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7대 불가사의

역사 2015. 2. 24. 22:17

 


한국 7대 불가사의

저자
이종호 지음
출판사
역사의아침 | 2007-03-1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천문학, 누금세공 기술, 청동기 문명, 철기 문명, 인쇄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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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돌이 한국 고대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중국 동북지역의 고인돌 분포가 특정 지역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령지역의 고인돌 분포 현황을 살펴보면, 그것이 비파형 동검 분포권과 유사함. 요동반도의 심금형 쌍방, 한반도 대전 비례동과 신대동, 여천 적량동의 고인돌에서도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었음. 이는 비파형 동검문화가 고인돌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의미. 더구나 요동반도의 고인돌은 전형적 북방식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것은 한반도 북방식 고인돌과 상통함. 이런 사실을 통해 요동반도와 한반도의 주민집단이 동일한 문화단계에서 생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한국에서 고인돌이 중요시 되는 것은, 역사학적으로 볼 때 청동기 시대로 들어선 경우에만 비로소 그 민족이 국가라는 틀을 갖출 수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 고인돌은 비록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청동기 시대에 축조되었다고 받아들인다. 곧 고인돌의 축조연대가 올라갈수록 국가성립 시기 또한 상향조정되는 것이다.
- 트라키아 지역은 375년부터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한 훈족의 근거지인 동시에 세계 3대 제국을 건설하면서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은 아틸라(395~453)의 근거지이기도 함. 또 황금보검은 아틸라가 유럽을 제패한 4~5세기에 그리스, 로마, 이집트, 서아시아에서 유행한 장식검으로도 유명. 요시미즈 츠네오는 이 부분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 이들간의 교류를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바로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가 했다는 것. 세계에서 가장 진귀한 황금보검이 트라키아 지방에서 극동의 신라에 이르는 흉노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많은 것을 시사함. 기원전부터 중국은 부단히 북방의 흉노와 혈투를 벌였으며, 그 유명한 만리장성도 실제로는 흉노의 남진을 막기 위해 건설된 것. 흉노는 유럽에서 훈족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프랑스까지 점령했고, 유럽의 세계사를 바꾼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한 장본인. 그런데 근래 연구를 통해 흉노가 극동지역에 자리한 신라와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음. 아틸라는 야만 유목민으로 프랑스를 포함해 유럽을 초토화한 훈족의 왕으로서 당대 유럽세계의 패자였음.
- 서양 학자들이 훈족의 원류가 한국인일 가능성을 제기하는데도 정작 우리 한국인들은 훈족과 훈족의 유럽제패를 이끈 아틸라왕에 대해 잘 모름. 이는 우리 한국인이 세계사를 배울 때 사용하는 교재가 모두 서양인의 관점에서 쓴 것이기 때문. 서양인은 아틸라 왕과 훈족데 대해 편견으로 가득 찬 매우 적대적 관점을 취함. 자신들이 유색인종에게 점령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음. 그러므로 실제적인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의도적으로 그 비중을 축소하여 서술하며, 훈족을 야만인으로 폄훼함. 서양사에는 훈족이 375년 게르만족을 공격함으로써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했다고 기록됨. 훈족의 침입으로 자신이 살고 있던 근거지에서 쫓겨난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의 영내로 밀려들어가게 되고 476년 게르만족인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멸망함으로써 유럽의 중세가 시작됨. 이처럼 훈족이 게르만족을 공격한 역사적 사실을 단 몇줄로 서술함으로써 마치 일회성 해프닝에 그친 것처럼 다루고 있음. 이후 100여년 동안 훈족이 유럽 대부분의 지역을 정복하고 유럽의 패자로 군림한 사실은 역사 서술에는 나오지 않음. 4세기에 유럽에 모습을 드러낸 훈족은 유럽인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음. 서양사 서술에서 매우 강한 인상을 주는 게르만족조차 훈족이 나타나면 공포에 질려 달아나기 바빴으며, 전투력 면에서 훈족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 활의 사거리가 떨어지는 데다 파르티안 기사법을 알지 못하는 유럽 기병이 기마민족의 탁월한 기동력을 발휘하며 전후좌우에서 자유자재로 화살을 날리는 훈족 기병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은 뻔함. 결국 훈족과 싸워 연전연패한 유럽인은 훈족을 신이 내린 징벌이라 일컬으며 두려워했다고 함. 이렇듯 압도적 전력을 바탕으로 유럽에 등장한 훈족은 곧 동로마를 압박하여 동로마에서 조공을 받는 위치가 됨. 435년 훈족은 동로마가 공물의 납기실을 번번이 어기는 것을 빌미로 동로마로 진격. 로마가 동서로 분리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내정이 정비되지 않았던 동로마는 실수를 인정하고 재빨리 훈족과 마르구스에서 다음과 같은 평화협정을 맺음
* 동로마는 훈족의 적인 로마 밖에 있는 게르만족과 동맹을 맺지 않는다
* 국경 근처에 양측이 보장하는 시장을 세운다
* 동로마가 매년 금 700파운드(약 229킬로그램)를 훈족에게 바친다 (협정전에 비해 2배)
이 협정은 훈족 입장에서 획기적 의미를 지님. 훈족이 동로마의 인정아래 로마 밖에 있는 중동부 유럽 전역의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확보했기 때문. 또 서로마의 아에티우스에게서는 서고트인을 통제할 수 있는 경찰권을 확보했으니, 사실상 당시 세계패자는 이미 훈족이었다고 볼 수 있음.
