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
- 엄청나게 다양한 오늘날의 개들은 모두 늑대의 후손들이다. 여우, 자칼, 코요테, 심지어는 들개도 아니다. 오직 늑대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유럽의 회색늑대들, 오늘날의 개들은 이 회색늑대와 유전자 서열의 99.5퍼센트를 공유한다. 무엇이 늑대를 우리 곁에 오게 했을까? 과거의 고고학자들은 농업 이 시작되면서 그렇게 되었으리라 추측했다. 기회주의적인 포식자들 인 인간에게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가축의 존재는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었으리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인간의 새로운 시대, 즉 신석기시대를 출발시킨 농업의 가장 오래된 증거는 약 1만 2천 년 전 중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의 골격은 이보다 훨씬 오래된 고고학 유적들에서 발견된다. 인간과 가깝게 접촉해 동맹을 맺음으로써 변화를 겪은 동식물들 가운데 아마도 개가 우리의 가장 오래된 친구인 듯하다. 개를 기른 최초의 사람들은 농부가 아니라 방하기의 수렵채집인들이었으니 말이다. 그 동맹의 시초를 찾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먼 선사시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 지난 몇 년 동안 개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은 엄청나게 뜨거웠다. 새로운 기법들과 새로운 발견들은 이론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잠재력을 안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이야기는 계속 바뀌고 있다. 하지만 고고학적 발견물에 대한 더 정밀한 연대측정법에서부터 더 빠른 DNA서열 분석에 이르는 이 모든 발전에 힘입어, 우리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가까운 친구의 기원을 둘러싼 실제 역사가 마침내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잘 아는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복잡하지 한번 보라. 우리 종 또는 다른 종의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역사인 선사시대에 접근할 때 우리는 수천 년에 걸친 상호작용의 복잡성을 깔끔하게 요약하는 단순한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매우 순진하게 출발한다. 하지만 더 많은 과학적 분석이 실시되고 더 자세한 내막이 드러남에 따라 전체 그림이 변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타이미르 늑대와 고대 및 현대에 존재하는 그 사촌들의 DNA에 대한 연구는 가축화의 뿌리를 찾는 일이 얼마나 험난한지 잘 보여준다. 개의 기원을 빙하기로 밀어 넣었다면, 그다음에 떠오르는 질문은 “개는 어디서 가축화되었을까?”다. 하나의 독립된 지역에서 시작된 다음 다른 곳으로 퍼져나갔을까? 아니면 각기 다른 시기와 장소에서 야생 늑대가 여러 번 개로 변모했을까?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개의 가축화는 지금으로부터 4만 년 전 시작된 듯하지만, 늑대와의 교잡은 그 이후로 오랫동안 계속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고대와 현대의 유전체에 간직된 비밀을 풀 수 있는 최신 유전자 기법 덕분에 우리는 적어도, 시도는 해볼 수 있다.
- 1959년 러시아 과학자 드미트리 벨라예프는 특정 행동을 골라내는 선택 육종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동물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개 가축화의 열쇠가 되는 기본 형질들이 존재했으며, 새끼 늑대에게서 순한 성격이 적극적으로 선택된 반면 공격적인 성향은 가차 없이 제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늑대와 유연관계가 상당히 가까운 종인 은여우 Vaulpesupes를 데리고 그 유명한 가축화 실험에 착수했다. 매 세대 가장 순한 여우들을 선택해 그들끼리 교배시키자 순한 성격이 개체군 내에 빠르게 퍼졌다. 집중적인 선택 육종을 여섯 세대 반복한 뒤에는 매우 순한 개체들이 개체군의 2퍼센트를 차지했다. 열 세대가 지나자 순한 개체들은 18퍼센트로 들었고, 서른 세대 뒤에는 절반에 이르렀다. 실험이 계속되어 2006년이 되었을 땐 거의 모든 여우가 가축화된 개와 똑같이 ? 인간에게 매우 친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변한 것은 여우의 행동만이 아니었다. 여우들 일부는 체색이 여전히 은빛이었지만, 몇몇 여우들은 붉게 변했다. 붉은색도 은여우의 표준 체색이므로 여기까지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개체들은 흰 몸에 검은 반점이 찍힌 모습으로 변했다. 이른바 '조지 화이트Georgian White' 품종으로, 야생에는 없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다. 조지 화이트 품종의 은여우는 여우처럼 생긴 자그마한 양치기 개와 묘하게 닮았다. 어떤 여우들은 은백색 바탕에 갈색이 얼룩덜룩하게 섞인 털색을 가지게 되었고, 어떤 여우들은 축 처진 귀를 가졌다. 게다가 다리와 주둥이가 짧아지고 두개골이 넓적해지는 등, 골격 구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번식 양상도 변했다. 야생 여우는 1년에 한 번만 짝짓기 를 하지만, 순한 암여우는 1년에 두 번 발정기에 들어간다. 또한 순한 여우는 야생 여우보다 성적으로 더 빨리 성숙했다. 인간에게 친근하게 굴고 공격성이 없는 등 실험을 통해 특별하게 선택된 특정 속성 외에도 순한 여우는 우리에게 익숙한 다른 행동 유형들을 보였다. 그들은 꼬리를 위로 들어 흔들었다. 주의를 끌기 위해 낑낑거리기도 했다. 킁킁대며 사육자를 핥는가 하면 인간의 손짓과 시선의 방향에 주의를 기울였다. 여우 육종 실험을 실시한 러시아 과학자들은 그들이 선택한 형질에 함께 딸려 온 듯하지만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개와 비슷한 수많은 기타 형질들을 얻었다. 이 여우 육종 실험은 수천 년 전 가장 친근하고 공격성이 덜한 늑대들이 어떤 식으로 세대를 거치며 빠르게 순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수렵채집인들은 러시아 과학자들처럼 매 세대 10퍼센트의 가장 친근 한 여우들만을 선택적으로 번식시키는 엄밀한 프로토콜에 따라 선택 육종을 실시할 필요가 없었다. 개의 조상인 늑대들이 어느 정도까지 는 자가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가장 친근한 녀석들만 인간 가까이에서 살도록 허락되었을 테니 말이다. 늑대 무리는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로 유연관계가 매우 가깝다. 한 마리가 인간을 용인하거나 나아가 친근하게 굴면 그 무리의 나머지 개체들도 같은 유전자와 행동 경향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따라서 무리 전체, 혹은 무리의 대다수가 인간과 동맹을 맺을 수 있었으리라. 순한 늑대는 인간과 애착을 형성해 손짓과 눈짓 같은 인간의 사회적 단서들을 따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 늑대가 개로 가축화되는 초기 과정은 비록 50년 만에 가축화된 야생 은여우의 경우만큼은 아니더라도, 비교적 빨랐을 것이다. 변화를 일으키는 분자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거의 모든 이론이 다면 발현을 거론한다. 온순함과 너그러움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선택된 특정 유전자 변종들은 연쇄적인 불안정화 효과를 통해 해부 구조와 생리, 행동의 다른 측면들을 광범위하게, 그리고 충분히 빠르게 바꿀 수 있다. 이러한 잠재력을 알면,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던 야생종에서 가축종의로의 변화가 갑자기 훨씬 쉽고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보인다. 어쩌면 늑대가 개, 또는 거의 개'로 변하는 일은 수없이 많이 일어났고, 우리는 그 시험들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계통으로 발전한 한두개의 유전적 흔적만을 찾을 수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빙하기가 절정에 이르렀던 2만 1천 년 전에서 1만 7천 년 전
사이, 유라시아 전역의 동물들이 스트레스 상황에 놓였다. 빙상이 내려와 유럽을 뒤덮었고, 시베리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춥고 건조해졌다. 많은 계통이 멸종했다. 때로는 종 전체가 사라졌다. 갯과 동물의 가축화 실험이 이 환경 재앙으로 주춤했다 해도 놀라울 게 없다. 하지만 어쩌면 빙하기가 정점으로 치닫던 시기에 수렵채집인의 야영지 가장자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던 먹이가 일부 늑대 무리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 모두가 추웠다.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일찍 가축화된 개의 일부 계통이 멸종했다 해도, 개를 곁에 두는 것은 마지막 빙하기의 정점에 수렵채집인의 생존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으리라고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현대 인류가 혹독한 마지막 빙하기를 무사히 지난 반면 네안데르탈인은 그렇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깔끔하고 그럴듯한 설명이긴 한데 그래서 오히려 꺼림칙하다. 너무 간단하지 않은가. 역사는 복잡하다. 가설은 얼마든지 제안할 수 있지만, 그것을 검증할 엄두도 내지 못할 때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개가 일부 수렵채집인 부족들의 생존과 성공을 도왔음을 의심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빙하기 이후로 가축 개의 화석 증거는 유라시아 전역에 나타난다. 8천 년 전 무렵부터는 서유럽에서부터 동아시아에 이르는 광범위한 장소에서 개 화석이 발견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고대 개와 현대 개에서 얻은 최신 유전자 데이터는 단일 기원을 암시하므로 이 모든 홀로세Holocene의 개들이 각 지역의 늑대 개체군에서 따로 가축화되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오히려 개는 이주하는 인간을 따라왔거나, 아니면 인간이 다른 지역에서 데려온 것이 틀림없다.
- 신석기에 인간이 농업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개도 처음으로 유라시아 밖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개는 농업의 확산을 따라갔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개가 등장한 것은 5600년 전 그 지역에 신석기가 시작된 뒤였고, 남아프리카에 도달하기까지는 4천 년이 더 걸렸다. 멕시코의 고고학 유적에 개가 등장한 것은 5천 년 전 무렵으로, 이 역시 최초의 농부가 등장한 시기와 같다. 하지만 남아메리카 남단에 도달한 것은 그로부터 4천 년 뒤였다.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는 아메리 카 대륙에 유럽인이 들어오면서 아메리카 개의 초기 계통들이 완전히 대체되었음을 암시한다. 반면 최근에 이루어진 유전체 전체 조사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지난 5백 년 동안 이주자들과 함께 도착한 유럽 개들이 신세계에 원래 살던 개들과 섞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현대 품종들이 생긴 것은 훨씬 나중이다. 그들은 최신 발명품이다. 그 역사가 유전자에 반영되어 있다. 개의 유전자에는 조상들이 두 차례의 큰 유전적 병목을 통과한 흔적이 있다. 가축화가 시작된 시점에 한 번, 그리고 지난 2백 년에 걸쳐 현대 품종들이 등장 한 시기에 또 한 번이다. 육종가들은 사냥과 목축에 큰 도움이 되는 놀 랍도록 순종적인 개를 생산하기 위해 특정 형질들을 집중적으로 골라냈다. 하지만 선택 육종으로 형질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 그자체가 육종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특정한 모양이나 크기, 색깔, 질감 등을 가진 개들도 육종되기 시작했다. 현대 개 품종들에서 볼 수 있는 형태적 다양성은 여우와 자칼, 늑대를 포함한 갯과의 나머지 동물들을 전부 합한 것보다 훨씬 더 크다.
- 인간과 늑대가 이 행성에서 공존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서로를 피하는 것인 듯싶다. 우리 조상들은 야생 늑대를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그들이 가축이 될 정도로 오랫동안, 하지만 지금의 늑대는 과거보다 더 인간을 기피하는 듯하다. 늑대는 가축화된 개가 됨으로써 여러 모로 변했고 야생 늑대도 변했을 것이다. 야생 늑대를 괴롭히고 사냥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자연선택을 일으키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결국 살아남은 늑대는 인간에게 접근하지 않는 늑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두려움이 많고 우리를 피하는 늑대는 인간이 매개하는 선택의 결과물인 셈이다. 개가 인간이 매개하는 선택의 산물이듯이. 회색늑대와 개의 유전자를 조사하면 개가 된 늑대 계통이 지금은멸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 빙하기가 정점으로 치닫던 무렵은 모든 생물들에게 힘든 시기였으므로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하지만 계통수를 달리 볼 수도 있는데, 그렇게 보면 늑대의 특정 계통은 결코 멸종하지 않았다. 그 계통은 사실 늑대 계통수에서 가장 북적이는 가지, 즉 개다. 유전적으로 말하면 개는 회색늑대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개를 카니스 루푸스Canis nupus라는 회색늑대종 내의 아종으로 명명한다. 즉, 별개의 종canisfamiliaris’이 아니라, 아종 canishutpusfan 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아는 테리어, 스패니얼, 레트리버는 내면은 늑대인 셈이다. 야생의 사촌들보다 꼬리를 더 잘 흔들고 손을 더 잘 핥고 덜 위험한, 훨씬 친근한 늑대 말이다. 농업이 시작되기 수백 년 전에 이미 빵이 중동의 주식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신석기 혁명을 이해하기가 더 쉬워진다. 사람들이 일단 야 생의 곡물을 모아 가공하기 시작하면, 그런 종들 - 보리뿐 아니라 밀 과 그 밖의 곡물들 - 이 작물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한 가지 음식에 의존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얻을 방법이 야생 곡물을 수확하는 것밖에 없다면 리스크가 너무 크다. 일부라도 직접 재배하면 도움이 될 것이 다. 하지만 이는 우리 조상들이 야생식물 재배를 의도적으로 시작했
음을 암시한다. 사실 농업의 시작은 신중하게 세운 계획보다는 우연에 훨씬 더 많은 빚을 졌을 가능성이 높다.


2. 밀
- 야생의 조상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작물화된 곡물의 변화들 중 적어도 일부는 우연히 발생했거나, 적어도 인간 행동의 의도치 않은 결과인 듯하다. 야생 곡물과 작물화된 곡물의 한 가지 중요한 차이는 씨가 달리는 중심축, 즉 (밀의 이삭을 이루는) 이삭 가지의 힘에 있다. 야생형의 이삭 가지는 잘 부러진다. 다시 말해, 익으면 씨가 든 작은 이삭들이 이삭에서 떨어져 바람에 흩어진다. 반면 작물화된 곡물의 이삭은 익은 뒤에도 작은이삭들이 그대로 붙어 있다. 이삭 가지가 질겨서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 이것은 야생풀이라면 심각하게 불리한 형질이다. 씨가 바람에 자유롭게 날려 흩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야생에서라면 이 문제 많은 돌연변이는 자연선택에 의해 신속히 제거될 것이다. 하지만 작물에서 단단한 이삭 가지는 이점이 된다. 만일 대부분의 이삭이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수확한다면 잘 부러지는 이삭 가지를 가진 이삭은 이미 씨의 대부분을 잃은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단단한 이삭 가지를 가진 돌연변이 식물은 작은이삭들 전부를 붙잡고 있다. 아직 달려 있는 씨는 고스란히 타작마당으로 가, 일부는 식량으로 먹히고 일부는 다시 뿌려진다. 결국 단단한 이삭 가지를 만드는 씨와 식물의 비율은 매 세대 증가하게 된다. 이는 자가선택을 하 는 형질의 또 다른 사례다. 농부들은 모든 씨를 붙잡고 있는 식물을 굳이 적극적으로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저 밀의 대부분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이 수확하는 밀 중에는 이삭 가지가 단단한 유형이 많을 테니 말이다. 즉, 이 특정 형질의 확산은 초기 농업 관행의 의도치 않은 결과였을 공산이 크다.
- 초기 농부들이 큰 날알이 달리는 식물을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선택함으로써 낟알 크기가 커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꽤나 합리적인 추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 형질은 우연히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초기 농부들은 개별 낱알의 크기보다는 밭의 크기와 생산성을 키우는 데 집중했을 텐데, 낟알이 커서 모종이 더 왕성하게 자라는 변종은 낟알이 작은 변종과의 경쟁에서 유리했을 것이다. 모종 사이의 경쟁은 바람에 흩어지는 야생종에서는 일어나지 않지만 씨가 촘촘하게 뿌려진 밭에서는 심해질 수 있다. 해가 가면서 밭은 서서히 난알이 큰 변종으로 채워져 농부들을 기쁘게 했을 것이다.
- 괴베클리 테페의 정말 놀라운 점은 그 연대다. 그 유적은 1만 2천년 전에 건설되었으니 농부가 아니라 수렵채집인들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은 신석기 초기의 인류 사회 발달에 관한 이론에 균열을 일으켰다. 기존의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전개되었다.
팽창하는 인류 집단에는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하고, 사람들은 이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농업을 채택한다. 농업은 잉여 식량의 축적을 촉진한다. 소수의 권력자들이 잉여 식량을 통제하면서 계층화된 복잡한 사회가 탄생하고, 이 새로운 권력 구조는 새로운 발명품인 조직된 종교로 더 받쳐진다.
괴베클리 테페는 이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기념비적 골칫거리임이 분명하다. 메소포타미아 고지대의 귀퉁이인 이곳에서, 적어도 하나의 복잡한 사회가 수렵채집인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괴베클리 테페가 전례 없는 노동 분업의 증거를 제공한다고 판단했다. “우리가 관점을 바꿔야 해요. 수렵채집인들은 보통 우리가 아는 방식의 일을 하지 않죠.” 하지만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달랐다. “그들은 채석장에서 일했어요. 기술자들이 생겨나 돌을 운반하고 세우는 방법을 알아내기 시작했죠. 석공 전문가들도 있었는데, 그들의 일은 돌로 조각과 기둥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그에게 괴베클리 테페는 권력과 비전을 가진 지도자를 갖추고 노동력을 조직할 수 있으며 예술가를 지원할 수 있는 사회가 존재했다는 구체적인 증거였다. 그리고 장식이 새겨진 환상 거석은 조직된 종교를 나타낸다고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강력한 상징을 지니며 사원 건설자들을 위한 신화와 의미를 풍부하게 갖춘, 실로 완연한 모습의 종교였다. 괴베클리 테페 이전까지, 조직된 종교가 농업 이전에 존재했을 가능성은 떠올릴 수 없는 것이었다.

3. 소
- 젖은 미세 화석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매우 특징적인 분자들이 존재하고, 그중 하나는 중요한 단서임이 밝혀졌다. 바로 젖의 유청 단백질, 공식 명칭으로 베타 - 락토글로불린-Lactoglobulin이다. 고고학자들에게 중요한 대목은, 베타 - 락토글로불린이 동물 젖에는 존재하지만 인간의 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베타 - 락토글로불린은 세균에 잘 분해되지 않아서 오랫동안 잔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 단백질의 유용한 특징이 하나 더 있는데, 종마다 달라서 소, 물소, 양, 염소, 말의 베타 - 락토글로불린을 구별할 수 있다는 점이다. 2014년에 한 국제 연구 팀이 광범위한 고고학 샘플에서 베타-락토글로불린을 찾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들은 낙농업의 증거가 풍부한 유럽과 러시아의 청동기시대(기원전 3000년) 치아의 치석에서 소, 양, 염소의 베타 - 락토글로불린을 다량 발견했지만, 낙농업의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 서아프리카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치아의 치석에서는 베타 - 글로불린을 찾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훌륭하다. 게다가 이 연구는 그린란드의 중세 북유럽 유적들이 결국 버려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밝혀주었다.
- 다른 연구에서 질소 동위원소비를 조사한 결과, 5백 년에 걸쳐 기후가 악화되어 그린란드의 바이킹들이 가축 식량을 줄이고 바다표범을 포함한 해양 식량원을 늘리는 쪽으로 식생활을 바꾸었으며, 그런 다음 15세기에 이르러 결국 자신들의 거주지를 포기했다고 추측했다. 생선 뼈는 고고학 유적에 잘 보존되지 않지만, 바이킹들은 아마 바다.표범뿐 아니라 물고기도 먹었을 것이다. 과학자이자 저술가인 재레드 다이아몬드 Jared Mason Diamond가 《문명의 붕괴Collapse)에서 말했듯이, 그린란드의 바이킹들은 기존의 식생활을 병적으로 고집하기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했던 듯하다. 그린란드 거주지를 버린 이유가 무엇이었든, 바다에서 나오는 음식을 먹기 싫어서는 아니었다. 바이킹 치아의 치석 분석은 또 하나의 식생활 변화를 밝혀준다. 서기 1000년에 그린란드의 초기 바이킹들은 유제품을 많이 먹었다. 하지만 4세기 뒤 베타 - 락토글로불린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그들은 더 이상 가축 동물을 먹지 않았고, 유제품도 이용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어쩌면 낙농 동물의 몰락이 이 바이킹 거주지의 종말을 앞당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린란드가 버려진 진짜 이유는 악화된 경제 상황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린란드 바이킹은 바다코끼리와 일각고래 상아를 교역했지만, 아프리카산 상아가 공급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상품은 더 이상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상아 시장이 바닥을 치자, 치즈 한 조각조차 얻을 수 없는 장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소, 양, 염소, 돼지는 인간과 협력 관계를 맺으면서 변모했다. 재배되면서 더욱 굵어진 밀 낱알과 달리, 소와 여타 동물들은 더 작아졌다. 그중에서도 소는 이상하게도 양, 염소, 돼지와 달리 - 신석기, 청동기, 철기를 거치며 유독 계속 작아졌다. 게다가 상당히 작아졌다. 고고학자들은 유럽 소의 고대 뼈를 조사해 신석기 동안 소가 얼마나 작아졌는지 측정했다. 유럽에서 농업은 약 7500년 전(기원전 5500년)에 시작되었다. 3천 년 뒤인 신석기 말, 소는 농업이 시작될 때보다 평균 3분의 1가량 더 작았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 농부들이 인위적 교배를 통해 더 작고 다루기 쉬운 동물을 고의적으로 선택했으리라는 결론으로 도약하기 쉽다. 그러나 가축화 초기라면 몰라도, 농부들이 수 세대 수천 년에 걸쳐 계속 해서 점점 더 작은 동물을 선택했을 확률은 낮아 보인다. 그러면 소는 왜 계속 작아졌을까?
- 중유럽의 신석기 유적에서 출토된 고대 소뼈들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크기가 작아질 뿐 아니라 어린 소의 개체수가 증가한다. 이는 목축의 초점이 고기 생산으로 옮겨 왔음을 암시한다. 어린 소는 빨리 자 란다. 3~4년이면 거의 성숙하고, 이때부터는 성장률이 떨어진다. 성
숙한 동물을 계속 살려두어서는 고기를 많이 얻을 수 없으므로, 보통은 동물들이 성숙하기 전에, 혹은 성숙하자마자 도태시킨다. 거주지 주변의 두엄 더미에 어린 뼈의 비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자체로 보면 이것이 소의 크기 축소와 무슨 관계인지 알기 힘들다. 크 기 축소는 성체 소에서 확인된 현상이고, 어린 소는 표본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체에 이르지 못한 뼈의 비율이 높다는 것에서 간파해야 할 사실이 있다. 바로, 송아지를 낳는 암소들도 대체로 완전히 성숙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번식할 수는 있으나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암소들은 무리 내의 성숙한 자매들에 비해 체중이 적게 나가는 송아지를 낳는 경향이 있다. 더 작고 가벼운 송아지는 더 작고 가벼운 소로 자란다. 이는 유럽의 신석기 소떼에서 젖을 짜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고기가 최우선 목적이 되면서 유럽의 소가 신석기 초보다 신석기말에 33퍼센트가량 작아졌다는 뜻이다.
- 선진국에서는 인공수정을 이용해 번식을 엄격하게 통제하면서부터 소 품종들 사이의 교잡 가능성이 사실상 제거되었다. 육종에 대한 이러한 엄격한 제약은 강력한 선택과 함께, 다수의 독립적이고 분절된 개체군으로 구성되는 종을 초래했다. 각 개체군은 유전병과 불임발생률이 높아지고 개체군 전체가 감염병에 취약해지는 등, 동계교배에 내재된 모든 위험에 노출된다. 유전적 변이가 적은 분절된 개체군은 야생에서 멸종 위험이 가장 높은 집단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엄격하게 통제되는 산업 품종이 전통적인 품종보다 더 생산적일 수 있다. 전통적인 품종을 산업 품종으로 바꾸는 것은 농부들에게 경제성 면에서 생각할 필요도 없는 간단한 결정일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한 가축 품종이 멸종하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모든 유전적 유산' 도 사라진다. 유전학자들은 개체군 분절화와 동계교배가 계속될 경우 소의 미래와 인류의 식량 안보에 미칠 위험을 우려하고 있다. 가축 양과 염소에 대한 우려도 있지만, 이런 동물들의 상황은 소와는 다르다. 여러 종이 존재하며 야생종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소를 현존하는 다른 소과 동물과 교배시켜 잡종을 만들 수 있고 그것이 미래에 유용한 유전적 자산이 될지도 모르지만, 소의 야생 조상은 이미 수백 년 전에 멸종했다.

4. 옥수수
- 옥수수는 별로 까다롭지 않다. 옥수수는 식물계의 코즈모포 리턴'인 듯하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곳에 자라는 곡물이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옥수수는 남위 40도인 칠레 남부의 밭에서부터 북위 50도인 캐나다에서까지 자란다. 또한 해발 3400미터인 안데스산맥에서부터 저지대와 카리브해안까지 번성한다. 옥수수의 세계적인 성공 비결은 그 겉모습과 습성, 그리고 유전자의 엄청난 다양성에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세계적 작물인 만큼 그 역사를 풀기는 엄청나게 어렵다. 옥수수가 전 세계로 퍼진 것은 겨우 5백 년 동안의 일이지만,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옥수수가 도입된 경위에 대한 문서 자료는 매우 모호하다. DNA가 추가 단서를 제공하긴 해도, 세계적인 무역과 교환이 옥수수의 유전적 역사를 뒤엉킨 거미줄로 만들어 버림. 옥수수의 세계화는 인간의 역사(탐사 항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무역로, 제국의 확장과 몰락)와 얽히며 그 흥망성쇠를 뒤따랐다.
- 표현형 가소성과 새로운 유전자 돌연변이는 새로운 형질을 만드는 두 가지 중요한 원천으로서 뛰어나고 독보적인' 옥수수의 다양성을 낳는 데 일조한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 에 기여한 또 다른 요인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야생 친척으로부터 받은 약간의 도움이었다. 초기 옥수수는 멕시코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퍼져나가면서 산지에 사는 테오신트의 아종인 제아 메이스 멕시카나와 교잡했다. 유전학 연구 결과, 고지대 옥수수가 가진 게놈의 약 20퍼센트가 멕시카나로부터 왔음이 밝혀졌다. 작물화된 보리가 시리아사막에서 자라던 야생 변종의 가뭄 저항성을 가져온 것처럼, 옥수수도 확산하는 동안 야생의 친척종들과 교잡함으로써 현지의 유전적 ‘지식'을 최대한 활용했던 셈이다.
- 옥수수는 멕시코에서 고지대와 저지대의 개별 경로를 통해 과테말라로, 그런 다음 더 남쪽으로 이주한 듯하다. 그리고 마침내 7500년전 남아메리카 북단에 도착했다. 이어 4700년에는 브라질 저지대에서 재배되고 있었고, 4천 년 전에는 안데스산맥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옥수수는 남아메리카 북단에서부터 북쪽의 트리니다드섬과 토바고섬, 카리브해의 다른 섬들로 퍼져나갔다. 북아메리카로의 확산은 훨씬 늦어서, 2천 년 전에 와서야 남서쪽 모퉁이에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곧장, 단 2백 년 만에 북동쪽으로 퍼 져나가 오늘날의 캐나다에 해당하는 지역까지 이르렀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접촉이 시작될 때쯤에는 이미 엄청나게 다양한 옥수수 변종들이 생겨나 멕시코에서부터 북동 아메리카까지, 카리브해 연안과 브라질 계곡에서부터 안데스산맥 고지까지 모든 지역에서자라고 있었다. 그 모든 형태의 옥수수는 각기 매우 잘 적응되어 있었고 변이가 풍부한 작물이었다. 즉,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해변에 발을 디디자마자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하드자족과 함께 잠시 시간을 보냈던 경험은, 뭐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의 생활 방식과 나 자신의 생활 방식에 대해 깨우침을 주었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추는 것에서부터 식습관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문화를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 우리는 과거와 다른 현 재의 문화를 장밋빛 안경을 통해 보기 쉽다. 하지만 '서구' 세계의 우리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전통적 생활 식 역시 전부 장밋빛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그들은 가족과 공동체에 중심을 두었다. 그들의 삶에는 '직업'이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실업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이에겐 각각의 역할이 있었다. 아이들도 한 부분을 담당했다. 자식을 낳는 것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해를 끼칠 수있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

5. 감자
- - 광합성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으며, 각각은 서로 다른 화학 경로를 이용한다. 나무와 관목이 이용하는 형태의 광합성은 광합성의 최초 산물로 탄소원자 세 개를 가진 분자를 만든다. 창의력 넘치는 식물학자들이 그런 식물을 'C3 식물'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다음으로, 풀과 사초 같은 식물들은 약간 다른 광합성을 이용해 탄소 원자가 네 개인 분자를 만든다. 이 식물들은 뭐라고 부를까? 물론 C4 식물이다. CA 경로는 물 분자를 더 효율적으로 이용할 뿐 아니라(건조한 환경에서 유용한 적응이다), 그 경로를 이용하는 식물은 보다 무겁고 안정한 동위 원소인 탄소-13을 더 많이 포획한다. 따라서 C4 식물들에는 탄소-13 이 비교적 풍부하다. 만일 한 동물이 C4 식물(예컨대 사초의 뿌리와 구경이 여기에 포함된다)을 많이 먹는다면, 그 동물의 뼈에도 탄소-13이 풍부해질 것이다. C3 식물과 C4 식물 사이의 이런 차이를 이용해 인류학자들은 유용한 결과를 얻어냈다. 침팬지의 식생활은 주로 잎이 무성한 C3 식물들로 이루어지므로 그들의 뼈에는 C-13이 풍부하지 않다. 약 450만 년전 우리의 초기 호미닌 조상들은 침팬지와 비슷한 C3 식물 위주의 식생활을 한 듯하다. 그러다 기후가 변동을 거듭하던 4백만 년 전~1백만 년 전, 그들이 거주하던 지역은 대체로 더 건조한 초원이 되어갔다. 우리는 약 350만 년 전에 그들이 C3 식물과 C4 식물을 함께 먹고 있었음을 알고 있다. 아마 C4 식물로는 대체로 녹말이 풍부한 뿌리와 덩이줄기를 먹었을 것이다. 땅 밑에 감추어져 있지만 어디에나 존재한 그 식량 덕분에 고대 조상들은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환경에서도 인구를 불리며 번성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어 250만 년 전에 식생활이 둘로 갈라지게 된다. 매우 튼튼한 치아와 턱을 가지고 있는 일부 호미닌은 주로 C4 식물을 먹었다(아마 계절에 따라 풀잎, 씨, 사초, 구경 등을 먹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가 속한 호모속의 초기 구성원들을 포함한 다른 호미닌들은 C3 식물과 C4식물을 계속 함께 먹었다. 정기적인 육식이 우리 조상들의 뇌를 더 크게 진화시키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했다고들 하지만, 최근 몇몇 연구자들이 식물 식량, 특히 덩이줄기처럼 녹말이 풍부한 식물 식량의 역할이 그동안 간과되었음을 주장하고 나섰다. 하나는 문화와 관련이 있고 하나는 유전자와 관련이 있는 두 가지 중요한 발전이 녹말에 묶인 에너지를 꺼내 쓰는 데 엄청난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문화적 발전은 요리의 탄생이고 유전적 발전은 녹말을 분해하는 침 속 효소를 생산하는 유전자의 중복이었다. 이 유전자 중복은 1백만 년 전 이후의 어느 시점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침 속 아밀라아제는 날것인 녹말보다 조리된 녹말에 훨씬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이 유전자 사본의 수가 늘어난 것은 요리가 도입된 직후였을 것이다
- 작물화가 어디서 처음 시작되었든, 그 사건은 야생 감자를 인 간에게 훨씬 더 유용한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야생 감자와 작물 감자의 가장 인상적인 차이는 덩이줄기의 크기와 기는줄기의 길이에 있다. 기는줄기란 새로운 식물을 싹 틔우기 위해 수평으로 뻗는 가느다란 줄기를 말한다. 야생 감자는 기는줄기가 매우 긴데, 이는 새로운 식물이 부모 식물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증식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야생 감자는 덩이줄기가 작다. 작물화는 기는줄기의 길이를 단축 시키고 덩이줄기의 크기를 키웠다. 두 가지 특징 모두 야생에서는 적 응도를 떨어뜨리지만 수확을 쉽게 만든다. 밀의 질긴 이삭 가지 형질 과 비슷하게 야생식물에는 극도로 불리한 특징이지만, 인간과 협력 관계를 맺은 식물에게는 요긴하게 쓰이는 셈이다. 작물화된 감자에는 또한 일부 야생 감자의 맛을 매우 쓰게 만들고 심지어는 독성을 띠게 하는 글리코알칼로이드도 적다.
- 북유럽에서 감자를 늦게 받아들인 데는 금기와 미신 외에 더 세속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순수하게 기능적인 관점에서 보면, 로마 시대 이래 유럽 전역에서 시행된 삼포식 돌려짓기 제도에 감자를 끼워 넣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다른 농부들과 공유하는 큰 밭에서 농부 개개인이 어느 한 뙈기만을 바꾸려면 눈치가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은 감자 확장을 가로막고 있던 문화적 장벽들이, 폭삭 내려앉은 것까지는 아니었을지라도 점차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종교와 정치의 흥미로운 합작으로 감자가 남유럽에서 북쪽과 동쪽으로 진출한 것이다. 17세기 말, 위그노와 여타 개신교 집단이 프랑스에서 쫓겨나면서 가는 곳마다 은세공, 조산술, 감자 재배 같은 다 양한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가져갔다. 18세기 말에는 칠년전쟁의 여파속에서 감자의 또 다른 이점이 입증되었다. 이 작물은 다른 곡물들과 달리 땅속에 있기 때문에 불에 타고 짓밟힌 밭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 프랑스군에서 약사로 일했던 앙투안 오귀스탱 파르망티에r는 프로이센에 포로로 잡혔을 때 감옥에서 감자를 먹었다. 감자를 가축 사료로만 생각했던 그는 이런 대우에 좌절하기보다는 감 옥 식사로 나오는 감자의 영양적 가치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1763년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는 감자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명망 높은 사람들을 초대해 감자 위주의 만찬을 열었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감자 꽃다발을 선물했다. 하지만 프랑스 요리에 이 보잘것없는 덩이줄기의 자리를 확고히 자리매김한 계기는 흉작, 혁명, 기근 같은 연속된 악운이었다. 파르망티에의 개척자 정신은 오늘날 이런저런 형태로 감자를 포함하는 많은 프랑스 요리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지금 파리에 있는 그의 무덤은 그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그 식물에 둘러싸여 있다.
- 다른 아메리카산 수입 작물인 옥수수와 함께 감자는 유럽 인구의 놀라운 증가에 기여했다. 1750년에서 1850년까지 1백 년 사이에 유럽인구는 1억 4천만에서 2억 7천만으로 거의 두 배나 늘어났다. 잉카제 국 건설자들에게 열량을 제공했던 감자는 이제 중유럽과 북유럽 국가 들에서 성장하는 인구에 에너지를 제공하고 도시화와 산업화의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경제성장을 견인했다. 증기로 돌아가는 산업혁명 시대 기계들이 석탄을 먹고 일하는 동안, 노동자들은 값싸고 믿을 수 있고 양이 풍부한 감자를 먹고 일했다. 이어 유럽 정치권력의 균형은 따뜻하고 화창한 남쪽 나라들에서 춥고 칙칙한 북쪽 나라들로 옮겨가기 시작했는데, 18세기와 19세기에 유럽 열강이 부상한 이면에는 여러 복잡한 요인들과 함께 어두컴컴한 땅 밑의 감자도 한몫을 했다. 그리 고 20세기에 찾아온 위기 때도 감자는 군대 식량으로서 제 몫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용 배급품 중에는 안데스 지역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용했던 건조 감자가 있었다.
- 수렵채집 생활 방식은 농경에 비하면 불안정하다. 수렵채집인은 자연에 의존하는 반면, 농부는 수확량을 제어하고 남은 식량을 비상시를 대비해 저장할 뿐 아니라, 잉여 농산물로 부와 권력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연을 통제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심지어는 우리의 착각일수도 있다. 자연의 기본 방식이 변화인데도, 우리는 생물을 고정시켜 변화를 막으려 하고 있다. 우리는 재배종의 진화를 제한함으로써 재배종을 매우 취약하게 만든다.

