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정권에 의해 경제개발 계획이 추진된 62년부터 69년까지 국민총생산은 연평균 10%로 증가해 표면상으로 다른 어느시기보다 높은 성장을 보임. 이렇게 수치화 내지 수량화된 경제지표가 세계 체제 내에서 국가/민족의 위상이 상승했음을 보여주는 일상적 즉어로 보도될 때, 그것을 통해 그 민족/국민됨에 대한 자부심이 향상될지는 몰라도 이를 빈곤극복과 상대적 박탈감의 해소라는 감각적 경험으로 느끼게 만들 입체영화적 기술을 개발되지 않았던 것 같다. 더욱이 공업화를 기반으로 한 경제개발계획은 도농간 소득격차를 증대시켰으며 광범위한 이농과 인구의 서울집중현상을 낳음으로써 도시빈민을 양산. 조국근대화는 국가/민족의 부흥이 곧 국민개개인의 것은 아니라는 경험적이고도 실제적 간극을 유지하고, 국민이 이 사실에 대해 침묵하는 한에서만 운용될 수 있는 지배담론이자 정책이었던 것이다.
- 한국에서 근대적 의미의 도시빈민은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등장. 1910년대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과 20년대 강화된 식민지적 지주경영으로 인해 소작농이 증가하고 소작조건은 악화됨. 그 결과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진 농민들은 화전민으로 떠돌거나 도시로 더나 토막민, 날품팔이 노동자로 살아갔는데, 그 수가 연간 15만명에 이름. 30년대 이후에는 일본이 대륙침략을 위해 식민지 조선을 병참기지화하면서 그나마 이전보다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농촌에서 축출된 과잉인구를 흡수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농촌을 떠난 사람들은 계속해서 도시나 해외로 이동. 42년 서울의 토막과 같은 불량 주태 거주자만 해도 약 7500호, 3만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45년 해방 이후에도 도시빈민 문제는 여전히 심각. 아니 일본 식민지배가 초래한 후유증으로 도시빈민은 오히려 증가. 미군정이 한국사회는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경제파탄과 만연한 빈곤에 시달림. 빈곤의 직접적 원인은, 첫째 식민지 조선의 경제에서 결정적 비중을 차지했던 일본의 자본과 인력이 일시에 철수하고, 둘째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점령으로 남북경제가 단절되면서 생산력이 전반적으로 위축되었기 때문. 또한 생산력의 위축과 더불어 미군정의 미곡정책이 초래한 식량기근과 인플레이션은 빈곤을 심화시킨 또다른 요인이었다. 그외에도 수많은 귀환동포와 월남인이 남한으로 넘어옴에 따라 급격하게 늘어난 인구 역시 빈곤을 가속화시킴. 미군정 시절 빈곤문제는 심각했음. 미군정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남한 인구 1600만명 중 절반에 가까운 750만명이 구호물자를 받을 정도. 특히 미군정 3년 동안 신체장애 등을 지닌 요구호자가 최소 200만명이상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중 절반은 해방이후 남한으로 돌아온 귀환동포들이었다.
