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적으로 "한국전쟁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명분과 예의를 중시하던 종전의 가치관을 버리고, 생존을 위해 실용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중시하는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했다"고 지적됨. 전후 한국사회는 원조경제에 의존하는, 생산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과도한 대중소비문화가 형성되었고, 전쟁에 흔들린 영혼들은 향락과 쾌락에 집착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의 폐허 속에서 거침없이 분출된 욕망은 또 한편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경제건설과 분단극복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도로 밑바탕에서 작용하는 추동력이기도 했다
- 50년대는 한국사회에서 전쟁으로 말미암은 유동성과 그러한 유동성 속에서 거침없이 분출하는 욕망, 이것이 추동하는 다양한 역사적 가능성들이 교차하는 시기였음. 그러나 53년 휴전으로 고착화되기 시작한 분단체제는 이후 대단히 역동적인 변화를 맞이하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기본틀에서는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음. 또한 파편화된 가족이 이기적인 지위상승 경쟁을 벌이는 상황, 가족주의의 연장선에서 조성된 혈연, 지연이 민주적 시민사회의 유대감을 압도하는 현상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임. 엄청난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겪은 사람들, 전쟁으로 뿌리뽑혀 유동적으로 떠도는 사람들의 난민적 삶의 형태는 현재까지도 우리의 의식과 삶에 좀처럼 깨어지지 않는 어떤 딱딱한 한계를 조성하며 남아 있다. 난민이라는 개념을 근본적 차원에서 넓게 적용하면 우리는 현재에도 난민상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난민개념을 현상적으로 좁게 적용한다 하더라도 아직도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시키지 못하는 휴전상태, 비평화상태속에서 한국사람들은 언제나 난민으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조사에 의해 밝혀진 역사적 진실은 다소 충격적이다. 한국전쟁 시기에 군인이 아닌 수많은 민간이이, 북한군이 아닌 대한민국의 군과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것.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의 규모는 적게는 수십명에서 수만명에 이르렀고, 전국 구석구석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은 곳이 없었따. 한국전쟁 자체가 수백만명이 희생된, 2차대전 이후 가장 폭력적인 전쟁이었따. 그런데 이 전쟁에서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그것도 적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국 군대와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음은 믿기 어려운 진실이다. 더 놀라운 것은 전쟁 발발 이전부터 이런 비극들이 발생했다는 것. 46년 10월, 당시 한국을 통치하던 미군정이 미곡 수집정책을 추진하다 실패해 혼란이 생겼다. 미군정은 정책실패에 불만을 갖고 저항하는 대중들을 경찰과 군을 동원해 폭력적으로 진압했따. 48년 제주도에서는 남북분단이 기정사실화되고 정부의 억압이 심해지는 것에 저항한 제주도민들을 정부가 파견한 군대가 잔혹하게 진압한 바 있음. 이때 제주도에선 수만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따. 이어서 48년 10월에는 정부의 제주 4.3사건 진압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정부의 명령에 불복해 반란을 일으킴. 정부는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수와 순천일대의 시민 수만명을 죽거나 다치게 함. 이렇게 한국사회에선느 한국전쟁 전부터 냉전적 대립으로 내전수준의 봉기와 반란이 발생했고, 수만명의 민간인들이 살해됨. 여순사건 이후 반란군과 이에 가담한 주민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자 정부는 이들을 토벌하는 작전을 전개. 49년부터 55년까지 약 6년간 지리산 인근 지역은 한국전쟁과 무관한 군사작전이 지속된 내전지대였다.
- 냉전갈등이 심해질수록 정부는 모든 국민을 잠재적인 적으로 의심하기 시작. 정당성이 약한 권력일수록 모든 것을 잠재적 위협이자 위기로 보는 법이다. 일례로 한국정부는 49년 좌익단체에 한번이라도 가입했거나, 이들의 활동을 지원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정치적 전과자로 간주하고 이들을 특별관리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만듬. 전국적으로 30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상세한 검증없이 모두 보도연맹 회원으로 만들어 놓고, 그들을 모두 정부 통제하에 두고 감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비극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시작. 정부는 전쟁발발 직후 군정보기관과 헌병, 경찰 등에 일괄적인 명령을 내려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살해. 진실, 화해 위원회는 전체의 76.5%에 해당하는 전국 114개 시, 군에서 최소 수만명, 최대 10만명이 넘는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되었음을 밝혀냈다. 그뿐 아니라 당시 형무소에 갇혀 있던 재소자와 정치범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정당한 법적절차 없이 살해됨
- 한국의 의무교육제도는 평화, 민주주의, 인권과 다양성 등 시민의 덕목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전쟁의 목적에 부합하는 호전적 전쟁교육에서 시작됨. 일제시기 의무교육제 시행이 일본의 태평양 전쟁 수행과 관련된 정책이었음을 상기한다면 한반도에서 지속된 전쟁의 유산이 얼마나 뿌리깊은지 가늠해 볼 수 있다.
