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근대성들

역사 2015. 5. 27. 09:45

 


잃어버린 근대성들

저자
알렉산더 우드사이드 지음
출판사
너머북스 | 2012-12-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중국, 베트남, 한국의 과거제와 관료제의 역사적 현재성""만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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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의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가지는 소위 능력주의 사회는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보여서 과거 한국과 중국, 베트남이 천년을 넘게 유지, 발전시켜왔던 관료제, 곧 능력주의 사회가 그다지 혁신적으로 느껴지지 않을수도 있앋. 그러나 세계사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이는 상당히 예외적이고 독특한 양상이었다. 유럽사회는 1차대전까지 귀족주의적인 세습적 권력을 바탕으로 한 통치가 유지되었던 사회였다. 버트런드 러셀이 22년 '중국인의 문제'라는 책에서 중국이 오래된 낡은 제도와 관습에서 벗어나기를 충고했을 당시에도 여전히 영국은 세습적인 상원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러셀 자신도 귀족출신으로서 여전히 귀족적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았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인재를 모집하는 획기적 과거제도를 통해 세습적 권력에 기반을 둔 통치가 막을 내린지 이미 천년이 지나고 있었다. 능력주의의 성향이 이미 주류가 된 사회로 변화한 동아시아에서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것은 불가능해진 지 오래. 또한 이같은 동아시아 과거시험과 관료제는 실제로 예수회 선교사 등을 통해 서구에 전해져 오히려 서구의 근대성 형성에 역사적으로 기여했음. 그럼에도 아시아 사회는 봉건적이라고 묘사되는 인격적이고 사적 감정에 기반을 둔 통치를 했던 반면에 유럽사회에 대해서는 사적 감정을 배제한 규칙과 이성에 기반을 둔 통치질서를 가졌다는 이미지가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 펠립 페르낭데 아르메스토는 지난 1000년간의 세계사를 담은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만약 먼 미래에 은하계 박물관이 생긴다면, 다이어트 콜라 캔이 중세의 사슬갑옷과 함께 '지구 1000~2000년: 기독교 시대'라는 표지를 붙인 진열장의 작은 유리상자에 함께 놓여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유럽 중심주의에서 조금만 벗어아 서기 100~2000년: 기독교-유교 시대의 문화유물을 기념하는 것으로 그 범위를 넓힌다면, 분명히 동아시아의 과거시험 교재를 사슬갑옷과 다이어트 콜라 캔 옆에 추가해야 할 것이다.
-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서구민주주의 사상은 고대 아테네가 노예를 소유했다는 사실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의 세 중국식 관료제 사회에서 능력주의 사회의 근본강령이 불완전하고 일부 타락했다 해도, 이 세나락 가졌던 능력본위의 권력이라고는 사고의 싹 그리고 정치행위에서 때 이르게 자라난 행정이론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내리는 것을 가로막아서는 안된다.
- 만약 강력했던 로마제국이 기원후 4세기에 극도로 쇠락하여 두 영역으로 분열되지 않고 1500년간 더 생존했다면, 근대 유럽 국가들의 역사는 좀더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와 비슷하게 되었을 것이다. 즉, 하나의 제국 중심부에서 창출된 정치적 영감이 주변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지금도 로마법은 여전히 근대 유럽 국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유럽의 르네상스 시기까지 중국은 과학과 기술에서 세계의 선두에 있었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큰 정치 단위체였던 중국의 정치적 역량은 다른 어떤 지역의 발전 수준보다도 뛰어났다. 만약 11세기에 지금처럼 세계적으로 효율적인 소통이 이루어졌다면, 오늘날 아시아의 지식이들이 미국의 비즈니스 스쿨이 설파하는 귀중한 정보들을 익히는 데 전념하듯 당시의 유럽인들은 중국의 정치, 경제이론들을 배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은 조직에 대한 사고에서 세계적 표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최소한 한개 이상의 왕안석 싱크탱크를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과거제와 유사한 제도는 중국에서 7세기 경에 이미 존재했고, 한국에서는 8세기 말, 베트남에서는 11세기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제를 연구하는 현대의 역사가들은 그것이 중국의 세습적인 귀족세력의 쇠퇴를 가져온 원인인지, 아니면 쇠퇴의 결과인지를 놓고 혼란스러워한다. 