6. 닭
- 닭 생산이 거대한 글로벌 산업으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전례 없는 규모의 선택 육종뿐 아니라, 육종에 대한 매우 엄격한 규제가 필요했 다. 오늘날 닭 육종과 닭 사육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닭이 낳은 알 을 암탉이 아닌 기계로 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이런 완전한 분업 을 가능하게 한다. 닭 농장주들은 흔히 닭을 대규모로 사육하지만 닭 을 육종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 일은 육종 기업이 한다. 그리고 아비 아젠Aviagen과 코브-밴트리스Cobb-Vantress라는 단 두 개의 거대 다국적기 업이 육종 시장을 지배한다. 이 회사들은 종자닭(순계) 집단을 매우 엄격하게 통제한다. 그들이 보호하는 순계에서 3대째에 이르러 생산된 '종계(부모계)를 육계 육종 농장에 팔면, 그곳에서 개별 유전 계통의 닭들을 함께 교배해 최종 잡종을 만든다. 그 병아리들은 육계 사육 농장으로 보내진다. 우리가 먹는 방목 유기 닭조차 이런 산업적인 육계 육종사에서 온 것일 수 있다. 전통적인 유기농 시장을 위해 천천히 자라는 닭을 전문으로 취급 하는 더 작은 육종 회사들이 몇 곳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닭은 빨리 자라서 단 6주 만에 도축된다. 사실상 우리는 너무 커진 병아리를 먹는 셈이다. 심지어 뼈끝이 연골에서 뼈로 변하기도 전의 병아리 말이 다. 순계인 증조할머니 닭 한 마리가 3백 만 마리의 육계 후손을 볼 수 있고, 이들은 성체가 되지 못한다.
- 동물의 대사뿐 아니라 행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호르몬은 가축 닭의 행동에서 필수적인 한 측면에 기여했다. 바로 모성 본능의 완 전한 상실이다. 이는 야생에서라면 분명 생존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 다. 알을 낳은 뒤 알을 두고 가버리는 암탉은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로 전달할 확률이 낮다. 하지만 가축 닭에서는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알 낳기를 멈추고 알을 품는 암탉은 달걀 생산에 득이 될 리 없다. 야생의 붉은산닭은 1년에 달걀을 열 개도 낳지 못하는 반면, 오늘날의 가축화된 산란계는 3백 개를 낳을 수 있다. 알을 품는 본능이 어떤 식으로든 닭에게서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닭 농장의 농부들이 인공부 화 기술을 개발했을 때 비로소 가능해졌다. 최초의 달걀 부화기는 오래전,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닭의 모성 행동이 눈에 띄게 사라진 것과 관련이 있는 유전적 변화는 훨씬 더 최근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밀과 옥수수의 비탈립성 이삭 가지처럼 알 품는 본능의 상실도 야생에서는 성공적인 번식을 방해하지만, 가축화에서는득이 된다. 유전학자들은 이 행동 변화의 유전적 바탕을 확인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들은 모성 본능에 큰 차이를 보이는 두 품종의 닭에서 유전체를 서로 비교했다. 하나는 알 품는 행동을 상실한 산란용 순계로 잘 알려져 있는 화이트 레그혼White Leghorn 품종이고, 다른 하나는 알 품기를 좋아하는 실키silkie 품종(오골계)이다. 유전학자들은 두 품종의 유전체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두 부위를 찾아냈다. 하나는 5번 염색체에, 다른 하나는 8번 염색체에 있었다. 두 부위 모두, 이번에도 갑상샘 호르모 시스템과 관련이 있었다. 게다가 5번 염색체상의 부위는 TSH 수용체 유전자가 있는 곳이다. 이 유전자의 몇 가지 변화가 1천 년 전 닭의 계군들 사이로 퍼져나갔고, 지금은 산란용으로 육종된 닭과 육계로 육종된 닭 모두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TSH 수용체 유전자에는 더 최근에 일어난 변화도 있는 듯한데, 이는 화이트 레그혼과 실키 같은 현대 품종들에서 나타나는 달걀 생산과 모성 행동의 차이를 설명해준다. 결과적으로 닭의 갑상샘호르몬 시스템을 조작함으로써 한 번의 유전적 변화로 두 가지 표현형 변화를 일으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둔 셈이다. 이번에도 우리는 한 특정 형질에 대한 선택이 또 다른 형질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엔 하나의 유전자가 포동포동한 살집과 산란 행동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유전자, 몸, 행동에 일어난 비교적 최근의 변화들은 가축화가 실제로는 하나의 단독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임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유전자 편집 기술의 도래는, 교황 칙령의 힘을 빌려야 했던 10세기보다 훨씬 빠르게 유용한 변화가 도입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7. 쌀
- 벼의 작물화가 시작된 시점은 중요하다. 같은 시점에 아시아의 반대편 끝에서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자라는 야생 곡류 호밀, 보리, 귀리, 밀를 경작하기 시작했다. 1만 1천 년 전~8천 년 전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자라던 그런 곡류들은 주곡이 되었고, 조와 쌀이 극동지역에서 그랬듯이 야생 풀에서 작물로 변모했다.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절묘하다. 아시아의 정반대 쪽에사는 두 집단의 수렵채집인들이 동시에 야생 풀을 좋아하게 되고 그 풀에 점점 더 의존하다가 결국에는 그것을 작물로 경작하게 되었다. 인간 행동에 일어난 이런 동일한 변화들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 65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양쯔강 계곡에서 동시에 작동한 뭔가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뭔가'는 기후변화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지막 빙하기가 절정에 이른 춥고 건조했던 시기, 야생 벼는 동아시아 열대지방의 습한 레퓨지아에서만 자랐을 것이다. 그러다 약 1만 5천 년 전부터 기온이 올라가면서 대기 중에 증가하는 이산화탄소에 힘입어 야생 벼가 퍼져나간다. 빽빽하게 자라고 낟알이 촘촘하게 맺히는 야생 곡류는 아시아 전역의 수렵채집인들에게 든든하고 수확이 용이한 식량을 제공했다. 유리한 기후 조건 아래 자라고 있던 야생 벼와 조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매력적인 식량 후보였을지도 모른다. 아마 옥수수의 경우처럼, 작물화 과정에서 모든 개체군들이 갖게 되는 형질들을 이미 얼추 지니고 있던 식물 낟알이 더 크고 곁가지가 적은 식물은 이미 훌륭한 식량원처럼 보였으며 수확하기도 쉬웠으리라. 하지만 약 1만 2900년 전, 춥고 건조한 시기가 1천 년 이상 지속된 신드리아스기가 왔다. 야생 식량의 감소에 직면한 사람들은 필사적으 로 자원을 통제하려 했을 테고, 이미 의존하게 된 야생 풀을 경작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신드리아스기 직전에 인구가 증가해 있었기에, 기후가 악화하기 시작했을 때 자원 압박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서아시아의 밀과 동아시아의 쌀, 그리고 아마도 중앙아메리카의 옥수수까지, 모두 신드리아스기를 계기로 인류와 손을 잡고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동안 이어지는 동맹을 맺었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의존할 수 있는 자원인 곡류는 식생활에서 더 중요해졌고, 결국에는 주곡이 되었다. 경작은 그다음이었을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관과는 매우 다른 관점이다. 독창성과 창의력에 힘입은 승리의 전진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일. 어려운 시기에 처해 어쩔 수 없이 생활 방식을 바꾸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순응한 사람들, 아시아의 정반대쪽에서 동시에 곡류가 주곡이 되고 그런 다음 경작이 이루어진 상황도, 선택이 아니라 기후 악화가 가져온 필연으로 본다면 충분히 납득이 된다.
- 콜럼버스의 '발견의 항해’ 이후, 작물화된 벼는 대서양 교역의 일부
가 되어 구세계에서 신세계로 건너갔다. 오늘날 열대 국가에 거주하
는 라틴아메리카인들에게 쌀은 설탕 다음으로 중요한 단일 열량 공
급원이다. 쌀과 콩의 조합은 카리브해 지역의 요리에서 특히 상징적
이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만, 둘의 제휴는 비교적 최근에 시작되
었다. 두 재료를 섞은 요리는 겨우 몇 백 년 전의 발명품으로 세계화의 초기 요리'로 불렸다. 하지만 기본 개념인 풀의 씨와 콩을 섞는다는 생각은 농업이 시작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있다. 두 음식은 맛과 질감에서 서로를 보완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을 한다. 바로 서로의 결핍을 벌충하는 것이다. 둘의 결합은 인체가 필요로 하지만 만들 수는 없는 모든 아미노산 단백질의기본단위 - 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단백질 꾸러미를 창조한다.

8. 말
- 그건 다른 존재와의 아주 특별한 동반자 관계였다. 인간과 말은 수 백 년에 걸쳐 서로를 알아가고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알아내고, 신뢰를구축했다. 이 관계는 말의 타고난 성향, 그들의 본성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뭔가에 의존하는 듯도 하다. 즉, 그들도 개와 마찬가지로 종을 뛰어넘는 동반자 관계를 적극적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타고나기를 사교적인 생물이다. 우리가 가는 도중에, 또는 야영지에 멈출 때마다 조리타는 다른 말들에게 가까이 가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출발 준비를 할 때는 다른 말들을 가볍게 밀기도 했다. 머리로 그들의 옆구리와 어깨를 밀고 코를 비볐다. 다른 말들도 조리타에게 똑같이 했다. 우리는 말 몇 마리를 야영지에 묶어둔 채 떠났는 데, 산을 내려와 야영지로 돌아왔을 때 조리타는 그들을 보자마자 신 이 나 히이잉 하고 울었다. 그들도 똑같이 응답했다. 누가 봐도 서로를 다시 만나 기뻐하는 행동이었다.
- 소 치는 사람들은 야생말을 아직은 길들이지 않고 평소와 같이 사냥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앤서니David Anthony는 얼음장 같은 기후가 말을 길들이게 된 동인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소와 양의 경우, 눈 속에서 먹이를 파먹는 일에는 젬병이다. 눈 위에 얼음이 덮이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물을 얻기 위해 얼음을 깨지도 못한다. 하지만 말은 발굽을 이용해 이 모두를 한다. 말은 차가운 초원에 잘 적응된 생물이다. 앤서니에 따르면, 인류는 6200년 전~5800년 전 기후가 나빠졌을 때 소떼가 혹독한 겨울을 헤쳐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고 스텝의 말과科 동물을 잡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가능성으로, 말을 사냥하는 문화에서 자연스럽게 말을 길들이게 되었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동안 말을 사냥해왔고, 그래서 말을 잘 이해했던 사람들이 다른 야생말을 사냥하려는 목적으로 말을 잡아서 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 너무 의도적이고 너무 전략적인 설명 같다. 야생말의 등에 처음 올라탄 이들은 그동안 상상도 못했던 일, 바보 아니면 용감한 자만이 할 수 있었을 이 일을 해보라고 서로를 부추긴 10대들이었음이 틀림없다.
- 말을 탐으로써 일어난 진전은 말의 가축화만이 아니었다. 기마를 통해 인간은 다른 동물들을 훨씬 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한사람이 걸어서 다니고 개의 도움을 받을 때 2백 마리의 양을 기를 수 있다면, 말을 타고 개의 도움을 받는 경우엔 5백 마리를 통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훨씬 더 넓은 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영역 확장은 분명 목축인들 사이에 무력 충돌을 유발했을 것이고, 따라서 동맹을 맺거나 선물을 주는 것이 중요해졌을 것이다. 고고학 기록에 구리와 금 으로 만든 보석이 급증하는 것은 사람들이 전과 달리 지위를 추구하 고 부를 과시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랐다. 바로 이 시점에 마제석기인 전곤도 출현하기 시작하는데 그중 일부는 말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기마와 전투가 초기 단계부터 밀접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식 기병대는 약 3천년 전 철기시대에 와서야 출현하지만, 다른 부족의 동물을 훔치기 위한 마상 습격과 내전은 말을 타기 시작함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 유전자분석은 진정한 말의 가계도를 복원하고 그 연대를 밝히는 이을 가능하게 했다. 가축 말의 야생 조상들은 가축화되기 훨씬 전인 약 4만 5천 년 전, 프르제발스키 말의 조상들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계통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계통이 갈라진 뒤에도 어느 정도의 이종교배는 계속되었다. 상호 유전자 이동의 증거가 오늘날의 유전체에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종교배의 대부분이 일어난 시점은 오래 전인 약 2만년 전으로, 마지막 빙하기가 정점에 이르기 전이었다. 하지만 빙하기 이후에도 프르제발스키 말의 유전자가 가축 말의 조상들로 일부 유입 되었으며, 심지어는 가축화 이후까지도 유전자 이동이 계속되었다. 더 나중인 20세기 초반에는 거꾸로 현대 말에서 프르제발스키 말로 유전자가 이동한 증거가 존재하는데, 가축 말 유전자가 프르제발스키 말로 유입된 이 마지막 사건은 인간이 프르제발스키 말을 기르며 포획상태에서 교배시키기 시작한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두 종류의 말 집단이 실제로 교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둘은 별개의 종으로 간주될 만큼 형태적으로나 유전적으로나 뚜렷이 구분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염색체 개수도 다른데, 염색체 개수 차이는 흔히 이종교배를 가로막는 완벽한 장벽으로 간주된다. 가축 말은 예순네 개의 염색체(서른두 쌍)를 가지는 반면, 프르제발스키 말은 예순여섯 개(서른세 쌍)를 가진다. 포유류의 난자 또는 정자 가 만들어질 때 정자와 난자에는 몸의 다른 세포들에 있는 유전물질의 절반만 들어가게 되고, 수정 시 난자의 유전물질이 정자의 유전물질과 결합해 다시 완전한 한 벌을 만든다. 난자에서 온 각 염색체가 정자에서 온 짝과 쌍을 이루어야 수정란이 분열을 시작해 배아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 가축 말과 프르제발스키 말이 짝짓기하면, 수정란은 서른두 개짜리 염색체 한 벌과 서른세 개짜리 염색체 한 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식으로든 (심지어 유전학자들조차 깜짝 놀라는 데) 염색체들은 쌍을 이룬다. 쌍을 이루지 못하면 생식력을 갖춘 자손 이 태어날 수 없다. 그리고 현대 가축 말과 프르제발스키 말의 유전체에 남겨진 이종교배의 흔적들은 그 자손들이 생식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후대를 생산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말과 종들 사이에서 탄생한 잡종은 잘 알려져 있다. 버새는 수말과 암탕나귀 사이에서 탄생한 잡종이다. 노새는 반대로 암말과 수탕나귀 사이의 잡종이다. 버새와 노새는 대개 불임이지만, 이따금씩은 그들도 번식에 성공한다. 당나귀가 서른한 쌍의 염색체를 가지고 말이 서른두 쌍의 염색체를 가진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역시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말과 종의 유전체에는 훨씬 더 놀라운 사건의 증거가 들어 있다. 바로, 서른한 쌍의 염색체를 가진 소말리 당나귀와 스물세 쌍의 염색체를 가진 그레비얼룩말 사이에 이종교배와 유전자 이동이 일어난 일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생물학의 작동 방식과 관련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종의 경계에는 유전체학 이전에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구멍이 많은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염색체 개수의 차이조차 우리 생각과 달리 번식의 장벽이 되지 못하는 듯하다.
- 말 소유자들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 적어도 짐작은 하고 있었 을 말의 매혹적인 행동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과학 연구에 의해 이제 막 해명되기 시작했다. 증거들에 따르면 고양이와 개는 신체와 음성 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듯하다. 실제로 개는 어떤 것이 행복한 사람의 얼굴인지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들도 표정을 지을 뿐 아니라 다른 말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최근 한 연구에서는 말들에게 화난 표정, 찡그린 표정, 행복한 표정을 짓는 사람의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웃는 얼굴에 비해 화난 얼굴을 볼 때 말의 심박수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말들이 사람의 감정을 읽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능력을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오래전부터 다른 말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해석할 수 있었던 말들이 가축화된 뒤 인간에 대해서도 똑같이 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말이 인간과 지내며 학습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예컨대 분노를 나타내는 다른 행동 단서들을 화난 사람의 얼굴과 연결 짓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 능력은 그들의 야생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몸짓에서 감정을 유추하는 타고난 성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신중하게 설계된 또 다른 최신 연구에서는, 말이 우리 행동을 해석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행동에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말의 몇몇 몸짓들은 실제로 의도를 가진 의사소통으로 보인다. 실험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먹이가 담겨 있지만 가닿을 수 없는 양동이를 향해 목을 쭉 늘이는 말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들은 인간 실험자를 쳐다본 뒤 양동이를 가리켰고', 그런 다음 다시 실험자를 쳐다보았다. 실험자가 멀리 가버리면 그런 행동을 멈추었으며, 실험자가 가까이 다가오면 시선을 더 자주 교차시켰다. 또한 말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흔드는 몸짓을 이용해 주의를 끌었다. 이는 말들이 의사소통을 원할 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들의 신호를 수신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말들이 가축화되는 단 몇 천 년 사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진화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것이 타고난 능력일 가능성도 낮다. 그보다 말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다른 말들과 그리고 지금은 인간과도 상호작용 할 때 이런 종류의 행동을 학습할 수 있는 유전적 소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즉, 그 행동 자체는 아닐지언정, 행동을 발달시킬 수 있는 성향은 타고난다는 얘기다. 말이 개처럼 사교적인 본성을 가진 동물이라는 것은 말이 또 다른 사교적인 동물과 협력하기에 적합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9. 사과
-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는 작은 열매를 맺는 나무들의 한 계통이 곰이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과가 열리는 새로운 종으로 바뀐다. 작은 사과는 매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소화관을 그대로 통과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나올 경우 성공적으로 발아할 확률이 낮다. 사과안에 박힌 사과 씨는 발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불리하게 생겨먹었나 싶겠지만, 새로운 사과나무가 부모 나무 밑에서 싹을 틔워 부모와 경쟁하는 것을 막는 방편이다. 큰 사과의 경우 씹어 먹을 수 밖에 없으므로 씨가 노출된다. 발아로 가는 필수적인 단계다. 이빨에 깨물려 떨어져 나온 사과 씨는 장을 그대로 통과하고, 그것이 항문으로 나오면 부모에게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장소에서 새로운 나무가 될 확률이 높다. 곰의 항문에서 나온 사과 씨는, 말하자면 비옥한 두엄더미에 실려 숲 바닥에 떨어지는 셈이다. 하지만 곰 배설물이라는 비료가 있다고 감안해도, 숲 바닥은 싹을 틔우는 데 이상적인 환경이 아니다. 다행히 숲속에는 사과 씨를 파묻어줄 다른 대형 포유류가 존재한다. 멧돼지는 흙을 헤집고 휘젓는 위대한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씨 가 성공적으로 발아할 확률을 높인다. 하지만, 갈색곰(그리고 멧돼지)이 중앙아시아의 숲에 사과 씨를 퍼뜨리는 놀라운 일을 해냈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해도, 이 과일이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마침내 전 세계로 흩어지도록 촉진한 것은 인간과 그들의 말이었다.
- 밀과 보리는 서쪽에서, 조는 동쪽에서 중앙아시아로 왔다. 이제는 중앙아시아가 나머지 세계에 선물을 줄 차례였다. 야생 사과나무 숲을 관통하는 원시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하던 사람들과 그들의 말은, 사과를 안장주머니에 넣고 다니거나 먹으며 이를 고향 밖으로 널리 퍼뜨렸다. 따지고 보면 사과나무의 열매는 씨를 퍼뜨리는 수단으로 진화한 셈이다. 사과가 맛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니, 자신의 씨를 널리 퍼뜨리게 하려는 방책이었던 것이다. 인간과 말은 곰만큼이나 사과를 좋아한다. 그리고 말은 곰과 멧돼지의 일을 둘 다 할 수 있다. 사과의 과육을 씨에서 떼어내고 그 씨를 퇴비 더미에 파묻는 일뿐아니라 발굽으로 땅 속에 씨를 박아 넣는 것까지. 이렇게 해서 사과는 자유롭게 꽃가루받이가 되고 자연적으로 씨뿌리기가 이루어지는 묘목으로서 널리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본질적으로 야생식물이었지만, 두 발로 걷고 네발로 걷는 친구들이 그들을 도왔다.
- 접붙이기는 우리가 한 그루 '부모'에게서 수백 그루의 사과를
복제할 수 있음을 뜻한다(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부모가 아니라 일란성쌍둥
이다). 접붙이기에는 다른 이점들도 있다. 만일 씨를 심는다면, 그것이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수년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미성숙한 대목에 성숙한 나무의 접가지를 붙이면 금방 열매가 맺히기 시작할 것이다. 미성숙한 단계를 건너뛰는 것이다. 언제든 새로운 재배종을 대목에 붙일 수 있다. 대목을 신중하게 고르면 나무의 크기에도 영향을 미쳐, 원래는 거대한 나무인 재배종에서 난쟁이나무를 만들 수도 있다. 어떤 대목은 재배하고자 하는 품종에는 없는 유리한 특징, 예컨대 해충 저항성이나 가뭄 저항성을 가져다준다. 게다가 접붙이기는 병든 나무를 살리는 방법으로도 이용된다.
-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근동 지역에서 유럽 전역으로 달콤하고 통통한 재배종 사과가 - 대체로는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아 - 확산된 것을 사과의 최초의 대규모 확산으로 볼 수 있다. 로마제국의 몰락과 함께 과수원은 버려지게 되지만, 서유럽의 경우 사과는 수도원 정원에서 살아남아 12세기에 시토 수도회의 확장과 함께 다시 한번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98년 웨일스의 바드시섬에서, 붉은색 황금사과가 열리는 사과나무 한 그루(아마 그곳 수도원 과수원의 마지막 생존자였을 것이다)가 자라고 있는 것이 발견되어 지금은 다시 재배되고 있다. 한편 동유럽에서는 사과가 8세기 비잔틴제국의 몰락을 딛고 살아남아 이슬람 세계에서 신중하게 관리 재배되고 있었다. 그러다 16~18세기, 유럽 식민주의 국가들이 남북 아메리카와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태즈메이니아에서 재배종 사과를 심기 시작하면서 사과의 두 번째 큰 확산이 일어났다. 1835년 칠레에 상륙한 다윈은 사과 과수원으로 둘러싸인 발디비아 항구를 발견했다. 태즈메이 니아는 훗날 '사과 섬'으로 알려지게 되니, 말하자면 아발론의 대척점 인 셈이다. 사과의 두 번째 '디아스포라'는 온대 전역의 다양한 기후에 적합한 엄청나게 다양한 품종의 사과를 낳았다. 북아메리카에서 사과가 성공한 것은 '야생으로의 회귀'가 수반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야생으로 돌아 간 사과는 씨에서 묘목이 자라났고, 그런 다음에 혹독한 겨울을 나야 하는 새로운 서식지에서 발육이 어려운 개체들이 자연선택에 의해 제거되었다. 자연선택의 체질을 통해 새로운 변종들이 등장한 한편, 재배 품종들은 아메리카 토종 꽃사과들과의 교잡으로 현지의 유용한 적응을 가져왔다. 사과는 새로운 서식지에 맞게 자신을 개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과가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 묘목에 대한 자연선택이 다시 한 번 이루어진 결과, 우리가 아는 현대 재배 품종들이 19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 사과의 다양성은 현대 재배종에서는 비록 억제되어 있지만, 다른종에 비하면 여전히 인상적인 수준이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식물학 탐사 보고서들은 바빌로프가 1929년 알마아타 주변 과수원들을 방문했을 때 내린 결론이 사실임을 확인해주는 듯 보였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먹는 재배품종 사과의 이 엄청난 다양성이 모두 카자흐스탄의 고대 과수원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10. 인류
- 수만 년 동안 호모 사피엔스는 대체로 아프리카 대륙에 한정되어 살았지만, 그런 다음 그 집단은 범위를 확장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최근에 이루어진 매우 포괄적인 유전체 전체 조사는 현생인류가10만 년 전에서 5만 년 전 사이에 일어난 한차례의 대이주로 아프리카를 빠져나와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로 퍼져나갔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아프리카를 떠난 뒤 개척자들은 갈라졌다. 하나의 흐름은 동쪽으로 향해 인도양 해안을 따라 퍼져나가 결국 동남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에 도달했다. 또 하나의 흐름은 북쪽과 서쪽으로 향해 서아시아와 유럽으로 갔다. 동쪽으로 간 이주자들은 아마 훨씬 더 이전에 일어난 이주 때 아프리카에서 나와 오스트레일리아와 파푸아뉴기니까지 도달한 현생인류의 자손들과 만났을지도 모른다. 현재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화석 기록이 너무 적어서, 초기에 동쪽으로의 이주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된 유럽 토착민인 네안데르탈인과의 교잡 시점은 5만 년 전~6만 5천 년 전으로 추정된다. 현생인류가 아프리카 밖으로 확산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이다. 비아프리카인들은 평균 2퍼센트 정도의 네안데르탈인 DNA를 가지고 있는 반면, 아프리카 계통 사람들의 유전체에는 네안데르탈인 DNA가 거의, 혹은 아예 없다. DNA 검사 결과, 나에게는 2.7퍼센트의 네안데르탈인 DNA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나는 '순혈'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다. (아무도 순혈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다. 실제로 종과 아종의 '순혈성'이라는 개념은 환상이요, 현대 유전학이 마침내 잠재운 19세기의 유물이다.) 동아시아인은 대체로 서아시아인이나 유럽인보다 약간 더 많은 네안데르탈인 DNA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추측해볼 수 있다.
첫째는 동아시아인의 조상들이 서유럽인 집단에서 갈라져 나온 뒤 네안데르탈인과 다른 집단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교배했을 가능성이다.
둘째, 우리는 네안데르탈인 DNA가 현생인류 유전체에 처음 들어온 뒤로 약한 자연선택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서쪽 집단과 동쪽 집단 모두의 조상들은 애초에 네안데르탈인에게서 이입된 같은 양의 DNA를 가지고 있었고, 그런 다음 자연선택이 서유라시아인 유전체에서 더 많은 양을 제거했을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서쪽 집단에 네안데르탈인 DNA가 적은 것은 네안데르탈인 DNA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북아프리카 이주 집단들과 섞임으로써 일어난 희석 효과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현생인류 조상들과 엮인 것은 네안데르탈인만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 태평양 남서쪽 멜라네시아의 섬들에 사는 현대인의 유전체에서 또 다른 구인류 집단과의 교잡 흔적이 발견된다. 멜라네시아인 유전체 DNA 중 3~6퍼센트는 또 다른 유형의 조상에게서 온 것이다. 그 조상은 시베리아의 데니소바 동굴Denisova Coin에서 나온 손가락 뼈 한 점과 치아 두 점으로만 알려져 있는 종이다. 화석 증거가 너무 적어서 우리는 이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뼈와 치아에서 추출한 고대 DNA를 통해 그들이 현생인류도, 네안데르탈인도 아니라는 점만은 알 수 있다. 이 사람들에게 그 들만의 종명을 부여하기에는 화석 증거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현재로 서는 그들은 그냥 '데니소바인' 이라고 부른다. 현생인류와 데니소바인 사이의 교잡은 아마 오스트레일리아와 태평양의 섬들로의 이주가 있기 전에, 아시아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한편 아프리카 내 다른 미확인 구인류 종과의 교배를 암시하는 증거도 존재한다. 오늘날의 아프리카 유전체에는 다른 고대 인류들에 대한 기억이 새겨져 있다. 비록 그 유전자 유령들과 연결 지을 만한 화석 증 거는 아직 없지만 말이다.
- 흰 피부가 북쪽 지방의 햇빛 부족에 대한 적응으로 진화했다는 비타민 D 가설은 설득력 있게 들린다. 오늘날 영국과 북아메리카에서 피부가 검은 사람들이 피부가 흰 사람들보다 비타민 D 결핍에 더 잘 걸린다는 관찰 사례는 분명 이 가설을 뒷받침해준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을 대상으로 측정한 비타민 D 수치는 가설대로 착착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비타민 D 수치와 햇빛 노출을 추적한 연구들은 예상치 못한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았다. 예측한 대로 햇빛에 대한 노출이 증가할수록 (어느 정도까지는) 비타민 D 수치가 증가했다. 옷으로 몸을 덮으면 혈중 비타민 농도가 낮아지는 것도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얇게 바른 자외선 차단제가 일광 화상은 막아줘도 비타민 D 생산을 줄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은 검은 피부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뜻밖에도, 같은 양의 햇빛에 노출되었을 때 비타민 D 생산이 촉진되는 정도는 피부가 검은 사람들과 흰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이 연구는 분명 피부가 검은 사람들도 피부가 흰 사람들만큼이나 효과적으로 비타민 D를 만들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새로운 결과는 언뜻 인간의 피부색 진화에 대한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 인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설명이 필요한 몇 가지 관찰 사례가 아직 남아 있다. 토착민의 피부색은 실제로 북쪽에서 더 하얗고, 북쪽 나라들에서는 예상대로 피부가 검은 사람들이 비타민 D 결핍을 더 많이 겪는 경향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관찰 사례는 '진화적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을 초래한다. 특정 돌연변이가 이점을 줄 때만 진화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은 거의 중립적인 돌연변이가 '유전적 부동'이라는 과정을 통해 개체군 내로 퍼지면서 진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것은 사실상 무작위 과정으로, '우연'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의 조상들이 북쪽으로 이주할 때 일어난 일을 짐작해 보면 대략 이렇지 않았을까. 열대에서 일광 화상과 피부암을 막아주므로 자연선택 된 검은 피부가 더 이상 그렇게 강력한 선택을 받지 않게 되었을 것이고, 그런 다음 더 흰 피부를 만드는 돌연변이가 우연히 발생했을 때 제거되지 않고 유전적 부동을 통해 퍼져나간 것이다. 실제로 적도에서부터 북쪽 위도로 갈수록 피부색이 일정한 비율로 밝아지는 것은 아니며, 밝은 피부색은 - 아마 훨씬 나중에 유럽과 아시아의 극북 지역 집단들에서만 진화했다. 유럽과 아시아의 나머지 지역은 위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하다.
- 약 1만 1천 년 전 서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농업이 거의 동시에 출현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을 것이다. 세계적인 기후변화가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사람들과 초원에 영향을 미쳤다. 1만 5천 년전부터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하면서 식물 생산을 촉진했다. 야생 곡식이 저절로 밭을 이루어 인간은 줍기만 하면 되었다. 그 런 다음 1만 2900년 전에서 1만 1700년 전까지 이어진 신드리아스기 동안 기후가 악화되었다. 사냥꾼이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이 많아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쉽게 딸 수 있는 열매와 딸기는 얼마 되지 않았다. 수렵채집인은 예비 자원에 기댔을 것이다. 채집하기 어렵지만 열량이 풍부한 풀의 씨앗들이 그중 하나였다. 서쪽에서는 귀리, 보리, 호밀, 밀을 먹었고, 동쪽에서는 기장, 조, 쌀을 먹었다. 나투프인들이 사용한 낫과 돌절구처럼 수확의 효율을 높이고 딱딱한 씨를 가루로 빻는 도구는 작물화와 농업 이전에 생겼다. 기후가 좋아지기 시작할 무렵에는, 곡물에 대한 의존이 이미 원시 농업으로 발전해 있었다. 이러한 초기 작물화 중심의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메소포타미아의 광대한 '농업의 요람'은 서유라시아 신석기의 시조 작물들을 제공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의 비옥한 땅에서 최초의 작물인 콩, 렌틸콩, 비터베치, 아마, 보리, 엠머밀, 일립계밀이 나왔다. 황허강과 양쯔강 주변의 땅에서는 조, 쌀, 대두가 나왔다. 하지만 그 밖에도 전 세계의 많은 다른 장소에서 작물화가 시작되었다. 신드리아스기 말엽, 아프리카의 남쪽 절반에 살던 사람들이 북쪽으로 이주해 비옥한 녹색 사하라를 점유했다. 그들은 사냥한 동물들과 더불어 과일, 덩이줄기, 곡물을 먹고 사는 수렵채집인들이었다.
- 1만 2천 년 전 이래로 맷돌을 사용해왔던 그들은, 곧이어 토종 수수와 진주조를 경작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하라의 농업은 약5500년 전 계절풍이 남쪽으로 이동해 비옥했던 땅을 사막으로 바꾸었을 때 전멸했다. 사탕수수는 약 9천 년 전 뉴기니에서 작물화되었고, 테오신트는 동시대에 메소아메리카에서 옥수수로 작물화되었다. 찾으면 찾을수록 더 많은 작물화 중심이 나타나는 듯하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매혹적이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신석기의 다른 요들로부터 시선을 빼앗는다. 바빌로프는 일곱 개의 작물화 중심을 찾아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전 세계에 10여 곳의 작물화 중심이 있다고 상정했다. 더 최근 연구들은 스물네 곳이라고 주장한다. 종 길들이기는 서로 다른 많은 장소에서 여러 차례 일어났다. 그런 장소 가운데 상당수가 바빌로프가 지적했듯이 산악 지대였다. 산악 지대는 다양성이 풍부한 경향이 있는데, 고도에 따라 물리적 조건이 달라지는 탓이다. 하지만 작물과 가축이 되기 위해서는 타이밍이 맞아야 했을 뿐 아니라 인간과 장단이 맞아야 했다. 인간이 생활 방식을 바꾸려는 시점에 인간의 개입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종. 그것이야말로 이 결정적 결속이 맺어지게 만든 승리의 조합이었다. 사실 의식적인 의사 결정이 모종의 역할을 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 작물화는 많은 경우, 무의식적인 과정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종들이 서로 만나 우연히 부딪치고 가까워지면서 진화적 역사가 한데 얽히게 되었다. 우리는 인류를 지배자로 여기고 다른 종들을 자발적인 하인, 나아가 노예로 여기는 데 너무 익숙하다. 하지만 우리가 동식물과 이런 협약을 맺은 방식은 다양하고도 미묘했고, 공생과 공진화 상태로 유기적으로 진화했다. 이 동반자 관계가 구축되기 시작할 때 의도가 개입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인류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동물을 길들이는 세 가지 경로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어떤 사건' 이라기보다는 길고 오랜 진화적 과정이었다.
한 경로는 동물이 인간을 선택해 우리에게서 자원을 빌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며 우리와 공진화하기 시작했고, 지난 몇 백 년 사이 창조된 개 품종들에서와 같은 인간 주도적인 선택이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길들여지게 되었다. 개와 닭이 이런식으로 우리의 동맹이 되었다. 두 번째 경로는 먹잇감 경로다. 이 경우에도 초반에는 동물들을 길들이려는 그들을 자원으로서 관리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양, 염소, 소 같은 중대형 초식동물이 이 경로를 따라 처음에는 먹잇감으로 사냥되고 이후에는 사냥감으로 관리되다가, 마침내 가축으로 길러졌을 것이다. 마지막은 가장 의도적인 경로로, 인간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동물을 잡아 길들인 경우다. 고기 외에도 뭔가 유용한 쓰임새가 있어 보인 가축들이 대개 이런 경로를 따랐다. 승마용 말로 길들여진 말이 대표적 사례다.
- 차탈회위크에는 그보다 앞선 수렵채집 집단들에 비해 생리적 스트레스와 건강 문제가 증가한 정황이 나타난다. 곡물을 중심으로 하는 식생활은 풍부한 열량을 공급하지만, 몸이 필요로 하는 모든 필수아미노산과 비타민까지 제공할 수는 없다. 다른 유적들처럼 성장률이 감소한 증거가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뼈 감염을 포함한 낮은 수준의 생리적 스트레스뿐 아니라, 녹말이 풍부한 식생활과 관련이 있는 듯한 높은 충치 발생률을 짐작하게 하는 충분한 증거가 존재한다.
- 오늘날의 산업화된 농업에서는 농업의 중노동을 인간 대신 기계가 짊어진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수렵채집인 조상들의 예비 식량이었던 곡류가 주식의 자리를 차지한 식량 생산 시스템에 속박되었다. 차탈회위크에 살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세계화된 식품 공급 덕분에 중요한 비타민의 다른 공급원들을 이용할 수 있지만(게다가 지금은 유전자 편집을 통해 곡물에 비타민을 집어넣을 수도 있다), 우리의 치아는 여전히 신석기 혁명의 영향으로 고통 받고 있다. 가장 해로운 악당 중 하나는 옥수수에서 파생된 액상 과당이다. 액상 과당은 신석기 유산의 최선과 최악을 담고 있는 식품이 아닐까 싶다. 즉, 환상적인 에너지 공급원임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그 위험을 이 제 막 알아차리기 시작한, 건강을 위협하는 교활한 적이기도 하다. 옥 수수 그 자체는 인류 역사에 막대한 역할을 했다. 잉카와 아스테카 문 명을 건설하는 연료였고, 콜럼버스가(그리고 아마도 캐벗이) 신세계에 도 착한 뒤로는 세계로 진출했다. 무게로만 따지자면, 오늘날 우리는 다 른 어떤 곡물보다 옥수수를 많이 생산한다. 옥수수는 우리가 먹는 음식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인간이 먹는 양의 네 배를 가축을 먹이기 위해 재배하고, 생물 연료를 만들기 위해 또다시 그만큼을 재배한다.
- 우리가 길들인 동물들과 우리 사이에는 또 하나의 신기한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 우리 역시 동물이 길들여졌을 때 등장한 형질들 중 일부를 드러내보이는 것 같다. 개처럼, 그리고 벨라예프가 길들인 은여우처럼, 우리는 선조들보다 작은 턱과 치아, 납작한 얼굴을 지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남성의 공격성이 줄었다. 이 일군의 연관된 형질들을 가축화 증후군domestication syndrome'이라고 부른다.
- 현생인류의 초기 화석들을 보면 대체로 최근 화석에 비해 눈썹 위 융기부가 훨씬 발달한 모습이다. 이러한 눈썹 위 융기부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 실제로 언제였는지, 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을까? 미국의 한 진화인류학 연구 팀이 이를 알아내고자 두개골 표본들 을 측정하고 비교했다. 표본의 일부는 20만 년 전~9만 년 전에, 일부는 8만 년 전 이후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며, 그 외의 많은 표본들은 지난 1만 년 내에 드는 최근 표본들이었다. 연구 팀은 9만 년 전보다 오래된 표본들이 이후 표본들에 비해 두개골의 눈썹 위 융기부가 더 발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얼굴의 길이도 오래된 표본에서 더 길었다. 얼 굴 모양의 여성화'는 홀로세까지 계속되었다. 테스토스테론 수치의 변화가 얼굴 모양의 이런 변화를 매개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양성 모두에서 나타나는 더 가냘프고 여성적인 두개골은 인간집단이 커짐에 따라 사회적 관용이 자연선택 되면서 생긴 부산물일 수 있다. 그런 선택이 어떤 식으로 일어났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유전 학자 스티브 존스의 기발한 표현처럼, 진화는 “두 번의 시험을 치르는" 셈이다. 단순히 살아남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번식에도 성공해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해야 한다. 만일 사회적 추방자 신세라면, 두 번째 시험에서 합격하기는커녕 시험을 치르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다. 공격성이 적은 남성들이 번식에 성공할 확률이 더 높다면, 그 형질이 집단 내로 빠르게 퍼질 것이다. 인간 사회가 진화함에 따라,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더 조밀하게 살게 되고 나아가 생존을 위해 광범위한 관계망에 의존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의도하지 않게 우리 자신을 길들였을 것이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의 흑역사  (0) 2020.06.21
신친일파 반일종족주의의 거짓을 파헤친다  (0) 2020.06.11
사무인간의 모험  (0) 2020.02.11
전쟁의 기원  (0) 2019.11.04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  (0) 2019.11.04
Posted by dalai
,

