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은 1330년대에서 1350년대까지 이 중대한 역병으로 인구가 대폭 감소했다. 이는 1340년대 최초의 페스트 창궐 이후 유럽의 인구 감소에 비견될 정도였는데, 장기간에 걸쳐 이와 비슷한 사망률을 초래한 질병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이제는 페스트의 야생 발 생지가 중국 근처라는 견해를 지지해 주는 유력한 근거가 있다. 페스트 박테리아의 DNA 흔적이 26,000~2,600년 전에 중국 내 또는 중국 인근에서 진화한 박테리아라는 주장이다. 중국이 몽골제국의 원 왕 조(1260~1368) 지배 아래 통합된 후에, 페스트가 이들 먼 지역으로부터 인구 밀집 지역으로 퍼져 나가는 것은 상대적으로 더 쉬웠을 것이 다. 사실, 페스트가 14세기 이전 중국에서 발생했다면, 페스트 직전 에 곳곳에서 기록으로 보고되고 있는 홍수와 지진을 통해 감염된 설 치류를 통해 퍼져 나갔을 것이다. 이런 재앙의 결과, 들쥐 떼가 인가에 사는 설치류와 가까이 접촉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쥐벼룩이 페스 트 박테리아를 인간에게 옮겼을지도 모른다
- 격리란 단지 질병에 대한 방어의 목적으로 계속하는 것이 아니었 다. 16세기 후반 페스트에 시달린 나라들의 내부 문제는 다른 나라들이 내린 금지 조치에 의해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외국 항구에서 역병 기미만 나타나도 그런 금지 조치를 충분히 단행할 수 있었고 어떤 경 우에는 경쟁국의 상업에 타격을 주기 위해 그런 소문을 의도적으로 퍼뜨리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병의 전파를 막는 것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노력을 드러내는 것이 과연 중요했을지는 의문이다. 역병에 대처하는 초보적인 규정만을 갖춘 나라들은 무역의 단절에 특히 취약했다. 예를 들어, 영국은 1600년대 초 역병 공포로 15년간 불황에 시달렸고 그 후 경제 회복이 지체되었다. 그러므로 새 국왕 제임스 1세가 내린 역병에 관한 칙령은 인근 나라 및 무역 상대국들에게 필요한 보호 조치를 취했다고 안심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와 같은 칙령은 또한 심각해지는 빈곤과 부랑민 문제에 대처하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는 빈민 그리고 악당이나 범법자outlaw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격리했다. 이 암울한 사람들은 초기에 공공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표면적으로는 역병 퇴치를 겨냥한 법규의 목표물이 된 것이었다. 환자와 감염이 의심되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병원들이 세워졌다. 역병이 잠잠 해지면 이들 병원은 병약한 사람과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수용 시설로 전용되었다. 마찬가지로 격리 조치도 사회적 여과 장치 로 작용해, 원치 않는 인물을 배제하는 반면, 중요한 인물은 그들이 감염 지역에서 왔다고 하더라도 자유롭게 통과하도록 허용했다.
- 페스트 이후 3세기 동안 유라시아, 북아프리카 및 동아프리카의 상당 지역이 역학적으로 얽혀 있었다. 중세 후기의 역병은 비록 간헐적이 기는 하지만 그 이전 수천 년 동안 진행되어 온 과정에서 가장 늦게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질병들 사이에 서로 약간 뒤섞이기도 했지만, 세계의 여타 지역은 이 역병에 이제야 노출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항 해로 인해 구세계 질병 대부분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하고 신세계 의 전염병 매독syphilis이 귀환한 항해자들과 함께 동쪽 유럽으로 퍼져 나가는, '교환'이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천연두, 홍역, 발진티푸스, 그리고 아마도 페스트와 같은 구세계 질병들이 어느 정도로 유럽인의 남북 아메리카 정복에 도움을 주었는지, 그뿐만 아니라, 매독이 아메리카 토착 질병인지 아니면 유럽에 이미 존재했던 병원균의 돌 연변이인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다. 어느 정도는 여전히 공인된 사항이지만, 콜럼버스적 교환이 불평등했던 것은 분명하다. 매독은 초기에는 치명적이고 끔찍한 질병이었지만, 그 병이 유럽에 끼친 영 향은 콜럼버스와 접촉을 한 뒤의 남북 아메리카의 인구 감소와 거의 비교가 되지 않는다. 
- 북미 지역은 17세기 중반부터 사탕수수 농장의 끊임없는 성장으로 발병하기 쉬웠다. 노예선은 더 빈번하게 대서양을 횡단했으며, 종종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노예와 이집트 모기Aedes aegypti의 유충을 운반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인은 설탕(사탕수수) 경제가 발전하면서 일어난 환경 변화였다. 사탕수수 재배용 길을 만들기 위해 숲을 개간함으로써 새로 들어온 곤충과 모기를 먹이로 삼았을 조류와 동물들의 서식지가 줄어들었다. 그 반면에, 물 항아리와 저장 탱크는 모기가 번식할 수 있는 여러 장소를 제공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설탕 그 자체였다. 농장 근처에 설탕 찌꺼기가 남아 있 었고, 그 후 해안 도시에 건설된 제당 작업장 주변에 박테리아의 성 장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어 모기 유충에 영양을 공급해 주었던 것이다. 
- 1840~50년대에 대서양 양안의 여러 나라들은 황열병을 막기 위한 격리 조치를 완화했다. 1828년 지브롤터에 잠시 나타난 이후 유럽에  발병 사례는 없었다. 병이 자취를 감추자 안정감이 되살아났다. 그것은 마치 짐승이 열대 지방의 은신처로 돌아간 것 같았다. 프랑스는  1847년 황열병에 대한 격리를 일방적으로 없애는 데까지 이르렀으 며, 영국과 그 대서양 제국에서는 그러한 방역 조치를 완화하거나 폐지했다. 북아메리카 일부 항구는 황열병의 영향을 계속 받았지만, 예 전처럼 정기적으로 엄습하거나 심각하지는 않았고 북미 지역 나라들도 방역 장벽을 낮추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186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규제가 느슨하거나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는 종국을 고했다. 각국이 위생 조치를 재검토하기 시작했으며, 기존의 제도를 새로운 조치로 대체하거나 보완할 것을 고려했다. 이러한 태도 변화는 황열병의 유병률 및 발병률의 급상승에 따른 것이었다. 1850년대부터 이 질병은 대서양 서쪽을 통해 급속히 퍼졌고, 무역을 통해 남미 및 카리브해의 발병지와 연결된 세계의 다른 지역을 위협했다. 1830년대에 증기선의 등장으로 대서양 횡단의 여행 기간이 약 30일에서 15일로 단축되었고, 1880년대는 스크루 프로펠 러와 같은 동력의 향상으로 다시 더 짧아졌다. 황열병은 그 특징적인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대서양을 횡단해 전염될 수 있었고 그 지역 전체에 걸쳐 상업에 대한 위협이 증가하고 있었다.
- 1865년 전세계는 메카Mecca에 모인 순례자들 사이에 콜레라가 발생 하는 것을 공포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 전염병으로 약 3만 명 메 카 순례자의 거의 3분의 1 이 죽었으며, 이는 곧 세계를 뒤덮을 역 병의 핵심을 이루었다. 광대한 영토에 인구가 널리 흩어져 있는 러시 아에서는 약 9만 명이 병에 걸려 죽었고, 북아메리카에서는 그 전염 병이 대부분 항구를 엄습해 사망자는 거의 5만 명에 가까웠다. 프로 이센과 전쟁에 휘말린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병사자는 16만 5천 명을 넘었다.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많은 것으로 보이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결핵과 같은 일반적인 전염병과 비교하면 치사율이 대체로 낮은 편이었다. 콜레라에 대한 공포감은 그 병이 실제로 초래할 통상적인 위험을 훨씬 더 초과한 것 이었다. 그것은 병사자 대부분이 겪게 되는 그 끔찍하면서도 수치스 러운 죽음 때문에 특히 서구인의 상상력을 강렬하게 장악했다. 콜레라는 이 불행한 사람들을 어떤 사전 경고도 없이 엄습했으며, 그리고 전신에 나타나는 첫 번째 증상 후에 그들은 곧바로 복부 경련을 일으키고 설사가 멈추지 않아 뱃속의 모든 것을 쏟아내야 했다. 신경 쇠약과 죽음이 그 뒤를 따랐다.
- 중국 윈난성은 여러 해에 걸쳐 페스트에 시달려 왔으나 1850년대에 는 더 자주 발생했고 때때로 광시廣西와 광둥廣東 등 인근 성으로 퍼져 나갔다. 민란이 페스트 창궐의 주된 원인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다 른 성으로 퍼진 것은 수익이 높은 아편 무역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무역이 고지대 감염 원천지와 남부 및 동부의 상업 중심지를 연결시켰던 것이다. 이후 제3차 대역병Third Plague Pandemic으로 알려지게 된 최초의 창궐 시기가 언제인지 의논이 분분하지만, 1890년대에 이 질병이 윈난성 동남부 주요 무역 도시 중의 하나인 멍쯔蒙自로부터 주강珠江 강변의 일부 촌락까지 전염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그 이전 에는 질병이 윈난성을 벗어난 후에 없어졌지만 1890년 이후에는 계 속 번져 1894년에는 광둥성 전역을 엄습했다. 그 후 광둥성 수도이자 주요 상업 중심지인 광저우廣州에 이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따뜻한 날씨에 힘입어 선腺페스트가 창궐했기 때문에, 1894년 초 광둥성의 심한 더위가 질병 확산에 유리했을 것이다. 5월경 페스트는 이미 해안을 따라 영국과의 조약으로 할양된 홍콩 항에 이르렀다. 광저우에서 80마일도 못 미쳐 주강 하구에 있는 홍 콩은 감염에 매우 취약했다. 정크선(범선)이나 증기선을 이용해 강 상 류의 항구들과 교역이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해외에서 일자리를 찾으 려고 광저우에서 홍콩으로 '쿨리coolie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하층의 중 국인 인도인 노동자를 서양인이 부르던 호칭. 옮긴이 주)라고 불리는 수 많은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고향에 머물러 있으라는 권고appeal는 무시되었으며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아무런 방해를 받지도 않고 도 시로 들어왔다. 광저우 주민들은 페스트 발병 보도를 듣고도 특별히 놀라지 않았는데, 이는 많은 중국인들이 그 질병을 전염성 있는 병으 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은 거주지와 사업장 주변의 공기를 정화하려고만 했다. 그 지역의 어떤 도시도 어떤 형태로든 격 리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개혁안이 발의되었음에도 위 생 상태는 열악했다. 홍콩의 영국 당국은 수많은 중국인 지주들이 이 런 개혁에 저항하는 것을 묵인해 왔다. 인구 과밀을 규제하면 그들이 임대료로 거두는 수입이 줄어들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홍콩에서 페스트는 인구가 과밀하고 비위생적인 거리를 통해 급속하게 퍼졌다. 6월 중순까지 거의 2천 명의 목숨을 앗아 갔는데, 이때 의 페스트는 이전의 것과 아주 다른 종種임이 분명해졌다. 안일했던 도시는 곧바로 공황 상태로 변했다. 8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도시를 떠났다. 그 결과, 상업은 '심각한 영향을 받았으며 노동력이 부족해졌다.
- 1910~11년 만주를 휩쓴 전염병은 약 6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갔는 데 인도 아대륙 서부와 북부에서 수백만 명이 사망한 인도 전염병 이래 가장 치명적인 발병 사례였다.135 1890년대 중국 남부에서 창궐 한 전염병과 달리 만주에서는 강이나 연안 항로보다는 철도를 타고 퍼졌다. 그런 시나리오는 그보다 몇 년 전에 인도에서 페스트 확산을 목격한 영국의 세균학자 한킨E. H. Hankin이 예견했던 터였다. 아시아·아프리카의 대규모 철도 공사를 언급하면서 그는 이렇게 경고한다. “질병이 근절될 것이라는 약속은커녕, 점증하는 불안의 근원이 될 것이다. 이 예언은 적중했다. 1890년대 이후 만주는 점차 이 지역의 패권을 놓고 경쟁한 러시아와 일본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 다. 러시아는 만주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자신의 입지를 확장하기 위해 북만주를 가로지르는 동청철도東靑鐵道를 건설했는데, 이 철도 는 모스크바와 태평양 연안을 연결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최종 구간이었다. 동청철도와 남쪽 뤼순旅順의 러시아인 정착지까지 남부지선으로 연결되었으나 1904~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배한 후에 러시아 세력은 북쪽으로 밀려났고 뤼순과 연결되는 남부 지선은 일본이 장악해 반관영 남만주철도회사만철滿鐵에 귀속되었다. 1910년 흑사병이 만주를 엄습했을 때, 그것은 내륙 멀리 떨어진 페스트 발생 지역과 하얼빈이나 선양陽 같은 주요 산업도시를 연결하는 이 노선을 타고 퍼졌던 것이다.  페스트에 대한 최초의 보고는 1910년 10월 내몽고의 한 작은 철도 읍 만졸리에서 비롯되었다. 다음 달에는 러시아 지배하의 하얼빈시에 서 이 질병이 나타났는데, 시베리아 마멋(타르바간tarbagan, 중앙아시아산 다람쥐과의 하나)을 사냥하던 두 남자가 페스트 진단을 받았다. 타르바간은 페스트의 야생 감염원인 셈이었고 과거에도 사냥꾼들은 병에 걸렸었다. 그러나 새로운 철도 연결을 통해 이 질병이 평소의 범위를 훨씬 넘어 퍼질 수 있게 되었다. 하얼빈 철도 거점은 곧 페스트의 확산 지점이 되었다. 페스트는 만주 중부 및 남부 지역, 그리고 인접해 있는 허베이성과 산둥성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감염 경로는 중국 새해를 맞아 귀성하는 노동자들의 경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 이 경우 페스트는 바이러스성 폐렴 형태를 띠게 되어 승객이 빽빽 하게 들어찬 철도 객차와 인구가 과밀한 빈곤층 주거지에 쉽게 퍼져 나가기 때문에, 한정된 구역으로부터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것이 다. 따라서 그 당시 만주 유행병에서 특히 페스트 통제 조치는 쥐보다 사람에게 더 집중했다는 점에서 가장 최근 발병에 취해진 것과 상당히 달랐다. 첫 번째 전염병이 창궐할 때, 철도 차량을 격리용 객실로 바꿨고, 그다음에 전염병이 유행하는 동안 하얼빈에서 러시아 측은 중국 측과 협력해 격리와 감염된 주택 소각을 비롯해 '엄격한 조치'를 시행했다. 러시아 당국은 말레이시아 출신의 케임브리지대 졸업생 우롄더吳連德 박사를 채용해 페스트를 직접 치료하도록 했다. 남만주에서도 일본인들이 페스트에 대해 이와 비슷하게 결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처럼 강력한 대응을 했음에도, 만주에서는 경제 교 란이 심각했다. 타르바간 모피의 거래는 1911년 러시아와 중국 두 나 라에서 모두 금지되었다. 물론 그 후에 특정 철도역에서 모피 제품의 검사와 소독 조치를 포함해 우롄더 박사가 작성한 엄격한 규정하에 다시 재개될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철도 운행의 중지 에 따라 무역이 심각한 영향을 받았으며, 전염병 창궐기에 총 손실이 1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 2002년 11월, 중국 남부의 한 정부 관리가 폐렴에 걸렸는데, 이 병은 일반적인 치료 형태에 반응하지 않는 나쁜 사례였다. 2월 중순까지 광둥성에서 3백 건 이상의 급성호흡기증후군의 발병이 보고되었고 5명이 사망했다. 베이징에서 파견된 의료진이 발병 사례를 조사하고 광둥성 호흡기질환연구소장 중난산嶺南山 박사를 만났는데,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새로운 감염병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 시점 에서, 그 발병은 공식적으로 공표되지는 않았지만, 우려감이 증폭되 고 있었으며 사람들이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약이라면 어느 것이나 손에 넣으려고 했기 때문에 약종상들이 몰려들었다. 중 박사와 그의 동료들은 그 병을 치료하는 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병이 비말 감염으로 퍼진다는 것을 발견했고, 환자들을 격리시킴으로써 감염을 막으려고 했다. 정부의 보건 당국자들은 이러한 발견을 무시했지만 3월 중순에 이르면 이 문제는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되 었다. 홍콩의 상업 및 금융 중심지에서 전염병이 발생했으며, 이때 부터는 알려진 바대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SARS)'은 더 이상 국내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 었다. 3월 15일 세계보건기구는 사스가 이미 전 세계적인 보건 위협' 이 되었음을 천명하면서 이미 캐나다, 태국, 베트남 등지에서 발병이 확인되었음을 밝혔다. 3월 19일까지 미국, 에스파냐, 독일, 슬로베니 아, 영국 등지에서도 의심되는 사례가 나타났다. 질병의 이동 속도는 무섭게 빨라져서 세계가 얼마나 작아졌는지 실감하게 했다. 필연적으로 '사스'는 곧 세계화 현상과 연결될 터였다. 즉, 질병이 상업과 관광 네트워크를 따라 퍼지면서 물질적 의미 와, 그리고 좀더 미묘한 방식으로, 전자 매체로 가능해진 정보의 신속한 송신에 의해 가상의 대유행병을 창출했기 때문이다. 2월의 투기, 소문, 고의적인 허위 사실이 그대로 퍼지면서 기업 신뢰를 떨어 뜨리고 상품과 통화 시장에 내재된 불안정을 증폭시켰다. 심지어 세계화를 공개적으로 칭찬했던 사람들조차 새로운 경제는 대체되는 것 이상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창조물이 될 것이라고 인정했다. 1990년 대 후반, 최종 위기는 동남아시아의 '호랑이' 경제(신흥공업국 경제)의 급속한 상승을 갑작스럽게 종식시켰지만, 그때 금융 붕괴라는 전염 병'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었다. 미래는 훨씬 더 불확실해졌다. 세계 경제는 금융 전염뿐만 아니라 실제 상황에서도 점점 더 취약해 보였기 때문이다.
- 조류독감과 돼지독감은 사스와 큰 차이가 있었지만, 두 질병에 대 한 반응은 새로운 세기 이 최초의 대유행병이 남긴 유산에 따라 조성 되었다. 사스는 세간의 이목을 끈 테러 공격과 세계 자본주의의 미래 에 대한 우려 속에서 소련 블록의 몰락과 함께 밀려 온 낙관론이 수그 러들고 있던 시기에 발생했다. 서구에서 방어적인 사고방식이 나타났 고 많은 공중보건 관계자들은 그 시대의 분위기를 따라 움직였다. 아 마도 자기 분야의 미래가 국가 및 세계의 안전 문제에 어떻게 관여하 는가에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량 사망자 수를 예측하 는 것은 대유행병에 따른 대재앙에 대해서 만약이 아니라 언제 의 태도를 조장했으며, 지금까지 위험에 빠져 있었던 의학의 한 분야(공중보건) 쪽으로 좀 더 많은 자원을 동원하는 데 이용되었다. 대중은 종종 이런 과장된 주장에 회의적이지만, 그러면서도 국경을 넘나드는 무 역과 인간의 이동을 줄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손에 휘둘렸다. 검역과 무역 금지는 최근에 확립된 세균 행정germ governance 의 관례에 따라 책임성 있는 조치로 제시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치 가운데 일부는 그 정당성이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세계보건기구의 규정이 이 일련의 다양한 관행을 지속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SPS 협약은 각국이 감 염 위험성에 대한 적절한 과학적 평가에 따라 국제 표준에 근거한 조 치로 이룩할 수 있는 수준보다 더 높은 보호 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12 이 조항은 해외 경쟁을 제한하려는 국가들이 가혹하게 자주 악용할 수 있는 허점을 드러냈다. 그러나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제 반 조치에 실린 믿음은 때로는 잘못된 것이었다. 일부 비평가들의 견 해로는, 차단 방역bio-security' 이라는 지배적인 개념은 잘못된 표현이 다. 이 말이 그릇된 안전의식을 낳았고, 대중이 그렇게 할 수 없는데도 독감과 같은 질병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물과 육류 생산물의 밀집사육(및 원거리 무역)을 정당화하는 일종의 위장막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 인수 공통 감염병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동물 의 대규모 밀집사육이다. 퓨위원회rew Commission(퓨Pew 자선재단의 기금으로 설립된 공장식 밀집사육에 관한 조사위원회)는 존스홉킨스대학 블룸버그 공중보건대학원과 협동으로 작성한 공장식 사육에 관한 최근 보고서에서 “동물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병원균의 위험성 제고, 비치료적 목적(즉 성장 촉진)을 위해 사용한 항생제와 항균제에 내성이 있는 미생물의 출현, 식품에 의한 질병, 근로자의 건강에 대한 우려, 그리고 지역사회에 확산되어 미치는 충격” 등을 경고했다. 아마도 이들 문제의 핵심은 공장식 사육 농가가 일부 논평자들이 부르는 이른바 '진화 가속 경로evolutionary fast-track'를 제공해 병원균을 더 치명적인 형태로 변이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독감 분야의 저명한 전문가 로버트 웹스터Robert Webster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전에는 뒷마당의 가금류를 먹었다....이제 우리는 수백만 마리의 닭을 공 장식 사육 시설에 집어넣는다. 그 바로 옆에는 돼지 사육 공장이 있다. 이제 이 돼지독감 바이러스가 옆의 닭 사육 시설에 침투해 수십억 마 리의 돌연변이를 동시에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 것이다. 
- 위생적 책임이 있는 곳에는 항상 논란이 빚어지는 문제가 있다. 이 는 말하기는 쉽지만 실행하기가 어렵다. 국경을 넘어선 감염에 초점을 맞추면 정부와 생산자들은 다른 곳에 책임을 넘길 수 있는 반면, 특정 생산물의 배제라고 하는 겉으로는 합리적이고 강제적인 처방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보호주의 충동은 종종 질병과 무역 자체의 본 질에 대한 대중의 불안감을 이용하는데, 이는 국내 산업을 파괴하고 새로운 문화적 영향력을 들여오려는 성향이기도 하다. 세계화 시대 에 이러한 두려움은 불편과 불안 등의 일반 감정과 뒤섞여 작용한다. 부유한 나라들은 더 값싼 제품과의 경쟁을 두려워하고 개개인은 전염 가능성을 두려워한다. 치명적인 대유행병이든, 광우병과 같은 은밀한 감염의 형태든 다 그렇다. 세계무역기구와 세계보건기구 같은 단체들은 이 불안정한 상황에 질서를 부여하려고 시도했지만 감염 위험에 대한 평가는 논란의 여지가 많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모든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시도로 과학'에 호소하 지만, 무역의 위생 규제에 순수하게 기술적인 해결책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고 제안하는 것은 기껏해야 순진하고 나쁘게 말하 면 위험한 허구다. 무역의 자유를 유지하고 위생 보호를 제공하는 우 리의 가장 큰 희망은 어떤 이익 집단도, 어떤 국가나 무역 블록도 지 배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명은 왜 사라지는가  (0) 2021.03.21
오리진  (0) 2021.02.06
세상을 바꾼 10대 그들은 무엇이 달랐을까  (0) 2021.01.09
하드코어 히스토리  (0) 2020.12.29
세계역사와 지도를 바꾼 가루전쟁  (0) 2020.11.30
Posted by dalai
,

이 책은 교육컨설턴트이자 강사였던 정학경씨가 지은 책이다. 처음엔 단순히 입시와 관련된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사교육의 허상을 비판하며 '인재'보다 '인간'을 길러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 소개된 33명의 10대들은 모두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의지를 갖고 실제로 실천한 이야기다.

 

이 책은 단순하게 33명의 청소년의 혁신 스토리를 풀어놓은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발명, 희망, 환경, 인권, 평화, 공존의 6가지 테마에 따른 사례를 소개하고, 각 영역별로 우리 청소년들이 실제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또한 청소년의 사회혁신을 위한 5가지 방법론을 제시함으로써 우리 청소년들도 작은 것부터 하나씩 단계를 밟아나갈 수 있도록 조언한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꿈을 먼저 키우라고 조언한다. 어쩌면 방시혁 대표의 말처럼 이해할 수 없는 현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상황과 싸우고 화를 내고 분노하는 것이 먼저일 수 있다.

 

누구나 청소년 시절에는 순수함이 있었다. 나 역시 어린 시절에는 동네 길거리에서 노점상을 하는 분들이 저마다 자기만의 작은 점포를 갖고, 맘 편히 장사를 하도록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적도 있었다. 하지만, 입시와 대학생활 그리고 취업, 결혼을 하게 되며, 어린시절 갖고 있었던 그런 순수한 생각들을 잊고 지낸 시간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책의 33명의 청소년 주인공들은 그런 순수한 생각을 즉시 실행에 옮겼고,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들은 주변의 것들, 심지어 쓰레기 더미에서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를 찾아냈다. 책에 소개되어 있는 속담에서처럼 삶이 시어빠진 레몬즙을 준다면, 그것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낸 것이다.

 

처음 책을 접할 때는 청소년들이 뭔가 화제가 되고, 신문에 날 만한 일을 해냈다면 어느 정도 부유한 나라에 살거나, 부유한 집안 출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 어렵고 가난한 나라의 청소년이거나, 선진국 청소년이라고 해도 평범하거나 오히려 개인적인 삶은 불우한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이러한 결핍이 세상을 바꾸는 행동으로 이끈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요즘 우리는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무엇이든 풍요롭고 풍족하게 해주려는 경향이 팽배해 있다. 마치 주변 친구들의 부모보다 부족하게 해주면 부모로서 사랑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모로서 그리고 어른으로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정신적, 문화적 유산을 남겨주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현실적으로는 입시, 취업을 강조하는 것이 유리할지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의 세상은 아이들과 청소년이 주인공이다. 어쩌면 세상의 주인공으로서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며, 세상을 바꾸어 나갈 마음가짐을 잃지 않게 해주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 아닐까 반성하게 된다.

 

 

* 본 리뷰는 출판사 지원을 통해 작성되었음

 

- 세상에는 자기 안의 음악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올리버 웬델 홈스)
- "저는 별다른 꿈 대신 분노가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저를 불행하게 하는 상황과 싸우고 화를 내고 분노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것이 저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었고 제가 멈출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방시혁 대표)
- "여러분 저는 꿈은 없지만 불만은 엄청 많은 사람입니다. 오늘의 저와 빅히트가 있기까지 제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분명하게 떠 오르는 (저의) 이미지는 바로 '불만 많은 사람입니다. 저는 별다른 꿈 대신 분노가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저를 불행하게 하는 상황과 싸우고 화를 내고 분노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것이 저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었고 제가 멈출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꿈 없이 살 겁니다. 알지 못하는 미래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시간을 쓸 바에야 지금 주어진 납득할 수 없는 문제를 개선해 나가겠습니다.”
- 관찰은 우리 삶에서 그저 하면 좋은 것이 아니라 무수한 기회로 이어지는 문을 여는 '열쇠'다. (티나 실리그 교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리진  (0) 2021.02.06
전염병 역사를 흔들다  (0) 2021.02.06
하드코어 히스토리  (0) 2020.12.29
세계역사와 지도를 바꾼 가루전쟁  (0) 2020.11.30
물류는 세계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0) 2020.09.25
Posted by dalai
,

