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의 진화는 욕망의 위계를 반영한다. 문명발생 이후 호모사피엔스가 생물학적 진화를 이루었다는 증거는 없다. 만년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동일한 위계를 가진 동일한 욕망을 품고 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생리적 욕망부터 충족한 다음 더 고차원적인 욕망을 충족하려고 한다. 인간 공동체인 국가도 생리적 욕망의 충족을 도모하는 데서 출발해 안전, 자유, 존엄이라는 차원높은 욕망충족을 향해 나아간다.
- 우리는 일제침략기에 국채보상운동을 벌였고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 운동을 한 민족이다. 공동의 사회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원을 동원하고 의지를 묶어내는 집단적 능력은 경제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회적 자원이다. 이렇게 보면 대한민국의 변화는 기적이 아니다. 일어날 법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일 뿐이다.
- 사고하는 역사가는 엄밀하게 말하면 과거의 문제를 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긴급하게 해결을 요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의 역사성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책임감 있게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역사를 회피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야만 하는 긴장관계를 견뎌내야만 한다. (한스 위르겐 괴르츠,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 혁명인지 쿠데타인지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쿠데타는 혁명과 달리 민중의 동의와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 군대를 동원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군사쿠데타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학술적 개념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516을 굳이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심정인 이해할 수 있다. 경제발전을 이루었으나 결과적으로 516은 잘된 일이고, 잘된 일에는 군사정변이나 쿠데타보다 혁명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느냐는 것.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운영을 잘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해도 516이 군사쿠데타였다는 사실을 달라지지 않는다
- 장기적으로 보면 경제적 변화와 민주주의는 어디에서나 함께 진전되었다. 무엇이 이런 선순환 관계를 만드는 것일까? 원하는 삶을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욕망이다. 그렇게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자유가 있어야 한다. 자유를 누리려면 물질의 결핍이 주는 억압을 극복해야 하고, 부당한 제도와 낡은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 박정희 의장과 이병철 회장의 만남은 국가와 재벌의 발전을 위한 동맹의 계기가 됨. 516 직후 체포되었다 풀려난 기업인들이 만든 단체가 바로 전국경제사범연합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전경련이다. 그후 재벌총수들은 대부분 한번 이상 불법 비자금 조성, 회자자금 횡령, 불법 정치자금과 뇌물제공, 분식회계, 탈세 등의 범죄를 저질러 재판에 회부되었다. 아예 기소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지만 범죄 혐의가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난 경우에도 기껏해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그나마 시간이 조금 지나면 대통령은 국민경제 활성화와 기업인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그들을 사면해 주었다. 기업의 탈세와 불법은 불합리한 제도 때문이며, 기업인을 처벌하면 경제가 위축되어 경제가 침체한다는 이병철 회장의 견해는 대통령과 판검사, 언론이 모두 추종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 무역정책과 산업정책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19세기 독일의 경제학자 리스트의 충실한 제자였다고 할 수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풍미했던 19세기 중반, 리스트는 자신이 독일인이기 때문에 자유무역론을 거부한다고 말했다. 그는 산업기반이 약한 독일이 자유무역을 하면 경제적으로 영국의 패권아래 편입되어 별 볼일 없는 산업을 가진 2등국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래서 먼저 높은 무역장벽을 치고 자국의 산업을 육성한다음, 충분한 실력을 갖추었을 때 국내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 리스트는 독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공산품에 높은 관세를 매겨야 한다고 제안했으며, 그런 목적으로 부과하는 관세에 보육관세라는 이름을 붙임. 대한민국의 무역정책은 뒤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나라에는 보호무역주의자 리스트의 전략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 환율은 세가지 요인으로 인해 변화. 첫째 장기적으로 환율은 물가인상률에 좌우됨. 물가인상률이 높으면 그 나라 화폐는 값이 떨어짐. 80~90년대 한국 물가 인상률은 미국, 유럽, 일본보다 높았다. 장기적으로 달러환율은 오르는게 정상. 둘째, 단기적으로 환율은 경상수지에 좌우됨. 지속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보는 나라의 화폐는 가치가 떨어짐. 그렇게 해서 수입가격은 오르고 수출가격이 떨어져야 경상수지 적자가 해소됨. 9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는 지속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그런데도 97년 여름가지 몇년간 달러 환율이 점진적으로 하락했다. 우리돈의 가치가 계속 오른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환율변동의 초단기 요인인 자본수지가 흑자였기 때문.
- 여론조사 회사들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소득수준이 낮은 유권자일수록 보수정당 후보를 더 높은 비율로 지지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서민의 경제생활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보수정권이 진보정권보다 경제성장을 더 잘 이루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경제성장률이 높아진다고 해서 저소득층의 소득이 향상되는 것도 아니다.