- 빈민문제는 1950~53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악화. 전쟁의 살상과 파괴는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고통이었고, 생산은 크게 위축됨. 여기에 통화량이 급증하면서 인플레이션을 촉진해 사람들은 극심한 물가고에 시달림. 또한 전쟁을 겪으면서 약 150~200만명의 사람들이 월남했는데, 이들은 도시 곳곳에서 정착해 판자촌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빈민 집단의 일원이 됨. 휴전 이후 경제상황은 호전되기 시작했으나 빈곤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못함. 특히 원조경제하 잉여농산물의 도입에 따른 저곡가 정책과 과중한 세금 및 고리채의 피해는 농업생산력의 저하와 함께 농촌의 몰락을 재촉. 농촌의 빈곤은 매년 2월 하순에서 5월 초의 보릿고개가 되면 전농민의 30~40%가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할 정도로 심각. 농촌이 피폐해짐에 따라 많은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고, 이런 이촌향도 대열은 50년대 내내 도시의 급격한 팽창과 더불어 수많은 도시빈민을 양산. 서울의 경우 55년 150만명 정도였던 인구가 60년에는 250만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런 추세는 각 지방 주요도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 이승만 정권은 마산의 항쟁을 폭도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 그러나 이는 권력의 입장에서 바라본 모습일 뿐. 소외된 도시빈민은 거대한 권력앞에서 자신의 의사와 요구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힘의 행삭밖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 밤은 그들이 가진 그 언어를 표출할 수 잇는 가장 적절한 시간이었다. 권력의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의사와 요구를 분출할 수 있는 밤은, 그래서 권력에게는 두려운 시간이다. 실제로 마산에서 시위대가 타격한 시설들은 대부분 권력기관과 권력과 밀착한 어용기관이었다. 특히 정권의 첨병으로서 민중의 원성을 많이 샀던 경찰시설이 많이 공격당함. 이는 당시 밤 시위를 주도한 도시빈민들이 이승만 정권, 특히 경찰에 대한 불만이 컸음을 보여줌
- 4.19 혁명 당시 도시빈민의 시위는 사회경제적 불만과 권력에 대한 분노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전개된 측면이 강했지만, 그 속에는 일정하게 조직과 연대의 힘이 작동하고 있었다. 특히 50년대 도시빈민중 고아, 구두닦이, 넝마주의 등은 나름의 조직을 만들어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 과정에서 서로간에 또는 학생들과 관계를 맺기도 함. 이런 조직력가 연대가 도시빈민들의 자연발생적 불만과 분노를 혁명의 불길로 타오르게 한 것이다.
- 도시빈민을 4.19혁명의 주인공으로 인정하는 경우는 예외적 사례일 뿐이다. 오히려 4.19이후 주요 도시에서 치안을 담당한 군 수뇌부는 혁명에 참여해 과격한 시위를 벌인 도시빈민을 일반 학생과 구별해 깡패와 불량배로 간단하게 낙인찍어버렸다. 즉 그들은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 단지 질서를 파괴하고 혼란을 가중시키는 범죄자일 뿐이었다. 4.19 혁명당시 과격한 시위에는 도시빈민뿐만 아니라 일반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도 종종 가담했지만, 사회전반의 의식은 질서있고 순수한 학생과 난동과 파괴를 일삼는 위험한 불량배를 끊임없이 구별하면서 전자를 우대하고 후자를 배제. 이 과정에서 스스로를 내세우기 어려웠던 도시빈민은 혁명의 주인공 자리를 박탈당하고 학생만 혁명의 유일한 주체로 남게 됨. 이렇듯 4.19 혁명에서 가장 용감하게 싸웠지만 행동 이외에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할 언어를 갖지 못했던 직업 소년 등 도시빈민은 혁명주체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리고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4.19혁명의 기억속에서 서서히 사라짐. 이들이 없었다면 과연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었을까? 도시빈민의 급진적 시위행위는 결국 시위대와 독재정권 사이의 대립을 화해 불가능한 적대적 대립으로 만들었다. 학생일반의 설득력 있는 호소력이 결합된 조직적 시위와 이들이 만들어낸 시위공간에 적극 참여한 도시빈민의 자발적이고 급진적 시위는 서로 불과 기름의 관계처럼 작용하면서 시위를 혁명의 성격으로 발전시켰다. 도시빈민도 학생과 마찬가디로 4.19의 당당한 주체다
- 70년을 전후에 대학교육의 목적이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하는 고급인력의 양성으로 대치되었으며, 실질적 정책변화가 수반됨에 따라 대학 분위기도 실리적이고 실용적인 방향으로 변모. 박 정권하에서 대학은 비판적 지성의 육성이라는 이념을 대신해 실용성을 강조하는 기능적 직업교육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했고, 대학생은 성찰적 지식인이 아니라 기능적 엘리트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한편으로는 대학사회가 스스로 질서를 정상화할 자정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명분하에 시행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국근대화에 이바지할 산업전사를 육성한다는 취지에 따라 이루어짐. 그러나 동시에 진행된 두가지 형태의 학원 정상화 방침은 궁극적으로 유신체제의 수립을 위한 전단계, 다시말해 대학에서 피어오르는 정치적 열정을 체제의 논리에 순치시키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지녔다.