하드코어 히스토리

역사 2020. 12. 29. 12:12

- 1929년 당시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대통령 밑에서 재무부 장관을 지낸 앤드루 멜런(Andrew Mellon)은 10년 이상 이어진 경제 공황의 시발점이 된 주식 시장 붕괴를 보며 다가올 시련이 사회적으로는 잘된 일이라고 판단했다. 후버의 회고록에 따르면 멜런은 “대공황이 체제 내 썩은 부분을 도려내 줄 것”이라고 말했다. 멜런은 이렇게 덧붙 였다. “높은 생활비가 줄어들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도덕적으로 살아가겠죠. 가치관이 조정될 것이며 진취적인 사람들은 덜 진취적인 사람들의 난파선에서 보물을 찾아낼 것입니다.” 어쩌면 멜런의 소망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도 있겠다. 높은 생활 수준, 주류 밀매점, 재즈, 플래퍼(전통적인 여성다움을 거부하는 1920년대 신여성 ― 옮긴이), 찰스턴(재즈에 맞춰 추는 사교적인 춤 - 옮긴이), 영화의 출현 등으로 대표되던 '광란의 1920년대(Roaring Twenties)가 대공황으로 끝나 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멜런이 천박한 사치라고 생각했던 대부분은 일반인의 오락에 불과했다. 돈이 점점 귀해지자 삶의 즐거움 역시 급격히 줄어들었다. 물론 대공황이 닥쳤을 때 미국인이 모두 파멸에 이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의 절반에 달하는 인구가 일순간에 빈곤선 아래 놓이게 됐으며 이런 혹독한 시기는 10여 년이나 지속됐다. 당시 증언을 들어 보면 죄다 가슴 미어지는 이야기들뿐이라 뭐라도 좋은 일이 있었겠지하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단언하건대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 중에서 혹시 모를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며 대공황 같은 경제 재난을 경험하겠다고 할 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다.
- 20세기 초 독일 군사사가 한스 델브뤼크(Hans Delbrick)'는 현대식 군대를 특징짓는 온갖 요소(조직, 전략, 훈련, 병참, 지도력 등)가 문명수준이 낮을 때 자연스레 얻게 되는 강인함이라는 강점을 상쇄하기 위해 고 안됐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그는 고대 게르만 민족이 잘 교육받은 로 마 군대에 연전연패당한 사실을 두고 이렇게 지적했다. “문명 수준이 높은 사람들에 비해 야만인은 호전적인 에너지를 마음껏 뿜어낸다는 강점이 있다. 마치 고삐 풀린 짐승의 본능 같은 근원적인 강인함을 내 뿜는 것이다. 문명은 인간을 개화해 더욱 감성적으로 만들며 그 과정 에서 신체적인 능력이나 용맹함 같은 군사적 자질을 약화한다. 이처럼 문명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약점을 상쇄하려면 반드시 인위적인 수단이 필요하다. ...... 상비군을 조직하는 주된 목적에는 문명화한 사람들을 규율로 단련하여 덜 문명화한 사람들을 저지할 능력을 갖추는 것이 포함된다.” 델브뤼크에 따르면 애초에 도시 국가에서 국경 너머의 야만인들에 비해 훨씬 온순한 농부들을 훈련과 규율을 통해 군대로 조직화한 것 은 혹독한 자연환경에서 사납고 호전적 으로 변한 이들에 대적하기 위해서였다. “시민이나 소작농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로마인을 한 무리 데려다가 인원수가 같은 야만인 무리와 싸움을 붙이면 틀림없이 로마인 무리가 패배할 것이다. 사실 제대로 싸우기 전에 도망갈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을 상쇄하기 위해 로마군은 전술적으로 긴밀하게 단 결된 보병대를 편성할 수밖에 없었다.”
- 현재는 군사용 무기와 기술이 엄청나게 발달한 상황이다. 급기야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미국 캔자스의 방구석에 앉아 아프가니스탄의 적군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다. 이때 그 무인 비행기 조종사는 마치 도장에서 오랫동안 검술을 연마하며 미래의 결투를 대비해 온 19세기 일본 소년처럼 비디오 게임으로 조종 기술을 연마했을 터다. 사살한 표적의 시체를 가까이서 본 경험도 거의 없을 요즘 킬러 들은 전투 무기를 다루는 법을 훈련하는 대신 드론을 날려 보내 험준 한 산악 지대에 적응한 강인한 부족 전사들을 쏴 죽인다. 델브뤼크의 로마 군대 이야기에서 나타나듯 오늘날의 군대도 부족한 강인함을 상쇄하는 여러 방법들을 찾아냈다. 하지만 강인함이라는 특성은 여전히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특히 계속 늘어나는 전사자 수와 전쟁 비용을 어디까지 감당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강인함이 핵심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역사가가 동료 심사를 거쳐야 하는 논문에서 그 사실을 무슨 수로 확증할 수 있을까?
- 어마어마한 사망자가 나온 결과 사회는 극심하게 침체되었으며 사 람들의 머릿속에는 어두운 생각만이 가득 찼다. 이웃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수없이 지켜본 생존자들은 삶이 오래 지속 되리라는 확신을 잃었다. 이런 태도는 예술에도 반영되었다. 당시 많 은 예술 작품들은 트라우마에 빠진 사람들의 정신을 들여다보는 창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일단 해골 같은 것들로 죽음을 물리적으로 표현하 려는 풍조가 여기저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망률이 급격히 높아지 자 사람들은 자신을 지켜 줄 것 같은 성유물이나 기도에 의지했다. 하 지만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자 자신의 믿음 체계에 대한 확신이 흔들렸다. 흑사병이 서방 세계를 강타하고 나서 한 세대 후에는 끔찍한 회의주의가 사회에 스며들었다. 당시 서방 세계 인구 의 절반에 달하는 7500만 명이 시체로 실려 나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 중 일부는 무모하게도 엉터리 치료법이나 신비주의에 빠져들었다. 아니면 오늘만을 산다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난교, 강간, 강도, 살인 등을 저질렀다. 15세기 잉글랜드에서는 전체 인구 중 4분의 1이 결혼을 하지 않았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굉장한 수치였다. 한편 이 끔찍한 상황을 책임질 누군가를 찾으려는 움직임도 나타 다. 중세 유럽에서 그 희생양은 유대인이었다. 이 시기 유대인에게 닥 친 일들은 가히 끔찍하기가 홀로코스트에 버금갔다. 당시 유럽인은 마을 우물에 독을 풀어 사람들을 병들게 함으로써 기독교 세계를 장악하려 했다는 혐의로 유대인을 고발했다. 흑사병 피해자들도 질병을 퍼뜨리는 주범이라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마법이나 주술을 행한다고 의심받는 사람들 역시 비난의 표적이 됐다. 14세기 흑사병이 시작될 무렵 잉글랜드 인구는 약 600만 명이었다. 이는 많은 전문가들이 당시 잉글랜드에서 최대로 수용할 수 있는 인구수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 수치다. 흑사병이 창궐한 후 단 몇 년 만에 잉글랜드 인구는 2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인구가 다시 예전수준으로 회복되기까지는 300년 이상이 필요했다.
- 인류는 이미 흑사병 부류의 병원균을 무기화하려는 의도로 활용한 적 이 있다. 흑사병에 관한 오래된 이론 중 몽골인이 유럽에 흑사병을 들여와 중심 도시를 공격하며 퍼뜨렸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따르면 몽골인은 감염된 시체를 도시 외벽 너머로 던졌다고 한다. 이런 주장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일본군이 의도적으로 벼룩에 페스트를 주입해 중국의 도시에 투하했던 것은 확실하다. 그때 이후로 세균전은 많은 진전을 보였다. 사실 공기로 전파되는 병원균을 무기로 사용한다는 생각은 전 세계 무기고에 있는 다른 어 떤 무기를 활용하는 것보다 더욱 무시무시하고 더욱 파괴적일 수 있다. 물론 핵무기나 화학 무기 역시 끔찍하지만 둘 다 치명성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살상력이 있는 병균이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파되며 퍼져 나가고 여러 세대에 걸쳐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인간이 만들어 낸 전염병은 지금까지 자연이 인류에게 가한 그 어떤 위협보다 끔찍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새로운 질병들도 나타난다. 거의 매년 새로운 종류의 독감이 대지, 가금류, 조류로부터 인간에게 옮는다. 스페인 독감은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질병이었다. 에이즈 역시 마찬가 지였다. 또 우리가 박멸한 질병이라도 자체적으로 변이가 일어나 거나 질병 억제를 위한 백신, 치료제, 항생제, 해독제의 효과가 떨어지 면서 그 위험이 되살아날 수도 있다. 아무래도 팬데믹에 따르는 직접적인 결과인 대규모 사망 사태에 집 중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 외에 다른 많은 사회 분야에 미치는 파 급 효과 역시 상당하다. 정부나 보건 당국이 미래에 질병이 초래할 수 있는 직접적인 위협뿐 아니라 대중의 공포나 불안, 불합리한 행동 등 으로 촉발될 위협도 똑같이 염려하고 있다는 것이 최근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역사를 고려하면 당연하다.
- 천연두는 사상자를 낼 만한 무기로 사용하기에 충분히 강력한 질병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쉽게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 데다 백신이 이미 존재하거나 없더라도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탄저균이 훨씬 더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를 공황 상태에 빠뜨리고 공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해하게 만들 의도라면 천연두는 우리의 집단 기억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병균 가운데 하나다. 세균학 전문가 휴 페닝턴(Hugh Pennington)은 “천연두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을 두려워하는 마음 이 불합리할 정도로 크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또 “물론 천연두가 사람을 죽이기는 할 것이다. 하지 만 천연두에 딸려 오는 공포심이 그것을 더 효과적인 무기로 만들어 준다. 천연두는 대량 살상을 위한 무기가 아니라 대량 공포를 위한 무기다.” 실제로 오늘날 천연두를 두려워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수많은 사상자를 낸 이 질병이 다시 창궐했 을 때 대중이 빠질 공황 상태다. 예컨대 1947년 뉴욕에서 천연두 사태가 벌어졌을 때 홀로코스트 사 망자 숫자에 맞먹는 600만 명에 달하는 뉴요커가 단시간 내에 백신 접종을 받았다. 예전에 매년 규칙적으로 600만 명씩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병균을 물리치기 위해서였다.
- 우리는 어떤 기록이나 이야기를 해석하는 방식이 다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 머릿속에는 황금기'나 '흥망성쇠'같은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이 너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리하여 사물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곤 한다. 인류학자 조지프 테인터(Joseph Tainter)에 따 르면 로마 제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세금을 지나치게 높게 책정한 반 면 공공 서비스는 제대로 보장하지 않아 심지어 일부 시민은 쳐들어 오는 야만인'을 구세주라며 환영했다고 한다. 청동기 시대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이론이 존재한다. 지나치게 관료 주의적인 데다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는 지중해 국가들의 궁정 문화는 대다수 백성에게 하등 쓸모없었으며 그 때문에 그들은 결국 어떤 식 으로든 궁정 문화를 외면하거나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는 않기로 결심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체계가 너무 복잡해서 제대로 작동 하지 않거나 지나치게 중앙 집권화한 사회가 하층민의 문제에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에 훨씬 단순한 체계나 지방 자치 체제로 회귀하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누구에게 질문하는지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우리가 그들이 살았던 '호시절'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다. 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로마 제국의 후계자들은 수백 년에 걸쳐 제 국을 (어떤 식으로든) 다시 원래대로 합치기 위해 애썼으며, 청동기 시대 가 막을 내리고 나서 여러 세기 후에 호메로스라는 눈먼 시인은 영웅이 활개 치던 호시절을 이야기로 되풀이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 어떤 면에서 아시리아 제국은 그 성공들 때문에 몰락했다고 할 수 있 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아시리아인은 중동에서 가장 포악하고 강력하다는 민족들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일부 역사가는 아시리아 에 정복당한 대부분의 민족이 아시리아가 무대를 떠난 뒤에도 고분고 분하게 굴었다고 주장한다. 아시리아에 이어 페르시아 제국이 등장했 을 때 페르시아인은 아시리아인만큼 잔혹해질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 른다. 아시리아가 이미 위협이 될 만한 부족, 민족, 국가를 제압해 놓았 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 역사가는 그로부터 300년 후 알렉산더 대 왕의 페르시아 원정이 모두의 예상보다 쉬워 보였던 이유 역시 해당 지역이 여러 세기에 걸쳐 아시리아와 전쟁을 벌인 결과 제국 체제에 길들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거대한 제국이 쇠락하거나 멸망한 이유를 추적하기란 언제나 어렵다. 아시리아의 경우에는 주로 내전과 지나친 군사적 확장이 몰락의 범인으로 지목된다. 아시리아의 마지막 위대한 왕들 가운데 바빌론을 파멸시킨 센나케리브 왕은 아들들에게 암살당했다. 전승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센나케리브는 기도를 하다가 뒤에서 두개골을 강타당해 죽었으며 그를 내리친 무기는 바빌로니아의 신을 대표하는 종교적 성상이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센나케리브가 바빌론에 저지른 짓에 복수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겼다. 후계자 에사르하돈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왕위에 오르고 난 뒤 위대한 도시 바빌론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 로마군은 언제부터 로마군이라기보다는 게르만군 같아졌을까? 애초에 이 사실이 중요하기는 했을까? 로마인에게는 이것이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인 질 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대부분 게르만 부족민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로마가 가장 어두운 시기를 마주했을 때 결국 서로마 제국을 뒤흔들어 놓을 군대로부터 나라를 수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불과 몇 세기 만에 게르만 전사들이 군 지휘부로 올라갈 정도로 로마 군대는 지나치게 게르만화되었다. 심지어 서로마와 동로마의 주요야전군을 모두 게르만계 장교가 통솔하는 시기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군은 과거와 외양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전투 방식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게르만 부대들은 (갈리아 부대가 그랬듯이) 군단에 통합되어 로마군처럼 바뀌는 대신 점점 더 자신들의 전통대로 야만적인 무기와 갑옷, 지도자, 전투 기술을 사용했다. 이런 변화가 로마의 운명에 얼마만큼 기여했는지 정량화하기는 어렵다. 물론 최근 고고학자들은 과거 야만족 철의 장막 뒤에 가려 있 던 발전 과정을 어느 정도 밝혀냈다. 베일에 가려 있던 유럽 중부 및 부부 지역 안쪽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가 증가 하고 경제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정치 시스템이 발전하고 새로운 농업 기술이 등장했다. 또 이런 변화들은 모두 급격한 인구 성장에 기여했 다. 이 중에서 로마인과의 접촉으로 발생한 변화는 무엇이고 게르만 족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한 변화는 무엇인지 구분하기란 쉽지 않 다. 하지만 이러한 로마 제국 말기 게르만 부족의 변화는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 때 그들을 훨씬 더 위협적으로 만든 주요 원인이었다. 역사가 피터 히더(Peter Heath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나타난 인구 급증, 경제 발전, 정치 개혁 덕분에 4세기의 게르마니아는 1세기와 비교했을 때 로마의 유럽 지배 계획에 훨씬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 인류 역사에서 오래된 관행 가운데 유치(乳齒)가 날 때 고통을 덜어 주거나 잠에 잘 들 수 있도록 아이에게 술이나 아편을 먹이는 행위가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의사가 아이에게 수면제를 처방하거 나 부모가 아기 잇몸에 위스키를 문지르는 행위가 꽤나 흔했다. 물론 이제 우리는 그런 행동이 아이들에게 해롭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수백 년 전에도 이런 문제를 인식한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 《유 년기의 역사》에는 흄(Hume)이라는 영국인 의사의 말이 인용되어 있 다. 1799년에 흄은 간호사들이 꽤나 강력한 아편제이자 결국에는 비 소만큼 치명적일 수 있는 고드프리즈 코디얼(Godfrey's cordial, 달콤한 시럽에 아편 팅크를 섞은 영유아용 진정제 ? 옮긴이)을 아이들 목에 부어 넣은 탓에 수천 명의 아이가 목숨을 잃었다고 비판했다. 과거에는 자녀를 공개 처형장에 데려가 처형 장면을 보여 주며 도덕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르치는 것을 바람직한 양육법으로 여겼다. 때로는 교육 효과를 높이기 위해 처형 장면을 지켜보는 동안 일부러 자녀를 때리기도 했다. 물리적 고통에 처형 장면을 영원히 결부 한 것이다. 이렇게 아이들을 때린 이유는 단순히 교육 목적 외에 여러 다른 이유가 있었다. 예컨대 옛 영국인들은 재판에서 증거를 제시하 듯이 합법적인 느낌을 연출하기 위해 아이들을 때려서 그날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을 일종의 공증인 혹은 알림장으로 활용하기 위 해 물리적인 폭력을 가한 셈이다. 현대의 부모들은 자녀가 TV와 비디오 게임에 나오는 가상의 폭력 행위에 노출되는 것, 그리고 지속적인 노출의 결과 실제 잔혹 행위에 도 둔감해지는 것을 걱정한다. 하지만 과거 여러 시대에는 TV 프로그램을 위해 꾸며 낸 폭력이 아니라 실재하는 폭력 때문에 아이들이 또 다른 폭력에 둔감해졌다. 아이들이 유년기부터 진짜 살인이나 고문행위를 눈앞에서 보고 자란 사회를 떠올려 보라. 어떤 경우에는 아이들이 그런 잔혹 행위에 직접 참여했을지도 모른다. 요즘 그처럼 유혈이 낭자하는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가 있 다면 우리는 그 아이가 정신적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었으며 상담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시대나 문화를 막론하고 모든 아이가 그런 경험에서 동일한 영향을 받았을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이전 시대 사람들은 동물이 도륙당하고 사람이 죽임당하는 모습을 당연한 일처럼 보고 자랐기 때문에 현대적 감수성을 지닌 사람에 비해 오히려 폭력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행위가 시대와 무관하게 모든 인간에게 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 나의 행위가 누구에게나 동일한 영향을 끼쳐서 그 사람을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바꾸어 놓지는 않는다. 현재든 과거든 잔혹한 공개 처형 장면을 실시간으로 여러 차례 목격한 아이라면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아이들과는 폭력에 영향을 받는 정도나 방식이 다를 것이다. 반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아이가 그런 경험을 한다면 아마 오래도록 상담이나 약물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
- 과거 많은 사회에서는 오늘날과 달리 부모와 자식이 그리 많이 접 촉하지 않았다.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유대감을 키우는 경험마저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여러 사회와 문 화에서 수천 년 동안 유모 제도가 큰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유모(다.른 여성의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여성) 이야기는 성서 시대는 물론이고 고대바빌론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존재한다. 고대 로마 시대 유모들은 콜룸나 락타리아(Columna Lactaria, 직역하면 '젖 먹는 기둥)라는 장소에 모여 일감을 찾았다. 특히 많은 사회에서 영아에게 동물의 젖을 먹이면 안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산모가 젖을 내놓지 못하거나 출산 도중에 사망한 경우에는 유모를 통해 필요를 채웠다. 하지만 유모에게 자녀를 맡길 경우 자녀는 대개 부모와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으며 때로는 그 기간이 수년에 달했다. 이전 시대에서는 별 거리낌 없이 다른 이에게 자녀를 양도하는 충격적인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 18~19세기의 여러 자료를 보다 보면 자녀를 인격체가 아니라 강아지 정도로 취급했다는 생각이 든다.
- 맥락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폭탄 실험은 아무 맥락 없이 이루 어지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마지막 해가 어땠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때를 전쟁의 가혹한 본성이 가장 잘 드러난 최악의 해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1945년에는 사실상 지도상에서 도시가 증발해 버리는 일이 일주일에 여러 차례’ 일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증 명된 사실이 하나 있다면 평화기에 아무리 많은 국가가 수많은 무기 조약에 서명하고 서로에게 수많은 제약을 부과했더라도 전쟁 중에는 하나도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여러 사회가 각자의 생존을 걸고 총력전 을 벌이는 와중에 윤리적 신성불가침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이 처음 시작될 때만 해도 도시 폭격에 세계가 경악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 되었기 때문에 1939년에는 도덕적인 분노라는 것이 전쟁 전의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별난 잔재처럼 여겨졌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폭탄이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폭격기 수백 대를 보내 감행해야 했던 공습을 이제 단 한 대의 폭탄으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본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행위의 도덕성을 놓고 토론할 때 이 사실은 자주 묵과된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이 사실을 분명 중요하게 인식했을 것이다. 원래 연합국은 히틀러 치하의 독일을 무너뜨릴 목적으로 재래식 폭탄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 새로운 초강력 폭탄을 독일에 투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독일의 거의 모든 대도시와 중소 도시가 이미 찢겨 나간 상태였다.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하기 두 달 전인 1945년 5월, 결국 나치 독일은 항복했다. 연합국은 아직 일본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1945년에 일본은 독일이 당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일본의 여러 도시가 폭격을 당해 불타고 있었다. 만약 원자 폭 탄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전쟁을 이어 나갔을 것이다. 1945년 3월,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다섯 달 전에 미군은 300대가 넘는 중폭격기를 동원해 도쿄에 소이탄 폭격을 단행했다. 결 과적으로 10만 명이 죽었고 100만 명 이상이 다쳤으며 27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면적이 불탔다. 8월에 원자 폭탄이 투하될 무렵 도쿄는 이미 여러 차례의 소이탄 폭격으로 80~95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면적이 잿더미가 될 정도로 심각하게 황폐한 상태였기 때문에 표적 우선 순위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다른 일본 도시 60여 군데 역시 상태가 비슷했다.
- 오늘날 우리는 미국이 일본에 원자 폭탄 두개 를 투하했던 일을 이야기할 때 '도덕성'의 맥락에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실 당시 의사 결정권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혹은 바라는) 만큼 선택권이 폭넓 지 않았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리는 대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주장은 아마도 당시 정치 현실을 모르고 하는 말일 터다. 역사가 게리 윌스(Garry Wills)는 저서 《폭탄의 힘》(Bomb Power)에서 이렇게 말한다. “미국이 전쟁을 끝낼 만한 무 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면 원 자 폭탄이 개발된 후에 사망한 모든 미군 가족은 분노했을 것이다. 대 중, 언론, 의회가 대통령과 고문들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트루먼 대 통령을 탄핵하고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을 군사 법원에 회부하라는 요 청이 빗발쳤을 것이다. 정부는 수십억 달러의 자금과 막대한 지력과 인력을 다른 군사 프로젝트 대신 원자 폭탄 개발에 투입하고도 아무 런 소득을 거두지 못한 책임을 져야 했을 것이다.”

 

Posted by dalai
,

- 설탕을 만드는 과정에서 파생된 제품이 지금까지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간식으로 즐겨 먹는 캐러멜이다. 캐러멜은 아랍어로 '달콤한 소금으로 만든 공' 이라는 뜻의 '쿠라트 알 밀' 에서 유래했다. 아랍인 들은 설탕과 캐러멜을 만들어 세계 각국에 수출했는데, 얼마나 많은 이익을 얻었는지 “설탕은 아랍인들이 생산하는 금과 같다”는 말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반면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유럽인들은 설탕을 맛보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서기 1097년부터 시작한 십자군전쟁 때, 중동으로 쳐들어간 십 자군이 설탕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꿀벌을 이용해 힘들게 얻어낸 꿀이 아니면 단맛을 맛볼 수 없던 유럽인들은 설탕의 달콤함에 빠져들었다. 1099년 2월, 십자군은 동맹을 제안한 이슬람 세력 트리폴리공국에 사절단을 보냈다가, 그곳에서 설탕을 만드는 작물인 사탕수수 농장을 보았다. 이에 설탕을 얻을 수 있다는 욕심에 트리폴리공국의 동맹 제안을 무시한 채 2월 14일 트리폴리공국으로 쳐들어갔을 정도다. 당시 중동에서는 정치적 내분이 극심해 각 지역마다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어 서로 다투고 있었던 터라, 개중에는 트리폴리공국처럼 십자군과 손잡으려는 집단도 있었다. 그런데 십자군은 설탕을 얻는 재료를 보자마자 동맹 제안을 뿌리치고 다짜고짜 전쟁을 걸어왔을 만큼 설탕을 중요시했다. 십자군의 공격은 3월 13일에 격퇴되었으나 그로부터 9년 후인 1108년 십자군은 다시 트리폴리공국을 침공했다. 트리폴리공국의 수도인 현재 레바논의 도시 트리폴리는 1년 동안 십자군에 포위당했고, 통치자와 주민들이 거세게 저항했지만 1109년 7월 12일 십자군에 함락 당하고 말았다. 10년 동안이나 트리폴리를 얻기 위해 전쟁을 벌일 만큼 십자군은 설탕에 집착했다.
- 1815년의 워털루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몰락했으나 그가 추진한 사탕무 재배 산업은 계속 확충되었다. 사탕무는 사탕수수보다 훨씬 빨리 자라 설탕을 더 많이 추출할 수 있었고, 설탕 가격도 사탕수수에 서 추출하는 것보다 훨씬 낮았다. 게다가 사탕수수처럼 덥고 습한 기 후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유럽처럼 비교적 서늘한 곳에서도 잘 자 랐기 때문에 설탕을 얻는 데 효율적이었다. 사탕무를 포함해 무 종류의 식물들은 빨리 자라는 것이 특징이다. 《삼국지연의》로 유명한 중국 촉나라의 재상 제갈량도 병사들에게 무를 길러 먹게 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유럽에서 사탕무를 이용한 설탕 정제산업이 자리잡자, 사탕 수수 재배에 경제의 대부분을 의지해온 카리브해 지역은 큰 타격을 받 았다. 특히 가뜩이나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배상금 요구를 받고 시달리던 아이티는 회복이 불가능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사탕무 재배가 확충되면서 더 이상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흑인 노예 를 부릴 필요가 없어지자 유럽 국가들은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시작했다. 겉으로야 인권을 내세웠지만, 정작 인권을 외친 프랑스혁명 때도 흑인 노예를 억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낸 것을 떠올려본다면, 유럽 국가들이 노예 제도를 폐지한 진짜 이유는 사탕무 재배로 인해 노예사업이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흑인 노예들은 사탕수수 때문에 고통 받다가 사탕무로 자유를 얻은 셈이었다.
- 후추의 판매를 통해 막대한 부를 벌어들이는 이슬람 세계는 그 부를 질투한 유럽 사람들의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로마제 국이 무너지고 수많은 왕국들이 난립하는 혼란기를 겪은 유럽 사람들은 예전보다 후추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로마처럼 강력한 지배와 통제력을 가진 국가체제가 무너지고 그보다 훨씬 약한 수많은 나라들이 서로 아옹다옹하는 상황이라서, 유럽인들 스스로가 후추의 원산 지인 인도나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직접 후추를 사러 가지 못하고, 대신 아랍 상인들이 가져온 후추를 살 수밖에 없었다. 아랍 상인들이 바보나 자선사업가가 아닌 다음에야 그들이 먼 나라에서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을 들여 어렵게 가져온 후추를 유럽 사람들에게 싼값에 팔 리가 없었다. 비싼 값에 후추를 사들이던 유럽인들은 내심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후추를 보다 싼값에 더 많이 얻으려는 욕망을 품었는데, 그런 목적으로 벌어진 그들의 대외 팽창이 십자군전 쟁과 대항해시대였다.
- 오늘날 반중 정서가 강한 우리 사회에서 조공은 옛날 중국에 바친 굴욕적인 상납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중국은 우리나라에 가급적 조공을 하러 오 지 말라고 했던 데 반해 우리나라는 오히려 조공을 자주 하려고 애썼다. 이는 우리나라의 지배층이 비굴하거나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조공이 그만큼 남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몇 가지 사례만 들어본다면, 1019년 고려가 귀주대첩에서 요나라의 군대를 물리치고 두 나라의 국교가 정상화되자, 고려는 1년에 여섯 번 이나 요나라에 조공하러 사신들을 보냈다. 요나라를 이기고 나서도 조공하러 사신들을 보낸 고려가 비굴한 겁쟁이로 비칠 수도 있지만 실상 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정황을 기록한 《송사》나 《요사》 같은 중국의 역사서를 보면, 고 려 사신들이 자주 요나라에 오자 요나라에서는 그들을 접대하고 보답으로 선물을 장만하느라 요나라 백성들의 등골이 휠 지경이었다. 심지어 요나라에 간 고려 사신들이 요나라 관리들의 접대가 형편없다면서 그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장면까지 기록되어 있다. 만약 고려가 요나라에 비굴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사정은 송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고려는 송나라에도 조공을 했는데, 고려 사신이 송나라의 수도인 개봉에 가서 황제를 만나면, 그 들이 가져온 조공품보다 황제로부터 10배나 더 많은 양의 선물을 받았 다. 이를 동양사에서는 회사(賜)라고 부르는데, 조공을 받는 나라가 조공을 보낸 나라에 그만큼 더 많이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보통 회사는 조공 물품보다 3배 이상 많은 양을 주었는데, 송나라로서는 고려가 각별히 중요한 나라여서 정성 들여 대접했다. 이렇게 고려 사신이 올 때마다 송나라에서 막대한 선물을 계속 주자 그만큼 송 나라 경제에 부담이 되었고, 송나라의 학자 소동파는 “고려 사신들이 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이 안 되고, 그들을 접대하느라 나라 경제에 부담이 늘어나 송나라 백성들의 고생이 크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송나라 이후에 들어선 명나라와 고려 이후에 들어선 조선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명나라 역시 조선의 조공품이 오면 그보다 더 많은 양의 회사를 주었는데, 한 예로 1404년 조선이 명나라에 말 3천 마리를 조공하자 명나라는 1만5천 필의 비단으로 회사했다. 이렇게 조선에 명나라 비단이 많이 풀리자 조선의 하인이나 노비들도 비단 옷을 입고 다닐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조공을 하면 회사만 얻는 것이 아니었다. 보통 조공 사절단에는 무역 상인들도 끼어들기 마련이다. 이들이 중국에 가면 한반도 의 특산품인 인삼이나 홍삼 등을 중국 상인들과 거래하면서 중국의 비단이나 은 등을 샀고, 이를 조선에 돌아와 팔아 더 많은 차익을 거두었 다. 조공은 일종의 무역이기도 했다. 조공은 중국이 우리나라를 착취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나라가 중국을 상대로 큰 이득을 보는 무역이었다고 봐야 적합하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과 우리나라에 “왜 유럽처럼 해외 식민지를 개척 하러 군대를 보내지 않았느냐? 이는 중국인과 한국인이 유럽인보다 게 으르고 나약하기 때문이다” 라고 비난하는 의견은 현실을 살피지 못한 인종차별적인 편견에 불과하다.
- 우리나라에 밀이나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대략 고려시대, 중국 북송 왕조와의 교류를 통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한반도는 밀을 재배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기후여서,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밀가루의 양은 매우 적었다. 1950년에 벌어진 한국전쟁 무렵, 미국에서 무상으로 밀가루를 대규모로 원조해주기 전까지 한반도에서 밀가루는 거 의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해오는 매우 비싼 식재료였고, 밀가루로 만드 는 음식들 역시 부유한 권세가 아니면 생일이나 잔칫날에 맛볼 수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상에서 즐겨 먹는 수제비도 조선 왕실에서나 먹은 고급 음식이었다.
- 고려 말의 속요 <쌍화점>에 “샹화점에 샹화를 사러 갔다” 라는 말이 언급되는데, 샹화는 만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를 보아 고려 말에 이미 한반도에서 만두가 팔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사서 먹었음을 알 수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밀가루 음식으로 국수가 자주 등장했다. 단, 국수 역시 생일이나 잔칫날 같은 특별한 기념일에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요리였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국수를 만드는 밀가루 대부분이 중국에서 수입한 비싼 재료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조선시대에는 지방관 들에게 대접하는 음식에서 국수를 빼라는 지시가 내려오기도 했다. 국 수를 장만하기 위해 백성들이 너무 고생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중종실록》 1539년 10월 8일)
- 18세기 프랑스에서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이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던 것처럼 19세기 미국에서도 커피는 수많은 이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는 음료였다. 다만 미국에서 커피를 주로 마시는 사람들은 지식인이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이 커피를 즐겨 마셨던 이유는 노동자를 부리는 기업주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커피가 미국에 들어오기 이전까지 노동자들은 점심시간에 맥주나 와인을 식사에 곁들여 마셨다. 이런 술 문화는 미국뿐 아니라 미국의 뿌리인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맥주나 와인은 엄연히 술이기 때문에 아무리 도수가 낮아도 마시면 취하게 마련이다. 점심시간에 맥주와 와인을 마신 노동자들 중 많은 수가 취해 제대로 일하지 못한 탓에 작업 능률이 떨어지는 경우가 잦았다. 그런데 커피가 들어오면서 노동자들은 술에 취하지 않고도 멀쩡한 정신으로 작업할 수 있었고, 덕분에 예전보다 일의 능률이 올라갔다. 기업주 입장에서는 고용한 노동자들이 술보다 커피를 더 마시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미국에 퍼진 금주운동으로 인한 반사이익이었다. 미국은 영국에서 달아난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였고, 그 때문에 다른 유 럽 국가들보다 엄격한 종교적인 금욕주의가 사회에 더 강하게 퍼져 있 었다. 이런 까닭에 미국에서는 일찍부터 술을 마시지 말자는 금주운동 이 일어났는데, 금주운동을 벌이던 단체들은 “술에 찌들어 알코올중독 자가 되느니 차라리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셔라!” 라는 구호를 외치며 커피 마시기를 권유했다. 여담이지만, 미국의 금주운동으로 인해 탄생한 음료수가 코카콜라였다. 미국 남부 도시 애틀랜타의 약사 존 펨버턴이 발명한 코카콜라는 코카나무 열매를 빻은 가루와 코카인을 레드 와인에 때마침 애틀랜타에서 금주운동이 한창 진행됨에 따라 와인을 포함한 모든 술을 팔 수 없도록 법이 만들어졌다. 그러자 존 펨버턴은 고민 끝에 레드 와인을 빼고 대신 탄산수를 넣은 무알코올 탄산음료로 개량해 1886년 5월 출시했다. 비록 알코올은 빠졌으나 마약의 일종인 코카인 이 들어간 코카콜라는 마시면 기분이 좋아졌고,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러다가 20세기 초부터 코카인의 해로움이 알려지면서 코카인이 들어간 음료가 금지되었고, 1903년 코카인이 빠지고 대신 카페인이 들어 간 코카콜라가 나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커피나 코카콜라 모두 카페인이 들어갔다는 점을 감안하면, 두 음료 수 모두 술을 대신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공통된 역할을 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을 바꾼 10대 그들은 무엇이 달랐을까  (0) 2021.01.09
하드코어 히스토리  (0) 2020.12.29
물류는 세계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0) 2020.09.25
음식경제사  (0) 2020.07.22
인간의 흑역사  (0) 2020.06.21
Posted by dalai
,

