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저자
이언 모리스 지음
출판사
글항아리 | 2013-05-27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오늘날 서양의 패권은 과연 필연인가, 우연인가? 2103년,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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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서양이 지배하는지를 두고 대략 1750년부터 1950년사이에 제시된 거의 모든 설명은 장기고착 테마의 변형이었음. 가장 인기있는 버전은 한마디로 유럽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문화적으로 더 우월해서라는 설명. 로마제국이 저물어가던 시절 이래로 대부분의 유럽인은 그들의 뿌리를 신약성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자신들을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기독교도라 여겼지만, 왜 서양이 이제서야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몇몇 18세기 유럽 지성은 기독교를 대체하는 계보를 그리기 시작. 그들은 2500년전 고대 그리스인이 이성과 창의성, 자유로 구성된 독특한 문화를 창조했다고 주장. 이것이 유럽을 여느지역과는 다른 더 훌륭한 궤도에 올려놓았다. 동양도 자기만의 사상적 전통이 있다는 것은 그들도 인정했지만 동양의 전통은 너무 뒤죽박죽이고 보수적이며 위계적이라 서양의 사고와 경쟁할 수 없었다. 많은 유럽인은 문화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정복하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 최근 몇몇 사람은 정화의 원정을 비롯한 다른 무수한 사실이 장기 모델에 끼워맞추기에는 너무 불편하다는 인상을 받기 시작. 이미 1905년 일본은 러시아 제국을 물리침으로써 동양의 나라들이 유럽과 전쟁터에서 경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 1942년 일본은 서양 세력을 태평양에서 거의 다 몰아낸 적이 있었고, 1945년 처참한 패배에서 되살아나 이번에는 방향을 틀어 경제대국이 되었따. 다들 알다시피 78년 이래로 중국도 유사한 경로를 따르고 있음. 06년 중국은 미국을 꺾고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탄소배출국이 되었고 심지어 08년 금융위기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중국경제는 서양의 정부들이 최고의 호황기에도 부러워할 만한 경제성장을 기록. 어쩌면 옛 질문을 내던지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 나을지도 모름.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가 아니라 서양이 지배하기는 하는가라고 말이다. 이에 대한 답변이 아니오라면 실제도 존재하지도 않는 서양의 지배에 대해 고래의 설명들을 추구하는 장기고착이론은 다소 무의미해 보임
- 1987년 유전학자 레베카 칸이 이끄는 연구팀은 세계 곳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연구한 책을 발표. 그들은 연구 데이터 안에서 약 150가지 유형을 구분했고 통계수치를 어떻게 배열하더라도 세가지 핵심결과가 지속적으로 산출됨을 확인.
(1) 다른 어느 곳보다 아프리카에서 유전적 다양성이 가장 크다
(2) 나머지 세계의 유전적 다양성은 아프리카 내 다양성의 일부에 불과하다
(3) 가장 멀리 거슬러올라가는 미토콘드리아 DNA계보는 모두 아프리카에서 기원한다.
결론은 불가피하다. 현재 우리 인류가 공유하는 가장 가까운 여자조상은 틀림없이 아프리카에 살았다는 것이다. 그녀에게는 금세 아프리카 이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칸과 동료들이 살펴보았듯이 그녀는 한 운좋은 어머니였다. 미토콘드리아 DNA에서 표준변이율에 따라 계산한 결과 연구팀은 이브가 20만년 전에 살았다고 결론 내렸다. 90년대 내내 고인류학자들은 칸의 연구팀이 내린 결론을 놓고 논쟁을 했음. 어떤 이는 그들의 방법에 의문을 제기했고, 또 다른 이는 그들의 증거를 의심했지만, 표본이나 수치를 아무리 재배열하더라도 결과는 매번 똑같았음. 후속 연구들르 결론에서 기껏 달라진 것은 이브가 살았던 시기가 15만년 전으로 약간 가까워졌다는 것. 기술이 발전해 유전학자들이 Y염색체에서 세포핵 DNA를 검사할 수 있게 된 90년대 말이 되자 논쟁에 쐐기를 박는 차원에서 아프리카 이브는 동반자를 얻게 됨. 미토콘드리아 DNA처럼 Y염색체 DNA도 아프리카에서 다양성이 가장 크고 계보도 가장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아프리카 아담이 6만년전과 9만년전 사이에 살았으며 비아프리카계 변형의 기원은 5만년 전이라고 지적. 2010년에 유전학자들은 한가지 세부사항을 추가. 호모사피엔스는 아프리카를 떠나자마자 네안데르탈인과 많이 성교했고, 그다음 이 유전자 조합을 나머지 지역으로 전파했다는 것.
- 지구온난화의 가장 큰 수혜자는 구세계 대략 북위 20도~35도까지, 신세계 남위 15도~북위 20도까지에 걸쳐 있는 행운의 위도대에서 살았음. 빙하기에 이 기후대에 밀집해있던 동식물은 기원전 1만 2700년 이후 급격히 증가했고 채집인들이 죽으로 끓여 먹거나 빻아서 빵을 만들 수 있게 종자가 크게 진화한 야생 곡물(서남아시아의 보리와 밀, 호밀, 그리고 동아시아의 쌀과 기장)이 아시아 양단에서 특히 증가했던 것 같다. 그들은 곡식이 여물때까지 기다려서 밀짚이나 보릿단을 흔든 다음 떨어지는 이삭을 줍기만 하면 되었다. 오늘날 서남아시아산 야생 곡물을 이용한 실험은 단 1만 제곡비터 면적의 땅에서 식용가능한 낟알을 1톤이나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 수확에 소비되는 에너지 1칼로리당 50칼로리의 식량을 얻을 수 있었음. 채집활동의 황금시대였다.
- 영구적인 마을은 설치류의 생존규칙을 바꾸었다. 이제 향기롭고 맛 좋은 쓰레기 더미를 언제든 구할 수 있게 되었고 인간의 바로 눈앞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작고 교활한 생쥐들은 사람의 주의를 끄는 크고 공격적인 놈들보다 이 새로운 환경에서 더 잘 생존. 몇 십세대 만에 설치류는 인간과 동거할 수 있도록 사실상 유전적으로 진화. 인간과 같이 살아가는 쥐새끼들은 호모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대체했듯이 커다란 야생 조상들을 완전히 대체. 집 안의 설치류는 인간이 저장해 놓은 식량과 물에 배설물을 남겨 질병의 전파를 가속화함으로써 끝없는 쓰레기 선물에 보답했음. 인간은 바로 그 때문에 쥐를 혐오. 우리 가운데 일부는 심지어 생쥐를 무서워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청소동물은 늑대였고, 늑대 역시 쓰레기의 유혹을 거부하기 힘들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무시무시한 야성의 부름 타입 괴물들이 주변에 얼쩡거릴 때의 문제점을 잘 알기 때문에 설치류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더 작고 덜 위협적인 동물들이 인간과 더불어 가장 잘 지냈다. 오랫동안 고고학자들은 순한 늑대새끼들 애완용으로 키우고 그것들을 다시 교배해 인간에게 사랑받는 만큼 인간을 따르는 순한 강아지를 번식시키는 식으로 인간이 적극적으로 개를 길들여 왔다고 여겨왔으나, 근래의 연구는 인간의 의식적인 개입보다는 다시금 자연선택이 작용했다는 가설을 지지함. 그러나 어떤 방식이든 늑대와 쓰레기,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은 인간이 남긴 부스러기를 두고 자신들과 경쟁할 뿐 아니라 질병도 퍼트리는 설치류를 처치할 능력이 있고 심지어 진짜 늑대들과도 싸울 수 있는 개라는 동물을 탄생시켰고, 개는 인간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됨.
- 농경은 분명히 지엽적 장애(과도한 방목 탓에 요르단 강은 기원전 6500년과 기원전 6000년 사이에 사막으로 변한 듯하다)에 봉착했지만 새로운 영거 드라이아스기 같은 기후적 재난만 제외한다면 세상의 모든 자유의지도 농경생활양식이 확산되어 농경에 적합한 마지막 남은 구석자리까지 모두 차지하는 것을 저지할 수 없었음. 영리한 호모사피엔스와 안정적 온난습윤한 기후, 거기에 개량종으로 진화할 수 있는 동식물의 결합으로 인해 이런 과정은 세상에서 가장 불가피한 일이 됨. 기원전 7000년이 되자 유라시아 대륙 서단의 역동적이고 팽창하는 농경사회들은 지구상의 그 무엇과도 같지 않았고, 따라서 이 시점에서 서양과 나머지 세계를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서양이 나머지 세계와 다르긴 했지만 그 차이는 영구적이지 않았고 다음 몇천년에 걸쳐 사람들은 행운의 위도대에 위치한 예닐곱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농경을 발명하기 시작.
