해도 전반적인 자각상태에서 도출한 견해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함
- 플라톤은 취한 상태일 때 믿음직한 사람이면 어떤 경우든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 게다가 상대를 술로 시험한다 한들 내가 손해 볼 일은 없다. 어떤 사람과 계약을 맺었다가 나중에야 그 사람이 부정직함을 알아채면 돈을 날리게 마련. 그러나 상대의 진면목을 알아보기 위해 같이 술을 마시면 전혀 위험할 것이 없다. 이런 모든 내용을 종합해보면 금주하는 사람을 믿어서는 안된다는 논리적 결론이 나옴. 이같이 고대 그리스에서는 음주는 이상하고 미묘한 일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되었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제정신을 잃지 말아야 했다. 술에 취해도 미덕을 발휘해야 했다.
- 희한하게도 모든 역사가와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가 말술을 마시고도 전혀 취하지 않았다는 데 동의. 영혼 자체가 너무도 질서정연했기 때문에 술에 취해도 합리적 태도만 드러났을지도 모름. 아니면, 그의 간이 유별나게 효율적이었을 수도 있음. 어떻든 소크라테스는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는 해괴한 이유로 칭송을 받아온 사람의 원조다
- 로마의 콘비비움은 현대의 술꾼이 참석하기에는 굉장히 불쾌하고 불편한 자리었으리라 추정됨. 그리스의 심포지온은 자신과 동등한 사람들을 만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심포지아크가 있었다고는 해도 얼굴마담에 불과했음. 생각해보면 그리스인들은 모두 같은 크라테르에 든 술을 마셨다. 심포지온은 남자들끼리 (오직 남자만) 모이는 자리였다. 로마의 콘비비움은 부를 과시하고 누가 윗사람이고 누가 아랫사람인지를 확고히 하는 데 목적이 있었을 뿐이다. 콘비비움은 즐거운 모임이 아니라 자기 위치를 깨닫고 자기보다 서열이 높은 사람들을 칭송하며 서열이 낮은 사람들을 조롱하는 자리였음. 그런 목적은 좌석배치, 노예, 포도주의 품질과 양, 음식, 술잔, 술잔을 던지는 곳을 통해 달성되었다.
- 중세 사람들은 말 그대로 언제 어디서나 술을 마셨음. 그들은 일터에서 술을 마셨다. 볼리외 수도원의 수사들처럼 하루에 약 1갤런의 맥주를 배급받는 수사들 천지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일터에서 술을 마심. 임금의 일부가 맥주로 지급되는 일도 많았음. 예를 들어, 목수는 임금 외에도 3파인트(약 1.7리터)의 맥ㅈ와 약간의 식료품을 덤으로 받음. 영주가 영토를 경작할 일꾼을 고용할 때도 그들에게 술을 얼마간 제공해야 했다. 술은 삶의 방식이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술에 취해 있었던 것은 아님. 들판에서 온종일 고된 노동을 하는 동안 띄엄띄엄 몇 파인트 마셔봐야 술에 취할리 없다. 그러나 맥주를 마시면 속이 든든해졌다. 한마디로 맥주는 액체로 된 빵이었다.
-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술을 마심. 중세 마을 교회는 예배장소라기 보다는 마을 회관 역할을 함. 사람들은 교회마당에서 축구도 하고 예배당 안에서 노래를 부름. 성인축일,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성인을 기념하는 영명축일, 혼례, 세례식, 장례식 등 각종 교회행사에서도 맥주를 나누어 마심. 호상은 늘 놀이판이었다.
- 무엇보다 중세 영국 남성은 집에서 술을 마셨음. 중세 영국 여성과 어린이도 마찬가지. 그때만 해도 물은 상당히 위험해서 아주 가난한 사람들만 마셨다. 앨프릭은 '나는 맥주가 있으면 맥주를 마시고 맥주가 없어야 물을 마신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음. 그 말고도 거의 모든 사람이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만드는 과정은 간단해서 기본적으로 보리와 물과 가능하다면 약간의 향신료만 필요했다. 따라서 남편이 들판에 일하러 나간 동안에 아내는 맥주를 양조하게 마련이었다.
- 중세 에일맥주는 질척질척한데다 불순물이 섞인 죽이나 다를 바 없었음. 맛을 좋게 하려면 약초와 향신료를 넣는 방법밖에 없음. 그중에서도 서양고추냉이가 가장 인기 있었음. 맥주 양조자들은 원래의 맛을 덮으려 했다. 역겨운 음료를 목에 넘길 수 있는 음료로 바꾸는 데 급급. 그때 홉이 등장했다. 홉은 홉 풀의 원뿔형 열매임. 홉을 에일맥주에 넣으면 진짜 맥주(beer)가 된다. 유럽 대륙인들은 오랫동안 홉을 넣어 맥주를 만들었지만 영국인들은 시대에 뒤처졌음. 홉은 런던에서 첫선을 보였고, 서서히 잉글랜드 전역으로 보급됨. 적잖은 저항이 있었다. 랭커셔에서는 17세기 중반이 되도록 에일 맥주를 마셨다. 콘월도 오랫동안 에일 맥주를 고수했다
- 사람들은 대개 홉이 들어간 맥주 맛을 선호. 홉 맥주는 에일 맥주에 비해 어마어마한 장점이 한가지 있다. 상하지 않는다는 점. 홉 맥주는 1년 정도를 보관해도 술통만 밀봉하면 맛이 변하지 않음. 그 때문에 홉 맥주는 대량생산이 가능했음. 모든 주요 도시에 양조장이 들어서서 맛좋은 맥주를 대량으로 생산해냈고 현지의 맥ㅈ집에 판매. 양조장은 맥주를 여과하여 훨씬 더 훌륭한 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 만취를 연구하는 문화인류학자들은 습식문화와 건식문화를 구별. 습식문화권의 사람들은 술에 대해 굉장히 느긋한 태도를 보임. 그들은 하루종일 술을 홀짝이며 매우 유쾌한 시간을 보내며 제대로 취하여 자빠지는 일이 거의 없음. 건식문화는 이와 반대. 건식이라고 그들이 알콜을 전혀 섭취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님.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그들이 술을 크게 경계하여 술을 마시면 안되는 경우를 엄격하게 규정해놓았기 때문. 상황이 허락하면 그들도 술에 취한다. 전형적으로 남부유럽은 습식문하권에 속함. 이탈리아 사람은 평일 정오에 레몬으로 만든 이탈리아 술인 리몬첼로를 홀짝이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북유럽은 아침에 술을 마시지 않으며, 금요일 밤에 술판을 벌이기 때문에 건식문화권이다. 그 때문에 이 두가지 문화는 대륙식 음주와 폭음으로 불리기도 함.