몇 명의 저명한 20세기 중국인 역사가들은 당 제국 때 과거시험을 바탕으로 한 능력주의 사회가 처음 출현한 것에 대해 지방의 호족들과 귀족세력을 견제하여 황제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한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설명공식에 따르면, 7세기 말의 측천무후는 자신의 정적인 산동 등 지방귀족 세력에 맞설 수 있고, 자신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새로운 사회계층을 창출하기 위하여 전시와 진사시험을 장려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 두 시험제도는 한국과 베트남에서도 채택되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세계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이런 설명이 부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중국사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이런 설명은 7세기 중국에서 귀족과 과거시험 지망생 간의 차이와, 과거를 통해 관직을 얻은 사람들의 수를 과장한 것일수도 있다. 군주와 귀족들 간의 권력투쟁은 보편적 현상이다. 그러나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의 관료선발 시험제도는 동아시아에서만 독특하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1500년대나 1600년대 유럽 군주들의 경우, 군주가 자신의 정치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취했던 대표적 전략은 귀족의 지위를 부여하는 왕실의 임명장을 팔거나 국가에 대한 봉사의 대가로 귀족지위를 부여함으로써 단순히 귀족계층을 확대시키는 것이었다.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첫번째 군주는 기사작위를 그의 재위 초반 2년 동안 부려 3배나 증가시켰다.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은 스웨덴 귀족가문의 숫자를 10년만에 두배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훌륭하고 충성스런 신하에게 종종 관작을 내렸던 동아시아 관료제 사회의 군주들은, 왜 크리스티나 여왕처럼 의도적으로 귀족계층을 늘리는 식으로만은 생존할 수 없었는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 과거시험이 출현하게 된 배경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 서구에서의 정치적 근대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탄생은 단순히 그리스의 민주적 사상이 지닌 호소력만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아테네 제국의 팽창에 따른 결과였다. 제국의 과업, 특히 해군의 야망과 관련된 과업은 기존의 아테네 과두정치세력을 제압하여 평민들과 권력을 나누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비슷한 주장은 훨씬 더 큰 규모로 엄청난 정치적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중국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광대한 정치체제를 통치하는데 필요한 극히 위대한 사명감이나 통치욕구, 그리고 엘리트 사이에서라도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따르는 크나큰 어려움은 순전히 세습적 권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황제체제 이전의 동아시아에서 정치적 현자를 구하고자 하는 이상은 호소력을 갖게 되었으며, 이는 천천히 필기시험의 형태로 제도화되었다. 과거시험은 이처럼 광대한 공간에 걸처 정치적 애착의 새로운 행동양식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 최근까지 서구의 정치사상에서 능력주의 사회의 위험성 문제는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음. 임마누엘 월러스틴은 자본주의가 사실상 능력주의 사회를 창출한다고까지 주장. 자본가는 노동력에 대해 보다 높은 효율성을 요구하고, 능력주의 사회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불평등한 경제적 보상에 대해 품는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메커니즘 또는 완화제를 제공해준다는 낙관적 전제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제는 잘못된 것이다. 능력주의 사회는 정치적으로 사회를 안정시키기보다 오히려 불안정하게 만든다 서구의 사상가들은 아직까지도 그 위험요소를 제대로 분석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세습적인 왕자들은 아버지나 다름없는 인물들이었다. 반면에 여피족은 과도한 특권을 지닌 동기간에 불과하다. 월러스틴과는 대조적으로 자본주의가 나타나기 이전에는 유럽의 사상가들은 능력주의 사회의 원칙에 근거한 정치제제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 다루었다. 마키아벨리와 파스칼은 능력주의 사회가 문제를 일으킬 잠재성이 있다고 지적하여 월러스틴의 전조를 보여주었다. 1600년대에 파스칼은, 능력에 기반을 둔 정치권력은 저마다 자기의 공을 내세우려 하기 때문에 내전을 야기할 수 있다는 독특한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파스칼은 이 논의를 더 이상 진전시키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논의를 진전시킨 것은 동아시아였다 근대 서구의 자유주의에서 봉건제를 넘어선다고 말하면 그것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봉건제를 넘어선다고 말하는 것은(봉건제를 넘어선 중국식 관료제의 제한적 의미에서는) 불안정하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동아시에에서 국지적으로 이런 불안정성을 이론화한 점은 그 동안 전 지구적 정치철학에서는 무시되어 온 부분이지만, 매우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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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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