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적으로 "한국전쟁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명분과 예의를 중시하던 종전의 가치관을 버리고, 생존을 위해 실용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중시하는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했다"고 지적됨. 전후 한국사회는 원조경제에 의존하는, 생산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과도한 대중소비문화가 형성되었고, 전쟁에 흔들린 영혼들은 향락과 쾌락에 집착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의 폐허 속에서 거침없이 분출된 욕망은 또 한편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경제건설과 분단극복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도로 밑바탕에서 작용하는 추동력이기도 했다
- 50년대는 한국사회에서 전쟁으로 말미암은 유동성과 그러한 유동성 속에서 거침없이 분출하는 욕망, 이것이 추동하는 다양한 역사적 가능성들이 교차하는 시기였음. 그러나 53년 휴전으로 고착화되기 시작한 분단체제는 이후 대단히 역동적인 변화를 맞이하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기본틀에서는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음. 또한 파편화된 가족이 이기적인 지위상승 경쟁을 벌이는 상황, 가족주의의 연장선에서 조성된 혈연, 지연이 민주적 시민사회의 유대감을 압도하는 현상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임. 엄청난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겪은 사람들, 전쟁으로 뿌리뽑혀 유동적으로 떠도는 사람들의 난민적 삶의 형태는 현재까지도 우리의 의식과 삶에 좀처럼 깨어지지 않는 어떤 딱딱한 한계를 조성하며 남아 있다. 난민이라는 개념을 근본적 차원에서 넓게 적용하면 우리는 현재에도 난민상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난민개념을 현상적으로 좁게 적용한다 하더라도 아직도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시키지 못하는 휴전상태, 비평화상태속에서 한국사람들은 언제나 난민으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조사에 의해 밝혀진 역사적 진실은 다소 충격적이다. 한국전쟁 시기에 군인이 아닌 수많은 민간이이, 북한군이 아닌 대한민국의 군과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것.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의 규모는 적게는 수십명에서 수만명에 이르렀고, 전국 구석구석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은 곳이 없었따. 한국전쟁 자체가 수백만명이 희생된, 2차대전 이후 가장 폭력적인 전쟁이었따. 그런데 이 전쟁에서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그것도 적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국 군대와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음은 믿기 어려운 진실이다. 더 놀라운 것은 전쟁 발발 이전부터 이런 비극들이 발생했다는 것. 46년 10월, 당시 한국을 통치하던 미군정이 미곡 수집정책을 추진하다 실패해 혼란이 생겼다. 미군정은 정책실패에 불만을 갖고 저항하는 대중들을 경찰과 군을 동원해 폭력적으로 진압했따. 48년 제주도에서는 남북분단이 기정사실화되고 정부의 억압이 심해지는 것에 저항한 제주도민들을 정부가 파견한 군대가 잔혹하게 진압한 바 있음. 이때 제주도에선 수만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따. 이어서 48년 10월에는 정부의 제주 4.3사건 진압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정부의 명령에 불복해 반란을 일으킴. 정부는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수와 순천일대의 시민 수만명을 죽거나 다치게 함. 이렇게 한국사회에선느 한국전쟁 전부터 냉전적 대립으로 내전수준의 봉기와 반란이 발생했고, 수만명의 민간인들이 살해됨. 여순사건 이후 반란군과 이에 가담한 주민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자 정부는 이들을 토벌하는 작전을 전개. 49년부터 55년까지 약 6년간 지리산 인근 지역은 한국전쟁과 무관한 군사작전이 지속된 내전지대였다.
- 냉전갈등이 심해질수록 정부는 모든 국민을 잠재적인 적으로 의심하기 시작. 정당성이 약한 권력일수록 모든 것을 잠재적 위협이자 위기로 보는 법이다. 일례로 한국정부는 49년 좌익단체에 한번이라도 가입했거나, 이들의 활동을 지원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정치적 전과자로 간주하고 이들을 특별관리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만듬. 전국적으로 30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상세한 검증없이 모두 보도연맹 회원으로 만들어 놓고, 그들을 모두 정부 통제하에 두고 감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비극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시작. 정부는 전쟁발발 직후 군정보기관과 헌병, 경찰 등에 일괄적인 명령을 내려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살해. 진실, 화해 위원회는 전체의 76.5%에 해당하는 전국 114개 시, 군에서 최소 수만명, 최대 10만명이 넘는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되었음을 밝혀냈다. 그뿐 아니라 당시 형무소에 갇혀 있던 재소자와 정치범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정당한 법적절차 없이 살해됨
- 한국의 의무교육제도는 평화, 민주주의, 인권과 다양성 등 시민의 덕목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전쟁의 목적에 부합하는 호전적 전쟁교육에서 시작됨. 일제시기 의무교육제 시행이 일본의 태평양 전쟁 수행과 관련된 정책이었음을 상기한다면 한반도에서 지속된 전쟁의 유산이 얼마나 뿌리깊은지 가늠해 볼 수 있다.
-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정책은 미국의 냉전전략에 조응해 한국정부의 역할을 보증받으려 한 정치적 전략. 하지만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 정책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지됨. 왜 한국정부는 전쟁이 끝나고, 미국과의 조약을 체결하고도 휴전반대와 북진통일을 주장했을까? 그것은 이철머 강경한 주장을 통해 지지세력을 결집하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자유당을 강화하며, 반대를 무마할 수 있었기 때문. 실제로 이승만은 54년 대통령 중임제 철폐 개헌을 이루기 위해 북진통일 정책을 활용. 이승만 정권은 한미상호방위조약 발표 이틀후인 11월 20일 개헌안을 상정하고, 27일 1표가 미달하는 결과가 나왔으나, 다음날 공보처장이 개헌안이 통과되었다고 발표. 이것이 바로 4사5입개헌이라 불리는 헌정사 초유의 불법적 희극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통해 체제를 보장받았고, 자유당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집권을 연장. 이승만 정권은 55년 여름에도 북진통일운동을 지원했고, 57년 1월 1일 발표된 대통령 연두교서는 3분의 2가 반공과 북진통일에 할애되어 있었다
-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 주장을 통해 대외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확보하고, 대내적으로 자유당을 강화해 개헌을 했으며, 장기집권체제를 구축 이어서 그는 면장과 반장까지 상부에서 임명하는 국가를 구축하려 했다. 하지만 권력의 과도한 집중은 결국 60년 3.15선거에서 발생한 가장 극단적 형태의 부정선거를 초래. 부정선거는 시민들의 대대적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4.19혁명으로 이어져 독재정권이 무너짐. 60년대 초가 되면 북진통일을 유일한 통일노선으로 여기던 분위기가 약해졌고, 유엔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이루자는 평화통일 논의가 등장. 이렇게 냉전의 최전선에서 미국의 후원을 받던 이승만 권위주의 체제는 북진통일 같은 호전적 수사와 함께 역사적 유물이 되었다.
- 전쟁과 냉전은 한반도에 크고 깊은 상흔을 남겼다. 한국은 최전선에 서서 전쟁을 치른 대가로 자유진영의 지원과 보호를 받으며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호전적인 체제대립을 활용한 권위주의 체제가 들어서고 지속된 탓에 해방된 지 40여년이 지난 후에야 국민의 뜻에 따라 정치가 이루어지는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민주화가 이뤄진 후에야 한국사회는 지난 시기를 되돌아보며 전쟁과 권위주의가 남긴 상처를 성찰하고 이를 넘어서려는 노력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반도엔 여전히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우리가 50년대의 경험을 통해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전쟁과 권위주의 체제의 영향 아래에서 살아왔고, 그것에 익숙해져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전쟁과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평화와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우리는 여전히 전쟁의 그림자를 마주하며 더 많은 평화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 분단과 전쟁은 농촌에서 나고 자라 죽을 때까지 같은 곳에서 머물던 대다수 한국인들이 고향을 떠나 타지로 이동하게 된 계기가 됨. 월남인, 과부, 고아 등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피난지에 머물거나 삶의 터전을 찾아 도시로 이동 해방 후 일본이나 만주 등에서 귀환한 동포 150여만명과 월남인 50여만명도 일자리가 있는 도시로 몰려듬. 농지개혁과정에서 농지를 팔고 몰락한 대부분의 소농들 역시 더이상 농촌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농촌이 피폐해 지면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도시빈민이 되었다. 도시인구 비율은 49년 17.2%이던 것이 55년 24.5%, 60년대에는 28%로 증가했는데, 49~55년 사이의 급격한 도시인구 증가 중에 3분의 1은 과거 농촌으로 분류되었던 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발생했고, 나머지는 전쟁으로 인한 인구이동의 결과. 50년대 농촌의 인구이동은 서구의 경우처럼 공업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도시화의 결과가 아니었다. 이 시기 인구이동은 도시의 인구유인요소가 높아져 나타난 것이 아니라 분단과 전쟁으로 삶의 조건이 피폐해진 민중들의 자구책이었음
- 전쟁으로 가족적, 친족적 유대를 상실한 사람들은 도시에서 원자화된 개인으로 맨몸으로 내던져졌다. 봉건적 가족제도와 가부장제에 기초해 가문과 친족의 번영을 일차적 목표로 삼던 전통적 가족주의는 가부장제의 존속을 전제로 한 여성의 모성을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 전쟁으로 가부장이 남성성을 잃거나 사망한 경우에도 가부장제의 파수꾼은 다름 아닌 여성이었다. 핵가족하에서 남편을 잃은 과부들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가부장이 있는 여성들은 육아와 교육에 완전히 몰입해 가족의 부상을 추구하는 것을 최대임무로 삼았다. 새로운 가족주의는 집안을 일으키는 수단으로서 교육을 중시해 과도한 교육열을 불러옴. 상호불신에 가득 차 믿을 것은 오직 돈뿐이던 도시의 삶에서 배금주의와 가족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렸고, 사람들은 더욱더 교육에 몰두. 계급상승과 유지의 도구로서 교육이 부상했기 때문에 국민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명문 일류학교 입학을 위해 과외가 성행.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위장전입이나 치맛바람 등의 신문기사는 은연중에 높은 교육열의 부작용을 여성들 탓으로 돌렸다. 전후 한국사회를 지탱한 힘은 여성들의 강한 생활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가정 바깥에서 하는 모든 활동은 항상 사회문제로 비화됨. 전쟁은 여성에게 삶의 무게와 사회적 비난이라는 이중의 고통을 안겨준 것이다.
- 1950년대는 여성이 삶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다양한 지위를 갖게 된 시가. 당시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아프레걸'이다. 이 용어는 전후파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아프레게르에서 온 말로 전통적 여성상에서 벗어난 전후이 새로운 여성이라는 의미. 이 말은 주로 미국문화를 모방하며 방종하는 여성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 하지만 가부장적 지식인들이 어떤 의미로 불렀든 아프레걸이 전통적 여인상과는 다른 새롭고 현대적 여성상을 보여준 것만은 분명했다. 전후에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여성들은 여대생, 취업여성, 양공주, 유한마담 등이었다. 이중에서 지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여대생은 대단히 매혹적인 존재였다. 50년대 교육의 양적 증대로 인해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여성의 숫자는 늘었지만 여성의 대학진학이 아직 보편화되지 못한 사정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했다.
- 전쟁후 사금융 시장 전체를 장악할 정도로 성행했던 계는 54년 7000여개에 이르렀는데, 이해 후반부터 정부의 통화 억제정책으로 자금융통이 원활하지 않게 되면서 위기를 맞음. 55년 1월 광주를 시작으로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도시에서 조직된 계의 대부분이 연쇄적으로 파탄났고 계로 인한 자살 사건도 급증. 계의 파탄에는 통화정책에 실패한 국가의 책임이 컸음에도, 오히려 실질적인 피해자의 계원들, 즉 부녀자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사업이나 계 등 여성들의 경제활동은 치맛바람, 배금주의 등의 용어와 결합해 경제자립을 위한 여성들의 활동 자체를 부정적으로 담론화하는 빌미로 작용. 그러나 50년대의 여성들은 이러한 경제활동을 통해 고정된 성역할에서 벗어나 가족의 부양을 책임지고 미래를 위해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첫번째 세대였다. 보수적인 남성지식인들은 여성의식과 세대, 풍속의 변화를 미국문화 탓으로 돌리기도 했는데, 이는 어떤 측면에선 일부 타당한 것이었다.
- 50년대 한국여성들에게 강한 출산억제 욕구를 불러 일으킨 것은 한국사회의 절대 빈곤이었다. 식구들의 입을줄이는 것이 절박했떤 당시 여성들에게 임신과 출산은 결코 축복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불법 낙태 수술이 만연해 생활고와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통받는 미혼여성, 미망인, 기혼여성 등이 정식으로 허가받은 병원인지도 알 수 없는 초라한 산부인과를 드나들었따. 당시 전체 가임여성의 35%가 인공유산 시술을 한번 이상 받은 경험이 있었으며, 수술도중 사망하는 일도 허다했다. 서구화와 자유화에 노출된 도시 못지 않게 가부장적 속박에 갇힌 농촌에서도 남몰래 낙태하려는 여성들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58년 대한어머니회가 대한여자의사회와 함께 추진한 출산조절 운동은 여성이 자신의 몸과 모성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자주적으로 출산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을 보급했다는 점에서 60년대 이후 국가정책에 귀속된 가족계획보다 더 진보적 여성운동이었음. 한편 초기 이승만 정권은 산아제한 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던 출산 조절운동을 반대. 통일후 총선에 대비하려면 인구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 따라서 이 시기에는 출산조절에 반대하고 자녀, 특히 아들을 많이 낳아 군대에 보내는 어머니가 훌륭한 어머니로 표창됨. 동시에 출산조절은 혼외 성관계를 의미하는 타락한 성윤리의 표출로 인식됨
- 전쟁은 인간과 사회의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거대한 비극. 그러나 전쟁은 역설적이게도 역사 변동의 원동력이자 전환점이 되기도 함. 탈식민과 국가건설 과정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은 사회를 급속히 재편해야 할 필요성을 부각시킴. 특히 전쟁으로 신분제와 대가족주의가 붕괴된 것은 여성의 지위향상에 결정적 계기가 됨. 그러나 남녀 평등과 여성해방의 이상은 멀고도 험난한 미래를 예고했다. 여성은 남성을 비롯한 사회전반을 변화시키는 것은 물론, 스스로도 변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50년대 한국 여성의 자화상에는 새로운 가족주의로 무장한 가부장제의 복원이라는 책무를 떠안은 여성과 자기욕망에 충실한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이라는 두가지 얼굴이 모두 들어 있었다. 양자 사이의 모순과 투쟁이야말로 이런 과제를 현실속에서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 피난민의 생계수단은 주로 상업활동. 서울 해방촌 인근에는 남대문시장이, 부산 용두산, 영주동, 보수천 인근에는 국제시장과 자갈치시장이 있었다. 피난민들은 노점상이나 행상 형태의 장사로 하루살이를 했음. 돈을 벌어 점포를 두고 안정적으로 장사하는 경우도 생겨남. 피난민들은 생필품, 귀금속류, 미군용품, 원조물자, 사제연초, 밀수품 등 다양한 물건들을 내다 팔았따. 자본없이 가진 물건으로만 장사를 했기 때문에 각양각색의 생필품이 거래되었다. 몸에 지니고 있던 귀금속류를 내다 팔아 장사 밑천이나 먹을 거리를 마련하기도 함. 시장에는 미군용품과 구호물자도 넘쳐났다. 당시 부산에는 "양생이 몰러 나간다"는 말이 있었다. 미군부대 안으로 염소를 밀어넣고 염소 찾으러 간다는 핑계로 미군물품을 훔쳐 나오는 의미. 피난민 여성 일부는 가족생계를 위해 양공주가 되거나 특수카페여급으로 일했고, 아이들은 유엔군을 상대로 구두를 닦거나 미군 하우스보이가 되어 보수, 사례, 증여의 형태로 미군용품을 받음. 이런 것들이 몇단계를 거쳐 시장으로 흘러들어감. 수용소 피난민들도 분배받은 구호물자를 팔았고, 부정부패한 구호당국의 관료들도 빼돌린 구호물자를 시장에 내놓았다. 사제연초를 만들어 남대문 시장에 파는 것은 서울 해방촌 피난민들에게 특화된 생계수단이었다. 해방촌 피난민 대부분이 사제연초를 만들어 팔았는데, 이 때문에 해방촌이 제2전매청이라 불림. 밀수품은 가까운 일본의 상품을 들여와 팔 수 있는 부산 피난민들에게 특화된 것이었다. 국제시장은 밀수품의 박람회라고 불릴 정도로 밀수품으로 가득했고, 장사를 하는 피난민들도 상당수 이에 관여했다.
- 대학을 흔히 상아탑이라고 부름. 상아탑이란 말은 19세기 중엽 프랑스 문예평론가 생트뵈브가 예술지상주의 시인이었던 알프레드 드 비니의 은거생활을 가리켜 '그는 대낮도 되기 전에 상아탑 속으로 들어갔다'고 표현한 데서 비롯됨. 코끼리들은 죽을 때가 되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생을 마감. 시간이 흐르면 그곳에 코끼리의 상아만 남아 높은 탑을 이룬다고 한다. 즉 상아탑은 사회와 단절된 채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하는 예술지상주의를 표한하는 말. 이후 그 의미가 대학으로 확장되어 상아탑은 대학이 사회와 단절되어 오직 학문연구와 진리탐구에만 몰두하는 기관임을 상징하는 관용어로 자리잡음
- 50년대 교육 팽창과정에서 학부모들은 정부투자보다 더 큰 규모의 자금을 부담. 중등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 의무교육인 초등교육조차도 학부모의 부담은 교육재정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였따. 정부는 이를 수익자 부담의 원칙이라고 합리화. 즉 교육을 수익사업이라고 간주하고 교육에 소요되는 재정조달의 책임을 국가에서 학부모로 이관한 것이다. 이 원칙은 미군정깅 임시방편으로 채택외어 제한적으로 사용되다 50년대 이르러 국가재정의 결핍을 이유로 자연스런 관행이 됨
- 50년대 학생들은 주로 어떤 책을 읽었을까? 아이들의 경우 만화책을 읽는 것으로 독서를 대치하거나 탐정물 등에 탐닉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고등학생의 경우 문학작품을 많이 읽었는데,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김동리의 소설과 김소월의 시,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토마스 하디의 테스, 펄 벅의 대지 등이 주요 대상. 50년대 학생들은 잡지도 즐겨 읽음. 국민학교를 다니던 어린 학생들은 새번, 소년세계를 주로 읽었고,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여원, 대학생들은 사상계, 여원을 많이 읽음. 그중 학원은 당시 일간신문에 맞먹는 매월 10만부에 가까운 발행부수를 기록하면서, 동시대 어떤 잡지와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영향력을 발휘. 잡지의 뛰어난 기획력과 더불어, 전쟁의 여파로 따라 읽을 거리가 없었다는 점, 해방 후 한글세대의 급증이 학원의 성장요인이었다. 당시 학원은 서구적 지식을 중요한 교양으로 인식. 이 잡지가 한국전쟁중 발간되어 다양한 자료를 구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서구지향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따. 이는 반공주의와 함께 친미가 정책적으로 조장되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도 관계가 있따. 어쨌거나 학원이 선택한 서구적 교양은 당시 젊은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 50년대 중고등학교 맹휴같은 학생들의 저항사례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집단적 힘의 결집과 분출이 당시 학생들에게 익숙한 경험이었다는 사실. 50년대에는 정치적 문제와 관련해 정부에 의한 학생동원, 즉 관제데모가 자주 일어났다. 관제데모를 할 경우 학교측이 학생들의 출석을 부르고 만약 불참할 경우 결석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시위에 참여했다. 그만큼 당시 학생들에게 시위의 경험은 익숙한 것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익숙한 시위경험을 바탕으로 상황에 따라 맹휴도 벌일 수 있었따. 4.19혁명은 이승만 정권이 오랫동안 정권차원에서 활용해온 시위라는 수단에 의해 성취됨. 여기에 이승만 정권의 학생통제와 동원이 갖는 또 하나의 역설이 존재함. 한마디로 4.19 혁명 당시 학생들의 데모는 이승만정권하에서 관제데모에 자꾸 동원되고 거기서 체득한 집단적 데모방법, 즉 학교에서 대열을 지어나가서 동일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그러고는 다시 열을 지어 각기 학교로 돌아가서 해산하는 방식을 학생들이 그대로 살린 것이다. 실제로 4.19 혁명 당시 대부분의 고등학생 시위는 그동안 관제데모를 이끌었던 학도호국단 간부들의 주도하에 진행됨. 당시 대학생보다 고등학생이 시위에 앞장선 것도 이런 관제데모의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
- 미국은 해방후 한국의 사회제도뿐만 아니라 가치와 정서에도 전방위적으로 개입해 한국의 국가정체성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일본이, 조선이 근대화를 의탁해야 하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나라로 행세하며 조선을 손아귀에 넣은 것처럼, 미국은 한국이 근대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 위해 의지하고 따라야 할 유일한 문명 지도국이라는 신념을 주입함으로써 한국을 미국주도의 세계질서에 체계적, 심성적으로 공고히 편입시키고자 했다. 냉전체제하에서 한국은 스스로 자유세계 반공전선의 맹주로 불리기를 원했는데,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한국이 미국의 군사적 정치적, 동맹국일 뿐만 아니라 미국문명과 문화를 전파하고 구축해야 할 개척지 역할을 기대이상으로 자임했음을 의미. 미국은 38선 이남지역이 앞으로 계속 미국을 지지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없었으며, 단독정부 수립 이후에 이승만 정권이 보여준 전체주의적 통치방식은 미국이 원하는 민주주의 국가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지나친 독재는 반발을 불러 일으켜 대중과 사회주의의 친화성을 높이기 때문이었따. 따라서 미국은 미국식 제도와 가치관 및 생활방식의 우월성을 선전함으로써 미국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생활속에 뿌리내리는 방식으로 문화전파을 수행할 필요가 있었다.
- 50년대 밀수란 서민들의 생활과 그리 멀지 않았다. 50~60년대 영화들 중에는 밀수업을 하다 경찰에 붙잡히는 남성이나 밀수에 손을 댔다가 사기를 당해 패가망신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많았따. 일례로 50년대의 풍속도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영화 자유부인에서 주인공 오선영을 댄스홀로 이끈 장본인인 저명인사의 부인이나, 60년대 초반 서민생활의 애환을 그린 영화 돼지꿈에서 후생주택의 할부금을 갚으며 빠듯하게 살아가는 중학교 교사와 그의 아내는 모두 밀수에 손을 댔다가 사기를 당해 불행을 겪음. 당시 밀수는 서민들에게 쉽게 큰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의 하나로 받아들여졌으며, 원조물품이나 피엑스 물품 사이에 밀수품이 섞여서 거래되는 것은 보통의 시장풍경이었다.
-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에 미제의 세계에 눈을 뜬 서민들에게 미제물건을 쓴다는 것은 문화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의미. 현실은 피엑스에서 나온 쓰레기 음식으로 꿀꿀이죽을 먹는 가난한 서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들 역시 2층 양옥집에서 양장을 하고 양식을 먹으면서 전시회나 음악회를 즐기는 도시 중산층의 삶을 꿈꾸고 있었다. 도깨비 시장이나 국제시장에서 구한 미제물건을 소비함으로써 미국영화에 나오는 서구적 생활, 풍요럽고 문화적인 삶을 조금이라도 구현해보고자 했던 서민들에게 미국은 근대적, 문화적 삶의 지표로서 다가온 것이다. 여기에 여성잡지를 중심으로 미국영화와 스타들에 대한 시각정보가 제공되면서 서민대중들에게 미국은 현실과 무관하게 구성되는 상상의 산물이 되어갔다.
- 일제시기 신민요와 트로트가 대부분이었던 대중가요계에 미군정과 전쟁은 미국음악 범람이라는 엄청난 변수를 가져다 줌. 대중가요에서 영어가사와 참전국이 낯선 지명이 등장하고 군인들의 심정을 대변한 노래와 실향민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고향노래가 유행하는 등 전쟁기 한국의 대중가요계에 많은 변화가 찾아옴. 전후에도 대중가요계의 주류는 여전히 뽕짝이라는 트로트였지만, 탱고나 볼레로 등 서양의 댄스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이국적 분위기의 노래도 속속 등장. 신민요의 멜로디에서 서양춤곡이 결합되어 블루스, 부기우기, 탱고, 룸바, 맘보, 차차차 같은 춤 이름을 단 노래제목이 자주 등장하고, 제목에 홍콩, 페르시아, 인도같은 지명을 넣은 노래도 많이 나옴. 노래 제목에 가장 많이 쓰인 나라는 역시 미국인데 샌프란시스코, 아리조나 카우보이,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등의 노래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재미교포의 심정을 그리기도 했지만, 한국인이 미국을 그리워하는 정체불명의 감수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당시 한국인들에게 미국적인 것은 막연히 뭔가 멋진 것을 의미했고, 최신의 현대문명을 누리는 남부럽지 않은 삶과 동의어였다.
- 미국화는 미국의 심리전과 문화전파라는 상징적 차원만이 아니라 기지촌과 피엑스와 댄스홀이라는 물질화된 현실공간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다. 상징과 물질로 다가온 미국에 대한 서로 대립되는 감정, 곧 현대문명의 모델로서 미국이나 저질문화를 양산하는 미국이라는 상호모순된 느낌은 한국사회에서 아메리카가 얼마나 전방위적으로 지배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방증. 따라서 미국화란 미국을 실제로 모방하는 것과는 거의 무관하게, 어떤 식으로든 대중들의 마음속에 아메리카가 자리잡아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음. 이는 미군 주둔의 경험을 공유하는 한국, 일본, 타이완에서 공통된 것이었지만, 그러한 경험이 양태와 낙차에 따라 각기 다르게 전개된 문화적 변동의 장소적 맥락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 50년 전면전이 발발해 53년 휴전까지 개신교 신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와 폭력의 화신처럼 행동.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당시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48년 발발해 거의 3만명에 달하는 도민이 학살된 제주 4.3사건이나, 50년 황해도 신천에서 3만5천명 이상이 학살된 신천 대학살 사건에서도 가장 중요한 가해자는 폭력적 개신교도였음.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런 민간인 학살사건은 전국 도처에서 일어났고, 그 사건들에는 대개 개신교도가 관련되어 있었음. 사실이야 어떻든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빨갱이를 잡는다고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가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던 경찰과 검철도 개신교도와 유난히 친했다. 심지어 그중 적지 않은 이들이 개신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미군정의 통역관으로 일하던 많은 개신교도들이 일제강점기에 경찰과 공무원이었던 이들을 미군에게 소개해주었기 때문. 그들 덕에 일자를르 얻게 된 사람들 입장에서도 개신교도가 되는 것이 미군정에서 살아남는 데 유리. 이 시기 개신교의 성장은 친미와 결합된 반공주의적 호전성가 긴밀하게 연결됨. 한경직이 설립해 오랜 기간 담임했던 영락교회는 이시기 개신교의 성장을 이해나는 가장 적절한 표본이다. 45년 12월, 27명으로 시작한 이 교회는 이듬해 말, 불과 1년 만에 신도수가 1000명이 넘었고, 49년 말에는 6000명이 넘는 신도를 거느린 남한 최대의 메가처치가 됨. 영락교회의 성장에 호전적 신자들의 대내적 결속이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무엇보다도 월남한 개신교 신자들이 대거 이 교회로 모였다. 해방직후 남한의 개신교 신자수는 10만명 정도였던 반면, 북한의 개신교 신자는 20만명을 상회. 이중 35~40%, 즉 7~8만명 정도가 월남을 선택한 것으로 보임. 한국전쟁시기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많아짐. 여기서 북한의 개신교도의 87%가 서북지역(평안, 황해) 출신이고, 서북지역 개신교도의 86%가 장로교. 서북지역 장로교는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강성한 근본주의 신앙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니 서북지역 월남인 중 가장 중요한 장로교 지도자의 한 사람인 한경직의 교회에 월남인 개신교도들이 대거 몰려든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 한경직은 일제 강점기에 신의주에서 교회를 크게 성장시킨 전력이 있음. 또 해방직후 북한에서 반공주의 개신교 정당을 만들어 활동한 것이 반공투쟁의 전력으로 해석되어 주요 월남인 지도자로 부상. 무엇보다 그는 미국 유학파로서 미국 장로교가 가장 신뢰하는 한국교회 지도자였고, 미군정 또한 월남 직후 통역관으로 활동했던 그를 매우 신뢰. 미국 장로교회는 월남인 장로교도의 정착 지원금 명목으로 거액의 후원금을 그에게 줌. 또한 미군정은 적산을 주로 개신교도들에게 불하했는데, 이때 한경직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이런 이유로 월남 기독교인들이 대거 그의 교회에 몰려들고,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의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영락교회가 월남 개신교인들을 대거 받아들이면서 급속하게 성장한 것처럼, 다른 많은 월남인 교회들도 유사한 과정을 밟음. 월남인들은 기존 남한 교회에 유입되기보다는 새로 설립된 월남인 교회로 찾아가는 것이 더 유리했다. 그것은 월남인 교회에 편파적일 만큼 특혜가 집중되었기 때문. 이렇듯 이 시기 남한 개신교의 성장은 월남인 교회의 설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한국전쟁 직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극도의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을 때 국가는 이들에게 거의 아무 도움되 되지 못함. 보건의료체계나 복지체계는 꿈도 꿀 수 없었따.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재건은 너무나 지체되고 있었다. 더욱이 부패와 무능 탓에 전세계에서 보내온 적지 않은 후권물자도 적절히 배분되지 못함. 그런 점에서 대중이 기댈 곳, 아니 기대고 싶은 곳 1순위가 교회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잘사는 서양의 종교라는 이미지도 있었고, 실제 인적, 물적 자원도 상대적으로 많았으며, 제도적 자원도 비교적 탄탄했다. 그 덕에 많은 이들이 개신교 신자가 됨. 45년부터 60년 사이 신자수가 10만에서 100만으로 10배 증가
- 그러나 목자없는 양을 향한 복음 전파의 소명을 이야기한 개신교 최고 지도자 한경직의 설교에도 불구하고, 한경직 자신처럼 그리스도 교회 역시 굶주리고 아픈 대중을 조건없는 사랑으로 포용하는데 매우 인색. 많은 개신굗들이 이분법적 사고에 깊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 그들은 개신교도들이 이분법적 사고에 깊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 그들은 교회 밖에 무수한 적그리스도가 들끓고 있다고 믿었다. 공산주의자, 이단, 자유주의자들이 그런 적그리스도들이고, 문화, 관습. 이념등은 적그리스도가 준동하는 무대였으며, 이 무대들을 통해 적그리스도에 의해 속속들이 오염된 세상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려면 전향이라 할 만큼 중대한 결단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 교회의 규범과 관습에 규율된 자만이 축복의 수혜자가 될 만하다는 폐쇄적 신앙이 개신교도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개신교도들의 이런 배타주의는 일상에서 그들을 가족과 불화하게 하고 동료와 대립하게 하며 민족을 분열시킴. 그리하여 더 많은 이들이 교회 안으로 유입되려면 진입의 문턱을 훨씬 더 낮춰야 했따. 그것이 실현된 것은 60~90년 사이에 불처럼 일어난 순복음 현상에 의해서다
- 북한이 한국전쟁에서 갖게 된 트라우마는 상시적 포위심리. 인민들은 공중폭격을 피하기 위해 지하동굴에서 살았으며, 미 공군기는 어떤 것이든 원자폭탄을 운반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졌다. 이때의 충격으로 북한 인민들은 전쟁공포와 미국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갖게 됨. 이런 무차별 폭격으로 인민들이 대량살상 되었던 까닭에 그들은 미국이라면 치를 떨며 증오했고, 미국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은 핵무기와 전쟁공포증으로 남았다. 북한 정부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해방이후 정권을 수립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국가의 처지에서는 나라 자체가 없어질 뻔한 충격이었다. 전쟁의 승패는 곧 개인의 안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추구한 정치공동체의 존폐와 직결되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전쟁은 북한 정치지도부의 사활이 걸린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인민들 자신의 전쟁이기도 했다
- 50년대 전쟁과 농업협동화를 겪으면서 북한이 농민과 농촌은 체질이 크게 바뀜. 토지개혁 이후에도 농촌에 남아 있던 유력가문의 연장자나 부농, 그리고 남성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권위하 해체되었으며, 이를 대신해서 빈농, 제대군인, 애국열사 유가족, 인민군 후방가족, 혁명투쟁 경력자, 열성 농민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혁명적 농촌 핵심진지가 등장. 이들은 조합의 간부직을 맡는 등 조합운영의 중심이 되었다. 농촌 체제 자체가 전시동원적 성격이 강한데다가 전후 농촌의 주역들이 전쟁과의 연관성 속에서 형성됨으로써 북한 농촌은 강고하게 준전시체제적 성격을 지니게 됨. 농업협동화는 농민을 농업노동자로 전환시킴. 가족단위로 작업하던 소농경리의 관습은 더이상 존속할 수 없었따. 전생산과정이 체계화, 합리화되고 노동규율이 개개인에게 직접적으로 부과됨. 또한 농업협동화는 농민의 관습과 사회의식에도 거대한 변화를 일으킴. 전통적 관습중 상당부분으 구시대의 잔재로 취급됨. 풍수지리에 의거한 주택관념이 비판받았고, 민간신앙은 미신으로 간주되어 타파되었따. 사회의식의 근대화가 진행된 것. 그리고 그 근대적 자각은 개인적 자각이 아니라 당과 국가를 따르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집단적 주체로서의 자각, 즉 인민으로서의 자각이었다. 그러나 농업협동화가 일으킨 변화가 장기간 지속된 농촌의 전통적 풍습 전체를 완전히 해체한 것은 아니었따. 부모나 시부모를 존중하는 풍습은 미풍양속으로 장려됨. 소겨리, 품앗이 등 공동노동의 전통은 농업협동조합의 최소단위인 분조의 바탕이 됨. 마을은 리 단위 조합에 맞추어 급속히 통합, 개조되었으나 상당수 지역, 특히 산간지대에서는 한 마을이 하나의 작업반이 되는 등 전통적 삶의 공간이 내면적으로 지속됨. 작업반장이 주도해 장례를 치르는 등 새로운 풍속 또한 마을단위 공동체 문화의 연장이었다. 친족적 결합은 약화되었으나 농촌이 점차 안정화되고 농민의 도시이동이 억제되면서 마을단위의 내적 연계망은 60년대 이후 다시 강화됨. 하지만 분명한 것은 50년대 북합의 농업협동화가 농민을 전통적 생활과 전혀 다른 사회주의적 생활로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전통은 완전히 해체되는 대신 사회주의 양식에 흡수되어 새롭게 재구성되었다는 점이다. 북한내 전통의 계승과 단절문제는 50년대 이후의 사정까지 고려해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온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임.