- 그런데 고대 지중해에 식민지가 건설된 이유는 무엇일까?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막스 베버는 고대 경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사람들이 먼 곳에서 수입된 곡물에 의존했다는 점을 들었는데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 카르타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스와 로마는 곡물이 부족해 다른 지역을 침략했다. 그중에서도 고대 로마는 많은 노예를 부렸는데, 특히 속주의 대농장(라티푼디움)에서 노예의 노동력을 많이 활용했다. 요컨대 지중해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노예 등의 저렴한 노동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노예가 없었다면 그들의 경제는 제대로 기능하 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중해 경제 성장의 큰 한계였다. 또 그리스가 정치적으로 대제국을 형성하지 않고 상인의 상업 네트워크를 이용했던 반면, 카르타고와 로마는 제국을 형성해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로마에게 카르타고는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광대한 영토에서 생산된 물자를 자국 선박으로 수입하는 것이 로마의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 원래 중국은 해상 무역을 중시한 나라였다. 마르코 폴로도 저서 『동방견문록』에서 저장성의 항구 도시인 항저우가 매우 번성했다고 말했다. 항저우는 원래 견직물 생산으로 유명했던 도시지만 원나라 때 상업 도시로 더욱 유명해진 것이다. 무슬림 상인들은 당나라 초기부터 푸젠성의 취안저우에서 무역활동을 했다. 당의 수도인 장안까지 무슬림 상인이 들어와 있었으니, 당의 대표적 항구인 취안저우에 무슬림 상인이 있었던 것은 당 연한 일이다. 취안저우는 원나라 때 남방 해양 무역으로 한층 더 번 성했다. 일반적으로 원나라, 즉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 부에 위치한 육상 제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나라는 해상 무역에도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대략 요약하자면 중국의 해상 무역은 당나라 때부터 왕성해져 송나라 때 크게 발전했다. 상업을 중시한 원나라도 무역을 장려했다. 이런 점에서 원나라 역시 이전 왕조의 연장선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는 해상을 중심으로 한 상업 네트워크를 통해 인도의 면직물이 홍해로, 또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로 보내져서 아프리카의 세네갈과 감비아까지 도달했다. 아마도 이 면직물은 도중에 카이로, 누비아(이집트 남부와 수단에 위치한 지역), 아비시니아(현 에티오피아)의 상품 집산지를 경유한 다음 사하라 사막을 종단하는 대상에 합류해 육상으로 운송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원나라 때 인도와 중국 사이의 해상 무역이 매우 활발했 고 해상, 육상을 망라한 네트워크가 아프리카까지 뻗어나갔다. 그리고 그 중심에 무슬림 상인이 있었다. 게다가 다른 곳에서 온 상인들도 동시에 활약하고 있었다.
- 조공 무역은 당나라 때 시작되었다. 중국 주변 나라들은 금, 은, 노예, 축산 원료를 중국에 보냈고 중국은 도자기, 견직물, 철기, 동기, 칠기, 서적 등을 하사했다. 이후 송나라 때에는 조공 무역 대신 민간 무역이 발달하기도 했다. 요, 금, 원나라에서도 민간 무역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명의 초대 황제 홍무제(재위 1368~1398년)는 대외적으로 해금 정책을 채택해 해외 무역을 중단시키고 대형선 건조를 금지했다. 3대 영락제 때 해외 무역을 다시 활발하게 전개하는가 싶더니 앞에서 말했다시피 영락제 사후 다시 해금 정책이 실시되었다. 한편 조공 무역은 계속되었다. 청나라 때도 이런 추세가 이어졌지만 스페인과도 활발히 교류하는 등 조공 무역의 비중은 명나라만큼 크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생사, 도자기, 차 등을 수출했고 스페인에서는 은을 수출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1757년부터는 광저우에서만 외국 무역을 할 수 있게되었다.
- 이탈리아와 그 주변국들은 정말로 선진적이었을까? 이탈리아에서 세계 최초로 은행업이 발달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 다. 1406년 제노바에 창설된 산조르조 은행이 세계 최초의 은행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은행에서는 환전과 대출, 투자 기능이 크게 발달했을 뿐 오늘날 은행의 금융 중개 기능(개인에게서 받은 돈을 기업에 빌려주는 기능)은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 이 기능은 19세기가 되 어서야 유럽에서 발달했다. 18세기에 들어서 영국에서도 비슷한 시스템이 등장했다. 중앙은행인 잉글랜드 은행이 국채를 발행하고 의회가 그 변제를 보증하는, 소위 '펀딩 시스템'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이탈리아에서는 그런 시스템을 구축할 수 없었다. 또 이탈리아는 다른 지역에 앞서서 해상 보험업을 도입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보험에 반드시 필요한 확률론이 도입되지 않았으므로 발전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떤 사고가 어느 정도의 비율로 일어날지 모른다면 진짜 보험업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은 보험을 들었을 때 생길 수 있는 현실적인 위험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원래 중세의 회사란 일정한 목적을 위해 조직되었다가 사업이 종 료되면 해산하는 조직이었다. 그러므로 확률론이 당시 이탈리아에 존재했다 해도, 보험회사의 사업이 영속할 것을 전제했다면 매우 유 효했겠지만 영속화를 전제하지 않은 사업에는 그다지 쓸모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탈리아에서 발달했던 보험업은 그 상태 그대로는 결코 근대적인 보험업이 될 수 없었다. 이탈리아 경제가 몰락한지 상당히 오래된 19세기에야 드디어 확률론을 이용할 만한 수학적 지식이 보험업계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이탈리아의 은행업, 보험업에는 결정적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중근세 이탈리아의 경제 시스템은 근대적 시스템으로 발전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이탈리아에는 생태적 한계가 있었다. 조선업 때문에 삼림을 개간한 것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지중해 연안에서는 한 번 벌채한 삼림이 두 번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그 결과 조선업과 해운업이 쇠퇴해 북유럽 같은 대규모 상선단을 보유할 수 없게 되었다. 16세기 내내 이탈리아에서는 대규모 벌채가 이어졌다. 그래서 베네치아는 목재뿐만 아니라 선체까지 외국에서 구입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완 성된 배를 외국에서 구입하는 것을 정부가 법률로 금했지만 결국은 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목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에너지 공급에 있어서의 한계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영국은 북해 연안의 덴마크(노르웨이), 독일, 네덜란드에 석탄을 수출했다. 영국이 북해 경제권의 에너지 공급원으로 기능한 것이다. 또 삼림 자원이 풍부한 발트해 지방에서도 대량의 목탄이 생산되었다. 반면 삼림 자원이 고갈된 지중해 경제권에서는 목탄을 조달하기가 어려웠다. 이탈리아는 지금도 석탄을 전혀 생산하지 못한다. 이탈리아의 경제 성장은 천연 자원의 고갈이라는 점에서 큰 한계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지중해에서는 오랫동안 노예가 노를 젓는 갤리선을 활용했다. 노잡이로는 죄수나 포로, 노예, 간혹 자유민까지도 동원 되었다. 지중해의 상인이 이처럼 노동 집약적인 선박을 활용한 것은 그들이 향신료 같은 고가의 상품을 거래했고 임금수준이 낮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해운업은 기본적으로 값싼 노동력으로 유지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탈리아의 번영은 저렴한 노동력이 사라지면 끝날 운명에 처해 있었다.
- 인도양과 동남아시아에는 다양한 종파의 상인 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세력이 가장 강했던 집단이 무슬림상인이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상인, 네덜란드 상인, 영국 상인이 차례차례 세력을 키우면서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물류가 유럽 상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17세기에는 네덜란드인이 동남아시아산 향신료를, 18세기에는 영국인이 인도산 면을 운송하게 되었다. 인도와 중국의 차도 유럽 선박으로 운송되었다. 동남아시아 내 무역에서도 유럽 선박의 비중이 높아졌다. 아시아의 물류 시스템이 완전히 유럽인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럽인과 아시아인이 서로 적대한 끝에 유럽인이 이겼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가 아니었다. 유럽은 대항해 시대를 경험했으므로 아시아보다 항해 기술이 뛰어났을 것이다. 아시아인은 희망봉을 돌아 유럽까지 항해한 적이 없었지만 유럽인은 나침반을 써서 원거리를 항해했다. 게다가 중국이 해금 정책을 취함으로써 경쟁 상대를 없앤 것도 중국의 항해 기술 발전을 늦추는 데 한몫했다. 어쨌든 유럽이 우월한 군사 기술로 전쟁에 이겨 물류 시스템을 변혁한 것이 아니었다. 국가 권력과 관계없는 상인들 스스로가 물류 시스템을 변혁한 것이다.
- 네덜란드에 이어 세계사상 두 번째로 패권 국가가 된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세계에 팍스 브리태니카 (직역하면 영국의 평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실제로 이 말은 영국이 가져온 평화가 아니라 영국이 빅토리아 여왕 시대(재위 1837~1901년)에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가진 대제국이 된 것을 뜻할 때가 많다. 이때 영국은 [지도 13]에서처럼 대단히 광대한 식민지를 확보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이 상징적 인 말이야말로 팍스 브리태니카의 실상을 드러낸다. 영국은 세계 최대의 함대를 갖추어 팍스 브리태니카를 유지했다. 이 함대는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세계 평화는 군사력으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영국의 세력 범위 안에는 영국의 식민지 및 자치령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식민지가 아니면서 경제적으로 거의 식민지가 된 곳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대표가 중국과 라틴아메리카(중남미)였다. 그들은 영국의 정치적 지배를 받는 식민지, 즉 '공식 제국이 아니라 식민지가 아니면서도 실질적으로 영국의 지배를 받아들였다는 의미에서 '비공식 제국으로 불린다. 다른 서양 제국들도 영국만큼은 아니지만 식민지를 많이 건설했다. 거기에는 일본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비공식 제국은 영국에게만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영국이 세계 물류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팍스 브리태니카 시대에 영국은 전 세계에 함대뿐만 아니라 상선 단을 파견해 영국 '제국을 유지했다. 영국은 분명 세계 최대의 해군 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제국을 군사적으 로 유지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였다. 그러나 영국 제국이 군사력으로 만 유지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세계화가 진행된 19세기에 영국이 세 계 최대의 상선단으로 전 세계의 물품을 운송했다는 사실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영국이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산업혁명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영국의 경제력이 강해진 것은 세계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영국의 증기선이 많은 상품과 사람을 운송하게 된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영국의 증기선이 없었다면 세계경제는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 영국은 자국의 선박을 이용함으로써 외국인, 그중에서도 네덜란드인에게 지불하는 운송료를 줄여 국제 수지를 크게 개선했다. 다시말해 근세의 잉글랜드, 더 넓게 보아 영국은 보호 무역이 아닌 '보호 해운업 정책을 쓴 것이다. 영국이 이 정책을 채택한 것은 타국과의 물류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20세기 초에는 톤수로 환산했을 때 영국 선박이 세계 선박의 약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영국 선박들이 전 세계의 상품을 운반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이 한창이던 18세기 말에 영국이 네덜란드를 제치고 유럽 최대의 해운 국가로 발돋움했다고 한다. 요컨대 제국주의 시대였던 19세기에 영국이 세계의 상품을 운송하는 국가, 즉 세계 물류를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다는 뜻이다.
- 프로토 공업화 이론의 핵심은 '인구 증가다. 앞서 말했다시피 근세 유럽에서는 인구 증가로 말미암은 식량 부족 사태가 발생하고 있었 다. 그러나 농촌이 농업 지대와 공업 지대로 나뉨으로써 농업 생산 성이 높아져 식량 부족이 해결된다는 멘델스의 주장과는 달리, 발 트해 지방에서 수입된 곡물 덕분에 식량 부족이 해소되었다. 이것이 멘델스의 오류였다. 그렇다면 유럽의 아마, 마, 리넨의 생산량이 늘 어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항해 시대가 시작된 16세기 초 서유럽 국가들은 아마도 가까 운 지역에서 해운 자재를 조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먼 곳까지 가기 위해선 턱없이 부족했으므로 발트해 지방의 해운 자재를 점점 더 많이 수입하게 되었다. 따라서 발트해 지역의 무역 흑자는 곧 서유럽 측의 적자로 이어졌다. 폴란드도 곡물을 수출함으로써 무역 흑자를 냈고 발트해 연안의 다른 지역들도 해운 자재를 수출해 무역흑자를 냈다. 이렇게 발트해 연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가처분 소득이 늘어났다. 앞서 말했다시피 프로토 공업화의 주 생산품은 아마, 마, 리넨 등 이었다. 이것들은 선박의 로프나 돛 등에 쓰이는 해운 자재였으며, 그중 리넨은 노예가 입는 옷에도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프로토 공업화와 유럽의 대외 진출이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럽의 농촌이 공업 지대와 농업 지대로 나뉜 것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사실 그 공업 지대란 유럽의 대외 진출에 필요한 해운 자재를 공급하는 지역이었다고 봐야 한다. 독일의 역사학자 클라우스 웨버에 따르면, 현재의 폴란드와 체코에 해당하는 슐레지엔에서 생산된 섬유 제품인 리넨은 주로 의류의 재료로 쓰였다. 그것은 프랑스와 포르투갈을 거쳐 서아프리카로 갔고, 아프리카 노예들의 옷이 되었다. 인도산 면직물은 내구성이 떨어 졌던 반면 리넨은 착용감은 비록 좋지 않았지만 내구성이 뛰어났다. 그래서 노예가 리넨 옷을 입게 된 것이다. 노예들은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뒤에야 리넨이 아닌 면 옷을 입기 시작했다. 발트해 지방의 아마, 마, 리넨이 없었다면 서유럽은 대항해 시대를 열 수도 없었고 18세기에 대서양 무역을 확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 프로토 공업화가 공업화의 첫 번째 국면이고 영국의 산업혁명이 두번째 국면이라는 멘델스의 견해는 이미 오류로 판명되었다고 앞서 말했다. 즉 프로토 공업화는 영국의 산업혁명(공업화)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했다시피 프로토 공업화와 이후의 공업화(산업혁명) 사이에 직접적 연관성은 없지만 간접적 연관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즉 프로토 공업화가 없었다면 대서양 경제가 형성되 지 않았을 것이고 대서양 경제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영국의 산업혁 명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면직물 공업이 발달한 덕분에 일어났다. 신세계 식민지에서 재배된 면화를 이용할 수 있었으므로, 다시 말해 대 서양 경제가 형성되었으므로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대서양 경제의 형성에는 발트해 지방에서 생산된 해운 자재가 반드시 필요했다. 반대로 영양이 부족하기 쉬운 발트해 지방 사람들에게는 신세계에서 생산된 설탕이 중요한 열량 공급원이 되어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토 공업화가 공업화의 첫 국면을 형성한 것은 사실이 다. 이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실제로 영국이 대량의 해운 자재를 발트해 지방에서 수입함으로써 그 지방을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멘델스 이후 진 행된 연구에서는 프로토 공업화로 분류할 수 있는 경제 현상이 세 계 이곳저곳에서 발생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러다 보니 왜 하필 유럽에서, 그중에서도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공업화(산업혁명)가 일어 났느냐 하는 의문에 대답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듯하다. n그러나 만약 내가 제시한 학설이 타당하다면 그 의문에 충분히 대답할 수 있다.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공업화가 일어난 것은 당시 영국이 발트해 지방에서 아마, 마, 리넨 등 해운 자재를 수입해 대서양 무역에 힘쓰는 동시에 미국에서 재배한 면화를 본국으로 가져와 면직물로 가공하는 시스템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 독립하자마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전쟁(1789~1815년)이 발발한 것 역시 미국에게는 행운이었다. 미 대륙에 해운 자재가 풍부했으므로 미국은 조선업을 발전시키기 쉬웠다. 유럽 국가들이 발트해 쪽에서 해운 자재를 수입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 미국은 외국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립을 유지함으로써 해운업을 크게 성장시켰다. 당 시 미국의 주요 항구는 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턴, 볼티모어였다. 또 미국은 프랑스의 도시 보르도와의 해상 무역에 힘썼다. 그 노력의 진가는 1793년에 발발한 프랑스 혁명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 지중해에는 영사관을 설치해 스웨덴, 덴마크와 함께 중립 정책을 펼치며 무역업에 힘썼다. 이 지도에 등 장한 지중해의 항구들은 서로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었으므로 한 항구가 폐쇄되더라도 문제가 없었다. 덕분에 유럽은 전쟁 중에도 상 업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미국은 그런 점을 영리하게 활용해 해운업을 발전시켰다. 미국의 선주들은 중립 정책을 최대한 활용해 선박을 계속 늘렸 다. 그들은 태평양을 횡단해 남미 대륙 남단의 혼 곳을 지난 뒤 아프리카 남부의 희망봉을 돌아 지중해와 발트해까지 가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유럽은 미국의 중립 선박이 없었다면 필요한 물자와 자재를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대서양과 유럽의 결합에 미국 선박이 크게 기여한 셈이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드코어 히스토리  (0) 2020.12.29
세계역사와 지도를 바꾼 가루전쟁  (0) 2020.11.30
음식경제사  (0) 2020.07.22
인간의 흑역사  (0) 2020.06.21
신친일파 반일종족주의의 거짓을 파헤친다  (0) 2020.06.11
Posted by dalai
,