- 서양의 정의를 둘러싸고 학자들이 옥신각신한다고 해서 분석적 범주로서 서양을 거부할 필요는 없음. 서양은 단순히 지리학적 표현으로서, 유라시아 서단에 위치한 개량화 과정의 핵심부인 측면 구릉지대에서 유래한 사회들을 가리킴. 농경이 측면구릉지대를 예외적인 곳으로 만드는 기원전 11000년경 이전에, 다른 곳과 구별되는 지역으로서 서양을 언급하는 것은 의미가 없음. 그 개념은 다른 농경 핵심부가 출현하기 시작하는 기원전 8000년 이후에야 중요한 분석적 도구가 되기 시작함. 기원전 4000년이 되자 서양은 측면구릉지대에서 팽창하여 유럽 대부분을 포함했고 최근 500년간 서양의 식민주의자들은 그 범위를 아메리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시베리아로까지 확장. 당연히 동양은 기원전 7500년경에 중국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개량화의 동단 핵심부에서 유래한 사회들을 의미함. 우리는 두 지역과 비길만한 신세계와 남아시아, 뉴기지, 아프리카 전통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지 묻는 것은 실제로는 중국이나 멕시코, 인더스강 유역이나 사하라 동부, 페루나 뉴기니에서 유래한 사회가 아니라 왜 측면구릉지대에서 유래한 사회들이 이 행성을 지배하게 되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 우리는 측면구릉지대 주민들이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우월해서 농경을 발명했다고 가정해서는 안됨. 그들이 사는 곳에는 개량화가 가능한 (그리고 더 용이한) 동식물이 더 많았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들이 제일먼저 그것들을 길들였음. 중국에서 동식물의 군집여건은 그보다는 덜 유리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에게 유리한 편이었음. 중국에서 개량화는 측면구릉지대보다 아마 2000년 뒤에 시작된 듯함. 길들일 만한 것이라고는 소와 양밖에 없었던 사하라의 유목민은 500년을 더 기다려야 했고, 사막에서는 작물을 재배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결코 농부가 되지 않았음. 뉴기니의 고지대인은 사하라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문제에 직면. 식물종이 협소하고 가축으로 길들일 만한 큰 동물은 전혀 없었던 것. 그들은 사하라 사람들보다 2000년을 더 기다려야 했고 결코 유목민이 되지 않았다. 사하라와 뉴기니에서 농경 핵심부는 측면구릉지대와 중국, 인더스강 유역, 오악사카와 페루에서와는 달리 도시와 문자 문명권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들이 열등해서가 아니라 천연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 서양에서 농경이 확산될 때처럼 동양에서도 약간의 장애물이 나타났음. 식물석은 기원전 4400년이 되면 벼가, 기원전 3600년이 되면 기장이 한국에 알려졌으며 일본에는 기원전 2600년에 기장이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다음 2000년간 한국인과 일본인은 이 신기한 먹을거리를 대체로 무시. 북유럽인처럼 해안에 거주한 한국인과 일본인에게는 거대한 패총으로 둥그렇게 둘러싸인 넓고 영구적인 마을을 지탱해줄 수산자원이 풍부했음. 이 풍요로운 채집인은 정교한 문화를 발전시켰지만 농경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모양이다. 기원전 5200년과 기원전 4200년 사이 1000년 동안 발트해의 수렵채집인들처럼 그들도 자신들의 땅을 빼앗으려 하는 식민지 이주자들을 쫓아낼 만큼 수가 많았지만 (그만큼 결연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수가 아주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굶주림에 떠밀려 먹고 살기 위해 농경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음.
- 동양에서 정교한 무덤이 일찍이 눈에 띄는 것과 그보다 더 일찍이 서양에서 정교한 성소가 두드러지게 출현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러한 발전은 사실, 서로를 비추는 거울상인 것 같다. 무덤과 성소는 모두 농경이 발전하면서 사자로부터의 상속이 경제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던 시기에 조상에 대한 집착이 커진 현상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 우리는 그 이유를 아마도 결코 알 수 없겠지만 아무튼 서양인과 동양인은 조상에게 감사하고 그들과 접촉하는 다른 방식을 들고 나왔음. 일부 서양인은 분명히 친지의 해골을 여기저기로 돌리고 건물을 소머리와 기둥으로 채우고 그 안에 인간을 제물로 바치면 효험이 있을 것이라 기대했음. 동양인은 일반적으로 친지의 무덤에 옥을 깎은 동물 조각상을 같이 묻고 무덤을 숭배하며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의 머리를 베고 그들을 무덤속에 같이 던져넣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했음. 사람들마다 처방은 다르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 마오쩌둥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모든 공산주의자는 정치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1840년대 이전에 어느 사회도 군사력을 전 지구상에 행사할 수는 없었고, 누가 세상을 지배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무의미했음. 그러나 1840년대 이후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된 것같다.
- 서양의 핵심부는 기원전 11000년부터 약 서기 1400년까지 지리적으로 매우 안정적이었는데, 이탈리아를 포함한 로마제국이 핵심부를 서쪽으로 끌어당긴 기원전 250년부터 서기 250년까지 500년간을 제외하고 지중해 동쪽 끝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음. 그때를 제외하면 서양의 핵심부는 오늘날의 이라크와 이집트, 그리스에 의해 형성되는 삼각형 안에서 항상 자리잡고 있었음. 1400년 이후로 서양의 핵심부는 끊임없이 북쪽과 서쪽으로 이동해서 처음에는 북부 이탈리아로, 그 다음에는 에스파냐와 프랑스로, 그리고 범위를 넓혀 영국과 벨기에, 네덜란드와 독일을 포괄하게 되었음. 1900년이 되면 대서양 양안에 걸쳐 있게 되고 2000년이 되면 북아메리카에 확고히 자리잡음. 동양에서는 핵심부는 1850년까지 최초의 황허강과 양쯔강 지대에 줄곧 머물렀음. 물론 핵심부의 무게중심은 기원전 4000년 이후 북쪽에 있는 황허강의 중앙평원을 향해 이동하다가 서기 500년부터 남쪽 양쯔강 유역으로 돌아오고, 다시 1400년이 지나면서 서서히 북쪽으로 이동하게 됨. 그후 동양의 핵심부는 팽창해서 1900년이 되면 일본을, 2000년이 되면 중국 동남부를 포함하게 됨
- 4000년전 신전과 궁전은 가장 좋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중앙집권적 관료제는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눠주는 대신 각자 필요한 것을 모두 재배하려고 했음. 관리들은 토지를 꽉 틀어쥐고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재배할 작물을 지시. 좋은 경작지를 보유한 마을은 포도나무를 재배하고 다른 마을은 야금업만을 전문적으로 할 수도 있었음. 관료들은 필요한 만큼 우선 단물을 빼먹고 일부는 위급상황을 대비해 비축한 뒤 나머지는 주민들에게 배급해주면서 생산물을 재분배할 수 있었음. 이런 과정이 기원전 3500년 우르크에서 시작되었고 1000년이 지나자 당연한 일이 됨. 국왕들은 이익이 되는 선물을 주고 받음. 금과 곡물이 풍부한 이집트의 파라오는 이런 물품을 레바논 도시의 하급 통치자에게 주고 답례로 향기로운 삼나무를 선물받음. 이집트에서는 좋은 목재가 귀했기 때문. 적절한 선물을 주지 않는 것은 어마어마한 실례였음. 선물교환은 경제만이 아니라 지위불안과 심리적 요인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재화와 사람, 사상을 매우 효과적으로 이동시켰음. 이러한 교환 사슬의 양끝에 위치한 국왕과 중개상인은 부유해졌음. 오늘날 우리는 왕이나 독재자, 정치관료들이 사람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는 명령경제는 비효율적이라고 간주하지만 대부분의 초기문명은 명령경제에 의존했음. 어쩌면 시장을 돌아가게 하는 방법과 신뢰가 부족한 세계에서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임. 그러나 명령경제가 유일한 선택은 결코 아니며 국왕과 사제들의 사업과 더불어 신분이 미천한 상인들의 독자적 교역도 항시 번창했음. 이웃끼리는 빵과 치즈를 교환하거나 아이를 봐주는 대가로 변소를 파주는 식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졌음. 도시와 시골주민들은 장에서 거래했음. 땜장이들은 솥과 냄비를 당나귀에 싣고 장을 돌았음. 사막이나 산과 만나면서 들판이 점차 사라지는 왕국의 가장자리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빵과 청동무기를 양치기나 몰이군의 우유와 치즈, 양털, 가축과 교환했음.
- 기원전 8세기 말 서양 핵심부 전역에서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곤경에 대한 해법으로 중앙집권화를 생각해냄. 오늘날의 수단땅에서 온 누비아인은 티블라트 필레세르가 아시리아의 왕좌를 차지하기도 전에 이집트를 다시 통일했고, 다음 30년에 걸쳐 티글라트 필레세르라면 알아봤을 개혁을 실행. 기원전 710년이 되자 자그마한 유대왕국의 히스기야 왕도 같은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것은 단 한명의 천재가 역사를 바꾼다기 보다는 절박한 사람들이 떠오른 발상은 모조리 시도해보는 가운데 결국 최상의 해법이 성공하는 식이었다. 중앙집권화로 가든지 목숨을 잃든지 둘 중 하나였다.
- 제2차 대전 말 자기 시대의 도적적 위기를 해명하려고 애쓰던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는 기원전 500년 무렵의 시대를 축의 시대라 불렀는데 역사가 전환하는 축을 형성한 시기라는 의미. 야스퍼스는 축의 시대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이 출현했다고 거창하게 선언. 축의 시대에 쓰인 저작들(동양의 유교와 도교경전, 남아시아 불교와 자이나교 경전, 서양의 그리스철학 문헌과 구약성서)은 고전, 즉 지금까지 무수한 사람들의 삶의 의미를 규정해 시대를 초월한 걸작이 되었음. 이것은 글을 전혀 남기지 않은 부처나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위업이었음. 때로는 훨씬 후대 사람인 그들의 후계자들은 그들의 말을 기록하거나 윤색하거나 완전히 지어내기도 했음. 창시자들이 진짜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 흔히 아무도 알지 못했으며 격렬하게 반목한 그들의 후계자들은 협의회를 열고 파문을 주고받으며 상대방을 더 먼저 암흑의 세계로 내동댕이쳤음. 지금까지 현대 문헌학의 위대한 승리는, 이 후게자들이 갈라서고 싸우고 저주하고 서로 박해하는 틈틈이 성전을 그렇게나 여러차례 쓰고 또 고쳐썼기 때문에 교리의 원래 의미를 찾아 문헌을 낱낱이 걸러내는 작업이 사실상 불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축의 문헌은 또한 매우 각양각색이다. 어떤 것은 모호한 경구를 모은 책이다. 어떤 것은 재치 넘치는 대화편이다. 또 어떤 것은 시가이거나 역사서, 격렬한 논쟁서다. 어떤 문헌은 이 모든 장르를 모조리 뒤섞었다. 여기에다가 마지막 시험대로, 이 고전들은 그들의 궁극적 주제인 초월적 영역을 규정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니르바나(문자 그대로는 꺼짐을 의미. 이승의 모든 정념이 촛불을 불어 끄듯 완전히 사라진 마음 상태를 가리킴)는 설명될 수 없다고 부처는 말한다. 설명하려는 시도조차도 당치 않다. 공자에게 인이란 (영어로 흔히 humaneness로 번역됨) 마찬가지로 언어를 초월한다. 우러러볼수록 높아지고 헤아리려할수록 그 뜻을 헤아리기 힘들다. 내 앞에 인이 있는가 하면 갑자기 내 뒤에 있으며 ... 인에 대해서 말할 때 누가 주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칼론, 즉 선을 설명해달라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설명을 단념해버렸다. 나는 선을 설명할 수 없다. 만약 설명하려고 하면 오히려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우화를 들려주는 것뿐이다. 선이란 우리가 실제로 착각한느 그림자를 던지는 불꽃과 같다고, 예수도 똑같이 천국에 대해 빗대어 말했고 똑같이 우화를 즐겼다.