- 사상계의 쇠락과 폐간에는 정치적 압력이 막대한 영향을 미침. 그러나 이것이 절대적 이유는 아니었다. 사상계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가는 배경의 한편에는 출판시장과 매체환경의 변화라는 맥락이 자리함. 사상계의 발행인 부완혁은 "정론의 시절은 아득한 옛이야기로 사라지고 염치없이 황색주의, 상업주의, 도색주의의 대소잡지 경영주들의 제품들이 언론계와 서점강 범람난무하고 있어 금석지감을 금할 수 없으리라" 통탄했지만, 이런 변화는 거대한 자본의 흐름과 출판계의 지각변동 속에 급속히 진행됐다. 60년대 중반을 거치는 동안 본격화된 잡지의 분화와 다양한 전문지의 등장은 사상계같은 종합지 한권으로 모든 분야를 망라하던 잡지의 시대가 종식되고 독자층도 분화되었음을 암시. 특히 주간지 붐과 계간지의 출현은 사상계로 대표되는 종합지가 지식인 사회에서 이전만큼의 영향력을 가질수는 없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 일반적으로 산업의 성장은 문화적 보수주의와 연관됨. 대규모 산업은 더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사회구성원 다수가 믿는 가치를 재생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 당시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족의 공동체적 삶의 방식은 미국식 소빔누화와 개인주의에 물든 여성들의 삶의 방식보다는 훨씬 받아들일 만한 것이었다. 도시 서민 가족드라마는 계측적으로 서민을, 지역적으로는 도시를, 세대에 있어서는 구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인의 삶을 보편적인 것으로 제시하면서 세대간의 갈등이나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를 성공적으로 봉합. 전통적 가치관을 추종하던 서민층 아버지를 정서의 중심으로 삼음으로써, 여전히 농촌 인구가 많았던 당시 한국사회에서 도시적 삶의 이질감은 완화될 수 있었다. 위험한 여성들을 통해 전면화되었던 미국적 가치는 문화적 보수주의 필터를 통과하면서 순화된 채 정착했으며, 아버지와 자식의 화해라는 주제의식은 세대간의 갈등을 순치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 KBS, MBC, TBC 의 텔레비전 3사 체제가 갖춰지고 드라마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영화산업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 기업화 정책의 모델로 삼았던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 역시 텔레비전이 부상하면서 구조조정을 해야 했음을 상기한다면, 한국영화에 있어서 60년대 후반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대한 근본적 대책이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영화평론가 이영일은 69년에 "한국의 영화는 지금 예술적인 면에서나 기업적인 측면에서나 그 한계점에 다다랐다고 확신한다"고 썼다. 그리고 그는 한국영화가 아직도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은 한국사회의 후진성과 빈곤이, 다른 수단의 레저형태를 확대시키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그대로 극장에 관객이 모여드는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진단을 덧붙였다. 돌이켜보면 이 진단은 텔레비전을 비롯해 다른 수단의 레저형태가 확산되었던 70년대 한국영화가 깊은 수렁에 빠져들 것임을 예견한 것이었다
- 군사정권과 부정축재자가 본격적 관계를 맺는 단초에는 외자도입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50년대 후반을 정점으로 미국의 원조가 급감하게 되는 가운데, 새로운 경제개발의 재원은 외자도입에서 구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시 도입가능한 외자는 차관의 형태였고, 미국 주도의 세계 자본주의의 질서 속에서 공공차관이던 상업차관이던 계약의 기본단위는 민간기업이었다. 자본조달에 다급한 군사정권의 입장에서는 이전부터 해외교류 경험이 있고, 자본동원능력을 가진 당시의 대자본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 대다수가 부정축재자로 조사받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는 전경련 측이 자신들의 장점이자 자원으로 군사정권에 적극 부각시켰던 내용이기도 했다
