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쳐서 피가 나거나 아프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예컨대 상처가 난 손등을 무심코 반대쪽 손으로 꼭 누르거나 입으로 가져감. 이것은 배워서 하는 행동이 아님. 어른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읻들도 마찬가지로 반응. 아마도 본능적인 반응일 것이다. 실제로 침에는 진통, 지혈효과를 보이는 성분이 있음. 물론 이러한 반사적 행동은 침에 진통, 지혈성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하는 것은 아니다. 동물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데, 이런 것이 아마도 자연주의적인, 합리적인 의술의 시초가 되었을 것
- 질병과 의술의 신으로는 우선 아폴론 신을 들 수 있음. 아폴론은 의술의 신이면서 동시에 질병의 신이었다. 말하자면 병주고 약주는 신이었다. 아폴론 이외에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신이 여럿 있었지만 질병과 의술에 관여했던 신은 아폴론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400년대, 히포크라테스가 활동하던 무렵이 되면 아폴론 대신에 새로운 신이 등장.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신으로, 아폴론의 아들. 우리 인간세상에서도 의사 일을 가업으로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신의 세상도 비슷한지, 아스클레비오스는 아폴론의 영향을 받는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아폴론과 인간 여성 사이에 태어난 반신반인간이었음. 아스클레피오스는 그전부터 신화에 등장했지만 본격적으로 숭상의 대상이 되는 것은 기원전 5세기 무렵부터. 아스클레피오스는 아버지의 역할을 물려받았지만 두가지 점에서 아폴론과 달랐음. 하나는 아스클레피오스가 전문적으로 의술만을 행하는 신이었다는 점. 아폴론이 주로 태양을 관리하는 일을 하면서 부업삼아 병을 내리든지 병을 치료하든지 의술과 관련된 일을 했던 것과 달리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만을 주업으로 하는 신이다. 인간 세상에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의사가 탄생한 것에 발맞추어 신의 세상에서도 전문 의술의 신, 의신이 나타난 것.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일까?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일까? 어쨌든 아스클레피오스는 전문적 의신이었음. 아버지 아폴론은 병도 주고 약도 주는 신이었는데 아들인 아스클레피오스는 병을 내리는 신은 아니었음. 오로지 치료만 하는, 의술의 신이었음. 아폴론은 고마운 동시에 무서운 신이었지만 아스클레피오스는 그렇지 않았다. 세상의 여러가지 변화, 그리고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신화에도 반영된 것일 터이다.
-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죽은 시체에 칼을 대는 것은 법으로 금지할 필요조차 없는 절대적 금기였음. 서양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고대 알렉산드리아 시대에 잠시 인체해부가 허용된 적이 있었음. 이것을 놓고 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한데 정말 그럴듯한 해석은 아직 나와 있지 않음. 어쨌든 기원전 280년부터 20~30년 동안 잠시 인체 해부가 허용된 적이 있었지만 이후 다시 문이 닫혀 약 천오백년 가량 중단된다. 그러다가 중세 후기 이탈리아에서 다시 인체해부를 허용하는 모습이 나타남. 중세 후기 몇몇 도시에서 인체 해부를 허용하는 모습이 나타났다고 했지만 그것이 당장 해부학으로 즉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했던 것은 아님. 그렇게 되기 까지는 2백년 정도의 회임기간이 더 필요했음. 본격적으로 인체 해부학이 탄생한 것은 1500년대,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같은 학자의 노력에 의해서다. 이때에 이르러 인체 해부학은 본격적인 학문으로 탄생하게 되고 또 빠른 속도로 발전. 이것은 아주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는데, 해부학이 현대의학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 해부학을 빼놓고는 현대의학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해부학은 중요한 학문임
- 서양에서 이발사가 지금과 같은 독립된 직업으로 분화된 것은 300년쯤 전인 1700년대. 그전까지 이발사는 이발사이면서 동시에 외과의사였음. 이발사와 외과의사가 한 직업이었던 것. 보통 이발사-외과의사(barber-surgeon)으로 불렸음. 그랬던 것이 1700년대에 이발사와 외과의사가 분리됨. 이발사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잇는 것과 같은 일만 하고 외과의사는 이발사가 하던 일로부터 의료적인 것만을 분리해 나와 독립적인 전문성을 쌓게 됨. 내과의사니 외과의사니 차이를 두지 않게 된 것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는데 이 역시 한 200년쯤 밖에 되지 않음. 오늘날에는 의대에서 다 같이 공부하고 졸업한 이후에는 누구는 내과의사가 되고, 외과 의사가 되기도 하며 정신과 의사가 되기도 함. 의사가 되기까지 교육과정이나 훈련과정이 전혀 다르지 않음. 그러나 200년 전까지는 내과의사와 외과의사가 뚜렷이 구분되어 있었음. 대학내에서는 내과의사만을 양성했음.