- 50년대 북한정부는 여러 목적을 가지고 약 2만4천명의 고아, 5천명의 유학생, 7837명의 노동자를 사회주의 형제국가로 보냄. 동시에 사회주의 형제국가에서 3675명의 자문가, 전문가, 기술자들이 북한에 들어옴. 사람과 함께 엄청난 양의 자금과 물품도 오고갔다. 모두 넓게는 사회주의 진영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들이었고, 좁게는 북한의 전후 복구를 위한 연대활동이었따. 북한정부는 이 예외적 기회를 자기 이해를 위해 적극 이용. 냉전 초기 사회주의 진영은 북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체계적 지구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체 사회주의 진영을 아우르는 지구화 전략은 오래가지 못하고, 62년 사회주의 내부의 분열에 의해 종말을 맞게 됨. 북한의 경우 주체성을 부각시키면서 폐쇄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 그것이 외부와의 완전한 단덜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밀이다. 북한은 60년대 이후에도 동구와 관계를 유지하고 70년대에는 무역관계를 강화. 하지만 50년대의 집중도에는 다시 도달하지 못했다. 흔히들 그 원인을 외부적으로는 중소갈등, 탈스탈린화, 자본주의 진영과의 평화적 공존에 대한 입장 차이 등에서, 내부적으로는 56년 김일성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 숙청, 개인숭배와 주체사상의 등장 등에서 찾는다.
- 북한이 50년대에 이룬 성장을 기반으로 원조라는 종속적 형태 대신 상호대등한 차원의 교류를 추구했다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 어쩌면 10년 동안 겪은 사회주의 지구화의 경험이 이런 북한의 선택을 뒷받침한 것은 아니었을까? 고아와 유학생의 사례에서 발견되는 동구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에서의 생활은 북한정부에 크나큰 도전으로 다가왔다. 학생들은 퇴폐적이고 타락적인 생활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일탈했던 것이다. 북한 당국은 이들을 모두 소환해 재교육시키고, 학생들을 더이상 이런 환경에 노출시킬 수 없다는 결론을 냈다. 주민들은 북한에 온 동독 기술자들의 가부장적이고, 독단적이며, 북한인을 무시하는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은 사회주의 형제관계에서 동구사람이 형, 북한사람이 아우로 설정되는 것을 거부. 일상생활에서의 이런 경험은 정치라는 큰 영역에서도 유사하게 반영됨. 연대활동과 원도로 나타나는 사회주의 가부장성은 북한이 사상, 정치, 경제협력 면에서 다른 사회주의 강대국과 거리를 두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50년대 사회주의 진영에서 지구화는 사회주의 코스모콜리탄을 형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북한은 왜 여기에 실패했을까? 북한정부는 약자이면서도 당당한 면이 있었다. 형제국가에 의존적이면서도 상대의 희생을 요구하는 뻔뻔함이 있었다. 이런 태도에는 겸손과 오만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기술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그 희생을 버거워하기 시작하면 이 관계는 상대에게 부담으로 작용. 부담은 접촉지대에서의 연대를 권력관계로 바꾸고, 쌍방의 관계에 내재했던 비균등성이 표면으로 나타나게 한다. 이는 종속성의 위험을 암시하기도 했다. 한편 북한정부는 선진과 후진의 잣대를 인식하고 이것이 같은 이념을 추구하는 나라 사이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문화적 차이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북한정부가 학생들의 개인적 욕망을 존중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문화가 접촉에서 발생하는 예측불가능한 공간형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던 것도 문제였다. 게다가 따라잡기식 근대화 추구는 일탈과 오류를 용납할 여유를 갖지 못하게 했다. 다른 문화를 받아들인 북한 고아와 유학생들이 집단적 의심을 받게 되었떤 것도 바로 그 이유. 발전에 대한 환상와 정치이념, 타 문화와의 관계 사이에 발생한 긴장과 갈증을 겪으면서 유연성보다는 경직성으로 지구화에 대응했던 북정부는 오늘날까지도 50년대 지구화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일본경제의 부활을 오로지 한국전쟁이 가져온 요행으로 보는 것은 편협한 시각. 한 추계에 따르면 51년 일본 경제성장률은 12%였는데, 조선특수가 없었다면 4.9~9.4%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함. 조선특수의 영향력이 남날랐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조선특수가 없을 때의 성장률도 결코 낮지 않다.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도 일본경제는 49년의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을 기점으로 점차 회복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전후 일본경제를 평가함에 있어서 전전 일본사회의 높은 성취와 발전 잠재력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줄곧 세계 10위 안에 드는 상당한 경제규모를 갖고 있었다. 인구 또한 세계 10위의 대국으로 내수시장 역시 컸다. 축적된 과학과 문화의 수준도 높았다. 그렇기에 일본은 전후 폐허 속에서도 각 분야에서 높은 경쟁력을 과시했다.
-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의 대가는 컸다. 중국은 최대 130만명이나 되는 파견군을 유지해야 했으며, 3년동안 36만명의 사상자를 냈고, 국가예산의 절반을 전쟁수행비용에 퍼부어야 했다. 게다가 유화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었던 서방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따. 유엔은 51년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를 채택하고 대중국 금수결의를 통과시킴. 52년 미국은 대중국수출통제위원회를 설치해 전시에 군사용으로 쓸 수 있는 품목의 중국수출을 일절 금지. 이로써 중국은 소렴 및 동구권과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외교적으로 철저히 고립되었따. 유엔에 가입하고 해외에서 타이완의 국민당 대신 중국을 대표하는 정권으로 인정받는 것 역시 난망했다. 한편 내전에서의 부정부패로 국민당에 대한 지지를 거둬들였떤 미국은 한국전쟁 발발직후 앞으로 타이완해협에서 일어나는 사태에 적극 개입하겠다고 천명했고 이내 타이완에 대한 적극적 군사 및 경제원조를 시작했다. 미국과 타이완의 관계가 밀착되면서, 중국공산당이 무력으로 타이완을 굴복시키고 통일하는 일은 불가능해짐. 한국전쟁의 휴전후 54년 9월 중국공산당이 시도한 진먼섬 포격은 무위로 돌아감. 54년 11월 미국은 타이완과 공동방위조약을 체결하고, 55년 1월 미 의회는 타이완결의를 채택해 타이완 방위를 천명했다. 사실상 중국은 무력통일 방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생산과 유통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고 사회주의화가 앞당겨짐. 전쟁수행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또 다른 이유는 역설적으로 토지혁명에 있었다. 건국이후 4년간 도시는 2000만명이나 늘어나 1억명에 육박하게 되는데, 이들 도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생계를 위해서는 안정적 식량공급이 필수적이었음. 그런데 토지혁명으로 제 땅을 얻은 농민들은 자가소비분을 늘려 기아에서 벗어나고자 했을 뿐 도시 수요나 전시수요를 위한 식량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중국의 신정권은 전선과 도시에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공업생산을 유지해야 했다. 결국 신정권은 농민들에게서 작물처분권을 회수해 국가가 식량을 모두 수매한 뒤 통제, 배분하는 강제공출제로 나아가게 된다. 한국전쟁을 기화로 사회주의화를 추진하기 시작한 중국공산당은 54년 2월 최종적으로 과도기의 총노선을 채택함으로써 사회주의 강행방침을 확실히 함. 사회주의 조기 강행의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압도적 물량과 현대식 무기를 경험하면서 큰 위기감을 느낀 중국공산당은 군수공업 중심의 급속한 공업화가 무엇보다 절실한 과제라고 인식. 중국업을 중심으로 급속한 공업화를 이뤄내야 현대적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고, 정권의 존립도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또 전시체제 분위기 속에 강행된 삼반오반운동으로 민간기업의 저항이 무력화되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이 집단화를 추진해도 반발할 세력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토지혁명의 부작용으로 토지가 개별 호로 지나치게 쪼개진 결과 농업경영이 과도하게 영세화되어 생산이 저조해지고 비효율이 발생. 결국 중국공산당은 농업생산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소련 모델을 따라 집단화를 추진해 경영규모를 확대하는 전략을 채택. 54년 9월 채택된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은 49년과 달리 중화인민공화국 성립부터 사회주의 사회를 구축하기까지는 하나의 과도가라고 해, 사회주의를 명확한 목표로 천명했다.
-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조건으로 소련에게서 군사현대화를 위한 지원을 약속받음. 57년 8월 소련의 대륙간탄도탄 발사실험이 성공하고, 10월에는 세계 최초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가 성공하면서, 중국은 사회주의 모델이 자본주의 모델보다 우수함이 증명됐다고 흥분. 그해 10월 중국은 소련과 국방신기술에 관한 협정을 맺고 원포생산기술 이전을 약속받음. 그러나 59년 6월 소련은 일방적으로 이 협정을 파기하고 중소관계는 냉각됨. 소련의 일방적 협정 파기에는 세계전략을 둘러싼 양자의 입장 차이와 사회주의 진영의 주도권을 둘러싼 두 국가의 경쟁이 복합적인 원인으로 작용. 흐루쇼프는 미국과의 평화공존을 우선시해 냉전격화르 인한 군사적 낭비를 줄이고자 했다. 그러나 중국은 민족해방투쟁을 중시해 미국과의 공존은 불가하다는 주장을 반복. 중국은 58년 진먼섬 포격을 재차 시도해 섬을 40일간 봉쇄하고 포격을 퍼부음. 미국은 전투애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타이완측에 군수물자를 제공. 중국 역시 원거리에서 포격만 하고 섬에 상륙하지는 않음. 중국 입장에서는 타이완 수복이 민족해방투쟁임을 천명하고 그에 대한 의니를 드러낸 것이었으나 소련 입장에서는 중국에 제공하는 군사기술이 결국 미국과의 긴장을 격화시키고 소련의 평화공존 노선을 파괴할 것이라는 의혹을 확인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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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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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 현대사

역사 2017. 5. 20. 07:53

- 국가의 진화는 욕망의 위계를 반영한다. 문명발생 이후 호모사피엔스가 생물학적 진화를 이루었다는 증거는 없다. 만년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동일한 위계를 가진 동일한 욕망을 품고 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생리적 욕망부터 충족한 다음 더 고차원적인 욕망을 충족하려고 한다. 인간 공동체인 국가도 생리적 욕망의 충족을 도모하는 데서 출발해 안전, 자유, 존엄이라는 차원높은 욕망충족을 향해 나아간다.
- 우리는 일제침략기에 국채보상운동을 벌였고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 운동을 한 민족이다. 공동의 사회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원을 동원하고 의지를 묶어내는 집단적 능력은 경제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회적 자원이다. 이렇게 보면 대한민국의 변화는 기적이 아니다. 일어날 법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일 뿐이다.
- 사고하는 역사가는 엄밀하게 말하면 과거의 문제를 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긴급하게 해결을 요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의 역사성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책임감 있게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역사를 회피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야만 하는 긴장관계를 견뎌내야만 한다. (한스 위르겐 괴르츠,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 혁명인지 쿠데타인지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쿠데타는 혁명과 달리 민중의 동의와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 군대를 동원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군사쿠데타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학술적 개념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516을 굳이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심정인 이해할 수 있다. 경제발전을 이루었으나 결과적으로 516은 잘된 일이고, 잘된 일에는 군사정변이나 쿠데타보다 혁명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느냐는 것.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운영을 잘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해도 516이 군사쿠데타였다는 사실을 달라지지 않는다
- 장기적으로 보면 경제적 변화와 민주주의는 어디에서나 함께 진전되었다. 무엇이 이런 선순환 관계를 만드는 것일까? 원하는 삶을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욕망이다. 그렇게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자유가 있어야 한다. 자유를 누리려면 물질의 결핍이 주는 억압을 극복해야 하고, 부당한 제도와 낡은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 박정희 의장과 이병철 회장의 만남은 국가와 재벌의 발전을 위한 동맹의 계기가 됨. 516 직후 체포되었다 풀려난 기업인들이 만든 단체가 바로 전국경제사범연합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전경련이다. 그후 재벌총수들은 대부분 한번 이상 불법 비자금 조성, 회자자금 횡령, 불법 정치자금과 뇌물제공, 분식회계, 탈세 등의 범죄를 저질러 재판에 회부되었다. 아예 기소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지만 범죄 혐의가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난 경우에도 기껏해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그나마 시간이 조금 지나면 대통령은 국민경제 활성화와 기업인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그들을 사면해 주었다. 기업의 탈세와 불법은 불합리한 제도 때문이며, 기업인을 처벌하면 경제가 위축되어 경제가 침체한다는 이병철 회장의 견해는 대통령과 판검사, 언론이 모두 추종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 무역정책과 산업정책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19세기 독일의 경제학자 리스트의 충실한 제자였다고 할 수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풍미했던 19세기 중반, 리스트는 자신이 독일인이기 때문에 자유무역론을 거부한다고 말했다. 그는 산업기반이 약한 독일이 자유무역을 하면 경제적으로 영국의 패권아래 편입되어 별 볼일 없는 산업을 가진 2등국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래서 먼저 높은 무역장벽을 치고 자국의 산업을 육성한다음, 충분한 실력을 갖추었을 때 국내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 리스트는 독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공산품에 높은 관세를 매겨야 한다고 제안했으며, 그런 목적으로 부과하는 관세에 보육관세라는 이름을 붙임. 대한민국의 무역정책은 뒤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나라에는 보호무역주의자 리스트의 전략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 환율은 세가지 요인으로 인해 변화. 첫째 장기적으로 환율은 물가인상률에 좌우됨. 물가인상률이 높으면 그 나라 화폐는 값이 떨어짐. 80~90년대 한국 물가 인상률은 미국, 유럽, 일본보다 높았다. 장기적으로 달러환율은 오르는게 정상. 둘째, 단기적으로 환율은 경상수지에 좌우됨. 지속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보는 나라의 화폐는 가치가 떨어짐. 그렇게 해서 수입가격은 오르고 수출가격이 떨어져야 경상수지 적자가 해소됨. 9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는 지속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그런데도 97년 여름가지 몇년간 달러 환율이 점진적으로 하락했다. 우리돈의 가치가 계속 오른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환율변동의 초단기 요인인 자본수지가 흑자였기 때문.
- 여론조사 회사들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소득수준이 낮은 유권자일수록 보수정당 후보를 더 높은 비율로 지지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서민의 경제생활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보수정권이 진보정권보다 경제성장을 더 잘 이루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경제성장률이 높아진다고 해서 저소득층의 소득이 향상되는 것도 아니다.
-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우선 부자감세다. 이 대통령은 법인세와 소득세율을 인하함으로써 재임 중 누적효과가 100조 원에 육박하는 감세를 했고 혜택은 대부분 대기업 주식 소유자와 고소득층의 몫이었다. 자영업자와 임금근로자 절반이 소득세 면세점보다 낮은 소득을 얻기 때문에 직접세 감세는 중간소득 이하 계층의 국민들에게는 단 한푼의 혜택도 주지 않음. 대기업의 투자와 부유층의 소비를 유도한다는 목적을 내세웠지만 감세의 투자촉진 효과는 별로 없었다. 둘째, 부동산 거래 규제완화로 단기적 경기부양을 하는 것. 그런데 부동산 가격은 오히려 하락. 부동산 투기시대의 거품이 덜 걷힌 상황에서는 규제완화로 부동산 경기를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셋째는 4대각 사업. 초대형 토목공사를 벌려 경기를 부양하려 했지만 환경을 파괴하고 국가의 돈을 건설회사 금고를 이전시켰을 뿐 고용증대와 경기진작 효과는 거의 없었다. 넷째는 수출을 증진하기 위해 환율을 인위적으로 올린 것. 환율 폭등으로 달러표시 1인당 국민소득 하락을 가져옴. 양극화의 원인이었던 경제력 집중과 오남용,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확산, 낙수효과 감소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 장기적으로 보면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는 어디에서는 함께 진전되었다. 무엇이 이런 선순환 관계를 만드는 것일까? 원하는 삶을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욕망이다. 그렇게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유가 있어야 한다. 자유를 누리려면 물질의 결핍이 주는 억압을 극복해야 하고, 부당한 제도와 낡은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 할 수 있다. 그의 생물학적 생명을 빼앗은 것은 총탄이었지만 정치적 생명을 앗아간 것은 그 자신이 이룬 성공이었다. 그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대중의 욕망을 무제한 분출시키고 그 탁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 그런데 산업화의 성공으로 절대빈곤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대중은 다른 욕망에 끌리기 시작했다. 자유, 정의, 민주주의, 인간적 존업성을 원했다. 박 대통령이 그 욕망을 존중하지 않자 많은 국민이 마음으로 그를 버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 그와 같은 민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 광주민중항쟁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가능성과 당시 민주화 운동의 현주소를 명료하게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전제정치를 타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속적, 동시타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라는 것, 그리고 아직 대한민국은 그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참혹한 패배로 막을 내린 광주민중항쟁은 많은 국민의 가슴에 깊은 죄책감을 남겼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 시민들이 계엄군의 폭력에 굴복했기 때문. 그로부터 7년이 지난 87년 6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어느 지역도 고립되지 않는 전국적 도시봉기를 정밀하게 기획하고 준비. 광주시민들만 홀로 고립의 아픔을 겪게 만든 80년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6월 민주항쟁은 사실상 광주민중항쟁의 전국적 확대판이었다.
- 민주주의는 제도와 행태, 의식의 복합물이다. 물론 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장기적으로 보면 모든 제도가 의식과 행태의 산물이지만, 단기적으로는 특정한 제도가 그에 맞는 의식과 행태를 북돋우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87년 가을 여야 정당들이 합의하고 국민이 승인한 제도의 틀 안에서 작동해 왔다. 그 제도의 틀을 87년 체제라고 핮. 87년 체제는 민주화 이전부터 존재했던 낡은 의식과 문화와 결합해 우리 민주주의의 성숙을 더디게 했다. 87년 체제는 특정한 제도와 의삭과 행태의 결합이다. 여기서 제도의 핵심은 대통령중심제와 5년 단임규정, 결선투표 없는 선거법, 국회의원 소선구제다. 이 제도는 지역주의라는 낡은 의식, 동원정치라는 후진적 문화와 결합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한국적 특성을 만들어냄. 87년 체제는 현행 헌법과 선거제로를 만든 정치지도자 1노3김의 동상이몽과 이해타산이 만든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 5년만 하고 나가는 데 합의. 대통령 단임규정은 25년의 군사독재로 말미암은 정치적 인사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 인간이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 유익하듯이, 삶의 실험도 다양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각자의 개성을 다양하게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 각자의 고유한 개성이 아니라 전통이나 관습에 따라 행동하게 되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든느 중요한 요소가운데 하나이자 개인과 사회발전의 불가결한 요소인 개별성을 잃게 된다. (자유론)
- 역사에 대한 지식은 어떤 유형의 정부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으며, 또한 어떤 유형의 정부가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가에 대해서도 실마리를 제공한다. 사실 성공적 정부의 세가지 주요 적은 이데올로기, 도덕성, 공포이다.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정부는 실패하기 쉬운데,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경험을 받아들이는데 필수적인 개방성을 낳지 않고 오히려 폐쇄적 사고체계를 낳는다. (보넌 보그다너, '역사, 시민이 묻고 역사가가 답하고 저널리스트가 논하다')
- 규제는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 사회의 질서를 표현. 환경규제, 재벌규제, 교통규제, 노동시장 규제는 무절제한 욕망의 표출을 방지하고 관리하는 수단이다. 특히 안전규제는 각종 사고를 예방해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만든 것이다. 선박운항과 관련한 안전규제를 분별없이 완화한 책임은 근본적으로 대통령이나 공무원, 기업인에게 있지만 오로지 그들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규제를 악인것 처럼 선동하는 일부 언론과 지식인, 규제완화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루겠다고 약속하는 정당과 정치인들을 믿은 국민들에게도 책임의 일단이 있다. 이렇게 보면 세월호는 진도 앞바다가 아니라 욕망의 바다에 침몰했다고 할 수 있다. 단원고 아이들과 승객의 모습을 앗아간 것은 사람보다 돈을 먼저 섬기는 물신숭배의삭과 부패문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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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롭게도 위도가 국부에 미치는 영향은 위도상에서 남북으로 상당히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개별국가에서도 나타남. 예컨대 미국의 북동부, 즉 온대지역에 있는 뉴욕주와 오하이오주는 열대지역에 가까운 남동부에 위치한 미시시피주와  앨라바마주보다 훨씬 부유함. 미국 북동부와 남동부, 두 지역의 빈부차이는 지금보다 과거에 훨씬 더 컸음. 이와 마찬가비로 브라질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은 적도에서 한참 떨어진 온대지역, 즉 브라질 남부에 위치한 리우데자네이루와 상푸울루 같은 풍요로운 도시의 주변임. 한편 브라질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은 적도부근, 북부의 열대지역임. 다시 말하면, 위도가 부에 미치는 영향은 국가들 사이에서도 뚜렷이 나타나지만 남북으로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개별국가에서도 분명히 나타남. 따라서 제도만이 아니라 지리적 조건을 근거로 북이탈리아가 남이탈리아보다 부유한 이유가 설명됨. 온대국가에 비해 열대국가가 가난한 데는 두가지 주된 이유가 있음. 하나는 낮은 농업생산성이고, 다른 하나는 열악한 공중보건.
- 애초의 기대와 달리 열대지역의 농업생산성이 낮은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음. 첫째로는 토양의 비옥도가 낮고 박토이기 때문. 이탈리아와 미국 등 온대지역의 농지는 심토이고 비옥한 편. 빙하가 미국과 이탈리아의 넓은 지역을 반복해 오르내린 덕분. 정확히 말하면, 수백만년 동안 지속된 빙하기에 빙하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남에서 북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적어도 22회 반복한 덕분. 빙하가 내려갔다가 되돌아갈 때마다 바위를 문질러 부서뜨리며 새로운 흙을 만들었고, 그때마다 새로운 영양분도 흙에 더해졌음. 반면에 무더운 열대지역은 얼음으로 뒤덮인 적이 없어, 영양분이 풍부한 새로운 흙으로 재생되는 기회를 얻지 못했음. 열대의 토양이 지닌 두번째 문제는 무엇일까? 이탈리아와 미국의 온대림에서 산택하면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와 낙엽이 자준 눈에 띰. 달리 말해 땅에 떨어져 천천히 썩어가며 토양에 오랫동안 영양분을 방출하는 유기물이 많다는 의미. 그러나 열대지역에서는 땅에 떨어진 낙엽, 나뭇가지, 유기물이 열대의 높은 기온때문에, 또 미생물과 작은 동물들에 의해 신속하게 분해됨. 게다가 열대의 잦은 비 때문에도 영양분이 토양에 스며들지 못하고 강으로, 다시 바다로 씻겨 내려감. 이같은 두가지 이유로 열대지역의 토양은 박토이고 비옥도가 낮음. 열대지역의 농업생산성이 낮은 또 하나의 이유는 온대지역보다 열대지역에 동식물의 종이 많다는 것. 구체적으로, 브라질에는 미국의 조류관찰자를 즐겁게 해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조류도 많지만, 곡물을 감염시켜 병들게 하여 결국에는 생산량을 크게 떨으드리는 병원균과 벌레와 곰팡이의 종류도 무궁무진하게 많음
- 열대지역에서 최근 경제가 눈부시게 성장한 국가들은 한결같이 공중보건에 적극적으로 투자한 국가들. 그 국가들은 온대지역에 비하면 농업경쟁력이 떨어지므로 농업만으로는 부유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농업 이외의 다른 분야에도 대대적으로 투자. 이처럼 각자의 문제를 정확히 진단함으로써 맞춤식 치료로 부자가 된 국가로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대만, 홍콩, 모리셔스가 있음
- 천연자원이 축복보다 저주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학자들은 몇가지 이유를 찾아냄. 첫째로는 천연자원이 그 나라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지 않다는 것. 실제로 천연자원은 일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매장되어 있는 경향일 띰. 이런 차이가 내란과 분리독립운동으로 이어짐. 천연자원이 매장된 지역은 따로 독립해 그 이익을 독차지하기 바라거나, 독립하지는 않더라도 이익의 상당부분이 다른 지역에 분배되는 걸 마뜩찮게 여김. 광물자원이 풍부한 콩고의 동부지역에서 분리독립운동이 만성적으로 벌어지는 이유가 여기 있음. 천연자원은 부패와 비리를 조장하기 때문에도 저주로 여겨짐. 자원을 개인의 주머니에 감추거나, 선박 컨테이너나 파이프라인으로 빼돌리기 쉬운 경우, 또 자원에 물리적으로 접근할 권리를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경우에는 거의 필연적으로 부패와 비리가 개입됨. 자원을 착복하는 사람, 컨테이너나 파이프 라인을 통제하는 사람이 돈을 직접 빼돌릴수도 있지만, 광산이나 유전을 개발할 권리를 얻은 광산회사나 석유회사에 검은 돈을 수수료로 요구할 수도 있음. 다이아몬드와 황금은 주머니에 감춰 운반하기도 쉽지만, 다이아몬드 광산과 금광은 채굴권을 통제하기도 무척 쉬움. 이런 이유에서 다이아몬드와 황금이 풍부한 국가들이 유난히 부패와 비리로 몸살을 앓고 있음. 천연자원을 개발하면 막대한 돈이 흘러들어가기 때문에 해당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음. 이런 현상도 천연자원의 저주를 부추기는 이유. 그들은 높은 임금을 받으므로 값비싼 물건을 살 수 있음. 따라서 물가가 자연스레 상승. 하지만 고임금과 고물가의 기조가 계속되면 경제를 지탱하는 다른 산업분야들이 천연자원 분야와 경쟁해서 버티기 어려움. 하지만 천연자원을 많은 돈을 버는 국가가 가난한 또 다른 이유는. 그 자원이 언젠가는 고갈되기 마련이므로 경제의 다른 분야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걸 잊기 때문. 그런 국가들은 다이아몬드와 석유가 영원이 지속되리라 착각한 채 경제의 다른 분야들을 개발하지 않고 교육에도 투자하지 않음. 그 때문에 천연자원으로 벌어들이던 돈이 바닥나면 그런 국가들은 다시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짐
- 역사학과 고고학 등 사회과학의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복잡한 제도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인구밀도가 높은 정주사회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 한편 정주사회는 농업의 출현으로 잉여식량을 생산해 저장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음. 따라서 복잡한 제도의 최종적 궁극인은 농업이며, 다음의 궁극인으로는 저장할 수 있는 잉여식량을 확보하며 인구밀도가 높아진 정주사회를 꼽을 수 있음. 농경과 목축으로 밀과 콩, 치즈의 저장이 가능해졌고, 그것들이 잉여식량이 되었음. 이런 잉여식량들은 왕족과 은행가, 학생과 교수 등 식량을 생산하지 않는 특수계급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음. 따라서 농업이 등장한 덕분에 왕족과 관료집단, 상인과 발명가, 중앙정부가 존재할 수 있었고, 군장사회와 국가로 발전할 수도 있었음. 문자와 금속도구, 시장경제, 씨족에 대한 충성을 넘어선 국가에 대한 충성, 교육받아 문해력을 지닌 시민, 법에 의한 정부의 통치, 대학 등이 생겨날 수 있었던 궁극인도 농업에 있음. 수렵채집사회에서는 이런 제도가 생겨날 수가 없음. 이런 복잡한 제도들이 한국과 미국 등 중앙정부를 지닌 국가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짐
- 국가의 탄생에 따른 복잡한 제도의 역사는 지역마다 다르며, 그 차이는 농업의 역사와 맞물임. 예컨대 그리스와 중국의 경우에는 국가의 통치가 4000년전에, 이탈리아에서는 약 3000년전에 시작되었지만, 뉴기니의 일부지역에서는 30년전에야 시작. 해외원조를 제공함으로써, 수천년 동안 지속되던 삶을 한 세대마에 뒤바꾸기는 어려움. 네덜란드의 경우에는 농업의 역사가 7500년에 이르지만 잠비아의 경우네는 2000년에 불과. 또 네덜란드는 2000년전부터 문자를 사용했지만 잠비아에는 130년전에야 문자가 도입됨. 네덜란드에는 독립된 중앙정부가 500년 동안 존재했지만 잠비아에는 40년 전에야 중앙정부라는 것이 생김. 기나긴 농업의 역사와, 농업으로 인해 가능해진 복잡한 제도 덕에 오늘날 네널란드가 잠비아보다 부유하고,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보다 부유한 것은 분명해 보임. 농업과 농업에서 비롯된 중앙정부의 역사가 긴 국가가, 농업과 중앙정부의 역사가 짧은 국가보아 일인당 평균소득이 더 높음. 경제학자들이 다른 변수들을 제어한 경우에도 마찬가지. 따라서 농업의 역사가 국가의 빈부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게 분명함. 국가간의 평균소득 차이에서 설명분산의 절반정도가 농업의 역사로 설명됨. 근대까지 소득이 낮았던 국가들을 비교하더라도 일본과 중국과 밀레이시아처럼 중앙정부가 일찍부터 있었던 국가들이 잠비아와 뉴기니처럼 중앙정부의 역사가 짧은 국가들보다 현대에 들어 경제성장률이 더 높았음. 요컨대 중앙정부의 역사가 긴 국가의 경제성장이 요즘에도 더 빠르다는 의미. 중앙정부의 역사가 짧기 때문인지 풍부한 천연자원을 지닌 국가들 중에도 경제성장이 더딘 국가가 적지 않음. 게다가 오랜 중앙정부의 역사를 지닌 국가는 가난하게 현대 세계에 진입했더라도, 중앙정부의 역사가 짧은 국가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경제가 성장하는 특징을 보여주었음.