- 독일의 베렌트와 슈미트박사는 한민족과 훈족이 연계되는 근거로 다음 몇가지 유물을 제시
*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되는 동복(청동 솥)이 가야지방에서 출토됨
* 훈족은 동복을 말 등에 싣고 다녔는데 신라에서도 말에 동복을 싣고 있는 기마인물상이 발견됨
* 동복의 문양을 한국의 머리장식에도 흔히 볼 수 있음
- 신라는 한반도 동쪽 끝에 자리한 고립된 나라가 아니었음. 당대의 신라는 중국과의 교류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임. 그동안 학자들은 이런 신라의 모습을 낙후성으로 해석하기도 했음. 하지만 신라는 중국과의 교류에 매달리지 않았기 때문에 낙후된 것이 아니라 초원길을 통해 중앙아시아, 그리스 로마 문화와 교류하면서 동북아에서 특별한 문화를 독자적으로 소화하며 발전해 나가고 있었음. 신라인은 여러민족이 여러 시기에 걸쳐 혼합된 민족이다. 선사시대부터 살아온 토착 농경민들, 기원전 3세기경에 진나라의 학정을 피해 이민한 사람들, 기원전 2세기에 이주해온 고조선 유민들, 고구려에 멸망당한 낙랑에서 내려온 사람 등으로 구성된 민족의 토대 위에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계까지 합류하여 문화의 다양성을 키웠음. 이렇게 축적된 문화의 다양성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 이처럼 경주에서 발견된 황금보검은 당대의 신라가 한반도 동쪽 끝에 자리한 궁벽한 나라가 아니라, 세계성을 지닌 나라였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며, 우리 민족 구성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음.
- 청동기가 언제 어디서 처음으로 발명되었는가는 고고학계에서도 아직 풀지 못한 문제. 학계의 입장은 기원전 5000년대에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자연동이 발견되어 기원전 4000년대에 실용화되고, 기원전 3000년대에는 코카서스-이란 고원에서 청동기가 주조되기 시작했다고 봄. 이후 메소포타미아로 전해졌고 그곳에서 사방으로 전파됨. 청동이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주석의 함량이 많을수록 합금의 경도가 높아짐. 순동에 주석을 섞으면 순동에 비해 용해 온도가 낮아짐. 순동의 녹는점은 섭씨 1083도이지만 주석을 일정량 넣으면 녹는점이 700~800도로 낮아지기 때문. 그러나 주석을 무한대로 넣는 것은 아님. 주석이 16~20% 들어갈 때 굳기 정도가 높아지는데 만약 이보다 주석의 양이 많아지면 부서지는 단점이 있음. 한편 납도 주석과 마찬가지로 녹는점을 낮추어 주조의 효율성을 높임. 그러나 주석보다는 제련하는 방법이 다소 어려우므로 그보다 자중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짐.