-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은 스승이 생각하는 좋은 사회에 대한 두가지 버전을 내놓았는데 '국가'는 어느 유학자한테도 좋을만큼 이상적이고 '법률'은 상앙을 흐뭇하게 할 만큼 권위주의적임.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적인 '윤리학'부터 냉정하고 분석적인 '정치학'까지 유사한 영역을 다룸. 파르메니데스와 엠페도클레스 같은 공상가들이 신비주의 측면에서 도가 사상가들에 필적한 것처럼 소피스트로 알려진 기원전 5세기 철학자 가운데 일부는 상대주의 측면에서 도가 사상가들과 견줄만 했음. 그리고 프로타고라스는 묵자처럼 평민의 열렬한 옹호자였음. 오늘날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그리스가 민주정을 발명한 사실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가 합리적이고 역동적인 독특한 문화를 창조한 반면 고대 중국은 반계몽적이고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장기고착이론을 언급했다. 이 이론 역시 틀렸다. 이런 생각은 동양과 서양, 남아시아 사상의 특정 요소를 과도하게 부각시키고 내부적 다양성을 무시함. 동양의 사상도 얼마든지 서양의 사상만큼 합리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현실적이고 냉소적일 수 있음. 서양의 사상도 동양의 사상만큼 신비주의적이며 권위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이며 반계몽주의적일 수 있음. 축의 사상의 진정한 통일성은 다양성의 통일성에 있음 동양과 서양, 남아시아 사상의 그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관념과 논의, 대립의 폭은 각 지역마다 놀랄만큼 유사함. 축의 시대에 사상가들은 그들이 황허강 유역에 있든 갠지즈 평원에 있든 동지중해의 도시에 있든, 동일한 지형을 논쟁터전으로 삼았다.
- 축의 사상이 국가 재구조화의 원인이라기 보다 결과라는 사실에 증거가 더 필요하다면 동양 핵심부의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호전적 국가 진나라를 보면 된다. 일종의 외교책략 실용서인 전국책의 익명 저자는 "진나라는 야만인들인 서융, 북적과 같은 풍습을 가졌다."고 말함. "진나라는 호랑이나 늑대의 심장을 가졌다. 탐욕스럽고 이익을 좇고 믿을 수 없으며 예나 의무, 덕행을 모른다." 그러나 유학자들이 숭상하는 모든 것의 정반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진나라는 동양 핵심부의 변두리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기원전 3세기에 핵심부 전역을 정복. 그와 다소 유사한 일이 유라시아 반대편 끝에서도 일어났는데, 서양 핵심부의 가장자리 출신인 로마인이(이들도 역시 수시로 늑대에 비유됨) 서양 핵심부를 전복하고 그들을 야만인이라 부른 철학자들을 노예로 삼음. 기원전 167년 로마에 인질로 끌려간 그리스의 교양인 폴리비오스는 이 모든 일을 동향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42권짜리 '역사'를 썼다. 그는 "어떻게 고작 53년만(기원전 220~167)에 로마인이 사람이 사는 세계 거의 전부"를 지배하게 되었는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이 일을 알기를 원치 않을만큼 편협하거나 게으른 사람이 있을까"라고 썼다.
- 기원전 480년 그리스를 침공할 당시 페르시아는 아마도 20만명의 병력을 동원했던 것 같지만 그 군사를 잃은 다음 국고를 다시 채우기까지는 수십년이 걸렸음. 로마는 그러한 제약에 직면하지 않았음. 한 세기 동안의 전쟁은 로마에 이탈리아의 모든 인력을 제공했고 기원전 264년 원로원은 서부 지중해를 장악하기 위해 카르타고와의 거대한 투쟁에 돌입. 카르타고는 로마의 첫 함대를 폭풍우가 부는 곳으로 유인해 (수만명의 선원과 함께) 바다속에 수장시킴. 그러자 로마는 더 큰 함대를 건조. 이것도 2년 뒤 또다른 폭풍우에 바다 속에 가라앉아서 로마는 세번째 대함대를 파견했지만 그것도 역시 잃었다. 네번째 함대가 마침내 기원전 241년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카르타고가 막대한 손실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 카르타고는 회복하는 데 23년이 걸렸고, 그 결과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코끼리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를 배후에서 쳤듬. 기원전 218년부터 216년까지 한니발은 10만의 로마병사를 죽이거나 사로잡았지만 로마는 그저 더 많은 군사를 일으켜 소모전으로 그를 서서히 약화시켰음. 그리고 진나라처럼 로마는 잔인성의 의미를 재정의.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관습은 그들이 마주친 모든 생명체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전멸시켰고, .... 따라서 로마인에게 함락된 병사를 죽이거나 사로잡았지만 로마는 그저 더 많은 군사를 일으켜 소모전으로 그를 서서히 약화시킴. 그리고 진나라처럼 로마는 잔인성의 의미를 재정의.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관습은 그들이 마주친 모든 생명체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전멸시켰고, .... 따라서 로마인에게 함락된 도시에서는 흔히 사람의 시체만이 아니라 토막난 개와 사지가 잘린 다른 동물의 사체도 볼 수 있다"고 적음. 결국 카르타고는 기원전 201년 항복했다. 원로원에는 전쟁이 협상보다 더 나아보였다. 딱 여름 한철을 쉰 뒤로 로마는 동부 지중해의 알렉산드로스 후계왕국들에 눈길을 돌렸고, 기원전 167년까지 이들을 모두 격파. 이후 한 세대에 걸친 게릴라들과의 험난한 전쟁은 로마군단을 에스파냐와 북아프리카, 북부 이탈리아로 이끌었음. 로마는 서양의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 기원전 200년이 되자 동양과 서양은 빙하기 이후 그 어느때보다 공통점이 많아짐. 둘다 수백만의 신민을 거느린 단일한 대제국의 지배를 받음. 두 지역 모두에서 축의 사상으로 교육받은 교양있고 세련된 지배층이 고도로 생산적인 농민들과 정교한 교역망을 이용한 물자공급에 의존해 대도시에서 생활했음. 그리고 양 핵심부에서 사회발전지수는 기원전 1000년보다 50%나 높았다. 광활한 중앙아시아와 인도양으로 분리된 동양과 서양은 사실상 서로 고립된 채 개별적이지만, 유사한 역사를 경험했고 빙하기말에 길들일 수 있는 동식물이 많이 분포했다는 지리적 이점에서 기인한 사회발전에서의 우위를 서양이 근소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만 주로 차이가 났음. 그러나 바로 지리가 사회발전 경로를 결정하는 한편, 사회발전 또한 지리의 의미를 변화시킴. 핵심부의 팽창은 동양과 서양을 섞어서 하나의 지구적인 이야기로 엮어내면서 양자의 거리를 점차 좁혀가고 있었다.