음식경제사

역사 2020. 7. 22. 08:18

- "식물은 흙과 물과 돌과 바람과 빛으로 스스로를 만들고, 나아가 흙을 모든 동물이 생명을 의존하는 음식으로 변형시킨다. 식물은 이후 자신을 보호하고 친구를 피기 위해서 색깔과 맛과 향을 가졌다. 우리가 채소와 과일과 곡식과 향신료를 먹는 것은 바로 우리 존재를 가능케 만든 음식, 우리 인생 앞 에 감각과 쾌락의 만화경 세상을 열어젖힌 그 음식 들을 먹는 것이다.” (해럴드 맥기 Harold McGee)
- 애덤 스미스는 중국을 한심하게 보았다. “중국은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던 것 같다. 그들이 법률과 제도적 본질에 어울리는 부를 갖춘 것은 아마 오래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법률과 제도 때문에 이러한 부는 가능한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반면 유럽은 지중해를 끼고 있어서 해운으로 국가 간 교류를 해 왔다. 기후와 토양을 가리는 밀의 속성 때문에 유럽의 먹거리는 동양처럼 풍족하지 않았다. 특히 단단한 밀의 씨앗을 고운 가루로 만들기까지는 상당한 기술 발전이 필요했다. 완벽한 제 분은 시계 공업이 발달한 스위스인이 증기기관을 이용하기 시작한 1800년대에나 가능했다.
- 동양의 곡창지대에 견주어 한참 북쪽에 있는 유럽은 편서풍 의 영향으로 연중 비가 내리는 서안해양성기후를 보인다. 이런 기후에서는 풀이 잘 자라므로 유럽은 목축으로 곡식 부족을 충 당했다. 그러나 밀은 단위면적당 생산력이 쌀에 견주어 낮기 에 강력한 왕권 국가를 설립하기 어려웠으며 백성들의 국가 개 념도 약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백년전쟁은 프랑스에 있는 영국 귀족의 땅 때문에 시작된 것인데, 프랑스 백성은 누가 자 기가 사는 땅을 다스리는지에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 농노였기 때문이다.
- 수천 년 동안 동양의 국가들은 너무 중앙집권적이고 강력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역사의 흐름이 멈추어 버렸다. (마르크스)
- 비가 내리지 않아도 잘 자라는 밀과 보리가 주식인 유럽과 중동에 견주어 동양은 우기와 장마 때 내리는 비로 한 해 농사가 좌우된다. 동양과 서양이 신 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뭇 달랐다. 동양의 지배층은 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자신에게 투사되도록 많은 장치를 고안했다. 계급이 처음 등장한 청동기시대에 통치자와 제사장이 일치한 것도 이런 이유다. 왕은 청동검과 청동거울, 황금 장신구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피지배 층을 세뇌했다. 이들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농사에는 물이 필요하므로 모든 문명은 강 주변에서 시작되었다. 관개는 지금도 많은 예산이 들어가는 대규모 사업이다. 인간의 노동에 의존하던 때 관개 사업은 강력한 왕권에서 비롯되었다. 곡식농사는 채집이나 수렵과 달리 강제 혹은 착취가 동원되었다. 사유재산과 노예제도도 여기서 나온다. 고대의 왕은 여러 씨족공동체를 무력으로 통합한 뒤 이들을 노예로 부려, 원가가 거의 들지 않는 많은 양의 곡식을 생산했다. 이렇게 축적한 자본은 피라미드 건설 같은 일에 퍼부어졌다. 황허강과 양쯔강 사이에 있는 중국은 놀라운 자본축적에 성 공했다. 황허강 위로는 밀을, 아래에서는 쌀을 재배했으며, 쟁기 · 시비법 · 이앙법 등 첨단 기술을 재빠르게 도입했다. 7세기 초반 건설한 중국의 대운하는 유럽보다 무려 1,0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진시황 이후 중국 황제들이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 로, 그리고 자신을 '왕 중의 왕'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벼농사의 높은 생산력 덕분이었다.
- 20세기 이전까지 질소를 농작물에 공급하는 방법은 뿌리혹박테리아로 질소를 공급받는 콩과 식물을 길러서 썩혀 퇴비로 주는 것과 번개가 치는 것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번개는 삼중결합으로 단단히 밀착되어 있는 공기 중의 질소 분자를 질소원자로 분리해 질소화합물을 생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질소비료가 나오기 전부터 질소를 공급받을 수 있었던 쌀은 천혜의 작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동양의 농부는 씨앗을 파종해 묘판에서 모를 키우는 이앙법을 도입했다. 이앙법은 풀을 뽑는 데 들어가는 노동력의 80퍼센트를 절감해 수확을 2배로 늘려주는 혁신적인 기술이었 다. 이앙법은 당나라 때 고안되어 송나라 때 정착되었다. 게다. 가 중국 남부의 아열대몬순기후에서는 1년에 2번 벼를 재배할 수 있다. 1,000년 전 중국에서는 이런 농업혁명이 차근차근 진 행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서양은 1200년경 시비법이 개발되기 전까지 휴경 지로 지력을 살리는 방법이 고작이었다. 쌀의 우월한 생산력 때문에 동양 국가들은 안정적인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로마가 지주들의 토지 독점과 토지 황폐화 때 문에 멸망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쌀은 밀이나 보리에 견주어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다. 쌀은 1헥타르당 생산량이 밀(820킬로그램)에 견주어 1.7배나 많 은 1,440킬로그램이다. 옥수수의 생산량인 860킬로그램보다 도 많다. 인류가 보리와 함께 가장 먼저 재배한 것으로 알려진 수수의 생산량(1헥타르당 400킬로그램)에 견주면 무려 3.6배나 차이가 난다. 쌀을 키우는 민족은 빠르게 고대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 한반도의 쌀 생산력은 아열대몬순기후부터 냉대기후대에 퍼져 있는 중국과 비교하면 정말 작은 규모다. 통계청 국제통계연감 2017년 자료를 보면, 중국의 쌀 생산량은 전 세계 쌀 생산량의 28.5퍼센트를 차지했다. 우리나라의 생산량은 0.8퍼센트로, 무려 35.6배 차이가 난다. 이런 낮은 생산량 때문에 우리 조상은 쌀 가운데 찰기가 있는 단립형 자포니카japonica를 먹은 것으로 보인다. 쌀의 전분은 퍼석한 느낌을 주는 아밀로스amylose와 찰기가 많은 아밀로펙틴 amylopectin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밀로스가 많은 쌀이 장립형 인디카(일명 안남미)다. 떡을 만드는 찹쌀은 아밀로스가 아예 없다. 아밀로스를 만드는 유전자가 우성이다. 3대 1로 인디카 쌀이 많다는 뜻이다. 우리 조상은 아밀로스가 없는 열성유 전자 쌀을 고른 것이다. 우리 조상이 찰기 있는 쌀을 선택한 이유는 밥이 주는 포만감 때문이다. 자포니카와 인디카 2가지 쌀을 모두 재배해온 중국인들이 이름도 알기 힘든 수많은 요리와 함께 인디카 쌀을 먹는 것은 그만큼 먹을 것이 풍족하다는 뜻이다. 향신료로 만드는 인도의 카레나 볶음 요리가 많은 동남아시아 요리에는 인디카 쌀이 잘 어울린다. 반면 우리나라와 일본의 식단이 유독 밥 중심인 것은 낮은 쌀 생산량을 고려한 조상의 선택으로 보아야 한다.
- 역사는 우리가 죽음을 맞는 전쟁터는 기념하면서, 번영의 터전인 밀밭은 비웃는다. 역사는 왕의 서자 이름은 줄줄이 꿰고 있지만 밀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못한다. 인간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이다. (장 앙리 파브르)
- 역사를 움직이는 결정적인 열쇠는 신이나 '보이지 않는 손'같은 형이상학적 힘, 위대한 지도자의 영도력이 아니라 개인의 사유재산에 대한 욕망이었고 사회 시스템이 이런 욕망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였다. 서양은 동양보다 훨씬 빠른 중세 때 이미 이런 욕망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반면 동양의 지배층은 이 욕망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일부 이슬람 세력과 북한 등은 지금도 이를 인정하길 꺼리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신념이나 영도력은 초기 확산 속도는 빠르지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지속력이 떨어진다. 진秦나라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뒤 불과 15년 만 에 망했다. 스페인의 선교사들은 모든 인간을 하느님이 창조했 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잊고 노예무역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반면 자기 땅에 대한 농민의 집착과 경제활동에 대한 상공인의 자유의지는 꾸준한 방향성으로 역사를 움직였다. 농민들은 늘 배가 고팠던 까닭이다. 개인의 생각을 만드는 기초는 먹거리다. 우리가 황혼 녘 밥짓는 냄새를 맡으면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하고 뭉클한 기운을 느끼는 것은 우리 민족이 1만 년 가까이 한반도에서 쌀을 먹으면서 삶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곡식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한다. 밀도 마찬가지다. 호메로스Homeros는 『오디세이아Odysseia』 에서 밀과 보리를 '인간의 골수'에 비유하기도 했다.
- 배고픈 유럽인의 살길은 땅을 떠나 바다로 나가는 것이었 다. 물고기를 잡거나 무역을 해야 했다. 이렇게 살길을 찾은 대표적인 나라가 고대 그리스다. 그리스는 빙하가 깎아놓은 노르웨이와 마찬가지로 바위가 많다. 게다가 석회암이 많아서 흙이 기름지지 않다. 그리스인의 주식은 보리였다. 보리에는 탄성을 만드는 단백질인 글루텐이 없어 빵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죽 으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인에게는 바다밖에 없었다. 뱃사람은 농사짓는 사람 에 견주어 거칠 수밖에 없다. 땅의 가혹함은 굶주림이지만 바 다의 가혹함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들은 살기 위해 거칠었고 모든 것에 회의적이었으며 셈에 밝았다. 보리죽을 먹던 그리스 인에게 새의 얼굴을 한 이집트의 신과 종교는 우스꽝스러웠겠지만, 그들이 만드는 기기묘묘한 모양의 빵은 기적처럼 보였을 것임.
- 기원전 6세기 솔론Solon의 개혁으로 평 민의 참정권이 보장되었으며, 이후 모든 시민이 참석하는 직접 민주주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시민들이 재판에 참석하는 배심원 제도도 이때 도입되었다. 하지만 로마는 여기서 더 나아갔다. 농사꾼들로 이루어진 평민회의 대표에게 최고 권력 자리인 호민관을 내주었다. 로마 가 이 같은 혁신을 채택한 것은 귀족과 평민의 화합으로 번영 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로마가 번영하려면 빵이 필요했고 이 빵은 이탈리아의 밀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들은 지중해 무역을 로마보다 앞서 개척한 이웃 나라 그리스와 북아프리카 페니키아와 맞서야 했다.
- 밀 외에 보리와 귀리도 있지만 이미 빵 맛을 알게 된 로마인은 보리를 가축이나 노예가 먹는 음식쯤으로 여겼다. 검투사를 로마에서는 호르데아리 hordearii라고 불렀는데 이는 ‘보리를 먹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기록에 따르면 검투사는 보리죽에 고수를 띄워서 먹었다. 로마에서는 문제가 있는 군인과 관리에게는 밀 대신 보리를 급여로 지급하기도 했다. 이런 전통은 근대까지 유럽에 남아 있었다. 로마는 지중해의 밀 생산 지대를 차지해야 했고 그러려면 다른 나라와 경쟁이 불가피했다. 살아남으려고 로마식 정치 혁신을 선택한 것이다. 로마의 선택은 옳았다. 로마는 주변 나라를 차례차례 격파하고 100여 년이 넘는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에 승리를 거두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다. 로마가 얼마나 카르타고에 이를 갈았는지는 카르타고를 정복 이후 한 짓을 보면 알 수 있다. 로마는 카르타고 남자를 모두 학살하고 카르타고의 곡창지대에 소금을 뿌려 영원히 밀을 키우지 못하도록 했다. 그만큼 밀은 로마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이제 북아프리카와 이스파니아의 곡창지대도 로마의 것이었다. 로마는 로마 시민을 먹여 살릴 빵 창고인 이집트마저 정복했다. 그러고는 이집트의 화학책을 모두 불살랐다. 로마인이 보기에는 마법 같던 이집트 빵 기술을 독점하려는 생각이었다. 로마는 드디어 서양 세계의 빵을 독점했다.
- 유럽에서 경쟁의 주체는 귀족이나 왕족처럼 권력과 토지를 독점한 자가 아니라 상인과 장인이었다. 12세기 유럽은 낮은 농업생산력을 무역과 기술 혁신으로 메워나가고 있었다. 유럽의 상인과 장인은 동업조합인 길드를 만들어 지배 세력에 맞서 자치권을 확보했다. 이들은 영주가 갖고 있던 경제행위에 대한 통제권은 물론이고 사법권 행사와 행정관리 선출에도 직접 개 입했다. 길드를 중심으로 한 상공업과 무역의 발달로 유럽의 작은 도시들에는 활력이 생겨났고, 농노들은 종교 공동체인 장 원을 빠져나와 도시에서 자유인으로 살기 시작했다. 영주와 종교인도 일부 권리를 상공인에게 넘기면 훨씬 사치스럽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13세기에는 석탄을 이용한 증기기관 같은 대대적인 혁명은 아니었지만, '연성 원시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에너지 혁명의 전조가 감지되었다. 1185년 영국 요크셔 지방에서 발명된 풍 차는 영주와 교회의 소유이던 수력 장치와 경쟁하는 평민의 에너지'였다. 풍차 설비 1대는 20명의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었다. 방아의 가장 중요한 기술적 진전은 회전운동을 왕복운동으 로 바꾸어주는 캠cam이었다. 방아 덕분에 양모를 천으로 바꾸는 가공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유럽 번영의 기초가 되었다. 이를 간파한 상공인들은 풍차와 수력 장치를 소유했고 어느덧 평민의 에너지 총량은 기득권층의 에너지 총량을 넘어섰다. 중세 기사도를 숭배한 라만차의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른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중세의 풍차와 수차에 대해 연구한 역사학자 린 화이트 Lynn White는 중세에 이미 산업혁명이 준비되었다고 진단했다. “15세기 후반 유럽은 그 이전의 어떤 문화권보다 훨씬 다양한 동력원 뿐만 아니라 그 에너지를 포착하고 전달하고 이용하는 데 필요 한 일단의 기술 수단까지 갖추었다. 1492년(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전개된 유럽의 확장은 상당 부분 에너지 소비의 증가와 그에 따른 생산성 향상, 경제력 · 군사력 증강에 기초한다.” 에너지와 기술 수단뿐 아니라 사회 시스템 역시 혁신적으로 진화 중이었다. 이는 중세 도시가 서로를 의식하며 치열하게 경쟁했던 탓인데 그리스와 로마, 카르타고가 지중해의 밀을 비롯한 무역권을 놓고 경쟁하던 것과 비슷하다. 13세기 이탈리 아의 피렌체 · 피사 · 베네치아 · 제노바는 부와 권력을 키우려고 이웃 도시와 전혀 다른 정책을 채택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인간이 고안해낼 수 있는 각종 창의적인 정책의 풀pool이 형성 되었다. 이탈리아인들이 실험 끝에 내린 결론은 제조업과 무역 이 번영의 핵심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다. 1112년 세워진 피렌체공화국은 은행업과 양모업 등 21개 길드의 대표 자가 운영하는 시뇨리아signoria를 통해 다스려졌다. 1532년 메 디치가가 세습군주제로 피렌체를 다스리기 전까지 이 대의 기구는 계속 운영되었다.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화정을 만든 점은 로마와 닮았 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피렌체는 로마와 달랐다. 피렌체는 귀족을 혁신의 걸림돌로 보고 대주주와 귀족이 정치 세력이 되지 못하도록 철저히 견제했다. 심지어 피렌체는 지주를 영구적인 위협 세력 혹은 적과 내통할 수 있는 세력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지주를 견제하는 대신 비봉건 사회의 특징인 예술인을 우 대해 예술의 번영을 일구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의 많은 거장이 피렌체에서 활동했다.
- 밀은 유럽인을 배고프게 만든 대신 그들에게 분석력이라는 눈을 선사했다. 서양인은 작은 개체를 낱낱이 파헤친 뒤 원칙을 세워 나머지를 묶어내는 분석 능력이 동양인보다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관찰과 경험을 중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야말로 진정한 실체다”라고 말했다. 서양인에게 집단은 개체가 모인 것인 반면 동양은 개체보다 관계와 전체를 중요시했다. 서양의 면도날 같은 분석 전통은 학문뿐 아니라 사회 발전에도 밑거름이 되었다. 정치가는 사회를 이루는 주체들을 각각의 변수로 놓고 이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제도와 법규 같은 시스템을 조율했다. 동양의 세계관이 부모와 왕과 국가(혹은 신)의 관계를 강조해 선과 도형으로 이루어진 평면적인 것이었다면 서양의 세계관은 입체적이고 역동적이었다는 분석을 하는 이유다. 어쩌면 이런 차이는 쌀보다 훨씬 제분이 어려운 밀의 속성에서 온 것인지 모른다. 밀은 쌀에 견주어 껍질은 단단하지만 속살(배젖)은 부드럽다. 껍질을 까면 밀은 쉽게 깨져버린다. 따라서 밀은 쌀과 보리와 달리 도정精 대신 분쇄를 해야 했다. 속도 차를 이용해 고운 가루를 내는 3중 분쇄 기술은 1800년에나 개발되었을 정도로 밀의 분쇄는 까다로운 일이었다. 서양인이 생산력의 열악함을 뛰어넘어 자본주의와 함께 그 대안인 사회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저력은 작지만 쉽게 제 몸을 내어 주지 않는 밀알을 좀더 치밀하게 깨려는 그들의 오랜 식습관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 유라시아인들이 식칼을 만들어 서로의 땅을 빼앗으려고 혈 안일 때 농업생산력이 높은 아즈텍인과 잉카인은 인신 공양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왜 이들은 인신 공양에 빠져 있었을까? 학자들은 옥수수의 기적적인 생산 조건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옥수수는 밀이나 쌀처럼 노동 집약적 곡식이 아니다. 심지 어 쟁기질도 타작도 도정도 필요 없다. 심는 법도 단순하기 그 지없다. 남자 농민이 큰 막대기로 땅에 구멍을 뚫으면 그 구멍에 부인이 씨앗을 심는다. 1년에 2번 씨앗을 심으면 50일 안에 열매가 열린다. 옥수수는 빨리 익을 뿐 아니라 익기 전에도 낱알을 먹을 수 있다. 1알을 심으면 보통 150알 이상을 거둘 수 있으며 심지어 800알을 얻기도 한다. 이것은 계절에 따라 7~8일 정도만 일하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약적 노동의 자유로움이 결국 지나치게 전제적인 신정국가에 이르게 한 것이다.
- 아메리카의 옥수수는 유럽으로 건너가서는 전혀 다른 역사를 일구었다. 호기심 많은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으로 건너간 옥 수수는 감자와 함께 근대적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두 식물의 가장 큰 공은 빠른 식량화를 통한 인구 팽창이었다. 페스트 확산으로 급감했던 유럽 인구는 17세기부터 급증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이후 2억 명가량이던 인구는 1650년 약 5억 명으로 2배가량 늘었고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해 1850년 에는 10억 명을 기록했다. 중국의 인구 증가도 옥수수가 전파 되었던 17세기 청나라 때부터였다. 유럽에서 최초로 옥수수에 주목한 나라는 전쟁광 스페인이 아니라 전통의 부호 이탈리아였다. 중남미의 인신 공양 행위를 유럽 최초로 지켜보고 기록했던 스페인 사람들은 남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옥수수를 불길한 음식으로 취급해 아예 먹지 않으 려 했다. 그러나 무역으로 부를 일군 도시국가 베네치아는 달랐다. 베네치아를 비롯해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노동력 대비 높은 옥수수의 생산성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시칠리아에 옥수수를 키워 식량으로 삼고 대신 옥수수에 견주어 2배 이상 비싼 밀을 시장에 팔았다. 17세기 베네치아는 생산된 곡물의 15~20퍼센트를 수출한 반면 프랑스는 2퍼센트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곡물을 소비했다.
- 아즈텍제국 멸망 후 멕시코로 건너온 스페인 사람들은 현지에서 앓던 설사와 고열 등의 병을 목테수마의 복수'라고 불렀다. 목테수마는 아즈텍제국의 마지막 왕이었다. 아직 GM 농산 물의 폐해가 구체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세계보건기구 WHO가 2015년 10월 가공육을 석면과 같은 1급 발암물질로, 붉 은 살코기를 2급 발암물질로 규정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판 목테수마의 복수는 옥수수를 통해 더 근본적이고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 그리스인은 기원전 8세기부터 페니키아인에게 배운 대로 식 민지의 광산을 개발해 화폐를 만들었고 곡물을 비롯해 특산품 을 본국으로 나르거나 다른 나라에 파는 삼각무역에 눈을 떴다. 따지기 좋아하고 매사 삐딱한 그리스인은 적성에 꼭 맞는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들은 보리로 된 빵 마자maza가 아니라 밀로 된 빵 아르토스artos를 먹을 수 있었 다. 기원전 6세기 전까지만 해도 아르토스는 평소에는 맛보기 힘든 음식이었다. 우리나라 서민들이 평소 보리밥을 먹다가 명 절 때 소고기 국에 쌀밥을 먹던 것과 비슷했다. 폴리스 가운데 아테네는 상업 활동이 가장 활발한 도시였다. 특히 아테네는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실시하던 폴리스였다. 인류 최초로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은 당시에는 특이하게도 사유재산을 인정한 덕분이었다. 2,000여 년 뒤 로크가 비로소 정리하고 옹호한 사유재산의 개념을 아테네가 이렇게 빨리 도입했던 것은 게오르고스georgo' 로 불리던 소농들 덕분이다. 소농들은 땅 부자인 귀족이 별 관심을 두지 않던 아테네 외곽 아티카 언덕의 척박한 땅을 개간하고 거기에 보리를 키워 가족을 부양했다. 그들은 종교의 자유와 땅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프로테스탄트처럼 끊임없이 참정권과 재산권을 요구했다. 미국이 1776년 독립전쟁으로 세계 최초로 귀족을 배제하고 사유재산을 인정한 헌법을 만들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테네의 소농은 진정한 혁신가였다. 그리스 공동체들은 기원전 7세기 무렵 중동의 패권 국가 아시리아에서 건너온 것으로 보이는 중장 보병 밀집 전술을 도입해 발전시켰다. 투구와 갑옷으로 중무장한 보병이 어깨를 맞댈정도로 밀집한 뒤 원형 방패로 몸을 최대한 가리고 3미터에 이르는 긴 창과 긴 칼을 들고 전진하는 방식이다. 팔랑크스phalanx 로 불린 전투 대형은 등껍질이 단단한 거북이가 긴 창을 꽂고 전진하는 모양새다. 팔랑크스는 전진 속도가 느렸지만 앞에 있는 것은 모조리 부수고 지나갔다. 그게 적이건 귀족이건 말이다. 팔랑크스는 『일리아스(lias』에 묘사되었던, 귀족이 주도하고 평민은 시종으로 따라나서던 전쟁을 평민 주도의 전쟁으로 바꾼 분수령이 되었다. 그리스 폴리스들은 이 전술을 앞다투어 도입했다. 그만큼 죽거나 다치는 병사도 많았다. 전쟁에 참여했던 시민들은 폴리 스를 위해 목숨을 건 대가로 정치 참여를 요구했다. 폴리스 간 의 경쟁이 치열했던 상황이어서 귀족은 이를 들어줄 수밖에 없 었다. 그리스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한 것은 고된 노동과 목숨을 건 전쟁을 감당해야 했던 소농을 포함한 시민들이었던 그리스 보리밭에서 자라난 민주주의 셈이다.
- 17세기 유럽에는 1,000개의 국가가 존재했으나 200년이 지난 뒤에는 40~50개로 통합되었다.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 기 지중해 인근의 정세와 비슷하다. 영국은 이 시기 아테네식 의 정치·경제개혁으로 유럽에서 가장 앞서 나갔다. 그러나 영국인은 아테네의 정치·경제 시스템에 스파르타의 정신을 이식했다. 기숙학교를 만들고 학생에게 럭비를 시켜 진 흙탕에서 뒹굴게 했다. 그들이 먹던 음식은 스파르타처럼 맛이 없었다. 지금도 유럽에는 “지옥의 요리사는 영국인" 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실제 영국은 스파르타처럼 쾌락보다는 절제 와 명예를 존중하는 전통을 강조해왔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적절하게 섞어놓은 영국은 20세기 초까지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로 성장했다. 후발 자본주의 국 가는 물론 중국과 같은 반봉건 국가들에도 영국은 벤치마킹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낯선 여러 국가는 스파르타의 전통에 경도되었다. 나치와 일본 제국주의가 대표적이다. 사회주의국가인 스탈린 시대 소련과 지금의 북한도 스파르타와 닮았다. 19세기 말부터 일본식 자본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도 스파르타의 전통이 강하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획일화된 학교 교육, 고루한 서열 문화 등은 찬란한 아테네보 다는 칙칙한 스파르타를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수능이나 토익 따위에 청춘을 소진하는 젊은이들은 전사가 되기 위해 집단생활에 내몰린 스파르타 젊은이들과 닮았다. 먹는 것도 비슷하다. 잡코리아 등이 취업 준비생 1,147명을 대상으로 2017년 6월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면,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취업 준비생은 17퍼센트에 불과했다. 이들이 가장 자주 사 먹는 식사 메뉴는 편의점 도시락과 삼각 김밥(23.7퍼센트)이었다. 조모스와 딱딱한 보리 빵을 먹던 스파르타 전사의 한 끼를 떠올리게 한다.
- 나는 폴리비우스가 조영관(로마 지방의회 관리)으로 뽑혔으면 좋겠다. 그는 우리에게 맛있는 빵을 공급해준다. (폼페이 유적 낙서)
- 로마의 실체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전재 국가였 다. 전쟁에 승리해 전리품과 노예가 확보되면 노예의 노동력을 토대로 다시 전쟁을 벌였다. 대부분 농민이던 로마의 시민군은 수백 년 동안 이 지겨운 무한 반복을 묵묵히 따랐다. 동맹국과 속주屬州의 시민 역시 전쟁에 참여했다. 그들은 애국심으로 무 장한 '전쟁 기계'였다. 그러나 전쟁에 참여한 시민에게 돌아온 것은 황당한 현실이 었다. 시민이 전쟁에 나간 사이 귀족이 시민의 토지를 독점했다. 토지 독점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로마가 민회와 원로원이 절대왕정을 견제하기 위한 대의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어가던 기원전 2세기 공화정 때였다. '강성 대국'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 아래 토지를 잃은 농민들 이 로마로 밀려들었다. 로마 시민의 99퍼센트는 빈민이었고 굶 주림을 걱정해야 했다. 이게 로마제국의 민낯이다. 번영하면 번영할수록 불안해지는 것이 로마의 숙명이었다. 노예제와 귀 족정, 군사독재라는 최악의 정치·경제 시스템은 어떤 개혁도 불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로마 정부는 개혁에 나서지 않고 시민에게 공짜 빵을 돌렸다. 시민들은 정치인이 던져준 공짜 빵을 짜고 냄새나는 생선젓인 가룸garum에 찍어 먹었다. 가룸은 멸치를 비롯해 전갱이 · 고등어 등 지중해에서 흔히 잡히는 생선으로 만들었다. 가룸은 오늘날 이탈리아 지역에서 즐겨 먹는 올리브유와 소 금에 절인 안초비anchovy와는 다르다. 오히려 냄새가 짙은 동남아시아의 생선젓과 비슷했다. 가룸은 고대 로마에서 가장 값싼 음식의 하나로, 서민의 주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공화정 말기부터 공짜 빵에 값싼 가룸을 찍어 먹으며 영광스럽던 로마의 붕괴를 지켜보아야 했다. 빵과 가룸은 단순히 먹거리가 아니라 로마의 역사를 상징한다. 그러나 구수한 빵과 냄새나는 가룸의 역할은 묘하게 달랐다. 빵은 무상이었지만 가룸은 돈을 내고 사먹어야 했다.
- 서양의 식탁에 단백질 공급원인 가축의 살과 우유가 풍족하게 공급된 시기는 유럽에서조차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세 기 말일 정도로 고기와 우유는 귀한 음식이었다. 게다가 척박 한 석회암 토양의 지중해 인근에서는 염소나 양처럼 작고 생명력 강한 가축을 키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배고픈 로마인은 자신보다 먼저 바다로 뛰어들어 빛나는 문 명을 만든 그리스인의 식탁에서 영감을 얻었다. 보리의 나라 그리스는 밀을 대부분 수입했다. 그리고 바다에 무궁무진한 어패류를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선은 쉽게 상한다. 그리스인은 생선을 소금에 절인 액젓 가로스garos를 만들었다. 가로스는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흑해 연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로마인은 그리스 신화에 기초해 로마 신화를 만들었듯이 가로스를 토대로 가룸을 만들었다. 가룸은 멸치를 비롯한 각종 생선에 소금을 넣어 만들었다. 주로 여름철에 3개월 정도 햇빛 에 노출해 발효시켰는데, 엄청난 냄새로 악명이 높았다. 발효 뒤 맨 위에 뜬 맑은 갈색 액체를 걸러낸 것이 가룸이다. 가룸을 따르고 남은 생선 찌꺼기를 알렉allec이라고 불렀는데, 알렉으 가장 값싼 서민 음식이었다. 가룸은 지중해 사람들의 지혜가 만든 지중해 경제의 산물이었다.
- 영어 케첩의 어원은 중국 푸젠성 방언으로 '생선으로 만든 소스'를 의미하는 꿰짭姓에서 유래했다. 17세기에 등장한 케첩은 굴·생선·계란 흰자 등을 넣고 발효시킨 일종의 생선젓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버섯 · 호두 등을 이용한 새로운 소스가 등장했고 이 소스는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실용적인 영국인들은 말레이시아에서 이 소스를 발견하고는 이를 이용하면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 다. 그래서 이 소스를 유럽에 전파했다. 유럽에서는 토마토를 이용한 새로운 케첩이 만들어졌다. 기름진 요리를 즐겨 먹던 19세기 미국에서 토마토케첩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지금은 마치 케첩이 미국의 소스인 것처럼 생각할 정도다. 중국에서 는 미국이 표준화시킨 토마토케첩을 양가장洋書·번가장語市書 이라는 별도의 말로 부른다. 토마토케첩의 재료는 제조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토마토 과육에 정향clove · 계피·후추·고추·마늘·육두구 등을 넣고 조린다. 제품에 따라 많게는 17종이나 되는 향신료를 쓰기도도한다. 서양인에게 이런 향신료는 대항해시대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하던 사치품이었을 것이다. 토마토 역시 남아메리카가 원산지다. 케첩은 소아시아의 생선젓에 취향대로 허브와 향신료를 넣 고 참치와 고등어로 만든 로마의 가룸과 많이 닮았다. 로마는 지중해를 통해 얻은 빵과 가룸으로 제국을 다스렸다. 지중해는 로마의 젖줄이었다. 서양인들은 로마가 어디서 어떻게 젖과 꿀을 얻었는지 잊지 않았고, 가룸을 부활시켰다.
- 수도원에는 중세에 보기 드문 잉여생산물이 쌓이기 시작했 다. 로마 시대에는 콜로세움보다 큰 식량 창고를 능수능란하게 만들었으나 그런 건축 기술이 없었던 중세 수도원은 잉여생산물이 변질되거나 손실되기 전에 가공해 팔아야 했다. 그들의 선택은 맥주였다. 그러나 빵을 액체로 만든 맥주는 보름도 안 되어 변질되기 일쑤였다. 중세의 도로 환경을 고려하면 그들은 맥주의 보존 기간을 늘려야 했다.수도사들은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하다가 늪지대에서 자라 는 뽕나뭇과의 여러해살이풀인 홉을 찾아냈다. 9세기 수도사 들은 홉을 넣으면 맥주의 맛이 상큼해질 뿐 아니라 보존 기간도 늘어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수도원은 홉을 넣은 맥주를 유럽의 방방곡곡에 팔기 시작했다. 로마 시대 이후 흔적만 남았 던 유럽의 길이 수도원 맥주를 실은 수레를 따라 다시 모습을드러냈다.
- 봉건제가 정착되고 이민족 침입이 잦아들면서 11세기에는 배 고픔에 대한 공포가 현저하게 누그러졌다. 넉넉해진 먹거리 덕 분에 인구도 급등했다. 볼로냐 ·케임브리지 · 파리 · 마인츠 등 에 대학이 생겨났다. 대학은 아랍인들만 읽었던 그리스·로마 의 고전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500여 년간의 암흑 끝에 빛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교회는 암흑을 택했다. 중세 초기에 낮은 곳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설파했던 교회가 변심했다. 중세 교회가 누려온 열매가 너무 달콤했던 탓이다. 교회는 1077년 이탈리아 카노사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굴복시키며 유럽 최고의 정치권 력임을 증명했다. 그들의 욕심은 정치에만 미치지 않았다. 교 회는 왕보다 넓은 토지를 가진 대지주이자 유럽에서 보기 드문 지속 발전 가능한 상공인이었다. 중세 교회는 규모가 작을 뿐이지 20세기 등장한 스탠더드오일이나 포드자동차 같은 독점기업과 유사했다. 수도원은 청빈의 삶을 버리고 농노들과 소작 계약을 맺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곡식을 빻고 빵을 만들고 술을 빚는 일도 교회가 독점하기 시작했다. 로마법에 따라서 물레방아는 토지를 가진 사람의 소유였다. 방앗간 주인은 물레방아를 교회나 영주에게 바친 뒤 고용 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재산을 빼앗긴 방앗간 주인은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곡식의 양을 속이는 것은 물론이고 모래를 섞기도 했다. 종교가 앞장서서 지역 사회에 뿌리 깊은 불신을 조장한 셈이다. 장터를 여는 이권 역시 교회가 영주와 함께 독점했으며 다리나 성문을 지나는 사람 에게 통행세를 걷기도 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전리품으로 타락했다가 결국 이민족의 침입으로 무너졌다. 갈취로 돈을 벌던 중세 교 회도 비슷했다. 외부에서 결정타를 맞았다. 페스트가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것이다.
- 유럽인이 청어를 많이 먹은 데는 2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단백질 공급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서양인이 고기를 손쉽게 접하게 된 것은 19세기 냉동선이 발명되면서다. 그전까지 붉은 고기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사치품이었다. 게다가 유럽은 후추 등 향신료가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기 요리는 지금과는 다 른 고약한 냄새가 나는 염장 육류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염 장 생선은 위도 탓에 낮부터 컴컴해지는 북유럽의 겨울철을 지 탱해주는 긴요한 음식이었다. 발효를 하면 원래보다 풍부한 맛 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염장하면 맛이 없어지는 육류와 큰 차 이였다. 지금도 스웨덴에서는 수르스트뢰밍 sutstromming이라는 염장 발효 청어를 즐겨 먹는다. 이 음식은 세계에서 가장 냄새가 고 약한 음식으로 선정되었으며 일부 국가에서는 발효 가스의 폭 발 위험 때문에 수르스트뢰밍 통조림의 비행기 반입을 금지하 기도 했다. 그래도 스웨덴 사람들은 빵에 수르스트뢰밍을 올려 별미로 즐겨 먹는다.
- 청어의 수요 증가에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었다. 부활절 등 각종 종교적 행사를 앞두고 소고기나 가축의 육식을 금지하던 중세 그리스도교의 전통 탓에 염장 청어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청어의 수요 증가는 필연적으로 소금 거래량을 늘렸다. '배 위에 올라오면서부터 썩기 시작한다'는 등 푸른 생선을 오래 두고 먹으려면 염장이 필수기 때문이다. 청어 염장에 사용된 최초의 소금은 폴란드 등 동유럽 내륙지역에서 나는 암염이었다. 이 암염을 나르면서 북유럽의 교역로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 교역로는 남유럽의 해상 무역로와 함께 유럽의 주요한 상업 루트가 되었다. 이 상업 루트는 이슬람 제국의 무역로와 연 결되면서 북유럽 국가에 중국·인도 등 다른 대륙의 상품을 전 달했다. 암염의 무역로를 따라 북유럽의 핵심 상품인 모피·목재·구 리 등이 유럽 시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소금과 청어가 생존 필수품이라면 모피는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동양의 비단이나 도자기에 견줄 수 있는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이 때문에 모피 는 유럽 왕과 귀족의 주요 자금원으로 사용되었다. 유럽의 시장은 이슬람 시장과 연계되었다. 바그다드 시장에서 북유럽의 모피를 살 수 있었고 북유럽에서도 아랍의 향신료와 설탕, 동 양의 도자기와 비단을 구입할 수 있었다.
- 초기 자본주의 네트워킹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영국인은 자국 상품을 사지 않던 중국에 마약을 팔았고 영국보다 면사를 잘 만들던 인도 기술자들을 고문하고 죽였다. 피해 국가가 항 의하면 전쟁을 선포했다. 은행이 후원하고 국회가 인준하는 전 쟁에서 영국을 비롯해 유럽은 승승장구였다. 18세기까지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이었던 중국과 인도조차 이들을 당해낼 수 없 었다. 중국과 인도가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은 유럽 국가를 제외 하면 유럽 국가의 오만을 견제할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는 이 야기다. 세계대전으로 불린 유럽 국가 간의 엄청난 전쟁은 자본주의 초기부터 예정되어 있던 셈이다.
- 중세에서 자본주의로 가는 변곡점은 스페인의 1492년 아메리카의 발견이었다(인류사 혹은 인권의 관점에서 본다면 스페인의 침략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여기서는 경제사의 관점에서 발견이라고 쓰겠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럽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상 품 시장이라는 종속적인 지위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전 지 구적인 경제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왔다. 유럽인은 본의 아니게 몇몇 권역별로 운영되던 세계경제를 하나로 묶기 시작했고, 유럽에서 발생한 상공업 혁명을 전 세계에 퍼뜨렸다. 그 계기는 우연처럼 보인다. 포르투갈의 형님 격인 스페인 역시 새로운 무역로를 찾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사기꾼처 럼 보이는 벤처 사업가 한 명이 찾아왔다. 콜럼버스는 인도에 가는 길을 알고 있으니 스페인 왕실에서 투자를 해달라고 했 다. 그는 영국 왕 헨리8세Henry III에게도 투자 설명회를 열었는 데 거절당했다. 그래서 스페인에 온 것이다.
- 영국은 세계 최초로 자본주의경제를 선보이고 19세기에는 세계의 공장' 이라고 불릴 정도로 산업이 발달했지만 경제 구조는 스페인의 노예무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국은 1807년 인권을 이유로 세계 최초로 노예무역을 철폐했다. 흑인 인권을 생각해야 한다는 인식도 있었지만, 서구 열강이 너도나도 플랜테이션 농업에 나서면서 설탕 가격이 떨어진 것도 주요한 이유였다. 영국은 광대한 식민지에서 나오는 설탕 · 향신료·차·고무·면화를 독점으로 싼값에 확보해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기계로 가공해 공급하는 식민지 의존 경제 시스템이었다. 말이 공업 국가였지 영국 경제의 기초는 식민지형 플랜테이션 농업 생산물이었다. 바다를 지배한다는 자만감은 16세기 스페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눈을 가렸고 영국의 자본가들은 혁신을 등한시하는 부자의 저주에 빠졌다. 반면 미국과 독일 같은 후발 국가들은 식민지가 거의 없었 다. 그들은 영국처럼 식민지 플랜테이션에 의존한 경공업 대신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켰다. 결국 이 두 나라는 석유 기반 내연 기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쫓아낸 넓은 국토에 미친 듯이 철도를 깔았다. 영국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미국 철도에 투자했고 미국은 철강과 기계 산업을 발 전시켰다. 중공업 중심으로 발전한 미국의 공업 생산량은 19세기 말 이미 영국을 초월했다. | 미국과 독일이 유럽 귀족들이 장난감 취급했던 내연기관 자 동차를 만들려고 고민하고 있을 때, 영국은 자동차는 마차보다 빨라서는 안 된다는 '붉은 깃발법Locomotive Act'을 통과시켰다. 이 말도 안 되는 법은 무려 30년간 지속되었다. 이 법안은 내연 기관 분야에서 영국이 미국이나 독일에 비해 뒤처지게 했다. 후추와 설탕 같은 아열대 식민지 농업에 의존한 초기 자본주 의경제는 대량생산 · 대량 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자본주의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유럽 국가들이 깨달은 것은 두 차례 의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영국·프랑스·스페인 · 네덜란드 등 의 지배에 신음하던 제3세계 식민지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뒤 대부분 해방되었다. 그러나 식민지를 경험한 많은 국가가 폭력으로 이식된 자본주의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저개발국가로 남아 있다. 후추와 설탕이 밀고 끈 자본주의가 마냥 달콤하지 않은 이유다.
- 광고는 미국 노동자 계층에게 자동차와 집을 소비하기만 하면 중산층으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19세기 싱어 재봉틀이 최초로 고안한 할부 제도는 이 환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환상의 최전선에 있 던 전위부대는 코카콜라였다. 코카콜라 역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영웅이라기보다는 1920년대 미디어에 의해 탄생한 스타들과 비슷한 존재였다. 코카콜라는 남아메리카의 코카잎과 아프리카의 콜라잎으로 만 든 미국 남부 지역의 민간 약품 중 하나였다. 코카잎에 든 마약성분이 진통이나 피로 해소에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의약품에 매기는 세금을 음료수에 매기는 세금보다 높 이자 코카콜라는 코카잎 성분을 빼버렸다. 그리고 '진통’, ‘강장' 대신 '상쾌함', '행복'이라는 단어로 슬로건을 바꾸었다. 본질은 가고 거죽만 남은 셈인데 미국 대중은 본질과 상관없 이 코카콜라에 열광했다. 광고 덕분에 물로도 풀 수 없는 갈증을 콜라가 풀어준다고 소비자가 '욕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가치가 없는 코카콜라에 다른 소다수에 없는 상쾌함이 있다는 신화적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수많은 기업이 코카콜라의 마케팅 기법을 바이블로 삼게 된 이유다. 코카콜라의 광고에 대한 집착은 오랜 전통이었다. 1886년 코카콜라를 만든 존 펨버턴 John Pemberton은 한 해 뒤 동업자와 상의 없이 자신의 이름으로 상표를 등록한 뒤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2만 5,000달러가 있다면 2만 4,000달러를 광고비로 쓰고 나머지로 콜라 원액을 생산할 거야. 그렇게 하면 부자가될 수 있어.”
- 다이아몬드가 영원한 사랑을 뜻하게 된 것은 1947년 다이아몬드 회사인 드비어스의 광고 때문이다. 미국 청년이 1,500만 명 이나 파병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사회적으로 결혼에 대한 욕구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드비어스는 그런 예비부부에게 다이아몬드를 판매하고 싶었다. 광고를 맡은 회사는 '다이아몬드 영원한 사랑의 증표'라고 콘셉트를 잡았고, 이 광고는 미국 젊은이뿐 아니라 전세계의 젊은이에게 기존에 없던 욕망을 만들어냈다. 다이아몬드 반 지가 결혼식에 쓰인 유래는 1477년 오스트리아 막시밀리안 대 공(훗날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다)이 부르고뉴의 마리 공주에게 청혼하면서부터였다. 마리는 프랑스 일부와 벨기에·네덜란 드·룩셈부르크에 이르는 영토의 상속인이었다. 미모도 상당 해 당시 유럽 최고의 신붓감으로 꼽혔다. 이런 세기의 결혼식을 후원했던 사람은 유럽 광산업의 큰손이었던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 가문이었다. 500년 동안 대중은 전혀 몰랐던 유럽 왕족의 결혼 관습을 미국의 광고가 확산시킨 것이었다.
- 지금 우리는 과학의 초기 성공이 가져다준 기분 좋은 술기운이 아니라 다음 날 아침에 찾아온 끔찍한 두통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

 

