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이 만든 역사

역사 2015. 5. 15. 14:03

 


왼손이 만든 역사

저자
에드 라이트 지음
출판사
말글빛냄 | 2008-07-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왼손잡이에 대한 역사적 인식, 왼손잡이가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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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의 양 반구의 기능은 단지 좌뇌지배형이냐 우뇌지배형이냐의 구분보다 복잡함. 이는 특히 왼손잡이의 경우에 해당. 크리스 맥마너스는 그의 저서 '오른손과 왼손'에서 대부분의 오른손잡이들은 좌뇌지배형이지만 왼손잡이들의 경우는 조금 더 복잡하다고 주장. 그 예로 오른손잡이의 95%는 좌뇌에 의해 언어능력이 지배당하지만 왼손잡이의 경우 70%만이 언어능력이 좌뇌에 지배당함. 맥마너스는 왼손잡이들이 평균적으로 오른손잡이들보다 뇌 사용의 가변성이 더 뛰어나다는 점을 지적. 즉 왼손잡이들은 신경학적 관점에서도 모험가인 셈. 왼손잡이들의 두뇌는 애초에 남들과 다르게 설계됨. 이는 그들이 변화의 선구자이거나 아니면 현상유지의 방해꾼이 될 가능성이 더 높은 이유로 해석됨. 왼손잡이들의 이런 선천적 차별성은 그들에게 들어맞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때문에 더욱 강화됨. 사회의 강요에 의해 좌절한 몇몇은 사회를 향한 저항자가 되기도 하지만 나머지 왼손잡이들은 그들의 특별함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주로 고독한 분야를 피난처로 삼아 천재성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평범한 왼손잡이들은 종종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반대방향인 세상에 적응해야 함. 그것이 병따개든 가위든 톱이든 왼손잡이들은 사용자체에 장애를 느껴야 함. 이런 현실 때문에 오른손잡이에 비해 왼손잡이의 의식은 환경에 적응하는 데 더 잘 훈련되어 있음.
- 우리는 주위 세계를 모방하면서 학습하며, 대부분은 오른손잡이들을 모방하게 되는데 이런 학습은 왼손잡이에게는 일련의 전환과정과 적응을 요구함. 그것은 순전히 별도의 인지단계를 거치는 번거로운 일이다. 그러므로 왼손잡이들은 요구되는 행동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집중해서 풀어내야 함. 아마 이 때문에 배우들중에 왼손잡이가 많은지도 모른다. 이러한 별개의 인지단계 학습은 왼손잡이들에게서 주로 발견되는 수평사고를 발생시키는 데 기여함
- 왼손잡이 천재들의 특징으로 두드러지는 두가지 종류의 수평사고는 적응적 수평사고와 변형적 수평사고임. 적응적 수평사고는 오른손잡이 세계에 적응하고 그 세계를 이용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하는 필요에서 발생. 이 때문에 왼손잡이들은 상황의 요구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됨. 변형적 수평사고는 이 능력의 강화된 변형이라고 할 수 있음. 이 종류의 수평사고는 배우 중에 왼손잡이가 많은 이유이기도 함.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모방 뒤에 다르는, 자기자신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요하기 때문. 다른 시각에서 논하자면, 이런 변환에 대한 욕구는 왼손잡이들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강해진다고 할 수 있음. 극단적인 경우 이런 욕구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정복자들의 건설적인 원동력이 되기도 함. 그 예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나폴레옹과 같은 경우 일단 권력을 손에 넣자 세상을 완전히 뒤바꾸고자 하는 불가능한 목표에 착수했음.