-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정책은 미국의 냉전전략에 조응해 한국정부의 역할을 보증받으려 한 정치적 전략. 하지만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 정책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지됨. 왜 한국정부는 전쟁이 끝나고, 미국과의 조약을 체결하고도 휴전반대와 북진통일을 주장했을까? 그것은 이철머 강경한 주장을 통해 지지세력을 결집하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자유당을 강화하며, 반대를 무마할 수 있었기 때문. 실제로 이승만은 54년 대통령 중임제 철폐 개헌을 이루기 위해 북진통일 정책을 활용. 이승만 정권은 한미상호방위조약 발표 이틀후인 11월 20일 개헌안을 상정하고, 27일 1표가 미달하는 결과가 나왔으나, 다음날 공보처장이 개헌안이 통과되었다고 발표. 이것이 바로 4사5입개헌이라 불리는 헌정사 초유의 불법적 희극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통해 체제를 보장받았고, 자유당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집권을 연장. 이승만 정권은 55년 여름에도 북진통일운동을 지원했고, 57년 1월 1일 발표된 대통령 연두교서는 3분의 2가 반공과 북진통일에 할애되어 있었다
-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 주장을 통해 대외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확보하고, 대내적으로 자유당을 강화해 개헌을 했으며, 장기집권체제를 구축 이어서 그는 면장과 반장까지 상부에서 임명하는 국가를 구축하려 했다. 하지만 권력의 과도한 집중은 결국 60년 3.15선거에서 발생한 가장 극단적 형태의 부정선거를 초래. 부정선거는 시민들의 대대적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4.19혁명으로 이어져 독재정권이 무너짐. 60년대 초가 되면 북진통일을 유일한 통일노선으로 여기던 분위기가 약해졌고, 유엔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이루자는 평화통일 논의가 등장. 이렇게 냉전의 최전선에서 미국의 후원을 받던 이승만 권위주의 체제는 북진통일 같은 호전적 수사와 함께 역사적 유물이 되었다.
- 전쟁과 냉전은 한반도에 크고 깊은 상흔을 남겼다. 한국은 최전선에 서서 전쟁을 치른 대가로 자유진영의 지원과 보호를 받으며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호전적인 체제대립을 활용한 권위주의 체제가 들어서고 지속된 탓에 해방된 지 40여년이 지난 후에야 국민의 뜻에 따라 정치가 이루어지는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민주화가 이뤄진 후에야 한국사회는 지난 시기를 되돌아보며 전쟁과 권위주의가 남긴 상처를 성찰하고 이를 넘어서려는 노력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반도엔 여전히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우리가 50년대의 경험을 통해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전쟁과 권위주의 체제의 영향 아래에서 살아왔고, 그것에 익숙해져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전쟁과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평화와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우리는 여전히 전쟁의 그림자를 마주하며 더 많은 평화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 분단과 전쟁은 농촌에서 나고 자라 죽을 때까지 같은 곳에서 머물던 대다수 한국인들이 고향을 떠나 타지로 이동하게 된 계기가 됨. 월남인, 과부, 고아 등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피난지에 머물거나 삶의 터전을 찾아 도시로 이동 해방 후 일본이나 만주 등에서 귀환한 동포 150여만명과 월남인 50여만명도 일자리가 있는 도시로 몰려듬. 농지개혁과정에서 농지를 팔고 몰락한 대부분의 소농들 역시 더이상 농촌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농촌이 피폐해 지면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도시빈민이 되었다. 도시인구 비율은 49년 17.2%이던 것이 55년 24.5%, 60년대에는 28%로 증가했는데, 49~55년 사이의 급격한 도시인구 증가 중에 3분의 1은 과거 농촌으로 분류되었던 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발생했고, 나머지는 전쟁으로 인한 인구이동의 결과. 50년대 농촌의 인구이동은 서구의 경우처럼 공업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도시화의 결과가 아니었다. 이 시기 인구이동은 도시의 인구유인요소가 높아져 나타난 것이 아니라 분단과 전쟁으로 삶의 조건이 피폐해진 민중들의 자구책이었음
- 전쟁으로 가족적, 친족적 유대를 상실한 사람들은 도시에서 원자화된 개인으로 맨몸으로 내던져졌다. 봉건적 가족제도와 가부장제에 기초해 가문과 친족의 번영을 일차적 목표로 삼던 전통적 가족주의는 가부장제의 존속을 전제로 한 여성의 모성을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 전쟁으로 가부장이 남성성을 잃거나 사망한 경우에도 가부장제의 파수꾼은 다름 아닌 여성이었다. 핵가족하에서 남편을 잃은 과부들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가부장이 있는 여성들은 육아와 교육에 완전히 몰입해 가족의 부상을 추구하는 것을 최대임무로 삼았다. 새로운 가족주의는 집안을 일으키는 수단으로서 교육을 중시해 과도한 교육열을 불러옴. 상호불신에 가득 차 믿을 것은 오직 돈뿐이던 도시의 삶에서 배금주의와 가족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렸고, 사람들은 더욱더 교육에 몰두. 계급상승과 유지의 도구로서 교육이 부상했기 때문에 국민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명문 일류학교 입학을 위해 과외가 성행.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위장전입이나 치맛바람 등의 신문기사는 은연중에 높은 교육열의 부작용을 여성들 탓으로 돌렸다. 전후 한국사회를 지탱한 힘은 여성들의 강한 생활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가정 바깥에서 하는 모든 활동은 항상 사회문제로 비화됨. 전쟁은 여성에게 삶의 무게와 사회적 비난이라는 이중의 고통을 안겨준 것이다.
- 1950년대는 여성이 삶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다양한 지위를 갖게 된 시가. 당시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아프레걸'이다. 이 용어는 전후파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아프레게르에서 온 말로 전통적 여성상에서 벗어난 전후이 새로운 여성이라는 의미. 이 말은 주로 미국문화를 모방하며 방종하는 여성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 하지만 가부장적 지식인들이 어떤 의미로 불렀든 아프레걸이 전통적 여인상과는 다른 새롭고 현대적 여성상을 보여준 것만은 분명했다. 전후에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여성들은 여대생, 취업여성, 양공주, 유한마담 등이었다. 이중에서 지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여대생은 대단히 매혹적인 존재였다. 50년대 교육의 양적 증대로 인해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여성의 숫자는 늘었지만 여성의 대학진학이 아직 보편화되지 못한 사정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했다.