- 스페인 정복자들은 그 당시에도 습식문화에 속했다. 그들은 포도주를 좋아했고, 온종일 술을 달고 살았지만 만취하는 일은 거의 없었음. 이 이론에 따르면 아즈텍은 건식문하다. 앞서 살펴본 법률에 따라 그들이 술에 입을 댈 수 있는 날은 며칠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예를 들어 400마리 술 취한 토끼를 기리는 종교 축제일에는 완전히 고주망태가 되었다. 그들은 종말론적이고 종교적으로 술에 취했고 앞서 살았던 이집트나 고대 중국 사람과 마찬가지로 신성을 체험하는 수단을 알콜을 이용했듬. 그러다 그달 내내 술을 입에 대지 않아다.
- 이방인들이 갑자기 나타나 나라를 정복하고 종교 축제일이 표시된 달력을 없애지 않았다면 이러한 시스템은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했을 것임. 그런데 정확히 아즈텍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 건식문화는 금요일에 폭음하고 월요일에는 말짱한 정신을 유지하는 식으로 그럭저럭 절충이 가능함. 하지만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예수회가 아즈텍 제국을 끝장낼 때쯤에는 달력이라는 중요한 정보가 사라졌다. 그때 알콜의존증이 전 세계적 유행병이 되었고 스페인 치하의 멕시코도 그것에 감염되었다. 실제 카톨릭 사제들은 사탄의 조종으로 원주민들이 알콜 의존증에 빠졌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원주민들이 선한 기독교도가 되지 못하도록 사탄이 방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사실과 정반대였다. 피정복자들을 풀케 중독으로 밀어 넣은 원인은 법률완화와 기독교 유입에 따른 사회혼란이었다.
-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는 노동을 식료품이나 토지 등 어쩌다 손에 넣은 것과 바꾸는 교환경제였다. 인구의 과반수가 강제노역에 종사하는 죄수들이었다. 따라서 기존 노역 의무 이상의 것을 시키려면 무엇인가를 제공해야만 했음. 영국 정반대편에 있는 이 지옥소굴에서 즐거움을 주는 것은 럼뿐이었다. 럼 공급을 장악하는 이가 식민지도 장악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로스 총독대리의 천재적 발상이었음. 역사학자 대다수가 럼이 뉴사우스웨일스의 화폐였다고 말할 테지만 실은 화폐 이상이었다. 럼은 사회통제의 수단이었다. 럼의 유통통제는 일종의 독재자였지만 럼의 소비는 무정부상태를 유발했기에 럼은 역설이었다. 향후 20년에 걸쳐 럼 부대는 럼 사업을 장악했고 부자가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전능한 권력을 손에 넣었다. 후임 총독들이 증류주 무역을 중단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런던에서 파견되었지만 그들이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증류주 무역만이 권력의 지렛대였기 때문
- 금주운동이 원동력이 중서부의 기혼여성들이었다면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독일인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양조업자들이었음. 이민집단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독일인들은 금주나 음주 절제츼 전통이 전혀 없었음. 그들의 전통은 맛좋고 시원한 맥주를 만드는 것이었고 그들은 맥주로 벌어들인 어마어마한 돈을 라거광고는 물론 절대금주운동의 반대 캠페인에 쏟아부었음. 이들의 광고는 위스키와는 반대로 맥주를 건강에 좋고 행복한 독일인 농부가 마시며 정통 독일 제조법에 따라 양조되는 독일음료로 묘사. 그때만 해도 누구나 독일인을 좋아했기 때문. 그러다가 1차대전이 터졌다. 다른 세계대전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인들은 다소 뜸을 들였지만 마침내 1917년에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후에 참전했고, 곡물보급량을 유지할 필요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에 따라 증류주 제조를 금지했음. 주류지지운동이 곤경에 처했다.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주류의 제조와 판매를 금지하는 조치가 시행되었다.
- 인간은 언제 어디에 살든 함께 모여 약에든 술에든 취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이 맨 정신에서 홀로 체험하는 세상은 결코 완전치 않다. 물론 술 같은 중독성 물질은 종류가 다양하지만 언제나 존재하게 되어 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말을 쓰곤 한다. 마약은 불변의 것이다. 마약끼리의 전쟁이 있을 뿐이며 그런 전쟁에서 항상 승리라는 것은 알콜이다. 명심할 점은 정부가 정말로 헤로인이나 코카인 같은 마약을 근절할 생각이 있다면 술에 매기는 세금을 없애기만 해도 목표를 쉽게 이룰 수 있다. 인간은 단순한 종이라서 가격과 입수가능성을 따져 중독성 물질을 선택한다.
- 인간은 맑은 정신일 때는 폄하하고 차별하며 부정한다. 술에 취하면 후해지고 협동하며 긍정한다. (윌리엄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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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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