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호 아저씨 호치민

저자
김이은 지음
출판사
자음과모음 | 2013-03-1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조국의 독립을 이끈 베트남 초대 주석 호치민의 삶을 생생하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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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베트남으로 불리는 나라는 북부의 통킹, 중부연안 지대인 안남, 동남부의 코친차이나로 구성됨. 세 지역이 실질적으로 통일된 것으 18세기 말, 지아롱 황제의 통치원 아래 들어가면서부터임. 지아롱 황제는 이 지역 전체에 베트남, 즉 고대 명칭으로는 먼 남쪽 나라(월남)를 뜻하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바로 중국의 남쪽을 가리킴
-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세력이 몰려오기 시작했지만, 베트남은 여전히 문화적 고립주의, 군사적 저항, 그리고 중국의 원조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의 도전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베트남은 외국의 간섭에 저항력을 잃기 시작. 1858년 프랑스 군대가 다낭항에 상륙했을 때, 지아롱의 후계자인 투 둑 황제는 군대를 집결시켜 프랑스군에 저항. 사실 프랑스의 최종목표는 중국이었음. 그러나 양쯔강 유역을 선점하고 있던 영국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한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 바로 중국 한가운데서 갈라져 나오는 메콩강과 홍하를 지배해 바로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낭에 대한 공격은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게다가 프랑스 군내에 콜레라와 이질까지 번지기 시작. 때문에 프랑스는 1861년 다낭을 버리고 베트남 남부 최대도시인 사이공을 공격하기 시작. 사이공 지역의 베트남 군대는 반격을 시도했지만, 낡은 군대 체제와 무기로는 잘 훈련받은 프랑스 군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베트남은 힘을 다해 반격했지만 1861년 2월 프랑스의 사이공 침고 2주만에 베트남의 저항은 끝이 났다. 이어 1862년 6월의 조약으로 베트남 남부 지방은 코친차이나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이후 1880년대 초까지 아슬아슬한 독립을 유지해 오던 베트남은 1882년 하노이가 함락되면서 빠르게 무너져 갔다. 베트남은 국가의 최대 위기라는 생각으로 중국에 원조를 호소했다. 중국은 베트남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보내 프랑스 군대를 상대로 반격을 벌였지만, 중국 군대는 프랑스 군대를 이기지 못했다. 결국 중국은 1885년 군대를 철수하고 프랑스와 조약을 맺어 인도차이나가 프랑스령이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말았다.
- 1919년 타인은 또 한번 이름을 바꾼다. 응엔 아이 꾸옥, 애국자란 뜻이다. 그해 여름, 응엔 아이 꾸옥은 프랑스에 사는 베트남인들을 위한 안남 애국자 연합을 결성하고 안남 민족의 요구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는데 이 문건의 서명자 이름이 바로 응엔 아이 꾸옥이었다. 이후 호치민은 꾸옥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정치 생활을 하게 됨. 안남 민족의 요구는 겉으로 보기에는 온건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지만, 베트남인들의 결사, 종교,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강제노동 폐지와 소금, 아편, 주류의 세금철폐를 요구하는 등 사실상 탈식민지화의 기초를 닦는 작업이었다. 따라서 프랑스 당국은 상당히 당황했고, 이 글은 프랑스 당국이 호치민, 즉 응엔 아이 꾸옥을 주시하는 계기가 됨. 프랑스 비밀경찰이 그의 사진을 몰래 찍고 그의 뒷조사를 하기 시작. 그의 사진을 찍었던 전 인도차이나 식민지 지배 총독 알베르 사로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사진 속의 꾸옥은 채플린의 가장 가련한 모습처럼, 작은 모자를 머리에 가볍게 쓰고 가냘프로 자신 없는 모습이 약간은 불안정하고 초라해 보였다." 그리고 프랑스 비밀경찰 루이 아르누는 이렇게 덧붙였다. "마르고 이마가 아주 넓은 젊은이가 가장 폭력적인 제국주의 규탄 전다을 나눠주면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때부터 꾸옥의 정치활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됨. 그는 국제 식민지 동맹의 혁명적 기관지인 '르 파리야'의 발행인으로서도 명성을 날리게 되는데, 천민을 뜻하는 '르 파리야'는 훗날 좌익 선전물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게 됨. 꾸옥은 이 신문의 편집인으로, 또 제일 중요한 기고자로 일했으며, 때로는 삽화를 그리기도, 초장고 하고, 구독자에게 배달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음. 하지만 이 신문을 만든 사람은 물론 읽는 사람도 즉시 체포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 신문의 알려진 구독자들은 모두 경찰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 밖에도 꾸옥은 각종 신문과 발행물들에 글을 실으면서 전문적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프랑스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거의 100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함. 이런 활동으로 꾸옥은 프랑스 내에서 어느정도 명성을 얻음. 그러고 나서 꾸옥은 프랑스 좌익세력인 사회당에 입당.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혐오한 꾸옥이 사회주의에 끌린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가 겪은 자본주의란 자신의 조국을 식민지로 착취하는 모습이었고, 자본주의 체제는 동포 대부분의 삶을 잔인하게 짓밟았기 때문이다.