사무인간의 모험

역사 2020. 2. 11. 08:11

- 타자수의 일은 주로 여성들의 몫이 되었다. 타자기가 유행하던 당시 기존의 고된 육체노동에 노출되던 여성들은 신종 직업을 눈여겨보게 되었고, 사회로 활발하게 진출. 점차 사무직은 육체노동에 비해 덜 힘든 일, 여성에게 적합한 일이라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 국내에도 타자기가 도입되던 시기에는 전문학원이 생길 정도였다. 타자수는 신종직업으로 각광받았다. 1800년대 후반의 초기 타자수들은 그저 주어진 글을 빠르게 쓰는 것에 중점을 두었지만, 숙련된 여성 타자수는 자신의 문장구성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단순히 글자를 쳐내는 다른 타자수들에 비해 인정받을 능력을 확보한 것이었다. 타자기의 등장으로 인해 남성 직원이 주로 전담하던 비서 업무에도 변화가 생겼다. 타자기를 통해 사회로 진출한 여성들이 점차 선망받던 비서업무를 맡기 시작했다.
- 타자기의 등장은 사무 일거리의 증가에 따른 결과물이었고, 이로 인해 사무원은 보다 높은 지위를 보장받았다. 역사적으로 단순하고 창의성이 가미되지 않은 노동은 대개 무시받았지만, 타이핑만큼은 단순하지만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 자본주의 체제는 표준화, 단순화를 엄어 사회와 문화 전반에 여러 영향을 끼쳤다. 패션과 관련해서도 선택의 범위가 많아지면서 무어을 입을지에 대한 고민에 지쳐갔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눈에 띄려는 욕구도 다소 가라앉았다. 이때 영국 국왕 에드워드 8세(1894-1972)의 신사복 차림은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조합으로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 개성을 부리지 않고 편하게 선택해 입을 수 있는 옷을 선호하기 시작했고, 남자들은 유일한 패션수단으로 넥타이에 집중하기 시작. 한정적인 정장의 색과 대비되는 넥타이의 무늬와 색은 다채롭게 변해감. 오늘날의 남성들도 정장색깔보다는 어떤 넥타이를 맬까 아침마다 고민하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개성을 나타내던 넥타이가 비즈니스맨의 상징이 된 데는 미국 은행의 면접방식이 큰 영향일 미쳤음. 하얀 얼굴과 금발이 아니면 취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외모의 비중이 컸고, 입사한 이후에는 정장과 넥타이를 착용해야 했다. 프랑스 절대왕정 시대의 귀족처럼 비슷한 외모에 똑같은 옷차림이었다. 화이트칼라의 전형적 모습은 이처럼 같은 옷차림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직장인에 의해 만들어졌다
- 넥타이는 패션의 의미뿐 아니라 자신을 육체노동과 구분짓는 경계선 같은 역할을 했따. 의자에 앉아 땀을 흘릴 필요가 없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작은 특권을 나타냈다. 한편 회사에서는 규칙과 질서를 상징하기도 했음. 일을 한 지 몇 시간이 흘러도 바람이 불지 않으면 미동조차 없는 넥타이는 표준화, 타협, 속박뿐 아니라 권위를 상징하는 지표이기도 했다.
- 산업화 초기 사무원에 대한 조서는 조금씩 피어오르는 두려움의 표출이었다. 사무원의 존재에 불편함을 느끼다 그들의 영향력이 높아지자 곧 긴장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 산업혁명을 거치며 사회는 상공업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점차 더 많은 사무원을 필요로 했다. 사무원은 그렇게 점차 산업의 중심 영역으로 진출. 고대 사회에서 하위의 노동으로 여겼던 사무업무는 산업화를 맞이하며 변화의 시기를 거쳐 마침내 노동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시작한다. 기존 노동과의 차이점은 명확했다. 같은 직군에 있는 동료들이 점점 많아지면 마음이 든든해졌다. 하지만 불어난 숫자만큼이나 직군간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다는 것은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 19세기 들어 사무원은 더 증가했지만 사무실의 주인은 아니었다. 지금은 회계사, 세무사, 변호사가 사무실의 주인이 되어 인턴을 고용하고 월급을 지급하기도 하지만, 산업화 초기 사무원은 경영주의 자리 한편에 마련된 책상에 멀거니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일을 찾아서 하기보다는 서류작업이 주어질 때만 열심히 일했다. 계산과 필사로 서류더미를 만들어내고 다시 버리기를 반복했다. 이때까지 사무실의 주인은 대부분 상업가였다. 요즘 컨텐츠 생산부터 영업, 마케팅까지 혼자 해내는 1인기업가가 늘어나고 있는데, 19세기 초반 상업가도 혼자 모든 것을 해내야 했다. 도매상이면서 소매상이 되기도 하고 수출과 수입은 물론 운반까지 책임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며 산업화의 요충지인 미국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겨났다. 업무가 분화되기 시작한 것. 상업가가 혼자 하던 업무들을 따로 분리해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 보험사무소, 운반업소, 은행이 대표적이었다. 상업가 또한 다양한 업무를 덜어내고 자신은 큰 의사결정에 집중했다. 반복되는 업무나 허드렛일은 사무실에 남아 있던 사무원이 해나갔다. 상업가들은 거래를 위해 사무실 밖으로 나갔고, 사무원들은 회계실에서 그들만의 영역을 확보. 분업화와 함께 점차 유통이 활성화됨. 만드는 곳과 파는 곳이 분리된 것. 자연히 매출을 기록할 인력이 필요하게 됐다. 사무원은 증가. 가내수공업을 들여다보면 노동자와 판매업자가 같이 있었다. 직접 땀을 흘리는 자와 옆에서 보조하는 사람이 함께 했다. 하지만 분업화가 진행되며 노동 역시 분리됐다. 육체노동자와 사무원으로.
- 포드주의, 테일러주의가 낳은 기계적 효율성은 생산성 면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산업의 발전에 있어서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노동자의 시각에서는 중간관리자라는 새로운 존재가 갈등을 부추겼다. 1900년대 접어들며 초시계와 카메라를 들고 공장에 견학을 온듯한 차리므이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새하얀 셔츠를 입은 그들은 기름때를 묻힐 만한 기계공이 아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엇을 할지 몰라 고성으로 업무지시를 내리던 중간 관리자들이었다. 그들은 이제 경영자의 지시하에 노동을 관리하고 분석하는 요원이 됨. 초시계로 노동자의 작업시간을 체크해서 임금에 적용했음. 이처럼 사무의 본질은 이전 시대와 다르게 변화. 양적인 면에서 사무원의 증가가 있었고, 계급의 분화, 노동의 분리, 분할의 시대를 맞이함.
- 80년대 전후로 서양의 사무실에는 이전과 또 다른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자리가 안정적이지 않았기 때문. 철옹성으로 여겨지던 관리자의 자리는 위태롭게 여겨지기 시작함. 승진의 튼튼한 동아줄만 잘 붙들고 있으면 꼭대기층까지 입성할 수 있다는 인식도 깨져버림. 더 이상 안정된 자리는 없었다. 80년을 전후로 미국에서만 100만명 가량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책상을 내주었다. 조직은 탈산업화와 공장의 해외이전 등으로 살을 뺐다. 구조조정의 첫번째 타겟은 중간관리자였다. 공장과 사무실에서 고군분투한 조직인간에 대한 대대적 감축이었다. 이제 실무능력과 생산성이 떨어져 하급 사무원으로 되돌아갈수도 없었다.
- 우리나라 사무공간에 파티션이 도입된 시기는 80년대. 그 전에는 공장도 개방된 구조로 되어 있었고, 사무실 또한 커다란 공간에 책상만 이어붙인 형태였음. 옆 사람의 작은 움직임도 눈에 보였고, 몇 미터 떨어진 사람과도 목소리만 조금 높니면 얼마든지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었다. 이와 다르게 서양에서는 일찌감치 파티션이 도입됨. 주로 최소한의 프라이버시와 보안을 확보하고 업무 효율성을 올리기 위한 방편. 미국을 비롯한 서양 국가들은 6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파티션이 늘어났고 70년대에는 보편화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80년대에 들어 해외 기업들이 국내에 둥지를 틀면서 자연스레 파티션으로 사무공간을 나누기 시작했다. 화이트칼라 직장인이 한동안 막강했던 지위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파티션의 도입과 연관이 있다. 중역들에게 개인 사무공간을 마련해주던 회사들은 이제 그들의 자리를 재배치했다. 장기간 출장에서 돌아와 보니 5분의 1도 되지 않는 작은 공간으로 옮겨져 있었다. 줄어든 공간은 자신들의 불안한 입지를 상기시켰다. 한편 파티션은 점점 이중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개방된 공간에서 프라이버시를 보장해주었지만, 동시에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유발하기도 했다. 똑같은 모습, 비슷한 표정을 한 사람들을 한정된 공간에 몰아넣다보니 몰개성화의 진원지로 지목되기도 했다. 70년대에서 80년대를 관통하며 파티션의 이중성이 부각되는 사이, 그 안에는 침입자가 발생했다. 경영자의 일정을 관리하던 여성 비서들의 입지도 이 침입자로 인해 줄어들게 되었음. 바로 컴퓨터의 등장이다. 인력감축의 중심에 컴퓨터가 있었다. 그나마 있던 개인의 공간에 또 다른 물체가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 직후에 비해 2000년대 노동자들은 물리적 노동강도뿐 아니라 업무강도와 스트레스도 계속해서 늘어왔다. 20여년전부터 바람이 분 글로벌화, 정보화의 어두운 이면이다. 글로벌 기업의 국내진출로 임금 깎아먹기 경쟁이 일어나고, 정보화로 인해 어디서나 일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뀌면서 삶과 일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경향이 짙어졌다. 24시간 가동되는 경제체제하에서 사무직은 온종일 일하는 경우가 만연해졌다. 게다가 고용의 비정규화 현상은 비정규직뿐 아니라 정규직 직원들에게도 부담을 가져왔다. 비정규직이 늘어나면서 적유직 인원은 이전보다 줄어들었고 업무강도도 높아지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비정규직, 정규직이라는 양대 축 외에도 하청, 파견, 자영업 계약직 등 기업이 제시하는 고용형태는 다양해졌고, 개인은 자신의 조건에 따라 그것을 받아들일지 선택하게 되었다. 노동조합도 없고 파업권도 없이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일하던 시대에 비해 여러 법제가 갖춰졌지만, 법망을 피해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계약은 만연해졌다. 약자 입장에 놓인 노동자는 경영자를 향해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정직원이라는 신분을 차지한 이들은 자기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회사형 인간이 되어야 했다.
- 밀려오는 구조조정의 물결에 화이트칼라의 수난사는 이어졌다. 종신고용의 희망은 사라지고 난공불락이던 연공서열조차 휘청거리고 있다. 자기자리가 어디든 자생력을 길러 각자도생을 해야하는 시대다. 90년대부터 정리해고라는 말은 심심찮게 들렸고 칼을 빼든 기업은 어쩔 수 없다는 유약한 항변만 반복했다. 더 나아가 이제는 사내실업이라는 말이 만연할 정도로 생산성이 낮아진 중간관리자들의 방황도 늘어나고 있다. 그렇게 회사 내에 생긴 다양한 신분은 본인이 어느 자리에 있든 상관없이 사무원들을 고난으로 몰아넣었다.
- 사무원들이 한데 모여 자신의 일자리와 업무의 자율성을 지켜내지 못하는 것을 이기주의 탓이라고 한다. 능력주의라는 추상적 신념을 원인으로 지적하기도 함. 하지만 의사, 언론인, 블루칼라도 능력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사무직원들이 직장에서의 생존에 있어 특히나 취약한 위치에 놓여 있는 이유는, 좋든 싫든 자신을 고용주, 경영진과 동일시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입장에 서 있기 때문. 교수, 변호사, 의사, 과학자 등은 스스로를 그 직업에 종사하는 인간으로 인식하지, 자신을 대학, 변호사 사무실, 병원, 실험실과 동일시하려 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사무지은 높은 자리를 목표로 바라보고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충성을 맹세해야만 조직 내 자신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고, 자신의 직업을 보장받을 수 있다. 경영진이 각종 갑질로 사회적 이슈에 오르고, 타락하거나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지라도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며 울며 겨자먹기로 사다리를 올라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일방적 충성의 대가는 아웃소싱과 정리해고였다. 회사는 이렇듯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개인의 힘으로는 피할 길이 없는 고용불안의 빨간불은 이렇게 현재 진행형이다.
- 미국 사회학자 찰스 라이트 밀스는 1960년대 들어 사무직 종사자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사했다. 그들은 "특징이 있는 것 같음에도 특징이 없는 존재"라고 새로이 생겨난 중산계급인 스스로를 정의했다. 즉 역사적으로 족적을 남길만큼 뛰어난 업무역량이 없으며, 그렇다고 정치 세력화를 할 집단도 아니고, 단지 조금 더 강한 세력을 따라가는 성향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다른 조사도 있었다. 우선 사무직 종사들에게 설문지를 나눠주며 공장 노동자와 경영진, 사무직 노동자에게 일정 점수를 매기도록 했다. 항목은 신뢰성, 양심성, 의존성 등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사무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육체노동자나 경영진과는 차별화된 존재로 인식했다. 다만 경영진에는 후한 점수를 주었고 육체 노동자에게는 낮은 점수를 주었다. 중간 성향을 가진 것을 스스로로 확인한 결과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저 조직의 안위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다른 생각을 가지는 집단 또한 생겨났다. 한 조직내에서 생과 사를 함께하는 조직인간이 아닌, 자신이 키운 능력대로 조직을 옮겨 다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 조직이 만들어낸 질서에 반하지 않고 경영진의 그림자를 따랐던 일반 사무직과는 달리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자신의 직무를 발전시켜 자신이 가진 지식의 대가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신흥세력이었다. 지식노동자였다. 사무직원들은 한 조직에 충성을 다했고 기력이 소진될 때까지 버틸지, 능력본위제의 삶에 충실할지의 기로에 서기 시작. 가장 최악의 상황에 놓인 이들은 한 자리에서 일가를 이루지도 못하고 새 둥지를 틀 수도 없는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이었다. 미래에 대한 고민과 사무직에 대한 회의감 사이에 이들은 조직에서 입지를 다질지, 제2의 업을 만들어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지식노동자는 지식산업 시대를 이끌어가는 사회의 주역 계급을 지칭하며 전문 기술직에 종사하는 이들을 말함. 골드칼라라 부르기도 함. 이보다 앞서 지식노동자에 대한 개념은 존재했다. 꾸준한 학습과 지식습득을 통해 일하는 방식을 혁신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 활용함으로써 생산성과 효율, 부가가치를 높여가는 사람을 일컬었다. 주변의 정보를 해석하고 이를 활용해 부가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이들이었다. 이는 피터 드러커가 지식사회를 다루며 제시한 용어임. 평생 직장인보다는 평생 직업인의 신념을 가지면서 광범위한 지적 재산, 혁신적 기업가 정신, 평생 학습정신, 창의성, 유연성 등을 갖추고 있는 사람으로, 이 시기에 등장한 지식노동자라는 개념은 기존 노동자들과는 차별적 존재로 부각됐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친일파 반일종족주의의 거짓을 파헤친다  (0) 2020.06.11
세상을 바꾼 길들임의 역사  (0) 2020.06.07
전쟁의 기원  (0) 2019.11.04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  (0) 2019.11.04
모든 시작의 역사  (0) 2019.09.15
Posted by dalai
,

전쟁의 기원

역사 2019. 11. 4. 08:06

- 기원전 12000년에서 8000년에 이르는 중석기 시대와 초기의 신석기 시대(이 시기를 합쳐서 중석기 시대로 부름)에 무기기술의 혁명적 발달이 있었고, 그 무기기술의 혁명은 오늘날의 화약, 기차, 항공기, 탱크 그리고 원자탄의 발명에 필적하는 것이다. 그 당시 처음 나타난 네가지 종류의 무기들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지배했던 무기들이다. 그 네가지란 활, 돌팔매, 단검과 손도끼였다. 이와 같은 혁명적 무기기술의 진보는 군사전술의 발명과 결합되었으며 역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진정한 의미의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 신석기 시대 초기의 인간들은 새로운 공격무기 체계의 화력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 이같은 요새화된 지역은 군사적 대변혁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유물이며 전쟁이 인간의 문화에 가한 충격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것임. 어떤 지역의 경우 다양한 형태로 건설된 대규모의 요새는 오히려 농업의 발견과 동물의 가축화를 초래했거나, 혹은 농업의 필요성을 요구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 우리는 전쟁이란 본질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길 주저한다. 비로 그것이 책에 쓰여진 가장 단순한 진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마샬)
- 기원전 1200년 이전에 금속은 보석, 또는 의식용 무기의 제조에 사용되었지만, 그것은 순수하게 연철이었으며 구리보다도 더 약한 것이었음. 고대 대장장이들은 금속을 주조할 수 있을 정도의 열(1530도)을 발생시키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 그러나 궁극적으로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쳐, 고대 대장장이들이 벌겋게 달아오른 강철에 탄소를 투입함으로써 탄화된 또는 강철과 같은 철을 생산하는 방법을 발견. 그 과정은 복잡했고 완전히 이해되지는 못했다. 그 과정은 강철이 부서짐을 방지하기 위한 가열, 재가열 또는 단련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900년 고대 근동지방의 대장장이들은 이런 절차를 발견했고, 아시리아는 자국의 전사들을 새로운 강철기술에 의한 진보된 무기로 등장시킴. 철은 급격히 적나라한 폭력과 동의어가 되기 시작. 욥기 40장 18절에 베헤모쓰(거대한 바다짐승)는 무쇠와 같은 단단한 뼈를 갖고 있었고, 바빌로니아의 격언집은 여자는 남자의 혀를 자르는 예리한 강철단검이니라, 라고 쓰고 있다. 청동기 시대부터 철기 시대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모습은 구리를 청동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주석, 특히 층적토의 주석을 구하기 어려운 반면, 철은 지구 곳곳에서 풍부하게 발견되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새로운 무기는 더욱 훌륭하였고 벽이고를 바닥나게 만드는 금속의 결핍은 없었다.
- 기원전 900년에서 612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철제병기로 장비한 아시리아군은 고대 근동지방을 점령하였고, 그 지역을 아시리아 왕들의 직접적 감독을 받는 지역으로 만듦으로써, 세계 최초의 제국을 건설. 신왕조의 이집트 왕국도 때로 제국이라 불림. 그러나 당시 파라오는 나일강 유역에 대해서만 직접 통치를 할 수 있었고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해서는 단지 패권 또는 영향권을 유지했을 뿐이다. 반면 아시리아 왕들은 정복당한 방위체제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새로운 대전략을 개발해야 할 필요성에 당면했으며, 새로운 대전략에서 메소포타미아 상부지역의 아시리아 본토 방위는 더 광범한 안전보장체계의 일부가 되는 것이었다.
- 아시리아인에 의한 전쟁의 전문화에 관한 두가지 사례, 즉 말의 공급과 포위작전은 아시리아 야전군이 얼마나 잘 조직되었으며 전술적으로 효과적이었는가를 말해주는 것 같다. 아시리아군은 천 마일이나 떨어진 먼 곳에서도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있었으며 어떠한 적군 병사나 적의 요새도 아시리아 군의 전략적 목표달성을 위축시키는 장애요소가 될 수 없었다. 기원전 900-612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아시리아 군은 고대 근동에서 최강의 지상군이었다.
- 페르시아 이후 기병대는 전쟁에서 엘리트 기동타격력이 되었으며 나폴레옹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인간과 비교했을 때 말은 더 크고 상대를 놀라게 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말을 탄 기병이 공격해올 때 보병이 자기의 위치를 고수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반면에 말들은 쉽게 무서움을 타며 흐트러지지 않는 적군의 창병 전열에 대한 공격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기병은 접전하기 전 선회하였으며, 즉 기마병은 창에 찔리길 원치 않았으며, 창병에 대한 정면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창병의 전열을 향한 기병대의 위댛나 공격이란 낭만적 개념은 존 키간의 '전투의 얼굴'이라는 책을 통해서 사실과 다른 것이라고 널리 알려질 수 있게 됨. 사실 전쟁사가들은 이러한 비밀을 항상 알고 있었고, 기병 지휘관도 물론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마디 경고가 필요할 것 같다. 무너지지 앟는 전열을 향해 기병이 공격하지 않았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열이 기병대의 공격 때문에 넘어지거나 또는 당황스런 상황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병은 성공적으로 보병에 대한 직접 공격을 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병대 사령관이 내려야 할 가장 어려운 결정중의 하나는, 적군의 보병 전열이 현재는 상당히 강력한 대형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언제 사기를 잃을 것이며 공격앞에 취약할 것인가를 알아내는 일이었다.
- 신석기 시대의 요새, 활의 출현, 돌팔매와 창, 그리고 역사 시대 이후 상당 규모의 조직화된 군대의 출현 등은 고대 전쟁의 모습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로부터 폐르시아 왕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은 전쟁수행능력을 갈고 닦았다. 종대와 횡대로서의 병력배치, 병참제도, 무기의 개발과 운용, 포위전쟁 기술과 더불어 수많은 종류의 전술적으로 전문화된 부대의 배치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나폴레옹 시대에 이르기까지 실제 전쟁의 대부분의 요소들은 고대 근동지방에서 이미 형성되었던 것이다. 페르시아 왕들이 통치했을 당시, 나폴레옹의 해군과 육군에 버금가는 군사력이 그 지역을 지배하였고, 기병, 보병, 척후병 및 함대 등의 구분이 정교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페르시아가 결여하고 있었던 군사력은 훌륭한 중장갑보병이었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인들이 이 같은 공백을 메꿀 것이다. 고대 근동지방 전쟁의 군사기술들을 채택한 그리스의 군대는 필립과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 이르러 페르시아와 비옥한 초생달 지역에 자신의 문명을 강요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했다는 사실이 장갑보병 사회의 군사적 우둔성의 지속에 기여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비록 일부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의 실수 때문에 그리스의 승리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더 널리 퍼졌던 바는 활에 대한 창의 승리, 경보병에 대한 중보병의 승리라는 믿음이었다. 해상 전쟁에서 그리스인들은 더 많은 창조성을 발휘하였고 페르시아 전쟁 당시 그리스 해군은 그리스 장갑보병보다 페르시아를 격파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함.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육상에서의 전투가 더 많았지만, 육상에서의 전쟁 역시 바다에서의 싸움에 의해 결판이 났으며, 함대에 의해 장갑보병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는 한, 그리스인들은 과거에도 그래왔던 것처럼 육상전쟁에서 중무장 보병의 우수성을 계속 믿으려고 하였다. 마케도니아의 필립은 그리스인의 믿음이 틀렸음을 증명하였다. 장갑보병 때문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다른 종류의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페르시아에게 많이 뒤처지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의 요새 및 포위전쟁은 원시적인 것이었다. 중무장 장갑보병은 아주 단순한 장애물을 향해 돌진하고 공격하기에도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중장갑 보병을 활용할 경우 요새화된 도시에 대한 가능한 전략은 오직 봉쇄 뿐이었고, 잘 요새화되지 못한 도시에 대해서도 도시 거주민들이 문을 열도록 설득당하지 않은 한 봉쇄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었다. 요새의 기술은 중장갑 보병 때문에 불필요한 일이 되었으며, 그리스가 고대 중근동 비장에 비해 낙후되어지도록 한 것이었따. 스파르타인들은 자기 도시에 성벽이 없다는 사실을 자랑으로 삼았고, 아테네인들 중에도 도시의 성벽을 허물어뜨림으로써 더욱 더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만약 성벽을 허물게 된다면 그것은 아테네로 하여금 스파르타만큼 강력한 중장갑보병을 양성케 하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병참에 관한 부분 또한 그리스인들이 정교하게 발전시키지 못했던 군사적 기예중 한 분야였다. 소규모의 병력은 (대부분의 그리스병력은 소규모였다) 그다지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고 이동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전쟁터가 이스트무스에 있던 그리스 요새로부터 불과 몇 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479년 플라테이아 전투에서 4만명의 병력에 대한 물자를 공급할 방법이 없었다. 고대 근동지방의 대규모 군대는 그들이 행군할 거리에 맞추어서 어느 정도 정교화된 병참지원체계를 개발. 그러나 그리스군은 수많은 하인들을 뱀처럼 길게 늘어뜨려 행군했고 행군속도는 대단히 느렸다. 행군속도는 보급품을 실은 우마차의 속도에 맞추는 것이었으며, 때로 조직화된 병참부대가 전혀 없어서 병사들을 따라다니는 개인적 장사꾼들이 병사들에게 물건을 비싸게 팔기도 했다.
- 오늘날에는 제식훈련 그 자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현대전쟁 기술발달로 인한 화력의 증대가 병사들로 하여금 근접대형을 이룰 수 없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전쟁의 경우 병사들은 근접된 상태로 전투를 실시했으며 그들이 퍼레이드를 특히 잘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전쟁에서도 훌륭하게 전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근거였던 것이다. 퍼레이드를 잘 할 수 있다는 사실의 심리적 효과는 결코 과대평가될 수 없는 일이었따. 비록 병사들이 적군과 직접 맞부딪쳤을 때 심리적 두려움이 가장 강력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되겠지만, 현명한 기동작전의 수행은 언제라도 전투에 불안을 느끼는 병사들을 통제할 수 있는 더 없이 중요한 수단이었음. 어떤 병사에게 있어서도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은 적군병사들 그 자체가 아니었다. 병사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아군부대가 당황한 상태에서 도망쳐 버림으로써 그들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했다. 훈련을 통해서 이처럼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팀워크가 훌륭한 군사력을 건설할 수 있는 것이다.
- 필립의 새로운 병참체계가 갖는 가장 큰 이점은 나폴레옹의 병참체계와 비교함으로써 가장 잘 이해되어 질 수 있을 것임. 나폴레옹과 필립의 병참체계는 비슷한 점이 많이 있는데 데이빗 챈들러의 걸작 '나폴레옹의 전역'에서 잘 관찰되어졌다.
행군중인 프랑스군은 약탈, 강간, 방화 이외의 또 다른 특징적인 성격 때문에 유명했다. 그 특징이란 그들의 행군속도였다. 훨씬 더 다루기 어려운 오스트리아군과 신성 로마제국의 군대는 이러한 면에서 나폴레옹 군대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병참지원에 관한 상이한 개념 때문이다. 프랑스군은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의 대부분을 전투의 현장에서 충족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프랑스군의 개념은 느릿느릿 움직이는 병참부대와 미리 채워진 화약고나 보충시설의 존재에 기반을 두는 전략적 답답함으로부터 프랑스군을 자유스럽게 했다. 그들은 결코 3일분 이상의 보급물자를 지니고 다니지 않았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습관적으로 9일분에 해당하는 식량전부를 수레에 싣고 다녔던 것이다. 프랑스군이 잘 지휘되었을 경우, 느릿느릿 움직이는 적군을 전술적, 전략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최근 역사학자 한 명은 고대 전쟁기술에 관한 이해로 가득 채워진 책에서, 알렉산더보다 필립이 더 우수한 전략가였다고 주장
필립은 이해심이 있었고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 이러한 것들은 알렉산더도 그러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알렉산더가 전술가로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의 후손들로 하여금 그의 전략적 능력은 덜 찬란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그의 행동 동기는 지속적으로 부주의한, 비이성적인 욕망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었다. 군인의 기예는 합리적인 계산을 요구하는 것이다. 필립은 이러한 점을 결여하고 있지 않았다.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에 관한 군사적 감각은 그의 아들보다 작지 않았다. 쌀울 것이냐 말 것이냐에 관한 정치적 감각은 또 다른 사항이다. 필립은 가장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은 또 다른 사항이다. 필립은 가장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의 정치적 감각에 대한 평가는 심사숙고되어야 할 것이 요구된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을 바꾼 길들임의 역사  (0) 2020.06.07
사무인간의 모험  (0) 2020.02.11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  (0) 2019.11.04
모든 시작의 역사  (0) 2019.09.15
원시인이었다가 세일즈맨이었다가 로봇이 된 남자  (0) 2019.09.15
Posted by dalai
,

- 근대 일본에서 서구 과학기술은 오로지 군사기술 측면에서 습득되기 시작했음. 의사의 난학이 무사의 양학으로 대체됐다지만 양학은 당시에 병학이었던 셈. 주된 학습목적은 어디까지나 기술, 즉 군사기술에 있었고, 과학은 기술습득에 필요한 범위내에서 학습됐다. 해군 전습소에서는 수학과 물리학을 가리치긴 했지만, 수학과 물리학 자체를 중시해서가 아니라 조선기술과 항해술 습득을 위한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근대 서구문명의 우월성을 사회사사과 정치사상이 아닌 과학을 통해 인식했다. 그 과학은 증기로 움직이며 강력한 대포를 갖춘 군함, 다시 말해 군사기술로 구체화됐던 것이다.
- 본래 대학 아카데미즘의 학문은 언어의 학문이자 논증의 학문이고, 고대 문헌의 열독과 풀이로 일관했다. 중세말 영국과 프랑스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을 때도, 이론의 정밀함만이 문제시됐을 뿐 실험으로 검증하려던 이는 없었다. 의료 행위와 연결되는 의학세계에서조차 수술과 약의 조합처럼 손을 더럽히는 일은 직무교육을 대학 밖에서 받는 등 직인 취급을 받던 외과의와 약제사에게 맡겨짐. 아카데미즘 세계에서는 직인도 그 기술도 천시됐던 것이다. 서구 중세에서 문자문화는 오로지 라틴어로 표기됐고, 아카데미즘 학자와 교회 성직자들이 독점했다. 그러나 16세기 들어 인쇄 서적 출현과 종교개혁 영향으로 속어의 국어와 움직임과 함께 성직자와 대학 지식인의 문자문하 독점에 구멍이 뚫렸고, 직인들이 자신의 경험을 속어 서적으로 표현하기 시작. 이는 16세기 문화혁명이라고 할 지적세계의 지각변동이었다. 이런 변동에 호응해 아카데미즘 내부에서도 수작업을 꺼려하지 않고, 실험장치를 조립해 관찰과 측정을 중시하는 새로운 유형의 학자들이 등장. 갈릴레오나 토리첼리, 훅이나 보일 등으로, 이들에 의해 관측과 실험에 근거한 실증과학이 등장. 이것이 17세기 과학혁명이다
- 일본의 근대화는 산업근대화, 공업화인 동시에 군의 근대화, 서구화였다. 보통은 산업근대화가 일본의 자본주의화로 인식되고 있지만, 군의 근대화가 일본 자본주의화에서 수행한 역할은 막대함. "당시 일본 기술전반의 발전에서 정부의 군사공업은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입장에 있었다."(호시노) 군의 무기 자급화 욕구와 군사목적으로 시작한 조선업이야말로 메이지 시대 중공업, 기계공업, 화학공업 발전의 커다란 추진력이었음. 군과 산업의 근대화가 동시에 병행해 위로부터 추진된 것이 일본 자본주의화의 특징. 군의 무기자급욕구가 이윽고 이를 위한 자원을 추구하며 아시아 침략으로 일본을 몰아가게 된다.
- 사농공상 신분이 고정된 봉건사회에서 지배층인 무사가 피지배층의 직업으로 간주돼온 공업의 담당자가 되는 것이 일본 공업화의 특징 중 하나다. 일본에서 직인은 그 지위가 변함없었던 반면 무사가 공업화 기수로 등장했다
- 서구 특히 영국 기술자가 시민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직인층 내부에서 기술혁신의 주체로 등장한 것과는 달리 일본은 지배계급 출신의 기술관료가 시민사회 탄생이전에 국가교육을 받고 갑자기 공업화 주체로 등장했던 것이다.일본 과학기술 요람기의 이런 특징 때문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학 공학부에서 강론된 전문의 지에 과대한 권위가 부여되고 있음. 동시에 과학기술의 주체, 특히 상급 기술자들은 엘리트 의식과잉과 배타적 성격, 한편으로는 관료적이고 조직이나 국가에 대해서는 순종하는 특성을 갖게 됨. 실제로도 이미 메이지 중기에 "대학 밖에서는 대학을 졸업한 학사 기술자와 종래 직인 간에 알력이 생기고 있었다. ... 공학사는 실업을 낮춰보고 현장 직인과 거리가 생겼다. ... 제국대학 출신자가 이미 관의 권위를 얻어 민을 지배하는 구조가 성립했다"고 한다. 사족에 의해 관료기구가 형성된 메이지에는 에도시대 무사의 농민, 조닌에 대한 차별의식이 민간인에 대한 관리의 차별의식으로 그대로 이동했다. 공부대학교와 제국대학 공과대학에서 교육받은 엘리트 기술자가 재래직인에 대한 우월감과 차별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 증기와 전기 사용이라는 에너지 혁명이 서구에서 일어난 시점부터 메이지유신까지는 기껏해야 반세기로 간신히 추격이 가능한 시간차였다. 오히려 일본은 후발국인만큼 증기기관을 예로 들면 세이버리아 뉴커먼의 대기압 기관에서 시작해 와트에 의한 개량, 19세기의 전반의 증기기관차와 증기선 같은 다방면 응용에 이르는, 1세기를 넘는 영국의 모색과 시행과정을 건너뛰었다. 즉 결말부터 습득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런 의미에서 유리한 지점에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는 "선진국에서 기계수출으 제한은 없었고, 일본은... 모든 선진국으로부터 최신기계를 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었다"는 사정도 있었다. 한술 더 떠 "선진국은 완성된 기계기술을 일본에 판매하는 것에 열심"이었을 정도였다. 결정적인 차이 혹은 늦었던 것은 민간의 자본축적이 너무 빈약했다는 점. 이 때문에 일본의 근대화는 당장은 거의 100% 정치권력 주도로 추진됐고, 군과 관료기구가 커다란 영향력을 갖게 됨. 특히 메이지 정부의 전신과 철도에 대한 움직임은 공부성의 전신인 민부성이 이미 1869년 계획을 세웠을 정도로 신속했다.
- 일본 메이지 시대 기계공업 발전은 군의 근대화가 이끌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수입된 최신예 플랜트의 저변에 재래의 의욕적인 직인들이 수입된 기계를 모델로 인력이나 수력구동, 목재 내지 일부 금속제의 비교적 저렴하고 재래 직인이 사용하기 좋은 양화절충의 기계, 또는 비교적 단순하고 소형화된 모방품을 만들어낸 데 있다. 또 이런 국산기계제조 혹은 수입기계부품제조에 종사하는 중소기업이 지방도시에 속속 생겨난 것에 의해 달성됨
- 프랑스 전기조명의 보급을 묘사한 '전기의 힘과 파리'의 서문에슨 '본서를 통해 전기가 승리를 거두는 데는 오랜시간이 필요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가스조명과의 오랜 싸움도 있었다. 조명의 혁명에는 석유, 아세틸렌, 합성양초도 가세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프랑스에서 백열전등이 정착한 것은 20세기 초엽이다.'라고 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가스등이 충분히 보급되지 않았던 것은 전등보급에는 행운이었다. 어쨌거나 일본의 산업혁명은 서구에 크게 뒤처진 상태로 시작됐으나, 에너지 혁명은 그다지 뒤지지 않고 달성됐다고 할 수 있다.
- 자본론에는 '기계장치가 근력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한에서는 그것은 근력이 없는 노동자, 또는 육체발달이 미숙하되 사지 유연성이 풍부한 노동자를 사용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그러므로 부인노동가 아동노동은 기계장치의 자본주의적 사용의 표현이었다'라고 되어 있지만 말 그대로의 상황이 메이지 일본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 자본론의 내용을 넘어서는 것조차 있다. 다이쇼 시대 호소이 와키조는 '여공애사'에서 '대체로 방적공장 정도로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는 곳은 없다'면서 특히 여성과 어린아이의 12시간 교대 심야노동에 대해 '이것은 어디까지나 근대 공업의 소산이고, 게다가 일본이 그 창시자인 것은 변명할 말이 없다'고 했다. 생산시설의 가동률을 올리기 위한 주야 2교대제는 산업혁명기 영국에도 없던 일. '일본 면사 경쟁력의 기본적 조건은 한마디로 아시아적 저임금과 서양의 최첨단 기술의 결합에 있다' 이렇게 해서 1897년에는 일본의 면사 수출량이 수입량을 넘어서게됨
- 경제학 서적에는 '일본 산업의 극히 빠른 근대화는 식산흥업정책의 성과라고 해도 좋다. 그것은 세계사에서 거의 예를 찾을 수 없는 성공이었다고 해도 좋고, 그 때문에 종종 기적이라 불릴 정도의 것이었다'고 돼 있다. 일본의 급속한 자본주의화의 성공과 기적은 개국과 근대 과학기술 습득 개시의 적시성, 국가의 강력한 지도와 진취적 경영자의 출현, 에도시대 이래 민중의 높은 문자해독률, 능력도 의욕도 있던 사족의 자제가 능력을 발휘하도록 한 효과적인 교육제도의 형성, 재래직인층 내부 풀뿌리 발명가의 탄생 등을 원인으로 열거할 수 있음. 하지만 농촌 노동력의 가혹한 수탈과 농촌 공동체의 무참한 파괴도 불가결의 요인이 됐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후쿠자와는 이 시점에서 중국, 조선의 근대화가 가망없다고 단념한 것. 이런 자타에 대한 현상 인식에서 나온 결론이 '탈아입구'였다.
오늘날 궁리해보니 우리나라는 이웃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여유가 없다. 오히려 이 대열에서 벗어나 서구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하고 중국, 조선을 대하는 방식도 이웃나라라고 특별히 대할 것 없이 바로 서양인들이 그들을 대하는 식에 따라 처분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메이지 중기 일본에서 열강주의 내셔널리즘이 태동. 일본은 1894-95년의 청일전쟁을 거쳐 1890년대 본격화된 세계분할 경쟁에 최후 멤버로 끼어들게 됐다.
- 1차대전은 최초의 과학전으로 불림. 첫째 당시 최첨단 고도 과학기술이 전면적으로 전쟁에 사용됐다는 점, 둘째 과학자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 때문이다. 둘째 이유와 관련해 과학과 기술이 본래는 별개이던 서구에서는 학자란 속세와 동떨어져 공상적인 일에 몰두할 뿐 실제에는 대체로 도움이 안되는 집단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서구에서 과학자에 대한 평가를 180도 바꾼 것이 전쟁이었다. 독일에서는 암모니아 합성법을 개발한 프리츠 하버와 후일 핵분열 반응을 발견하는 오토 한 등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일류 화학자들이 모두 독가스 연구에 종사했음. 영국에서도 조셉 존 톰슨과 어니스트 러더퍼드 같은 초일류 물리학자들이 무선전신과 잠수함 탐지 등 군사연구에 종사하며 모두 유능함을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그뿐 아니다. 전쟁 직전까지 서구 각국의 자연과학자들 사이에서는 국제협력이 이뤄졌다. 외국 대학에서 공부하고 외국교수의 지도로 학위를 취득했다. 외국의 연구자와 공동연구하는 것은 당연하고, 연구자들의 국제회의도 종종 열림. 국적을 초월한 과학자공화국 일원으로 연구에 종사하는 듯 행동했다. 그러나 개전과 동시에 아인슈타인 같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일제히 애국자가 돼 자국의 전쟁에 솔선해 협력했던 것이다. 서구 각국은 이로써 과학자가 전쟁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알게 됐고, 이에 따라 국가에 의한 과학동원, 즉 국가에 의한 과학자의 과학기술 연구동원 정책이 생김. 그러나 일본에서는 막말 이래 과학은 군사에 편중된 과학기술의 부속물로 간주됐고, 메이지 시대에 이미 군학 협동이 시작된 만큼 과학자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은 특별히 새로운 발견이라곤 할 수 없다.
- 총력전 체제는 연구활동과 생산활동, 경제조직에 대해 능률화와 이를 위한 합리화를 요구했던 것이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총력전에서는 국민을 인적자원으로 간주해 물적자원과 같은 차원으로 취급하면서 효율적인 배치와 활용을 지향한 만큼 사회 전체의 합리적 재편성도 필요로 했다. 야마노우치 야스시가 말한 것처럼 '총력전 체제는 ... 전 인민을 국민공동체의 운명적 일체성이라는 슬로건 하에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 그것은 인적자원의 전면적 동원을 위해 실시한 개혁이 사회혁명이 되어 여러가지 제도의 합리화를 촉진했던 것이다.
- 전쟁이 끝나고 모두가 미국의 물량과 과학기술에 패배했다고 납득하면 할수록 중국에 패했다는 의식은 희박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메이지 이래 서구에 배우는 자세가 패전으로 다시 강화됐지만 아시아에 배운다거나,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을 제국에 강제로 편입시킨 것에 대한 책임의 엄중함을 생각하는 기술자는 적었다. 이렇게 해서 유일 피폭국이라는 전후 일본의 상투적 언사가 등장. 이는 아시아 각국을 침략한 가해자임을 지우고 은폐하는 것이다.
- 중앙집권적 행정 시스템을 가진 관료기구의 지도에 의해 추진된 전후부흥, 관료기구와 산업계와 대학의 협동에 의한 60년대 경제성장은 전후판 총력전이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국내조건으로
첫째, 20년대 시작돼 전시에 급속히 추진된 중화학공업이 전후 생산의 기조가 됨. 중화학공업에서는 잔존한 생산설비가 37년 당시보다 많았다.
둘째, 전시하 과학동원과 이공계 붐으로 급팽창한 군사부문에서 성장, 축적된 기술과 기술자층의 존재다. 전시에 군 연구기관과 군수산업에 편입돼 군사연구에 종사했던 유능한 기술자, 특히 정밀가공과 고급소재기술 등의 전문가가 기술개발에 큰 힘을 발휘했다. 전쟁 수행을 위해 창설된 도쿄대 제2공학부에서 육성된 기술자도 전후 고도성장을 떠받친 주역이 됐다. 실제로 전시 레이더 개발이 전후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를 기초로 한 전기통신분야 발전의 기초가 된 점은 잘 알려져 있음. 전기산업에서 도시바, 히타치, 마쓰시타는 모두 전시 군수생산으로 크게 성장한 기업이다. 전후 생겨난 기업으로 소니가 알려져 있지만 소니도 모체는 거의 대부분 해군기술 연구소 인맥이다. 자동차산업도 도요타, 닛산, 이스즈는 앞서 기술한 자동자제조사업법의 혜택을 입었고, 쇼와 10년대 정부보호하에 생겨난 기업. 더욱이 미군 점령하에서 항공기 생산이 완전히 금지됨에 따라 전시하에서 군용기 개발과 생산에 종사했던 미쓰비시 중공업 이외 군용기 업체와 군연구소 기술자들 다수가 자동차산업으로 옮긴 것으로 알려짐. 전후 국산 승용차 개발에 전전, 전시 항공기산업의 기술적 축적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군 기술자는 국철과 철도연구소에도 대거 자리를 잡았고, 이것이 철도기술 발전을 가져왔다. 일본 고도성장을 대표하는 기술 중 하나가 신칸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신기술의 집대성인 신칸센 개발에서 육해군, 항공 기술자의 활약이 돋보였던 것이다. 세번째, 전전부터 교육수준이 높았던 노동자층과 전후의 급속한 인구증가를 들 수 있다. 노동력과 함께 국내시장이 확충됨에 따라 공장건설, 생산확대는 물론 제품 판매를 국내에서 소화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국내적 조건만이 전후 부흥과 고도성장을 가능케 한 것은 아니다. 당시의 국제환경도 그만큼 중요했다. 전후 경제성장의 외적조건으로는 미 점령군이 배상보류내지 연기조치를 취한 것, IMF/GAAT 체제하의 국제교역 확대흐름. 석유수출국기구의 원유가격 대폭 인상에 따른 1차 오일쇼크 이전까지 석유값이 매우 저렴했던 점을 꼽을 수 있음. 그와 함께 혹은 그 이상으로, 다음 사실이 중요. 50년대 일본 본토가 부흥에 전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키나와가 미 군정에 편입되면서 섬 전체가 군사기지가 됐고, 한국에서 미군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군사정권이 존재하고 있었던 데 있다. 미 점령군이 일본을 비군사화, 민주화한 것은 성공한 점령의 흔치 않은 예로 종종 거론되곤 하지만, 이는 오키나와와 한국에서 미군 또는 독재정권에 의한 가혹하고 비민주적인 군정지배에 의해 뒷받침된 것이다.
- 한국전쟁 특수야 말로 일본 경제가 신속히 회복할 수 있었던 최대 요인. 특수는 네이팜탄과 로켓포, 박격포, 바주카포를 포함한 포탄류, 권총/소총/기관총과 탄약 등 무기류, 군용 트럭과 자동차 부품, 석탄과 마대, 군복과 모포 등 물자, 전차와 무선장치 등의 수리와 기지건설에 이름. 미군 특수에 의한 트럭발주가 하늘의 은혜가 돼 도요타, 닛산, 이스즈 3사를 소생시킴. 50년부터 5년간 특수로 일본에는 30억불이 유입됐고, 기업은 이로써 생긴 이익을 낡은 설비의 갱신과 최신기술 도입에 돌리면서 이후의 발전, 60년대 고도성장의 기초를 쌓음. 고도성장이 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자동차, 철강, TV 수출의 호조세와 함께 65년 본격화된 베트남전쟁 특수에 힘입은 바 크다. 조선과 베트남 인민들을 살육하기 위한 많은 무기가 평화헌법이 지배하는 일본에서 제작됨. 이렇게 해서 일본은 부흥을 달성하고 경이적이라 평가받은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일본은 다시 아시아 인민들을 발판으로 대국으로 향한 길을 걸어간 것.
-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시바에는 방위장비 부분이 있어 지대공미사일을 개발, 제조. 한편으로 원자로는 발전장비이자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 제조장치이기도 함. 두가지 기술을 보유한 도시바는 핵미사일을 만들 수 있는 회사다. 이런 양면성은 종합전기업체에 공통되는 특성. 도시바는 이 밖에 방위성에 레이더 시스템도 납품하고, 매년 방위성에서 500억엔 전후의 수주를 확보함. 레이더, 공대공 미사일, 적외선 탐지장치 등을 다룸. 미쓰비시 전기는 약 1000억 엔, NEC는 무선통신장치 등으로 약 800억엔, 후지쓰는 통신전자기기로 약 400억엔을 방위성에서 수주.('13), NEC는 전성기에 사장, 회장을 역힘한 세키모토 다다히로는 "새해 업무를 시작할 때 맨 처음 인사를 간 곳은 방위청"이라 했다. 일본의 종합전기는 방위라는 끈으로 국가와 깊이 연결돼 있다
- 일본 자본주의가 70년대 두 차례의 석유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위 노동조합이 노사협조노선을 통해 임금인상을 강하게 요구하지 않았고 기업의 합리하에 협조적이었던 것과 함께 많은 기업이 생산거점을 해외로 옮긴 것에 있다. 공장을 해외에서 찾은 것은 노동임금이 저렴하기 때문만은 아님. 와타나베 도쿠지와 사에키 야스하루는 84년 출판된 '전환기에 선 석유화학공업'에서 욧카이치 공해 소송결과로 74년 지역전체에서 유해물질배출에 대한 총량규제가 도입된 것에 대해 "즉시 철강, 전력, 석유, 화학 4대업체가 즉시 반대의향을 표명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총량규제 정책은 차츰 기업들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등 기본적으로 정책은 효과를 발휘. 이에 대응한 기업들의 행동은 첫째 재래지역 이외에 새로운 콤비나트 입지를 찾는 것이었다. 홋카이도 도마코마이, 아오모리현 무쓰오가와라, 세토나이카이 서부 스오우나다, 나아가 한국의 여수, 싱가폴 등에 대형 콤비나트를 조성하는 계획이 내세워짐. 그러나 이후 석유화학공업의 성정장체로 일부 외국에서의 계획을 제외하고는 실현되지 못함.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공해규제가 느슨한 국외를 선택한다는 것. 간단히 말해 일본은 자본을 공해를 끼워 수출한 것이다. 이는 전시 대동아공영권 구상의 전후 복제라고까지 할 수 있다.
- 일본은 대일 무배상을 원칙으로 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이의를 제기했던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 남베트남 등 4개국과 과거 전쟁에 대한 배상협정을 맺어 76년까지 총액 10억불 남짓의 배상금을 지불했음. 하지만 지불은 현금이 아니라 공장과 발전소 건설, 항만과 철도 등 인프라 건설공사 서비스, 또는 기계와 플랜트 제공방식으로 행해졌고 이후 일본 기업 및 상품의 동아시아 진출 거점이 됐다. 전시 아시아 군사침략에 대한 배상이 전후 아시아 경제진출의 길을 열었던 것.
- 환율이 변동환율제로 이행한 73년 이후, 90년대 불황으로 불리는 시대까지 일본기업은 생산거점을 해외로 옮기며 경영의 합리화와 효율화를 꾀함. 특히 자동차 관련 배기가스 규제와 에너지 절감기술, 전자업체의 반도체 생산, 여기에 고도성장기 축적된 기술력이 만든 쿼츠 시계와 VHS 비디오, 디지털 카메라, 워크맨 등 독창적인 발명으로 미국 시장을 중심으로 수출확대를 지속하면서 일본 자본주의는 80년대 말 거품시기까지 연 3%를 넘는 안정성장을 유지. 60년대에는 IBM을 거느린 미국이 세계시장을 지배했던 컴퓨터 산업에서도 통산성의 지원으로 70년대 전반에는 일본기업이 IBM을 따라잡음. 일본은 많은 희생을 지불하면서도 철강, 자동차, 화학공업, 전자기기산업 등 20세기 후반의 자본주의 기간산업 부문에서 세계 선두에 서게 됐고, 국제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글로벌화된 세계경제에서 경쟁려을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신자유주의 깃발아래 구조개혁이 추진됐지만 그 결과 초래된 것은 격차확대와 20년 가까운 디플레이션이었음
- 이제 더 이상 이윤을 올릴 공간이 없는 곳에서 무리하게 이윤을 추구하면 그 악영향은 격차와 빈곤의 형태를 띠고 약자에 집중될 것입니다. 그리고 ... 약자는 압도적 다수의 중간층이 몰락하는 형태로 나타날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의 많은 노동자들은 결혼조차 불가능한 상태에 놓임. 그렇게 되면 간단히 말해 물건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고, 금융완화가 추진되더라도 기업이 국내에서 설비투자에 적극 나서지도 않음. 무엇보다도, 결혼도 불가능하고 아이를 키울 수도 없게 되면 저출산, 고령화는 필연이 됨. 이렇게 해서 인구가 감소하는 지금, 미래 시장확대는 바랄 여지도 없고, 경제성장은 현실적 조건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미즈노의 책에 있듯이 '기술혁신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21세기에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 이같은 상황에서 현재 일본정부와 재계가 획책하고 있는 것이 원전수출과 경제의 군사화, 즉 군수생산의 확대와 무기수출이다.
- 현재 일본은 군산학복합체의 입구에 서 있다. 그 두개의 축이 무기수출과 군학 협동연구다. 여기서 중단시키지 못하면 일본은 전쟁할 수 있는 나라에서 전쟁을 원하는 나라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역사적 분기점에 서 있다.
- 19세기 서구에서 과학기술이 태동한 이래 오늘날까지 200년간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성장이 세계를 석권해왔다. 일본도 개국이래 거의 50년 늦게 이 세계사의 급류에 휩쓸려 많은 희생을 지불하면서 따라잡기에 매진해옴. 그러나 증식로 개발계획의 사실상 파탄과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는 과학기술의 한계를 상징하고, 막말/메이지 이래 150년에 걸쳐 일본을 지배해온 과학기술에 대한 환상의 종언을 의미한다.
- 과학기술의 진보로 에너지 사용을 얼마든 늘릴 수 있고 그로써 얼마든지 경제성장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원전만이 아님. 17년 12월 신칸센 노조미의 중대사고는 과학기술의 과신 위에서 차체 경량화에 의한 고속화를 추구하다 벌어질 수 있는 대참사를 예고했다. 게다가 11년부터 시작된 인구감소는 개국 이래 1세기 반에 걸쳐 추진해온 경제성장의 현실적 조건이 상실됐음을 나타냄. 마이니치 신문의 나카하타류반노센류의 투고에 무기원전 카지노가 성장전략인가 라는 게 있다. 정상적 상품경제로는 빠른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아베 정권 경제정책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임.
- 식산흥업, 부국강병에서 시작해 총력전 체제에 의한 고도국방국가 건설을 거쳐 경제성장/국제경쟁이라는 서사, 즉 대국주의 내셔널리즘과 결합한 과학기술 진보에 기반해 생산력을 증강하고 경제성장을 추구해온 근대 일본 150년의 흐름과 결별해야 할 때가 온 것. 요컨대 경제성장을 지속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명제 자체가 의문시 되고 있는 것이다.
- 거품경제 붕괴과정에서 스스로가 범한 소비실패의 후유증에 상처받은 국민은 괴로운 체험에 비춰 시기와 의심의 눈길을 위정자에게 돌리고 있음. 정부의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은 세계의 소비자에게 절약, 검약, 심플 라이프는 고통이 아니라 가치 높은 삶의 방식의 하나가 됐으며 적정 소비를 넘는 낭비는 비속한 인간적 욕망의 상징으로 바뀌고 있음. 소비생활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물건을 사지 않을까'를 고심한다. 이는 단지 소비자의 생활방어라는 차원을 넘어 지구환경과 자원문제에 대처하는 바람직한 태도임. 당연히 그래야 할 소비자의 이런 선택이 경제를 위축시키고 실업을 늘리는 것이 된다면 그런 경제순환 자체가 개혁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념형 경제사회로의 전환, 우치하시, 1999)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무인간의 모험  (0) 2020.02.11
전쟁의 기원  (0) 2019.11.04
모든 시작의 역사  (0) 2019.09.15
원시인이었다가 세일즈맨이었다가 로봇이 된 남자  (0) 2019.09.15
술에 취한 세계사  (0) 2019.09.05
Posted by dalai
,