- 제국이 해체되는 방식은 무수히 많지만 (패전, 불만이 쌓인 총독, 통제할 수 없는 대귀족, 절망적인 농민, 무능력한 관료) 제국이 결속력을 유지하는 방법은 하나, 타협뿐이다. 한나라와 로마의 통치자들은 여기에 확실한 재능을 보여주었음. 고조가 기원전 202년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제국의 3분의 2를 반독립적인 왕국으로 지배하도록 다른 군웅 열명과 거래했기 때문. 하지만 너무 급히 움직여 그들을 위협하면, 너무 느리게 움직여서 왕을 너무 강하게 놔둘 때와 마찬가지로 제국이 피해야만 하는 바로 그 내전을 촉발할 수도 있었음. 그러나 한나라의 황제들은 딱 들어맞는 속도로 움직였고, 기원전 100년까지 의외로 반란을 거의 겪지 않으면서 이 왕국들을 해체했다. 한나라의 황제들은 진시황만킄 과대망상적이지는 않았지만 물론 그들도 그런 쪽으로 능력을 뽐낼 기회가 있었음. 한 예로, 한 경제는 기원전 141년 자신만의 병마용과 함께 묻혔음. 비록 크기는 진시황릉의 3분의 1이었지만, 숫자는 6배 많았음. 그러나 위대한 정복자 한 무제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한나라 황제들은 비록 속세와 초자연적 세계 사이의 중개자로서 상나라와 주나라의 왕이 맡았던 역할은 여전히 고수했지만 불멸이나 신성을 주장하는 것은 꺼렸음. 그들은 이러한 노선을 매우 신중하게 조정했음. 권문세가와 잘 지내려면 (비록 귀족들의 부와 왕실의 성공을 결부하는 실용적 조치도 도움이 되었지만) 왕실의 신성에서 후퇴할 필요가 있었음. 유학자들을 회유하기 위해서는 이상화된 유교모델에 따라 위계질서가 확립된 우주안에 황제의 지위를 끼워맞출 줄 알아야 했음. 그와 더불어 또 다른 실용적 조치로 귀족가문 사이의 연줄이 아니라 유교경전에 대한 지식을 관직 등용요건으로 삼음. 방대한 시골지역에서도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와는 또 다른 것이 요구되었는데, 조상과 신을 연결하는 다리로서 축의 시대 이전 군주의 지위 일부와 군역 축소, 잔인한 법률완화, 시의적절한 세금감면과 같은 좀더 현실 생활에 밀착된 조치를 결합하는 것이었음. 타협은 평화와 통합을 낳았고 평화와 통합은 동양 핵심부를 점차 단일한 실체로 엮어냈음. 동양 핵심부의 통치자들은 그곳을 중국이나 천하라고 불렀고, 이 시점에서 동양 핵심부를 연대 서양인이 진나라에 대한 잘못된 발음으로 차이나라 부르는 단일한 실체로 받아들여지기 시작. 거대한 문화적 차이들은 천하에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동양핵심부는 중국이 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도 유사한 타협안을 추구. 기원전 30년에 내전이 종결되었을 때 승리한 아우구스투스는 징병된 이들을 제대시키고 변경에 직업군인을 배치했음. 한나라의 황제들처럼 그도 군대가 그의 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중국의 통치자들이 군대를 죄수와 이방인으로 채우면서 어떤 의미에서 주류 사회 밖으로 밀어낸 데 반해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친구보다 적을 더 가까이 두기로 했음. 군대를 사회의 중심제도로 만들었지만, 그들의 직접벅 통제 아래 있는 제도였음. 전쟁은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되었고 다른 이들은 모두 평화의 기술로 주의를 돌림. 중국처럼 로마도 속국의 왕들을 흡수했고 귀족들의 번영과 왕국의 번영을 결부시킴. 황제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면서 귀족을 상대할 때는 동류가은데 으뜸일 뿐인 것처럼, 군대를 상대할때는 총사령관처럼, 그들의 통치자가 신령스럽기를 기대하는 제국의 각 지역을 상대할 때는 신처럼 행세. 그들은 '하루 동안 신'이라는 타협을 '죽으면 신'이라는 전략으로 대체. 이 이론에 따르면 황제는 살아있을 때는 그저 뛰어난 인물에 불과했다가 죽으면 신성의 품에 안기게 되어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같은 사람들은 그 논리가 우스꽝스럽다고 여겼음. 쓰러진 그는 죽어가면서 궁정인들에게 "내가 신이 되려나 보군"이라는 농담을 던졌다.
- 두가지 다소 유사한 힘이 동양과 서양의 경제성장 뒤에 버티고 있었는데, 하나는 경제를 위에서 견인하는 힘이고, 또 하나는 밑에서 경제를 추진하는 힘이다. 견인요인은 국가의 성장이었음. 로마와 한라아의 정복자들은 방대한 지역에서 세금을 거둬들였고 세수 대부분을 변경을 따라 배치한 군대(로마 35만명, 중국은 적어도 20만명의 군인이 있었음)와 거대한 수도(로마 100만명, 장안 50만명)에 사용. 양쪽 모두 식량과 상품, 돈을 부유하고 세금을 내는 지방에서 굶주리고 세수를 집어삼키는 인구가 집중된 지역으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었음. 로마 교외의 유적지 몬테테스타초는 서양에서 이러한 견인요인의 규모를 예시함. 깨진 질그릇 조각이 46미터 높이로 쌓인 이 잡초 무성한 둔덕은 진시황의 봉분보다 덜 극적이지만 골수 고고학자들에게는 이집트 선망에 대한 이탈리아의 답변이다. 2500만개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저장단지들이 3세기에 걸쳐 이곳에 버려짐. 대부분은 에스파냐 남부에서 로마로 올리브기름(750만리터 분량)을 운송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로마의 도시민은 올리브기름을 음식에 넣거나 몸을 씻고 등잔을 밝힐 때 사용했음. 몬테테스타초위에 올라서면 각종 욕구에 굶주린 인간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됨. 이것은 로마의 쓰레기로 만들어진 인공둔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두번째 힘, 경제를 위로 추진하는 힘은 기후변화라는 익숙한 힘이었다. 기원전 800년 이후 지구냉각화는 저가 국가를 대혼돈 속에 내던졌고 수세기에 걸친 팽창을 촉발. 기원전 200년이 되자 계속되는 궤도변화는 기후학자들이 로마온난기라고 부르는 시대를 알렸음. 이것은 겨울바람을 약화시켰지만 (지중해의 농부와 중국의 대하 유역의 농부에게는 안 좋은 소식이었음) 부분적으로는 앞선 지구냉각화에 대한 대응으로 생성된 고가제국은 이제 동양과 서양사회에 기후변화에서 살아남을 뿐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는 끈질긴 생명력도 안겨주었음. 힘든 시절은 다양화와 혁신을 추구하는 유인을 증가시켰음. 사람들은 물레방아와 석탄을 갖고 실험을 했고 상품을 이동시킴으로써 지역적 이점을 활용. 고가국가들은 주민들이 부유해질수록 세금도 더 많이 낼 수 있다는 매우 합리적인 가정아래 이런 활동을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도로와 항구를 제공했고 군대와 법전은 수익의 안전성을 보장했음.
- 로마와 중국의 문헌은 2세기에 역병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인도의 문헌과 극명하게 대조된. 역병에 대한 언급 부재는 그저 수백만명의 가난한 사람들의 죽음처럼 일상적 사건에 대한 교양계급의 관심부재를 반영할지도 모르지만, 역병이 실제로 인도를 비켜갔을 가능서잉 더 크며, 이는 구세계 교환이 인도양 교역로보다는 주로 비단길과 초원길을 따라 퍼졌다는 것을 뜻함. 그것은 확실히 전염병이 중국과 로마에서 시작된 정황, 즉 변경지대 병영에서 발생한 정황과도 일치. 미생물 교환의 메커니즘이 어떤 식이었든 끔찍한 전염병은 180년대 이후 계속해서 세대마다 재발했음. 서양에서 최악의 시기는 한동안 로마시에서 매일 5000명이 죽어나간 251~266년이다. 동양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는 310년과 322년 사이인데 이번에도 서북부에서 시작되었고 서북부 주민 거의 모두가 사망. 살아남은 의사의 묘사를 보면 이 역병은 홍역이나 천연두처럼 보임
- 중국과 달리 로마는 2세기 변경전쟁에서 승리. 만약 졌다면 로마도 한나라처름 180년대에 위기에 빠졌을 것. 그렇기는 해도 아우렐리우스의 승리는 변화의 결과가 아니라 변화의 속도에만 영향을 미쳤을 뿐이며, 결국 군대만으로는 붕괴를 저지할 수 없다는 점을 시사. 전염병의 무지막지한 사망률은 경제를 대혼란에 빠뜨림. 식량가격과 농업임금이 급등했고 덕분에 전염병은 살아남은 농부들, 생산성이 떨어지는 경지를 버리고 옥토에 집중할 수 있는 농부들에게는 이득을 가져옴. 그러나 농경이 축소되고 세금과 임대수입이 감소하자 더 큰 차원에서 경제지표는 폭락하기 시작. 지중해의 난파선수는 200년 이후 급격히 감소했으며 얼음코어와 호수 퇴적물, 늪지의 오염도도 250년을 기점으로 같은 추세를 따랐음. 그때가 되자 모두가 쪼들리고 있었음. 200년 이후 거주지에서 소와 돼지, 양의 뼈는 점점 크기가 작아지고 드물어지며 생활 수준의 하락을 암시했고, 220년대가 되면 부유한 도시 거주자들도 웅장한 건물과 비석을 갈수록 세우지 않게 되었다.
- 질병과 이주, 전쟁은 이전 제국을 통일된 전체로 묶었던 관리자와 상인, 돈의 연결망을 무너뜨림. 4세기 중국 북부와 5세기 서유럽의 새로운 왕은 그들이 차지한 웅장한 연회장에서 장발의 전사부족장들과 잔치를 즐기며 확고하게 저가 국가를 유지했다. 이들은 정복한 농민에게서 기꺼이 세금을 받았지만 봉급을 주어야 할 군대가 없으므로 이러한 세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미 부유했다. 그들은 확실이 힘이 셌다. 관료제를 운영하고 다루기 힘든 부하들로부터 정기적으로 세금을 뜯어내는 것은 가치가 있기보다도 수고스러워 보였다. 중국 북부와 서로마 제국의 오래되고 부유한 귀족 가문 다수가 귀중품을 챙겨 건강이나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쳤지만 더 많은 수가 어쩌면 시도니우스처럼 코를 감싸쥔 채 구제국의 잔재 가운데 머무르며 그들의 새로운 주인과 할 수 있는 한 거래를 계속했음. 그들은 비단옷을 양모바지로, 고전시가를 사냥으로 맞바꾸며 새로운 현실에 순응했다. 그러한 현실 가운데 일부는 썩 좋은 것으로 드러남. 이전 시기 한나라와 로마제국 전역에 영지가 흩어져 있던 초대형 갑부귀족은 사라졌지만 비록 그들의 자산이 이제 한 왕국 안으로 한정되었다 할지라도 일부 4~5세기 지주는 여전히 어마어마한 부자였음. 옛 로마와 중국 지배층은 정복자와 통혼했고 무너져가는 도시에서 시골의 거대한 장원으로 옮겨갔다. 저가 국가로의 완만한 이행이 4세기 화북과 5세기 서유럽에서 가속화함에 따라 왕은 이전에 농민이 징세인에게 넘겨주었던 잉여생산물을 귀족이 지대로 가져가는 것을 허용. 이러한 잉여생산물은 인구가 감소하고 농장주들이 자신들의 노력을 최상의 토지에 집중할 수 있게 되면서 오히려 증가하고 있었을지도 모름. 시골사람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배워온 기술을 거의 잊어버리지 않았고 실제로 몇가지 새로운 기술을 추가하기도 했음. 양쯔강 유역의 배수기술과 나일강 유역의 관개기술은 300년 이후 향상되었음. 화북지방에는 소가 끄는 쟁기가 많아졌고 파종기와 발토판(보습 위에 비스듬히 댄 넓적한 쇠)을 댄 쟁기, 물레방아가 서유럽에 퍼짐. 그러나 귀족의 과시와 농미의 재간에도 불구하고 한나라와 로마제국 아래서 강력하게 번영했던 관료, 상인, 관리자 계층의 지속적 감소는 유라시아 양단에서 거대했던 경제가 계속 안에서 붕괴하고 있음을 의미했음. 이 사람들은 흔히 부패하고 무능력했지만 실제로 편익을 제공했음. 상품을 운송함으로써 그들은 다양한 지역들의 이점을 포착했는데, 이러한 중개자들이 없어지자 경제는 갈수록 한 지방에 국한되고 자급자족의 방향으로 기울었음.