- 기원전 3000년경의 청동기 유물로 추정되는 고인돌과 청동제품은 청동기 시대에 비로소 국가가 성립될 수 있다고 주장해온 한국의 실증사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음. 실증사학자들은 한국의 청동기가 100여년전에 시작되었다고 간주했고 이를 근거로 단군조선 등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 역사학계에서는 이병도와 그를 잇는 학파를 실증주의학파라고 함. 학계 통설에 따르면 실증주의를 특징짓는 명제는 과학만이 타당한 지식이며, 사실만이 지식의 대상이라는 것. 따라서 실증주의는 사실과 과학을 통해 확인된 법칙을 넘어서는 어떠한 힘이나 실체의 존재와 그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며 형이상학이나 과학적 방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연구방법은 어떠한 것이든 배격함. 이는 역사학을 하나의 과학으로 보려는 학문적 연구태도와 관점, 다시 말해 역사의 과정과 자연의 과정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자연과학의 방법을 역사해석에 적용하려는 입장을 지칭하는 것. 이들은 최종자료를 문헌자료에 의지. 아무리 많은 고고학 자료가 있다 해도 자의적 해석이 되기 쉬우므로 그것이 갖는 의미는 최종적으로 문헌자료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한다는 것. 물론 문헌자료를 근거로 한다는 것에도 문제점이 있음을 자인함. 문헌자료란 글자가 생긴 후에 만들어진 것인데다 당시 사회의 모습을 체계적으로 설명해줄 정도로 자세하지 않기 때문. 결국 실증사학에서도 양측을 병용하여 접근하지만 실증사학 자체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임. 문제는 이병도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조선의 병합을 합리화하기 위해 조선사를 편찬한, 이완용이 고문으로 있던 조선사편수회의 일원이며 이후 일제 강점기를 한국 사학계를 주도한 진단학회를 이끌었고, 해방이후에도 1950~60년에 한국사 전 6권을 발간하는 등 한국사학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점. 더구나 실증사학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지배수단으로 이용하던 학문이라는 데 문제점이 있음. 원래 실증사학은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의 "역사는 주관적 판단없이 역사적 사실을 실증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는 주장을 기본으로 함. 유적과 유물도 과학으로 실증된 사실만 인정하며 사료의 경우 주관적 판단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배제한다. 당연히 민족사학 등은 비판대상인데 일반적으로 실증사학은 역사가 짧은 서양사회가 오랜 역사를 이어온 동양사회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 학문임.
- 신라시대 종이 탁월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종을 만든 청동재료의 배합비가 다르기 때문. 보통 청동제품은 구리, 주석, 납을 섞어 만들지만 그 용도에 따라 비율이 달라지는데 한국의 청동은 유난히 아연함량이 많음. 아연이 포함된 청동은 중국의 경우 한나라 이전에는 없고 송나라 때에 드물게 나타남. 아연은 섭씨 900도에서 끓기 시작하므로 아연이 많이 들어있는 청동합금을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움. 한국의 청동이 기술적으로 중국이나 일본보다 앞선 것은 자유자재로 우수한 합금을 만들 수 있었다는 의미
- 지금까지 알려진 것에 따르면 청동으로 식기를 만들어 쓴 민족은 한민족 밖에 없음. 같은 문화권인 중국에서는 주로 자기를 사용했고, 일본은 나무를 사용. 신라 유물 중에는 놋그릇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 놋그릇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든 청동기다. 우리 한민족이 자기를 만들 줄 몰랐던 것이 아니므로, 식기의 재료로 놋쇠를 사용했다는 것은 놋그릇을 만드는 기술 수준이 높아서 자기에 비해 저렴한 비용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했음을 보여주는 것. 일본 쇼소인에 소장된 신라 놋그릇을 보면 당시 신라에서 만든 놋그른이 미학적, 기술적으로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음. 고려시대 금속활자는 우리 청동기 기술의 결정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금속활자가 고려에서 세계 최초로 발명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것임. 다만 금속활자가 어떻게 고려에서 세계 최초로 발명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 고구려 주력부대는 개마무사로 구성됨. 개마란 기병이 타는 갑옷을 입힌 말을 이르며, 개마에 탄 중무장한 기병을 개마무사라고 했다. 개마고원도 개마무사가 말달리던 곳이라는 사실에서 유래. 고구려 개마무사는 말과 기사 모두 강철 갑옷으로 무장했는데, 개마무사가 5.4미터가 넘는 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하고 말과 기사의 갑옷과 체중에 말을 달린 탄력까지 모두 합하여 적에게 돌진하면 보병으로 구성된 적군의 대형은 무너지기 마련. 따라서 최강의 공격력과 장갑을 자랑하는 개마무사의 주된 임무는 적진 돌파와 대형격파였다. 개마무사는 현대로 치면 탱크와 같은 역할을 수행. 말조차 강철장비로 무방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함. 사실 기병이 아무리 용맹해도 말이 부상당하면 전투력이 떨어지므로 말의 안전은 기병 못지 않게 중요. 따라서 고구려는 기병은 물론 말가지 갑옷으로 무장했는데, 당시 말과 사람을 위한 갑옷을 강철로 만드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고도로 발달한 철기 문명 수준과 아울러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 따라서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전투력을 갖추고 한민족 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영유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님.