모든 시작의 역사

역사 2019. 9. 15. 11:48

- 네발 동물들에게서 앞다리와 뒷다리의 차이, 곧 앞다리는 방향을 정하면서 시각적으로 가까운 주변을 함께 살피고, 뒷다리는 추진력을 제공한다는 차이가 이미 중력에 반하는 것이다. 두발걷기는 다리와 발에 심지어 일부 퇴행을 불러왔다. 앞다리가 손이 되면서 그 사이 얻었던 것, 곧 조종기능을 도로 빼앗긴 것이다. 그러니까 원숭이가 두 다리로 일어서서, 이를테면 돌던지기로 장거리 공격자가 되면서 단번에 인류가 생겨났다는 것은 (큐브릭의 인간형성 장면을 좀더 평화롭게 변형시킨 것) 그냥 전설일 뿐이다. 이런 전설은 믿을 수 없이 긴 시간을 요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를 방해할 뿐이다
- 몸무게 50킬로그램의 두발걷기 동물은 (인간 직전 원숭이는 대강 그정도 무게에 키는 120센티) 45킬로 수컷 침팬지가 10킬로미터 구간을 뒤지는 데 필요한 것과 동일한 에너지를 들이면, 16킬로미터의 길을 걸을 수 있었따. 실제로 원숭이들은 오늘날에도 하루 2킬로 정도를 전진하는데, 채집꾼 인간공동체는 13킬로 정도를 나아간다. 먼 거리를 나갈수록 직립보행에 따른 에너지 비축이 12-16% 정도 커짐.
- 암컷이 보호를 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새끼를 데리고 먹이를 찾으며 먼 거리를 이동하기가 위험하므로, 성별에 따른 노동분하가 나타남. 섹스와 먹이의 교환, 또는 일부일처 방식이 나타난 것. 덕분에 암컷은 더 많은 출산을 견딜 수 있었음. 새끼를 데리고 이동하지 않아도 되고, 맹수들로부터 새끼를 더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암컷들은 더 많이 출산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면 직립보행이 소가족제도의 형성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셈. 또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광범위한 영역에서 먹이를 찾을 경우, 직립보행의 이점과 수컷들 사이의 갈등을 줄이는 일부일처제가 서로를 보강해주었다는 뜻. 인간직전의 원숭이들에게 송곳니가 없다는 것은 이런 이미지와 잘 들어맞아 보임. 일부일처 상황에서는 서로 물어뜯을 필요가 적고, 먹이를 찾을 영역이 늘어나는 만큼, 영역방어는 어차피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 침팬지들의 관점에서 보면, 좋아하는 먹이는 두 발로 운반하고 덜 달가운 식물은 네다리로 운반하는데, 이것 또한 경쟁이 두려울 때면 두 발 운반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러브조이의 논제는 원숭이 세계에 일부일처방식이 없으므로, 원숭이 세계와의 유추를 포기해야만 하는데, 게다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일부일처 생활을 햇따는 강력한 암시도 없다는 것이 난점. 수컷 인간직전 원수잉의 몸무게가 암컷에 비해 훨신 많이 나간다는 사실은 많은 연구자에게 오히려 그 반대를 알려줌. 이런 성적 이종현상, 즉 수컷과 암컷 사이의 뚜렷한 신체차이에 대한 설명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일지도 모름. 운동기관이 인간과 비슷하건 더 큰 호미니드 수컷들은 탁 트인 초원지대에서 먹이를 찾을 때 암컷들을 숲 가장자리에 남겨두는데, 암컷들은 그곳에서 계속 나무타기 능력을 유지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방어책도 없었을 것임. 수컷들은 직립보행과 더 강한 신체구조로 채집 영역의 생태적 여건과 위험에 더 빨리 적응했을 것임. 암컷들은 해부학자 랜들 서스먼이 요약한 대로 더 적은 몸무게로 더 오랫동안 부분적인 나무 거주자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 주변 지역의 초원화가 진행되면서 강가 숲에 사는 원숭이들이 고립되었기에, 유전적으로 분리된 그들의 진화는 이 서식 구역의 우기와 건기, 기온의 높낮이, 생태계 변화에 의해 결정되었다. 예를 들면 긴 건고기간 동안 나무들이 작아지고 계절에 따른 특정한 과일들이 나타나지 않고, 잎들이 썩어감에 따라 땅의 식물들과 꽃들이 더 풍성해졌다는 것, 그리고 덕분에 원숭이들이 더 체계적으로 땅바닥을 뒤지게 되었따는 것 등도 이런 생태계 변화의 특징들이다. 이 원숭이들은 처음에는 땅에 일어나 앉아서 작은 먹이들을 (씨앗, 곤충, 파충류, 딸기류) 찾아 먹었다. 일어서기에 앞서 웅크리고 앉기가 먼저 나타난 것이고, 일어나서 걷는 인간직전 원숭이 이전에 조너선 킹던의 용어로 땅원숭이가 나타난 것이다.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뿌리옆의 땅원숭이가 된다. 똑바로 서서 걷기가 아니라 웅크리고 앉아 먹이를 먿는 방식이 인간직전 원숭이들의 상체, 곧 척추와 골반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 고기식사가 개인의 몸을 강하게 만들고, 고기를 장만하는 일이 사회적 영혼을 강하게 만들었따는 주장은 몇 가지 의문을 던진다. 우선 이는 대단히 남자에게 의존하는 문명의 스케치다. 여기서 여자들은 자식을 낳고 간식거리를 마련하는 정도의 역할밖에 할 일이 없다. 그에 반해 식물 및 음식 익히기가 초기인간의 섭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치면, 여자에게도 더 중요한 의미가 주어짐. 그 밖에도 고기를 먹으면 뼈가 남고, 뼈는 100만년이 지나도 학자들이 연구를 할 수 있는데 반해, 식물먹이는 그런 흔적을 훨씬 덜 남긴다는 우연한 상황은, 사냥꾼 태고남자를 옹호하는 학자들에게 과도하게 유리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고기먹이가 우리 몸에 이롭고 에너지 결산에서 사냥이 채집보다 더 좋다는 증거가 있는가? 일단 동물을 죽이면 단백질 결핍은 없지만, 그것을 죽이기까지는 그토록 불확실한 성공을 위해 상당한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지 않는가. 그것 말고도 인간의 경우 몸에 이로운 단백질 공급에 상한선이 있다. 단백질이 일상에서 섭취하는 열량의 3분의 1을 넘기면 (통상 6-15%) 겨우 몇 주만에 죽을 수도 있음. 초기인간이 사냥을 했다면 이런 위험은 더욱 컸을 것임. 야생돌물의 고기에는 지방분과 수분이 적기 때문이다. 사냥의 사회적 성과에 대해서도 의문점은 남는다. 고기 먹이로 넘어간 것이 더 많은 갈등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동물이 클수록 고기에 대한 욕구는 높아지는데, 고기가 분배되었다는 사실이 곧 소유자에게 분배의 주도권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님. 인류학자들이 참아주는 도둑질이라 부르는 것도 있음. 빈털터리들은 사냥감에서 제 몫을 얻기 위해 사냥꾼이 방어에 투자하려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로 싸우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자면 사냥에서 추가 소비의 쓸모가 처음에는 매우 높지만 그 다음에는 급격히 낮아지므로 고기의 재분배가 이루어짐. 그 밖에도 사냥꾼이 죽은 짐승의 임자로 인정되는지도 의문이다. 오늘날 탄자니아에 있는 수렵채집 사회의 사냥행위와 사냥감 분배를 다룬 연구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어째서 사냥꾼들이 고기를 나누느냐'가 아니라, '사냥감이 자기 것도 아니라면, 사냥꾼들은 어째서 애초에 사냥하러 가느냐'를 물어야 함. 성공의 공로를 차지하는 것과 고기의 분배는 전혀 다른 일. 성공한 사냥꾼에게는 더 많은 고기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주목과 인기가 주어진다. 그는 특별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특볗리 유명해지는데, 이는 진화생물학자들에게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가 (생물학자 말고 사냥꾼이) 특별히 인기 있는 짝짓기 상대일 것이라는 추측을 불러들인다.
- 어째서 하필 인류의 정착시기에 포도와 곡식의 발표가 나타났을까? 그 시기에 축제들이 특별한 기능을 했다는 설명이 설득력이 있음. 우선 기후변화가 특권적인 축제에서 소비될 식량의 과잉을 가능케 했다. 무언가를 넉넉하게 가진 사람은 축하할 계기가 있어야 함. 또한 예를 들어 예배소를 건축하는 것과 같은 집단적 업적은 거대한 연회의 형태로 보상받았다. 축제는 성취된 것을 강조하지만, 그것을 성취할 동기도 만들어냄.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렵채집 공동체에서 집단의 크기가 커지면서 마을 생활로 바뀌었으니, 이제 더는 곤궁때문에 서로 뭉친 것이 아닌 사람들의 사회적 결속을 축제가 강하게 해주었기 때문. 축제는 사람들을 결합시킨다. 이미 최초의 신화들이 축하연 이야기로 가득하다. 물론 오로지 신들 사이에서, 또는 상류층 구성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축하연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축제는 계급을 드러냄. 더 많은 식량 여분을 얻었기에 더욱 큰 축제를 거행할 수 있는 사람은, 명성뿐만 아니라 더 많은 재원도 얻음. 이런 특권은 축제가 손님들에게 알콜 음료를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는 분명한 조직능력과 지시권한을 암시한다는 사실에 주로 근거함. 이런 축제음료는 생산 이후 며칠 (밀맥주, 보리맥주, 엠머맥주의 경우), 한달 (용설란 와인), 또는 1년 (쌀술과 포도주) 안에 사용해야 함. 곡물맥주의 생산에 필요한 날짜가 6-14일 이므로 맥주를 축제에 제공하려면 전체 분량이 사용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한꺼번에 생산되어야 함. 고대 이집트의 축제 양조장 한 곳이 하루에 390리터까지 맥주를 공급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산됨. 여기서 이런 도취음료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집중된 연쇄명령이 이루어졌던 것이 아주 분명함. 포도주가 비로소 생산과 소비를 나누고, 그를 통해 무역에도 쓰일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축제에서의 맥주소비는 거의 초기국가라 부를 만한 조직에 의한 것이었고, 따라서 기원전 4000년 무렵 중동에서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으로 시작된 도시왕국의 발생이라는 방향에 딱 들어맞음
- 수컷 붉은 사슴과 다마 사슴에게서 인간과 견줄 만한, 아니 오히려 훨씬 더 아래로 내려간 후두를 볼 수 있다. 덕분에 목구멍과 구강의 비욜이 분명히 목구멍에 유리하도록 변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낮은 소리가 음향적으로 과장된 자기 이미지를 다른 사슴들에게 만들어내기 때문으로 추측됨. 일반적으로 소리길의 길이와 그에 따른 주파수의 다양성은 척추동물의 몸크기를 알리는 신뢰할 만한 신호로 여겨짐. 포효하는 사슴은 목구멍 크기를 두배로 만들어서 특히 어둠속에서, 그리고 전체를 조망할 수 없는 지역에서, 경쟁자와 암컷에게 원래 자신의 모습보다 더욱 강력한 인상을 만들어냄. 이런 으스대기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퍽 잘 알려진 일이다. 인간 남자의 변성기도 이 과정으로 설명됨. 이는 사춘기에 후두가 한 전 더 아래로 내려앉으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깊은 목소리는 문화차이를 가리지않고 거의 동일하게 확정, 권위와 위협, 자신감, 크기 등과 연결됨. 물론 모든 사슴이 그렇게 포효하고 과장한다면 과연 낮은 목소리에는 어떤 이점이 있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은 아직도 탐구해야 할 부분이다.
- 대화사회학에 따르면,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처음에 날씨나 열차 연착, 또는 뉴스에서 얻은 정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런 말로 상대의 후원을 받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라고 함. 인류학자 브로니스라프 말리노프스키는 이를 두고 의례적 언어사용이라는 개념을 썼다. 이는 확인기능으로만 쓰이는 것으로, 정보를 거의 전달하지 않은 채, 간단한 말의 교환을 통해 공동체 의식을 만들어냄. 접촉 자체를 위한 것으로,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 믿을 만한 사람, 무언가 도와줄 사람을 더듬어 찾는데 쓸모가 있음.
- 언어는 단 하나의 시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작에서 나왔다. 자식을 너무 일찍 낳고 오래 교육하는 어떤 생명체의 협동적 천성에서 나왔다. 또한 이름 붙이기의 논리와 공동의도에 주목하게 하는 몸짓 레퍼토리에서 나왔다. 소리로 된 애정의 신뢰 형성효과에서 나온 것이며, 노래의 소리 여부에서도 나왔다. 그렇게 보면 언어가 나오기까지 그토록 오래 걸린 것이 이상하지도 않다. 해부학적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4만년 전에 많은 우회로를 거치며 이동해서 호주와 아메리카로도 넘어갔고, 유럽에도 정착했음. 그리고 유럽에서 호모 에렉투스와 네안데르탈인 등 친척들에 맞서 유일한 인류로 살아남음. 마지막 네안데르탈인들은 아마도 2만8천년 전에 스페인 남부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다른 종과 섞이지 않은 하나의 종이라는 까다로운 준거가 여기서는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해야 함.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사이에서 얼마나 온갖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것은, 무엇이든 제3의 뼛조각이 나오기만 하면 새로운 종의 초기인간으로 분류될 수 있느냐는 의문만큼이나 아직 확정되지 않은 채 열려 있는 의문이다. 어쨌든 네안데르탈인에 대해서는 저 유명한 FOXP2 유전자의 변종을 지녔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 돌연변이는 언어능력에 해를 끼치는 것이고, 그로써 그들이 언어능력을 지녔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됨. 다시 말하자면 호모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30만년 전 두 종으로 나뉘기 이전에 이미 언어가 있었다는 뜻. 그렇다면 맨 처음 말을 한 종은 아마도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였을 것임. 네안데르탈인들은 작은 무리를 이루어 20만년을 견뎠다. 그것은 대규모 기후변동의 시기였다. 그들은 무기를 이용하기는 했으나 아마도 아궁이나 화덕 같은 불 피울 장소를 갖지는 못했고, 상징을 사용하는 확장된 문화를 이루지는 못했을 것임. 고고학적 발굴에 대한 온갖 조심성을 갖고 말하자면, 그들이 색소 사용을 (신체 단장 같은) 넘어 그림작품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작은 무리를 이룬 생활과 문화적 소박함이라는 두가지를 합쳐보면, 네안데르탈인이 언어의 문턱에 이르러 있었지만, 자기들 사회 형태에 어울리는 정도의 몸짓 또는 소리 어휘의 단계를 넘어서지는 모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음. 영국 인류학자 스티븐 미슨은 특히 네안데르탈인이 노래하고 웅얼거리기는 했으나 말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 수컷보다 암컷의 번식비용이 훨씬 더 높기 때문에 암컷은 훨씬 더 까다롭게 고름. 정보, 곧 노래는 자기가 모험적이라는 내용을 포함한다고 요약할 수 있음. 노래하는 새는 동시에 먹이를 찾을 수 없고, 심지어 맹수를 끌어들일 수도 있음. 오래 복잡하게 노래하는 새는 그로써 자신의 영역이 먹이가 풍부하며 따라서 생존능력이 있음을 알리는 셈. 이것은 불리한 조건(핸디캡) 선택이론에 따른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아무나 보내는 신호는 안 되며, 곧 쉽사리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닐 경우에만 정보능력이 있음. 다른 말로 하자면 다음과 같음. 비용이 높을 경우에만 광고를 믿을 수 있다. 오직 성공적 공급자만이 그런 비용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 이런 점이 광고의 반대 결론을 성공으로 연결시켠 줌. 높은 비용을 들여 노래를 하는데, 아직도 살아 있다면 이미 한 가지 시험에 통과한 것임. 신호가 인상적일수록 더욱 엄격한 시험에 통과했다.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힘이라는 결론을 허용하지는 않아도 간접적으로는 그렇다. 그것이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라면, 오로지 힘 있는 자만이 그런 것에 투자하는 위험을 감당할 수 있다
- 미국 여성인류학자들인 엘렌 디사나야케완 딘 포크는 몹시 흥미로운 사색을 펼쳤다. 인간 아기들은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어찌 할바를 모르는 상황에서 자기들이 홀로 방치된게 아니라는 신호를 필요로 했다. 아기를 안는 팔 대신 마음을 진정시키는 전 단계 음악을 통한 소통이 나타났다는 것임. 어째서 그런 음악이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있었을까. 바로 어머니 목소리 때문이고, 반복을 통해 안정적 기대감을 만들고 음높이과 고요함을 통해서는 위험이 없다는 상황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울부짖는 아기가 맹수들로 가득찬 세계에서 자신과 어머니를 극한 위험으로 몰아가는 것이니 이런 진정효과는 생존전쟁 상황에서도 도움이 된다. 이렇게 보면 음악의 시작은 위안이었다.
- 음악은 개인을, 함께 행동을 조율하지 않을 수 없는 상대방에게로 보내는데, 상대의 생존을 후원하는 것이 동시에 생존도 강화해 줌. 진화에서 멜로디의 기능은 진정시키는 어머니 목소리라는 특질에 있었고, 리듬의 기능은 집단행동을 통해 자기와 타자의 대립을 덮어버리는 것에 있었다. 음악에서 정서의 차이들은 사라진다. 듣는 사람들이 음악의 정서에 빠져들기 때문이고, 음악의 정서에 빠져 있는 한은 그렇다. 이것은 선사시대에 인간무리가 특정 규모 이상으로 커졌을 때, 특히 그런 무리들의 행동에 이점이 될 수 있었다.
- 가장 중요한 식량공급방법으로서 사냥과 채집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그리고 식물과 동물의 품종을 개량하지도 않은 채로, 먼저 정착이 이루어짐. 기원전 4000년 무렴 아시아에서 기장과 벼농사의 시작도 마찬가지. 그곳에서는 먼저 야생식물을 생산하고 수확하고 저장했다. 특히 벼는 재배종 벼와 야생 벼를 체계적으로 구분하지도 못하던 수렵채집 공동체에 의해 재배됨. 중국에서는 그보다 4000년도 저 전에 날시가 서늘해지면서 최초의 마을들이 건설됨. 여기서도 정착, 재배, 품종개량 사이의 맥락은 느슨했다.
- 식물학자 잭 할런은 50년 전에 선사시대의 돌낫으로 터키에서 야생밀을 수확했는데, 한 시간만에 1킬로그램을 거둠. 3주 이내에 한 가족이 1년간 먹을 식량을 모을 수 있었던 셈. 산업혁명 때까지 지구상 인구의 5분의 1 정도가 그런 수렵채집 공동체에 속했다는 사실은 설사 기후가 좋은 경우에도 농경으로의 이행이 많은 사람들에게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20세기와 21세기 남반구의 채집공동체들은 매우 불리한 환경에서 사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1만년도 더 전에 농경으로 넘어갔는가에 대해 우선 두가지 이론이 대립함. 하나는 기후변화가 닥치면 식물과 동물이 부족해졌고, 그러면 사람들은 식량이 있는 오아시스와 강변지대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고정된 지역에서의 삶에 익숙해졌고, 그곳 식물계와 동물계에 더욱 집중했다는 추정이다. 줄여 말하자면 이렇다. 날씨가 인간을 특정 장소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자연을 탐구할 각오만 한다면, 자연의 변덕에 덜 노출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 많은 지질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이 이런 오아시스 이론에 반대했다. 원래의 건기에 대한 충분한 증거들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날씨 말고 다른 것도 보았다. 정착 생활로의 이행이 자연의 강요로 이루어졌다고는 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 이전에 기후가 건조해진 세 번의 간빙기가 있었는데도, 오아시스에서 동식물의 품종개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은 기후대신 인구압박을 결정적 인자로 보았다. 2만년 전에는 보통 겨우 25명 규모의 수렵채집 공동체들이 250-500명의 짝짓기 네트워크만을 포괄했는데, 그러다 차츰 현존하는 자원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팽창했고, (그것도 다시 날씨가 좋은 덕에!) 따라서 식량 마련의 방식을 바꿀 필요가 절실해졌다는 것. 기원전 1만년 무렵에 점점 인구가 늘어난 나머지, 식량부족에 대한 전래의 가장 쉬운 대응방식인 이동이 더는 효율적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동 대신 다른 전략을 찾아야 했다. 식량 토대의 확장, 일시적 잉여식품의 저장, 그러니까 절약의 훈련, 그리고 (혁명이론가들과 이기적 유전자 이론의 추종자들에게 최후의 방책인) 번식률 하락 등이었다. 오아시스 이론의 또 다른 대표자들은 높은 번식력, 줄어든 영아사망, 더 긴 기대수명을 정착 생활 덕으로 돌림. 지역 식물계와 동물계에 의존하는 더 단일한 영양과 합쳐보면, 정착생활은 식량을 부족하게 만들었고, 혁신 경영을 절실히 필요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자원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정착생활은 어떤 이점을 제공할 수 있었을까? 줄어든 영토는 방어가 더 쉽다. 풍부하고 먼 사냥터와 덜 풍부하지만 가까운 지역을 두고 고려할 때 후자가 이점을 가질 수가 있다. 이런 전략을, 의자뺏기 놀이에서 허락되지 않은 눌러앉기 전략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놀이 참가자와 의자의 비례관계가 커질수록 운동규칙을 어기고 단순히 눌러 앉아 있고자 하는 충동이 더욱 커짐. 예를 들어 맨 처음에 사람 10명에 의자가 9개였다가, 두번째 단계에서는 9명에 8개, 그러다 마지막에는 2명에 1개가 된다고 상상해 보라. 자원갈등에 참가한 모든 집단이 더 많은 의자(영토)를 차지하려 할 것이고, 언제나 외부 참가자가 끼어드는 데다가 의자(영토) 들은 매력의 정도가 서로 다르므로 이런 비교가 매우 제한적인 것이긴 하다. 그래도 의미가 있다. 정착한 집단은 영토를 차지하고, 그로써 나머지 다른 집단들의 활동영역을 줄여버린다. 그러면 나머지 집단들도 동일한 전략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더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게 된다.
- 맨 처음에 신전(사제)와 왕권이 전체를 위한 결정권을 지녔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두 세력 사이의 갈등이 나타나는데, 결국은 군사집단이 제게 유리한 결정을 내린다. 먼저 신전이 재분배 경제를 조직하고 사용료를 만들고 장부를 작성하고, 자체 생산을 한다. 신전, 또는 사제단은 희생제물을 관리함으로써, 그리고 거대한 개인살림인 왕의 궁정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특히 중요한 족속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통해, 이런 모든 일을 먼저 하도록 미리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뒷날에는 자체 수행원을 거느린 군사 지휘자들이 전체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선다. 도시들 사이의 갈등은 늘 있게 마련이고, 특히 식량위기의 시기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도피처를 찾는다. 이들은 대도시에서 군주가 사제집단에 대해 연속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게 만든다.
- 전쟁은 도시를 하나의 국가로 만들고, 그와 동시에 사제들을 전쟁 지휘자의 보조자 역할로 낮추어 버린다. 메소포타미아에는 여러 도시들이 이곳저곳의 중심지를 이루었고, 그들 사이의 경쟁과 물물교환이 자주 갈등으로 비화했기 때문에, 도시들은 성벽, 성문, 해자 등을 갖춘 방어시설물이 되었다. 도시 정치조직의 핵심업무는 처음에는 분명하게 농경과 무역이 서로 협동하여 일하고 임금을 받도록 하며, 또한 총 생산을 분배하는 일이었다. 이 점에서는 무역과 이주를 통해 서로 연관된 모든 메소포타미아 도시들이 비슷했다. 하지만 누가 통행권을 갖느냐, 상류 물줄기에서 무엇이 나와야 하느냐, 또는 누가 도시 영역들 사이의 중간구역을 맡느냐 등의 싸움이 일어날 경우에는, 차츰 무기가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되었고, 따라서 모든 자원을 포함하는 정치적 임무는 서서히 신전에서 왕궁으로 이동했다.
- 이론에 따르면 돈은 교환매체로서 가치를 보존하는 수단이며 가치척도로서 상업의 거래비용을 떨으뜨리기 위해 발명됨. 돈은 저장할 수 있고 운반하기도 쉬운 특히 인기있는 물건, 예를 들어 금이나 은에서 발전해 나와 마지막에는 구매력 자체가 됨. 제빵사는 정육업자에게 가서 빵을 내고 고기와 바꾸려고 한다. 하지만 정육업자는 이미 빵을 넉넉하게 갖고 있다. 따라서 제빵사는 어떤 교환상대라도 결코 충분히 가질 수 없는 어떤 것, 곧 돈을 제공해야 한다. 바꾸려는 사람들은 모두가 기꺼이 갖고자 하는 물건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래서 이 물건 일부를 떼어 놓는다. 매력적인 교환제안을 간직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언젠가는 돈이라는 매체가 발전하게 된다. 그렇게 보면 돈의 기원은 비축인 셈이다. 이렇듯 많은 것을 보여주는 이 이론은 물론 한가지 약점이 있음. 실제와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 즉 이중의 우연성 문제에 봉착하는 순수한 교환이란, 역사적으로나 민속학적으로도 입증되지 않는다. 최초의 동전발굴은 그것을 주조한 동전제작소의 근처 일대에서만 나타난다. 그것이 원거리 교역에는 쓰이지 않았거나, 아니면 극히 드물게만 쓰였다는 뜻. 당시 가장 작은 동전이 가졌던 상대적으로 큰 가치는 일상적 근거리 교역에 쓰였다고 보기도 어렵게 함.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아티카에서 1드라크마가 이미 양 1마리 가치를 지녔다. 그런 동전은 소소한 거래에는 쓸 수가 없었다. 동전은 처음에는 일반적 교환수단이 아니었음. 돈이 이후 상업에 꼭 필요한 것으로 입증되었다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 최초의 동전들로 지불된 채무란 대체 어떤 것들이었을까? 최초의 동전들이 정치적 공공조직, 즉 지역조직의 인각을 지닌 것임을 생각한다면, 여기서는 개인채무가 관찰대상이 아니다. 그보다는 정치적 채무를 생각해야 하고, 동전지불을 이용하던 정치적 권위를 향한 개인의 청구권을 생각해야 한다. 즉 군인들의 급료, 관리들의 봉급, 체육선수들에게 주던 상금 등이다. 여기서 동전의 인각은 이렇게 지불된 동전이 실질적 구매력가 연관되어 있음을 보증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정치적 권위는 벌금이나 지대 등을 돈으로 받겠노라고 고집했던 것이다. 동전소지자는 법률을 위반했을 경우 벌금이나 세금을 이 돈으로 낼 수 있었다. 따라서 지불이 표준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나타난 곳은 공공질서 분야였다. 이것은 돈의 두번째 기능, 즉 가치표준이라는 기능으로 연결된다.
- 짝짓기란 자신의 번식을 원하는 두 개체가 서로 상대방을 이용하는 것. 여기서 남성측의 기여분이 적어질수록, 일부일처의 가능성은 낮아짐. 처음에 양측의 에너지 비용이 차이가 나지만, 남성이 여러가지를 돌볼 경우, 즉 먹이를 가져오고, 둥지를 짓고, 먹이영역과 여성 및 후손을 보호하고, 후손의 교육에 동참할수록, 양측의 이런 투자비용 차이는 줄어듬. 이렇게 기여한다 해도, 일부일처제와 바람피우기의 결합이라는,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전략을 바꾸지는 못함. 암컷은 두 가지 관점에 따라 이런 가능성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다. 신체적 표지들을 통해 상대방의 유전적 적합성을 살펴보고, 또한 상대방이 훌륭한 부양자가 될 것인지의 개연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 인간 아이들의 양육이 어린 동물의 양육보다 비용이 더 들고 따라서 더욱 후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함. 인간은 훨씬 더 느리게 어른이 된다. 생후 1년이 지나면, 두뇌는 성숙한 두뇌의 절반크기에 도달. 그에 반해 원숭이와 심지어 호모 에렉투스까지도 같은 시기에 어른 두뇌의 80% 정도에 이름. 이렇게 느린 성장은 유인원에 비해 극적으로 긴 기대수명을 동반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경우 자주 여러명의 후손이 동시에 부모의 후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냄. 반면 동물계의 양육은 거의 언제나 차례로 이루어짐. 인간의 일부일처 형성과 노동의 분화는 한편으로는 아이들을 보살피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특히 먹여야 한다는 점에서, 후손에게는 생존에 유리했다. 짝의 형성과 분업은 아이들의 사망률을 크게 낮추고, 서로를 보강했다. 짝의 형성이 분업을 허용하고, 분업은 둘이 서로 더욱 의지하게 만든 것이다. 동시에 인간만이 유일하게 일부일처와 집단생활을 결합시켰다 가족들이 집단을 이루어 생활하는 소수 유인원들의 경우, 이런 가족이란 언제나 수컷 1마리와 그의 하렘으로 구성됨
- 일부다처제로 인해 여성이 부족해지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모두가 결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서로 경쟁상태에 있는 도시국가에서는, 모든 주민이 자신을 전체와 동일시하도록 만들 수단이 될 수 있었다.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다. 일부일처 결혼제도가 규범이 되면, 사회 안에서 남성들의 성적인 경쟁을 줄인다. 그렇게 보면 일부다처에서 사회적 일부일처제로 넘어가는 것은 경쟁을 줄여주는 다른 구조들, 곧 엘리트를 통한 세금지불, 고용주 지분이 들어간 사회보장제도의 도입 등과 비견될 수 있고, 따라서 일종의 정치적 재분배라고 할 수 있다. 아주 늦게야 나타나는 1인1표라는 생각이 이런 관정메서는 1인 1아내라는 공식으로 이미 준비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임. 일부일처 결혼은 정치적 타협의 덕이자, 이익집단을 넘어 집단행동의 의식이 생겨난 덕으로 돌릴 수 있을 것임.
- 일부일처제가 여성에게 실질적으로 내놓는 질문은, 10등 남자가 온전히 제게 속하는 것과 1등 남자의 10분의 1만이라도 제게 속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나은가 하는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
- 한 여자가 자신의 생애 동반자가 자기를 속인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따지면, 그는 무조건 '당신에게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아내나 여자친구가 바람피운 것을 알게 되면,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났어.' 예를 들어 '우리 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라고 그가 말하거나 '그건 아무 의미도 없어'라고 그녀가 말한다면, 이건 그냥 사족일 뿐이다. (독일의 수필가 카를 마르쿠스 미셸) 커플의 사회생물학과 문화사의 배경을 놓고 보면, 두 사람 모두 옳다. 바람피우기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일부일처제에 대한 질문에는 그런 설명이 아무 의미도 없다. 사랑에 찬 결혼이 오로지 바람을 피웠다는 것만으로 해체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감당되고, 용서되고, 심지어 허용될 수도 있음. 물론 이런 진실이 두 사람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지만 말이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쟁의 기원  (0) 2019.11.04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  (0) 2019.11.04
원시인이었다가 세일즈맨이었다가 로봇이 된 남자  (0) 2019.09.15
술에 취한 세계사  (0) 2019.09.05
역사의 역사  (0) 2019.07.21
Posted by dalai
,