- 개인의 위기극복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예측인자들
* 경직된 성격보다 유연한 성격
* 자신감과 관계 있는 자아강도
* 과거의 선택적 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경험에서 오는 자신감
* 성장함에 따라 개인적 문제를 자율적으로 선택하도록 허용받는 자유로운 분위기
* 돈 문제나 끊임없는 물리적 위험 등과 같은 실질적인 문제에 구속받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선택의 자유
* 해결책을 찾으려는 시도는 성공할 가능성이 크지 않기 때문에 모호함과 실패를 용납하는 여유로움
*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배울 수 있는 본보기 친구
* 감정적 위안과 물질적 지원을 해줄만한 친구
- 일본의 역사에서 메이지 유신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이 시도한 국가개조에서도, 위기치료사들이 개인의 성공적 위기탈출을 위해 중요하다고 제시한 여러 요인들 중 적어도 여섯가지가 분명히 확인됨
(1) 담을 쌓는 것. 일본의 많은 지도자는 분명히 변해야 할 것이 있다고 인정했지만, 서구식 방법을 통째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졌음
(2) 핵심가치를 양보하지 않고 굳게 지킴. 예컨대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과 일본의 문화적 가치 등.
(3) 일본인의 자아강도. 일본의 독특성과 우월성에 대한 자신감
(4) 교육과 통치, 산업화, 육군과 해군 등 많은 분야에서 서구식 모델로부터 배우겠다는 일본의 적극적 의지
(5) 미국과 영국, 프랑스와 독일로부터 받은 지원.
(6) 일본의 지리적 조건. 섬나라인 이유로 국경을 맞댄 이웃이 없는 까닭에 선택을 하는데 상당히 자유로웠음. 즉, 국경을 맞댄 이웃국가로부터 큰 압박을 받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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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학자 조지프 테인터를 비롯한 역사학자들은 로마가 노예 에너지에 의존하면서 약탈경제를 구축하게 되었다고 지적. "전쟁에서 진 사람들이 경제의 기반이 되고 나아가 노동력을 제공했다. 이것은 높은 경제적 수익을 내는 전략이었다." 로마제국에 에너지와 현금이 더 많이 필요해지자 예멘 시골 지역 농부들을 차출해 군인이 되도록 유도한 후 다른 나라를 로마에 복속시키라는 임무를 내렸따. 이런 농부들이 버리고 간 토지는 시골지주가 냉큼 집어삼켰고, 그렇게 확장된 사유지에 에너지원을 공급하기 위해 노예를 사들였다. 승리를 거둔 군대는 수만명의 노예를 데리고 로마로 돌아왔다. 드베이어와 들레아쥬, 에머리가 지적했듯이, "모든 군사적 모험은 도시 귀족의 재산을 불렸고, 민간경제에서는 노예 노동력의 절실함을 주장할 수 있는 기회였다. 여기저기서 더 많은 노예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결국 더 많은 전쟁이 벌어졌다."
- 프랑스의 귀족이자 사회평론가 토크빌은 1831년 미국을 방문했다가 노예제도가 사람들의 습관과 성격에 미치는 영향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았다. 제조업을 하는 북부는 석탄과 자유민의 노동에 의존한 반면 남부는 노예의 에너지에서 부를 얻었다. 담배와 면화경작은 부단한 근력이 필요했다. 박식한 토크빌은 미국 남북전쟁 이전의 30년간 노예제도는 남부지역의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는 걸 이해했다. 토크빌은 노예나 하인없이 자란 대다수 북부인은 "참을성 많고 생각이 깊고 인내심이 있으며 신중하고 불굴의 의지를 지닌"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급자족이 가능하며 진취적이라고 설명. 그에 반해 노예들은 남부인 대부분에게 "생활에 필요한 것들은 즉각적으로"공급해 주었다. 따라서 미국 남부사람들은 화려하고 장엄한 것을 선호하고, 평판을 중시했다. 또 여흥과 오락을 즐기고 무엇보다도 빈둥거리기를 좋아했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노력할 이유가 없엇다. 북부인들이 부와 안위를 추구하는 일을 "마음의 즐거움이나 쾌락보다" 더 우위에 놓을 때, 남부인은 400만명 가까운 노예들이 제공하는 에너지를 통해 얻은 부를 군사게임, 여흥, 오락에 썼다. "남부인은 충동적으로 행동하곤 했다. 그래서 더 화통하고 더 솔직하며 더 재기발랄했다." 미국 북부인이 중산층의 장단점을 두루 갖추었다면, 남부인은 귀족계층의 편견과 취향을 지니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노예제도는 백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약화시켜버린 것이다.
- 인간노예제도의 질서를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에너지를 소유해야만 했다. 비록 화석연료가 광범위한 자유와 지금껏 본 적 없는 유토피아을 약속했지만, 결국 우리에게 준 것은 영 딴판의 것들이었다. 끊임없이 연료를 소비하는 기계 노동자 무리는 복잡한 형태의 관리를 필요로 했고, 강력한 힘을 지닌 탄소중개인이라는 저돌적인 계층을 만들어냄. 우리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인간 노예의 에너지대신 화석연료를 동력으로 삼는 노예를 부리게 되었다.
- 석유는 미국 자본주의의 말쑥한 얼굴을 달라지게 함. 검소한 침례교도로서 숫자를 다루는 재주가 비상한 회계담당자였던 존 록펠러는 석유를 이용해 미국 경제에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정착시킴. 그때부터 사업은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크게 한몫 잡는 일이 되었다. 석유로 인해 발생한 잉여자본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험많고 박식한 록펠러는 골치아픈 석유시추사업 대신 등유를 정제해 운송 및 유통하는 일에 투자. 그리하여 세계 최초의 다국적 기업으로 손꼽히는 스탠다드 오일을 세웠다. 록펠러는 단기간에 석유의 가장 훌륭한 속성, 즉 권력을 집중시키고 자본을 창출해내는 능력을 입증. 독과점 체제를 구축하면서 록펠러는 몇가지 주요한 사업관행을 만들어감. 먼저 통계부서를 만들어 비용과 가격을 기록해서 지속적으로 관찰. 직원들이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동안 돈과 숫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했다. 이사회는 매일 모였다. 또 표준규격에 맞춘 등유상품을 생산해냄으로써 죄없는 소비자가 희생당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그리고 최대한 노출하기 않는다는 개인적 신념으로 업계에 비밀주의라는 관례를 전파. 록펠러는 서면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은 채 모든 경쟁자를 철저히 파멸시키는 데 전념.
- 록펠러가 독과점을 이루기 위해 동원했던 방법은 스파이, 뇌물, 왕따, 협박, 사보타지, 세금공제 등이었다. 유조선과 배럴 통을 비롯해 여러 사업부문에 들어가는 비용을 통제함으로써 구조적으로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만듬. 독립 정유사업체가 합병을 거부하면 스탠다드 오일은 시장에서 등유가격을 떨어뜨려서 그 업체가 저가로 고통받게 함. 석유계의 거물 록펠러는 사우스 임프루먼트 컴퍼니 설립에 도움을 주었다. 이 회사는 은밀하게 철도기업과 리베이트 거래를 해서 다른 경쟁자들이 스탠다드 오일보다 2배 높은 등유 운송비용을 지불하게 했다. 스탠다드 오일은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줘서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거나 방해하는 경쟁자를 손보게 만들었다. 1880년에 이르자 스탠다드 오일은 정유사업의 90%를 점유했고, 등유는 미국에서 네번째로 큰 규모의 수출품목이 되었으며, 심지어 중국에도 수출.
- 텍사스 역사학자 로저 올리엔과 다이애나 데이비즈 올리언은 세기말에 스탠다드 오일에 대한 거센 반발이 일어난 데에는 미국의 이상적인 남성상이 사라진다는 공포감이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분석. 제퍼슨이나 페인, 프랭클린 같은 연방제 공화국 설립자들이 마음속에 그렸던 나라는 태양과 근력, 노예로 운영되는 농경국가였고, 그 나라의 국민들은 독립심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야 했음.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지나친 부를 멀리하고 장인의 숙련된 솜씨를 가치있게 생각하며 자급자족을 옹호하는 나라를 이상적으로 생각. 하지만 화석연료가 찬양하는 가치는 이와 달랐다. 석유와 석탄으로 움직이는 기계 노예는 규모를 키우고 집중시켜서 많이 일할수록 더 많은 이득을 냈다. 특히 석유는 벼락부자와 무위도식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석유산업의 발달로 인해 1860년 전체 인구의 88%에 달하던 자영업자수는 1910년 3분의 1로 감소. 경제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이런 변화는 남성성에 있어 재앙이었다.
- 석유와 그 무생물 조력자는 1차대전과 마찬가지로 2차대전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 미국인들은 자국의 석유매장량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 맹신했지만 석유수입국이었던 일본과 독일은 합성액체연료를 연구하고 미국에서 수입한 원유를 비축해두었다. 팽창주의를 표방하던 이 두나라는 석유부족이 자국의 정치, 경제적 야망을 제한하게 되리라는 것을 인식. 그래서 외국의 에너지를 입수하는 독특한 군사전략에 희망을 걸었다. 독일의 잠수함 U보트는 대서양에서 유저선을 침몰시켰고, 일본은 미국이 일본에 대한 석유금수조치를 취하자 진주만 공습을 감행. 세계대전을 벌이는 동안 일본은 수백만명의 한국, 중국인 노동자를 강제징용했고, 나치는 동유럽과 소련에서 수백만명을 강제노동에 동원. 미국은 자국의 석유소비를 군사장비에 집중시켰다. 석유자원이 거의 없던 독일은 석탄액화 공장에 크게 의존. 사실 나치의 주요 군사전략인 전격전은 저렴한 석유를 공급받지 못한데서 시작. 노르웨이와 프랑스, 폴란드를 속전속결로 점령하면서 독일은 더 많은 석유를 확보. 하지만 이 전략은 러시아 대평원에서는 꽃을 피우지 못해서 러시아 최대 석유생산지역 두곳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은 실패. 석탄으로 만든 저급 합성액체연료를 쓰는 독이르이 비행기는 고옥탄 연료를 사용하는 연합군의 비행기에 비해 기동성과 속도면에서 뒤떨어졌음. 결국 전쟁의 주도권 다툼은 얼마나 많은 전투용 기계노예를 동원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됨. 많은 양의 에너지를 잡아먹는 투기적 잠수함 전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음. 양측은 잠수함대를 이용해서 서로의 석유공급을 차단하려 했다.
- 엔지니어겸 건축가이자 미래학자인 벅민스터 풀러는 40년대 초반에 에너지 노예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 미국과 영국 군대에서 모으는 에너지 통계자료를 취합해 살펴본 풀러는 놀라운 결론을 내렸다. 1810년, 미국인구는 100만가구와 100만 노예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1940년에 이르러 석탄과 석유를 태워 만들어내는 기계 에너지는 미국 시민 1인당 약 39명의 에너지 노예를 배당해 주었다.
- 1969년 풀러는 석유지질학자 프랑수아 드 샤데네데스에게 자연에서 석유 1갤런을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봐달라고 요청. 혁신가인 풀러는 이 지질학자에게 광합성 비용 및 수백만년 동안 열과 압력으로 천천히 변형시켜서 원유를 만드는 비용까지 모두 계산하도록 요구. 드 사데네데스는 석유 1갤런 당 100만불 이상의 돈이 들 것이라 추산. 당시 풀러는 미국에 있는 일반적인 자동차 소유자가 매년 300갤런의 석유를 소모한다는 데 주목. 다시 말하면, 미국인 1명이 3억불 가치의 천연자본을 태우고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말이다. 풀러는 이를 우주적 규모의 범죄라고 칭했다. 현재의 수입게 맞추어야지 저축을 고갈시켜서는 안된다는 걸 모두가 잘 알면서도 노예소유주들은 원래 양심의 가책을 잘 느끼지 못한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 생태학자 제프리 듀크스가 비슷한 연구를 함. 그는 운송수단에 사용되는 석유 1갤런을 대기 위해서는 선사시대에 땅에 묻힌 식물성 물질 98톤을 굴착하거나 퍼올려야 한다고 추정. 지금 몰고다니는 차량이나 SUV차를 32킬로 굴리기 위해 연료통에 40에이커 규모의 밀줄기며 뿌리까지 모두 넣고 다녀야 한다면 어떨까. 듀크스의 질문이다. 그는 97년에 미국에서 소모한 석탄과 석유의 양을 모두 더해본 뒤 탄소 97조 파운드에 해당한다고 결론내림. 이는 한해동안 전세계에서 경작하는 모든 식물의 400배에 달하는 수치이다. 다시 말해 미국 자동차 소유주가 부리는 에너지 노예들이 매일 태워없애는 화석연료만 계산해도 한해동안 지구상의 모든 땅과 바다에서 나는 식물의 양에 해당한다는 이야기.
- 인간노예 시스템과 휘발유를 기반으로 하는 노예 시스템의 공통점은 희귀해지면 무례하지 않게 사용한다는 점. 값사고 풍부한 물자는 업신여기면서 소비한다. 인간노예든 탄소기반 노예든 상관없이 모든 에너지 시스템은 편안한 생활과 편의를 위해 잉여에너지를 장악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삶을 안락하게 하는 것을 끊임없이 공급받기 위해 에너지를 집중시켜야 하기 때문에 사회는 피라미드 구조를 이룬다. 그러다 노예 또는 석유가 지나치게 비싸졌을 때 이 피라미드는 허물어진다. 지금까지 우리는 값싼 석유노예가 희귀해지는 경험을 거의 못했다. 그래서 매일 석유를 함부로 낭비. 하지만 모든 지배적인 에너지 시스템은 관성적으로 성장해서 인지부조화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선하고 매우 영리한 사람들조차 충격적인 행동을 합리화하는 상황이 빚어진다. 노예제도가 브라질을 생각없는 곳으로 만들었듯이, 석유를 기반으로 하는 기계들은 미국의 의사결정능력을 정지시키고 혁신이 일어나는 것을 방해했다.
- 모든 에너지 시스템은 놀라울 정도의 의존적 성향과 예상치 못한 역학관계를 만들어낸다. 노예의 목에 쇠사슬을 씌우면 그 쇠사슬의 다른 끝이 우리의 목을 조인다.
- 단일한 곡물을 대량으로 재배하기 위해서는 물을 끌어들이는 기술과 더불어 헌신적인 인간의 노력이 필요했다. 수많은 노예가 상당한 규모의 군대와 권위주의적 국가가 필요해따. 이런 활동을 통해 얻은 보상은 대체적으로 1%의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그런 식으로 농업혁명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그리스, 로마를 크게 변화시켰다. 미국 작가 리처드 메닝의 설명에 따르면 농업은 식량과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 부의 축적과 관련된 일이기도 했다. 이 새로운 에너지 혁명은 성역할을 바꾸어 놓기도 했다. 특히 쟁기를 사용해서 밀, 보리, 호밀 등을 수전농경으로 재배한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육중한 근육과 폭발적 힘을 요구하는 도구는 남성의 체격에 유리. 쟁기로 땅을 개간하는 농업지역에서 남자들이 밭에 나가 일을 하는 동안 여자들은 가정을 돌보았다. 반면 순수한 에너지로 생각할 때 훨씬 더 우수한 접근방식이라 할 밭 경작지역에서의 성역할은 많이 달랐다. 괭이와 호미로 땅을 일구는 이 지역에서 여성들은 들에 나가 작물을 키우는 일을 훨씬 가치있게 생각했다. 눈여겨볼 사실은 그 지역의 후손들이 오늘날에도 수전농경을 하던 지역에 비해 훨씬 더 높은 양성평등 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 정치나 노동계, 기업활동에 참여하는 여성의 비율도 훨씬 더 높다. 쟁기의 사용으로 인해 모계사회는 부계사회르 바뀌어 감.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전능한 모계 여신의 치세가 끝나고 수메르와 바빌론에서 우세했던 남신과 사제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말했다.
- 중국은 8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독특한 농업에너지 제국을 구축하고, 자연적 에너지 흐름을 이용해 1억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먹여살림. 태양에너지를 신중하게 통제해서 북쪽에는 수수와 밀을 집중적으로 기르고 남쪽에는 쌀을 기르는 방식. 인공적으로 땅을 물에 잠기게 하고 다모작을 하는 벼농사의 혁식은 평균적인 농가에서 산출하는 곡물의 양을 3배로 늘림. 세심하게 관리한 1평방마일(약 2.6제곱킬로미터) 면적의 농지에서 생산한 곡식은 225명의 농부를 먹여살렸다.
- 프랑스 에너지 역사학자 장 클라우드 드베르와 장폴 드레아주, 다이넬 에머리는 다음과 같이 언급. "중국이 장기적인 에너지 부족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에너지구조의 성과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월등히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상 유례없이 역동적인 에너지 구조였다." 지속성 있는 태양에너지 기반 농업 덕분에 중국의 농부들은 자급자족하는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 시스템의 성공은 세심하고 주의 깊은 다수의 경작자가 존재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식물생육을 위한 면적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람들은 짐을 끄는 초식동물의 사용도 제한했다. 작물에서 얻은 식품열량이 작물을 경작하는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한, 이 시스템은 번창할 수 있었다. 그러나 12세기 1억명이던 중국의 인구가 18세기 5억명으로 늘어나면서 중국은 잇단 에너지쇼크를 경험. 그로 인해 경작지 및 열을 발생시키는 원자재인 목재가 고갈됨. 태양에너지를 식량으로 변환시키는 데 필요한 사람수가 늘자 작물에 의해 공급되는 잉여에너지는 당연히 감소. 정치불안과 불확실성이 만연하면서 중국은 유럽인들이 화석연료를 정복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암흑시대에 빠져들었다. 20세기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오래된 농업시스템에 기계로 작동하는 양수기와 과학적 농업방식, 특수한 품종을 도입하는 등 일대 개혁을 시도. 그러나 이런 개혁은 토양을 침식하고 산림을 심하게 훼손했으며 사막이 확대되는 데 일조. 오랜 세월동안 잘 보존되었던 중국 에너지 시스템의 기본구조는 70년대 이르러 농업이 산업화하고 도시화하면서 붕괴하기 시작. 그런 다음 화석 연료와 화학비료, 댐이 등장하면서 4억명의 농부는 터전을 잃고 쫓겨나게됨
- 현대 곡물은 이전에 경작된 품종보다 더 많은 탄수화물을 함유함. 이처럼 지나치게 많은 탄수화물은 비료가 질소 순환주기에 영향을 미쳤던 방식과 마찬가지로 신체의 인슐린 생산에 영향을 미침. 마른 사람들은 이런 탄수화물을 흡수해서 지방을 저장해 두었다가 나중에 식량이 부족할 때 에너지를 생산. 하지만 뚱뚱한 사람들은 저장된 지방을 가져다 쓸 수 없음. 탄수화물을 섭취하면 인슐린 분비가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 뚱뚱한 사람들이 뚱뚱한 이유는 과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뚱뚱하기 때문에 과식하는 것이다. 저탄수화물식인 전통적 식습관을 되찾으면 체중이 줄 뿐만 아니라 당뇨병과 같은 건강문제가 없어지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 나무에서 과실을 딴 뒤 가장 신속하고 저렴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그 과실을 입에 집어넣는 것이다. 철도여행에 돈을 낭비하지 않는 이가 최고의 경제학자이다. 너무나 효율적이어서 조직에 관심을 두지 않는 이가 절대적 효율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사람은 이상적인 단순화의 극치라고 볼 수 있지만, 단순화야말로 사과나무처럼 믿을 만한 방법이다. (G.K 체스터턴)
- 과거에는 경제사상이 에너지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세계 쵳초로 경제사상을 가르친 정식 교육기관은 중농주의자의 소유였다. 18세기 프랑스의 토지균분론자들과 철학자들은 토지를 모든 부의 원천으로 여겼음. 루이 15세의 주치의였던 프랑수에 케네는 태양에너지를 집약하는 농업이 이루어져야 경제가 지속될 수 있다고 믿었다. 케네는 프랑스 사회에서 잉여작물이 경제성장을 만들어낸다고 명쾌하게 지적하면서, 농부에게 부과하는 세금과 관세감면을 공개적으로 지지. 중농주의자들 역시 강수량, 재배, 부패, 계절의 변화 등 자연법칙과 물리법칙에 관한 지식이 경제학의 기초라고 생각. 케네는 농부 한명이 몇마리의 말과 소를 써야 하고 얼마만큼의 먹이를 먹여야하는지를 계산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다시 말해 에너지 입력이 부의 창출에 기여하는 바를 정리했던 것이다. 케네와 중농주의자들은 자연의 한계를 분명히 인지한 사회가 잘 먹고 잘 사는 경향이 있다는 데 주목. 그렇게 하지 못한 사회는 굶주렸다. 케네에게 모든 경제적 노력의 목적은 가능한 최소한의 경비를 지출해서 최대한의 만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에 새로운 종자의 경제학자들이 등장. 1776년 애덤스미스는 세계최초로 무생물 노예 소유주와 제조업자들을 위한 초대형 경제 베스트셀러인 국부론을 출간. 석탄 붐이 한창이던 당시, 스미스의 책은 경제적 진보가 사리사욕 추구와 분업, 자유무역이라는 세가지 본질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 경제풍조를 정확하게 관찰하는 능력이 있던 스미스는 땅에서 얻은 원생산물 수출보다 제조업을 더 우위에 놓으면서, 공산품이야말로 새로운 부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후대의 스미스 추종자들과 다르게 스미스 자신은 이데올로기 신봉자가 아니었다. 그는 생산에 한계가 있다는 걸 이해했고, 자연의 생식력이 부의 창출에 기여한다는 사실도 인정. 하지만 석탄의 열로 벼려서 만든 새로운 기계가 석탄의 열기를 동력으로 삼아 우리 문명이 태양계의 한계를 넘어서게 만든 방식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앗다. 그저 그 결과를 찬양하기에 급급.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위대한 사건은 돈을 벌어준다. 하지만 중농주의자들은 이 의견에 절대 동의하지 않았다. 페이르 사뮤엘 뒤퐁 느무르는 스미스의 추종자였다. 장 밥티스트에게 이런 글을 전했다. "그대는 경제의 범위를 지나치게 좁혀서 오직 부에 관한 학문으로만 바라보고 있소. 경제란, 자연법칙을 다루는 과학을 문명사회에 적용시킨 것이어야 하오" 스미스 이후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자들이 정계에 급속히 퍼짐. 과장되게 글을 쓰는 불행한 전통의 시조라 할 경제학자 리카도는 나라마다 가장 잘하는 일에 자본과 노동력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주장. 리카르도는 대영제국의 번영과 새로운 유행이 된 산업화를 전제로 벤담, 밀 등 추종자들과 더불어 자본의 실용적 창출을 중시. 노동자 계급에게 좀더 많은 자본이 가야한다고 주장한 걸로 유명한 마르크스 등의 경제학자들은 노동을 중시. 하지만 애초 이같은 논쟁을 촉발시킨 에너지 흐름의 급속한 증가는 전통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거의 100년 동안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은 무생물 탄화수소 노예가 만들어낸 잉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싸움을 벌였다. 마치 상속유산을 어떻게 분배할지를 두고 다투는 형제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 40여년전 니콜라스 조지스쿠-로젠은 석탄과 석유의 형태로 물려받은 에너지를 이용해 얻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비용으로 사용되는 날이 오리라고 예견. "전쟁도구는 물론이고 자동차나 컨테이너 하나를 사용할 때마다 미래세대를 위한 쟁기날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결국 미래를 살아갈 인구의 수가 줄어든다는 뜻이다." 세상은 결국 태양에너지 흐름에 의존하는 형태로 회귀하고 길고긴 경기침체를 맞이할 것이라고 예측. 그리고 이런 곤경에 처하지 않기 위해 실천해야 할 여러가지를 제안. 대량살상무기 사용을 금지하고, 인구를 서서히 감소시키는 것도 그 제안에 포함됨. 그는 기계대신 사람과 동물을 쓰는 유기농 농업을 통해 식량을 생산해야 한다고 믿었다. 또 낭비가 심한 에너지 사용습관과 낭비벽이 있는 기계장치를 엄격히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 내구성이 강하고 수선이 가능한, 더 좋은 품질의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 더 많은 에너지를 쓰는 일로 여가시간을 보낼게 아니라, 주변환경을 더 아름답게 하고 마음을 더 너그럽게 하고 머리를 더 신중하게 다듬는데 써야한다고...하지만 이 루마니아 사람은 이런 것들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인류는 어쩔수 없이 생긴대로 살다가 사라질 운명인지도 모른다. 에너지 위기는 인류의 현명함이 위기에 봉착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쩌면 인간의 운명은 오랫동안 특별한 사건없이 식물인간처럼 존재하는 것보다는, 짧지만 강렬하고 흥미로우며 낭비벽이 심한 삶을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신적 야망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아메바류의 생물이라야 후손엑 햇빛 가득 담은 흙을 물려줄 수 있는 건 아닐까.
- CCS기술은 전형적인 거대과학적 사고방식. 그렇지 않아도 고에너지 사회인 마당에 더 많은 에너지를 들여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 이른바 독립과학자들은 이를 두고 졸렬한 열역학 모조품이자 나쁜 공학이라 여김. 바츨하프 스밀은 배기가스를 줄이면 간단할 것을 왜 관리하려 하냐고 묻는다. "탄소격리 문제는 난제해결을 위해 당장 활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유용한 옵션이라고 무책임하게 묘사한다."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로테크 대안은 생각보다 많다. 스밀에 의하면 이런 대안에는 도심 자동차 사용금지와 연료가격 인상, 탄소세 부과, 공공 교통수단, 재생가능한 에너지 프로젝트, 열대우림 지역 보호 등이 있다. 더 적은 에너지와 비용, 그리고 적은 수의 과학자로도 배기가스를 크게 줄이는 방법들이다. 그러나 고대 로마에서 노예제도를 지지했듯이 거대과학은 에너지와 독점력을 강화시켜주는 도구를 옹호함. 미국의 비즈니스 분석가 그레고리 언러는 CCS기술을 또 다른 탄소잠금효과라 불렀다. 이것은 화석연료를 이용하는 과학기술-사회제도 복합체에게 통상적인 일이다. CCS 기술은 현상유지를 강화하고 이론상으로 화석연료의 시대를 몇백년까지 연장시킬 것이다. 재생가능한 에너지 프로젝트와 달리 CCS기술은 다국적 석유기업이 과학기술과 노하우, 자본에 투자한 것들을 보존해 준다. 매립방법은 배기가스를 줄이지만 그와 동시에 이산화탄소 배출기간을 연장시킨다. 그리고 CCS기술은 수십억 달러의 보조금 없이는 진행될 수 없기에 정부재원을 고갈시킨다. 그래서 내구성과 비용효과가 더 좋은 정책이 입안되는 걸 지연시키고, 자원을 유용해서 로테크 해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 현재 석유와 천연가스 생산으로 세입의 30% 이상을 충당하는 국가는 전세계적으로 30여개에 달함. 이런 국가에서 수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고위층드은 18세기 노예와 플랜테이션 농장 소유주보다 더 부유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로마의 노예보다 못한 음식을 먹고 지냄. 석유가 민주주의를 공고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보여준 몇몇 국가에서도 석유 자산은 사회제도와 기본원칙을 잠식해 나갔다. 석유는 하나의 주인만을 섬긴다. 18세기 런던의 귀부인은 차에 설탕 한스푼을 첨가하는 것만으로도 유혈이 낭자하는 끔찍한 노예무역과 연관을 맺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휘발유를 구매하는 행위는 모든 자동차 운전자를 석유왕국과 오염된 상수도, 정치적 부채와 연계되게 만든다. 가공할 석유의 논리는 결국 다음과 같이 귀결된다고 테리 린 칼은 말했다. "한마디로 국민을 대변하는 유능한 주정부를 세운는 것보다 송유관을 놓는 편이 더 빠르고 쉽다는 것이다."