Posted by dalai
,

인간의 흑역사

역사 2020. 6. 21. 14:04

- 인류가 아무리 눈부시게 발전하고 아무리 많은 난관을 극복했다. 해도, 파국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역사 속에서 예를 찾아보자. 9세 기 북유럽의 장수였던 '천하장사 시구르드’는 적장 뻐드렁니 마엘 브릭테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고 의기양양하게 귀환했다. 그러나 마엘 브릭테의 뻐드렁니가 말 타고 달리던 시구르드의 다 리를 계속 긁었고, 그 상처의 감염으로 시구르드는 며칠 만에 죽고 만다. 천하장사 시구르드는 자기가 이미 죽인 적에 의해 죽임을 당한 불 명예스런 주인공으로 전쟁사에 길이 남았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두 가진다. 첫째 자만은 금물이다. 둘째, 적의 치아 위생에 유의하자. 이 정도일 것이다. 이 책의 중심 주제는 자만과 그로 인한 파멸이니, 옛사람들의 구강 위생에 더 관심 있는 독자에게는 양해를 구한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간다면, 두 사람이 맞붙은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시구르드가 마엘 브릭테에게 각자 병사 40명씩 데리고 싸우자고 도전했기 때 문이다. 도전을 수락한 마엘 브릭테 앞에, 시구르드는 병사 80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러니 이 이야기의 또 한 가지 교훈은 철저하게 나쁜 놈은 되지 말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 흥미롭게도 이 또한 이 책에서 반복되는 주제이 기도 하다.
- 우리 머리는 교향곡을 작곡하고 도시를 계획하고, 상대성이론을 생각해내지만, 가게에서 포테이토칩 하나를 살 때도 무슨 종류를 살지 족히 5분은 고민해야 기우 결정할 수 있다.
- 진화라는 과정은 영리함과 거리가 멀다. 멍청 할 뿐 아니라 아주 고집스럽게 멍청하다. 진화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래저래 죽을 수 있는 수천 가지 시나리오를 피하고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잘 넘어갈 때까지만 죽지 않고 사는 것, 그것 뿐이다. 그렇게만 되면 성공이다.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다시 말해 진화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 지금 당장' 이익이 되는 특성 은 무조건 선택된다. 그 결과 훗날 9대손쯤에서 너무 구닥다리 특성으로 고생하지 않을지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미래를 내다보고 반영한다든지 하는 것도 물론 전혀 없다. 이를테면 “아, 이 특성은 지금은 좀 거추장스러워도 100만 년 후에는 후손들한테 진짜 유용 하겠군. 좋아, 선택하자”, 그런 경우는 없다. 진화의 원리는 앞을 내다보는 것이 아니다. 그냥 먹을 것과 짝짓기에 굶주린 개체들을 인 정사정없는 세상에 무진장 많이 풀어놓고 누가 제일 덜 망하나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뇌는 최고의 사고 기계를 목표로 세심하게 설계한 결과물이 아니라, 그저 요령과 땜질과 편법을 덕지덕지 모아놓은 것 에 불과하다. 그 모든 것은 예컨대 우리의 먼 조상이 먹을 것을 찾는 데 2퍼센트 더 유리했거나, 아니면 '앗, 조심해, 사자야!'라는 개념 을 전달하는 데 3퍼센트 더 유리했기에 선택된 요령들이다.
- 기준점 휴리스틱이란 뭔가를 결정할 때, 특히 사전 정보가 부족할 수록 제일 처음 얻은 정보에 따라 결정이 크게 좌우되는 것을 가리킨다.
- 한편 가용성 휴리스틱은, 우리가 모든 정보를 신중히 따지기보다. 는 무엇이든 제일 쉽게 떠오르는 정보를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가장 최근의 사건이라든지 더 극적이고 기억에 남는 사실을 기준으로 세계를 바라보려는 엄청난 편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현실을 더 정확히 반영할 만한 평범하고 시시한 정보는 그냥 흘려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끔찍한 범죄를 보도하는 자극적인 뉴스를 보고 나면 범죄율이 실제보다 높다고 생각하게 되는 반면, 범죄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무미건조한 뉴스는 봐도 생각이 잘 바뀌지 않는다. 이는 (더 찾고 상대적으로 덜 충격적인) 자동차 사고보다 (드물고 더 충격적인) 비행기사고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대중도 정치인도 테러라고 하면 즉각적, 반사적으로 반응하지만, 훨씬 더 치 명적이면서 동시에 평범한 위험 요소는 뒷전으로 취급하는 이유다. 2007년에서 2017년까지 10년 동안 미국에서는 테러보다 잔디 깎는 기계 때문에 죽은 사람이 더 많지만, 아직까지 미국 정부가 '잔디 깎는 기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 기준점 휴리스틱과 가용성 휴리스틱을 함께 쓰면 위급한 순간에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라든가 일상생활에서 소소한 결정을 내리는 데는 아주 효과적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복잡한 특성을 다 고려해 좀 현명한 결정을 내릴라치면 이 두 휴리스틱이 골칫거리가 된다. 우리 뇌는 가장 먼저 들은 것이나 가장 빨리 머리에 떠오르는 것에 자꾸 이끌리면서 늘 안전지대에 머무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 ‘더닝 크루거 효과'라고 하는 유명한 인지 편향 현상이 있는데, 이 책을 대표하는 이론으로 삼아도 될 듯하다. 이는 심리학자 데이비 드 더닝과 저스틴 크루거가 무능에 대한 무지Unskilled and Unaware of It」라는 논문에서 제안한 효과로, 우리가 살면서 익히 알던 현상을 입증한 것이다. 즉, 어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 가하는 경향이 있고, 잘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엄청나게 과 대평가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결점을 말 그대로 잘 모르니, 그 결점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당연히 모른다. 그래서 마냥 낙관하고 과신하다가 사고를 치고 일을 그르치기를 끝없이 반복한다(이 책을 읽다 보면 알겠지만, 우리 뇌가 저지르는 온갖 실수 중에서도 ‘과신’과 ‘낙관'이야말로 가장 위험하다.
- 우리는 군중에 편승하려는 욕구 때문에 각종 유행과 열풍과 광풍에 까딱하면 휩쓸린다. 한 사회 전체가 이성을 내동댕이치고 광란의 집착에 일시적으로 휘몰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순수하게 신체적인 형태로는 중세에 약 700년에 걸쳐 주기적으로 유럽을 덮쳤던 불가해한 춤바람, '무도 광'을 예로 들 수 있다. 갑자기 춤을 추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수십 만 명에게 전염병처럼 확산된 현상으로, 춤추다가 탈진해 죽는 사람 들까지 있었다. 돈과 관련된 형태도 많았다. 군중 편승 욕구와 일확천금 기회라면 믿고 보는 습성이 돈 욕심과 결합해 벌어진 일들이다. 이렇게 해서 생겨나는 것이 실제 가치보다 평가 가치가 훨씬 높아지는 금융 거품 이다. 본래 가치가 높지 않은 대상이라 해도 남들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돈을 벌 수 있으니 너도나도 투자한다. 물론 거품은 꺼 지기 마련이고, 많은 사람이 큰돈을 잃고 경제 전체가 몰락해버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집단적 공황이라는 형태도 있다. 그 시발점은 주로 우리의 공포를 조장하는 헛소문이다. 전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건 역사적으로 마녀사냥 비슷한 광풍이 꼭 벌어졌다(유럽에서는 16세기에 서 18세기까지 벌어진 마녀사냥에 약 5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 인간은 발길 닿는 곳마다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존재다
- 농경이 지속된 것은 농경으로 모든 이들의 삶이 더 나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농경사회가 이전 사회 보다 생존 경쟁에서 유리했기 때문이다. 즉, 농경사회는 자손 번식 속도가 빠른 데다가(농경은 더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고, 한곳에 머물러 살면 아이가 걸음마를 하기 전에 다음 아이를 또 낳을 수 있다), 집단적으 로 점점 더 넓은 땅을 차지하면서 농사짓지 않는 이들을 다 밀어내 게 된다. '농경은 끔찍한 실수였다' 설의 지지자인 저술가 재러드 다 이아몬드가 1987년 「디스커버」에 쓴 표현을 빌면, 인구 제한이냐 식량 증산이냐, 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후자를 선택했고, 그 결과 기아, 전쟁, 폭정을 떠안았다. 한마디로 우리는 질보다 양을 선 택한 것이다. 역시 인간답다. 세상이 이 꼴이 된 게 '다 농경 때문이다!'라고 막연히 사방에 손 가락질을 하고 싶지만, 농경의 시작은 그 밖에도 더 직접적이고 스 펙터클한 각종 참사를 빚어냈다. 농경에 착수하면서 인간은 주변 환 경을 마음대로 바꾸기 시작했으니, 농사라는 게 그런 것일 수밖에 없다. 식물을 가져다가 본래 있을 곳이 아닌 어디 다른 곳에 꽂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주변 풍광을 변화시키게 된다. 필요 없는 것은 없 애고, 그 자리에 필요한 것을 더 채워넣으려고 궁리하게 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인간이란 그런 일이 낳을 여파를 잘 따져볼 줄 모른다는 게 확실하다.
- 라파누이인들은 운이 나빴던 데다가 바보짓을 벌여 자멸하고 만 것. 일단 운이 나빴던 것이 라파누이섬은 지리적, 생태적으로 삼림 파괴에 유달리 취약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앞서 등장했던 '농업은 인류 최악의 실수' 설의 주창자)가 라파누이 문명을 집중 조명한 저서 『문명의 붕괴 Collapse』에서 설명하듯, 이스터섬은 폴리네시아 지역 의 다른 섬들에 비해 후미진 곳에 위치한 데다가 좁고 평탄한 지형 에 춥고 건조한 기후였다. 한마디로 나무를 베면 자연적으로 보충되 기 힘든 조건이었던 것이다.
- 그리고 바보짓을 했던 것이, 라파누이인들은 더 좋은 집을 짓고 더 좋은 카누를 만들고 석상을 운반하는 설비를 더 좋게 개선하려고 열을 올린 나머지 나무를 계속 베어내기만 하고 나무가 다시 자라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별안간 나무가 한 그루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전형적인 공유지의 비극' 이었다. 나무 한 그루를 벤 한 사람은 잘못이 없었을지라도, 결국 모든 사람의 잘 못으로 상황은 회복 불능이 되어버렸다. 숲이 사라지자 라파누이 사회는 막심한 타격을 입었다. 나무가 없 으니 고기잡이할 카누도 만들 수 없었고, 토양이 비바람에 깎여나가 황폐해지면서 산사태가 일어나 마을이 파묻혔으며, 추운 겨울을 나 려니 그나마 남은 초목마저 긁어모아 불을 때야 했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날로 희소해지는 자원을 놓고 집단 간에 경쟁이 거세졌다. 이는 비극적이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수순으로 이어진 듯하다. 절박한 인간은 사회적 지위를 갈망하거나 사기충천이 필요하거나 자신이 큰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위안이 필요할 때, 왕왕 그 러는 습성이 있으니까. 즉, 그들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오히려 더 강 하게 밀어붙였다. 라파누이인들은 점점 더 큰 석상을 만드는 데 사 활을 건 것으로 보인다. 왜 그랬느냐고? 그러게 말이다. 인간이란 해 결이 난망해 보이는 문제에 부닥쳤을 때 원래 잘 그런다. 섬에서 최 후로 제작된 석상은 아예 채석장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다른 석 상들도 놓일 자리까지 가다 말고 길가에 나뒹굴었다. 일이 갑자기 엎어진 것이다. 폴리네시아인들은 절대 필자나 독자보다 덜 똑똑한 사람들이 아 니었다. 미개하지도 않았고 환경에 무지하지도 않았다. 혹시라도 '와, 환경이 파탄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문제를 외면하고 문제의 발단이 된 일을 더 벌였다니, 바보 아냐?' 하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 다면....... 음, 주변을 좀 둘러보시죠? 실내 난방 온도 좀 적당히 맞추고 쓰레기 재활용도 좀 잘 하시고요. 『문명의 붕괴』에서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 야자수를 벤 이스터섬 주민은 뭐라고 하면서 그 나무를 베었을 까?” 정말 좋은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 이다. 아마 “인생 뭐 있나!”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더 좋은 질문은 마지막에서 두 번째 나무나 마지막에서 세 번째, 네 번째 나무를 벤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베었느냐가 아 닐까? 우리 인류사 전반을 예리하게 통찰해볼 때, 그 정답은 '내 문 제도 아닌데 뭐' 정도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 10억 마리의 천적이 갑자기 사라지자 중국의 메뚜기들은 매일매 일이 잔칫날이었다. 여기저기서 곡식을 조금씩 쪼아 먹는 참새와 달리 메뚜기 떼는 거대한 공포의 구름을 이루어 중국의 논밭을 통째로 싹쓸이했다. 1959년 마침내 전문가(참새 소탕 작전은 위험하다고 일찍 이 경고했던 조류학자 정줘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졌고, 공식 유해 동 물 명단에서 참새가 빠지고 대신 빈대가 들어갔다. 그러나 때는 이 미 늦었으니, 참새 10억 마리를 박멸하고 나서 '어, 이게 아니네, 취 소' 하고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 물론 1959년에서 1962년까지 중국을 덮친 대기근은 참새 소탕 뿐 아니라 여러 잘못된 결정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게 원인이 었다. 당의 주도에 따른 전통적 자급 농업에서 고부가가치 상품작물 재배로의 전환, 소련 생물학자 트로핌 리센코의 유사 과학 이론에 기반한 파괴적 농경 기법 도입, 농산물을 몰수해 지역사회 내에서의 소비를 막은 중앙정부의 정책 등이 모두 제각기 몫을 했다. 게다. 가 고위직이든 하위직이든 우수한 실적을 보고한 공무원들에게 포 상이 주어지다 보니 국가 지도자들은 모든 게 잘되고 있고 식량 수 급이 넉넉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홍수와 가뭄 등 기상 악조건이 몇 년간 이어지던 끝에 별안간 식량 비축분이 바닥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참새 박멸과 그로 인한 메뚜기 떼의 창궐이 대재앙을 낳 은 주요 원인이었음은 분명하다. 당시 대기근으로 인한 사망자 수 는 적게는 1,500만 명에서 많게는 3,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무려 1,500만 명의 인간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조차 확실치 않다니 더 오싹해질 따름이다.이 참사가 남긴 교훈은 자명하다. 뒷일을 아주 확실하게 장담할 수 없다면 자연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장담할 수 있어도 웬만하 면 건드리지 말자. 앞으로라도 명심하면 좋겠지만......... 그럴 것 같지 않다. 2004년, 중국 정부는 사스SARS 바이러스 확산을 막고자 사향고양이에서 오소리까지 각종 포유동물을 집단 살처분하라고 명령했다. 역시 인간은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능력이 모자라는 것일까.
- 나서서 남에게 명령하길 좋아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것이 옳은 일인지는 의문이지만
- 절대 권력자들이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막장짓을 벌이곤 했기 때문에 역사상 여러나라에서 그 폐단을 줄이고자 민주주의라는 것을 시도하곤 했다.
- `절대 권력자들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막장짓을 벌이곤 했 기에, 역사상 여러 나라에서 그 폐단을 줄여보고자 이따금씩 '민주 주의'라는 것을 시도하곤 했다. 그리고 그 성패 여부는 다양했다. 민주주의가 처음 어디서 시도되었느냐 하는 것은 논란이 있다. 먼 옛날 소규모 사회에서도 틀림없이 다양한 형태로 집단적 의사 결정 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또 2,500년 전 인도에도 민주주의에 근접 한 제도가 존재했다는 근거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와 비슷 한 시기인 기원전 508년,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민주정치를 처음으로 도입하고 법제화한 것으로 본다. 물론 민주주의의 주요 요건은 (요컨대 모든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 시민이 마음에 들지 않는 정부를 교체할 권리 등) 누구까지를 '시민' 으로 보느냐의 문제와 직결된다. 역사를 통틀어 여러 나라에서 여성, 빈민, 소수민족 등 보잘것없는 약자들은 시민으로 보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권력을 아무한테나 줄 수야 없지 않았겠는가? 민주주의의 또 한 가지 문제는, 누구든 민주적 절차에 의해 권력 을 잡는 것은 좋아하지만 권력을 빼앗길 것 같으면 갑자기 영 달가 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계속 유지하는 데만도 참으로 엄청난 노력이 들어간다. 예컨대 로마에서는 민주주의가 전제정치로 퇴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각종 묘책을 시도한 바 있다. 한 가지 방법은 행정과 군사를 모 두 관할하는 선출직 최고 통치자 집정관의 역할을 두 사람에게 나누어 맡기는 것이었다. 임기는 1년이었고, 두 사람이 한 달마다 번 갈아 주요 통치권을 행사했으며, 로마군 4개 군단을 한 사람이 2개 군단씩 맡아 지휘했다. 이는 어느 한 사람도 절대 권력을 손에 쥐지 못하게 하는 꽤 영리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4개 군단을 모두 전투에 투입해야 할 때는 이상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가령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 때가 그랬으니, 로마 군은 코끼리 애호가였다는 한니발 장군이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결 전을 벌여야 했다. 이 전투에서 두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군 지휘권을 '하루마다' 번갈아 행사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전술적 견해가 충돌한다는 게 문제였다. 하루는 신중한 파울루스가 지휘를 맡고, 또 하루는 과감 한 바로가 지휘를 맡았으니 말이다. 로마군을 전장으로 끌어들이고 자 했던 한니발은 바로가 지휘권을 잡을 때까지 그냥 하루를 기다렸 고, 간단히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전투는 로마군의 전멸에 가까운 참 패로 끝났다. 사실 로마는 이런 내분을 막기 위해 마련해둔 방책이 있었다. 비상시에 전권을 위임받는 '독재관'을 임명해두는 것. 독재관은 일단 임무를 완수하고 나면 바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어 있었다 (공교롭 게도 로마 원로원은 칸나이 전투 직전에 독재관이 쓰는 전술이 마음에 들지 않아 독재관을 해임해버렸다). 이 역시 원론적으로는 좋은 생각이었지 만, 절대 권력에다가 대군의 지휘권까지 손에 넣은 사람이 인간적으 로 순순히 자리에서 물러나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독재관들 대다수는 별 탈 없이 물러났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야망가가 '권력 맛을 보니 참 괜찮은데 불만 없으시면 제가 좀 갖고 있겠다'라고 했다. 카이사르의 끝은 결국 좋지 않았지만, 그의 후계 자들 역시 절대 권력을 맛보고는 절대 놓지 않으려 했으니, 로마 공 화국'은 금방 '로마 제국'으로 변해버렸다.
- 히틀러는 집단 학살광이라는 점 외에도 우리가 흔히 간과 하기 쉬운 일면이 있었다. 대중문화 속에서 히틀러는 오랫동안 조롱 거리로 묘사되어왔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나치의 조직은 무자비하 리만치 능률적이었으며 독재자 히틀러는 자기 일, 즉 독재에는 밤낮 으로 열심히 임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히틀러는 무능하고 게으르고 병적으로 자기중심 주의적인 사람이었고 그의 정부는 완전히 코미디였다는 사실을 알 아둘 만하지 않을까. 사실 오히려 그 덕분에 그가 득세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독일 지도층은 그를 시종일관 과소평가했다. 그가 총리가 되 기 전, 정적들은 그의 투박한 연설과 유치한 유세를 들어 그를 한낱 웃음거리로 치부했다. 어느 잡지에 따르면 그는 한심한 얼간이'였다. 또 어느 잡지는 그의 당이 '무능력자 집단'이며 '어중이떠중이 들 잔치를 과대평가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선거를 통해 나치가 독일 의회 최대 정당이 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히틀러가 허세에 찬 바보이고 호구이니 똑똑한 사람들에게 쉽게 조종당하리라 생각했다. 당시 독일 총리 자리에서 밀려난 프란츠 폰 파펜은 권력을 되찾으려고 칼을 갈고 있었다. 그는 히틀러를 봉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그와 함께 연립내각을 수립하기 위 한 논의에 들어갔다. 마침내 1933년 1월, 협상이 성공해 히틀러가 총리, 파펜이 부총리가 되고 내각은 파펜에 우호적인 보수 관료들로 채워졌다. 파펜은 승리를 확신했다. 자기에게 실수했다고 경고하는 지인에게 ‘그자는 우리 하수인'이라며 안심시켰다. 그리고 다른 지인에게는 두 달이면 히틀러는 구석에 몰려 찍소리 못 하게 될 것이 라고 자신했다.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두 달 만에 히틀러는 오히려 나라를 완전히 장악했고, 자신에게 초헌법적 권한과 대통령직에다 의회까지 통째로 넘겨주게 될 법을 통과시켜달라고 의회를 설득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국가가 순식간에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게 되었다. 독일의 지도적 인사들은 왜 그렇게 시종일관 히틀러를 얕잡아 보 았을까? 히틀러의 무능함을 제대로 짚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능함도 히틀러의 야욕 앞에서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실제 로 히틀러는 정부를 운영하는 능력이 형편없었다. 그의 공보 담당관 오토 디트리히는 훗날 회고록 『내가 알던 히틀러』에 이렇게 적기도 했다. “히틀러는 독일을 12년간 통치하면서 문명국가에서는 유례가 없을 만큼 정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았다.”
- 히틀러는 문서 읽기를 질색했다. 보좌관들이 올린 문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일이 잦았다. 부하들과는 정책을 의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머리에 떠오르는 내용으로 일장 연설만 일방적으로 늘어놓았다. 말이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하고 꼼짝없이 듣고 있어야 했으므로, 부하들에게는 공포의 시간이었다. 히틀러 정부는 늘 난장판이었다. 관료들은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 몰랐고, 누가 무슨 일을 맡고 있는지 잘 몰랐다. 히틀러는 어려운 결 정을 해달라고 하면 결정을 한없이 미뤘고, 결국 느낌대로 결정해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니 측근들도 그가 뭘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 에른스트 한프슈팅글은 훗날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그는 어찌나 종잡을 수 없는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렇다 보니 관료들은 나랏일 수행은 뒷전이고 종일 서로 갈라져 싸우고 헐뜯기에 바빴고, 그날그날 히틀러의 기분 상태에 따라 어떻게든 그의 눈에 들거나 그의 눈을 피할 생각뿐이었다.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히틀러가 매사를 제 뜻대로 하려고 일부러 수를 쓴 것이냐, 아니면 그냥 업무 지휘 능력이 형편없이 떨 어졌던 것이냐, 하는 논란이 좀 있다. 디트리히는 이것이 분열과 혼 돈을 조장하기 위한 계책이었다는 입장이다. 히틀러가 그 방면의 선수였던 건 맞다. 하지만 히틀러의 개인적인 습관을 볼 때, 그냥 일하기 싫어하는 자아도취증 환자에게 나라를 맡겨놓으니 그리 될 수밖 에 없었을 것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 히틀러는 엄청나게 게을렀다. 그의 보좌관 프리츠 비데만에 따르 면, 그는 베를린에 있을 때도 11시가 넘어서야 일어났고, 점심 전까 지 하는 일이라고는 신문에 실린 자기 기사를 읽는 것 정도가 고작 이었다(디트리히가 꼬박꼬박 기사 스크랩을 가져다주었다). 그래도 사람 들이 자꾸 자기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하니까 베를린에 있기를 좋아 하지 않았다. 기회만 되면 집무실을 떠나 오버잘츠베르크의 개인 별 장에 갔고, 거기서는 당연히 일을 더 안 했다. 그곳에서는 아예 오후 2시까지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하는 일은 산책 아니면 새벽까 지 영화 보기가 거의 전부였다. 그는 대중매체와 유명인에 집착했으며, 그러한 시각으로 자기 자신을 종종 바라보았던 것 같다. 스스로를 가리켜 “유럽 최고의 배 우”라 하기도 했고, 한번은 친구에게 쓴 편지에 “내 인생은 세계사를 통틀어 최고의 소설이라고 생각하네”라고 했다. 그의 개인적 습관은 특이하거나 어린아이 같아 보이는 것이 많았다. 낮에는 꼭 낮 잠을 잤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단 것을 엄청 나게 좋아해 “케이크를 엄청나게 많이 먹었으며 “찻잔에 설탕 덩어리를 어찌나 많이 집어 넣는지 차를 부을 공간이 거의 없을 정도” 였다. 자신의 무식함에 콤플렉스가 심했기에, 자기 선입견에 맞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다른 사람이 식견을 말할 때면 폭언을 퍼붓곤 했다. 누가 자기에게 반박하면 “호랑이처럼 격노했다”고 한다. “사 실을 말해줘도 자기 마음에 안 들면 화부터 내고 보는 사람에게 누 가 사실을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비데만은 개탄했다. 히틀러는 남 들이 자기를 비웃는 것을 질색했지만, 남을 놀림감으로 삼는 것은 좋아했다(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흉내를 내며 조소하곤 했다). 그러 면서도 자기가 멸시하는 대상이 자기를 인정해주기를 갈망했으며, 신문에 자기를 칭찬하는 글이 실리면 기분이 금방 좋아지곤 했다.
- 역사상 최악으로 꼽히는 인재人災들은 대개 천재 악당의 소행이 아니다. 오히려 바보와 광인들 이 줄지어 등장해 이랬다저랬다 아무렇게나 일을 벌인 결과다. 그리 고 그 공범은 그들을 뜻대로 부릴 수 있으리라고 착각한, 자신감이 넘쳤던 사람들이다.
- 역사상 러시아를 대규모로 침공해 성공한 주인공은 몽골이 유일하다(당시는 러시아가 아니라 키예프 공국이었다.), 폴란드는 잠깐 성공해 모스크바를 몇 년간 점령하기까 지 했지만 결국 쫓겨났고, 스웨덴은 한 번 시도했다가 참패한 후 사 실상 스웨덴 제국 몰락의 길로 들어서는 엄청난 화를 입었다. 그러니 '러시아는 웬만하면 쳐들어가지 말자'라는 교훈을 새길 만하다. 두 사람 중에서는 나폴레옹이 히틀러보다 그나마 조금 더 합리적 인 이유에서 계획을 단행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선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의 실패'라는 참고 사례가 없었다. 휘하의 육군이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으니 승리를 자신할 만도 했다. 더군다나 유럽에서 러시아를 제외하고 아직 버티고 있는 유일한 적수 영국을 경제적으로 봉쇄하는 데 러시아가 협조하지 않는다고 보았으므로 차르 알렉산드르 1세에게 충분히 불만을 품을 만했다. 물론 무역 봉쇄에 협조 하지 않는다고 대국에 쳐들어간다는 것은 그리 현명한 생각이라고 보기 어렵다. 나폴레옹의 가장 큰 실수라면, 매사에 뜻을 관철하는 수단이 거의 전쟁으로 시작해 전쟁으로 끝났다는 점. 나폴레옹은 외 교와 협상에는 영 재주가 없었다. 나폴레옹은 누군가를 공격하긴 해야겠다고 일단 마음을 먹은 상태에서, 러시아가 그나마 영국처럼 섬은 아니니 만만하다고 생각했 을 것이다. 그리고 기후를 고려했을 때 러시아를 침공할 시간이 사실상 석 달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전략을 이렇게 짰다. '모스크바로 곧장 쳐들어가 그곳에서 러시아와 총력전을 벌인다. 러시아 군대는 귀족들이 부리는 용병 무리에 지나지 않으니 우리처럼 사기가 드높 고 전투력이 월등한 군대의 적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계획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적이 예상대로 나오지 않으면 실제로는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 계획도 그런 경우였 다. 러시아군은 예상과 달리 나폴레옹 군대의 진격에 별 저항을 하 지 않았다. 계속 후퇴를 거듭하면서 큰 전투를 가급적 피하고, 동시 에 초토화 전술로 프랑스군이 물자를 확보할 수 없도록 하면서 겨울 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수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빠져나오기엔 늦은 상황이었다. 이제 지칠대로 지친 프랑스군 앞에 놓인 운명은 이역만리에서 고국까지 다시 돌아가는 죽음의 행군뿐이었다. 나폴레옹의 철옹성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이로써 나폴레옹은 몰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1941년 히틀러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히틀러도 섬나라인 영국 침 공의 어려움을 깨닫고, 대신 소련을 침공하되 여름이 지나가기 전에 신속히 해치워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당시 히틀러는 소련 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었지만, 자기는 나치이고 소련은 공산주의 자들이니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히틀러는 사실 나폴레옹의 전략을 연구했다. 그리고 같은 실수를 피하기 위한 묘책을 마련해두었다. 병력을 모조리 모스크바로 보내지 않고 셋으로 나누어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와 키예프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폴레옹과 달리 겨울이 다가와도 바로 퇴각하지 않고 버티며 싸울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두 선택 모두 파멸을 자초하고 말았다. 히틀러가 깨닫지 못한 사실은 나폴레옹 때와 전술이 조금 달랐다고 해도 결국 기본 작전은 똑같았다는 것이다(신속 과감하게 적을 치고, 큰 전투를 가뿐히 이기면, 적은 금방 무너진다는 것). 그러니 문제점도 똑같았다(적이 예상대로 행동하리라 철석같이 믿었고, 러시아 겨울의 위력을 여전히 무시함). 독일 수뇌부에는 이러한 문제점을 히틀러에게 지적해줄 수 있을 만한 참모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반대하거나 회의 하는 낌새만 있으면 작전 내용을 참모들에게 꽁꽁 숨기거나 철저히 거짓말로 둘러댔다. 이는 ‘자만심', '소망적 사고', '현실 회피' 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의사 결정 방식이었다.
- 미국이 피그스만에 상륙해 쿠바를 침공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은 집단 사고의 전형적 사례일 뿐 아니라, 집단 사고groupthink'라는 말 자체의 기원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가 케네디 행정부의 이 대실패 사례를 연구하고 나서 만들어낸 말이 바로 집단 사고다.미국은 바로 지척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 쿠바의 정부를 전복시키 려고 오랜 세월 온갖 삽질을 했지만, 피그스만 작전은 그중에서도 가장 굴욕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만하다 (단, 가장 '엽기적' 이었던 사건 은 따로 있는데, CIA가 조개에 폭발물을 장착, 스쿠버다이빙하는 피델 카스트로를 유인해 암살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조개를 대량 구입했던 일을 꼽아야 할 것이다). 기본 계획은 이랬다. 카스트로에 반대하는 쿠바 망명자들을 훈련 시켜, 이들로 하여금 미국의 공중 지원하에 침공에 나서게 한다는 것. 이들은 오합지졸 쿠바군과의 전투에서 쉽게 승기를 잡을 것이 고, 이를 본 쿠바 주민들은 그들을 해방군으로 환영하며 공산주의 정권에 맞서 들고일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아주 간단했다. 미국은 이미 과테말라도 그런 식으로 처리한 적이 있었다.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존 F. 케네디가 리처드 닉슨을 이기고 대통령이 되면서였다. 이 작전은 애초에 부통령이던 닉슨이 지지했고 그가 백악관의 새 주인이 되리라는 전제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그리 호방한 기질이 아니었고, 자칫 소련의 심기를 건드려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우려했다(실제로 우려할 만했다). 그 래서 작전의 일부 변경을 주장했다. 미국의 작전 지원은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즉 공중 지원 불가), 또 상륙 지점도 인구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바꿀 것을 요구 했는데, 그렇다면 '민중 봉기 유도' 시나리오는 실현이 어려워질 게 뻔했다. 원래부터도 상당히 낙관적인 작전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누가 봐도 폐기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전혀 그럴듯한 작전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당국자들은, 마치 그럴듯한 작전이라는 듯 일을 계속 진행해나갔다. 질문하는 사람도 없었고 따지고 드는 사람도 없었다. 당시 케네디 행정부의 고문이었고 이 계획을 반대했던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가 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누구나 동의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묘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열렸고, 자신은 어이없는 계획 이라고 생각했지만 회의 석상에서는 왠지 잠자코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그때 내가 소심하게 질문 몇 개를 던지는 것 이상으로 나서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하자면, 그 허튼짓을 고발하고 싶은 충동이 당시의 회의 분위기에 눌려버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살다 보면 그런 회의를 경험하게 되니,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다.
- 케네디는 이 의사결정의 실패를 통해 교훈을 톡톡히 얻었다. 그 덕분에 그다음 해에 찾아온 쿠바 미사일 위 기에서 수뇌부가 더 냉철한 판단을 할 수 있었고, 이로써 전 세계가 파국을 모면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사건의 충격이 워낙 컸기에, 미국은 다시는 집단 사고에 빠져 부실한 침공 작전 을 허술한 정보에 기대어 뚜렷한 계획도 출구 전략도 없이 밀어붙이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 콜럼버스의 탐험 계획은 자기가 직접 구한 두 계산값에 전적으 로 기반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지구의 크기고 다른 하나는 아시아 의 크기였다. 그런데 두 계산값 다 오차가 심했다. 일단 아시아가 실제보다 훨씬 길다고 계산해서(실제도 무척 길지만), 순풍만 불면 일본 을 실제보다 수천 킬로미터 더 동쪽에서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 각했다. 더 큰 실수는 지구 둘레의 계산에 9세기 페르시아 천문학자 알파르가니의 연구를 참고했다는 것. 그건 좋은 참고 자료가 아니었 다. 일찍이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 수학자 에라토스테네스도 제대 로 구해냈고, 그 밖에도 꽤 정확한 추정값이 많이 나와 있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는 따로 있었다.
- 콜럼버스의 가장 큰 실수는 알파르가니가 언급한 마일'이 당연히 로마 마일(약 1,500미터)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알파르가니가 사용한 단위는 아랍 마일(약 2,000~2,100미터)이었다. 즉, 알파르가니가 언급한 거리들은 콜럼버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길었다. 콜럼버스는 세상의 크기를 실제의 약 4분의 3으로 착각했다. 게 다가 일본의 위치를 실제보다 수천 킬로미터 더 가깝다고 착각했으 니, 결과적으로 항해 일정을 실제 필요한 일정보다 훨씬 짧게 잡고 그에 맞추어 식량과 물자를 준비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 네 세상 크기를 잘못 안 것 같은데” 하며 의문을 표했지만 콜럼버스 는 자기 계산을 꿋꿋이 믿었다. 그러니 콜럼버스가 카리브 제도를 덜컥 맞닥뜨린 건 사실 천만다행이었다(아시아까지 가기 전에 웬 다른 대륙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여기서 콜럼버스가 알파르가니가 쓴 단위를 오해한 것은 퍽이나 유럽 중심적 사고였음을 짚고 넘어갈 만하다. 그러나 그가 그 지독 한 유럽 중심적 사고로 그 후에 벌인 일들에 비하면 이건 잘못 축에 도 들지 않는다. | 만약 콜럼버스가 계산을 좀 제대로 해서 항해를 포기했더라면 세 계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포르투갈어 사용 인구는 좀 더 늘었을지 몰라도 포르투갈인들은 당 시 유럽 최고의 항해 기술자들이었고, 콜럼버스보다 몇 년 늦게 아 메리카 대륙 곳곳에 도달했다
- 오늘날까지도 다리엔 사건은 스코틀랜드를 양분하고 있다.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투표 때는 양편 모두 다리엔을 상징 적 사건으로 거론했다. 민족주의자들은 다리엔을 잉글랜드가 스코 틀랜드를 항상 훼방 놓고 탄압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우화로 삼았고, 통합주의자들은 안정을 버리고 비현실적 야망을 좇는 위험성을 보 여준 교훈으로 삼았다. 다리엔 이야기가 상징하는 바는 크다. 그것은 한 나라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교역 상대국과의 정치적 연합을 외면하고 무한한 세계적 영향력이라는 환상을 찾는 한편, 이를 부추긴 제국주의적 자유 무역 광신자들이 막연한 계획을 애국적 피해 의식으로 포장하면서 현실 상황에 대한 전문가들의 경고를 시종일관 무시한 이야기다.그렇다면 오늘날의 상황을 상징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생각해 볼 문제다.
- 외교란 한마디로, 대규모 인간집단끼리 서로 개자식처럼 굴지 않는 기술이다.
- 우리는 외교적 선택이란 어찌 보면 세력 판도 변화를 예 측하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그걸 정확히 예측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니, 오판이 잦은 것도 놀랍지 않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늦봄의 스위스, 우스꽝스러운 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내가 독일 정부에 제안을 해왔다. 러시아인인 그는 정변에 휩싸인 고국으 로 돌아가고자 간절히 원했지만, 전쟁 통이라 유럽을 가로질러 이동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최선의 귀국 경로는 독일을 통과해 북쪽 으로 도달하는 길이었지만, 그러려면 독일의 허가가 필요했다. 하지 만 독일 정부는 그의 정치 이념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그가 주장한 논리는 간단했다. 자신과 독일은 여러모로 다르지만 공동의 적을 두고 있다고 했다. 그 적은 그가 타도하고자 하는 현 러 시아 정부였다. 현재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고 있던 독일은, 러시아가 뭔가 소요를 겪어 최전선에 자원을 집중하지 못한다면 좋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독일은 그의 요구를 수락했다. 사내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가 거느린 러시아인 30명을 열차에 태워 북쪽 항 구로 보내주었고, 일행은 그곳에서 스웨덴과 핀란드를 경유하는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대단해 보이는 반군 무리는 아니었지만 없 는 것보다는 나을 듯 보였다. 독일 당국은 그들에게 돈까지 쥐어주 었고, 이후 몇 달에 걸쳐 계속 자금을 지원한다. 독일은 특이한 이념 을 가진 이 정치인이 소란을 좀 피우도록 지원하면 러시아가 한동안 교란되고, 결국 세상에서 조용히 잊히리라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내가 레닌이었다. 독일의 계책은 여러모로 완벽히 먹혀들었다. 오히려 예상보다 큰 성공이었다. 레닌의 볼셰비키는 러시아 당국을 괴롭히고 교란하기 만 한 게 아니라, 완전히 박살내버렸다. 6개월 남짓 후, 러시아 임시 정부는 전복되었고, 레닌은 권력을 잡고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했다. 독일은 휴전을 얻어냈다. 레닌을 열차에 실어 보냈던 4월까지만 해도 가망이 없어 보였던 일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 계책은 대성공이라고 볼 수 없었다. 일단 동부 전선에서 얻어낸 휴전은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았다. 또 그 후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린 소련 과 독일과의 관계는 급속히 틀어졌다. 그리고 수십 년 뒤 또 한 차례 세계대전이 지나간 후, 독일 땅의 절반은 소련이 점령하고 만다.독일은 '적의 적은 동지'라는 흔한 착각에 빠진 것이다. 그게 꼭 틀린 말은 아니다. 동지애의 유효기간이 엄청 짧을 뿐이다.
- 국제정치라는 게 참 어렵다. 숭고한 이상이 설 자리는 별로 없고, 실리를 생각하면 마음에 꼭 드는 상대가 아니더라도 아쉬운 대로 손을 잡아야 할 때가 많다.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도 번번이 곤경을 자초하는 일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적의 적도 대개는 처음 적 못지않게 나쁜 놈이라는 것.
- 몽골 제국은 몇 세대 후에 파벌 싸움과 내분에 휘말려 분열됨으로써 제국의 전형적 말로를 맞았지만, 그 유산은 일부 지역에서 계승 되어 20세기까지 이어졌다.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들이 통치하던 부하라 토후국이 1920년 볼셰비키에게 정복되면서, 칸 왕조는 마침내 막을 내린다.(1838년, 찰스 스토더트라는 영국 군인이 부하라 토후국을 영국 제국의 우방으로 포섭하려고 외교사절로 방문했다가 공교롭게도 무함마드의 바보짓을 축소판으로 재현하고 만다. 나스룰라 칸을 별 이유 없이 무심코 모욕하는 바람에, '벌레 구덩이'로 알려진 대단히 불쾌한 곳에 던져진 것. 그곳에서 그는 곤충 떼에 살을 뜯어먹히는 끔찍한 형벌을 몇 년 동안 받다가 결국 처형당했다. 이름에 '칸'이 붙은 사람에게 허튼짓하지 말자.)
- 몽골이 정복했던 많은 지역은 문화와 역사와 문헌이 모두 파괴되었고, 주민들이 송두리째 추방되었으며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긍정적인 면을 찾자면, 그 모든 사태의 발단이 되었던 교역로가 통합되고 안정화되면서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문화 교류를 가능케 했고, 이는 유라시아 전역에 근대 문명기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부정적인 면이라면 그 교역로를 통해 문화뿐 아니라 질병도 옮겨졌다는 것이며, 특히 흑사병은 또 한 차례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모든 사달은 콤플렉스 덩어리인 한 사내가 외교는 애송이들이 나 하는 짓이라 여기고 단순한 통상 요청을 사악한 계략으로 착각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 과학, 기술, 산업시대의 태동은 인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제 우리는 우주에서도 사고를 칠 수 있게 되었다.
-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세계는 토머스 미즐리가 남 긴 유산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의 두 주요 발명품이 모두 전 세계 대다수의 나라에서 금지되거나 퇴출되었다. 환경 속에 이 미 엄청난 양으로 퍼진 납은 현재 그대로다. 납은 분해되지도 사라 지지도 않으며, 제거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힘든 작업이다. 하지 만 좋은 소식은 적어도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아이들이 예전처 럼 납을 많이 들이마시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의 혈중 납 농도가 이제 대부분 중독 수준 밑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만세다. 한편 오존층은 CFC가 널리 금지된 이후로 서서히 회복되어가고 있 다. 앞으로 별 문제 없으면, 오존층이 미즐리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 는 시점은 아마도, 음, 2050년쯤일 것으로 보인다. 인류 파이팅! 어쨌거나 미즐리는 확고한 명성을 남겼다. 「뉴 사이언티스트」에 따르면 그는 “그 자체가 환경 재앙이 된 인간" 이었다. 역사학자 J. R. 맥닐은 저서 『20세기 환경의 역사Something New Under the Sun」에서 그를 “지구 역사상 환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단일 생명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그가 현대 세계의 모습을 예기치 못한 여러 면으로 바꾸어놓은 것 또한 사실이다. 노킹 방지 연료의 보급으로 자동차는 세계적으로 주요한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단순한 이 동 수단을 넘어 지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개인의 정체성 과 개성을 강력히 드러내는 심볼 역할을 하게 되었다. CFC는 우리 가 집에서 쓰는 냉장고뿐 아니라 에어컨이란 물건을 가능하게 했으 니, 그것이 없었더라면 세계의 대도시들은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두 발명품은 서로 결합해 시너지를 일으키기까지 했다. 강력한 파워의 자동차와 차량용 에어컨이 결합하면서, 일상적인 장거리 운전이 어렵지 않고 즐겁기까지 한 일이 되었다. 예컨대 광활한 미국 서부와 중동 지역 대부분의 땅만 생각해보아도, 토머스 미즐리의 발명이 없었다면 세상의 모습은 아마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또 문화 전반적으로도 파급 효과가 있었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영 화관이 냉방 시설을 초창기부터 도입한 덕분에 대공황 시절 여가 활 동으로 영화가 인기를 누릴 수 있었고, 영화 산업은 황금기를 맞으 며 문화적 영향력을 굳혔고 실로 20세기를 대표한다고 할 만한 엔 터테인먼트 장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토머스 미 즐리는 LA를 통째로 발명해낸 것이다. 자동차와 에어컨으로 돌아가는 도시, 영화 산업의 중심지 LA 말이다. 그러니 다음에 영화관에 앉아 범죄 조직과 맞서 독불장군처럼 싸우는 경찰 이야기가 나오는 심심풀이 땅콩용 할리우드 영화를 보게 되면, 그 모든 것이 다 토머스 미즐리가 자기가 발견한 화학물질이 별 탈 없을 것이며 갤런당 3센트를 더 벌 수 있으리라 생각한 덕분임을 잊지 말자.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물류는 세계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0) 2020.09.25
음식경제사  (0) 2020.07.22
신친일파 반일종족주의의 거짓을 파헤친다  (0) 2020.06.11
세상을 바꾼 길들임의 역사  (0) 2020.06.07
사무인간의 모험  (0) 2020.02.11
Posted by dalai
,

책을 읽는 내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반일 종족주의'라는 쓰레기 같은 책을 집필한 이영훈, 이우연 등의 또라이 보수주의자들은 무슨 생각으로 대한민국에 발을 딛고 살고 있는 것일까. 무슨 경제적 이익을 위해 반일 종족주의라는 새로운 용어까지 만들어내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저자는 이영훈이다. 서울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고 하는데, 서울대씩이나 나온 지식인이 왜 이러나 싶을 정도다. 아무리 학문연구의 자유가 있을지라도, 아직도 살아계신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미안하지도 않은가. 전공인 경제에 대해서나 연구할 것이지, 왜 갑자기 역사학에 집적대는지 모르겠다.