- 베트남 전쟁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지체시키고 군사화, 병영화를 가속화하는 결정적 계기이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 참전 시기 한국사회는 또 하나의 전장이었다. 후방인 한국은 베트남의 전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전장에서 돌아나오는 출구였다. 전쟁이 직접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나 당시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전쟁의 열기를 피할수는 없었다. 8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동안 전선과 후방, 전장과 일상이 뒤엉켰다. 한국군이 베트남에 참전하고, 실제적인 안보위기가 고조되면서 국매의 일상은 전시동원과 통제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바뀌어갔다. 67년 이후 징병제도가 본격적으로 강화됐고, 68년 4월 1일에는 향토예비군이 창설됨. 68년 11월 21일부터는 18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주민등록증이 발급됐고, 12월 5일에는 총 393자로 이루어진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됨. 국민교육헌장은 국민총화와 규율, 국가를 위한 헌신을 강조했던 당시 시대상을 잘 보여줌. 박대통령이 앞장서 싸우면서 건설하자고 외치던 69년부터는 전국의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교련이 정규과목으로 채택되었는데, 교련복, 군대식 사열과 분열로 끝났던 조회와 제식훈련, 총검술 등의 군사교육은 학원의 병영화를 심화시킴. 72년 유신체제의 성립은 미국의 닉슨독트린에 따른 안보위기감을 반영한 것이었고, 75년 남베트남의 몰락은 긴급조치 9호를 정당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해 한국을 그야말로 겨울공화국으로 만들었다.
- 베트남전쟁에 대한 한국의 공식기억은 전쟁에 대한 선택적 기억, 곧 베트남전이 경제발전을 위한 전쟁이었다는 긍정적 이미지, 일종의 경제적 신화를 중심으로 함. 베트남전을 월남특수로 기억하며, 국가, 기업, 비록 일부라고 할지라도 개인이 그 성과를 같이했던 경험은 이런 기억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 그러나 전쟁을 기회로 인식하는 것은 그 자체가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전쟁의 고통과 희생을 망각하고 부차화하는 효과를 낳음. 전쟁경험과 기억에 관련해 우리가 기억하고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전쟁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라 잃은 것이다. 첫째, 박정희 시대는 근대화를 향한 총력전 체제였다. 이는 발전의 방향이 아닌 속도, 효율성과 경제적 이해를 최우선 가치로 하며, 목적을 위한 수단을 정당화. 베트남 정부의 추정에 다르면 베트남전에서 베트남인 사망자수는 약 300만명에 달함. 이런 엄청난 피해를 수반했던 전쟁에서 이해를 추구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하고, 자민족 중심적 이해추구를 당연시 하는 사회가 과연 올바른 사회인가? 이는 역사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적 측면에서도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려움. 둘째, 전쟁으로 인해 한국이 입은 직접적 피해를 기억해야 함. 베트남전에서 5099명의 사망자와 1만 962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전쟁기간동안 이들의 희생은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전쟁으로 인한 질병도 오랫동안 망각되거나 방치된 부분이다. 