- 단일한 거대제국을 다시 수립함으로써 수나라는 한꺼번에 두가지 일을 함. 첫째로 북부에 기반한 강한 국가가 남부의 새로운 경제적 개척지대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둘째로 남부의 경제성장이 중국 전역에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 이것이 완벽히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음. 길이가 2400킬로에 달하고 폭이 40미터에 달하는 대운하라는 당대의 가장 기념비적 역사를 완성했을 때 수나라의 황제는 군대를 이동시킬 수 잇는 초고속도로를 염두에 두었음. 그러나 한 세대 안에 대운하는 남부의 쌀을 북부의 도시로 실어나르는 중국경제의 대동맥이 되었음. 7세기 학자들은 "타이항 산맥을 관통하는 운하를 파면서 수나라는 백성들에게 참을 수 없는 고초를 안겼다"고 불평하기를 좋아함. 그러나 그들도 "운하가 백성들에게 끝없는 혜택을 가져왔다. ... 그러한 혜택은 실로 어마어마했다"는 사실을 인정했음. 대운하는 고대 로마가 누린 것과 같은 수로를 중국에 마침내 제공함으로써 동양의 지리를 변화시켜 인간이 만들어낸 지중해와 같은 역할을 했음. 저렴한 남부의 쌀이 북부 도시의 인구폭발을 감당했음. 시인 백거이는 다시금 중국의 수도가 된 장안을 두고 "거대한 바둑판 같은 수백, 수천채의 집"이 들어섰다고 썼음. 장안은 "이랑을 따라 양배추가 줄줄이 심어진 광대한 밭처럼" 80제곱킬로에 걸쳐 뻗어있었음. 100만명의 주민이 뉴욕 5번가보다 다섯배나 넓고 양옆으로 가로수가 늘어선 대로에 북적거렸음. 장안만 독보적인 것이 아니었음. 뤄양의 규모는 장안의 절반이었고 다른 십수개의 도시도 수십만명에 달하는 인구를 자랑. 그러나 중국의 회복은 양날의 검과 같았음. 북부의 국가권력과 남부 개척지대에서 온 쌀의 결합은 상반된 결과를 낳음. 한편으로는 급성장하는 관료제가 농민과 상인을 부유하게 살찌우는 도시의 시장을 조직하고 치안을 유지해 사회발전지수를 끌어올리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도한 행정이 상업활동을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규제하면서 농민과 상인을 제약해 발전에 제동을 걸었음. 관리들은 가격을 고정시켰고 물건을 사고파는 시기를 지정했으며 심지어 상인들의 생활방식까지 규제.
- 우리 세기의 정치 전문가 다수는 18세기 기번의 비판가들처럼 이슬람을 서양 문명에 반하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쉽게 상정함.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현실을 무시하는 것. 700년이 되자 이슬람 세계는 이럭저럭 서양 핵심부였고 기독교권은 그 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있는 주변부일 뿐이었음. 아랍인은 이전 로마제국만큼 서양 핵심부의 상당부분을 느슨하게 한 국가로 통합. 아랍인의 정복은 수 문제의 동양정복보다 오래 걸렸지만 아랍군대는 매우 작았고 사람들의 저항도 매우 저항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복한 땅을 거의 초토화하지 않았음. 그래서 8세기에 서양의 사회발전지수는 마침내 하락을 멈추었다.
- 7세기 아랍의 정복은 로마세계와 페르시아를 가르던 옛 경계선을 지웠고, 무슬름 핵심부에 일종의 급성장을 촉발. 칼리프는 이라크와 이집트에서 관개농업을 확대했고 여행자들은 인더스강에서 대서양으로 작물과 기술을 이전. 쌀, 설탕, 면화가 무슬림 수중의 지중해를 가로질러 퍼져나갔고 작물을 돌려심어서 농부들은 밭에서 두세 차례 수확을 할 수 있었음. 시칠리아를 식민화한 무슬림은 파스타와 아이스크림 같은 고전적 서양음식을 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마와 페르시아 간옛 장벽을 극복함으로써 얻은 이득은 지중해를 가로질러 이슬람권과 기독교권을 나누는 새로운 장벽에서 발생하는 손실로 갈수록 상쇄되었음. 남부와 동부 지중해가 갈수록 탄탄하게 이슬람 사회가 되어가고(750년까지도 아랍의 지배권에서 무슬림은 10명중 1명이 될까말까 했지만 950년이 되자 이제 10명중 9명에 가까웠다) 아랍어가 공용어가 되어갈수록 기독교권과의 교류는 쇠퇴
- 실제 배만큼 중요한 것은 화물을 사서 창고에 보관하고 돈을 대부해주며 배를 재빨리 회전시키는 운송 중개상이다. 그러나 이 모든 활동에는 현금이 필요했고 경제가 성장하자 정부는 충분한 동전을 찍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새로운 구리 공급원을 찾으려는 영웅적인 노력 덕분에 통화공급량은 983년 3억개에서 1007년 18.3억개까지 증가했으나 여전히 수요에 미치지 못함
- 9세기 차 무역이 성행하고 사업에 대한 국가의 감독이 느슨해졌을 때 쓰촨의 거래상들은 장안에 사무소를 차리기 시작. 그곳에서 상인들은 차를 팔아 받은 동전을 날아다니는 돈, 즉 비전이라는 지불증서와 교환했고, 쓰촨으로 오면 회사의 본사에서 이 어음을 다시 현금으로 바꿨다. 비전 한뭉치가 구리동전 40자루에 해당한다고 보면 이점은 명백했고 상인들은 곧 이 신용증사를 그 자체로 화폐로 사용하게 됨. 그 가치가 금속 내용물보다는 발행자의 신용에 의존하는 명목화폐, 즉 신용화폐를 발명한 셈이었다. 1024년 국가는 논리적으로 당연한 다음 단계를 밟아 지폐를 찍어내기 시작했고 곧 동전보다 지폐를 더 많이 발행하게 됨. 지폐와 어음이 시골에 침투해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 더 쉬워지자 더 많은 농민이 땅에서 잘 자라는 것은 무엇이든 재배해 판 뒤 그 돈으로 쉽게 재배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구입했다.
- 호모사피엔스는 의식주와 연료를 얻고자 언제나 동식물을 착취해 살아왔음.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은 훨씬 더 효율적인 기생동물이 되었음. 한 예로 1세기에 한나라와 로마 제국 사람들은 그보다 1만 4000년 전 빙하기 선조들이 힘들게 모은 것보다 7~8배 더 많은 1인당 에너지를 소비. 한나라와 로마제국 사람들은 또한 동식물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 배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바람과 파도를 이용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제분기에 수력을 응용했음. 그러나 1013년 추위에 떨다 폭동을 일으킨 사이펑 주민들은 여전히 기본적으로는 다른 유기체에 의지해 살았고 석기시대 수렵채집인보다 에너지의 대사슬에서 약간 더 높은 단계에 서 있을 뿐이었음. 몇십년 안에 그런 상황이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카이펑의 제철업자들은 저도 모르게 혁명가로 변신. 1000년 전 한나라 때 일부 중국인이 석탄과 가스에 손을 댔지만 이 에너지원은 분명한 용도가 거의 없었음. 게걸스러운 대장간이 따뜻한 가정집과 연료를 놓고 경쟁하게 된 지금에 이르러서야 산업가들은 고대 유기체 경제와 화석연료의 신세계 사이의 문을 열심히 밀기 시작. 카이펑은 중국 최대 석탄 매장지 두 곳과 가까이 있었고, 황허에 접근하기도 쉬었으므로 원광을 녹이기 위해 숯대신 석탄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데는 천재가 따로 필요 없었다. 그저 탐욕과 필사적 노력, 시행착오만 있으면 되었다. 석탄을 찾아내 채굴하고 운반하기 위해서는 자본과 노동력도 필요했는데, 가정집이 아니라 기업가가 이런 움직임을 주도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 어느 이집트 군대가 마침내 1260년 갈릴리 해안에서 몽골족의 발길을 멈춰 세웠지만, 그 무렵이면 그들의 미친듯한 파괴와 약탈은 이미 2세기에 걸친 이란, 이라크, 시리아 옛 무슬림 심장부의 경제적 쇠퇴에 확실한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서양에 미친 몽골족의 가장 큰 영향은 그들이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들이 카이로를 약탈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이로는 서양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로 남았고, 그들이 서유럽을 침공하지 않았기에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서양 최대의 상업중심지로 남을 수 있었다. 옛 무슬림 핵심부에서 사회발전지수는 추락했지만 이집트와 이탈리아에서는 꾸준히 상승해서 1270년대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향해 출발할 때가 되자 서양 핵심부는 확고하게, 몽골족이 건드리지 않고 살려준 지중해 지역으로 이동했음.