- 인간은 지구 역사상 환상을 믿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들은 상상력을 통해 수십억의 집단지성을 이룩할 수 있었다. 다른 동물집단은 일정 숫자가 넘어가면 서로를 신뢰하고 협력하기 어려움. 한 개체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숫자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동물 무리와 달랐다. 그들은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강력한 이야기의 토대만 있다면 수백만 명이 넘어가도 똘똘 뭉칠 수 있었다. 그 시작은 단연 신화이자 종교였으며 국가와 사상, 철학과 문화로 발전했다. 모든 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였다. 시끄럽고, 거짓말 잘하며, 이야기를 부풀리는 동물, 즐거운 환상의 토대 위에서 살아가는 동물, 그들은 천생 이야기꾼이었다
- 그들은 연금술사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쇠를 자유롭게 붙이고 모양을 만드는 능력이 당시로서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모습이었다. 실제로 대장장이가 만드는 말편자의 경우, 오늘날의 부적처럼 행운을 가져다주고 악마를 쫓는다고 믿었다. 그를 보면 당시 대장장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주술사나 마법사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연금술의 대가는 혹독했다. 그들은 중금속 중독에 걸려 각종 질병을 몸에 달고 살았다. 특히 비소는 신경마비, 색소침착, 탈모 등의 부작용을 일으켰고, 심할 경우 통증, 구토, 하혈과 함께 사망에 이르는 위험한 물질임. 대장장이이자 불의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괴팍한 성격에 절름발이, 두꺼운 목, 흉측한 얼굴로 그려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 조선시대 왕의 업무는 처리하는 직무가 만 가지나 된다고 하여 만기라고 불림. 4시에 일어나 늦은 밤 11시 취침까지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16시간을 노동한 셈.
- 인간은 광물을 언제부터 캐냈을까? 그 서사는 꽤나 오래전으로 4만 3천년 전에도 광산은 존재했음. 구석기인들은 아프리카에 있는 가장 오래된 강산 라이언 케이브에서 적철광을 캐냈으며, 네안데르탈인은 헝가리에서 부싯돌을 캐냈고, 고대 이집트인들 또한 시나이 반도에서 터키옥을 채굴한 흔적이 있다. 인간은 땅속에서 무언가를 캐내 무기나 도구를 만들고, 유용한 에너지로 썼으며, 금으로 장식을 만들어 목에 걸었다.
- 숫자의 탄생은 7천년전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 이들은 나일강 범람으로 인해 매번 토지의 구분선이 사라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하학을 발전시킴. 또한 숫자는 곡식을 저장하고, 재산을 측정하고, 갚아야 할 빚을 계산하기 위해 필수적이었음. 놀라운 것은 이 숫자가 인간에게 엄청난 힘을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건축술이었음. 피라미드 또한 치밀한 수학을 바탕으로 지어진 정교한 건축물이었으며, 기원전 3천년 경 고대 인더스 문명에서는 자와 컴퍼스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도시를 설계. 이 때문에 이들 땅에는 직각의 도로와 원기둥, 직육면체와 같은 건물이 등장할 수 있었음. 그래서인지 현대 수학의 근본을 탄생시킨 고대 그리스에서 수는 종교적 성향을 띄었음. 실제로 피타고라스 학파는 1부터 10까지의 수를 숭배하기도 했음
- 사실 처음 신대륙을 발견한 건 우리가 흔히 아는 콜럼버스가 아님. 오히려 그는 모험가나 발견자라기보다 침략자에 가까웠음. 그의 항해 일지에는 금과 보물에 관헌 언급이 수백 차례나 등장. 그 스스로도 엄청난 수의 노예를 원했음. 그는 1억명 이상의 원주민 학살의 시초이자, 노예무역의 대표주자였다. 신대륙의 발견은 기원전 1200년경에서 900년경에 살았던 페니키아인을 살펴봐야 한다. 페니키아 문명은 최초의 갤리선을 사용했으며, 지중해를 가로질러 해상무역을 시도. 고대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당시 페니키아인의 이야기를 듣고 정오의 해가 오른편에 떠 있었다니 믿기 어렵다고 기록했고, 그의 기록은 오늘날 그들이 아프리카를 일주했다는 근거가 됨. 적도 남쪽으로 들어서면 한낮의 해가 북쪽과 오른쪽에 위치하기 때문. 페니키아인들은 일명 침묵의 거래를 했다. 원주민이 상품을 갖다 놓으면, 그에 걸맞는 금을 놓고 가는 방식이었다.
- 인류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일했을까? 그것은 행복이나 자아실현, 위대한 목적의식 같은 게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초창기의 원시인처럼 여전히 생존을 위해 살아갔음. 근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90%의 사람들은 땀 흘리던 농부였고, 이후에도 공장 노동자나 단순 서비스 직종에 종사. 현재에도 한국 직장인 60.7%가 생계유지를 위해 일한다고 하니, 과거 신분제나 계급사회, 걸핏하면 목숨이 날아가던 시절에는 거의 모두가 생존을 위해 일했다고 봐야 한다. 지구를 살다 간 대부분의 인간이 하고 싶은 일보다는, 그저 살아가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것은 꽤나 슬픈일이다.
- 고대부터 중세가지 대부분 국가들의 회계는 매우 형편없었음. 과거에는 국왕의 개인지출이나 소득은 비밀리에 부쳐졌고, 이를 조사하거나 검문하지 않았음. 오히려 모두 쉬쉬하는 분위기.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로마 부실장부를 비판했다고 머리와 손이 잘려 광장에 전시됐으며, 루이 14세는 죽기 직전에 과도한 지출로 프랑스를 파산시켰음을 시인. 회계가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이탈리아. 그들은 매우 부유했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새로운 회계기술이 필요했음. 그때 등장한 것이 복식부기였는데, 이는 단순히 수입과 지출만을 계산하는 게 아닌, 자산과 부채라는 개념을 포함해 돈을 관리하는 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인류는 사업의 총이익을 투자자들에게 분배하는 데 효과적인 계산을 할 수 있게 됨. 인간은 회계를 통해 더욱 효율적인 경영을 할 수 있게 됨. 올바르고 뛰어난 기업, 투명하고 튼튼한 국가는 바로 이 회계에서 시작됨
- 사실 16세기까지만 해도 외로움은 잘 쓰이지 않는 개념이었다. 1674년 존 레이가 '흔히 쓰이지 않는 용어'에서 처음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정의했는데, '이웃헤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나 장소'를 의미. 과거에는 지금보다 훨씬 강한 집단의식, 공동체 속에 살았기에 좀처럼 외로움이란 감정이 자리잡지 못했을 것임. 하지만 16세기 르네상스 이후 개인주의가 들어서면서 외로움이 급부상.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자녀를 거부하는 딩크족에서 결혼을 거부하고 혼자 살아가는 나홀로족까지. 오늘날 우리가 개개인으로 분리될 수록 외로움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외로움이 깊어지는 동안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바 형태의 술집이 처음 생김. 당시에는 위스키나 브랜디 같은 독주가 성행했는데, 이는 노동자들이 빠르게 일터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 이에 용이한 것이 바였다. 산업 노동자들은 그 속에서 10분 남짓한 시간 안에 독한 술을 입에 털어 넣고 급히 돌아갔다.
- 스포츠는 disport와 라틴어 deporto에서 유래. 이것을 해석하면 '지루한 일상을 떠나보내고, 신나게 논다'는 의미. 인간은 오래전부터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체조가, 이집트에서는 전차경주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창던지기가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9세기 고대 그리스는 권투, 레슬링, 원반던지기, 종합격투기의 근원인 판크라티온을 포함해 주기적으로 올림피아 제전을 열었고, 이런 정신을 계승하여 최초의 올림픽이 개최됨
- 상담은 아주 오래전 종교로부터 시작. 성직자들은 사람들의 고민을 종교라는 테두리안에서 상담해줌. 그들은 마음 속 짐을 덜어주고, 평온함을 안겨주었다. 오늘날 상담치료가 발달한 계기는 슬프게도 1,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였음. 전쟁은 많은 군인과 그 가족들에게 처참한 고통을 안겨주었고, 이는 우울증, 발작, 공황장애 등 정신질환을 일으킴. 이들에게는 정신적 치료가 절실히 필요했고, 사람들 통해 치유되어야만 했다. 2차 대전 이전에 일어난 경제 대공황 또한 효율적인 직무상담이 크게 발전한 계기가 됨. 당대의 파슨스나 로저스는 "인간은 모두 자아실현 욕구가 있다"고 말하며, 새로운 상담이론을 제시. 절망적 상황에서 상담은 빛을 발했다. 위기가 왔을 때 한 인간이 한 인간을 돕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는 지금도 정신병을 앓고 있다. 범죄, 테러, 전쟁으로 죽는 사람보다 자살로 죽는 사람이 훨씬 많다. WHO에 따르면 39초당 1명 꼴로 자살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오늘날 상담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단적으로 보여줌
- 원시시대 결혼은 분업과 협력의 성격이 강했음. 원시인들은 생존을 위해 부족 간 협력을 원했다. 그 과정에서 결혼은 효과적 수단이 되었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인간의 유년기는 무척 길었고, 책임감 있게 지켜 줄 가족이 필요했다. 그들은 결혼을 통해 번식했고 생존력을 강화했다. 가족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러나 전략적 분업으로서의 결혼은 시간이 지나 그 본질을 잃어갔다. 1만년 전 시작된 농업사회는 사유재산과 계급을 탄생시킴. 상류계층은 그 지위를 유지할 방법으로 정략결호을 선택. 결혼이 권력과 부의 상속수단이 된 셈. 그 과정에서 개인의 뜻은 묵살됐다. 15세기 중반까지 결혼에 관한 한 여성은 속박의 대상이었고, 토지가 없는 이들에게도 결혼은 소원한 일이었다. 영혼의 동반이라는 의미로 부상되기 시작한 것은 약 2세기 전으로, 그 역사가 길지 않음. 하지만 기대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영원이라는 수사는 빠지게 될지도 모름. 110년 동안의 결혼새활이 타당할까? 세계적으로 황혼이혼이 대두되고,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며, 그 빈자리에는 동거라는 대안이 자리잡고 있다. 결혼이 사라지기는 힘들겠지만 연속 결혼, 즉 끝을 정해 놓은 계약결혼이 보편화될지도 모르는 일. 더 나아가 서로의 자유를 허락하는 새로운 종류의 결혼이 등장할지도 모름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  (0) 2019.11.04
모든 시작의 역사  (0) 2019.09.15
술에 취한 세계사  (0) 2019.09.05
역사의 역사  (0) 2019.07.21
무역의 세계사  (0) 2019.07.08
Posted by dalai
,

술에 취한 세계사

역사 2019. 9. 5. 12:46

- 다윈은 인간과 원숭이가 똑같은 방식으로 숙취에 대처하는 것을 보고 이 두 종이 친척관계에 있다고 생각했음. 이것이 다윈의 유일한 증거는 아니지만 고위 성직자들도 영장류임을 입증하는 출발점이 됨. 그뿐 아니라 이는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수많은 최근 이론의 선구자가 되었다.
- 우리 인간도 술을 마시도록 진화. 우리 조상은 1000만년 전 나무에서 내려왔다. 왜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지나치게 익어서 나무 밑으로 떨어진 맛난 열매를 주우러 내려왔을 가능성도 있음. 실제 숲에 가면 지표면에 나뒹구는 열매를 볼 수 있다. 그런 열매는 더 많은 당분과 알콜을 함유. 그렇게 해서 인간은 알콜냄새를 맡을 수 있는 코를 지니게 됨. 알콜은 인간에게 당분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판이었다.
- 인간이 농경을 시작한 이유는 식량을 얻기 위해서가 아님. 식량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이유는 술이 필요했기 때문. 이런 이론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 때문
(1) 맥주는 불을 피운 화덕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빵보다 만들기 쉬움
(2) 맥주는 인류가 건강과 튼튼함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타민B를 함유. 수렵인들은 다른 동물의 고기를 섭취함으로써 비타민B를 얻는다. 반면, 농경인은 맥주 없이 빵만 먹다가는 빈혈에 시달리다 약골이 되어 몸집이 크고 건강한 수렵인들에게 죽임을 당하기 십상이었을 것임. 그러나 밀과 ㅂ리가 발효되면 비타민B가 생성된다
(3) 맥주는 빵보다 훨씬 나은 식품이다. 맥주가 좀더 건강에 좋은 이유는 그 안에 함유된 효모가 소화를 돕기 때문.
(4) 맥주는 저장해두었다가 나중에 마실 수 있음.
(5) 맥주의 알콜 성분은 해로운 미생물을 모조리 죽임으로써 맥주의 원료인 물을 정화. 정착생활의 문제점은 인간은 어딘가에 대변을 배설할 수밖에 없으며 그 대변의 일부가 물속으로 들어가 다음에 곧바로 인간의 입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임.
(6) 행동을 바꾸려면 문화적 원동력이 필요함. 괴베클리 테페가 시사하듯이, 맥주가 먼 거리를 여행해서 찾아올 만큼 가치있고 종교적 음료였다면 수렵에 가장 열심인 사람이라 해도 한곳에 정착하여 맥주 양조에 필요한 보리를 재배하자는 설득에 넘어갔을 법하다.
이처럼 기원전 9000년경의 인류는 주기적으로 술에 취하고 싶었기 때문에 농경을 발명했다.
- 알콜이 인류에 끼치는 영향력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인간본성의 신비로운 기능을 자극하는 능력 때문. 대체로 인간본성은 정신이 맑을 때문 냉엄한 현실과 메마른 비판에 짓눌린다. 인간은 맑은 정신일 때는 폄하하고 차별하며 부정한다. 술에 취하면 후해지고 협동하며 긍정한다. 알콜은 실제로 인간의 긍정기능을 효과적으로 촉진함. 알콜은 취객을 차디찬 주변부에서 눈부신 중심부로 이끈다. 취기는 사람을 얼마 동안이나마 진실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알콜을 추구하는 까닭이 비뚤어진 심성 때문만은 아님. 가난하고 학식이 없는 이들에게 알콜은 교향곡 연주회와 문학의 역할을 대신함. 또한 알콜은 삶이 지닌 한층 더 심오한 수수께끼와 비극의 일부로서 전체적으로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독이지만 초반의 짧은 시간 동안에는 우리가 곧바로 뛰어나다고 인식하는 것의 낌새와 조짐을 우리 대다수에게 알려줌. 취한 상태의 자각은 신비로운 자각의 일부이며 우리가 그런 상태에서 도출한 견해도 전반적인 자각상태에서 도출한 견해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함
- 플라톤은 취한 상태일 때 믿음직한 사람이면 어떤 경우든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 게다가 상대를 술로 시험한다 한들 내가 손해 볼 일은 없다. 어떤 사람과 계약을 맺었다가 나중에야 그 사람이 부정직함을 알아채면 돈을 날리게 마련. 그러나 상대의 진면목을 알아보기 위해 같이 술을 마시면 전혀 위험할 것이 없다. 이런 모든 내용을 종합해보면 금주하는 사람을 믿어서는 안된다는 논리적 결론이 나옴. 이같이 고대 그리스에서는 음주는 이상하고 미묘한 일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되었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제정신을 잃지 말아야 했다. 술에 취해도 미덕을 발휘해야 했다.
- 희한하게도 모든 역사가와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가 말술을 마시고도 전혀 취하지 않았다는 데 동의. 영혼 자체가 너무도 질서정연했기 때문에 술에 취해도 합리적 태도만 드러났을지도 모름. 아니면, 그의 간이 유별나게 효율적이었을 수도 있음. 어떻든 소크라테스는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는 해괴한 이유로 칭송을 받아온 사람의 원조다
- 로마의 콘비비움은 현대의 술꾼이 참석하기에는 굉장히 불쾌하고 불편한 자리었으리라 추정됨. 그리스의 심포지온은 자신과 동등한 사람들을 만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심포지아크가 있었다고는 해도 얼굴마담에 불과했음. 생각해보면 그리스인들은 모두 같은 크라테르에 든 술을 마셨다. 심포지온은 남자들끼리 (오직 남자만) 모이는 자리였다. 로마의 콘비비움은 부를 과시하고 누가 윗사람이고 누가 아랫사람인지를 확고히 하는 데 목적이 있었을 뿐이다. 콘비비움은 즐거운 모임이 아니라 자기 위치를 깨닫고 자기보다 서열이 높은 사람들을 칭송하며 서열이 낮은 사람들을 조롱하는 자리였음. 그런 목적은 좌석배치, 노예, 포도주의 품질과 양, 음식, 술잔, 술잔을 던지는 곳을 통해 달성되었다.
- 중세 사람들은 말 그대로 언제 어디서나 술을 마셨음. 그들은 일터에서 술을 마셨다. 볼리외 수도원의 수사들처럼 하루에 약 1갤런의 맥주를 배급받는 수사들 천지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일터에서 술을 마심. 임금의 일부가 맥주로 지급되는 일도 많았음. 예를 들어, 목수는 임금 외에도 3파인트(약 1.7리터)의 맥ㅈ와 약간의 식료품을 덤으로 받음. 영주가 영토를 경작할 일꾼을 고용할 때도 그들에게 술을 얼마간 제공해야 했다. 술은 삶의 방식이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술에 취해 있었던 것은 아님. 들판에서 온종일 고된 노동을 하는 동안 띄엄띄엄 몇 파인트 마셔봐야 술에 취할리 없다. 그러나 맥주를 마시면 속이 든든해졌다. 한마디로 맥주는 액체로 된 빵이었다.
-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술을 마심. 중세 마을 교회는 예배장소라기 보다는 마을 회관 역할을 함. 사람들은 교회마당에서 축구도 하고 예배당 안에서 노래를 부름. 성인축일,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성인을 기념하는 영명축일, 혼례, 세례식, 장례식 등 각종 교회행사에서도 맥주를 나누어 마심. 호상은 늘 놀이판이었다.
- 무엇보다 중세 영국 남성은 집에서 술을 마셨음. 중세 영국 여성과 어린이도 마찬가지. 그때만 해도 물은 상당히 위험해서 아주 가난한 사람들만 마셨다. 앨프릭은 '나는 맥주가 있으면 맥주를 마시고 맥주가 없어야 물을 마신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음. 그 말고도 거의 모든 사람이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만드는 과정은 간단해서 기본적으로 보리와 물과 가능하다면 약간의 향신료만 필요했다. 따라서 남편이 들판에 일하러 나간 동안에 아내는 맥주를 양조하게 마련이었다.
- 중세 에일맥주는 질척질척한데다 불순물이 섞인 죽이나 다를 바 없었음. 맛을 좋게 하려면 약초와 향신료를 넣는 방법밖에 없음. 그중에서도 서양고추냉이가 가장 인기 있었음. 맥주 양조자들은 원래의 맛을 덮으려 했다. 역겨운 음료를 목에 넘길 수 있는 음료로 바꾸는 데 급급. 그때 홉이 등장했다. 홉은 홉 풀의 원뿔형 열매임. 홉을 에일맥주에 넣으면 진짜 맥주(beer)가 된다. 유럽 대륙인들은 오랫동안 홉을 넣어 맥주를 만들었지만 영국인들은 시대에 뒤처졌음. 홉은 런던에서 첫선을 보였고, 서서히 잉글랜드 전역으로 보급됨. 적잖은 저항이 있었다. 랭커셔에서는 17세기 중반이 되도록 에일 맥주를 마셨다. 콘월도 오랫동안 에일 맥주를 고수했다
- 사람들은 대개 홉이 들어간 맥주 맛을 선호. 홉 맥주는 에일 맥주에 비해 어마어마한 장점이 한가지 있다. 상하지 않는다는 점. 홉 맥주는 1년 정도를 보관해도 술통만 밀봉하면 맛이 변하지 않음. 그 때문에 홉 맥주는 대량생산이 가능했음. 모든 주요 도시에 양조장이 들어서서 맛좋은 맥주를 대량으로 생산해냈고 현지의 맥ㅈ집에 판매. 양조장은 맥주를 여과하여 훨씬 더 훌륭한 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 만취를 연구하는 문화인류학자들은 습식문화와 건식문화를 구별. 습식문화권의 사람들은 술에 대해 굉장히 느긋한 태도를 보임. 그들은 하루종일 술을 홀짝이며 매우 유쾌한 시간을 보내며 제대로 취하여 자빠지는 일이 거의 없음. 건식문화는 이와 반대. 건식이라고 그들이 알콜을 전혀 섭취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님.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그들이 술을 크게 경계하여 술을 마시면 안되는 경우를 엄격하게 규정해놓았기 때문. 상황이 허락하면 그들도 술에 취한다. 전형적으로 남부유럽은 습식문하권에 속함. 이탈리아 사람은 평일 정오에 레몬으로 만든 이탈리아 술인 리몬첼로를 홀짝이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북유럽은 아침에 술을 마시지 않으며, 금요일 밤에 술판을 벌이기 때문에 건식문화권이다. 그 때문에 이 두가지 문화는 대륙식 음주와 폭음으로 불리기도 함.
- 스페인 정복자들은 그 당시에도 습식문화에 속했다. 그들은 포도주를 좋아했고, 온종일 술을 달고 살았지만 만취하는 일은 거의 없었음. 이 이론에 따르면 아즈텍은 건식문하다. 앞서 살펴본 법률에 따라 그들이 술에 입을 댈 수 있는 날은 며칠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예를 들어 400마리 술 취한 토끼를 기리는 종교 축제일에는 완전히 고주망태가 되었다. 그들은 종말론적이고 종교적으로 술에 취했고 앞서 살았던 이집트나 고대 중국 사람과 마찬가지로 신성을 체험하는 수단을 알콜을 이용했듬. 그러다 그달 내내 술을 입에 대지 않아다.
- 이방인들이 갑자기 나타나 나라를 정복하고 종교 축제일이 표시된 달력을 없애지 않았다면 이러한 시스템은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했을 것임. 그런데 정확히 아즈텍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 건식문화는 금요일에 폭음하고 월요일에는 말짱한 정신을 유지하는 식으로 그럭저럭 절충이 가능함. 하지만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예수회가 아즈텍 제국을 끝장낼 때쯤에는 달력이라는 중요한 정보가 사라졌다. 그때 알콜의존증이 전 세계적 유행병이 되었고 스페인 치하의 멕시코도 그것에 감염되었다. 실제 카톨릭 사제들은 사탄의 조종으로 원주민들이 알콜 의존증에 빠졌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원주민들이 선한 기독교도가 되지 못하도록 사탄이 방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사실과 정반대였다. 피정복자들을 풀케 중독으로 밀어 넣은 원인은 법률완화와 기독교 유입에 따른 사회혼란이었다.
-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는 노동을 식료품이나 토지 등 어쩌다 손에 넣은 것과 바꾸는 교환경제였다. 인구의 과반수가 강제노역에 종사하는 죄수들이었다. 따라서 기존 노역 의무 이상의 것을 시키려면 무엇인가를 제공해야만 했음. 영국 정반대편에 있는 이 지옥소굴에서 즐거움을 주는 것은 럼뿐이었다. 럼 공급을 장악하는 이가 식민지도 장악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로스 총독대리의 천재적 발상이었음. 역사학자 대다수가 럼이 뉴사우스웨일스의 화폐였다고 말할 테지만 실은 화폐 이상이었다. 럼은 사회통제의 수단이었다. 럼의 유통통제는 일종의 독재자였지만 럼의 소비는 무정부상태를 유발했기에 럼은 역설이었다. 향후 20년에 걸쳐 럼 부대는 럼 사업을 장악했고 부자가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전능한 권력을 손에 넣었다. 후임 총독들이 증류주 무역을 중단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런던에서 파견되었지만 그들이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증류주 무역만이 권력의 지렛대였기 때문
- 금주운동이 원동력이 중서부의 기혼여성들이었다면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독일인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양조업자들이었음. 이민집단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독일인들은 금주나 음주 절제츼 전통이 전혀 없었음. 그들의 전통은 맛좋고 시원한 맥주를 만드는 것이었고 그들은 맥주로 벌어들인 어마어마한 돈을 라거광고는 물론 절대금주운동의 반대 캠페인에 쏟아부었음. 이들의 광고는 위스키와는 반대로 맥주를 건강에 좋고 행복한 독일인 농부가 마시며 정통 독일 제조법에 따라 양조되는 독일음료로 묘사. 그때만 해도 누구나 독일인을 좋아했기 때문. 그러다가 1차대전이 터졌다. 다른 세계대전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인들은 다소 뜸을 들였지만 마침내 1917년에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후에 참전했고, 곡물보급량을 유지할 필요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에 따라 증류주 제조를 금지했음. 주류지지운동이 곤경에 처했다.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주류의 제조와 판매를 금지하는 조치가 시행되었다.
- 인간은 언제 어디에 살든 함께 모여 약에든 술에든 취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이 맨 정신에서 홀로 체험하는 세상은 결코 완전치 않다. 물론 술 같은 중독성 물질은 종류가 다양하지만 언제나 존재하게 되어 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말을 쓰곤 한다. 마약은 불변의 것이다. 마약끼리의 전쟁이 있을 뿐이며 그런 전쟁에서 항상 승리라는 것은 알콜이다. 명심할 점은 정부가 정말로 헤로인이나 코카인 같은 마약을 근절할 생각이 있다면 술에 매기는 세금을 없애기만 해도 목표를 쉽게 이룰 수 있다. 인간은 단순한 종이라서 가격과 입수가능성을 따져 중독성 물질을 선택한다.
- 인간은 맑은 정신일 때는 폄하하고 차별하며 부정한다. 술에 취하면 후해지고 협동하며 긍정한다. (윌리엄 제임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시작의 역사  (0) 2019.09.15
원시인이었다가 세일즈맨이었다가 로봇이 된 남자  (0) 2019.09.15
역사의 역사  (0) 2019.07.21
무역의 세계사  (0) 2019.07.08
서양은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나  (0) 2019.07.04
Posted by dalai
,

역사의 역사

역사 2019. 7. 21. 19:37

1. 서구 역사의 창시자,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2500여 년 전 사람이지만 사유능력은 현대의 역사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 역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직면했던 어려움과 해결해야 했던 과제, 역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직면했던 어려움과 해결해야 했던 과제, 역사를 서술한 목적도 비슷했다. 그들은 모든 시대의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영원성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었기에 책의 첫머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 역사가는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건을 선택해서 의미있다고 여기는 사실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함. 어떤 사건이 중요한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경험의 영향을 받음. 직접 체험한 전쟁보다 더 의미있게 다가오는 사건이 달리 있겠는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서술 대상의 차이가 아니라 역사의 대사건을 서술하면서 취한 두 역사가의 태도다. 세계대전의 역사를 쓴 그리스 사람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와 페르시아를 공정하게 대했고, 내전의 역사를 쓴 아테네 시민 투키디데스는 델로스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공정하게 다루었음. 그들이 어느 한쪽을 감정적으로 편들었다면 사실을 편향되게 기록하고 해석했을 것이고, '역사'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인류 문화자산이 되기 어려웠을지도 모름
- 역사는 역사가의 목적과 사실, 사실에 대한 해석과 역사가의 상상력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복합적 피드백의 산물이라고 본 카는 매우 간결하고 우아한 문장으로 그 생각을 표현했음.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소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다."
-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가 서구에서 역사의 창시자 대접을 받는 것은 책이 훌륭해서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었고 지금도 읽기 때문이기도 함. 역사의 역사에 남은 역사서를 쓴 서구 역사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그리스 고전에 통달했고, '역사'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들의 책은 왜 그렇게 오래 그리고 널리 읽혔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핵심은 서사의 힘이다. 그들은 뚜렷한 목적을 품고, 명확하게 특정할 수 있는 대상에 관하여, 최대한 사실에 토대를 두고, 사람들이 귀 기울여 들으면서 지적 자극을 받고 정서적 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이야기를 꾸몄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가 지적자극을 받고 정서적으로 공감을 할 수 있는 서사를 만드는 일이다.

2. 사마천이 그린 인간과 권력과 시대의 풍경화
- 사기가 그저 가치 있는 역사기록일 뿐이라면 전문 역사연구자들이나 들여다보는 책으로 남았을 것임. 수많은 역사 애호가들이 지금도 사기를 읽는 것은 그 안에 인간의 이야기가 있어사다. 사기에서 우리는 사람답고 훌륭한 삶을 추구하면서도 부질없는 욕망과 야수같은 충동에 휘둘리는 인간존재의 모순을 발견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남을 지배하는 데 요긴한 처세술을 배우려고 읽으며, 또 어떤 이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인생의 의미를 만들어나가야 할지 고민하면서 읽는다
- 인물과 사건이 역사의 뼈와 살이라면, 제도와 문화는 혈관과 신경이다. 사회와 시대를 입체로 재현하려면 제도와 문화를 함께 보아야 한다. 사마천은 단순히 제도 변경사실만 기록한 게 아니라 제도에 적응하고 허점을 이용하는 사람의 행동을 함께 살피면서 제도사와 문화사를 썼다. 이런 측면까지 인식하고 역사를 서술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인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역사서를 한권만 뽑는다면 사기가 가장 강력한 후보다. 사마천은 역사를 역사답게 쓴 중국문명 최초의 역사가였다. 민간의 역사서와 다양한 국가기록을 참고해 사기를 집필했지만 사기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 이전의 역사서가 저마다 별 하나를 그렸다면 사마천은 우주를 그렸다. 사기는 시대와 문명의 과거를 언어로 재구성한 전체사였다. 인류 역사에서 혼자 힘으로 그런 작업을 해낸 역사가는 오로지 그 한사람뿐이었다. 사마천은 역사를 쓰는 사람이 반드시 부딪히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섰음. 자연인 한 사람이 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작업량이 많았음. 종이도 아닌 죽간에 먹으로 글을 쓰면서도 모든 역사적 사건의 발생시점과 상관관계를 크게 어긋남 없이 기록하고 서술. 영웅과 군주와 왕조의 명멸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추적하면서 세상의 변화에 큰 영향을 준 인물들의 삶과 업적을 함께 이야기했다. 조수를 여럿 썼다면 그나마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어떤 방식으로 이렇게 방대한 작업을 해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 사마천은 국가와 사회는 정치권력과 경제제도, 사회제도, 법률, 예술과 문화양식의 복합체이며 그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 구조와 양상을 분석. 권세와 지위는 없었지만 독특하고 자주적인 인생을 살아나감으로써 인간의 본성과 삶의 의미를 사유할 실마리를 던진 이들을 망각의 어둠에서 건져냈다. 사기는 또한 개인사의 치욕을 견뎌낸 사마천이 역사의 수많은 사실을 마주하면서 느꼈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과 감정도 전해준다.

3. 이븐 할둔, 최초의 인류사를 쓰다
- 600년 전 북아프리카에 살았던 이븐할둔(1332-1406)은 문명을 환경의 산물로 간주하고 세계를 일곱기후대로 나누어 환경과 문명의 관계를 살피면서 인류사를 썼음. 그가 쓴 역사서설은 인류사의 원형으로 역사의 역사에서 합당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
- 역사서설에서 오늘날까지 역사서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는 보편적 역사법칙을 밝혀서가 아니라 귀중한 역사기록을 남겼기 때문. 그는 자신이 발견했다고 믿었던 역사법칙을 논증하는 과정에서 7세기에 탄생한 이슬람 문명과 아랍사회의 현황 및 특징을 기록했고, 당시 아랍지식인들이 인간과 문명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정밀하게 서술. 이런 정보 덕에 역사서설은 이슬람 문명의 발생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귀한 길잡이가 되었음. 이 책은 또한 시대를 한참 앞서간 과학적 사고방식과 인문학적 상상력을 담고 있어서 만만치 않은 재미를 맛볼 수 있다.
-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는 신을 섬기는 종교는 근보적으로 독선적일 수밖에 없다.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마찬가지. 그런데 이슬람 세계의 불행은 교리 그 자치게 아니라 무함마드가 세속의 왕이 된데서 비롯했음.그는 영혼과 도덕을 다루는 종교를 합법적 강제력 행사를 본서응로 하는 국가권력과 하나로 묶었다. 독점적 진리에 대한 확신을 기본으로 삼은 종교라 할지라도 종교의 영역에만 있을 때는 해악이 적고, 세속권력이 할 수 없는 사회적 선을 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종교가 국가권력과 일체가 되면 사회의 내적 평화가 뿌리내리지못함. 무함마드가 죽은 후 이슬람 세계에서 벌어진 일을 보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 오스만제국은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의 세 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차니한 다종교, 다문화, 다언어 국가였음. 만약 그 시점에서 인류문명을 대표하는 세계의 수도를 하나 정한다면 단연 이스탄불이었다. 산업혁명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축적한 단연 이스탄불이었다. 산업혁명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축적한 서유럽 열강이 영토를 잠식하고 그 지원을 받은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민족이 독립함으로써 수백년에 걸쳐 영토를 조금씩 잃었지만, 추축국 진영에 가담했따가 1차대전의 패전으로 무너진 20년까지 오스만 제국은 5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이었다.

4.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 랑케
-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랑케의 야심,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쓴 역사를 과학적 역사라고 한 추종자들의 호언은 인간정신과 문자 텍스트의 한계에 대한 인식부족이 빚어낸 착각이 있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랑케의 역사이론은 역사가에게 명분있는 도피처를 마련해주었다. 과거를 평가하는 일에서 손을떼고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도록 동시대인을 일깨우는 과업을 외면하면, 역사가는 역사 서술작업에 따르는 정치적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사라져 버린 문명의 파편을 탐사하고 이미 죽고 없는 사람들이 남긴 문서를 뒤져 지나간 시대의 고유한 가치를 탐사하는 것으로 역사가의 임무를 다할 수 있다면, 굳이 그 과거의 연장선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사건에 개입하거나 끌려들어가지 않아도 됨.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역사가들이 우리 민족사를 우리 스스로 연구한다는 취지 아래 1934년 진단학회를 결성하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만 기술한다는 랑케의 구호를 차용한 것은 영리한 선택이었음. 일제의 식민사관 구축에 협력한 학자들도 같은 이론을 내걸었기 때문에 나중에 도매금으로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긴 했지만, 이러한 실증주의 역사관을 표방함으로써 총독부의 감시와 박해를 피하는 데 잠시 효과를 보았다.
- 랑케는 배울 것이 많지만 반면교사로 삼기에도 좋은 역사가다. 역사가는 해부학을 배우는 학생이 아니라 노련한 과학수사대 요원과 법의학자가 시신을 다루는 자세로 역사의 사실을 대면해야 함. 시신을 해부해서 거기 무엇이 있는지를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신의 상태를 코고 사망원인과 시간을 알아낼 뿐만 아니라 망자의 직업과 생활환경, 생전의 건강상태와 습관까지 추론해 내야 하며, 유류품이 담고 있는 정보를 연결해 그 사람의 인생행로를 추측할 수 있어야 함. 니체가 아프게 지적한 것처럼, 랑케는 역사의 사실에서 인간의 이야기를 끌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쓴 책들은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귀중한 문헌을 보관하는 도서관 깊은 곳에 잠겨 있는 것이다.