전쟁과정에서나, 그후에나 한국의 국가, 사회는 참전군인들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해 거의 관심을 기울여본 적이 없고, 그들의 고통은 개인적 문제나 일탈로 여겨짐. 고엽제 문제도 마찬가지. 셋째, 한국의 전쟁기억에서 가장 크게 잊힌 것은 사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다. 사건은 한겨레21 99년 9월 2일자 '베트남의 원혼을 기억하라'는 탐사보도를 통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 반공, 발전을 위한 전쟁이었다는 기존 시각과 인권, 편화를 중심가치로 삼고 부끄러운 과거사를 직시해야 한다는 새로운 시각이 충돌. 24년전 종결된 베트남전이 한국 땅에서 기억의 전쟁으로 재현된 것이다. 전쟁의 상처를 둘러싼 이러한 시차는 끝나지 않고 지속되는 전쟁의 여진과 한국사회의 세대, 이념간 대립과 갈등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 창군 이후 한국전쟁을 거쳐 한국군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선배장교들은 매우 빠르게 승진했지만, 53년 정전 이후 군의 팽창이 중지되고 오히려 점차 감축되면서 후배장교들의 승진은 갑자기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육시 1기 100여명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임관 8년안에 별을 달았지만, 이들보다 불과 4년뒤에 입대한 육사 8기 1200명의 경우 12년이 지나도 극히 일부만이 대령급으로 승진. 게다가 이미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던 장성급들의 나이가 대부분 30~40대에 불과했기에 그들이 퇴역하려면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이에 육사 8기생들은 4.19혁명을 계기로 부패한 선배장성들의 퇴진을 요구. 그러나 이 정군운동이 하극상으로 규정되어 좌절되자, 61년 5월 16일 그들은 박정희와 함께 4.19 혁명이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군사쿠데타를 결행. 즉 군 장교들의 인사문제에 대한 불만은 그들의 권력욕, 정치 참여의 비와 더불어 쿠데타의 중요한 원인이 됨.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와 육사 8기를 비롯한 젊은 장교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군부는 일단 감군이라는 현실적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장악한 권력을 바탕으로 한국군을 넘어 정치계, 행정계 등 한국사회 곳곳에 진출. 김종필 등 육사 8기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중앙정보부 역시 군부의 영향력을 사회전반에 확산시키는 주요 통로가 됨. 하지만 군부가 권력을 잡았다 해대 한국군의 규모가 워낙 커서 감군의 압력은 계속 이어짐. 특히 한국군의 유지에 결정적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은 재정부담을 이유로 지속적으로 감군을 요구. 그러나 한국운의 감축은 곧 박정희 정권의 지지기반이 축소되는 것을 의미했다. 60년대 중반 미국이 베트남점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상황이 급변. 더 많은 깃발을 희망했던 미국은 동맹국들에 전쟁참여를 요청. 미국의 주요 동맹국들은 명분이 부족하다며 개입을 거부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했지만, 박정권은 다른 동맹국들과 달리 미국의 요청에 적극 호응해 베트남전에 많은 군대를 보냄
- 65년 미국의 한국군 전투병 파병요청은 이제 더이상 한국군 감축문제가 논의될 수 없음을 의미. 분단상황에서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는 한국의 전투병을 베트남에 보내는 마당에 한국군을 감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따. 박정희 정권 역시 베트남 파병 논의 과정에서 미군측에 군사원조 유지를 파병조건으로 제시. 결국 한국군 감축문제는 또다시 연기됨. 덕분에 군부와 군부를 앞세워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파병을 요청한 미국의 확고한 지지속에서 자신들의 힘을 유지, 강화할 수 있었다.