- 아랍인은 비단길가 인도양 교역로의 서쪽 구간을 지배하기에 편리한 곳에 위치했고 동양과 서양을 잇는 동맥의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유럽인은 여러세기 동안 대부분 집에 머무르면서 베네치아인이 아랍인의 식탁에서 집어다주는 부스러기에 만족해야 했음. 그러나 십자군 운동과 몽골의 정복은 동방을 향한 유럽인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면서 정치적 지형을 바꾸기 시작. 게으름과 두려움을 누르기 시작하면서 탐욕은 무역상들(특히 베네치아인)을 홍해를 따라 인도양으로 이끌거나 마르코폴로 같은 이들을 초원길로 이끌었음. 서유럽 국가들이 흑사병 이후 고가전략으로 옮겨가면서 전쟁이 심화되고 있을 때 정치적 지리는 경제적 유인에 힘을 보탰다. 대서양 변방에 위치한 통치자들은 더 많은 대포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반면 돈을 벌 수 있는 일반적 수단들(주민에게 과세하는 관료제를 확대하고 유대인을 갈취하고 이웃나라를 약탈하는 등)은 바닥나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조세수입원을 제공할 수 있따면 누구든, 심지어 항구에서 어슬렁거리는 수상쩍고 탐욕스런 인물이 하는 이야기라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 16세기는 동양 문화와 서양문화의 황금기였다. 1590년대에 런던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의 헨리5세, 줄리어스 시저, 햄릿 같은 새로운 연극을 보거나 존 폭스의 유혈이 낭자한 순교자처럼 신실한 사람들이 말뚝에 묶인 모습을 그린 목판화가 새로운 인쇄기로 수천 권씩 찍혀 나온 저렴한 종교 책자를 읽을 수 있었음. 유라시아 반대편 끝에는 베이징 사람들이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이가 관람한 전통 가극인 20시간짜리 모란정을 감상하거나 서유기를 읽을 수 있었음. 그러나 번쩍거리는 겉모습 이면의 모든 것이 그리 좋지많은 않았다. 흑사병으로 서양과 동양 핵심부에서는 3분의 1이나 그 이상의 인구가 사망했으며, 1350년 이후로도 흑사병은 한 세기 동안 주기적으로 재발하면서 인구 수준을 계속 낮은 상태로 유지했다. 그러나 1450년과 1600년 사이 배고픈 입의 숫자는 두 지역에서 대략 두배가 되었다. "인구가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크게 불어났다."고 한 중국인 학자는 1608년 기록. 멀리 프랑스 사정도 마찬가지였음. 사람들은 속담에서 말하는 대로 헛간의 쥐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두려움은 언제나 사회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자식을 많이 낳자 땅은 잘게 분할되었고 상속에서 배제된 이들이 생겨 이전보다 갈등이 증폭됨. 농부들은 잡초를 더 자주뽑고 거름을 더 자주 주었으며 물길을 막고 우물을 파거나 더 많은 옷을 지어 팔려고 애썼다. 일부는 한계지에 정착해 그들의 부모라면 결코 관심을 두지 않았을 산비탈과 돌과 모래투성이 땅에서 근근이 연명. 다른 이들은 핵심부를 버리고 인구밀도가 낮은 야생의 변경지대에 정착. 그러나 그들이 신세계에서 온 기적의 작물들 심었을 때조차도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양은 충분치 않았음. 노동력은 부족하고 토지는 풍부했던 15세기의 기억은 갈수록 흐릿해져 갔다. 소고기와 맥주, 돼지고기아 포도주가 있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더 좋았따고 1609년 난징 근처 어느 현감은 말했다. "모든 가구마다 살 집과 경작할 땅, 땔감을 구할 야산, 채소를 기를 텃밭이 있어서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은 궁핍하다. ... 탐욕은 끝이 없으니 살이 뼈를 해한다." 1550년경 어느 독일 여행자는 그보다 더 직설적이다. "옛날에는 농가에서 먹는 게 달랐다. 그때는 고기와 음식이 풍성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진정으로 변했다. 가장 잘사는 농민의 음식도 옛날의 날품팔이와 하인이 먹던 것보다 질이 떨어진다."
- 어떤 측면에서 16세기 서양 핵심부와 동양 핵심부는 다소 비슷해 보였다. 각각 거대한 제국이 전통적 중심을 지배했고(동양은 황허강, 양쯔강 유역을 명나라가, 서양은 동부 지중해를 오스만 제국이 지배) 경제적으로 활동적인 작은 국가들은 제국의 가장자리에서 번영 (동양에서는 일본과 동남아시아, 서양에서는 서유럽). 그러나 유사성은 거기서 끝이었다. 명나라에서 황제와 관료 사이 기싸움과 대조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나 관료들은 팽창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약탈 이후 주민수가 5만명으로 감소했으나 다시금 대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되살아났다. 1600년이 되자 콘스탄티노플에서는 40만명의 도시민이 살았으며 그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지중해 전역의 산물이 필요했음. 고대 로마의 원로원 의원처럼 튀르크의 술탄은 정복만이 이 모든 저녁식사를 확보하는 최상의 길이라고 판단. 술탄들은 한쪽 발은 서양 핵심부에, 다른 한쪽 발은 스텝지대에 걸쳐 둔 채 복잡한 춤사위를 펼침. 이것이 그들의 성공비결이었다. 1527년 술탄 술레이만은 자신의 군대 규모를 대부분 전통적인 유목민 유형의 귀족출신 궁수인 기병 7.5만명과 머스킷 보병으로 훈련받고 대포의 지원을 받는, 기독교도 노예로 구성된 에니체리 부대 2.8만명으로 추정. 기병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술탄들은 정복한 땅을 봉토로 나눠서 하사. 예니체리를 위해서는(급료지불) 도요토미도 감명시킬 만한 토지조사를 실시하여 마지막 동전 한 닢까지 현금이 원활하게 흐르게 했음. 이 모든 일에는 뛰어난 경영수완이 필요했고 꾸준하게 확대되는 관료제는 제국에서 가장 유능하고 뛰어난 인재를 끌어들이는 한편 술탄은 이해관계 집단이 서로 경쟁하게 만들도록 노련하게 처신했음. 15세기에 술탄은 흔히 예니체리의 편을 들었으며 정부를 중앙집권화하고 국제적 문화를 후원. 16세기에는 귀족편으로 기울어서 더 중요한 것은 모든 것에 연료를 공급하는 약탈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전쟁이 필요했고 보통은 이겼다.
- 도요토미와 펠리페가 죽은 1598년 이후 수십년 안에 발전의 역설이 다시금 작동할 조짐이 확연했다. 과거에도 흔히 그랬듯이 날씨가 커져가는 위기에 일조. 1300년 이래로 서늘한 기후는 이제 더 추워졌다. 어떤 기후학자들은 기후변화가 1600년 페루의 화산폭발 탓이라고 여기지만 다른 학자들은 태양 흑점 활동의 축소 탓으로 추측하기도 함. 여하튼 대부분은 1645~1715년 시기가 구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혹독하게 추웠다는 데 동의. 런던부터 광저우까지, 일기나 공식 문헌에는 눈과 얼음, 서늘한 여름에 대한 불평이 남아 있다. 추운 도시민과 땅에 굶주린 경작자들은 삼림이든 습지든 야생동물이든 식민지 원주민이든 간에 무방비 상태로 남겨진 이들의 17세기를 재앙으로 만드는 데 함께 했음. 때로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정부는 이러한 희생자들을 보호하는 입법을 하기도 했지만 핵심부의 변경을 바깥으로 밀어젖히고 있는 식민주의자들은 그런 조치들에 좀처럼 주의하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이른바 판잣집 사람들이 산과 숲을 침범하여 고구마와 옥수수 농사로 취약한 생태게를 초토화했음. 그들은 묘족같은 토착민 집단을 아사직전으로 몰아갔지만 묘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은 군대를 파견해 반란을 평정. 일본 북부의 아이누인과 잉글랜드의 가장 오래된 식민지인 아일랜드인, 북미 동부 원주민들도 똑같은 암울한 이야기를 전함
- 기후변화는 고삐 풀린 묵시록의 기수 가운데 첫번째일 뿐이었다. 자원에 대한 증가하는 압력은 체제들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리면서 국가실패를 야기. 군주들은 비용을 삭감하면 관리와 병사들의 동조를 잃었고 납세자들을 더 많이 쥐어짜면 상인과 농부들의 지지를 잃었다. 빈곤층의 폭력적 항의는 국가가 발명된 이후로 언제나 어쩔 수 없는 삶의 현실이었지만 재산을 박탈당한 젠트리, 파산한 상인들, 급료를 받지 못한 병사들, 그리고 실패한 관리들이 빈곤층에 합세하면서 더 격렬해졌다. 시대가 험난해질수록 서양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신의 의지를 구현하는 대표자라고 더 확고하게 주장함으로써 반란의 비용을 증가시키려고 애썼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더욱 공격적으로 종교학자들의 환심을 구했고 서유럽의 지식인들은 절대주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국왕의 권위는 오로지 신이 내린 것이며 교회, 인민의지에 구속받을 수 없다고 주장. 프랑스 구호에 따르자면 '하나의 국왕, 하나의 신앙, 하나의 법'이었다. 이 일괄거래에서 어느 일부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선하고 순수한 모든 것에 도전하는 것이었따. 그러나 불만을 품은 다수의 신민은 바로 그렇게 할 태세였다. 1622년 튀르크의 술탄이자 칼리프로서 무함마드의 계승자이자 지상에서 신의 대표인 오스만 2세는 갈수록 돈을 많이 먹는 에니체리 부대를 감축하려고 했음. 그들은 술탄을 궁전에서 끌어내 목을 졸라 죽이고 그의 성스러운 신체를 절단하는 것으로 대응. 오스만의 뒤를 이은 그의 동생은 강경파 성직자들과 손을 잡고 심지어 커피를 금하고 도락을 목적으로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 사형을 도입함으로써 상황을 회복하려 했지만 1640년대 술탄의 정통성은 완전히 땅에 떨어진 뒤였다. 이제 성직자들과 한편이 된 예니체리 부대는 광인 술탄 이브라힘을 처형했고 50년에 걸친 내전이 시작됨
- 1640년대는 거의 모든 곳의 국왕들에게 악몽의 시절이었음. 반절대주의 반란이 프랑스를 마비시켰고 잉글랜드에서는 의회가 강압적인 국왕과 전쟁에 들어가 그의 목을 쳤다. 그 사건은 램프의 요정을 밖으로 나오게 한 꼴이었따. 신성한 국왕이 재판을 받고 처형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불가능할 게 있을까? 고대 아테네 이후로 어쩌면 최초로 민주주의적 사고가 비등했다. 의회군의 한 대령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도 가장 힘 있는 사람과 똑같이 살아갈 삶이 있으며, 정부 아래서 살아가려는 사람은 누구든 먼저 그 자신의 동의에 의해서 그 정부 아래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 2000년 동안 스텝지대는 거대한 농경제국들의 통제를 대체로 벗어난 동서양간의 고속도로였음. 이주민과 미생물, 사상과 발명품이 이 길을 따라 이동하면서 동양과 서양을 발전과 붕괴의 연결된 리듬속에 하나로 묶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이나 한 무제, 당 태종 같은 정복왕들은 커다란 희생을 치르고서 드물게 스텝지대에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했지만, 이들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보통은 농경제국이 유목민이 요구하는 대로 뭐든 내어준 뒤 일이 잘 풀리기를 바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대포는 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유목민은 수시로 화기를 사용했고 대포를 중국에서 서양으로 전한 이들도 몽골족일 것이다. 그러나 대포의 성능이 좋아지면서 제국은 점차 조직을 갖추어 갔고 수만명의 병사를 모집해 머스킷 총과 대포로 무장시키고 연속 일제사격을 훈련시킬 능력이 있는 장군들은 유목민 기병들을 무찌르기 시작했다. 스텝지대 기마궁수들은 1500년 경에 여전히 농경제국의 보병들을 수시로 격퇴했다. 1600년이 되자 이따금 격퇴했다. 그러나 1700년이 되자 그런 경우는 거의 들어볼 수 없었다. 러시아인이 주도권을 잡았다. 1550년대 이반 뇌제의 대포는 볼가 부지에서 허약한 몽골의 한국들을 싹 몰아냈고 다음 100년에 걸쳐 러시아인과 튀르크인, 폴란드인은 건조한 우크라이나 스텝지대를 수비대와 해자, 말뚝 울타리로 꾸준히 에워쌌다. 머스킷 총으로 무장한 마을 주민들은 처음에는 유목민의 이동을 일정한 경로로 돌렸고, 마침내는 그들의 길목을 완전히 차단했다. 네르친스크에서 러시아와 중국은 그들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스텝지대를 따라 이동할 수 없다는 데 합의. 이제 모두가 농경제국의 신민이 되리라.