- 전쟁후 사금융 시장 전체를 장악할 정도로 성행했던 계는 54년 7000여개에 이르렀는데, 이해 후반부터 정부의 통화 억제정책으로 자금융통이 원활하지 않게 되면서 위기를 맞음. 55년 1월 광주를 시작으로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도시에서 조직된 계의 대부분이 연쇄적으로 파탄났고 계로 인한 자살 사건도 급증. 계의 파탄에는 통화정책에 실패한 국가의 책임이 컸음에도, 오히려 실질적인 피해자의 계원들, 즉 부녀자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사업이나 계 등 여성들의 경제활동은 치맛바람, 배금주의 등의 용어와 결합해 경제자립을 위한 여성들의 활동 자체를 부정적으로 담론화하는 빌미로 작용. 그러나 50년대의 여성들은 이러한 경제활동을 통해 고정된 성역할에서 벗어나 가족의 부양을 책임지고 미래를 위해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첫번째 세대였다. 보수적인 남성지식인들은 여성의식과 세대, 풍속의 변화를 미국문화 탓으로 돌리기도 했는데, 이는 어떤 측면에선 일부 타당한 것이었다.
- 50년대 한국여성들에게 강한 출산억제 욕구를 불러 일으킨 것은 한국사회의 절대 빈곤이었다. 식구들의 입을줄이는 것이 절박했떤 당시 여성들에게 임신과 출산은 결코 축복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불법 낙태 수술이 만연해 생활고와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통받는 미혼여성, 미망인, 기혼여성 등이 정식으로 허가받은 병원인지도 알 수 없는 초라한 산부인과를 드나들었따. 당시 전체 가임여성의 35%가 인공유산 시술을 한번 이상 받은 경험이 있었으며, 수술도중 사망하는 일도 허다했다. 서구화와 자유화에 노출된 도시 못지 않게 가부장적 속박에 갇힌 농촌에서도 남몰래 낙태하려는 여성들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58년 대한어머니회가 대한여자의사회와 함께 추진한 출산조절 운동은 여성이 자신의 몸과 모성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자주적으로 출산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을 보급했다는 점에서 60년대 이후 국가정책에 귀속된 가족계획보다 더 진보적 여성운동이었음. 한편 초기 이승만 정권은 산아제한 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던 출산 조절운동을 반대. 통일후 총선에 대비하려면 인구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 따라서 이 시기에는 출산조절에 반대하고 자녀, 특히 아들을 많이 낳아 군대에 보내는 어머니가 훌륭한 어머니로 표창됨. 동시에 출산조절은 혼외 성관계를 의미하는 타락한 성윤리의 표출로 인식됨
- 전쟁은 인간과 사회의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거대한 비극. 그러나 전쟁은 역설적이게도 역사 변동의 원동력이자 전환점이 되기도 함. 탈식민과 국가건설 과정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은 사회를 급속히 재편해야 할 필요성을 부각시킴. 특히 전쟁으로 신분제와 대가족주의가 붕괴된 것은 여성의 지위향상에 결정적 계기가 됨. 그러나 남녀 평등과 여성해방의 이상은 멀고도 험난한 미래를 예고했다. 여성은 남성을 비롯한 사회전반을 변화시키는 것은 물론, 스스로도 변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50년대 한국 여성의 자화상에는 새로운 가족주의로 무장한 가부장제의 복원이라는 책무를 떠안은 여성과 자기욕망에 충실한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이라는 두가지 얼굴이 모두 들어 있었다. 양자 사이의 모순과 투쟁이야말로 이런 과제를 현실속에서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 피난민의 생계수단은 주로 상업활동. 서울 해방촌 인근에는 남대문시장이, 부산 용두산, 영주동, 보수천 인근에는 국제시장과 자갈치시장이 있었다. 피난민들은 노점상이나 행상 형태의 장사로 하루살이를 했음. 돈을 벌어 점포를 두고 안정적으로 장사하는 경우도 생겨남. 피난민들은 생필품, 귀금속류, 미군용품, 원조물자, 사제연초, 밀수품 등 다양한 물건들을 내다 팔았따. 자본없이 가진 물건으로만 장사를 했기 때문에 각양각색의 생필품이 거래되었다. 몸에 지니고 있던 귀금속류를 내다 팔아 장사 밑천이나 먹을 거리를 마련하기도 함. 시장에는 미군용품과 구호물자도 넘쳐났다. 당시 부산에는 "양생이 몰러 나간다"는 말이 있었다. 미군부대 안으로 염소를 밀어넣고 염소 찾으러 간다는 핑계로 미군물품을 훔쳐 나오는 의미. 피난민 여성 일부는 가족생계를 위해 양공주가 되거나 특수카페여급으로 일했고, 아이들은 유엔군을 상대로 구두를 닦거나 미군 하우스보이가 되어 보수, 사례, 증여의 형태로 미군용품을 받음. 이런 것들이 몇단계를 거쳐 시장으로 흘러들어감. 수용소 피난민들도 분배받은 구호물자를 팔았고, 부정부패한 구호당국의 관료들도 빼돌린 구호물자를 시장에 내놓았다. 사제연초를 만들어 남대문 시장에 파는 것은 서울 해방촌 피난민들에게 특화된 생계수단이었다. 해방촌 피난민 대부분이 사제연초를 만들어 팔았는데, 이 때문에 해방촌이 제2전매청이라 불림. 밀수품은 가까운 일본의 상품을 들여와 팔 수 있는 부산 피난민들에게 특화된 것이었다. 국제시장은 밀수품의 박람회라고 불릴 정도로 밀수품으로 가득했고, 장사를 하는 피난민들도 상당수 이에 관여했다.