- 주민등록제도는 한국인들로 하여금 정부의 부당한 감시와 통제를 필요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함. 68년 주민등록법 1차개정으로 모든 국민은 성인이 될 즈음에 손가락 지문 채취와 함께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게 되엇다. 그 결과 주민등록증이 마치 성인의 상징처럼 됨. 10대 청소년들은 주민등록증 발급을 국가가 인정하는 성년식 같은 것으로 여김. 또한 젊은 사람들기리 주민등록즉을 내놓고 서로의 신원을 즐겁게 확인하는 민증까기의 풍조도 생김. 주민등록증을 통한 감시와 통제의 확신이 감시와 통제의 사회화를 넘어 감시와 통제의 문화화 단계까지 나아간 것.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의 독재는 국가에 의한 강력한 감시와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주민등록제도와 더불어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무엇보다 분단과 전쟁의 역사가 있다. 박정권은 참혹한 전쟁의 경험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반공을 전면에 내세워 독재를 강해. 박정권이 만든 주민등록제도는 애초부터 반인권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간첩을 잡기 위해 필요한 제도라는 주장 앞에서 국민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인권은 무시됨. 박정희의 독재는 주민등록제도의 강화를 통해 단지 감시와 통제의 내면화만 이룬 것이 아니라 반공의 내면화와 독재의 내면화를 이루었다. 요컨대 박정권은 주민등록제도를 통해 독재적 주체, 즉 반공을 내세운 독재에 순종하는 주체의 생산을 시도. 그리고 그 결과는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의 교련교육, 주민등록제도에 따른 철저한 감시와 통제, 징병제를 통한 강제 군입대, 제대후 향토예비군을 통한 군생활의 지속이라는 사이클은 한국사회으 병영화를 가속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가 병영화를 넘어 총력전 체제의 형성으로 나아가도록 했다. 68년부터 본격화된 안보위기는 박정희 정권에게 이를 추진할 수 있는 절호의 계기를 제공
- 유신체제가 붕괴된지 30년이 흘렀지만, 병영사회와 총력전 체제가 남긴 군사주주의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음. 이는 기본적으로 권위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보수적이고 개인의 개성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통일성과 획일성 등의 가치를 강조. 군사주의는 사회구성원들을 근대국가의 국민으로 훈육하기에 아주 적합한 도구였따. 군사주의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곧 국가의 유용하고 순종적 도구가 되기 시작. 국가는 더이상 직접적 강제나 강요를 하지 않고도 사람들에게 국가를 절대적 존재로 각인시킬 수 있었고, 애국심, 자기희생, 조국수호 등고 같은 가치 또한 쉽게 주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과 제도는 국민들을 경제성장과 근대화의 유용한 도구로 활용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의도 아래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순종한느 신체를 가진 국민이 되길 바라는 국가의 요구를 별다른 저항없이 받아들였고, 한국사회 전반의 국가주의적 사고는 점점 강화됨.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바탕에는 박정권의 실제 권력기반이기도 했던 군대와 군사주의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한마디로 박정희 정권이 부르짖은 조국 근대화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사실은 조국 군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 50년대를 거치며 북한의 인민들은 균질한 사회적 처지로 재편되어 갔다. 사회주의 사회에 맞는 근로인민으로 바뀌어 간 것. 북한의 근로인민은 망치와 낫, 붓이 상징하는 것처럼 노동자, 농민, 근로 인텔리의 세 집단으로 이루어짐. 그러나 이 중의 핵심은 노동자였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모든 인민은 노동계급화될 것을 요구받았다. 60년대 천리마 작업반 운동은 가장 선진적이어야만 했던 노동자들의 행위와 의식구조를 북한 사회 전역에 확대, 복사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것이 사회주의를 너어 공산주의의 도래를 앞당기는 유력한 수단이라고 믿었던 것. 이 시기 노동자들은 북한시 사회주의가 자신들에게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받아들임. 그 핵심은 집단주의 였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집단주의는 노동자의 일상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가장 현실적으로 작동하는 집단인 작업반을 통해 구현됨. 작업반은 이제 단순한 직장의 최말단 노동단위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아침부터 밤까지의 삶을 끌어당기는 생활의 중심이자, 동료들과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감정의 공동체로 승화된 것이다. 즉 집단주의가 자신들의 일상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느끼면서 북한의 인민들은 체제에 협력적인 사회주의 근로인민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 그러나 60년대 천리마 작업반운동이 북한 전역에 확대되고 일상적으로 수행되던 시기, 인민의 열의는 온전했지만, 대외적으로 고립되고 남북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북한의 경제성장에 제동일 걸리기 시작. 결국 체제의 역동성이 점차 사라지고, 내외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면서 오직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체제 유지가 강조됨. 인민들에게 자발적 협력보다도 조직화된 충성이 강요되기 시작. 수평적인 형제애에 근거한 노동자 의식은 약화되고 수직적이고 절대적인 충성심을 끌어내기 위해 항일 빨치산 시절의 수령-전사 관계가 강력하게 유포되어 갔다. 주체사상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 귀국자가 북한경제에 미친 영향은 단순히 암시장의 발아-형성/발전에 그치지 않았다. 귀국자는 북한의 산업, 그중에서도 특히 경공업발전에 큰 역할. 이는 북한 당국이 귀국사업을 실시하게 된 배경에서도 유추할 수 있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본질적으로 귀국사업은 중국인민지원군이 철군한 상황에서 전후복구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귀국사업으로 북한에 오게 된 재일조선인은 전문기술을 가진 숙련공이었음.