- A지역에서 B지역으로 단순히 상품을 운송하는 대신 무역상들은 서유럽인이 제조한 상품(직물, 대포 등)을 서아프리카로 가져가서 이윤을 남기고 노예로 교환할 수 있었음. 그다음 그들은 카리브해로 노예로 싣고 가서 이번에도 이윤을 남기고 설탕으로 교환할 수 있었음. 최종적으로 그들은 설탕을 유럽으로 가져와 거기서 더 많은 이윤을 남기고 판 다음 새로운 탁송 완제품을 구입해 다시 아프리카로 출발. 반대로 북미에 정착한 유럽인은 럼을 아프리카로 가져와서 노예와 교환. 그 다음 노예를 카리브해로 실어와서 당밀로 교환하고, 당밀을 북미로 가져와 다시 럼을 더 많이 생산함. 어떤 이들은 북미에서 카리브해로 식량을 실어온 다음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그곳의 땅은 노예를 먹일 식량을 재배하는 데 쓰기에는 너무 소중했다) 설탕을 구입해 서유럽으로 가져가고, 최종적으로 북미에 완제품을 싣고 돌아왔다.
- 16세기 유럽에서 막강한 제국인 에스파냐는 유럽에서 절대왕정이 가장 발달해 있었고, 일반적으로 상인들은 적당히 위협하면 요구한 대로 돈을 토해내는 현금인출기처럼, 식민지는 약탈의 대상으로 취급했음.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른 유럽 라이벌들을 강압해 단일한 유럽 대륙제국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면, 대서양 경제는 분명히 17세기 넘어서까지 이런 식으로 지속되었을 것임. 그러나 그 대신에 국왕의 권력이 더 약한,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서북부 변두리에서 온 상인들은 상황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갔음. 그들 가운데 가장 앞서나간 이들은 네덜란드인이었다. 14세기 네덜란드는 여러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었고, 자주 침수되는 주변부에 불과. 이론적으로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충성할 의무가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자기일에 바쁜 먼 곳의 지배자들은 멀리 떨어진 서북부에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는 것이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곳의 통치를 현지 도시의 유력자들에게 맡겼음.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 네덜란드 도시들은 혁신을 할 수 밖에 없었음. 나무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들은 토탄을 에너지원으로 발전시켰고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북해에서 조업을 했다. 그렇게 잡은 것을 발트해 인근에서 곡물과 교환. 간섭하는 왕과 귀족이 없었기에 부유한 도시민들은 시정을 사업에 친화적으로 운영. 건전한 자금과 더 건전한 정책들은 더 많은 돈을 끌어당겼고 16세기 후반이 되자 이전에 후진적이었던 네덜란드는 유럽의 금융 허브가 됨. 저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는 네덜란드는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뼈 빠지는 소모전에 계속 돈을 댈 수 있었고,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에스파냐의 국력을 서서히 갉아먹었다.
- 두려움은 흔히 게으름을 이기기에 1450년 이후 인구가 성장하자 유라시아 전역에서 사람들은 지위를 잃거나 굶주리거나 심지어 아사하지 않기 위해 행동에 뛰어들어다. 그러나 1600년 이후 대서양 경제의 생태학적 다양성, 저렴한 운송, 열린시장이 서북부 유럽의 보통 사람들이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범위안에 소소한 사치품의 세계를 열어주면서 탐욕 역시 게으름을 이기기 시작. 18세기가 되면 호주머니에 얼마간 여분의 돈이 있는 사람은 그저 빵 한덩이를 더 사는 것 이상을 할 수 있었음. 차, 커피, 담배, 설탕 같은 수입품이나 우산, 사기 파이프, 신문 같이 국내에서 생산된 놀라운 품목을 살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풍성한 선물을 만들어낸 바로 그 대서양 경제는 그런 구매자에게 필요한 돈을 기꺼이 지불할 준비가 된 사람들을 만들어냈음. 무역상들은 모자나 대표, 담요 등 아프리카나 아메리카로 실어갈 수 있는 것은 기꺼이 구입하려고 했고, 그에 따라 제조업자들은 그러한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돈을 지불하려고 했기 때문. 일부 농부는 가족에게 방적과 방직을 시켰음. 다른 농부들은 작업장에 들어갔다. 일부는 농사를 아예 그만두었다. 더 집약적으로 거름을 주고 가축을 사들이는 것이 경제적으로 타당성이 있을 만큼 안정적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했다. 세부적 차이는 있지만 서북부 유럽인은 점점 더 자신들의 노동력을 팔고 더 오랜 시간 일하게 되었음. 그리고 그들이 더 많이 일할수록 더 많은 설탕과 차, 신문을 살 수 있었음. 더 많은 노예가 대서양 너머로 끌려왔고, 플랜테이션 농장이 들어서기 위해 더 넓은 땅이 개간되었으며, 더 많은 공장과 상점이 열렸다는 소리다. 판매량이 증가했고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었으며, 가격이 하락하면서 이 상품의 세계가 더 많은 유럽인 앞에 열림. 좋든 나쁘든 1750년이 되자 세계 최초의 소비자 문화가 북대서양 연안에 생겨났고 수백만 명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가죽신발과 회중시계로 단장하지 않으면 감히 커피숍에 얼굴을 내밀지 않을 남자들은 수십일의 종교상 휴일로 세지 않거나 일요일의 숙취를 잠으로 해소하기 위해 쉬는 성 월요일 같은 오랜 전통을 지키지 않게 되었다.
- 각 시대는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고를 얻는다. 대양 너머에 새로운 변경을 창출한 서유럽인은 공간과 시간, 돈에 대한 표준화된 정밀한 측정방법이 필요했고, 바늘 두개짜리 시계가 당연해진 시점에 자연 자체가 기계가 아닐까 생각하지 않았다면 유럽인은 굉장히 둔한 사람들일 거이다. 마찬가지로 서양의 지배계급이 별스럽고 예측불가능한 사상가들에게 약간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을만큼 과학적 사고에서 충분한 이점을 보지 못하려면 그보다 더 둔해야 했으리라. 앞선 축의 사상이 일으킨 1~2차 물결 그리고 르네상스와 마찬가지로 원래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는 상승하는 서양의 사회발전지수의 원인이라기 보다는 결과였다.
