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 저자
-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 지음
- 출판사
- 시공사 | 2012-09-27 출간
- 카테고리
- 정치/사회
- 책소개
- 국가의 성패를 결정적인 요인, '제도'의 힘! 번영과 빈곤의 기...
- 에스파냐가 미 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내내 비슷한 제도와 사회구조가 생겨남. 약탈과 금은보화에 눈이 먼 식민지 개척초기가 지나자 에스파냐는 원주민을 수탈하기 위한 제도를 거미줄처럼 뽑아냈다. 엔코미엔다, 미타, 레타르티미엔토, 트라진에 이르는 온갖 제도가 죄다 원주민을 삶을 연명가능한 최저생계수준까지 끌어내리고 그 잉여분은 모조리 에스파냐가 수탈하기 위한 것이었음. 그들의 땅을 몰수하고 강제노력을 시키면서도 최저임금만을 지급하며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자발적으로 사지 않은 물품에 대해서도 고가의 가격을 매기는 방법으로 수탈을 자행한 것. 이런 제도 덕분에 에스파냐 왕실은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정복자들과 그 후손들 역시 부를 누릴 수 있었지만, 이 때문에 남미는 세상에서 가장 불평등하고 경제적 잠재력을 송두리째 빼앗긴 대륙으로 전락
- 1490년대 에스파냐가 미 대륙 정복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잉글랜드는 내전인 장미전쟁에 따른 심각한 후유증에서 갓 회복하던 변방세력에 지나지 않았음. 그들은 전리품으로 금은보화를 챙기고 미 대륙의 원주민을 착취할 기회를 모색할 겨를이 없었음. 그로부터 거의 100년이 지난 1588년, 잉글랜드는 운 좋게도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가 침략을 작심하고 파견한 무적함대를 패퇴시켜 유럽 전체에 엄청난 정치적 파문을 일으켰음. 행운이 따랐다고는 해도 무적함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은 바다에서 잉글랜드의 위세가 그만큼 커질 것이라는 신호였고 마침내 식민제국 건설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함. 따라서 잉글랜드가 정확히 같은 시기에 북미의 식민지화에 나선 것은 우연이 아니었음. 하지만 후발주자 신세를 면치 못했던 게 사실임. 이들이 북미를 선택한 것은 이 땅이 매력적이어서가 아니라 남은 게 그곳밖에 없어서였음. 아메리카 대륙에서 착취할 원주민이 많고 은광이 있는 노른자 땅은 이미 남의 차지가 되어 있었음. 잉글랜드는 찌꺼기에 만족해야 했음.
- 멕시코의 불평등한 제도는 원주민을 착취하고 독점을 정당화하는 기반위에 사회를 건립함으로써 대다수 민중의 경제적 인센티브와 일할 의욕을 꺾어버렸음. 19세기 전반, 미국이 산업혁명을 겪기 시작했을 때도 멕시코는 나날이 가난해졌을 뿐이다.
- 1820년에서 1845년 사이 미국에서 특허를 받은 사람 중 부모가 전문직 종사자거나 유력한 지주가문 출신인 경우는 19%에 불과. 같은 시기 특허를 받은 사람 중 40%는 에디슨처럼 기본 정규교육밖에 받지 못한 이들이었다. 게다가 역시 에디슨처럼 사업을 시작할 때 걸핏하면 부모에게 손을 벌린 사람들이다. 19세기 미국은 세계 어느나라보다 정치적으로만 민주적 양상을 띤 것이 아니라 혁신에서도 민주적이었음. 이런 면이 세계에서 으뜸가는 경제혁신을 이루는 나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19세기에 걸쳐 급속도로 팽창한 금융중개업과 은행업은 경제의 가파른 성장과 산업화를 이끄는 중대한 견인차 역할을 했음. 1818년에만 해도 미국에서 영업하던 은행은 겨우 338개로 총 자산도 1억 6000만불에 불과했지만, 1914년 무렵에는 무려 2만 7864개의 은행이 성업했으며 총 자산은 273억 불에 육박. 꿈을 가진 미국의 발명가라면 진작부터 창업에 필요한 자금조달이 수월했다는 의미. 그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은행과 금융기관의 경쟁이 치열해서 상당히 낮은 금리로 자금을 빌릴 수 있었음. 이번에도 멕시코의 사정은 달랐음. 실제로 멕시코 혁명이 발발한 1910년까지도 멕시코에서 영업한 은행은 42개에 불과했고, 그중 두곳이 총 은행자산의 60%를 차지. 경쟁이 치열했던 미국과는 달리 멕시코 은행간에는 사실 경쟁이랄게 없었음. 경쟁할 필요가 없으니 은행은 고객에게 굉장히 높은 금리를 요구할 수 있었고, 대체로 엘리트층과 부유층은 그렇게 자금을 끌어다 경제전반을 강하게 장악할 수 있었음.
- 미국 헌법이 시행된 직후인 18세기 후반에는 멕시코와 별반 다름없는 은행체제가 슬슬 시동을 걸었음. 정치인들은 국가가 독점하는 은행체제를 시도. 측근 및 후원자에게 독점권을 부여하고 그 대가로 독점을 얻는 이윤을 나누어 갖길 바란 것이다. 곧 미국은행돌도 멕시코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규제하는 정치인들에게 대출을 몰아주는 경향을 보였음.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런 상황이 오래가지 못했음. 독점적 은행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정치인이라도 멕시코와 달리 선출직이어서 재선에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 독점적 은행을 만들어 자신이 대출을 받는다면 정치인에게는 이보다 수지맞는 장사가 없었음. 그러고도 무사하다면 말이다. 하지만 시민에게는 대단히 불리한 일일 수밖에 없음. 멕시코와 달리 미국에서는 시민이 정치인을 견제하고, 자신의 직위를 남용해 축재하거나 측근에게 독점권을 챙겨주는 이들을 제거해버릴 수 있었음. 결과적으로 독점적 은행체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 지금의 카를로스 슬림을 있게 한 멕시코의 경제제도는 미국과 딴판이다. 멕시코 기업가는 창업단계부터 번번이 진입장벽에 부딪힌다. 값비싼 면허비용을 치러야 하는 것은 물론 번잡한 행정절차에 시달려야 하고 정치인과 기존 사업자의 견제를 받아야 한느 데다 경쟁을 벌여야 할 기존 사업자와 결탁한 금융기관으로부터 자금을 조달받기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님. 이런 진입장벽은 어느 편에서느냐에 따라 수익성 높은 사업에 아예 진출조차 못하게 막는 난관이 될 수도 있고, 경쟁자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철통같은 방책이 될 수도 있음. 물론 연줄과 영향력 행사 가능성에 따라 시나리오가 갈림. 또 누구를 뇌물로 구워삶을 수 있느냐도 당연히 중요한 역할을 함. 수완 좋고 야심이 대단한 카를로스 슬림은 레바논 이민자 출신이라는 비교적 평범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독점적 계약을 따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음. 노다지나 다름없는 멕시코 통신시장을 독점하더니 더 나아가 라틴 아메리카까지 손을 뻗친 것이다.