- 20세기 전반동안 에너지 전문가 대부분은 잉여물의 문제를 화제로 삼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1950년대 저술활동을 했던 사회학자 프레드 코트렐은 미국의 풍부한 잉여 때문에 국가가 급속하게 발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코트렐에 따르면 고에너지의 열매를 따먹은 사회는 팽창하는 반면, 저에너지 토끼를 쫓는 사회는 퇴조한다. 길을 따라 걷다가 야생 블랙베리를 따먹은 사람은 자신이 소비한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되돌려 받았다. 반면 80에이커의 들판에서 산토끼를 뒤쫓던 사람은 자신이 포집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열량을 태운다. 코트렐의 주장에 따르면 햇빛에 의존하는 저에너지 사회는 득실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 산출 에너지보다 투입에너지가 더 많아져 에너지 적자가 생기고, 에너지의 빚을 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문화붕괴를 맞이하기 때문. 하지만 석유에 중독된 사회에서는 이런 사실을 발견하기가 무척 어려움. 석유가 너무 많은 잉여를 생산해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에너지에 대한 생각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
- 1만년전 수렵채집인들은 석유로 환산했을 때 연간 1.5배럴에 달하는 에너지를 식물과 동무에서 수집. 기원전 100년경 중국의 농부들은 나무와 석탄을 활용해 1인당 연간 최대 석유 3배럴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확보. 하지만 산업혁명이 도래하면서 이런 수치는 크게 바뀌기 시작. 1880년이 되었을 때 석탄과 증기 노예가 만들어주는 에너지는 폭발적으로 증가해, 보통 사람이 연평균 석유 15배럴의 에너지를 사용하기에 이름.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후 유럽인 한명이 연간 먹어치우는 에너지는 석유 26배럴이 되었다. 미국인들의 석유 식탐은 이보다 심했다. 소비 에너지의 40%를 석유에서 얻고 2%는 천연가스와 석탄에서 얻는 미국에서는, 한 사람이 신석기 시대 사냥꾼보다 매년 50배렬이나 많은 석유를 태워버리고 있다.
- 개인의 에너지 소비량이 연 7배럴 수준을 넘어서면 이후 에너지 소비량이 더 늘어난다고 해도 행복감이 별로 늘지 않음. 오히려 17배럴을 넘어선 다음부터는 보답으로 얻는 행복감이 급감. 스밀의 말을 빌리면 지금 북미 사람들이 낭비하는 에너지의 3분의 1만 있어도 낮은 유아사망률이나 건강한 식단, 높은 기대수명, 좋은 집을 얻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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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 경제사

역사 2016. 4. 21. 14:40

- 흑사병은 1347년 흑해의 무역항 카파에서 창궐하기 시작. 당시 카파는 지중해 무역으로 번영을 누리던 이탈리아 상업도시 제노바의 무역기지였으며, 제노바는 동양에서 수입하는 향신료와 직물 등을 유럽 전역에 판매하여 큰 이익을 거두고 있었다. 당시 제노바는 베네치아와 더불어 이탈리아 전성시대를 이끄는 양대 축이었다. 1347년 킵차크 한국(몽골제국 4한국의 하나. 1243년 칭기즈칸의 아들 주치와 손자 바투가 서시베리아와 키르기스 초원과 남러시아에 세운 나라. 14세기 전반 최전성기를 누리다가. 1502년 모스크바 대공국에 멸망)의 자니베크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제노바인이 방어하던 카파를 포위하고 공격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몽골군 진영에서 역병이 발생.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자니베크 칸은 시신을 투석기에 얹어 성내로 던져 놓고는 철군. 투석기로 날아온 시신을 통해 감염된 제노바인들이 감염사실을 모른 채 배를 타고 시칠리아 및 지중해 연안으로 상륙하면서 흑사병이 유럽에 대유행. 불과 5녀만에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병마가 맹위를 떨쳐다. 흑사병의 정체는 19세기말에서야 밝혀짐.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라는 박테리아가 검은 쥐와 같은 설치류에 서식하는 벼룩을 통해 인간에게 감염됨으로써 발생. 벼룩이 문 상처를 통해 림프절에 병변을 만드는 선페스트와 달리 사람의 호흡을 통해 감염되는 변종인 폐 페스트도 있다는 주장도 있음. 흑사병의 전파속도가 무척 빨랐다는 점. 그리고 쥐가 거의 서식하지 않는 아이슬란드와 같은 지역에서도 발병했다는 점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 오늘날 의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원래 흑사병이 중아아시아 토착 질병이었다고 파악한다. 그런데 중세에 유라시아 동서교역이 활성화되면서 사람, 가축, 물자의 이동이 빈번해짐에 따라 설치류의 서식범위도 통상로를 따라 확대됨. 이것이 흑사병이 범유행성 질병으로 재탄생한 배경이었다. 달리 말하면, 흑사병은 세계화가 낳은 예기치 못한 부산물이었다. 당시 세계화가 진전된 데는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의 기여가 컸다. 한반도에서 흑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제국은 개방적 대외정책을 실시했고, 역참제도 등 무역진흥에 유리한 인프라를 구축. 베네치아 출신 마르코폴로와 모로코 출신 무슬림 여행자 이븐 바투타가 공통적으로 증언했듯이, 몽골제국은 사람과 상품이 이동하기에 최적의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몽골제국이 정한 제도와 질서와 관습이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팍스 몽골리카 시대의 진면목은 바로 이런 세계화의 급속한 진전에 있었다. 동서 교역의 확대가 토착질병을 세계적 질병으로 변모시켰다면, 흑사병이 유럽에서만 창궐했다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 최근의 연구는 흑사병이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1330~50년대 사이에 중국에서도 흑사병이 대규모로 창궐했으며, 인도와 서아시아의 무역항들과 이슬람 성지 메카에서도 흑사병으로 많은 인구가 목숨을 잃음. 흑사병 이후 세계는 중대한 변화를 경험. 서유럽에서는 봉건영주와 교회의 지배력에 큰 균열이 발생. 농노들이 저항끝에 신분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시작. 대영주들의 지배력이 컸던 동유럽에서는 이와 반대로 강력한 억압정책의 결과로 농노제가 오히려 강화됨. 서유럽이 선진지역으로, 그리고 동유럽이 후진지역으로 재편되는 과정이었다. 한편 동아시에서는 세계화의 중심축이던 원제국이 쇠퇴함에 따라 유라시아 동서교역도 위축됨. 세계화의 부산물이 흑사병이 결국 세계화를 축소시키는 결과는 낳았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
- 이탈리아 도시들이 동방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상황을 수세기동안 지켜본 유럽 군주들은 아시아로 통하는 새 교역로를 개척하려는 야망을 마음속으로 키워왔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이 야망을 실천으로 옮기는 계기로 작용.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군주들에게 후원을 약속받은 탐험가들이 가장 먼저 새 항로의 개척이라는 벤처사업에 몸을 던짐. 이들의 성공소식은 곧 다른 나라의 군주와 탐험가들을 자극했고, 머지 않아 유럽의 상인들이 장거리 무역을 주도하는 시대가 도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유럽에 대한 아시아의 우위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영향은 메흐메트 2세가 생각했던 바와는 전혀 다르게 흘렀다. 유럽이 대항해 시대의 주역으로 나서게 되고 결국 이것이 세계의 경제적, 기술적, 군사적 무게추를 아시아에서 유럽쪽으로 이동시키는 결과로 이어짐. 역사는 실로 승자가 패자가 되고 패자가 승자로 바뀌는 반전의 연속이다.
- 남미에서 생산된 은은 어디로 갔을까? 스페인인들은 채굴한 은의 대부분을 자국으로 보냈다. 이 은은 스페인이 왕위계승전쟁을 치르고, 종교개혁의 와중에 신교도를 압박하고, 외국에서 많은 물품을 수입하는 데 사용됨. 이 과정에서 은이 서유럽 전역으로 유입되었는데, 이는 다시 서유럽이 발트해 연안에서 곡물과 목재를 수입하고, 레반트에서 동방의 생산품을 구매하고, 무엇보다도 남아프리카를 도는 인도 항로를 통해 인도와 중국의 인기상품을 수입하는 데 사용됨. 한편 아메리카에서 생산된 은의 일부는 태평양을 횡단하는 세계 최장항로를 통해 마닐라에 있는 상관에 보내져 아시아 물품을 구입하는 데 쓰임. 이렇듯 세계 무역망을 통해 아메리카에서 채굴된 은은 지구를 돌고 돌아 중국과 인도로 모아짐. 당시 아미레카를 제외하고 은을 가장 많이 생산한 국가는 일본이었는데, 일본의 은도 수출항 나가사키, 그리고 쓰시마와 류큐를 거쳐 중국으로 향했다. 은이 풍부해진 중국은 조세를 은화로 납부하도록 제도를 개편. 명대 후기와 청대에 실시된 일조편법과 지정은제가 바로 이런 제도였다. 새 조세제도는 은에 대한 수요를 늘려 세계적으로 은을 중국으로 유입시키는 역할을 했다. 마치 전 세계를 연결한 순환펌프가 작동하듯이 은이 지구를 돌고 돌아 중국으로 빨려들었다. 대항해 시대에 지구전체는 은을 매개로 하여 단일경제권으로 통합되었다. 통합된 국제 무역망 속에서 조선의 정세도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 되었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오자 명은 군대를 파병하는데, 이에 따라 막대한 양의 은이 필요해짐. 임진왜란과 전후에 명은 부족한 은을 조달하기 위해 조선에 많은 양의 은을 요구. 세계적으로는 은이 순환펌프에 압력을 높였을 것이고 그에 따라 아메리카에서는 은채굴의 필요성이 더 커졌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인들은 광산의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노예수입을 더 늘렸을 것이다. 은을 매개로 지구 전체가 연결된 상황에서, 임진란이 세계적 노예무역의 증가로 이어졌으리라는 추정은 전혀 비현실적이지 않다. 이렇게 대항해 시댕 은은 식민지 체제와 국제 무역망을 통해 세계를 일주했다. 당시에 은의 종착지가 중국과 인도였다는 사실은 아시아의 경제가 높은 국제경쟁력을 지녔음을 시사. 하지만 이런 세계적 네트워크를 형성한 것 자체가 대항해 시대를 연 유럽인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은 향후 세계경제의 무게중심이 점차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옮겨가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 종교개혁이후 신교를 받아들인 지역은 구교지역에 비해 빠른 경제성장을 보였다. 그 이유를 막스베서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신교의 교리가 개인의 영리추구에 더 잘 부합했기 때무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종교적 가르침의 차이보다 신교지역에서 사람들의 문해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종이와 새 인쇄술이 결합하여 종교적, 비종교적 인쇄물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자, 글을 이해하고 표현하려는 열망이 고조되었다. 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교육에 힘쓰게 되고, 소수의 점유물이었던 지식이 널리 대중화되었다는 것. 백지에서 시작된 이 지식혁명이 경제적 진보를 낳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매우 높다.
- 튤립공황은 지난 300여년 동안 인간의 우매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로 인용되어 왔따. 1720년에 발생한 프랑스의 미시시피 버블 및 영국의 남해회사 버블과 더불어 금융공황의 초기사례로 지목됨. 특히 20세기 후반부터 국제적 금융위기의 발생빈도가 높아지는 환경에서 이 사례들은 학계와 언론에서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들에 대한 학문적 재평가 움직임도 활발.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당시의 투자행위를 전적으로 비이성적 충동으로 매도할 수 없다고 함. 거품의 존재를 알면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적절한 시점에 올라타고 다시 적절한 시점에 뛰어내려 이익을 얻은 합리적 투자자도 많았음. 주요 투자자가 소수의 부유층이었기 때문에 거품붕괴의 영향도 자산의 재분배에 머물렀을 뿐, 국가경제 차원의 타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음. 그렇다면 이 거품들은 어떻게 최악의 거품이라는 오명을 갖게 되었을까? 19세기 철도와 주식시장의 과열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면서 일부 저술가들이 이 거품을 과장되게 서술하여 널리 전파했던 탓이 큼. 영국 찰스 매케이가 1841년 펴년 대중의 미망과 광기라는 책은 이런 과장을 대중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함. 예를 들어 이 책에는 튤립의 알뿌리를 양파로 착각하여 먹었다가 투옥됬다거나 굴뚝청소부와 같은 저소득층까지도 투기열풍에 빠졌다는 일화가 많이 실려 있는데, 이들은 1630년대 당시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는 내용임. 하지만 학술적 성과는 재미가 없고 대중에게 알려지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인터넷과 언론을 통해 튤립거품은 과대포장되어 재생산되고 또 재생산된다
- 18세기까지 인도는 중국과 더불어 세계인들이 소비하는 물건을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였음. 서양의 아시아진출이 시작된 이후에도 무굴제국 시대까지 인도는 세계적으로 유력한 제국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았다. 샤자한은 명품 건축물 타지마할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데, 이를 건축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기술자를 프랑스, 이탈리아, 페르시아에서 데려왔고 장식용 재료를 미얀마, 티벳, 중국, 이집트 등지에서 들여왔다. 인도는 세계적 제국으로서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인도의 최대 수출품은 면직물이었다. 유럽 귀족들이 즐겨 찾은 최고급 직물부터 카리브해에서 노역하는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의 거친 작업복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종류의 면직물들이 인도인의 손에 생산되고 수출되어 국고를 살찌웠다. 노인에서 어린이에 이르는 수많은 인력들이 전통적 방식으로 생산한 면직물이 세계시장을 사실상 석권하고 있었음. 영국을 포함한 유럽 중상주의 국가들은 국내 면공업을 발전시켜 인도산 면직물 수입을 대체하려 노력했지만, 경쟁력에 큰 차이가 났음. 그러나 무굴제국이 영국의 침탈을 받아 몰락하면서, 그리고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전개되면서 인도의 면공업은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됨. 영국은 17세기 동인도 회사를 내세워 인도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경쟁국 프랑스를 물리치고 벵골의 지배권을 확립함으로써 인도 식민지화의 교두보를 확보. 영국은 본국의 면공업 육성을 위해 인도의 면공업을 압박하여 쇠락의 길로 내몰았다. 18세기말부터 영국 북부 랭커셔 지방을 중심으로 면공업이 급성장하면서 영국은 결국 세계시장에서 인도를 몰아냄. 19세기에 영국은 인도 각지의 토후세력들을 분열시켰고, 1857년 세포이의 봉기를 진압함으로써 인도를 직접 통치. 인도는 더이상 면직물 수출대국이 아니라,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영국을 위해 원료인 면화를 공급하는 식민지로 전락
- 영국은 19세기 인도를 다시한번 이용했다. 이번에는 아편을 통해서였다. 영국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무역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아편수출을 늘리기로 기획했는데, 중국에 팔 아편을 생산하는데 인도를 최적의 생산지로 여김. 수확된 아편은 무게 900그램의 둥근 덩어리로 만들어졌는데, 파트나시의 아편창고에만 30만개의 아편덩이가 저장되었다. 얼마나 많은 아편이 생산되어 중국으로 판매되었을지 실감이 난다. 실제로 19세기 초반의 30년 동안 중국의 아편수입량은 10배나 증가. 이후의 역사는 잘 알려진 대로 두차례의 아편전쟁을 통한 영국의 중국침탈과 강압적 개방으로 이어졌다. 서구열강에 의한 강제적 세계화의 가장 대표적 사례였다. 영국의 입장에서 인도는 얼마나 큰 경제적 가치가 있던 것일까? 19세기말~20세기초, 영국은 유럽대륙과 북미에서 심각한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었음. 1901년 대미적자는 5000만 파운드, 대유럽 적자는 4500파운드나 되었다. 이를 해결해 준것이 아시아에서 유입된 자금이었다.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1300만 파운드의 흑자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는 무려 6000만 파운드의 흑자를 보임. 그런데 인도가 영국산 제품을 계속 소비할 수 있었던 데는 중국에서 얻은 아편판매 대금이 중요하게 작용. 영국은 아편을 통해 중국과 인도에서 동시에 막대한 이익을 취했던 것이다. 보통 서구의 역사책에서 이 시기는 세계적으로 무역과 자본투자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호시절로 묘사됨. 그리고 여기에 영국의 역할이 컸다고 설명함. 최대 경제국이었던 영국이 일부 국가들에서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다른 국가들에서는 유사한 규모의 무역흑자를 기록했기 때문에 세계 경제가 글로벌 불균형의 문제를 피해 원활하게 작용했다는 것. 그러나 이 균형은 영국이 정당화하기 힘든 인도의 식민통치와 아편수출, 즉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두가지 부도덕한 정책이 없었더라면 성립할 수 없었다. 인도의 사례는 강제적인 세계화는 손해를 가져오기 십상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영국 사상가 코마스 칼라일은 대문호 셰익스피어를 식민지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원문을 보면 그가 의도했던 말은 미래에 식민지로서 인도는 존재하지 않게 되겠지만 셰익스피어를 통해 풍부해진 영어는 계속 사용되리라는 것. 애초의 의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위의 표현은 셰익스피어의 가치를 강조한 것임에 분명하지만, 비교대상으로 인도를 삼은 것은 식민지 인도의 가치가 영국에 그만큼 컸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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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속 경제사

역사 2016. 4. 17. 07:47

- 칼의 재료로 주목되는 것이 원산지를 과학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흑요석이다. 용암이 지표면에서 급속히 굳어지며 형성되는 흑요석은 인류 역사 초기부터 칼, 화살촉, 도끼 같은 무기도구로 이용됨. 이미 10만~13만년 전으로 추정되는 탄자니아 북부 뭄바 바위그늘 유적에서 나온 7개의 유물은 32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온 것. 에티오피아의 가뎁 유적과 킬롬베 유적에서 흑요석으로 만든 아슐리안 석기 전통의 주먹도끼가 나왔는데 이는 원산지에서 100킬로미터 가량 운반된 것.
- 치아로 판독한 나이에 비해 다른 뼈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거나 두께가 얇을 경우 인골의 주인공은 살아서 단백질 성분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했다고 판단할 수 있음. 또 두개골의 두개관부분의 밀도를 측정하거나 눈을 감싸던 부분의 다공성 여부를 통해 빈혈 여부를 알 수 있음. 비타민 D결핍은 구루병의 흔적으로 남게 되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골막하 출혈 흔적이나 손실된 이빨 개수를 통해 괴혈병 여부도 추론가능. 치아나 뼈에 남은 흔적을 통해 생애주기 중 언제 잘 먹고 언제 고생했는지를 유추할수도 있음. 치아나 뼈에 나이테처럼 영양공급 상태를 남기는 해리스 라인을 분석하면 배고픔과 기아의 고통이 어느정도 였는지 알 수 있음. 이 같은 흔적을 근거로 젠슨스라는 학자의 조사에 따르면 원시시대 크로마뇽인 인골의 88.2%는 사망시 연령이 40세 이하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61.7%는 30세 이하에 죽었다. 네안데르탈 인골의 경우에는 40세 이하 사망률이 95%, 30세 이하 사망률은 80%에 달했다.
- 값싸게 이용할 수 있는 노예노동이 너무 광범위하게 퍼지다보니 일각에선 노예제도가 기술발전을 지체시키는 요인이 됐다고도 분석. 하지만 실제로는 노예제가 그다지 경제적이지 않았다는 평이 지배적임. 앤터니 앤드루스에 따르면 노예에 투자하는 것은 수익이 상당히 적고, 토지만큼 안전한 것도 아니었음. 상인의 항해에 돈을 빌려주는 것보다 안전하긴 했지만 수익도 그만큼 적은 편인 경제행위였다. 노예공급이 풍부하고 노예가격이 저렴한 한도내에서만 노예투자는 합리적인 경제행위였다는 설명. 더글러스 노스도 고대 노예제가 중세 봉건제 장원경제로 넘어간 이유로 노예 시스템을 강요하는 비용이 많이 들고, 상대적으로 노예감시 및 감독비용도 다른 체제에 비해 부담이 컸기 때문이라고 분석. 노예제는 오직 노예가 수지맞는 장사일 때만 작동했던 셈이다.
- 관중은 '시장이 서야 생활이 풍요로워진다'면서 백성에게 잉여생산물의 판로를 제공해 수입을 늘림. 그리고 그는 소비를 장력. 근검절약만이 능사가 아니며 '안 쓰는 것보다 차라리 사치가 필요하다'는 입장. 상인들이란 이익이 있다면 어디든지 가기 때문에 소비가 있으면 상인이 움직일 것이란 논리. 부유한 사람이 돈을 써야 가난한 사람에게 일자리가 생긴다는 낙수효과를 주장한 것도 관중이었다. 사람은 창고가 가득 차 물자가 풍복해져야 예절을 알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풍복해야 영욕을 안다는 인간관을 가졌던 것. 실제 그는 흉년이 들어 빈민이 늘어나자 대규모로 궁전 확장공사를 실시해 일자리를 늘리기도 했음. 2700년 전에 이미 케인스식 불황 타개책을 내놓은 것. 하지만 이 같은 관중의 처방은 중국 사상사에선 비주류 중의 비주류였다. 유학이 지배이념으로 자리잡은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상업발전이 농업의 경제구조를 뒤흔들 수 있다는 두려움에다가, 상인들이 사회지배층의 대항마로 크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집권층의 의도가 반영됐기 때문.
- 로마제국 멸망후 이슬람 세력이 흥기하면서 동방과의 교역선이 끊긴 유럽은 자급자족 경제로 쇠퇴. 이전까지 갈리아에선 마르세유 등의 무역항을 통해서 콘스탄티노플, 이집트,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서 파피루스와 향류, 고급직물, 포도주, 올리브유 등 동방의 생산품이 수입됐다. 하지만 이들 시리아나 동방에서 갈리아 지역으로 수입되던 상품들은 8세기경에 이르면 수입로가 거의 완전히 막힘. 남아 있던 극소수의 무역선을 통해 동방에 내놓을 만한 것도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수지타산도 맞지 않는 노예 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히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자연스레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상품들이 사라져갔다. 가장 먼저 파피루스가 없어졌다. 서유럽 지역에서 파피루스에 쓴 작품들은 대부분 6~7세기 이전의 것. 메로빙거 시대에는 왕실 사무국에서 파피루스만을 사용했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파피루스에 비해 불편하고 질이 많이 떨어지는 양피지로 대체됨. 8세기 말까지도 약간의 개인문서에선 여전히 파피루스가 쓰였지만 이는 예전에 수입해 보관했던 파피루스를 이용한 것. 재고가 떨어진 뒤에는 예전에 수입해 보관했던 파피루스를 이용한 것이었다. 벨기에 출신 중세사가 앙리 피렌은 '갈리아에서 파피루스가 사라진 것은 상업이 쇠퇴하고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파피루스가 아니라 향신료에 대한 언급도 이 시대 사료에서 사라지기 시작. 이 시대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강제로 입맛도 단순해짐. 지중해에서 상업이 재개된 12세기가 돼서야 향신료는 서유럽 지역에 다시 등장. 가자 지방 특산이었던 와인수입도 끊겼고, 오일도 더 이상 아프리카에서 수출되지 않았따. 아프리카산 오일을 구하지 못하면서 프로방스 지방에서 생산된 대체품으로 오일수요을 메웠지만 역부족이었음. 결국 이 시대 이후부터 교회에선 기름을 사용하는 등잔불이 아니라 양초를 이용해 불을 밝히게 됐다. 실크도 더 이상 구경할 수 없게 되면서 샤를마뉴 대제같은 유럽의 최고위층까지도 소박한 옷을 입었다고 전해짐. 샤를마뉴의 검소한 의상은 이전시대 메로빙거 국왕들의 화려한 의복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따. 아마도 샤를마뉴가 검소하게 입고 싶어서 그렇게 입었던 것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이 시대에는 심지어 부의 상징인 금의 공급마자 감소. 8세기 주조된 금화는 금과 은의 합금으로 주조됐는데 시간이 갈수록 은의 분량이 증가. 금이 동방에서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 갈리아에선 금화가 아주 귀한 것이 되면서 더는 통화로 사용되지 않았음. 금은 교환의 매개물로서보다는 그 가치가 교회를 장식하기 위한 보석으로 혹은 장식용 마구로 더 인정받았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피핀과 샤를마뉴 시대부터는 데나리우스 은화만 주조됐다. 동방과의 해상교역이 쇠퇴하면서 직업상인은 사라졌다. 포도주와 소금 등 약간의 필수품 운송이나 소규모의 불법적 노예무역 정도만 명맥을 유지. 상업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과는 다른 소규모의 국지상업으로 위축됐고, 상인도 비정규적인 존재로 전락. 상품과 사치품은 상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쟁이나 약탈에 의해 유통되거나 선물형태로 교환됐다. 중세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서유럽 주요 지역은 촌락중심 경제로 재편됐고 경제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의 삶은 촌락에 묶였다. 당시 농업이 수준은 풍년이 들어도 잉여 농산물이 거의 없고 흉년이 들면 심각한 기근이 불가피한 수준이었다. 대장장이나 목수 등 일부 직업분화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 농민들은 장인역할까지 같이 했다. 살라카법전에는 대장장이, 목수, 기타 노동자를 통칭하는 두루뭉술한 용어인 faber만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소수의 장인들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역농민으로 잡았다. 로마제국 시대의 교환경제는 폐쇄적인 소비경제로 대체됐다. 9세기에 이르면 서유럽 지역은 폐쇄적 가내경제, 혹은 시장없는 경제의 황금기로 평가되기도 함.
- 중세시애 기사 한사람을 부양하는 비용은 결코 만만치 않았음. 11세기 말에는 기사가 타는 말 한마리 가격이 황소 5~10마리 가격과 맞먹었음. 기사들이 입는 갑옷은 그런 말보다도 훨씬 비산 럭셔리 제품이었다. 말을 탄 기사는 한마디로 값비싼 이동요새 같은 존재였다. 비유적 표현일수도 있지만, 구식 가죽갑옷을 대신해 등장한 사슬(미늘)갑옷은 말보다 네배에서 10배나 비싼 것으로 전해짐. 즉 갑옷 한벌 가격이 황소 20~100마리에 해당했던 것. 문제는 기사가 된 뒤, 기사생활을 유지하려면 말이 한 마리만으로는 부족했다는 데 있다. 긴 행군을 하고 나면 말이 지쳐 막상 전장에 투입될 수 없었기 때문. 이에 따라 1100년 플랑드르 백장이 500명의 기사를 소집할 때 기사 한명당 말 세마리를 보유하도록 주문. 말이 세마리 필요했던 것은 행군마와 전투마, 짐말이 제대로 갖춰져 있어야만 기사가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 이처럼 기사 한명을 부양하기 위해 드는 비용을 오늘날 수준으로 단순비교해보면 소 한마리를 500만원이라고 가정할 경우 싸게는 1억 7500만원에서부터 6억 5000만원에 이름. 1000년 전 중세시대 소의 가치가 오늘날보다 훨씬 컸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사로 출사하기 위해서는 5억에서 10억 가량의 여유자금을 굴릴 수 있는 경제력이 있어야 했따. 여기에 당시엔 희귀품목이던 창이나 칼같은 무기류에서 종자를 부리고 먹일 돈도 별도로 포함돼야 함. 기사로 성장하는 데 교육기간도 오래 걸린만큼 십수년의 교육비용도 고려되지 않았다.
- 전대미문의 대공포가 지나간 뒤 살아남은 사람에겐 흑사병이 일종의 축복이었다. 사람이 귀해지면서 몸값이 높아졌고, 일자리와 재산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풍족해졌기 때문. 부동산 소유권의 이전도 활발해짐. 폴란드에서 잉글랜드까지, 노르웨이에서 시칠리아까지 전 유럽에서 대규모로 부동산의 주인이 바뀜 19세기 영국 중세학자 서롤드 로저스는 '페스트의 의미는 토지에 완전한 혁명을 도입한 데 있다'고 평했을 정도. 11세기 이후로는 임금지급이 없던 과거의 농노제는 효율성을 급격히 상실해감. 지주에 대한 농민의 반감은 오늘날 거대기업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는 것처럼 흔한 일이기도 했다. 지주들은 토지를 소작 주고자 했으며 과거 현물로 지불되던 지대는 점차 금나븡로 대체됨. 농노보다 신분적 예속이 적은 노동자가 일을 더 잘한다는 사실을 지주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지주들은 상대적으로는 중노동이라고 하더라도 미리 분량이 정해져 있는 일을 하는게 절대량은 적다해도 분량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일을 하는 것보다 환영받는 점도 터득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자연스레 흑사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높은 임금을 요구. 예전에 찍소리 못햇을 사회 하급계층과 농민들은 어느덧 영주와 지주, 귀족들에게 큰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귀족층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지고 중산층의 영향은 커지고, 사회하층도 덩달아 여유가 커짐. 14세기말부터 15세기까지를 후대 역사가들은 잉글랜드 농민의 황금시대로 부르게 됨. 실제 당시 농민들의 실질소득 수준은 19세기가 될 때까지 가장 높은 수준이었던 것으로 평가받음
- 루이 14세 이래 프랑스는 사치풍조가 급속히 확산되던 사회였다. 각종 사치풍조는 궁정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지방으로 부자에게서 가난한 사람에게로 전해짐. 이런 시기에 하이힐도 큰 위력을 보이며 퍼짐. 당대 지식인들이 "사람의 품위가 식탁과 그 밖의 사치품에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가에 의해 평가되는 시대"라고 개탄하던 시기에 걸맞게 각종 사치풍조가 경쟁적으로 퍼졌고, 패션은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됨. 하지만 이런 현상은 유럽 주요 국가에서 고급 창녀들이 사회적으로 돌출 되면서 조금씩 예상밖의 진로로 나가게 됨. 바로 신분이 높은 품위 있는 여성들의 취향이 창녀들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 이전에는 엄격하게 구분되던 힐의 모양도 한편에선 매춘부의 것이라고 딱히 구분되기 힘든 형태로 변해가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한방향으로 나가게 됐다. 유명한 창녀들은 어느새 패션의 모범이 되어갔고, 궁정에 대항하는 경쟁상대로 등장. 상류사회 여인들도 남성중심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되지 않으려면 애첩, 창녀들과 일종의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많은 부분 창녀들로부터 자극을 받아 그들의 장점을 수용. 경제사가 베르너 좀바르트에 따르면 여성들이 고급 창녀로부터 자극을 받아 수용한 가장 대표적인 장점이 비로소 몸을 씻게 됐다는 게 아이러니긴 하지만 말이다.