- 서유럽인은 로마인과 송나라 사람들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했는데, 세가지 변했기 때문. 첫째, 기술이 계속 축적되었다. 일부 기술은 사회발전이 붕괴할 때마다 유실되었지만 대부분은 보존되었고 다음 세기를 거치면서 새로운 기술이 추가되었음. 그러므로 같은 강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원칙은 계속 작동하고 있었다. 1세기와 18세기 사이에 단단한 천장을 압박했던 사회들은 각각 그 이전의 사회와는 달랐다. 각자 이전에 존재했던 사회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았고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둘째, 대체로 기술이 누적되었기 때문에 농경제국은 이제 효과적인 대포를 갖게 되었고 러시아와 청나라는 스텝지대 초원길을 닫을 수 있었다. 그 결과 17세기에 사회발전이 단단한 천장을 압박했을 때 묵시록의 다섯번째 기수(이주)는 나타나지 않았음. 힘든 싸움이었지만 핵심부들은 다른 네 기수에 대처할 수 있었고 붕괴를 피했다. 이런 변화가 없었다면 18세기는 3세기나 13세기만큼 재앙으로 넘쳐났을지도 모른다. 셋째, 다시금 대체로 기술이 축적되었기 때문에 배는 이제 원하는 대로 어디든 갈 수 있었고, 서유럽인은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대서양 경제를 창출. 로마인이나 송나라 사람들은 그러한 방대한 상업적 성장의 엔진을 건설할 위치에 있지 않았고, 따라서 어느 쪽도 17세기와 18세기 서유럽인이 주목할 수밖에 없는 그런 종류의 문제들에 직면할 필요가 없었다. 뉴턴과 와트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이 아마도 키케로와 심괄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보다 더 영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다른 것들을 사고했을 뿐이다. 18세기 서유럽은 단단한 천장을 일소하기에 이전의 다른 어느 사회보다 더 좋은 위치에 있었음. 서유럽 안에서도 (왕권이 미약하고 상인들이 더 자유로운) 서북부가 남서부보다 더 좋은 위치에 있었음. 그리고 그 서북부 안에서도 영국이 가장 좋은 위치에 있었음. 1770년이 되자 영국은 어느 곳보다도 더 높은 임금과 더 많은 석탄, 더 탄탄한 재정, 그리고 분명히 더 개방적인 제도를 보유했음.
- 영화와 소설들은 흔히 빅토리아 시대를 촛불과 따뜻한 난롯가, 제 분수를 아는 사람들의 아늑한 세상으로 그리지만 당대 사람들은 빅토리아 시대를 매우 다르게 경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9세기 서양을 자신이 주문으로 불러들인 지하세계의 힘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마법사 같다고 생각.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거기에 환호했음. 보수주의자들은 반발했다. 교회는 사회주의와 물질만능주의, 과학에 반대했다. 지주 귀족층은 그들 계층의 특권을 옹호했다. 반유대주의와 노예제가 때로 새로운 가면을 쓰고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대립은 폭력적일 수도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8년에야 가까스로 자신들의 사상을 공산당 선언에 종합할 수 있었는데, 그때 혁명이 유럽의 거의 모든 수도를 뒤흔들고 있었고 종말의 시간이 가까워온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인류 역사상 핵심부의 팽창은 흔히 변두리의 어느 부분이 강대국에 대한 저항을 주도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격렬한 주변부 전쟁을 촉발. 예를 들어 기원전 1000년대 아테네와 스파르타, 마케도이나는 한세기 반 동안 페르시아 제국의 변두리에서 전쟁을 벌임. 그리고 초나라와 오나라, 월나라는 황허강 유역의 핵심부가 팽창하면서 중국 남부에서 똑같은 일을 했다. 19세기에 그 과정은 동양이 서양의 주변부가 되면서 되풀이되었다.
- 우리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실험과 시도를 거듭하고 그들의 삶을 더 편하거나 풍족하게 하거나 상황이 변했을 때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았고, 그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사회발전은 증가한다. 그러나 사회발전에서 커다란 변혁들 (농경의 기원, 도시와 국가의 부상, 다종다양한 제국의 생성, 산업혁명) 은 단순한 실험과 시도에 불과하지 않았다. 각각은 절박한 수단을 요구하는 절박한 시대의 산물이었다. 빙하기말 수렵채집인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그들을 지탱하는 자원에 대한 압력을 증가시켰다. 식량을 구하려는 추가적인 노력에 따라 채집인은 자신들이 의존하는 동식물 일부를 변형, 가축과 작물로 품종을 개량시켰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농부로 변신했다. 일부 농부는 무척 성공적으로 변신해서 다시금 자원에 새로운 압력을 가했고 생존을 위해(특히 기후가 그들에게 불리해졌을 때) 마을을 도시와 국가로 변신시켰다. 일부 도시와 국가는 상당히 성공했고 그들 역시 자원 문제에 부닥쳐 이번에는 제국으로 (처음에는 육지에 바탕을 둔, 나중에는 스텝지대와 해양에 바탕을 둔) 변신했다. 이 제국들 가운데 일부는 자원에 새로운 압력을 가하고 산업경제로 변신하여 동일한 순환을 반복했다. 역사는 산넘어 산의 연속이 아니다. 사실, 역사는 늘 똑같은 이야기의 끝없는 반복이다. 언제나 한층 새로운 적응을 요구하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는 세계에 적응해가는 거대하고 간단없는 단일한 과정이다. 이책에서 이 과정을 발전의 역설이라 부른다. 증가하는 사회발전은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바로 그 힘들을 생성한다. 사람들은 매일 그러한 역설에 직면하고 해소하지만 한번씩 역설은 진정으로 변혁적인 전환에만 굴복하는 단단한 천장을 생성한다. 그러한 전환을 위해 어떻게 해야할지는 커녕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좀체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사회가 이러한 천장에 접근하면 발전과 붕괴 사이에 일종의 경주가 시작된다. 사회들이 천장에 부닥쳤을 때 사회발전이 몇 세기간 변화하지 않은 채 그냥 제자리에 머무는 경우란 좀처럼 (어쩌면 결코) 없다. 그보다는 사회가 이 단단한 천장을 어떻게 부숴야 할지 방법을 짜내지 못하면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묵시록의 다섯 기수라고 부른 것들 일부느 전부가 풀려나오고 기아와 질명, 이주, 국가붕괴 (특히 기후변화 시기와 일치하면)가 사회발전을 때로는 수세기동안 뜰어내려 암흑기에 접어든다.
- 2차대전이 끝나고 5억명의 여성은 그들의 어머니보다 더 젊은 나이에 결혼해서 애를 더 많이 낳기로 결정. 인구는 급증했다. 30년이 지나 그들의 달 10억명은 그 반대로 하기로 결정하고 인구 성장 속도는 느려졌다. 이런 선택들은 집단적으로 현대사의 경로를 바꿨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은 개인의 일시적 기분에 따른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한 세기 반 전에 핵심을 파고들었다. 그는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역사를 만들어가지는 못한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상황 아래 역사를 만들지는 못한다."고 주장. 아이를 더 많이 낳는 쪽으로 그리고 나중엔 덜 낳는 쪽으로 결정할 만한 이유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20세기 여성은 흔히 그 문제에서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느꼈음. 1만년 전 농경을 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나 5000년 전 도시로 이주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나 200년 전 공장에서 직업을 얻기로 결정한 사람들처럼 진짜 대안은 없다고 느꼈음이 틀림없다.
- 문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는 머릿속 목소리보다는 오히려 여러 선택지를 두고 논쟁하는 주민회의에 가깝다. 각 시대는 지리와 사회발전이 강요하는 종류의 문제들에 좌우되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상을 얻는다. 이것은 왜 동양과 서양의 역사들이 지난 5000년 동안 전반적으로 유사했는지를 설명해줌. 서양에서는 기원전 3500년경, 동양에서는 기원전 2000년 이후, 최초로 등장한 양 핵심부 국가들은 신성한 왕권의 성격과 한계에 대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음. 국가들이 관료제를 더 갖춰가자 서양에서는 기원전 750년 이후에, 동양에서는 기원전 500년 이후에, 이러한 논의들은 개인적 초월의 성격과 개인적 초월이 세속권력과 맺는 관계를 다루는 제1차 축의 사상으로 대체됨. 서기 200년 무렵이 되자 거대한 한나라와 로마제국은 해체되었고 이런 질문들은 다시, 제도화된 조직을 갖춘 교회가 혼란스럽고 위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신도들을 구원할 수 있을지를 논의하는 제2차 축의 사상에 길을 터주었다. 그리고 사회발전이 회복되었을 때 중국에서는 1000년이 되자, 이탈리아에서는 1400년이 되자 르네상스라는 문제 (어떻게 하면 실망스러운 가까운 과거를 건너뛰고 제1차 축의 사상 시대의 잃어버린 지혜들을 되찾을 수 있을지를 논의하는)가 더 큰 관심사가 되었다. 동양과 서양의 사상들은 오랫동안 그렇게 유사하게 발전해왔는데, 사회발전이 계속 증가하는 경로는 결국 하나뿐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24점의 천장을 돌파하기 위해서 동양인과 서양인은 둘다 국가를 중앙집권화했고, 이러한 현상은 필연적으로 지식인들을 제1차 축의 사상으로 이끌었다. 이 국가들의 쇠퇴는 제2차 축의 사상을 가져왔다. 축의 사상의 부흥은 거의 필연적으로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각각의 커다란 변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상을 생각하도록 이끌었다.
- 모든 시대마다 그리고 모든 곳에서 우리는 합리주의자와 신비주의자, 개별사항들로부터 추상화하는 사람과 복잡성을 한껏 즐기는 사람, 심지어 이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하는 소수의 사람을 찾을 수 있다. 달라지는 것은 그들이 직면하는 도전이다. 1600년 무렵, 대서양 경제를 창출했을 때 유럽인은 자신들에게 새로운 문제를 부과했고 기계적, 과학적 현실 모델이 이런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다음 400년에 걸쳐 이러한 사고방식은 서양의 교육과정에 확고하게 자리잡았고 갈수록 서양인의 기본적 사고양식이 되었다. 대서양 경제가 창출한 종류의 도전이 19세기 넘어서까지 긴급하지 않은 동양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그렇게 깊숙이 진행되지 않았다. 최근인 1960년대까지도 서양 사회학자들은 동양문화 특히 유교문화가 경제적 성공에 필수적인 경쟁과 혁신의 기업가적 정신발달을 저해해왔다고 주장. 1980년대 일본의 경제적 성공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에 직면하여 새로운 세대의 사회학자들은 권위를 존중하고 집단에 대한 자기희생을 강조하는 유교적 가치가 자본주의 발전을 억제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렸다. 오히려 유교적 가치는 일본의 성공을 설명하는 요인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하를 사회발전의 요구에 맞게 조정하고, 따라서 20세기 후반에 자유주의 자본주의 외에 유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자본주의도 탄생했다는 것이 더 합당한 결론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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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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