-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 데 경제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나라가 어떤 경제제도를 갖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와 정치제도임. 궁극적으로 미국의 좋은 경제제도는 1619년 서서히 부상한 정치제도에서 비롯되었음. 정치 및 경제제도의 상호작용이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한다는 것이 우리가 제시하는 세계 불평등 이론의 골자임. 또 지구촌 각 나라가 어떤 연유로 지금과 같이 서로 다른 제도를 갖게 되었는지 역시 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음. 간단히 살펴본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만 보더라도 어떤 힘에 의해 정치, 경제제도가 만들어지느느지 가늠해볼 수 있음. 오늘날 제도가 서로 다른 패턴을 보이는 이유는 과거 역사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함. 일단 사회가 특정 방식으로 조직된 이후에는 그런 경향이 지속되는 관성을 보이기 때문. 이 도한 정치, 경제제도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살펴볼 것이다. 세계 불평등을 제거하고 가난한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도 그런 관성과 그 관성을 유발하는 힘 때문
- 다이아몬드의 이론은 그가 주력하는 수수께끼를 푸는 데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접근방법이지만 이를 확대해 세계 불평등을 설명하려들면 무리가 따른다. 가령 다이아몬드는 에스파냐가 아메리카 대륙 문명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 오랜 농경의 역사와 그에 따른 탁월한 기술 덕분이었다고 주장. 하지만 과거 아즈텍과 잉카제국의 땅에 사는 멕시코와 페루인들이 왜 가난하게 살아가는지는 설명하지는 못함. 밀과 보리를 재배하고 말을 키울 수 있어 에스파냐가 잉카보다 잘살았을지는 모르지만, 그 소득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에스파냐 시민의 평균소득은 기껏해야 잉카제국 시민의 두배가 채 안 되었을 것이다. 다이아몬드의 이론에 따르면 잉카제국 사람들이 모든 식물과 동물종을 기를 수 있고 스스로 개발하지 못한 기술을 습득했더라면 에스파냐의 생활수준을 빠르게 따라잡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음. 오히려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 에스파냐와 페루의 소득격차는 더 크게 벌어졌음. 오늘날 에스파냐는 페루에 비해 평균 6배는 더 윤택한 삶을 영위. 이 소득격차 역시 불공정한 현대 산업기술의 분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지 에스파냐와 페루의 동식물종 차이나 근본적인 농업 생산성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님.
- 대륙간 불평등을 거론하는 다이아몬드의 주장은 오늘날 세계 불평등의 요체라 할 만한 대륙 내부의 변이에 대해서도 설득력을 잃고 만다. 가령 유라시아 대륙의 방향이 동서방향이어서 잉글랜드가 수고를 들이지 않고 서아시아의 혁신으로부터 수혜를 입었다고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산업혁명이 왜 몰도바에서 일어나지 않고 굳이 잉글랜드에서 발생했는지는 설명하지 못함. 그뿐만 아니라 다아이몬드 자신도 지적하듯 중국과 인도는 대단히 다양한 동식물종이라는 천혜의 자원을 자랑하며 유라시아 대륙 방향성에서도 유리함. 하지만 오늘날 지구촌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 대부분이 바로 이 두나라에 살고 있음.
- 무지가설이 지리적 요인이나 문화가설과 다른 점은 빈곤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는 것. 무지 때문에 가난해졌다면, 지도자와 정책입안자를 계몽해 교육하면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고 적절한 조언을 제공하고 올바른 경제운용이 어떤 것인지 정치인을 설득하면 지구촌의 번영을 도모할 수 있다는 주장. 하지만 부시아의 경험만 놓고 보아도 시장실패를 줄이고 경제성장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정책을 채택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정치인의 무지가 아니라 이들이 사회에서 직면하는 인센티브와 제약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음
- 우리는 충분히 중앙집권적이고 다원적인 정치제도를 포용적 정치제도라고 부를 것이다. 두 조건 중 하나라도 충족하지 않으면 착취적 정치제도라 할만하다. 경제와 정치제도 간에는 강력한 시너지가 생긴다. 착취적 정치제도는 소수 엘리트층에 권력을 쥐어주며 권력행사를 특별히 제한하지도 않음. 이들은 으레 나머지 사회구성원의 자원을 착취할 수 있도록 경제제도의 틀을 짠다. 따라서 착취적 경제제도는 자연스레 착취적 정치제도를 수반함. 사실 이들은 태생적으로 생존을 위해서라도 착취적 정치제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권력을 두루 분배하는 포용적 정치제도는 다수의 자원을 몰수하고, 진입장벽을 세우며, 소수가 혜택을 누리도록 시장의 기능을 억압하는 경제제도를 뿌리뽑으려 하기 때문이다.