-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우선 부자감세다. 이 대통령은 법인세와 소득세율을 인하함으로써 재임 중 누적효과가 100조 원에 육박하는 감세를 했고 혜택은 대부분 대기업 주식 소유자와 고소득층의 몫이었다. 자영업자와 임금근로자 절반이 소득세 면세점보다 낮은 소득을 얻기 때문에 직접세 감세는 중간소득 이하 계층의 국민들에게는 단 한푼의 혜택도 주지 않음. 대기업의 투자와 부유층의 소비를 유도한다는 목적을 내세웠지만 감세의 투자촉진 효과는 별로 없었다. 둘째, 부동산 거래 규제완화로 단기적 경기부양을 하는 것. 그런데 부동산 가격은 오히려 하락. 부동산 투기시대의 거품이 덜 걷힌 상황에서는 규제완화로 부동산 경기를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셋째는 4대각 사업. 초대형 토목공사를 벌려 경기를 부양하려 했지만 환경을 파괴하고 국가의 돈을 건설회사 금고를 이전시켰을 뿐 고용증대와 경기진작 효과는 거의 없었다. 넷째는 수출을 증진하기 위해 환율을 인위적으로 올린 것. 환율 폭등으로 달러표시 1인당 국민소득 하락을 가져옴. 양극화의 원인이었던 경제력 집중과 오남용,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확산, 낙수효과 감소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 장기적으로 보면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는 어디에서는 함께 진전되었다. 무엇이 이런 선순환 관계를 만드는 것일까? 원하는 삶을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욕망이다. 그렇게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유가 있어야 한다. 자유를 누리려면 물질의 결핍이 주는 억압을 극복해야 하고, 부당한 제도와 낡은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 할 수 있다. 그의 생물학적 생명을 빼앗은 것은 총탄이었지만 정치적 생명을 앗아간 것은 그 자신이 이룬 성공이었다. 그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대중의 욕망을 무제한 분출시키고 그 탁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 그런데 산업화의 성공으로 절대빈곤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대중은 다른 욕망에 끌리기 시작했다. 자유, 정의, 민주주의, 인간적 존업성을 원했다. 박 대통령이 그 욕망을 존중하지 않자 많은 국민이 마음으로 그를 버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 그와 같은 민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 광주민중항쟁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가능성과 당시 민주화 운동의 현주소를 명료하게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전제정치를 타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속적, 동시타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라는 것, 그리고 아직 대한민국은 그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참혹한 패배로 막을 내린 광주민중항쟁은 많은 국민의 가슴에 깊은 죄책감을 남겼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 시민들이 계엄군의 폭력에 굴복했기 때문. 그로부터 7년이 지난 87년 6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어느 지역도 고립되지 않는 전국적 도시봉기를 정밀하게 기획하고 준비. 광주시민들만 홀로 고립의 아픔을 겪게 만든 80년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6월 민주항쟁은 사실상 광주민중항쟁의 전국적 확대판이었다.
- 민주주의는 제도와 행태, 의식의 복합물이다. 물론 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장기적으로 보면 모든 제도가 의식과 행태의 산물이지만, 단기적으로는 특정한 제도가 그에 맞는 의식과 행태를 북돋우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87년 가을 여야 정당들이 합의하고 국민이 승인한 제도의 틀 안에서 작동해 왔다. 그 제도의 틀을 87년 체제라고 핮. 87년 체제는 민주화 이전부터 존재했던 낡은 의식과 문화와 결합해 우리 민주주의의 성숙을 더디게 했다. 87년 체제는 특정한 제도와 의삭과 행태의 결합이다. 여기서 제도의 핵심은 대통령중심제와 5년 단임규정, 결선투표 없는 선거법, 국회의원 소선구제다. 이 제도는 지역주의라는 낡은 의식, 동원정치라는 후진적 문화와 결합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한국적 특성을 만들어냄. 87년 체제는 현행 헌법과 선거제로를 만든 정치지도자 1노3김의 동상이몽과 이해타산이 만든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 5년만 하고 나가는 데 합의. 대통령 단임규정은 25년의 군사독재로 말미암은 정치적 인사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 인간이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 유익하듯이, 삶의 실험도 다양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각자의 개성을 다양하게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 각자의 고유한 개성이 아니라 전통이나 관습에 따라 행동하게 되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든느 중요한 요소가운데 하나이자 개인과 사회발전의 불가결한 요소인 개별성을 잃게 된다. (자유론)
- 역사에 대한 지식은 어떤 유형의 정부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으며, 또한 어떤 유형의 정부가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가에 대해서도 실마리를 제공한다. 사실 성공적 정부의 세가지 주요 적은 이데올로기, 도덕성, 공포이다.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정부는 실패하기 쉬운데,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경험을 받아들이는데 필수적인 개방성을 낳지 않고 오히려 폐쇄적 사고체계를 낳는다. (보넌 보그다너, '역사, 시민이 묻고 역사가가 답하고 저널리스트가 논하다')
- 규제는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 사회의 질서를 표현. 환경규제, 재벌규제, 교통규제, 노동시장 규제는 무절제한 욕망의 표출을 방지하고 관리하는 수단이다. 특히 안전규제는 각종 사고를 예방해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만든 것이다. 선박운항과 관련한 안전규제를 분별없이 완화한 책임은 근본적으로 대통령이나 공무원, 기업인에게 있지만 오로지 그들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규제를 악인것 처럼 선동하는 일부 언론과 지식인, 규제완화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루겠다고 약속하는 정당과 정치인들을 믿은 국민들에게도 책임의 일단이 있다. 이렇게 보면 세월호는 진도 앞바다가 아니라 욕망의 바다에 침몰했다고 할 수 있다. 단원고 아이들과 승객의 모습을 앗아간 것은 사람보다 돈을 먼저 섬기는 물신숭배의삭과 부패문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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