- 대학을 흔히 상아탑이라고 부름. 상아탑이란 말은 19세기 중엽 프랑스 문예평론가 생트뵈브가 예술지상주의 시인이었던 알프레드 드 비니의 은거생활을 가리켜 '그는 대낮도 되기 전에 상아탑 속으로 들어갔다'고 표현한 데서 비롯됨. 코끼리들은 죽을 때가 되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생을 마감. 시간이 흐르면 그곳에 코끼리의 상아만 남아 높은 탑을 이룬다고 한다. 즉 상아탑은 사회와 단절된 채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하는 예술지상주의를 표한하는 말. 이후 그 의미가 대학으로 확장되어 상아탑은 대학이 사회와 단절되어 오직 학문연구와 진리탐구에만 몰두하는 기관임을 상징하는 관용어로 자리잡음
- 50년대 교육 팽창과정에서 학부모들은 정부투자보다 더 큰 규모의 자금을 부담. 중등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 의무교육인 초등교육조차도 학부모의 부담은 교육재정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였따. 정부는 이를 수익자 부담의 원칙이라고 합리화. 즉 교육을 수익사업이라고 간주하고 교육에 소요되는 재정조달의 책임을 국가에서 학부모로 이관한 것이다. 이 원칙은 미군정깅 임시방편으로 채택외어 제한적으로 사용되다 50년대 이르러 국가재정의 결핍을 이유로 자연스런 관행이 됨
- 50년대 학생들은 주로 어떤 책을 읽었을까? 아이들의 경우 만화책을 읽는 것으로 독서를 대치하거나 탐정물 등에 탐닉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고등학생의 경우 문학작품을 많이 읽었는데,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김동리의 소설과 김소월의 시,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토마스 하디의 테스, 펄 벅의 대지 등이 주요 대상. 50년대 학생들은 잡지도 즐겨 읽음. 국민학교를 다니던 어린 학생들은 새번, 소년세계를 주로 읽었고,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여원, 대학생들은 사상계, 여원을 많이 읽음. 그중 학원은 당시 일간신문에 맞먹는 매월 10만부에 가까운 발행부수를 기록하면서, 동시대 어떤 잡지와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영향력을 발휘. 잡지의 뛰어난 기획력과 더불어, 전쟁의 여파로 따라 읽을 거리가 없었다는 점, 해방 후 한글세대의 급증이 학원의 성장요인이었다. 당시 학원은 서구적 지식을 중요한 교양으로 인식. 이 잡지가 한국전쟁중 발간되어 다양한 자료를 구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서구지향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따. 이는 반공주의와 함께 친미가 정책적으로 조장되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도 관계가 있따. 어쨌거나 학원이 선택한 서구적 교양은 당시 젊은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 50년대 중고등학교 맹휴같은 학생들의 저항사례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집단적 힘의 결집과 분출이 당시 학생들에게 익숙한 경험이었다는 사실. 50년대에는 정치적 문제와 관련해 정부에 의한 학생동원, 즉 관제데모가 자주 일어났다. 관제데모를 할 경우 학교측이 학생들의 출석을 부르고 만약 불참할 경우 결석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시위에 참여했다. 그만큼 당시 학생들에게 시위의 경험은 익숙한 것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익숙한 시위경험을 바탕으로 상황에 따라 맹휴도 벌일 수 있었따. 4.19혁명은 이승만 정권이 오랫동안 정권차원에서 활용해온 시위라는 수단에 의해 성취됨. 여기에 이승만 정권의 학생통제와 동원이 갖는 또 하나의 역설이 존재함. 한마디로 4.19 혁명 당시 학생들의 데모는 이승만정권하에서 관제데모에 자꾸 동원되고 거기서 체득한 집단적 데모방법, 즉 학교에서 대열을 지어나가서 동일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그러고는 다시 열을 지어 각기 학교로 돌아가서 해산하는 방식을 학생들이 그대로 살린 것이다. 실제로 4.19 혁명 당시 대부분의 고등학생 시위는 그동안 관제데모를 이끌었던 학도호국단 간부들의 주도하에 진행됨. 당시 대학생보다 고등학생이 시위에 앞장선 것도 이런 관제데모의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
- 미국은 해방후 한국의 사회제도뿐만 아니라 가치와 정서에도 전방위적으로 개입해 한국의 국가정체성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일본이, 조선이 근대화를 의탁해야 하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나라로 행세하며 조선을 손아귀에 넣은 것처럼, 미국은 한국이 근대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 위해 의지하고 따라야 할 유일한 문명 지도국이라는 신념을 주입함으로써 한국을 미국주도의 세계질서에 체계적, 심성적으로 공고히 편입시키고자 했다. 냉전체제하에서 한국은 스스로 자유세계 반공전선의 맹주로 불리기를 원했는데,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한국이 미국의 군사적 정치적, 동맹국일 뿐만 아니라 미국문명과 문화를 전파하고 구축해야 할 개척지 역할을 기대이상으로 자임했음을 의미. 미국은 38선 이남지역이 앞으로 계속 미국을 지지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없었으며, 단독정부 수립 이후에 이승만 정권이 보여준 전체주의적 통치방식은 미국이 원하는 민주주의 국가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지나친 독재는 반발을 불러 일으켜 대중과 사회주의의 친화성을 높이기 때문이었따. 따라서 미국은 미국식 제도와 가치관 및 생활방식의 우월성을 선전함으로써 미국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생활속에 뿌리내리는 방식으로 문화전파을 수행할 필요가 있었다.