- 1346년까지만 해도 정치, 경제제도에 관한 한 동서유럽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았지만, 1600년 무렵에는 격차가 극심하게 벌어진다. 서유럽의 노동자는 봉건적 세금이나 벌금, 규제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호황을 맞은 시장경제의 핵심일원이 되었음. 동유럽 역시 그런 경제호황을 맞았지만, 식량과 농산품에 대한 서유럽의 수요를 맞추려고 농노를 강제로 부린 덕분. 동서유럽간 제도적 차이는 언뜻 아주 사소한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음. 동유럽의 영주는 비교적 조직적이었음. 그런대로 권리도 많았고 영지에 대한 지배력도 조금 더 강했다. 서유럽에 비해 도시는 미약했고 작았으며 소작농의 결집력은 약했음. 역사적 큰 그림에서 본다면 작은 차이일지 모른다. 하지만 동서유럽에서 흑사병으로 봉건질서가 흔들릴 때 일반대중의 삶과 제도발전의 운명을 완전히 갈라 놓은 것도 이런 작은 차이들이었다. 흑사병은 대형사건이나 요인이 한데 어우러져 기존 사회의 경제 또는 정치균형을 뒤흔들어놓는 결정적 분기점의 생생한 사례라 할 수 있음. 결정적 분기점은 한 나라가 나아갈 길을 급변시킬 수 있는 양날의 칼이다. 한편으로는 잉글랜드에서처럼 착취적 제도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좀더 포용적인 제도가 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함. 하지만 동유럽의 재판농노제에서 보듯이 착취적 제도가 다시 고개를 들어 공고하게 자리를 잡는 시발점이 되기도 함.
- 결정적 분기점과 제도적 부동의 상호작용에 따라 전 세계의 경제발전은 대단히 다른 패턴을 보이게 됨. 기존의 정치, 경제적 제도들은 미래의 변화가 전개될 반석 역할을 함. 흑사병과 1600년 이후 세계 무역의 확대는 유럽 열강에 대단히 결정적 분기점으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기존의 상이한 제도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심각한 차이를 만들어내기 시작. 1346년 서유럽 소작농은 동유럽보다 비교적 많은 권리와 자율성을 누렸음. 그 결과 흑사병은 서유럽에서 봉건제도의 몰락으로 이어진 반면 동유럽에서는 재판농노제라는 상이한 결과를 낳았음. 동서유럽은 이미 14세기부터 갈림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17,18,19세기에 걸친 새로운 경제적 기회는 유럽의 양대 지역에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띄게 됨. 1600년 잉글랜드 왕실의 힘은 프랑스와 에스파냐에 비해 약했기 때문에 대서양을 통한 무역은 잉글랜드에 더 폭넓은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지는 길을 열어주었지만, 프랑스와 에스파냐에서는 왕실의 힘만 강화되었을 뿐
- 정착집단은 갈등 해소가 한층 어려워질 수 있음. 이동생활을 하면 불화가 생겨도 성에 차지 않는 사람이나 집단이 떠나버리면 그만이기 때문. 하지만 영구 주거건물을 짓고, 들고 다닐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자산을 쌓아두기 시작하면서 마음에 안든다고 해서 그냥 떠나버릴 수 는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취락은 더 효과적인 갈등해소 방법과 더 정교한 재산개념이 필요했음. 취락과 가까운 땅에 누가 들어갈 수 있는지 누가 이런 나무에서 열매를 딸 수 있는지, 냇물 어디에서 누가 낚시를 할 수 있는지 온갖 의사결정을 내려야 했음. 규칙도 마련하고, 그 규칙을 집행할 제도를 만들어 다듬어야 했음. 따라서 정착생활이 가능해지려면 먼저 수렵채집인을 강제로 정착시킬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적 혁신이 선행되어야 했을 것임. 그런 제도적 혁신으로 권력을 쥔 정치 엘리트가 사유재산권을 집행하고 질서를 유지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나머지 사회구성원으로부터 자원을 착취할 수 있어야 했다는 것. 실제로 규모는 작더라도 샤이암 왕이 주도했던 것과 흡사한 정치혁명이 돌파구가 되어 정착생활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음
- 역사속에서 착취적 제도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는 그만큼 이면의 논리가 탄탄하기 때문. 제한적 번영을 이룩하면서도 소수 엘리트의 손에 그 결실을 쥐여줄 수 있다는 것. 이런 성장을 위해서는 정치권력의 중앙집중하가 필요함. 중앙집권화가 마무리되면 정부 또는 정부를 장악한 엘리트층은 으레 투자를 통해 부를 창출하고, 정부가 자원을 착취할 수 있도록 다른 이들에게도 투자를 장려하며, 더 나아가 본디 포용적 경제제도와 시장을 통해 마련되는 일부 과정까지도 흉내낼 인센티브가 생김. 카리브해 대농장 경제의 착취적 제도는 엘리트층이 강압적으로 노예를 부려 설탕을 생산하는 양상을 띠었음. 소련에서는 공산당이 농업에서 공업으로 자원을 재배분하고 경영진과 노동자에게 일부 인센티브를 허용하는 형태였음.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런 인센티브는 체제의 성격때문에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정치권력을 중앙집중화하려는 욕구는 착취적 성장가능성에서 비롯됨. 샤이암이 쿠바왕국을 창건하려 했던 이유이며 나투프인이 서아시아에서 원시적 형태이나마 법과 질서, 계급질서, 착취적 제도를 확립해 궁극적으로 신석기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도 그 근본적 원인은 착취적 성장 가능성이었을 것임. 아메리카 대륙에서 정착사회가 태동하고 농경생활로 이양하는 토대가 마련된 것도 비슷한 과정이 계기가 되었을 것임. 소수 엘리트층의 이익을 위해 다수를 강압적으로 다스렸던 대단히 착취적 제도를 기반으로 한 마야인의 발달한 문명에서도 그런 면을 볼 수 있음. 하지만 착취적 제도하에서 달성한 성장은 포용적 제도하에서 달성한 성장과는 성격이 다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은 지속불가능하다는 사실. 그 성격상 착취적 제도는 창조적 파괴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기술적 진보 역시 기껏해야 제한적 수준에 그침. 따라서 착취적 제도를 통한 성장은 단명하고 만다.