- 논쟁의 여지가 많고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점도 없지는 않지만 세계체제론을 주장했던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16세기이래 자본주의 성립이후 대차대조표를 보면 물질적 측면에서 세계가 그다자 덕을 본게 없다는 박한 평을 내리기도 함. 월러스틴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역사적 자본주의라 구분지어 무를 정도로 특이한 현상이다. 봉건제 생산양식은 축적된 자기모순 때문에 붕괴가 필연적이었지만, 그 뒤를 이은 자본주의의 출현은 결코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시각. 역사적 자본주의는 15세기 말엽 유럽에서 탄생해 시간이 지나면서 우연히 공간적으로 연이은 통합과정을 거쳤고, 팽창을 거듭해 19세기 말까지 전 지구를 뒤덮게 된다. 월러스틴은 자본주의의 등장이 가능했던 이유로 봉건제의 생존력이 다했다는 점을 든다. 1450~1750년 사이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부상했던 반면 1150~1450년에도 이와 비슷한 무너질 수준이 아니었기에 기존체제가 존속될 수 있었다는 설명. 세계체제론에서 봉건제는 내부 위기를 맞이해 위기에 몰린 귀족계급이 "역사의 흐름을 거스른 대응을 한 덕"에 자본주의로 대체됐다. 봉건적 토지제도가 흐트러지면서 농민들의 봉기가 늘었고 평등한 분배를 실현하려는 움직임이 진척됨. 소규모 차지농들의 생산효율성이 증대됐고, 인구감소 현상도 발생. 정치구조의 취약성은 여전했고, 귀족들의 내부상쟁이 밎어지면서 대중을 억누를 힘이 약해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카톨릭 이데올로기마저 힘을 잃어가면서 봉건귀족들의 위기의식은 커져감. 결국 위기에 몰린 귀족계급은 기존의 시장기제를 이용해 간접적으로 잉여를 착취하는 체제를 일구었다는 설명이다. 당시 유럽은 영주수입의 감소를 보상하고 격렬한 계급전쟁의 가능성을 차단하면서 귀금속, 식량, 향로, 원료와 유순한 노동력을 제공해줄 새로운 지역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 당시 항해 사업에 뛰어들 충분한 동기와 역량을 겸비한 나라가 바로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훗날 스페인)이었다.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시작된 점도 16세기 당시 유럽의 애매한 위상과 관련이 크다. 유럽이 생산력과 체제 결속력에서 전 세계의 중간수준 지대였다는 지적이다. 당시 유럽은 후진적 원시경제도 아니면서 아시아처럼 생산력과 체제 결속력이 강하고 지식면에서 높은 수준을 갖춘 지역이 아니었기에 쇠퇴해가는 지주귀족 계급이 부르주아지로 변신해 하급계층과 다른 지역 대중에 대한 착취와 지배를 지속시킬 수 있었다고 보는 것.
- 흔히 교육은 소득격차와 사회적 격차를 줄일 것으로 포장되고 사회적 부를 재분배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교육시설이 확장되면서 일정한 직업에 요구되는 교육수준도 줄곧 높아졌다. 1990년 중등교육을 이수한 사람이 1890년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과 똑같은 직업을 갖게 되었다. 자본주의 문명의 산물인 능력주의도 신화에 불과하다고 일갈한다. 능력주의는 자본주의 등장 이전에는 신분에 의해 사람의 지위가 정해졌지만 프랑스 혁명에서 주장된 재능에 따른 출세가 보편화된 것을 지칭. 하지만 이전 시대에도 개인의 사회적 상승은 언제나 있었고, 다만 자본주의 시스템하에서 능력주의가 하나의 공식적 덕목으로 천명된 점이 차이점이라는 설명. 사회신분 상승이 가능했던 비율이 과거보다 늘기는 했지만 이는 여전히 소수의 몫으로 남아있다는 지적이다. 한마디로 자본주의가 이룬 인류역사상의 진보를 믿는 것은 역사적 자본주의가 퍼뜨린 자기정당화의 이념에 물든 것이라는 진단이다. 월러스틴에게 역사적 자본주의는 지속적으로 불평등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일부 수혜자는 있지만 세계인구의 50~85%에겐 더욱 상황이 나빠진 퇴보의 역사에 불과했다. 그에게 자본주의는 결코 진보적인 것이 아니며 대안적 역사적 가능성을 제거한 암흑희 사도였다. "자본가들은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자본을 축적하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계속 달리기만 했고 그런 과정에서 일부는 더 잘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비참하게 살게 됐다"는 게 월러스틴의 요약이다. 세계 인구 중 대다수가 자본조의 등장 이후 이전의 역사적 체제보다 물질적으로 못살게 됐다고 믿는 것이 세계체제론의 결론인 셈이다. 일반적 통념과는 다르지만 누구나 당연히 여기던 자본주의의 성과를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월러스틴의 역사적 자본주의 논쟁은 음미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 관료들에게 있어서 상인은 언제나 개인적 이익 혹은 국가적 이해관계를 위해 이용하거나 쥐어짜야 할 존재에 불과했다. 상업활동은 언제나 관료의 감독과 징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소금과 철, 차, 비단, 담배, 소금, 성냥 등은 국가가 전매제도로 운영. 관료들은 어떤 상인층도 이런 특권을 침식할만큼 독자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관료들은 상호간 보호관계와 혈연관계를 맺으면서 사실상 세습적 관료귀족제를 구축. 관료들은 상인의 사유재산권을 무시했고, 아무리 큰 상업세력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선 관료의 후원과 지지를 얻어야만 했다. 오늘날로 치면 상인과 은행가, 중개인, 그리고 모든 종류의 거래인은 관료제에 종속된 부속계층에 불과했다. 학자 관료집단은 세금이라는 수단을 통해 상인들이 그들에게 도전하는 것을 방지하는 국가독점체제를 창조. 관료들은 농민과 상인이 힘을 합치는 것을 두려워했고 이를 방지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임. 그리고 유교적 효의 덕목을 강조하면서 중국을 순종적 대중을 생산해내는 거대한 공장으로 만들었다.
- 서구학자들은 상인들이 지주신사와 관료에 종속돼 독자적으로 확고한 지위를 확립하지 못한 데서 자본주의가 중국에서 번창하지 못했다고 진단. 그나마 관료로 대표되는 중국의 엘리트들은 중화문명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만심에 빠져 변화의 필요성을 못느꼈고 현실에 안주하려 했다. 이 같은 체제에서 경제적 인간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생산된 것 가운데 자신의 몫을 최대한 늘리는 자였다. 혁신적 기업가정신보다 관리에게 돈을 지불해 기존 시장을 통제하는 독점이라는 지름길을 택하는 게 합리적이면서도 선택가능한 대안이었다. 이를 두고 페어뱅크는 "중국의 전통은 보다 나은 쥐덫을 만드는 게 아니라 쥐에 대한 공인된 독점권을 얻는 것"이라고 비꼬았다.
- 오랫동안 화폐의 기준이 되는 무게 역할을 하던 금속으로는 금와 은이 경쟁. 사실 전근대 사회에선 은을 기준으로 삼는 문명권이 일반적. 19세기까지 동양과 서아시아, 남미, 독일,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은본위제를 시행. 이 같은 금과 은의 경쟁에서 금이 승자가 된 때는 19세기다. 결정적 계기는 1859년 미국 네바다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면서 은의 가치가 급격히 떨어진 것. 1871년 은본위제를 고수하던 독일이 금본위제로 이행하면서 금대세론은 굳어짐. 때마침 독일은 보불전쟁의 승리로 프랑스로부터 50억프랑의 배상금을 받아 금본위제 전환비용을 감당할 수 있었음. 독일이 금본위제를 실시하면서 보유하고 있던 다량의 은이 국제시장에 나오게 되면서 금가격이 상승하고 은의 가격이 떨어짐. 이보다 약간 앞서 대규모 금광도 발견됐지만 금은 은과는 다른 효과를 내게 된다. 1850년을 전후해 캘리포니아와 호주에서 금광이 발견돼 금 가격이 하락. 새로운 금광발견으로 25년간 생산된 금의 양이 이전 250년간 생산된 금의 양과 맞먹을 정도가 됐다. 하지만 대규모 은의 발견이 은본위제의 퇴출을 가져온 것과 달리 금광 발견으로 금본위제는 위축되는 게 아니라 미국과 프랑스, 벨기에 등에서 통용되던 금은양본위제가 쫓겨났다. 금은양본위제는 금과 은의 가격비율을 고정적으로 정해놓은 뒤 그와 연결해 화폐를 발행하는 것으로 국제 금은 시세와 자국에서의 가격비가 같거나 비슷해야 유지된다. 그러나 대규모 금광 발견으로 국제시장에서 은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되면서 은은 해외로 유출되고 국내엔 금만 유통돼 사실상 자연스레 금본위제로 전환된 것. 이에 따라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등 소위 프랑권 국가들이 1870년대 금본위제로 이행했고 미국도 1900년에 금본위제를 채택. 1900년이 되면 유럽과 북미, 일본, 아르헨티나까지 주요국이 금에 기반을 둔 화폐체제를 구축. 고전적 금본위제가 자리잡은 것이다.
- 19세기 후반 금과 은 모두 생산이 늘었지만 두 금속의 위상이 극과 극으로 달라진 금본위제로의 이행배경에는 영국의 힘이 있었다. 바로 금의 가치가 지고지선해서가 아니라 영국이 금본위제를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 원래 중세부터 나폴레옹 전쟁때까지 영국은 은본위제 국가였음. 영국 화폐단위 파운드 스털링은 법적으로 스털링은의 무게를 재는 단위에서 기원.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영국 중앙은행이 전비조달에 전력하는 과정에서은본위제가 폐지되고 1816년 금본위제가 선택됨. 영국이 금본위제를 실시하자 1870년대 영국의 재정지원을 받고자 하는 많은 나라는 금본위제로의 이행을 서둘렀다. 또 이들과 교역하던 많은 나라도 불이익을 줄이려고 금본위제를 택했다. 당시 최대 교역국으로 주요 운송국이며 해외자본 수출국이었던 영국의 화폐가 사실상 국제 지불수단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던 점이 배경에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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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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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역사 2016. 4. 3. 22:21

- 수렵채집인의 확산화 함께 벌어졌던 제1의 물결 다음에는 농부들의 확산과 함께 벌여졌던 멸종의 제2의 물결이 왔고, 이 사실은 오늘날 산업활동이 일으키고 있는 멸종의 제3의 물결에 대한 중요한 관점을 제공. 우리 조상들이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았다는 급진적 환경보호운동가의 말은 믿지 마라. 산업혁명 훨씬 이전부터 호모사피엔스는 모든 생물들을 아울러 가장 많은 동물과 식물을 멸종으로 몰아넣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음.
- 한때 학자들은 중동의 어느 특정 지점에서 농업이 시작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중동 농부들이 자신들의 혁명을 수출한게 아니라 농업은 세계 여러지역에서 완전히 독자적으로 생겨났다는 생각에 합의하고 있음. 중미 사람들은 중동에서 밀과 완두콩을 재배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옥수수와 콩을 작물화했다. 남미 사람들은 멕시코나 지중해 지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채 감자를 재배하고 라마를 키우는 법을 익혔다. 중국의 초기 혁명가들은 쌀과 수수를 작물화하고 돼지를 가축화했다. 북미의 첫 정원사는 먹을 수 있는 호리병막을 찾아 땅속을 샅샅이 뒤지는 데 진력이 나서 호박을 재배하기로 결심했다. 뉴기니 사람들은 사탕수수와 바나나를 길렀고, 그동안 서부 아프리카 최초 농부들은 아프리카 수수, 아프리카 쌀, 수수와 밀을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작물화. 이들 지역에서 농업은 널리 퍼져나감. 기원후 1세기 쯤이 되자 세계 대부분의 지역 사람들 대다수가 농민이 되었다.
- 진화적 성공과 개체의 고통간의 이런 괴리는 우리가 농업혁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 우리가 밀이나 옥수수 같은 식물의 이야기를 조사할 때는 순수한 진화적 관점이 타당할 지 모른다. 하지만 소나 양, 사피엔스처럼 각자 복잡한 기분과 감정을 지닌 동물의 경우, 진화적 성공이란 것이 개체의 경험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도 우리는 우리 종이 집단적으로 힘을 키우고 외견상 성공을 구가한것이 개개인의 큰 고통과 나란히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될 것이다.
- 역사상의 전쟁과 혁명 대부분은 식량부족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의 선봉에 선 것은 굶주린 농부가 아니라 부유한 법률가들이었다. 고대 로마 공화국은 기원전 1세기에 국려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때는 귀중품을 가득 실은 지중해 전역의 선단들이 그 전 선조들은 상상도 못했을 정도로 로마인들을 부유하게 만들어 주던 시기였다. 하지만 로마의 정치질서가 붕괴해서 일련의 치명적 내란이 일어난 것 또한 부가 절정에 이르렀던 바로 이 시점이었다. 91년 유고는 국민 모두를 먹여 살리고도 남을 만한 능력이 있었지만 국가는 해체되고 끔찍한 유혈극이 벌어졌다. 이런 재난들의 근원에 깔린 문제점은 인류가 지난 수백만년 동안 불과 수십명으로 구성된 작은 무리에서 진화해 왔다는 사실. 농업혁명이 일어난 뒤 도시와 왕국과 제국이 출현하는 데는 불과 몇천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대규모로 협력하는 본능이 진화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 자연의 질서는 안정된 질서다. 설령 사람들이 중력을 믿지 않는다 해도 내일부터 중력이 작용하지 않을 가능성은 없다. 이와 반대로 상상의 질서는 언제나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화에 기반하고 있고, 신화는 사람들이 신봉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 상상의 질서를 보호하려면 지속적이고 활발한 노력이 필수. 이런 노력 중 일부는 폭력과 강요의 형태를 가짐. 군대, 경찰, 감옥은 사람들의 상상의 질서에 맞춰 행동하도록 강제하면서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음. 어떤 바빌론 사람이 이웃의 눈을 멀게 했다면 그에게 '눈에는 눈' 법을 강제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모종의 폭력이 필요.
-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나 민주주의, 자본주의 같은 상상의 질서를 믿게 만드는 방법은 무얼까? 첫째, 그 질서가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아야 함.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는 위대한 신이나 자연법에 의해 창조된 객관적 실재라고 늘 주장해야 함. 사람이 평등하지 않은 것은 함무라비가 그렇다고 해서가 아니라 엔릴과 마르두크가 그렇게 명했기 때문. 사람이 평등한 것은 토머스 제퍼슨이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신이 그렇게 창조했기 때문. 자유시장이 최선의 경제체제인 것은 애덤 스미스가 그렇다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불변의 자연법칙이기 때문. 또한 사람들을 철저히 교육시켜야 한다. 그들이 태어나자마자 세상 만물에 스며들어 있는 상상의 질서원리들을 끊임없이 주지시켜야 함.
- 문자체계가 인간의 역사에 가한 가장 중요한 충격은 정확히 이것, 즉 인간이 세계를 생각하는 방식과 세계를 보는 방식이 점차 바뀌었다는 점이었다. 자유연상과 전체론적 사고는 칸막이와 관료제에 자리를 내주었다.
- 농업혁명 이후 수천년에 이르는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됨. 인류는 어떻게 자신들을 대규모 협력망으로 엮었는가? 그런 망을 지탱할 생물학적 본능이 결핍된 상태에서 말이다. 간단하게 답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상상의 질서를 창조하고 문자체계를 고안해 냈기 때문. 우리는 이 두가지 발명품을 통해 생물학적으로 물려받은 것에 의해 생겨난 틈을 메웠따. 하지만 이런 협력망들의 출현은 많은 사람에게 의심스럽고 불안한 축복이었다. 그물을 지탱하는 상상의 질서는 중립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았다. 그 망은 사람들을 서열로 구분된 가상의 집단으로 나누었다. 상류층이 특권과 권력을 향유하는 동안, 하류층은 차별과 압제로 고통을 받았다. 가령 함무라비 법전은 귀족, 평민, 노예 사이의 서열을 확립. 귀족은 좋은 것을 모두 가졌고, 평민은 그러고 남은 것을 가졌으며, 노예들은 불평을 하면 채찍질을 당했다.
- 힌두교 카스트 제도가 형성된 것은 약 3천년전 인도아리아 사람들이 인도 아대륙을 침략해 현지인들을 복속시켰을 때. 침략자들은 계층화된 사회를 건설하여, 자신들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현지인들은 하인과 노예로 삼음. 수가 적었던 침략자들은 특권적 지위와 고유의 정체성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 그런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그들은 사람들을 카스트로 구분했고, 각 카스트는 특정한 직업을 갖거나 사회에서 특정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 대부분의 사회정치적 차별에는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으며, 우연한 사건이 신화의 뒷받침을 받아 영속화한 것에 불과.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중 하나가 이것이다. 만일 흑인과 백인의 구분, 브라만과 수드라의 구분이 생물학적 실체에 근거를 두었다면 어떨까? 만일 브라만이 정말로 수드라보다 더 나은 뇌를 갖고 있다면? 그렇다면 인간사회를 이해하는 데는 생물학으로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각기 다른 집단이 지니는 생물학적 차이는 사실상 무시할만한 수준이므로 생물학으로도 인도사회의 곡저이나 미국 인종차별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음. 우리는 상상의 산물을 잔인하고 매우 현실적 구조로 바꿔놓은 사건들, 조건들, 권력관계들을 연구해야만 그런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음.
- 인지부조화는 흔히 인간정신의 실패로 여겨짐. 하지만 사실 그것은 인간의 핵심자산. 만일 사람들에게 모순되는 신념과 가치를 춤을 능력이 없었다면, 인간의 문화 자체를 건설하고 유지하기 불가능했을 것임. 예컨대 기독교인인 당신이 근처 모스크에 참배하러 가는 무슬림을 정말로 이해하고 싶다면, 모든 무슬림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순수한 가치들이 무엇인지 찾아볼 필요가 없음. 그보다는 무슬림 문화에서 가장 극심한 딜레마의 현장을 찾아봐야 함. 규칙이 서로 충돌하고 규범이 서로 난투를 벌이는 지점 말이다. 무슬림들이 두가지 지상명제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지점이야말로 당신이 그들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다.
- 우리는 여전히 고유문화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만일 그 고유성이라는 것이 독자적으로 발달한 무엇,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대의 지역전통으로 구성된 것을 뜻한다면, 오늘날 지구상에는 고유문화가 하나도 없다. 지난 몇세기 동안 모든 문화는 홍수처럼 범람한 지구적 영향들에 의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이런 지구화의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이른바 민속요리다. 우리는 이탈리아 식당에서는 토마토 소스를 넣은 스파게티를 예상하고, 폴란드와 아일랜드 식당에서는 많은 감자를, 아르헨티나 식당에서는 수십종의 스테이크 중 하나를 고를 것을, 인도 식당에서는 거의 모든 음식에 매운 고추가 들어갈 것을, 모든 스위스 카페의 하이라이트는 크림을 잔뜩 넣은 뜨겁고 진한 코코아일 것을 예상한다. 하지만 이중 어떤 음식도 이들 국가가 원산지는 아니다. 토마토, 고추, 코코아의 원산지는 멕시코다. 이것들은 스페인이 멕시코를 정복한 다음에야 유럽과 아시아에 들어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단테 알리기에는 토마토 소스가 듬뿍 묻은 스파게티를 포크로 감아본 일이 없다. 윌리엄 텔은 초콜릿을 맛본 일이 없으며 부처는 음식에 고추를 넣어 먹은 일이 없다. 감자가 폴란드와 아일랜드에 들어온지는 4백년도 채 되지 않았다. 1492년 아르헨티나에서 얻을 수 있는 스테이크는 라마고기로 만든 것뿐이었다.
- 기원전 첫 밀레니엄 동안, 보편적 질서가 될 잠재력 있는 후보 세가지가 출현. 세 후보 중 하나를 믿는 사람들은 처음으로 세계 전테와 인류전체를 하나의 법 체계로 통치되는 하나의 단위로 상상할 수 있었음.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모두가 '우리'였다. '그들'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로 등장한 보편적 질서는 경제적인 것, 즉 화폐 질서였다. 두번째 보편적 질서는 정치적인 것, 즉 제국의 질서였다. 세번째는 종교적인 것, 즉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보편적 종교의 질서였다.
- 철학자와 사상가와 예언자는 수천년에 걸쳐 돈을 흉보면서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매도.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한편 돈은 인류가 지닌 관용성의 정점이다. 돈은 언어나 국법, 문화코드, 종교, 신앙, 사회적 관습보다 더욱 마음이 열려 있다. 인간이 창조한 신뢰 시스템 중 유일하게 거의 모든 문화적 간극을 메울 수 있다. 종교나 사회적 성별, 인종, 연령, 성적 지향을 근거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은 유일한 신뢰 시스템이기도 하다. 돈 덕분에 서로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신뢰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
- 오늘날 종교는 흔히 차별과 의견충돌과 분열의 근원으로 여겨짐. 하지만 실상 종교는 돈과 제국 다음으로 강력하게 인류를 통일시키는 매개체. 모든 사회질서와 위계는 상상의 산물이므로 모두 취약하게 마련. 사회가 크면 클수록 더욱 그러함. 종교가 역사에서 맡은 핵심적 역할은 늘 이처럼 취약한 구조에 초월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 종교는 우리의 법은 인간의 변덕의 결과가 아니라 절대적 최고 권위자가 정해놓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처렴 최소한 몇몇 근본적인 법만큼은 도전받지 않을 수 있었으므로, 사회의 안정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종교는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 다신교의 통찰은 폭넓은 종교적 관용을 낳기 쉬움. 다신교도들은 한편으로는 하나의 최고권력, 완벽하게 무심한 권력을 믿고, 다른 한편으로 편견을 지닌 수많은 권력을 믿으므로 하나의 신에 헌신하는 사람이라도 다른 신들의 존재와 효험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없다. 다신교는 본질적으로 마음이 열려 있으며 이단이나 이교도를 처형하는 일이 드물다. 다신교도는 심지어 거대한 제국을 정복했을 때도 피정복민을 개종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집트인, 로마인, 아즈텍인은 오시리스, 유피테르, 우이칠로포치틀리(아즈텍 최고 신)에 대한 신앙을 전파하려 선교사를 외국에 파견하지 않았고, 이를 목적으로 군대를 파견하지도 않았다. 제국내의 모든 피정복 민족들은 제국의 신과 의례를 존중할 것으로 기대되었따. 이들 신과 의례가 제국을 보호하고 정당화하기 때문. 하지만 자산의 지역 신과 의례를 포기하라는 요구를 받지는 않았다. 아즈텍 제국에서 피정복민들은 우이칠로포치틀리 신전을 지어야 했지만, 기존의 지역 신전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그 옆에 세웠다. 많은 경우 제국의 엘리트 자체가 피정복민의 종교와 의례를 받아들였다. 로마인들은 아시아의 키벨레 여신을, 이집트인들은 이시스를 그들의 만신전에 기꺼이 추가했다. (키벨레는 소아시아 고대국가 프리기아의 대지의 여신, 이시스는 풍요의 여신)
- 다신교는  여기저기서 다양한 일신교를 잉태했으나, 이런 종교들은 주변부에 남아 있었다. 스스로의 보편적 메시지를 소화하지 못한 탓이 적지 않았다. 가령 유대교는 우주의 최고 권력은 사심과 편견을 지니는데, 그분의 주된 관심은 조그만 유대국가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모를 땅에 있다고 주장. 유대교는 다른 나라에게는 이 믿음을 권하지 않았고, 그 존속기간 대부분 동안 선교를 하지도 않았다. 이 단계를 우리는 지역적 일신론 단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비약적 돌파구는 기독교와 함께 왔다. 기독교 신앙은 나자렛 예수가 그들이 오래 기다리던 구세주라는 것을 유대인에게 확신시키려 했던 비전의 유대교 분파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분파의 첫 리더 중 하나였던 타르수스의 바울은 만일 우주의 최고 권력이 관심과 편견을 지니고 있으며 수고롭게도 피와 살을 가진 존재로 화신하셔서 인류를 구원하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면 이것은 유대인에게 뿐만 아니라 만민에게 전파되어야 할 이야기이므로, 예수에 대한 좋은 말씀(복음)을 전 세계로 전파하 필요가 있다고 추론했다. 바울의 주장은 비옥한 땅에 씨를 뿌렸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인류를 겨냥해 광범위한 선교활동을 조직하기 시작. 이 비의적 유대교 분파가 강력한 로마제국을 접수한 것은 역사상 가장 이상한 사태전개로 꼽힘. 기독교의 성공은 7세기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현한 또 다른 일신교의 모델이 되었다. 이슬람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구석진 곳의 작은 분파로 시작했지만, 기독교보다 더 이상하고도 놀라운 업적을 이룩. 아라비아 사막을 벗어나 대서양에서 인도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제국을 정복하기에 이른 거이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일신교 사상은 세계사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됨.
- 일신론자가 어덯게 그런 이신론적 신념을 품을 수 있을까.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전지전능한 유일신을 믿거나 둘다 전능하지 않은 서로 대립되는 힘을 믿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모순을 믿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수백만명의 경건한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교인이 전능한 신과 독립적 악마를 둘다 동시에 믿는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수없이 많은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교인은 심지어 선한 신과 악이 싸울 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상상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런 상상은 여러가지를 고취시켰는데, 이 중에는 지하드와 십자군을 일으켜야 한다는 요구도 포함됨.
- 일신론은 역사에서 나타났듯이 일신론과 이신론, 다신론, 애니미즘 유산이 하나의 신성한 우산밑에 뒤섞여 있는 만화경이다. 보통 기독교인은 일신론의 하느님만이 아니라 이신론적인 악마, 다신론적인 성자, 애니미즘적 유령을 모두 믿음. 종교학자들은 이처럼 서로 다르고 심지어 상충하는 사상을 동시에 인정하는 행위와 각기 다른 원천에서 가져온 의례와 관계를 혼합하는 행위에 대한 명칭으로, 제설 혼합주의를 썼다. 실제로 제설 혼합주의야말로 단 하나의 위대한 세계종교일지도 모른다.
- 우리는 세상의 신념들을 신 중심의 종교와 자연법칙을 기반으로 한다고 주장하는 신 없는 이데올로기의 두종류로 나눌 수 있음. 하지만 이때 일관성이 있으려면, 적어도 불교, 도교, 스토아철학의 일부 분파는 종교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목록에 올려야 함. 그리고 거꾸로 많은 근대 이데올로기 속에 신에 대한 믿음이 계속 존재하며 그중 일부, 대표적으로 자유주의는 그런 믿음이 없다면 거의 의미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함.
- '어떻게'를 서술하는 것과 '왜'를 설명하는 것은 뭐가 다를까? '왜'를 설명한다는 것은 왜 다른 사건이 아니라 하필 이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인과관계를 찾는다는 것을 의미. 일부 학자들은 실제로 기독교의 발흥같은 사건에 결정론적 설명을 제시함. 이들은 인간사를 생물학적, 생태학적 혹은 경제적 힘의 작용으로 설명하려 함. 이들은 로마가 지배했던 지중해 연안의 지리적, 유전적, 경제적인 뭔가가 필연적으로 일신론의 발흥을 가져왔다고 주장.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런 결정론적 이론에 회의적임. 학문 분과로서의 역사학이 지닌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특정한 역사 시대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왜 하필 일이 그런 식으로 전개되었으며 다른 식으로는 전개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점. 특정 시대에 대해 피상적 지식만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실현된 가능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음. 이들은 사후 깨달음을 근거로, 어째서 그런 결과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이론으로 설명함. 반면 해당 시대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진행되지 않은 경과를 훨씬 많이 인식하고 있다. 사실 그 시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다시 말해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야말로 그 시대를 가장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후의 깨달음에 의해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정작 그 시대에는 전혀 명백하지 않은 일이었따. 이 역사의 철칙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 현대과학은 과거의 모든 전통지식과 다음 세가지 점에서 결정적으로 상이함
1.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기 : 현대과학은 라틴어로 표현하면 '이그노라무스'(우리는 모른다)에 기반을 둠.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면 틀린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떤 개념이나 아이디어, 이론도 신성하지 않으며 도전을 벗어난 대상이 아니다
2. 관찰과 수학이 중심적 위치 차지 : 무지를 인정한 현대과학은 새로운 지식의 획득을 목표로 사음. 그 수단은 관찰을 수집한 뒤, 수학적 도구로 그 관찰들을 연결해 포괄적인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3. 새 힘의 획득 : 현대과학은 이론을 창조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음. 이론을 사용해서 새 힘을 획득하고자 하며, 특히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자 함
- 일반적으로 근대 이전 대부분의 지배자와 사업가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려는 목적으로 우주의 속성에 대한 연구에 자금을 대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자신이 발견한 내용을 기술적 장치로 해석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지배자들은 교육기관에 자금을 댔지만, 그런 기관의 의무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하에 전통적 지식을 확산시키는 데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지만, 그 기술들은 보통 교육을 받지 못한 장인들이 시행착오를 통해 만들어낸 것이었지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연구를 추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개발된 것이 아니었음. 마차 제조업자는 늘 같은 재료를 갖고 늘 같은 마차를 만들었다. 새로운 마차를 연구개발하기 위해 연간 순익의 1%를 따로 떼어놓는 일은 하지 않았다. 마차의 설계는 가끔 개선되었지만, 이는 대학에 발을 들여놓은 일도 없고, 글도 읽지 못하는 어느 천재에 의해 이루어짐.