- 북한은 단순 노동력이 아닌 숙련공을 필요로 했다. 당시 어느 공장을 가보아도 기술분야는 대부분 외국인(귀국자)이 담당했으며, 귀국초기 귀국자의 직장과 삶의 터전은 재산과 기술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당국의 조치에서도 이런 사실을 간파할 수 있음. 이는 지극히 재본주의적 발상. 북한은 귀국자를 매개로 양질의 노동력과 기술 이외에 자본을 도입하는 데도 성공.
- 북한 주민은 50년대 한국전쟁의 피해로 개인 축재가 전무한 상태였다. 게다가 60년에서 65년 사이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는 절정이었다. 이 상황에서 귀국자가 대거 유입된 만큼 귀국자가 북한의 정치, 사회, 문화에 미친 파장은 적지 않았다. 귀국자는 북한에 유입될 당시 두가지 요소를 동시에 들여왔는데 그중 하나가 개인 축재. 즉 귀국자는 일본에서 가져온 재산 도는 친척 원조를 통해 막대한 불로소득을 올렸으며, 이를 토대로 재산축적이 이루어짐. 귀국자가 점차 오토바이나 자가용 등 사유재산을 소유하게 되면서 북한당국은 귀국자에 한해 공식적으로 사유재산을 인정. 귀국자가 북한에 가지고 온 또다른 하나는 소비문화. 부유한 귀국자는 일하지 않고 노는 건달도 많았다. 이들은 매일 밤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고 불고기 파티를 벌였다. 각자 돼지고기, 맥주, 생선회를 가져왔다. 집 밖에는 우유, 수산물, 맥주, 돼지고기, 쌀, 야채 등 물건을 대기 위해 장사군이 줄을 섰다. 대부분 신용판매였다. 매일밤 목욕도 한다. 일본에서 보는 주간잡지도 가져와 귀국자들끼리 돌려보았으며, 잡지에서 본 의상과 헤어스타일 등 모두 일본 것을 따라함. 북한 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소비재 유입은 환영할 요소지만 소비문화의 유입은 대단히 우려스런 일. 그러나 전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후자도 동시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게 딜레마. 실제 북한 당국은 자본주의의 영향을 더이상 받기 싫다며 귀국사업을 중단시키고 사람이 아닌 돈만 보내라고 하기도 했다.