- 왼손잡이의 지각(혹은 의식)과 그를 둘러싼 환경이 빚어내는 부조화는 왼손잡이로 하여금 사회와 불화를 일으키게 함. 이 때문에 왼손잡이는 오른손잡이보다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함. 이것은 마치 이민자가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려는 노력으로 여러가지 지식을 쌓아가는 것과 같음. 이민자는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배워야 함. 이런 부조화에서 길러진 감정이입 능력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선황의 마부조차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했음. 또한 이집트나 바빌론에 비해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페르시아인들과의 관계에서 정치적으로 강력한 이점을 가져다줌. 그는 페르시아인들의 종교에 대해 이해가 깊었고 인내력이 있었기에 그들을 결국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문화의 편견에 얽매이지 않았는데 이는 많은 왼손잡이들과는 달리 그가 최상의 교육을 받았기에 가능했음. 그의 개인교사는 아리스토텔레스였는데 그는 전략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가르쳐 알렉산드로스의 신체적 용맹함을 보완
- 왼손잡이들에게 흔히 발견되는 성향 중 하나는 그들의 소수로서 억압당해왔기에 패배자 혹은 낙오자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행동임. 카이사르 시절 로마 주요 정치세력은 귀족계급의 특권을 지지하는 보수파와 평민의 지지를 얻는 인민파로 나뉘어 있었음. 귀족출생임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는 정치적 영향력의 기반을 군대와 평민계층에서 얻은 인기에 의지하고 있었음. 군중의 환심을 사는 것은 늘 음식과 오락이 중대한 문제였다. 카이살는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 남성이 여성보다 왼손잡이가 되기 쉽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음. 어떤 과학자들은 태아가 자궁내에서 과도한 남성호르몬에 노출되면 뇌의 우반구를 더 발달시키며 그 영향으로 왼손잡이가 된다고 주장. 이것이 잔다르크의 인생에 대한 남성적 접근법을 설명할 수 있음. 또한 위대한 왼손잡이들이 보여준 남성호르몬에 자극된 맹렬함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음. 이런 인물의 예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카이사르, 나폴레옹, 존 메켄로, 미켈란젤로가 있다.
- 흥미로운 사실은 왼손잡이들은 오른손잡이보다 정신분열증에 걸리기 더 쉽다는 것. 이는 아마 왼손잡이들이 종종 보여주는 뛰어난 감수성과 감정이입 능력의 단점일 것. 몇몇 연구결과는 왼손잡이들이 오른손잡이들보다 정신분열적 성향을 더 강하게 나타냄을 입증. 게다가 그런 성향이 있으나 완전한 정신분열증으로 악화되지 않는 경우에는 그런 성향이 없는 사람보다 더 수평사고에 뛰어난 것으로 밝혀짐. 정신분열 증세를 두드러지게 보인 인물은 로이스 캐럴, 니체, 지미 헨드릭스가 있다.
- 레오나르도는 14세의 나이로 피렌체의 화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데 됨. 그 당시 이탈리아 회화는 기법변화의 첨단에 이써서 템페라 물감을 유화물감으로 대체하고 있었음. 템페라 물감은 안료를 달걀 노른자와 섞어 만들었는데 이 물감은 너무 빨리 말라서 깊이나 세부를 묘사하는 데 한계가 있었음. 기름을 섞어 물감을 만드는 기술은 얀 반 아이크와 같은 플랑드르 미술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이탈리아 미술가들에게 전해졌음. 그러나 이등른 유화물감을 표면광택을 내는 데에만 주로 사용. 레오나르도는 유화물감을 주재료로 사용한 첫번째 화가였음. 마르기까지 시간이 더 걸리는 특성은 그림의 정밀도를 얻는데 특히 도움이 되었으며 여러겹의 물감을 바름으로써 더 강렬한 깊이를 창조할 수 있었음. 레오나르도는 전 생애에 걸쳐 새로운 방식에 열려 있는 태도를 유지했으며 이미 알려진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왼손잡이로서의 의지는 뛰어난 결과를 도출해내는 원동력이 되었음. 그의 창조성은 유화물감에 의해 더 큰 자유를 얻었음. 인물과 자연에 대한 묘사는 해부학 연구로 더욱 단련되어 풍요롭고 사실적이 됨. 레오나르도의 회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배경으로 그려진 자연환경이 얼마나 정확히 세세하게 묘사되었는지 발견할 수 있음. 레오나르도는 완벽주의자였다. 그 예로 회화에 있어서 그는 스푸마토(안개처럼 색을 미묘하게 변화시켜 색깔 사이의 윤곽을 명확히 구분지을 수 없도록 자연스레 옮아가도록 하는 명암법)라는 기법을 개발했는데 이는 그림의 배경을 흐릿하게 처리하는 기법이었다. 이는 투스카니 특유의 햇볕 속에서 보이는 원경을 모방한 것으로 다른 화가들은 아직 도달하지 못했던 깊이를 레오나르도는 작품에 부여했다.
- 레오날도는 노트에 disscepolo para sperientia라고 사인을 했다. 이는 경험 혹은 실험 모두의 신봉자라는 의미. 이는 레오나르도가 삶을 통제하는 원칙으로서 기독교적 신앙을 저버렸음을 의미. 전통을 그저 전통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레오나르도는 기독교적 신앙의 추상적 가치 대신 눈으로 직접 확인하여 얻는 진실을 택했음. 이 사실로 미루어볼 때 자연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 과학과 인간정신의 능력에 대해 믿음을 가졌던 레오나르도는 이성시대 계몽주의의 선구자였다.