-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이 극심한 제한을 받는 것은 창조적 파괴와 혁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님. 마야 도시국가의 역사는 착취적 제도의 태생적 논리에서 비롯되는 한층 더 불길하고, 안타깝게도 한층 보편적으로 귀결되는 운명을 여실히 보여줌. 이런 제도를 통해 엘리트층은 상당한 이득을 취할 수 있으므로 다른 이들이 현재 엘리트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반기를 들 강력한 인센티브가 생기기 마련. 따라서 내부분쟁과 불안정은 착취적 제도에 반드시 수반되는 태생적 특징이며, 비효율성을 심화시킬 뿐 아니라 중앙집권화된 정치권력을 와해시키기 일쑤이며, 심하면 법과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려 사회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함. 고전기를 거치는 동안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던 마야 도시국가도 종국에는 이런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음.
- 그린란드 빙핵 프로젝트는 인류역사 25만년에 해당하는 3030미터의 빙하를 시추한 바 있음. 이 프로젝트와 이전 프로젝트들에서 발견된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기원전 500년경부터 대기오염물질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는 것. 납, 은, 구리 등 금속 오염물질의 양은 이후 꾸준히 늘어 기원후 1세기에 정점을 찍음. 대기중 납의 양이 전고점에 근접한 것은 놀랍게도 13세기에 들어서였음. 그 이전은 물론 이후와 비교해서도 로마의 채굴활동이 그만큼 대단히 활발했다는 의미. 채굴활동의 급증이 경제확장을 시사해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 소련 등 다른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사례와 마찬가지로 로마역시 공화정 당시에는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경험했음. 하지만 일부 포용적 제도하에서 달성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성장은 한계가 있었고 지속가능하지도 않았음. 로마의 경제성장은 비교적 높은 농업 생산성, 속주에서 거두어 들이는 막대한 공물과 장거리 무역에 의지했을 뿐 기술적 진보나 창조적 파괴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었음. 로마인도 철제도구와 무기, 문자해득력, 쟁기농업, 건축기법 등 일부 기본적 기술을 물려받았고 공화정 초기에는 시멘트 벽돌, 펌프, 수차 등 다른 기술을 만들어내기도 했음. 하지만 이후에는 로마제국 시대를 통틀어 기술은 답보상태를 면치 못함. 가령 조선 부문만 보다라도 배의 설계나 삭구에 거의 변화가 없었고, 로마인은 방향타를 개발한 적이 없어 늘 노를 저어 방향을 잡았음. 수차 역시 아주 더디게 확산된 탓에 수력 에너지가 로마경제에 혁신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음. 송수로와 도시하수도처럼 로마의 위대한 업적 역시 로마인이 완성했다고는 하지만 기존 기술을 사용했을 뿐이다. 혁신이 없어도 기존 기술에 의존해 어느 정도의 경제성장은 가능했지만, 창조적 파괴가 수반되지 않는 성장에 불과했으며 또 오래가지도 못했음. 사유재산권이 갈수록 불안해지고 시민의 경제적 권리가 정치적 권리와 더불어 움츠러들면서 경제성장 역시 퇴보하고 말았음.
- 베네치아의 경제번영은 중요한 포용적 요소를 지닌 제도 덕분에 가능했지만, 기존 엘리트층이 신규 참가자가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체제의 문을 닫아걸고 심지어 베네치아공화국에 번영을 가져다준 경제제도를 금지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로마의 역사가 아무리 도드라져 보인다 하더라도 로마의 유산이 잉글랜드의 포용적 제도나 잉글랜드 산업혁명으로 직접 연결되지는 않았음. 역사적 요인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제도가 발달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미리 정해진 축적과정을 거치지는 않음. 로마와 베네치아만 보더라도 포용성을 향한 초기행보가 이내 후퇴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음. 로마가 유럽과 서아시아 지역일대에 가져다준 경제 및 제도적 기반이 훗날 한층 더 뿌리 깊은 포용적 제도로 고스란이 이어지지도 않았음. 오히려 그런 제도들이 최초로 가장 힘차게 기지개를 편 곳은 로마의 장악력이 가장 미약했고, 기원후 5세기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시피 한 잉글랜드였다. 역사는 제도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제도적 부동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은 차이일지라도 결정적 분기점과 상호작용을 통해 그 차이가 증폭되면서 역사의 큰 물줄기가 만들어지기도 함. 하지만 이런 차이는 흔히 워낙 작아 되돌려질 때가 많으므로 단순한 축적과정의 산물이라 할 수도 없다.
- 리의 양말짜는 틀 편물기계처럼 중대한 혁신은 정치권력의 판도마저 바꾸어 놓을 수 있음.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가 리에게 특허를 거부한 것은 사실 그의 기계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될 백성이 가여워서가 아니었다. 정치적 패자로 전락할 것이 두려웠던 것. 리의 발명품으로 곤경에 처한 백성이 정치불안을 초래하고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뒤흔들 수 있다는 위협을 느꼈던 것. 러다이트 운동과 마찬가지로 손뜨개질 인력과 같은 노동자의 저항은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는 때가 많음. 하지만 특히 정치권력을 위협받는 엘리트층은 그런 혁신을 도입하는 데 한층 가공할만한 걸림돌이 됨. 창조적 파괴의 과정에서 잃을 게 많은 세력은 새로운 혁신을 도입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혁신에 저항하고 막아보려 애쓰기 일수임. 그것이 사회에 가장 급진적인 혁신을 도입해줄 주역이 필요한 이유이고, 그런 새로운 주역과 이들이 초래하는 창조적 파괴는 막강한 지도자와 엘리트층을 비롯해 이런저런 저항세력을 반드시 극복해야 함
- 잉글랜드는 사유재산권을 새로 만들거나 개선했고,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했으며, 재정정책을 바꾸었고, 금융시장을 확대했으며, 무역상과 수공업자를 보호했음. 1760년에 이르자 이 모든 요인이 한데 어우러져 상승효과를 내기 시작했음. 특허 발명품의 수가 급증했고 훗날 산업혁명의 핵심이 될 기술혁신이 확연히 더 왕성한 양상을 띠기 시작. 개선된 제도적 환경을 반영하듯 다방면에서 혁신이 이어짐. 가장 중요한 분야는 동력이었다. 그리고 단연 눈에 띄는 것은 1760년 제임스 와트의 아이디어 덕에 크게 활용도가 높아진 증기기관이었음.