이 책(신친일파)은 호사카 유지가 쓴 책이다. 저자는 88년부터 한일관계 연구를 위해 서울에 거주하고 있으며, 03년에는 대한민국으로 귀화했으며, 현재 세종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런 책이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에 의해 씌어졌을까하는 부끄러움이 앞섰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오히려 일본과 한국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중간자적인 입장에서 객관적 사실과 사료를 바탕으로 조목조목 '반일 종족주의'의 주장을 반박하는 저자의 필력과 지식에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가장 적임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주제는 강제징용, 위안부, 독도 및 일제강점이다.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이영훈은 이들은 자발적으로 돈을 벌러 일본에 간 것이라고 주장한다. 상식적으로 어느 누가 목숨을 내걸고 전쟁통에 남의 나라의 탄광으로 전장의 위안부로 자발적으로 가겠는가? 모두 납치, 사기에 의한 일본의 범죄일 뿐이다.

참고로 이영훈, 이우연 등은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속이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87년 경제사학자 안병직과 이대근이 공동으로 설립한 연구소라고 한다. 안병직은 뉴라이트 재단의 초대 이사장이기도 하며,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결국 '반일종족주의' 저자들은 보수정권의 정권재창출을 목표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활동을 한 친일파에 대한 단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의 역사현실 앞에 정권창출을 목적으로 친일행각을 벌이는 이들이 아직도 버젓이 학문이라는 탈을 쓰고 활동하고 있다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 악마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면 안된다. 악마는 거짓말에 교묘히 진실을 섞는다. (엑소시스트 중)

- 한국인의 정신문화를 '반일 종족주의'라고 폄하하는 이영훈의 논리는 일본 극우세력에게 면죄부를 주는 '이적행위'와도 같다. 필자는 '노예근성'을 되풀이하는 이영훈의 논리와 글이 한국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우려스러움을 떨쳐낼 수가 없다. 필자는 그 우려스러움을 확실히 해결하기 위해 본서를 썼다. 독자 여러분은 본서를 통해 거짓에 사실을 섞어 사람을 속이고 나라를 파멸로 몰아가려는 악마가 있다면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 이우연은 조선인들이 위험한 일에 종사한 것은 조선인들이 돈 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갔고, 당시 노동수요와 노동공급이 맞아떨어진 결과이지 결코 민족차별'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본 기업의 변호사 역할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이우연 의 주장은 당시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간 조선인들과 '모집', '관 알선’, '징용'으로 강제연행된 조선인을 고의적으로 혼동해서 한 말이다. 1945년 8월 15일 패전 시점에서 강제적으로 동원되어 작업 현 장에 있던 조선인 노동자 수는 32만 2,890명이었고, 조선인 군인과 군속은 11만 2,718명이었기 때문에 양자를 합하면 패전시 일본에 있던 '징용'과 '징병’의 범주에 속하는 조선인들은 모두 43만 5,608명이었다. 이 수치는 패전 시 일본에 있던 조선인 총인구 약 200만 명의 22% 정도이자 1939년부터 1945년의 전시 동원 기 간에 증가한 일본 내 조선인 인구 약 120만 명의 약 36%에 해당한다.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이 많았기 때문에 강제 동원이나 강제연행이라는 단어 자체가 잘못 사용되고 있다고 하면서, '강제연행설 허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 돈을 벌기 위해 도일한 조선인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제연행이나 강제 동원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실제로 조선인 약 43만 5,000명은 강제연행된 사 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우연이 말하는 “젊고 건장한 조선 청년들은 주로 일본 정부 와 기업에 의해 전시 동원되었고, 나이가 많거나 어린 조선인들은 전시 동원 기간에 도일한 120만 명 중 나머지 64%에 해당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그러므로 전시 동원 기간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 3명 중 1명은 강제연행되었다는 이야기다.
- 일본이 조선인들을 강제연행해 데려간 곳은 주로 탄광이었다. 그러므로 일본 측이 처음부터 강제연행의 대상으로 삼은 조선인 들은 젊고 건장한 남자들'이었다. 마찬가지로 당시 젊고 건강한 여자들은 ‘위안부나 근로 정신대'로 끌려갔다. 일본 기업들은 자신들의 수요를 보충하기 위해 식민지 주민이 라는 약한 입장에 있는 젊고 건강한 조선인 노동자들을 강제연행 했다. 전쟁 시 동원이니 당연하다는 논리는 타당치 않다. 전범 기업들은 조선인들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만 신경을 썼고, 일본인들과 평등한 대우를 해주지도 않았다. 강제로 시킨 저축은 계약 기간 만기가 된 조선인 노동자에만 돌려주었고, 도주하거나 중 도 퇴직자의 저금은 모두 기업이 가로챘다. 작업장에서의 대우가 일본인과 조선인이 완전히 평등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으므로 '민족차별’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인 노동자의 불만이 쌓여서 패전 후에도 그 한이 풀리지 않는 이유는 불평등한 대우뿐만이 아니라, 불법적 인 일제 강점으로 인해 일어난 부당한 동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침략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한민족을 강제로 가담시킨 일제의 만행 때문이다.
- 일본 기업들은 조선인 노동자와 중국인 노동자, 전쟁 포로들을 착취할 수 있는 만큼 착취하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조선인 노동자 등을 죽지 않을 정도로 혹사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달에 10엔 정도의 용돈은 현재 가치로 2만엔, 즉 20만 원 정도라고 하니 고등학생이 받는 용돈 수준이었다. 이렇게 기업의 관리자들은 여러 명목으로 월급의 많은 부분을 조선인 노동자가 관리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 1965년 청구권 협정과 함께 일본이 지급한 무상 3억 달러의 보상금으로 모두 탕감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지만, 일본이 당시 보상금을 지급할 때 생환자, 즉 살아서 귀환한 자에게 보상금을 줄 수 없고 사망한 자에게만 준다고 했다. 따라서 1945년 시점에 서 생존해 있던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1965년의 청구권 협정의 지 급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중요한 사실을 이우연이나 일본 우파 는 절대로 밝히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일부 부분적인 사실만을 부풀려 그것이 마치 전체적인 진실인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일본 우파 논리의 노예가 된 사람들의 정신 상태 는 구제하기가 어렵다. '노예근성'이 정신을 파괴해버린 것이다.
-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일본군에 의 한 취업 사기 및 납치의 좋은 사례이자, 군이 통제하면서 형식은 여성들을 포주의 사창으로 만들어 일본군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대단히 악덕한 장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탄광에서 기업 들이 사용한 나야納屋 제도와 흡사하다. 기업이 나야 관리인과 계약하고 나야 관리인이 광부의 모집, 나야라는 숙소 관리, 광부들 의 생활 관리, 노동 관리 등을 모두 책임지는 것이 나야 제도였다. 즉 광부들이 기업과 직접 계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나야 관리인 과 계약하는 형태였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 역시 일본군은 포주 를 선정하고, 포주가 여성들의 모집, 인솔, 현지에서의 위안소 관 리 등을 모두 맡았다. 그러므로 ‘위안부'들은 일본군과 직접 계약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지시로 포주와 계약한 것이다
-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문제가 된 이유는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전쟁터가 된 중국, 동남아 등 최전선에는 일본인 여성들보다 훨씬 많은 타민족인 조선인이나 대만인 여성들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이영훈은 “기생제, 공창제, 위안소제는 그 본질적 속성을 변치 않 은 채 한 계열로 죽 이어져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본군 '위안 부들이 모두 원래부터 창부들이었다고 주장하여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범죄성을 물타기 하려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조선의 기생제나 공창제와는 관계없는, 취업 사기와 납치 등으로 여성들을 조선이 아닌 타국으로 강제연행해 일본군 각 부대의 사창으로 만든 새로운 시스템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일본이 타민족 여러 계층의 여성들을 취업 사기나 납치 형식으로 연행해 무력으로 위협하는 환경 속에서 성적 착취를 정당화한 제도이자, 일정한 기간 동안 그녀들을 '성 노예로 만들어서 ‘위안부'들의 자유를 박탈한 범죄였다. 한편 조선시대의 기생은 제도화된 계층적 존재였고, 기생이나 사비를 쓰는 사람들은 같은 민족인 조선인들이었다. 고려나 조선 에서 타민족을 기생이나 사비로 강제 동원했다면 한국은 그 타민 족으로부터 지금도 큰 비판을 받고 있을 것이다. 결국 조선의 기생제와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몽골(원나라)과 명나라, 청나라가 한반도를 영향하에 두었 을 때 고려나 조선은 그 나라의 명령으로 공녀를 바쳤다. 공녀들은 고국에 돌아와도 '환향녀'라고 불리며 사람들의 경멸 대상이 되었다. 한국사의 비극 중 하나인 셈이다. 그런데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처럼 타민족을 성노예로 만든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면 한국은 왜 몽골과 명나라, 청나라 등 중국 왕조에는 강력한 항의와 배상 요구를 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 문제에 대해 일부에서는 한국인들이 일본에는 엄격하지만 중국에는 약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여러 역사적 사실로 일본군 '위안부와 중국에 보내진 공녀는 큰 차이가 있다. '위안부'와 공녀의 차이는 '위안부'가 불특정 다수인 일본 병사들의 성노예였는 데 비해, 공녀들은 중국인의 성 노리개가 되었다기보다 왕궁에 들어가 궁녀가 되거나 중국인의 첩이나 본처가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공녀들이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식경제사  (0) 2020.07.22
인간의 흑역사  (0) 2020.06.21
세상을 바꾼 길들임의 역사  (0) 2020.06.07
사무인간의 모험  (0) 2020.02.11
전쟁의 기원  (0) 2019.11.04
Posted by dalai
,

1. 개
- 엄청나게 다양한 오늘날의 개들은 모두 늑대의 후손들이다. 여우, 자칼, 코요테, 심지어는 들개도 아니다. 오직 늑대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유럽의 회색늑대들, 오늘날의 개들은 이 회색늑대와 유전자 서열의 99.5퍼센트를 공유한다. 무엇이 늑대를 우리 곁에 오게 했을까? 과거의 고고학자들은 농업 이 시작되면서 그렇게 되었으리라 추측했다. 기회주의적인 포식자들 인 인간에게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가축의 존재는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었으리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인간의 새로운 시대, 즉 신석기시대를 출발시킨 농업의 가장 오래된 증거는 약 1만 2천 년 전 중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의 골격은 이보다 훨씬 오래된 고고학 유적들에서 발견된다. 인간과 가깝게 접촉해 동맹을 맺음으로써 변화를 겪은 동식물들 가운데 아마도 개가 우리의 가장 오래된 친구인 듯하다. 개를 기른 최초의 사람들은 농부가 아니라 방하기의 수렵채집인들이었으니 말이다. 그 동맹의 시초를 찾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먼 선사시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 지난 몇 년 동안 개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은 엄청나게 뜨거웠다. 새로운 기법들과 새로운 발견들은 이론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잠재력을 안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이야기는 계속 바뀌고 있다. 하지만 고고학적 발견물에 대한 더 정밀한 연대측정법에서부터 더 빠른 DNA서열 분석에 이르는 이 모든 발전에 힘입어, 우리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가까운 친구의 기원을 둘러싼 실제 역사가 마침내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잘 아는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복잡하지 한번 보라. 우리 종 또는 다른 종의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역사인 선사시대에 접근할 때 우리는 수천 년에 걸친 상호작용의 복잡성을 깔끔하게 요약하는 단순한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매우 순진하게 출발한다. 하지만 더 많은 과학적 분석이 실시되고 더 자세한 내막이 드러남에 따라 전체 그림이 변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타이미르 늑대와 고대 및 현대에 존재하는 그 사촌들의 DNA에 대한 연구는 가축화의 뿌리를 찾는 일이 얼마나 험난한지 잘 보여준다. 개의 기원을 빙하기로 밀어 넣었다면, 그다음에 떠오르는 질문은 “개는 어디서 가축화되었을까?”다. 하나의 독립된 지역에서 시작된 다음 다른 곳으로 퍼져나갔을까? 아니면 각기 다른 시기와 장소에서 야생 늑대가 여러 번 개로 변모했을까?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개의 가축화는 지금으로부터 4만 년 전 시작된 듯하지만, 늑대와의 교잡은 그 이후로 오랫동안 계속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고대와 현대의 유전체에 간직된 비밀을 풀 수 있는 최신 유전자 기법 덕분에 우리는 적어도, 시도는 해볼 수 있다.
- 1959년 러시아 과학자 드미트리 벨라예프는 특정 행동을 골라내는 선택 육종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동물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개 가축화의 열쇠가 되는 기본 형질들이 존재했으며, 새끼 늑대에게서 순한 성격이 적극적으로 선택된 반면 공격적인 성향은 가차 없이 제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늑대와 유연관계가 상당히 가까운 종인 은여우 Vaulpesupes를 데리고 그 유명한 가축화 실험에 착수했다. 매 세대 가장 순한 여우들을 선택해 그들끼리 교배시키자 순한 성격이 개체군 내에 빠르게 퍼졌다. 집중적인 선택 육종을 여섯 세대 반복한 뒤에는 매우 순한 개체들이 개체군의 2퍼센트를 차지했다. 열 세대가 지나자 순한 개체들은 18퍼센트로 들었고, 서른 세대 뒤에는 절반에 이르렀다. 실험이 계속되어 2006년이 되었을 땐 거의 모든 여우가 가축화된 개와 똑같이 ? 인간에게 매우 친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변한 것은 여우의 행동만이 아니었다. 여우들 일부는 체색이 여전히 은빛이었지만, 몇몇 여우들은 붉게 변했다. 붉은색도 은여우의 표준 체색이므로 여기까지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개체들은 흰 몸에 검은 반점이 찍힌 모습으로 변했다. 이른바 '조지 화이트Georgian White' 품종으로, 야생에는 없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다. 조지 화이트 품종의 은여우는 여우처럼 생긴 자그마한 양치기 개와 묘하게 닮았다. 어떤 여우들은 은백색 바탕에 갈색이 얼룩덜룩하게 섞인 털색을 가지게 되었고, 어떤 여우들은 축 처진 귀를 가졌다. 게다가 다리와 주둥이가 짧아지고 두개골이 넓적해지는 등, 골격 구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번식 양상도 변했다. 야생 여우는 1년에 한 번만 짝짓기 를 하지만, 순한 암여우는 1년에 두 번 발정기에 들어간다. 또한 순한 여우는 야생 여우보다 성적으로 더 빨리 성숙했다. 인간에게 친근하게 굴고 공격성이 없는 등 실험을 통해 특별하게 선택된 특정 속성 외에도 순한 여우는 우리에게 익숙한 다른 행동 유형들을 보였다. 그들은 꼬리를 위로 들어 흔들었다. 주의를 끌기 위해 낑낑거리기도 했다. 킁킁대며 사육자를 핥는가 하면 인간의 손짓과 시선의 방향에 주의를 기울였다. 여우 육종 실험을 실시한 러시아 과학자들은 그들이 선택한 형질에 함께 딸려 온 듯하지만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개와 비슷한 수많은 기타 형질들을 얻었다. 이 여우 육종 실험은 수천 년 전 가장 친근하고 공격성이 덜한 늑대들이 어떤 식으로 세대를 거치며 빠르게 순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수렵채집인들은 러시아 과학자들처럼 매 세대 10퍼센트의 가장 친근 한 여우들만을 선택적으로 번식시키는 엄밀한 프로토콜에 따라 선택 육종을 실시할 필요가 없었다. 개의 조상인 늑대들이 어느 정도까지 는 자가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가장 친근한 녀석들만 인간 가까이에서 살도록 허락되었을 테니 말이다. 늑대 무리는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로 유연관계가 매우 가깝다. 한 마리가 인간을 용인하거나 나아가 친근하게 굴면 그 무리의 나머지 개체들도 같은 유전자와 행동 경향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따라서 무리 전체, 혹은 무리의 대다수가 인간과 동맹을 맺을 수 있었으리라. 순한 늑대는 인간과 애착을 형성해 손짓과 눈짓 같은 인간의 사회적 단서들을 따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 늑대가 개로 가축화되는 초기 과정은 비록 50년 만에 가축화된 야생 은여우의 경우만큼은 아니더라도, 비교적 빨랐을 것이다. 변화를 일으키는 분자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거의 모든 이론이 다면 발현을 거론한다. 온순함과 너그러움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선택된 특정 유전자 변종들은 연쇄적인 불안정화 효과를 통해 해부 구조와 생리, 행동의 다른 측면들을 광범위하게, 그리고 충분히 빠르게 바꿀 수 있다. 이러한 잠재력을 알면,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던 야생종에서 가축종의로의 변화가 갑자기 훨씬 쉽고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보인다. 어쩌면 늑대가 개, 또는 거의 개'로 변하는 일은 수없이 많이 일어났고, 우리는 그 시험들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계통으로 발전한 한두개의 유전적 흔적만을 찾을 수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빙하기가 절정에 이르렀던 2만 1천 년 전에서 1만 7천 년 전
사이, 유라시아 전역의 동물들이 스트레스 상황에 놓였다. 빙상이 내려와 유럽을 뒤덮었고, 시베리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춥고 건조해졌다. 많은 계통이 멸종했다. 때로는 종 전체가 사라졌다. 갯과 동물의 가축화 실험이 이 환경 재앙으로 주춤했다 해도 놀라울 게 없다. 하지만 어쩌면 빙하기가 정점으로 치닫던 시기에 수렵채집인의 야영지 가장자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던 먹이가 일부 늑대 무리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 모두가 추웠다.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일찍 가축화된 개의 일부 계통이 멸종했다 해도, 개를 곁에 두는 것은 마지막 빙하기의 정점에 수렵채집인의 생존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으리라고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현대 인류가 혹독한 마지막 빙하기를 무사히 지난 반면 네안데르탈인은 그렇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깔끔하고 그럴듯한 설명이긴 한데 그래서 오히려 꺼림칙하다. 너무 간단하지 않은가. 역사는 복잡하다. 가설은 얼마든지 제안할 수 있지만, 그것을 검증할 엄두도 내지 못할 때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개가 일부 수렵채집인 부족들의 생존과 성공을 도왔음을 의심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빙하기 이후로 가축 개의 화석 증거는 유라시아 전역에 나타난다. 8천 년 전 무렵부터는 서유럽에서부터 동아시아에 이르는 광범위한 장소에서 개 화석이 발견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고대 개와 현대 개에서 얻은 최신 유전자 데이터는 단일 기원을 암시하므로 이 모든 홀로세Holocene의 개들이 각 지역의 늑대 개체군에서 따로 가축화되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오히려 개는 이주하는 인간을 따라왔거나, 아니면 인간이 다른 지역에서 데려온 것이 틀림없다.
- 신석기에 인간이 농업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개도 처음으로 유라시아 밖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개는 농업의 확산을 따라갔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개가 등장한 것은 5600년 전 그 지역에 신석기가 시작된 뒤였고, 남아프리카에 도달하기까지는 4천 년이 더 걸렸다. 멕시코의 고고학 유적에 개가 등장한 것은 5천 년 전 무렵으로, 이 역시 최초의 농부가 등장한 시기와 같다. 하지만 남아메리카 남단에 도달한 것은 그로부터 4천 년 뒤였다.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는 아메리 카 대륙에 유럽인이 들어오면서 아메리카 개의 초기 계통들이 완전히 대체되었음을 암시한다. 반면 최근에 이루어진 유전체 전체 조사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지난 5백 년 동안 이주자들과 함께 도착한 유럽 개들이 신세계에 원래 살던 개들과 섞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현대 품종들이 생긴 것은 훨씬 나중이다. 그들은 최신 발명품이다. 그 역사가 유전자에 반영되어 있다. 개의 유전자에는 조상들이 두 차례의 큰 유전적 병목을 통과한 흔적이 있다. 가축화가 시작된 시점에 한 번, 그리고 지난 2백 년에 걸쳐 현대 품종들이 등장 한 시기에 또 한 번이다. 육종가들은 사냥과 목축에 큰 도움이 되는 놀 랍도록 순종적인 개를 생산하기 위해 특정 형질들을 집중적으로 골라냈다. 하지만 선택 육종으로 형질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 그자체가 육종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특정한 모양이나 크기, 색깔, 질감 등을 가진 개들도 육종되기 시작했다. 현대 개 품종들에서 볼 수 있는 형태적 다양성은 여우와 자칼, 늑대를 포함한 갯과의 나머지 동물들을 전부 합한 것보다 훨씬 더 크다.
- 인간과 늑대가 이 행성에서 공존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서로를 피하는 것인 듯싶다. 우리 조상들은 야생 늑대를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그들이 가축이 될 정도로 오랫동안, 하지만 지금의 늑대는 과거보다 더 인간을 기피하는 듯하다. 늑대는 가축화된 개가 됨으로써 여러 모로 변했고 야생 늑대도 변했을 것이다. 야생 늑대를 괴롭히고 사냥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자연선택을 일으키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결국 살아남은 늑대는 인간에게 접근하지 않는 늑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두려움이 많고 우리를 피하는 늑대는 인간이 매개하는 선택의 결과물인 셈이다. 개가 인간이 매개하는 선택의 산물이듯이. 회색늑대와 개의 유전자를 조사하면 개가 된 늑대 계통이 지금은멸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 빙하기가 정점으로 치닫던 무렵은 모든 생물들에게 힘든 시기였으므로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하지만 계통수를 달리 볼 수도 있는데, 그렇게 보면 늑대의 특정 계통은 결코 멸종하지 않았다. 그 계통은 사실 늑대 계통수에서 가장 북적이는 가지, 즉 개다. 유전적으로 말하면 개는 회색늑대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개를 카니스 루푸스Canis nupus라는 회색늑대종 내의 아종으로 명명한다. 즉, 별개의 종canisfamiliaris’이 아니라, 아종 canishutpusfan 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아는 테리어, 스패니얼, 레트리버는 내면은 늑대인 셈이다. 야생의 사촌들보다 꼬리를 더 잘 흔들고 손을 더 잘 핥고 덜 위험한, 훨씬 친근한 늑대 말이다. 농업이 시작되기 수백 년 전에 이미 빵이 중동의 주식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신석기 혁명을 이해하기가 더 쉬워진다. 사람들이 일단 야 생의 곡물을 모아 가공하기 시작하면, 그런 종들 - 보리뿐 아니라 밀 과 그 밖의 곡물들 - 이 작물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한 가지 음식에 의존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얻을 방법이 야생 곡물을 수확하는 것밖에 없다면 리스크가 너무 크다. 일부라도 직접 재배하면 도움이 될 것이 다. 하지만 이는 우리 조상들이 야생식물 재배를 의도적으로 시작했
음을 암시한다. 사실 농업의 시작은 신중하게 세운 계획보다는 우연에 훨씬 더 많은 빚을 졌을 가능성이 높다.


2. 밀
- 야생의 조상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작물화된 곡물의 변화들 중 적어도 일부는 우연히 발생했거나, 적어도 인간 행동의 의도치 않은 결과인 듯하다. 야생 곡물과 작물화된 곡물의 한 가지 중요한 차이는 씨가 달리는 중심축, 즉 (밀의 이삭을 이루는) 이삭 가지의 힘에 있다. 야생형의 이삭 가지는 잘 부러진다. 다시 말해, 익으면 씨가 든 작은 이삭들이 이삭에서 떨어져 바람에 흩어진다. 반면 작물화된 곡물의 이삭은 익은 뒤에도 작은이삭들이 그대로 붙어 있다. 이삭 가지가 질겨서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 이것은 야생풀이라면 심각하게 불리한 형질이다. 씨가 바람에 자유롭게 날려 흩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야생에서라면 이 문제 많은 돌연변이는 자연선택에 의해 신속히 제거될 것이다. 하지만 작물에서 단단한 이삭 가지는 이점이 된다. 만일 대부분의 이삭이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수확한다면 잘 부러지는 이삭 가지를 가진 이삭은 이미 씨의 대부분을 잃은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단단한 이삭 가지를 가진 돌연변이 식물은 작은이삭들 전부를 붙잡고 있다. 아직 달려 있는 씨는 고스란히 타작마당으로 가, 일부는 식량으로 먹히고 일부는 다시 뿌려진다. 결국 단단한 이삭 가지를 만드는 씨와 식물의 비율은 매 세대 증가하게 된다. 이는 자가선택을 하 는 형질의 또 다른 사례다. 농부들은 모든 씨를 붙잡고 있는 식물을 굳이 적극적으로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저 밀의 대부분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이 수확하는 밀 중에는 이삭 가지가 단단한 유형이 많을 테니 말이다. 즉, 이 특정 형질의 확산은 초기 농업 관행의 의도치 않은 결과였을 공산이 크다.
- 초기 농부들이 큰 날알이 달리는 식물을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선택함으로써 낟알 크기가 커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꽤나 합리적인 추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 형질은 우연히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초기 농부들은 개별 낱알의 크기보다는 밭의 크기와 생산성을 키우는 데 집중했을 텐데, 낟알이 커서 모종이 더 왕성하게 자라는 변종은 낟알이 작은 변종과의 경쟁에서 유리했을 것이다. 모종 사이의 경쟁은 바람에 흩어지는 야생종에서는 일어나지 않지만 씨가 촘촘하게 뿌려진 밭에서는 심해질 수 있다. 해가 가면서 밭은 서서히 난알이 큰 변종으로 채워져 농부들을 기쁘게 했을 것이다.
- 괴베클리 테페의 정말 놀라운 점은 그 연대다. 그 유적은 1만 2천년 전에 건설되었으니 농부가 아니라 수렵채집인들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은 신석기 초기의 인류 사회 발달에 관한 이론에 균열을 일으켰다. 기존의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전개되었다.
팽창하는 인류 집단에는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하고, 사람들은 이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농업을 채택한다. 농업은 잉여 식량의 축적을 촉진한다. 소수의 권력자들이 잉여 식량을 통제하면서 계층화된 복잡한 사회가 탄생하고, 이 새로운 권력 구조는 새로운 발명품인 조직된 종교로 더 받쳐진다.
괴베클리 테페는 이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기념비적 골칫거리임이 분명하다. 메소포타미아 고지대의 귀퉁이인 이곳에서, 적어도 하나의 복잡한 사회가 수렵채집인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괴베클리 테페가 전례 없는 노동 분업의 증거를 제공한다고 판단했다. “우리가 관점을 바꿔야 해요. 수렵채집인들은 보통 우리가 아는 방식의 일을 하지 않죠.” 하지만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달랐다. “그들은 채석장에서 일했어요. 기술자들이 생겨나 돌을 운반하고 세우는 방법을 알아내기 시작했죠. 석공 전문가들도 있었는데, 그들의 일은 돌로 조각과 기둥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그에게 괴베클리 테페는 권력과 비전을 가진 지도자를 갖추고 노동력을 조직할 수 있으며 예술가를 지원할 수 있는 사회가 존재했다는 구체적인 증거였다. 그리고 장식이 새겨진 환상 거석은 조직된 종교를 나타낸다고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강력한 상징을 지니며 사원 건설자들을 위한 신화와 의미를 풍부하게 갖춘, 실로 완연한 모습의 종교였다. 괴베클리 테페 이전까지, 조직된 종교가 농업 이전에 존재했을 가능성은 떠올릴 수 없는 것이었다.

3. 소
- 젖은 미세 화석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매우 특징적인 분자들이 존재하고, 그중 하나는 중요한 단서임이 밝혀졌다. 바로 젖의 유청 단백질, 공식 명칭으로 베타 - 락토글로불린-Lactoglobulin이다. 고고학자들에게 중요한 대목은, 베타 - 락토글로불린이 동물 젖에는 존재하지만 인간의 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베타 - 락토글로불린은 세균에 잘 분해되지 않아서 오랫동안 잔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 단백질의 유용한 특징이 하나 더 있는데, 종마다 달라서 소, 물소, 양, 염소, 말의 베타 - 락토글로불린을 구별할 수 있다는 점이다. 2014년에 한 국제 연구 팀이 광범위한 고고학 샘플에서 베타-락토글로불린을 찾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들은 낙농업의 증거가 풍부한 유럽과 러시아의 청동기시대(기원전 3000년) 치아의 치석에서 소, 양, 염소의 베타 - 락토글로불린을 다량 발견했지만, 낙농업의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 서아프리카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치아의 치석에서는 베타 - 글로불린을 찾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훌륭하다. 게다가 이 연구는 그린란드의 중세 북유럽 유적들이 결국 버려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밝혀주었다.
- 다른 연구에서 질소 동위원소비를 조사한 결과, 5백 년에 걸쳐 기후가 악화되어 그린란드의 바이킹들이 가축 식량을 줄이고 바다표범을 포함한 해양 식량원을 늘리는 쪽으로 식생활을 바꾸었으며, 그런 다음 15세기에 이르러 결국 자신들의 거주지를 포기했다고 추측했다. 생선 뼈는 고고학 유적에 잘 보존되지 않지만, 바이킹들은 아마 바다.표범뿐 아니라 물고기도 먹었을 것이다. 과학자이자 저술가인 재레드 다이아몬드 Jared Mason Diamond가 《문명의 붕괴Collapse)에서 말했듯이, 그린란드의 바이킹들은 기존의 식생활을 병적으로 고집하기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했던 듯하다. 그린란드 거주지를 버린 이유가 무엇이었든, 바다에서 나오는 음식을 먹기 싫어서는 아니었다. 바이킹 치아의 치석 분석은 또 하나의 식생활 변화를 밝혀준다. 서기 1000년에 그린란드의 초기 바이킹들은 유제품을 많이 먹었다. 하지만 4세기 뒤 베타 - 락토글로불린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그들은 더 이상 가축 동물을 먹지 않았고, 유제품도 이용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어쩌면 낙농 동물의 몰락이 이 바이킹 거주지의 종말을 앞당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린란드가 버려진 진짜 이유는 악화된 경제 상황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린란드 바이킹은 바다코끼리와 일각고래 상아를 교역했지만, 아프리카산 상아가 공급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상품은 더 이상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상아 시장이 바닥을 치자, 치즈 한 조각조차 얻을 수 없는 장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소, 양, 염소, 돼지는 인간과 협력 관계를 맺으면서 변모했다. 재배되면서 더욱 굵어진 밀 낱알과 달리, 소와 여타 동물들은 더 작아졌다. 그중에서도 소는 이상하게도 양, 염소, 돼지와 달리 - 신석기, 청동기, 철기를 거치며 유독 계속 작아졌다. 게다가 상당히 작아졌다. 고고학자들은 유럽 소의 고대 뼈를 조사해 신석기 동안 소가 얼마나 작아졌는지 측정했다. 유럽에서 농업은 약 7500년 전(기원전 5500년)에 시작되었다. 3천 년 뒤인 신석기 말, 소는 농업이 시작될 때보다 평균 3분의 1가량 더 작았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 농부들이 인위적 교배를 통해 더 작고 다루기 쉬운 동물을 고의적으로 선택했으리라는 결론으로 도약하기 쉽다. 그러나 가축화 초기라면 몰라도, 농부들이 수 세대 수천 년에 걸쳐 계속 해서 점점 더 작은 동물을 선택했을 확률은 낮아 보인다. 그러면 소는 왜 계속 작아졌을까?
- 중유럽의 신석기 유적에서 출토된 고대 소뼈들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크기가 작아질 뿐 아니라 어린 소의 개체수가 증가한다. 이는 목축의 초점이 고기 생산으로 옮겨 왔음을 암시한다. 어린 소는 빨리 자 란다. 3~4년이면 거의 성숙하고, 이때부터는 성장률이 떨어진다. 성
숙한 동물을 계속 살려두어서는 고기를 많이 얻을 수 없으므로, 보통은 동물들이 성숙하기 전에, 혹은 성숙하자마자 도태시킨다. 거주지 주변의 두엄 더미에 어린 뼈의 비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자체로 보면 이것이 소의 크기 축소와 무슨 관계인지 알기 힘들다. 크 기 축소는 성체 소에서 확인된 현상이고, 어린 소는 표본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체에 이르지 못한 뼈의 비율이 높다는 것에서 간파해야 할 사실이 있다. 바로, 송아지를 낳는 암소들도 대체로 완전히 성숙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번식할 수는 있으나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암소들은 무리 내의 성숙한 자매들에 비해 체중이 적게 나가는 송아지를 낳는 경향이 있다. 더 작고 가벼운 송아지는 더 작고 가벼운 소로 자란다. 이는 유럽의 신석기 소떼에서 젖을 짜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고기가 최우선 목적이 되면서 유럽의 소가 신석기 초보다 신석기말에 33퍼센트가량 작아졌다는 뜻이다.
- 선진국에서는 인공수정을 이용해 번식을 엄격하게 통제하면서부터 소 품종들 사이의 교잡 가능성이 사실상 제거되었다. 육종에 대한 이러한 엄격한 제약은 강력한 선택과 함께, 다수의 독립적이고 분절된 개체군으로 구성되는 종을 초래했다. 각 개체군은 유전병과 불임발생률이 높아지고 개체군 전체가 감염병에 취약해지는 등, 동계교배에 내재된 모든 위험에 노출된다. 유전적 변이가 적은 분절된 개체군은 야생에서 멸종 위험이 가장 높은 집단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엄격하게 통제되는 산업 품종이 전통적인 품종보다 더 생산적일 수 있다. 전통적인 품종을 산업 품종으로 바꾸는 것은 농부들에게 경제성 면에서 생각할 필요도 없는 간단한 결정일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한 가축 품종이 멸종하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모든 유전적 유산' 도 사라진다. 유전학자들은 개체군 분절화와 동계교배가 계속될 경우 소의 미래와 인류의 식량 안보에 미칠 위험을 우려하고 있다. 가축 양과 염소에 대한 우려도 있지만, 이런 동물들의 상황은 소와는 다르다. 여러 종이 존재하며 야생종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소를 현존하는 다른 소과 동물과 교배시켜 잡종을 만들 수 있고 그것이 미래에 유용한 유전적 자산이 될지도 모르지만, 소의 야생 조상은 이미 수백 년 전에 멸종했다.