- 전쟁의 역학 구조상 상대방이 우수한 장비를 갖고 있으면 그 장비를 재빨리 모방하거나 더욱 개선하여 다음 전쟁에 활용하는 것이 상식인데 중국은 개마무사가 무적이란 것을 알고도 이를 주력군으로 육성하지 않음. 중국 역사를 통틀어 기마병을 전혀 도입하지 않은 것은 아님. 그러나 그들이 운용한 기병은 북방 기마민족이 중국을 점령했을 때나 중국의 용병으로 이민족을 끌어들였을 때 활용한 것에 지나지 않음. 중국이 개마무사의 위용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운용하지 않은 이유로 학자에 따라 중국 특유의 전술에 기인한다는 설명도 있지만 좀더 근원적으로 중국의 제철능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으로 인식. 고구려는 개마무사로 무장할 수 있는 철 생산능력이 있었는데 반해 중국에서는 철 생산능력이 없었다는 것.
- 중국이 타국에 비해 우월성을 보이는 것은 압도적으로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병력. 물론 장병수가 많다고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의 역사를 놓고 볼 때 대규모 인해전술과 물량작전을 펴서 실패한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중국은 고구려를 상대해서는 거의 모든 전투에서 패배. 고구려가 중국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중국보다 앞선 철기문명을 바탕으로 우수한 장비를 부단히 공급할 수 있었고 산성전투와 청야전투 등을 활용하면서 공격군에게 치명상을 입혔기 때문. 결국 고구려가 중국의 물량작전에 맞서 당당히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전술을 복합적으로 구사한 결과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요인은 고구려인의 평소 삶과 정신세계임. 먼저 고구려인은 기본적으로 상무적이었음. 그것은 고구려인이 결혼과 더불어 수의를 지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짐작가능. 고구려인의 이런 풍습을 대하고 중국인들은 매우 놀랐다고 하는데 그것은 고구려인이 국가적 대의를 위해 언제든 죽을 각오가 되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
- 중국과의 문화 교섭사 측면에서도 중국보다 한국에서 인쇄술이 더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기록이 있음. 1091년 한 해에 중국 송나라가 120여종에 이르는 희귀한 책 5000여권을 고려에 주문했다는 기록. 1092년은 목활자도 발명되기 전이므로 그 당시 고려가 송나라에 수출한 책들은 신라에서 비롯된 목판 인쇄술로 찍은 것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인쇄된지 300년, 우리나라는 중국에 서적을 수출할 정도로 인쇄술이 발달한 문화 선진국이었다. 당시 고려는 국제적으로 고금의 귀중한 서적이 많은 나라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수많은 책을 수출했음.