- 명예혁명을 기념비적 사건이라 하는 것은 이처럼 권한이 커진 광범위한 연합세력이 주도했기 때문. 또 이 연합세력은 명예혁명으로 한층 더 힘을 키워 행정부의 권한은 물론 세력 내 일원들의 권한에도 제약을 가할 수 있는 헌정질서를 마련할 수 있었음. 가령 바로 이런 제약들 덕분에 모직물 수공업자들이 면직물 및 퍼스티언 수공업자의 잠재적 경쟁을 막지 못한 것. 1688년 의회의 권한이 막강해진 것도 바로 이 광범위한 연합세력 덕분이었지만, 또 그 덕분에 의회 내에서 단일 세력의 힘이 지나치게 비대해져 권력을 남용하는 일도 견제할 수 있었음. 다원주의 정치제도의 태동에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 된 것이다. 포용적 정치, 경제제도가 꾸준히 강화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바로 이런 광범위한 연합세력의 권한강화 덕분이었음.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벌어진다 해서 진정한 다원주의 정권이 반드시 들어서리란 보장은 없었음. 그런 정권의 태동은 부분적으로 역사의 우발적 경로를 따른 결과였다 할 수 있음. 스튜어트왕조에 맞서 싸운 잉글랜드 내전에서도 연합세력이 승리했지만 올리버 크롬웰의 독재로 이어진 바 있음. 연합세력의 힘이 강하다 해서 반드시 절대왕권을 물리칠 수 있다는 의미도 아님. 제임스 2세는 오렌지공 윌리엄을 물리쳤을 수도 있다. 다른 정치적 갈등의 결과나 마찬가지로 주요 제도적 변화가 걷는 길 역시 역사의 우발성에 좌우되기 마련이다. 제도적 부동과정으로 절대왕정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연합세력이 만들어지고 대서양 무역기회라는 결정적 분기점으로 스튜어트 왕조가 불리한 입장에 처했었다 하더라도 역사의 우발성을 무시할 수 는 없었다. 따라서 잉글랜드의 사례에서 다원주의 및 포용적 제도가 태동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역사성 우발성과 광범위한 연합세력이라 할 수 있다.
- 고도로 절대주의적이고 착취적인 오스만 제국의 제도를 고려하면 인쇄술에 대한 술탄의 적대감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음. 책은 사고를 전파시키고 그만큼 백성을 통제하기 어렵게 함. 어떤 사고는 경제성장을 증진할 수 있는 소중한 새로운 방법에 관한 것일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사고는 체제를 부정하며 기존의 정치 및 사회질서를 뒤흔들어 놓는 것일수도 있음. 책은 또한 구두로 전해지는 지식에 대한 통제력도 약화시킴. 글을 아는 누구라도 지식을 습득할 수 있기 때문. 따라서 인쇄술은 엘리트층이 지식을 장악하던 기존질서를 파괴할 위협으로 여겨졌음. 오스만 제국의 술탄과 종교집단이 두려워한 것은 인쇄술이 초래할 창조적 파괴였음. 이들의 해법은 인쇄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 잉글랜드가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상업이 급속도로 팽창한 덕분. 에스파냐와 포르갈에 비해 잉글랜드는 대서양 무역에서 후발주자였지만 무역과 식민지 관련 사업에 비교적 광범위한 계층이 차명할 수 있도록 허용했음. 에스파냐에서는 새로운 경제적 기회가 왕실의 배만 불려주었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신흥상인계급도 수혜를 입었다. 잉글랜드에서 초기 경제환경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 바로 이 상인계층이었으며 절대왕정에 반대하는 정치연합의 보루역할을 한 것도 이들이었음. 에스파냐에서는 잉글랜드의 경제성장과 제도적 변화를 이끌었던 과정이 현실화되지 못했음.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후 이사벨라와 페르디난츠는 세비야의 상인길드를 통해 새로운 식민지와 에스파냐간 무역을 주관. 이 상인들이 모든 무역을 통제하며 아메리카 대륙에서 얻는 부의 일정부분이 왕실이 차지할 수 있도록 했음. 식민지오 자유무역은 꿈도 꾸지 못했으며 매년 대규모 선단을 꾸려 아메리카 대륙에서 귀금속과 귀중품을 세비야를 실어 날랐다. 무역을 워낙 편협하게 독점한터라 식민지와 무역기회를 통해 광범위한 상인계층이 부상할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던 것.
- 잉글랜드는 절대왕정을 뿌리 뽑았는데 에스파냐에서는 오히려 그 입지가 강화되어 꾸준히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결정적 분기점에서 작지만 중요한 차이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한가지 사례라 할수 있음. 작은 차이는 대의기구의 힘과 성격이었고, 결정적 분기점은 아메리카대륙의 발견이었다. 이런 작은 차이와 분기점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에스파냐는 제도적으로 잉글랜드와 사뭇 다른 길을 걷게 됨. 잉글랜드에서는 비교적 포용적인 경제제도가 만들어져 전례없는 경제성장을 구가하며 산업혁명으로 정점을 찍었지만, 에스파냐에서는 산업화 가능성이 희박했음. 산업기술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을 무렵에도 에스파냐 경제는 왕실과 지주 엘리트층이 산업화를 막을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추락.