- 50년대 밀수란 서민들의 생활과 그리 멀지 않았다. 50~60년대 영화들 중에는 밀수업을 하다 경찰에 붙잡히는 남성이나 밀수에 손을 댔다가 사기를 당해 패가망신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많았따. 일례로 50년대의 풍속도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영화 자유부인에서 주인공 오선영을 댄스홀로 이끈 장본인인 저명인사의 부인이나, 60년대 초반 서민생활의 애환을 그린 영화 돼지꿈에서 후생주택의 할부금을 갚으며 빠듯하게 살아가는 중학교 교사와 그의 아내는 모두 밀수에 손을 댔다가 사기를 당해 불행을 겪음. 당시 밀수는 서민들에게 쉽게 큰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의 하나로 받아들여졌으며, 원조물품이나 피엑스 물품 사이에 밀수품이 섞여서 거래되는 것은 보통의 시장풍경이었다.
-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에 미제의 세계에 눈을 뜬 서민들에게 미제물건을 쓴다는 것은 문화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의미. 현실은 피엑스에서 나온 쓰레기 음식으로 꿀꿀이죽을 먹는 가난한 서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들 역시 2층 양옥집에서 양장을 하고 양식을 먹으면서 전시회나 음악회를 즐기는 도시 중산층의 삶을 꿈꾸고 있었다. 도깨비 시장이나 국제시장에서 구한 미제물건을 소비함으로써 미국영화에 나오는 서구적 생활, 풍요럽고 문화적인 삶을 조금이라도 구현해보고자 했던 서민들에게 미국은 근대적, 문화적 삶의 지표로서 다가온 것이다. 여기에 여성잡지를 중심으로 미국영화와 스타들에 대한 시각정보가 제공되면서 서민대중들에게 미국은 현실과 무관하게 구성되는 상상의 산물이 되어갔다.
- 일제시기 신민요와 트로트가 대부분이었던 대중가요계에 미군정과 전쟁은 미국음악 범람이라는 엄청난 변수를 가져다 줌. 대중가요에서 영어가사와 참전국이 낯선 지명이 등장하고 군인들의 심정을 대변한 노래와 실향민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고향노래가 유행하는 등 전쟁기 한국의 대중가요계에 많은 변화가 찾아옴. 전후에도 대중가요계의 주류는 여전히 뽕짝이라는 트로트였지만, 탱고나 볼레로 등 서양의 댄스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이국적 분위기의 노래도 속속 등장. 신민요의 멜로디에서 서양춤곡이 결합되어 블루스, 부기우기, 탱고, 룸바, 맘보, 차차차 같은 춤 이름을 단 노래제목이 자주 등장하고, 제목에 홍콩, 페르시아, 인도같은 지명을 넣은 노래도 많이 나옴. 노래 제목에 가장 많이 쓰인 나라는 역시 미국인데 샌프란시스코, 아리조나 카우보이,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등의 노래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재미교포의 심정을 그리기도 했지만, 한국인이 미국을 그리워하는 정체불명의 감수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당시 한국인들에게 미국적인 것은 막연히 뭔가 멋진 것을 의미했고, 최신의 현대문명을 누리는 남부럽지 않은 삶과 동의어였다.
- 미국화는 미국의 심리전과 문화전파라는 상징적 차원만이 아니라 기지촌과 피엑스와 댄스홀이라는 물질화된 현실공간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다. 상징과 물질로 다가온 미국에 대한 서로 대립되는 감정, 곧 현대문명의 모델로서 미국이나 저질문화를 양산하는 미국이라는 상호모순된 느낌은 한국사회에서 아메리카가 얼마나 전방위적으로 지배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방증. 따라서 미국화란 미국을 실제로 모방하는 것과는 거의 무관하게, 어떤 식으로든 대중들의 마음속에 아메리카가 자리잡아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음. 이는 미군 주둔의 경험을 공유하는 한국, 일본, 타이완에서 공통된 것이었지만, 그러한 경험이 양태와 낙차에 따라 각기 다르게 전개된 문화적 변동의 장소적 맥락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 50년 전면전이 발발해 53년 휴전까지 개신교 신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와 폭력의 화신처럼 행동.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당시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48년 발발해 거의 3만명에 달하는 도민이 학살된 제주 4.3사건이나, 50년 황해도 신천에서 3만5천명 이상이 학살된 신천 대학살 사건에서도 가장 중요한 가해자는 폭력적 개신교도였음.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런 민간인 학살사건은 전국 도처에서 일어났고, 그 사건들에는 대개 개신교도가 관련되어 있었음. 사실이야 어떻든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빨갱이를 잡는다고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가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던 경찰과 검철도 개신교도와 유난히 친했다. 심지어 그중 적지 않은 이들이 개신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미군정의 통역관으로 일하던 많은 개신교도들이 일제강점기에 경찰과 공무원이었던 이들을 미군에게 소개해주었기 때문. 그들 덕에 일자를르 얻게 된 사람들 입장에서도 개신교도가 되는 것이 미군정에서 살아남는 데 유리. 이 시기 개신교의 성장은 친미와 결합된 반공주의적 호전성가 긴밀하게 연결됨. 한경직이 설립해 오랜 기간 담임했던 영락교회는 이시기 개신교의 성장을 이해나는 가장 적절한 표본이다. 45년 12월, 27명으로 시작한 이 교회는 이듬해 말, 불과 1년 만에 신도수가 1000명이 넘었고, 49년 말에는 6000명이 넘는 신도를 거느린 남한 최대의 메가처치가 됨. 영락교회의 성장에 호전적 신자들의 대내적 결속이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무엇보다도 월남한 개신교 신자들이 대거 이 교회로 모였다. 해방직후 남한의 개신교 신자수는 10만명 정도였던 반면, 북한의 개신교 신자는 20만명을 상회. 이중 35~40%, 즉 7~8만명 정도가 월남을 선택한 것으로 보임. 한국전쟁시기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많아짐. 여기서 북한의 개신교도의 87%가 서북지역(평안, 황해) 출신이고, 서북지역 개신교도의 86%가 장로교. 서북지역 장로교는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강성한 근본주의 신앙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니 서북지역 월남인 중 가장 중요한 장로교 지도자의 한 사람인 한경직의 교회에 월남인 개신교도들이 대거 몰려든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 한경직은 일제 강점기에 신의주에서 교회를 크게 성장시킨 전력이 있음. 또 해방직후 북한에서 반공주의 개신교 정당을 만들어 활동한 것이 반공투쟁의 전력으로 해석되어 주요 월남인 지도자로 부상. 