- 19세기까지만 해도 군사분야의 혁명은 기술적 변화가 아니라 조직적 변화의 산물이었다. 물론 서로 모르던 문명들이 서로 접할 때 기술적 격차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음.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 격차를 일부러 만들고 확대할 생각을 한 사람은 드물었다. 대부분의 제국이 부상한 것은 기술 분야의 마법적 재능 덕분이 아니었으며, 그 지배자들도 기술개선에 많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랍인들이 사산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우월한 활이나 칼 덕분이 아니었고, 셀주크 사람들이 비잔틴 사람들에게 기술적 우위를 지니진 않았으며, 몽골이 중국을 정복한 것도 뭔가 독창적인 신무기의 도움을 받은 덕분은 아니었음. 사실 이 모든 경우에서 군사기술과 민간기술이 우월한 것은 오히려 패배자 쪽이었다. 로마군이 좋은 사례임. 로마군은 당시 최강의 군대였지만 기술적으로는 카르타고나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제국보다 나을 게 없었다. 로마군의 강점은 효율적 조직, 강철같은 규율, 막대한 예비인력에 있었다. 로마군은 연구개발 부서를 만든 일이 없었으며, 이들의 무기는 몇세기 동안 거의 같았다. 만일 기원전 2세기에 카르타고를 초토화시키고 누만시아인들을 패퇴시킨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장군의 군대가 5백년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갑자기 출현했다면 스키피오는 대제를 상대로도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지금으로부터 몇세기 전의 장군, 가령 나폴레옹이 군대를 이끌고 현대의 무장한 여단과 맞선다고 상상해보자. 나폴레옹은 탁월한 전략가였고 그의 부하들은 정예의 전문가들이었지만, 현대의 무기 앞에서 그들의 기술은 쓸모 없었을 것이다.
- 중국에 철로가 놓인 것은 1876년. 길이 24킬로미터로 유럽인이 건설했는데, 중국정부는 이듬해 이것을 파괴. 1880년 중국 제국에선 단 하나의 철도도 운영되지 않았다. 페르시아에 철도가 처음 놓인 것은 1888년에 들어와서였다. 테헤란과 남쪽으로 10킬로 떨어진 무슬림 성지를 연결하는 공사였는데, 건설과 운영은 벨기에 회사가 맡았다. 1950년 페르시아에 놓인 철로는 총연장 2500킬로미터에 불과했다. 국토면넉이 영국의 일곱배인 나라로선 형편없이 적은 수치다.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에게 부족했던 것은 증기기관과 같은 기술적 발명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서구에서 여러세기에 걸쳐 형성되고 성숙한 가치, 신화, 사법기구, 사회정치적 구조였따. 이런 것들은 빠르게 복사하거나 내면화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이 재빨리 영국의 발자국을 뒤따랐던 것은 가장 중요한 신화와 사회구조를 이미 영국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은 사회에 대한 생각과 사회의 조직방식이 달랐던 탓에 그렇게 빨리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런 설명은 1500년에서 1850년 사이 시기를 새롭게 조명하게 함. 이시기 유럽은 아시아 열강보다 기술, 정치, 군사, 경제적 우위를 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독창적 잠재력을 구축했고, 1850년이 되자 그 중요성은 갑자기 뚜렷해졌다. 1750년에 유럽과 중국, 이슬람 세계가 외관상 동등해 보였던 것은 신기루일 뿐이었다.
- 유럽제국주의는 역사상 존재했던 다른 모든 제국주의 프로젝트들과 완전히 달랐다. 과거의 제국 추구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고 추정하는 경향이 있었음. 정복은 단지 그들의 세계관을 활용하고 퍼드리는 것에 불과했다. 예를 들어 아랍인들은 이집트나 스페인 혹은 인도를 정복했지만, 자신들이 모르고 있던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로마인, 몽골인, 아즈텍인들이 탐욕스럽게 새 땅을 정복한 것은 권력과 부를 찾아서였지, 새 지식을 찾아서는 아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새 영토뿐 아니라 새 지식을 획득한다는 희망을 안고 먼 곳의 해변을 향해 떠났다. 이런 생각을 한 최초의 탐험가 제임스 쿡은 아니었다. 15~16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 항해자들도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항애자 엔히크 왕자와 바스코 다가마는 아프리카 해안을 탐사하고 그 과정에서 섬과 항구의 지배권을 강탈.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자 즉각 스페인왕의 통치권을 선포함. 마젤란은 세계일주 항로를 찾아냈고, 이와 동시에 스페인이 필리핀을 정복할 기초를 놓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식의 정복과 영토의 정복은 점점 더 긴밀하게 합쳐졌다. 18~19세기 유럽을 출발해 먼 나라로 향한 주요 군사탐험대는 거의 모두 과학자들을 배에 태우고 있었다. 이들의 목적은 전투가 아니라 과학지식의 발견이었다.
- 이런 저런 종류의 신용거래는 인류의 모든 문화권에 존재했으며, 그 기원은 최소한 고대 수메르까지 거슬러 올라감. 옛 시대의 문제점은 아무도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했다거나 활용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신용을 크게 확장하려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점. 그것은 미래가 현재보다 나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
- 스미스는 부와 도덕간의 전통적 대립을 부정했고, 부자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줌. 부자가 되는 것은 도덕적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스미스의 이론에서 사람들은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파이의 크기를 늘림으로써 부자가 된다. 파이가 커지면 모두에게 이익이다. 따라서 부자는 사회에서 가장 쓸모 있고 인정많은 사람이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도록 성장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사람이기 때문.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전제가 있다. 부자가 자신의 수익을 비생산적인 활동에 낭비하지 않고 공장을 새로 세우고 사람들을 새로 고용하는 데 쓴다는 전제. 그래서 스미스는 "수익이 늘면 지주나 직공은 더 많은 조수를 고용할 것이다."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풀이할 뿐 "수익이 늘면 스크루지는 돈을 상자에 숨겨둘 것이고 세어볼 때나 꺼낼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적 부분으 새로운 윤리의 등장이었는데, 이 윤리에 따르면 이윤은 생산에 재투자되어야 함. 재투자는 더 많은 수익을 가져오고, 이것은 다시 생산을 위해 투자되어 더 많은 이윤을 낳으며, 이과정은 무한반복됨. 투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짐. 공장확대, 과학연구, 신제품 개발... 하지만 모든 투자는 어떻게 해서든 생산을 늘려야 하고 더 많은 이윤으로 전환되어야 함. 새로운 자본주의 교리에서 가장 신성한 제1계율은 생산에 따른 이윤은 생산증대를 위해 재투자되어야 한다는 것.
- 자본과 정치의 힘찬 포옹은 신용시장에스 큰 의미가 있음. 어떤 경제가 지닌 신용의 양은 새로운 유전의 발견이아 새 기계의 발명 같은 순수한 경제적 요인 뿐만 아니라 체제 변화나 좀더 대담한 해외정책 같은 정치적 사건들에 따라서도 달라짐. 나바리노 전투 이후 영국 자본주의자들은 해외의 위험한 거래에 돈을 투자할 용의를 더 많이 나타냈다. 외국의 채무자가 변제를 거부한다면 여왕의 군대가 돈을 받아내주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오늘날 한 나라의 신용등급이 천연자원보다 경제적 복지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더 큰 이유가 여기 있다. 신용등급은 그 나라가 부채를 갚을 가능성을 가리킴. 순수한 경제적 데이터 외에도 정치, 사회, 심지어 문화적 요인을 고려해서 매겨짐. 석유가 풍부한 나라라도 독재 정부에 전쟁이 만연하고 사법제도가 부패해 있다면 등급이 낮음. 그 결과 이 나라는 상대적 빈곤국으로 남을 가능성이 큼. 석유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데 필요한 자본을 모을 수 없기 때문. 거꾸로 천연자원이 없더라도 평화를 유지하며, 사법제도가 공정하고, 자유정부를 지닌 나라는 신용등급을 높게 받을 가능성이 큼. 그래서 이 나라는 싼 대가로 많은 자본을 모아 좋은 교육제도를 지원하고 하이텍 산업을 육성하는 데 사용할 수 있음.
-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이윤이 공정한 방식으로 분배되도록 보장하지 못함. 그렇기는 커녕, 이윤과 생산량을 늘리려는 갈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성장이 최고의 선이 되고 다른 윤리적 고려에 의한 제약을 받지 않을 때, 그 성장은 쉽사리 파국으로 치닫는다. 기독교나 나치즘 같은 종교는 불타는 증오심 때문에 수백만을 살해했다. 자본주의는 차가운 무관심과 탐욕때문에 수백만명을 살해. 대서양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인에 대한 인종적 증오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주식을 구매한 개인이나 그것을 판매한 중개인, 노예무역회사의 경영자는 아프리카인데 대해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사탕수수 농장 소유자도 마찬가지. 많은 농장주들이 농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고, 그들이 원한 유일한 정보는 손익을 담은 깔끔한 장부였다.
- 소비지상주의 윤리와 사업가의 자본주의 윤리를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을까? 후자에 따르면 이윤은 낭비되어서는 안되고 생산을 위해 재투자되어야 하는 데 말이다. 답은 간단하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오늘날 엘리트와 대중 사이에는 노동의 분업이 존재한다. 중세 유럽의 귀족들은 값비싼 사치품에 돈을 흥청망청 썼지만, 농부들은 한푼 한푼 아끼며 검소하게 살았다. 오늘날은 상황이 역전되었다. 부자는 자산과 투자물을 극히 조심스레 관리하는데 반해 그만큼 잘살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빚을 내서 정말로 필요하지도 않은 자동차와 텔레비전을 산다. 자본주의 윤리와 소비지상주의 윤리는 동전의 양면이다. 이 동전에는 두 계율이 새겨져 있다. 부자의 지상계율은 '투자하라'이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의 계율은 '구매하라'이다.
- 진화는 우리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몰려오는 쾌락적 감각을 누릴 수 있게 했지만, 그런 느낌은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 조만간 이 느낌은 가라앉고, 불쾌한 느낌에게 자리를 내준다. 예를 들어 진화는 남자로 하여금 임신 가능한 여자와 성관계를 해서 유전자를 퍼뜨리면 쾌감이라는 보상이 주어지도록 만들었다. 만일 성관계에 따르는 쾌감이 크지 않다면, 힘들게 그런 수고를 하려 드는 남자는 드물 것. 그런데 또한 우리는 그 쾌감이 빨리 사라지는 방향으로 진화. 이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만일 오르가즘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행복한 남자는 음식에 흥미를 잃은 탓에 굶어 죽고 말 것이고, 다른 임신가능한 여자를 찾는 수고를 하려 들지도 않을 것.
- 순수한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은 절대 아무런 의미가 없음. 인류는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 없이 진행되는 눈먼 진화과정의 산물. 우리의 행동은 뭔가 신성한 우주적 계획의 일부가 아님. 내일 아침 지구라는 행성이 터져버린다 해도 우주는 아마도 보통 때와 다름없이 운행될 것임. 그 시점에서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인간의 주관성을 그리워하는 존재는 없을 것임.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그서이 무엇이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 행복에 대한 불교의 접근법은 생물학적 접근방식과 기본적 통찰 측면에서 일치. 즉, 행복은 외부세계의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과정의 결과라는 것. 하지만 동일한 통찰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교는 생물학과는 매우 다른 결론에 도달함. 불교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즐거운 감정과, 고통을 불쾌한 감정과 동일시. 그래서 자신의 느낌을 매우 중요시하며, 점점 더 많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한편 고통을 피하려고 함.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은 다리를 긁든, 의자에서 꼼지락 거리든, 세계대전을 치르든 모두 그저 즐거운 감정을 느끼기 위한 시도에 지나지 않음. 문제는 우리의 감정이 바다의 파도처럼 매 순간 변화하는 순간적 요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있음. 5분전에 나는 즐겁고 결의에 차 있었지만, 지금 나는 슬프고 낙담해 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즐거운 감정을 경험하고 싶다면, 불쾌한 감정을 몰아내면서 즐거운 감정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함. 설령 한번 그러는 데 성공했더라도 곧바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함. 그간의 노고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다. 그토록 덧없는 보상을 받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사라지는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 그토록 힘들게 분투할 필요가 무엇인가? 불교에서 번뇌의 근원은 고통이나 슬픔에 있지 않다. 심지어 덧없음에 있는 것도 아님. 번뇌의 진정한 근원은 이처럼 순간적 감정을 무의미하게 끝없이 추구하는 데 있음. 이 대문에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동요하고, 불만족스런 상태에 놓임. 이런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기쁨을 느낄 때조차 만족스럽지 않다. 기쁜 감정이 금방 사라져버릴 것이 두렵고, 이 감정이 이어져 더 강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 사람드링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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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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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역사

역사 2016. 4. 2. 10:09

- 네안데르탈인 이후 등장한 보다 발달된 인종들은 일시적으로 온화한 기후조건 속에서 세련된 도구들을 개발할 수 있었는데, 그 도구들은 후기 구석기인들에게 이전보다 더 넒은 영역을 제공. 그들은 뼈와 뿔을 재로로 삼아 새롭고 가벼운 사냥무기들과 가시로 만든 것보다 더 나은 낚시바늘과 다가올 빙하기에 대비한 의복을 꿰매는데 사용할 바늘을 만들었다. 기원전 11000년경에 빙하가 마지막으로 물러나자, 인간, 동물, 식물은 다시 한번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인간의 기술은 그가 환경에 적응하기에 충분할 정로로 발전. 이때 이미 음식은 인류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류문명의 태동기인 기원전 10000년경부터 7000년 동안 음식은 인류역사의 형성에 그 어느때보다 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빙하가 북쪽으로 물러나자 초목지대의 모습일 달라짐. 순록과 그에 의존해 살아가는 인간들은 얼음 주변에서 자라나는 이끼와 양치류를 따라 이동. 작은 동물들은 자라나기 시작하는 숲의 주변부에서 번식하기 시작. 그리고 따뜻한 바람의 영향으로 야생 곡물들이 자라나는 대초원이 중동의 여러지역에 생겨남. 이전에는 인간은 목자가 아니라 사냥꾼이었고, 식물을 재배하기 보다는 채취하는 데 그쳤었음. 그러나 빙하가 물러나고 2천년이 지나자, 식물경작과 가축사육이 시작되고, 촌락이 세워지기 시작. 경작지식은 유럽, 아프리카, 서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서서히 알려짐. 이윽고  중동의 농부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경작방식이 옥토를 사막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게 됨.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으로 관개시설을 개발. 이 관개시설은 비록 수원지 근처의 평지에서만 가능했지만 풍부한 수확을 가져올 수 있었고, 잉여생산물의 발생은 인류의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침. 기원전 5000년경 이후에는 촌락들이 무리지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동일한 강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공정한 물의 공급을 위해 다투기도 했고 때로는 배수로와 운하건설을 위해 협력하기도 함.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행정조직이 생겨나면서 그 중심지는 소도시, 도시로 점진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들은 도시의 특징적인 조건과 구성원, 제도 등을 갖추어 나감. 이리하여 문명이 발생. 100만년전 빙하가 처음으로 도래했을 때엔 지구상에 50만명의 원인이 존재한 것으로 추산되는데, 기원전 10000년경인 신석기 혁명 직전에 호모사피엔스의 수는 300만명으로 증가. 농경을 시작한지 7000년이 지난 기원전 3000년경에는 세계인구가 1억명에 달할 정도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 비록 많은 채소들은 고고학적 흔적들을 남기지 않으나, 렌즈콩이나 이집트콩 등 여러가지 콩이 야생형태로 중동과 중앙아메리카, 유럽일부지역에서 애용되었고, 상당수의 식물종자들이 채집되어 조미료료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있음. 사람들은 겨자씨를 고기와 함께 씹어먹었고, 원시형태의 밀과 보리의 씨를 구워 다른 음식위에 뿌려 견과 같은 맛을 즐기기도 했음.
- 토기와 청동기가 출현하기 이전에 적어도 한가지 형태의 용기가 널리 사용됨. 이 용기는 방수성과 내열성이 다 있어서 불속에 넣지는 못해도 불위에 매달아 놓을 수는 있었음. 이것은 동물의 위였다. 구석기 시대에 사냥군이 사냥감을 잡은 후에 운반하기 좋게 살코기를 베어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사냥한 공로로 상하기 쉬운 부분들(심장, 간, 뇌, 안구뒤 지방, 연한 내장기관)을 갖고 잔치를 했따. 20세기 에스키모처럼 그는 그 희생물의 부분적으로 소화된 위의 내용물들을 특별한 별미로 간주했을 것이다. 조리된 음식을 선호하는 습관이 생기면서 전개된 발전과정을 추리해보면, 처음에는 동물의 밥주머니 속에서 그 내용물을 요리했고, 그 다음엔 바로 그 용기를 사용하여 다른 요리들을 하게 됨. 그 밥주머니들은 최종적 효과 면에서 오늘날의 내열냄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됨. 유목민인 스키타이족은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서도 적당히 큰 솥이 없을 때는 여전히 밥주머니에서 음식을 요리. "그들은 모든 살코기를 그 동물의 위에 집어넣고 물을 섞어, 그 동물의 뼈로 불을 지핀 모닥불 위에서 끓인다. 뼈들은 매우 잘 타며, 위는 껍질을 벗긴 고기가 전부 들어갈 만큼 넉넉함. 이런 식으로 수소나 다른 제물은 기발하게도 그 자체의 재료들로 삶을 수 있다고 헤로도토스는 기록. 18세기 까지도 그런 방법이 사용됨. 영국 탐험가 새뮤얼 헌은 베아티라는 음식이 만들기 쉽다는 것을 발견. 이것은 일종의 해기스(양의 내장을 다져 오트밀 따위와 함께 그 위속에 넣어 삶은 스코틀랜드 민속음식0인데, 혈액, 작게 토막낸 다량의 지방, 가장 연한 살코기의 일부를 그 동물의 심장 및 허파와 함께 작은 조각으로 자르거나 찢어서 위속에 넣고 불위에 매달아 굽는다. 후추나 소금 또는 다른 조미료를 넣지 않아도 아주 맛있는 음식이다. 그런데 위에 내용물을 너무 많이 넣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 그렇지 않으면 터지는 수가 있음. 기원전 13000년 경에는 가죽 가공기술이 대단히 진보하여 가죽이 예전의 여러가지 용기를 대체하게 되었다.
-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빙하기가 물러가기 전에 인간과 순록의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이 동물은 고기뿐 아니라 도구로 사용되는 뼈와 불을 제공해줌. 순록은 눈이 녹아 습해진 땅에서 자라는 이끼와 양치류를 먹었다. 그러나 눈 녹은 물에 의지하는 동물들은 염분부족 때문에 정기적으로 해변이나 내륙의 지표에 노출된 암염지로 원정을 가야했다. 그러다가 순록이 사람의 오줌을 염분의 급원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이 발견됨. 이를 미끼로 사람은 그의 야영장 부근까지 순록을 유인할 수 있었고, 동물들을 길들이는 데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한 상호의존관계를 맺는 데 성공. 결국 순록(동쪽지역의 가젤)은 진정한 가축이 되는데는 거부반응을 보였으나, 그에 대한 경험으로 인간은 동물세계의 특정한 종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터득. 신석기 혁명 이전의 1천년 동안 한 종류의 동물이 길들어졌는데, 육식동물이고 상황에 따라 인간을 잡아먹기도 하는 이 동물은 보통은 인간의 자연적인 적으로 보였다. 이것은 아시아의 작은 늑대였따. 그러나 생후 6주 정도까지 새끼늑대는 분명히 붙임성이 있는 귀여운 짐승으로 친근한 접근에 대해 즉시 반응을 보였다. 아시아의 늑대는 기원전 11000년경부터 이미 인간의 지배를 받게 된 것으로 추정됨.
- 20세기의 의사이며 여행가, 앙드레 미고는 티벳 사람들이 구운 보리가루와 차를 갖고 음식을 만드는 방법에 관해 묘사. "그릇에 버터를 넣은 차를 조금 담아라. 그 위에 큼직한 트삼파 덩어리를 올려놓고 집게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저어라. 그 다음으로 손으로 반죽을 하면서 그릇을 빙글빙글 돌리면 당신이 먹을 커다란 둥근 반죽덩어리 하나가 만들어진다. 이제 차를 마시면서 그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겨라. 그 모든 과정은 고도의 손재주를 요한다. 또한 얼마만큼의 차를 갖고 얼마만큼의 트삼파를 반죽할 것인지 정확히 판단하려면 어느정도 경험이 필요하다. 이 비율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완성된 음식이 말라붙은 반죽 덩어리가 되거나 아니면 손가락에 들러붙는 곤죽상태의 반죽이 되기 십상이다. 트삼파를 만드는 과정은 손 씻는 일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나라에서는 다음과 같은 부수적 이점이 있다. 그 일을 시작할 때 손이 아무리 더럽더라도 다 마치고 나면 손들이 아주 깨끗해진다." 다소 불쾌하게 느껴질지라도 그 곡물반죽은 선사시대의 획기적 발견이다. 이는 그 기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귀리나 밀 등 작고 비실용적인 종자로부터 많은 양의 고체상태의 음식을 만들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한 필요할 때마다 액체를 첨가하여 먹을 수 있는 구운 곡식의 형태로 여행시 갖고 다닐 수 있었다. 최초의 이스트를 넣지 않은 빵이 발명된 것은 불 옆의 뜨거운 돌 위에 놓아둔 곡물반죽의 일부가 맛있고 바삭바삭한 빵껍질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일 것이다. 아니면 그것은 물과 날곡식가루로 만든 가루반죽을 갖고 보다 의도적인 실험을 행한 결과였을지도 모음. 어느 편이든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지만 후자가 보다 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짐
- 밀가루와 물로 만든 납작한 무발효 빵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아직도 남아 있으며, 때때로 여기에 약간의 지방을 첨가하기도 하고 보통 소금으로 간을 맞춤. 멕시코의 토르티야, 스코틀랜드의 귀리빵, 인도의 차파티, 중국의 사오빙, 아메리카 인디언의 옥수수빵, 에티오피아의 인제라는 모두 신석기 시대의 빵이 그대로 전수된 것으로 사실상 그 재료의 비율이 같다. 완성된 음식이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것은 주로 기본곡식의 차이에서 비롯됨. 고대의 납작한 빵은 한가지 약점이 있다. 금방 만들어져 따뜻할 때는 맛이 좋으나, 식으면 딱딱해지고, 소화시키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는 점. 이런 이유로 보존성이 뛰어난 평범한 곡물반죽이 구운빵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열을 가하지 않고도 타작이 가능한 밀과 보리가 개발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곡물반죽을 계속해서 만들어 먹기 위해 집에서 낟알을 구웠다. 토기시대가 오기 전에 곡물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두가지 더 있었다. 그 어느방법도 곡식을 요리할 필요는 없었으며, 모두 고대 신석기 시대의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첫번째 방법은 부분적으로 탈곡된 날곡식을 이용하는 것. 밀이나 보리종자들에 수분을 공급하고 발아하도록 방치해주면 여기서 콩나물과 같은 아삭하고 영양이 좋은 작은 줄기들이 올라옴. 또한 발아과정중에 건조한 날곡식 상태에서는 소화할 수 없는 종자의 전분질이 소화가능한 엿당으로 전환됨. 그러나 신석기 시대의 한 가족이 1년동안 1톤의 발아밀을 먹어치울 정도로 곡식이 준비되어 있었는지는 의심해 볼만하다. 더욱이 이 방법은 아직 방수성 용기가 귀하던 그 당시에 많은 수의 용기를 점유해버리는 불편함이 있었을 것. 그러나 발아된 곡식은 훗날 맥주의 발명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 두번째 방법에는 왕겨가 제거된 완전한 형태의 굽지 않은 종자들이 필요하다는 불편함이 뒤따랐다. 통밀을 불 옆의 더운 물에 담가두면 몇시간이 지난 후에 팽윤하면서 호화되어 하얗고 투명한 고기젤리 비슷한 맛있는 음식이 됨. 이런 형태의 음식은 나중에는 인도에서 쿠바, 중국에서 영국에 이르기까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나타남. 그 방법은 전부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신석기 시대에 이미 개발되었던 것 같다. 마침내 토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자 요리사의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방열, 방수용기들이 원활하게 공급되어 용기들이 쉽게 깨지더라도 손쉽게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곡식에 다량의 물을 넣고 끓이기, 소량의 물을 가하여 부글부글 삶기, 고기와 곡식으로 스튜 만들기, 납작한 빵을 더 맛있게 굽기 등 여러 새로운 요리법을 개발하고 이전의 음식들을 개선하는일이 가능해짐. 그리고 토기가 깨지지 않는 금속용기로 대체되면서 현대적 요리가 발달하기 시작
- 양과 염소 중에서 어느것이 최초로 길들여진 동물이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지만 염소일 가능성이 높음. 염소는 자극적인 냄새가 날 뿐만 아니라 어린잎을 먹어치우는 파괴적 습성 때문에 사람에게 상당히 해를 끼침. 그러나 농토를 확장하던 초기에 경작을 위해 관목숲을 제거해야 했던 지역에서는 잎사귀를 먹어치우는 염소의 재능은 염소를 유용한 일꾼으로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양을 길들이는 첫단계가 시작된 것은 명확하지 않으나 기원전 8920년경 이라크 자위 케미 샤니다르와 루마니아 도브루자에서였다. 혹은 카스피해 동쪽 카라쿰 같은 추운지방에서 사냥꾼들이 길들여왔을 수도 있다. 방적 및 직조기술이 발명되기 훨씬 전부터 양털을 갖고 따뜻한 천연펠트를 만들수도 있었는데, 이 펠트는 추운 기후에서는 매우 귀중했다. 그러나 한마리의 양은 일주일 동안 자기 체중의 100배나 되는 녹색식물을 먹어치울 수 있으므로 초창기의 목자는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계속 이동해야만 했을 것임. 많은 사람들이 서쪽의 풀이 많은 이라크 초원으로 이동해갔을 것이며, 이런 유목민들로부터 자위 케미 샤니다르 같은 새로 정착된 마을의 주민들은 양치는 기술을 배웠을 것이다.
- 돼지는 세번째로 농가의 헛간에 등장하는데, 앞의 두 동물에 비해 늦은 기원전 7000년 경에야 사육이 시작됨. 그 잉유들 중 하나는 돼지가 되새김동물과는 달리 밀짚, 풀, 잎사귀 또는 잔가지들을 소화시킬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상 돼지 사육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그 자신의 음식의 일부를 그 사업에 투자하게 되면서 부터. 주된 식용동물 중에 제일 늦게 사육된 것은 소였다. 소 사육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기 때문. 오늘날 고고학적 논쟁의 결과에 의하면 터키의 차탈 휘위크와 마케도니아의 네아 니코메디아에서 기원전 6100~5800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됨. 17세기에 원형종이 사멸되기는 했지만 지난 20년 동안 뮌헨과 베를린에서 그것을 다시 만들려는 노력이 이루어져왔다. 성질이 사납고 몸이 날랜 현대종을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신석기인들은 그 원래의 품종을 갖고 매우 애를 먹었을 것. 그러나 일단 사람의 손아귀에 들어오면 소들은 조악한 사료, 비좁은 우리, 두다리를 한데 묶는일, 그리고 황소의 경우 보통 거세에 의해 굴복되었다. 인간은 수렵시대부터 이미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염소는 고기 외에도 윤기나는 방수성 털과 1등급 물주머니를 만들 수 있는 가죽을 제공해준다는 것, 양은 양털과 상당량의 지방을 제공하는 데 이 지방은 요리뿐 아니라 의약용 연고재료나 골풀양초와 등불을 위한 수지로도 쓸모가 있다는 것, 대지의 뻣뻣한 털은 돼지기름인 라드와 가죽만큼이나 가치 있다는 것, 암소의 가죽은 질기고 튼튼하며 배설물은 불을 피울 때 우수한 연료가 된다는 것 등. 그러나 사람이 우유와 그것의 여러가지 이용 및 보존법에 관해 알게 된 것은 이 동물들이 사육되고 난 후의 일이다. 이 새로운 식표품들은 동물 사육에서 예기치 않았던 두가지 이점 중 하나였으며, 그 후의 세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됨. 두번재 이점은 염소, 양, 거세된 수소들을 씨를 뿌리고 쟁기를 끌고 수확한 곡식을 타작하는 일에 부릴 수 있다는 것. 가축들은 사실상 인간의 최초의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 이집트는 그 식량공급을 재생력이 있는 나일강물에 의해 보장받고 있었으므로 국제무역 없이도 생존가능했음. 그러나 수메르는 메소포타미아의 토양이 거의 고갈되어 외부와의 거래없이는 생존 불가했다. 그로부터 2천년이 지난 후에는 그리스도 그과 같은 처지가 되었는데, 후세 사람들의 정신에 근본적 영향을 미친 바로 그 문명에 의해 미약한 천연자원마저도 빠른 속도로 파괴되어 갔기 때문. 그래서 그리스인들도 식품의 수입에 의존하여 살아가게 되었다. 그들은 무역상인인 페니키아인을 앞세워서 지중해 연안의 대부분 국가들을 개방시켰으며,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에 발판을 마련했고, 동쪽으로 가서 흑해 연안의 부유한 나라들과도 접촉했다. 그들은 구리, 주석, 직물, 유리 등을 수입하고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수출했다. 그러나 그들의 모험적 사업을 자극했던 긴박한 동기는 곡물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이었다.