- 60~70년 사이 미국의 대외 군사지출 총액 약 250억불을 흡수한 지역의 순위를 따져보면 일본이 1위로 33억불, 2위 남베트남 28억불, 3위 한국 15억불, 4위 태국 13억불, 5위 오키나와 11억불. 당시 아직 미군 통치하에 있던 오키나와를 합치면 미국의 군비지출에서 일본이 가져간 금액은 44억불로 압도적임. 이런 직접적 흡수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은 한국, 베트남, 타이완 등 베트남 주변지역에 대한 수출을 확대하여 미국이 아시아 각국에 산포한 달러의 상당부분을 다시 흡수. 일본의 대미수출을 경이적으로 늘어났따. 탄약, 의료, 섬유, 전차와 차량 등 군수사업의 수요가 큰 철강수출이 급증. 일본의 대미 무역수지는 전후 내내 적자를 면치 못했는데, 65년 드디어 수출이 수입을 누르고 흑자로 바뀜. 베트남 특수를 내다본 일본기업계는 철강, 전력, 석유화학, 조선 등 중화학 공업에 설비투자를 대폭 늘렸고, 그 결과 70년대에 일본은 세계 최대의 철강생산국이 될 수 있었다. 근대 일본이 청일전쟁에 배상금으로 철강을 비롯한 중화학 공업에 투자해 러일전쟁을 거처며 근대 경제를 완성한 역사가, 현대의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걸쳐서도 재현됨. 베트남 전쟁 초기 65~70년 일본 GNP평균 명목성장률은 17.5%, 실질성장률은 11.2%로 제1기 고도성장을 상회했다
-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66년부터 77년가지 봉건문화와 자본주의 문화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를 창출하자는 기치아래 벌어진 대규모 정치운동. 그 과정에서 많은 인명의 살상, 유무형의 문화재 파괴가 벌어져 10년 동란이라고도 부름. 정치, 사회, 사상, 문화, 전반을 개조해 진정한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구현하겠다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정권의 중심에서 밀려난 마오쩌둥이 대중동원의 형태로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실용파를 수정주의로 공격하고 정권을 되찾은 권력투쟁이었다는 평가.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부의 항쟁에 일반민중과 당조직이 휘말려들었다. 건국이래 중화인민공화국이 구축해온 사회질서가 붕괴되고, 사회계층 사이에 축적되었던 불만과 요구가 한꺼번에 분출되면서 중국의 내정, 외교, 사회, 경제에 대혼란이 생김. 국가주석 류사오치를 비롯해 다수의 정치지도자가 투옥되고 옥사. 사회 각 분야의 전문지식인과 당 간부들에게 반혁명이라는 이름올 린치와 박해가 가해졌다.
- 어른들의 정치투쟁에 장기판의 말이 된 것은 대부분 도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어린 홍위병과 실업상태의 노동자들이었다. 이들 문혁세대는 전후에 1차 베이비붐으로 태어난 아이들로, 항일전쟁과 내전을 겪지 않고 건국후에 태어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교육받은 세대. 미국의 베이비붐세대, 일본의 단카이 세대에 상당하는 것이 중국의 홍위병 세대. 이 세대는 평화의 시기에 태어나 건국 초기의 건설을 보고 사회주의 강국 건설의 이데올로기와 자긍심을 가졌으나 성장한 후에는 좌절감에 휩싸임. 중국의 도시인구비율은 10%에 불과했지만, 베이비붐으로 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도시 청년의 수는 매년 200만명씩 증가. 그러나 중공업 위주의 정책과 경기둔화로 이중 취업이 가능한 수는 절반에 불과. 이런 가운데 사회주의의 평등원리는 건국후 노화현상을 보임. 노동현장에서는 타내와 부패가 생기고, 당 간부와 자제들이 특권을 독점하는 현상이 두드러짐.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정규직을 못찾은 채 열패감에 젖어 있으면서 학교에서 배운 사회주의 이상향과는 거리가 먼 당관료의 특권에 불만을 가진 젊은이들은 문혁에서 그 희망을 찾았다.
- 안방극장이란 말은 언제 태어났을까? 이 용어는 61년 12월 31일 한국방송공사 텔레비전 방송국이 출범한 이후 이른바 텔레비전 붐이 일어나던 62년 본격적으로 등장. 62년 경향신문은 "2만 2천여대의 텔레비전이 서울 장안에서 안방극장을 차려 놓은 셈이다"라고 적음. 동아일보 역시 62년 3월 "온 동네 아이나 식모들을 모아놓고 방송시간에만 안방극장을 이루는"이라고 썼다. 56년 경제력에 비해 비교적 일찍 도입된 HLKZ-TV가 있었음에도 KBS텔레비전이 등장하기 전까지 안방극장이라는 말은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니까 안방극장은 60년대부터 지금의 KBS가 등장하면서 회자되던 신종유행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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