무엇보다 그는 미국 유학파로서 미국 장로교가 가장 신뢰하는 한국교회 지도자였고, 미군정 또한 월남 직후 통역관으로 활동했던 그를 매우 신뢰. 미국 장로교회는 월남인 장로교도의 정착 지원금 명목으로 거액의 후원금을 그에게 줌. 또한 미군정은 적산을 주로 개신교도들에게 불하했는데, 이때 한경직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이런 이유로 월남 기독교인들이 대거 그의 교회에 몰려들고,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의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영락교회가 월남 개신교인들을 대거 받아들이면서 급속하게 성장한 것처럼, 다른 많은 월남인 교회들도 유사한 과정을 밟음. 월남인들은 기존 남한 교회에 유입되기보다는 새로 설립된 월남인 교회로 찾아가는 것이 더 유리했다. 그것은 월남인 교회에 편파적일 만큼 특혜가 집중되었기 때문. 이렇듯 이 시기 남한 개신교의 성장은 월남인 교회의 설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한국전쟁 직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극도의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을 때 국가는 이들에게 거의 아무 도움되 되지 못함. 보건의료체계나 복지체계는 꿈도 꿀 수 없었따.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재건은 너무나 지체되고 있었다. 더욱이 부패와 무능 탓에 전세계에서 보내온 적지 않은 후권물자도 적절히 배분되지 못함. 그런 점에서 대중이 기댈 곳, 아니 기대고 싶은 곳 1순위가 교회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잘사는 서양의 종교라는 이미지도 있었고, 실제 인적, 물적 자원도 상대적으로 많았으며, 제도적 자원도 비교적 탄탄했다. 그 덕에 많은 이들이 개신교 신자가 됨. 45년부터 60년 사이 신자수가 10만에서 100만으로 10배 증가
- 그러나 목자없는 양을 향한 복음 전파의 소명을 이야기한 개신교 최고 지도자 한경직의 설교에도 불구하고, 한경직 자신처럼 그리스도 교회 역시 굶주리고 아픈 대중을 조건없는 사랑으로 포용하는데 매우 인색. 많은 개신굗들이 이분법적 사고에 깊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 그들은 개신교도들이 이분법적 사고에 깊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 그들은 교회 밖에 무수한 적그리스도가 들끓고 있다고 믿었다. 공산주의자, 이단, 자유주의자들이 그런 적그리스도들이고, 문화, 관습. 이념등은 적그리스도가 준동하는 무대였으며, 이 무대들을 통해 적그리스도에 의해 속속들이 오염된 세상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려면 전향이라 할 만큼 중대한 결단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 교회의 규범과 관습에 규율된 자만이 축복의 수혜자가 될 만하다는 폐쇄적 신앙이 개신교도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개신교도들의 이런 배타주의는 일상에서 그들을 가족과 불화하게 하고 동료와 대립하게 하며 민족을 분열시킴. 그리하여 더 많은 이들이 교회 안으로 유입되려면 진입의 문턱을 훨씬 더 낮춰야 했따. 그것이 실현된 것은 60~90년 사이에 불처럼 일어난 순복음 현상에 의해서다
- 북한이 한국전쟁에서 갖게 된 트라우마는 상시적 포위심리. 인민들은 공중폭격을 피하기 위해 지하동굴에서 살았으며, 미 공군기는 어떤 것이든 원자폭탄을 운반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졌다. 이때의 충격으로 북한 인민들은 전쟁공포와 미국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갖게 됨. 이런 무차별 폭격으로 인민들이 대량살상 되었던 까닭에 그들은 미국이라면 치를 떨며 증오했고, 미국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은 핵무기와 전쟁공포증으로 남았다. 북한 정부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해방이후 정권을 수립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국가의 처지에서는 나라 자체가 없어질 뻔한 충격이었다. 전쟁의 승패는 곧 개인의 안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추구한 정치공동체의 존폐와 직결되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전쟁은 북한 정치지도부의 사활이 걸린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인민들 자신의 전쟁이기도 했다
- 50년대 전쟁과 농업협동화를 겪으면서 북한이 농민과 농촌은 체질이 크게 바뀜. 토지개혁 이후에도 농촌에 남아 있던 유력가문의 연장자나 부농, 그리고 남성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권위하 해체되었으며, 이를 대신해서 빈농, 제대군인, 애국열사 유가족, 인민군 후방가족, 혁명투쟁 경력자, 열성 농민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혁명적 농촌 핵심진지가 등장. 이들은 조합의 간부직을 맡는 등 조합운영의 중심이 되었다. 농촌 체제 자체가 전시동원적 성격이 강한데다가 전후 농촌의 주역들이 전쟁과의 연관성 속에서 형성됨으로써 북한 농촌은 강고하게 준전시체제적 성격을 지니게 됨. 농업협동화는 농민을 농업노동자로 전환시킴. 가족단위로 작업하던 소농경리의 관습은 더이상 존속할 수 없었따. 전생산과정이 체계화, 합리화되고 노동규율이 개개인에게 직접적으로 부과됨. 또한 농업협동화는 농민의 관습과 사회의식에도 거대한 변화를 일으킴. 전통적 관습중 상당부분으 구시대의 잔재로 취급됨. 풍수지리에 의거한 주택관념이 비판받았고, 민간신앙은 미신으로 간주되어 타파되었따. 사회의식의 근대화가 진행된 것. 그리고 그 근대적 자각은 개인적 자각이 아니라 당과 국가를 따르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집단적 주체로서의 자각, 즉 인민으로서의 자각이었다. 그러나 농업협동화가 일으킨 변화가 장기간 지속된 농촌의 전통적 풍습 전체를 완전히 해체한 것은 아니었따. 부모나 시부모를 존중하는 풍습은 미풍양속으로 장려됨. 소겨리, 품앗이 등 공동노동의 전통은 농업협동조합의 최소단위인 분조의 바탕이 됨. 마을은 리 단위 조합에 맞추어 급속히 통합, 개조되었으나 상당수 지역, 특히 산간지대에서는 한 마을이 하나의 작업반이 되는 등 전통적 삶의 공간이 내면적으로 지속됨. 작업반장이 주도해 장례를 치르는 등 새로운 풍속 또한 마을단위 공동체 문화의 연장이었다. 친족적 결합은 약화되었으나 농촌이 점차 안정화되고 농민의 도시이동이 억제되면서 마을단위의 내적 연계망은 60년대 이후 다시 강화됨. 하지만 분명한 것은 50년대 북합의 농업협동화가 농민을 전통적 생활과 전혀 다른 사회주의적 생활로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전통은 완전히 해체되는 대신 사회주의 양식에 흡수되어 새롭게 재구성되었다는 점이다. 북한내 전통의 계승과 단절문제는 50년대 이후의 사정까지 고려해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온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임.