-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가 출간된 1543년 같은 해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우주에 대한 생각, 세계관을 바꾸어 놓는 책이 또 한 권 나옴. 이 책은 당대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뒤흔들어 놓게 되는데, 바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담겨 있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 요즘도 큰 변화를 일컬을 때 코페르니쿠스적 변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과 같은 표현을 종종 한다. 천동설을 뒤엎은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 신부이자 의사였음. 그전부터 내려오던 천문학에 대한 생각, 더 넓게는 자연과 우주에 대한 생각을 바꾼 책이 코페르니쿳의 '천구의 회전운동에 관하여'다. 이 책이 나온 것은 1543년으로 이미 코페르니쿠스가 사망한 후였는데 그는 생전에는 너무 큰 파문을 두려워하여 책을 내지 못했음. 자기한테 혹시 큰 위해가 닥칠지 몰라서였음. 실제로 나중에 가면 지동설을 주장하던 많은 사람들이 종교재판도 받고 처형도 당하게 됨. 조르다노 브루노같은 사람들은 화형을 당하기도 함. 그런데 정작 코페르니쿠스 책에 대해서는 별로 문제를 삼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이 나온 초기라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코페르니쿠스는 살아서 이 책을 냈어도 괜찮았을 뻔했다.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와 '천구의 회전운동에 관하여'가 모두 1543년에 출간된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겠지만, 르네상싀 시기였기 때문에 이러한 책들이 나오는 것도 가능했을 것임. 그 전 시대였다면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 하더라도 감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어려웠을 것이고, 설령 생각했다 하더라도 그 생각을 쉬이 펼칠 수가 없었을 것. 그만큼 세상이 변화하고 있었고, 이 가운데 근대 의학이 탄생한다.
- 환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흔히 시든햄을 근대의 히포크라테스 또는 영국의 히포크라테스라 부르기도 함. 히포크라테스가 환자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 이런 점에서는 히포크라테스와 비슷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점도 있었음. 히포크라테스는 환자라는 전체 인간을 중시하고 그것만이 거의 전부인 것처럼 여겼는데, 시든햄은 그것도 중요하지만 환자가 갖고 있는 질병 역시 중요하다고 주장. 환자만큼이나 환자가 가지고 있는 질병도 중요하다는 것. 근대 이전의 서양의학은 우리 몸 전체의 균형과 조화를 핵심적인 것으로 여겼음.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네가지 체액이 균형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으면 건강한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건강치 못한 상태라고, 개개 질병보다는 우리 몸 전체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음. 다시 말해 질병이 아니라 우리 몸 전체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주목했다는 것. 그런데 시든햄부터는 환자도 중요하지만 그것과 더불어서 질병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뚜렷해짐. 현대 의학이 갖고 있는 질병관과 같은 이런 생각이 시든햄무렵부터 싹트게 된 것. 시든햄은 질병을 분류했다. 질병이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시도를 했을 것이다. 우리 몸 전체의 균형여부가 중요하지 질병은 부차적인 것이라 생각했다면 굳이 질병을 분류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질병을 분류하기 시작한 것은 질병의 실체를 인정하게 된 것이자 그 중요성을 자각한 것이란 의미가 됨. 여기서부터 시든햄의 근대적 면모를 찾아볼 수 있음. 이런 질병분류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칼 린네다. 우리가 식물학자 혹은 식물분류학자로 잘 알고 있는 린네는 사실 의사였음. 그는 환자를 진료하다가 시간이 나면 들이나 산에 나가서 식물채집을 해 와서는 자기 스스로 세운 분류기준에 따라 열심히 분류했음. 그렇게 그는 근대적 식물분류학의 창시자가 됨. 그런데 린네는 식물만 분류한 것이 아니라 동물도 분류했고 광물도 분류했다. 이뿐만 아니라 자신이 돌보던 환자가 갖고 있는 질병도 자신의 기준에 따라 분류했음.