- 절대주의 체제는 유럽 대부분 지역은 물론 아시아에서도 군림했으며 혁명으로 결정적 분기점의 기회가 주어진 시기에도 산업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었음. 중국의 명, 청왕조, 오스만 제국의 절대주의 체제가 이런 패턴을 잘 드러내줌. 960년에서 1279년까지 이어진 송왕조 시절만 해도 중국은 수많은 기술혁신으로 세계를 주도했음. 시계, 나침반, 화약, 종이, 지폐, 도자기, 화로, 주철을 만드는 용광로 등도 유럽에 앞서 중국이 먼저 발명했음. 물레와 수력 역시 유라시아 건너편에서 발명될 즈음 중국도 독자적으로 개발했음. 그 결과 1500년만 해도 중국의 생활수준은 유럽에 견줄만했을 것이다. 또 중국에는 수세기 동안 능력본위의 관료체제를 갖춘 중앙집권 정부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중국 역시 절대주의 체제가 군림했고 송왕조하의 성장도 착취적 제도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음. 지배층 이외의 다른 사회집단을 대변하는 의회 또는 코르테스와 같은 정치적 대의기구가 존재하지 않았음. 중국에서는 상인의 지위 역시 늘 불안했고, 송왕조의 위대한 발명품들이 탄생한 것도 시장의 인센티브가 아닌 정부의 장려 또는 직접적인 명령에 따른 것이었음. 상용화된 발명품도 거의 없었다. 송에 이은 명, 청왕조는 정부의 권한을 한층 더 강화. 그 근간에는 늘 착취적 제도의 논리가 깔려 있었다. 착취적 제도로 군림하는 지도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중국의 절대주의 황실 역시 변화를 거부하고 안정을 추구했다. 기본적으로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한 것이다.
- 명,청왕조가 해외무역을 반대한 이유도 쉽사리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역시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했다. 지도층의 주된 관심사는 정치적 안정. 대서양 무역 팽창기에 잉글랜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해외무역은 상인들이 배를 불려 딴생각을 품게 하므로 정치불안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고 여겼음. 명, 청왕조 지배자만 그렇게 믿은 것이 아니다. 송왕조 지배층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송왕조는 기술혁신을 후원하고 한층 더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장려했지만,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명, 청왕조가 들어서자 경제활동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한층 강화되었고 해외무역은 아예 금지되면서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음. 명, 청왕조 시절에도 분명 시장과 무역이 존재했고 국내 경제활동에 대한 세금도 꽤 낮은 수준이었음. 하지만 혁신을 장려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정치안정을 위해 상업 및 산업적 번영의 기회를 희생한 꼴이었다. 경제를 절대주의적 정부가 틀어쥐고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자명하다.
- 학술적 기반이 마련되고 아서 루이스의 이론이 확산되던 50년대와 60년대 남아프리카를 방문한 경제개발학자의 눈에는 원주민 자치지구와 번성하는 근대유럽 경제지구사이의 대조가 이중경제이론과 딱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유럽인의 경제지구는 도시적이고 교육수준이 높았으며 근대기술을 사용했다. 원주민 자치지구는 가난한 시골인데다 낙후성을 면치 못했다. 노동생산성도 굉장히 부진했고 주민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시간을 초월한 아프리카 낙후성의 진수로 비쳤을 것이다. 이중경제는 자연발생적인 것도, 불가피한 필연도 아닌 유럽 식민지배 정책의 산물이었다. 원주민 자치지구가 가난하고 기술적으로 낙후되었으며, 주민의 교육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아프리카 경제성장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유럽인이 장악한 광산이나 토지에 값싸고 무지한 아프리카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부정책의 소산이다.
- 프랑스군이 유럽 대륙에 큰 고통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이들이 유럽의 형세를 획기적으로 뒤바뀌어놓은 것도 엄연한 사실.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봉건질서가 자취를 감추었고 길드가 무너졌으며 군주와 제후의 절대권력 역시 송두리째 흔들렸고 경제, 사회, 정치 등 모든 면에서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교회마저 맥을 못추게 되었음. 태생적 지위에 따라 인민을 불평등하게 대우했던 앙시앵레짐의 기반이 무너진 것. 이런 변화 덕분에 해당 지역에서 훗날 산업화가 뿌리내릴 수 있게 해준 포용적 경제제도가 수립되었음. 19세기 중엽에 이르자, 프랑스가 장악했던 지역은 거의 예외없이 산업화가 한창이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등 프랑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역이나, 폴란드와 에스파냐 등 프랑스의 점령기간이 일시적이거나 제한적이었던 지역은 여전히 제자리걸음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 19세기 중반만 해도 중국과 일본은 절대주의 정권 아래 허덕이는 가난한 나라였음. 중국의 절대주의 정권은 수세기 동안 변화를 두려워했음. 중국과 일본은 유사점이 많았다. 이전 중국 황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도쿠가와 막부 역시 17세기에 해외무역을 금지했고, 정치, 경제적인 변화를 달가와하지 않았음. 하지만 양국간에는 주목할만한 정치적 차이도 존재. 중국은 절대권력을 틀어쥔 황제가 다스리는 중앙집권적 관료제국이었음. 물론 황제 역시 권력이 도전을 받았던 게 사실이고, 그중 가장 신경쓰이는 위협이 반란이었다. 1850년에서 1864년까지 중국 남부 전체가 태평천국의 난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그 와중에 수백만명이 전쟁에 휘말리거나 굶어죽음. 하지만 중국 황제에 대한 견제가 제도화되지는 않음. 일본 정치제도의 구조는 이와 달랐다. 막부가 청황을 밀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도쿠가와 가문의 권력이 절대적이지도 않았고 사쓰마 등의 번은 독립을 유지했으며 심지어 나름대로 해외무역을 할 수도 있었음.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영국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중국과 일본의 군사적 취약성을 드러냈다는 것. 중국은 이미 1839년에서 1842년까지 계속된 아편전쟁 당시 영국 해군력에 무릎을 꿇었고, 일본 역시 1853년 페리제독이 이끄는 미국 전함이 도쿄만에 등장하자 중국과 다름없는 위협을 느낌.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쇼군을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으로 이어지는 개혁을 추진하려는 계획을 세운것도 경제적 낙후성이 군사적 낙후성을 초래한다는 현실인식 때문이었음. 사쓰마번의 지도자들은 경제성장이 제도적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기존 제도에 권력을 의존하는 쇼군은 개혁을 반대. 개혁을 추진하려면 쇼군을 무너뜨려야 했고, 실제로 결국 막부체제는 막을 내리게 됨. 중국에서도 상황이 비슷했지만 애초에 정치제도가 달랐기 때문에 황실을 전복하기가 한층 어려웠고, 1911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일이었음. 중국은 제도개혁대신 근대무기를 수입해 영국의 군사력에 맞서려 했음. 반면 일본은 독자적인 군수산업을 구축했음. 이처럼 초반의 제도적 차이때문에 양국은 19세기에 직면한 도전에서도 다르게 대응.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결정적 분기점을 맞아 일본과 중국은 서로 크게 엇갈린 길을 갖게 된 것. 제도를 개혁한 일본의 경제는 고속성장의 길로 들어섰지만, 중국은 제도적 변화를 꾀하는 세력이 그만큼 강하지 못해 착취적 제도가 대체로 고스란히 존속하다 1949년 공산혁명을 계기로 개악의 길을 걷게 됨
- 프랑스에서는 절대왕정이 무너지자 포용적제도를 향한 새로운 길이 열렸고, 그 덕분에 궁극적으로 산업화에 착수해 고속 경제성장을 누릴 수 있었음. 아닌 게 아니라 프랑스 혁명의 영향은 이보다 훨씬 컸다. 여러 주변국을 침략해 강제로 착취적 제도를 개혁하면서 프랑스의 제도를 수출한 것. 따라서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에서뿐 아니라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과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서도 산업화에 불을 지폈다. 동쪽으로 눈을 돌리면서 흑사병 이후나 별반 다를 게 없는 반응을 보였다. 이번에도 봉건질서가 무너지기는커녕 한층 더 강화된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오스만 제국은 경제적으로 한참 더 낙후되었지만 1차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도 절대왕정이 존속했음.