4. 옥수수
- 옥수수는 별로 까다롭지 않다. 옥수수는 식물계의 코즈모포 리턴'인 듯하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곳에 자라는 곡물이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옥수수는 남위 40도인 칠레 남부의 밭에서부터 북위 50도인 캐나다에서까지 자란다. 또한 해발 3400미터인 안데스산맥에서부터 저지대와 카리브해안까지 번성한다. 옥수수의 세계적인 성공 비결은 그 겉모습과 습성, 그리고 유전자의 엄청난 다양성에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세계적 작물인 만큼 그 역사를 풀기는 엄청나게 어렵다. 옥수수가 전 세계로 퍼진 것은 겨우 5백 년 동안의 일이지만,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옥수수가 도입된 경위에 대한 문서 자료는 매우 모호하다. DNA가 추가 단서를 제공하긴 해도, 세계적인 무역과 교환이 옥수수의 유전적 역사를 뒤엉킨 거미줄로 만들어 버림. 옥수수의 세계화는 인간의 역사(탐사 항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무역로, 제국의 확장과 몰락)와 얽히며 그 흥망성쇠를 뒤따랐다.
- 표현형 가소성과 새로운 유전자 돌연변이는 새로운 형질을 만드는 두 가지 중요한 원천으로서 뛰어나고 독보적인' 옥수수의 다양성을 낳는 데 일조한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 에 기여한 또 다른 요인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야생 친척으로부터 받은 약간의 도움이었다. 초기 옥수수는 멕시코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퍼져나가면서 산지에 사는 테오신트의 아종인 제아 메이스 멕시카나와 교잡했다. 유전학 연구 결과, 고지대 옥수수가 가진 게놈의 약 20퍼센트가 멕시카나로부터 왔음이 밝혀졌다. 작물화된 보리가 시리아사막에서 자라던 야생 변종의 가뭄 저항성을 가져온 것처럼, 옥수수도 확산하는 동안 야생의 친척종들과 교잡함으로써 현지의 유전적 ‘지식'을 최대한 활용했던 셈이다.
- 옥수수는 멕시코에서 고지대와 저지대의 개별 경로를 통해 과테말라로, 그런 다음 더 남쪽으로 이주한 듯하다. 그리고 마침내 7500년전 남아메리카 북단에 도착했다. 이어 4700년에는 브라질 저지대에서 재배되고 있었고, 4천 년 전에는 안데스산맥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옥수수는 남아메리카 북단에서부터 북쪽의 트리니다드섬과 토바고섬, 카리브해의 다른 섬들로 퍼져나갔다. 북아메리카로의 확산은 훨씬 늦어서, 2천 년 전에 와서야 남서쪽 모퉁이에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곧장, 단 2백 년 만에 북동쪽으로 퍼 져나가 오늘날의 캐나다에 해당하는 지역까지 이르렀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접촉이 시작될 때쯤에는 이미 엄청나게 다양한 옥수수 변종들이 생겨나 멕시코에서부터 북동 아메리카까지, 카리브해 연안과 브라질 계곡에서부터 안데스산맥 고지까지 모든 지역에서자라고 있었다. 그 모든 형태의 옥수수는 각기 매우 잘 적응되어 있었고 변이가 풍부한 작물이었다. 즉,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해변에 발을 디디자마자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하드자족과 함께 잠시 시간을 보냈던 경험은, 뭐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의 생활 방식과 나 자신의 생활 방식에 대해 깨우침을 주었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추는 것에서부터 식습관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문화를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 우리는 과거와 다른 현 재의 문화를 장밋빛 안경을 통해 보기 쉽다. 하지만 '서구' 세계의 우리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전통적 생활 식 역시 전부 장밋빛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그들은 가족과 공동체에 중심을 두었다. 그들의 삶에는 '직업'이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실업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이에겐 각각의 역할이 있었다. 아이들도 한 부분을 담당했다. 자식을 낳는 것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해를 끼칠 수있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

5. 감자
- - 광합성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으며, 각각은 서로 다른 화학 경로를 이용한다. 나무와 관목이 이용하는 형태의 광합성은 광합성의 최초 산물로 탄소원자 세 개를 가진 분자를 만든다. 창의력 넘치는 식물학자들이 그런 식물을 'C3 식물'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다음으로, 풀과 사초 같은 식물들은 약간 다른 광합성을 이용해 탄소 원자가 네 개인 분자를 만든다. 이 식물들은 뭐라고 부를까? 물론 C4 식물이다. CA 경로는 물 분자를 더 효율적으로 이용할 뿐 아니라(건조한 환경에서 유용한 적응이다), 그 경로를 이용하는 식물은 보다 무겁고 안정한 동위 원소인 탄소-13을 더 많이 포획한다. 따라서 C4 식물들에는 탄소-13 이 비교적 풍부하다. 만일 한 동물이 C4 식물(예컨대 사초의 뿌리와 구경이 여기에 포함된다)을 많이 먹는다면, 그 동물의 뼈에도 탄소-13이 풍부해질 것이다. C3 식물과 C4 식물 사이의 이런 차이를 이용해 인류학자들은 유용한 결과를 얻어냈다. 침팬지의 식생활은 주로 잎이 무성한 C3 식물들로 이루어지므로 그들의 뼈에는 C-13이 풍부하지 않다. 약 450만 년전 우리의 초기 호미닌 조상들은 침팬지와 비슷한 C3 식물 위주의 식생활을 한 듯하다. 그러다 기후가 변동을 거듭하던 4백만 년 전~1백만 년 전, 그들이 거주하던 지역은 대체로 더 건조한 초원이 되어갔다. 우리는 약 350만 년 전에 그들이 C3 식물과 C4 식물을 함께 먹고 있었음을 알고 있다. 아마 C4 식물로는 대체로 녹말이 풍부한 뿌리와 덩이줄기를 먹었을 것이다. 땅 밑에 감추어져 있지만 어디에나 존재한 그 식량 덕분에 고대 조상들은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환경에서도 인구를 불리며 번성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어 250만 년 전에 식생활이 둘로 갈라지게 된다. 매우 튼튼한 치아와 턱을 가지고 있는 일부 호미닌은 주로 C4 식물을 먹었다(아마 계절에 따라 풀잎, 씨, 사초, 구경 등을 먹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가 속한 호모속의 초기 구성원들을 포함한 다른 호미닌들은 C3 식물과 C4식물을 계속 함께 먹었다. 정기적인 육식이 우리 조상들의 뇌를 더 크게 진화시키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했다고들 하지만, 최근 몇몇 연구자들이 식물 식량, 특히 덩이줄기처럼 녹말이 풍부한 식물 식량의 역할이 그동안 간과되었음을 주장하고 나섰다. 하나는 문화와 관련이 있고 하나는 유전자와 관련이 있는 두 가지 중요한 발전이 녹말에 묶인 에너지를 꺼내 쓰는 데 엄청난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문화적 발전은 요리의 탄생이고 유전적 발전은 녹말을 분해하는 침 속 효소를 생산하는 유전자의 중복이었다. 이 유전자 중복은 1백만 년 전 이후의 어느 시점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침 속 아밀라아제는 날것인 녹말보다 조리된 녹말에 훨씬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이 유전자 사본의 수가 늘어난 것은 요리가 도입된 직후였을 것이다
- 작물화가 어디서 처음 시작되었든, 그 사건은 야생 감자를 인 간에게 훨씬 더 유용한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야생 감자와 작물 감자의 가장 인상적인 차이는 덩이줄기의 크기와 기는줄기의 길이에 있다. 기는줄기란 새로운 식물을 싹 틔우기 위해 수평으로 뻗는 가느다란 줄기를 말한다. 야생 감자는 기는줄기가 매우 긴데, 이는 새로운 식물이 부모 식물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증식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야생 감자는 덩이줄기가 작다. 작물화는 기는줄기의 길이를 단축 시키고 덩이줄기의 크기를 키웠다. 두 가지 특징 모두 야생에서는 적 응도를 떨어뜨리지만 수확을 쉽게 만든다. 밀의 질긴 이삭 가지 형질 과 비슷하게 야생식물에는 극도로 불리한 특징이지만, 인간과 협력 관계를 맺은 식물에게는 요긴하게 쓰이는 셈이다. 작물화된 감자에는 또한 일부 야생 감자의 맛을 매우 쓰게 만들고 심지어는 독성을 띠게 하는 글리코알칼로이드도 적다.
- 북유럽에서 감자를 늦게 받아들인 데는 금기와 미신 외에 더 세속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순수하게 기능적인 관점에서 보면, 로마 시대 이래 유럽 전역에서 시행된 삼포식 돌려짓기 제도에 감자를 끼워 넣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다른 농부들과 공유하는 큰 밭에서 농부 개개인이 어느 한 뙈기만을 바꾸려면 눈치가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은 감자 확장을 가로막고 있던 문화적 장벽들이, 폭삭 내려앉은 것까지는 아니었을지라도 점차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종교와 정치의 흥미로운 합작으로 감자가 남유럽에서 북쪽과 동쪽으로 진출한 것이다. 17세기 말, 위그노와 여타 개신교 집단이 프랑스에서 쫓겨나면서 가는 곳마다 은세공, 조산술, 감자 재배 같은 다 양한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가져갔다. 18세기 말에는 칠년전쟁의 여파속에서 감자의 또 다른 이점이 입증되었다. 이 작물은 다른 곡물들과 달리 땅속에 있기 때문에 불에 타고 짓밟힌 밭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 프랑스군에서 약사로 일했던 앙투안 오귀스탱 파르망티에r는 프로이센에 포로로 잡혔을 때 감옥에서 감자를 먹었다. 감자를 가축 사료로만 생각했던 그는 이런 대우에 좌절하기보다는 감 옥 식사로 나오는 감자의 영양적 가치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1763년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는 감자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명망 높은 사람들을 초대해 감자 위주의 만찬을 열었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감자 꽃다발을 선물했다. 하지만 프랑스 요리에 이 보잘것없는 덩이줄기의 자리를 확고히 자리매김한 계기는 흉작, 혁명, 기근 같은 연속된 악운이었다. 파르망티에의 개척자 정신은 오늘날 이런저런 형태로 감자를 포함하는 많은 프랑스 요리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지금 파리에 있는 그의 무덤은 그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그 식물에 둘러싸여 있다.
- 다른 아메리카산 수입 작물인 옥수수와 함께 감자는 유럽 인구의 놀라운 증가에 기여했다. 1750년에서 1850년까지 1백 년 사이에 유럽인구는 1억 4천만에서 2억 7천만으로 거의 두 배나 늘어났다. 잉카제 국 건설자들에게 열량을 제공했던 감자는 이제 중유럽과 북유럽 국가 들에서 성장하는 인구에 에너지를 제공하고 도시화와 산업화의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경제성장을 견인했다. 증기로 돌아가는 산업혁명 시대 기계들이 석탄을 먹고 일하는 동안, 노동자들은 값싸고 믿을 수 있고 양이 풍부한 감자를 먹고 일했다. 이어 유럽 정치권력의 균형은 따뜻하고 화창한 남쪽 나라들에서 춥고 칙칙한 북쪽 나라들로 옮겨가기 시작했는데, 18세기와 19세기에 유럽 열강이 부상한 이면에는 여러 복잡한 요인들과 함께 어두컴컴한 땅 밑의 감자도 한몫을 했다. 그리 고 20세기에 찾아온 위기 때도 감자는 군대 식량으로서 제 몫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용 배급품 중에는 안데스 지역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용했던 건조 감자가 있었다.
- 수렵채집 생활 방식은 농경에 비하면 불안정하다. 수렵채집인은 자연에 의존하는 반면, 농부는 수확량을 제어하고 남은 식량을 비상시를 대비해 저장할 뿐 아니라, 잉여 농산물로 부와 권력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연을 통제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심지어는 우리의 착각일수도 있다. 자연의 기본 방식이 변화인데도, 우리는 생물을 고정시켜 변화를 막으려 하고 있다. 우리는 재배종의 진화를 제한함으로써 재배종을 매우 취약하게 만든다.

6. 닭
- 닭 생산이 거대한 글로벌 산업으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전례 없는 규모의 선택 육종뿐 아니라, 육종에 대한 매우 엄격한 규제가 필요했 다. 오늘날 닭 육종과 닭 사육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닭이 낳은 알 을 암탉이 아닌 기계로 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이런 완전한 분업 을 가능하게 한다. 닭 농장주들은 흔히 닭을 대규모로 사육하지만 닭 을 육종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 일은 육종 기업이 한다. 그리고 아비 아젠Aviagen과 코브-밴트리스Cobb-Vantress라는 단 두 개의 거대 다국적기 업이 육종 시장을 지배한다. 이 회사들은 종자닭(순계) 집단을 매우 엄격하게 통제한다. 그들이 보호하는 순계에서 3대째에 이르러 생산된 '종계(부모계)를 육계 육종 농장에 팔면, 그곳에서 개별 유전 계통의 닭들을 함께 교배해 최종 잡종을 만든다. 그 병아리들은 육계 사육 농장으로 보내진다. 우리가 먹는 방목 유기 닭조차 이런 산업적인 육계 육종사에서 온 것일 수 있다. 전통적인 유기농 시장을 위해 천천히 자라는 닭을 전문으로 취급 하는 더 작은 육종 회사들이 몇 곳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닭은 빨리 자라서 단 6주 만에 도축된다. 사실상 우리는 너무 커진 병아리를 먹는 셈이다. 심지어 뼈끝이 연골에서 뼈로 변하기도 전의 병아리 말이 다. 순계인 증조할머니 닭 한 마리가 3백 만 마리의 육계 후손을 볼 수 있고, 이들은 성체가 되지 못한다.
- 동물의 대사뿐 아니라 행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호르몬은 가축 닭의 행동에서 필수적인 한 측면에 기여했다. 바로 모성 본능의 완 전한 상실이다. 이는 야생에서라면 분명 생존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 다. 알을 낳은 뒤 알을 두고 가버리는 암탉은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로 전달할 확률이 낮다. 하지만 가축 닭에서는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알 낳기를 멈추고 알을 품는 암탉은 달걀 생산에 득이 될 리 없다. 야생의 붉은산닭은 1년에 달걀을 열 개도 낳지 못하는 반면, 오늘날의 가축화된 산란계는 3백 개를 낳을 수 있다. 알을 품는 본능이 어떤 식으로든 닭에게서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닭 농장의 농부들이 인공부 화 기술을 개발했을 때 비로소 가능해졌다. 최초의 달걀 부화기는 오래전,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닭의 모성 행동이 눈에 띄게 사라진 것과 관련이 있는 유전적 변화는 훨씬 더 최근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밀과 옥수수의 비탈립성 이삭 가지처럼 알 품는 본능의 상실도 야생에서는 성공적인 번식을 방해하지만, 가축화에서는득이 된다. 유전학자들은 이 행동 변화의 유전적 바탕을 확인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들은 모성 본능에 큰 차이를 보이는 두 품종의 닭에서 유전체를 서로 비교했다. 하나는 알 품는 행동을 상실한 산란용 순계로 잘 알려져 있는 화이트 레그혼White Leghorn 품종이고, 다른 하나는 알 품기를 좋아하는 실키silkie 품종(오골계)이다. 유전학자들은 두 품종의 유전체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두 부위를 찾아냈다. 하나는 5번 염색체에, 다른 하나는 8번 염색체에 있었다. 두 부위 모두, 이번에도 갑상샘 호르모 시스템과 관련이 있었다. 게다가 5번 염색체상의 부위는 TSH 수용체 유전자가 있는 곳이다. 이 유전자의 몇 가지 변화가 1천 년 전 닭의 계군들 사이로 퍼져나갔고, 지금은 산란용으로 육종된 닭과 육계로 육종된 닭 모두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TSH 수용체 유전자에는 더 최근에 일어난 변화도 있는 듯한데, 이는 화이트 레그혼과 실키 같은 현대 품종들에서 나타나는 달걀 생산과 모성 행동의 차이를 설명해준다. 결과적으로 닭의 갑상샘호르몬 시스템을 조작함으로써 한 번의 유전적 변화로 두 가지 표현형 변화를 일으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둔 셈이다. 이번에도 우리는 한 특정 형질에 대한 선택이 또 다른 형질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엔 하나의 유전자가 포동포동한 살집과 산란 행동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유전자, 몸, 행동에 일어난 비교적 최근의 변화들은 가축화가 실제로는 하나의 단독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임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유전자 편집 기술의 도래는, 교황 칙령의 힘을 빌려야 했던 10세기보다 훨씬 빠르게 유용한 변화가 도입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7. 쌀
- 벼의 작물화가 시작된 시점은 중요하다. 같은 시점에 아시아의 반대편 끝에서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자라는 야생 곡류 호밀, 보리, 귀리, 밀를 경작하기 시작했다. 1만 1천 년 전~8천 년 전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자라던 그런 곡류들은 주곡이 되었고, 조와 쌀이 극동지역에서 그랬듯이 야생 풀에서 작물로 변모했다.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절묘하다. 아시아의 정반대 쪽에사는 두 집단의 수렵채집인들이 동시에 야생 풀을 좋아하게 되고 그 풀에 점점 더 의존하다가 결국에는 그것을 작물로 경작하게 되었다. 인간 행동에 일어난 이런 동일한 변화들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 65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양쯔강 계곡에서 동시에 작동한 뭔가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뭔가'는 기후변화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지막 빙하기가 절정에 이른 춥고 건조했던 시기, 야생 벼는 동아시아 열대지방의 습한 레퓨지아에서만 자랐을 것이다. 그러다 약 1만 5천 년 전부터 기온이 올라가면서 대기 중에 증가하는 이산화탄소에 힘입어 야생 벼가 퍼져나간다. 빽빽하게 자라고 낟알이 촘촘하게 맺히는 야생 곡류는 아시아 전역의 수렵채집인들에게 든든하고 수확이 용이한 식량을 제공했다. 유리한 기후 조건 아래 자라고 있던 야생 벼와 조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매력적인 식량 후보였을지도 모른다. 아마 옥수수의 경우처럼, 작물화 과정에서 모든 개체군들이 갖게 되는 형질들을 이미 얼추 지니고 있던 식물 낟알이 더 크고 곁가지가 적은 식물은 이미 훌륭한 식량원처럼 보였으며 수확하기도 쉬웠으리라. 하지만 약 1만 2900년 전, 춥고 건조한 시기가 1천 년 이상 지속된 신드리아스기가 왔다. 야생 식량의 감소에 직면한 사람들은 필사적으 로 자원을 통제하려 했을 테고, 이미 의존하게 된 야생 풀을 경작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신드리아스기 직전에 인구가 증가해 있었기에, 기후가 악화하기 시작했을 때 자원 압박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서아시아의 밀과 동아시아의 쌀, 그리고 아마도 중앙아메리카의 옥수수까지, 모두 신드리아스기를 계기로 인류와 손을 잡고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동안 이어지는 동맹을 맺었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의존할 수 있는 자원인 곡류는 식생활에서 더 중요해졌고, 결국에는 주곡이 되었다. 경작은 그다음이었을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관과는 매우 다른 관점이다. 독창성과 창의력에 힘입은 승리의 전진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일. 어려운 시기에 처해 어쩔 수 없이 생활 방식을 바꾸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순응한 사람들, 아시아의 정반대쪽에서 동시에 곡류가 주곡이 되고 그런 다음 경작이 이루어진 상황도, 선택이 아니라 기후 악화가 가져온 필연으로 본다면 충분히 납득이 된다.
- 콜럼버스의 '발견의 항해’ 이후, 작물화된 벼는 대서양 교역의 일부
가 되어 구세계에서 신세계로 건너갔다. 오늘날 열대 국가에 거주하
는 라틴아메리카인들에게 쌀은 설탕 다음으로 중요한 단일 열량 공
급원이다. 쌀과 콩의 조합은 카리브해 지역의 요리에서 특히 상징적
이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만, 둘의 제휴는 비교적 최근에 시작되
었다. 두 재료를 섞은 요리는 겨우 몇 백 년 전의 발명품으로 세계화의 초기 요리'로 불렸다. 하지만 기본 개념인 풀의 씨와 콩을 섞는다는 생각은 농업이 시작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있다. 두 음식은 맛과 질감에서 서로를 보완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을 한다. 바로 서로의 결핍을 벌충하는 것이다. 둘의 결합은 인체가 필요로 하지만 만들 수는 없는 모든 아미노산 단백질의기본단위 - 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단백질 꾸러미를 창조한다.