- 레오나르도가 가장 집착한 것 중 하나가 인간의 비행에 대한 착상. codex atalnticus라고 알려진 노트에 그는 이렇게 썼다. "날개란 수학적 법칙에 따라 작용하는 기계이다. 이 기계의 모든 동장을 훨씬 힘을 덜 들이고 재현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 인간이 만든 그 기계에 부족한 것은 다만 새의 정신이다. 인간의 정신은 새의 정신을 닮아야 한다."
- 미켈란젤로와 다른 예술가들의 관계는 매끄럽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가장 고통받았던 것은 왼손잡이 동료인 레오나르도와의 관계였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의 천재성을 뛰어넘어야 할 장벽으로 여겼다. 많은 부분에서 그는 자신을 레오나르도와 반대입장에 놓았다. 이는 비평가인 래롤드 블룸이 말하는 영향력 불안의 고전적 사례로서 일종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볼 수 있음. 미켈란젤로는 직접적으로 레오나르도에 맞서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입장을 밝힌 적이 있음. 레오나르도가 회화를 더 선호한 반면 미켈란젤로는 조각이 더 우월한 예술형태라고 주장. 레오나르도는 자연을 숭상했던 반면 미켈란젤로는 자연을 예술과 문명이 극복해야 할 적대적 대상으로 봄. 미켈란젤로는 도제생활 동안 피렌체의 위대한 통치자 로렌초 데 메디치의 인정을 받아 인문학이 꽃피던 그의 가문으로 들어가 생활하면서 신플라톤주의의 신비로운 합리주의를 배우게 됨. 그 결과 미켈란젤로의 예술세계는 고전주의로의 회귀를 보였으나 독학을 한 레오나르도는 작품내용으로 고전주의영역을 표현하는 일은 드물었다. 물론 차이는 개인적 성향이기도 했다.
-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대성당 천정화에서는 고전주의적 이미지와 성서의 이미지가 혼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음. 그가 그린 나체화들은 어떤 이들에게는 신성모독으로 비춰졌다. 아마도 미켈란젤로 자신은 이를 의식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술세계는 신성대신 인간의 중요성이 점차 대두되던 르네상스에 중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그는 인습타파적이었다.
- 종종 불균형이 천재를 낳곤 하는데 뉴턴의 경우 왼손잡이의 몽상은 감정적 표현이 제거된 수학적 언어에 집중되어 사회적 교류와 현실성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했음. 뉴턴은 전생애에 걸쳐 과학만큼이나 연금술에 매료되어 있었음.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금속의 변성에 실패했으나 정상의 인간적 감정을 지적에너지로 변성시키는 데에는 성공적이었음. 이런 지적 에너지를 원동력으로 뉴턴은 자연구조에 대해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통찰을 일구어냈음. 달리 말하자면 그는 자기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이를 포기하고 과학에 있어 중대한 문제 몇몇을 해결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
- 많은 왼손잡이 천재들은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거나 스스로가 정규교육을 무시하는 태도를 지녔음. 그랜덤에서의 뉴턴도 예외가 아니었다. 첫해에 그는 80명중 78등이었따. 쓰기는 오른손으로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왼손잡이에게 학교생활을 더욱 어렵고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느끼게 한다. 왼손잡이 천재들의 경우 자신만의 사고방식, 다른 이들과 자신의 차이점에 대한 본능적 인식이 너무 강함. 또한 그들의 독창성과 직관력은 정규교육이 제공하는 상대적으로 평범하고 일반적인 분별로는 가둘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정규교육은 각 개인들이 일정한 문화 테두리 안에서 협력을 통해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관습을 깨뜨리는 자들은 진정한 소속감을 느낄 수 없으며 이 대가로 뉴턴은 계속되는 고립을 겪어야 했음. 대체로 친구도 없이 뉴턴은 학창시절 동안 혼자서 물시계나 나무로 만든 제분기계 따위의 설계와 제작으로 시간을 보냄. 그랜덤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하숙했던 약제사 집의 다락에서 뉴턴은 목재 벽면에 기하학적 도형을 새기는 것을 좋아했다. 이는 고독한 사색이 그를 어디로 이끌지를 보여주는 전조였다.