5. 역사를 비껴간 마르크스의 역사법칙
- 마르크스는 다른 사람의 사상과 이론을 빠르게 흡수하면서도 그 결점과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해 자신만의 사상과 이론을 구축하는 데 활용. 유물사관의 방법론인 변증법으 헤겔에게서, 철학적 토대인 유물론은 신의 존재를 부정한 논문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발표해 젊은 지식인들을 매료시켰던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마흐(1804-72)에게서 가져왔다. 마르크스의 대표적 자본론의 핵심인 잉여가치론은 고전파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을 개정 증보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글도 잘 썼다. 공산당 선언 같은 정치적 격문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을 비롯한 정치비평, 자본론처럼 방대한 학술서를 모두 최고 수준으로 쓴 지식인은 문명사에 흔치 않다.
- 역사의 종말은 철학, 경제학, 정치학을 뒤섞은 사변적 정치선언문으로, 역사와 역사학에 대한 구체적이고 진지한 질문에는 전혀 응답하지 않는다. 헌팅턴의 표현에 따르면, 이 책은 서구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지식인이 터뜨린 환상과 편견의 꽃망울일 뿐이다. 그러나 후쿠야마가 되살려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함. 인간은 일관된 방향을 가진 역사를 구축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역사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많은 역사가들이 대답을 제시했지만, 실제 역사는 그 모든 대답을 비겨갔다. 결국 후쿠야마이 대답 역시 터무니 없는 것으로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그가 되살려낸 질문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6. 민족주의 역사학의 고단한 여정, 박은식, 신채호, 백남운
- 헤로도토스에게 역사서술은 돈이 되는 사업이었고, 사마천에게는 실존적 인간의 존재 증명이었으며, 할둔에게는 학문연구였다. 마르크스에게는 혁명의 무기를 제작하는 활동이었고, 박은식과 신채호에게는 민족의 광복을 위한 투쟁이었다. 사피엔스의 뇌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지만 뇌에 자리잡는 철학적 자아는 사회적 환경을 반영한다. 그들은 각자 다른 시대에 살면서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이야기를 남겼다.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게 되는 이유가 무얼까? 그들은 철학적 자아와 공명하기 때문. 민족주의자든 아나키스트든 마르크스 주의자든, 식민지 시대 지식인들이 쓴 역사를 읽으면 가슴이 아리다. 그들이 살았던 사회적 환경과 오늘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같지 않은데도 이러는 이유가 무엇일까?

7. 에드워드 H 카의 역사가 된 역사이론서
- 역사가의 선택을 받은 사실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자. 수많은 과거의 사실 가운데 어느 것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지, 그 사실에 얼마나 중요한 지위를 부여할지는 역사가의 주관적 평가와 해석에 달려 있음. 역사적 사실은 순수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면서 발언하는 게 아니라 평가와 해석이라는 주관적 요소의 세례를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존재를 인정받고 무언가 말할 수 있다. 이 주장을 카는 다음과 같이 우아하게 표현했다. 베네데토 크로체가 얼마나 대단한 혁명가, 정치가, 역사가였는지 알면 더 좋겠지만 몰라도 이해하는 데 큰 상관은 없다.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선언했다.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운으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임무는 기록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만약 아무것도 평가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기록할 가치가 있는 사실인지 역사가는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 사실을 다루는 역사가의 태도에는 두 극단이 있다. 하나는 역사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 깎을 것은 깎고 보탤 것은 보탠 공자의 춘추필법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 그 자체가 말하게 함으로써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보여준다는 랑케 필법이다. 춘추필법은 역사가에게 해석이라는 칼로 사실을 난도질할 권리를 주었다. 반면 랑케필법은 사실 앞에서 역사가를 무장 해제했다. 춘추필법은 2000년 동안 중국 문명권의 역사서술을 지배했고, 랑케필법은 100년 동안 서구 역사학계에서 유행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어느 것도 받아등리지 않는다. 그들이 쓴 역사는 모두 춘추필법과 랑케필법 사이 어딘가에 있다.

8. 문명의 역사, 슈펭글러, 토인비, 헌팅턴
- 토인비의 이론에 따르면, 문명은 외부환경의 도전에 대한 성공적 응전의 산물이며 탄생한 후에도 계속 새로운 도전에 직면. 문명은 응전에 성공하면 성장, 발전하고, 실패하면 쇠퇴하며, 실패한 응전이 계속될 경우 해체된다
- 토인비는 문명이 만나는 도전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눔. 척박한 땅이 주는 자극, 새로운 땅이 주는 자극, 갑작스러운 외부의 충격(공격), 외부의 계속적인 압력(압박), 그리고 사회 내부 집단에 대한 제재(압제)다. 새로운 도전이 전혀 없으면 폴리네시아, 에스키모, 유목민 사회처럼 문명이 성장을 멈춘다. 도전이 가혹할수록 응전하는 힘도 커지지만, 지나치게 가혹하면 문명 자체를 말살하기 때문에 지나치지 않은 수준의 적당한 도전이 문명의 성장에 가장 큰 자극을 줌. 그렇다면 문명은 왜 응전에 성공하거나 실패하는가? 응전의 성패를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가? 토인비는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관계에 의거해 다음과 같은 해답을 제시했다. 사회의 진보는 언제나 개인에서 출발. 여기서 개인은 모든 개인이 아니라 소수의 창조적 천재들이다. 어느 사회나 소수의 창조적 천재가 있으며, 그들은 비창조적 다수자가 자신의 비전을 받아들이고 따를 때에만 사회적 창조행위를 성공적으로 수행가능. 비창조적 다수자가 창조적 소수자를 모방하고 따르는 현상을 미메시스라고 한다. 그리스어 미메시스는 모방 또는 재현이라는 의미. 창조적 소수자가 미메시스를 창출하면 사회는 응전에 성공하고, 문명은 성장. 반면 창조적 소수자가 창조력을 상실하면 비창조적 다수가가 미메시스를 철회하는데, 이런 과정을 네메시스라고 함. 네메시스는 화를 내며 비난한다는 의미. 창조적 소수자가 창조력을 잃고 지배적 소수자로 타락하면, 다수자는 미메시스를 철회하고 면종복배하는 내적 프롤레타리아트와 폭력으로 맞서는 외적 프롤레타리아트로 분화하며, 사회는 응전능력을 잃고 혼란에 빠지며 문명은 쇠퇴
- 토인비의 역사 패러다임은 21세기 들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됨. 미국은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다언어를 가진 제국이며 현대 서구문명의 중심국가임. 그런데 백악관의 권력자들은 종종 지배적 소수자의 행태를 보였다. 9/11 테러를 저지른 무슬림 테러리스트 집단은 서구 문명에 포획당안 서구 밖 문명에 속한 사람들(외적 프롤레타리아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16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트럼프 후보의 인종주의적 정치선동에 환호를 보낸 미국의 쇠락한 공장 지대 백인 노동자들은 위에서 말한 "성공한 백인 동료들이 바다 건너에서 데려온 노예와 같은 사회적 지위로 떨어졌다."고 느끼는 내적 프롤레타리아트라 할 수 있음. 이것은 토인비가 문명 해체기의 징후로 지목한 현상과 유사함. 새로운 창조적 소수자가 등장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미메시스를 복원하지 못하면 서구문명뿐만 아니라 인류문명이 직면한 멸망의 위험도 줄이기 어려울 것임. 서구문명이 노예제도를 스스로 폐지했기 때문에 전쟁이라는 쌍둥이 암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토인비의 믿음은 지나친 낙관이었는지도 모름
- 사람들은 조상, 종교, 언어, 역사, 가치관, 관습, 제도를 가지고 자신을 규정한다. 부족, 민족집단, 신앙공동체, 국민, 가장 포괄적인 차원에서는 문명이라고 하는 문화적 집단에 자신을 귀속시킨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도 정치를 이용한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 알 때만, 아니 자신의 적수는 누구인지 알 때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문명의 충돌)

9. 다이아몬드와 하라리, 역사와 과학을 통합하다.
- 토인비는 문명의 발생원인과 관련해 인종설과 환경설을 모두 배척하고 문명 내부로 눈길을 돌려 사람과 사람의 관계, 기술과 제도와 문화의 변화를 추적. 그러나 다이아몬드는 전적으로 환경설에 손을 들어줌. 피부색과 신체특성이 어떻든 모든 사피엔스는 동등한 지적, 정서적, 육체적 능력을 지녔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문명 발전 속도의 차이를 만들어낸 근본원인은 환경 외에 다른 게 있을 수 없다. 기술과 제도아 문화의 차이도 그 원인을 추적하면 결국 환경 차이에 귀착됨.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을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다이아몬드의 대답은 간단하다. "우연히" 또는 "운이 좋아서"
- 헤로도토스는 이오 공주 납치사건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로 '역사'를 열었다. 사마천은 사기본기 첫머리에 삼황오제의 전설을 실었다. 할둔의 역사서설은 사회조직의 등장과 함께 출발하며, 문명을 역사서술 단위로 설정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도 마찬가지. 김부식은 삼국사이의 신라본기를 박혁거세의 탄생설화에서 시작했고, 신채호는 단군왕검 신화로 조선상고사의 문을 열었다. 모두가 국가 또는 그에 준하는 사회조직의 출현을 역사의 시작으로 잡은 셈. 그런데 하라리는 7만년전 쯤 일어난 인지혁명을 역사의 출발점으로 보았음. 사피엔스가 이 혁명으로 사회조직 또는 문명을 만들어낼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 그렇다면 인지혁명은 어떤 혁명이었을까? 그것은 역사의 사건이 아니라 생물학의 사건이었다.
인지혁명이란 약 7만년전부터 3만년 전 사이에 출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을 말한다. 무엇이 이것을 촉발했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이론은,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돌연변이가 사피엔스 뇌이 내부배선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전에 없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의 나무 돌연변이라 할 수 있다. 왜 하필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라 사피엔스의 유전자에 등장했을까? 우리가 아는 한 그것은 순수한 우연의 산물이었다.
- 하라리가 하고 싶었던 말은 어떤 생물 종의 진화적 성공이 그 후의 인구폭발은 사피엔스의 진화적 성공을 증명함. 그러나 그들이 더 행복해졌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농부가 수렵채집인보다 행복하게 살았다고 확언할 수는 없었다는 말이다. 이 논리를 산업화 또는 과학혁명 이후의 인구폭발에 적용하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근대 이후 노동자의 삶은 중세 농부의 삶보다 행복한가? 아래 글을 보면 하라리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는 소, 돼지, 닭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사피엔스라고 해서 예외가 되는 건 아니다.

 

Posted by dalai
,

무역의 세계사

역사 2019. 7. 8. 12:45

- 근대이전의 경우 기본적 화폐는 놀라울 정도로 일관적이었다. 약 4그램의 작은 금화가 주로 통용되었으며 오늘날 미국의 10센트 동전 크기. 프랑스의 리브르, 피렌체의 플로린, 스페인이나 베네치아의 두카트, 포르투갈의 크루사도, 이슬람권의 디나르, 비잔틴의 베잔트, 로마후기 솔리두스가 이러한 예이다. 오늘날 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80달러 정도의 가치를 지님. 이와 관련하여 세가지 예외가 있다. 네덜란드의 길더는 무게가 5분의 1정도였으며, 영국의 1파운드 금화와 로마초기 아우레우스는 무게가 2배정도였다. 이슬람권의 디르함, 그리스의 드라크마, 로마의 데나리온은 은화로, 크기와 무게가 거의 비슷했다. 가치는 반숙련 근로자의 하루임금 수준이었으며, 금화와 은화의 교환비는 1대 12정도였다.

1. 메소포타미아의 초기교역
- 기원전 2500년에는 신분을 과시하는 상징이 소라껍데기 잔과 등에서 구리로 만든 단지, 도구, 장신구로 바뀜. 이 시대에도 구리의 운반비용은 여전히 비쌌고, 평민은 금속이 아닌 석재로 만든 도구를 사용. 설사 평민이 구리로 만든 훌륭한 기구를 손에 넣을 능력을 가졌더라도 구리로 된 고급제품은 지배계층과 군인차지였을 것이다. 이후 500년 동안 금속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구리로 만든 도구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 청동기 시대에는 구리가 귀했기에 소, 곡물과 더불어 교역품으로 활용됨. 하지만 기원전 2000년 경 구리공급이 증가하면서 가치도 하락. 그러자 구리대신 은이 교환수단, 즉 오늘날 화폐라 일컫는 대상으로 자리잡음. 은이 화폐로 통용되면서 다른 산물의 구입과 판매도 촉진되어 상업이 활성화됨.
- 과거 로마인에게 후추무역이란 오늘날 야심만만하고 물욕이 강한 사람들의 투자은행과도 같았음. 다시 말해 최고 부유층에게 직접 닿을 수 있는 방법이었음. 제국 초기에는 탐욕스러운 사람을 가리켜 "낙타 등에서 방금 구매한 후추를 처음으로 가져가는 자"라고 표현했다.
- 서로마제국의 멸망은 세계무역이 그 요람지인 인도양 밖으로 뻗어나가는 속도를 둔화시켰다. 그러나 교역 자체가 멈춘 것은 아니었음. 강력한 신흥 유일신교인 이슬람이 발원하면서 인도양을 통한 교역이 새롭게 확대됨. 이에 따라 교역은 아시아의 드넓은 평원에서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의 변경에서도 일어남. 한나라-로마 축을 중심으로 한 교역은 막대한 거리를 아울렀지만 통합의 정도는 강하지 않았다. 화물은 생산지에서 목적지까지 수많은 인종, 종교, 문화, 법전통의 상인들을 거쳐야 했다.
- 성직자의 탄생을 계기로 파편적이고 다민족을 거치는 고대의 교역은 자취를 감춤. 무함마드가 사망한 이후 몇 세기만에 하나의 문화, 하나의 종교, 하나의 법이 구세계 3개 대륙간 교역을 통합시켰다. 이러한 상태는 최초의 유럽 선박이 동양에 도착하기 전까지 1000년 가까이 유지됐다.

2. 그리스 교역 해협을 누가 장악하는가
- 그리스가 서양문명의 요람이라면, 그리스 특유의 전략적 지리요소는 해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서양의 해군전략에도 영향을 미쳤다. 베네치아, 네덜란드, 잉글랜드는 각각 13, 17, 19세기판 아테네였음. 식량을 자급할 수 없는 수준으로 몸집이 커지자 번영과 생존이 해로와 머너먼 카테가트(유틀란트아 스웨덴 사이의 해협), 영국 해협, 수에즈, 아덴, 지브롤터, 말라카, 헬레스폰트와 보스포루스 같은 전략적 요충지의 장악 여부에 달려 있었음. 오늘날 사우디, 이라크, 이란의 거대한 유전에서 생산되는 원유가 페르시아만을 통과하면서 미국, 영국, 인도, 중국의 국방장관은 좁은 물길을 자유롭게 통과하는 항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느끼고 있다.

3. 대상의 길_낙타와 선지자
- 기원전 1500년까지는 주로 당나귀가 짐을 나르는 짐승으로 쓰였다. 이후 유목민은 이동을 위해 낙타를 대거 사육. 당나귀가 부드럽고 가벼운 짐을 실을 수 있는 가정용 세단이라면, 낙타는 푹신한 발굽이 있어 길도 없는 장거리의 황무지를 두 배의 짐을 싣고 두 배로 빠르게 갈 수 있는 랜드로버였다. 이 같은 낙타의 능력은 중동 사막과 아시아 스텝 지대의 교역에 혁명을 일으킴. 몰이꾼 한 사람이 끌고 갈 수 있는 낙타는 3-6마리 정도였고, 하루에 1-2톤의 짐을 30-100킬로미터 나를 수 있었다.
- 유황과 몰약은 종교적 이유와 세속적 이유 모두에서 사치품으로 각광받음. 현대인은 고대문명을 상상할 때 주로 시각과 청각요소를 떠올리고 후각적 요소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위생시설이 변변치 않은 비좁은 도시에서는 지도 없이 냄새로도 장소를 식별할 수 있었다. 주요 하수시설과 도축장에서 나오는 오수는 악취를 풍기고 관청, 신전, 극장 주변에서는 소변냄새가 진동했다. 특히 무두질 공장, 생선가게, 묘지에서 풍기는 악취는 후신경을 강하게 자극. 게다가 깨끗한 물로 자주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는 특권은 부유층만 누릴 수 있는 시대였기에 몰약만큼 가치있는 물건도 드물었음. 몰약은 바디로션처럼 간편하게 바를 수 있었고 일상적 악취를 가려주었음. 의사들은 의약품에 듬뿍 첨가했으며, 고대의 방부제로도 활용됨. 또한 향은 성적 용도로도 사용되었음.
- 고대의 향료 교역은 오늘날 코카인이나 헤로인 거래와 다를 바가 없었음. 원료를 재배하는 농가에서는 상대적으로 안전하지만, 완제품 형태로 최종 소비자에게 전달될 때는 매우 위험한 물건이 되었다. 향료가 최종목적지 로마에 미친 영향은 그리 유익하지 못했음. 실크와 더불어 향료의 수입은 제국 내부에 유통되던 은을 고갈시킴. 나이젤 그룸은 제국의 수도로 모인 낙타 1만마리 분량의 향료를 구입하는 데 연간 1500만 데나리온 가량이 들었다고 추정. 해외에서 약탈한 물건이라도 부두에 도착하기만 하면 문제가 없었다. 세네카가 축적한 부만 해도 1억 데나리온에 달했다고 전해짐. 하지만 2세기에 정복활동이 중단된 반면 로마인의 낭비는 절정에 달하면서 제국의 힘은 향을 태운 연기 속에 사라져갔다
- 지중해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섬에 속하던 키프로스가 649년 아랍의 첫 공격에 함락된 이후 827년에 크레타, 870년 몰타가 차례로 아랍인의 차지가 됨. 지중해 최대 거점인 시칠리아도 100년 이상의 갈등 끝에 965년 아랍인의 손에 넘어감. 새 천년이 밝을 때 기독교 세력은 한때 로마가 우리 바다라 부르던 지중해가 무슬림 선박으로 뒤덮인 모습을 보았을 것임. 유럽에서 무슬림은 정복활동을 이어나가 교역을 장악. 9-10세기에 주조된 이슬람 주화가 유럽중부, 스칸디나비아, 잉글랜드, 아이슬란드에서까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 750년을 기준으로 이전에는 초기 우마이야 왕조가, 이후에는 아바스 왕조가 지배. 이들은 로마제국보다 더 넓은 영토를 다스렸는데, 대대적 정복활동이 마무리되어 전리품 공급이 줄어들자 상업적 요소가 군사적 우선순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 이들에게는 가난하고 후진적인 서유럽보다 실크 교역로가 지나가는 부유한 중앙아시아가 더 매력적이었음. 우마이야조는 732년 프랑스의 도시 푸아티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갈리아로 돌아오지 않았다. 또한 718년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레콩키스타(에스파냐의 그리스도교가 이슬람교도에 대해 벌인 회복운동)가 일어났지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레콩키스타는 1492년 마지막 무어인(과 유대인)을 축출하면서 마무리됨. 반면 무슬림 군대는 먼 중앙아시아 지역을 거듭 공략했으며, 751년 탈라스(오늘날 카자흐스탄)에서 처음으로 당나라 군대에 승리를 거둠. 탈라스와 더불어 이익이 나는 대상 교역로가 무슬림의 손에 들어왔고,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극적인 정복은 종종 놀라운 행운을 안겨주기도 함. 탈라스에서 무슬림이 얻은 가장 중요한 소득은 영토도 실크도 아닌 평범하면서도 귀중한 자원이었다. 탈라스에 억류되어 있던 중국인 죄수 가운데 제지업자가 있었고, 이들은 이슬람 세계와 유럽에 놀라운 기술을 전파했다. 인류의 문화와 역사를 바꾼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 초기에 무슬림 정복자들은 기본적으로 팍스 로마나를 재현했는데 규모가 그보다 더 컸다. 우마이야와 아바스 제국은 사실상 옛 국경과 장벽을 없앤 거대한 자유무역지대로 기능했다. 특히 아득한 고대에서부터 동과 서를 가르는 경계 역할을 하던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자유무역이 이루어짐. 더 이상 아시아로 향하는 세가지 경로, 즉 홍해와 페르시아만, 실크로드가 경쟁을 벌이지 않았다. 대신 글로벌 물류체계가 통합되었고, 칼리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세력은 누구나 길을 이용할 수 있었음. 이후 1000년 가까이 무슬림의 항해는 정복과 개종활동을 능가했음. 놀랍게도 선지자의 죽음 이후 100년이 흐른 8세기 중반에 페르시아인으로 추정되는 무슬림 상인 수천 명이 중국의 항구뿐 아니라 내륙의 도시까지 진출. 반면 중국 최초의 대형 정크는 1000년 쯤에야 인도양을 항해했다. 이후로도 400년이 지난 후 전설적 환관 정화가 대형선박으로 스리랑카와 잔지바르를 항해했다.
- 팍스 이슬라미카에 온전히 축복만 따른 것은 아니었다. 서양과 동양의 경계가 서쪽의 지중해로 이동하면서 무슬림이나 기독교도 모두 자유로운 통행이 불가능해짐. 역사학자 조지 후라니는 "고속도로 대신 지중해가 변경이 되자 곧 전쟁의 바다로 변했다. 이런 변화로 알렉산드리아가 쇠락했다"고 지적. 무슬림의 상업적 연결망은 환어음, 정교한 대출제도, 선물시장 등 여러 선진적 기능을 했다. 하지만 어떤 이슬람 국가도 현대 세계의 금융제도 기반인 국영은행 혹은 중앙은행을 설립하는 데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이는 핵심에서 벗어난 지적이다. 로마가 멸망한 수백 년 동안 옛 제국은 세계 상업에서 변두리로 몰락했고 중동, 인도, 중국에서 진행되던 상업과 기술의 혁명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지중해 항해에 선박의 방향을 바꿔주는 아랍의 대형 삼각돛이 도입되면서 혜택을 받음. 고대 서양의 사각돛으로는 방향전환이 불가능했다.
- 팍스 이슬라미카는 어떤 도전도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다가 11세기에 기독교 세력이 부활하면서 스페인, 시칠리아, 몰타에서 상당부분의 영토를 상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영토 회복에 힘입어 클레르몽 공의회를 열고 1차 십자군 원정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며, 일시적으로나마 성지를 탈환. 12세기 살라딘은 파티마 왕조 정복에 이어 예루살렘의 십자군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으며(다만 살라딘은 적인 기독교도와 교역하는 데 더 만족했다), 중동에서 무슬림 세력을 통합. 살라딘의 승리로 이슬람은 절정을 맞았지만 이후 처참한 울분이 이어짐. 13세기에 몽골이 침입했고, 14세기에는 흑사병이 유행했으며, 15-16세기에는 바스코다가마가 인도양을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이슬람은 오랜 세월에 걸쳐 쇠락. 하지만 무슬림 상인들은 16세기까지 장거리 교역을 장악했고, 근대 초까지도 여러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4. 상인들이 종교_범이슬람 상권의 등장
- '중국과 인도 여행기'에 따르면 중국인은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들에게 구리, 상아, 향, 별갑을 샀고 광저우에 도착한 무슬림은 금, 진주, 실크와 양단을 배에 실었다. 물건을 교환하는 과정은 무척 까다로웠으며 정부가 독점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은 바그다드에서 들여온 물건을 '다음번 선원들이 들어올 때까지' 6개월 동안 광저우의 창고에 보관했다. 물건의 30%를 수입관세로 지불했는데 "정부는 어떤 물건을 원하든 가장 높은 가격에 구입했고 대금도 즉시 결제했으며 거래를 불공정하게 진행하는 부분도 없었다" '중국과 인도 여행기'는 중국 여행기에 대한 서양의 전통을 세우는 역할을 했고, 훗날 마르코폴로와 이븐 바투타 등 수많은 여행자들이 이 책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중국과 인도 여행기'에서 기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익명의 저자들은 천조의 규모와 세련된 수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중국에는 대도시가 200곳 이상 있었고, 생활양식이 이국적이었으며, 제도가 발전한 상태였다. "중국에 사는 사람들은 빈부노소를 막론하고 서예를 배웠고 글쓰기 기법을 익혔다. 오늘날 사회보장 제도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은 '중국과 인도 여행기'에 설명된 중국의 세제, 노인 연금체계를 참고할 만하다.
세금은 개인이 보유한 부와 토지를 기반으로 징수되었다. 누구라도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관청에 등록했다. 18세가 되면 인두세를 부과했고 80세에 이르면 더 이상 장수하지 않았다. 그때부터는 국고에서 연금을 지급했다. 중국인은 젊을 때 세금을 거둬들였으니 늙었을 때 급여를 지급한다고 말한다.
- 중국이 해양기술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 상인들이 말라카 서부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중국은 단지 1405-33년에만 인도양에서 위력을 과시했을 뿐이다. 상인들이 기를 펴지 못한 이유는 유교에서 상업을 천시하고, 가장 뛰어나고 야심찬 인재들을 교역보다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관료사회에 집중시킨 영향으로 보임. 당시에도 중국(과 훗날의 일본)의 중앙집권적 정치구조는 외세와의 접촉을 신속히 차단할 수 있었음. 반면 고도로 분권화된 중세 인도양 교역에서는 다윈식 경쟁이 벌어짐. 정치적 돌연변이가 교역과 상업에 적합한 나라는 번창했지만 제도적으로 뒤떨어진 나라는 힘이 약해졌음. 이와 유사하게 유럽의 정치환경을 살펴보변 지형적으로 산과 강이 많아 수천개로 쪼개진 국가가 경쟁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제도를 갖춘 나라에게 유리했다. 그중 하나인 잉글랜드는 역사상 최초로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 얼마전부터 정화의 원정은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주제로 떠올랐다. 영국의 퇴역한 잠수함 사령관 개빈 멘지스는 '1421 :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에서 정화의 6차 원정파견대가 아메리카 대륙(과 더불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브라질 대서양 해안, 카보베르데 제도)을 방문했을 가능성을 시사. 해양사학자들은 멘지스의 주장 대부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오늘날 중국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기지개를 켜면서, 정화의 원정이 중국 외교의 따뜻하고 비공격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라고 설명. 하지만 그런 의도라면 정화의 원정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지 않는 편이 나을 것임. 당시 원정대는 황제의 권위에 어울리는 경의를 표현하지 않는 현지인을 납치하고 도륙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 예를 들어 1차 원정 당시 정화는 말라카 해협에서 해적을 5000명 이상 살해. 해적의 우두머리는 황제에게 올리는 선물로 중국으로 끌려가 참수당함. 나중에 떠난 원정에서 정화는 스리랑카, 수마트라 동부의 팔렘방, 세무데라(오늘날 반다아체 인근)의 통치자들을 사로잡았다가 풀어주었으며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벌인 적도 많았다.
- 말라카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무엇인가? 말라카가 해양 세계에서 중요한 관문으로 번성한 이유는 단순히 계절충의 종착지이기 때문은 아님. 해협은 말레이와 수마트라 해안을 따라 수백킬로나 뻗어 있었고 좁은 싱가폴에서 통제하기가 쉬웠다. 게다가 말레이와 수마트라에는 파라메스와라가 1400년 말라카를 발견하기 이전부터 수 백년 동안 존재해온 교역도시가 있었다. 도시의 부와 명성은 파라메스와라와 후손이 남긴 천재적 제도 덕분으로 봐야 함. 해협에 있는 수많은 교역도시 가운데 말라카만 유일하게 교역할 것인가, 침략할 것인가, 아니면 보호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디. 말라카인은 전통적 이슬람법에 따라 부과되는 정도보다 가볍게 책정. 서쪽, 즉 인도인과 아랍인이 들여오는 물건에 (통상적인 10%가 아니라) 최대 6%의 관세를 적용한 것이다. 만약 서쪽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 아내와 더불에 항구에 정착하면 3%만 내면 됨. 동쪽에서 온 사람, 즉 말레이인, 인도네시아인(귀한 향신료를 가져오는 몰루카 제도 사람), 시암인, 중국인은 관세를 전혀 내지 않음. 동쪽 사람들의 물건을 포함한 모든 수입품에서 술탄과 신하들에게 바치는 선물을 공제했는데, 피레스는 이를 전체 물건가치의 1-2% 정도로 추산. 수출세는 상인, 동쪽사람, 서쪽사람, 현지인 어느 누구도 낼 필요가 없었다

5. 중세 향료교역과 노예교역
- 향신료를 대규모로 거래했다는 대목에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음. 서양에서는 막대한 향신료 수요를 무슨 돈을 해결했느냐 하는 것. 16세기에 페루와 멕시코의 광산에서 채굴된 은이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전가지, 유럽에는 수입품 가격을 지불할 수 있는 주화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음. 게다가 서양에서 생산하는 물건 중 동양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 만한 상품도 별로 없었음. 현대 이전에는 제조업과 섬유산업이라는 말이 사실상 동의어였음. 유럽에서 생산되는 양대 직물 가운데 리넨은 인도의 면직물보다 질이 떨어졌으며 양모 역시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대신 지중해에서는 붉은 산호가 대량으로 채취되고 이탈리아에서는 고급 유리를 생산했지만, 동양에 사치품을 판매해서 벌어들이는 이익은 중세 서양의 무역적자를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음. 유럽인은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에서 탐나는 향신료와 교환할 상품을 생산했는가? 그럴 만한 상품이 없지는 않았다. 당시 군사를 탐욕스레 모집하던 무슬림 군대에게 노예는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1200-1500년경 이탈리아 상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노예 상인들이었으며, 흑해의 동부해안에서 사람을 사서 이집트와 레반트에서 팔아넘겼음. 노예를 실은 선박은 다르다넬스(고대 헬레스폰트)와 한대 강성해던 비잔틴 제국이 지키던 보스포루스라는 두 곳의 요충지를 거쳐갔음. 이제 비잔틴 제국은 이탈리아 교역의 양대 세력인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사정거링 놓이는 신세로 전락
- 유럽인과 무슬림은 육두고, 메이스, 정향이 서양에 처음 전파된 이후 1000년 동안 재배지의 저오확한 위치를 몰랐다. 10세기에 활동한 아랍의 역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는 정향과 육두구를 인도에서 나는 품목에 포함시켰는데, 실제 생산지와의 오차가 6500킬로미터에 달함. 마르코 폴로, 이븐 바투타, (이 두 여행가가 향료 교역에 대한 지식의 상당부분을 의존했을) 중국인은 향료가 자바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향료 제도는 자바에서 동북동 방향으로 1600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었다.

6. 흑사병과 질병교역
- 과거 세계는 서로 완전히 분리된 질병 풀로 구성되어 있는 전염병 부싯깃통과 같았음. 각 풀안의 인구는 해당 질병이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지만 다른 풀에서 건너온 질명에는 취약했음. 한 지역에 1000년 동안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잠복해 있던 병원체가 수백 킬로 떨어진 지역에서는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임. 14-18세기에 세계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질병 풀이 서로 뒤섞였고 마침내 대재앙이 벌어짐. 현대인에게는 희소식이 있다면, 앞으로 질병의 혼합이 추가로 일어날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 이제 세계적 유행병은 HIV 바이러스 같이 인간 이외의 숙주에서 머물던 병원체가 변이를 일으켜 인간을 감염시키는 경우에만 가능
- 최초의 전염병은 벼룩을 통해서 사람 사이에 전염됨. 벼룩을 통한 전염병은 14세기 유럽에 영향을 미친 폐렴형 전염에 비해 전염속도가 느렸음. 동로마 제국에서는 최초로 질병이 창궐한 후 5-10년간격으로 역병이 찾아왔고 면역력이 떨어지는 어린아이들이 특히 큰 피해를 입음 541-42년에는 콘스탄티노플 인구의 4분의 1 가량이 사망했는데, 프로코피우스는 사망률이 정점에 달했을 때 하루 1만명이 죽었따고 기록. 700년에는 인구가 반으로 감소. 역병이 돌기 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제국의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 페스트가 통일의 희망을 산산조각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전염병이 휩쓸고 간 유럽은 암흑시대에 들어갔다. 반면 사막기후가 펼쳐지고 대도시가 없어 질병에서 보호받은 초기 이슬람 신자들은 지정학적 진공상태를 기회로 세력을 넓힐 수 있었음. 또한 전염병은 무슬림이 더 동쪽으로 진출하도록 도와주었음. 프로코피우스는 페르시아가 황폐화되었다면서, 연이은 역병으로 무슬림이 636년 크테시폰(이라크)에서 역사적 승리를 거뒀다고 기록. 동로마제국에서 전염병의 기세가 꺾였을 당시에는 이미 동방과의 교역이 쇠퇴하는 추세였다. 622년 콘스탄티노플에 마지막으로 역병이 돌았는데, 같은 해 쿠라이시는 무함마드와 추종자들을 메카에서 쫓아내 메디나로의 헤지라를 촉발시킴. 8년 사이에 무함마드의 군대는 아라비아 전역을 장악했고, 이후 1000년 동안 서양의 선박이 바브엘만데브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차단함. 이후 여러 세대 동안 서양인은 실크로드에도 접근할 수 없었음. 유럽은 서력기원이 시작된 이래 줄곧 아시아로 자유롭게 접근했지만 이슬람 군대에게 길을 빼앗김. 이처럼 뼈아픈 패배에서 유럽에 비친 한줄기 희망을 찾자면, 길이 차단된 덕분에 이후 700년 동안 아시아의 전염원에서 보호받았다는 점이다.
- 6세기 페스트는 바다를 통해 유입된 반면, 14세기에는 육로로 전파됨. 몽골 칸들이 정치적 화합을 이루면서 실크로드가 열렸고, 중국의 진귀한 물건과 함께 카파의 포위자들을 감염시킨 쥐와 벼룩도 같이 이동. 몽골군과 동맹이 감염당한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맥닐은 스텝지역의 전사들이 1252년 북쪽 방향에서 중국 남부와 버마의 히말라야 산기슭을 공격할 당시 감염된 설치류를 통해 질병에 걸린 것으로 추정. 중국에서는 1331년 페스트가 돌아왔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 거의 동시에 페스트는 몽골의 지배로 왕래가 손쉬워진 실크로드를 타고 빠르게 퍼짐. 감염된 벼룩은 서쪽으로 향하는 군마의 갈기, 낙타의 머리털, 짐칸과 안장주머니에 숨어 있던 곰쥐에 올라탔다. 장거리 상품교역은 간접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실크와 향신료가 도중에 중개인에게 인도되는 방식이었음. 이 과정에서 간균은 여러 차례 여정에 합류했다.
- 흑사병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유럽의 농민들은 숲으로 피하여 삶을 새로 시작할 수 있었음. 하지만 이집트에선 그런 선택권이 없었음. 나일강에서 불과 몇 킬로 떨어진 지역에서부터 태양이 작열한느 사막이 끝없이 펼쳐졌다. 당시 이집트 기록에는 사람이 자취를 감춘 마을에 대한 언급이 종종 등장. 이후 이집트는 과거의 부, 권력, 영향력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음. 페스트 발생 직전의 이집트 인구는 800만으로 추산되는데, 1789년 나폴레옹이 침입했을 당시에는 300만에 불과했음. 최근 신뢰할 만한 추정에 따르면, 근대 초 이집트의 인구는 예수가 탄생할 때와 동일한 수준에 머물렀다.
- 기원전에 교역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질병 풀이 뒤섞일 정도로 빠르고 광범위하게 진행되지 않았음. 역병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 진원지로 추정되는 히말라야 산기슭에 고립되었고, 천연두와 홍역도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머물렀다. 하지만 로마-한나라 시대에 장거리 교역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이슬람과 몽골세력이 영향을 미치면서 질병은 먼 거리에 있는 무방비 상태의 사람들을 공격. 구세계에 서로 분리되어 있던 질병 풀은 이후 1500년 동안 충돌하고 결합되어 대재앙을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아시아인과 유럽인의 면역성이 향상됨. 신세계에 처음 발을 디딘 서양의 이주자들은 자신과 함께 이동한 미생물이 원주민 사회를 짓밟으리라고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윌리엄맥닐의 말을 빌리자면, 탐험 시대의 막이 오를 때 "유럽은 새로운 인간 감염 측면에서 줄 것은 많고 받을 것은 적은" 상태였음. 더 놀라운 사실은 아시아의 좁은 지역 일부에 머물던 전염병균이 전세계로 확산되었다는 것. 그렇다면 페스트가 근대까지 계속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이유는 무얼까? 1346년 이후 간균이 여러 종에 미치는 영향은 이전보다 약해졌음. 14세기에는 개, 고양이, 새가 인간과 함께 떼죽음을 당했지만 이제는 질병에 이전처럼 취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쥐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도 역시 덜할 것이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1666년 런던 대화재 이후 영국에서 페스트가 자취를 감췄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음. 더 이상 목재 틀을 쓰지 않고 벽돌집을 세우면서 쥐가 숨어들기 어려웠고, 벼룩도 초가지붕이 아닌 기와지붕에서 사라에게 뛰어들기 힘들었다. 서유럽에서 목재로 만든 가옥이 사라지고 벽돌집이 보편화되면서 쥐와 인간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고 질병 감염경로로 차단됨. 21세기 들어 위생개념이 철저해지고 항생제를 사용하면서 치명적 병원체를 지닌 지하 전염원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막이 한 겹 더 늘었다.