- 50년대 북한정부는 여러 목적을 가지고 약 2만4천명의 고아, 5천명의 유학생, 7837명의 노동자를 사회주의 형제국가로 보냄. 동시에 사회주의 형제국가에서 3675명의 자문가, 전문가, 기술자들이 북한에 들어옴. 사람과 함께 엄청난 양의 자금과 물품도 오고갔다. 모두 넓게는 사회주의 진영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들이었고, 좁게는 북한의 전후 복구를 위한 연대활동이었따. 북한정부는 이 예외적 기회를 자기 이해를 위해 적극 이용. 냉전 초기 사회주의 진영은 북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체계적 지구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체 사회주의 진영을 아우르는 지구화 전략은 오래가지 못하고, 62년 사회주의 내부의 분열에 의해 종말을 맞게 됨. 북한의 경우 주체성을 부각시키면서 폐쇄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 그것이 외부와의 완전한 단덜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밀이다. 북한은 60년대 이후에도 동구와 관계를 유지하고 70년대에는 무역관계를 강화. 하지만 50년대의 집중도에는 다시 도달하지 못했다. 흔히들 그 원인을 외부적으로는 중소갈등, 탈스탈린화, 자본주의 진영과의 평화적 공존에 대한 입장 차이 등에서, 내부적으로는 56년 김일성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 숙청, 개인숭배와 주체사상의 등장 등에서 찾는다.
- 북한이 50년대에 이룬 성장을 기반으로 원조라는 종속적 형태 대신 상호대등한 차원의 교류를 추구했다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 어쩌면 10년 동안 겪은 사회주의 지구화의 경험이 이런 북한의 선택을 뒷받침한 것은 아니었을까? 고아와 유학생의 사례에서 발견되는 동구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에서의 생활은 북한정부에 크나큰 도전으로 다가왔다. 학생들은 퇴폐적이고 타락적인 생활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일탈했던 것이다. 북한 당국은 이들을 모두 소환해 재교육시키고, 학생들을 더이상 이런 환경에 노출시킬 수 없다는 결론을 냈다. 주민들은 북한에 온 동독 기술자들의 가부장적이고, 독단적이며, 북한인을 무시하는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은 사회주의 형제관계에서 동구사람이 형, 북한사람이 아우로 설정되는 것을 거부. 일상생활에서의 이런 경험은 정치라는 큰 영역에서도 유사하게 반영됨. 연대활동과 원도로 나타나는 사회주의 가부장성은 북한이 사상, 정치, 경제협력 면에서 다른 사회주의 강대국과 거리를 두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50년대 사회주의 진영에서 지구화는 사회주의 코스모콜리탄을 형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북한은 왜 여기에 실패했을까? 북한정부는 약자이면서도 당당한 면이 있었다. 형제국가에 의존적이면서도 상대의 희생을 요구하는 뻔뻔함이 있었다. 이런 태도에는 겸손과 오만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기술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그 희생을 버거워하기 시작하면 이 관계는 상대에게 부담으로 작용. 부담은 접촉지대에서의 연대를 권력관계로 바꾸고, 쌍방의 관계에 내재했던 비균등성이 표면으로 나타나게 한다. 이는 종속성의 위험을 암시하기도 했다. 한편 북한정부는 선진과 후진의 잣대를 인식하고 이것이 같은 이념을 추구하는 나라 사이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문화적 차이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북한정부가 학생들의 개인적 욕망을 존중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문화가 접촉에서 발생하는 예측불가능한 공간형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던 것도 문제였다. 게다가 따라잡기식 근대화 추구는 일탈과 오류를 용납할 여유를 갖지 못하게 했다. 다른 문화를 받아들인 북한 고아와 유학생들이 집단적 의심을 받게 되었떤 것도 바로 그 이유. 발전에 대한 환상와 정치이념, 타 문화와의 관계 사이에 발생한 긴장과 갈증을 겪으면서 유연성보다는 경직성으로 지구화에 대응했던 북정부는 오늘날까지도 50년대 지구화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일본경제의 부활을 오로지 한국전쟁이 가져온 요행으로 보는 것은 편협한 시각. 한 추계에 따르면 51년 일본 경제성장률은 12%였는데, 조선특수가 없었다면 4.9~9.4%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함. 조선특수의 영향력이 남날랐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조선특수가 없을 때의 성장률도 결코 낮지 않다.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도 일본경제는 49년의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을 기점으로 점차 회복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전후 일본경제를 평가함에 있어서 전전 일본사회의 높은 성취와 발전 잠재력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줄곧 세계 10위 안에 드는 상당한 경제규모를 갖고 있었다. 인구 또한 세계 10위의 대국으로 내수시장 역시 컸다. 축적된 과학과 문화의 수준도 높았다. 그렇기에 일본은 전후 폐허 속에서도 각 분야에서 높은 경쟁력을 과시했다.