- 그의 사고의 실마리는 지치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 그의 독특한 재능은 순수하게 추상적인 문제라도 완벽히 이해할 때까지 계속해서 정신을 집중하는 능력이었다. 그의 직관력은 그 어떤 인간이 가졌던 직관보다 더 강하고 더 영속적인 걸출함에서 비롯된 것. 한번이라도 순수하게 과학적이거나 철학적인 사상에 도전해보았던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어떻게 그 문제를 잠시나마 자신의 사고에 잡아둘 수 있는지, 어떻게 그 문제에 파고들기 위해 모든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사고과정이 부지불식간에 흩어져버리는지를, 결국 발견하는 것은 멍해져 있는 자신임을 말이다. 뉴턴은 그 비밀을 파헤칠 때까지 몇시간이든 몇주든 한 문제에 골몰할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최고의 수학자였던 그는 해석의 목적에 따라 그것을 도식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정 뛰어난 부분은 그의 직관이었다. ... 앞서 말했듯이 그 증거들은 용도에 따라 후에 떠올랐을 것이다. 논증은 발견의 도구가 아니었다. (케인즈)
- 교향곡 3번은 이전부터 전해온 전통적인 음악적 가르침을 무시하는 왼손잡이적 특징을 뚜렷이 보여줌. 당시 어떤 비평가는 교향곡 3번을 '악상들의 거대한 무더기'라고 혹평. 그러나 웅장한 긴장감은 베토벤이 다양하고 강렬한 주제들을 어떻게 종합했는지를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그 자신의 위기, 나폴레옹의 등장,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 등이 교향곡 3번을 관통하는 주제들이다. 그러한 통합의 시도는 낭만주의 세계관과 연관이 깊음. 낭만주의는 종합적이고 유기적인 면에 중점을 두며 과학적 사고를 조각조각 연결하는 선형성이 반대. 이런 낭만주의적 접근이 왼손잡이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종합적 사고는 뇌의 우반구 활동과 관련이 있으며, 단계적 논리는 우뇌의 영역. 게다가 왼손잡이는 오른손잡이에 비해 뇌 양반구의 상호협력에 더 뛰어남. 우뇌는 음조와 멜로디를 지각하며, 좌뇌는 복합적 선율을 지각하기 때문에 음악에 있어 양반구의 상호협력은 더욱 유용함
- 10년동안 바젤대학에 재직한 후, 나빠진 건강과 정상적 생활의 속박에 적응할 수 없어 괴로워하던 니체는 교수직을 그만둠. 그는 방랑하는 철학자가 되어 유럽대륙을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는데, 한 곳에 2~3개월 이상은 머물지 않았으며 얼마 안되는 식량으로 겨우 생존. 니체가 유명저서 대부분을 집필한 것도 바로 이시기. 니체는 독일국적을 포기함으로써 무국적자가 되었고 어떤 기관에 소속됨으로써 생기는 속박에서도 벗어남. 그의 고독한 존재는 사회의 명령에 따를 수 없는 왼손잡이들의 궁극적 표현. 그러한 요소들은 미켈란젤로, 베토벤, 잔다르크 등 여러 왼손잡이 천재들에게서 눈에 띄지만, 니체처럼 강력하게 개인의 주체서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없었음. 이런 이유로 그는 장 폴 샤르트르, 짐 모리슨, 헨리밀러, 비트족 작가 잭 케루악을 포함하는 사회적 반항자 집단에게 영감이 되었음.
- 니체의 초인에 대한 설정은 특별한 왼손잡이식 위대함의 개념이다. 사회의 질서는 전통적으로 왼손잡이게게 불리하게 겹겹이 쌓여 있으므로 그들은 흔히 자기자신과의 싸움을 선호하며 지체식 자기극복의 도전을 즐김. 베토벤의 귀머거리 작곡은 자기극복의 가장 강력한 예이지만, 존 매켄로가 코트에서 벌이는 망나니같은 행동에서 볼 수 있듯이 자기극복에 항상 성공하는 표현은 아니다. 그의 행동은 적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내부의 악마를 정복하고자 하는 투쟁이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완벽주의는 초인식 투쟁의 또다른 예이다. 위대함이 특정 수준에 이르면 왼손잡이 천재들은 자기 자신만이 경쟁자가 된다. 절정에 올라 있던 베토벤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라이벌이 없었듯이 자기와 견줄만한 예술가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니체가 궁극적으로 자신을 희생하여 발견한 것처럼, 초인이 되고자 하는 노력은 성공으로 끝나기보다 긴장상태를 유발할 가능성이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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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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