- 우리나라 종이는 예부터 명성이 자자했음. 송나라 손목은 계림지에서 "고려의 닥종이는 윤택이 나고 흰빛이 아름다워 백추지라고 부른다"고 했음. 고반여사에는 "고려종이는 누에고치 솜으로 만들어 종이 색깔은 희고 질기기가 마치 비단과 같은데 글자를 쓰면 먹물을 잘 빨아들여 종이에 대한 애착심이 솟구친다. 이런 종이는 중국에는 없는 우수한 것이다"라고 기록 됨. 중국에서 진귀하게 여긴 신라의 백추지 또는 경면지는 긴 섬유의 종이를 몇겹으로 붙여서 이를 두드려 광택을 낸 것. 백추지는 두드려 만든 하얀 종이란 뜻이며, 경면지는 두드러 거울처럼 빛나게 한 종이란 뜻. 중국에서 질긴 성질이 요구되는 우산, 부채, 책 표지 등의 용도로 우리나라 종이가 인기가 있었고 그림이나 글씨를 쓰는 데는 두드려서 광택을 낸 것을 즐겨 사용했음. 중국 역대 제왕의 진적을 기록하는 데 고려의 종이만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음. 고려종이의 명성은 조선으로 이어져 한지가 중국과의 외교에 필수품으로 등장. 한지의 질이 명주와 같이 정밀해서 중국인들은 이를 비단섬유로 만든 것으로 생각했음. 그래서 한지는 중국과의 외교에서 조공품으로 많이 강요됨
- 최무선은 고려말에 화약을 만든 것으로 유명. 하지만 그가 이후 계속해서 화포를 만들고 이를 고려수군의 전함에 장착하여 왜구를 상대로 진포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음. 진포해전은 세계 최초의 함포해전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 서양역사에서 함포해전을 근대 해전의 분기점으로 본다. 진포해전에 대해 알지 못하는 서양인들은 1517년 베네치아, 제노바, 스페인의 연합함대가 튀르크 함대와 레판토에서 격돌한 레판토 해전을 근대 함포해전의 효시로 본다. 레판토 해전이후 함포가 장착된 배로 해상권을 장악한 국가가 세계를 정복하게 되며, 역사의 주도권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간다.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이 세계사를 주도) 서양이 동양에 대해 우위에 서게 되는 지리상의 발견과 식민지 침탈의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함포외교임. 그런데 레판토 해전보다 무려 190년이나 앞서, 최무선은 화포를 선박에 장착하여 적선을 격파하는 함포해전을 세계 최초로 선보임. 이후 최무선은 1389년에 전선 100처을 동원하여 대마도 정벌에 나섰음. 결과는 대성공으로 고려는 대마도 해안에 정박중이던 300여척의 왜선을 격침하고, 왜구 소굴을 파괴했으며, 인질로 잡혀 있던 고려인 100여명을 구출해 귀국. 그리고 200년 후 최무선의 화약무기와 함포전술을 그대로 계승한 조선 수군이 임진왜란에서 왜군을 맞아 대승을 거둔 것을 보면 당대 최무선이 창안한 함포전술이 얼마나 뛰어난 것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음.
- 임진난에서 조선수군의 함포전술에 연전연패한 왜군은 서둘러 배에 화포를 장착. 하지만 크기가 작은 일본의 전선은 대형 화포의 발사충격으로 뒤집히기 일쑤였고, 흔들림이 심해 조선수군에 비해 화포의 명중률도 현저하게 낮았음. 때문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내내 왜군은 전선에 대형화포를 탑재할 수 없었음. 이것이 왜군이 조선수군에 연전연패한 주요 원인. 최무선이 고려수군의 전선에 장착한 함포가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의 탁월한 조선기술이 뒷받침되었기 때문. 고려시대에 들어와 해상활동이 활발해지자 조선과 항해기술이 크게 발달했음. 고려시대의 배는 전투용 군함, 무역과 대외활동을 위한 무역선, 조세나 공물을 운반하는 조운선으로 나뉨. 조운선은 각지에서 공물로 거둬들인 조세미와 진상품을 수도 개성으로 운반하는 데 사용한 관용선으로 관청에서 수납한 세곡과 중앙정부에서 쓰이는 일용품이 거의 조운선으로 운송됐음. 조운선은 조선전기에는 병조선이라 불렀음. 상장(구조물)을 설치하면 병선이 되고, 상장을 철거하면 조운선이 되기 때문에 붙은 이름. 평시에는 조운선으로 활용하다 전시에는 상장을 설치해 병선으로 운용한 것으로, 유사시 재빠른 전시체제로 돌입하기 위한 지혜의 소산이었음. 조운선은 쌀 800석, 600석, 300석을 적재하는 세 종류가 있는데, 이를 운행하는 인원은 겨우 22명, 20명, 18명 정도였으니 당시 항해술과 화물선적술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음. 그 결과 조운선이 정박하는 나루와 포구에는 관련업무를 보는 관리와 인부, 그리고 상인들이 모이게 되고 이들의 침식을 위해 또 다른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작은 마을로 시작된 나루와 포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로 번창. 조선시대 조운서이 도시로 번창한 대표적 예를 서울의 용산, 마포, 노량진, 동작나루, 양화진 등이며 충청도 충주, 전라도 법성, 덕성, 영산포, 강원도의 원주, 춘천, 황해도의 금곡, 조음, 평안도의 안주, 삭주, 의주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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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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