-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의 대가는 컸다. 중국은 최대 130만명이나 되는 파견군을 유지해야 했으며, 3년동안 36만명의 사상자를 냈고, 국가예산의 절반을 전쟁수행비용에 퍼부어야 했다. 게다가 유화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었던 서방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따. 유엔은 51년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를 채택하고 대중국 금수결의를 통과시킴. 52년 미국은 대중국수출통제위원회를 설치해 전시에 군사용으로 쓸 수 있는 품목의 중국수출을 일절 금지. 이로써 중국은 소렴 및 동구권과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외교적으로 철저히 고립되었따. 유엔에 가입하고 해외에서 타이완의 국민당 대신 중국을 대표하는 정권으로 인정받는 것 역시 난망했다. 한편 내전에서의 부정부패로 국민당에 대한 지지를 거둬들였떤 미국은 한국전쟁 발발직후 앞으로 타이완해협에서 일어나는 사태에 적극 개입하겠다고 천명했고 이내 타이완에 대한 적극적 군사 및 경제원조를 시작했다. 미국과 타이완의 관계가 밀착되면서, 중국공산당이 무력으로 타이완을 굴복시키고 통일하는 일은 불가능해짐. 한국전쟁의 휴전후 54년 9월 중국공산당이 시도한 진먼섬 포격은 무위로 돌아감. 54년 11월 미국은 타이완과 공동방위조약을 체결하고, 55년 1월 미 의회는 타이완결의를 채택해 타이완 방위를 천명했다. 사실상 중국은 무력통일 방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생산과 유통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고 사회주의화가 앞당겨짐. 전쟁수행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또 다른 이유는 역설적으로 토지혁명에 있었다. 건국이후 4년간 도시는 2000만명이나 늘어나 1억명에 육박하게 되는데, 이들 도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생계를 위해서는 안정적 식량공급이 필수적이었음. 그런데 토지혁명으로 제 땅을 얻은 농민들은 자가소비분을 늘려 기아에서 벗어나고자 했을 뿐 도시 수요나 전시수요를 위한 식량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중국의 신정권은 전선과 도시에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공업생산을 유지해야 했다. 결국 신정권은 농민들에게서 작물처분권을 회수해 국가가 식량을 모두 수매한 뒤 통제, 배분하는 강제공출제로 나아가게 된다. 한국전쟁을 기화로 사회주의화를 추진하기 시작한 중국공산당은 54년 2월 최종적으로 과도기의 총노선을 채택함으로써 사회주의 강행방침을 확실히 함. 사회주의 조기 강행의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압도적 물량과 현대식 무기를 경험하면서 큰 위기감을 느낀 중국공산당은 군수공업 중심의 급속한 공업화가 무엇보다 절실한 과제라고 인식. 중국업을 중심으로 급속한 공업화를 이뤄내야 현대적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고, 정권의 존립도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또 전시체제 분위기 속에 강행된 삼반오반운동으로 민간기업의 저항이 무력화되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이 집단화를 추진해도 반발할 세력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토지혁명의 부작용으로 토지가 개별 호로 지나치게 쪼개진 결과 농업경영이 과도하게 영세화되어 생산이 저조해지고 비효율이 발생. 결국 중국공산당은 농업생산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소련 모델을 따라 집단화를 추진해 경영규모를 확대하는 전략을 채택. 54년 9월 채택된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은 49년과 달리 중화인민공화국 성립부터 사회주의 사회를 구축하기까지는 하나의 과도가라고 해, 사회주의를 명확한 목표로 천명했다.
-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조건으로 소련에게서 군사현대화를 위한 지원을 약속받음. 57년 8월 소련의 대륙간탄도탄 발사실험이 성공하고, 10월에는 세계 최초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가 성공하면서, 중국은 사회주의 모델이 자본주의 모델보다 우수함이 증명됐다고 흥분. 그해 10월 중국은 소련과 국방신기술에 관한 협정을 맺고 원포생산기술 이전을 약속받음. 그러나 59년 6월 소련은 일방적으로 이 협정을 파기하고 중소관계는 냉각됨. 소련의 일방적 협정 파기에는 세계전략을 둘러싼 양자의 입장 차이와 사회주의 진영의 주도권을 둘러싼 두 국가의 경쟁이 복합적인 원인으로 작용. 흐루쇼프는 미국과의 평화공존을 우선시해 냉전격화르 인한 군사적 낭비를 줄이고자 했다. 그러나 중국은 민족해방투쟁을 중시해 미국과의 공존은 불가하다는 주장을 반복. 중국은 58년 진먼섬 포격을 재차 시도해 섬을 40일간 봉쇄하고 포격을 퍼부음. 미국은 전투애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타이완측에 군수물자를 제공. 중국 역시 원거리에서 포격만 하고 섬에 상륙하지는 않음. 중국 입장에서는 타이완 수복이 민족해방투쟁임을 천명하고 그에 대한 의니를 드러낸 것이었으나 소련 입장에서는 중국에 제공하는 군사기술이 결국 미국과의 긴장을 격화시키고 소련의 평화공존 노선을 파괴할 것이라는 의혹을 확인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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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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