- 18세기 의학분야에는 많은 변화와 발전이 일어났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꼽자면 병리학의 변화임. 당시 사람들은 물론, 지금 우리가 그 시대를 돌이켜 보더라도 가장 중요한 병리학의 변화 혹은 해부병리학이라 일컫는 새로운 병리학의 탄생을 꼽을 수 있음. 해부 병리학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해부학을 바탕으로 한 병리학임. 그 이전의 병리학은 체액 병리학이라 부르는데, 체액설을 기반으로 한 병리학이었음. 우리 몸을 이루고 잇는 네가지 체액 사이의 균형, 조화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체액설을 기반으로 한 병리학이 이제 해부병리학으로 변화하게 된 것. 오늘날의 의학은 바로 이 해부병리학에 기반을 두고 있음. 의학의 여러 분야들이 각기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핵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병리학. 무엇을 질병으로 보는가, 질병이 무엇인가, 질병을 어떻게 여기는가에 따라서 진단하는 방법도 달라지고 예방 및 치료하는 방법도 달라지기 때문
- 마취제 개발에는 치과의사들이 역할이 컸음. 치과치료에도 효과적인 마취제가 꼭 필요했다. 치통 자체가 굉장히 아프거니와 발치할 때도 마취를 하면 참 좋을 것이었다. 이렇게 치과의사와 외과의사들이 아산화질소를 마취하는 데 써보게 된다. 그런데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음. 후대에 다시 조사해보니 가스의 양이나 농도를 좀더 높였더라면 성공할 수 있었던 시도였음. 그러나 당시에는 실패했고 웃음가스를 사용한 사람들은 그냥 웃음거리로 남고 말았음. 두번째 후보로 떠오른 것이 에테르였다. 지금은 에테르를 사람에게 사용하지 않음.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 후 한국전 무렵까지도 사용. 서양의 경우 19세기까지는 가장 많이 사용된 마취제이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더 좋은 마취제가 개발되어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됨. 지금도 에테르는 사람에게는 쓰지 않지만 동물실험에, 특히 작은 동물 실험에는 많이 사용함.
- 파스퇴르와 코흐가 초석을 다진 후 1870년대부터 20~30년 사이에 인류를 괴롭혀 왔던 세균성 전염병들의 정체와 원인이 밝혀짐. 특히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가 그런 사실들을 많이 밝혀냄. 파스퇴르는 프랑스 사람이고 코흐는 독일사람인데 프랑스와 독일은 우리나라와 일본이 라이벌인 관계인 것과 비슷하게 여러가지로 라이벌 관계였음. 19세기 말에는 학문을 둘러싸고 새로운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었고 이런 라이벌 관계가 서로를 자극해서 특히 세균학의 발전에 기여. 전염병과 병원균에 관련해서 파스퇴르의 공도 크지만 구체적 업적은 코흐가 더 많이 쌓았음. 코흐가 발견한 병원균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결핵균. 결핵은 19세기 유럽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전염병이었음. 결핵이 등장해 인간을 괴롭힌 역사는 수천년, 혹은 그 이상 될 정도로 길지만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본격적으로 도시화와 산업화가 시작되던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부터다. 특히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그전까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던 결핵이 본격적으로 커다란 사회문제로 떠오름. 이처럼 19세기 내내 유럽 사람들을 가장 괴롭혔던 질병이 결핵임. 산업화가 뒤쳐진 나라들은 20세기 들어와서 결핵으로 고생을 하게 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도 20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산업화,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결핵으로 많은 고통을 겪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거의 예외없이 근대화과정 또는 산업화 과정에서 결핵이 가장 큰 보건의료 문제로 등장하곤 했음. 코흐는 산업화 이후 19세기 유럽의 가장 큰 보건문제였던 결핵의 원인균이 결핵균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냄.
- 19세기 유럽에 가장 큰 피래를 끼친 질병은 결핵이지만 유럽 사람들이 더 무서워하던 병은 따로 있었음. 19세기 유럽 사람들을 가장 공포에 떨게 한 병은 바로 콜레라. 콜레라는 그 특성 때문에 19세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큰 피해를 입힌 결핵보다도 더 큰 공포를 불러 일으켰음. 결핵은 항상 주변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무섭기는 해도 익숙한 질병이었음. 이에 반해, 콜레라는 한동안 잠잠하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하룻밤 사이에 한 도시와 마을을 휩쓸어 폐허로 만들어버리고는 했기 때문. 19세기 동안 콜레라는 크게 4차례 유행. 유럽만이 아니라 거의 전세계가 피해를 입었는데, 심지어 당시 조선시대 말이었던 우리나라도 기록을 보면 거의 같은 시기에 비슷한 피해를 봄. 잠잠하다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큰 피해를 주고 사라지는 특성 때문에 사람들은 결핵보다 콜레라를 더 두려워함. 그런 콜레라균의 정체와 원인을 밝힌 사람도 코흐다.
- 키니네는 키나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만든 약으로 프랑스에서 처음 만들어짐.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말라리아뿐만 아니라 열이 날 때 키나나무의 껍질을 갈아서 환자에게 마시게 하거나 흡입하게 해서 치료했는데, 이것을 본 서양인들이 1700년 무렵에 유럽으로 가져와서 효과를 많이 봄. 그러다가 19세기에 접어들어 화학이 발전하면서 치료효과가 있는 성분, 즉 키니네를 추출해서 약으로 만들게 됨. 그런 키니네를 중국인들이 음을 따서 금계랍이라고 불렀음. 우리나라는 1880년대 초 금계랍을 수입해서 사용한 것으로 보임. 일제강점기에도 금계랍은 말라리아 특효약으로 평판이 좋았지만 당시 조선인들의 소득수준에 비하면 상당히 비싼 약이었기 때문에 쉽게 복용할 수는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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