7. 대항해 시대_포르투갈 교역제국
- 위대한 모험이 으레 그렇듯 비전, 용기, 지식, 세밀한 관심, 끈질긴 노력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음. 콜럼버스는 1492년 항해에 나서기 전에 배 세척의 모든 목재를 꼼꼼히 살폈다. 운도 따라야만 했다. 만약 주앙 2세가 콜럼버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가 훤히 알고 있는 포르투갈 아조레스 탐험에 나섰다면 해당 위도에서 부는 사나운 바람 때문에 배가 침몰했을 것임. 공교롭게도 콜럼버스가 떠난 네 차례 탐험은 모두 아조레스 남쪽의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에서 출발하여 카리브해 쪽으로 부는 북동 무역풍을 이용할 수 있었다. 결국 콜럼버스, 산탄젤, 이사벨의 판단은 옳은 것으로 드러났지만 그 근거는 빗나갔음. 반면 포르투갈, 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 왕에게 조언한 학자들은 콜럼버스보다 지리적 지식이 더 풍부했기 때문에 콜럼버스가 인도제도를 탐험한 기념비적 1차 항해에서 돌아왔을 때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임. 신세계의 해안선은 일찍이 스칸디나비아 탐험가들도 어렵풋이 인지했고, 컬럼버스보다 수세기 전 활동안 유럽과 아시아의 탐험가들도 알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어느 누구도 거대한 신세계의 코앞까지 다가갔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했다. 훗날 유능한 정복자들은 탐험을 나서며 본능적으로 전문가들과 동행했따. 하지만 고집불통인 콜럼버스는 서쪽 항해에 전문가를 데려가지 않았다. 배에는 그가 스펭니으로 데러간 원시적 카리브 인도인이 사실은 인도의 원주민이 아님을 지적할 아랍 통역가들이 없었고, 선박을 짓누르는 거대한 무게의 노란색 금속이 황철석이라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보석상이 없었다. 콜럼버스가 항해에서 돌아와 페르난도와 이사벨에게 진상한 계피와 후추가 구세계에서는 본 적 없지만 그저 나무껍질과 고추일 뿐이라고 경고해 줄 피레스 같은 약재상도 없었다. 콜럼버스는 설사 전문가와 동행했더라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임. 그는 3차 항해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아시아와 전혀 다른 장소에 도착했음을 서서히 깨달을 정도로 둔했다.
- 다 가마는 1498년 동아프리카와 인도땅을 밟은 지 5년만에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는 교역기반을 다짐. 하지만 동시에 인도로 가는 길에 위치한 모든 항구에서 적을 만들었다. 가볍게 지나가는 지역에서조차 포르투갈인 때문에 추방된 무슬림 상인들의 원한을 샀다. 새로 구축된 향료 교역로는 길고 취약했기 때문에 요새화된 포르투갈 기지로 보호하고 지켜야 했음. 오늘날에도 아조레스에서 마카오에 이르는 길목에 당시의 문화와 건축물이 남아 있다.
- 제국은 신속히 건설되었고, 1505년에는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가 인도의 초대 식민지 총독으로 취임했다. 먼저 그는 킬와 (오늘날 탄자니아 해변)를 들러 공격하고 진압했으며, 아랍 술탄을 꼭두각시로 세우고 거대한 요새를 구축. 다음에는 몸바사를 약탈했는데, 그가 인도로 이동하는 동안 수배대는 모잠비크의 섬을 장악했다. 포르투갈은 몇 개월만에 동아프리카의 주요 항구를 대부분 차지. 점령한 기지와 교역소는 아프리카의 금을 인도 향료와 거래하는 장소가 되었다. 여기에서 확보한 금으로는 구자라트의 옷감을 사들였다. 옷감, 금, 향신료의 삼각무역은 사실 새로운 발상이 아니었음. 이미 아랍과 아시아 상인들은 수백 년 동안 삼각 무역을 해왔음. 하지만 유럽인은 삼각무역을 통해 인도양에서 추가로 이익을 낼 수 있었고 희망봉을 돌아가는 위험천만한 항해도 피할 수 있었음.

8. 에워싸인 세계_기축통화가 된 스페인 달러
- 대체 17세기 중반에 중국인 이발사들은 어떻게 멕시코시티까지 갔을까? 유사한 시기에 포르투갈어를 구사하던 네덜란드 출신의 유대인은 브라질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 뉴암스테르담에서는 왜 민간기업인 서인도 회사가 정부의 정책적 결정을 내렸는가? 어떻게 스페인의 은화를 가득 실은 네덜란드 선박은 제임스쿡 선장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기 한 세기 전에 오스트레일리아 서쪽 끝자락의 해저에 멈춰 섰는가? 이상의 네가지 질문에 답하는 과정은 탐험시대로 시작된 세계경제의 확대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음. 이를 통해 우리는 오늘날의 세계화와 이에 대한 불만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음. 먼저 다음 다섯 가지를 이해해야 함
(1) 1493년 콜럼버스의 2차 항해 이후 수십 년 안에 옥수수, 밀, 커피, 차, 설탕 등의 대륙이 넘나들면서 세계 농업과 노동시장에 혁명이 일어남. 작물의 교환이 인간의 생활조건을 늘 개선한 것은 아니었다.
(2) 17세기 초 스페인과 네덜란드 선원들은 지구 풍향체계의 마지막 비밀을 풀어냈다. 덕분에 드넓은 대양을 비교적 손쉽게 건널 수 있었음. 1650년에는온갖 물건과 전 세계의 사람들이 세계 대다수 지역을 공략할 수 있었음.
(3) 페루와 멕시코에서 거대한 은 광산이 발견되면서 세계적 통화체계가 탄생. 이와 더불어 은화가 지나치게 주조되어 살인적인 인플레가 발생.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스페인의 8레알 동전은 오늘날 미국의 100불 지폐나 비자카드 처럼 통용되었음.
(4) 17세기에는 주식회사가 탄생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무역질서가 형성되었음. 주식회사는 이전의 개인 판매원, 가족기업, 왕족의 독점 등과 비교해 이점이 컸음. 이내 대규모 기업이 세계 교역을 장악했으며, 이후 세계 무대에서 대기업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음.
(5) 변화는 누군가를 불만에 빠뜨렸음. 16-17세기의 새로운 세계경제로 값싸고 질 좋은 물건이 수입되자 섬유제조업자, 농민, 서비스 근로자는 타격을 입음. 오늘날로 따지면 자기권리를 주장하는 프랑스 농민들과 미국의 자동차 산업 근로자들이었음
- 인류가 힘겹게 세계의 풍향을 이용하는 법을 터득하면서 새로운 통화체계가 대두됨. 여러 면에서 오늘날 글로벌 신용과 결제 메커니즘의 전신이라 할 만하며, 구세계와 신세계에서 모두 열망하던 수입사치품의 구입에 사용됨. 노호하는 40도대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선박에는 아시아에서 수요가 높던 유럽산 고급직물과 귀금속이 실려 있었음. 귀금속은 대부분 멕시코와 페루에서 주조된 8레알의 스페인 달러였으며 8등분한 형태도 있었음. 은화는 16세기 유럽의 통화시장에 대량 유입되었고, 달러가 유래한 보헤미아 탈러와 크기나 무게가 거의 비슷했음 (8레알은 1달러의 가치를 지녔는데, 동전을 일상에서 쓰기에 불편했기 때문에 8등분하는 경우가 많았고 각 조각은 1레알의 가치였음. 여기에서 유래하여 스페인 은화는 여덟조각으로도 불렸으며, 25센트는 두조각이라는 별칭을 얻음)
- 스페인은 막대한 양의 은화를 주조. 총주조량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1766-1776년 2억개 이상 발행됨. 각 은화의 무게는 1온스에 못미쳤으며 멕시코에서만 생산됨. 16-19세기에는 멕시코에서 주조한 은화가 시장의 신뢰를 얻으며 사실상 가축통화 역할을 했음. 은화는 강력한 무역회사가 보유하든 하층계급의 지역상인이 보유하든 지니고만 있으면 반다해에서 육두구를, 구자라트에서 캘리코를, 마닐라와 멕시코에서 실크를, 예멘에서 커피를, 스리랑카에서 계피를 살 수 있었다.

9. 기업의 등장_동인도회사
- 유럽에서 평화로운 무역이란 스페인과 네덜란드처럼 부강한 나라에서나 가능했음. 이들은 해적으로부터 바다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기득권 세력이었음. 반면 영국은 16세기의 빈곤하고 후진적인 여러 나라들처럼 해외 선단이 방해 없이 바다를 지나가도록 지켜보는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었음. 약탈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상당했기 때문. 위풍당당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대영제국은 200년 이상 흘러야 만나볼 수 있다. 튜더 왕조의 잉글랜드는 부패한 군주가 다스렸고, 왕은 아첨하는 자들에게 독점사업을 분배했으며, 약탈자에게 나포 면허장을 발부하는 국가였다.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의 전쟁기구 못지 않게 인상적인 부분은 네덜란드 금융이었음. 1602년 투자자들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초기자금 모집에 650만 길더를 투자했음.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1억불로, 인력을 고용하고 선박을 구매하며 향료아 교환할 은과 교역품을 구매하는 데 사용됨. 특히 이 자본은 영구자본이었음. 성과가 좋아 이익이 발생하면 이익금의 상당부분을 기업확장에 투자할 수 있었던 것. 투자자들은 해마다 적당한 수준의 배당을 받더라도 초기에 투자한 650만 길더를 곧 회수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근거가 없었음. 오늘날의 투자자에게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투자로 보이겠지만,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영구자본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네덜란드 금융제도에 대한 신뢰가 매우 컸음을 의미.
- 17세기 초에 모든 길은 네덜란드로 통했다. 네덜란드는 국토가 포르투갈보다 작고 인구도 약간 더 많을 뿐이었으나(1600년에 150만 명 수준)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세계무역 체계를 세운 나라였다. 오늘날까지도 글로벌 시장에서의 성패는 그 규모가 아니라 선진적인 정치, 법, 금융제도에 달려 있다. 1600년 네덜란드는 이런 면에서 단연 세계 최고수준이었으며, 포르투갈이 세운 교역제국에 도전장을 내밀만한 가장 유력한 위치에 있었다. 물로 네덜란드는 스페인에게서 독립하기 위해 투쟁을 벌이는 중이었고,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뮌스터에서 체결된 조약으로 1648년에야 막을 내렸다. 전쟁을 벌이는 중에도 네덜란드는 스페인, 영국, 다른 유럽 나라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었음. 영국은 나포 면허장을 지닌 드레이크의 활약, 무적함대에 거둔 승리, 영국 동인도회사가 근소하게 앞서 있다는 이점이 있었음. 하지만 튜더와 스튜어트 왕조가 종교갈등으로 내홍을 겪고 있었고, 금융시장은 원시적 단계로 불안정했으며, 결국 치명적인 내전을 겪음. 프랑스와 스페인은 왕실의 독점과 만성적 부패로 더 뒤처진 상태였음. 반면 네덜란드 연합주는 유럽에서 절대왕정의 저주로부터 자유로운 몇 안되는 나라였고, 법과 금융제도가 엄격했으며, 야심만만하고 재능있는 인재들에게 종교를 불문하고 관대했다. 두가지 간단한 통계에서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드러난다. 경제사학자들이 추정하는 1600년 잉글랜드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오늘날 가치로 약 1440달러, 네덜란드는 2175달러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각각 1370달러, 1175달러다) 이는 식민지 패권을 차지하기위한 경쟁이 시작된 이래 네덜란드와 영국 사이에 기술과 상업적 격차가 벌어졌으며, 제도와 금융의 차이가 큰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영국에서의 평판 좋은 채무자(대부분의 경우 왕족은 포함되지 않음)의 이자율이 10%인데 비해 네덜란드에서는 4%에 그쳤으며, 네덜란드 정부의 이자율은 최저수준이었다. 반면 영국에서는 왕실이 채무를 거부하기 일쑤여서 채권자들은 왕실에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는 실정이었다.
- 네덜란드의 해양기술이 고도로 발전하면서 희망봉을 돌아가는 경로는 신드바드의 길과 홍해 길을 이용하는 것보다 저렴한 수준에 이르렀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향료제도도 완벽하게 장악했으며 해상운송도 효율적이었음. 금융시장이 원활히 돌아갔고 기업의 회계도 양호하게 관리되었음. 17세기 초에는 지브롤터를 통해 서쪽에서 도착하는 후추와 고급향료가 지중해에 과잉공급되었음. 이로 인해 이익은 줄었으나 가격이 저렴해서 육상향료 이동경로가 경제성을 잃었음. 이에 따라 지중해 동쪽 해안을 활용하는 베네치아의 오랜 교역도 막을 내림. 베테치아는 주요 수익원이 사라진 후 한 세기 반 만에 나폴레옹 군대의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 포르투갈의 약재상이자 모험가요 저술가였던 토메피레스는 "말라카를 지배하는 자가 베네치아의 명운을 쥐고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결국 그의 말은 신빙성을 잃고 말았다. 베네치아의 명줄을 쥐려면 말라카뿐 아니라 순다, 희망봉, 향료제도까지 차지해야 했다. 포르투갈인은 이러한 과업을 이룰 수 없었으며, 17세기 중반 네덜란드가 향료시장을 독점하면서 베네치아의 목을 조를 수 있었다.
- 상업에서 발생한 부만큼 다른 나라의 질시를 유발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요소도 없다. 이러한 감정은 17-18세기 영국-네덜란드의 관계를 파고들었고 양국은 네 차례에 걸쳐 전면전을 벌였다. 우리 시대처럼 무익한 상업적, 외교적 무언극을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무역전쟁을 벌였다.

10. 플랜테이션과 삼각무역
- 1700년 이전에 세계의 무역은 이국적 장소에서 가져오는 전설상의 상품을 독점공급하기 위해 중무장을 하는 교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음. 시장독점이라는 이상은 17세기 네덜란드가 몰루카 제도와 스리랑카에서 생산되는 고급향료시장을 독차지했을 때 단 한 번 현실로 이뤄졌다. 1700년 이후에는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커피, 설탕, 차, 면직물같이 이전에 서양에는 덜 알려졌으나 대륙 곳곳에 손쉽게 옮겨 심을 수 있는 새로운 상품이 세계무역을 장악했음. 향료와 실크 또는 향을 안트베르펜, 런던, 리스본, 암스테르담, 베네치아 붇에 몇 톤 정도 하역해 놓고 막대한 이익을 거두는 일은 이제 불가능했다. 게다가 기업은 새로운 대중시장에 어울리는 제품수요도 촉진해야 했다.
- 네덜란드가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자들에게 바가지를 씌울 수 없었다면 최소한 커피나무를 수리남, 스리랑카, 말라바르 해안에 심어 재배측면에서 앞서갈 수 있었다. 예멘에서 말라바르 해안으로 옮겨심은 커피나무는 초기의 시행착오를 거쳐 바타비아 인근의 자바고원에서 성공적으로 재배되었다. 1732년 인도네시아는 연간 120만 파운드의 커피를 생산했고, 수리남과 브라질에서 재배된 원두가 인도제도에서 생산된 원두와 더불어 암스테르담의 부두에 도착했다. 공급량 증가로 예멘의 독점은 깨졌고 마침내 가격이 하락했다. 새로운 산지의 농장주들은 예멘보다 값싼 비용으로 커피를 생산할 수 있어 네덜란드에 양호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인도네시아와 신세계의 새로운 산지 덕분에 가격이 하락하면서 유럽의 커피문화도 바뀜. 갑자기 모두가 기이한 음료를 마실 수 있게 됨.
- 자바 원두의 품질은 모카 항에서 거래되는 원조에 미치지 못했지만, 대체로 유럽인은 그 차이를 분별하지 못했다. (이식된 커피는 예멘산 커피보다 카페인 함량이 50% 이상 높았다) 하지만 예민한 무슬림 소비자들은 원조를 알아봤고 값싼 인도네시아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았음.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17인 위원회가 무슬림이 자바커피를 멀리한다는 보고서에 보인 반응은 자기만족적 면모를 잘 보여준다. 보고서는 자바와 모카 항의 원두 표본을 모두 수집했으나 둘 사이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었다고 밝힘. "천박한 투르크인과 페르시아인이 우리나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보다 미각이 민감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직물이 주요 교역 상품으로 발전한 과정은 설탕과 무척 비슷. 영국 동인도회사가 1600년 탄생할 당시 면직물은 실크에 맞먹는 고급제품이었음. 그나마 사치품으로라도 구입할 수 있는지 여부는 값싼 인도 노동력이 좌우. 목화는 설탕과 마찬가지로 재배가 쉬웠으나 생산과정에 막대한 노동력이 들었다. 산업시대 초기에 목화 섬유와 씨앗이 조잡하게 뒤섞여 있는 목화다래 100파운드를 생산하려면 이틀치 작업이 필요했음. 다래에서 씨앗을 제거하고 섬유를 가지런히 정리하며(소면) 포장하는 데 70일치 작업이 필요했는데, 여기에서 고작 8파운드의 원면을 얻을 수 있었음. 여성 방적공이 다시 35일을 일해야 원면을 실로 만들 수 있었다. 다시 말해 1파운드의 면사를 얻으려면 약 13일의 노동이 필요했음. 반면 무게의 실을 얻는데 양모는 1-2일, 리넨은 2-5일, 실크는 6일의 노동이 들었다. 인도에서는 다수의 값싼 노동력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면직물과 관련하여 수백년 동안 전문기술이 축적되었음. 짧고 약한 목화 섬유를 내구성 있는 실로 만드는 작업은 쉽지 않았음. 1750년 이전에 영국 방적공은 날실로 사용할 정도의 튼튼한 면사를 생산하지 못했음. 따라서 영국 국내에서 생산된 천은 리넨이나 울을 날실로, 면을 씨실로 하여 제조됨. 솜씨가 뛰어난 인도의 방적공이라야 순면직물에 적합한 실을 생산할 수 있었음. 따라서 18세기에 방적기가 개발되기 전에는 서양의 거의 모든 면에 인도에서 방적한 실을 사용.
- 1600년대 초 영국 동인도 회사는 당시 가장 중요했던 향료교역에서 존재감이 미미했음. 동인도회사가 주로 수행한 교역은 페르시아 실크를 낙타에 실어 시리아 사막을 거쳐 투르크의 항구로 운반해 오는 형태였음. 머지않아 영국 동인도회사는인도의 직물시장을 두드리기 시작. 섬유교역이 산업혁명을 촉발하는 역할을 하고 인도의 섬유제조업을 파괴하며, 오늘날 세계화된 경제가 논쟁거리이듯 영국에서 자유무역에 대한 논란을 일으키며 대영제국을 탄생시키는 역할을 하라리고는 초창기에 상상할 수 없었다.
- 17세기가 막을 내릴 무렵 영국에서는 아시아로부터 면직물 수입을 막기 위해 세 집단이 한데 힘을 합쳐 기이한 보호주의 동맹을 형성. 첫번째 집단은 도덕주의자들로 새롭고 화려한 옷가지로 야기된 사회불안에 분노했음. 두번째 집단은 실크와 양모 방직공들로, 값싸고 더 나은 외국제품으로 일자리를 잃음. 세번째 집단은 중상주의자들로, 그저 패션을 위해 은을 유출하는 데 분노를 표현했음. 이 세력들은 영국 동인도 회사에 맞서 회사에 치명적 결과를 입혔고 영국의 경제, 사회구조, 제국에 혁명을 일으켰으며 인도 경제의 근간인 섬유산업을 파괴했다
- 보호주의 조치는 양모산업과 실크방직공들에게 불가피하게 역효과를 일으켰음. 18세기초 캘리코는 고전적인 고부가가치 상품이었따. 큰 부자들은 값싼 원면과 소비자들이 원하는 비싸고 부드러우며 가벼운 옷감 사이의 격차를 좁혀줄 존재를 기다렸다. 캘리고 수요가 아직 높았지만 비싼 가격을 치러도 인도산 옷감을 구할 수 없게 되자, 혁신자들은 방적과 방지과정의 개선을 시도.
- 바라던 혁신은 실제로 일어났음. 1721년 법안이 통과되고 10년 후, 존 케이는 플라잉 셔틀을 개선하여 방직공의 생산성을 높임. 이에 실 수요가 증가했는데, 방적과정은 기계화하기 더 어려웠다. 1738년 루이스 폴과 존 와이엇은 최초의 기계식 방적기를 개발해 특허를 출원. 그러나 1760년 중반에 제임스 하그리브스, 리처드 아크라이트, 새뮤얼 크럼프턴의 기계가 발명되고 나서야 상업적 활용이 가능해짐. 이들은 각각 제니방적기, 수력방적기, 뮬 방적기를 발명. 뮬 방적이는 제니방적기와 수력방적기를 혼합한 형태임
- 경제사학자 에릭 홉스본은 "산업혁명을 노하는 자는 모두 면직물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라고 지적. 거대한 변화의 중심에 있던 새로운 기계의 발명으로 수많은 방적기와 방직기가 쓸모 없어짐. 새로운 공장이 탄생하기 전인 18-19세기에 기계파괴 시도가 일어남. 1721년 법 제정 직후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인기수입품은 인도산 실이었으나 기발한 기계가 발명된 이후에는 원면이 산업혁명의 소재이자 교역품으로 떠오름. 1720년대 초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수입한 원면은 150만 파운드였는데, 1790년대 말에는 3000만 파운드로 급증
- 영국 동인도회사는 17세기에 향료제도를 네덜란드에 빼앗기면서 인도의 섬유로 눈을 돌렸듯, 18세기에는 완성된 면직물과 실크라는 고수익 무역을 빼앗기자 무게중심을 다시 옮겨다. 이번에는 중국과의 차 무역이 새로운 관심분야였다.
- 차와 설탕의 역사는 서로 얽혀 있었으며 소비량이 나란히 증가. 설탕 생산자들은 차 소비가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차 마시기를 장려. 영국 동인도회사 역시 설탕에 같은 입장을 취함. 18세기에는 영국에서 수천 킬로 떨어진 곳, 지구 반대편에서 생산되는 차와 설탕이 귀족부터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애용하는 필수품으로 자리잡았다.
- 17-19세기 신세계에서 유럽으로(커피, 면직물, 설탕, 럼, 담배), 유럽에서 아프리카로(섬유를 비롯한 제조품), 아프리카에서 신세계로(노예) 대성양을 횡단하여 일어난 삼각무역이라는 상거래에 대해 대부분 학생들이 배움. 하지만 전체 그림을 지나치게 간소화하는 과정에서 단거리 교역은 무시되었음. 예를 들어 영국 선박은 자메이카에서 필라델피아로 인디고 염료를 싣고 간 다음 옥수수를 선적하여 런던까지 나르고, 런던에서는 양모를 실어 르아브르로 이동하고, 거기서 프랑스 실크를 실어 아프리카 노예해안으로 떠났을 것이다. 한편 동양에서는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았다. 영국은 캘리코에 열광했고 차에 취했지만, 자급자족하고 자기만족 상태인 중국인의 물건과 교환할만한 교역품을 찾기가 만만치 않았음. 대서양에서처럼 원활히 진행되는 체계가 필요했음. 대서양 삼각무역의 한 축이던 노예무역이 이후 수백년 동안 인종관계를 악화시켰듯, 19세기 인도 및 중국과의 불평등한 교역은 오늘날까지도 동양과 서양의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1. 자유무역의 승리와 비극
- 중국에서 동양과 서양은 단순히 지리적 경계로 나뉜 지역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 중국에는 교역이란 개념이 없었음. 황제는 조공을 받을 뿐이었고 그 대가로 외국의 탄원자에게 하사품을 내리는 식. 하지만 조공을 받고 하사품을 전달하는 교환행위는 현실적으로 다른 아시아 상업중심지에서 일어나는 일반적 교역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 중국은 영국이 시암같은 일반적 속국이라고 크게 착각했고 그 오판으로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 아편으로 중국 전체 인구와 경제가 피폐해졌다는 통념은 오해다. 첫째, 마약은 가격이 꽤 비쌌기 때문에 대체로 고위관리나 상인이 소비. 둘째, 주류와 마찬가지로 마약도 사용자의 일부에서만 치명적 중독현상이 나타남. 악명 높은 아편굴도 지저분한 명성과는 거리가 있었음.
- 황제와 고관들은 아편에 의한 심신약화에 도덕적 분노를 표출. 하지만 그보다 더 우려한 대목은 마약이 무역수지에 미치는 악영향이었음. 중국은 17세기 유럽의 여느 군주들처럼 유럽형 중상주의 이론을 지지. 1800년 이전의 차 교역은 중상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에 매우 유리했음. 영국 동인도회사의 기록에 따르면 1806년을 기점으로 은의 유출입 흐름이 바뀜. 1806년 이후 중국의 아편수입량이 차 수출량을 넘어섰고, 중국 은이 처음 해외로 유출되기 시작. 1818년 이후에는 은이 중국 수출품에서 5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음.
- 사회규범은 대단히 빠른 속도로 변하곤 한다. 예를 들어 1600년에는 개화한 유럽인조차 흑인 노예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따. 1800년에 유럽인이나 다수의 중국인은 영국이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는 무역을 비난하지 않았다. 오늘날 아편 못지 않게 중독성이 강한 담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전 세계에서 윌리엄 자딘과 제임스 매디슨의 후예들이 적극적으로 담배 마케팅을 펼치고 있는 실정이다.
- 1776년 국부론 발간 이후 1846년 곡물법이 폐지되기까지 스미스, 리카도, 코브던은 새로운 글로벌 경제의 이론적 정치적 기반을 닦음. 글로벌 경제는 코브던-슈발리에 조약의 체결 이후 수십년 동안 전성기를 누림. 보호주의자들은 값싼 수입 농산물 때문에 농민들이 재앙을 맞을 것이라 예상. 처음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 유럽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식품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했기 때문. 하지만 곡물법이 폐지되고 한 세대 후 아메리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러시아에서 저렴한 곡물이 쏟아져 등러와 영국과 유럽대륙의 농민들을 덮쳐다. 1913년 영국은 밀 소비량의 80%를 수입했지만, 20세기 초 사리 판단이 분명한 영국인 가운데 나라의 산업기반을 놔두고 과거의 농업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세계 곡물의 침입이 유럽대륙에서는 각기 다른 형태로 전개됨 1880년대에 처음으로 자유무역에 대한 거센반발이 일어난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그러한 흐름이 유지됨. 새로운 글로벌 경제에 대한 19세기의 반응은 21세기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자유무역이 전반적으로는 인류에게 이익을 안겨줬어도, 새로운 질서를 가만히 앉아서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패배자들도 양산했음

12. 기술혁신과 대륙횡단 무역
- 자유무역론자와 보호주의자 사이으 갈등이 남북전쟁 발발에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1861년 남부 6개주의 분리독립과 전쟁이 벌어지면서 북부는 군자금이 필요했으며, 나중에는 연금과 재건에도 자금이 절실했음. 이 모든 비용을 감당하려면 수십억 달러의 수입세를 거두는 수밖에 없었음. 이제는 남부인의 성가신 반대도 없었기에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관세장벽을 거리낌없이 세웠다. 이때 만들어진 가공할만한 관세장벽은 남북전쟁 이후 50년 이상 미국의 산업을 영국과의 경쟁에서 보호하는 방패역할을 했다.
- 역사적으로 교역량의 증가는 늘 승자와 패자를 양산. 운송비의 하락 덕에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우크라이나의 농부와 목장 주인은 유럽대륙에 곡물과 육류를 풍부하게 공급할 수 있었음. 반면 저렴한 국산목재와 범선에 대한 전문지식에 의존하던 미국의 조선사는 영국의 증기선과 철강기술에 자리를 내줌. 1850-1910년에 대서양에서 운반된 화물의 5분의 2는 유니언잭(영국국기)을 게양한 선박으로 이동되었으나, 성조기를 단 선박으로 운반된 비중은 10분의 1에 불과했음. 인도 역시 패자에 속했다. 면직물과 황마 재배자들은 번영을 누렸으나 범선 위주의 해운업은 증기선과 수에즈 운하의 조합으로 황폐화되었음. 1차대전 발발로 인도 선박은 연안무역조차 할 수 없었으며 조선업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특파원처럼 낙관적인 관찰자들은 글로벌 교역이 빚어낸 기적에 놀라워했지만 반발은 반세기 이상 자유무역을 지연시켰으며, 파괴적 양차 대전이 발발하는 데 적잖이 기여. 오늘날 세계화를 둘러싼 투쟁에도 배경을 제공했다.

13. 대공황과 보호무역주의
- 영국과 1900년 이전 미국에서는 노동력과 자본이 같은 입장에 있다. 영국의 경우 보호무역이 유리함. 독일에서 자본과 토지를 가진 집단으 마르크스 주의에 기울던 도시의 노동자들에게 반대. 이 경우 자본가와 지주는 철강과 호밀 연합으로 이름 붙일 수 있을 텐데, 철강은 희소한 자본요소를 막대하게 투입해야 하는 산업임. 독일의 도시 노동자들은 자유무역을 원했음. 풍부한 요소인 노동력을 가진 집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 세계관에도 적합했기 때문. 자유무역은 산업발전과 완전한 자본주의로 이어지고 이후 필연적으로 균열이 일어난 다음 공산주의로 향하는 길이 마련된다는 점에서 혁명이라는 레시피에 반드시 팔요한 재료였음. 지나치게 논리적이었던 마르크스는 관세에 반대했다.
"우리 시대의 보호주의 체제는 보수적인 반면 자유무역 체제는 파괴적이다. 과거의 민족을 해체하고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적대감을 극단적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한마디로 자유무역 체제는 사회혁명을 재촉하는 것이다. 이 같은 혁명차원에서 보자면 나는 자유무역에 찬성한다."
- 20세기 전반 전 세계 애국자들은 세계를 자기 터전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는 큰 고통을 야기했음. 미국은 보호가 보복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았다. 한 나라에 수입이 없으면 수출도 불가능함. 또한 미국은 2차대전에 참전하기 전에도 무역전쟁이 실제 전쟁을 촉발할 수 있음을 깨달았으며, 역사학자들과 정치인들은 고립주의와 보호주의가 대재앙에 기여했음을 감지했다.
- 근대 세계화의 역사는 크게 4개 기간으로 나뉨.
1기는 1830-85년으로 운송 및 통신비용이 빠르게 하락하고, 상대적으로 낮은 관세로 무역량이 크게 증가하며, 임금, 지대, 임차료, 금리가 세계적으로 수렴하던 시대.
2기는 1885-1930년으로 아메리카대륙,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우크라이나의 농산물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유럽의 보호무역론자들의 반발을 일으킨 시기. 운송비가 지속적으로 하락한 덕분에 반발은 간단히 무시되었다.
3기는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통과된 1930년에 시작되었고, 운송기술이 점진적으로 발전했으나 대대적 관세인상에 그 효과가 묻힘.
4기는 1945년에 시작되었으며, 미국이 앞장서서 자유무역을 주창한 시기로서 세계무역의 수문이 열림. 세계무역의 실질가치는 폭발적으로 증가해 이후 50년 동안 연간 6.4% 수준을 기록. 1945-98년 세계 무역량이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5%에서 17.2%로 증가

14. 세계화를 둘러싼 논쟁
- 선박은 과거에도 그랬듯 가까운 미래에도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장거리 운송수단으로 각광받을 것임. 따라서 원활한 해상교역을 위해서는 요충지가 정치적으로 안정되어야 함. 고대 이래 유럽의 상인과 해군은 전략적 해협과 해로의 가치를 인식했고, 차지하는 경로에 따라 기근으로 고통받는 나라가 갈리기도 했음. 헬레스폰트와 보스포루스는 2500년 이상 해상 요충지 역할을 했으며,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 바스코 다가마의 경로로 인도양을 탐험하는 유럽인의 최우선 목표는 말라카, 호르무즈, 바브엘만데브 해협의 통과였으며 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지금도 상황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으며, 과거와 비교해 수에즈와 파나마라는 두 곳의 인공 요충지가 더 생겼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 세계 교역의 80%가 선박을 통해 일어나며 대다수 선박은 요충지 일곱 곳 가운데 한 군데, 때로는 두세 군데를 지나기도 한다.
- 자유무역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유무역에 따른 경제적 효과를 과장해 왔음. 19세기 역사는 무역이 성장의 엔진이라는 주장에 의문부호를 던짐. 만약 자유무역이 국부를 창출하는 길이었다면 역사상 최고수준의 관세를 부과한 미국은 절대 번영할 수 없읐을 것임. 유럽은 관세인하의 황금기인 1860-80년의 성장률이 보호무역주의가 득세하던 1880-1900년보다 더 높아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보호무역주의 기간이 성장류이 더 높았음. 또한 1880년 이후 보후주의자들의 영향력이 강했던 북부유럽의 경제는 자유무역을 지지하던 영국보다 더 빠르게 성장했음.
-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자들도 이 점을 놓치지 않았으며, 1996년 대통령 선거후보였던 패트릭 뷰캐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음
"워싱턴, 해밀턴, 클레이, 링컨과 이후 공화당의 대통령이 쌓아올린 관세장벽의 뒤에서 미국은 농업이 주를 이루던 해안 공화국을 세계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가장 위대한 산업국가로 만들었다. 불과 한세기 만에 이룬 성취는 오늘날 폄하하는 보호무역정책이 성공을 거둔 결과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는 뷰캐넌 만이 아니다. 다수의 경제사학자들이 뷰캐넌과 의견을 같이 하는데, 그중에는 폴 베어록같은 저명한 학자도 있음. 근대의 계량분석기술은 자유무역을 19세기성장의 엔진으로 볼 증거가 취약함을 확인시켜줌. 엄격한 계량적 연구는 오히려 1800년대 보호무역주의가 실제로는 경제발잔을 이끌었음을 시사. 19세기 초 미국 보호무역주의에 대해 마크 빌스가 수행한 민감도 분석은 해밀턴, 애덤스파, 케어리의 주장이 옳았음을 보여줌. 높은 관세가 아니었다면 "뉴잉글랜드의 산업부문은 절반이 파산했을 것이다." 저명한 경제사학자인 케빈 오루크도 19세기 유럽의 부유한 8개국과 미국 및 캐나다에 대해 조사했는데, 놀랍게도 관세수준과 경제성장률 사이에 양의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남. 관세율이 높을수록 나라가 더 나은 성과를 낸 것이다. 그는 경제학자의 절제된 표현을 사용해 다음과 같이 결론내림
"19세기에 관세와 성장률이 양의 상관관계에 있었다는 베어록의 가정은 성장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요소를 통제한 상황에서 최근에 수집할 수 있는 데이터에 적용했을 때 상당히 유효한 것으로 나타났다."
- 미국이 19세기 관세 인상이 이로웠다는 데 동의 하지 않는 무역역사학자들도 있음. 버클리의 브래드포드 들롱은 보호무역주의는 뉴잉글랜드 기업인들이 영국의 최첨단 증기선과 산업기술을 받아들이는 시기를 지연시켰다고 지적. 관세인하가 기존 뉴잉글랜드 공장을 황폐화했을 것이라는 빌스의 주장에 일리가 있더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번영을 누리고 자본집약적인 첨단 산업부문을 육성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결말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들롱은 주장. 하지만 45년 이후에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경제사학자 에드워드 데니슨의 구체적 분석에 따르면, 50-60년 GATT 관세인하는 북부유럽의 성장률을 1% 정도 추가하는데 그쳤으며 미국에는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60년 이후가 되자 자유무역이 특히 개도국에 이롭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가 제시됨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술에 취한 세계사  (0) 2019.09.05
역사의 역사  (0) 2019.07.21
서양은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나  (0) 2019.07.04
전쟁과 평화의 역사_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  (0) 2019.06.13
나쁜 짓들의 역사  (0) 2019.05.07
Posted by dalai
,