8. 말
- 그건 다른 존재와의 아주 특별한 동반자 관계였다. 인간과 말은 수 백 년에 걸쳐 서로를 알아가고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알아내고, 신뢰를구축했다. 이 관계는 말의 타고난 성향, 그들의 본성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뭔가에 의존하는 듯도 하다. 즉, 그들도 개와 마찬가지로 종을 뛰어넘는 동반자 관계를 적극적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타고나기를 사교적인 생물이다. 우리가 가는 도중에, 또는 야영지에 멈출 때마다 조리타는 다른 말들에게 가까이 가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출발 준비를 할 때는 다른 말들을 가볍게 밀기도 했다. 머리로 그들의 옆구리와 어깨를 밀고 코를 비볐다. 다른 말들도 조리타에게 똑같이 했다. 우리는 말 몇 마리를 야영지에 묶어둔 채 떠났는 데, 산을 내려와 야영지로 돌아왔을 때 조리타는 그들을 보자마자 신 이 나 히이잉 하고 울었다. 그들도 똑같이 응답했다. 누가 봐도 서로를 다시 만나 기뻐하는 행동이었다.
- 소 치는 사람들은 야생말을 아직은 길들이지 않고 평소와 같이 사냥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앤서니David Anthony는 얼음장 같은 기후가 말을 길들이게 된 동인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소와 양의 경우, 눈 속에서 먹이를 파먹는 일에는 젬병이다. 눈 위에 얼음이 덮이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물을 얻기 위해 얼음을 깨지도 못한다. 하지만 말은 발굽을 이용해 이 모두를 한다. 말은 차가운 초원에 잘 적응된 생물이다. 앤서니에 따르면, 인류는 6200년 전~5800년 전 기후가 나빠졌을 때 소떼가 혹독한 겨울을 헤쳐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고 스텝의 말과科 동물을 잡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가능성으로, 말을 사냥하는 문화에서 자연스럽게 말을 길들이게 되었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동안 말을 사냥해왔고, 그래서 말을 잘 이해했던 사람들이 다른 야생말을 사냥하려는 목적으로 말을 잡아서 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 너무 의도적이고 너무 전략적인 설명 같다. 야생말의 등에 처음 올라탄 이들은 그동안 상상도 못했던 일, 바보 아니면 용감한 자만이 할 수 있었을 이 일을 해보라고 서로를 부추긴 10대들이었음이 틀림없다.
- 말을 탐으로써 일어난 진전은 말의 가축화만이 아니었다. 기마를 통해 인간은 다른 동물들을 훨씬 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한사람이 걸어서 다니고 개의 도움을 받을 때 2백 마리의 양을 기를 수 있다면, 말을 타고 개의 도움을 받는 경우엔 5백 마리를 통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훨씬 더 넓은 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영역 확장은 분명 목축인들 사이에 무력 충돌을 유발했을 것이고, 따라서 동맹을 맺거나 선물을 주는 것이 중요해졌을 것이다. 고고학 기록에 구리와 금 으로 만든 보석이 급증하는 것은 사람들이 전과 달리 지위를 추구하 고 부를 과시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랐다. 바로 이 시점에 마제석기인 전곤도 출현하기 시작하는데 그중 일부는 말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기마와 전투가 초기 단계부터 밀접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식 기병대는 약 3천년 전 철기시대에 와서야 출현하지만, 다른 부족의 동물을 훔치기 위한 마상 습격과 내전은 말을 타기 시작함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 유전자분석은 진정한 말의 가계도를 복원하고 그 연대를 밝히는 이을 가능하게 했다. 가축 말의 야생 조상들은 가축화되기 훨씬 전인 약 4만 5천 년 전, 프르제발스키 말의 조상들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계통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계통이 갈라진 뒤에도 어느 정도의 이종교배는 계속되었다. 상호 유전자 이동의 증거가 오늘날의 유전체에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종교배의 대부분이 일어난 시점은 오래 전인 약 2만년 전으로, 마지막 빙하기가 정점에 이르기 전이었다. 하지만 빙하기 이후에도 프르제발스키 말의 유전자가 가축 말의 조상들로 일부 유입 되었으며, 심지어는 가축화 이후까지도 유전자 이동이 계속되었다. 더 나중인 20세기 초반에는 거꾸로 현대 말에서 프르제발스키 말로 유전자가 이동한 증거가 존재하는데, 가축 말 유전자가 프르제발스키 말로 유입된 이 마지막 사건은 인간이 프르제발스키 말을 기르며 포획상태에서 교배시키기 시작한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두 종류의 말 집단이 실제로 교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둘은 별개의 종으로 간주될 만큼 형태적으로나 유전적으로나 뚜렷이 구분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염색체 개수도 다른데, 염색체 개수 차이는 흔히 이종교배를 가로막는 완벽한 장벽으로 간주된다. 가축 말은 예순네 개의 염색체(서른두 쌍)를 가지는 반면, 프르제발스키 말은 예순여섯 개(서른세 쌍)를 가진다. 포유류의 난자 또는 정자 가 만들어질 때 정자와 난자에는 몸의 다른 세포들에 있는 유전물질의 절반만 들어가게 되고, 수정 시 난자의 유전물질이 정자의 유전물질과 결합해 다시 완전한 한 벌을 만든다. 난자에서 온 각 염색체가 정자에서 온 짝과 쌍을 이루어야 수정란이 분열을 시작해 배아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 가축 말과 프르제발스키 말이 짝짓기하면, 수정란은 서른두 개짜리 염색체 한 벌과 서른세 개짜리 염색체 한 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식으로든 (심지어 유전학자들조차 깜짝 놀라는 데) 염색체들은 쌍을 이룬다. 쌍을 이루지 못하면 생식력을 갖춘 자손 이 태어날 수 없다. 그리고 현대 가축 말과 프르제발스키 말의 유전체에 남겨진 이종교배의 흔적들은 그 자손들이 생식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후대를 생산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말과 종들 사이에서 탄생한 잡종은 잘 알려져 있다. 버새는 수말과 암탕나귀 사이에서 탄생한 잡종이다. 노새는 반대로 암말과 수탕나귀 사이의 잡종이다. 버새와 노새는 대개 불임이지만, 이따금씩은 그들도 번식에 성공한다. 당나귀가 서른한 쌍의 염색체를 가지고 말이 서른두 쌍의 염색체를 가진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역시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말과 종의 유전체에는 훨씬 더 놀라운 사건의 증거가 들어 있다. 바로, 서른한 쌍의 염색체를 가진 소말리 당나귀와 스물세 쌍의 염색체를 가진 그레비얼룩말 사이에 이종교배와 유전자 이동이 일어난 일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생물학의 작동 방식과 관련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종의 경계에는 유전체학 이전에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구멍이 많은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염색체 개수의 차이조차 우리 생각과 달리 번식의 장벽이 되지 못하는 듯하다.
- 말 소유자들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 적어도 짐작은 하고 있었 을 말의 매혹적인 행동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과학 연구에 의해 이제 막 해명되기 시작했다. 증거들에 따르면 고양이와 개는 신체와 음성 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듯하다. 실제로 개는 어떤 것이 행복한 사람의 얼굴인지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들도 표정을 지을 뿐 아니라 다른 말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최근 한 연구에서는 말들에게 화난 표정, 찡그린 표정, 행복한 표정을 짓는 사람의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웃는 얼굴에 비해 화난 얼굴을 볼 때 말의 심박수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말들이 사람의 감정을 읽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능력을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오래전부터 다른 말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해석할 수 있었던 말들이 가축화된 뒤 인간에 대해서도 똑같이 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말이 인간과 지내며 학습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예컨대 분노를 나타내는 다른 행동 단서들을 화난 사람의 얼굴과 연결 짓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 능력은 그들의 야생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몸짓에서 감정을 유추하는 타고난 성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신중하게 설계된 또 다른 최신 연구에서는, 말이 우리 행동을 해석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행동에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말의 몇몇 몸짓들은 실제로 의도를 가진 의사소통으로 보인다. 실험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먹이가 담겨 있지만 가닿을 수 없는 양동이를 향해 목을 쭉 늘이는 말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들은 인간 실험자를 쳐다본 뒤 양동이를 가리켰고', 그런 다음 다시 실험자를 쳐다보았다. 실험자가 멀리 가버리면 그런 행동을 멈추었으며, 실험자가 가까이 다가오면 시선을 더 자주 교차시켰다. 또한 말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흔드는 몸짓을 이용해 주의를 끌었다. 이는 말들이 의사소통을 원할 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들의 신호를 수신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말들이 가축화되는 단 몇 천 년 사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진화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것이 타고난 능력일 가능성도 낮다. 그보다 말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다른 말들과 그리고 지금은 인간과도 상호작용 할 때 이런 종류의 행동을 학습할 수 있는 유전적 소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즉, 그 행동 자체는 아닐지언정, 행동을 발달시킬 수 있는 성향은 타고난다는 얘기다. 말이 개처럼 사교적인 본성을 가진 동물이라는 것은 말이 또 다른 사교적인 동물과 협력하기에 적합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9. 사과
-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는 작은 열매를 맺는 나무들의 한 계통이 곰이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과가 열리는 새로운 종으로 바뀐다. 작은 사과는 매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소화관을 그대로 통과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나올 경우 성공적으로 발아할 확률이 낮다. 사과안에 박힌 사과 씨는 발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불리하게 생겨먹었나 싶겠지만, 새로운 사과나무가 부모 나무 밑에서 싹을 틔워 부모와 경쟁하는 것을 막는 방편이다. 큰 사과의 경우 씹어 먹을 수 밖에 없으므로 씨가 노출된다. 발아로 가는 필수적인 단계다. 이빨에 깨물려 떨어져 나온 사과 씨는 장을 그대로 통과하고, 그것이 항문으로 나오면 부모에게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장소에서 새로운 나무가 될 확률이 높다. 곰의 항문에서 나온 사과 씨는, 말하자면 비옥한 두엄더미에 실려 숲 바닥에 떨어지는 셈이다. 하지만 곰 배설물이라는 비료가 있다고 감안해도, 숲 바닥은 싹을 틔우는 데 이상적인 환경이 아니다. 다행히 숲속에는 사과 씨를 파묻어줄 다른 대형 포유류가 존재한다. 멧돼지는 흙을 헤집고 휘젓는 위대한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씨 가 성공적으로 발아할 확률을 높인다. 하지만, 갈색곰(그리고 멧돼지)이 중앙아시아의 숲에 사과 씨를 퍼뜨리는 놀라운 일을 해냈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해도, 이 과일이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마침내 전 세계로 흩어지도록 촉진한 것은 인간과 그들의 말이었다.
- 밀과 보리는 서쪽에서, 조는 동쪽에서 중앙아시아로 왔다. 이제는 중앙아시아가 나머지 세계에 선물을 줄 차례였다. 야생 사과나무 숲을 관통하는 원시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하던 사람들과 그들의 말은, 사과를 안장주머니에 넣고 다니거나 먹으며 이를 고향 밖으로 널리 퍼뜨렸다. 따지고 보면 사과나무의 열매는 씨를 퍼뜨리는 수단으로 진화한 셈이다. 사과가 맛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니, 자신의 씨를 널리 퍼뜨리게 하려는 방책이었던 것이다. 인간과 말은 곰만큼이나 사과를 좋아한다. 그리고 말은 곰과 멧돼지의 일을 둘 다 할 수 있다. 사과의 과육을 씨에서 떼어내고 그 씨를 퇴비 더미에 파묻는 일뿐아니라 발굽으로 땅 속에 씨를 박아 넣는 것까지. 이렇게 해서 사과는 자유롭게 꽃가루받이가 되고 자연적으로 씨뿌리기가 이루어지는 묘목으로서 널리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본질적으로 야생식물이었지만, 두 발로 걷고 네발로 걷는 친구들이 그들을 도왔다.
- 접붙이기는 우리가 한 그루 '부모'에게서 수백 그루의 사과를
복제할 수 있음을 뜻한다(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부모가 아니라 일란성쌍둥
이다). 접붙이기에는 다른 이점들도 있다. 만일 씨를 심는다면, 그것이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수년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미성숙한 대목에 성숙한 나무의 접가지를 붙이면 금방 열매가 맺히기 시작할 것이다. 미성숙한 단계를 건너뛰는 것이다. 언제든 새로운 재배종을 대목에 붙일 수 있다. 대목을 신중하게 고르면 나무의 크기에도 영향을 미쳐, 원래는 거대한 나무인 재배종에서 난쟁이나무를 만들 수도 있다. 어떤 대목은 재배하고자 하는 품종에는 없는 유리한 특징, 예컨대 해충 저항성이나 가뭄 저항성을 가져다준다. 게다가 접붙이기는 병든 나무를 살리는 방법으로도 이용된다.
-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근동 지역에서 유럽 전역으로 달콤하고 통통한 재배종 사과가 - 대체로는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아 - 확산된 것을 사과의 최초의 대규모 확산으로 볼 수 있다. 로마제국의 몰락과 함께 과수원은 버려지게 되지만, 서유럽의 경우 사과는 수도원 정원에서 살아남아 12세기에 시토 수도회의 확장과 함께 다시 한번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98년 웨일스의 바드시섬에서, 붉은색 황금사과가 열리는 사과나무 한 그루(아마 그곳 수도원 과수원의 마지막 생존자였을 것이다)가 자라고 있는 것이 발견되어 지금은 다시 재배되고 있다. 한편 동유럽에서는 사과가 8세기 비잔틴제국의 몰락을 딛고 살아남아 이슬람 세계에서 신중하게 관리 재배되고 있었다. 그러다 16~18세기, 유럽 식민주의 국가들이 남북 아메리카와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태즈메이니아에서 재배종 사과를 심기 시작하면서 사과의 두 번째 큰 확산이 일어났다. 1835년 칠레에 상륙한 다윈은 사과 과수원으로 둘러싸인 발디비아 항구를 발견했다. 태즈메이 니아는 훗날 '사과 섬'으로 알려지게 되니, 말하자면 아발론의 대척점 인 셈이다. 사과의 두 번째 '디아스포라'는 온대 전역의 다양한 기후에 적합한 엄청나게 다양한 품종의 사과를 낳았다. 북아메리카에서 사과가 성공한 것은 '야생으로의 회귀'가 수반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야생으로 돌아 간 사과는 씨에서 묘목이 자라났고, 그런 다음에 혹독한 겨울을 나야 하는 새로운 서식지에서 발육이 어려운 개체들이 자연선택에 의해 제거되었다. 자연선택의 체질을 통해 새로운 변종들이 등장한 한편, 재배 품종들은 아메리카 토종 꽃사과들과의 교잡으로 현지의 유용한 적응을 가져왔다. 사과는 새로운 서식지에 맞게 자신을 개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과가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 묘목에 대한 자연선택이 다시 한 번 이루어진 결과, 우리가 아는 현대 재배 품종들이 19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 사과의 다양성은 현대 재배종에서는 비록 억제되어 있지만, 다른종에 비하면 여전히 인상적인 수준이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식물학 탐사 보고서들은 바빌로프가 1929년 알마아타 주변 과수원들을 방문했을 때 내린 결론이 사실임을 확인해주는 듯 보였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먹는 재배품종 사과의 이 엄청난 다양성이 모두 카자흐스탄의 고대 과수원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10. 인류
- 수만 년 동안 호모 사피엔스는 대체로 아프리카 대륙에 한정되어 살았지만, 그런 다음 그 집단은 범위를 확장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최근에 이루어진 매우 포괄적인 유전체 전체 조사는 현생인류가10만 년 전에서 5만 년 전 사이에 일어난 한차례의 대이주로 아프리카를 빠져나와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로 퍼져나갔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아프리카를 떠난 뒤 개척자들은 갈라졌다. 하나의 흐름은 동쪽으로 향해 인도양 해안을 따라 퍼져나가 결국 동남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에 도달했다. 또 하나의 흐름은 북쪽과 서쪽으로 향해 서아시아와 유럽으로 갔다. 동쪽으로 간 이주자들은 아마 훨씬 더 이전에 일어난 이주 때 아프리카에서 나와 오스트레일리아와 파푸아뉴기니까지 도달한 현생인류의 자손들과 만났을지도 모른다. 현재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화석 기록이 너무 적어서, 초기에 동쪽으로의 이주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된 유럽 토착민인 네안데르탈인과의 교잡 시점은 5만 년 전~6만 5천 년 전으로 추정된다. 현생인류가 아프리카 밖으로 확산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이다. 비아프리카인들은 평균 2퍼센트 정도의 네안데르탈인 DNA를 가지고 있는 반면, 아프리카 계통 사람들의 유전체에는 네안데르탈인 DNA가 거의, 혹은 아예 없다. DNA 검사 결과, 나에게는 2.7퍼센트의 네안데르탈인 DNA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나는 '순혈'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다. (아무도 순혈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다. 실제로 종과 아종의 '순혈성'이라는 개념은 환상이요, 현대 유전학이 마침내 잠재운 19세기의 유물이다.) 동아시아인은 대체로 서아시아인이나 유럽인보다 약간 더 많은 네안데르탈인 DNA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추측해볼 수 있다.
첫째는 동아시아인의 조상들이 서유럽인 집단에서 갈라져 나온 뒤 네안데르탈인과 다른 집단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교배했을 가능성이다.
둘째, 우리는 네안데르탈인 DNA가 현생인류 유전체에 처음 들어온 뒤로 약한 자연선택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서쪽 집단과 동쪽 집단 모두의 조상들은 애초에 네안데르탈인에게서 이입된 같은 양의 DNA를 가지고 있었고, 그런 다음 자연선택이 서유라시아인 유전체에서 더 많은 양을 제거했을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서쪽 집단에 네안데르탈인 DNA가 적은 것은 네안데르탈인 DNA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북아프리카 이주 집단들과 섞임으로써 일어난 희석 효과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현생인류 조상들과 엮인 것은 네안데르탈인만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 태평양 남서쪽 멜라네시아의 섬들에 사는 현대인의 유전체에서 또 다른 구인류 집단과의 교잡 흔적이 발견된다. 멜라네시아인 유전체 DNA 중 3~6퍼센트는 또 다른 유형의 조상에게서 온 것이다. 그 조상은 시베리아의 데니소바 동굴Denisova Coin에서 나온 손가락 뼈 한 점과 치아 두 점으로만 알려져 있는 종이다. 화석 증거가 너무 적어서 우리는 이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뼈와 치아에서 추출한 고대 DNA를 통해 그들이 현생인류도, 네안데르탈인도 아니라는 점만은 알 수 있다. 이 사람들에게 그 들만의 종명을 부여하기에는 화석 증거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현재로 서는 그들은 그냥 '데니소바인' 이라고 부른다. 현생인류와 데니소바인 사이의 교잡은 아마 오스트레일리아와 태평양의 섬들로의 이주가 있기 전에, 아시아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한편 아프리카 내 다른 미확인 구인류 종과의 교배를 암시하는 증거도 존재한다. 오늘날의 아프리카 유전체에는 다른 고대 인류들에 대한 기억이 새겨져 있다. 비록 그 유전자 유령들과 연결 지을 만한 화석 증 거는 아직 없지만 말이다.
- 흰 피부가 북쪽 지방의 햇빛 부족에 대한 적응으로 진화했다는 비타민 D 가설은 설득력 있게 들린다. 오늘날 영국과 북아메리카에서 피부가 검은 사람들이 피부가 흰 사람들보다 비타민 D 결핍에 더 잘 걸린다는 관찰 사례는 분명 이 가설을 뒷받침해준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을 대상으로 측정한 비타민 D 수치는 가설대로 착착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비타민 D 수치와 햇빛 노출을 추적한 연구들은 예상치 못한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았다. 예측한 대로 햇빛에 대한 노출이 증가할수록 (어느 정도까지는) 비타민 D 수치가 증가했다. 옷으로 몸을 덮으면 혈중 비타민 농도가 낮아지는 것도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얇게 바른 자외선 차단제가 일광 화상은 막아줘도 비타민 D 생산을 줄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은 검은 피부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뜻밖에도, 같은 양의 햇빛에 노출되었을 때 비타민 D 생산이 촉진되는 정도는 피부가 검은 사람들과 흰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이 연구는 분명 피부가 검은 사람들도 피부가 흰 사람들만큼이나 효과적으로 비타민 D를 만들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새로운 결과는 언뜻 인간의 피부색 진화에 대한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 인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설명이 필요한 몇 가지 관찰 사례가 아직 남아 있다. 토착민의 피부색은 실제로 북쪽에서 더 하얗고, 북쪽 나라들에서는 예상대로 피부가 검은 사람들이 비타민 D 결핍을 더 많이 겪는 경향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관찰 사례는 '진화적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을 초래한다. 특정 돌연변이가 이점을 줄 때만 진화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은 거의 중립적인 돌연변이가 '유전적 부동'이라는 과정을 통해 개체군 내로 퍼지면서 진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것은 사실상 무작위 과정으로, '우연'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의 조상들이 북쪽으로 이주할 때 일어난 일을 짐작해 보면 대략 이렇지 않았을까. 열대에서 일광 화상과 피부암을 막아주므로 자연선택 된 검은 피부가 더 이상 그렇게 강력한 선택을 받지 않게 되었을 것이고, 그런 다음 더 흰 피부를 만드는 돌연변이가 우연히 발생했을 때 제거되지 않고 유전적 부동을 통해 퍼져나간 것이다. 실제로 적도에서부터 북쪽 위도로 갈수록 피부색이 일정한 비율로 밝아지는 것은 아니며, 밝은 피부색은 - 아마 훨씬 나중에 유럽과 아시아의 극북 지역 집단들에서만 진화했다. 유럽과 아시아의 나머지 지역은 위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하다.
- 약 1만 1천 년 전 서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농업이 거의 동시에 출현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을 것이다. 세계적인 기후변화가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사람들과 초원에 영향을 미쳤다. 1만 5천 년전부터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하면서 식물 생산을 촉진했다. 야생 곡식이 저절로 밭을 이루어 인간은 줍기만 하면 되었다. 그 런 다음 1만 2900년 전에서 1만 1700년 전까지 이어진 신드리아스기 동안 기후가 악화되었다. 사냥꾼이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이 많아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쉽게 딸 수 있는 열매와 딸기는 얼마 되지 않았다. 수렵채집인은 예비 자원에 기댔을 것이다. 채집하기 어렵지만 열량이 풍부한 풀의 씨앗들이 그중 하나였다. 서쪽에서는 귀리, 보리, 호밀, 밀을 먹었고, 동쪽에서는 기장, 조, 쌀을 먹었다. 나투프인들이 사용한 낫과 돌절구처럼 수확의 효율을 높이고 딱딱한 씨를 가루로 빻는 도구는 작물화와 농업 이전에 생겼다. 기후가 좋아지기 시작할 무렵에는, 곡물에 대한 의존이 이미 원시 농업으로 발전해 있었다. 이러한 초기 작물화 중심의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메소포타미아의 광대한 '농업의 요람'은 서유라시아 신석기의 시조 작물들을 제공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의 비옥한 땅에서 최초의 작물인 콩, 렌틸콩, 비터베치, 아마, 보리, 엠머밀, 일립계밀이 나왔다. 황허강과 양쯔강 주변의 땅에서는 조, 쌀, 대두가 나왔다. 하지만 그 밖에도 전 세계의 많은 다른 장소에서 작물화가 시작되었다. 신드리아스기 말엽, 아프리카의 남쪽 절반에 살던 사람들이 북쪽으로 이주해 비옥한 녹색 사하라를 점유했다. 그들은 사냥한 동물들과 더불어 과일, 덩이줄기, 곡물을 먹고 사는 수렵채집인들이었다.
- 1만 2천 년 전 이래로 맷돌을 사용해왔던 그들은, 곧이어 토종 수수와 진주조를 경작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하라의 농업은 약5500년 전 계절풍이 남쪽으로 이동해 비옥했던 땅을 사막으로 바꾸었을 때 전멸했다. 사탕수수는 약 9천 년 전 뉴기니에서 작물화되었고, 테오신트는 동시대에 메소아메리카에서 옥수수로 작물화되었다. 찾으면 찾을수록 더 많은 작물화 중심이 나타나는 듯하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매혹적이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신석기의 다른 요들로부터 시선을 빼앗는다. 바빌로프는 일곱 개의 작물화 중심을 찾아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전 세계에 10여 곳의 작물화 중심이 있다고 상정했다. 더 최근 연구들은 스물네 곳이라고 주장한다. 종 길들이기는 서로 다른 많은 장소에서 여러 차례 일어났다. 그런 장소 가운데 상당수가 바빌로프가 지적했듯이 산악 지대였다. 산악 지대는 다양성이 풍부한 경향이 있는데, 고도에 따라 물리적 조건이 달라지는 탓이다. 하지만 작물과 가축이 되기 위해서는 타이밍이 맞아야 했을 뿐 아니라 인간과 장단이 맞아야 했다. 인간이 생활 방식을 바꾸려는 시점에 인간의 개입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종. 그것이야말로 이 결정적 결속이 맺어지게 만든 승리의 조합이었다. 사실 의식적인 의사 결정이 모종의 역할을 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 작물화는 많은 경우, 무의식적인 과정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종들이 서로 만나 우연히 부딪치고 가까워지면서 진화적 역사가 한데 얽히게 되었다. 우리는 인류를 지배자로 여기고 다른 종들을 자발적인 하인, 나아가 노예로 여기는 데 너무 익숙하다. 하지만 우리가 동식물과 이런 협약을 맺은 방식은 다양하고도 미묘했고, 공생과 공진화 상태로 유기적으로 진화했다. 이 동반자 관계가 구축되기 시작할 때 의도가 개입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인류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동물을 길들이는 세 가지 경로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어떤 사건' 이라기보다는 길고 오랜 진화적 과정이었다.
한 경로는 동물이 인간을 선택해 우리에게서 자원을 빌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며 우리와 공진화하기 시작했고, 지난 몇 백 년 사이 창조된 개 품종들에서와 같은 인간 주도적인 선택이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길들여지게 되었다. 개와 닭이 이런식으로 우리의 동맹이 되었다. 두 번째 경로는 먹잇감 경로다. 이 경우에도 초반에는 동물들을 길들이려는 그들을 자원으로서 관리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양, 염소, 소 같은 중대형 초식동물이 이 경로를 따라 처음에는 먹잇감으로 사냥되고 이후에는 사냥감으로 관리되다가, 마침내 가축으로 길러졌을 것이다. 마지막은 가장 의도적인 경로로, 인간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동물을 잡아 길들인 경우다. 고기 외에도 뭔가 유용한 쓰임새가 있어 보인 가축들이 대개 이런 경로를 따랐다. 승마용 말로 길들여진 말이 대표적 사례다.
- 차탈회위크에는 그보다 앞선 수렵채집 집단들에 비해 생리적 스트레스와 건강 문제가 증가한 정황이 나타난다. 곡물을 중심으로 하는 식생활은 풍부한 열량을 공급하지만, 몸이 필요로 하는 모든 필수아미노산과 비타민까지 제공할 수는 없다. 다른 유적들처럼 성장률이 감소한 증거가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뼈 감염을 포함한 낮은 수준의 생리적 스트레스뿐 아니라, 녹말이 풍부한 식생활과 관련이 있는 듯한 높은 충치 발생률을 짐작하게 하는 충분한 증거가 존재한다.
- 오늘날의 산업화된 농업에서는 농업의 중노동을 인간 대신 기계가 짊어진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수렵채집인 조상들의 예비 식량이었던 곡류가 주식의 자리를 차지한 식량 생산 시스템에 속박되었다. 차탈회위크에 살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세계화된 식품 공급 덕분에 중요한 비타민의 다른 공급원들을 이용할 수 있지만(게다가 지금은 유전자 편집을 통해 곡물에 비타민을 집어넣을 수도 있다), 우리의 치아는 여전히 신석기 혁명의 영향으로 고통 받고 있다. 가장 해로운 악당 중 하나는 옥수수에서 파생된 액상 과당이다. 액상 과당은 신석기 유산의 최선과 최악을 담고 있는 식품이 아닐까 싶다. 즉, 환상적인 에너지 공급원임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그 위험을 이 제 막 알아차리기 시작한, 건강을 위협하는 교활한 적이기도 하다. 옥 수수 그 자체는 인류 역사에 막대한 역할을 했다. 잉카와 아스테카 문 명을 건설하는 연료였고, 콜럼버스가(그리고 아마도 캐벗이) 신세계에 도 착한 뒤로는 세계로 진출했다. 무게로만 따지자면, 오늘날 우리는 다 른 어떤 곡물보다 옥수수를 많이 생산한다. 옥수수는 우리가 먹는 음식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인간이 먹는 양의 네 배를 가축을 먹이기 위해 재배하고, 생물 연료를 만들기 위해 또다시 그만큼을 재배한다.
- 우리가 길들인 동물들과 우리 사이에는 또 하나의 신기한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 우리 역시 동물이 길들여졌을 때 등장한 형질들 중 일부를 드러내보이는 것 같다. 개처럼, 그리고 벨라예프가 길들인 은여우처럼, 우리는 선조들보다 작은 턱과 치아, 납작한 얼굴을 지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남성의 공격성이 줄었다. 이 일군의 연관된 형질들을 가축화 증후군domestication syndrome'이라고 부른다.
- 현생인류의 초기 화석들을 보면 대체로 최근 화석에 비해 눈썹 위 융기부가 훨씬 발달한 모습이다. 이러한 눈썹 위 융기부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 실제로 언제였는지, 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을까? 미국의 한 진화인류학 연구 팀이 이를 알아내고자 두개골 표본들 을 측정하고 비교했다. 표본의 일부는 20만 년 전~9만 년 전에, 일부는 8만 년 전 이후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며, 그 외의 많은 표본들은 지난 1만 년 내에 드는 최근 표본들이었다. 연구 팀은 9만 년 전보다 오래된 표본들이 이후 표본들에 비해 두개골의 눈썹 위 융기부가 더 발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얼굴의 길이도 오래된 표본에서 더 길었다. 얼 굴 모양의 여성화'는 홀로세까지 계속되었다. 테스토스테론 수치의 변화가 얼굴 모양의 이런 변화를 매개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양성 모두에서 나타나는 더 가냘프고 여성적인 두개골은 인간집단이 커짐에 따라 사회적 관용이 자연선택 되면서 생긴 부산물일 수 있다. 그런 선택이 어떤 식으로 일어났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유전 학자 스티브 존스의 기발한 표현처럼, 진화는 “두 번의 시험을 치르는" 셈이다. 단순히 살아남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번식에도 성공해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해야 한다. 만일 사회적 추방자 신세라면, 두 번째 시험에서 합격하기는커녕 시험을 치르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다. 공격성이 적은 남성들이 번식에 성공할 확률이 더 높다면, 그 형질이 집단 내로 빠르게 퍼질 것이다. 인간 사회가 진화함에 따라,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더 조밀하게 살게 되고 나아가 생존을 위해 광범위한 관계망에 의존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의도하지 않게 우리 자신을 길들였을 것이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의 흑역사  (0) 2020.06.21
신친일파 반일종족주의의 거짓을 파헤친다  (0) 2020.06.11
사무인간의 모험  (0) 2020.02.11
전쟁의 기원  (0) 2019.11.04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  (0) 2019.11.04
Posted by dalai
,

사무인간의 모험

역사 2020. 2. 11. 08:11

- 타자수의 일은 주로 여성들의 몫이 되었다. 타자기가 유행하던 당시 기존의 고된 육체노동에 노출되던 여성들은 신종 직업을 눈여겨보게 되었고, 사회로 활발하게 진출. 점차 사무직은 육체노동에 비해 덜 힘든 일, 여성에게 적합한 일이라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 국내에도 타자기가 도입되던 시기에는 전문학원이 생길 정도였다. 타자수는 신종직업으로 각광받았다. 1800년대 후반의 초기 타자수들은 그저 주어진 글을 빠르게 쓰는 것에 중점을 두었지만, 숙련된 여성 타자수는 자신의 문장구성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단순히 글자를 쳐내는 다른 타자수들에 비해 인정받을 능력을 확보한 것이었다. 타자기의 등장으로 인해 남성 직원이 주로 전담하던 비서 업무에도 변화가 생겼다. 타자기를 통해 사회로 진출한 여성들이 점차 선망받던 비서업무를 맡기 시작했다.
- 타자기의 등장은 사무 일거리의 증가에 따른 결과물이었고, 이로 인해 사무원은 보다 높은 지위를 보장받았다. 역사적으로 단순하고 창의성이 가미되지 않은 노동은 대개 무시받았지만, 타이핑만큼은 단순하지만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 자본주의 체제는 표준화, 단순화를 엄어 사회와 문화 전반에 여러 영향을 끼쳤다. 패션과 관련해서도 선택의 범위가 많아지면서 무어을 입을지에 대한 고민에 지쳐갔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눈에 띄려는 욕구도 다소 가라앉았다. 이때 영국 국왕 에드워드 8세(1894-1972)의 신사복 차림은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조합으로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 개성을 부리지 않고 편하게 선택해 입을 수 있는 옷을 선호하기 시작했고, 남자들은 유일한 패션수단으로 넥타이에 집중하기 시작. 한정적인 정장의 색과 대비되는 넥타이의 무늬와 색은 다채롭게 변해감. 오늘날의 남성들도 정장색깔보다는 어떤 넥타이를 맬까 아침마다 고민하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개성을 나타내던 넥타이가 비즈니스맨의 상징이 된 데는 미국 은행의 면접방식이 큰 영향일 미쳤음. 하얀 얼굴과 금발이 아니면 취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외모의 비중이 컸고, 입사한 이후에는 정장과 넥타이를 착용해야 했다. 프랑스 절대왕정 시대의 귀족처럼 비슷한 외모에 똑같은 옷차림이었다. 화이트칼라의 전형적 모습은 이처럼 같은 옷차림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직장인에 의해 만들어졌다
- 넥타이는 패션의 의미뿐 아니라 자신을 육체노동과 구분짓는 경계선 같은 역할을 했따. 의자에 앉아 땀을 흘릴 필요가 없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작은 특권을 나타냈다. 한편 회사에서는 규칙과 질서를 상징하기도 했음. 일을 한 지 몇 시간이 흘러도 바람이 불지 않으면 미동조차 없는 넥타이는 표준화, 타협, 속박뿐 아니라 권위를 상징하는 지표이기도 했다.
- 산업화 초기 사무원에 대한 조서는 조금씩 피어오르는 두려움의 표출이었다. 사무원의 존재에 불편함을 느끼다 그들의 영향력이 높아지자 곧 긴장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 산업혁명을 거치며 사회는 상공업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점차 더 많은 사무원을 필요로 했다. 사무원은 그렇게 점차 산업의 중심 영역으로 진출. 고대 사회에서 하위의 노동으로 여겼던 사무업무는 산업화를 맞이하며 변화의 시기를 거쳐 마침내 노동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시작한다. 기존 노동과의 차이점은 명확했다. 같은 직군에 있는 동료들이 점점 많아지면 마음이 든든해졌다. 하지만 불어난 숫자만큼이나 직군간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다는 것은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 19세기 들어 사무원은 더 증가했지만 사무실의 주인은 아니었다. 지금은 회계사, 세무사, 변호사가 사무실의 주인이 되어 인턴을 고용하고 월급을 지급하기도 하지만, 산업화 초기 사무원은 경영주의 자리 한편에 마련된 책상에 멀거니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일을 찾아서 하기보다는 서류작업이 주어질 때만 열심히 일했다. 계산과 필사로 서류더미를 만들어내고 다시 버리기를 반복했다. 이때까지 사무실의 주인은 대부분 상업가였다. 요즘 컨텐츠 생산부터 영업, 마케팅까지 혼자 해내는 1인기업가가 늘어나고 있는데, 19세기 초반 상업가도 혼자 모든 것을 해내야 했다. 도매상이면서 소매상이 되기도 하고 수출과 수입은 물론 운반까지 책임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며 산업화의 요충지인 미국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겨났다. 업무가 분화되기 시작한 것. 상업가가 혼자 하던 업무들을 따로 분리해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 보험사무소, 운반업소, 은행이 대표적이었다. 상업가 또한 다양한 업무를 덜어내고 자신은 큰 의사결정에 집중했다. 반복되는 업무나 허드렛일은 사무실에 남아 있던 사무원이 해나갔다. 상업가들은 거래를 위해 사무실 밖으로 나갔고, 사무원들은 회계실에서 그들만의 영역을 확보. 분업화와 함께 점차 유통이 활성화됨. 만드는 곳과 파는 곳이 분리된 것. 자연히 매출을 기록할 인력이 필요하게 됐다. 사무원은 증가. 가내수공업을 들여다보면 노동자와 판매업자가 같이 있었다. 직접 땀을 흘리는 자와 옆에서 보조하는 사람이 함께 했다. 하지만 분업화가 진행되며 노동 역시 분리됐다. 육체노동자와 사무원으로.
- 포드주의, 테일러주의가 낳은 기계적 효율성은 생산성 면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산업의 발전에 있어서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노동자의 시각에서는 중간관리자라는 새로운 존재가 갈등을 부추겼다. 1900년대 접어들며 초시계와 카메라를 들고 공장에 견학을 온듯한 차리므이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새하얀 셔츠를 입은 그들은 기름때를 묻힐 만한 기계공이 아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엇을 할지 몰라 고성으로 업무지시를 내리던 중간 관리자들이었다. 그들은 이제 경영자의 지시하에 노동을 관리하고 분석하는 요원이 됨. 초시계로 노동자의 작업시간을 체크해서 임금에 적용했음. 이처럼 사무의 본질은 이전 시대와 다르게 변화. 양적인 면에서 사무원의 증가가 있었고, 계급의 분화, 노동의 분리, 분할의 시대를 맞이함.
- 80년대 전후로 서양의 사무실에는 이전과 또 다른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자리가 안정적이지 않았기 때문. 철옹성으로 여겨지던 관리자의 자리는 위태롭게 여겨지기 시작함. 승진의 튼튼한 동아줄만 잘 붙들고 있으면 꼭대기층까지 입성할 수 있다는 인식도 깨져버림. 더 이상 안정된 자리는 없었다. 80년을 전후로 미국에서만 100만명 가량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책상을 내주었다. 조직은 탈산업화와 공장의 해외이전 등으로 살을 뺐다. 구조조정의 첫번째 타겟은 중간관리자였다. 공장과 사무실에서 고군분투한 조직인간에 대한 대대적 감축이었다. 이제 실무능력과 생산성이 떨어져 하급 사무원으로 되돌아갈수도 없었다.
- 우리나라 사무공간에 파티션이 도입된 시기는 80년대. 그 전에는 공장도 개방된 구조로 되어 있었고, 사무실 또한 커다란 공간에 책상만 이어붙인 형태였음. 옆 사람의 작은 움직임도 눈에 보였고, 몇 미터 떨어진 사람과도 목소리만 조금 높니면 얼마든지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었다. 이와 다르게 서양에서는 일찌감치 파티션이 도입됨. 주로 최소한의 프라이버시와 보안을 확보하고 업무 효율성을 올리기 위한 방편. 미국을 비롯한 서양 국가들은 6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파티션이 늘어났고 70년대에는 보편화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80년대에 들어 해외 기업들이 국내에 둥지를 틀면서 자연스레 파티션으로 사무공간을 나누기 시작했다. 화이트칼라 직장인이 한동안 막강했던 지위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파티션의 도입과 연관이 있다. 중역들에게 개인 사무공간을 마련해주던 회사들은 이제 그들의 자리를 재배치했다. 장기간 출장에서 돌아와 보니 5분의 1도 되지 않는 작은 공간으로 옮겨져 있었다. 줄어든 공간은 자신들의 불안한 입지를 상기시켰다. 한편 파티션은 점점 이중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개방된 공간에서 프라이버시를 보장해주었지만, 동시에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유발하기도 했다. 똑같은 모습, 비슷한 표정을 한 사람들을 한정된 공간에 몰아넣다보니 몰개성화의 진원지로 지목되기도 했다. 70년대에서 80년대를 관통하며 파티션의 이중성이 부각되는 사이, 그 안에는 침입자가 발생했다. 경영자의 일정을 관리하던 여성 비서들의 입지도 이 침입자로 인해 줄어들게 되었음. 바로 컴퓨터의 등장이다. 인력감축의 중심에 컴퓨터가 있었다. 그나마 있던 개인의 공간에 또 다른 물체가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 직후에 비해 2000년대 노동자들은 물리적 노동강도뿐 아니라 업무강도와 스트레스도 계속해서 늘어왔다. 20여년전부터 바람이 분 글로벌화, 정보화의 어두운 이면이다. 글로벌 기업의 국내진출로 임금 깎아먹기 경쟁이 일어나고, 정보화로 인해 어디서나 일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뀌면서 삶과 일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경향이 짙어졌다. 24시간 가동되는 경제체제하에서 사무직은 온종일 일하는 경우가 만연해졌다. 게다가 고용의 비정규화 현상은 비정규직뿐 아니라 정규직 직원들에게도 부담을 가져왔다. 비정규직이 늘어나면서 적유직 인원은 이전보다 줄어들었고 업무강도도 높아지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비정규직, 정규직이라는 양대 축 외에도 하청, 파견, 자영업 계약직 등 기업이 제시하는 고용형태는 다양해졌고, 개인은 자신의 조건에 따라 그것을 받아들일지 선택하게 되었다. 노동조합도 없고 파업권도 없이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일하던 시대에 비해 여러 법제가 갖춰졌지만, 법망을 피해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계약은 만연해졌다. 약자 입장에 놓인 노동자는 경영자를 향해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정직원이라는 신분을 차지한 이들은 자기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회사형 인간이 되어야 했다.
- 밀려오는 구조조정의 물결에 화이트칼라의 수난사는 이어졌다. 종신고용의 희망은 사라지고 난공불락이던 연공서열조차 휘청거리고 있다. 자기자리가 어디든 자생력을 길러 각자도생을 해야하는 시대다. 90년대부터 정리해고라는 말은 심심찮게 들렸고 칼을 빼든 기업은 어쩔 수 없다는 유약한 항변만 반복했다. 더 나아가 이제는 사내실업이라는 말이 만연할 정도로 생산성이 낮아진 중간관리자들의 방황도 늘어나고 있다. 그렇게 회사 내에 생긴 다양한 신분은 본인이 어느 자리에 있든 상관없이 사무원들을 고난으로 몰아넣었다.
- 사무원들이 한데 모여 자신의 일자리와 업무의 자율성을 지켜내지 못하는 것을 이기주의 탓이라고 한다. 능력주의라는 추상적 신념을 원인으로 지적하기도 함. 하지만 의사, 언론인, 블루칼라도 능력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사무직원들이 직장에서의 생존에 있어 특히나 취약한 위치에 놓여 있는 이유는, 좋든 싫든 자신을 고용주, 경영진과 동일시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입장에 서 있기 때문. 교수, 변호사, 의사, 과학자 등은 스스로를 그 직업에 종사하는 인간으로 인식하지, 자신을 대학, 변호사 사무실, 병원, 실험실과 동일시하려 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사무지은 높은 자리를 목표로 바라보고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충성을 맹세해야만 조직 내 자신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고, 자신의 직업을 보장받을 수 있다. 경영진이 각종 갑질로 사회적 이슈에 오르고, 타락하거나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지라도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며 울며 겨자먹기로 사다리를 올라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일방적 충성의 대가는 아웃소싱과 정리해고였다. 회사는 이렇듯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개인의 힘으로는 피할 길이 없는 고용불안의 빨간불은 이렇게 현재 진행형이다.
- 미국 사회학자 찰스 라이트 밀스는 1960년대 들어 사무직 종사자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사했다. 그들은 "특징이 있는 것 같음에도 특징이 없는 존재"라고 새로이 생겨난 중산계급인 스스로를 정의했다. 즉 역사적으로 족적을 남길만큼 뛰어난 업무역량이 없으며, 그렇다고 정치 세력화를 할 집단도 아니고, 단지 조금 더 강한 세력을 따라가는 성향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다른 조사도 있었다. 우선 사무직 종사들에게 설문지를 나눠주며 공장 노동자와 경영진, 사무직 노동자에게 일정 점수를 매기도록 했다. 항목은 신뢰성, 양심성, 의존성 등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사무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육체노동자나 경영진과는 차별화된 존재로 인식했다. 다만 경영진에는 후한 점수를 주었고 육체 노동자에게는 낮은 점수를 주었다. 중간 성향을 가진 것을 스스로로 확인한 결과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저 조직의 안위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다른 생각을 가지는 집단 또한 생겨났다. 한 조직내에서 생과 사를 함께하는 조직인간이 아닌, 자신이 키운 능력대로 조직을 옮겨 다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 조직이 만들어낸 질서에 반하지 않고 경영진의 그림자를 따랐던 일반 사무직과는 달리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자신의 직무를 발전시켜 자신이 가진 지식의 대가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신흥세력이었다. 지식노동자였다. 사무직원들은 한 조직에 충성을 다했고 기력이 소진될 때까지 버틸지, 능력본위제의 삶에 충실할지의 기로에 서기 시작. 가장 최악의 상황에 놓인 이들은 한 자리에서 일가를 이루지도 못하고 새 둥지를 틀 수도 없는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이었다. 미래에 대한 고민과 사무직에 대한 회의감 사이에 이들은 조직에서 입지를 다질지, 제2의 업을 만들어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지식노동자는 지식산업 시대를 이끌어가는 사회의 주역 계급을 지칭하며 전문 기술직에 종사하는 이들을 말함. 골드칼라라 부르기도 함. 이보다 앞서 지식노동자에 대한 개념은 존재했다. 꾸준한 학습과 지식습득을 통해 일하는 방식을 혁신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 활용함으로써 생산성과 효율, 부가가치를 높여가는 사람을 일컬었다. 주변의 정보를 해석하고 이를 활용해 부가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이들이었다. 이는 피터 드러커가 지식사회를 다루며 제시한 용어임. 평생 직장인보다는 평생 직업인의 신념을 가지면서 광범위한 지적 재산, 혁신적 기업가 정신, 평생 학습정신, 창의성, 유연성 등을 갖추고 있는 사람으로, 이 시기에 등장한 지식노동자라는 개념은 기존 노동자들과는 차별적 존재로 부각됐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친일파 반일종족주의의 거짓을 파헤친다  (0) 2020.06.11
세상을 바꾼 길들임의 역사  (0) 2020.06.07
전쟁의 기원  (0) 2019.11.04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  (0) 2019.11.04
모든 시작의 역사  (0) 2019.09.15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