- 1670년대 신흥 상인계층과 경제적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휘그당이 명예혁명의 구심점이었으며, 1714년부터 1760년까지 의회를 지배한 것도 휘그당원이었다. 이들은 권력을 잡고나자 새로 얻은 지위를 이용해 자기배를 채우는 것은 물론 남의 권리까지 침탈하고 싶은 유혹에 빠졌음. 스튜어트왕조와 다를 게 없었지만 분명 절대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의 권력은 그만큼 견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의회내 경쟁세력, 특히 휘그에 반기를 들고 세워진 토리당, 그리고 의회를 강화하고 새로운 절대주의 체제 등장과 스튜어트 왕조의 복귀를 막기 위해 투쟁하며 제 손으로 도입한 제도가 발목을 잡은 것이다. 명예혁명을 통해 다원주의적 성격의 사회가 등장했다는 것은 또한, 자신들의 의견을 대변해줄 의원조차 선출하지 못한 이들을 비롯해 거의 온 국민이 힘을 얻었다는 뜻이었다. 블랙행위는 바로 휘그당이 지위를 남용하고 있다는 인식에 따른 평민의 반발이었던 것이다.
- 1701~04년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에서 승리하고 제커바이트 반란까지 성공리에 진압한 윌리엄 캐도건 장군의 사례는 휘그가 어떤 식으로 평민의 권리를 침해해 블랙행위를 부추겼는지 똑똑히 보여줌. 조지 1세는 1716년 캐도건에게 남작의 지위를 부여한 데 이어 1718년에는 백작으로 임명했음. 캐도건은 주요 국사를 논하는 법관귀족 섭정회의에서도 입김이 셌고 최고사령관 대행을 맡기도 했음. 그는 윈저에서 서쪽으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캐버셤에 약 1000에이커에 달하는 대규모 토지를 사들인 뒤 사슴사냥터를 조성. 하지만 이는 인근 주민의 권리를 침해해가며 마련한 부동산이었음. 주민은 터전을 잃었고, 가축에 풀을 뜯게 하고 토탄과 땔감을 모으는 전통적 권리마저 빼앗겼음. 캐도건을 향한 블랙의 분노가 활활 타오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음. 1722년 1월 1일에 이어 그해 7월에도 무기를 들고 말을 탄 블랙들이 사슴 사냥터를 습격했다.
- 명예혁명은 한 엘리트 집단이 다른 엘리트 집단을 전복시킨 것이 아니라 젠트리와 상인, 수공업자는 물론 휘그파와 토리당 파벌까지 가세한 광범위한 연합세력이 절대왕정에 반기를 들고 일으킨 혁명이었음. 이 혁명의 결과로 태동한 것이 바로 다원주의 정치제도였다. 법치주의 역시 이 과정의 부산물로 등장. 여럿이 권력을 분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법과 견제를 모두에게 적용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어느 일방이 과도한 권력을 거머쥐기 시작하고 이내 다원주의의 토대마저 뒤흔드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통치자에게도 한계와 제약이 따른다는 것이 법치주의의 근간이 되는 개념이다. 스튜어트 절대왕정에 반기를 들었던 광범위한 연합세력이 도출해낸 다원주의 논리에서도 이 개념은 빼놓을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군주가 신성한 권리를 갖지 않는다는 이념과 더불어 법치주의 원칙은 스튜어트 절대왕정에 항거하는 반대논리의 요체였다는 사실은 놀랄일이 아니다. 역사학자 톰슨은 스튜어트 왕조에 맞선 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배층은 자신들도 법의 지배에 따라야 하며 자신들의 정당성은 법제의 형평성과 보편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려 무진 애를 썼다. 또 지배층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의든 타의든 자신들이 뱉은 말에 발이 묶이는 형국이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규칙대로 권력올이를 하되 그 규칙을 깰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권력놀음의 판 자체를 뒤집는 꼴이기 때문이었다."