- 농경생활이 정착생활에 선행되었을 것이라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실제 벌어진 일은 그 반대였음. 일단 한 곳에 머물러 살게 된 이후에야 농경같이 오랜 시간 땅에 묶여 있어야 하는 활동이 가능해짐. 풍부한 야생곡물과 그로 인해 가능해진 정착생활은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선행요소였다. 곡물을 주식으로 삼던 수렵채집민들은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그 자리에서 싹이 돋고 몇 개월 후면 열매가 맺힌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을 아는 것과 그 동안 유지해왔던 생활방식을 버리고 농경을 주 생활수단으로 삼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농경이 효율적 식량확보수단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고되고 반복적 노동을 필요로 했음. 야생에 충분한 식량이 존재한다면 수렵채집민들은 굳이 힘들게 농사를 짓는 것보다 자연이 주는 것을 그대로 거두어들이는 쪽을 택했다.
- 결국에는 풍족한 식량공급에 안정적 정착생활이 더해져 나타난 인구증가가 이곳의 수렵채집민들을 농민으로 변화시킴. 한동안은 주변의 자연자원을 더욱 집약적으로 채집하여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어느 시점ㄴ에서 인구는 자연이 지탱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자연으로부터 그것이 허용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수렵채집민들은 자연에 기술과 노동을 투입해 그것을 변형시켜야 했음. 농경이 시작된 것이다. 레반트의 나투프 문화에서는 정착생활이 시작되고 3천년이 지난 후에야 농경사회가 나타났는데, 이는 수렵채집민들이 과거의 생활방식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보여줌
- 불리한 환경 때문에 농업생산력은 낮은 수준에 머물렀던 서유럽은 동방에 비해 발전이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적 불리함은 중세 이후에 오히려 서유럽을 전근대적인 고착상태에서 끌어올리는 조건으로 작용. 불리한 자연환경에서 농업생산력이 증가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힘에 의한 생산력의 증폭효과가 필요했음. 달리 말하면 서유럽에서는 농업생산력의 증가가 시장이 성장한 이후에야 일어날 수 있었다. 무력집단이 시장의 확장에 의해 증가된 농업잉여의 일부를 흡수하며 성장했지만 시장을 억누를 만큼 충분히 강해지지 못했다
- 지방분권적 무력집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전투에 참여하는 인원의 수는 보통 많아야 수천 명 정도. 당시의 낮은 생산력으로 이보다 큰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일. 이렇게 전투가 소규모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소수의 귀족 전사들이 전장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면서 더 많은 병사들을 먹이고 무장시키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 결과 전장에 동원되는 병사들의 숫자가 과거에 비해 10배 이상으로 증가. 전국시대에 중원의 왕국들은 작으면 수만에서 많게는 십만 이상의 병사들을 전쟁터에 보냈다.
- 귀족전사는 농민들에게 기생하며 군림하는 이들의 계급적 특성상 그 수가 적었다. 서기 981년 독일제국에는 다 합해야 5천~6천 정도의 기사가 있었고, 1200년경 일본에는 비슷한 숫자의 사무라이가 있었다. 수만 명 이상이 맞붙어 싸우는 대규모 전장에서 소수의 귀족전사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평민병사는 일반대중이라는 거대한 인적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적은 비용으로 무장할 수 있는 보병으로 싸웠음. 장평에서 희생된 조나라 병사들은 대다수가 보병이었고, 마우리아 군대의 주축도 엄청난 수의 보병이었음.
- 양질의 무장을 갖추고 잘 훈련받은 평민병사는 귀족적 군대를 상대로 대등함 이상의 싸움을 할 수 있었다. 오만한 귀족들은 전장에서도 제멋대로 행동하려는 경향이 강했음. 중세 유럽의 전쟁사를 보면 귀족기사들이 지휘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전투를 패배로 이끄는 장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음. 이러한 반항적 군대를 가지고 정교한 전술을 펼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돌격해서 상대진영을 흐트러뜨리는 것이 기사군대가 사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전술이었다. 이들이 지배하던 시대에 전투는 귀족전사들이 서로를 향해 돌격하여 싸움을 벌이는 단순한 결투의 성격이 강했음. 반면 평민병사는 귀족들보다 상관의 명령을 잘 따랐다. 비록 이들은 개인적 전투능력은 떨어져도 다양한 병과를 이루어 효율적 전술을 운용하기에 용이했음.
- 백년 전쟁 동안 영국군의 보병중심 군대가 그들보다 규모가 큰 프랑스의 기사중심 군대를 상대로 연속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평민군대의 이점이 작용한 결과. 프랑스의 기사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지형에서도 무모하게 돌격을 고집하다가 진영을 잘 갖춘 궁수와 보병에게 거듭 참패를 당했음. 귀족전사들은 전장을 주도하던 위치에서 밀려났고 그 자리는 대규모의 평민보병에게 돌아갔다. 유럽에서 이러한 전환이 가장 앞서서 일어났던 곳은 남쪽에 위치해 상대적으로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빨랐던 스페인이었다. 테르시오라는 밀집보병 전술을 사용한 스페인군은 1503년 체리뇨랄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한 이후 수십만의 압도적 병력규모를 바탕으로 140년 동안 군사적 패권을 유지했다. 대규모화된 전투에서 귀족기사들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 돈키호테는 기사의 영광이 이야기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환상으로 전락한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 전사귀족이 지배하는 지방분권적 사회질서가 무너진 이후 세 지역에 나타난 변화상을 보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처럼 보임. 역사학자 에버하르트에 의하면 "만약 그 후 역사의 진행과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당시의 중국을 관찰한다면 명백한 변화의 흐름에 따라 자본주의 사회로의 발전을 예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중국에는 시장경제 대신 전제적 황제들이 나타났고 이들이 20세기초까지 중국을 지배. 그 원인은 이 시대에 새로운 형태의 무력집단이 성장해 나왔기 때문.
- 왕의 통제하에 있고 항시적으로 유지되는 군대를 얻은 중앙권력은 그것을 적군가 싸우는 데뿐만 아니라 내부의 불만을 억누르는 데도 사용. 강력한 군사력을 얻은 중앙무력집단은 반항적 귀족들을 제압하고 지배력을 확장해감. 그렇다고 귀족들이 단순한 희생양이 된 것은 아님. 군사적으로 무력해져 생산자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 귀족들은 중앙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관직을 차지함으로써 다시금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됨. 다만 과거와 같이 귀족들이 권력을 사적인 세습재산으로 소유하지는 못했다. 관직을 잃으면 그에 따르는 권력도 사라짐. 시장과 중앙권력은 농업생산력의 발달에 의해 증가한 농업잉여를 흡수하며 동시에 성장. 당시 인도와 중국사회를 보면 한편에서 상인들이 거부를 모으는 동안 다른 한편에선 거대한 제국이 잉태되고 있었다. 인도에서 불교는 자신들을 하층 카스트로 취급하는 브라만교에 반발한 부유한 상인들의 후원에 힙입어 브라만교를 위협할 정도로 교세를 확장. 역시 불교를 후원했던 아소카는 인도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을 다스렸다. 여불위는 상업을 통해 모은 막대한 재산을 이용해 재상의 자리에 오름. 그의 아들로 의심받은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했고, 그것을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다스렸다. 유럽에서도 상공업이 발달한 근대 초기는 절대왕정의 시대였음. 이 시기는 지방분권적 무력집단의 지배에서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의 지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였음. 지방귀족들의 권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아직 중앙 무력집단도 충분히 성장하지 못하자 일시적으로 무력집단 지배력의 공백기가 생겨남. 그 결과 무력집단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잉여가 시장에 공급되며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활기넘치는 시대가 나타남. 그러나 일단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강력한 형태를 갖추고 나면 시장과 무력집단의 부자연스런 동거는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의 집중된 힘은 지방분권적 무력집단보다 훨씬 강한 중압감으로 사회와 시장을 짓누르기 시작.
- 무력집단의 중앙집권화가 진행될수록 지배계급이 문인화되는 현상이 나타남. 군대가 미천한 평민들로 채워지자 군인이 되는 대신 귀족들은 거대한 군대와 그 군대에 의해 뒷받침되는 관료조직을 관리하는 문인관료로 탈바굼. 지배계급이 문인화되었다고 해서 무력집단이 생산자들을 지배하는 근본적 수단이 바뀐 것은 아님. 관료들은 그 수하에 그들을 대신해 폭력을 행사할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음. 과거 귀족들이 무기를 들고 직접적 무력을 행사했다면 이제는 국가의 군사조직을 통제함으로써 무력을 행사하게 된 것.
- 일본은 250개간 넘는 번국으로 나누어져 있었음. 이렇게 잘게 분열되어 있는 일본의 무력집단은 사회에 대한 장악력이 중앙집권적인 사회보다 상대적으로 약했음. 때문에 지속적으로 농업산출량이 증가하는 동안에도 다이묘들은 농민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늘리는 데 어려움을 겪음. 그 결과 농민들에게 지워진 세금부담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벼워짐. 덕분에 일본 농민들의 생활수준은 상당히 높았음. 19세기 일본인의 평균수명은 35-45세 정도였는데, 이는 동시대 청나라보다 10년 이상 높고 동시대 서유럽과 비슷한 수준이었음. 메이지 유신 이전부터 이미 일반대중들도 자식들을 학교에 보낼 정도의 여유가 있었음. 에도막부 말기에는 전체 남성의 40%와 여성의 10%가 정규교육을 받음. 덕분에 남성 인구중 절반 이상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당시의 기준으로 봤을 때 아주 높은 수준이었던 일본의 교육수준은 이후 근대화의 과정에서 큰 이점으로 작용. 농민들의 손에 남은 잉여는 시장에 공급되었고 그 결과 경제의 상업화가 진행되었음. 막부 말기에 이르면 일본의 많은 지역에서 과거의 자급자족적 농업은 시장에 판매하기 위해 생산하는 상업적 농업에 자리를 내주었다. 농경사회에서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농업이 상업화는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서유럽에서 시장경제로의 이행이 일어날 수 있었던 전제조건이었다.
- 에도 시대에 시장에 공급된 농업잉여는 각종 사적 기업을 번창시켰다. 이 시기에 형성된 기업전통, 상업자본, 상업망과 금융망 등은 산업화의 기반이 되었음. 상업화된 농업은 높은 생산력은 근대화에 필요한 비용을 무리없이 소화해냈다. 또한 상업적 농업하에서 임금노동에 익숙해진 일본의 농민들은 새로운 사회에 필요한 노동형태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였다.
- 그리스와 동양의 제국들 사이에 존재했던 정치체제의 차이는 무력집단과 생산자 사이의 힘의 역학관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스의 특수한 환경에 의해 무력집단의 성장이 억제되었기 때문에 보다 민주적인 정치체제가 나타났던 것이다. 민주적인 정치체제는 고대 그리스 이전에도 많은 지역에서 나타났다. 사실 인류가 수렵채집민으로 유랑하던 시절 인간사회는 전체적으로 아주 평등했다. 권력이 소수에 의해 독점되는 현상은 농경생활이 시작된 이후 무력집단이 성장하면서 나타났다. 고대그리스처럼 농경문명이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이후에도 민주적 체제가 시행된 경우는 예외적이기는 했지만 고대 그리스 이외에도 여럿이 존재했다
- 기원전 8세기 그리스는 급속한 경제적 팽창을 경험했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으로 인해 인구가 전례없이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그리스인들은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부족해진 토지를 찾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림. 그리스인에 의한 지중해 연안의 식민활동이 시작된 것이 이때부터였다. 외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져 금속이 보다 싼 가격으로 유입되었고 동방에서 새로운 금속기술이 도입되어 무기를 만드는 비용이 내려감.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데다 무기의 평민들이 가담하면서 중장보병의 규모가 커지자 과거 소수의 귀족들이 개별적으로 전투를 벌이는 모습은 사라졌다. 대신 대규모 보병군대에 적합한 밀집방진 전술인 팔랑크스가 나타났다. 무장을 갖춘 평민들은 귀족들의 권력독점에 도전했다. 견고하게 뿌리박힌 귀족 셀겨에 맞서기 위해 평민들은 구심점을 필요로 했고 참주가 그 역할을 맡았다. 기원전 7세기 중반부터 일련의 야심가들이 평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귀족들이 장악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독재정권을 수립. 참주의 권력은 평민을 지지기반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평민들이 귀족들에 대항하기 위해 그를 필요로 했을 때에만 유지될 수 있었음. 평민들이 귀족들을 억제할 자신감을 갖게 되자 참주의 필요성은 사라졌고 그의 권력기반은 침식되어 갔다. 그리하여 참주정은 독재정권에 염증을 느낀 평민들과 귀족들의 연합에 의해 전복되었다. 이후 그리스에는 시민중장보병인 호플리테스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체제가 형성됨.
- 비록 경제발전으로 더 넓은 계층이 무장을 갖출 수 있게 되었지만 모두가 청동갑옷을 마련할 만한 경제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음. 아테네의 경우 남성시민의 40-60%는 무장을 갖출만한 여력이 없었따. 테테스라 불린 이들은 관직을 소유할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 가난한 시민들이 국가의 군사력에 기여할 기회는 바다에서 찾아왔다.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이 해안가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상 그리스에서는 해양활동이 활발했고 해군의 중요도가 높았다. 영화 벤허에서는 쇠사슬에 묶인 노예들이 채찍을 맞아가며 노를 젓는 것으로 묘사됐지만 사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갤리선의 노를 젓는 자리에는 노예가 아닌 시민들이 선호되었다. 국가에 대한 아무런 권리도 없는 노예들에게 함대의 운명을 맡기는 것은 꺼림칙한 일로 여겨졌다. 그래서 노예들에게 노를 젓는 자리를 맡길 때는 전투가 끝난 후 시민권을 주기로 약속하거나, 아니면 노예들을 먼저 시민권자로 만든 후에 노를 잡게 했다.
- 그리스의 민주적 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음. 비록 그리스의 민주적 전통이 최후를 맞이한 것은 필리포스 2세의 마케도니아 군대에 짓밟힌 이후였지만, 그리스의 시민권력은 마케도니아에 의한 정복 이전부터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서로간에 거의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이러한 만성적인 전쟁상태에서는 전문적인 군대가 필요했음. 농지를 돌봐야 하는 시민군대를 무한정 전쟁터에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이 시기 그리스에서는 시민들의 권력기반이었던 시민전사의 전통이 부식되었고 용병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적으로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유력자들에게 권력의 주도권이 넘어가게 만들었다. 또한 점증하는 군사적 분쟁은 그 안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군지도자들의 입지를 강화시킴. 그 결과 군대를 기반으로 한 군주제가 자라났다.
- 동부 지중해 연안을 지배한 일련의 대제국인 아시리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는 모두 상대적으로 척박한 농경지역에서 기원한 민족들에 의해 건설됨. 사막의 유목민 베두인들로부터 주로 병력을 제공받았던 초기 아랍제국의 군대는 농민출신은 아니었지만 역시 가진 것이 많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그리스 로마인들의 군사적 성공은 가난했기에 더 강한 보병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던 민족들이 부유한 문명들을 정복하고 대제국을 건설하던 당시의 역사적 흐름의 일부였다.
- 가난했기 때문에 무력집단의 성장이 억제되서 군사적으로 강력했던 민족이 제국의 주인이 된 후 부유해졌지만 그 결과 무력집단의 지배력이 강해지면서 오히려 군사적으로 약화되어 제국의 붕괴로 이어지는, 말하자면 배고픈 늑대가 배부른 돼지가 되는 과정은 아시리아 이후에 등장했던 다른 제국들도 겪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전설을 가진 로마제국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기원전 7세기까지 로마인들이 전투를 치르는 방식은 고전시대 초기의 그리스와 비슷했다. 무장을 갖춘 귀족전사들은 개별적으로 적과 전투를 벌였고 이들의 뒤에는 무장을 갖추지 못한 평민들이 소리를 지르며 따라다녔다. 이후 그리스에서 나타났던 것과 비슷한 변화과정이 일어났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서 더 넓은 계층의 사람들이 무장을 갖출 수 있게 된 것이다. 6세기를 거치면서 부유해진 로마는 오두막집들이 모여 있던 촌락에서 세련된 도시로 탈바꿈했다. 같은 시기에 그리스의 팔랑크스 전술이 되입되어 4천명 정도로 이루어진 중장보병 군단이 조직되었다. 병사들은 대부분 자비로 무장을 갖출 여유가 있는, 토지를 보유한 농민들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철기제조술의 전래이후 로마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경제성장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를 뒤덮고 있던 울창한 숲이 철제 도끼에 의해 잘려나가 농경지로 바뀌었고 철제보습을 단 쟁기로 보다 수월하게 땅을 갈 수 있었다. 농업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수많은 단위로 쪼개져 있던 부족들이 통합되어 갔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났다. 로마가 이탈리아를 통일해 가던 이 시기에 이탈리아의 성인 남성중 10%는 군대에 있었는데 한국으로 치면 2백만명 이상이 군복무를 하고 있었던 셈. 이탈리아 남성들은 평생동안 최소 4년을 군대에서 보냈음. 당시 마넝적 전쟁상태에 있던 이탈리아에서 이들의 군생활은 거의 항상 실전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로마와 이탈리아의 병사들은 오랜 실전경험으로 단련된 베테랑 군인들이었다. 이탈리아가 로마에 의해 통합된 후 이탈리아의 강인한 병사들은 로마의 군대로 편입되었다. 동방과 서방의 정복을 완료시킬 동력을 제공한 것이 바로 이 범이탈리아출신 중장보병이었다.
- 전쟁은 로마인들에게 있어 일상적 삶의 일부였다. 그래서 그들의 사회는 전쟁을 위해 짜여졌고 무를 숭상하는 문화가 자리잡음.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군사적 업적이 필수. 로마역사상 최고 부호였떤 크라수스가 굳이 말년에 그에게 비참한 죽음을 선사해준 파르티아 원정을 떠난 이유도 그에게 모자랐던 전쟁터에서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였음. 로마인들은 이웃민족들과 싸우면서 그들의 군사기술을 다듬어갔다. 초기에는 단순히 그리스의 팔랑크스를 모방한 수준이었던 로마군단은 수많은 전투와 패배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개조를 거듭해 극도로 효율적인 전쟁기계로 진화해감
- 농업생산력이 낮은 서유럽에 중앙집권적 제국이라는 유지비가 많이 들어가는 형태이 정부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고대의 고속도로였떤 지중해를 통해 농업생산력이 높은 동방엣 생산된 잉여를 서방으로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 군사력에서 우위에 있던 서방이 동방을 정복하고 그 부를 강탈하여 제국의 지배도구인 상비군과 관료조직을 지탱시킨 것. 당시 제국의 세입에 대한 자세한 수치상의 정보를 알 수는 없지만 이집트 한 지역에서 거두어들인 세입이 제국의 전체 세입의 최소 3분의 1에서 많게는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방의 군사력이 약화되자 동방으로부터 제국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잉여를 빼앗아 올 수 없게 되었다. 3세기 이후 로마시는 더 이상 제국의 권력중심지가 아니었다. 북부 발칸 출신 장군들은 그들의 군사기지에서 제국을 통치하다가 324년에는 발칸반도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겨버림. 이제 동방의 잉여는 로마시가 아니라 콘스탄티노플로 흘러들어감. 로마시로 향하던 이집트의 곡물 수송선들은 새로운 로마시로 방향을 바꿈. 이후 동방의 잉여로 유지되던 서방의 제국은 필연적 붕괴를 향해 나아갔다.
- 부유한 동양의 문명들에서도 과거 농업생산력이 낮았던 시기에는 지방분권적 사회가 나타나지만 그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 있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서유럽보다 2천년 정도 앞서서 서유럽에서 나타났던 것과 아주 유사한 형태의 봉건적 사회가 형성되었음. 중세의 서유럽이나 동시대의 동양이나 정부가 운영되는 방식은 달랐어도 그것은 근본적 원리는 동일했다. 바로 폭력이었다. 중세 서유럽을 지배하던 자들은 전사계급이었다. 이들은 견고한 성채에 거점을 두고 군사력을 통해 주변지역을 지배했다.
- 우리에게 익숙한 말을 탄 기사는 9세기 이후에야 널리 퍼졌다. 그 이전까지는 귀족들도 주로 보병으로 싸웠다. 자유민 전사들이 주축을 이루었던 초기 프랑크 왕국의 군대는 거의 전적으로 보병이었다. 가난한 자유민 병사들은 방어장비를 거의 갖추지 않고 전장에 나감. 갑옷은 고사하고 투구를 쓴 자도 많지 않았다. 이 시기 프랑크족과 전투를 치른 비잔틴 사람들은 이들을 반쯤 벌거벗은 보병으로 묘사. 군대의 귀족화가 진행되면서 값비싼 장비인 중장갑과 말의 사용이 늘어났다. 그러나 8세기가지는 과거의 보병중심적인 성향이 이어졌다. 프랑크족 기병들은 말을 전장으로 이동한 뒤 말에서 내려 보병으로 싸웠다.
- 1439년 국왕에게 프랑스 최초의 상비군이 주어졌고, 또한 그것의 유지를 위해 전국적인 세금을 부과할 권한이 부여됨. 전문적이고 규율잡힌 군대를 얻은 프랑스는 곧 영국의 침략군을 그들의 국토에서 몰아냈다. 새로운 형태의 군대는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더 우월한 군사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18세기까지 귀족기병에 의존한 폴란드처럼 변화에 뒤처진 국가는 외국군대에게 정복당해 지도상에서 사라짐. 프로이센은 30년 전쟁 동안 스웨덴의 군대에게 짓밟힌 후 국왕에게 강력한 상비군을 쥐어줌. 이 변방의 소국은 약 2세기 후 독일 전역을 통일. 강력한 군대를 손에 넣은 유럽의 군주들은 약 2천년 전 전국시대 중국의 군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1500년에서 1700년 사이의 기간은 유럽 역사상 가장 호전적인 시기였는데, 이 시기 동안 전쟁이 없었던 해는 다 합해 10년 정도에 불과. 주변국들과의 군사력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각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군대의 규모를 늘려감. 유럽 주요 국가들의 군대규모는 1530년과 1710년 사이에 10배로 증가.
- 군대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것을 통제하는 국왕의 권력도 증대됨. 과거 지방에서 독자적 지배자로 행세하던 귀족들은 중앙권력에 복속되었고,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여 왕의 통제를 받는 관료조직이 들어섰다. 거대한 국가권력기구의 정점에 선 왕은 유일한 정치적 권위의 원천이 되었다. 이른바 절대왕정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유럽에서 절대주의의 시대를 연 것은 가장 남쪽에 위치해 농업생산력이 높았던 스페인이었다. 16세기 카스티야의 몇몇 농장에서는 밀의 파종량 대비 수확량이 8배에서 9배정도였는데 이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1500년 무렵 영국과 프랑스의 수확량은 파종량의 5배를 조금 넘는 정도였고 독일에서는 이 수치가 5배 아래였다.
- 무거운 쟁기의 보급에 의해 촉발되었던 농업생산력의 증가는 13세기에 이르러 한계에 다다랐다.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정체되었고 그 세기 말부터는 늘어난 인구를 먹이기 위해 고지대나, 모래땅, 습지같이 척박한 한계지까지 경작지가 지나치게 확장된 영향으로 평균 산출량이 감소하기 시작. 무거운 쟁기는 산업시대 이전에 농경에 적용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의 기술이었다. 중세 초기 무거운 쟁기의 확산 이후 19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농업에서 그와 같은 기술상의 혁신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서유럽이 과거 동방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천 년 동안의 정체상태에 빠져들 차례인 듯 보였다. 그러나 서유럽의 농민들은 기술상의 혁신이 아닌 새로운 동력에 의해 다시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이루어내다. 이 새로운 동력은 바로 시장이었다.
- 파종량 대 수확량 비율 1:4라는 저조한 수치가 일반적이었던 13세기에도 예외적으로 높은 수확고를 거둔 몇몇 지역들이 있었다. 도시가 만들어낸 시장에 접근할 수 있었던 지역들이 그곳이었다. 됫의 시장은 농민들에게 그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판매하여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 농민들은 더 많은 수익을 얻기 위해 그들이 가진 한정된 토지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최대한 많은 식량을 생산하도록 노력했다. 높은 생산성은 노동과 자본을 아끼지 않고 투자함으로써 달성되었다. 도시의 시장과 연결된 지역에서 농민들은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과거보다 더 많은 시간동안 일했다. 일손이 더 필요하면 임금노동자들이 고용됨. 지력을 높이기 위해 많은 양의 거름이 시비되었는데, 이 중 상당부분은 외부로부터 구입되었다. 토지를 보다 집약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휴한지를 줄일 수 있는 농법과 가축의 수를 늘려 보다 많은 거름을 얻을 수 있는 농법이 시도되었다. 종종 근대농업의 혁신으로 지목되는 이러한 변화들은 근대에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중세 후기에도 이미 존재했더 것이었다.
- 종종 근대 농업의 혁신으로 지목되는 이러한 변화들은 근대에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중세 후기에도 이미 존재했던 것이었음. 다만 근대에 이르러 시장의 영향력이 확장된 이후에야 많은 노동과 자본이 소요되더라도 생산성이 높은 이러한 집약적 농경방식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됨. 시장이 발달함에 따라 또한 각 지역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지역의 자연환경에 가장 적합한 작물과 가축에 집중해서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음. 과거 자급자족적 사회에선 각 지역이 거의 모든것을 스스로 생산해야 했기에 그 지역에서 잘 자라지 못하는 농작물도 재배해야 했다. 시장이 발달하여 교역을 통해 생활에 필요한 다른 산물들을 얻을 수 있게 된 이후에야 각 지역에 가장 적합한 작물로 생산의 집중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 서유럽은 정말 딱 적장한 환경에 위치해 있었다. 무겅누 쟁기의 도입 이후 기술적 요인에 의한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서유럽의 농업생산력은 사회를 과도기적 단계로 들어서게 할 정도의 수준에 있었다. 이 시기에 서유럽에서는 지방 분권적 무력집단의 지배가 해체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중앙집권적 무력집단 역시 아직 미미한 수준으로밖에 성장하지 못했다. 이러한 무력집단 지배력의 공백상태는 무력집단의 통제에서 벗어난 잉여가 시장에 공급되게 만들어 시장이 성장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제공했음. 이후 시장의 성장에 의해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면서 늘어난 잉여 중 일부가 중앙 무력집단에 공급되었고, 그 결과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조금씩 성장했다. 그러나 서유럽에서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의 성장은 전적으로 시장의 성장이라는 1차적인 현상이 의존해 일어난 2차적 현상이었다. 시장이 먼저 성장한 다음에야 그것에 의해 증가한 잉여를 배분받아 중앙권력이 성장할 수 있었음. 따라서 중앙 무력집단의 성장은 시장의 성장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었음.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어느정도 성숙한 형태를 갖추었을 때 시장은 이미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장해 있었다. 일시적으로 중앙 무력집단이 과도하게 성장해 시장을 위축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장이 위축되면 시장에 의해 증가했던 농업생산력이 감소했음. 그 결과 농업잉여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중앙 무력집단 역시 위축됐고, 시장은 다시 성장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 과정은 시장이 마침내 폭력에 이한 강제력을 밀어내고 사회의 지배적 원리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 영국의 젠트리 역시 중세시대 전사귀족의 하부계층이었음. 그런데 중국의 소귀족들과 달리 젠트리들은 관료조직이라는 새로운 보금자리에 의존할 수 없었음. 영국의 빈약한 중앙권력은 관료들을 먹여살릴 만한 자원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 지방 관리들은 거의 무료로 관직에 봉사했으며, 수입이 있는 관직이라도 수입이 일시적이고 변변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전장에서 평민병사들에게 자리를 빼앗겨 더 이상 전사 지배계급으로 행세할 수 없게 된 영국의 소귀족들은 따라서 뭔가 다른 부분에서 수입을 올릴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당시 역동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시장이 그 해답을 제공.
- 젠트리들은 그들의 토지를 세심히 관리하고 충분한 노동과 자본을 투자하여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늘어난 산물은 시장에 판매하여 많은 이익을 거둘 수 있었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적용됐음. 이미 자본을 소유하고 있던 귀족들은 경제활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만 하면 시장의 성장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볼 수 있었고 시장경제를 지배하는 자본가로 변모할 수 있었음. 젠트리들은 상업적 농업 외에도 상공업에 투자하는 등 생산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여 새로운 경제적 환경에서 가장 번영하는 계층이 되었다. 워릭셔 주에서 젠트리들의 평균 자산가치는 1530년대로부터 100년 동안 거의 4배로 증가. 평민 계층 중에서 농업과 상공업으로 재산을 모은 자들은 젠트리 계층으로 편입되었음. 대귀족들은 경제적 논리가 지배적이 되어가는 시대에 그들의 하급자들보다 더디게 적응했다. 지나간 시대에서 누렸던 권력이 컸던 자일수록 과거의 영광에 매달려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 그 결과 대귀족들은 16세기말 한때 심각한 재정적 위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영국의 조그만한 왕실은 대귀족들 중 아주 일부에게만 충분한 수입을 제공해줄 수 있었다. 때문에 대귀족들도 결국에는 생산활동에 발을 들여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자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데로 관심을 돌린 대귀족들은 17세기에 상당한 경제적 회복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17세기에 이르면 영국의 귀족계급은, 특히 그 중 젠트리는 훗날의 자본가계층의 시조와 비슷한 존재로 변해 있었다. 영국에서는 귀족들이 이미 생산자로 전환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에서 나타났던 귀족과 생산자들 사이의 대결이 일어나지 않았다. 생산자와 충돌을 일으킬만한, 진정한 의미에서 무력집단이라고 할 만한 것은 허약한 국왕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 한때 학계에서는 왕당파와 의회파의 싸움을 봉건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투쟁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후 학자들이 양측의 구성원들의 사회경제적 상태를 세미랗게 조사해본 결과 이러한 부르즈아 혁명이라는 틀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의 싸움은 무력집단과 생산자 사이의 싸움이 아니었다. 양측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젠트리들은 이미 시장으로 돌아서 있었다. 한 역사가의 말에 의하면 "문제는 부르주아가 양쪽에 있었다는 것이다." 양측에서 가장 지배적이라 할 수 있는 차이는 종교였다. 랭커셔에서 의회파에 가담한 귀족의 73.6%가 청교도였던 반면 왕당파에 가담한 귀족의 65.5%가 카톨릭 신자였다. 많은 수가 그들이 속한 지역이 어느 쪽에 서기로 결정했느냐에 따라, 또는 점령당했는가에 따라 편을 정했다. 그 외에 각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이상, 왕에 대한 충성심 및 동정심, 혹은 전쟁에 뛰어들어 한 몫 잡아보려는 계산 등이 어느 편을 택할지에 영향을 미쳤다. 대다수 젠트리들은 내전에 무관심했고 분쟁에 끌려들어가는 것을 꺼려했다. 젠트리의 60% 이상은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이미 지방에서 사법권과 행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중앙에서도 의회를 통해 왕권을 제약할 수 있었던 젠트리들은 왕권의 소멸에서 얻을 것이 별로 없었다. 기득권층인 이들은 현재의 사회가 격변하는 것을 원치 않았음. 그래서 의회파의 편에 섰던 의원들에게도 국왕자리를 없애버리는 것은 고려사항이 아니었음. 의회파와 왕당파 의원들의 정치적 견해의 차이는 이미 제한적인 왕권을 더 깎아낼 것인지 말 것인지에 있었다. 의회파는 왕당파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에도 찰스 1세게에 입헌군주제를 제안했다. 그가 이 제안을 거부하고 스코틀랜드 군대를 끌어들여 일어난 2차 내전이 진압된 후에도 의회는 여전히 국왕과 협상하는 쪽을 택했다.
- 영국에서 절대왕권을 세우려고 했던 찰스 1세의 헛된 시도가 야기한 사건들은 당시 사회의 주도권이 이미 무력집단에서 시장으로 넘어와 있었음을 보여준다. 영국에서는 기후적 조건 때문에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시장의 성장이 일어난 후에야 그것에 의해 증가된 농업잉여를 공급받아 성장할 수 있다는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는데, 섬나라의 특성상 군사력까지 갖지 못한 영국의 왕실은 잉여흡수능력이 더욱 떨어져 발육부진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현상은 시장에 더 많은 잉여가 공급될 수 있게 해주었고, 또한 중앙 무력집단에서 수입원을 찾지 못한 지배계층이 생산활동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덕분에 경제성장에 아주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되었다. 1600년에 이를 때까지 영국의 경제는 당시의 최고 선진지역이었던 네덜란드는 물론이고 프랑스와 비교해서도 조금 뒤처져 있었다. 17세기에는 대륙에서 군대의 규모와 함께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급성장하면서 대륙이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퇴보와 정체상태에 빠져들었다. 프랑스에서 국왕의 권세가 절정에 달했던 태양왕의 치세는 경제적으로는 침체의 시기였음. 중세 이후 유럽 상공업의 중심지로 독보적인 경제발전을 구가하던 네덜란드 역시 비대해진 군대와 관료조직에 발목이 잡혔다. 주변이 대국들이 가하는 군사적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17세기말 인구 200만의 네덜란드는 10만의 군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군대와 관료조직은 그 무거운 유지비용으로 경제를 짓눌렀다. 17-18세기 네덜란드의 세금부담은 영국보다 몇 배 이상 무거웠다. 또한 국가의 관료조직이 제공하는 짭짤한 관직은 사람들의 관심이 생산적인 활동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18세기 네덜란드에서 가장 높은 소득을 올리는 자들은 대부분이 관직을 가진 자들이었음.
- 영국에서는 대륙의 국가들이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에 깔려 허우적거리던 시기에 시장이 성장이 지체없이 이어졌다. 시장의 영향력이 확산되면서 과거에 예외적인 일부 지역에서만 달성되었던 높은 수확량이 18세기 말이 되면 영국의 일반적 농업생산력이 되었다. 1600년경까지만 해도 영국 농민들의 노동생산성은 프랑스보다 조금 낮은 수준이었지만 1700년경에 이르면 프랑스보다 15% 이상 높아졌고 1800년경에는 그 차이가 44%로 벌어짐. 시장의 생산력 증폭현상은 농업뿐만 아니라 공업에도 적용되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산업혁명이었다. 최근 들어 학자들은 산업혁명의 연속적 성격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18세기 후반 이전에도 시장의 성장과 함께 공업생산성의 꾸준한 발전이 이어졌음. 우리가 산업혁명기라고 부르는 시기는 이 성장속도에 급격한 가속이 붙은 시기였다.
- 무역과 식민지에 의해 창출된 해외시장도 공업품의 수요를 만들어내는 데 어느정도 역할을 했으나, 당시의 산업성장을 주도한 것은 역동적으로 성장하던 내수시장이었음. 시장의 성장에 의한 농업생산력의 혁명적 발전은 산업사회로의 길을 열어주었다. 식량생산량이 급증함에 다라 16세기 초에 200만명이 조금 넘었던 영국의 인구는 18세기 말에는 800만 이상으로 증가. 늘어난 인구는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상품이 소비될 잠재적 시장을 제공해줌. 또한 농업생산력의 증가는 농가소득을 증가시키고 식품가격을 하락시켜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산업생산품을 구매하는 데 사용할 수 있게 해줌. 1750년경 영국 농업의 노동생산성은 전체 인구의 46%를 차지하는 농업인구가 54%의 비농업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었음. 더 이상 땅을 일굴 필요가 없게 된 사람들은 도시로 유입되어 공장이 돌아가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 인구의 절반 이상이 농업이 아닌 다른 부분에 종사하는 사회는 더이상 농업사회가 아니었다.
- 프랑스에서 중앙무력집단의 성장은 시장의 성장이라는 1차적 현상에 의한 농업생산력이 증가하면서 거기서 나온 잉여를 분배받아 일어난 2차적 현상이었다. 중앙 무력집단은 시장의 성장이 먼저 일어난 이후에야 그것에 뒤따라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학관계는 시장을 중앙무력집단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했음. 17세기에 중앙무력집단이 지나치게 성장하여 시장을 짓누르자 농업생산력이 정체 또는 감소됨. 농업잉여의 공급이 정체 또는 감소하자 중앙무력집단의 성장은 중단되었고 그 결과 시장에 가해지는 압박도 누그러짐. 그리하여 시장은 태양왕의 시대를 살아남았고 18세기에는 다시 성장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1715년 이후 프랑스 경제는 17세기의 정체에서 탈출하여 긴 성장국면에 진입했다. 루이 14세가 사망한 이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까지 프랑스 교역규모는 5배로 증가. 18세기 프랑스의 경제성장은 전에 없이 역동적인 것이었음.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 프랑스의 경제성장률이 연간 1%에 달해 당시 산업혁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영국의 0.7%보다 더 높았다고 추정했다.
- 영국의 귀족들과 달리 프랑스 귀족들은 번듯하게 성장한 관료조직과 군대에서 새로운 부와 지위의 원천을 찾을 수 있었음. 관직은 급료에 더해 수수료와 뇌물 등으로 그것을 소유한 자들에게 추가적 수입을 가져다줌. 왕의 신임을 얻어 고위관작에 오르게 되면 한순간에 부귀영화를 거머쥘 수 있었다. 과거 자신들의 지방을 호령하던 대귀족들은 관직가 관대한 연금, 하사금을 얻기 위해 왕의 궁전 주변으로 모여들었음. 귀족들은 거대하게 팽창한 왕의 군대에서 장교자리를 거의 독점적으로 차지. 루이 14세 시대에는 2만명 가량의 장교가 있었는데, 그중 80%는 귀족출신이었음. 장교들은 일반 병사들보다 최소 10배 이상의 급료를 받았다. 17세기 말에 전체 귀족남성의 1/6, 군복무 연령대 귀족의 약 1/3에서 1/2이 군대에 속해 있었음.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부와 권력을 얻을 상당한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에 프랑스 귀족들은 영국 귀족들과 달리 천한 생산활동으로 거의 돌아서지 않았다. 이는 프랑스의 귀족들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것을 막아 이들에게 오히려 독이 됨. 자본을 소유하고 있던 프랑스 귀족들은 경제활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만 하면 영국의 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본가로서 시장의 성장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임. 그러나 프랑스의 중앙무력집단이 제공한 기회는 귀족들의 관심을 묶어둘 만큼 충분히 화려했다.
- 시장의 발전에 의한 도시의 성장은 많은 수의 생산자들을 도시라는 좁은 공간에 집결시켜 생산자들의 조직력을 강화시켰고, 이 조직력은 필요시에 군사력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중앙집권적인 무력집단의 지배를 받은 문명들에서도 농업의 높은 생산성으로 인해 농업잉여를 소비하는 도시가 발달. 무굴제국에서는 인구의 15%가 도시에 거주했고, 송나라에서는 인구의 20%, 고대 이후 이집트에서는 25%이상이 도시에 거주. 그러나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도시는 생산자가 아니라 무력집단이 한 군데 모여 주변의 농촌지역을 지배하는 행정과 군사중심지로 성장. 상업과 공업 등 생산적 부분이 도시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부수적인 수준일 뿐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에서는 도시의 성장이 생산자들의 조직력과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송나라 카이펑은 파리보다 규모가 더 큰 도시였지만 그 인구 중 25만명은 관료들과 그의 가족들이었고, 도시의 안과 주변에 최대 30만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음. 장인들도 인구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이들 중 다수가 국가가 운영하는 작업장에 속해 있어 사실상 국가에 종속되어 있었다.
- 서유럽에서 도시의 성장을 가능하게 해준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시장의 성장에 의해 이루어졌음. 따라서 도시의 성장은 시장과 연결된 생산적 부분에 의해 주도되었다. 시장의 성장에 의해 증가한 농업잉여의 일부를 제공받은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의 행정조직이 도시에 더해졌지만 도시의 생산자적 성격을 잠식할 정도가 되지 못했다. 루이 16세는 약 2만명의 군대를 파리 인근에 동원했지만 이 병력으로 파리를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음.
- 국가의 더 많은 구성원들에게 정치적 권리가 주어질수록 더 많은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권리를 가진 국가를 위해 기꺼이 군사적 의무를 수행한다. 따라서 사회가 민주적이 될수록 국민의 역량 중 더 많은 부분을 외국과의 무력투쟁에 동원할 수 있게 됨. 즉 국가의 군사적 효율성이 높아짐. 과거 부족적 단계의 사회가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했던 것도 이 때문. 부족들은 정치적 권리를 가진 자유민 남성 전체를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음. 또한 이들은 무력집단에 의해 억지로 끌려나온 피지배자들보다 싸우려는 의지가 더 강했다. 무력집단은 그들 부 중 커다란 부분을 정치권력의 독점에서 얻었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애초에 고려대상이 될 수 없었음. 반면 부르주아들은 무력집단과 달리 그들의 부를 기본적으로 경제적 수단을 통해 얻었기 때문에 정치권력의 독점을 포기하더라도 그들의 경제적 기반은 크게 손상되지 않았다. 따라서 부르주아들은 민주주의와 타협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참아낼 수 있었다. 프랑스군의 무기력한 패배로 부유한 자들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정치체제로는 외국군대를 물리칠만한 국민적 역량을 끌어낼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던 부르주아들은 민중의 협력을 얻기 위해 정치적 양보를 했다. 하인을 제외한 모든 성인 남성에게 선거권이 부여됨. 그로부터 약 한달 후, 갓 입대한 의용군으로 이루어져 훈련도 경험도 부족했지만 높은 사기와 혁명에 대한 열정으로 무장한 프랑스의 의용군은 발미에서 당시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았던 프로이센의 군대를 막아냈다.
- 영국과 프랑스에서 시장의 성장에서 비롯되어 일어난 두개의 혁명은 그것이 가지는 우월성으로 인해 곧 주변국가들로 확산되었다. 두 혁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시장경제도 같이 퍼져나갔다. 대륙의 국가들은 앞다투어 영국에서 일어난 경제적 혁신을 받아들였다. 영국의 산업지역에 기계와 공장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바다 건너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나타남. 기득권층이 가졌던 특권의 포기를 의미했던 정치부분에세의 혁명은 전파가 더뎠고 많은 진통이 야기됨. 1814년 마침내 프랑스를 꺾은 유럽의 강대국들은 프랑스 혁명을 무효로 만들려고 시도. 그러나 시장경제가 퍼져나가면서 무력집단의 정치권 독점은 결국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국가간의 군사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각국은 보다 넓은 계층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해야 했다. 1807년 프로이센은 프랑스군에게 패배하여 영토의 거의 절반을 빼앗긴 이후에 마침내 농노데를 폐지. 그로부터 약 60년 후에는 모든 남성에게 보통 선거권을 부여하여 다른 유럽국가들보다 오히려 앞서 나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개혁의 결과 프로이센은 프랑스를 제압하고 독일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 변화의 근원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국가들은 자발적으로 변화를 수용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 채 식민화라는 결과로 지리적 불운함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월등한 기술력과 생산력, 그리고 정치제도의 뒷받침을 받은 서양의 근대적 군대는 세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