- 로마역시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수세기동안 밀의 공급이 행정, 경제, 국제적 정책을 수립하는 데 지배적 역할을 했다. 로마제국의 대부분 국경지방은 고대세계의 밀 재배지역들의 경계와 거의 일렬로 접해 있었다. 밀은 로마제국의 영토확장 뿐 아니라 항해사에서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동물이 1~2톤의 곡식을 100마일의 거리를 운반해 오는데 일주일이 걸렸으므로, 부피가 크고 가치가 낮은 물품이 육로를 거쳐 오면 값이 두배로 뛰었다. 그러나 1000톤 정도를 운반하는 배들이 순풍을 만난다면, 북아프리카에서 오스티아에 이르는 300마일의 여정을 4일 이내에, 알렉산드리아로부터 1000마일의 여정을 13일만에 마칠 수 있었다. 곡물을 실은 배들을 위해 특별히 부두와 등대들이 세워졌으며, 영국조차도 로마제국의 곡물창고가 되기에 먼거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사회가 더욱 고도화됨에 다라 향신료에 대한 수요가 증가. 이들 동방의 사치품들은 수백년간 아시아와 무역로에서 중요한 지점들을 장악하고 있던 아랍인들의 중재로 그리스와 로마에 들어왔다. 그러나 서기 1세기 초에 로마는 이집트의 홍해연안으로부터 멀리 인도까지 항해할 수 있는 큰배들을 제작함으로써 아랍의 독점을 무너뜨리기 시작. 이 여정은 길고 위험했으므로 처음에는 향신료가 귀해서 후추값이 한때 12온스당 50파운드라는 천문학적 가격으로 폭등하기도 했음. 그러나 1세기 중엽에 유럽 선원들이 계절풍을 발견하자, 인도남부까지 갔다가 돌아오는데 1년도 채 안걸리게 됨. 곧이어 인도 말와 지역의 무지리스항에는 외국의 아름다운 배들이 자주 나타나게 되었고, 그들은 금을 갖고와서 후추와 바꾸어 갔으며 무지리스는 그런 소동으로 시끌벅적했다고 한다. 로마가 인도의 향신료를 다 가져가 버리자, 인도의 상인들은 할 수 없이 공급처를 찾아 차례차례 국경을 넘어 동남아까지 진출. 그들은 카르다몸의 시장인 타콜라나 장뇌 산지인 카르푸라드비파 섬 같은 곳에서 향신료를 구해왔다. 이렇게 하여 동서간의 바닷길은 길고 험한 육로인 비단길보다 먼저 안정됨. 비단길은 로마제국의 황제들보다는 중국의 한나라 황제들의 노력에 의해 열림. 바다에서 해적들은 단지 이차적 위협에 불과했으나,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서 횡행했던 호전적 유목민들은 육로무역을 심각하게 방해. 한나라는 결국 군사력을 동원하여 그 지역을 통치하기에 이르렀고, 무역조건들이 안정됨에 따라 중국의 사치품에 대한 로마의 갈망은 지칠 줄 몰랐다. 서기 2세기 경에 사막의 대상들은 정기적으로 중국의 뤄양에서 비단, 생강, 계피, 계피잎을 싣고 출발하여 둔황, 뤄부포 호수, 카슈가르를 경유하는 수백마일의 꾸불꾸불한 여정을 돌아서 파미르 고원 북쪽에 위치한 큰 교역장소까지 왔다. 그곳 중앙아시아의 황야에서 지극히 아름다운 중국의 비단들과 색다른 향신료들이 로마가 그 대신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들(유리그릇, 도기, 산호구슬, 무늬를 새긴 보석, 황제를 위한 포도주 등과 무엇보다도 금, 은)과 물물교환 됨.
- 맥주양조는 처음에 특별한 빵제조법으로부터 개발된 것 같다. 신석기 시대의 가정주부는 날곡식의 싹을 틔워 소화성을 좋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현대의 양조기술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함. 그 방법은 보리를 발아하도록 방치했다가 말려서 가볍께 빻아 으갠다. 그것을 더운물에 담갔다가 건더기를 걸러내고 남은 액체를 발효되도록 놓아둔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악한 맥주는 아마 걸쭉하고 혼탁했겠지만 순한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발아된 곡식을 말린다음 빻은 가루로 만든 빵이 재래식 밀가루로 만든 빵보다 더 오래 보존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발아된 뒤 말린 곡식으로 특별한 반죽을 만든다음 부분적으로 굽고, 그 덩어리를 부수어 물에 담가두었다. 그 혼합물을 하루 정도 방치하여 발효시킨 후에 걸러내면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기원전 3천년기 말기에는 이집트 양조업자들이 양념과 풍미를 각각 달리한 맥주빵을 만들어냄에 따라 고객들의 선택의 폭이 더욱 넓어졌다.
-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의 기본적 식사는 곡물반죽이나 왕겨가 많이 섞인 거친 빵, 수수로 만든 폴렌타 같은 죽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음료로는 주로 물을 마심. 주방설비가 조악하고 연료도 부족하여 요리법은 원시적이었음. 대다수의 로마시민이 살고 잇는 고층의 비좁은 공동주택 인술라에서는 화재위험도 높았음. 따라서 빈민들은 가능하면 요리를 하지 않고 그냥 먹었다. 대개는 빵이나 곡물반죽에 올리브, 날콩, 무화과 혹은 치즈를 곁들여 먹고, 가끔씩 구운 돼지고기 조각이나 소금에 절인 생선을 길거리에 펼쳐놓고 파는 지저분한 음식점들로부터 구입할 수 있는 수준이었음. 이에 반해 부자들의 음식은 매우 다양했고 고도로 세련되었을 것으로 여겨짐. 많은 사람들이 요리의 최종효과인 풍미에 관해 호기심을 가졌으며 그 재료들도 확실히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유베날리스와 같은 겸손함을 자처하는 사람은, 무리중에서 가장 연하고 포동포동한, 몸속에 피보다는 젖이 더 많이 들어 있는 새끼염소, 약간의 야생 아스파라거스, 달걀을 넣은 어미닭과 함게 건초뭉치 속에서 꺼낸 온기가 있는 고급스런 계란들, 그리고 후식으로 먹을 포도, 배, 사과와 간소한 음식들을 흡족한 마음으로 먹었다. 부자들의 식사는 물론 이와는 매우 달랐다. 이들은 사치스럽고 화려한 식탁을 지위의 상징으로 간주. 이런 허례는 정교한 상차림의 형식을 취하기도 했는데, 미식법에 관한 표준원전인 페트로니우스의 트리말리키오의 향연에 따르면, 연회에서는 손님들에게 페가수스처럼 보이도록 날개로 장식한 산토끼, 그 뱃속에 살아 있는 개똥지빠귀들을 잔뜩 넣은 야생 암퇘지, 성게처럼 보이게 가시를 꽂츤 마르멜로 열매, 생선, 새, 거위 등의 모양으로 조각한 구운 돼지고기 등을 제공했다. 이런 종류의 상차림이 자산가를 파산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색다른 외국 식품들의 유행이 또다른 문제였다. 먹을만한 가치가 있는 창꼬치는 로마의 티베르섬과 클로아카 막시마를 연결하는 두 교각 사이로부터 손쉽게 구할 수 있었으나, 절인 야채는 스페인에서 들여왔고, 햄은 갈리아, 포도주는 쥐라, 석류는 리비아, 굴은 영국, 그리고 향신료는 인도네시아로부터 수입해야 했다. 달팽이도 양식했는데, 우유를 먹여 지나치게 포동포동해서 자신의 껍질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살을 짜움. 산쥐류는 질그릇 항아리속에 가둬놓고 견과류를 먹여 사육하다 충분히 살이 찌면 식탁에 내놓음. 비둘기는 날개를 자르거나 다리를 부러뜨려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음 잘게 부순 빵을 먹여 살짜움. 사치의 극치는 비텔리우스 황제가 여신 미네르바에게 바친 요리들에서 나타남. 그 요리들에는 파르티아 국경으로부터 지브롤터 해협에 이르는 제국의 방방곡곡에서 수집된 여러가지 희귀하고 값비싼 종류의 고기들 대신 창꼬치의 간, 꿩의 뇌, 공작의 뇌, 홍학의 혀, 칠성장어 알 등 몹시 넌더리나는 혼합물이 사용됨
- 양과 소는 텐트용 펠트나 갑옷을 위한 가죽이 되든 아니면 스튜냄비를 위한 고기가 되는 간에 유목민들의 대부분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었다. 육류의 대부분은 양고기였을 테지만, 몸집이 더 큰 가축이 번식이 잘 되는 경우나 말이 너무 늙어서 격렬한 생활을 계속할 수 없게 되면, 유목민들은 틀림없이 소의 허리고기나 낙타의 혹 구운 것, 또는 진한 말고기 국물 한사발을 맛있게 먹었을 것. 낙타의 구운 혹은 대단히 맛이 있었으며, 그 발을 찌거나 혹위를 기름에 살짝 튀긴 후 약한 불에 끓인 것도 훌륭한 음식이었다. 말고기는 소고기보다 여러 면에서 더 우수했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빈민들의 부실한 식사를 개선하기 위해 말고기를 일반화하려는 시도가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었으나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는 여전히 말을 먹는 것이 거의 식인 풍습만큼이나 대단히 혐오감을 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은 소고기, 낙타 또는 야크의 고기보다 말고기를 더 자주 먹을 수 있었을 것. 스텝지대에서 떼지어 서식하던 가축의 종류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보다 황량한 지역에는 소떼가 별로 없었을 것. 암소는 사실상 혹독한 기후에는 전혀 적응하지 못한다. 낙타는 3년간격으로 단 한마리의 새끼를 낳으므로 음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비경제적이었을 것이며, 야크도 그 진하고 풍부한 젖때문에 희생하는 것보다 살려주는 것이 유익했다.
- 유목민의 가장 특징적 식품 하나는 살아있는 동물의 혈액이었다. 마르코 폴로는 13세기 몽골 군대가 먼 지역으로 신속히 이동할 때 그들이 어떻게 식량을 조달했는지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몽골의 기병은 10일 정도의 여정에서 자주 바꿔 탈 수 있도록 각각 18마리 정도의 수말들과 암말들을 끈으로 꿰어서 데리고 다님. 그들은 장거리 여정 중에 아무런 식량도 갖고 다지니 않았으며 불을 피우지도 않았고 단지 그들의 말들에 의존하여 연명했는데, 기수들은 각자 자신의 말의 정맥에 구멍을 내어 그 혈액을 마심. 10일 간격으로 말 한마리당 0.5파인트의 피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 정도면 그의 탈 것들의 효율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기수의 체력을 유지하기에도 충분. 식품으로서 혈액의 이점은 그것이 특별한 수송이나 준비 또는 요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 불은 스텝지대 사람들에게 종종 문제가 되었다. 연료가 부족한 경우가 많았고 요리할 때 피운 불꽃은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눈에 띌 수 있기 때문
- 서기 1천년경 유목민들은 보다 재래식 유제품들을 이용. 말의 수가 많은 지역에서 말젖은 가장 중요한 식품으로, 유목민들의 원기왕성함에 결정적 요인이 됨. 식사에서 고기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 유목민들은 단백질, 지방, 비타민A와 B는 충분히 섭취했으나 비타민 C를 얻는 방법은 제한되어 있었음. 스텝지대에서는 신선한 과일과 야채가 매우 휘귀했기에 당연히 유목민들은 비타민 C 결핍증인 괴혈병으로 맥없이 죽어갔을 것이며, 적어도 그 병의 특징인 나태와 무기력 증세를 나타냈을 것임. 그러나 유목민들에게서는 이런 증상을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말젖을 많이 마셨기 때문. 말젖에는 비타민C가 모유의 2배, 우유의 4배나 들어있기 때문. 만약 그들이 말젖을 매일 다량으로 마시는 습관을 들였다면, 그들은 이 급원만으로도 비타민C를 적절히 공급받을 수 있었을 것임
- 유목민들은 아마 다른 동물들의 유즙으로부터도 응유나 요구르트 형태의 많은 식품드을 만들어냈을 것. 응유제품들은 신석기 시대의 초깅 인간이 젖을 짜는 일에 관해 알게되자마다 거의 그 즉시 발견된 것으로 보임. 중동의 기후에서는 유즙을 몇시간만 방치해도 곧 굳어버림. 다른 요인들, 즉 기온과 공기중에 떠다니는 미생물들의 종류에 따라 응유가 부드러워질수도 있고 거칠어질수도 있었을 것이다. 부드러운 종류는 맛이 짜릿하고 상큼한 제품으로 개발되었을 것이며, 오늘날 발칸반도의 요구르트, 스칸디나비아의 타에타, 인도의 다히 등이 대표적. 거친 응유는 걸러내어 우선 부드럽고 신선한 치즈를 만들었고, 차차 응유를 침전시키는 방법을 발견함에 따라 채소즙 등을 첨가하기도 하고 송아지의 위로 만든 용기 속에서 발효시키기도 하여 (송아지의 위에는 레닌이라는 효소가 들어 있는데 이것이 응유 촉진제인 레닛을 생성함) 각각의 특성을 지닌 여러 치즈를 만들게 되었다. 응유를 바구니틀이나 구멍을 낸 질그릇 속에 넣어 압착한 다음에 발효, 숙성하도록 놓아두면 되었다. 또다른 주요 유제품인 버터는 보다 한랭한 지역에서 개발된 듯하며, 버터를 만드는 교반 방법은 어떤 여행자가 여행중 유즙용기를 갖고 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터를 가열하여 수분을 증발시킨 다음 불순물을 걸러내거나 단순히 제조과정에 소금을 첨가함으로써 그 품질유지 기간이 연장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발견됨.
- 응유, 치즈, 요구르트, 버터는 모두 인간의 당연한 요구에 대해 잉여분의 유즙을 보존하는 유용한 방법이었다. 분유도 마찬가지. 마르코폴로는 몽골족이 어떻게 분유를 만들고 이용했는지에 대해 기술. "우선 유즙을 끓인다. 적당한 순간 표면에 뜨는 크림을 걷어내고 그것을 다른 용기에 넣어 버터를 만든다. 크림이 남아 있는 한 유즙이 건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 그 유즙을 햇볕에 내놓아 수분이 증발하도록 방치한다. 그들은 원정에 오를 때 이 건조된 유즙을 10파운드 쯤 갖고 가서, 매일 아침 그중 반 파운드 정도를 꺼내 호리병박처럼 생긴 작은 가죽 용기에 넣고 물을 적당량 붓는다. 그러면 그들이 말을 타고 있는 동안 용기에 들어 있는 유즙분말이 용해되어 액체상태가 되는데, 그것이 그들의 아침식사이다." 마르코 폴로가 유즙을 끓인다고 표현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유즙은 크림이 이미 표면에 떠오른 다음에는 아마도 야트막한 용기에 넣어져 비등점 보다 몇도 아래의 온도에서 천천히 가열되었을 것이다. 그때쯤에는 크림이 걸쭉하고 쭈글쭈글해져서 냉각시킨 다음 걷어내기가 쉬워졌을 것이다. 만약 몽골인들이 유즙을 말리기전에 크림을 걷어내지 못했다면, 그 분유는 매우 빠른 속도로 산패되었을 것. 걷어낸 크림으로 만든 버터는 오늘날 고형 크림이나 데번셔 크림으로 알려져 있는데, 교반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버터와 다른 것은 아니다.
- 신선한 상태나 분말 상태로 이용한 것 외에도 유목민들은 말젖을 영양가도 많고 기분을 돋우는 또다른 음료로 전환시켜 이용. 그것은 말젖을 발효시켜 만든 술로 보통은 몽골식 명칭인 쿠미스로 잘 알려짐. 낙타젖을 발효시킨 것은 케피르, 야크젖을 발효시킨 것은 아이란이라고 함
- 유목민들은 결코 동물의 젖이 모자란 적이 없었으나, 다른 사회에서는 그 대용품이 광범위하게 이용됨. 견과류는 유즙을 대신하는 주된 급원으로, 비록 동물성 식품만큼 영양가가 풍부하지는 않았어도 매우 유용했음. 인도와 동남아에서는 코코야자를 널리 이용했는데, 덜 익은 과육에서는 맑은 천연과즙을 추출하고, 잘 익은 과육은 물에 걸러 우려냈다. 북미 인디언들은 히코리넛과 피칸으로부터 유즙같은 과즙을 추출하여 죽이나 옥수수빵을 만드는데 이용. 유럽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적어도 18세기 말까지 호두와 아몬드를 살짝 데쳐 가루로 만든 다음 물에 불린 것이 주된 유즙 대용품이었음. 그 당시 대부분의 아몬드는 이탈리아와 프로방스에서 수입되었는데, 이들 지역에 그 나무가 소개된 것은 아랍 정복에 따른 결과였다. 유즙 같은 액체는 강낭콩이나 다른 콩류에서도 추출 가능. 콩을 약한 불로 삶은 다음 약간의 조리용매로 푸레처럼 걸쭉하게 만들어 걸러내면 됨. 두유는 세계 여러지역에서 이용되었으며, 특히 중국인들이 즐겨 마셨다. 이들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과 달리 방목하는 가축이나 그것들이 제공하는 유제품에 거의 의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식량생산이 증가하자 인구도 증가. 17세기 말엽 독일의 한 지역의 인구는 로마시대에 비해 4배나 증가했던 것으로 추정됨. 몇세기가 지나면서 신형쟁기는 북유럽과 서유럽으로 전파됨. 그러나 그것은 그 사용자들에게 새로운 훈련을 요하는 부담을 주었다. 보습쟁기를 제작하고 유지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었고, 그것을 끄는데 8마리의 수소가 필요했으며, 넓고 광활한 장소에서는 멋지게 기능을 발휘했으나 협소하고 개별적인 토지에서는 부피가 너무 커서 다루기 힘들었다. 부유층은 자신들의 쟁기를 가질 수 있었으나,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근본적인 사회적 조정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그들은 하나의 쟁기와 한데 맨 짐승들을 공동소유하고 각자의 작은 토지들을 합병하여 공동을 일하는 너른 들판으로 만들기 시작. 이제부터 그 토지로부터 수확한 것은 그전처럼 어느 한사람의 필요가 아니라 그가 어떤 공동기업에 기부한 것의 상대적 가치와 연관되었다.
- 성장하는 도시에서 일반 가정의 주방설비는 로마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편리하지 않았다. 이는 구운고기 판매업자들의 증가를 가져옴. 물론 전문적으로 요리된 음식이 새로운 개념은 아니었음. 네부카드네자르 시대의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이미 음식점이 있었고, 중동의 주민들은 중세에 들어서도 여전히 집에서 요리하기보다 시장에서 고기경단, 구운 양고기, 생선튀김, 팬케이크, 아몬드가루로 만든 단것 등을 사다 먹는 것을 더 좋아했다. 사실상 요리된 음식을 사다 먹는 풍습이 유럽에 다시 소개된 것은 아랍세계로부터 스페인을 경유하여 들어온 것으로 유럽에 화폐경제의 부활이 없었다면 별로 진척되지 않았을 것이다. 1183년 런던 어느 대중음식점에서는 "계절에 따라 굽거나 튀기거나 삶은 요리, 크고 작은 생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조잡한 고기, 부자를 우한 사슴고기 같은 맛있는 고기, 크고 작은 조류 등의 음식을 구입할 수 있었다. 만약 여행으로 지친 친구들이 갑자기 방문한다면, 그리고 신선한 식품을 사다가 요리해줄 때까지 굶주림을 참고 기다릴 수 없다면 그들은 급히 강둑으로 갔을 것이며, 거기에는 모든 음식들이 바로 먹을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을 것이다." 12세기의 물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1363년에 구운 양다리 하나를 1페니(날품팔이 농사꾼의 하루 임금)에 살 수 있었고, 같은 값으로 세마리의 비둘기를 구입할 수 있었음. 통째로 구운 돼지 한마리는 3.2페니정도였고, 구운 피리새 10마리에는 0.4페니, 손님이 자신의 수탉을 잡아 고기파이를 만들고자 한다면 반죽, 연료 및 수고의 대가로 0.6페니를 지불하면 되었다.
- 뜻밖에도 기독교 신앙이 아주 낙관적인 상인조차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염장산업에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사순절은 부활주일 전 40일의 단식기간으로, 염장산업에 가장 유익한 기간이었다. 이대는 생선이 필수식품이었으나, 내륙에는 신선한 생선이 부족했다. 또한 1년내내 금요일마다 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특히 소도시에서는 거의 사순절 기간만큼 유익했다. 심지어 16세기 중반까지도 금요일에 고기를 먹는 잉글랜드 사람은 교수형이 처해지는 것이 여전히 가능했다. 청어는 절인 생선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품목. 14~15세기에 발트해와 북해는 이 생선으로 가득차 있었다. 한자 동맹의 상업도시들은 거의 200년간이나 발트해의 절인 생선 거래의 대부분을 장악했고, 북해연안에서 가장 번화한 중심지들은 잉글랜드 동쪽 해안에 위치한 야머스와 스카버러, 그리고 네덜란드의 브릴이었다. 청어는 풍부하긴 하지만 매우 빠른 속도로 산패되는 지방질이 많은 생선. 그것을 소금에 절여두고자 한다면 잡은 뒤 24시간 이내에 시작해야 함. 생선 판매시기에는 고도의 조직력이 요구되었으며, 심지어 발트해 연안에서는 수산회사들이 매일 들어오는 어획량을 인수하기 위해 늘 가까이에 대기하고 있었다. 15세기 경 북해에서는 전문적인 어부들이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획물을 처리해야 했다. 노퍽의 네덜란드 어선들은 1톤이 넘는 소금과 아주 많은 수의 통이나 통을 만들 수 있는 재료들 뿐만 아니라, 몇달 동안 5~10명의 선원들에게 양식으로 공급될 곡물과 에일, 베이컨, 소금에 절인 생선, 소고기와 버터를 싣고 초여름에 아이슬란드 근해를 향해 출항했다.
- 따뜻하고 습한 지역에서 식품을 건조시키려면 기후로부터의 보호와 무한정의 연료공급이 필요. 그러나 날씨가 무덥거나, 건조하고 바람이 부는 기후가 계속되는 지역에서는 만족스럽고 비용이 적게 드는 방법이었다. 중동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대추야쟈, 무화과, 포도는 뜨거운 모래사막에 파묻는 간단한 방법으로 건조시킴. 고기는 돌로 두드려서 육즙을 제거한 다음 햇볕에 말렸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후자의 방법을 북쪽 기후에 적용하여 깨끗하고 상쾌한 공기와 서늘한 바람이 효과를 높여준다는 것을 알았다. 노르웨이의 스토크피스크는 내장을 제거하고 나무로 만든 선반에 수천마리식 매달아 건조시킨 대구인데, 중세 사람들의 값싸고 거의 변질되지 않는 저장식품이 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요리사가 다루기에 그다지 편리한 재료는 아니었을 것이다. 14세기에 파리의 한 상인은 다음과 같은 방법을 추천했다. 10~12년 된 대구 말린 것을 요리할 때는 "한시간 동안 나무망치로 두들긴 다음 더운물에 두시간 이상 담가두고, 익힌 다음에는 잘 문질러서 물에 씻어낼 필요가 있다. 그다음 그것을 겨자에 찍어 먹거나 버터에 적셔 먹는다."
- 14세기 역시 대부분의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의 식사는 별도의 부류에 속했다. 그것은 여전히 호밀, 보리, 잡곡으로 만들어진 검은 빵과 수프냄비에서 떠낸 콤파나티쿰, 치즈 약간 또는 식사를 부드럽게 마무리할 응유 한 사발로 이루어졌다. 시골 대지주의 노예들이 자신의 오두막에서 사는 농부보다 훨씬 더 잘먹었다. 이따금 그들은 잡곡밥, 완두콩 푸딩, 소금에 절인 청어, 말린 대구, 치즈, 재배지에서 만든 에일뿐만 아니라 소고기나 거위고기도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세 요리법의 독특한 특징은 소도시의 부유한 상인이나 시골의 2류 귀족이 베푼 중류사회의 정찬모임에서 아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중세의 메뉴는 현대의 것과 거의 관련이 없었따. 사실상 정식과 메뉴에서 골라먹기(알라카르테)는 같은 것이었다. 각 코스는 모든 것이 식탁 위에 동시에 차려지는 각양각색의 요리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식사하는 사람들은 제공된 음식들 가운데서 골라 먹었다. 그 코스들은 오늘날처럼 수프-생선-고기-단 음식의 순서로 나누어져 있지 않았으마, 우연히 어느정도 분류가 되기도 했다. 16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 코스가 어느정도의 단일성을 의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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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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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자는 그대로는 장기간 보존 불가. 수확시기도 한정돼 있어 1년내내 수확할 수도 없음. 오랜 시간 감자를 주식으로 삼아온 인디오들은 감자를 장기간 보존할 방법을 고안해냄. 스페인 사람과 인디오의 혼혈인으로 페루 정복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가르실라소 데 라베가는 이 지역 사람들이 감자를 어떻게 보관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땅에 짚을 깔고 그 위에 감자를 놓는다. 이 지역의 밤은 거의 1년내내 몸이 얼어붙을 만큼 추워 감자가 금세 어는데 언 감자를 그냥 밖에 둔다. 이렇게 언 감자는 마치 요리를 한 것처럼 부드러워진다. 그것을 짚으로 싸서 조심스레 밟으면 감자속 에 있던 수분이 빠져나온다. 수분이 모두 빠지면 그것을 다시 햇볕에 바짝 말린다. 그러면 감자도 장기간 보존할 수 있다. 이것을 추뇨라고 한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냉동건조 보존법. 냉동건조라고 하면 근대적 느낌이 들고, 인스턴트 라면에 들어 있는 건조 야채 같은 것으리 떠오르지만, 일본에서도 옛날부터 한천,언두부, 동결 곤약 등을 이런 방법으로 만들었음. 이런 두부나 곤약은 냉동건조시키는 과정에 바람이 들면서 구멍이 생기므로 음식을 만들 때 국물이 잘 스며들어 생두부나 곤약과는 다른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있음. 인트턴트 라면에 들어 있는 동결건조 감자는 그런대로 원래 맛에 가까운데, 이는 좋은 조건에서 단시간에 만들었기 때문이고, 두부와 언 두부가 다르듯이 추뇨는 가공전 감자와는 전혀 다른 음식이다. 현지 케추아어 속담에 '추뇨 없는 수프는 사랑 없는 인생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금도 추뇨는 안데스 고지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음식. 먹는 방법도 졸이거나, 수프의 건더기로 넣는 것뿐만 아니라 쪄서 치즈를 뿌리고 돌절구에 찧어 가루로 만들어 고기요리를 할 때 넣는 등 쓰임새가 매우 다양하다. 추뇨를 처음 먹어본 유럽인들 중에는 맛이나 씹는 느낌이 크로크같다고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리를 잘해서 그랬는지 맛있다는 사람도 있음. 어쨋든 스페인으로 돌아온 정복자들은 남미에서 접한 이 신기한 작물을 항해할 때 필요한 보존식품으로 여겨 약탈품과 함께 배에 실었다.
- 벨기에에서는 프라이드 포테이토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프리츠,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프리텐이라고 함. 모두 튀김이라는 의미로 메인요리에 곁들여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간식으로, 또는 주식대용으로 사랑받음. 프리츠를 국민음식이라고 단정하는데 저항을 느끼는 벨기에 사람이라도 푸짐한 홍합와인찜과 프리츠가 같이 나오는 요리라면 벨기에가 자부하는 요리라고 자신있게 말할 것이다. 벨기에에는 어느 동네든 반드시 프라이드 포테이토 전문점이 있고, 일반 가정에서는 시스템 키친에 프라이드 포테이토 튀김기가 포함되어 있음. 감자를 자르는 것 기계가 아닌 손으로 해야 한다는 등, 튀김온도를 처음에는 160도에서 10분, 두번째는 몇도에서 몇분이라는 둥, 벨기에 사람 나름의 철칙이 있다. 나아가 프라이드 포테이토에 곁들이는 소스도 마요네즈, 타르타르 소스, 머스터드 소스 등 여러가지 중에서 선택한다. 프라이드 포테이토는 홀랜드, 즉 지금의 네덜란드에서 탄생하여 원정지에서 이를 본 나폴레용이 프랑스로 가져갔고, 이윽고 미국에 전해졌다는 설이 있음. 하지만 현재는 벨기에세서 생선튀김 대용식으로 프라이드 포테이토가 탄생했다는 설이 유력. 18세기말 무렵, 어느 여행자가 남긴 기록에는 가잉 얼어 물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되자 생산을 튀기듯 감자를 썰어 튀겨먹었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프렌치 프라이라고 하는 이유는 정확하지 않음. 프랑스를 경유해서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일수도 있고, 미국에서 프랑스어를 하는 벨기에계 이민자를 프랑스인으로 착각했을수도 있다.
- 18세기 아일랜드 농민은 1년 중 10개월을 감자와 우유로, 남은 2개월은 감자와 소금으로  살아갔다고 한다. 하루에 먹는 감자는 어른 한명당 10~14파운드로, 6킬로그램 정도. 이처럼 식량을 한가지 식품에만 의지하면, 만에 하나 그 식품이 손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날지 당시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1845년 아일랜드 감자밭에 입고병이라는 전염병이 엄습. 그 뒤 수년간에 걸친 대기근은 기근에 익숙하다는 아일랜드 농민조차 절망적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개략적으로 100만명이 기근에 희생되었고, 100만명이 다른 나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들이 간 속은 잉글랜드 외에 미국, 캐나다, 멀리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였다. 이 공전의 대기근에도 불구하고 본국인 영국 정부의 대책은 거의 없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일랜드는 예부터 영국의 속국으로 취급받아 자주 침략을 당해왔다. 특히 16세기 영국의 왕 헨리 8세가 로마 카톨릭 교회와 결별한 이래 영국 성공회는 아일랜드에 깊이 뿌리내린 카톨릭 교도를 거듭 탄압. 켈트족의 피를 이어받고 카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인과 이를 차별하고 억압하는 앵글로 색슨계 프로테스탄트 영국인의 대립적 구조는 수백년에 걸쳐 고착했던 것이다. 대기근에 대한 영국 정부의 차가운 대응은 두고두고 아일랜드인에게 깊은 원한을 샀고, 결과적으로 아일랜드가 독립하는 계기가 됨. 1922년 아일랜드가 일단 독립한 뒤에도 영국의 일부로 남겨진 북붜 얼스터에서 최근까지 테러행위를 계속해온 아일랜드공화국군은 대기근과 그뒤 계속된 민족의 비극을 배경으로 탄생한 무장혁명조직이다. 이런 북아일랜드 문제의 원인은 감자만을 단일경작했던 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대기근을 계기로 세계사의 흐름이 변한 사례가 있다. 현재 미국에선느 아일랜드계 주민의 총 인구의 20%를 차지하는데, 그들 대부분이 감자기근을 피해 건너온 이주민의 후손. 당시 아일랜드 이주민은 시끄럽고 거친 술주정뱅이라고 업신여김을 당했지만 이윽고 그 안에서도 성공한 사람이 나온다. 아일랜드에서 대규모로 탈출한 농민들 중에 패트릭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패트릭은 미국으로 향하는 배안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해 보스턴에 정착. 그는 비록 빈곤과 이민자에 대한 차별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대신 그의 손자는 하버드대를 졸업하여 정재계에서 이름을 날림. 그래도 여전히 뒤에서는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지만,그의 차남 즉 패트릭으로부터 4대째가 되는 손자는 훗날 미합중국의 35대 대통령이 된다. 그가 바로 존 에프 케네디다. 케네디의 증조부는 감자기근때문에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농민이었다.