- 내리 찧는 절구대 밑에서 볍씨는 빻아지지만,
고통이 지나면 그 흰빛이 감탄스럽다!
사람의 세상살이도 이와 마찬가지.
진정한 인간이 되려면 불행이라는 절구가 있어야 한다.
(벼찧는 노래, 옥중일기 중에서)
- 40년에 들어서자 일본은 중국과 동남아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 인도차이나는 중국의 장제스 정부가 연안의 철도를 통해 중국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목이며, 동남아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전략 요충지이고, 쌀을 비롯한 많은 농산물의 산지이기 때문에 일본이 가장 중요한 전략목표로 정한 것이다. 일본 군대는 40년 9월 22일 최초로 베트남의 랑손을 공격했다. 그런데 일본의 사령관들은 인도차이나를 다스릴 명분이 없었다. 그 때문에 일본은 프랑스의 비시정부(2차대전 중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여 수립한 프랑스 괴뢰정부)와 타협을 시도. 결국 몇 차례에 걸친 프랑스-일본 협약, 특히 41년 협약 이후 일본 군대의 베트남 주둔이 허가되고 외국의 침입이 있을 때에는 공동으로 방어한다는 계획이 수립되기에 이름. 또한 일본은 인도차이나 내에서의 프랑스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인도차이나를 일본의 전시 경제권 안으로 통합시킨다는 거래가 이루어짐. 바야흐로 인도차이나 내에서 권력이 분리되고 이중의 식민지 착취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 꾸옥은 이런 여러가지 상황에 맞는 새로운 통일 전선 수립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 식민지 권력을 추방하는 공동투쟁에서 모든 세력을 통일할 광범위한 조직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베트남 독립 동맹이다. 줄여서 베트민이라고 부르기로 한 이 조직은 이후 베트남 혁명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됨
- 41년 5월 10일, 팍 보에서 인도차이나 공산당 전체 회의가 열림. 많은 대표들이 참석했지만, 팜 반 동과 보 응우옌 지압은 아직 중국에서 국외본부를 유지하며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전체 회의에서 호치민은 당의 임무 중 가장 중요하고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이 일본과 프랑스 파시즘에 대한 저항과 베트남의 독립이라는 점을 분명히 함. 즉, 공산주의의 지상과제인 계급혁명이나 토지혁명 등의 일보다 민족혁명이 우위에 있다고 못 박음. 호치민이 공산주의자라기보다 민족주의자라고 말하는 편이 옳다는 판단은 이런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공산주의를 목적이라기보다는 수단으로 활용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호치민은 또 이 민족해방 혁명을 위해서는 통일된 혁명세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 그래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호치민의 제안에 따라 새로운 베트민 전선을 수립하기로 합의. 새로운 베트민 전선의 강령은 베트남 혁명의 새로운 단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제 전면에 나선서 프랑스 식민지 체제와 일본 점령군으로부터 민족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을 감행할 때가 오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 생트니는 비록 프랑스 측 대표였지만 호치민을 만다고 그를 좋아하게 되었던 것 같다. 생트니는 호치민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호치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의 적수보다 적게 요구하고, 상대적인 독립에 만족할 줄 알며, 어느정도 기간을 둔 다음에 자기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허용하리라는 프랑스의 명예가 달린 약속을 신뢰하고 있었다. 이점에서 호치민은 확실히 성실했다. 그는 자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35년간 투쟁해왔다. 그러니 확실히 몇년 쯤은 더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폭넓은 교양, 지성,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활약상, 고난으로 점철된 삶, 사심이라고는 없는 행동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만한 명망과 인기를 누리게 만들었다. 프랑스가 이런 인물을 과소평가하고, 그의 장악력과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는 점은 확실히 유감스럽다. 그의 제안, 행동, 태도(특히 공식적이거나 사적으로 보여준 처신)를 보면, 그가 무력으로 해결하는 방식을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이 시대를 겪어 오는 내내 인도차이나의 간디가 되기를 열망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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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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