- 19세기말과 20세기초 강도귀족과 독점 트러스트의 발호는 시장이 있다고 해서 포용적 제도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줌. 시장이 소수기업에 지배당하면 터무니 없는 가격을 매기고 더 효율적인 경쟁자와 신기술의 진입을 막아버릴 수 있음. 시장을 그냥 내버려두면 포용적 색채를 잃고 갈수록 정치, 경제적으로 힘이 있는 개인과 기업의 손에 휘둘릴 수 있음. 포용적 경제제도가 뿌리내리려면 단순히 시장만 있으면 되는게 아니라 공평한 경쟁환경과 대다수 참여자에게 경제적 기회를 조성해주는 포용적 시장이 필요함. 엘리트층의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횡행하는 독점은 이에 정면으로 배치됨. 하지만 독점 트러스트에 대한 대응은 또한, 정치제도가 포용적이라면 포용적 시장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에 대항해 이를 상쇄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선순환이란 이런 것이다. 포용적 경제제도는 포용적 정치제도가 꽃필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주며, 포용적 정치제도는 포용적 경제제도에서 일탈하려는 움직임을 억제한다. 이런 선순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미국의 트러스트 단속노력은 앞서 멕시코의 사례와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멕시코에는 카를로스 슬림의 독점을 제한할 정치기구가 없는 반면, 미국에서는 지난 한 세기에 걸쳐 트러스트, 독점, 카르텔을 제한하고 시장의 포용성을 지키기 위해 셔먼법과 클레이턴법이 수시로 동원되어 왔음.
-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적 경제제도로 이어져 다수를 희생시키면서 소수의 배만 불려줌. 따라서 착취적 제도로 이득을 보는 자들은 사병과 용병을 키우고, 판사를 매수하고, 정권 유지를 위해 부정선거를 저지를 충분한 자원을 갖게 됨. 또한 체제를 수호해야 할 이유가 분명ㅎ짐. 따라서 착취적 경제제도는 착취적 정치제도를 기반으로 한 정권이 권력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경제적 부를 챙길 수 있기 때문. 또한 착취적 정치제도는 권력남용을 견제할 수단을 제공하지 않음. 권력이 꼭 부패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액턴 경의 주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에스파냐 정복자는 거리낌 없이 착취적 정치, 경제제도를 수립했다.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신세계를 찾은 이유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수립한 제도 대부분은 일시적 목적이었음. 가령 엔코미엔다는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임시권리였다. 이후 400년 넘게 지속될 제도를 어떻게 확립해야 할지 본격적인 계획을 세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이 수립한 제도는 상당부분 바뀌었지만 악순환의 결과인 제도의 착취적 성향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착취의 형태는 바뀌었을지언정 제도의 착취적 성향이나 엘리트층의 본질은 그대로였다. 과테말라에서 엔코미엔다, 레파르티미엔토, 교역 독점은 리브레타와 토지강탈로 이어졌음. 그 와중에 대다수의 마야 후손은 교육도 거의 받지 못하고, 아무런 권리도 누리지 못했으며 공공서비스는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피땀을 흘려야 했음. 중미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과테말라에서도 전형적 악순환의 고리가 계속되어 착취적 정치제도가 착취적 경제제도를 뒷받침했고, 이는 결국 착취적 정치제도를 한층 더 견고하게 만들었으며 동일한 엘리트층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 지주 엘리트층 권력과 농장위주 경영, 저임금, 낮은 교육 수준의 노동력에 기반을 둔 미국 남부의 착취적 제도는 20세기가 한참 지나서도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런 제도는 2차대전이후 흔들리기 시작했고, 시민권 운동이 구체제의 정치기반을 와해시키면서 완전히 무너졌다 할 수 있음. 50년대와 60년대 이런 제도가 사라지고나서야 남부가 북부에 빠르게 융합될 수 있었음. 미국 남부 역사는 더 질긴 악순환의 면모를 보여줌 콰테말라에서처럼 남부 농장 지주층은 권력을 내놓지 않았고, 권력유지에 유리하게 정치, 경제제도를 뜯어고쳤다. 하지만 과테말라와 다른 점은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는 사실. 노예제도가 철폐되고 흑인의 정치참여를 완전히 배제했던 구체제가 흔들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농장주 엘리트층이 광대한 토지를 틀어쥐고 서로 힘을 합치는 이상 새로운 제도를 구성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노예제도 대신 흑인차별법을 도입해 같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음. 그런 악순환의 고리는 링컨 등 많은 이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순했다. 악순환은 착취적 정치제도에서 비롯된다.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적 경제제도를 낳고, 이어 경제적 부와 권력으로 정치권력을 살 수 있으므로 착취적 경제제도 역시 착취적 정치제도를 뒷받침한다. 40에이커의 땅과 노새 한마리의 약속이 물건너가자 남부 농장주 엘리트층의 경제권력은 확고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또 당연하고도 안타깝게도 남부 흑인의 시련은 남부 경제발전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었다.
- 보츠와나, 중국, 미국 남부는 잉글랜드의 명예혁명, 프랑스 대혁명, 일본 명치유신과 마찬가지로 역사가 숙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생히 증명해준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면 착취적 제도는 포용적 제도로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저절로 되는 것도, 쉬운일도 아니다. 여러가지 요인이 한데 어우러져야 한다. 한 나라가 한층 더 포용적인 제도를 향해 한발짝 성큼 다가설 수 있으려면 특히 결정적 분기점이 마련되어야 하고, 개혁이나 다른 유리한 제도를 추구하는 광범위한 연합세력이 존재해야 하는때가 많다. 게다가 얼마간 행운도 뒤따라야 한다. 역사는 늘 우발적 방향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 최소한의 중앙집권화를 달성한 착취적 제도하에서는 그런대로 성장이 가능. 하지만 중요한 것은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은 두가지 이유에서 지속되지 못함
(1) 지속적 성장은 혁신이 있어야 하는데, 혁신은 반드시 창조적 파괴를 수반하기 때문. 창조적 파괴는 경제적인 면에서 옛것을 새로운 것으로 갈아치울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기성권력 기반을 뒤흔들기 마련. 착취적 제도를 장악한 엘리트층은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한 나머지 이를 거부하기 때문에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은 어쩔 수 없이 단기에 그치고 만다
(2) 착취적 제도를 장악한 이들이 사회전체를 희생시켜가며 자신들의 배를 채울 수 있으므로 착취적 제도하의 정치권력을 탐내는 이들이 많아져 수많은 집단과 개인이 권력투쟁을 벌이게 됨. 그 결과 착취적 제도하의 사회에는 정치불안을 초래할 만한 강력한 요인이 많아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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