- 아마도 유럽에서 처음으로 토마토를 먹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인 나폴리에서는 밀가루 반죽을 제면기에 걸어 얇고 길게 뽑나낸 가느다란 파스타, 즉 스파게티를 대량생산하는 기술을 개발. 지금 스파게티를 이탈리아 국민은식으로 일컫는데, 경질의 밀인 세몰리나를 원료로 만들어 씹는 맛이 있는 건조 파스타는 원래 나폴리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남부 음식이었다. 그것이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진데는 파스타와 토마토의 행복한 만남이 매우 큰 영향을 끼침. 파스타에 토마토 소스를 섞은 요리 나폴레티나가 언제부터 일반적이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17~18세기라고 추정하는데, 19세기 말 나폴리의 풍속을 그린 그림을 보면 마을 사람들이 거리에서 고개를 쳐들고 손을 국수를 집어 입안 가득히 넣고 우물거리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 무렵 스파게티는 포장마차에서 선채로 간편하게 먹는, 말하자면 다치구이소바와 같은 것이었다. 지금처럼 파스타가 코스요리의 첫 음식으로 자리잡은 것은 의외로 20세기 중반정도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파스타 이상으로 토마토와 관계가 깊은 음식이 바로 피자인데, 이것 역시 기원은 나폴리다. 이탈리아인이 잘 먹는 마르게리타 피자는 토마토 소스에 모차렐라가는 하얀 치즈를 올린 심플한 피자다. 갓 구운 피자 위에 생 바질 잎을 올리면 바로 이탈리아 국기의 3색과 같은 배색이 된다. 마르게리타 피자는 1889년 이탈리아 국왕의 왕비 마르게리타를 위해 나폴리 요리사가 고안해 낸 것. 마르게리타 국기의 3색을 배합한 소박한 서민요리를 매우 흡족해 하며 자신의 이름을 쓸수 있게 했다고 한다.
- 타바스코는 미국, 일본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팔리고 있지만, 정작 지명을 따온 멕시코에서는 타바스코 소스병을 볼 수 없다. 고추를 이용한지 수천년에 달하는 역사를 가진 멕시코인들은 시장에 나와 있는 것만 해도 100종이 넘는다는 수많은 고추 중에서 요리나 기호에 따라 몇가지를 선택해서 매운 정도나 향이 어울리는 살사 소스를 그때그대 만들어 쓰기 대문. 타코스나 로스트 치킨에 반드시 곁들여 나오는 살사소스에는 다진 양파나 토마토, 라임즙, 코리앤더 잎이 들어가는데, 아무리 싸구려 식당의 소스라도 병에 들어 있는 고추소스와는 전혀 다른 신선한 맛을 지님
- 마야 사람들은 거의 1년 내내 건조시켜 저장한 옥수수를 삶아서 껍질을 벗긴 뒤에 으깨어 빚어 먹었다. 지금도 옥수수를 그대로 삶아 먹기보다는 가루를 내어 반죽한 것을 얇고 넓저갛게 구운 토르티야나, 반죽에 재료를 넣고 치마키처럼 옥수수 껍질이나 바나나 잎으로 싸서 찐 타말레스로 만들어 먹는다. 옥수수는 콜럼버스가 유럽에 전한 것. 옥수수는 한랭지에서도 잘 자라고, 덥고 건조한 기후에서도 강하며, 생육이 빠르다는 것 등 여러 이점이 있음. 그런데 유럽에서는 좀처럼 널리 재배되지 않안따. 옥수수 가루에는 밀가루처럼 글루텐이 없어 부드럽고 푹신한 빵을 만들 수 없기 때문. 또 낯선 곡물은 이교도들이 먹는 음식으로 그리스도교도에게는 적당하지 않다고 여긴것도 보급이 차단된 이유였음. 얼마전만 해도 유럽 사람에게 옥수수는 가축의 사료에 지나지 않았따. 그래도 이탈리아에서는 옥수수가 비교적 빨리 식용되었따. 단지 멕시코의 토르티야처럼 빵 모양으로 굽는 것이 아니고, 끓는 가루를 부어 걸쭉하게 될 때까지 저어 떡과 비슷한 폴렌타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 먹음. 일본의 소바가키 같은 음식인데, 매시드 포테이토처럼 고기요리에 곁들이거나 조금씩 떼어 토마토 소스를 곁들여 먹고, 식어서 굳은 것을 다시 오븐에 넣어 굽기도 한다. 옥수수 폴렌타는 북이탈리아의 명물요리인데, 그 기원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보리죽까지 거슬러 올라감. 코르시카 섬에서는 밤가루,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서는 메밀가루로 만든 폴렌타로 먹는다. 루마니아의 마마릴기,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프릿카도 소바가키 모양의 옥수수 요리임. 아프리카에서도 옥수수를 뜨거운 물로 반죽한 우갈리를 주식으로 함. 우갈리도 그 요리의 기본은 수수와 같은 잡곡으로 만든 것. 지금은 밀가루나 남미가 원산인 카사바를 이용하는 지역도 있지만, 케냐에서는 맛 좋은 옥수수로 만든 우갈리가 사랑받음.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옥수수를 가리키는 영단어 콘은 원래 곡식 일반, 혹은 그 땅에서 재배하는 주요 곡식을 말함. 즉, 영국에서 콘은 밀이고, 스코틀랜드에서는 귀리가 된다. 나아가 독일에서 콘은 호밀이다.
- 캐서린 드 메디치가 즐겼다고 하는 아티초크를 최음제로 여겼다고 했는데, 양이 아주 적으면서 값비싸고, 신기한 물건에 대해 특별한 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인간의 본성임. 예부터 사과같은 과일이나 꿀, 그리고 동양에서 들여온 여러종류의 향신료, 타아가 트뤼프와 아스파라거스 같은 값비싼 채소까지 사치스런 음식에는 한결같은 에로틱한 이미지가 따라다님. 미약을 몸을 튼튼하게 지켜주는 약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며, 이에 도움이 될 만한 음식은 꽤 있을 것임. 그러나 사람들이 화제로 삼은 것은 좀더 노골적인 최음효과였다. 예를 들면 트뤼프에 관해서는 19세기 프랑스의 미식가 브리야사바랭도 정설을 확인하고자 여러 방면으로 조사한 끝에 다음과 같이 조심스런 결론을 내림 '트뤼프가 결코 뚜렷한 효과를 내는 최음제는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부인들을 한층 순종적으로 만들고 남성들을 좀더 상냥하게 만든다' 숫돼지의 성 페로몬과 같은 종류의 화학물질을 포함한 트뤼프가 인간에게도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나, 이 정설은 고대에도 알려져 있었다. 중세 프랑스에서는 검은색을 불길한 색으로 여겼지만, 르네상스 시대부터는 다시 귀하게 대접한 모양이다. 18세기에 루이 15세의 정부 퐁파두르 부인이 왕을 위해 고안한 요리에 트뤼프가 자주 쓰인것도 왕의 정열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을까...
- 포테이토 칩은 기묘한 계기로 생겨났다. 19세기 중반, 뉴욕주 사라토가 스프링스에 있는 식당 문 레이크 로지의 요리사였던 조지 크럼은 어느날 한 손님의 불평에 심기가 불편해 있었다. 프렌치프라이가 너무 두꺼워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크럼은 감자를 평상시보다 더 얇게 썰어 튀겼지만, 그래도 손님은 만족하지 않음. 화가난 크럼은 화풀이로 감자를 종잇장처럼 얇게 썰어 포크로 찌를 수 없을만큼 바삭하게 튀겨 손님에게 내놓았다. 예상과는 반대로 그 손님은 매우 기뻐하며 접시를 비움. 크럼이 노릇하게 구운 얇은 프라이드 포테이토는 순식간에 큰 인기를 끌었고, 사라토가 칩이라는 이름으로 문 레이크 로지의 스페셜 메뉴가 됨. 그리고 20세기 전반에 감자껍질을 벗기는 기계가 등장하여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포테이토 칩은 전국으로 확산됨
- 포테이토 칩과 닮은 프랑스 폼수플레 역시 우연한 계기로 탄생. 1837년 파리와 생제르맹앙레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던 날, 철도회사는 손님을 레스토랑으로 초대. 그런데 기차가 늦게 도착해 요리사가 준비한 감자 프라이가 식어버림. 일행이 도착한 다음에 식은 감자를 다시 기름에 넣고 데우자 프라이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것이다.
- 터키는 동서문명의 교차로에 위치한 덕에 다양한 문화요소를 받아들여 독특한 식문화를 형성. 터키 요리라고 하면 보통 양고기 꼬치구이 시시케밥이나,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터키인들이 경영하는 노점에서 볼 수 있는 도네르케밥이 유명한데, 꼬치구이처럼 단순한 음식만이 터키요리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음. 궁중요리의 흐름을 이어받아 온갖 정성을 들인 요리나 수많은 종류의 과자는 프랑스 요리나 중국요리와 비교할만 하다. 간 고기를 채소에 채워 넣은 요리가 많은 것이 터키요리의 특징. 고기를 피망이나 토마토, 가지에 채워 넣거나, 양배추나 포도잎에 싼 것을 모두 돌마라고 하는데 그 종류가 매우 많음. 필라프라 주로 중동에서 동쪽으로 전해진 것에 비해, 돌마나 사르마라고 부르는, 속을 채운 요리는 아랍의 여러 나라는 물론이고, 그리스나 발칸반도의 동유럽 여러나라에 전해졌다. 사실 롤 캐비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터키에 있다. 도한 간 고기를 가지속에 넣지 않고, 가지와 고기를 번갈아 몇층으로 겹겹이 쌓아 굽는 무사카는 그리스 요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것도 터키에서 발칸반도에 걸친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요리. 마찬가지로 고기를 갈아서 경단처럼 빚어 구운 요리도 중동, 그리스, 동유럽에 많음.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는 남은 자투리로 고기를 다져서 동물의 장에 채워 넣는 요리가 보통이지만 독일의 영향이 강한 곳을 제외한 동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의외로 이런 음식을 볼 수 없음. 대신 미트볼 같은 요리는 각지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원래는 터키의 쾨프테라는 간 고기 요리의 총칭에서 유래. 원래 이슬람권인 터키에서는 대개 양고기를 사용하는데, 발칸의 여러나라에서는 쇠고기나 돼지고기도 사용. 터키가 발상지인 음식은 그밖에도 많이 있는데 또 하나 의외의 음식이 있다. 바로 불라리아 명물인 요구르트. 이는 터키계 유목민이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명칭도 터키어 요우르트에서 유래. 본고장인 터키에서는 샐러드나 수프 등 다양한 요리에 쓰는데, 그리스나 불가리아 등지로 이와 같은 요리가 전해짐. 요구르트는 중앙아시아와 인도 등 동방으로도 전파됨.
- 밀가루 루로 끈기를 내는 일본식 카레가 영국의 인도식 스튜를 응용한 것이라는 사실은 상식. 인도 사람들은 일본의 카레라이스를 먹어도 자기나라의 요리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인도에는 카레라는 요리가 없다. 16~17세기 인도의 서해안을 식민지로 한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이 현지에서 항상 사용하는 향신료를 많이 넎은 수프나 끓여 졸인 국물요리를 커리라고 기록한 것이 카레의 영어 어원임. 하지만 다른 지역 사람들이 타밀어라든지, 말라바르어로 카레라고 하는 커리는 인도나 인도 식문화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 향신료가 잔뜩 들어간 국물요리나 졸인 요리를 총칭한다 해도 좋음. 들어가는 재료는 채소, 콩, 육류, 어패류 등으로 다양한데, 사용하는 향신료도 다양함. 매운 향신료를 의미하는 믹스 스파이스인 가람마살라가 유명한데, 인도의 남부에서는 가루로 된 것보다는 그때그때 갈아서 쓰는 경우가 많고, 가람마살라가 만능의 카레가루는 아니다. 이런 스파이시한 인도요리가 대영제국을 통해 유럽에 소개되고, 프랑스에서도 이국적 요리로 변형되었는데, 18세기에 영국의 크로스 앤 블랙웨사가 향신료를 조합한 카레가루를 상품화하면서 흔히 말하는 카레맛이 본격적으로 확산됨. 20세기 초, 파리의 레스토랑에서 내놓은 에드워드 7세식이라는 요리에 카레맛이 나는 것은 당시 영국왕이 인도황제도 겸했기 때문. 일본의 카레라이스는 영국을 경유해 들어온 것이지만, 남아공 인도계 이민들이 직접 카레맛의 요리를 가져간 예도 있음. 중미의 카리브해 지역에서도 비교적 인도계 이민이 많은 나라에서는 카레맛이 널리 퍼졌다. 예부터 중미 사람들에게 익숙한 고추에 구대륙이 원산지인 향신료가 잘 어울린 것이 이른바 카레가루가 되어 돌아온 셈
- 현재 치즈왕국이라고 하면 단연 프랑스이고, 그 다음으로 스위스나 이탈리아를 들 수 있는데, 발상지는 서아시아임.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앙아시아, 몽골의 유목민이 치즈를 발명했다고도 하지만, 지금도 몽골에서 사랑받는 이 유제품은 가열한다든지 식초를 첨가한다든지 해서 우유를 응고시킨 음식으로, 효소로 우유를 응고시켜 발효, 숙성시키는 일반적 유럽치즈와는 제법이 다르다. 아라비아에는 유명한 치즈탄생 전설이 있다. 옛날 어느 상인이 양의 위를 말려 만든 물통에 우유를 넣고 사막을 여행하다가, 막상 마시려고 보니 안에서 나온 건 우유가 아니라 투명한 물과 흰색 덩어리였는데, 그 덩어리를 먹어보니 의외로 매우 맛있었다는 이야기다. 양의 위에는 레닌이라는 효소가 들어 있어 이것이 우유를 응고시키는데, 투명한 물은 훼이이고, 흰색 덩어리는 치즈의 원료가 되는 커드이다. 치즈는 이미 기원전 4000년부터 3000년경에 만들어진 것 같다. 사막의 상인이 치지를 발견했는지 알 수 없지만, 치즈 만들기의 원점은 정말로 동물의 위 속에서 우연히 일어난 화학변화였는지도 모른다
- 이누잇의 식사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생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상식. 실제로 그들의 전통적 식생활은 사냥해 잡은 동물을 날로 먹는 비율이 매우 높음. 이것은 열을 가하면 귀중한 비타민C를 잃어버리게 되므로 채소나 과일을 먹기 어려운 환경에서 나온 습관. 사실 북극 탐험가들 대부분, 그리고 1948년 프랭클린 탐험대 129명이 전멸한 가장 큰 원인은 생고기를 먹지 않아 비타민C가 부족해져 생긴 괴혈병이 만연했기 때문. 생고기를 먹는 것은 야만스런 행위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 영어의 프루트는 즐거움을 뜻하는 fructus에서 나온 말로 달콤한 향과 맛을 즐기는 먹을거리라는 의미. 이렇게 페르시아 멜론은 로마로 건너가 페르시쿰으로 불림. 로마제국의 확대와 함께 지금의 프랑슬 전해져 페슈, 그 다음 영국으로 건너가 피치가 됐다. 일상 회화 중에서 피치는 멋지다, 훌륭하다, 멋있는 여자를 표현할 때 쓰는데, 이것이 원래는 페르시아였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미국사람들은 현재의 이란에 대해 무슨 일이 있어도 멋진 나라라고 말하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 중국에서는 전한 무렵부터 서아시아로부터 실크로드를 경유하여 맷돌과 함께 제분법이 전해짐. 처음에는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는데, 후한 무렵에는 가늘고 긴 끈상태, 즉 면국수가 등장. 대략 2000년 전의 일이다. 호식이라고 한 밀가루 요리는 실크로드의 기점인 장안을 중심으로 당나라 시대에 발전하여 송나라 시대에는 중국 전역에 보급됨. 당초 서쪽으로부터 중국에 전해진 것은 가마에 구운 넓적한 발효빵과 같은 종류였을 것이다. 그것이 중국에서는 언젠가부터 찐빵 형태의 만두로 변화. 밀가루 생지를 가마에서 구운 빵 계통의 식품이 왜 중국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빵의 분포는 굽는 가마, 영어로 말하면 오븐의 분포와 일치하는데, 중국인은 신석기 시대부터 증기로 찌는, 서양에는 없는 독특한 가열법을 발전시켜 왔다. 빵을 굽기 위해 가마를 설치하는 것보다, 자신들에게 익숙한 찜통에서 빵 생지를 쪄서 만두로 만드는 방법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름. 나아가 이 조리법은 바오쯔나 국수 등 중국의 독자적 밀가루 요리로 대단히 많이 발전. 일본어로 면이라고 하면 당연히 가늘고 긴 것으로 생각하고, 밀가루로 만드는 우동이나 소면, 메밀국수가지 합쳐 면류라고 한다. 하지만 원래 면은 그 형태보다는 원재료가 밀가루인 것이 중요. 중국에서 면이라면 기본적으로 밀가루를 가리키고, 밀가루로 만든 식품은 모두 병이라고 총칭. 일본에서 말하는 가늘고 긴 면은 중국에서 보통 몐타오라고 함.
- 중국의 면 중에는 끓는 물에 밀가루 반죽을 칼로 잘라 던져 넣는 산시성 명물인 다오샤오몐과 같은 특이한 종류도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가늘고 긴 면은 일반적으로 가공법을 기준으로 하여 크게 세종류로 나뉨. 먼저 긴 막대기 모양의 반죽을 잡아 당긴 다음, 계속하여 둘로 접기를 반복하는 수타식. 한가닥을 두가닥으로, 두가닥을 네가닥으로 하는 작업을 반복하는 수타면의 대표적인 것이 라멘이다. 납은 손으로 잡아당기는 것을 의미. 다른 설도 있지만 일본 라멘의 어원은 라멘으로 보고 있다. 한편 반죽을 얇게 펴서 칼로 가늘게 썰어 만드는 칼국수도 일본인에게는 수타식 우동 등으로 친숙함. 중국어로는 이 면을 치에몐이라고 하는데, 그 종류가 다양하다. 손으로 반복하여 접어 만드는 수타식 면과 칼로 가늘게 썬 칼국수가 중국에서 밀가루를 면으로 가공할 때 쓰는 일반적 방법인데, 스파게티는 양쪽 방식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 중국에서 가늘고 긴 면을 만드는 세번째 방법은 우무를 가공할 때 쓰는 방식과 같이 압출하는 방식. 압출식은 일본에서는 낯선 방식이지만, 녹두전분으로 만드는 당면이나 쌀가루로 만드는 비훈 등 압출식 면은 그 종류가 다양함. 한반도에서 냉면 등에 쓰는 아주 찰기가 강한 독특한 면도 메밀가루와 전분으로 만든 압출식 면이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일대에서 보통의 밀가루가 아닌 다른 재료로 면을 만들 때 쓰는 방법인데, 이탈리아 마카로니나 스파게티는 원리를 본다면 압출식 면이다.
- 손님을 냉대한다는 의미로 식은 어깨고기라는 말이 있다. 중요한 손님에게 정성이 담긴 요리를 대접하는 것은 동서양, 시대를 불문하고 마찬가지다. 따뜻한 것은 따뜻할 때, 차가운 것은 차가울 때, 각각의 요리가 가장 맛있는 상태일때 대접하는 것이 가장 좋다. 차가운 어깨고기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맛없는 요리를 상징. 반가운 손님이라도 너무 오래 머무르면 식은 어깨고기를 냄으로써 빨리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넌지시 비치는 것이다. 단, 현대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cold shpulder의 shoulder는 어깨고기가 아니라, 어깨를 쳐서 넘어뜨리다. 어깨를 돌린다 등에서 사용하는 어깨의 의미와 같은 느낌으로 푸대접이라는 뜻을 나타냄. 또한 하이픈이 들어간 cold-shoulder는 냉대하다는 동사가 되기도 함
- 구운지 오래된 빵은 딱딱해서 그대로 먹기 어려움. 이것을 어떻게든 먹기 쉽게 하기 위해 뜨거운 국물이나 와인 등의 액체를 부어 불렸는데, 이것을 속라틴어로 suppa라고 했다. 프랑스어의 수페, 영어의 수프, 독어의 주페, 이탈리아어의 주파, 스페인어의 소파의 어원이 suppa다. 잔다르크는 물을 탄 와인에 적신 빵을 좋아했다고 한다. 얼마 안가서 수프라는 말은 불린 빵보다 그 빵을 불리기 위한 국물을 가리키게 됨. 그런데 18세기 이후 프랑스의 부유층은 수프라는 말이 천박하다고 하여, 대신 포타주라는 말을 쓰기 시작. 이것은 항아리를 뜻하는 속라틴어 potus가 어원. 즉 프랑스어러 포라고 부르는 항아리, 혹은 그 끓인 내용물이 포타주다.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걸쭉한 수프를 포타주, 맑은 장국 같은 것을 콘소메라고 하는데, 이렇게 나누어 부르는 것은 영어의 용법에 따른 것이다. 본래 프랑스어의 포타주는 스튜처럼 졸인 국물부터 콘소메처럼 맑은 포타주까지를 포함한 국물의 총칭. 또한 고기나 채소의 정수만을 추출한 고급스런 콘소메는 완벽하게 하자는 의미의 동사 consommer의 파생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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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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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근대성들

역사 2015. 5. 27. 09:45

 


잃어버린 근대성들

저자
알렉산더 우드사이드 지음
출판사
너머북스 | 2012-12-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중국, 베트남, 한국의 과거제와 관료제의 역사적 현재성""만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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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의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가지는 소위 능력주의 사회는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보여서 과거 한국과 중국, 베트남이 천년을 넘게 유지, 발전시켜왔던 관료제, 곧 능력주의 사회가 그다지 혁신적으로 느껴지지 않을수도 있앋. 그러나 세계사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이는 상당히 예외적이고 독특한 양상이었다. 유럽사회는 1차대전까지 귀족주의적인 세습적 권력을 바탕으로 한 통치가 유지되었던 사회였다. 버트런드 러셀이 22년 '중국인의 문제'라는 책에서 중국이 오래된 낡은 제도와 관습에서 벗어나기를 충고했을 당시에도 여전히 영국은 세습적인 상원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러셀 자신도 귀족출신으로서 여전히 귀족적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았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인재를 모집하는 획기적 과거제도를 통해 세습적 권력에 기반을 둔 통치가 막을 내린지 이미 천년이 지나고 있었다. 능력주의의 성향이 이미 주류가 된 사회로 변화한 동아시아에서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것은 불가능해진 지 오래. 또한 이같은 동아시아 과거시험과 관료제는 실제로 예수회 선교사 등을 통해 서구에 전해져 오히려 서구의 근대성 형성에 역사적으로 기여했음. 그럼에도 아시아 사회는 봉건적이라고 묘사되는 인격적이고 사적 감정에 기반을 둔 통치를 했던 반면에 유럽사회에 대해서는 사적 감정을 배제한 규칙과 이성에 기반을 둔 통치질서를 가졌다는 이미지가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 펠립 페르낭데 아르메스토는 지난 1000년간의 세계사를 담은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만약 먼 미래에 은하계 박물관이 생긴다면, 다이어트 콜라 캔이 중세의 사슬갑옷과 함께 '지구 1000~2000년: 기독교 시대'라는 표지를 붙인 진열장의 작은 유리상자에 함께 놓여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유럽 중심주의에서 조금만 벗어아 서기 100~2000년: 기독교-유교 시대의 문화유물을 기념하는 것으로 그 범위를 넓힌다면, 분명히 동아시아의 과거시험 교재를 사슬갑옷과 다이어트 콜라 캔 옆에 추가해야 할 것이다.
-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서구민주주의 사상은 고대 아테네가 노예를 소유했다는 사실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의 세 중국식 관료제 사회에서 능력주의 사회의 근본강령이 불완전하고 일부 타락했다 해도, 이 세나락 가졌던 능력본위의 권력이라고는 사고의 싹 그리고 정치행위에서 때 이르게 자라난 행정이론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내리는 것을 가로막아서는 안된다.
- 만약 강력했던 로마제국이 기원후 4세기에 극도로 쇠락하여 두 영역으로 분열되지 않고 1500년간 더 생존했다면, 근대 유럽 국가들의 역사는 좀더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와 비슷하게 되었을 것이다. 즉, 하나의 제국 중심부에서 창출된 정치적 영감이 주변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지금도 로마법은 여전히 근대 유럽 국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유럽의 르네상스 시기까지 중국은 과학과 기술에서 세계의 선두에 있었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큰 정치 단위체였던 중국의 정치적 역량은 다른 어떤 지역의 발전 수준보다도 뛰어났다. 만약 11세기에 지금처럼 세계적으로 효율적인 소통이 이루어졌다면, 오늘날 아시아의 지식이들이 미국의 비즈니스 스쿨이 설파하는 귀중한 정보들을 익히는 데 전념하듯 당시의 유럽인들은 중국의 정치, 경제이론들을 배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은 조직에 대한 사고에서 세계적 표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최소한 한개 이상의 왕안석 싱크탱크를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과거제와 유사한 제도는 중국에서 7세기 경에 이미 존재했고, 한국에서는 8세기 말, 베트남에서는 11세기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제를 연구하는 현대의 역사가들은 그것이 중국의 세습적인 귀족세력의 쇠퇴를 가져온 원인인지, 아니면 쇠퇴의 결과인지를 놓고 혼란스러워한다. 몇 명의 저명한 20세기 중국인 역사가들은 당 제국 때 과거시험을 바탕으로 한 능력주의 사회가 처음 출현한 것에 대해 지방의 호족들과 귀족세력을 견제하여 황제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한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설명공식에 따르면, 7세기 말의 측천무후는 자신의 정적인 산동 등 지방귀족 세력에 맞설 수 있고, 자신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새로운 사회계층을 창출하기 위하여 전시와 진사시험을 장려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 두 시험제도는 한국과 베트남에서도 채택되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세계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이런 설명이 부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중국사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이런 설명은 7세기 중국에서 귀족과 과거시험 지망생 간의 차이와, 과거를 통해 관직을 얻은 사람들의 수를 과장한 것일수도 있다. 군주와 귀족들 간의 권력투쟁은 보편적 현상이다. 그러나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의 관료선발 시험제도는 동아시아에서만 독특하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1500년대나 1600년대 유럽 군주들의 경우, 군주가 자신의 정치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취했던 대표적 전략은 귀족의 지위를 부여하는 왕실의 임명장을 팔거나 국가에 대한 봉사의 대가로 귀족지위를 부여함으로써 단순히 귀족계층을 확대시키는 것이었다.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첫번째 군주는 기사작위를 그의 재위 초반 2년 동안 부려 3배나 증가시켰다.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은 스웨덴 귀족가문의 숫자를 10년만에 두배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훌륭하고 충성스런 신하에게 종종 관작을 내렸던 동아시아 관료제 사회의 군주들은, 왜 크리스티나 여왕처럼 의도적으로 귀족계층을 늘리는 식으로만은 생존할 수 없었는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 과거시험이 출현하게 된 배경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 서구에서의 정치적 근대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탄생은 단순히 그리스의 민주적 사상이 지닌 호소력만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아테네 제국의 팽창에 따른 결과였다. 제국의 과업, 특히 해군의 야망과 관련된 과업은 기존의 아테네 과두정치세력을 제압하여 평민들과 권력을 나누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비슷한 주장은 훨씬 더 큰 규모로 엄청난 정치적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중국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광대한 정치체제를 통치하는데 필요한 극히 위대한 사명감이나 통치욕구, 그리고 엘리트 사이에서라도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따르는 크나큰 어려움은 순전히 세습적 권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황제체제 이전의 동아시아에서 정치적 현자를 구하고자 하는 이상은 호소력을 갖게 되었으며, 이는 천천히 필기시험의 형태로 제도화되었다. 과거시험은 이처럼 광대한 공간에 걸처 정치적 애착의 새로운 행동양식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 최근까지 서구의 정치사상에서 능력주의 사회의 위험성 문제는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음. 임마누엘 월러스틴은 자본주의가 사실상 능력주의 사회를 창출한다고까지 주장. 자본가는 노동력에 대해 보다 높은 효율성을 요구하고, 능력주의 사회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불평등한 경제적 보상에 대해 품는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메커니즘 또는 완화제를 제공해준다는 낙관적 전제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제는 잘못된 것이다. 능력주의 사회는 정치적으로 사회를 안정시키기보다 오히려 불안정하게 만든다 서구의 사상가들은 아직까지도 그 위험요소를 제대로 분석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세습적인 왕자들은 아버지나 다름없는 인물들이었다. 반면에 여피족은 과도한 특권을 지닌 동기간에 불과하다. 월러스틴과는 대조적으로 자본주의가 나타나기 이전에는 유럽의 사상가들은 능력주의 사회의 원칙에 근거한 정치제제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 다루었다. 마키아벨리와 파스칼은 능력주의 사회가 문제를 일으킬 잠재성이 있다고 지적하여 월러스틴의 전조를 보여주었다. 1600년대에 파스칼은, 능력에 기반을 둔 정치권력은 저마다 자기의 공을 내세우려 하기 때문에 내전을 야기할 수 있다는 독특한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파스칼은 이 논의를 더 이상 진전시키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논의를 진전시킨 것은 동아시아였다 근대 서구의 자유주의에서 봉건제를 넘어선다고 말하면 그것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봉건제를 넘어선다고 말하는 것은(봉건제를 넘어선 중국식 관료제의 제한적 의미에서는) 불안정하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동아시에에서 국지적으로 이런 불안정성을 이론화한 점은 그 동안 전 지구적 정치철학에서는 무시되어 온 부분이지만, 매우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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